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르코 복음서 (1)


지난 호까지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소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알아볼 것입니다. 각 복음서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전달하면서도 나름대로 저마다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복음서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복음서만의 독특한 면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자신의 복음서 안에서 소개할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복음의 시작부터 이야기합니다. 마르코 복음서 1장 1절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첫 구절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마르코 복음서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그리고 약속된 메시아인 그리스도로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르코 복음서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아듣기 위해서는 세 가지 역사적 상황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기의 역사적 상황’, ‘마르코가 살고 있던 시기의 역사적 상황’,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역사적 상황’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기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생활하셨던 곳은 팔레스티나 지역입니다. 팔레스티나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하느님께서 약속해주신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차지하여 살고 있던 가나안 지역의 땅을 말합니다. 흔히 이스라엘 땅은 팔레스티나 땅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티나의 경제 구조는 로마 제국의 경제 구조에 강제로 편입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대부분의 농경은 갈릴래아 호수 근처의 갈릴래아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팔레스티나 지역은 사막과 산악지대가 많아서 메마르고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는데 갈릴래아 지방은 다른 곳에 비해서 토양이 기름진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에 점령당하기 전에는 갈릴래아의 토지는 자작농들의 소유였고 자급 농업 방식으로 경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생산물은 물물 교환으로 거래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에 점령되면서부터 팔레스티나에는 새로운 토지 소유 형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대지주라는 제도였습니다. 이는 소수의 대지주가 많은 토지를 소유하는 제도입니다. 그 토지는 땅을 빼앗기거나 갖지 못한 소작인들이 경작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팔레스티나를 통치하던 때에 촌락을 구성하던 사람들의 계층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자유농민, 소작농민, 대지주였습니다. 자유농민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를 갖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생산한 수확물로 이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제국에 로마 화폐로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세금을 내기 위한 현금을 마련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 자신의 생산물을 팔아야만 했습니다. 소작농민들은 대지주에게 고용된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개가 세금을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토지를 빼앗겼고, 그래서 소작인의 신분으로 전락해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유농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부과된 세금을 로마 제국에 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임금 자체가 생활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이농현상이 급속도로 확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대지주들은 넒은 땅과 권력을 차지하며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지주들 대부분이 토지는 많이 소유했지만 생활의 근거지는 예루살렘이나 그 밖의 도회지에 두고 있는 부재지주(不在地主)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회지에서 사는 자기들을 대신해서 토지를 관리하고 농사를 감독하는 지배인을 고용했습니다.


대지주들이나 자유농민들이 소유한 토지에서는 주로 곡물류(옥수수, 콩 등)가 생산되었고 그 밖에 과일(올리브, 무화과, 포도 등)과 채소도 경작되었습니다. 또한 대지주들은 가축을 기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 닭, 비둘기와 같은 가축들을 성전에서 제물로 봉헌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가축들을 파는 시장이 성전에서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티나에서 불결한 동물로 알려져 있던 돼지는 사육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는 농경 촌락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시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새로운 도시들은 소작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 지역으로 옮겨가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개발되기 시작한 도시들에는 기술자 계급이 새롭게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여러 장인(匠人)들이 모여 조합을 이루어 생산품을 만들고 판매하였습니다. 도시, 특히 예루살렘에서 생산된 품목들은 주로 피륙, 모피, 가구, 금은 세공품 등이었습니다. 그 밖에 보석류와 같은 사치품들도 예루살렘에서 생산되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서는 건축 사업도 아주 활발하였습니다. 특히 80여 년에 걸쳐서 예루살렘성전 건축 사업이 계속되는 동안 많은 시민들에게는 성전 건축 공사가 고용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성전 건축이 마무리된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유지하는 일에 고용되었습니다.


*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르코 복음」, 2010, 기쁜소식, 11-17쪽.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7-8월호, 사목국 성서사목부]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르코 복음서 (2)


지난 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기의 역사적 상황 중 팔레스티나의 경제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정치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략해서 팔레스티나를 로마의 속주로 합병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무렵의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였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은 헤로데 대왕 말기로 추정됩니다. 헤로데 대왕은 팔레스티나 남쪽에 있는 이두매아라는 곳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인정을 받아 팔레스티나 전체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위해 자기 가족까지 죽일 정도로 패륜아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지략은 아주 뛰어나서 그 당시 팔레스티나는 겉으로나마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번창했습니다.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자 자유를 간절히 바라던 백성이 유다, 베로이아, 갈릴래아 등지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소요들은 시리아의 로마인 총독 바루스에 의해 곧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팔레스티나는 세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헤로데 대왕의 세 아들인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필리포스가 로마에 의해 각각의 영주로 책봉되어 다스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기에 갈릴래아를 다스리던 사람은 헤로데 안티파스였습니다.


