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제자 마르코


헤로데 아그리파의 박해 중에 천사의 도움으로 베드로가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나 예루살렘 거리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 그는 “마르코라고도 불리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사도 12,12). 이것이 베드로와 복음서 저자 마르코 사이의 특별한 유대를 지적하는 첫 번째 언급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바오로와 마르코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더 신빙성 있게 보일지도 모른다. 나아가 우리는 성서의 관점으로부터 마르코가 베드로의 제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바오로의 제자라고 불려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안티오키아에 가기 이전에(사도 12,25) 그리고 거기서 키프로스를 경유하여 소아시아의 해안 지방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있었다. 절벽과 깊은 계곡 사이 눈 덮인 산악 길을 지나가야 하는 소아시아의 통과하기 힘든 산악들을 넘어간 뒤 마르코는 동료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사도 13,13).


몇 해 뒤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두 번째 선교 여행을 계획하였다. 바르나바는 조카(?) 마르코를 다시 데리고 가자고 제안하였으나, 바오로는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가 자기들만 일하게 한 사람을 함께 데려갈 수는 없다며 더욱 적절한 판단을 내렸다(사도 15,38). 그러자 바르나바와 마르코는 바오로와 갈라져 키프로스를 향해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는 62~63년에 마르코가 갇혀 있는 바오로 주위에 있는 것을 다시 보게 된다(골로 4,10). 게다가 바오로는 그를 자기의 동료라고 부른다(필레 1,24). 그 다음에도 우리는 바오로와 접촉하는 그를 본다(2디모 4,11). 그러므로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몇 해를 지낸 뒤 먼젓번의 자기 스승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마르코와 베드로의 관계에 관한 한 우리는 성서에서 단 하나의 명백한 자료만을 발견한다. 이방 로마 - 서방의 “바빌론” - 에서 쓰여진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1베드 5,13) 마르코는 저자에게 “내 아들”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그는 베드로의 정신적인 아들, 즉 제자였다. 이 때문에 초기의 교부들은 마르코가 베드로의 제자요 통역관이었다고 증언한다.


더 후대의 전승은 이 자료를 훨씬 더 확장하였다. 즉 마르코는 베드로와 백성들 사이에서 해설자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백성은 마르코에게 설명을 청하였고,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으로 고정시켜 줄 것을 되풀이해서 간청하였다. 마침내 그는 승낙하였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그는 그것을 베드로 살아 생전에 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 많은 증언에 따르면, 그는 사도가 죽은 뒤에야 그 일을 하였다. 따라서 전승에 비추어 고찰해 보면, 마르코의 복음은 어떤 때 “베드로의 설교에 따른 복음”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마르코 복음을 읽어 보면, 어째서 복음서 저자가 베드로를 특별히 생각하였으며, 그를 존경하였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곧바로 그의 개인적인 묘사에 의존하였는지 분명히 드려난다.


마르코에 따르면, 실제로 예수의 공생활에 있어서 첫 번째 사건은 베드로의 소명이다(마르 1,16-18). 그 일은 베드로의 집에서 일어났고, 마르코는 그것을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다(마르 1,29-34). 몇 가지 다른 사건들에서 베드로의 현존은 뚜렷하게 언급된다(마르 1,36; 5,37; 9,2-5; 11,21).


베드로에게 영예를 돌리는 사건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야기된다. 따라서 마르코는 예수께서 물위를 걷는 것을 언급하는 반면에(마르 6,49-52) 베드로가 파도 위를 걷는 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마태 14,28-33).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는 베드로의 고백 뒤에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의 다음 말씀이 뒤따르지 않는다.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태 16,18).


반대로 마르코 복음에서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비난이 언급되는데, 뉘우치는 베드로의 고백을 마치 우리가 듣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마르 8,33; 14,37). 따라서 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묘사에서조차 자신의 탓이라는 강한 의식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은 알지도 못하오.’ 하고 잡아떼었다”(마르 14,71). 마치 베드로의 “내 탓이오”처럼 들린다.


게다가 마르코의 복음에서 부각되는 것은 다른 부분들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언어와 문체의 궁핍이 입증되는 반면에 다른 부분에서는 생생하고 이례적으로 상세한 묘사가 눈길을 끈다. 이러한 구체적이고 활기있는 묘사들은 눈으로 본 증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가 사도들의 숫자에 들지 않기 때문에 해석학자들은 이러한 자연스럽고 생생한 보고서에 대한 설명을 바로 목격 증언과 관련하여 찾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앞서 말한 사건들의 어느 누구에게나 베드로는 현존한다. 거기서 사람들은 사도의 성격과 놀라운 일을 분명히 눈치챈다. 그가 설교로 청중들에게 전하고, 마르코를 통하여 두 번째 복음서를 읽는 우리에게도 전하는 놀라운 일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성서의 세계 - 신약] 가장 원형적인 마르코 복음


“가장 원형적인 복음”


네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마르코 복음은 많은 면에서 다른 복음서들보다 더욱 흥미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가장 짧고 - 16장밖에 안된다. - 가장 직설적이며,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자료들을 - 수난 이야기의 경우는 예외지만 - 한결 짧고 간결하게 다룬다.


그런데도 흔히 말하듯이, 복음서 저자 자신이 단어를 취하는 일이 드물고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비전을 거의 표현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장 원형적인 복음서이다. 마르코 복음(l4,51-52)에 따르면, 올리브 동산부터 예수를 따랐던 젊은이가 마르코 자신이라는 것이 꽤 널리 퍼져 있는 의견이다.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난 그는 삼베(담요)만 걸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붙들리게 되자, 그는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이것이 마르코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의 복음서를 읽어 보면, 포착하기 어려운 복음서 저자는 도망가고, 말하자면 손에는 다만 복음서만 남는다.


그의 복음서 안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두드러지고 중대한 순간에 더욱 상세하게 언급되는 인물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마르코의 영적 아버지인 사도 베드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이들은 마르코를 베드로의 통역관이라고 일컫는다.


