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임치백(林致百) 요셉(1804-1846)


'군집(君執)'으로도 불리던 임치백 요셉은 한강변의 한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미 1830년에 천주교를 알게 되었으나 입교하지는 않았고, 호의적으로 천주교와 천주교인을 대하기만 했다. 1846년 5월 선주(船主)인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갇혀 있는 옹진 수영으로 가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천주교인이라 속이고 자수했다. 며칠 후 서울로 이송되어 포청에서 처음으로 김대건 신부를 만나 천주교 교리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즉시 세례성사를 받고, 순교를 결심했다. 드디어 9월 20일 정오부터 해가 질 때까지 매를 맞은 후 포청 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4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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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서 신자가 된 임치백


일명 군집(君執)이라고도 하는 임치백(林致百 요샙 1803-1846년) 성인은 서울 한강변의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모친을 잃고 홀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천성이 순량, 정직하여 덕행을 쌓았다. 1830년 처음으로 천주교를 알게 된 그는 호감을 가졌을 뿐 입교하지는 않았다.


이 무렵 김대선 신부는 중국에 머물고 있던 메스트로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영입하고자 연락망을 찾고 있었다. 김 신부는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기잡이를 하는 중국배를 통해 중국으로 편지와 지도를 보내려고 계획했고, 중국선과 접촉하려고 조기잡이 배를 위장할 배를 한 척 얻었다. 그 배가 바로 임치백의 아들 임성룡의 배였다. 1846년 5월 13일 조기잡이 배로 위장한 임성룡의 배를 빌려 탄 김대선 신부는 마포를 떠나 연평도 앞바다를 거쳐 등산곶으로 나갔다가 등산첨사에서 체포되었다.


임치백은 배를 빌려준 아들이 김대선 신부와 함께 관아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옹진수영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아들은 황해도 감영으로 넘겨지고 난 뒤였다. 다시 해주로 달려간 그는 아들의 석방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아들을 만나고자 '천주학쟁이'라고 거짓 고백을 한 임치백은 곧 감옥에 갇혔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된 감옥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김 신부의 신덕과 용덕에 크게 감동받은 임치백은 감옥에 갇힌 신자들 앞에서 "나도 오늘부터 천주교를 믿겠다" 하고 말하였다.


임치백은 그 날로부터 기도하며,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임요셉의 친구들은 그의 목숨을 살리고자 배교를 종용했지만 그는 의연히 거절하고 오히려 천주를 위해 죽기를 다짐했다. 형리는 더욱 간교하게 임치백의 아들과 며느리를 앞세워 가족의 처지를 생각해서라도 배교한다는 말 한 마디만 하도록 그를 회유했다. 임치백이 인정에 끌려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자 형리들은 극심한 매질을 시작했다.


요셉은 피투성이가 된 채 태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죽을 사람을 공연히 매질하는 헛수고를 하는 게요." 그러자 형리들은 대꼬챙이로 임치백의 몸을 찌르고 주리를 틀며 "만일 네가 신음소리 한 번이라도 내면 그것으로서 배교한 것으로 보겠다"고 했다. 이게 어쩐 일인가? 이 말이 있자마자 임치백 요셉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단 한번의 신음소리도 내지 않은 것이다.


그이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자신의 사형선고 소문을 듣고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으며 같이 있던 교우들을 격려하였다. "나는 본래 아무런 공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로 여러분보다 앞서 천국에 가게 되면 반드시 천국에서 내려와 여러분의 손을 잡고 아버지이신 천주의 나라로 안내할 터이니 여러분은 용기를 내주시오."


얼마 뒤, 그는 포도대장 앞으로 끌려갔다. 포도대장은 그에게 "네가 진실로 천주교를 믿느냐?" 하고 물었다. 임치백은 "저는 감옥에 들어온 이래 기도하며 배우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천주십계명을 외워보아라." "저는 아직 다 외우지 못합니다." 이에 포도대장은 "십계도 못 외우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천국에 가려면 다른 신자들처럼 유식해야 하느니라" 하며 그를 내보내려 했다. 이때 임치백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이는 글을 몰라도 어버이께 효도할 수 있습니다. 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일지라도 효도는 훌륭히 합니다. 제가 배운 것은 없지만 천주께서 제 아버지이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일로 임 요셉은 거듭 고문을 받았으나 굽히지 않았다. 그러던 9월 20일, 해질녘까지 매를 맞은 그는 옥안에서 동료 여섯 명과 함께 목매어 죽음을 당했다. 임치백의 나이 마흔 넷이었다. 그의 위대한 죽음을 지켜본 옥리가 시신을 거두어 묻은 뒤 그의 몸이 신비로운 빛 속에 싸여있었다고 유족들에게 전했다.


<경향잡지, 1997년 6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성 이호영 베드로(1803-1838)


이호영은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으로 신유박해 후 어머니와 과부가 된 누나 이소사(아가타)와 함께 입교했다.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이사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으며 이 때문에 유방제(柳方濟)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l815년 2월(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나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참아내어 결국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때 결안(結案)의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는 문구에 대해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정도(正道)이며 거룩하고 참된 도(道)라 수결(手決)할 수가 없다고 버티자 포졸들이 강제로 수결시켰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4년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누나 이소사와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1838년 11월 25일(음력 10월 8일) 긴 옥살이 끝에 얻은 병과 옥고로 옥사(獄死)했다. 그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 성녀 이소사 아가타는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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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영 베드로 - 칼 아래 순교하는 것이 원입니다


이호영 베드로(1803-1838년) 성인은 우리 나라의 두 번째 전국적인 박해인 기해박해(1839년) 때 순교한 성인, 성녀보다 한발 앞서 순교한 분이다. 한국 순교 성인 명단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정하상 바오로 다음으로 그 이름이 올려진 이호영 베드로는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신자가 된 그는 부친이 대세를 받고 선종한 뒤에 누나 아가다와 함께 서울로 이사하여 한강 북쪽에 있는 무쇠막이라는 동네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누나 아가다는 17세에 결혼했으나 3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동생 이호영과 함께 옥중의 고통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하여 남매가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이호영 베드로가 무쇠막에서 살 때 그의 성실한 신앙생활이 당시 주문모 신부 다음으로 입국해 사목하던 유방제 신부의 눈에 들었다. 유 신부는 그의 순직함을 보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부탁했는데, 나이가 어리면서도 모든 일을 잘 감당했다. 그는 서른 살이 되어서야 외교인 처녀를 입교시켜 결혼했다. 유 신부는 그의 성실함을 보고 회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그는 직무를 잘 처리해 내었다.


그러다가 유호영은 참으로 기이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친구의 권유로 과거장에 갔는데 그곳에는 황홀한 음악이 들려왔다. "자네가 급제를 했네." 친구가 한 말에 깜짝 놀라 "아니 어째서 그렇단 말인가?" 하고 묻자 "임금님의 신임을 받은 신하가 자네를 아는 까닭일세" 하고 친구가 대답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내가 아마 치명하려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칼 아래 치명하여 순교하는 것을 그만큼 영광스럽고 기쁜 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꿈을 꾸고 몇 달이 지난 1835년 2월 어느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니 한 무리의 포졸이 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그를 체포했다. "어째서 나를 잡는거요?" 이호영이 물었다. "네 죄를 네가 모르겠는가? 천주교를 믿으니 잡아가는 것이다." 포졸들은 그의 누나인 아가다도 함께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고 참혹한 형벌과 심문이 이어지는 옥고가 시작되었다. 이호영은 문초를 당한 것에 대해 옥중에서 이렇게 편지를 썼다.


"동짓날 초엿샛날 재판 시간(오후 2시경)에 나와 누님은 법정으로 끌려갔습니다. 관장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양옆으로는 곤장을 든 형리들이 많이 서 있었습니다. 재판관이 내 이름을 묻고 나서 문초를 시작했습니다. '사교(邪敎)는 부모의 은덕을 배반하는 것이요, 또 조정에서 엄금하고 있거늘 어찌하여 그것을 신봉하느냐?'


'결단코 사교가 아니옵니다. 천주교를 믿고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면 국왕을 공경하고 부모를 극진히 사랑하며 남을 자기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누가 이런 교를 가리켜 부모의 은덕을 배반하는 것이라 말하겠습니까?'


'너는 한문을 아느냐?'


'한문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 교를 배울 수 있었단 말이냐?'


'이 교를 배우기 위해서는 제가 읽을 줄 아는 언문으로 번역된 책이 있으니 한문을 몰라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배우기가 무엇이 그리 어려웠겠습니까?'


'네 나이가 몇이냐? 너는 부모님께서 제사를 지내지 않지? 누가 보든지 조상께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는 자는 개나 돼지만도 못한 자이며 죽어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교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죽음 취하고자 한단 말이냐!'


'그 제사라는 것은 헛되고 무익한 것이요, 진리를 따르기 위해서는 헛된 것과 무익한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잠드신 부모님께 음식을 차려드리고 잠드신 채 그것을 잡수시라고 한다면 그 아니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영혼은 신령한 것이기에 물질적인 음식을 먹고살지 않습니다. 또 천주의 계명은 훌륭한 것이요, 그것을 지키면 공이 되는 것입니다. 국왕을 위해 자시 생명을 바치는 사람을 역적이라고 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천지문물의 주제이시며 왕 중의 왕이시며 전 인류의 공번된 아버지이신 분, 비와 이슬을 마음대로 내리게 하시고, 가장 미약한 풀 한 포기에서 큰 나무까지도 모두 자라게 하시며 그분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없는 천주를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역적으로 몰겠습니까?'


'음, 네 말이 옳기는 하다. 그러나 조정에서 금하는 것을 거역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있다. 그리고 어찌하여 조상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헛되고 쓸데없단 말이냐? 천주의 그림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도 역시 헛되고 무익한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부모의 초상에는 왜 절을 하지 않느냐?'


'천주님은 전능하시고 무한히 착하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제가 천주를 흠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드리는 특별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너 혼자 지껄이고 있으니 누가 네 말을 옳다고 하겠느냐? … 어찌하여 마음을 아니 돌리느냐?'


'거룩한 결심을 어찌 나쁜 결심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 때 그들이 내 책에 들어있는 작음 봇짐을 묶어서 재판관 앞에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나 다음에 누님도 문초를 당했는데, 나와 같은 진리를 증언했습니다. … (여기서 그는 누님인 이 아가다 성인의 문초와 형벌 받는 대목을 적고 이렇게 끝맺음하고 있다.) 내가 지금 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들은 것입니다. 이야기를 더 길게 쓸 수가 없습니다. 내 영혼에 가득한 생각을 자세히 기록할 수는 업습니다. 내 다리는 온통 터져서 하나의 큰 상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주의 은혜로 아직도 괴로움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교우 여러분에 평화를 축원하며 소식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호영은 이 편지에서 자신이 받은 형벌에 대해서 자세히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문초 당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더 상세히 전해주었다. 형리들은 그의 주리를 틀어 정강이뼈가 활처럼 휘게 하는 등 사람으로서는 차마 견디지 못할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만일 네가 말로써 천주를 배반하기 싫거든 글자 하나를 써줄 터인 거기에다가 저 하나만 찍든지 침을 뱉든지 하라. 그러면 그것으로 배교를 인정하고 너를 놓아주겠다"고 유혹했다. "만 번을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거절당하자 형리 네 명이 굵은 곤장으로 한꺼번에 이호영의 온몸을 마구 내리쳤다. 그러면서 재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신음소리를 낸다면 배교하는 것으로 인정하겠다." 이호영은 살점이 헤어져 뼈가 드러나고 팔이 부러지도록 매질을 당했다. 그러나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재판관은 판결문을 내주며 "여기에 내 도장을 찍어라"고 했다. 이호영은 판결문을 보고 천주교를 사교로 단정한 구절에 반발하여 말했다. "우리 교는 거룩하고 그 가르치는 도리는 참된 그것이 그르다고 증언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거절했다. 재판관은 억지로 그의 손을 끌어다 도장을 찍게 하였다. 이호영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 옥중에서 상처가 심하고 병이 깊어 기력이 쇠약해졌다. 1838년 11월 25일 그는 "나는 칼 아래 치명하는 것이 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주의 명이 아니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고 하느님 성의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숨을 거두었다.


