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1) 마르코 복음서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는 목적은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이다. 즉 복음서의 의미를 이해하고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한 수단이 바로 ‘읽기 방법론’이다. 적합한 읽기 방법론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읽으려는 복음서 본문이 가지는 여러 특성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즉 본문의 특성에서 읽기 방법론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글이 가지는 다양한 특성에 맞는 적합한 방법론만이 글의 의미와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세 가지 특성


그렇다면 마르코 복음서는 어떤 특성을 가지는가? 첫째, 복음서는 역사적 특성을 가진다. 복음서는 역사적 인물인 예수님과 역사적 사건인 예수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는 역사의 구체적 상황에서 특정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였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읽는 마르코 복음서는 최종 형태로 완성되기 전에 다양한 전승과 편집 과정을 거친 문헌이다. 다시 말해 역사를 가진 문헌이다.


둘째, 복음서는 문학적 특성을 가진다. 복음서는 쓰인 글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문학이다. 특히 마르코 복음서는 복음서라는 문학 장르로 쓰인 최초의 작품이다. 복음서 본문에서 우리는 다양한 문학 양식, 문학 구조, 문체, 문학 기법을 발견한다.


셋째, 복음서는 신학적 특성을 가진다. 사실 복음서를 역사적 특성과 문학적 특성을 가지는 다른 여느 문헌과 구별 짓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신학적 메시지이다.


이와 같이 마르코 복음서 본문이 가지는 특성을 세 가지 주제어로 표현하면, ‘역사’, ‘문학’, ‘신학’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본문을 파악하기 위한 세 가지 방법론


마르코 복음서 본문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적절한 방법론이 필요하다. 첫째, 마르코 복음서의 역사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역사비평적(歷史批評的) 방법론이 필요하다. 이 방법론은 복음서를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해석하고, 최종 본문이 형성된 이전의 전승과 편집의 역사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방법론이다. 본문 비평, 문헌 비평, 전승 비평, 양식 비평, 편집 비평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마르코 복음서의 문학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문학 비평적(文學批評的) 방법론이 필요하다. 이 방법론은 전승과 편집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읽는 최종 본문에 이른 복음서가 가지는 다양한 문학적 특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방법론이다. 수사학 비평, 기호학 비평, 서사 비평, 독자-반응 비평, 정경 비평 등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 마르코 복음서의 신학적 메시지를 파악하는 신학적 해석학이 필요하다. 이는 본문의 신학적 메시지가 복음서가 쓰일 당시에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를 물을 뿐 아니라, 그것이 오늘을 사는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묻는다. 즉 신학적 해석학은 복음서의 메시지를 독자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며, 본문의 의미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appropriation)’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특성을 가지는 마르코 복음서에 적합한 읽기 방법론은 역사 비평, 문학 비평, 신학적 해석학이다. 역사 비평과 문학 비평은 복음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주석(exegesis)의 방법이다. 주석은 독자와 본문 사이의 ‘거리 두기’를 전제하는 비평적 읽기의 방법이다. 여기서 비평적 읽기란 엄밀한 방법론에 따른 객관적이고 학문적이며 분석적인 읽기를 가리킨다.


마르코 복음을 새롭게 읽기 위한 기본 태도


복음서 읽기의 방법으로써 역사 비평과 문학 비평은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본문의 역사적 특성뿐 아니라 문학적 특성을 함께 파악할 때 본문의 의미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다. 즉 역사 비평적 방법론도 복음서의 문학적 특성을 살펴야 하고, 문학 비평적 방법론도 본문의 역사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같이 복음서 본문을 읽기 위하여 역사 비평과 문학 비평, 통시적 방법론과 공시적 방법론의 장점을 종합하여 살펴야 한다. 이것이 마르코 복음서 읽기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는 기본 태도이다.


역사 비평과 문학 비평으로 복음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한 독자는 신학적 해석학을 통해 본문의 신학적 메시지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곧 본문의 의미를 독자의 신앙적 실존과 관련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학문적 복음서 읽기와 신앙적 복음서 읽기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학문적 읽기는 신앙적 읽기가 자의적(恣意的) 해석이 되지 않고 본문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신앙적 읽기는 학문적 읽기가 신앙과 교회 공동체와의 관련성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제시한다. 이것이 마르코 복음서 읽기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는 또 다른 기본 태도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역사 비평과 문학 비평, 학문적 읽기와 신앙적 읽기의 방법론적 만남과 대화를 지향한다.


[성서와 함께, 2010년 7월호, 송창현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2) 이야기를 통째로 읽기


우리에게 익숙한 마르코 복음서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마르코 복음서는 여러 사건이 단락별로 나뉘어 있고, 각 단락에는 소제목이 붙여 있다. 그리고 우리가 미사 때 말씀 전례에서 읽는 복음서의 본문도 전례 시기에 맞춰 길지 않은 분량으로 나뉘어 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마르코 복음서의 모습은 짧은 여러 단락으로 잘려 있다.


그런데 부분으로 나뉜 마르코 복음서에 익숙하게 되면 전체 모습을 놓칠 수가 있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서에 대한 ‘다시 읽기(re-reading)’와 ‘문학적 읽기(literary reading)’를 시도하는 우리는 복음서 각 본문을 ‘세밀하게 읽기(close reading)’에 앞서 전체 복음서의 짜임새를 파악해야 한다. 즉 복음서에 대한 ‘전체 읽기(holistic reading)’가 필요하다. 복음서를 통째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서를 하나의 이야기로 읽는 우리의 방법론적 출발점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복음서를 ‘이야기’로 읽을 뿐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다시 읽는다.


이야기의 줄거리 구성


마르코 복음서의 이야기는 다양한 등장인물 간에 특정한 배경 아래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하나의’ 이야기인 복음서는 사건을 각기 따로따로 분리된 것으로 나열하지 않고, 전체 짜임새 안에서 긴밀히 연결시킨다. 이 전체 짜임새가 바로 줄거리 ‘구성(plot)’인데, 그 중요한 요소가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conflict)’이다.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생기는 갈등을 중심으로 전체 줄거리 구성을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나눌 수 있다. 이야기의 시작 부분인 발단에서는 등장인물과 사건의 배경이 소개되고 갈등의 실마리가 제시된다. 전개에서는 등장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위기에서는 갈등이 점점 고조되고, 절정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마침내 결말에서는 갈등이 해소되고 전체 사건이 마무리된다.


이상 살펴본 이야기의 다섯 단계 줄거리 구성을 마르코 복음서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발단(1,1-13):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소개되고,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시는 단계이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신다.


② 전개(1,14-8,2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신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제자들을 부르며 많은 기적을 행하신다. 이 단계에서 반대자들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예수님과 반대자들은 죄의 용서, 정결 예식과 식탁 친교, 안식일 규정 등으로 갈등을 일으킨다.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반대자들은 예수님을 해칠 음모를 꾸민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3,6). 한편, 예수님과 제자들의 갈등도 나타난다.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뒤따라 나선 제자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 행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③ 위기(8,27-13,37): 예수님과 반대자들, 제자들의 갈등은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8,27-30 참조) 후에 점점 더 심화된다.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그 길에서 제자들과의 갈등이 더 깊어진다. 특히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 말씀과 그것에 대한 제자들의 거듭되는 몰이해에서 갈등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반대자들의 갈등은 예루살렘에서 더욱 고조된다. 특히 이 갈등은 계속되는 논쟁 사화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11,27-33에서 수석 사제, 율법 학자, 원로들과 권한 문제로, 12,13-17에서는 바리사이, 헤로데 당원들과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로, 12,18-27에서는 사두가이들과 부활 문제로 논쟁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대표적 종교 정치 그룹들과 당대의 논란거리를 놓고 논쟁하신다.


④ 절정(14,1-15,47): 예수님과 다른 등장인물들 사이의 갈등은 14장 이후의 수난 사화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반대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14,1).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고 재판한 뒤 십자가형에 처한다.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그분을 버리고 도망가고(14,50 참조), 베드로는 그분을 부인한다(14,66-72 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실 때, 제자들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한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했던 군중은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외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죽음에서 이야기의 갈등은 절정에 이른다.


⑤ 결말(16,1-20): 복음서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 대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다. 등장인물들 사이의 갈등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시자 반대자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신 하느님의 응답이다. 예수님의 길이 승리한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배반했던 제자들을 새로운 만남으로 다시 초대하신다(16,10 참조). 이렇게 이야기의 마무리 단계에서 갈등은 해소되고 문제가 해결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야기의 줄거리 구성에 따라 마르코 복음서의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이야기의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단계에 따라 복음서의 전체 짜임새를 이해할 수 있다.