이 복음서의 특정은 다른 복음서들이 지닌 하나의 노선 혹은 순서가 빠져 있는 것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마태오는 다섯 개의 담화라는 기획을 바탕으로 복음 이야기를 구성한다. 루가는 성지를 두루 거쳐 예루살렘에서 끝나는 여행 중에 계시는 분으로 예수를 소개한다. 요한은 일곱 개의 기적을 선택하여, 그것들과 함께, 상승하는 노선에서 또한 수많은 상징들을 통하여 예수를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마르코에서 그와 비슷한 구조를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복음 안에는 개인적인 비전이 빠져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덜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태오의 비길 데 없는 스승이나 루가의 자비롭고 관대한 의사는 마르코의 복음에서 지배적인 특색을 띠지 않는다. 확실히 그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가르치신다. 그러나 드물다.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나 치유에 대한 짤막한 묘사 때문에 마르코는 그것을 독자들에게 깊이 있게 들어가지 않게 한다. 아니 어떠한 생각도 지배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인칭적 복음서에서, 한 면으로는 복음서 저자의 목소리를 덜 듣는다면 다른 면으로는 교회와 신자들의 목소리를 더욱 느낄 수 있다. 복음서 저자는 자기 자신은 침묵하면서 설교를 가능한 한 젊은 교회에서 썼던 대로 느끼게 해준다. 따라서 마르코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더욱 백성과 가까이 일치하고 그의 복음서는 당연히 가장 대중적인 복음서로서 자격을 받을 수 있다.


대중적인 성격은 이미 예수의 모습에 관한 개인적인 비전이 덜한 데서 드러난다. 백성은 하나의 기적을 보고 열정적이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적을 보고도 그랬고 그 다음에도 그랬다. 여론은 많은 기적들 가운데서 하나의 노선을 찾지 않고, 오히려 기적들을 그것들이 표명하는 위엄이란 국면 속에 축적하였다. 마르코 복음에서 마주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기적들이 “권능을 드러낸다.”는 대중적인 용어로 묘사되고, 수많은 비범한 일들로 불러일으킨 인상에 신뢰가 가게 한다. 악마들을 추방시키는 것은 더욱 분명하게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마르 1,27). 이 때문에 마르코 복음을 읽으면, 예수께서는 악령들을 추방하심으로써 분명히 악마적인 능력을 넘어서시고 모든 영들을 넘어서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는 인상이 더욱 커진다. 그분은 악령들을 지배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으로 드러나신다.


마르코는 백성이 바라는 것에 응하여 예수를 설교가로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두 번 그분의 입에 담화를 담을 뿐이다. 그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특별히 탁월한 분이시다. 예컨대, 어려운 상황에서 아니면 그분의 적들에게 압박을 받으실 때도 그분은 그 상황을 뛰어넘는 지적인 응답을 구사하실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바가 마르코 복음에서는 언제나 생생한 이야기나 놀라운 사건 가운데서 나타난다.


이미 고대의 교부들은 마르코에 대해 저술하면서 그의 복음을 “결정적인 순서가 없는”, 어떠한 연대기적 지적도 없는 것으로 특징지었다. 이러한 고대의 증언을 고려하면서 현대의 비평가들은 짧고 대중적인 이 복음을 “가장 오래된” 복음으로 삼았다. 그들에 따르면, 저자는 우리에게 초기의 자료들에 관한 신학적 반성을 제공한 마태오와 루가나 요한과는 달리 사건들에 더욱 가까이 있었다.


반면에 우리는 마태오나 루가의 반영(反影)을 필연적으로 후대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으나 복음서 저자 개인의 작용으로 돌리면서, 마르코 복음을 목격 증인에 따라 태어나는 교회에 제공된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본다.


회개하여라


기쁜 메시지의 첫 번째 활력 있는 공표는 성서에서 “회개하여라”는 말로 요약된다.


기적적인 오순절 사건이 있은 다음에 예수의 겁 많은 제자들은 갑작스럽게 용감한 사도들이 되어 백성 앞에 공공연하게 나타났다. 베드로는 처음으로 이러한 말로 종합되는 열정적인 담화를 선언하였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시오”(사도 2,38). 이것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끄집어낸 첫 번째 결론이었다.


실제로 예수의 출현 이전에 이 메시지는 이미 선구자의 입을 통해 나왔다.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하고 선포하였다”(마태 3,1-2). 그리고 그러한 메시지는 선구자에게서 무엇보다도 행동으로 입증되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마태 3,4).


마르코와 마태오의 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첫 번째 현현을 같은 방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나아가 마태오한테는 예수의 첫 번째 설교가 요한이 언급한 말과 문자 그대로 일치한다.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l7). 그러나 예수의 이 첫 번째 설교를 이구동성으로 보고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주어지는 설명은 상당히 달라진다. 같은 선언이 흔히 아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증거다.


지난 세기에는 “회개하여라”는 말을 “참회를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즉 복음의 관점에 따라 메시지는 말하자면 낙타 털옷에 덮여 있었다. 구약 성서의 묘사는 실상 참회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예컨대 욥은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참회를”(욥기 42,6) 하였다. 니느웨에서는 요나의 파견 이후에 왕의 명령이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사람이나 짐승, 소떼나 양떼 할 것 없이 무엇이든지 맛을 보아서는 안된다.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굵은 베옷을 입혀라. 그리고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라.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남을 못살게 굴던 나쁜 행실을 모두 버려라”(요나 3,8). 라틴어 번역은 그와 같은 호소를 “회개하여라”로 이해하였고, “참회를 하라”는 말로 그것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많은 세기 동안 이러한 번역은 적어도 서유럽에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서유럽 지역에서는 복음서의 첫 번째 호소가 “참회를 하라”는 용어로 인정되었다.


16세기에 인본주의자들은 라틴어 번역을 무시하면서 오로지 신약 성서의 원문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회개를 뜻하기 위해 채택된 말이 “영” 혹은 “의향”을 뜻하는 명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적인 의미를 취하여 예수의 호소는 “의향을 바꾸어라.” 아니면 “영적으로 변하여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미 루터는 이 번역을 알았고 그것을 선업(善業)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 채택하였다.