<경향잡지, 1999년 9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6) -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평신도단체 명도회의 첫 회장 "초대교회 가장 뛰어난 지도자"


진주목사(晉州牧使) 정재원(丁載遠)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가 한국초대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의 아들들은 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인데 그 중에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 1760-1801)은 셋째 아들이다.


정약종은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중에 성인 정하상(丁夏祥)과 정정혜(丁情惠)의 아버지이시다. 달레 신부는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정약종을 두고 "천주교가 이 나라에서 가졌던 가장 유명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이며, 가장 위대한 순교자 중에 한사람"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그의 후손인 우리는 아직도 그를 복자나 성인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순교자가 성인으로 선포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삼가 그의 유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천성이 곧고 총명하며 연구심이 강하여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필에 성공했다.


그는 점잖고 학식 있는 인사들과 교제하여 이가환 등 당대의 저명한 선비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는 입신양명을 위한 과거시험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 증진하여 철학, 윤리 등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한 동안 그는 추종자들에게 불사(不死)의 비법을 얻겠다고 약속하고는 노자의 도를 연구하기도 했고, 또 의학에 심취하여 큰 명성을 얻기도 했다.


마침내 천주교가 전래되자 그는 곧 그 교리를 공부했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를 즉시 따르지는 않았고, 오히려 이벽(李蘗)의 신앙생활을 염려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786년에 그의 망설임은 끝이 나고 영세입교할 때, 그가 망설였던 것이 성 아우구스띠노의 젊은 시절 지성의 방황과 닮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수호성인으로 받들며 세례명을 아우구스띠노라 정했다. 신자가 된 정약종은 다시는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어떤 찬사도 미칠 수 없는 열성과 항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1791년 진산사건으로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비참하게 배교한 형제와 친구들 속에서도 그는 뛰어난 모범으로 신앙생활의 귀감이 되었다.


정약종을 친하게 알았던 황사영은 그의 사람됨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그는 세속 사정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특히 철학과 종교연구를 즐겨 하였다. 교리의 어떤 점이 분명치 않게 생각될 때는 그것을 연구하느라 침식을 잊고 그것을 밝혀 내기까지는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가거나 집에 있거나 말을 타거나 배를 타거나 깊은 묵상을 그치지 않았다. 무식한 사람을 만나면 온갖 정성을 들여 그것을 가르쳤으며,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그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귀찮아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무리 우둔하더라도 그들에게 자기의 말을 이해시키는데 신기할 만큼 능숙했다.


그는 조선말로 '주교요지'라는 책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거기에는 그가 천주교 서적에서 본 것을 모아놓은 다음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으며, 무엇보다도 명백히 그것들을 설명하는데 힘썼다. 이 책들은 이 나라의 새 교우들에게 귀중한 길잡이가 되었으며, 주문모 신부도 그것을 인정하였다.


정약종은 교우들을 만나면 인사를 나눈 후 곧 교리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리 이외의 쓸데없는 말을 끼울 수가 없었다. 그가 통달하지 못했던 어려운 점을 누군가가 풀어주면 그는 마음에 기쁨이 넘쳐흘러 그 대화자에게 뜨겁게 감사했다. 반면 냉담자나 우둔한 사람이 구원의 진리를 기꺼이 듣지 않으면 그는 근심과 걱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온갖 문제들을 질문하였는데, 그는 정확한 답변과 단순하고도 명백한 말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앙을 굳게 하고 애덕을 더하게 했다."


그는 당대 가장 뛰어난 교리지식을 바탕으로 교리서인 "주교요지" 상하를 저술하여 중국의 교리서인 "성세추요"를 능가하였고, 종합교리서인 "성서전교"를 집필하던 중 1801년 박해로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는 그의 일생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마재에서 서울로 말을 타고 가던 중에 정약종은 금부도사를 만났다.


그는 사람을 보내 누구를 잡으러 가는가를 알아보게 하였고, 금부도사가 자신을 체포하러 가는 길임을 알고 그 자리에서 곧장 감옥으로 갔다. 신문을 받는 동안 그는 엄숙히 신앙을 고백하며 천주교 진리를 설명하였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에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의 얼굴은 아주 빛났다. 옥중과 법정에서 지치지 않고 전도한 그는 그의 순교장소를 매우 감동적인 강단으로 만들었다. 그를 죽이기 위한 형구들을 행복스럽게 바라보며 소리 높여 마지막 강론을 힘차게 했다. 그는 형구에 머리를 댈 때,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며 하늘을 볼 수 있게 머리를 바로 누였다. 망나니가 벌벌 떨며 마지못해 첫 칼질을 하였다. 목이 절반밖에 잘리지 않았지만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십자성호를 그은 다음 다시 처음의 자세로 누워 순교하였다.


한국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 초대교회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 중의 한 분, 가장 위대한 순교자 중 한 분이신 그는 42세로 그 생을 마쳤다. 초대교회에서는 그의 무덤에서 수많은 치유기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가톨릭 신문, 2001년 4월 8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 평신도의 영원한 귀감


진주목사 정채원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초대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의 아들들은 약현, 약종, 약용, 네 형제인데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년)는 셋째 아들이다.


정약종은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 가운데 정하상 바오로와 정정혜 엘리사벳성인의 아버지이다. 달레 신부는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정약종을 두고 "천주교가 이 나라에서 가졌던 사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며, 가장 위대한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라고 극찬했다.


그는 천성이 곧고 총명하며 연구심이 강해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필에 성공했다. 그는 입신양명을 위한 과거시험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 힘을 쏟아 철학, 윤리 등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한동안 그는 불사(不死)의 비법을 얻겠다고 노자의 도를 연구했고, 또 의학에 심취하여 큰 명성을 얻기도 했다.


마침내 천주교가 전래되자 그는 곧 교리를 공부했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를 곧장 따르지는 않았고, 오히려 이벽(李檗)의 신앙생활을 염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그의 망설임은 끝이 났고, 입교하여 세례를 받을 때 자신이 처음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였던 점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젊은 시절 지성의 방황과 닮았다고 생각하여 세례명을 아우구스티노라 정하고 자신의 수호성인으로 받들었다. 이렇게 신자가 된 정약종은 그 뒤 다시는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이 변함없는 마음과 열성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1791년 전산사건으로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비참하게 배교한 형제와 친구들 속에서 뛰어난 모범으로 신앙생활의 귀감이 되었다.


정약종과 친하게 지냈던 황사영은 그의 사람됨에 대해 이렇게 말재주고 있다. "그는 세속 사정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오직 철학과 종교 연구를 즐겨하였다. 교리의 어떤 점이 분명치 않다고 생각될 때는 그것을 연구하느라 침식을 잊고 그것이 밝혀질 때까지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가거나 집에 있거나 말을 타거나 배를 타거나 깊은 묵상을 그치지 않았다. 무식한 사람을 만나면 온갖 정성을 들여 가르쳤으며,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그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귀찮아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무리 우둔하더라도 자기의 말을 이해시키는 데 신기할 만큼 능숙했다. 그는 조선말로 '주교요지'라는 두 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가 천주교 서적에서 본 것을 모아놓은 다음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으며, 그것들을 명백히 설명하는데 힘썼다. 이 책들은 이 나라 새 교우들에게 귀중한 길잡이가 되었으며, 주문모 신부도 그것을 인정하였다. 정약종은 교우들을 만나면 인사를 나눈 뒤 곧 교리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이외의 쓸데없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가 통달하지 못했던 어려운 점을 누군가 풀어주면 마음에 기쁨이 넘쳐 그 사람에게 뜨겁게 감사하였다. 반면 냉담자나 우둔한 사람이 구원의 진리를 기꺼이 듣지 않으면 그는 근심과 걱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온갖 문제들을 질문하였는데, 그는 정확한 답변과 단순하고도 명백한 말로 마음속에 신앙을 굳게 하고 애덕을 더하게 했다."


그는 당대 가장 뛰어난 교리지식을 바탕으로 교리서인 "주교요지" 상, 하를 저술하여 중국의 교리서인 "성세추요"를 능가하였고, 종합교리서인 "성교전서"를 집필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하였다.


마재에서 서울로 말을 타고 가던 길에 정약종은 금부도사를 만났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누구를 잡으러 사는지를 알아보게 하였고, 금부도사가 자신을 체포하러 가는 길임을 알고 그 자리에서 곧장 감옥으로 갔다. 심문을 받는 동안 그는 엄숙히 신앙을 고백하고 천주교 진리를 설명하였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에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정약종의 최후는 그의 일생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의 얼굴은 마치 어떤 희열에 감진 듯 빛났다. 도중에 그가 수레 끄는 사람들을 불러 "목이 마르다"고 하니 사람들은 죽음의 형장으로 가는 죄인이 물을 청한다고 나무랐다. 그러자 정약종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며 "내가 물을 청한 것은 나의 위대한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기 위함이어" 하고 말하였다.


감옥과 법정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치지 않고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전교하였던 그는 최후의 순간인 형장에서도 열정을 다해 교리를 설명하여 형장을 마치 열정 어린 전교의 강단처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될 형구 앞에 앉았다. 그리고 형구를 행복하게 들여다보고 나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높여 외쳤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무한히 흠숭하올 천지만물의 대주재이신 분이 당신들을 창조하셨고 보존하십니다. 당신들은 모두 회개하여 당신들의 근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근본을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 거리로 삼지 마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형리들은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참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대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태연히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똑바로 머리를 누이면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죽는 것이 났다"고 하였다. 심금을 울리는 그의 열변과 의연한 자세를 보고 망나니는 벌벌 떨며 감히 칼을 내리치지 못하다가 관장의 독촉을 받고서야 아직 감탄에 찬 마음이 가시지 않은 채 자신 없는 손놀림으로 마지못해 첫 번 칼을 내리쳤다. 이 때문에 정약종의 목은 절반밖에 끊어지지 않았다. 선혈이 낭자하고 보는 이들이 더욱 긴장했다. 순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다음 순간 그는 조용히 손을 들어 보단 듯이 크게 성호를 긋고 다시 누워 칼을 받을 자세를 취했다. 순교의 칼! 그것이 소원인 듯 태연한 그의 모습에 장내는 순간 숙연해졌다. 그리고 여섯 번째 칼을 받고서야 그토록 열망하던 순교의 영광 속에 그의 영혼을 주님께 바쳤다.


한국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 한국 초대교회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 그리고 가장 위대한 순교자 가운데 한 명인 그는 42세로 이렇게 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정성스럽게 거두어져서 그 가족이 살고 있는 곳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의 친척과 인척들은 그의 무덤에서 외교인이건 천주교 인자이건 여러 사람이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다고 단언하였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따라서 그의 재산은 모두 정부의 특별 명령으로 몰수되었다. 그때 맏아들인 정철상 가롤로는 아버지와 삼촌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옥 근처에 머물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정성을 다했다. 그러다가 중부인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숙부인 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각각 유배되었고 굳건히 신앙을 지킨 아버지의 옥중 고초가 더욱 심해졌다. 마침내 아버지 정약종이 순교의 영광을 얻자 바로 그날(1801년 2월 26일) 국청의 명으로 아들 철상도 형조의 옥에 갇히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짚신을 삼아 겨우 먹을 것을 구하면서도 아버지 정약종의 뒤를 따라 굳건한 마음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남은 가족들은 고향 마재로 갔으나 국법을 어긴 죄인의 가족이라 냉대와 괄시를 받았다. 이 냉대와 시련 속에서 뒷날 위대한 평신도 자도자요 순교성인이 되실 정약종의 어린 아들, 정철상의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어린 시절이 눈물 속에 시작되고 있었다.


<경향잡지, 1999년 3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7) - 정철상 가롤로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 옥바라지 / 정약종의 장남

"주문모 신부 거처 알려주면 아버지 풀어주겠다" 유혹 뿌리쳐


대왕대비 김씨는 천주교 금교령을 내리면서 사학이 서울에서부터 기호까지 날로 치성해지고 있음을 거론하고, 그래도 국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금령을 어기는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역률을 적용하여 역적으로 다스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가작통법을 엄히 시행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이며 전국적인 박해인 신유박해는 시작되었다.


