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1) 마르코 복음서 입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이방인들에게 선포


이번 호부터 평화방송 TV 강좌 '윤일마(성 바오로딸 수녀회)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연재를 통해 독자들을 살아 숨 쉬는 신앙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는 기존의 해설과 지식 위주의 성경 강좌에서 벗어나 함께 성경을 읽으며 주요 상황에 맞는 그림과 모형, 지도를 통해 성경을 완전히 이해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 마태오 복음사가를 비유하는 사람 그림(왼쪽 상단), 요한 복음사가를 비유하는 독수리 그림(오른쪽 상단), 루카 복음사가를 비유하는 황소 그림(왼쪽 하단)과 마르코 복음사가를 비유하는 사자 그림.


성경을 읽고 쓰고 공부하면 예수님과 함께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감사해야할 일이 많았음을 보게 된다. 하느님과 만나는 여정을 시작하겠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구약의 주인공은 하느님이시다. 구약에는 아브라함, 모세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조연자다. 신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다. 구약의 주제는 계약, 신약의 주제는 부활이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며 창세기가 처음 쓰인 시기는 기원전 10세기 중반이고 마지막 요한묵시록이 쓰인 시기는 기원후 95년경이다.


성경은 하느님 말씀이 들어 있는 신앙의 진리가 담긴 책이다. 성경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수를 전해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처음에 나오는 역사는 원역사다. 원역사에는 태고사와 성조사가 있다. 태고사에는 천지창조, 노아의 방주와 바벨탑 이야기가, 성조사에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요셉의 이집트 생활까지 나온다.


탈출 시대는 성경에서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는 시나이 계약이 들어 있는 탈출 19~40장이 가장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을 통해 모든 민족 가운데 하느님의 소유가 된다. 거룩한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약을 맺는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가나안으로 입성하며 판관 시대가 시작된다. 판관 시대는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 200년 동안 지속된다. 판관 시대가 끝나면 왕정 시대가 도래한다. 판관 시대가 끝나서 왕정 시대가 온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건만, 백성이 자기들에게 왕을 달라고 하자, 하느님이 허락주시어 왕정 시대가 시작됐다.


첫 번째 왕은 사울, 두 번째는 다윗, 세 번째는 솔로몬이다. 가장 위대한 왕은 다윗이다. 다윗은 메시아의 가문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왕이 죽은 후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갈라진다. 북부 이스라엘은 B.C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다. 남부 유다는 B.C 587년 바빌론의 유배라는 아픔을 겪는다. 멸망과 유배의 근본 이유는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남부 유다가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기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많은 예언자가 출연한다. 성경에서 첫 예언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는 모세와 엘리야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했으며, 유다 전승에서 보면 모세는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들은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도 나온다. 타볼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이 변모하실 때에도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한다. 묵시문학에서는 메시아가 오실 때에는 분명히 모세와 엘리야를 대동할 것이라고 한다.


예언자가 북부이스라엘에서 활동했는지, 남부 유다에서 활동했는지, 또 바빌론 유배 전에 활동했는지, 유배 기간 동안에 활동했는지, 유배 이후에 활동했는지를 구분하면 정확한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키루스 황제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 나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은 사람도 있고, 제3국을 선택해 떠난 사람도 있다.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들은 고향에 가면 잘 살 줄 알았는데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출연한 예언자들이 성전을 지으라고 한다.


예언의 시대가 끝나고 재건 시대가 시작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잘 살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독립된 국가로 살아본 적이 없다. 메시아가 와서 구원해줬으면 좋겠다는 갈망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이집트를 탈출해 홍해를 건널 때 마른 땅을 밟고 건너게 해 준 메시아다. 지금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그 메시아가 와서 우리를 구해줬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갖는다. 그러나 메시아는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고, 배척을 당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다. 복음은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네복음서가 있다. 마르코가 가장 먼저, 요한이 제일 마지막에 쓰였다.


이스라엘은 유다와 갈릴래아, 사마리아로 나눠져 있다. 유다는 예수님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지역, 갈릴래아는 예수님이 성장하고 선교를 시작한 곳이다. 마르코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1장 14절~10장 45절까지 갈릴래아에 사셨다. 10장 46절부터 시작되는 수난과 죽음, 부활의 무대는 유다 지방이다.


사마리아는 유다와 갈릴래아 사이에 있는 곳이다. 사마리아인들은 722년경 아시리아에 의해 패망한 후 그때 남아 있던 유다인과 이방인의 후손들이다.


마르코ㆍ마태오ㆍ루카 세 복음서는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이뤄진 예수님의 공생활과 부활을 비슷한 시각으로 다루었다 해서 공관복음서라고 한다.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바라보는 시각이 같다는 의미다.


마르코복음서는 십자가 수난으로 세상을 구원한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마르코복음서는 이방인을 위해 쓰였다. 마르코는 이방인에게 나자렛 사람은 이스라엘 한 민족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려 오신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23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2) 빛의 자녀로 다시나기


세례, 죄에서 벗어나 생명의 삶으로


- 조반니 벨리니 작 '그리스도의 세례'.


우리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를 살펴보겠다.


마르코복음서에서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라 말한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통해서 하늘나라로 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회개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하신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였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이기에 초대하셨을까.


구약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 가나안 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며, 하느님의 땅도 거룩하다. 이 땅에 들어가는 사람도 거룩함이라는 자격을 갖춰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낸 세월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정화의 시간이었다.


하느님 나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곳도 거룩한 나라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갖춰야 할 합당한 자격이 필요하다.


요한 세례자는 그것을 회개라고 말한다. 요한이 말하는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잘 살겠다는 결심으로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용서와 은총을 받게 된다.


죄를 지었다는 것은 '더럽혀졌다' '상처 입었다' '얼룩이 졌다' '부정해졌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처음 죄를 지었을 때 후회막급하며 죄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죄의 얼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 줄 모르고 산다.


우리가 죄의 상태에 있을 때는 나와 내가 만나지 못하고, 나와 이웃이 만나지 못하고, 나와 하느님이 만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를 나와 나, 나와 이웃, 나와 하느님을 분리하고 이간질하는 것은 사탄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일치이지만, 사탄이 하는 짓은 분열이다.


요한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8)라고 했다.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물의 세례,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는 성령의 세례다.


세례는 더럽혀지고 얼룩진 것을 씻어내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한다. 세례받았을 때를 기억하며 교리문답에 답해보자.


"세례란 무엇입니까?"

"씻는 것입니다."


"무엇을 씻습니까?"

"죄를 씻습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죄에는 원죄와 본죄가 있습니다."


"죄를 씻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4 참조)으로 살아가야 한다. 촛불처럼 자신을 태우고, 녹일 때 세례의 삶을 살 수 있다. 세례의 삶은 '내가 먼저 타고, 내가 먼저 녹는 삶'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음에도 세례를 받으러 나자렛에서 요한이 있는 요르단 강으로 가셨다. 예수님이 죄도 없으시면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의 세례는 죄를 뉘우치거나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죄와 허물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우리와 함께 있음을 가르쳐주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하기 위해 오셨음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복된 삶으로 초대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은총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장차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실 그리스도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성령이 예수님을 통해 내려오셨다는 것은 성령의 힘으로 메시아의 사명을 실현할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요르단 강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임을 이야기한다. 예수님이 하느님 뜻에 따라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실 메시아시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표징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이 표징은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모든 이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예수님의 세례는 죽음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삶을 체험하는 것이다. 죄의 상태는 죽음이다. 용서를 받고 새롭게 살아갈 때 생명의 삶을 체험할 수 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


생명으로 초대됐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하루하루 힘차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세례의 삶을 살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한다. 세례를 받은 사람의 힘이다.


