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 여행 (6) 마르코 복음서는 어떤 책인가?


이 복음서는 신약성경 맨 앞자리에 배치된 네 권의 복음서 가운데 두 번째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때는 그 가치와 중요성에서도 두 번째로, 곧 다른 복음서들보다 뒤처지는 복음서로 취급받기도 했다. 다른 복음서들보다 비논리적이고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한 묘사에서도 거칠고 투박한 면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 많은 연구를 통해 이러한 편견이 사라지고, 오히려 이 책이 첫 번째로 기록된 복음서로서 다른 복음서의 형성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신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복음사가 마르코 : 교회 전통에서 이 복음서는 사도 12,12에 등장하는 ‘요한이라고도 불리는 마르코’에 의해 로마에서 7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추정한다. 마르코는 본래 예루살렘에 살던 신심 깊은 유다인이었는데,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베드로 사도의 통역관으로 봉사하면서 사도에게 전해들은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하여 오늘날과 같은 복음서를 남겨 주었다.


독자와 저술 목적 : 마르코는 이방인들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세상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심을 선포하고자 복음서를 기록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버림받고 로마 군사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그러한 배신과 죽음이 오히려 모든 민족을 위한 희생과 속죄였음을 가르쳐주었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나 백인대장처럼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음으로써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주요 가르침 : 복음서의 제목 격으로 기록된 1,1의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라는 표현은 저자가 이 책에서 무엇을 전해주고자 하는지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곧, 저자는 특별히 역사 안에서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언도 받고 죽은 나자렛 사람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르코는 “역사적 인물 나자렛 사람 예수가 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주제를 사용하여 그리스도론을 전개했다. 곧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분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시라는 사실이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비밀에 쌓여 있었지만, 차츰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달랐다. 많은 이가 예수님께 현세적인 축복을 기대했고, 제자들까지 예수님이 왕좌에 오르실 때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기대했다(9,34; 10,37-41).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많은 이의 몸값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선언하셨다(10,45). 이러한 예수님의 사명은 인류의 죄를 대신한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실현되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이해하고 그분께 믿음을 고백하게 되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후에야 비로소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정체가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만 명확하게 밝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도 당신처럼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섬김의 삶을 살라고 초대하셨다(8,34; 10,43).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섬김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013년 2월 3일 연중 제4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전주가톨릭신학원 성서부]


공관복음 여행 (7) 마르코가 선포하는 예수님 : 겸손하신 평화의 임금


며칠 전 우리나라에 첫 여성 대통령이 취임했는데,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새 대통령이 취임식 때 입었던 옷들과 청와대로 이동하는 중에 탔던 최고급 방탄차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러한 관심 뒤에는 옷이나 장신구 또는 자동차 등이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명성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온 세상의 임금이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 예수님은 만민의 참 임금이지만 세상의 여느 왕들과 달리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임금의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평화의 행진을 하셨기 때문이다(마르 11,1-11).


당시 사회적 · 종교적 환경에서 예수님의 행렬은 왕이며 메시아이신 그분의 ‘격’(格)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당신이 이스라엘의 성조 야곱이 예고한 왕이며 즈카르야가 예언한 메시아임을 드러내시기 위해서다. 야곱은 유다 가문에서 나올 이스라엘의 왕을 다음과 같은 말로 예고했다. “그는 제 어린 나귀를 포도 줄기에, 새끼 나귀를 좋은 포도나무에 매고 포도주로 제 옷을, 포도의 붉은 즙으로 제 겉옷을 빤다”(창세 49,11). 또한 즈카르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실 메시아를 두고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


라삐들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특별히 왕이며 메시아이신 그분의 신원을 밝혀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빌론 탈무드의 「기도 · 축복」 56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꿈에 나귀를 보는 이는 메시아의 왕국을 갈망하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일부 순례자를 제외하면, 도성 안에 있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다른 순례자들은 예수님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시는 일에 반감을 품고 속임수로 사지에 내몰 궁리까지 한다(마르 11,27-33; 14,1ㄴ).