많은 일들 가운데서도 육신의 죽음에 대해 확실히 공포를 느끼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은 회개에서 영적인 요소에 새롭게 강조를 두고 있다. 즉 회개는 의향의 변화와 영의 쇄신을 말한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널리 퍼져 있는 영적 설명이며 새로운 가르침, 즉 육신과 영혼, 영과 육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비전 - 그러나 루터의 의도와 전혀 다른 - 과 부합한다.


이 새로운 비전은 어떠한 것인가? 예전에는 모든 사람 안에서 육이 영을 거슬러 싸운다는 성 바오로의 편지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얻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로마 8,13). 그리고 이것과 비슷한 본문들에 육체적인 참회의 실천이 근거를 두었다. 반면에 현대의 해석학은 “육”에서 더 이상 인간의 열등한 부분을 보지 않고 오히려 - 순수하게 셈족의 의미에서 - 회개 이전의 죄 많은 상황에 있은 전인간(全人間)을 본다. 회개가 없이는 인간은 “육”이다. 하느님과의 부자(父子) 관계를 통하여 그는 “영”이 된다. 즉 회개 안에서 인간은 영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하느님께로 향해야 한다. 그렇다면 회개는 분명해진다. 옛 번역 “참회를 하라”는 포기할 수 있다. 참회의 과업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다만 영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에는 엄청난 오류가 감추어져 있다. “육”을 전인간을 뜻하는 용어로 정확하게 설명하면서 “영”이란 말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인간의 유일한 상위 부분과 관련된다. 셈족의 심성에 비추어 볼 때 단지 “육”이란 말뿐이 아니라 “영”이란 용어도 전인간을 가리킨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루가 1,46-47). 이는 전인간의 기쁨이다. 영의 변화는 따라서 육신을 포함하는 전인간의 변화다.


고대의 설교에서는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육체적인 참회에서 회개를 찾았던 반면에, 현대의 설교에서는 지나치게 쉽게 그러한 점을 소홀히 한다. 완전한 회개는 전인간의 변화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l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성서의 세계 - 신약] 마르코의 진정한 의향


마르코에 나타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선약 성서를 펼쳐 보면 마르코 복음이 극히 짧다는 것이 모두에게 명백히 드러난다. 마태오 복음은 28장이고 루가 복음은 24장인데 마르코 복음은 16장뿐이다. 게다가 또 마태오나 루가 복음과 비교해 볼 때 모든 상세한 부분이 마르코 복음에서는 아주 간결해진다. 마르코는 얼마 안되는 말을 채택하고, 그 묘사에 있어서도 더욱 절도 있으며, 사실을 생생하고 간결하게 제시할 줄 안다. 그는 중요한 점은 격언조로 고정시킨다. 따라서 곧바로 다음으로 넘어가고, 그것은 마찬가지로 짧게 언급한다. 아주 자주 쓰고 있고 두 번째 복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말은 “곧”이라는 말이다. 마르코는 그것을 45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일화는 급히 다른 것을 따라 나오며, 따라서 그의 복음은 신속하게 전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때때로 복음서 저자는 어떤 일화에 더욱 풍부히 머물러 있기 위하여 이러한 묘사 방법에서 벗어난다. 마태오나 루가에는 없는 말들을 상당히 많이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다. 게다가 그러한 묘사들은 몹시 정확하고 사소한 특성에 이르기까지 사건들을 고정시킨다. 야이로의 딸의 부활이 그런 경우다.


기적은 세 공관 복음서 모두에 나타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마태오나 루가와 비교하도록 해준다. 마태오는 앞서 말한 부활을, 복음서 저자에 따라서 산상 담화의 뒤를 이어 바로 나오는 아홉 가지 기적군(奇籍群) 안에 제시한다. 따라서 기적군은 하느님의 나라가 정말로 지상에 세워졌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마태오의 개념에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 안에 요약되어 있는 메시아적 약속의 성취이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마태 11,4-5). 즉 아홉 가지 기적군은 이러한 메시아적 이상이 그 모든 면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게 한다.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기적은 그렇기 때문에 폭 넓고 상세한 묘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요한 선에서 고정되고, 마태오의 기획을 위해서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마르코의 계획은 다르다. 그는 이러한 사건에 관해 그가 알 수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해 언급하기를 좋아한다. 기적은 예수께서 이방인 지역에서 호수 동편으로 돌아오셨을 때 일어났다. 그분은 다른 편에서 배를 타고 오셨고 여전히 호숫가에 계셨다. 이러한 모든 특수성은 마태오나 루가에는 빠져 있다. 그러자 군중 가운데서 한 사람이 나오게 된다. 마르코는 이 사람이 회당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예수를 보자마자 땅에 엎드려 죽어 가는 딸을 위해 그분이 개입해 주실 것을 간절히 청한다. 잠시 중단한 뒤, 마르코는 야이로의 종들이 아이가 이미 죽었다고 고하러 왔다는 것을 전달하면서 말을 계속한다. 이러한 메시지에도 예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따라오게 하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신다. 그리고 큰소리로 우는 사람들을 물리치신 예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들어가신다. 마르코만이 예수께서 아이가 누워 있는 방에 발을 들여놓으시고 소녀에게 “탈리타 쿰”, 즉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는 뜻의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마르 5,41). 그리고 또한 마르코만이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마르 5,42)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는 결론으로서 기적 이야기를 종결지을 뿐 아니라 일상 생활의 과정을 다시 취한다.


자신의 복음에서 마르코를 따르는 루가는 기적에 대한 묘사에 많은 작은 특징들을 그로부터 끌어 왔으나 이 이야기에서도 자신의 복음의 의향을 부각시킨다. 실제로 그는 먼저 소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말함으로써 극적인 요소에 강조를 둔다(루가 8,51).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도 마찬가지로 약간 앞에, 이야기가 부모의 행복으로 종결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루가 8,56). 즉 루가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는 분이다.