세례 때 사진을 보며 세례받은 동기를 생각해보자. 세례받을 때 인도해준 고마운 분들을 떠올려보자.


세례는 하느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30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3) 사랑의 고리


서로 구원의 길 밝혀주는 등불이 되자


-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예수 그리스도'. 지거쾨더 신부 작.


오늘 우리는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만난다(마르 2,1-12).


로마제국의 속국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이 주시는 참 평화와 행복 속에 사는 새 시대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새 시대는 예수님이 선포하고 계신 하느님 나라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흠 없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의롭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구원받을 자격의 기준으로는 가장 먼저 죄와 허물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졌다. 죄와 허물은 나와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고 영원한 죽음, 곧 파멸의 길로 가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앞에서 사랑으로 죄를 용서받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병든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관습이 있었다. 죄 때문에 하느님의 징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치병을 치유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는 징표였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이 따라다녔다. 악령이 들린 사람을 비롯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많았다.


예수님이 카파르나움에 있는 어느 집에 머무르실 때 일이다. 군중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다. 군중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 말씀을 듣고 있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메마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가르쳐주셨다. 그런데 네 사람이 몸이 말라 비틀어진 중풍병자를 들것에 싣고 왔다.


중풍병자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마음도 굳어 있는 상태였다. 네 사람은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중풍병자를 내려보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아니시면 누구도 이 중풍병자를 구원할 수 없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집의 지붕은 간단히 걷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 명은 우리에게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준다. 성경에 나오는 넷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숫자이며, 동서남북 사방을 가리킨다. 이들이 중풍병자를 도와줌으로써 병자가 낫게 됐다. 이들의 믿음은 다른 사람을 주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불같은 것이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장면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많은 경우 병자를 들것에 실어 오거나 누군가가 업고 오는 등 이웃의 도움을 통해 예수께 왔다.


마르코복음서 5장에서는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와서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마태오복음서 8장에서는 백인대장이 병든 종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한다. 이 마음은 병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사랑의 마음이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은 주님을 감동시킨다.


네 사람은 치유와 은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줬다. 예수님은 기적을 보여주셨고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말씀하셨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불신했다. 불신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예수님의 구원도 통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한다. 불신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 앞에 벽을 쌓는 행위다. 이는 마치 누군가를 신뢰하고 믿으면 그의 모든 일에 협력할 수 있지만, 믿지 못하면 그 사람의 좋은 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 가라"고 말씀하셨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큰 자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들의 권한을 갖고 용서해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힘을 보여주셨다. 많은 사람이 하느님 권능을 목격했다.


중풍병자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구원을 향해 나아가도록 등불 역할을 해줘야 한다. 묵주반지를 낀 가톨릭 신자들을 보면 사람들은 그 사람은 이미 선을 베풀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네 명의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 중에도 그런 삶을 사시는 분이 계실 것이다. 우리 각자도 복음서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네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경제적으로 힘들 때, 병고에 시달리고 있을 때, 취직이 안 돼 힘들었을 때,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을 때, 갖가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나를 그 상황에서 구해준 사람은 누구인지, 10대부터 60대에 이르는 현재까지 각 시기마다 도움을 준 아름다운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평화신문, 2013년 7월 7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4) 예수님의 참 가족(마르 3,31-35)


하느님 뜻 실행하는 모든 이가 형제이며 자매


- 신앙으로 맺어진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다. 사진은 2010년 8월 주교회의 청소년사목위원회가 주최한 제2회 한국청년대회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돼 한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청년들. 평화신문 자료사진


가족 하면 사랑, 따스함, 편안함, 엄마 냄새 등이 떠오른다. 가족은 내가 살아갈 에너지를 준다.


아버지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하셨다. 내가 첫 서원하던 날 아버지가 시를 써주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일기장에 '오늘은 일마가 수녀원에 들어간 지 몇 일 되었다' '오늘은 일마가 수녀원에서 밥을 몇 끼 먹었다' '일마가 휴가를 나오기 몇 일 전이다' 등을 다 적어두셨다.


휴가를 갔다가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날에는 아버지가 수녀원 대문까지 배웅해 주셨다. 내가 수녀원 대문에 발을 들여놓으면 아버지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셨다. 내가 뒤돌아보면, 아버지는 수녀원 앞 굽은 골목에 있는 전봇대 옆에 서서 내 뒷모습을 보시곤 했다. 아버지는 울고 계시기도 했고, 우리는 마주 보며 웃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께서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가족은 정말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


성경에서는 가정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다. 남편과 아내, 자녀, 그들이 거느리는 종과 종의 가족이 한 가족을 형성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혼자가 된다는 것은 공포 중 하나였다. 혼자가 된 이웃을 가족으로 거둬들이는 게 풍습이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 가족은 무엇을 뜻할까.


예수님은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셨다. 마르코 3장 8절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래아에 계실 때 갈릴래아 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다. 유다, 예루살렘, 이두메아 지역,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도 많은 사람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까. 예수님은 고을을 찾아 다니며 부자와 가난한 사람, 손가락질받는 죄인, 율법학자 등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나셨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하셨고 이야기를 들으셨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웅크렸던 마음을 폈다. 찡그린 얼굴에서 미소가 번져 나왔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미움을 용서로 바꾸고, 가족 중심의 이기심을 이웃과 나누는 마음으로 바꿨다. 상처 때문에 힘들었던 마음이 치유됐고, 저주와 분노는 감사와 찬미로 바뀌었다.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을 통해 소문이 금방 퍼졌다. 그러자 예수님을 시기하는 무리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하느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등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은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벼르면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사탄의 힘이라고 여겼다.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나자렛까지 퍼졌다. 나자렛에 사는 예수님 친척과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 마리아는 오해와 시기, 질투로 둘러싸인 아들이 걱정돼 아들을 찾아간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당당하게 이들을 꾸짖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리아는 사람을 불러 "엄마가 왔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어머니와 형제라고 선포한 사람들은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이들이다. 하느님 뜻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은 바로 어머니,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카나 혼인잔치에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할 만큼 아들에게 순종했다. 마리아는 진정한 예수님의 형제이자, 누이이며 어머니임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신앙으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모범으로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 기회에 가족의 의미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다.


당시 제자들에게 신앙으로 맺은 가족은 혈연을 뛰어넘는 가족이었다.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신앙의 유대로 맺어진 가족임을 깨닫는다. 혈연으로 맺은 가족은 생활방식과 습관, 생김새가 비슷하고, 신앙으로 맺은 가족은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모습이 같다.


예수 그리스도 속죄의 피로 맺어진 신앙 가족의 관계에서 우리는 한 가족이다.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산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됐다는 자부심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혈연 가족을 생각해 보자. 엄마인 나 때문에, 아버지인 나 때문에, 시어머니인 나 때문에, 며느리인 나 때문에, 아들인 나 때문에, 딸인 나 때문에, 아들인 나 때문에 가족이 분노를 느끼고 슬퍼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 때문에 아파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로 인해 다시 웃고, 나로 인해 다시 행복을 되찾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하자.