이처럼 예수님이 분명한 모습으로 당신이 메시아시며 임금이심을 드러내셨음에도 유다인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현실에서 바라는 것이 서로 다른 데서 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즈카르야가 예고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실 왕 · 메시아는 유다인들의 지식 속에 있는 존재이고, 그들이 현실에서 바라는 인물은 지상 최고의 힘과 능력을 지니고 세상 모든 통치자를 압도하는 절대군주였을 것이다. 그러한 모습이 하느님의 대리자이며 유다의 왕 · 메시아의 격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세속적 논리로 하느님 백성의 왕 · 메시아를 기대하던 유다인들의 시선을 원점으로 돌려놓으시고자 성경의 예언대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이 기대하는 왕의 권력과 메시아의 능력을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라시는 겸손의 왕이며 평화의 메시아로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담은 성경의 예언대로 행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세속의 논리나 바람이 아닌 신앙의 논리(복음)와 하느님의 뜻(성경 말씀)을 앞세워야 한다.


[2013년 3월 18일 사순 제4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전주가톨릭신학원 성서부]


공관복음 여행 (8) 마르코가 선포하는 예수님 :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마르코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하느님 아들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계시 사건이라고 이해했다. 또한 통치자들의 관점에서 극악무도한 반역자에게 행해지던 십자가 형벌은 인류의 반역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친 메시아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다고 이해했다. 이처럼 십자가상의 죽음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적인 계시 사건인 동시에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이 완성되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겪으셨다. 하지만 그분의 십자가 옆을 지나가던 이들은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향해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15,29ㄴ-30) 하고 말하면서 모독하였다. 조롱하는 몸짓은 시편 22,7에 나오는 원수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또한 시편 22,9와 지혜 2,17-20에는 악인들이 의인에게 주님께서 구원해주실 것 같으냐고 다그치는 말이 나오는데, “너 자신이나 구해보아라.” 하는 말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마르코는 예수님의 모든 수난이 구약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며, 그분 스스로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 행인들이 한 것과 비슷한 말로 예수님을 조롱한다(마르 15,31-32). 이들은 예수님께 다른 이들을 구원한 것처럼 자신을 구원하고(15,31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15,32ㄱ) 요구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은 구원하면서도 당신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그분은 그러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 죽음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당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오르셨으므로 죽기 전에는 거기에서 내려오지 않으실 것이다.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15,37). 예수님은 기력이 다해 숨을 거두는 모습과 거리가 멀다. 큰 소리를 지르셨다는 것은 부활의 승리, 종말론적 심판, 사명 완수에 대한 확인 등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죽는 순간에도 메시아로서의 힘과 권능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15,38). 이 장면은 예수님의 세례 때에 하늘이 갈라졌던 장면(1,10)과 병행되어 있다. 세례 때 하늘이 갈라진 것처럼 십자가상의 죽음 때 성전 휘장이 갈라졌고, 세례 때 하느님이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셨듯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라고 고백한다. 두 사건 사이에 다른 점은, 세례 때 하느님의 증언이 예수님만 들을 수 있는 비공개적인 것이었다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는 예수님의 정체가 공개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마르코가 선포한 복음(1,1)의 정점에 해당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본 것은 로마의 백인대장뿐이었다. 장차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제자가 될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한 것이다. 마르코는 백인대장의 본보기를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라고 촉구한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시고 우리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2013년 4월 14일 부활 제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전주가톨릭신학원 성서부]


[성경산책 신약] 마르코 복음서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사람의 아들


마르코 복음서는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로 간주되며 간결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저자는 자신의 복음서를 예수님의 활동이 이루어진 장소에 따라, 예수님께서 이동하시는 경로에 따라 복음서를 구성했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의 활동이 이루어진 곳은 갈릴래아 호수와 그 주변이었습니다.(마르 1,1-8,26) 그곳을 떠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데, 두 번째 부분은 이 여정과 함께 구성되어 있습니다.(마르 8,27-10,52) 그리고 마지막 장소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게 되는 예루살렘입니다.(마르 11,1-16,8)


마치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삶을 갈릴래아에서 출발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정처럼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공적인 삶은 당신의 죽음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 이후에야 다시 갈릴래아로 돌아갑니다.(마르 16,7) 이러한 틀은 마태오와 루카에게 영향을 주었고 공관 복음서의 중요한 신학적 구조가 됩니다.