[성서와 함께, 2010년 8월호, 송창현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3) 이야기 읽기의 열쇠인 1장 1절


마르코 복음서 이야기의 여러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다. 복음서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여러 사건을 이야기로 서술한 것이다. 그것은 마르코 복음서의 첫머리인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1)에서 잘 드러난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 말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즉 복음서는 예수님과 그분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기쁜 소식으로 전하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이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라는 내용을 ‘이야기(story)’라는 문학 형식으로 기술한 것이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두 가지 호칭


우리는 1,1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복음사가인 이야기꾼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라고 표현한다. 두 표현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일종의 호칭(title)이며, 이는 메시아를 가리킨다. 이야기꾼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야기의 시작에서 미리 밝힌다. 곧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이야기꾼의 대답이다.


이야기꾼이 마르코 복음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가 바로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해 두 호칭은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전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정체(identity)를 짧게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라는 두 호칭은 전체 이야기의 주제를 표현한다. 다시 말해 전체 이야기는 두 호칭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1,1은 전체 이야기를 읽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된다. 우리는 이 열쇠로 마르코 복음서의 이야기 세계를 열어나갈 것이다.


먼저 우리가 할 일은 마르코 복음서 전체에서 ‘하느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라는 표현이 어느 구절에 나오는지 찾아보는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한 유용한 도구가 바로 ‘성경 용어 색인(concordance)’이다. 색인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단어가 어느 책 몇 장 몇 절에 나오는지 일목요연하게 배열해 놓았다. 우리의 성경 읽기를 풍요롭게 만드는 보조 도구인 셈이다.


베일에 싸인 예수님의 정체


이제 두 표현을 중심으로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자. 앞서 살펴본 대로 1,1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고 밝히면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한 복음서는 전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어떤 ‘하느님의 아들’이고, 어떤 ‘그리스도’인지 말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는 복음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차 드러날 것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먼저 세례자 요한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선포와 세례가 소개된다(1,2-8 참조).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 강으로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1,9-11 참조). 이 세례 장면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구절을 발견한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된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다.


1,14-15부터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기 시작한다.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시며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신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 그분이 누구신지 아는 등장인물이 있다. 바로 악령들이다.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1,24)고 말한다. 그리고 1,34에 따르면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 3,11에서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고 말하고, 5,7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이처럼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정체에 대해 침묵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침묵 명령은 마르코 복음서의 중요한 신학적 모티프 중 하나인 ‘메시아 비밀 사상’과 관련이 있다.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정체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조금씩 밝혀질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르코 복음서가 시작된 후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던 등장인물은 하느님과 악령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분이 누구이신지 질문할 뿐이다.


1,27에서 카파르나움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고 4,41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풍랑을 가라앉히신 후, 제자들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라고 서로 말한다. 한편 6,14-16에서 헤로데 임금이 들은 소문에 따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는 옛 예언자와 같은 예언자라고 말한다.


[성서와 함께, 2010년 9월호, 송창현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4) 큰 등장인물인 제자들


등장인물


복음서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분류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그중 하나가 큰 등장인물(major characters)과 작은 등장인물(minor characters)로 나누는 것이다. 큰 등장인물에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비롯하여, 사건을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인 제자들, 반대자들, 군중이 포함된다. 말하자면, 복음서 이야기의 줄거리는 큰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들은 복음서의 여러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고 사건이 벌어진다.


큰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먼저 살펴볼 대상은 제자들이다. 마르코 복음서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등장인물로서 어떤 특성을 지니는가? 그들은 어떻게 묘사되며, 전체 줄거리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인물 묘사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각기 특성을 지니고 특정한 역할을 한다. 복음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storyteller)은 다양한 방법으로 인물 묘사(characterization)를 한다.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인 이야기꾼은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아니다. 그는 이야기 바깥에서 3인칭 시점(視點, point of view)을 가진다. 그리고 이야기의 전체 줄거리와 모든 사건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다양한 특성과 생각과 감정까지 다 알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서의 이야기꾼은 전지적(全知的, omniscient)이다. 그는 복음서 이야기를 읽는 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독자는 그를 신뢰한다.


이야기꾼이 인물 묘사를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문학 장치(literary devices) 중 대표가 ‘말하기(telling)’와 ‘보여 주기(showing)’다. 말하기는 등장인물에 대한 직접 소개(direct presentation)다. 이야기꾼은 등장인물을 직접 설명한다. 즉 등장인물의 특성, 성향, 동기 등을 직접 소개한다. 그리고 이야기꾼은 등장인물을 직접 평가하기도 한다.


보여 주기는 등장인물에 대한 간접 소개(indirect presentation)다. 이야기꾼은 등장인물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하고, 등장인물이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야기꾼은 등장인물의 독백이나 내적 관점을 통해 그의 내밀한 생각이나 감정을 보여 주기도 한다.


등장인물과 독자의 반응


복음서 이야기를 읽는 독자(reader)는 본문(text)을 통해 저자(author)와 만난다. 즉 마르코 복음서를 통해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이루어진다. 저자는 자기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저자인 이야기꾼은 다양한 등장인물과 그들에 대한 인물 묘사를 통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즉 이야기꾼은 자기 이야기를 통해 등장인물에 대한 독자의 이해에 영향을 주려 한다. 이야기꾼은 등장인물에 대한 독자의 반응(reaction)에 영향을 주려 한다.


복음서의 독자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만나는 여러 등장인물에 대해 여러 반응을 나타낸다. 독자의 반응에는 긍정과 부정이 있다. 첫 번째 긍정적 반응은 ‘공감(共感, sympathy)’이다. 이 반응은 독자가 어떤 등장인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긍정적 관계를 가리킨다. 두 번째 긍정적 반응은 ‘하나 되기(empathy)’다. 이 반응은 공감보다 더 강한 긍정적 관계로, 독자는 등장인물 안에서 자신과 공통점을 발견하고 하나가 되는 동일화(同一化, identification)의 단계에 다다른다. 한편 독자의 부정적 반응은 ‘반감(反感, antipathy)’이다. 이것은 독자가 등장인물을 거부하는 부정적 관계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제자들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르코 복음서의 첫 번째 주제는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이다. 그렇다면 마르코 복음서의 두 번째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어떻게 뒤따를 것인가?’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정체’와 ‘예수님을 뒤따르기’가 마르코 복음서의 두 주제다. 이야기꾼은 복음서 이야기의 전체 줄거리를 통해 두 주제를 다룬다.


두 번째 주제와 관련하여 복음사가는 이야기 안에서 어떤 등장인물이 예수님을 뒤따랐는지, 또 어떻게 뒤따랐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동시에 어떤 등장인물이 예수님을 뒤따르지 않았는지 말하고자 한다. 결국 저자인 이야기꾼은 ‘예수님을 뒤따르기’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등장인물의 모습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래서 이야기꾼은 독자인 우리가 복음서의 등장인물에 대해 나타내는 반응에 영향을 주려고 한다.


우리가 복음서의 다양한 등장인물 중에 먼저 제자들을 살펴보려는 이유도 그것이 마르코 복음서의 큰 주제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등장인물 중에 ‘예수님을 뒤따르기’를 가장 먼저 실천했던 이들이 바로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먼저 읽을 본문은 1,16-20이다. 즉 예수님께서 첫 제자를 부르신 본문이다. 이 본문을 읽기에 앞서 복음서 본문 읽기의 기본 태도와 방법을 살펴보려 한다.


[성서와 함께, 2010년 10월호, 송창현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5) 제자들의 뒤따르기


1,16-20 읽기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마르코 복음서의 큰 주제 중 하나인 ‘예수님을 뒤따르기’와 관련하여 첫 번째로 읽을 본문은 1,16-20이다. 여기서 우리의 1차 관심은 제자들에게 집중될 것이다.


① 단락 나누기


본문 읽기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읽을 본문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단락을 나누는가? 일반적으로 복음서에서 새 단락은 새로운 등장인물의 소개, 장소의 이동과 시간의 변화에 대한 언급 등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상황 묘사에 해당하는데 단락을 나누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1,16은 새로운 단락의 전형적 시작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주인공 예수님과 새로운 등장인물인 시몬과 안드레아가 소개되고, ‘갈릴래아 호숫가’라는 새로운 공간적 배경이 언급된다. 그리고 1,21은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로 시작하는데, 새로운 장소인 카파르나움과 회당이 소개되고 시간적 배경인 안식일이 언급된다. 즉 21절은 단락의 시작이다. 따라서 16절에서 시작한 본문은 또 다른 새 단락이 시작되기 전인 20절에서 끝난다. 이와 같이 우리는 1,16-20의 본문을 문학적으로 단일한 단락으로 볼 수 있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하나의 문학 장르인 복음서에 사용된 문학 양식은 다양한데, 크게 둘로 나누면 ‘예수 말씀 양식’과 ‘예수 사화(史話) 양식’이다. 그중에서 예수 사화 양식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인 소명 사화, 반대자들과의 논쟁 이야기인 논쟁 사화, 병자와 불구자를 고치신 치유 기적 사화, 악령을 내쫓으신 구마 기적 사화, 죽은 사람을 살리신 소생 기적 사화, 자연과 관련된 자연 기적 사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수난 사화 등이 있다. 이 분류에 따르면 본문의 문학 양식은 소명 사화(召命史話)다.