성당에서 평소 인사를 잘 하지 않고 지나친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미소를 건네자. 우리 모두 예수님의 참 가족으로 열심히 살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성가정을 이루도록 함께 기도하면 좋겠다.


[평화신문, 2013년 7월 14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5) 마음의 밭(마르 4,19)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진리 선택하는 힘 길러야


- 씨앗은 하느님 말씀이며, 땅은 우리의 마음이다. 씨앗을 잘 받아들이는 땅이 있고 그렇지 않은 땅도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하나는 새가 쪼아먹고, 다른 하나는 돌밭에 떨어져 햇빛에 말라 죽었다. 또 하나는 가시덤불에 떨어져 숨이 막혀 죽었다.


우리는 농부가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알아들으려면 먼저 이스라엘의 농사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겨울에 비가 내리고 여름은 고온건조한 지중해 기후다. 가을에 우기가 시작돼 농부들이 씨를 뿌리러 나간다. 수확이 끝나면 더위가 시작된다. 파종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루를 메고 나가서 바람이 부는 대로 씨를 날려보내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 농사지을 때는 잡초와 돌을 다 제거하고, 고랑을 내어 씨나 모종을 심고 흙으로 덮은 다음 물도 주고 거름도 주지만 이스라엘에 돌이 너무 많아 쟁기질을 할 수가 없다. 바람에 날아가는 씨는 여기저기 흩어진다. 돌밭에 떨어지기도 하고 길가나 가시밭, 좋은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


두 번째 방법은 씨를 담은 자루를 나귀 허리에 얹어 고정시킨 뒤 나귀를 돌아다니게 하면서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이다. 씨가 어디에 떨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농부도 모른다. 농부들은 좋은 땅과 나쁜 땅을 가릴 수가 없다. 씨를 뿌리고 본다.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는 농부는 씨를 뿌려야 많은 소득이 생긴다는 것을 알기에 씨를 뿌리러 나간다.


여기서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에 비유된다. 예수님도 이스라엘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에 있는 호숫가에 계셨고,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예수님이 군중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셨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말라버리고, 어떤 것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씨를 받아들이는 땅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셨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까지 주셨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예수님의 비유는 쉽고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열고, 뜻을 깊이 새기지 않으면 말씀의 뜻을 깨닫기 어렵다.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고 하셨다. 비유는 가르침을 쉽게 전한다. 하지만 믿음이 없고 교만한 이들은 참뜻을 알지 못한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흙과 씨앗에 관한 이야기다. 씨앗이 최고 품종이라 해도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땅이다. 씨앗은 하느님 말씀이며, 땅은 우리 마음이다.


길에 떨어진 씨앗은 하느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의 마음에 비유된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하느님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 자신도 모르게 점점 어둠으로 가지만 어둠인 줄 모른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시련과 위기, 고통이 다가오면 금방 넘어지는 사람들 마음에 비유된다. 피정하러 가서 기쁜 마음으로 많은 계획을 세우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기쁨 중에 세운 새로운 계획은 사라진다. 이는 마음속에 믿음의 뿌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뿌리를 예수님 안에서 깊숙이 내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위기와 아픔, 고통을 겪는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세상의 쾌락과 나쁜 습관에 중독된 사람 마음에 비유된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는 많은 사람이 북적이는데도 이어폰을 꽂고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화 캐릭터를 죽이고, 부수고 파괴하는 게임을 새벽부터 하는 것이다. 술과 돈에 중독돼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마음속에 선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선택할 것인지 세상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하느님을 따르는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참된 진리를 선택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내 삶에 개입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가 내 마음에 깃들지 않고, 내 마음이 교만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


길, 돌밭, 가시덤불 혹은 좋은 땅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해 땅에 축복을 내리셨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라고 했는데, 롯은 요르단 강 건너편에 있는 땅을 선택했다. 겉보기에는 물이 넘쳐흐르고 모든 것이 갖춰진 듯한 땅이지만 멸망에 이른다. 겉보기에 화려한 땅도 하느님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죽음의 땅이 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가나안 땅을 선택했다. 가나안 땅은 돌과 먼지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축복의 땅으로 바뀐다. 신앙인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힘든 상황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사랑과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농사를 지을 때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는 일을 고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농사는 실패하지 않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씨를 잘 받아들이는 땅이 있고 그렇지 않은 땅이 있다. 하느님의 씨앗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 마음속에 좋은 땅을 마련해야 한다.


[평화신문, 2013년 7월 21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6) 기적의 꽃(마르 5,21-43)


우리 믿음을 보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


- '야이로의 딸의 부활', 일리아 레핀 작, 1871년, 국립 러시아 박물관.


이번 주는 야이로의 딸과 하혈하는 부인 이야기를 살펴보자.


마르코복음의 특징은 함구령이다. 예수님은 일을 행하신 다음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마라"며 함구령을 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리실 때는 당신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났을 때다. 어떤 정체성이 드러났기 때문일까.


오늘 예수님은 전형적 이방인 도시인 요르단 강 건너편, 게라사 지방에 가셨다. 여기에서 일어난 '마귀들과 돼지 떼'의 교훈은 예수님이 아무리 강력한 악의 세력이라도 무력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으로 이동하셨다. 예수님이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군중 가운데는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께 특별한 은총을 받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이중 예수님과 만날 수 있는 믿음을 지닌 사람은 단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카파르나움의 회당장 야이로였다. 회당을 관리하고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으로 당시 유다인 사회에서 권위 있고 지위가 높았다. 유다교 지도자인 그가 예수님께 치유와 자비를 간청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명성과 소문이 일반 사람뿐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알려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히브리어인 '야이로'라는 이름에는 '주님이 비추신다', '주님이 일으켜 주신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야이로라는 이름을 통해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생명으로 일으켜주실 것이며,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드러내실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야이로는 자신의 종을 예수님께 보내지 않고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하며 아이에게 가셔서 손을 얹어 아이가 다시 살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은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을 향해 가고 계셨다. 군중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런데 따라가던 군중 속에는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있었다. 율법에서 피는 생명을 상징하며 생명의 상징인 피를 흘린다는 것은 부정하다고 규정돼 있다. 이 여인은 긴 시간 동안 가족과 격리돼 있었고, 하느님을 경배하는 자리에 갈 수 없었다. 병 자체도 고통스러운데 사람들에게 죄의 결과로 얻은 병이라며 손가락질을 당했다.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강한 힘이 빠져나간 것을 알아차리셨다. 예수님은 군중을 둘러 보며 "누가 나의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다.


여인은 두려운 마음에 엎드려 고백했다. 하혈하던 여인은 이미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을 때 출혈이 멈췄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여기서 병을 치유받는 것을 뛰어넘어 구원의 자비를 바라는 여인의 믿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 치유받은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은 치유의 은총을 베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다.