마르코 복음의 중요한 영향 중 하나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입니다. 이 호칭이 처음 사용될 때, 저자는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으로 생각되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음을 이야기합니다.(마르 2,10) 또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으로 표현됩니다.(마르 2,28) 이 호칭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마르 8,31-33)에 다시 등장합니다.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는 마르코 복음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수난과 부활 예고는 비슷한 형태(수난 예고 - 제자들의 몰이해 - 가르침)로 반복됩니다. 마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조금씩 이해해 가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내용적으로는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을 통해 메시아, 곧 그리스도께서 수난과 죽음을 겪고 부활하리라는 복음의 핵심에 대한 선포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의 아들은 종말 때에 다시 오실 분으로 드러납니다. 수난 예고처럼 세 번에 걸쳐 표현되는 ‘다시 오심’, 곧 그리스도의 재림(마르 8,38; 13,26; 14,62)은 죽고 부활하신 바로 그분이 종말의 심판자임을 나타냅니다. 결국 마르코 복음은 사람의 아들이란 호칭을 통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며, 그분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제자들을 뽑으신 이야기에서 제자들의 첫째 목적을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마르 3,14) 복음의 선포나 권한을 통해 예수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함께 있음’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부활 이후에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되는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마르 16,20)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으로 활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4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일 서울주보 4면, 허규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약성경의 기도] 기도하시는 예수님


공관복음서, 특히 마르코 복음서를 중심으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기도’를 머릿속에 떠올리면, 즉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기도를 많이 하셨다는 것을 복음서들이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요한 17장)는 별도로 살펴보기로 하고, 이번 호에서는 공관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 그 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기록된 마르코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루카 복음서에 가장 많이 제시되어 있지만, 이미 마르코 복음서 안에 그 뚜렷한 윤곽이 드러나 있다. 마르코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고 언급되는 곳은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1) 마르 1,35; 6,46 : 많은 활동 후에 ‘홀로’ 하느님 아버지와 마주하시는 기도.


2) 마르 14,32-42 : 겟세마니에서 하신 기도.


3) 마르 6,41; 8,6-7; 14,22-23 : 식사 전 기도. 마르 14,22-23의 기도는 최후만찬 때 성찬례를 제정하시는 맥락에 나오므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만, 식사 전에 드리는 기도라는 점에서는 마르 6,41; 8,6-7에 나오는 기도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4) 마르 15,34 : 골고타 십자가 위에서 하신 기도.


위에 제시한 것 말고도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경건한 유다인들이라면 으레 하였을 다른 기도들도 많이 하셨을 것이다. 예를 들어, “셔마 이스라엘(들어라, 이스라엘아) 기도”1), 안식일에 회당에서 하던 여러 기도들2), 여러 순례 축제 때(예컨대, 파스카, 오순절,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다인들이 바치던 기도들(특히 시편기도들)도 함께 바치셨을 것이다. 그러니, 복음사가들이 전해주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하신 기도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제한된 지면 때문에, 위에 제시된 ‘기도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마르코 복음서의 단락들 가운데 첫째 부분, 곧 마르 1,35에 관해서만 살펴보겠다.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는 예수님’ :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알아보는 데 대단히 중요한 구절이다.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며, 예수님의 지상 삶의 두 차원인 ‘자비의 활동’과 ‘기도’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맥락 : 마르코 복음서 안에서 위의 말씀은 이른바 ‘카파르나움에서의 바쁜 하루’(마르 1,21-38)라는 맥락에 나온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며 우선 네 제자를 부르신(1,16-20) 다음, 그들을 대동하고 안식일 낮에는 카파르나움의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다(1,21-28). 회당에서 나오신 다음에는 시몬의 집에 들어가 열병으로 누워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다(1,29-31).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곧, 안식일이 끝나자3))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시몬의 집에 머물던 예수님께 데려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문 앞에서 고쳐주신다(1,32-34). 아마 예수님의 이 병자치유 활동은 밤늦게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바쁘게 지낸 하루에 대한 묘사가 있은 다음에,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라는 말씀이 나온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예수님이 기도하시려고 일어나 나가신 때가 아주 어두운 시간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는 예수님의 기도 시간이 길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바쁘게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르 1,35의 말씀의 앞부분에서뿐 아니라, 다음 부분(1,36-39)에서도 묘사되어 있다“(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라는 1,39의 요약문 참조.).