마르코가 다만 어떤 기쁨을 위해서만 기적을 이야기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역시 마태오나 루가와 마찬가지로 엄밀한 의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 기적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폭 넓게 묘사하고 있는 악령의 군대를 몰아내는 이야기에 붙이고 있다. 따라서 두 가지 대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예수님께서는 악령과 죽음의 지배자로 나타나신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3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성서의 세계 - 신약] 천천히 드러나는 메시아의 표상


예수의 금지령


예수의 선(善)은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고, 누구에게나 상당히 설득력 있게 표현된다. 그분의 모범은 모방하고 싶은 열정과 바람을 자극한다. 따라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셨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예수의 입에서 금지령을 듣는 것이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명확한 금지들이 복음과 예수의 말씀 자체에서 여러 차례 발견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때문에 “예수의 금지령”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증인인 세 명의 사도들뿐만 아니라 야이로와 그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소녀를 부활시켰을 때 스승께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셨다”(마르 5,43). 그것으로 지극히 행복한 부모에게 진정한 금지령이 부과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이웃들과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되었다.


유사한 금지령은 치유를 받은 나병환자도 받았다. “예수께서 곧 그를 보내시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르 l,43-44). 그러 나 어떤 상황에서 말을 금하는 명령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예수께서는…… ‘에파타’ 즉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굳은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 그러나 엄명하실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마르 7,34-36).


예수께서 이러한 금지령을 악마들에게 부과하신 것은 쉽게 이해된다(마르 l,34; 3,12). 악마들은 메시아적 메시지의 적합한 예고자들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러한 열두 사도에게 예수의 업적에 대한 감탄과 확신을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나아가 침묵을 지키라는 명이 내려질 때, 차라리 불가사의 하다고 말해야 할 만큼 금지령의 동기는 납득하기 어렵다.


이 점에 관하여 처음의 세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예수의 금지령이 어째서 마르코 복음에 가장 많이 나오는지 알게 된다. 거지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욱 신중하게 결정한다. 그 결과 어떤 해석학자들은 그것이 철저하게 마르코의 개인적인 창작물은 아니더라도 그것을 그의 특징으로 본다.


이러한 고려에서 곧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첫째는 예수 자신이 이러한 금지령을 분명하게 그리고 그토록 자주 부과하셨는가이고, 둘째는 예수께서 아니면 우연히 복음서 저자가 진정으로 지녔던 의향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가톨릭적인 해석학에서는 첫번째 질문에 부정적으로 응답하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하다. 사실 몇몇 믿지 않는 해석학자들만이 마르코가 이러한 생각을 품고 그것을 예수의 입에 담았으며, 그런 경우에 복음서 저자는 예수자신에 대한 올바른 묘사를 하지 못했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게다가 믿는 이에게는 이러한 결론이 감도(感導)의 개념과 상충하고, 따라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세 복음서 저자를 고려해 보면,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군중의 열정을 분명히 잠재우고자 하셨다고 믿는다. 그와 함께 오히려 우리는 다른 이들보다도 마르코가 이러한 자료를 강조했고 사실에 속하는 순간들을 의식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였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께서 부과하신 비밀 엄수는 마르코의 특징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으로 두번째 질문은 상당히 중대한 문제가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비밀 엄수를 명하신 예수께서는 무엇을 의도하고 계실까?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은 그분의 메시아성에 대한 떠들썩한 입증이었고, 논리적으로 누구나 마음속으로 열정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역설(逆說)이 되지 않았는가?


이 명백한 역설에 대하여 우리는 단 하나의 설명을 할 수 있다.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은 오로지 기적을 행하는 데만 있지 않고 오로지 교리를 주는 데만 있지도 않다. 그분의 사명의 절정은 - 도처에서 “……야 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 수난과 죽음이었다. 오래 전부터 기다려 온 구세주는 고통받는 메시아였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은 때때로 히브리 백성의 정신과 대립되었고, 그것을 실제로 그 모든 충만함 안에서 제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것은 점차적으로 제시되었다. 오로지 메시아적 국면을 위해서는, 군중의 환호가 메시아에 대한 전적인 수락에 장애가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예수의 엄한 금지령이 있었다.


많은 이들은 실제로 그러한 금지령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엄명하실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마르 7,36). 어쩌면 이 역시 이스라엘의 맹목에 이바지했을까?


마지막으로 어째서 바로 마르코가 이러한 금지령에 관해 그렇게 명백하게 기록했느냐 하고 여전히 질문한다면 이렇게 답변해야 한다. 마르코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더 역사적인 예수, 아직 부활하시지 않은 메시아, 즉 점차적으로 드러나시는 메시아의 표상을 주고자 하였지 때문이라고.


예수의 친척들


복음서 저자 마르코는, 이미 여러 차례 암시했듯이, 마태오나 루가와는 조금은 다른 수법으로 예수에 대해 기록했다. 그는 예수의 현현(顯現)에 대한 역사적 상황을 확실히 선호한다. 게다가 그는 무엇보다도 베드로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할 때 훨씬 더 생생한 양식을 지닌다. 따라서 우리가 그에게서 예수의 친척들에 관한, 특히 메시아의 공생활, 그 성공과 명백한 패배에 대한 그들의 반응들에 관한 짧고 치밀한 소식들을 발견한다 해도 놀라운 일일 수 없다.


더욱 놀라운 소식들 가운데 하나는 마르코 복음 3장 20-21절에서 발견된다. “(예수께서) 집에 돌아오시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그분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서 그분을 붙들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가 정신나갔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 짤막한 묘사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상한 인상을 준다. 복음서들에서는 도처에서 예수에 대한 조용한 묘사가 발견되고, 그분의 현존으로부터 고요함과 평온함이 나오는 것을 보는 반면에 여기서는 정반대가 확인된다. 그리고 이 소식의 진실성에 대해 거의 의심이 갈 정도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체면을 짝아 내릴 수도 있는 예가치 많은 이상한 일은 바로 진실성에 대한 보증이 된다. 아주 후대의 저자가 -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신앙에 상응하는 비전을 지녔던 - 비슷한 사실을 꾸며 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 때문에 바로 그가 그런 일을 꾸며 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약간의 동정심을 일으키는 그러한 자료는 바로 예수의 공생활에서 나오는 가혹한 실재의 비화(秘話)이다.


