마르코 복음서의 문학적 접근


다니엘 키스터(서강대학교 명예교수/예수회/신부)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예로니모는 자신들이 배우며 성장한 고대 로마의 시와 비교할 때 시편집의 시는 거칠고 덜 세련되었다고 생각했다.1) 20세기 초 성서학자들은 마르코 복음서에 대해서도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서툰 저술가로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여러 자료를 엮어 내는 일에 문학가로서나 신학자로서 상당한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2)

그러나 20세기 후반 마르코 복음서에 대한 폭발적인 연구 결과, 이 첫 번째 복음사가가 자신의 저술 자료들을 매우 날카로운 신학적 안목을 가지고 배열했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마르코 복음서를 문학적으로도 매우 놀라운 성과물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3) 첫 번째로 쓰여진 이 복음서를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이 복음서에 관한 몇 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서기 70년 경, 바오로가 편지들을 쓰기 시작한 지 15년이나 그 이상이 지난 무렵, 곧 마태오와 루가가 복음서를 쓰기 15년이나 전이며 나중에 요한이 복음을 쓰기 훨씬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본래 마르코 복음서는 저자를 알 수 없었으나 후에 마르코의 저서로 규정되었는데, 이 마르코는 사도행전 12장 12절과 그 뒤에 언급되는 그 마르코일 것 같다. 필자는 마르코 복음서를 서사 문학으로 읽기 위한 지침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학자보다는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일반적인 성서 독자를 위한 작업이다. 마르코의 설화가 지닌 의미에 대한 결정적인 해석을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독자가 스스로 문학적인 분석의 기본적인 질문들을 마르코 복음서에 적용해봄으로써, 이 복음서가 담고 있는 하느님 말씀과의 대화로 들어오라는 그 초대에 응답하도록 안내하려는 것뿐이다.

일반적으로 독자들은 성서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성서의 다른 부분이나 신학적인 주석에서 익숙해진 성서 서사의 전제 조건들을 그 작품에 읽어 넣게 된다. 더구나 우리는 어느 한 복음서를 읽을 때, 각 복음서의 저자가 각자 독특한 문학적 목적과 신학적 관점에 따라 예수님 생애 이야기를 다르게 구성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여러 복음서를 상상 속에서 하나로 뭉뚱그리는 경향을 지닌다. 가톨릭 교회는 전례 쇄신을 통해서, 주일 복음 독서를 한 해는 마태오, 다음 해는 마르코, 그리고 다음 해에는 루가의 복음서를 읽음으로써 각 복음서가 각각의 독자적인 지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대부분의 신자와, 주일 미사 강론을 하는 대부분의 사제는 이러한 사실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주일이건 평일이건 전례를 통해서 각 복음서의 독특한 지향을 파악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전례를 통해서 하루하루 제시되는 것은 기도와 묵상을 위한 짧은 몇 대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사 전례 속에서 복음서를 단일한 문학 작품으로 읽을 기회는 거의 없다.

복음서 저자들은, 아마 대부분이 본래 입으로 전해지던 기존의 자료에 통일된 지향(志向)을 부여함으로써 문학 작품을 만들어 낸다. 마르코는 일견 무계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심하게 자료를 배치함으로써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투사해 놓았다. 이런 방식에 대한 감상법은 사실주의 소설 읽기에 익숙해진 사람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 독자나 영화 애호가가 더 잘 갖추고 있을 것이다.


복음서의 시작:극적 지향


독자가 문학 작품의 의미 지향을 찾으려면, "이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하는 질문을 잠시 접어 두고 "내가 이 이야기에서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든가, "이 이야기의 사건들이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내가 놓인다면 나는 과연 어떤 체험을 하게 될까?" 하는 구체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런 다음에 저자가 그런 사건들에 어떻게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의미와 느낌에 지향을 드러내는가 하는 점을 살핀다. 하나의 이야기 안에 일어나는 일을 살펴볼 때 우리는 먼저 이야기의 서두에 소개된 기본적인 상황과 중요 인물에 주목한다.