예수님의 재판과 죽음에 관련되어 있는 본시오 빌라도는 기원후 25년부터 35년까지 이 지역의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유다 안에서 로마 총독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중요한 일은 모두 그들의 법정에서 다루어졌는데, 특히 그들은 생사를 좌우하는 권한을 쥐고 있었고 그들이 내린 언도는 군사들에 의해 집행되었습니다.


이처럼 팔레스티나는 로마의 속국이 되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이곳 주민인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최고 의회(대 산헤드린)를 통해서 어느 정도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은 최고 의회에서 결정한 사항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최고 의회는 대사제가 의장을 맡았고 71명의 의원들이 있었습니다. 최고 의회는 종교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적 기능으로는, 신학적인 학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최고 의회에서는 유다교의 교의(敎義)를 정하고 예식에 관한 일정표를 세웠으며 모든 종교 생활을 감독했습니다. 정치적 기능으로는, 율법을 의결하고 자체 경찰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로마 정복자와의 관계를 조정했습니다. 하지만 사형 언도의 경우에는 로마 당국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최고 의회가 로마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받았지만 결정적인 권한은 로마에게 있었기 때문에 최고 의회의 의장인 대사제마저 로마 권력층과 결탁하여 지내는 병폐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대사제는 카야파였지만, 그 이전의 대사제이자 카야파의 장인인 한나스가 계속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최고 의회의 정치적 역할은 훗날, 제1차 유다 항쟁의 실패로 기원후 70년경 끝이 나게 됩니다.


최고 의회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회합을 가졌는데 성전은 유다인들의 삶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다인들은 매일 성전에서 번제를 드렸고 희생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성전에서 기도를 했으며 일년에 세 차례, 아니면 적어도 파스카 축제 때는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또한 팔레스티나의 모든 유다인들은 성전 건물을 관리하고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을 대기 위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또한 성전 안에서는 티리쉬(Tyrisch)라는 화폐만이 통용되었기에 성전에 와서 헌금을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은 상당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유다인들은 압제자 로마의 지배 밑에서 각종 세금을 바쳐야 하는 등 착취를 당하고 있는데다가 사두가이를 비롯한 유다 지배 계층에게 억눌려 있었습니다. 또 성전세와 십일조 등으로 시달렸기에 몹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정치와 사회 상황에 놓여 있던 유다인들이 로마의 압제나 온갖 억압에서 자신들을 구해줄 정치적 인물을 기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치적, 물리적 권세를 지닌 메시아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모든 억압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해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르코 복음」, 2010, 기쁜소식, 17-21쪽.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9월호, 사목국 성서사목부]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르코 복음서 (3)


이번 호에서는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종교 집단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의 유다인들은 모두 하느님을 믿는 같은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그 당시 사회에는 다양한 정신적 흐름들이 있었고 여러 종교적 당파들도 있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집단으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 사두가이들이 있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은 무엇이었는지, 이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이들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등을 살펴본다면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들을 알면 예수님께서 왜 그들과 논쟁을 벌였는지, 왜 그들이 예수님께 적대감을 갖고 있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율법의 전문가들로, 고도의 교육과 훈련을 받고 양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배워 익힌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힘과 권위를 누렸으며, 최고 의회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율법 학자들 중에는 바리사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로는 보수를 받을 수 없었고 제자들이 내는 돈과 성전에서 지급되는 의연금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율법 학자들이 주로 하는 일은 율법을 이론적으로 더욱 발전시키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율법을 실제로 적용하고 집행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복음서에서 주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일 때 많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육체의 부활, 영혼 불멸, 마지막 심판, 천사의 존재 등을 믿었고, 인간이 하느님의 의지를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성문화된 히브리 성경과 구전되는 전승을 둘 다 인정했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구분하고 분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자처하며 자기들의 우월함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을 순수한 유다인 혈통이 아니며 거룩하지 못하다고 비난하면서 그런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분하였습니다.