지난 해 연말에 최필공과 최필제가 몇몇 신자들과 함께 잇달아 체포되어 가더니 새해에는 배교자 김여삼의 밀고로 최창현 회장마저 체포되는 불길한 징조를 보며, 공포심이 번져 신자들이 불안해하였는데 마침내 정월 10일(음)에 이렇게 금교령이 내려서 염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당시 명도회 회장 정약종은 이제 이런 상황을 비상상태로 보고 중요한 물건들을 은밀히 안전한 곳으로 옮겨 보관하고, 밀고를 피할 수 있도록 집회의 비밀이 더욱 잘 유지되도록 조치하고자 했다. 그는 지난 해 있었던 양근 지방의 박해를 피하여 서울에 와있던 중이었는데, 그 동안 지니고 있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 및 주문모신부의 편지 등이 들어있는 책궤짝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선 믿을 만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인 그의 사환 임대인 토마스를 시켜 책궤짝을 아현에 있는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게 하였다. 나무로 궤짝을 둘러싸서 나뭇짐처럼 위장하여 옮기던 중, 밀도살한 고기를 숨겨 옮기는 짐으로 오해받아 수색을 당하면서 마침내 한성부 관원에게 발각되어 임대인은 체포되고 책궤짝은 압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대왕대비의 금교령이 내려진 아흐레 뒤인 19일에 있은 이 정약종의 책궤짝사건으로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크게 확대될 것을 두려워하여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초조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포도대장 이유경은 채제공의 외조카로 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 더 이상의 보고를 하지 않아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 뒤 새로 부임한 포도대장 신대현은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 배교자들은 모두 석방하고, 최필공, 최필제, 최창현 임대인 등 충실한 신자들만 옥에 남겨 두었다.


이를 본 공서파로 소북의 박장설과 이서구, 최현중 등이 잇달아 상소를 올려 신자들을 반역죄로 처벌할 것과 신자들을 석방해 준 신대현도 처벌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대왕대비는 크게 노하여 포도대장 신대현을 잡아 가두게 하고 포도청에 있던 신자들은 의금부로 옮겨 반역죄를 적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등을 체포하여 국문을 하였고, 2월 11일(음)에는 권철신과 정약종을 14일(음)에는 정약전을 16일(음)에는 이기양을 차례로 체포하여 의금부에 구금하였다.


이 때, 구금 당해 순교한 한국초대교회의 뛰어난 지도자요,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으로 영광스러운 순교를 한 정약종 아우구스띠노의 장남으로 정철상(丁哲祥,가롤로, ? - 1801년)은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말씀과 모범으로 천주교 신앙을 배우고 교회의 계명과 본분을 지키며 자랐다. 그는 아버지의 훌륭한 모범을 그대로 본받아 매우 빠르게 영적 성숙을 이룩하였다. 양근 땅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그로서는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온갖 명예와 부유한 생활을 모두 버리고 다만 한가지 그 생의 목표를 하느님께 두었다. 철상은 참으로 성서의 권유대로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온 마음을 다하여 그 분을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았다.


그가 스무 살이 되었을 즈음에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아버지 정약종과 삼촌 약전, 약용이 모두 의금부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철상은 아버지와 삼촌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옥 근처에 머무르면서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런 중 중부인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숙부인 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각각 유배되었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킨 아버지 약종의 옥중 고초는 더욱 심해졌다. 그는 끝까지 아버지 곁을 지키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의 옥중생활을 위로하며 격려했다. 철상이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그토록 정성스럽게 하는 동안 그는 참으로 가혹한 효성의 시험을 받았다. 그것은 포졸들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신부(주문모)의 거처를 알리라는 것이었다. 포졸은 신부의 거처만 알려주면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고 옥고도 면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실로 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유혹의 심각한 고통을 겪게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 유혹의 시련을 이겨내며 묵묵히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더욱 정성껏 했다.


마침내 아버지 정약종이 순교(1801년 2월 26일)의 영광을 얻자 그 날로 철상은 국청의 명에 따라 형조에 감금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다. 형조의 옥중에서 그는 짚신을 삼아 겨우 먹을 것을 구하면서도 굳건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아버지의 뒤를 따를 것만 바랐다. 사형집행일에 그는 결연히 형장으로 나가 기쁘게 망나니에게 머리를 내밀었다.


그의 남은 가족들은 고향인 마재로 돌아왔으나 국법을 거역한 죄인의 가족으로 옹색하고 시련이 겹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 냉대와 시련 속에 우리의 위대한 평신도 지도자요 순교성인이신 그의 동생 정하상 바오로의 어린 시절은 시작되고 있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15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8) - 이존창 루도비코


한국교회 토대다진 '내포의 사도'


충청도 아산지방으로부터 태안반도에 이르는 일대의 평야를 내포(內浦)지방이라 한다. 이 내포평야의 접경에 천안군 '여사울'이란 곳이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해당하는 여사울에서 이존창(루도비코, 1752~1801, 일명 단원)은 농가의 양민으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여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으나, 더 깊은 학문에의 열정으로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 때 삼남에 그 위명이 자자하던 권일신선생 형제들을 알게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권일신은 젊고 총명한 농민출신의 학자인 이존창의 자질과 품성에 이끌려 그에게 마음을 쓰고 있던 중,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어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사베리오는 즉시 이 신앙의 은혜로움을 제자인 이존창에게 전하였다. 스승은 제자에게 특히 천주교에서 믿어야 할 중요한 신조뿐만 아니라 천주교인의 본분과 그 실천방법까지 철저히 전수하였다.


이존창이 루도비코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때, 스승 권일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그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는 스승의 명에 따라 고향으로 가서 머무는 동안 가족과 친척, 그리고 벗과 이웃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였고 그의 지식과 덕행을 보고 끌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저 유명한 내포천주교회의 기초가 이렇게 이루어 진 것이다. 이존창에 의해 이루어진 내포천주교회는 다른 어느 곳보다 열심했고, 이후 백년간의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여 한국교회의 굳건한 토대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복음을 널리 전파한 이존창은 오늘날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게 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을 갖고 있었기에 한국초대교회에 있었던 평신도에 의한 임시성사집행기에 그도 평신도의 임시 성직단(聖職團)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품성사를 받지 않고 성사와 전례를 집행하는 것이 잘못인 줄을 알자 그 일을 즉시 중단하고 사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어 윤유일, 지황, 최인길 등과 함께 사제영입운동을 도와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당하여 심한 고문과 교활한 꼬임에 빠져 한 때 배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도 베드로처럼 즉시 뉘우치고 이 배교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그의 땀이 어린 고향 내포지방을 떠나 새로운 회개의 삶을 살게 되었다. 홍산(鴻山)으로 이사한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고 전교에 힘썼다. 이로 인하여 그의 눈물과 땀으로 전교한 내포와 홍산 지방에서는 박해 중에 불굴의 증거자들이 잇달아 배출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 입교하였는데, 김대건신부의 할머니가 그의 조카딸이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이며, 실로 이 땅에서 12년간 사목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오늘이 있도록 기여한 최양업 신부는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된다. 이렇게 그가 전교한 그의 친인척 가운데 사제가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전교한 결과로 입교하게 된 한국초대교회의 신자들에 의해 오늘날의 교회가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활동은 온갖 기대를 넘어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우의 상당부분이 그의 전교로 입교한 교우들의 자손들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전교상의 공헌은 지대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1795년 말에 이존창은 지방관리들에 의해 다시 체포되었다. 그는 고향인 천안으로 이송되어 사도직 활동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강제로 연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연금생활 중에서도 이존창은 열절한 기도와 탁월한 교리지식으로 주변에 많은 감화를 주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정조가 재위 24년만에 승하하고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순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궁중의 어른인 정순왕후 김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권력의 변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를 맞게 되었다. 이때 이존창은 6년간의 연금생활 끝에 그 해 3월 18일(음력 2월 5일)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1801년 4월 8일 명도회 초대회장 정약종 선생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사형은 출신지 감사가 있는 곳인 공주로 호송되어 이루어졌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 그의 일생은 사도적 열성으로 불탔고 그의 전교업적은 교회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약점을 멍에처럼 지니고 있어 한차례 나약한 배교의 아픔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차라리 이 약점 때문에 더욱 그를 가까이 하고 싶어진다. 그의 뉘우치는 삶은 잘못을 참회하는 깊이 만큼 짙고 치열하였다. 이 뉘우침과 회개의 삶과 보속을 본받고 싶어진다. 이 화해의 새 삶이 그를 내포의 사도가 되게 하였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공주에서 장렬하게 참수되어 순교할 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역사는 내포가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의 못자리로 기억될 때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도 함께 기억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22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이존창 루도비코 - 내포의 사도


충청도 아산지방으로부터 태안반도에 이르는 일대의 평야를 내포평야라고 한다. 이 내포평야의 접경에 천안군 '여사울'이란 곳이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곳 여사울에서 이존창 루도비코(1752-1801년)는 농가의 양민으로 태어났다. 그는 비록 양민 신세이나 가세가 넉넉하여 집안에서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였고 성장하면서 변혁의 열의가 깊어져. 마침내 학문에 대한 불타는 열망으로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삼남지방에 그 이름이 자자하던 권일신의 형제들을 알게 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권일신은 젊고 총명한 농민 출신의 학자인 이존창의 자질과 품성에 이끌려 그에게 마음을 쓰고 있던 중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스승은 이 신앙의 은혜로움을 제자인 이존창에게 전하였다. 스승은 제자에게 특히 천주교에서 믿어야 할 중요한 신조뿐 아니라 천주교인의 본질과 그 실천방법까지 철저히 전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존창이 루도비코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때, 스승 권일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그에게 일깨워주었다.


이존창은 그가 얻은 신앙을 혈족과 고향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열의에 찬 마음으로 여사울로 돌아왔다. 그는 사도적 열의에 불타 가족과 친척, 그리고 벗과 이웃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였고, 얼마 뒤에 그의 지식과 덕행을 보고 그를 따르는 신자수가 삼백 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저 유명한 내포 천주교외의 기초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존창에 의해 이루어진 내포 천주교회는 한국 복음선교의 효시가 되는 명례방 집회 다음의 시자 공동체로서, 그뒤에 생긴 다른 어느 공동체보다 열심했다. 그리고 이후 백년 동안의 박해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여 한국교회의 굳건한 토대가 있었다. 이렇게 내포지방에 널리 복음을 전한 그를 우리는 '내포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더욱 열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없이 창설된 한국 초대교회의 평신도의 임시 성사 집행기에 이승훈, 권일신, 유향검과 함께 평신도 임시 성직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내포교회를 이끌었다. 그후 북경 주교로부터 성품성사를 받지 않은 채 성사와 전례를 집행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연락을 받고 곧 중단하였다. 그리고 비로소 사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는 평신도 지도자로 여전치 열성적으로 전교활동을 하면서 윤유일, 지황, 최인길 등을 도와 사제 영입운동을 전개하며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의 놀라운 전교활동에 대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위대한 재능에다 사람의 마음을 잡는 특별한 재주까지 겸하고 있어서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그에게 이끌려왔다. 그의 전교에 저항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러므로 이 지방의 천주교 신자수는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신앙을 받아들이는 집안이 이제는 선비들의 집안뿐만 아니라 농부, 노동자, 서민, 빈민들까지 확대되었고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해 멀리서 무리를 지어왔고, 종종 다른 신자들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존창의 헌신적인 전교활동으로 예산, 아산, 면천, 당진, 해산, 서산, 덕산, 태안 등 내포지방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놀라운 활동은 결국 조정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791년 제사문제로 '잔산사건'이 일어나 윤지충, 권상연이 순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전국각지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도 체포되어 충청감영에서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때가 그에게는 최대의 시련이었다. 극심한 고문과 교활한 꼬임에 빠져 마음이 흔들리고 생각은 착잡하게 엇갈렸다. 그러다 쇠약해진 몸과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비록 한때나마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약속하여 석방되었다.