루가와 마태오는 마르코보다 15년이나 뒤에 복음서를 쓰면서, 다소 여유 있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가 한 사람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대로, 루가와 마태오는 예수님의 조상과 그 탄생에 관한 이야기로 복음서를 시작한다. 마태오는 예수님에 관한 긴 족보를 열거한다. 이 두 명의 후기 복음사가는 독자들을 예수님 탄생의 신적인 경이로움과 인간적인 비천함을 맛보도록 초대한다. 마르코 역시 예수님 현존의 경이로움을 음미하도록 초대하지만 예수님의 인간적 혈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예수님의 탄생이나 그 유년 시절에 대해 명상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도 가지지 않는다. 마르코는 단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1,9) 출신이라는 것만 우리에게 알려 준다. 한국 문화와 마찬가지로 한 아들을 그의 가계와 가족 관계 안에서 규정하는 히브리 문화의 배경으로 볼 때 이것은 다소 이상한 일이다.

마르코는 자신의 이야기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기쁜 소식]"(1,1)이라는 선포로써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서막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마치 생생한 영화 필름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과 같은 연속적인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장면들은 우리로 하여금, 히브리 백성이 과거에 지니고 있던 기대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남으로써 성취된 현재로 숨가쁘게 달려오게 한다.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기 위해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1,3). 요한은, "너희에게......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1,8)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예언한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홀연히 나타나실 때, 다른 복음서나 그리스도교 전승을 통해서 이미 익숙해진 독자는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계신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남편 요셉을 떠나 왔으며, 그 나이가 서른 살 정도라는 것을 추정한다. 그러나 마르코는 우리에게 그런 인간적인 배경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이사야에서 요한으로 이어지는 예언자 계보를 제공할 뿐, 예수님의 가계나 그의 나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는 극적인 장면에서 마르코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만을 기록한다.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1,10-11).

현대의 독자는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에 대한 20세기의 신학적 성찰들을 마르코의 텍스트에 넣어 읽음으로써, "너는 내 아들"이라는 진술과, 요한의 복음서의 서두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예수님께서 지니신 신적 본성에 대한 더욱 형이상학적인 해설을 종종 뒤섞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는 적어도 20년 뒤에 쓰여진 것 같으며, 설사 우리가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마르코 복음서나 그 시대의 독자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가졌던 의미를 분명하게는 알지 못한다.4) 그럼에도 뒷날의 요한과 마찬가지로, 마르코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관계에 비추어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의 서두에 나오는 평화롭고 성찰적인 방식은 마르코의 방식이 아니다. 아마도 마르코는 예수님 생애의 실제적인 사건에 더 가까운 시대에 자신의 복음을 함께 두기 위해서, 우리를 이러한 사건에 대한 한가로운 성찰로 초대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사건의 생생한 역동성 안에 우리를 붙잡아 두려고 하는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르코는 마치 우리의 눈앞에 예수님을 불쑥 내놓는 것 같다. 모두가 빠르게 움직이는 구체적이고 영화 같은 이미지다. 예수님의 세례의 시각적 배경이 되는 거의 폭력적인 영상 속에서 우리는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주된 행위가 시작되어 하나의 설화가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의미와 정서의 지향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서사적 텍스트를 이해하려 할 때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어디에서 행위가 시작되는가?"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계시됨으로써 복음서의 의미 지향에 관한 무엇인가가 시작된다. 그러나 서사적인 행위는 예수님 자신이 행동을 시작하심으로써 비로소 시작된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1,15)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설화가 시작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일반 대중, 이른바 "악령들", 그리고 율법학자들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시작된다. 이야기는 두 개의 중요한 전개 흐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하나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가 중심으로 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유다 권력자들과의 대립에 중심이 놓여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구체적인 행위를 제시하는 첫 번째 장면은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그 장면이다. 마르코, 또는 마르코에게 전해진 대로의 이 장면의 본래 화자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이 첫 번째 만남에 대한 그대로의 사실들을 열거하기보다는,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느끼는 호소력을 맛볼 수 있게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독자들의 상상과 기도 생활 속에 이 장면을 살아남을 수 있게 했던 꾸밈없는 드라마 양식을 통해서 마르코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 가시다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다(1,16-19).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를 때에 그 형제도 똑같이 한다.