사두가이들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들은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영혼의 불사불멸, 육체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두가이들은 오경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믿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 새로운 계시는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바리사이들이 받아들인 구전 전승을 인정하지 않고 성문화된 성경(오경)만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원래 통치 계급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부유한 지주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정복자 로마에게 자발적으로 협조했고 정치와 종교에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율법을 극도로 보수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입니다.


그 외 집단으로는 에세네파, 열혈당원들, 헤로데 당원들이 있습니다.


에세네파는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들은 사해 근처 사막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단순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수도자나 은수자들처럼 생활하면서 재산을 공유하고 공동으로 식사를 하며 정결을 지켰습니다.


열혈당원들은 엄밀히 말해 종교 집단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신앙 내용에서는 바리사이들에 동조했지만, 무장 투쟁을 통해 민족주의를 이루려했습니다. 폭력도 불사한 이들의 일차적 공격 대상은 압제자인 로마였지만, 로마뿐만 아니라 미온한 태도를 보인다고 판단되는 동족들도 이들의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헤로데 당원들(마태 22,16; 마르 3,6. 12,13)은 헤로데 왕가의 통치를 지지했습니다. 따라서 로마에 호의적이었던 유다인들입니다. 이들은 영향력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한 이들은 바리사이들과 함께 예수님을 없애기로 모의하기도 했습니다(마르 3,6).


이러한 종교 집단들은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이나 사회, 정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편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에서 중심이 되었던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는데, 이에 버금가게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에 중요한 장소가 된 곳이 회당입니다.


회당은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회당은 각 유다인 공동체의 중심이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회당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기도 장소로서의 기능이고 또 하나는 교육 장소로서의 기능입니다.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은 회당에 모여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바쳤으며 율법을 배우고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르코 복음」, 2010, 기쁜소식, 21-24쪽.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11월호, 사목국 성서사목부]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르코 복음서 (4)


이번 호에서는 마르코 복음서 시대의 팔레스티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마르코 복음서가 기원후 65-70년 사이에 마르코라는 사람에 의해, 로마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해 쓰였다고 봅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막강한 힘을 행사하며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소아시아 지방까지 정복하여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팔레스티나 지역은 경제적 상황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정복한 땅에서 전리품을 약탈하고 다양한 명목을 붙여서 세금을 거두어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인 상황은 로마를 점점 소비 도시로 만들어 갔으며, 그 결과 로마의 권력자들과 상인들은 더욱 경제적인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상인들과 농부들은 외국 다른 식민지들로부터 많은 수입품이 들어옴으로써 생계의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토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살던 지방을 떠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속속 로마로 몰려들었지만 쉽게 일자리를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로마는 인구 과잉의 도시가 되었고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빈민가들이 도시 전체로 확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부자들과 빈민들의 관계는 날카로운 대립 관계로 치닫게 되었고, 현실의 고통스러운 조건 속에서 살아야 하는 다수의 빈민들은 자연스럽게 로마 제국에 원한의 감정이 깊어갔습니다.


이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의 정치적 상황 역시 로마의 영향 하에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군사 독재 정권이 통치하는 국가였으며 이 군사 독재 정권의 통수권자는 군대의 최고 사령관인 황제였습니다. 본래 로마를 다스리는 권력은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대표들이 공유하던 것이었으나 결국에는 황제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입니다. 황제는 권력을 유지하고 안전하게 보전하기 위해서 황제만이 최고의 권력을 갖는 새로운 관료 정치 제도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원로원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황제들은 정권을 유지하고 백성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희생시키기도 했습니다. 기원후 64년 로마에 엄청난 화재가 일어나서 거의 대부분의 구역을 휩쓸고 갔는데 그때 로마 황제 네로가 그 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희생양을 찾고 있던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죄를 덮어씌웠습니다. 그래서 네로 치하에서 로마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잔혹하게 박해 당했습니다.