본문은 두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장면은 16-18절이고 두 번째 장면은 19-20절이다. 두 장면은 ‘상황 묘사, 부르심, 응답’이라는 동일한 문학 구조를 가진다.1)


첫 번째 장면의 상황 묘사(16절)에는 사건이 일어날 공간적 배경이 제시되고 등장인물이 소개된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paravgwn) 시몬과 안드레아를 보셨다(eiden).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그들을 보셨다. 시몬과 안드레아는 그들의 이름으로 불리고 가족 관계로 소개된다. 그들은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첫 제자를 부르신 사건은 일상의 자리,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다.


부르심(17절) 부분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직접 인용된다. 부르심의 핵심 내용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초대, 그분과 관계하는 초대이다.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던 사람들을 그분의 친교 공동체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고기를 잡던 어부가 사람 낚는 어부로 변화되는 것이다.


응답(18절) 부분에서 부사 ‘곧바로(eujquv?’는 부르심 받은 제자들의 즉각적 응답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응답은 ‘버리다(ajfivhmi)’와 ‘뒤따르다(ajkolouqevw)’는 동사로 표현된다. 버림은 뒤따름의 조건이고 뒤따름은 버림의 목적이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동사 ‘뒤따르다’다. 이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제자가 되다’를 의미한다.


두 번째 장면의 상황 묘사(19절)는 첫 번째 장면의 상황 묘사와 매우 유사하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을 보셨다(eiden). 예수님께서 부르실 이들을 먼저 보셨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도 그들의 이름으로 불리고 가족 관계로 소개된다. 그들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그때까지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고 있었다.


부르심(20ㄱ절) 부분에서는 첫 번째 장면의 자세한 부르심 내용과 달리 ‘부르셨다(ejkavlesen)’는 동사로 표현된다. 응답(20ㄴ절) 부분에서 제자들은 아버지를 버려두고(ajfivhmi)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여기서 우리는 버림과 뒤따름의 관계를 발견한다.


본문의 구조에 따라 자세히 읽은 다음에는 본문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뒤따랐다. 그리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이 변화는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가? 그것은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초대에 의해 일어났다. 즉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에서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제자들의 긍정적 응답에 의해 일어났다. 이 응답은 예수님 없는 삶을 버리고 예수님과 관계 있는 삶, 그분의 공동체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③ 문맥 살피기


본문(text)을 자세히 읽었으니 이제 본문의 전후 문맥(context)을 살펴보자. 본문 바로 앞의 단락(1,14-15)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신다. 15절에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구절과 바로 뒤이어 나오는 본문은 어떤 관계일까?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신 후 하신 첫 번째 일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투신할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그것을 위해 일할 사람들을 필요로 하며, 제자들의 사명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뒤따라 나선 제자들은 15절에서 초대하신 회개와 믿음의 참된 모범이 된다.


그리고 바로 뒤이은 21절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에서 주어는 3인칭 복수인 ‘그들은’이다. 마르코 복음서가 시작된 후 예수님께서는 항상 단수 주어로 등장하신다. 그러나 첫 네 제자를 부르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과 공동체를 이루신다. 그리고 첫 제자들인 시몬,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의 위치와 역할은 복음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차 드러날 것이다.


④ 자기 것으로 하기


본문을 읽는 오늘의 그리스도인 독자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뒤따라 나섰던 제자들의 행동에 공감(sympathy)하게 된다. 복음서의 제자들이 부르심과 응답을 체험했듯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체험이 있다. 더욱이 독자는 제자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과 동일화(identification)한다. 그래서 제자들의 탁월한 모범에 독자는 긍정적 반응을 나타내며 예수님 뒤따르기의 모델인 제자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현실을 되돌아본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그분을 뒤따르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성서와 함께, 2010년 11월호, 송창현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6) 제자들의 정체성과 사명


3,13-19 읽기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는 마르코 복음서의 등장인물 중에 제자들에 관해 살펴보고 있는데, 이번에 읽을 본문은 3,13-19이다. 이는 ‘예수님을 뒤따르기’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1,16-20과 2,14에 이어 세 번째 본문이다.


① 단락 나누기


3,13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즉 새로운 공간적 배경으로 ‘산’이 언급된다. 바로 앞 단락인 3,7-12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즉 7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로 시작한다. 한편 3,20에는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호숫가(7절), 산(13절), 집(20절) 순으로 이동하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3,13-19은 ‘산’이라는 하나의 공간적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문학적 단일성을 가진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는데 여기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늘의 하느님과 땅의 인간이 만나고 소통하는 장소이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소통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의 산은 탈출 24,4의 산을 연상케 한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 하느님의 백성을 형성하기 위해 ‘열두’ 지파를 모았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열둘’을 세우신다.


예수님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신다. 1,16.19과 2,14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먼저 ‘보셨던’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기 전에 ‘원하시는’ 이들을 당신께 나아오게 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라는 점이다. 미완료는 과거 동작의 지속이나 반복을 표현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일정 기간 동안 계속 ‘원하고 계셨던’ 이들 중에서 ‘열둘’을 선택하신 것은 다분히 상징적이고 의도적이다. 이처럼 동사 - - -에서 열둘을 세우시는 예수님의 의지가 잘 드러난다. 즉 열두 지파로 옛 하느님의 백성이 이루어졌듯이, 이제 열둘을 세우시어 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기를 원하셨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사도는 본디 ‘파견된 이’를 의미하며, 나아가 ‘사명을 가지고 파견된 이’를 뜻한다. ‘열둘’의 사명은 14-15절에 명시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신 목적은 종속 접속사 - -가 두 번 이끄는 두 개의 목적절에서 잘 표현된다. 첫 번째 목적은 '- - - - - - ', 즉 ‘그들이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하여’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이 열둘을 세우신 첫 번째 목적이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친교(communion)를 의미하고, 그분과 공동체(community)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난 제자들은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친교로 그분을 알게 되고 그분에게서 배우게 된다. 예수님과 만난 제자들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그들도 친교를 나눈다. 이렇듯 예수님과 제자들은 공동체를 이룬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있음’은 제자 됨의 의미, 곧 제자들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신 두 번째 목적은 ‘그들을 파견하기 위해서’이다. 열둘은 먼저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하여 세워졌다. 그런데 그것은 파견으로 연결된다. 파견은 열둘의 ‘사명’을 의미한다. 사명은 뒤이은 두 개의 부정사를 통해 표현되는데, 첫째는 ‘선포하기’이고 둘째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기’이다. 이처럼 열둘은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 파견되며, 그것이 제자들의 사명이다.


3,16-19은 열둘의 명단이다. 그 명단은 마태 10,2-4과 루카 6,14-16과 사도 1,13에도 나온다. 그 네 명단을 비교해 보면, 사도들의 이름과 순서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네 명단의 공통점은 시몬 베드로가 첫 사도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이라고 소개된다.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도는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야고보와 요한이다. 여기서 첫 세 사도는 본명과 함께 별명이 소개된다.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는 것은 특별한 소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네 번째 사도는 안드레아이다. 여기서 열둘의 첫 네 사도는 1,16-20에서 처음 부르심을 받은 네 제자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 소명 사화에서 ‘예수님을 뒤따르기’의 탁월한 모범인 시몬, 야고보, 요한, 안드레아가 열둘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서와 함께, 2010년 12월호, 송창현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7) 예수님의 참가족


3,31-35 읽기


지난 호에서는 3,13-19을 읽으면서 제자들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제자들의 정체성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그들의 사명은 ‘예수님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주요한 등장인물인 제자들의 긍정적 모습을 살펴보고 있는 우리가 이번호에서 함께 읽을 본문은 3,31-35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가 새로운 의미를 띠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함께 그 의미를 찾아 나서 보자.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① 단락 나누기


3,13-19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신 장소는 산이다. 그 후 2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집으로 가신다. 그 집에서 일어난 사건은 35절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4,1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그런데 3,21에 따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선다. 그들은 3,31에서 무대 전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21절과 31절 사이, 즉 22-3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베엘제불에 관해 논쟁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31절부터 새 단락이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이 단락은 35절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4,1에서 장소가 바뀌고(호숫가) 새 단락이 시작된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단락의 첫머리에서 새로운 등장인물인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소개된다. 그들은 예수님을 나자렛으로 다시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다. 그래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집 밖에 서 있고,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신다. 또 예수님 둘레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이들도 집 안에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말씀도 듣지 않고 있다. 이 장면은 예수님과 친척들 사이의 갈등을 암시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분을 밖으로 나오게 하여 그분의 사명을 방해하려 한다.