이 한때의 나약함은 그에게 크나큰 아픔이었다. 이존창은 베드로 사도처럼 뉘우치며 배교에 대한 가책과 고통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교차한 이곳에서 다시 전교활동을 펴고자 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형이 나서서 그를 방해했다. 어쩔 수 없이 이존창은 자신의 땀이 어린 내포교회를 떠나 새로운 땅으로 사시로 결심하고 홍산을 거쳐 금산에 이르러 회개의 새 삶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날의 배교를 깊이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계명을 지켰고 전교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그의 눈물과 땀으로 전교한 홍산과 금산지방에서도 박해중에 불굴의 증거자들이 잇달아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님의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는데 김대선 신부님의 할머니가 그의 조카딸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나라 두 번째 사제이며, 12년 동안의 사목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큰 기여를 한 최양업 신부님은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된다. 이처럼 그가 전교한 친인척 가운데에서 사제가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교로 입교한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유지되었다고 할만큼 그의 활동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교우의 상당수가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한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공헌이 지대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1785년, 한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이 최인길 회장의 집을 급습하여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고 했던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 신자 색출소동이 벌어졌다. 주문모 신부에게 충직하게 협력했던 이존창은 다시 체포되어 충청감영으로 연행되었고, 신문을 받고 천안으로 이송되어 이번에는 연금생활을 겪게 되었다. 6년동안의 연금 생활은 큰 시련이었지만 그는 감사라는 마음으로 기도와 명상을 통해 주님께 향한 신심을 더욱 깊게 하였다.


그러던 중 정조가 제위 24년만에 승하하고 순조가 열한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정순왕후 김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벽파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는 정치권력의 변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인 신유박해를 맞게 되었다. 이때 이존창은 다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고 서울에서 체포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대질하기 위해 서울로 끌려가 국청에서 거듭 신문을 당하였다. 이미 한차례 뼈아픈 실수를 경험했던 이존창은 이제 순교의 열의에 불타올랐다. 스스로 충청도 지방 천주교 신자들의 지도자임을 시인하고 모진 곤장에도 의연한 모습으로 굴하지 않았다.


그는 1801년 4월 8일 명도회 초대회장 정약종과 초대교회 지도자 최창현 등이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이틀 뒤인 4월 10일에 여섯 번이나 내리친 칼날 아래 치명하였다. 며칠 뒤 친지와 동료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는데 이존창의 목에는 칼자국만이 흉터로 남았을 뿐 잘리 목이 단단히 붙어 있어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 그의 일생은 사도적 열성으로 불탔고, 전교업적은 교회사의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약점을 멍에처럼 지니고 있어 한차례 배교의 아픔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약점 때문에 더욱 그를 가까이 하고 싶어진다. 그의 삶은 잘못을 참회하는 깊이만큼 짙고 치열하였다. 이 뉘우침과 회개의 새 삶이 그를 영원한 '내포의 사도'가 되게 하고 있다. 역사는 내포를 열심한 순교자들의 못자리로 기억하게 될 것이며, 그때마다 이존창은 그곳의 사도로 함께 기억될 것이다.


<경향잡지, 1999년 1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9) - 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주저함없이 불꽃처럼 순교한 선교 초기 '포천 지방의 사도'


우리나라 선교(宣敎)의 여명기에 지역마다 첫 복음을 전한 사도(使徒)들을 볼 수 있다. 예컨대 내포 지방의 이존창, 호서와 호남의 포교자 권일신, 전라도의 유항검 등이다. 그리고 포천(抱川)지방의 지도자는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37~1801)이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 제41행에서 홍교만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홍 사베리오 교만은 권철신의 외숙으로 경기도 포천에서 살았습니다.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하고 늘그막에는 경학(經學)을 좋아하였는데, 권씨네 집안에서 성교를 믿자 그 역시 믿고 좇았습니다. 그는 벼슬할 생각을 끊고 고향의 이웃 사람들을 권유하여 감화시켜서 한 고을의 영수(領袖)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여 고향 마을에서 신앙의 지도자가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천주교에 대한 전국적인 박해는 1801년 신유박해였다. 그 때, 이러한 초대교회의 사도들 대부분이 순교하였다. 순조(順祖) 원년 2월 26일(양력 1801년 4월 8일)에는 6명의 귀중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는데, 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그는 천주교인들 사이에서 남양(南陽) 홍씨로 알려진 남인의 양반집 자손이었다. 일찍이 학문에 증진하여 진사가 되었고, 그의 점잖고 사려 깊은 성격과 여러 가지로 풍부하게 쌓은 지식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얼마 동안 서울에서 머무른 다음, 포천현(지금 경기도 포천군)으로 가서 살다가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들었는데, 아마 그와 사돈간인 권씨 집안을 통하여 들었을 것이다. 그는 천주교를 이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나중에 그의 아들 홍인 레오에게서 설명을 듣고 권고를 받아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은 뒤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세속의 영광을 누릴 만했으나 인간의 영광과 세속의 복락에는 생각을 두지 않았다. 그는 또 수많은 외교인 친구들과 교제를 끊었는데 그런 행동으로 받게 될 비난은 개의치 않았다. 자기 본분과 가족을 가르치는데 전심하여 냉담자를 회개시키고 천주교를 전파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그의 고향 포천에서는 그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그의 집에 모여든 교우들이 항시 끊이지 않았으며, 그는 이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느라 여러 밤을 세우며 지내는 일이 자주 있었다.


포천의 사도 홍교만은 그의 고향에서 이렇게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신앙의 초석을 깔고 복음 선포의 굳건한 기반을 닦아 나갔다. 그러던 중인 1801년 정조가 재위 24년 만에 승하하고, 정순왕후 김계비는 이를 기회로 국법을 악용하여 국가기강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으로 정치적 보복을 행하며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박해령이 내렸을 때에 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아들과 함께 서울로 피신하였다. 한 동안 서울에 숨었던 그는 오랫동안 피신할 수 없음을 알고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그는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에 포졸들을 만나 체포당해 도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재판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관변측 기록인 신유추안(辛酉推案)에는 그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문초와 형벌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볼 수 있다.


홍교만은 1801년 3월 27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가 불과 10여 일 남짓한 그 해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정약종(丁若鐘), 홍낙민(洪樂敏), 최창현(崔昌顯) 등과 함께 참수 순교하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혹독한 형벌과 심문은 가혹하였는데 홍교만은 당당하고 의연하게 신앙을 고백하며 증거하였다. 그의 당찬 모습에 대해서는 당시 그를 심문하고 형벌을 가했던 관리들이 홍교만의 결안(結安)에 다음과 같은 말을 추가로 더 적어 넣은 것으로 인해 오히려 그의 인내와 끈기에 대한 훌륭한 찬사로 남게 되었다. "그는 뻔뻔스럽게도 그의 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 행복하다고 감히 말한다. 그의 고집은 목석보다 더 강하다. 그에게는 모든 형벌이 너무 가볍다." 그 무렵 순교자들과 그리고 배교자들의 모습을 보며 증언을 남긴 사람들은 그들의 증언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굳세다가 마지막에는 굴복하는 자가 많다. 죄를 지은 뒤에 다시 일어나고, 배교하였다가 순교자가 되는 것은 보통 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다." 그렇다. 순교자들 가운데도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한때 배교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적인 연민이 어려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주저함도 없이 불꽃처럼 산화해 간 순교자들에게는 더욱 순연한 '성령의 승리'를 사무치게 느끼게 한다.


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그의 고향 포천의 사도로 밤하늘의 불꽃처럼 64세의 한평생을 주님 대전에 빛나는 증거자로 살았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29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10) - 김풍헌 토마스


정조 말기의 천주교 박해는 고루한 집권세력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정치적 주도세력을 차지한 그들은 천주교를 탄압하는 것보다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는 그들의 반대파인 이가환 등 남인의 중요한 지도자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에도 크다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노론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왕이 취한 태도는 미온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지방관리들의 지나친 행태가 천주교 신자들을 더욱 부당한 처리에 희생되게 하였다. 왕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황사영은 그의 백서(帛書)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선왕은 중국에 대한 염려가 없지 않았다. 중국인 신부가 조선에 와 있다는 사실을 북경 정부와의 사이에 어려운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었다. … 한편 선왕의 성격은 과격한 조치를 싫어하였다. 왕은 신부를 조용히 처치하고 천주교인들을 형벌보다는 유혹과 위협으로 배교시키기를 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신하들에게서 국가기강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의 탈을 쓴 정치적 증오심을 잘 간파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지방의 여러 관리들이 왕의 이름으로 천주교인들에게 저지르는 과격한 처사를 눈감아 주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지방관리들은 조정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그들의 탐욕과 원한을 마음껏 만족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희생된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 한사람이 김풍헌(金風憲, ?∼1801) 토마스였다. 그는 충청도 청양 고을의 중인 가정에서 태어나 약간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질고 꿋꿋한 성격으로 고향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를 신뢰하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풍헌(風憲 : 조선시대 면이나 리의 일을 맡아하는 사람. 오늘날의 면장과 이장에 해당됨)이 되게 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도 계속 풍헌의 일을 맡아보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열성을 다해 기도하며 교회의 본분을 지켰다. 그리고 신심서적을 읽는데 전심하면서 가족들을 정성껏 가르치고 모든 이웃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그의 모범적 신앙생활은 모두에게 알려져 1796년 병진(丙辰)박해 때 붙잡혀 청양관아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쑥잎을 말려서 항문에 넣어 쑥뜸을 뜨게 하는 등 잔인하고 가혹한 형벌을 그는 의연히 견디고, 빨갛게 달아오른 보습 위를 맨발로 걷고자 할 때는 관장이 오히려 당황하며 그를 만류하였다. 그 어떤 가혹한 형벌도 그의 신앙을 흩트려 놓지 못하였다. 그의 가슴에 달아오른 보습보다 더 뜨겁게 순교의 열망이 타올랐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려 했다. 마침내 그에게 사형언도가 내려졌다. 청양현감은 김풍헌 토마스의 사형이 집행되기 사흘 전에 그의 얼굴에 회칠을 한 채 북소리에 맞추어 시장마당을 세 번 돌게 하였다. 이는 죄수에게 모욕을 줌과 동시에 일반인들에게는 경종이 되게 하려는 조선시대 행형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이 장마당 조리돌리기까지 해놓고 갑자기 청양현감이 파면되어 김토마스의 사형집행이 연기되고 말았다. 때문에 그의 순교열망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의 간청은 거절되었고, 신관의 부임을 기다리게 되었다. 신관은 재판기록을 검토한 후 김토마스를 옥에서 내어놓고 보석으로 한 개인의 집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리고는 며칠이 지난 뒤 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김토마스는 만나는 사람마다 순교의 행복을 얻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며, 이승의 삶이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추방당하여 더는 고향에 머무를 수가 없어서 부여, 금산, 고산 등으로 옮겨 살면서 교우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더 없는 청빈으로 극빈한 생활을 했다. 신자들이 그에게 옷이나 새 신을 주면, 그는 아름다운 옷은 교만을 길러주기 쉽다하여 사양하고, 거지를 만나면 곧바로 옷을 바꾸어 입었다. 그는 또 하루에 한끼 밖에 먹지 않았으며 그 한끼도 아주 허술하여 변변치 못했다.


1801년 다시 박해가 전국에 미치자 김풍헌 토마스는 그의 가족들을 산골로 데려가 숨겨두며, "여기서 주님 섭리의 명을 기다려라! 나는 순교를 하지 못한 것을 늘 마음 속으로 원통히 생각해 왔는데, 마침 기회가 좋으니 자수하련다"


사람들은 그가 없으면 가족이 굶어 죽을 것이라고 만류하고 끝내는 "그대 역시 주님 섭리의 명을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하여 겨우 진정시켰다.


순교의 열망을 가슴에 품고 잠시도 긴장을 놓지 않았던 증거자! 청빈과 단식으로 무섭게 절제하며 자신을 이겨낸 승리자인 그는 1801년 7월 추방당한 채 순례의 삶을 살았던 용담고을 안고개에서 병들었다. 주님은 그의 열망을 거두어 주시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주님의 뜻이라 생각하며 다만 기뻐할 뿐이었다. 죽기 전날 그는 죽음을 예견하여 자신이 살고 있던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그는 뜰에서 내려 마당에 무릎을 꿇고 겸손한 자세로 합장한 체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의 청빈과 절제와 극기는 모든 신자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과 흠모의 강물이 되어 끝없이 마음과 마음으로 흘러내렸다.