로마의 지배 계층으로서 부와 권력을 누리던 원로원의 귀족들이, 이제는 황제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에 술과 쾌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로마의 다신론(多神論) 종교도 더욱 부패하여 백성들의 호응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동방의 새로운 종교들이 대중 속으로 들어와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종교들은 특히 토지를 갖지 못한 소작인들과 실직한 해방 노예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닌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대두되었으며 이들에게서부터 점점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마르코 복음서가 집필됩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두 번째 복음서의 집필자는 사도 베드로의 통역관이었던 마르코라고 여겨집니다. 베드로의 통역관이었던 마르코가 베드로의 증언을 기반으로 하여 복음서를 집필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서의 사도적 권위는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인정되어 왔습니다. 마르코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측근에서 상당한 신임을 받으며 복음 선포에 전념했을 것이고, 두 사도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자기 복음서를 썼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밖 로마에서 집필된 마르코 복음서는 자연히 이방인에게 선교하는 것을 우선 목적으로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내용이 나오고, 유다인들의 관습을 설명하고 이방인들의 생활상까지도 참작해서 쓴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묘사하여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특징은 목격 증인의 이야기들을 마르코가 하나하나 자세히 열거하여 전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마르코 복음서가 제시하는 중요한 관점은 메시아의 비밀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비밀은 마르코 복음서의 중요한 주제였으며, 마르코는 이 주제를 부각시키면서 자신의 복음서를 전개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정체는 그분의 지상 여정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고발되어 마침내 처형을 당하게 되는 그 상황에 가서야 비로소 메시아로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이러한 주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 십자가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수행해야 할 봉사와 고통의 참된 의미를 강조합니다. 이는 또한 마르코 복음서가 그 대상으로 하는,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직면한 박해의 고통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르코 복음」, 2010, 기쁜소식, 25-30쪽.


[길잡이, 2012년 12월호, 사목국 성서사목부]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르코 복음서 (5)


이번 호에서는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중 ‘권위를 가지고 치유하는 예수님’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마르1,21-28)


마르코 복음서는 마태오나 루카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시기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세례자 요한의 활동 이야기로 시작합니다(마르 1,2-8 참조). 예수님에 대한 첫 소개는 세례 받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앞으로 행할 복음 선포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승인을 받으십니다(마르 1,9-11 참조). 그리고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부터 복음 선포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는 말로 예수님의 선교 내용을 요약합니다.


그 뒤로 카파르나움에서의 예수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마르코 복음서 1장 29-39절을 일컬어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고 하는데, 이 부분은 마르코가 몇 가지 단편 자료를 모아서 의도적으로 편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 낮에는 회당과 집에서, 저녁에는 문 앞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에는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고 이어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들을 쫓아냅니다. 이처럼 마르코는, 우선 예수님의 일과를 서술하면서 장차 그분이 어떻게 활약할 것인지 미리 알려줍니다. 이번 호에서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일으킨 치유 기적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마르 1,21-28)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에는 유다인 가정이 열 세대만 있어도 반드시 회당이 있어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사는 곳에는 대부분 회당이 있었습니다. 회당은 종교 생활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의 모든 생활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면 회당이야말로 설교하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습니다. 예수님 역시 새로운 메시지를 이 회당에서 선포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회당에서 가르치는 일을 주도적으로 한 사람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른 유다인 남자면 누구나 회당장의 요청으로 성경을 읽고 설교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회당에 모였을 때 말하고 해설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을 지명하는 권한은 예배 준비를 책임지는 회당장에게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께서 안식일 예배 때 회당에서 가르쳤다는 사실은 그분이 가르치는 능력으로 이미 명성을 얻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23절부터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마주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악령은 ‘더러운 영’이라고 불리는데, 성경에서 더러운 것이란 거룩한 것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여기에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더러운’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는 단순히 치유 기적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다는 말은 귄위 있는 행위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분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22절). 그리고 곧이어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하심으로써 권위 있는 행위를 보여주셨습니다(25-26절). 이러한 예수님의 권위 있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표징의 의미를 파악하고 당신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일시적인 도움만을 받으려고 예수님을 계속 찾아 나섰습니다(1,37 참조). 치유 행위 그 자체가 예수님의 최종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르코에 의하면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분명히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혹시 우리도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필요를 위해서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르코 복음」, 2010, 기쁜소식, 46-59쪽.


[길잡이, 2013년 1월호, 사목국 성서사목부]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르코 복음서 (6)


이번 호에서는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중 ‘병자를 고치며 죄를 용서하는 예수님’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마르 2,1-12)


우리는 지난 호(마르코 복음 첫 장)에서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통치가 이미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온전함과 건강을 회복시켜 하느님의 구원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권위를 가지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모습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죄를 용서하시면서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통치가 이미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1-12)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의 집에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께 몰려듭니다. 이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치유를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그 구멍으로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장애물(군중)을 극복한 이들의 믿음을 좋게 보셨을 것입니다. ‘믿음’은 마르코 복음의 기적 이야기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보통 믿음이 기적에 앞서 요구됩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을 굳게 믿고 예수님의 인격에 자신을 조건 없이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굳은 믿음으로 그분 앞까지 다가온 병자에게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이 나았다고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죄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치유 이야기 한가운데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연스럽지 않게 왜 갑자기 치유 이야기 가운데 사죄 선언이 나오는 것일까요?