32절에서 예수님 둘레에 앉아 있던 군중이 친척들의 방문을 그분께 알린다. 여기서 친척들이 밖에서 찾는다는 사실이 다시 언급된다. 예수님 둘레에 있던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있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그들은 우선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특히 3,13-19에서 세워진 ‘열둘’이다. 동시에 그 군중에는 그분의 가르침을 듣는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질문을 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 그분께서는 친척들과의 갈등을 피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혈연관계에 거리를 두신다. 사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에게는 혈통과 가족 관계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제시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당시 상황에서 엄청난 도전이며 혁명적 시도이다.


3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신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동사 ‘둘러보다’는 여섯 번 사용되는데, 예수님의 행동으로 다섯 번 표현된다(3,5.34; 5,32; 10,23; 11,11).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치유 행위를 하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노기를 띠고 그들을 둘러보신다(3,5 참조). 그러면서 율법의 안식일 규정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익명성과 폭력성을 폭로하신다. 또 어떤 부자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거절한 후(10,17-22 참조)에 예수님께서는 주위를 둘러보시며(10,23 참조)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부자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번 호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그들이 누구인지 한 사람씩 살피시고, 당신과 그들의 관계를 확인하신다. 이와 같이 그분께서는 당신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중대한 선언을 하시기 전에 먼저 그들을 둘러보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 우리는 마르코 복음서의 소명 사화(1,16-20; 2,14 참조)에서 제자들을 부르기 전 먼저 그들을 보셨던 행동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행동이나 말씀을 하실 때 먼저 그들을 ‘보신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4ㄴ-35절)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새 가족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분과의 친교(communion)에 바탕을 두어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community)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이르는 길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새 가족은 우선 그분의 제자들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의 공동체를 새로운 가족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의 새 가족은 제자들뿐 아니라 더 넓은 차원으로 열려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는 누구나 새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


[성서와 함께, 2011년 1월호, 송창현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8)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4,35-41 읽기


우리는 지금까지 마르코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의 긍정적 모습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는 제자들의 모습(1,16-20; 2,14 참조), 제자들의 정체성과 사명(3,13-19 참조), 예수님의 참가족의 의미(3,31-35 참조)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복음서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제자들의 긍정적 면만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제자들의 몰이해(incomprehension)라는 모티프와 관련하여 함께 읽을 본문은 4,35-41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서의 두 가지 주제인 ‘예수님의 정체’와 ‘예수님을 뒤따르기’가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① 단락 나누기


4,1-34은 예수님의 비유와 그 설명의 모음이다. 그런데 4,35에서 시간적 배경이 바뀌어 “그날 저녁이 되자”로 표현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시고 배를 타신다. 한편 5,1은 “그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4,35-41은 갈릴래아 호수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탄 배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한다. 이렇게 단락을 나누어 문학적 단일성을 발견한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먼저 본문(4,35-41)의 문학 양식과 문학 구조를 살펴보자. 본문의 문학 양식은 호수의 풍랑이라는 자연현상과 관련된 자연 기적사화이다. 그리고 본문의 문학 구조는 ‘상황 묘사, 문제 발생, 문제 해결, 결과’로 나눌 수 있다. 사실 복음서의 본문(text)은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잘 짜인 하나의 천과 같다. 따라서 본문의 짜임새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본문의 구조에서 ‘상황 묘사’는 단락의 시작으로, 곧 펼쳐질 사건의 중요한 요소인 등장인물, 공간적 배경, 시간적 배경 등을 소개한다. 다음 단계인 ‘문제 발생’에서는 등장인물 사이에 생겨나는 갈등과 긴장이 표현된다. 그리고 ‘문제 해결’ 단계에서는 앞 단계에서 생겨난 갈등이 해결되고 긴장이 해소된다. 마지막으로 ‘결과’는 단락 전체를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본문을 자세히 읽는다는 것은 이러한 본문의 구조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그 변화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분석을 통해 본문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제시한 문학 구조에 따라 본문을 나누면 다음과 같다.


상황 묘사(35-36절) :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문제 발생(37-38절) :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문제 해결(39-40절) :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결과(41절) :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본문은 예수님의 주도권으로 시작한다. 1,38에서 제자들에게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다. 갈릴래아 호수 저쪽은 이방인들의 지역인 데카폴리스 지방을 가리킨다(5,20 참조). 사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다고 서술한다(4,35-41; 6,45-52; 8,13-21 참조). 6,45에서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8,13에서는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이번호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남겨 둔 채 제자들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신다. 한 배를 탄 예수님과 제자들은 운명 공동체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호수에서 거센 돌풍이 일어 물이 배 안에 가득 차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제자들은 생명을 위협 받게 된다. 그들은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게다가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셔서 제자들을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신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워 도움을 청하려 한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여기서 제자들은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인정한다. 이 단어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열두 번 사용되는데 모두 예수님에게 적용된다. 이 말은 1,24에서 카파르나움 회당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한 말,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와 유사하다. 즉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와 ‘멸망시키러’에서 동일한 동사가 사용된다. 이 문제 발생 단계에서 생긴 예수님과 제자들의 갈등과 긴장은 어떻게 해결될까? 예수님께서는 풍랑의 위협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실까?


마침내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에게 명령하신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그러자 바람과 호수가 예수님에게 복종한다. 이렇게 하여 앞선 단계에서 발생한 문제가 해결된다. 이 문제 해결의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있다. 그분은 당신 말씀으로 호수의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신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여기서 겁과 믿음은 대조를 이룬다. 겁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있었는데도 풍랑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그분이 현존하시는데도 위기의 순간에 그분이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믿음은 중요한 주제인데, 그것은 1,15에 나타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예수님의 요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실 제자들은 그때까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많은 행적을 보았지만 그분이 과연 누구신지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몰이해를 꾸짖으신다.


단락은 제자들의 질문으로 끝난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이 말은 1,27에 언급된 사람들의 반응과 유사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두 구절에서 더러운 영과 자연의 힘이 모두 예수님에게 복종한다. 본문의 결말 부분에서 마침내 제자들은 처음으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질문한다. 이는 제자들의 몰이해라는 모티프와 관련 있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참된 제자는 그분이 누구신지 이해하지만 본문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제자들의 부정적 모습이 드러난다.


[성서와 함께, 2011년 2월호, 송창현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9) 스승님은 그리스도


8,27-30 읽기


마르코 복음서의 큰 주제,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은 8,27-30(‘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이다. 이는 마르코 복음서의 중앙에 위치하며 내용상 전환점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고백이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정체’와 ‘예수님을 뒤따르기’라는 두 주제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① 단락 나누기


8,27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카이사리아 필리피를 향해 가고 있다는 언급으로 시작한다. 등장인물과 새로운 장소에 대한 언급은 새 단락의 시작을 가리키는 전형적 요소이다. 이번호 본문 바로 앞 단락은 예수님께서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고치신 이야기이다. 그리고 8,31은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예고이다. 이 예고는 9,30-31과 10,33-34에서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8,27-30은 동일한 장소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묘사하는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먼저 본문의 문학 구조를 상황 묘사(27ㄱ절), 첫 번째 대화(27ㄴ-28절), 두 번째 대화(29절), 침묵 명령(30절)으로 구분한다. 이 구조에 따라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자.


상황 묘사에서는 사건이 펼쳐질 무대가 소개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나타난다. 그들은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로 가고 있다. 새로운 장소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의 일행이 갈릴래아를 떠나 새로운 지역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갈릴래아의 영주는 헤로데 안티파스였고,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다스리던 지역에 속하였다(루카 3,1 참조). 따라서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여정을 시작하신다는 의미이다.