마르 1,29-39의 맥락에서 본 ‘외딴곳으로 나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마르 1,35) : 이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 삶에 근본적으로 두 차원, 곧 ‘자비의 활동’과 ‘기도’의 차원이 있다는 점과 이 두 차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시작 부분에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분께서 하시는 ‘자비의 활동’이다. 예수님은 갖가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비를 베푸신다. 그분의 자비는 모든 고통에 열려있고 그들을 치유해 주시는 데서 드러난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상생활 중에는 이런 ‘자비의 활동’ 외에 또 다른 차원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는 모습’이다(1,35). (하느님) 아버지를 찾고 아버지와 일치해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이 열망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비를 베푸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예컨대 시몬의 일행이 찾아와,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찾고 있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라고 말씀하신다.


카파르나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며 찾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이런 상황을 훌훌 털고 일어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다른 곳에 있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시고자 그곳을 떠나신다.


마르코 복음서의 맥락에서 예수님의 이런 단호한 결단과 식별은 ‘오랜 기도’(“새벽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하신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마르 1,35에 따르면, 기도는 예수님에게 자비를 베푸는 활동의 원동력이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사랑의 샘이었다.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셨다고 전해주는 다른 구절들 : 마르 1,35에서처럼 외딴곳으로 떠나 ‘홀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복음서들에서 중요한 모티브이다. 자주 언급된다.4) 마르 6,46의 다음 말씀이 그 한 예이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이 말씀은 ‘호수 위를 걸으신 이야기’(마르 6,45-52)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데, 바로 그 앞에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 이야기’(마르 6,30-44)가 있었다. 1,35에서처럼 여기서도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신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홀로’라는 단어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재촉하여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지시하시고, 당신 홀로 산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예수님의 기도는 ‘밤늦은 시간에’ 하는 기도이다(6,48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신 시간은 “새벽녘”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사가들이 “홀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하여 전하는 의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데 있지, 기도는 반드시 ‘홀로’해야 한다고 가르치려는데 있지 않다. 예컨대 마태 18,19-20의 말씀은, 제자들이 함께 한마음으로 하는 기도의 중요성과 그 효과를 강조한다.


복음서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기도의 장소가 골방이든(마태 6,6 참조), 회당이든, 성전이든, 산이든, 또 기도를 홀로 하건, 함께 하건, 기도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가식적이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마음을 온전히(오롯하게)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다.5) 바로 이 점을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님 자신이 모범으로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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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라, 이스라엘아”(히브리어로 ‘셔마 이스라엘’)라는 말로 시작되는 신명 6,4-5의 말씀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득한 옛날부터 아침과 저녁의 기도 시간에 기도로 바치던 신앙고백적 계명이며 동시에 기도였다.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최고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즉각 대답하셨다(마르 12,29-31).


2)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거나 치유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이야기는 복음서의 여러 곳에 나온다(예를 들면, 마르 1,21-28; 3,1-6; 마르 6,1-6; 루카 4,16-30). 이런 회당 방문 때,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기도도 함께 바치셨을 것이다.


3) 유다인들의 날짜 계산법에 따르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해가 떨어지면서부터였다.


4) 마태 14,23(마르 6,46의 병행구절); 루카 5,16; 9,18(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전에); 9,28-29(거룩한 변모의 장면). 또한 마르 1,12-13(“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유혹을 받으신”이야기)와 마태 6,6도 참조.


5) 참조 :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이며,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59항에 인용된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의 말씀).


* 김영남 다미아노 - 의정부교구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교수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교 신학부와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특히 바오로 서간)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15년 1월호, 김영남 다미아노]


구역반장 월례연수 신약성경 이해 (1)


공관(共觀) 복음서 :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하느님 말씀은 새로운 복음화의 원동력’이고, ‘기도는 새로운 복음화의 활력’입니다. 2015년 한 해 동안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새기고 체험하고 나누는 삶이 될 수 있도록 구약 성경에 이어 신약 성경 이해를 돕는 글을 싣습니다.


공관(共觀) 복음서


구원의 ‘기쁜 소식’(복음)인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배경으로 전하는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네 책을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앞의 세 복음서는 그 내용과 표현 그리고 배열 순서 등이 비슷하여 병행 구절들을 나란히 놓고 볼 수 있어서 ‘공관(共觀, Syn/함께 ?opsis/보다) 복음서’라고 불립니다.


마태오 복음서


전통적으로 사도 마태오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원후 80-90년에 쓴 책으로 여겨온 마태오 복음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이 성취됨을 전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내용


다섯 개의 설교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데 충실한 마태오 복음서는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될 것을 알려줍니다.