<가톨릭신문, 2001년 5월 13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11) - 무명순교자 이종국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하느님 자비로 천당 가오"


1795년 말에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지방관리들에 의해 다시 체포되어 고향인 천안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6년 동안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연금생활을 하였는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그를 신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전들은 그들이 존경하고 있고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헌신적으로 글을 가르쳐 주었던 이존창을 그다지 괴롭히지는 않았다. 이존창은 1801년 재판을 받고 순교하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연금 당한 채 지내면서도 굳굳한 태도를 보이며 모든 사람들이 다 알도록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말과 모범으로 그 지방에 큰 이익을 주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여사울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보기 위해 잠시 다녀올 허락을 받았다. 그는 여사울로 가서 가족들을 만나면서 당시 천주교의 현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때, 그는 교우들이 무서움에 못 이겨 천주교 서적들을 모두 동네 광장에 모아놓고 불살랐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존창은 눈물을 흘리며 몹시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단 한 권의 서적이라도 불태움을 모면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토록 주님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여기던 이존창은 신유년 2월 26일 서울로 이송되어 정약종, 최창현과 같은 날 사형선고를 받고 조정의 명에 따라 공주에서 사형집행을 당했는데, 그의 순교일은 서울의 순교자들보다 이틀 뒤인 2월 28일에 치러졌다(가톨릭신문 2246호 참조). 그의 머리는 여섯 번째 칼질에 가서야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친척들이 며칠 뒤에 유해를 거두어 가족묘지로 옮길 때, 떨어졌던 머리는 목에 단단히 붙어있었고 단지 희끄무레한 실낱같은 흉터만이 남아 있는 것 외에 다른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해 갈 무렵 수많은 무명순교자들 또한 함께 승리의 영광에 동참하고 있었다.


무명순교자들의 묘지에 서면 더욱 절실하고도 숙연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상상하며 앙모하게 된다. 지극한 고난의 한 순간을 장엄하게 또는 애절하게 남긴 한 토막 이야기만이 남아 있을 뿐,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순교자들의 사연은 더욱 강하게 우리들 가슴에 여운을 남긴다.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이종국은 다만 그 이름만이 전해질 뿐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순교자들 중 한 분이다. 이존창이 순교한 보름 후에 그가 순교한 바로 그 자리 공주읍내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무명이라 할 한 교우의 사형집행이 있었다. 그에 대한 이 한 대목에 전해진 이야기는 마침 그 때에 어떤 사정으로 옥 근처에 갔다가 그 곳에서 일어난 일을 똑똑하게 보고들은 80세 노인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가족도 세례명도 자세히 알 수 없고 다만 이종국이라고만 전해지는 사람이 청주에서 잡혀 공주로 압송되었다. 그 사람이 죽기 전날은 3월 보름 무렵이라 달이 환히 밝았는데, 그는 밤새껏 옥 문지방에 기대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새벽녘에 그는 문을 열고 동쪽을 쳐다보며 "왜 날이 이렇게도 더디 새느냐!"하고 여러 번 부르짖었다. 그리고 총소리를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저게 좋은 신호다. 곧 나를 부르러 오겠구나" 하고는 더욱 열심한 마음으로 다시 기도를 시작하였다.


몇 분 후에 다시 총소리가 한번 울린 다음 옥문이 열리고 옥졸들이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바로 '사자밥'이었다. 조선시대 수많은 순교자들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듯이 옥중생활은 언제나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사형수에게는 사형집행 전에 마지막으로 근사한 밥상을 차려주었다. 그래서 사형수들은 이 마지막 밥상을 받으면 곧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형수들은 죽음을 알리는 그 마지막 밥을 차마 먹지 못한 채 울다가 형집행장으로 간다.


이종국은 마지막 밥상을 받고는 이 세상에 좋은 것을 그렇게도 많이 창조하신 것을 오랫동안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나서, 그에게 준 음식을 골고루 다 맛보았다. 그가 밥상을 물리고 다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을 때에 갑자기 "이종국을 끌어내어라"하는 호령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듣자 이종국은 곧 일어나서 함께 갇혀있던 교우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성모 마리아님의 도우심으로 이제 천당의 복을 누리러 가오. 여러분도 신뢰하는 마음을 잃지 말고 나처럼 하시오!"


그가 이렇게 큰 소리로 교우들을 열렬히 격려하고 있을 때 형리들이 그를 재촉하였다. 그리고 그를 옥에서 끌어내어 형장으로 가는 말에 태웠는데, 말안장에 거꾸로 앉도록 했다. 이렇게 형장으로 가던 이종국의 얼굴은 기쁨에 빛나는 모습이었다. 참수형으로 순교의 승리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얼굴에 어린 기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쁨에 찬 모습으로 목숨을 바친 때는 1801년 3월 13일(음)이었고, 그의 나이 스물 일곱이었다.


무명순교자들은 그 이름과 함께 그 행적 또한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이름만이 전해지고 있는 한 순교자의 이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며,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을 영원토록 기리고자 한다.


<가톨릭신문, 2001년 5월 20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한국 천주교 창립의 주역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51-1792년)는 광암 이벽, 이승훈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삼대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삼남의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던 양근 땅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의 명문가인 권씨 가문 5형제 중 셋째였다.


권일신은 가학을 이어가며 형과 함께 성호 이익에게 사사하였고 뒷날 실학자 안정복의 문인으로 들어가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무렵 광암 이벽은 당대 거유인 이가환과 사흘 밤낮을 토론하여 천주교의 옳음을 밝혔으나 그가 천주교를 믿을 뜻이 없음을 알았고, 복음을 더욱 올바르게 전하려고 학식과 덕망으로 존경받는 양근 땅 감호의 권씨 형제를 찾았다. 지우인 이벽의 열의에 찬 강설을 듣고 크게 감동한 권씨 형제 가운데 권일신이 먼저 입교하여 이벽의 기대를 훨씬 넘어선 활약을 보여주었다.


1784년 9월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을 때 권일신은 이미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수호자로 모시기로 하고 그 이름을 세례명으로 정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가족 전부를 가르쳐 신자가 되게 하였다. 그의 명성과 학식, 덕행은 주변의 친지들에게 그리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내포 출신으로 형의 제자였던 이존창에게 천주교를 알려주고 중요한 믿을 교리와 신자로서의 본분과 실천방법을 자세히 일러주었으며, 고향으로 내려가 전교하게 하였다. 이존창은 크게 감복하여 루도비코 곤자가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고, 충청도 내포로 내려가 전교활동에 투신해 내포지방의 사도가 되었다.


또 전라도 전주 초남에 덕망이 높고 재산이 많아 세력이 컸던 유항검 또한 권씨 형제를 따랐는데, 권일신은 그도 전교하여 그를 한국 초대교회의 전라도 사도로 남게 하였다. 이렇게 권일신의 덕망과 인품으로 한국교회는 서울에서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퍼져나가게 되었고,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이들이 속속 입교하였다.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가진 정기적인 종교집회가 한국 천주교 복음 선포의 기점이 되는데, 권일신은 정약용 형제, 이벽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집회는 우연한 기회에 형조의 나졸들에게 발각되어,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면서 중지되었고, 김범우만이 형조에 투옥되었다. 이때 권일신은 아들과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과 함께 형조판서 김하진에게 가서 성상을 돌려주고 김범우를 석방하든지, 아니면 함께 처벌해 달라고 용감히 말했다. 그러나 그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벽은 집 안에 감금되고 김범우는 유배형을 받았으며 지도층 교우들은 흩어졌다. 그는 교회 재건을 다짐하며 조동섬과 함께 양근에 있던 용문사에 들어갔다.


1787년 박해가 진정되자 권일신은 교회를 떠났다가 뉘우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과 함께 조용히 교회재건운동을 벌였다. 이때 한국교회의 터전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스스로 신부처럼 미사를 봉헌하고 세례성사, 고해성사, 견진성사 등을 집행하기로 하였다. 아직 성품성사와 성직제도, 전례에 대한 교리 지식이 부족했던 그때, 오직 교회재건의 열의에 불탔던 이들은 이른바 '가성직 제도'를 수립하여 평신도로서 성사를 집행했다. 이 평신도에 의한 임시성사 집행은 약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권일신과 동료 10여 명은 대단한 열성으로 엄격하게 재를 지키며 성사와 전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교회서적을 공부하면서 그들의 이러한 행위가 교리에 위배되고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곧 북경 주교에게 밀서를 보내 문의하였다. 당시 밀사로 윤유일이 선정되어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 북경을 다녀왔는데, 권일신은 그 첫번째 파견 때 북경으로 서한을 보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서 천주교 교리와 윤리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함부로 성사를 집행한 사실에 대한 엄한 책망을 들었다. 주교는 회답에서 일체 성사를 거행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다만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일은 기쁘고 좋은 일이니 꾸준히 계속할 것을 당부하면서 신부를 보내줄 것을 약속하였다. 주교의 편지를 받은 권일신 등은 모든 신자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될 난처한 입장임에도 교회에 순명하는 자세로 곧 성직수행을 멈추고, 오직 신입교우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며 전교하는 일에만 전심전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주교의 회신 가운데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하는 내용도 있어 많은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었는데,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제사문제로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는 박해가 일어났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때 이미 그 신원이 드러났던 권일신은 1791년의 이 '진산사건'으로 홍낙안, 목만중 등에게 천주교 교주로 지목받아 고발당하기 시작했고, 그해 11월에 체포되어 형조에 넘겨졌다.


권일신은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으나 형리들 앞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해도 그분을 배반할 수 없고, 그분께 대한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웅변하였다.


당시 정조 임금은 권일신의 덕망과 자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형조의 보고를 듣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를 설복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곤욕을 치르면서도 권일신의 신앙고백은 한결같았고, 어떤 유혹과 형벌도 그를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배교'란 말만 나오면 무섭게 화를 내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권일신을 사형에 처하고 싶지 않았던 정조는 그를 제주도로 귀양가게 하였다.


유배지로 떠나기 전 누이동생인 이윤하의 집에 머물던 그에게 충신을 희생시키지 않으려 애쓰던 정조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80세의 노모를 생각하게 하였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에 대한 효심으로 착잡해진 권일신의 심정을 이용하여 배교가 아니라 임금께 조금만 양보하는 뜻을 쓰게 하였고, 이를 권일신의 굴복으로 임금께 보고하였다. 그렇게 해서 유배지가 노모가 계시는 예산으로 바뀌었으나 그는 이미 모진 형벌로 기진하여 귀양지에 가던 길에 한 주막에서 객사하였다. 신앙 때문에 당한 그의 고독한 죽음은 민족의 구원사에 더 깊은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6월호>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이국승 베드로


순조 원년인 정유년 5월 22일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한꺼번에 사형결안이 내려진 하루였다. 이날 강완숙, 문영인 등 다섯 명의 여교우와 김현우 등 네 명의 남자교우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고, 다른 여러 건의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들은 '압송원적관정법'의 방침에 따라 각각 그들의 출생지로 이송되어 처형당했다. 이는 그들의 처형을 봄으로써 지방 주민들에게 겁을 주려고 한 것이다.


이날 선고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이국승(1771-1801년)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겸'이라고 불리었는데 충청도 음성 출신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충주로 이사한 뒤에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더 분명히 알고자 서울로 가서, 그 무렵 경기도 양근의 명문가 권일신, 철신 형제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는 교리를 공부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마음이 움직임을 느끼고 곧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변화를 보고, 은총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했다. 그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진산사건이 일어나고 지방 박해가 시작되자 이국승 베드로의 신앙생활이 알려져 관아에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너무나 긴장하고 두려워하여 배교의 말을 하고 풀려났다. 그는 너무도 나약하여 쉽게 배교했지만, 곧 뉘우쳤다. 이국승은 자신의 나약함을 이겨보려고 열심히 기도하고 자주 단식하며 보속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삶을 잘 알지 못한 부모는 자식을 결혼시켜 세속의 일상적 삶 속에서 여생을 지내게 하려 했다. 이국승은 결혼하여 아내를 갖고 자녀를 두게 되면 더욱 계명을 지키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이미 한 차례 배교를 경험한 그는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고자 하여 부모의 결혼 권유를 끈질기게 거절하였다.