수많은 번역들은 예수를 “붙잡고자” 하였다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두고 있지만, 본문은 그 이상을 이야기한다. 이런 식의 “붙잡음”에 대해 사용되는 그리스어는 세례자 요한의 체포(마르 6,17), 예수를 잡으려는 대사제들과 학자들의 시도(마르 12,12) 그러고 같은 예수를 그분의 수난 전날에 체포하여 끌고 갈 때(마르 14,44.46)에도 채택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구절의 경우에도 예수에게서 자유를 박탈하고 폭력적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라는 의미에서 용어를 이해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상한 것은 앞에서 지적된 행동하는 방식의 동기다. 즉 예수는 당선의 활동에 대해 더 이상 책임질 수도 없었고 그리스 말의 올바른 의미에 따라, 미친 사람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묘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놀라게 하는 것은 체포의 시도와 책임이 바로 예수의 친척들에게로 돌려진다는 점이다. 이 친척들은 총칭적인 방식으로 지적되었으나, 확실히 그것으로 마르코 복음 3장 31절에 언급되어 있는 사람들 집단 이외에 다른 이들이 포함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거기서 그들은 그들 가운데 있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군중들 사이를 뚫고 그분에게로 접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복음서들 안에는 우리가 예수의 친척들의 부정적이고 거슬리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는 다른 본문도 있다. 그것은 네번째 복음서의 본문으로, “예수의 형제들조차도 그분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요한 7,5)는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불손한 태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민 눈에 띄지 않는 의심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의심 없이 예수와 직면해서 극렬한 태도를 표현하는 마르코의 본문을 다소 완화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복수 3인칭으로 사용된 동사의 표현을 주목해 보자. “그들은 예수가 정신나갔다고 말했던 것이다.” 곧 그들이 앞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 즉 다만 의심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죄를 뒤집어씌울 준비가 되어 있는 중상자들이요 적들로 지적될 수도 있는 친척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는 다른 이들에게 돌릴 필요가 있다. 그리스어에서 - 그리고 다른 언어들에서도 - “그들이 말했다”는 “그가 말했다”와 같은 가치를 갖는다. 결과적으로, 예수의 광기(狂氣)에 대한 고발은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유포시켰던 ‘그의 정신이 이상하다고 하더라.’는 뜬소문이었다.


어쩌면 친척들은 이러한 소리에 대해 불안해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를 가족 문제로 간주하고 사실을 자세하게 알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분을 보호하고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아마도 그분의 의지와 반대될지라도 예수를 붙잡는 것이 최상의 도리라고 보았다. 이러한 행동에서 확실히 의심은 드러난 반면에 예수에 대해 적대심의 표는 없었다.


예수의 친척들의 - 눈에 띄지 않는 - 의심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같은 복음에서, 아직 공생활 중에 그들이 그분에게 가담했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분이 부활하신 날 막달레나는 임무를 받았다.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요한 20,17). 그리고 오순절 축제를 준비하는 중에 친척들은 사도들과 기도로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부인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사도 1,14). 지금도 마리아는 다시 한번 그들 가운데 계신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4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성서의 세계 - 신약] 예수께 형제들이 있었는가


주님의 형제들


예수께 형제와 자매가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실제적인 문제다. 신앙 안에서 양육되는 가톨릭 신자는 누구나 부정적인 의미로 대답할 것이고, 반대로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성서에서 출발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할 것이다. 가톨릭 신자는 마리아를 “평생 동정이신” 분으로 공경하는 전승에 호소할 것이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빈번하게 예수의 형제들과 자매들에 대해 말하는 복음서들을 신뢰할 것이다.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반성서적인” 가톨릭 전승을 거부하고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 일치 시기에 이러한 대조는 고통스럽고도 불유쾌한 일이다.


우리가 말했듯이, 복음서에는 몇 차례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수의 형제들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분이 나자렛에 나타나셨을 때에만 마태오와 마르코한테서 네 명의 이름이 언급된다. 나자렛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묻는다. “저 사람은 그 목수이며, 마리아의 아들로서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또한 그의 누이들도 여기서 우리와 함께 지내고 있지 않은가?”(마르 6,3; 마태 13,55).


예수께 형제들이 - 게다가 특별히 지명되어 - 있었다는 명확한 말로 언급되는 이 본문에서 또한 분명하게, 마치 그에게 형제들이 있었다는 것을 예기하듯, 그가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외아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형제”라는 말을 더욱 폭넓은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일단 예수와 그분의 형제들 사이의 구별 가능성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면, 다른 본문들도 같은 일에 대해 암시한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네번째 복음서 저자가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 머무시는 것에 대해 기록할 때(요한 2,12), 구절 가운데 분명한 구분을 두고 있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셨다.”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 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만일 형제들이 마리아의 아들들이라면 이상할 것이다. 사도행전(1,14)에서도 같은 구분이 나타나며, 나아가 전치사 “함께”로 강조된다. “이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부인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 여기서도 지적은 “형제”라는 말을 총칭적인 의미로 이해하도록 한다.


마르코 복음서 끝에 예수의 두 형제 야고보와 요셉의 이름이 다시 한 번 짝짓고 있다. “또 여자들도 먼 데서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마르 15,40; 마태 27,56). 이 본문으로부터 예수의 두 형제는 동정녀 마리아가 아닌 다른 어머니를 두었으며, 따라서 더욱 넓은 의미의 말로 형제로 부른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떤 언어든 고유한 색조와 독특한 관습을 갖는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많은 언어에서는 일련의 친척들에 대해서 “조카”라는 말을 채택하는 용법이 있다. 좁은 의미로 그것은 형제나 자매의 이름들에 대해 사용되나, 또한 숙부나 숙모의 아들들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다. “조카”라는 말은 따라서 일의(一意)적이 아닌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증손(曾孫) 혹은 먼 조카를 단순히 “조카”라고 부를 때 뜻은 더욱 모호해진다. 그런 경우에 어떤 친척 관계를 뜻하는지 정확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더욱 명료한 자료 없이 그것을 정했다면 동음 이의어(同音異意語)로 떨어질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이다.