+ 마태 1-2장 :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탄생, 어린 시절


+ 마태 3.1-4,11 : 세례자 요한의 설교, 예수님의 세례, 광야에서 유혹 받으심


+ 마태 4,12-18,35 :

① 마태 4,12-25: 갈릴래아에서의 전도 시작,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심

② 마태 5-7장 : 산상 설교(참 행복, 율법의 완성, 원수 사랑, 자선과 기도와 단식, 하느님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아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라)

③ 마태 8-10장 : 병자 치유, 열두 사도의 선발과 파견, 복음 선포 위한 설교

④ 마태 11-12장 : 복음 선포,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의 참가족

⑤ 마태 13장 :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 설교(씨 뿌리는 사람, 가라지, 겨자씨, 누룩, 보물과 진주 상인, 그물)

⑥ 마태 14-15장 : 예수님의 활동(오천 명 먹이심, 물 위를 걸으심, 가나안 여자의 믿음)

⑦ 마태 16-17장 : 수난과 부활 예고(베드로의 신앙 고백, 수난과 부활 예고, 변모)

⑧ 마태 18장 : 교회 공동체의 모습과 삶에 대한 설교(하늘 나라의 큰 사람-어린이처럼 되라, 죄의 유혹 거부,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형제애-충고, 용서)


+ 마태 19-20장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하신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


+ 마태 21-28장 :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활동

① 마태 21장 :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두 아들의 비유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② 마태 22장 : 혼인 잔치의 비유와 부활 논쟁,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③ 마태 23장 :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비판

④ 마태 24-25장 : 종말과 심판에 대한 설교(성전 파괴 예고,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열 처녀와 탈렌트의 비유, 최후의 심판)

⑤ 마태 26-27장 :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예수님을 죽일 공모, 향유 부은 여인, 유다의 배신,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기도, 체포, 신문, 십자가의 길, 숨을 거두심, 무덤에 묻히심)

⑥ 마태 28장 :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 모든 민족들에게로의 복음 선포 사명 부여


마태오 복음서의 신학적 주제


+ 옛 계약(구약)의 성취 :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이야말로 구약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을 전하기 위하여 구약 성경을 가장 많이 인용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1,22)와 같은 ‘성취 인용문’이 많이 나옵니다.


+ 임마누엘 :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임마누엘”(1,23: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들과 함께 계십니다(28,20). 마태오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살아 계심을 강조합니다.


+ 교회 공동체와 제자들의 사명 : 복음서들 가운데 유일하게 ‘교회’(16,18; 18,17)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참 이스라엘’인 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교회는 주님이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를 전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인생살이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마르코 복음서


전통적으로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에 동행했으며, 사도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알려진 마르코(사도 12,12.25; 1베드 5,13)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원후 70년경에 쓴 것으로 여겨온 마르코 복음서는 네 복음서 가운데에서 분량이 가장 적지만(16장) 가장 먼저 쓰였고,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가장 생동감 있게 전해줍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내용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이방인들의 땅까지 포함한 그 주변 지역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과 예리코를 거쳐 예루살렘을 향한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제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주십니다.


+ 마르 1,1-8,30 : 주된 관심사인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1,1), 예수님의 치유 행위와 가르침을 전함

① 마르 1장 : 세례자 요한의 설교, 예수님의 세례와 유혹, 갈릴래아에서의 복음 선포의 시작과 네 제자를 부르심, 구마와 치유 이야기

② 마르 2-3장 : 다섯 편의 논쟁 이야기(죄의 용서 권한, 죄인을 부르러 오심, 단식, 안식일의 주인, 안식일의 치유), 열두 제자의 선발과 파견, 참가족

③ 마르 4-5장 : 비유 말씀(씨 뿌리는 사람, 등불, 저절로 자라는 씨앗, 겨자씨)과 기적 · 구마 · 치유 이야기(풍랑을 가라앉히심, 군대 마귀 축출, 회당장 야이로의 딸 소생, 하혈하는 부인 치유)

④ 마르 6-8,30 : 고향 사람들의 거부, 열두 제자의 파견, 오천 명을 먹이심, 물 위를 걸으심,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치유, 바리사이들의 표징 요구, 벳사이다의 눈먼 이의 치유(8,22-26)와 베드로의 신앙 고백(8,27-30)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헤로데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비교됨


+ 마르 8,31-10,52 : 예수님의 세 번의 수난 예고와 제자들에 대한 교육


+ 마르 11-16장 : 예루살렘 입성, 성전 정화, 체포와 신문, 십자가 죽음과 부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제자들의 사명(13,10; 14,9)


마르코 복음서의 신학적 주제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 : 마르코 복음서 첫 머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복음의 요약이요, 예수님께서 전하고자하신 내용의 핵심입니다.