마르코는 독자들을, 예수님을 하느님의 눈을 통해서 그 사랑하는 아들로서 바라보도록 방금 초대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이 첫 제자들의 눈을 통해서 그분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아마도 마르코 복음서의 독자들과는 달리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선포하는 하늘로부터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로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 뿐이다. 인간 예수님의 모습 중에서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즉시 자신의 어부 일을 버리고 그분의 도전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마르코는 말이 없다. 그는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만나는 사람들을 신비감으로 둘러싼다. 마르코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은 매우 신비한 존재로 남아 있다.

마르코는 우리에게 지리적 또는 사회적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조금만 알려줄 뿐이며, 역사이건 소설이건 현대의 많은 서사 문학 속에서 볼 수 있는, 사건의 무대의 자세한 묘사라든가, 인물의 외관이나 내적인 동기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는 전혀 보여 주지 않는다. 독자들은 각자 갈릴래아 호수를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으며, 예수님, 시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 모습인지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실제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대목에 나오는 것보다는 더 많은 말을 하셨거나, 이 짧은 만남 이전에 이미 시몬과 다른 제자들을 만난 적이 있으셨을 것이다. 마르코, 또는 이 장면의 본래 화자는 이 만남의 씨앗과 같은 핵심만을 제시함으로써 이야기를 압축하고, 극적인 초점을 지닌 대화를 구성하는 탁월한 기술을 보여 준다. 그가 예수님의 말로 인용하는 것은 제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간단한 도전이다. "나를 따라 오라." 그는 이러한 변화를 하나로 담아 내는 "사람 낚는 어부"라는 간단한 이미지로 보여 준다. 그는 제자들 응답의 초점을 하나의 간결한 행위, "곧" 예수의 초대에 응하여 그분을 따라가는 그 행위에 둔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이 첫 번째 도전은 강렬하지만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이는 갈등과 긴장이 빠져 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가르침과 치유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일반 대중과 "악령들"과 율법학자들과 만나는 상황으로 독자의 관심을 이동시키는 시점에서 긴장을 도입한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초점을 길고 산만한 산상 설교에 둔다. 마태오는 이 대중 강연 속에, 다양한 주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아 놓는데, 이는 행복 선언으로 시작하여 세 개의 장 전체에 걸쳐 이어진다(5,1-7,29 참조).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파르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1,21)다고 말함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는데, 그분이 그곳에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에 대한 단서는 제공하지 않는다. 제자들과의 첫 만남에서처럼, 마르코는 "그 가르침을 듣고 놀란"(1,22) 백성들의 반응을 강조한다.

뒤에 가서 마르코는 네 개의 비유로 대중에게 설교하시는 예수님을 제시한다. 예수님의 이 네 비유는 주로 농사일에서 취한 이미지, 곧 씨 뿌리는 사람, 등경 위에 놓아둔 등불, 자라나는 씨, 겨자씨(4,1-33 참조)의 형상 속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모아 담아 놓은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의 예수님은 역동적인 인물로서, 치유하고, 죄를 용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심으로써 말보다는 행동으로 가르치시는 분이다. 그는 개념적인 교리가 아니라 행동의 방식을 제공한다. 예레미야스(Jeremias)가 모든 복음서들 안에 들어 있는 비유들에 대해서 말했듯이, 비유의 목적은 "보편적인 격언"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각 비유는 예수님 생애의 실제적인 상황 속에서", 특히 "갈등의 상황 속에서" 말해진 것이며 각 비유는 직접적인 응답을 요구한다.5)

흔히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이미지, 간단한 비유, 간결한 격언 등을 이용하시는데, 많은 경우에 수수께끼와 같으며 설명을 덧붙이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낚는 어부"(1,17)가 되라고 첫 제자들을 초대하시지만, 이러한 이미지가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지시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가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이용해서 간결하게 선언하신다.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사람도 없다"(2,22).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어떤 면에서 새로운지는 설명하지 않으신다.