[성서와 함께, 2011년 3월호, 송창현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10) 길 위의 예수님과 제자들


8,31-9,1 읽기


8,27-30(‘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은 마르코 복음서 전체에서 큰 분수령을 이룬다. 여기서 복음서의 후반부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시작하시고, 그 ‘길’에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차례 예고하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후에 시작된 그 ‘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 ‘길’에서 ‘예수님의 정체’와 ‘예수님 뒤따르기’라는 두 주제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① 단락 나누기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8,27-30)은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로 향하는 ‘길’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나오는 8,31-9,1에서는 장소와 시간의 변화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9,2에서 ‘엿새 뒤’라는 새로운 시간적 배경,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새로운 등장인물, ‘높은 산’이라는 새로운 공간적 배경이 언급된다. 비록 우리가 읽는 《성경》에서 8,31-33과 8,34-9,1이 따로 떨어져 있지만, 여기서는 8,31-9,1을 하나의 단락으로 설정한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본문의 문학 구조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수난과 부활 예고(8,31), 둘째, 베드로의 몰이해(8,32), 셋째, 예수님의 가르침(8,33-9,1)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oJ cristov?라고 고백한 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identity)를 새로운 차원에서 말씀하신다. 그것이 바로 수난과 부활 예고이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가 되는 것(discipleship)이 무엇인지 가르치신다. 여기서 ‘예수님 뒤따르기’라는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1) 수난과 부활 예고(8,31)


베드로가 당시 유다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 사상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면, 이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메시아의 모습을 제시하신다. 즉 당신은 고통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시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라는 호칭 대신 다니 7,13-14에 언급된 ‘사람의 아들(oJ ui Jov?tou' ajnqrwvpou)’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당시 유다인들이 생각했던 정치적 임금, 승리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약하고 고통당하는 메시아시다. 그래서 당신의 그리스도 정체와 관련하여 제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으려 하신다. 새로운 메시아의 모습은 하느님의 계획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본문에서 ‘반드시 ~해야 한다(de i')’로 표현된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인 원로, 수석 사제,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면서 언급한 14-16장에서 일어날 것이다.


2) 베드로의 몰이해(8,3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예고는 베드로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한다. 여기서 ‘반박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ejpitimavw(에피티마오)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들을 꾸짖으실 때 사용된다(1,25; 3,12; 9,25 참조). 그리고 곧이어 8,33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신다. 이처럼 8,32에 표현된 베드로의 반응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incomprehension) 처지를 잘 드러낸다.


3) 예수님의 가르침(8,33-9,1)


베드로의 몰이해와 반대에 직면한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다. 다른 제자들도 지금 벌어지는 사건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8,33) 하고 꾸짖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과 베드로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다. 베드로의 자리는 예수님의 ‘뒤(ojpivsw mou)’이다. 이 말씀은 1,17에서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제자로 부르실 때 사용하신 ‘내 뒤로(ojpivsw mou)’라는 표현을 회상시킨다. 제자는 스승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베드로를 다시 부르신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일(ta?tou' qeou')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ta?tw'n ajnqrwvpwn)만을 생각하여 ‘예수님 뒤따르기’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혹자, 반대자를 의미하는 사탄으로 불린다. 이처럼 고통과 죽임을 당하는 새로운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정체’를 밝히는 수난과 부활 예고는 제자들의 몰이해와 직면하는데, 이것이 ‘예수님 뒤따르기’에 대한 가르침의 계기를 제공한다.


참된 제자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뒤따라야 한다(8,34 참조). 그리고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은 예수님과 친교를 이루는 것인데, 이것이 충만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8,35.38 참조). 제자는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 사이의 갈등(8,33 참조), ‘내’가 원하는 것과 ‘예수님 뒤따르기’가 요구하는 것 사이의 갈등(8,34 참조), 자기 목숨을 구하는 것과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믿음이 요구하는 것 사이의 갈등(8,35 참조), 세대 사람들에게 맞추는 것과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 사이의 갈등(8,38 참조)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참된 제자는 이 갈등 속에서 자기 목숨을 포함하여 무엇보다 ‘예수님 뒤따르기’와 예수님과의 친교를 최상의 가치로 삼는다.


[성서와 함께, 2011년 4월호, 송창현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11) 겟세마니의 제자들


14,43-50 읽기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8,27-10,52 참조)에서도 ‘예수님의 정체’와 ‘예수님을 뒤따르기’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마침내 11,1-11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들은 군중과 함께 환호한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며 활동하신다. 11,22-24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힘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11,25에서는 용서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12,43-44에서는 생활비를 모두 봉헌한 가난한 과부를 모범으로 제시하신다. 제자들은 여전히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데 반해 과부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한다. 13장의 종말론적 말씀에 이어 14,1부터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우리가 자세히 읽을 본문은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14,43-50이다.


“그러자 곧,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그가 와서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하고 나서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그때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예수님께서 나서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① 단락 나누기


14,32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겟세마니(Geqshmaniv)로 간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기도하신다. 14,33-42에는 예수님의 기도와 자고 있는 세 제자들에 대한 말씀이 세 차례 언급된다. 14,43에서는 같은 장소인 겟세마니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곧 유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타난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한다. 14,51-52은 새로운 등장인물인, 알몸으로 달아난 어떤 젊은이에 관한 장면이다.


따라서 14,43-50은 겟세마니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체포 사건에 관한 본문으로 문학적 단일성을 가진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본문의 전반부인 14,43-47에서 사건을 주도하는 등장인물은 유다이다. 배신자 유다가 등장한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 겟세마니에서 말씀하고 계실 때이다. 유다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ei?tw'n dwvdeka)”(43절)로 소개된다. 이 표현은 유다의 배신 장면인 14,10과 최후의 만찬 장면인 14,20에서 유다를 소개할 때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유다가 ‘열둘’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의 부정적 모습을 발견한다.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열둘(dwvdeka)’ 중의 하나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분을 체포하려는 사람들을 안내한다. 유다가 동행한 이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43절)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8,31; 11,27; 14,53; 15,1에서도 동일하게 소개된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와서 ‘스승님(rJabbiv)’이라고 인사하고 입을 맞춘다. 여기서 우정의 표현인 입맞춤이 배신의 신호가 된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46절). 이어서 14,48-49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서술된다. 그분은 벌어지는 일을 성경과 관련시키신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부정적 모습에 둘러싸여 계신다. 즉 14,43-46에는 배신자 유다의 행동이 묘사되고 14,50에는 다른 모든 제자의 부정적 모습이 표현된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kai; ajfevnte?aujto;n e[fugon pavnte].” 여기서 ‘모두(pavnte)’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14,27)를 회상케 한다.


그리고 제자들의 행동을 표현하는 동사는 “버리다”와 “달아나다”이다. 특히 ‘버리다(ajfivhmi)’ 동사는 마르코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의 “예수님을 뒤따르기”와 관계된다. 첫 네 제자를 부르신 본문인 마르 1,16-20에서 이 동사는 두 번 사용된다. 18절에서 시몬과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ajfevnte) 예수님을 뒤따랐다. 그리고 20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버리고(ajfevnte)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이와 같은 의미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인 10,28에서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ijdou; hJmei'?ajfhvkamen pavnta kai; hjkolouqhvkamevn soi)”고 말한다. 여기서도 ‘버리다(ajfivhmi)’와 ‘뒤따르다(ajkolouqevw)’ 동사가 함께 사용된다.


이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뒤따랐다. 그들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과의 친교(communion)를 선택하여 그분과 공동체(community)를 형성하였다.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교와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정확히 말해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순간에 결정적 파국을 맞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뒤따랐던 제자들이 마침내 그분마저 버린다. ‘예수님을 뒤따르기’와 그분과의 친교를 위한 조건으로 제시된 동사 ‘버리다’가 겟세마니에서는 그분과의 관계 단절을 표현한다. 1,18.20과 10,28에서 제자들의 긍정적 모습을 표현하는 동사 ‘버리다’가 14,50에서는 부정적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③ 문맥 살피기


이제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라는 문맥에서 제자들의 몰이해와 부정적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14,1-2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 14,3-9에는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일을 서술한다.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자 몇 사람이 불쾌해하며 나무랐다. 제자들도 그 여자가 행한 행동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14,6-9에서 그 행동의 의미를 설명하신다. 14,10-11에서는 유다의 배신이 묘사된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수석 사제들을 찾아갔다. 유다는 돈을 받기로 하고 결국 예수님을 넘기고 만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파스카 만찬을 준비하고(14,12-16 참조) 그분과 함께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배신을 예고하신다(14,18 참조). 그러자 유다와 열 한 제자가 차례로 “저는 아니겠지요?”(14,19)라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고(14,20-21 참조), 이 말씀이 본문에서 이루어진다. 유다는 결국 거짓말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중에 성찬례를 제정하시고(14,22-25 참조) 제자들과 함께 올리브 산으로 가신다. 거기에서 베드로가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예고하신다. 그러자 베드로는 두 번이나 강하게 부정한다(14,27-31 참조). 29절에서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하고, 31절에서는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고 한다. 곧이어 복음사가는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14,32-42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세 제자,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14,33.37.40 참조).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고 배반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이들이다.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은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제자들이다.


그들은 1,16-20에서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13,16-17에 따르면 세 사람은 열두 사도의 명단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5,37 참조)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9,2 참조)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다. 13,3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아와 함께 세 제자에게 종말론적 가르침을 말씀하신다. 이처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열두 제자 중에서도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으며, 예수님께서 총애하신 제자들이었다. 그들마저도 겟세마니에서 부정적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문맥에서 마침내 제자들의 몰이해가 더 잘 드러난다. 배신자 유다의 행동뿐 아니라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는 제자들의 행동에서 부정적 모습이 분명히 묘사된다. 그 후 14,53-65에서 예수님께서는 최고 의회에서 신문을 받으신다. 침묵하시던 예수님께서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61절)라고 묻는 대사제의 말에, “그렇다”(62절)고 대답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당신의 정체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메시아)’라고 인정하신다.