아마도 예수님의 사죄권에 대한 이야기는 후대의 어느 전승자가 집어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전승자가 사죄권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 집어넣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대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죄권을 행사했었는데, 유다인들이 이것에 대해 신성 모독이라며 비난을 했습니다. 이에 마르코 복음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확증해 보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치유 기적 이야기에 예수님의 사죄권에 관한 논쟁 이야기가 섞여 하나의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사죄권에 대한 논쟁은 죄로 말미암아 병이 생긴다고 생각한 유다인들의 사고방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병자를 죄인으로 취급했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병자가 모세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당시 유다인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며 그것도 저 세상에서나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감히 예수님이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을 했으니, 유다인들에게 이 말은 곧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율법 학자들은 이 말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성 모독은 사형을 받을 만큼 큰 죄에 속했으므로 그 파장이 더욱 컸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에 의하면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병이 낫지 않아야 하는데, 병자는 병이 나았습니다. 그는 죄를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2장 1-12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모습은 구약 시대 사람들이 생각해 왔던 엄격한 심판자로서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를 짓고 멸망하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하여 다시 구원받기를 바라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나약한 죄인이지만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즉 그분의 가르침과 계명을 따름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 나라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르코 복음」, 2010, 기쁜소식, 71-85쪽.


[길잡이, 2013년 2월호, 사목국 성서사목부]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르코 복음서 (7)


이번 호에서는 마르코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중 ‘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마르 2,13-17)


예수님께서는 공적인 직무를 시작하는 초기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는 장면들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 자기 일터에서 부르심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일하는 고유한 상황에서 당신의 사람들을 찾고 부르십니다. 마르코 복음서 1장에서는 호숫가에서 네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가 나오고(마르 1,16-20), 2장에서는 다시 호숫가를 지나가는 길에 ‘레위’라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마르 2,13-17). 이번 호에서는 ‘레위’라는 사람을 부르시는 이야기를 통해 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는 이야기와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이야기는 공관 복음서에서 공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르코의 관심은 ‘레위’라는 특정 인물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어떤 특성이 있는지에 관심을 보입니다.


이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 당시 세리라는 직업이 어떤 것이었고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로마 제국이 거두어들이는 세금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조세, 관세, 인두세, 토지세, 통행세, 시장세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세금은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이 민중의 반응을 고려하여 유다인 세금 대납업자가 걷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을 세리라 하는데, 이를테면 이들은 로마의 유다인 청부업자인 셈이었습니다. 이들은 수많은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흔히 수탈을 자행했기 때문에 유다인들에게는 굉장히 증오를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유다 사회는 세리를 사기꾼이나 도둑 같은 부류로 취급했습니다. 그들은 동족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배신자로 낙인찍혔고,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도 미움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세리들은 유다 사회 공동체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그렇게 증오와 멸시를 받는 세리 가운데 한 사람을 자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義)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고, 세리들에게서 착취를 당하는 가난한 평민들의 입장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선택하고 부르시는 이야기를 통해,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어떻게 은총을 베푸시는지 알려주기 시작합니다.


한편 유다인들에게는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우정과 존중을 크게 표시하는 일이었습니다. 또 유다인들은 식탁의 축복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축복이 아닌 저주를 받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부정을 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식탁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식탁에서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에 대해 불평한 것입니다. 세리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고, 여기서 말하는 죄인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도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죄인들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걸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계명을 명백하게 지키지 않는 부도덕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누구나 경멸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 이익만 취하는 데 혈안이 된 부정직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두 부류를 하느님의 구원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 세리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는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의 눈에는 율법을 거스르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하나가 되어 어울려 스스로를 불결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과 함께 기존 사회 이념을 수호할 입장에 있어야 할 예수님께서 그러지 못하신 데에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아주 잘 해석하는 선생으로 여겼습니다. 이 선생이라는 사람이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으니 그것이 그들에게는 불명예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위협에 간단하고도 자명한 답변으로 맞서십니다. 곧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대답입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사명감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의인이라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참다운 의인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인이라고 말하는 율법 학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보다는 자기 자신의 정의에 만족하여, 결국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르코 복음」, 2010, 기쁜소식, 95-109쪽.