"평안히 가거라"는 평화 안으로 떠나라는 뜻이다. 이 평화는 건강해지는 것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충만하고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야이로는 속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야이로의 집에서 한 사람이 침통한 얼굴로 다가왔다.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두려워하지 말고" 이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로서 죽음의 세력을 제압하고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다. "믿기만 하여라"는 예수님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키는 분이시니 모든 것을 예수님께 의탁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야이로 집에 도착하니, 울고 탄식하는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모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소녀의 방으로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탈리타 쿰!"(마르 5,41)이라고 말씀하셨다. "일어나라"는 뜻인 이 말은 당시 주술가들이 병자를 치유할 때 사용하거나 부모가 잠든 딸을 깨울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마르코복음은 이 말을 그리스어로 옮기면서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일을 예수님이 하셨다. 예수님이 이 일을 행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죽은 사람(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이로써 하느님의 아들(메시아)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만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간청한 회당장 야이로와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댄 하혈하던 여인은 예수님만이 생명의 은총을 베푸실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그 믿음으로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자비를 청했고,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원하는 소망을 다 이뤄주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평화신문, 2013년 7월 28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7) 나의 살던 고향(마르 6,1-6)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메시아라고?


-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성경 말씀이 이뤄졌다는 예수님 말씀을 믿지 않았다. 동정 마리아는 천사의 전갈에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다. 사진은 나자렛 주님탄생예고 대성당 모자이크화. [CNS 자료사진]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을 찾아가 보자.


나자렛은 갈릴래아 지역에 있다. 팔레스티나는 유다, 사마리아, 갈릴래아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갈릴래아는 어떤 곳일까. 세 지역 중 가장 북쪽에 있는 갈릴래아는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다. 남쪽은 비가 많이 내려 땅이 비옥해 농사일을 주로 한다. 밀과 보리, 포도와 석류가 많이 난다. 호수가 있어 어업도 많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 갈릴래아는 헤로데 임금의 아들 헤로데 안타피스(기원전 4년~ 기원후 39년)가 다스리고 있었다. 기원후 70년쯤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완전히 함락된 후 갈릴래아는 유다교 학문의 중심지가 됐다.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의 탄생지는 베들레헴, 삶의 터전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공적 직무 수행의 중심지였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기적은 갈릴래아에서 가장 많이 행하셨다. 예수님 제자도 대부분 갈릴래아 출신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리래아로 가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 곳도 갈릴래아에 있는 산이었다. 이처럼 갈릴래아는 예수님과 밀접한 곳이다.


나자렛은 '(꽃이) 만발하다', '감시하다, 보호하다'는 뜻이다. 구약에서는 나자렛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신약에서는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구약성경에서 나자렛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엘이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하고 반발한다. 메시아는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나자렛 출신이라고 밝히는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과 다름없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내가 나자렛 출신이라고 하니, 메시아로 여기지 않았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중요한 두 시기를 보내셨다. 잉태와 아동기, 그리고 어른이 되어 사람들을 가르치신 곳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에서 하혈하는 여인과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신 후 제자들과 나자렛으로 이동하셨다. 나자렛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사시는 곳이다. 예수님이 고향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하셨다. 예수님이 고향을 더 이상 방문하지 않으신 것은 고향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쯤에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을 요셉의 아들로 여겼다"(루카 3,23).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에 공생활을 시작하셨고, 그 전에는 줄곧 나자렛에 사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여러 곳을 다니며 군중에게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도록 기적을 행하셨다. 그런 분이 고향에 가고 싶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기쁜 마음으로 고향에 가셨다.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스승으로 가셨다. 첫날은 안식일이었다. 유다인들에게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배하는 중요한 날이다.


고향에 가신 예수님은 회당에 가셨다. 예수님은 예언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을 봉독하셨다. 예언서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하느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이가 바로 메시아라고 밝히고 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같은 뜻의 그리스어다.


예수님은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이사 61,2).


은혜로운 해는 △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시간 △ 하느님과 화해가 이뤄지는 시기 △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치유와 자유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 시간이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것이 메시아의 역할이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기름부음 받은이가 나라고 밝히신다. 이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하느님의 은총이 예수님을 통해 드디어 주어졌음을 뜻한다. 예수님은 "오늘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구나'라며 기뻐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마르 6,2-3) 하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다.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3) 하면서 못마땅해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하며 이름을 나열하고,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라며 믿을 수 없어 했다. 부모와 친척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은 자기들과 예수님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의미다. 너무 잘 알던 이가 남다른 권위와 능력을 지니고 나타난 사실이 못마땅한 것이다.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유명한 율법학자의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부잣집 아들이었다면…. 완전히 다르게 대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내게 오신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맞을 것인가?


[평화신문, 2013년 8월 4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8) 옛날 옛날에(마르 7,1-5)


사람의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 필리프 드 샹파뉴의 '모세와 십계명'. 하느님이 십계명을 주신 것은 인간이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나라마다 전통이 있듯이 유다인에게도 전통이 있다. 유다교의 핵심 사상은 성전과 땅, 율법이다.


지금은 성전이 없지만 유다인에게는 성전이 민족의 삶의 심장이었다. 종교, 정치, 사회, 문화 이 모든 것의 구심점을 이루는 것이 성전이다. 성전이 도시를 거느리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도시의 25%를 차지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계신 곳이자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제사를 바치고 사제직을 수행하는 곳이자 하느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곳이다.


성전의 역사는 제1, 2성전 시기로 나뉜다. 제1성전 시기는 솔로몬 시대부터 바빌론 유배 시기까지다. 제2성전 시기는 유배 후 기원전 520년에 재건축된 때부터 로마인에게 완전히 함락된 기원후 70년까지다.


성전에는 매일 예배와 안식일 예배가 있었다. 안식일 예배는 사회적 구심점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충성을 결정짓는 표시 중 하나였다. '쉐마'와 '18개의 기도문'은 유다인의 자아의식을 지탱해주는 것 중 하나였다. 쉐마와 18개 기도문의 핵심 내용은 오직 하느님만이 계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며 하느님은 그들을 구원하러 오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통해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이었다. 이 땅은 빵과 포도주, 가축을 길러내는 하느님의 축복이 이뤄지는 현실 장소다. 또 이들은 율법을 하느님의 법, 하느님의 지혜라고 생각했다.


율법은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계약 헌장으로, 땅에 관한 약속과 축복의 성취를 위해 지켜야 할 규율을 제공했다. 율법을 지키는 실천적 사항 세 가지는 할례와 안식일, 정결례였다. 이는 유다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분해주는 표징이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예수님은 율법에 매여 계실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뛰어넘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유다인들이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이유는 율법은 하느님의 백성에 속해 있다는 표지이자, 구원의 약속을 앞당길 수 있는 충성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구원이 이뤄졌을 때 자신의 신원을 보증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전은 유다인들에게 사회ㆍ종교적 삶의 중심이었다. 유다인들에게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이며 하느님은 성전에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해주고 축복해 주신다고 믿었다. 하느님의 집이 있는 예루살렘을 하느님의 도성이라고 불렀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하느님 백성과 유다교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였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을까. (어쩌면 그들이 생각하기에) 갈릴래아에 남다른 권위를 지니고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랍비가 출연했다는 소문을 듣고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유다인들은 공동체 의식 때문에 제자가 잘못하면 스승이 책임을 진다.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따지듯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율법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정결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레위기 11-15장에는 △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 산모의 정결례 △ 사람에게 생기는 악성 피부병 △ 악성 피부병 환자의 정결례 △ 남자와 여자가 부정하게 되는 경우 등의 정결규정이 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은 레위기나 율법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손 씻는 규정은 '조상들의 전통'(마르 7,5)이라 불리는 관습법에 속한다.