가파르나움 회당 장면에서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시는지를 소개하지 않고 그분이 악한 세력과 맞서시는 것을 소개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실 때 어떤 악령 들린 사람이 외친다.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예수께서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1,24-26).


이 장면과 또 다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악령과 맞서시는 일은 그분의 권위에 이러한 악한 세력들을 통제하는 권능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마르코가 보여 주는 이 대적 이야기는 또 이러한 악령들에게, 예수님의 신원이 지닌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으로서의, 또는 뒤에 계속 나오는 장면들에서 그들이 외치듯이 "하느님의 아들" 또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로서의(3,11; 5,7) 이른바 "메시아적인 비밀"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는 예수님의 생각을 강조한다.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당신 자신을 오히려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신다(2,10. 28; 8,31. 38; 9,9. 12. 31; 10,32. 45; 13,26; 14,21. 41. 62).6)

더 중요한 것은 가파르나움의 일화가 율법학자라는 모습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악한 세력과 맞서는 대립의 씨앗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마르코는 이 장면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1,22). 갈등의 더 구체적인 근원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악령 들린 사람에게서 그 악령을 쫓아내시고 시몬의 장모도 안식일에 치유해 주셨던 일이다(1,29-31). 마르코는 일련의 극적인 일화들을 통해서, 유다 세력가들과의 이러한 갈등을 자기 이야기의 주된 지향으로 재빠르게 녹여 넣는다.

저자는 한 사람의 일생에 일어나는 일들을 택하여 문학 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 사람 일생의 어떤 측면들은 확장시키거나 강조하고 다른 것들은 축소하거나 강조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어떤 말과 사건들은 포함시키고 다른 것들을 누락시키기로 결정을 내린다. 저자는 독자들을 위해서 그 사람 일생의 말과 행동을 되살리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마도 그는 사건의 시간적 배열보다는 그 사람의 삶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강조할 수 있는 배열에 더 신경을 쓸 것이다. 따라서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그 일생을 통해서 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선별하여 순서를 매겨 제시하며, 그럼으로써 또한 그들은 각각의 고유한 신학적인 개념을 형성한다.

복음서 서두에서 시작하여 앞머리의 일화들을 통해서, 마르코는 마치 빠르게 움직이는 카메라로 잡은 듯한 일련의 짧은 장면들 속에서 예수님과, 또 그분과 율법학자들과의 갈등을 우리 앞에 내어 놓는다. 마르코는 화자의 권리를 휘둘러, 극적인 효과를 위해 시간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실제로는 몇 달에 걸쳐 일어났을 사건들을 마치 하나하나 빠르게 연이어 리듬감 있게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곧"과 같은 표현은 속도감을 더해 준다.7)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 일화들을 간결하게 줄여서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마르코는 이러한 움직임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어떠한 자세한 가르침이나 그림 같은 묘사도 도중에 배치하지 않는다. 그는 간결하고 대담하고 초점이 분명한 형상들을 동원해서 사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낙타 털옷을 입은 광야의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라고 외친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우리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본다.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에게 "호수에 그물을 던져라."라고 하시며,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분께서 가파르나움의 한 사람에게 들어가 있는 악령에게 나오라고 명령하시자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1,26).