[길잡이, 2013년 3월호, 사목국 성서사목부]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르코 복음서 (8)


이번 호에서는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중 ‘그리스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예수님’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마르 8,27-33)


마르코 복음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자렛 예수님, 그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정체는 복음서 초반에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복음서 초반에는 예수님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이 소개됩니다. 1장 27절에서는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악령 들린 사람을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놀라서 수군거립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2장 7절에서는 카파르나움에서 중풍 병자에게 죄를 용서한다고 권위 있게 선언하는 예수님을 보고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신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4장 41절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호수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물음이 제기됩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이렇듯 복음서 초반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한 판단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확고한 신앙 고백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말씀을 선포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에게 경탄이 쏟아지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에 대해 여전히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결정적 대답은 바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고백에서 나타납니다.(마르 8,27-30 참조) 이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 전체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길을 가는 중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에 관해 의견이 분분했던 토론을 마감시키시려고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십니다. 군중의 분분한 여론은 예수님의 정체가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못했다는 당시의 상황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군중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알리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에 한층 다가섰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초대교회 신앙 고백문의 단순한 형태입니다. 마르코는 이러한 초대 교회의 고백을 복음서 안에 반영시켰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은 복음서 첫머리부터 마르코가 줄곧 염두에 두었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마르코가 복음서를 집필하게 된 동기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잘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람들의 반응을 따라 복음서를 읽어오다가 베드로의 고백 장면에 이르러서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함께 하게끔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 사화뿐만 아니라 수난과 부활 사건까지 실현된 후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로마의 지배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 곧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구원을 가져다 줄 왕을 간절히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가 소개한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이 바라는 해방자로서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이곳에 사용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이사야가 묘사해 주는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마르코는 해방자인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다인들의 잘못된 메시아 상(像)을 바로잡아 주려고 합니다. 한편 초대 교회에도 박해의 위험에 처해서 신앙을 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코는 영광의 그리스도도 십자가의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생겨날 수 없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붙들고 펄쩍 뛰는 베드로의 모습은 고난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초대 교회 신자들의 갈등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로 고백해야 하며, 따라서 수난과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얻게 된 메시아를 본받아 고통과 박해를 이겨내고 하느님의 영광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르코 복음」, 2010, 기쁜소식, 121-136쪽.


[길잡이, 2013년 4월호, 사목국 성서사목부]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르코 복음서 (9)


이번 호에서는 마르코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중,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밝히는 예수님’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마르코는 이미 정답을 서두에서부터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 참조)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이런 질문은 다양한 관점으로 전개됩니다. 악령을 해방시키는 모습, 권위 있는 가르침, 그리고 메시아 정체성이 결정적으로 확인되는 부분이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27-33)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했던 장소적 배경에 대해 살펴봅시다.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BC 2세기, 황제에게 바쳐진 도시입니다. 헤로데 필리포스가 충성심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영어로 씨저입니다. 씨저를 왕으로 고백하는 도시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질문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사람들의 의견을 전달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는 전설적인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깨끗하고 의로운 삶으로 회개를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야는 기적의 힘으로 수백 명 바알 예언자를 꺾었습니다. 사람들 이미지 속 예수는 이미 훌륭한 사람입니다. 공자님, 부처님, 소크라테스님처럼 위대한 현자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그냥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직접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다른 사람 목소리, 소문이나 풍문이 아닙니다. 우리들 자신의 대답을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인간 정도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가 똑똑해서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계시된 진리에 통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성령의 힘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메시아의 비밀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가벼운 말로 구원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려면 삶이 필요합니다. 모욕과 아픔, 십자가 수난이 꼭 있어야 합니다. 완전히 죽고 다시 완전히 살아나셔야 합니다. 고통과 생명을 성취한 삶 안에서만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성공으로 미화된 메시아입니까? 밥벌이를 성취시키는 현세의 왕입니까? 내 인생에 상처와 아픔은 있어서는 안 됩니까? 수난과 고통은 정말 절대 안 되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곧 제자들의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르코 복음」, 2010, 기쁜소식, 121-136쪽.


[길잡이, 2013년 5월호, 사목국 성서사목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