그는 부모의 끊임없는 결혼 재촉을 피하려고 마침내 집을 떠나 서울로 가서 살았다. 그는 서울에서 독신생활을 하며 집안일에 마음 둘 일이 없어 온전히 착한 일을 하는 데만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삶을 보고 차츰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는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며 따뜻한 사랑으로 이웃의 어려운 일에 헌신하였다. 교우들은 그의 모범을 보고 따랐으며, 외교인들 가운데 그의 행실을 보고 천주교를 신봉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행복했던 기간은 짧게 끝이 났다. 순조 원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이 최초의 전국적인 대박해 때 그는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이국승은 일찍이 충주 본관에 체포되어 악형을 당하고 배교했던 때를 회상하며 몸서리쳤다. 그런 때 그가 옥에 들어서면서 금방 옥고를 이기지 못하여 배교한 한 교우를 보게 되었다. 이국승은 순간 자신의 배교와 그 동안의 회한의 삶을 생각하며 뜨거운 연민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배교자에게 "뉘우쳐 회개하라."고 외쳤다. 뜻밖의 외침에 놀란 배교자는 낯선 충고자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 배교자가 바로 고광성이었다.


고광성은 황해도 평산지방의 양민 출신으로 손인원이라는 교우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입교한 뒤 천주교 서적을 열심히 읽고 계명을 지키며 본분을 행하고자,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곧 체포되어 관아에 투옥되었으나 배교하지 않아 서울로 이송되었다. 그는 포청으로 이송된 뒤 더 가혹한 형벌을 견디지 못해 그만 순간적으로 배교하고 말았다. 그때 이국승 베드로가 포청으로 오게 되어 이렇게 옥중에서 만났던 것이다.


이국승은 고광성의 배교에 피를 토하듯 열렬히 권면하며 취소하도록 하였다. 그는 준엄하게 꾸짖고 간절히 호소하였다. "그대가 배교한 것은, 자네 자신이 아니고 마귀가 자네를 속여서 말하게 한 것이라고 포장에게 이야기하게."


여러 차례 권고를 받고 고광성은 마침내 배교한 것을 철회한 뒤 다시 용감히 신앙을 고백했고, 더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가해지는 혹독한 형벌을 달게 받으며, 더욱 굳게 신앙을 고백하는 영웅적 모습을 보였다. 신앙심을 버리는 말 한마디도 받아내지 못한 형리는 고광성을 형조로 옮겨 사형선고를 받게 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평산으로 옮겨 1801년 7월 2일 처형하였다. 지방민을 위협하려는 조정의 법에 따라 그는 고향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도끼로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아버지의 장렬한 순교를 본 고광성의 어린 딸은 아버지의 순교 신앙을 이어받아 1839년 12월 29일 순교하였다. 그분이 103위 한국 순교성인 가운데 한 분인 고순이 바르바라 성녀이다.


이국승 베드로는 이렇게 열절한 신앙으로, 배교한 신자를 권면하여 순교의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하는 데 기여했다. 오래지 않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이 어인 일인가. 동료를 옥중에서 격려하여 순교하게 한 그 자신은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는 나약함을 보였다. 관원은 즉시 고문을 중지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석방하려 했다. 그때 이국승은 갑자기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지금 나를 풀어주기만 하면 나는 곧 전처럼 천주교를 신봉하겠소." 하고 외쳤다. 관원은 이 어이없는 태도에 놀라기도 하고, 한편 감정이 크게 상해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이국승은 자신의 나약했던 의지를 뉘우치며 어금니를 깨물고 형벌을 견뎌내려 하였다. 그러나 참혹한 형벌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고,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선혈이 튀는 곤장에 뼈가 으스러졌다. 인간의 의지는 잔학한 고문 앞에 너무도 약한 것이었다. 그는 다시 주님을 배반했다. 고문을 중단하고 관원이 배교를 확인한 뒤 그를 풀어주려 하였다. 이국승은 거듭 자신의 배교를 철회했고 이렇게 배교와 취소가 거듭되었다.


그의 인간적인 나약함은 여러 번 주님을 배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배반하고 또 뉘우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교리를 생의 의미와 가치의 지표로 승화시키고,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에 기대려던 열정을 바꾸어 겸손하게 주님의 은총에 의지해 갔다.


하느님께서는 약하고 못난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당신 종이 일체의 교만과 과신을 버리고 겸허하게 의지해 왔을 때 그에게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가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그대들이 나를 동정하지만, 참으로 불쌍한 것은 주님 은총에 의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요." 였다.


그때 그의 나이 30세였으며, 그의 시신은 조카들이 공주에 묻었다.


<김길수 요한/전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5월호>


권상연 야고보: 신주가 어이 조상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진리를 목숨 바쳐 증언한 순교자들은 모두 영웅다운 주인공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함께 순교한 순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주인공처럼 여기고 다른 이들은 주인공을 따라 부수적으로 순교한 조연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순교자들이 함께 심문을 받고 옥고를 치렀더라도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목소리로 신앙을 고백하고 형벌을 받았으며, 온전히 자신의 자유의지로 목숨까지 바친 주인공들이다.


'진산사건'은 1791년 신해박해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버린 사건을 말한다.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렸을 때 조선교회는 그 존립 기반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다. 아직 선교사도 없이 자치적으로 가졌던 집회는 형조에 의해 해산당하고, 유림의 반발로 탄압을 받는 가운데 제사를 폐하기 어려워 양반신분의 초대교회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에 교회의 사목적 지시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여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하여 조정으로부터 사형 결안을 받은 최초의 순교자가 나왔으니 이들이 바로 윤지충과 권상연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진산사건을 말할 때 수기를 남긴 윤지충만을 기억하며 권상연도 함께했다는 정도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권상연 또한 진산사건의 위대한 신앙 증거자로 순교한 주인공이다.


권상연 야고보(1750-1791년)는 본래 경상도 안동지방 출신으로 충남 공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의 부모는 전라도 진산에 정착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권상연은 고종사촌이 되는 윤지충과 이웃하여 살면서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권상연은 자라면서 당시의 조선 젊은이들처럼 유교적인 학문과 윤리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사촌인 윤지충에게 천주교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듣고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여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791년 윤지충 바오로의 어머니이며 자신의 고모인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사촌과 함께 애통해 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상례 절차를 행하면서 다만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다. 부족함을 보완하겠다는 입장에서 천주교를 수용했던 학자들은 이 제사 문제에 부딪쳐 학문적 태도를 버리고 교회를 떠났다.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천주교를 수용하려 했던 지도자들도 제사 문제에서 한계를 느끼고 교회를 떠나가고 있었다. 지식인, 지도자들이 이렇게 교회를 떠나던 때 권상연과 윤지충은 교회의 이 사목지침을 믿음의 자세로 받아들인 신앙인의 모범을 순교로 보여주었다.


체포령이 내려지고 진산군수 신사원이 포졸을 보냈다. 권상연은 재앙을 피하여 몸을 숨겼으나, 포졸들이 윤지충의 삼촌을 대신 잡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곧 진산 관아로 밤새워 걸어가 자수하였다. 권상연은 그해 10월 28일 먼저 자수해 들어와 있던 사촌인 윤지충을 옥중에서 만났다. 그들은 함께 옥고를 치르고 심문을 받으면서 서로 격려하였다.


군수는 심문했다.

"네가 이단에 빠졌다는 것이 사실이냐?"

"저는 결코 이단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천주교를 믿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 그것이 이단이 아니란 말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바른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 대에 걸쳐 동양 성현들이 가르치고 실현한 것이 모두 거짓이란 말이냐?"

"우리 교회의 여러 가지 계명 가운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저는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교할 생각은 없고, 다만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어 진산군수가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유교적 입장에서 길게 설명하자 그는 대답했다.

"그 모든 것이 천주교 책에는 쓰여있지 않습니다."


북경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릴 때 그 전달 구실을 했던 윤유일이, 조선에서 제사를 폐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주교에게 간절히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주교는 '성실지도'를 따르라고 하였다. 천주교를 믿으려 하면서 천주교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성실한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심문에서 "그것은 천주교의 책에는 쓰여있지 않습니다." 했던 것은, 그들이 천주교를 신봉하는 한 천주교의 명에 순명할 것임을 고백한 대목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진술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가난한 이나 일반 서민을 벌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내가 제사를 폐함이 국법을 어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내가 제사를 폐한 것을 굳이 문책함은 내가 양반이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비록 양반의 법을 어겨 양반에게 죄인이 될지언정 교회의 법을 어겨 하느님 앞에 죄인이 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진산군수는 권상연에게 십계명과 칠극을 외우게 하고 이를 적어서 감사에게 보고한 뒤 그에게 "천주교의 십계명에는 왕과 신민의 관계가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임금이 없다거나 업신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권상연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임금님은 온 나라의 어버이이시고 관장은 그 고을의 어버이입니다. 그러므로 그분들에게는 충성의 본분을 지켜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십계명 가운데 제4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술서에서 이미 제사를 올리지 않게 되었으니 신주가 쓸데없이 되었다고 하면서 신주를 조상처럼 모실 수 없음에 대해 "조상과 부모는 나에게 살과 뼈를 물려주셨지만 신주는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목수가 만든 나무 조각에 불과한데, 그 신주를 조상이나 부모처럼 모시는 것이 오히려 부모와 나의 지극한 관계를 욕되게 한다."고 그 뜻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마침내 조정에서 사형을 집행하라는 명이 떨어지고 그들은 형장으로 끌려갔다. 관리는 마지막으로 배교를 강요하고, 조상의 신주를 공경하라고 요구했다. 권상연은 죽어도 배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신주를 공경하라는 데에 대해서는 "목수가 다듬은 나무 조각이 어이 조상이겠습니까." 하며 끊임없이 예수님, 성모님을 부르며 순교하니, 때는 1791년 12월 8일 그의 나이 41세였다.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1년 7월호>


김귀동: 신자로 교우들과 함께 죽겠소


'황사영 백서 사건'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 사건이다. 불행히도 너무나 유명하고 그 결과가 매우 유감스러웠던 이 사건은 관련된 인물들이 차례로 처형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백서를 쓴 장본인인 황사영은 천륜과 인륜을 어긴 죄인으로 판결되어 참수와 육시를 당하였다. 백서에 서명된 명의자인 황심 또한 결안대로 참수되고 육시를 당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료였던 옥천희와 현계흠은 보통 죄인처럼 참수당했다. 동시에 황사영의 집과 재산이 적몰되고, 어머니는 거제도에, 아내는 제주도에 관노로 보내졌고, 어린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보내졌다.


한차례 태풍이 지나간 며칠 뒤에 황사영을 배론에서 숨겨주고 고발하지 않았던 사람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이렇게 한 사건의 뒤편에서 재판을 받고 불굴의 의지로 외롭게 죽어간 순교자가 있었는데 그가 김귀동(?~1802년)이다.


김귀동은 전라도 고산 출신으로 충청도 홍주에서 살았다. 그에 대해 알려진 자세한 문헌이 없어 어렸을 때의 행적이나 천주교 신자가 된 동기는 알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세례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세례성사도 받지 못한 채 순교했을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그는 천주교를 알게 된 뒤에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집과 재산을 버리고 1801년 초에 충청도 제천의 배론(현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으로 옮겨와 옹기점을 운영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무렵 황사영은 신유박해를 피해 신분을 숨기고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여 자신을 이씨라고만 밝힌 채 의지할 곳 없이 방랑하고 있었다. 김귀동은 이 사실을 알고 그를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김한빈의 안내로 황사영이 황심과 함께 배론으로 왔을 때 김귀동은 그들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그가 경영하는 옹기점에 굴을 파서 피신처를 마련해 그 입구를 옹기 그릇으로 막고 은밀하게 하였다.