한편 14,66-72에서 베드로는 마침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4,3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강하게 부정했던 베드로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다. 제자들 중에, 특히 ‘열둘’ 가운데에서 첫 번째인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특히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부정적 모습을 더 분명히 드러낸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에게서 일어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버리고 부인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까이 가실수록 제자들은 그분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는 파국을 맞게 된다.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교가 예루살렘에서 단절된다.


[성서와 함께, 2011년 5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12) 다시 부르시는 예수님


16,1-8 읽기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갈등이 예루살렘에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는 순간 제자들은 그분을 버리고 달아난다. 베드로마저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반대자들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다. 결국 그분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신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가? 제자들의 배반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예수님 뒤따르기’와 ‘참된 제자 되기(discipleship)’라는 주제의 끝은 아니다. 이야기의 대반전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번에 함께 읽을 본문은 16,1-8이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① 단락 나누기


16,1-2에 나타난 시간적 배경은 ‘안식일이 지나자’와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이고, 등장인물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이다. 공간적 배경으로 ‘무덤’을 언급하는 것은 새로운 단락이 시작됨을 알리는 전형이다. 이 시작 부분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안장되시는 장면(15,42-47 참조) 바로 뒤에 나온다. 그리고 16,9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간 첫날 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 나타나신 장면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16,1-8은 무덤에서 있었던 사건을 서술하여 문학적 단일성을 띤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멀리서 지켜보던 여인들이었다(15,40 참조).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로 소개된다(15,41 참조).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모셔지는지 지켜보았던 이들이다(15,47 참조).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증인이 바로 그분 부활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부활의 증인 역할을 한다.


15,46에 따르면,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포로 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시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이번 본문에서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리기 위해 무덤에 갔다. 그들이 만나기를 예상했던 예수님은 시신이 된 예수님이다. 그런데 무덤 입구의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고 웬 젊은이가 무덤 안에 있었다. 그는 6절에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hjgevrqh)”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부활은 동사 ‘일으키다(ejgeivrw)’의 단순과거 수동태로 표현된다. 이 수동태는 행위의 주체가 하느님임을 알리는 신적 수동태(神的 受動態, divine passive)이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사건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그분이 걸으신 길에 대한 사람들의 응답이었다면, 그분의 부활은 예수님의 길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적이고 결정적 대답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시신으로 존재하지 않으신다. 7절에서 젊은이는 여인들에게 명령법 동사인 ‘가라(uJpavgete)’와 ‘말하라(ei[pate)’를 써서 전한다. 여인들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고 말해야 한다. 젊은이는 먼저 14,28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예고,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나는 먼저 갈 것이다(proavxw)’ 동사는 ‘먼저 가다’, ‘앞서 가다(proavgw)’의 미래 시제이다. 그런데 16,7의 ‘그분은 먼저 가실 터이니(proavgei)’가 현재 시제로 표현된다. 미래 시제가 예수님의 예고 말씀을 가리킨다면, 현재 시제는 그 예고가 이미 실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동사 ‘앞서 가다(proavgw)’의 의미이다. 이 동사는 앞서 언급한 두 구절을 포함하여 마르코 복음서에서 총 다섯 번 사용되었다. 6,45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당신보다 먼저 벳사이다로 가게 하시는데, 여기서 동사 ‘앞서 가다’는 시간을 뜻한다. 10,32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고(hn proavgwn) 뒤따르는 이들(oiJ ajkolouqou'nte)은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동사 ‘앞서 가다’는 공간을 뜻하며 ‘뒤따르다(ajkolouqevw)’와 짝을 이룬다. 11,9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는 예수님을 ‘앞서 가는 이들(oiJ proavgonte?’과 ‘뒤따라 가는 이들(oiJ ajkolouqou'nte)’이 언급된다. 여기서도 동사 ‘앞서 가다’는 공간을 뜻하면서 ‘뒤따르다’와 함께 나타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동사 ‘앞서 가다’는 10,32; 14,28; 16,7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표현한다. 그리고 ‘뒤따르다’와 짝을 이룬다. 즉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가다’, ‘앞서 가다’ 동사로 표현되고 제자들은 ‘뒤따르다’로 표현된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먼저 가다’, ‘앞서 가다’는 제자들의 ‘뒤따르다’를 가능하게 한다.


[성서와 함께, 2011년 6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13)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지난 호까지 우리는 마르코 복음서의 큰 등장인물(major characters)인 예수님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복음서의 두 가지 대주제인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와 ‘예수님을 어떻게 뒤따를 것인가?’를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작은 등장인물(minor characters)을 중심으로 마르코 복음서를 다시 읽으려 한다. 그들과 함께 ‘예수님의 정체’와 ‘예수님을 뒤따르기’라는 두 주제를 살펴 보자.


작은 등장인물


복음서의 큰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의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인 제자들, 반대자들, 군중이다. 이에 비해 작은 등장인물은 줄거리 구성에서 주변에 나오는 인물이다. 큰 등장인물은 복음서의 여러 장면에 자주 나타나고 그들 사이에 생기는 갈등으로 사건이 벌어진다. 그러나 작은 등장인물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한두 장면에만 나올 뿐이다.


대부분 그 이름이 불리지 않고 단지 더러운 영이 들린 어떤 사람(1,21-28), 시몬의 장모(1,29-31), 어떤 나병 환자(1,40-45), 어떤 중풍 병자(2,1-12), 어떤 손이 오그라든 사람(3,1-6), 게라사의 더러운 영이 들린 어떤 사람(5,1-20), 어떤 하혈하는 부인(5,25-34), 어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7,25-30), 벳사이다의 눈먼 이(8,22-26), 벙어리 영이 들린 어떤 아이의 아버지(9,14-29), 어떤 부자(10,17-22), 어떤 율법 학자(12,28-34), 어떤 가난한 과부(12,41-44), 베타니아의 어떤 여자(14,3-9), 어떤 백인대장(15,39)이라고 언급된다.


물론 예외가 있다. 회당장 야이로(5,21-24.35-43), 예리코의 바르티매오(10,46-52), 키레네 사람 시몬(15,21), 십자가 아래의 여인들(15,40-41),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15,42-47), 무덤에 간 여인들(16,1-8)은 자기 이름으로 불린다.


작은 등장인물은 제자들과 반대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들의 만남은 제자들과 반대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방식과 어떻게 다른가? 작은 등장인물은 이야기의 줄거리에서 무슨 특징을 가지고 어떤 역할을 하는가? ‘예수님의 정체’와 ‘예수님을 뒤따르기’라는 복음서의 두 가지 대주제와 관련하여 그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특히 그들은 제자들과 어떻게 대조되어 나타나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면서 마르코 복음서가 첫 번째 작은 등장인물로 소개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1,21-28)를 함께 읽어 보자.


1,21-28 읽기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① 단락 나누기


1,16-20은 예수님께서 첫 네 제자를 갈릴래아 호수에서 부르시는 단락이다. 그런데 21절에는 새로운 장소(카파르나움, 회당)와 시간적 배경(안식일)이 언급된다. 곧 새 단락의 시작을 나타내는 전형이다. 그리고 29절에서 예수님의 일행은 회당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이동한다. 따라서 1,21-28은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안식일에 있었던 사건을 서술하는 문학적 단일성을 가지기 때문에 한 단락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1,21-28의 문학 양식은 기적사화(奇蹟史話)이다. 그중에서도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구마(驅魔) 기적사화이다. 이 문학 양식의 일반적 구조는 (1) 구마자(驅魔者)와 부마자(付魔者)의 만남, (2) 부마자의 말, (3) 구마자의 말, (4) 구마 발생, (5) 목격자의 반응이다. 이 본문도 동일한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구조를 (1) 상황 묘사: 21절, (2) 문제 발생: 22-24절, (3) 문제 해결: 25-27절, (4) 결과: 28절로 나누어 읽으려 한다.


상황 묘사인 21절의 시작은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이다. 동사 ‘가다(eijsporeuvontai)’는 3인칭 복수 형태이다. 주어의 정체는 앞 단락 1,16-20의 등장인물인 예수님, 시몬,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첫 네 제자와 공동체를 이루신 후 처음으로 등장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활동한 첫 장소는 카파르나움이다. 본문의 시간적 배경은 ‘안식일’이고 공간적 배경은 ‘회당’이다. 안식일은 종교적 시간이고, 회당은 종교적 공간으로 공적으로 공개된 장소이다.