+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면서 당신의 길을 걸어가신 ‘하느님의 아드님’(1,1; 1,11; 3,11; 5,7; 9,7; 15,39)이십니다.


+ 사람의 아들 : 예수님께서는 현세적 영광의 그리스도를 고대하던 유다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의 영광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 정체성에 대한 함구령 : 예수님께서는 8장 30절까지 당신의 정체성이 드러날 때마다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 고백(8,27-30) 이후, 수난과 부활의 예고와 더불어 당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은 지상 여정의 마지막인 수난과 죽음에 이르러서야 온전히 드러납니다.


+ 참된 제자됨 :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당신이 걸어가시는 길을 이어갈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겨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루카 복음서


전통적으로 사도 바오로가 언급하는 의사 루카(콜로 4,14; 필레 24; 2티모 4,11)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원후 80-90년경에 쓴 것으로 여겨온 루카 복음서는 사도행전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 죄인들과 이방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만민의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루카 복음서의 내용


주님이신 예수님, 현재의 구원,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활동을 강조하는 루카 복음서는 예루살렘을 온 세상을 향한 선교의 출발점으로 강조합니다.


+ 루카 1,1-4 : 머리말.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


+ 루카 1,5-4,13 : 유년 시절 이야기와 공생활 준비의 두 부분을 전함

① 루카 1,5-2,52 : 루카 복음서에만 나오는 예수님의 유년시절 이야기(세례자 요한 출생 예고, 예수님 탄생 예고,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과 마리아의 노래,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즈카르야의 노래, 예수님의 탄생, 목자들의 구유 경배, 아기 예수님의 봉헌,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

② 루카 3,1-4,13 : 세례자 요한의 설교, 예수님의 세례와 족보, 예수님의 유혹받으심


+ 루카 4,14-9,50 : 예수님의 갈릴래아에서의 활동

① 루카 4,14-30 : 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를 통한 희년 선포. 고향 사람들의 배척

② 루카 4,31-6,11 : 치유, 제자들을 부르심,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의 논쟁

③ 루카 6,12-7,50 : 열두 사도 선별, ‘행복과 불행 선언’을 시작으로 하는 설교 말씀(원수 사랑, 심판하지 마라, 좋은 나무, 죄 많은 여자의 용서), 백인대장의 종의 치유

④ 루카 8,1-9,50 : 씨 뿌리는 사람과 등불의 비유, 풍랑을 가라앉히심, 하혈하는 부인의 치유, 야이로의 딸 소생, 열두 제자의 파견, 오천 명을 먹이심, 베드로의 신앙 고백,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예고, 영광스러운 변모,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 루카 9,51-19,27 : 예수님의 예루살렘에로의 여정. 일흔두 제자들의 파견과 보고, 가장 큰 계명,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마르타와 마리아 방문, 주님의 기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질책,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우는 세 가지 비유(되찾은 양 · 은전 · 아들)와 자캐오의 회심, 종말 준비를 일깨우는 미나의 비유


+ 루카 19,28-24,53 :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활동(수난과 죽음, 부활, 승천)

① 루카 19,28-23장 :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에서의 가르침, 예수님의 수난기

② 루카 24장 :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24,47)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실현이 사도행전에서 드러남


루카 복음서의 신학적 주제


+ 구원의 현재성 :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구약의 시대와 부활 · 승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교회 시대를 이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 한 번으로 완성된 구원의 ‘오늘’이라고 하는 현재성을 강조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2,11)


+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 :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언젠가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완성을 믿고 희망하며 제자 공동체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표지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 예수님을 따름 :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제자들은 날마다 회개 · 기도 · 애덕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 구원의 보편주의 :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3,6)는 옛 계약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제자 공동체는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에 힘입어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실현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의 실현을 사도행전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기


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태 16,15; 마르 8,29; 루카 9,20)는 물음에 ‘오늘’ 우리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 비추어서 어떤 답을 드리겠습니까?


② 예수님은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십니다. 언제, 어디에서 하느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할 수 있었고, 또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을 누구에게 전하고 싶습니까?