마르코는 다음날 아침 "외딴 곳"(1,35)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줌으로써 빠른 움직임에 짧은 휴식기를 끼워 넣는다. 그리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1,41)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신다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의 내적인 감정을 처음으로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대립의 장면들"로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시작한다. 이 장면들 안에서 예수님의 행동과 말은 이스라엘의 율법학자들과 충돌하는 과정으로 빠르게 나아가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어려움 없이 악령을 내쫓으실 수 있지만, 이런 인간의 악한 세력들이 그와 맞서 빠르게 모여드는 것은 통제하지 못하거나 통제하지 않으신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지닌 악한 의도를 오히려 자극하는 것 같다. 그의 이런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제자들과 대중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가지게 되는 경이로움은 쉽사리 불길한 예감으로 변화된다. 대립의 이 장면들은 압축된 드라마, 그 안에서 발견되는 세심한 구성,8) 신속한 클라이맥스 형성 등 노련한 화자와 뛰어난 기교를 지닌 문학가의 특징을 담고 있다.

마르코는, 복음서에 처음으로 나오는 구체적이고 긴 장면인 예수님과 유다 권력자들 사이의 첫 번째 대립 사건을 이 장면들의 첫머리에 제시한다. 그리고 다시 가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들으려고 사람들이 가득 모인 방안에서 말씀하시다가 네 사람이 데려온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다. 마르코는 이 장면을 극적인 방식으로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실제 사건이라기 보다는 주의를 끄는 영화 장면처럼 만든다. 많은 한국 독자들은 아마도 이 장면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해석할 것이다. 거의 우스꽝스러우리만치 급한 네 사람은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 내려보냈다"(2,4).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대담한 선언으로 답하신다. 그분께서는 이런 선언이 방의 지붕을 벗겨내는 행동만큼이나 율법학자들의 종교적인 기대와 사고 방식을 산산이 부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아셨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 앉아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며 중얼거렸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중풍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어 가지고 나갔다(2,5-12).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행위 안에 잠재해 있던 유다 권력자들과의 갈등 가능성은 자신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졌다는 이 신성 모독처럼 들리는 주장을 계기로 표면화된다.

마르코는 이 긴장을 빠르게 강화시킨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다고 비난하고, 예수님께서는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어법으로 이렇게 대답하신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2,17).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2,22)에 넣어야 한다고 대답하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곡식을 따먹었는데 그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예수님께 대든다. 이 도전을 받아들이는 예수님께서는 "사제들밖에는 아무도 먹을 수 없는", 제단에 놓은 빵을 굶주린 부하들과 나누어 먹은 다윗의 예를 들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무뚝뚝하게 말씀하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아가 당신의 권위를 대담하게 주장하신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26-27).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자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3,2)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는 일화를 통해서 이 긴장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 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3,3-6).


문학 작품을 읽을 때에는 목적과 수단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르코가 이전의 대립 장면들을 극화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한번의 부딪침에서 이끌어내시는 간결한 가르침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장면에서 마르코는 극적인 치유 행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이 사건을 꾸밈없는 본질의 차원으로 축소시킴으로써 그 극적인 성격을 강화한다. 이 마르코의 기사는 이 사건에 관한 마태오 복음서의 판본(12,9-14 참조)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강렬하다.

더구나 이 장면은 마르코 복음서 전체의 흐름 중에서 더욱 핵심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드라마는 단순히 맞선 세력들 간의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기대하는 미래를 향한 지향을 투사하는 것이다. 이번 일화는 이 장면 자체에 그려진 예수님과 유다 권력가들 사이의 강렬한 대립만으로 극적인 효과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 장면은 그 대립을 그들의 손에 의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비극적 과정 안에 결정적으로 가져다 놓는다.