하느님께 나아갈 때는 정결해야 한다는 규정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인간이 만들었다. 하느님을 위해 만들어 놓은 전통법이 부작용을 낳았다. 이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보다 먼저 사람의 눈에 합당한지 합당치 않은지를 따지는 규정으로 변질됐다. 설에 부모에게 세배하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이다. 세배를 안 했다고 해서 고해성사 봐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도 때론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가치관과 전통이 있다. 그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이들은 예수님이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이 처음 십계명을 주신 것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행복을 주고 생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율법은 사람을 심판하고 생명을 빼앗는 도구로 전락했다. 종교 지도자들이 다 떠난 다음 예수님은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15).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우리 마음이 깨끗하면 좋지 않은 것이 들어와도 물리칠 수 있다. 마음이 악한 것으로 가득하면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 들어와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9) 고백(마르 8,27-33)


나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진실한 마음의 고백은 받아들임과 용서, 사랑을 불러온다. 신앙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힘을 얻는다.


예수님은 카이사리아의 필리피라는 곳으로 가셨다. 이곳은 헤로데 임금이 일찍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신 '판'이라는 신에게 신당을 지어 준 곳이다. 옛날 사람들은 판을 모든 자연의 신으로 믿었다. 이곳은 헤로데 임금의 아들 헤로데 필리포스가 기원전 2년께 헤르몬 산 밑에 샘이 솟아 오르는 곳에 세운 도시 중 하나로 잡신이 많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나를 누구냐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돌아올 찬란한 영광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다. 예수님도 자신이 행하신 기적과 가르침으로 인해 자신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을 통해 메시아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 사명은 당신이 행하신 기적으로써가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해 기꺼이 선택하신 당신의 죽음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속에 신앙이 온전히 자리 잡게 되는 것은 제자들이 체험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까지, 또 예루살렘에서 수난의 길을 걸으셨을 때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다.


유다는 예수님을 돈 주고 팔아넘겼다. 다른 제자들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모두 도망갔다.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은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악인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선고할 메시아를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은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참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고자 하신 구원은 힘과 권력으로 억압하는 악인들을 똑같은 힘과 권력으로 제압하는 게 아니다. 더 큰 사랑으로 감싸 안음으로써 회개와 용서로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앞에서 참 자유와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제자를 직접 뽑으셨다. 예수님은 율법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세우지 않고, 하늘나라를 토대로 제자들의 공동체를 세우셨다. 율법의 참된 의미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느님 현존 안에서 하느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과 삶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실지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다. 스스로 죽음이라는 사건을 앞두고,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당신의 부활을 기다리게 하는 힘을 불어넣어 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하고 질문하신다. 제자들이 대답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르 8,28)라고 답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동시대에 등장한 인물이다. 요한은 유다 지역에서 강력한 세례 운동을 펼친 분 중 한 분이다. 다가올 심판, 종말을 위해 회개하라는 징표로 세례를 베풀었다.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활은 세례자 요한에게 받으신 세례로 시작됐다.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한다. 루카 복음에서는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을 통해 자신이 어떤 그리스도인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해주고 계신다.


베드로가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 반박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이 가셔야 할 길은 그 길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답답하게 생각했다. 제자들 생각은 그리스도는 반대자들에게 배척받고 죽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왕국을 세우는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하고 호통을 치셨다.


예수님이 모범으로 보이신 진정한 승리와 영광은 남을 지배하는 힘과 능력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는 진실과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않고,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살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신다. 그 힘을 바탕으로 우리는 죄를 끊어버릴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 사이에 분열보다는 일치를 이루는 힘을 주신다.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고, 하느님을 바라볼 힘을 주신다. 나는 예수님께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평화신문, 2013년 9월 1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10) 가장 큰 사람(마르 9,33-37)


스스로 낮추고 섬기는 위대한 삶


- 영화 '마르첼리노의 기적' 포스터.


예수님이 높은 사람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마르코 복음 9장에는 제자들의 무능력이 드러난다.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했음에도 제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제자들은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에 너무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하면서 수난과 죽음에 대해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이 제자들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예수님 말씀에 힘과 권위가 없어서가 아니라 제자들이 딴생각을 하고 있어서다. 마음 깊이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나와는 다른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자들은 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고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에게 십자가와 죽음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따라다니는 예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오면 예수님 옆에는 누가 앉을까에 더 관심이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과 생각이 너무 달랐다. 그 제자들 모습이 우리 모습이다. 우리는 신앙생할을 열심히 하면서도 예수님 생각 따로, 우리 생각 따로인 것처럼 행동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수난을 당하려고 예루살렘에 가시는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그 길에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제자들의 알아듣지 못함이 내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보자. 세속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현세적 축복을 기대하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아무리 당신 수난과 부활을 이야기하셔도 알아듣지 못한다.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것은 당신의 죽음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자원하셨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두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용기를 주고자 하셨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통치자가 되시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자기들은 마땅히 그 다음가는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 마음은 어땠을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마르 9,33-34)


그러나 제자들은 거리낌이 있어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높은 자리에 앉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설명해주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다. 삶을 진정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나눔의 삶이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가운데 세우신 다음, 어린이를 껴안으면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어린이들은 서슴없이 예수님에게 간다. 이익을 따지지 않고 예수님께 곧장 갈 수 있는 마음은 우리 안에도 있다. 많은 사람이 통상적으로 천진무구하다. 예수님은 하느님 앞에서 가장 미소한 이의 상징이 어린이라고 말씀하신다.


영화 '마르첼리노의 기적'을 보면, 주인공 마르첼리노가 수도원 앞에 버려져 있다. 수사들은 마르첼리노를 데려다 키웠다. 수사들은 마르첼리노에게 다락방에는 올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마르첼리노는 다락방에 올라간다. 다락방에 올라가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고 마르첼리노는 놀란다. 옷을 걸치고 있지 않은 예수님에게 마르첼리노는 "예수님 춥죠? 예수님 배고프죠?"하고 묻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어 마르첼리노가 가지고 온 빵을 같이 잡수신다. 우리 마음에도 분명히 예수님을 직면할 수 있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이 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 눈에서 의심 없이 순수한 믿음을 보셨다. 어린이들처럼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갖고 살 때 누구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셨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추고, 하느님의 종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분의 이름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 예수님은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대답해주셨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진정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평화신문, 2013년 9월 15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11) 하느님의 나라 거울(마르 10,17-27)


가진 것 내어주고 얻는 영원한 생명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하신 말씀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한다.


'하느님 나라'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122번 나온다. 그중 공관복음서에서 99번이다. 공관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부분에 '하느님 나라'가 나온다. 그 정도로 예수님이 처음 선포하고 초대하신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해준다.


하느님 나라는 지도의 한 구석에 있는 곳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다르다.