[성서와함께, 2011년 7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14) 어떤 나병 환자


지난 호부터 우리는 작은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마르코 복음서를 다시 읽고 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1,21-34은 예수님께서 하루 동안 카파르나움에서 활동하신 이야기이다. 1,21-28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1,29-31에서 시몬의 장모를 고치신다. 여기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시몬의 장모는 작은 등장인물이다. 예수님께서는 1,32-34에서 치유와 구마 활동을 계속하신다.


카파르나움에서 보냈던 하루가 예수님께서 지내시는 일상의 전형이다. 따라서 독자인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 행위가 계속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또 도움이 필요한 작은 등장인물에게 예수님께서 긍정적으로 반응하시리라 기대하게 된다.


이제 우리가 만날 작은 등장인물은 1,40-45의 ‘어떤 나병 환자’이다. 복음서 이야기에서 그는 어떤 특징을 지니며, 그가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1,40-45 읽기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 들었다.”


① 단락 나누기


1,35에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나가 기도하셨다. 39절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하신 활동 전체를 요약한다. 그리고 40절에서 새로운 장면이 시작되는데, 배경이 되는 시간과 장소는 언급되지 않으나 새로운 등장인물인 어떤 나병 환자가 소개된다. 며칠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신다(2,1 참조). 따라서 1,40-45은 ‘어떤 나병 환자의 치유’라는 문학적 단일성을 띤 한 단락으로 경계를 설정할 수 있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본문의 문학 양식은 치유 기적 사화이다. 본문의 문학 구조는 (1) 상황 묘사: 40ㄱ절, (2) 문제 발생: 40ㄴ절, (3) 문제 해결: 41-44절, (4) 결과: 45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의 새로운 작은 등장인물은 이름 없이 단순히 ‘어떤 나병 환자’로 소개된다. 첫 문장의 주동사인 ‘오다’는 역사적 현재형으로 표현된다. 나병 환자의 행동은 세 개의 현재 분사로 묘사되는데, ‘도움을 청하고(parakalw'n)’, ‘무릎을 꿇고(gonupetw'n)’, ‘말하며(levgwn)’이다. 그는 신체적 결함인 나병에 걸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그를 도울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행위는 그분의 권위에 대해 경의와 존경을 표현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병 환자의 행동은 능동적이고 눈에 띄는 특성을 표현한다.


1,32에서 사람들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나병 환자가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예수님과 만나게 된다. 그와 유사한 작은 등장인물로는 5,25-34의 ‘어떤 하혈하는 부인’과 10,46-52의 ‘예리코의 눈먼 이 바르티매오’이다.


당시에 나병 환자는 부정不淨한 사람으로 취급받았고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죄인으로 간주되어 그와 접촉하는 것조차 부정한 일이었다. 하느님의 영역에서 배제되었고 사람들에게서 소외당했다(레위 13,45-46 참조). 그래서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와 같이 나병은 환자의 몸뿐 아니라 그와 하느님, 다른 사람의 관계도 파괴하였다.


나병 환자는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고 하며 간절히 청한다. 여기서 그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 그는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고 있다. 이렇게 그는 질병에 대한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의 이 행동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는 예수님의 초대에 대한 긍정적 응답이다.


[성서와함께, 2011년 8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15)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


이번에 만날 작은 등장인물은 3,1-6의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다. 지난 호에서 읽은 ‘어떤 나병 환자의 치유’(1,40-45) 후에, 예수님과 반대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갈등(conflict)은 이야기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생기는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 가치의 충돌로 이야기의 줄거리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야기의 전체 줄거리는 등장인물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서 발전하고 해결되는 단계로 구성된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줄거리에서 갈등의 요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야 한다. 즉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갈등이 일어나고, 그 갈등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이며, 그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파악해야 한다. 또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이며, 그 변화는 각자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찾아야 한다.


마르코 복음서 이야기에서 예수님과 반대자들 사이의 갈등은 이미 그분의 초기 활동 공간인 갈릴래아에서 시작된다. 2,1-3,6에서는 죄의 용서, 식탁 친교, 안식일 규정 등으로 갈등이 일어난다. 특히 3,1-6에서는 안식일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갈등의 요인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은 등장인물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3,1-6 읽기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① 단락 나누기


3,1에는 새로운 공간적 배경인 회당이 언급된다. 장소의 변화는 새 단락의 시작을 가리키는 전형이다. 바로 앞 단락인 2,23-28은 안식일에 밀밭에서 예수님, 제자들, 바리사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한다. 그리고 3,7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가신다. 따라서 3,1-6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하는 문학적 단일성을 가진 한 단락이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본문의 문학 양식은 치유 기적사화이다. 그리고 본문의 문학 구조는 (1) 상황 묘사: 1절, (2) 문제 발생: 2-4절, (3) 문제 해결: 5절, (4) 결과: 6절로 되어 있다.


1절은 상황 묘사의 전형이다. 새로운 장소와 등장인물이 소개된다.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에서 ‘다시(pavlin)’라는 부사는 1,21의 공간적 배경으로 소개되는 회당을 연상케 한다. 회당은 종교 장소로, 공적으로 드러난 장소이다. 작은 등장인물은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고 단순하게 소개된다. 이는 작은 등장인물에 대한 기본 패턴을 따른다. 그는 이름 없이 언급된다. 그의 신체 조건은 도움과 회복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는 다른 작은 등장인물과 달리 예수님을 만나는 데 어떤 주도권도 가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그를 데리고 오지도 않는다. 단순히 회당 안에 그가 ‘있다’(현존)고 언급될 뿐이다. 어쨌든 도움이 필요한 작은 등장인물이 소개되어, 독자는 예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동시에 그것은 예수님과 반대자들 사이에서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다.


2-4절은 문제 발생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에서, 독자는 본문의 시간적 배경이 안식일임을 알 수 있다. ‘안식일’(종교적 시간 배경)은 갈등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동사 ‘지켜보다’와 ‘고발하다’는 예수님과 반대자들 사이의 긴장을 잘 표현한다. 이러한 배경의 분위기에서 작은 등장인물은 자신에 대한 예수님과 반대자들의 서로 다른 태도가 드러나게 하고, 반대자들에게 예수님을 고발할 근거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다. 반대자들은 안식일 규정을 위반했다는 구실로 예수님을 고발하려 한다.


예수님께서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 율법,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어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그를 가운데로 초대하신다. 그리고 반대자들에게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고 질문하신다. 이 질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좋은 일을 하는 것(ajgaqo;n poih'sai)”과 “목숨을 구하는 것(yuch;n sw'sai)”으로 표현하신다. 예수님의 일과 대조되는 반대자들의 일은 “남을 해치는 것(kakopoih'sai)”과 “죽이는 것(ajpoktei'nai)”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한다.


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까? 그 해답은 5절에서 제시된다. 반대자들의 적대적 침묵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노기를 띠신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보신다. ‘둘러보다’라는 예수님의 동작은 여러 곳에서 언급된다(3,34; 5,32; 10,23; 11,11 참조). 이 행동으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안식일 규정 뒤에 숨어 침묵하는 반대자들의 익명성과 폭력성을 폭로하신다. 반대자들의 부정적 모습은 그들 마음의 완고함으로도 표현된다.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의 모습에 슬퍼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Ekteinon th;n cei'ra)”고 명령하신다. 그가 손을 뻗자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여기서 문제가 해결된다. 치유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그분은 치유의 능력과 권위를 가진 분이시다.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에 작은 등장인물은 순종한다.


반대자들에게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한 구실이었지만, 예수님에게는 ‘함께 아파하기’와 ‘돌봄’의 대상이었다. 예수님의 안식일 치유는 그날이 가지는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신명 5,12-15에 따르면,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고 구원된 것을 기억하는 날이다. 예수님의 안식일 치유는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28)는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의 결과는 6절에 해당한다. 앞에서(1,27.45; 2,12)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 기적을 본 사람들은 놀라면서 그분을 찬양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반대자들인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님을 없앨 계획을 세운다. 2절에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지켜보던 반대자들은 안식일의 치유를 구실로 삼아 마침내 그분을 없애려 한다. 이처럼 안식일 치유는 예수님과 반대자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성서와함께, 2011년 9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16) 하혈하는 부인


마르코 복음서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 제자들은 매우 긍정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제자들의 부정적 모습도 함께 나타난다. 4,1-8,21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는 장면을 전한다. 여기에서 보이는 제자들의 부정적 모습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몰이해를 잘 드러낸다. 이 모티프는 특히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어난 두 사건, 즉 풍랑을 가라앉히신 4,35-41과 물 위를 걸으신 6,45-52에서 뚜렷이 표현된다.


이러한 문맥에서 작은 등장인물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1-3장에서 묘사된 작은 등장인물들의 특징과 역할을 비교했을 때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하혈하는 부인 이야기를 함께 읽고자 한다.