황사영을 토굴 속에 피신시킨 김귀동은 김한빈과 함께 토굴 속을 드나들며 천주교 서적을 읽고 교리공부를 하며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황사영의 동지들이 교회일을 잘 돌볼 수 있도록 힘껏 뒷바라지하였다.


황사영은 이 토굴 속에서 중국 교회에 보내려 한 그 유명한 백서를 썼다. 황심은 백서의 서명인이 되고, 김한빈은 조심스럽게 당시의 교회실정과 순교자들에 대한 소식을 전하여 백서의 자료를 제공하였다. 옥천희가 그해 동지사 속에 숨어들어 전하기로 계획된 이 일은, 그가 국경에서 체포되고 이어 황심과 황사영이 체포당하면서 백서가 발각되었다.


실패로 끝난 이 사건으로 황사영과 그의 동지들이 순교한 며칠 뒤 이제 황사영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잡혀온 교우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서울로 이송되어 포청과 형조를 거치며 여러 차례 심문과 모진 형벌을 받았다. 이때 김귀동과 함께 일했던 김세귀, 세봉 형제는 형벌과 회유가 반복되자 더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여 경상남도 칠원과 창원으로 귀양보내졌다.


김귀동은 참담한 심정으로 고독하게 신앙고백을 하며 고통을 이겨냈다. 그와 함께했던 황사영과 신앙의 동지들은 모두 사형이 집행되었고, 함께 일했던 교우 김세귀와 세봉 형제는 슬프게도 배교하고 유배의 길을 떠났다. 그를 격려하며 함께할 어떤 신앙의 동지도 없었다. 냉혹한 심문과 교활한 회유, 그리고 음습한 옥중의 차가운 바람이 더욱 쓰라린 고독을 느끼게 하였다. 세상은 그를 잊은 듯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혼자 버려진 김귀동은 끊임없이 예수님과 성모님을 부르며 앞서 순교한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하기만을 바랐다.


포청의 심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본시 고산 사람으로 제천의 토목이 좋다는 말을 듣고 옹기점을 하여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번 2월초에 배론 산중에 이주했는데, 같은 달 말경에 김한빈이 이씨라는 상주를 데리고 저에게 와서 옳은 도를 행하는 이라고 극찬하였습니다. 저와 한빈은 힘을 모아 땅을 파서 사서를 숨겨놓았고 그 도에 점점 미혹되었는데 얼마 뒤에 들으니 그 이씨라는 사람이 바로 황사영이었습니다. 제가 이미 사영, 한빈 등과 혈당을 맺고 흉모에 가담하였으니 사영을 따라 함께 사형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형장에 나갈 것이며 다시 변심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밖에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동지들과 함께 순교하기를 열망하는 이 자백에 관장은 놀라워하며 모질게 매질하여 형조로 넘겼다. 형조의 심문과 형벌은 더욱 가혹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동료의 배교를 가슴 아파했고, 피로 맺은 동지들이 목숨을 바치고 떠난 뒤 혼자 남아 옥고를 치르면서, 신앙인으로 죽어 순교하기를 간절히 염원하였다.


형조에서 심문한 내용과 이에 대하여 김귀동 자신이 자백하여 말한 내용을 적은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너는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으로 사학을 굳게 믿고, 깊은 산골에 옹기점을 마련하여 흉적을 땅굴 속에 숨겨두었으며, 도망할 길을 만들어놓고 머리를 맞대고 모의를 했으니, 그 흉중의 심사는 무엇을 하고자 한 것이냐? 지금 사영이 벌을 받은 뒤에도 그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내심의 흉악한 사정을 감히 속이지 말고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라."


"제가 생각한 바는 이미 포청 조사에서 모두 진술했습니다. … 저는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으로 나라의 금령을 무시하고 사설을 굳게 믿었으며, 도망한 흉적을 감추어두어 여러 달을 잡히지 않게 했습니다. 실정을 알면서 고발하지 않았으니 벌을 면하기 어려운데, 또다시 흉적과 연결되어 오랫동안 은밀히 접촉했습니다. 스스로 범한 죄를 생각해 보니 만 번 죽더라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이는 김귀동에 대한 관변측 기록인 형추문목과 승관초의 내용이다. 그가 자신의 신앙을 사설이라 하거나, 또 신앙의 동지로 목숨을 함께하려 한 동지를 흉적이라 했을 까닭이 없다. 관청에서 죄인이 자신의 죄를 이렇게 자백하고 자인한 것처럼 그들의 입장에서 적은 것이다. 우리는 이 기록에서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당당히 말하고 "사형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형장에 나갈 것이며 다시 변심할 생각이 없습니다."라는 대목에서 순교를 열망하는 굳건한 자세를 엿볼 수 있겠다.


달레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몇 줄로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오랫동안 고문을 한 뒤 관원은 배교하기를 원하면 풀어주겠다고 그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거절하고 신앙인으로서 '다른 교우들과 같이 죽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는 마침내 그의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어 1802년 2월 2일 참수당해 순교의 영광스런 승리를 얻었다.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8월호>


최필제 베드로: 정한 날짜에 돌아온 순교자


1801년 5월 14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여섯 명 가운데 하나인 최필제 베드로는, 일찍이 길거리에서 열정에 복받쳐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외친 가두선교의 효시라 할 순교자 최필공 토마스의 사촌동생이다.


서울의 중인계층 출신인 그는 자가 자순(子順)이었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약장사로 생업을 삼아 늙으신 부모를 봉양하며 살았다. 효자였던 그는 성실하게 약제를 다루어 약값이 싸고 질이 좋다며 모두 그를 신임하였다. 그리고 타고난 성품이 참되고 온후하였는데 그 진실하고 충직하며 중후한 성품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서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가 어진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사촌형이며 순교자인 최필공도 최필제를 언제나 존중하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나이가 어린 아우뻘이지만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여 행하고 한 가지도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또 최필공에게는 항상 천주교를 못마땅해하는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늘 천주교를 헐뜯고 배척하며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돌아가며 욕했다. 그러나 그도 그의 사촌인 최필제에 대해서만은 감히 흠잡아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최필제의 자를 부르며 천주교에서 취할 만한 사람은 오직 자순(子順) 한 사람뿐이라고 칭찬했다.


최필제는 한국교회 창립 직후인 1790년경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그는 이 무렵 입교한 사촌형 최필공과 함께 활약했는데 그 이듬해 제사문제로 일어난 신해박해로 1791년 종형과 함께 체포당하였다. 입교한 지 겨우 1년, 아직 그의 심중에 깊이 박히지 못한 신심으로 혼란에 빠진 그는 배교하고 옥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한동안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냉담 상태에 빠졌다.


그러다 진산사건 이후 교우들이 비참한 상태에서 굳건한 신앙생활을 하며 눈물겹게 벌이고 있는 사제 영입운동을 보면서 차츰 자신의 불성실을 뉘우치기 시작했다. 그는 1793년경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와 신앙 동지들의 외롭고 힘겨운 활동에 동참했고 이윽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해 사목활동을 펼 때 더할 수 없이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늙은 아버지는 이미 한 번 옥고를 치르고 난 아들이 천주교에 대해 다시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몹시 걱정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천주교로부터 떼어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최필제는 아버지의 만류가 있을 때마다 지극히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함께 신앙생활을 할 것을 청했다. 아버지와 온 집안의 만류가 심했지만 그는 한 번 배교한 것을 무섭게 뉘우치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천주공경의 갈등을 이겨냈다. 그는 간절한 효도와 온순한 태도로 천주공경의 올바름을 아버지께 아뢰면서 신앙의 의지를 힘있게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에게 가족의 탄압이 오히려 굳고 심원한 신심을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더 힘들고 괴로운 가족의 박해 속에서 오히려 그들에 대한 참사랑의 계율을 아름답게 실천해 갔다. 축첩의 폐습과 남존여비의 일상화된 관습을 버리고 아내를 정중하고 사려 깊게 한 인격체로 대하며 사랑하였다.


이러한 그의 삶을 주문모 신부가 보고 탄복하였다. 신부는 그를 칭찬하여 "부부가 정절을 지키며 훌륭하게 끝을 맺는 이가 아주 드문데, 이 부부는 지조가 갈수록 굳어지고 고통을 이겨 주님께 공을 세우는 일에 부지런하니 참으로 어진 사람이다."고 하였다.


조정의 천주교 탄압세력이 기회를 노리다가, 1800년 정조 임금이 승하하고 어린 순조의 뒤에서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을 시작하자, 파당의 적대세력을 탄압하려는 명분으로 국가기강을 바로잡는다면서 천주교 박해령을 내렸다.


며칠 뒤 주님 봉헌 대축일을 맞이하여 이른 새벽에 최필제는 한 길가에 있는 약방의 안쪽 방에서 겨우 몇 사람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포졸들이 교우들이 기도하며 가슴을 치는 소리를 듣고 투전치는 소리로 잘못 알았다. 포졸들은 마침 무뢰배들이 돈내기하는 투전을 단속하던 참이라 창문을 열고 교우들 방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곳에 투전이 보이지 않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을 수색하여 첨례단(축일표) 한 장을 찾아냈지만 포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포졸들은 그것을 글을 아는 다른 관리에게 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것이 천주교에 관련되는 것임을 알아내고는 교우들을 잡으려고 다시 돌아왔다. 이때 이미 날이 환하게 밝은 뒤여서 다른 교우들은 다 그 자리를 떠나 흩어졌고 다만 최필제 베드로와 오현달이란 교우만 남아있었다. 두 사람은 잡혀서 관아로 끌려가 옥에 갇혔다.


최필제는 관아에 압송된 뒤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지만 자신이 천주교 신자인 것만을 분명히 밝히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 속에서 순교의 결의를 다졌다. 이미 한차례 배교한 적이 있는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배교의 강요나 회유, 그리고 동료 신자들을 밀고하라는 어떤 요구에도 다만 침묵하고 있었다.


1801년 2월 대왕대비 김씨는 교를 내리어 천주교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도 황사영을 잡지 못하였음을 꾸짖고, 열흘 안으로 그를 잡지 못하면 포청의 관헌을 처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과연 3월 11일 황사영을 잡지 못한 탓으로 경기도 장단부사 구종을 처벌하였다.


최필제는 냉담을 청산하면서 주문모 신부가 만든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에 가입하고 교리를 연구하며 정약종, 황사영 등과 함께 열심히 활동하였으나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형제가 화를 당할 일을 할 수 없다 하여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그의 종형이며 신앙의 동지인 최필공 토마스를 만나 옥고를 함께 치르며 서로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그해 4월 8일 최필공이 먼저 정약종 등과 함께 순교하자 순교에 대한 그의 열망은 더욱 굳어졌다.


이때 그의 부친은 사랑하는 아들이 옥고를 치르게 되자 너무 상심하여 병석에 누웠다가 세상을 떠났다. 옥중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최필제는 지극한 효성으로 애통해 하며 관원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일시 귀가를 청했다. 조선의 형법에서는 이를 허가하게 되어있어 일시 귀가하여 상주로서 의무를 행하게 되었다.


허락을 해준 관리는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이번 기회에 상례를 마치고 멀리 도망쳐 생명을 구하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그러나 최필제는 정한 날짜에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돌아가셨음을 기뻐하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전에 배교했던 것을 기워 갚기를 원하네. 내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내 머리를 바치는 일이네."


그는 그의 소원대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며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였다.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9월호>


윤유일 바오로: 한국 초대교회의 신실한 밀사


압록강을 건너 책문까지는 오랑캐의 땅으로, 인가도 없고 추위도 막심했다. 1793년 윤유일이 조선교회의 밀사로 압록강을 건너 북경을 다니던 그 무렵, 동지사로 중국을 다녀온 적이 있는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에는,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에서 추운 겨울밤 들녘에서 노숙하는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리가 걸어감에 날이 어두운지라 의주 창군 십여 명이 횃불로 앞을 인도하더라. 십여 리를 행함에 곳곳에서 수풀 사이에 불을 피우고 사람이 모여있으니, 이는 짐 실은 사마꾼이 두루 흩어져 머문다 하더라. … 역관들은 한 곳에 겹장막을 치고 하졸들은 곳곳에 모여 앉아 사면에 장막을 길같이 싸고 불을 질러 불을 쬐고 밤을 새우니, 만일 큰 풍설을 만나면 얼어죽는 이 많을러라. … 밤에 호환이 무서워 자주 천하성을 불러 여러 사람이 일시에 함성으로 서로 응하니 이로 인하여 종시 잠을 깊이 들지 못할러라."