성서 언어에서 “형제”라는 말은 유사한 탄력성을 지닌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구약 성서에서 같은 아브라함의 형제로도 불린다(창세 13,8; 14,14.16). 성조들의 공동체에서 성조의 친척들은 서로 형제라고 불린다. 오늘날 팔레스티나의 아랍인은 아직도 모든 친척과 - 특히 외국인들 앞에서 같은 종족의 모든 자손을 “자신의 형제”라고 부른다. 따라서 성서 본문에서는 “형제”라는 용어를 잘 이해된 맥락 안에서 취할 필요가 있다. 협의의 문자적인 의미로 그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할 위험이 있다. 보통 “형제들”을 읽을 때 우리는 “친척들”로 이해해야 한다.


주님의 형제들이 실제로 먼 친척이라는 것은 결국 네번째 복음서에서 끌어올 수 있다. 거기서는 예수께서 당신의 어머니에 대한 보호를 요한에게 맡기시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이 마리아를 한 제자에게 맡기는 것은 분명히 그녀가 오로지 예수 외에 다른 아들들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5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성서의 세계 - 신약] 하느님의 아들, 예수


악마들의 승리자 예수


되풀이 말하지만, 우리는 마태오의 체계적인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특별한 묘사를 어려움 없이 본다. 분명하게 강조되는 다섯 개의 즉 담화는 예수를 스승으로 소개한다. 반면에 마르코의 복음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고유한 계획을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의 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더욱 수집한 작품이다. 다시 말해 거기에서 예수의 생애의 단순하고 생생한 순간들이 정해진 순서 없이 서로서로 따라 나온다. 거기에서는 하나의 고정된 노선을 발견하기 어렵고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주제를 찾아내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런데도 단편적인 기록들 사이에서 마르코 복음에서 지배적인 복음서 저자의 고유한 결정적인 관심사를 생각하게 하는 요소가 발견된다. 동시에 베드로가 예수에 대한 자신의 묘사에서 동일한 생각을 드러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베드로는 사도들의 우두머리로서 교회 안에 초기 이방인들을 모았다. 그는 이것을 가이사리아에서, 로마 백인대장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납득하였다. 고르넬리오의 친척들과 친구들을 위해서 베드로는 예수의 삶에 대해 짤막한 평을 해야 했다.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비롯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서 일어났던 나자렛 예수에 관한 일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시고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사도 10,37-38). 예수의 공생활은 몇 마디로 말해서 악마에 대한 계속되는 승리로 특징지어진다.


베드로의 제자는 예수의 공생활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할 때 악마의 힘을 상대로 한 예수의 투쟁에 대해 분명히 상당한 관심을 드러낸다. 비슷한 사건들에 대한 묘사를 마르코가 선호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실상 마르코 복음의 첫번째 극적인 기적은 악마 추방(구마)이다.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소리로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그래서 예수께서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하고 서로 수군거렸다”(마르 1,23-27).


다른 복음서 저자들에게서도 악마들을 쫓아내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은 사실이나, 마르코는 그것을 기록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드러낸다. 악마 추방은 마르코의 복음에서는 첫번째 기적이면서 가장 빈번히 나오는 기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묘사가 생생하여 언제나 놀랍다. 예를 틀면, 게라사 지방에서의 악마 추방은 웅장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사람은 마귀 들린 사람들 앞에서 무력하다. “여러 번 쇠고랑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 두었지만 그는 번번이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지 못하였다”(마르 5,4). 예수의 권능은 그에게 이례적으로 당당한 권능으로 드러났다.


예수의 권한은 마귀 들린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본다는 사실을 통해서 더욱 위대하게 나타난다. 첫번째 기적에서 해로운 악령은 득의 양양해서 외친다.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선 거룩한 분이십니다”(마르 1,24). 또한 다른 데서도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의 이름을 안다고 자랑한다(마르 1,34; 3,11; 5,7). 근동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을 뜻하므로, 악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예수를 자기 권한 안에 두기라도 한 듯 득의 양양하게 자랑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는 머리를 숙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두려운 폭군보다 더 큰 권능을 지니셨다.


예수의 승리는 새로운 나라를 위해 근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사탄의 유혹들이 영구히 패배하게 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마르코는 예수께서 점차로 그분의 권한을 사도들에게 넘기신다는 것을 두 번이나 말씀하시도록 하고 있다. 그분은 그들을 뽑으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마르 3,15; 6,3) 주시어 파견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악마에 대한 영원한 승리다.


이미 말했듯이, 전승은 마르코가 베드로의 제자였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으며, 예수에 대한 마르코의 비전이 이를 입증한다. 같은 전승은 또한 마르코가 그의 복음을 로마에서, 다시 말해 이방인들을 위해 썼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며, 이 역시 예수에 대한 마르코의 비전으로 입증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이방인들에게 확신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마태오가 했듯이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에게 호소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구약 성서를 알지 못했던 반면에 단지 자기들이 두려움과 공포 속에 섬기는 우상들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코에게는 이방인의 우상들이 악마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시편 96,5), 그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에게 합당한 신적 권한을 소유하신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양한 부분들과 악마의 추방 기사들이 집중되는 두번째 복음서의 정점은 십자가 아래서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한 고백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


하느님의 힘 아래


복음서들의 주인공이 - 특히 마르코 복음에서는 모든 권능 위에 들어 올려진 - 자기 자신을 한충 더 높은 권능에 종속시킨다는 사실은 어쩐지 놀라운 일이다. 사실 많은 순간에 예수께서는 전능하신 분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의 생명이 그분의 손안에 있고, 그분은 죽음의 침상에서 혹은 적어도 무덤에서 죽은 이들을 부활시키신다. 반면에 자신의 죽음과 관련될 때, 그분은 자기 생애의 길이 다른 분에 의해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에게 달려 있다고 느낀다.


자신의 공적인 활동이 성공을 이루는 동안에 그분은 자기 생애의 종말에 대해 침묵하신다. 세상을 영구적인 승리로 정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적들의 반대 이후에 그리고 군중으로부터 물러나 계신 뒤에 그분은 그분에게 충실한 집단에게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신다.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 오로지 그들에게만 나라의 신비에 귀기울이는 것이 허용된다. 그리고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에 대해 아버지께서 지니신 계획을 밝히실 때 유일하게 참석한 것도 그들이다. “그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예수께선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마르 8,31-32).