예수님이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자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뭔가를 했구나 하며 예수님을 자신 있게 바라봤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족한 면을 깨우쳐 주신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가진 것을 파는 일은 쉽지 않다.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도 쉽지 않다. 예수님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자신의 것을 움켜쥐고 있을 때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어떤 것인가를 볼 수 없다. 예수님은 움켜쥔 것을 펴라고 하신다. 당신의 삶과 생명까지 다 내어주는 삶을 사셨기에 우리에게 그런 삶을 살아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이 사람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2)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마르 10,23)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당시 유다 사람들은 재물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축복과 재산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이지만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했을 때 재물은 탐욕으로 변한다. 탐욕으로 변하면 우리가 그 올가미에 걸려들게 된다. 곧 하느님을 떠난 삶을 살게 된다.


구약에 보면 삼촌과 조카 사이인 아브라함과 롯이 부자가 되자 갈등이 생겨 서로 헤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을 두고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정말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자,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부유함이라는 축복 자체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하고 최선을 다해 하느님 계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삶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을 믿어야 한다.


내 삶 안에서 하느님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 활동이 나에게서 이뤄진다.


우리가 모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느님을 뵙고 만나기 위해서다.


우리가 재물을 포기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 진정한 포기가 있을 때 하느님은 내 안에서 활동하시고, 당신의 계획을 나를 통해 실현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포기한 것보다 더 많이 하느님이 채워주신다.


우리가 현재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공로만으로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고 말씀하셨다.


[평화신문, 2013년 9월 29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12) 무화과나무의 교훈(마르 11,12-25)


믿음 기도 사랑 없는 신앙 경계해야


-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경고하셨다. 사진은 무화과 열매. 평화신문 자료사진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티나 전 지역과 우리나라에서는 전남 영암지방에 많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명상과 기도를 했다.무화과는 꽃이 없다는 뜻이다. 무화과나무는 평화와 안전한 생활, 훌륭한 삶을 상징한다. 무화과나무 잎이 무성하면 그 안에 반드시 열매가 있다.


무화과나무가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알몸이라는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신의 치부를 가렸다는 이야기에서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기에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은 하느님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경고하셨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비유로 드신 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정리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파스카(무교절)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다의 가장 큰 장엄 축일이다. 순례객들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라고 외쳤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해 제일 먼저 성전으로 가셨다.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성전에서만 하느님과 백성의 공적인 만남이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인 동시에 하느님 현존의 장소다. 하느님의 집은 예수님의 집이다. 예수님은 성전에 계심으로써 예수님 당신이 하느님 이름으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임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날이 저물 때까지, 성전 곳곳을 둘러보며 성전에 머무셨다. 하느님의 백성이 어떤 상태인지 보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열두 제자와 다시 베타니아로 가셨다. 예수님의 활동은 둘째 날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신 중요한 일은 장사꾼들을 내쫓으신 것이다. 성전 정화 사건이다. 이는 하느님이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이 둘째 날 다시 성전으로 오신다.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마르 11,12-13).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마르 11,14)라고 말씀하셨다.


무화과 철도 아닌데 예수님에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이 성전에 가서 보니 염소와 양, 소가 울고 아수라장 같았다. 예수님은 환전상의 탁자와 비둘기 장사의 의자를 엎는다.


요한복음서에는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요한 2,14-15)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방인들은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성전 안에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사제들의 뜰'을 비롯해 성소와 지성소 등이 있다. 이 지성소는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며, 대사제만 1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왜 격노하셨을까?


유다인들은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게 의무였다. 순례의 축제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의무 순례 대축제는 파스카(과월절,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해방절), 오순절(파스카 후 50일), 초막절(밀 추수 감사) 세 가지가 있다.


예루살렘에 온 그들은 제물을 바쳐야 했다. 제물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기에 흠이 있으면 안 된다. 먼 곳에서 귀중한 양 한 마리를 가져와도 흠 없이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성전 안에는 흠 없는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기 어려웠지만, 장사꾼들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 돈을 받고 팔았다. 성전에서만 사용하는 동전이 있었는데,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돈을 환전해야 했다. 환전을 해야 번제물을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성전을 관리하는 대사제와 장사꾼과의 뒷거래가 있었을 것이고, 이에 예수님은 격노하셨다.


예수님은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쫓아내셨고 환전상의 탁자를 엎으면서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라고 하셨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모든 민족에게 전해야 하는데 자기네만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성전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다. 이것을 본 지도자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했다.


예수님은 마음의 성전을 모시고 있는 우리 공동체와 단체에 어떤 채찍을 드실까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님 일행은 셋째 날, 베타니아에서 다시 성전으로 가다가 뿌리째 말라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았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굳건한 믿음과 참된 기도, 진실한 사랑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겉만 화려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다인들의 삶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세 가지 교훈을 알려주신다. 의심하지 않는 굳은 믿음을 지녀야 하며(마르 11,23), 그런 믿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마르 11,24), 기도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마르 11,25)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3년 10월 6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13) 나 새롭게 발견하기(마르 12,38-44)


위선 교만으로 가득찬 신앙 멀리하라


율법학자와 가난한 과부에 대해 살펴보자.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의로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배우고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가르침을 주는 대표적인 사람은 율법학자였다.


이들은 율법서와 예언서를 해설하고, 백성에게 삶으로 적용시키도록 가르쳤으므로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있는 학식만으로는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없다고 하신다. 참된 신앙은 높은 학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삶에서 깨달은 것으로 전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고발하신다. 가난한 과부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어떤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고 계시다.


엄밀히 말하면 율법학자들은, 모세의 율법 전승에 따라 내려오는 전통을 연구하고 그것을 분석하는 전문가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을 경계하라고 당부하신다. 율법학자들에게서 경계할 점은 명예욕과 탐욕, 과시욕, 위선적인 기도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율법학자의 자리에 나를 놓고, 예수님은 나의 어떤 삶을 보며 경계하실까 하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의 과시욕은 그들이 기도하고,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에서 드러난다. 겉옷 자락 네 곳에 긴 술을 달고 다녔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내보인다. 또 이들은 장터에서 시민들이 자기에게 깍듯이 인사하기를 바란다. 대중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보십시오 여러분, 나를 좀 봐 주세요.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며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율법학자들은 회당이나 잔칫집에 가면 높은 자리에 앉길 원했다. 좋은 자리는 저명인사가 앉는 자리다. 회당에 가면 모세오경을 보관하는 자리 앞쪽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잔칫집에 가면 윗자리에 앉길 원했다. 윗자리는 주인 옆자리다. 통상적으로 주인 옆자리는 원로들에게 내어주는 자리다. 주인 옆에 있으면 사람들 눈에 금방 띄기 때문이다.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후한 대접을 너무 좋아했다. 과부들은 남편이 남긴 유언에 따라 재산을 관리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에게 법적 자문을 해주며 수수료를 받고 때로는 과부의 가산을 착취하기도 했다. 또 과부들을 위해 긴 시간 동안 기도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아냈다.


예수님은 이렇게 율법학자들이 경건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으면서 신심 깊은 체하기 위해 길게 기도하는 모습을 비난하셨다. 예수님이 남에게 보이는 위선적 신심행위, 사기행각에 집착하는 율법학자들을 단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태오 복음서 23장을 보면,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선언을 하셨다.


겉으로는 고상하게 열심히 기도하면서 속내는 하느님 뜻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율법학자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과부를 비교하시면서 신앙의 참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는 삶의 본보기를 제시한 이는 율법학자가 아닌 가난한 과부였다. 사람들에게 참 신앙인의 길을 보여준 사람은 율법학자가 아닌 과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마태오 복음서에 더 분명하게 제시돼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삶을 본받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마태 12,38-40).