또한 마르코의 드라마 속의 이 결정적인 순간은, 처음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인격을 그만큼 가장 예리하게 관찰하게 해 준다. 문학 이론에 의하면, 이른바 '평면적인' 인물과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부르는 인물들 간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전자는 한 이야기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유형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사실적인 인간 존재가 되어 독자의 관심을 끌어내지는 않는다. 반면에 후자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내적인 동인과 변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이 초기 일화들뿐만 아니라 전체 마르코 복음서에서 다루는 인물들을 평면적인 인물에 가깝게 그린다. 예수님도 평면적이고 대중적인 인물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처음부터 마르코는 그분 인격이 지닌 신비를 강조하며, 위대한 인격적 깊이를 암시하는 권위의 후광을 그 말씀과 행동에 불어넣는다. 그러나 여기까지 그는 우리에게 단순히 예수님의 내적인 정신과 마음을 간헐적으로 엿보게 해 주었을 뿐이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에게 들어가 있는 악령에게 나가라고 명하시면서 "꾸짖으셨다"(1,25)라고 말한다. 마르코는 나병 환자가 병을 고쳐달라고 애원하자 예수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셨다."라고 말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자 율법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예수님께서 그 영으로 알아채셨다고 알려 준다(2,9 참조). 이제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그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3,5) 둘러보셨다고 말한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 대한 연민만큼이나 강한 유다 권력자들에 대한 분노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유다 권력자들이 자신을 죽일 구실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그런 구실을 제공하신다. 진정 비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사건이 그렇듯이 예수님의 행동 자체는 그에 대항하여 모여드는 세력의 행동과 맞물려 사건을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

마르코의 이러한 간결한 사건 묘사 방식은 극적인 강렬함을 노린 것이지만, 역사나 전기, 소설 작품 안에 등장하는 사건의 더 구체적이고 분석적인 탐색에 익숙해진 현대 독자들은 어째서 마르코가 배경을 좀더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과 그 반대자의 동기에 대해 말하지 않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께 맞서 불길하게 모여드는 인간 악의 세력의 동기를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다만 스스로 희생양이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한편의 비극적인 희생 드라마 속에 경외심을 가지도록 초대한다.

"예수님을 더 분명히 알고,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고, 그분을 더 가까이 따르"겠다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기도처럼, 시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교 독자들은 자기들이 도달할 수 있는 만큼의 도움을 복음서에서 얻기를 바란다. 이런 생각을 지닌 이냐시오는 각자 복음을 읽을 때 장면의 부족한 세부 사항들은, 마치 그것이 현재인 양 자신의 상상력으로 보충해 넣으라고 권고한다. 그는 우리에게 복음사가가 보여 주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들려 주지 않는 것을 듣게 하며, 언급하지 않는 것을 자세히 검토하게 하며, 간단하게만 그려 주는 사회적인 배경을 채워 넣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로서는 유익한 방법이지만 독서하는 방법으로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복음을 문학 작품으로 읽는 독자들에게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권고가 더 적합하다. 요한 복음서에 있어서 그는 독자들이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내용보다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그것은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크리소스토모는 위대한 문필가로서의 예리한 비판력으로, 복음서를 더도 덜도 아니게 그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 복음서를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9)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일화에서 마르코는 예수님께 맞서 모여든 세력들과 예수님과의 결정적인 대립을 재빠르게 구성한 뒤에 이야기의 속도를 늦추면서 사건들을 덜 긴밀한 방식으로 연결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예수님의 명성이 널리 펴져서 "유다와 예루살렘과 에돔과 요르단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이며 띠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많이 몰려왔다."(3,8)라고 한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공생활 이야기의 시작으로 삼았던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관계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음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이름을 열거하는데, 그 마지막 사람이 "예수를 팔아 넘긴"(3,19) 유다 이스가리옷이다. 이런 유다에 대한 꾸밈없고 불길한 수식은 예수님 일생의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별로 놀라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르코의 이야기 방식으로 보자면, 예수님께서 선택한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을 예수님과 대립하여 모인 세력과 하나로 묶는 것은 갑작스러운 충격과도 같다. 게다가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의 예수님 유년 시절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가족에 대해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매우 놀랍게도 마르코는 예수님 가족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율법학자들의 시선과 연결짓기까지 한다. 어느 시점에서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도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3,21-22).