5,24ㄴ-34 읽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① 단락 나누기


마르코 복음서의 이야기꾼은 한 장면의 이야기를 다른 장면 안에 삽입(intercalation)하는 문학 기술(literary technique)을 사용한다. 그 대표 본문이 바로 5,21-43이다. 이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 안에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신 장면을 삽입한 경우이다.


5,21은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다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신 상황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22절에는 회당장 야이로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딸이 죽게 되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도움을 청한다. 그런데 야이로에 관한 이야기는 24절에서 갑자기 중단된다. 새로운 등장인물인 하혈하는 부인에 관한 장면으로 바뀐다. 이 부인이 치유된 후 복음서의 이야기꾼은 35절부터 다시 야이로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처럼 5,21-43은 두 작은 등장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A-B-A′라는 샌드위치 구조를 이룬다. 이 문학 기술은 야이로와 부인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부각시켜 각 등장인물의 인물 묘사를 더욱 뚜렷하게 표현한다. 여기서 삽입된 본문 5,24-34을 문학적 단일성을 가진 하나의 단락으로 설정한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본문의 문학 양식은 치유 기적사화이다. 그리고 문학 구조는 (1)상황 묘사: 24-26절, (2)문제 발생: 27-28절, (3)문제 해결: 29-33절, (4) 결과: 34절로 구성된다.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신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때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여인이 등장한다. 이야기꾼은 그 여인의 상황과 조건을 상세히 설명한다. 여인에 대한 소개는 앞서 소개된 야이로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둘은 모두 작은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야이로는 이름으로 소개되지만 하혈하는 부인은 이름 없이 소개된다. 야이로는 유다인들의 종교 공동체에서 회당장이라는 직책을 맡은 지도자이다. 그와 반대로 하혈하는 여인은 제의상 부정不淨하여 종교 공동체에서 소외당한 사람이다. 야이로에게는 열두 살짜리 딸이 있지만, 여인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여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야이로는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있으나, 여인은 자기 병을 치료하느라 더욱 가난하게 되었다.


이러한 차이점과 함께 공통점도 발견된다. 둘 다 절망스러운 상태에서 도움 받기를 원한다. 야이로의 딸은 죽기 직전이고 하혈하는 부인의 고통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또 둘은 모두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다. 그 신뢰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다고 믿는 데서 비롯된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반면, 여인은 군중이 많아 혼잡한데도 예수님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즉 야이로는 드러나게 도움을 청하고 여인은 드러나지 않게 행동한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곧바로’ 여인의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았다(29절 참조). 여인은 자신이 치유된 것을 알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신다. 그래서 누가 손을 대었는지 물으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밀쳐 대는 군중을 언급할 뿐이다. 여기서 치유 사실을 알고 있는 여인과 예수님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제자들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33절에서 여인은 두려워 떨며 나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한다. 두려움은 4,41의 제자들과 5,15의 게라사인들의 부정적 모습을 표현한다. 그러나 여인은 두려움을 이기고 예수님 앞에 엎드린다(prosevpesen). 이 동작은 22절에서 야이로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린 행동을 연상케 한다.


34절은 본문의 결과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고 말씀하신다. 여인을 “딸아(qugavthr)”라고 부르시며 당신의 깊은 자비를 드러내신다. 야이로가 병든 딸을 돌보듯이 예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여인을 돌보신다. 그리고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신다. 이 믿음이 여인을 위한 구원의 근거이다. 28절에서 여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swqhvsomai)” 하고 생각하는데, 바로 그 구원이 여인에게 왔다. 이 구원은 23절에서 야이로가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바랐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참된 믿음의 본보기로 제시하신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고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믿음은 군중이 밀쳐 대는 상황에도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여인은 두려움을 극복한 믿음의 모델이지만, 제자들은 지금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평화와 건강에 대한 말씀은 여인의 몸이 치유되었을 뿐 아니라 그 내면까지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혈하는 여인은 변화를 경험한다. 변화를 위한 전환점은 바로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이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고통 받았고, 하혈하여 제의상 부정했고, 사회에서 소외되었으며, 가난하고 희망 없이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용기가 생기고 겸손하고 솔직해졌다. 마침내 여인은 치유되고 구원되었다.


③ 문맥 살피기


4,1-8,21의 문맥에서는 제자들의 긍정적 모습뿐 아니라 부정적 모습이 잘 드러난다. 제자들의 부정적 면은 몰이해, 겁, 두려움, 믿음 없음, 깨닫지 못함, 완고한 마음 등으로 표현된다. 4,13에서 비유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신다. 4,40에서 풍랑을 가라앉히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후에 제자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6,52).


[성서와 함께, 2011년 10월호, 송창현 미카엘]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20) 예리코의 눈먼 이 (2)


10,46-52에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서의 주제인 ‘예수님의 정체’와 ‘예수님 뒤따르기’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작은 등장인물인 예리코의 눈먼 이를 만난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러 그분을 메시아로 믿는 신앙을 표현한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뒤따르는 참된 제자이다. 지금까지 10,46-52 본문을 자세히 읽은 우리는 이제 본문의 문맥을 살펴볼 것이다. 본문이 위치하는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본문의 역할과 의미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③ 문맥 살피기


마르코 복음서 전체에서 10,46-52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을 보도하는 8,27-10,52의 끝 부분에 위치한다. 즉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여정과 예루살렘 입성 사이에 위치한다. 전체 문맥에서 본문을 전후 본문과 비교해 보자.


10,46-52의 앞 문맥


먼저 10,13-16과 10,46-52을 비교해 보자. 두 본문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10,13에서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고 10,47에서는 눈먼 이가 예수님을 부른다. 그러나 그들은 방해를 받는다. 두 본문에서 동사 ‘꾸짖다(ejpitiman)’가 동일하게 사용된다. 10,14-16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에 대해 가르치시어 제자들이 그들에게서 배우도록 초대하신다. 즉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리코의 눈먼 이 바르티매오에게서 이 어린이의 조건을 발견한다. 그는 신체적·사회적 조건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에 대한 그의 믿음에서 눈먼 이는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어린이의 모범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10,17-22과 10,46-52의 비교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부자에게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10,21)고 말씀하신 후 “나를 따라라”고 초대하신다. 그러나 그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슬픔에 잠겨 떠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뒤따르기’를 거부하는 사람의 전형을 발견한다. 이에 반해 본문의 눈먼 이는 ‘가라(u{page)’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그가 가진 것의 전부인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을 뒤따른다. 여기서 눈먼 이는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의 전형으로 나타난다.


10,23-27에는 재산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서술된다. 26절에서 제자들은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tiv?duvnatai swqh'nai?”라고 묻는다. ‘구원되다’는 17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다’로 표현된다. 부자가 ‘예수님 뒤따르기’를 거부하여 구원에서 멀어졌다면, 본문의 눈먼 이는 ‘예수님 뒤따르기’의 모범일 뿐 아니라 구원된 사람의 전형이다. 또 10,28에서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포기와 추종의 관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리고 32절과 33절에서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는 언급은 10,46-52의 공간적 배경인 예리코와 연결된다.


또 흥미로운 공통점도 발견할 수 있다. 두 본문의 시작 부분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을 언급한다. 예수님과 관련되는 인물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소개된다. 10,35에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으로 소개되고, 10,46에서는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로 소개된다. 그리고 이 두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10,36)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10,51) 이 질문에 대하여 제베대오의 아들들은 영광 중에 예수님과 함께 앉기를(kaqivswmen) 원하지만(10,37 참조), 더 이상 앉아 있지(ejkavqhto) 않는 눈먼 이는 다시 보기를 원한다(10,51 참조). 이 대답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제베대오의 아들들을 나무라신다. “너희는 … 알지도 못한다”(10,38).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와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그래서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다시 보게 되어 예수님의 길을 뒤따르는 본문의 바르티매오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본문 바로 앞에 위치하는 10,41-45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와 봉사에 대해 가르치시는데, ‘높은 사람’과 ‘섬기는 사람’, ‘첫째’와 ‘종’이 각각 대조된다. 이 대조는 10,13-45에서 발견되는 일련의 대조와 연결된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다’와 ‘어린이처럼 되다’(10,13-16 참조), ‘재산을 버리다’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다’(10,17-22 참조), ‘사람에게 불가능하다’와 ‘하느님께 가능하다’(10,27 참조), ‘포기’와 ‘추종’(10,28-31 참조), ‘죽음’과 ‘부활’(10,33-34 참조), ‘영광’과 ‘수난’(10,35-40 참조). 이 대조되는 문맥에서 본문의 눈먼 이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다.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포기의 모범이며, 수난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을 뒤따르는’ 모범이다.


[성서와함께, 2012년 2월호, 송창현 미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