예수님이 지적하신 율법학자의 위선은 교만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본인 스스로 인간적 권위를 내세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당시 사람들은 거리에서 율법학자를 만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손을 모아 "선생님" 혹은 "아버지" 하며 깍듯이 인사했다고 한다. 시간이 나면 장터에 가서 사람들에게 인사받는 것을 즐겼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은 그 마음에 교만이 가득 찼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위선적인 율법학자와 달리 과부는 가난하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쳤다. 당시 여성들은 공개적으로 율법을 배울 수 없었고 결혼하기 전까지 어머니 밑에서 살림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과부가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2000원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예수님은 이 과부가 궁핍한 가운데 가진 생활비를 모두 넣었다고 칭찬하셨다. 전부를 바친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돈의 액수에 달려 있지 않다. 참된 신앙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마음과 태도를 지녀야 한다.


[평화신문, 2013년 10월 13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14) 아름다운 인생(마르 13,32-37)


언제든 주님께 달려갈 준비해야


-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6세기, 채색 삽화, 로사노 대성당 보물실, 이탈리아.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깨어 있는 삶은 어떤 삶일까. 지나온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고,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깨어 있는 삶을 설계해보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최종적인 목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삶은 눈만 떠서 깨어 있는 삶이 아닌 하느님을 향한 삶이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주님의 날'이 빨리 오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날'이란 주님이 원수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시는 날이다.


구약에는 많은 예언자가 나오는데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살면 헛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고 이웃에게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날'은 구원의 때가 아니라 심판과 징벌의 날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태오 복음서 25장 1-13절을 보면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온다. 25장 14-30절까지는 탈렌트의 비유가 나온다. 31-46절은 최후의 심판 이야기가 나온다. 열 처녀가 있었다. 다섯 명은 슬기로웠고, 다섯 명은 어리석었다. 그런데 이들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열 처녀는 모두 똑같이 등불을 준비했다.


다 같이 신랑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신랑이 온다는 말을 듣고 처녀들은 등불을 챙겼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챙기지 못했다. 그런데 기름이 떨어진 것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달라고 하자 나눠줄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기름은 우리가 한 생을 주님을 위해 살아온 삶의 기름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삶의 기름이다. 우리는 마지막 날 하느님을 대면했을 때, 하느님께 "다시 살다 오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실 때 달려갈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첫째는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돼야 한다. 하늘에는 해와 달, 별이 있고 하늘과 땅 사이의 창공에는 날아다니는 새가 굉장히 많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다.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가 나오는데 아담과 하와 말고 하느님은 더 소중하고 귀중하게 나를 만드셨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가장 존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둘째, 가족과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통해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삶의 각도가 잘 맞춰 있는가를 바라봐야 한다.


내가 표시 나지 않게 조금 변하면 내 주위의 사람들도 소리 없이 조금만 변한다. 예를 들어 밥을 먹을 때 내가 웃으면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도 웃으면서 먹는다. 그러나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밥만 먹으면 식탁은 조용하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데 깨어 있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루에 하나의 목표를 세워 살아가도록 노력하자.


아침에 일어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나는 내가 정말 좋다"고 말해 보자. '오늘 하루는 인사를 잘 해야지' 하고 결심했다면 하루 종일 웃으며 인사를 나눠보자. 해본 사람만이 그 힘을 느낀다. '좋은 말씀이지' 하면서도 움직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소금기둥처럼 돼 있을 것이다. 소금기둥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깨어 있는 삶은 예수님을 자기 삶의 첫 자리에 두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은 첫째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마르 12,30). 두 번째는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것이다(마르 12,31).


'주님의 날'이 왔을 때 빨리 가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힘은 우리 각자에게 있다. 사랑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자기를 내어주고, 힘과 사랑, 마음을 나눌 때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귀중한 삶의 기름이 될 것이다. 그런 삶을 살 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사는 참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큰 목표가 아닌 작은 목표를 세워 살아보자.


[평화신문, 2013년 10월 20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15) 아버지의 뜻, 나의 뜻(마르 14,32-42)


온전히 아버지 뜻에 맡겨야


- 엘 그레코 작, '겟세마니의 기도', 1608년.


마르코복음의 종결 부분으로, 예수님의 수난사를 접하게 된다. 예수님이 수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장면이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때부터 예수님의 빈 무덤 사화까지를 수난사화(마르 14,1-16,8)라고 한다. 수난사화에는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기도, 최고의회의 신문, 빌라도의 신문, 십자가 처형, 부활 등 다양한 전승이 섞여 있다. 사형선고를 당하신 다음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난사화에는 십자가 사건을 깊이 새길 수 있는 의미가 있다. 11장부터 보자.


예수님이 성전 정화를 하셨다. 성전 정화를 하시면서 성전은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를 통해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봤다.


심판의 날을 앞두고 깨어 있으라고 예고하셨다. 14장에 와서는 예수님이 당신에게 다가올 시련과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다.


예루살렘 동쪽 올리브산에 겟세마니란 곳이 있는데, 겟세마니는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이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올리브 기름은 유용했다. 손님을 환대할 때나 잔치할 때는 올리브 기름을 발랐다. 팔레스티나 기후가 건조하기에 몸을 보습하기 위해 발랐다.


기름은 음식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됐다. 향수나 비누에도 올리브가 많이 쓰였다. 성경에 보면, 전통적으로 왕이나 대사제들이 특별히 하느님 백성과,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용했다. 이는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 풍요로움과 충만한 행복, 기쁨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되시기 전날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에서 고통과 불안에 싸여 기도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여러 가지 귀감을 준다. 첫째, 예수님은 철저하게 혼자서 하느님과 대면하며 기도하셨다. 기도에 대한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셨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고 여러 번 당부하셨다. 셋째, 예수님의 기도가 가장 중요한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있다.


예수님은 공포와 번민에 휩싸인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큰 공포와 번민에 싸여 계셨다. 예수님은 나약한 자신을 주님께 내어 보이면서 인간적인 기도를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 14,36).


이어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라고 하셨다. 온전히 아버지 뜻에 생명을 맡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도가 끝날 무렵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마르 14,41-42). 당신 스스로 그들에게 나아가신다. 육체적 나약함을 버리고, 하느님의 힘으로부터 강해진 것을 볼 수 있다.


'탄원' 기도는 단순히 극도의 고통을 토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굳은 믿음으로 구원을 간청하고 확신하는 기도였다. 겟세마니 기도의 세 가지 특징은 두려움에 대한 원천적 경험, 죽음의 힘 앞에서 느끼는 전율, 무(無)라는 나락에서 밀려오는 공포다.