③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구원의 손길을 펼치시는 하느님은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여정을 충실히 걸어갈 것을 교회 공동체에 요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 공동체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에 더욱 힘쓰는 가운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은 누구입니까?


④ 사도들이 “사람 낚는 어부”(마태 4,19; 마르 1,17; 루카 5,10)로 불림을 받은 것처럼 세례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불린 우리들도 세상의 소유와 명예와 권력의 유혹에 맞서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15,22; 마태 20,30; 마르 10,47; 루카 18,38)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참고 문헌: <신약성경 개론>(마르틴 에브너), <신약성서 입문>(K.H. 셸클레), <신약 성경 통권 노트>(이혜정), <주석 성경>(주교회의 성서위원회)


[길잡이, 2015년 2월호, 서울대교구 사목국]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9) 마르코 (상)


'메시아 비밀' 담고 있는 마르코복음서


- 마르코복음은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전승과 사상을 종합하는 교회일치 신학을 제시했다. 그림은 바티칸 박물관 '지도의 방' 벽면에 그려져 있는 마르코 성인화. 날개 달린 사자는 마르코 성인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전승을 문자로 기록한 최초의 복음으로, 초대교회에 큰 공헌을 했다.


고대교회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 주교 증언에 따르면 복음서를 쓴 마르코는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출신 요한 마르코이다. 그는 예루살렘 가정교회 유지의 아들이었다.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빠져나와 마리아의 집으로 향하는데, 이 마리아가 마르코의 어머니다.


마르코는 당시 국제공용어인 그리스어에 능통해 베드로 사도를 수행하며 그의 설교를 통역했다. 또 바오로 사도의 제1차 전교여행에 동행했기에, 마르코복음서에는 두 사도의 영향이 반영됐다. 때문에 복음서는 두 사도의 전승과 사상을 종합하는 교회일치 신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 의미를 갖는다.


복음서는 주님의 여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사야서와 즈카르야서, 시편 등 구약성경을 인용했다. 그중에서도 이사야서는 복음서의 기본 구조를 이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사야서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돼 본토로 귀환하게 되리라는 예언으로, 폐허에서 일어서야 하는 귀향민에게 희망을 고취했다. 마르코서는 이러한 이사야서의 시대적 배경을 이용해 예수가 선포한 기쁜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틀로 차용한다.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와 바빌론 종살이에서 해방돼 귀환할 때 광야를 거친다(이사 40,3). 마르코복음서 역시 광야를 서두로 삼고 있다. 요한 세례자는 예언서에 나타난 대로(1,2~3)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설교 듣는 이들에게 함께 주님의 길을 마련하도록 촉구한다. 이처럼 광야를 거쳐 주님이 오신다는 점에서 이사야서의 본토 귀환 여정은 마르코복음의 지리적 여정과 일치한다.


또 이사야서는 귀향민에게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신다고 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마르코복음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새 하늘이 열리고, 예수가 광야에서 유혹을 받거나 5000명의 유다인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킬 때 광야가 초원으로 변하며 새 땅이 열리는 것을 보여줬다. 하느님 초대에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이 참여해 기쁨을 나눈다고 한 이사야적 전망 역시 반영돼 있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며 공생활을 시작했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물속에서 나올 때 하늘이 갈라졌다(1,10). 이는 이사야서의 한 대목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63,19)을 암시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과 고통 속에 있는 자신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무엇인가 행동을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예수 세례 때 실현된 것이다.


복음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는 대목에서 예수는 하느님 아들로 선언된다. 구약성경에서 '아들'은 메시아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특히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외아들'(창세 2,22)로 표현된 이사악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이사악이 하느님 말씀에 따라 제헌(祭獻)됐듯 예수 역시 스스로 바쳐져야 한다는 소명이 있음을 암시한다.


복음서는 예수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가 하느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예수 한 명이다. '너는'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계시가 예수에게만 들린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점에서 복음서는 '메시아 비밀'이라고 하는 특유의 주제를 드러낸다. 복음서 곳곳에서 마귀가 예수를 하느님 아들이라는 점을 폭로하려고 하지만 예수는 이를 막는다. 왜 예수의 신원이 비밀로 지켜져야 했는가.