마르코는 자기 이야기의 중간 단계로 접어들면서 비극적인 갈등을 향해 나아가던 지향을 배경의 지위로 낮추어 버린다. 그렇게 극적으로 시작한 이야기로서는 어울리지 않게, 마르코는 비극적인 전개 흐름을 중단시키고 잠시 떠나,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의 언행,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는 말씀, 행위, 그리고 이미지들에 초점을 둔 장면들을 중심 단계로 끌어들인다.

마르코의 복음이 전개되는 과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필자는 다음과 같은 기초적인 문학적 질문들을 제안한다. 복음서 이야기가 우리를 초대하는 하느님 말씀과의 대화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이런 질문에 깊이 숙고하여 대답을 찾는 것이 결국은, 필자나 다른 어떤 성서학자가 만들어 낸 요점보다 더 도움이 될 것이다.


1) 각각의 일화는 언제 어디에서 일어난 것인가? 장면, 등장 인물, 사건의 묘사는 자세하고 다채로운가, 아니면 간결하고 꾸밈이 없는가? 어떤 이야기가 확장된 이야기이고 어떤 이야기가 축소된 이야기인가?

2)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바라고, 행하고, 말씀하시는가?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구체적인 개인적 특성을 지니시는가? 예수님의 내적 감정이나 타인들과의 상호 작용에서 외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측면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께서 가장 자주 상호 관계를 맺으시는 개인이나 집단은 누구인가? 만일 예수님께서 한국 사람이라면 달리 어떻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실까?

3) 복음서의 다른 등장 인물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는가, 아니면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가? 그들은 입체적인 인물인가 평면적인 인물인가? 그들은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하는가? 당신과 그들은 어떤 면에서 유사한가?

4) 중요한 행위가 시작되는 것은 어느 시점인가? 어떤 갈등이나 긴장이 이 행위를 형성하는가? 어떤 진술과 사건이 미래를 가리키는가? 그 진술과 사건은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에 대해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키는가?


마르코 복음서 전체가 진행됨에 따라서, 독자는 또한 점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 숙고해 볼 수 있다.


5) 말과 행위와 이미지 속의 어떤 양식들이, 발전해 가는 행위에 형태와 지향(志向)을 부여하는가? 각 단계에서 등장 인물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 행위가 절정에 달하는 것은 어느 곳인가? 그리고 그 행위는 어디에서 끝나는가?

6) 행위의 과정에서 어떤 긴장이나 모호함이 발생하는가? 이런 긴장과 모호함은 의미와 느낌의 지향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구약성서의 어떤 언급이 그 의미를 풍요롭게 하는가? 그 장면들을 둘러싸고 있는 감정적인 분위기나 어조는 어떤 것인가? 그 이야기 속에 유머가 들어 있는가?

7)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가 아니면 빠르게 흐르는가? 부드럽게 이어지는가 아니면 단절을 겪으며 흐르는가? 이야기의 과정에서, 예수님과 다른 이들에게, 행위의 지향에, 감정의 어조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가? 이야기의 끝은 그 시작과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끝으로 그 이야기는 끝 부분에서 종결이 되는가, 아니면 우리에게 앞으로의 다른 사건들을 기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며 개방되어 있는가?

8)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삶에서 어떤 측면에 초점을 두는가? 어떤 측면을 강조하지 않는가? 복음사가의 이야기 제시, 구성, 또는 언급의 양식이,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범위를 넘어서는 생각, 태도, 사건들에 관한 관찰 방식을 암시하는 것은 어느 곳인가? 복음사가가 우리로 하여금 복음서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과 다른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게 하는 곳은 어디인가? 만일 복음사가가 한국 사람이라면 그 이야기를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을까?

9) 이 복음서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어떤 곳인가? 그 복음서 속에서 당신 자신의 삶의 체험이나 삶을 향한 태도와 일치하는 측면들은 어떤 것인가? 그 복음서가, 당신 자신이나, 하느님, 예수님 또는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새롭거나 더 풍요로운 방식으로 초대한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 복음서는 어떻게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의 친밀한 대화를 향해 개방하도록 도전을 제기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해 가는 과정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복음서를 문학 작품으로 읽는 독자는 하느님, 예수님 그리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이나 화자의 말에서만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독자는 작품 전체에 담긴 하느님 말씀의 지향을 찾으려고 한다.