예수님의 결단처럼 우리도 삶에서 빛을 선택할 것인지, 어둠을 선택할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수님은 빛과 생명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겠다고 결단을 내리셨다. 겟세마니 기도를 통해 우리가 믿는 주님이 소름 끼치는 순간을 겪으시는 모습을 매우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 또 자신의 생명에 고군분투하는 예수님과 피곤함 때문에 깨어 있지 못하는 제자들 모습이 서로 대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고통 받으셔야 했다는 점에서 우리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인식할 수 있다. 예수님은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을 식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나의 뜻을 하느님이 이루시도록 하느님께 주입시킨다. '하느님 꼭~' 하면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 주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하셨다. 성장해 가는 아기들이 아버지를 친숙하게 부르는 말이다.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룰 수 있는 생활을 하면 좋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마르 14,42)고 말씀하신다. 당신 스스로 우리 죄인을 위해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평화신문, 2013년 10월 27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16) 조롱받고 못 박히신 예수님(마르 15,21-32)


예수의 외로운 길, 하느님 사랑과 현존의 증거


조롱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만나보자. 로마 군인들은 총독 관저에 예수님을 끌고 갔다. 예수님은 로마 법정에서 신문을 받고 구타와 인격적 모욕을 당하신다. 예수님은 자주색 옷을 입고 가시관을 쓰셨다. 자주색 옷은 왕이나 귀족이 입는 옷이다. 유다인의 왕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자주색 옷을 입힌 것이다. 순교자들도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조롱과 학대를 당했다.


군중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며 외쳤다. 예수님은 외침을 들으며 참혹한 죽음을 안겨줄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다. 당시 로마의 처형 방법은 목을 잘라서 죽이는 참수형, 굶주린 맹수에게 집어 던지는 맹수형이 있다. 십자가형은 가장 잔혹한 극형으로, 로마인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어도 십자가형에 처하지 않았다.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형에 처한 죄수가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메고 가는 도중에 계속 매질을 한다. 그러나 가는 길에 죄수가 죽어버리면 안 되므로 너무 힘이 빠졌다고 생각하면 대신 다른 사람이 지고 가게 했다.


군인들은 예수가 길에서 죽으면 안되겠다 싶어 키레네 사람 한 명을 골라 예수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져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위에 보면 우리를 대신해 수고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청소를 해주시는 분, 화단을 정리해 주시는 분 등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도와주는 분이 많다.


채찍은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에게 자비의 행위라고 한다. 오히려 채찍으로 맞은 후 십자가에 못 박히면 일찍 죽기 때문이다. 사형장에 가면 군인들은 죄수를 나무 십자가 위에 눕혀서 죄수의 손목과 발을 나무에 대고 박은 다음 세워놓고 몇 시간이 지난 다음 군인들은 죄수가 죽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리를 부러뜨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기에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나왔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예수님 시신을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셨다.


예수님은 엄청난 고통을 겪으시면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셨다. 힘든 상황에서 침묵하셨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군인들이 키레네 사람들을 붙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 것은 예수님의 기력이 쇠했고 십자가를 질 수 없을 그만큼 예수님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쏟아내어 주셨다는 것이다. 마르코복음서에는 "유다인들의 임금"(마르 15,26), 마태오복음서에는 "이 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마태 27,37), 루카 복음서에는 "이 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루카 23,38)라고 쓰여 있다. 요한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축제에 모인 다양한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세 가지 언어(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써놓았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하기를, 이 세 가지 언어는 세 부류의 사람을 뜻한다고 했다. 히브리어는 하느님의 율법으로 영광스럽게 된 유다인을, 라틴어는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는 로마인을, 그리스어는 이방인들 가운데 현자들을 표현한다. 더 깊은 뜻으로는 히브리어는 종교의 언어, 라틴어는 정치의 언어, 그리스어는 문화의 언어다. 종교와 정치, 문화 모든 면에서 예수님은 진정한 임금이시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시는 예수님을 보며 모독했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마르 15,29-30).


수석 사제들도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마르 15,31-32)하며 바아냥 거렸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곧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성전을 무너뜨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흘 후에 이뤄질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신 성전을 세우는 사건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믿는 모든 이를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살아있는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자신도 구하지 못하는 예수님은 그 많은 백성이 있음에도 백성에게 배척당하면서 혼자 외롭게 돌아가실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그 모습에서 인간을 위해 생명을 내놓으시는 하느님, 인간의 고통과 절망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에 백인대장이 나와 신앙고백을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고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온갓 시련을 이겨낼 힘을 주신다. 너무 힘든 상황이라고 울고만 있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처절하고 절실하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그것을 뛰어넘을 용기와 힘을 주실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면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실 것이다.


[평화신문, 2013년 11월 3일, 정리=이지혜 기자]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17 · 끝) 내가 주는 특별한 상(마르 16,14-18)


믿음의 삶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 만나야


우리는 16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예수님은 부활하시면서 사람들에게 "평안하냐"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온전한 평화, 충만한 평화다. 예수님이 주신 평화가 나에게 머물고, 나에게 머무는 평화가 이웃에게 전해져야 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개인적 희생의 결과가 하느님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하느님 뜻을 실현한 것으로 예수님의 신비로운 인격을 계시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 생애의 종말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한 시작이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에 물든 낡은 세계를 파괴하고, 당신 뜻에 일치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셨다.


세 여인이 예수님 시신에 바를 향료를 들고 무덤을 향해 급히 갔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멀리서 지켜보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였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마르 16,1).


여인들이 무덤으로 간 때는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이었다. 이때는 희망과 기쁨을 상징적으로 예고한다. 여인들은 무덤에 가면서 걱정스러운 말투로 이야기를 나눈다.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내 줄까요?" 무덤에 도착하자 이미 돌이 굴러져 있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마르 16,5).


오른쪽은 행운과 희망을 약속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젊은이가 입고 있는 흰옷은 천상적인 존재임을 나타낸다. 젊은이는 여인들에게 "놀라지 마라.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예고하신 부활이 이미 실현됐음을 볼 수 있다.


부활이라는 말은 많이 쓰는 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이다. 예수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 전반적으로 펼쳐져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첫 만남 이후의 체험들이 언어로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부활은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희망이다. 부활이란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다. 어둠 속에 있는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죽음의 상태로 있는 우리가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부활이다. 그분께서 나에게 개인적인 스승이 되시고, 나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신다.


또한 부활이란,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님은 죽음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죽음을 극복하셨다. 신앙인에게 부활이란 예수님을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 향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분은 아버지께로 올라가신다. 당신 부활로 우리의 참된 집인 아버지 집에 우리가 갈 수 있도록 받아들여지는 역할을 하는 것이 부활이다. 부활은 옛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과 쇄신된 삶을 의미한다. 모든 것, 우리 삶의 참된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 부활이다. 부활은 하느님과 인간이 나눈 사랑 역사의 완성이자 신앙의 완성이다.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부활은 목격자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기록한 것을 읽고 있다. 우리는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신앙의 삶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교회는 전례시기를 크게 사순과 부활, 대림과 성탄으로 나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신앙의 눈으로 읽고 살아간다면 우리 삶 전체가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초대하신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추억의 장소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이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도 다 용서해주신 곳이기도 하다. 갈릴래아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들은 곳이요, 사랑을 나누고 함께 울고 웃던 사랑의 흔적이 배어 있는 곳이다.


우리는 그동안 마르코복음서를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그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기적들을 체험했다. 우리가 마르코복음서를 통해 어떤 예수님을 만났는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선포해야 할까. 우리가 믿고 있는 절대자 하느님, 최고의 참된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세상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도 매일 주님을 선포해야 한다.


[평화신문, 2013년 11월 10일, 정리=이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