이러한 신비는 사도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그 내용은 지지할 수 없었으나 예수께서 자유로운 선택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고 “의무”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분이 그러한 사명을 밝히신 말씀들은 느부갓네살에게 예고되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다니엘의 예언(다니 2,28-29)을 생각나게 하였다. 예수의 경우에도 하느님의 요청, 아들이 마땅히 종속되어야 하는 아버지께 대한 임무가 있었으니까.


오늘날의 독자가 여기나 혹은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예수의 입에서 나온 하느님의 뜻을 그렇게 풀리는 것으로 이해할 때, 예수 자신은 이러한 하느님의 명령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때때로 그분이 당신의 과제를 구약성서의 예언들로부터, 특히 이사야서나 수난과 관련 있는 시편들로부터 이해하셨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 시대에 유다 공동체는 수난의 예언들을 메시아에게 적용시키지 않았다. 예수의 생애에서 메시아적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을 보도록 배려하는 마태오조차도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 안에 예언의 구절을 언급하지 않는다. 루가에게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할지라도 뚜렷한 어떤 예언도 인증하지 않는다(루가 24,26.4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장래의 수난을 다른 방식으로 아셨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세속적인 설명을 따라가고 예수의 인간적 인식이 어쨌든 그분의 신적 인식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분은 그런 식으로 자기 생애의 책무를 아셨으므로 사도들에게 그것을 전하셨다.


이들이 스승의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는 것은 죽음에 관한 예언의 삼중 반복으로부터, 마태오나 마르코 그리고 루가에서 모두 발견되는 - 두번째 복음서 저자에게서는 특별히 더 눈에 띄는 - 하나의 반복으로부터 드러난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 우리는 이를 이미 말했지만 - 예수의 말씀을 가장 적게 가지고 있고, 세 번이나 반복되는 하나의 일은 특별한 의미를 띠고 있다. 세 개의 예언이 밀도 높은 리듬으로 이어지는(마르 8,31-35; 9,30-32; 10,32-34) 그만큼 더 독특하고 긴박한 연결이라는 인상을 준다. 게다가 수난에 대한 세번째 예언은 마르코 복음에서 더욱 작은 특성에 이르기까지 공들여 작성되어 있다. 실상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발걸음을 옮기는 중 예수께서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싸여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앞에 서신다. 그리고는 열두 제자를 향해 얼마나한 일이 당신에게 닥쳐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시기 시작한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 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10,32-34).


분명한 제시에도 사도들은 예언을 이해하지 못했다(마르 9,32). 그리고 예수께서 그것을 선포하셨을 때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도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예수의 수난이 시작될 때 그들은 도망칠 것이다.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도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마르 16,11-14). 오로지 성령의 은혜로 그들은 믿음과 사실에 대한 올바른 감각을 받았을 뿐이며, 그리고는 수난에 대한 예언을 여러 차례 정확하게 반복했을 뿐이다. 예보와 성취는 따라서 그들에게 예수를 믿기 위한 논거가 될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의 복종은 악마들의 세력에 대한 그분의 지배와 강한 대조를 이룬다. 그분의 지배는 그분의 메시아적 품위에 대한 유력한 입증이다. 동시에 성부께 대한 그분의 복종은 사람들에게 그분의 사명이 지닌 메시아적 특성에 대한 표명이 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6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성서의 세계 - 신약] 천사 발현의 즉석 사진


마르코 복음에 나타난 부활의 천사


오늘날의 복음서 해석에서는 흔히 두 가지 중요한 경향이 제시되는데, 비록 이러한 경향들이 비가톨릭 성서 주석으로 명백해진 것이라 할지라도 가톨릭에게도 강한 암시를 준다.


그 첫째는 기적적인 것, 말하자면 흔히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는 초자연적 일들, 그리고 천사로 명기되는 하늘의 인물에 대한 확실한 반감으로 묘사될 수 있겠다. 현대인은 복음서의 기적들을 단순화하고 ‘천사 없는’ 천사적 발현을 설명하려고 애쓴다.


엄밀히 첫째 경향과 연결되는 다른 경향은 마르코 복음에 대한 특별한 평가다. 이 복음서에서는 선선하고 원초적인 비전이 눈을 끌고, 다른 복음서들보다 더 신빙성 있고 참되다는 인상을 주는 생생한 기록을 읽게 된다. 말하자면 마태오 복음은 호교적인 맛을 지니고 있으며, 논증하고 입증하려고 애를 쓴다. 반면에 마르코 복음은 순수한 기록이다. 이 때문에 마르코의 객관적인 보고서를 쉽게 선호할 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들의 기적 이야기들이 그의 이야기로 완화된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것을 관찰해 볼 수 있다. 예수의 유년기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나 경이적인가! 천사들의 계속적인 방문이다. 어디에서 이런 기적들을 발견하는가? 마르코 복음에는 없다. 그 결과 마르코 복음은 사실을 밝혀 내고, 다른 복음서들의 기적 이야기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규범이 되고 있다. 천사의 발현을 순수하게 상징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호소한다.


마르코 복음에서 천사들에 대한 어떤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장엄한 계획의 장식이나 배경으로 의도된 것이다. 예컨대, 예수께서 그분이 천상 영광에로 들어가심을 묘사할 때, 그분은 천사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예수께서 뽑힌 사람들을 사방으로부터 모으기 위해 그분의 천사들을 파견하실 때인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서도 그렇다(마르 13,27 참조).


이미 후기 유다 문학은 천사들을, 비록 그러한 묘사에서 단지 배경으로 밖에 이용되지 않지만, 마지막 심판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마르코는 땅에 내려온 천사들에 대해 말할 때 볼 수 있는 천사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예수의 유혹과 관련,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는 말에 이어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는 말이 따라오게 한다(마르 1,13). 만일 악마의 유혹이 내적이었다면 - 일반적으로 그것을 해석학자들은 지지한다. - 천사들의 시중도 결과적으로 어떤 내적인 것이었으리라. 어쨌든 다시 한번 마르코 복음에서 천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묘사다.