더욱이 독자가 복음서에 그려진 사건을 그릇되게 왜곡하는 신심의 렌즈를 들이대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인 독자가 자기 안에 내재한 현세적 사실주의의 감각을 무시하고 영적인 가면을 쓴 채로, 마르코의 복음서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바라본다면 잘못이다. 실재적인 인간 삶의 유머에 대한 한국적인 감각을 지닌 독자는 그러한 가면을 쓴 사람보다 더 잘 마르코의 이야기를 따라잡을 수 있다.

20세기 전반에 걸쳐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중에서 어느 것이 정말 그분의 것이고 어느 것이 복음사가나 그 복음사가가 속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덧붙여 넣은 것인지를 가리기 위한 많은 학문적 조사가 진행되었다. 만일 우리가 복음서에 담긴 하느님 말씀의 중심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조사는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작품 전체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러한 조사는 덜 중요할 것이다. 본고는 마르코의 복음서에 기록된 말과 행위가 어느 정도만큼 예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시고 행하셨던 것과 일치하는가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본고의 목적은 예수님의 삶 전체가 인류에게 주는 하느님의 말씀의 표현이라고 전제하고, 신학적인 통찰력과 문학가의 역량을 갖춘 마르코가 어떻게 예수님 생애의 현실과 의미를 독자들에게 되살려 주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성경을 문학적으로 읽는 독자는 신학적으로 읽는 독자와 다르다. 곧 신학적인 독자는 작품 안에 내포된 개념적인 이념의 명료성을 추구하는 반면, 문학적인 독자는 오히려 작품 안에 존재하는 모호성과, 다중적인 의미의 차원과, 서로 갈등하는 긴장에 관심을 가진다. 이는 모호함, 다중적인 의미, 그리고 긴장이, 우리들 자신,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에 대해 끈질긴 질문들을 제기하여 이 관계를 성숙한 단계로 이끌 수 있는 지속적인 힘을 그 작품에 부여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계속)


1) David Norton, A History of the Bible as Literature I, Cambridge, 1993년, 4-5.30-48면 참조.

2) William R. Telford, "Introduction", William R. Telford편, The Interpretation of Mark, T & T Clark, Edinburgh, 1995년, 1-2.40면 참조; 신약성서 전반에 대한 최근의 문학 비평에 대한 조사는 William A. Beardslee, "Recent Literary Criticism," Eldon Jay Epp and George W. MacRae편, The New Testament and Its Modern Interpreters, Fortress, Philadelphia, 1989년, 175-198면 참조.

3) William R. Telford, 위의 책, 9면 이하 참조.

4) 위의 책, 27-28면.

5) Joachim Jeremias, The Parables of Jesus,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 1963년, 21면; Amos Wilder, Early Christian Rhetoric:The Language of The Gospel, Harvard Univ., Cambridge, 1971년, 12-13면 참조.

6) 마르코 복음서 속의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에 관한 토론으로는 Norman Perrin, "The High Priest's Question and Jesus' Answer(Mark 14,61-62)", Werner H. Kelber편, The Passion in Mark:Studies on Mark 14-16, Foftress, 1976년, Philadelphia, 85면 이하와 Telford, 앞의 책, 27면 이하 참조.

7) John Drury, "Mark," Robert Alter and Frank Kermode편, The Literary Guide to the Bible, Belknap, Cambridge, 1987년, 409면.

8) Joanna Dewey, "The Literary Structure of the Controversy Stories in Mark 2,1─3,6," The Interpretation of Mark, 141-151면 참조.

9) Frank Kermode, "John", The Literary Guide to the Bible, 441면 참조.


<사목, 2002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