예수는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많은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뛰어난 능력을 드러냈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가 메시아이자 하느님 아들인 것은 놀라운 능력을 통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하느님 아들이라는 근거는 인간적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리셨다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아들이라는 결정적 근거다. 이는 어떠한 인간도 개입하거나 흉내낼 수 없는 하느님만의 역사다. 하느님은 예수를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부활시키고 오른편에 앉게 함으로써 당신과 같은 권능과 권한, 영광으로 이끄셨다. 하느님의 이러한 역사하심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비로소 하느님 아들임을 깨닫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마르코복음서는 '메시아 비밀'이라는 모티브로 구성돼 있다. 이것은 예수의 신원이 단박에 알려질 수 없다는 원초적 사실에 근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를 함부로 고백하기보다는 침묵속에서 그분이 가신 길을 따르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평화신문, 2013년 3월 31일, 정리=김은아 기자]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10) 마르코 (하)


광야 · 빈 무덤 지나 부활의 갈릴래아로


- 빈 무덤을 찾은 세 여인이 예수가 부활했음을 알고 두려움에 떤다. 그러나 이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부활을 선포하고, 예수가 기다리는 갈릴래아로 가게 된다. 그림은 코르넬리우스(1783~1867)의 '무덤가의 세 마리아'.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강림한다. 하늘이 갈라질 정도로(마르 1,10) 강력한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내던졌다'(1,12).


마르코복음은 광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지만, 예수가 사탄을 제압하고 들짐승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3). 이는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이사 11,6-9)하고 구약에 기록된 메시아의 왕국이 도래했다는 표지다.


마르코복음에서 광야라는 장소는 대단히 중요하다. 광야는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서 복낙원(復樂園)을 암시한다. 예수가 수천 명의 군중을 먹일 때 광야는 초원으로 변모한다(6,39-40). 이는 이사야서를 비롯한 묵시문학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이 예수 도래와 함께 나타난 성령의 활동 안에서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하고 말한다.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왔지만 여전히 감춰져 있기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믿지 않는 한, 하느님 나라에 관한 어떤 말도 의미가 없다. 하느님 나라와 믿음이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하느님 나라 선포는 공동체가 더불어 수행해야 하는 공동의 소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는 자세다. 예수의 네 제자가 생업과 가족을 포기하고 뒤따랐던 것처럼, 구체적 삶을 통해 실현해야 한다(1,18).


예수가 행한 치유와 구마(驅魔) 행위는 기존 질서와 충돌하는 부분이 많았다. 마귀는 성경에서 인간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둠의 세력인 동시에 공동체의 사회적 시스템, 또는 자연 배후에서 작용하는 세력으로 묘사된다. 때문에 구마 행위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구조적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5장에 기록된 '마귀들과 돼지 떼' 에피소드다. 예수가 마귀 들린 이 앞에 나타나 이름을 묻자 그 안의 더러운 영들이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했다(5,9). 이들은 예수에게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하지만 더러운 영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더니 호수에 빠져 죽는다(5,10??13). 마귀들의 이름을 군대라고 밝힌 것은 로마 군대를 연상시킨다. 이는 백성들을 억압하는 세력이 로마 제국주의 세력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느님 나라는 미래에서 현재로,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현실이 변모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제국주의적 현실과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예수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을 꼽음으로써(12,29), 인간의 궁극적 원리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예수는 성전 앞의 환전상과 비둘기장수를 쫓아내는 성전 정화사건(11,15)을 벌인다. 그리고 성전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기에 파괴되리라고 암시한다(13,2). 또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행위를 금지시킴으로써 제구를 나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는 유혈제사를 비판하고,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11,17). 유혈제사를 대신하는 것으로 자신의 몸을 빵으로 바꾸어 나누는 성찬례가 그리스도교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마르코복음은 후반부에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16,8)고 진술한다. 빈 무덤에서 예수의 부활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이 이를 선포하기보다는 두려워서 스스로 입에 족쇄를 채우고 도망친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1장의 배경인 '광야'에 다시 놓인 것과 같다. 이처럼 마르코복음서는 광야에서 시작해 무덤으로 끝난다. 그러나 광야가 주님이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잠시 준비하는 곳인 것처럼, 무덤 역시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 확인하는 장소로서 거쳐 가는 장소일 뿐이다. 때문에 제자들은 당혹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으로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고, 예수가 기다리는 갈릴래아(16,7)로 향해야 한다.


이는 인간적 좌절과 실패, 두려움을 겪는 우리를 불러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초대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신문, 2013년 4월 7일, 정리=김은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