그러나 일련의 묘사들과 부합하지 않는 천사 묘사가 있다. 그것은 빈 무덤에서 발현한 천사에 대한 생생하고 장엄한 표현이다. “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더니 웬 젊은이가 흰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보고 질겁을 하자 젊은이는 그들에게 ‘겁내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여기가 예수를 모셨던 곳이다.’ 하였다.” 여자들은 “겁에 질러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마르 15,5-8).


아무도 이 보고서를 단순한 짜맞춤이거나 장식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사건에 대한 보고이다. 여자들의 당황스러움도 느껴진다. 봉인된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하는 것은 정녕 얼마나 불가사의한 일이겠는가! 첫번째 반응은 “여기 이 무덤을 모독했구나.”일 수밖에 없다. 왜 그랬을까 라는 물음은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갑자기 증인으로 나타난 한 젊은이의 입에서 설명이 따라 나온다. 그의 증언은 이야기를 더욱 불가사의하게 하였다. 혼란에 빠진 여자들은 도망쳤다.


이 보고서에서는 ‘천사’란 말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한 젊은이에 대해 말할 뿐이다. 흰옷은 그가 하늘의 사자라는 것을 암시하게 한다. 사실 승천 때에도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하늘의 메시지를 갖고 나타났다(사도 1,10). 그리고 예수의 변모 순간에 그분의 옷은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마르 9,3) 빛나고 눈처럼 하얗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마르코의 객관적이고 순수한 복음은, 말하자면 천사 발현에 대한 즉석 사진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초자연적 사건을 말하는 것이 바로 마르코이므로, 현대의 독자조차도 의심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참되고 설명할 길 없는 발현 사실에 직면한다. 그러나 설명할 길 없는 이야기가 겸허하고 성실한 믿음으로 읽혀지기를 복음서 자체가 요구하는 순간들이 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7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성서의 세계 - 신약] 마르코 복음의 진실성


마르코 복음의 결론


모든 성서 번역은, 어떠한 종교적 고백으로 이루어지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그 시대의 결정적인 관점 혹은 개념의 재현(再現)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의 다양한 번역에서 각 종파의 서로 다른 해석이 발견되는 까닭을 알 수 있다. 특히 마르코 복음의 결론과 관련 있는 몇몇 번역에서 눈에 띄는 상이점과 마주치게 된다. 신앙심이 깊어 보이는 옛 번역 하나는 두 번째 복음서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 “그러자 그들은 떠나가서 도처에서 주님의 도움을 받으며 설교하였다. 주께서는 그들의 말을 기적들로 증명해 주셨던 것이다”(마르 16,20). 반면에 20세기에 들어서 회의적인 합리주의 시대에는,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마르 16,8)로 끝나는 프로테스탄트 번역이 출판되었다. 처음의 프로테스탄트 번역들은 마르코 복음의 옛 결론 앞에서 망설이며 마르코 복음 16장 9절부터 20절을 큰 괄호 속에 담고 있는데, 이렇듯이 어느 시대나 그 나름대로의 확신과 의심은 있는 것이다.


가톨릭의 경우, 트렌트 공의회는 성서 내용에 관한 교의적인 결정 가운데서,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마르 16,9-20)이 성서에 속한다는 것을 틀림없는 사실로 천명하였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우리는 그것을 신약 성서의 번역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트렌트 공의회의 오류 없는 선언은 저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즉 마르코가 복음의 저자라고 믿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 저자 마르코가 그 전통적인 긴 결론의 저자라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의심한다면, 그 의심은 영감(靈感)이 아니라 저자에게만 국한된다.


앞서 말한 구절들의 진실성에 반(反)하는 중대한 논거는 몇 가지 고사본에 그것들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4세기 중엽의 썩 훌륭한 두 개의 사본은, 마르코 복음을 신심 깊은 여인들의 두려움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구절(마르 16,8 참조)로 끝맺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본들은 전통적인 결론에 명백히 대립된다. 어쨌든 다른 사본들이 또 다른 결론 형식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따라 논거는 보강된다. 따라서 고대 교회에는 문제의 구절들의 진실성에 관한 의심이 명백하게 있었다.


열두 개의 구절이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자료의 연속이라면 더욱이나 여자들의 두려움에 대한 묘사가 기쁜 소식의 결론으로 어렵사리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여하튼 알려져 있는 결론이 바로 앞선 구절들의 연속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한 보고에서 이미 막달라 마리아의 문제가 있었고(마르 16,1), 반면에 계속되는 이야기에서는 그녀가 독자에게 아직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으로 소개되기 때문이다. “일요일 이른 아침,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는데, 그는 예수께서 일찍이 일곱 마귀를 쫓아내어 주셨던 여자였다”(마르 16,9). 이 사실은 마르코 복음과 문제의 결론이 서로 통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게다가 논의된 구절들은 부활에 대해 이미 알려진 묘사들을 짤막하게 요약한다는 인상을 준다. 엠마오 제자들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짧고 간소하게 암시된다. “그 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시골로 가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마르 16,12). 다른 일화들 - 넷째 복음서에서는 폭 넓게 작성되어 있다. - 은 오히려 두 단락으로 요약된다. “그 뒤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마음이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신 것을 분명히 본 사람들의 말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마르 16,14). 또한 마태오의 파견 명령도 극히 짤막하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따라서 이 열두 구절은 이미 알려져 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결론 대용품이라는 인상을 준다.


문제의 구절들에서 마르코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몇 가지 말들이 나오고, 예수께서 바오로의 편지에서처럼 “주님”(마르 16,19)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고려해 불 때, 많은 이들에게 이 일은 결정적이고, 그들은 더 이상 마르코를 이 적절하지 않은 결론의 저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열두 구절에서 마르코 복음의 중요한 다른 주제들을 찾아낸다. 즉 예수께서는 악마들의 주님이시고(마르 16,9-17), 사도들은 - 적어도 원칙에 관하여 - 의심이 많은 증인들로 묘사된다(마르 16,11.13.14). 예수에게 주어진 호격 “주님”은 있을 법하지 않은 것으로 혹은 바오로의 제자 입에서 나온 새로운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말하기를, 전통적인 결론은 마르코 복음에 뒤늦게 덧붙여질 수도 있었다고 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8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