윤유일 바오로(1760-1795년)는 한국 초대교회의 밀사로 그 신분을 숨기고 이 험난한 북경 길을 두 차례나 왕복하였으며, 압록강 국경까지 나가 주문모 신부를 은밀히 서울로 모셔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모셔온 사제의 행방을 끝까지 숨기려고 모진 형벌 아래 순교한 증거자이다.


그는 1760년, 경기도 여주 고을의 양반 집에서 태어나 유학에 힘쓰던 선비였다. 그는 여주에서 가까운 양근 땅 본향을 자주 드나들면서, 이웃의 존경을 받던 권일신과 교분을 맺었다. 그리하여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권일신 프란치스코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이때 한국교회는 어렵고 힘든 처지에 놓여있었다. 1784년에 시작한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의 정기집회가 발각되어 집주인 김범우는 형조에서 매를 맞고 유배되었으며, 집회를 이끌던 광암 이벽은 아버지가 집안에 감금하였다.


그 뒤 권일신은 이승훈과 함께 교회 재건운동을 벌였는데 그때 이들은 신부 역할을 하며 성사를 집행하였다. 이는 물론 교계제도와 성사에 대한 교리를 잘 모른 채 오직 교회 재건의 열의에서 행한 일이었다.


이들은 매우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성사를 집행하고 있었는데 교리공부를 하면서 차츰 성품성사와 사제의 독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이를 북경 주교에게 문의해 보고자 했다.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는 편지는 이승훈과 권일신이 썼다. 그러나 그것을 확실하게 전달할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해마다 북경에 파견되는 부연사행의 일행 속에 신분을 감추고 숨어들어 중국교회와 은밀히 연락을 취해야 하는, 어렵고 위험한 사명을 맡을 유능하고도 헌신적인 인물을 찾아내야 했다.


이 중요한 사명의 적격자로 초대교회는 윤유일을 주목했다. 윤유일은 아직 예비신자였지만 성격이 온순하고 비밀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매우 침착하면서도 대담하여 이 막중한 사명을 맡을 적격자였다. 그는 또한 처음부터 이 일을 알고 스스로 적극적인 자세로 나섰다.


윤유일은 유관검과 이가환의 재정적 도움을 얻어 중국으로 가는 사신 일행의 수행 상인 자리 하나를 사들여 1789년 10월에 북경을 향해 떠났다. 서울에서 북경까지는 삼천리 길이었다. 한겨울에 외국 땅으로 가는 이 긴 여행은 위험과 고통이 따랐다. 실제로 사신 일행 가운데 여러 사람이 도중에 병들거나 얼어서 죽어갔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공부에만 전념했고 여행 경험이 한 번도 없었던 윤유일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외롭고 힘든 고난을 홀로 이겨내야 했다.


수많은 위기를 넘기고 마침내 북경에 이른 윤유일은 이승훈, 권일신의 명의로 된 조선교회의 밀서를 프랑스 선교사인 로오 신부에게 전했다. 이때의 놀라운 감격을 구베아 주교는 그의 서한에 이렇게 적고 있다.


"윤 바오로의 도착은 생각지 못했던 일로, 북경의 교회는 온통 환희에 젖었습니다. 아직 선교사도 찾아가지 않은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가르쳐준 일이 없는 나라에서 온 놀라운 복음 전파의 소식을 듣고 교회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새롭게 생겨난 이 교회에서 온 편지를 읽고, 또 이 신자에게서 사정을 듣고 한 통의 답신서를 썼습니다. 새로 태어난 교우들이 전능하시고 무한히 선하신 주님의 영생의 은혜를 받고, 신앙에 대한 그들의 사명에도 무한한 은총을 입어 믿음을 위하여 온갖 것을 인내하도록 권고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특별한 수단을 강구해 줄 것을 전구해 주었습니다."


윤유일이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밀사의 막중한 임무를 성공함으로써 조선교회는 비로소 외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이 다녀간 직후인 1790년 10월 6일 로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 안토넬리 추기경에게 조선교회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 조선교회 소식을 듣고 교황과 유럽 교회가 감격한 것은 물론이다.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에게서 신부 파견 약속과 주교의 교서를 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예비신자였던 그는 자청하여 세례성사와 견진성사까지 받은 뒤 귀국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이 "중국인들과 유럽인 참석자들 모두가 눈물을 가눌 수 없을 만큼, 그토록 깊은 신심과 열성으로 성사를 받았다."고 했다. 그의 영세 대부인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판지 수사는 윤유일의 초상화를 그려 생 라자르에 보내고, 이탈리아 본국 신부들에게 그 소식을 편지로 전했다.


윤유일의 성공적인 사명 수행은 깊은 신뢰를 받아, 1790년 9월 제사문제를 가지고 밀사로서의 두번째 임무를 맡아 사명을 완수해 냈다. 그는 이렇게 한국교회 사제영입운동에 직접 헌신하여 마침내 한국 최초의 사목사제인 주문모 신부를 성공적으로 영접하였다. 신부의 입국 소식을 듣고 직접 압록강 국경에 나가 입국시기를 조정하고, 결빙기를 이용해 강을 건너 서울까지 직접 안내해 왔다.


그러나 사제 영입의 기쁨은 진사 한영익의 밀고로 싸늘하게 식고, 윤유일은 최인길, 지황과 함께 체포당했다. 그는 그가 모셔온 사제를 위해 죽기로 각오하고 모진 형벌을 침묵으로 견디었다. 당시 그를 심문했던 포청 관리들은 "죽음을 기뻐하고 곤장 맛보기를 마치 엿 맛보듯 하며, 입을 꼭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1795년 6월 28일 장하치명으로 순교하니 그의 나이 36세였다.


구베아 주교는 이렇게 증언했다. "내 자신과 북경의 이 교회가 윤 바오로의 신심과 정성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10월호>


조 토마스: 극기로 순교를 준비한 증거자


지극한 효성으로, 귀양 가는 아버지를 따라가 모시다가 옥중에서 순교한 조(趙) 토마스는 나이도 알 수 없으며, 다만 조동섬 유스티노의 아들 로만 알려져 있다.


조동섬은 양근 출신의 덕망 높은 한학자인데 한국 초대교회의 열렬한 신자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는 1800년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801년 2월에 다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그해 2월 27일 의금부에서 그를 경기 감영으로 보냈는데, 불행히도 그는 나약한 모습으로 배교의 뜻을 나타내어 유배형을 받았다.


아버지가 이렇게 옥고를 치르며 문초를 받고 유배형이 내려질 때, 비로소 그의 아들인 토마스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어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훌륭한 성격과 효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된 뒤로 그는 교회의 모든 본분을 정확히 지켜 그를 아는 모든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덕행을 쌓고 영적 정진을 하면서도 조용하고 겸손하게 아버지의 후광 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800년 아버지가 처음 체포당하였을 때, 그는 옥에서 10리 되는 곳에 자리를 잡고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두 번씩 찾아뵙고 음식을 갖다드리며 힘을 다해 위로해 드렸다. 사람들은 이 지극한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그의 효성에 머리를 숙였다.


1801년 아버지가 다시 체포당하고 마침내 30년 유배형을 받아 함경도 무산으로 떠날 때, 토마스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밤이고 낮이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유배지인 무산까지 멀고 험한 길을 아버지를 모시는 데만 전념하여 동행하던 포졸이 감복하게 하였다.


유배지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옥고와 형벌의 상처가 덧나고 여행의 피로가 겹쳐 중병이 들고 말았다. 조 토마스는 아버지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정성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며 섬기어 모셨다. 유배지인 무산 사람들도 또한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토마스의 지극한 정성과 기도가 효험이 있어 아버지는 기력을 차려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경기 감영에서 나약한 모습으로 배교한 것을 통탄하며 뉘우쳤다. 토마스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회심에 감복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온갖 규범과 계명을 엄하게 지키며 귀양살이의 어려움을 이겨냈다. 부자는 그 험한 귀양지에서 기도하며 회개의 삶을 사는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외롭고도 아름다운 귀양 생활이 곧 끝이 나게 되었다. 당시 양근 군수는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조동섬과 그의 아들을 기어코 없애려 했다. 조동섬이 귀양가고 아들이 아버지를 모셔 집을 떠났기 때문에 자신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게 되자 군수는 여러 차례 대신들에게 청원을 냈다. 결국 몇몇 친구의 힘을 얻어 필요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하고, 평소에 그가 아들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한 대로 포졸을 파견해 토마스를 잡아오게 하였다.


그해 8월에 양근의 포졸들이 무산에 들이닥쳤다. 불편하고 어려운 가운데에도 회개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부자는 놀라고 황망하여 가슴이 메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조용히 주님의 섭리를 받아들여 따르기로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래, 너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 하고 물었다. 토마스는 늙으신 아버지를 이 귀양지에 혼자 버려둘 수밖에 없는 처지를 생각하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섭리를 따라야 했다. '이것이 주님 뜻이라면 기뻐해야 한다. 떠나야 한다면 아버지께 슬프고 괴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 토마스는 대답하였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 발 한 발 따라가는 것밖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아들의 이 침착한 대답에 아버지는 마음 든든한 듯이 "좋다. 이제는 네가 떠나는 것을 후회없이 안심하고 보내겠다."고 하면서, 이제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을 했다.


아들을 떠나보내고, 그것도 포졸의 손에 죽음의 길로 떠나보내고 조동섬 유스티노는 유배지에서 더욱 열절한 신앙생활을 했다. 늙고 병들어가자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천주교 교리를 전수해 줄 젊은이를 찾고 싶어했다. 뒷날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소원을 이루어주신 것을 주님께 감사드리며 정하상을 격려하면서 교회의 재건과 사제 영입을 위해 헌신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였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그에게서 배우고 또 그가 소개해 준 조숙의 집을 활동 근거지로 하여 놀라운 활약을 해나갔다. 조동섬 유스티노는 1830년 8월 2일 92세로 유배지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뉘우침의 삶으로 그의 소원을 정하상 성인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실현한 셈이다.


토마스는 아버지를 두고 떠나온 쓰라린 가슴을 순교의 열망으로 달래며 양근에 도착했다. 양근 군수는 오랜 소망을 이루게 된 것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문초를 시작했다.


"그래, 네 아비의 죄를 아느냐?" 토마스는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대답했다. "사또께서 어떻게 인륜을 무시하고 그런 질문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제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지금 아버지가 당하시는 고통은 제 잘못 때문이지 아버지의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이 효성 지극하며 사리가 분명한 대답에 양근 군수는 내심 놀라워했다. 그러나 오히려 화를 내며 혹독한 고문을 하며 배교하라고 강요하였다. 오랜 영적 수련으로 살아온 조 토마스는 배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끈기있게 모든 고문을 참아 받았다.


토마스는 근 두 달 동안 거의 날마다 끌려나가 신문을 당하며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한시도 나약함을 보인 적이 없었다. 놀라운 그의 정신은 굽힐 줄 모르고 더욱 힘차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그의 의연한 자세와 초인적 인내에 모두 탄복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거듭되는 형벌을 더 견디지 못했다. 칼날 아래 순교하기를 열망했던 그는 1801년 11월 중순경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토마스의 순교 사실을 전해준 사람은 그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순교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이 잡히는 것을 허락하셨을 때 형벌을 받는 데 익숙해지려고, 여러 해 전부터 혼자 있는 틈을 타서 자기의 팔다리를 몹시 쳤다고 한다. 아마도 이 용감한 극기를 상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순교의 영광을 주신 모양이다."


신앙생활이 드러나면 체포당하고, 잡히면 모진 형벌을 견디지 못해 본의 아니게 주님을 배반하게 되는 것이 현실인 박해시기에, 스스로 몸을 쳐 극기하는 순교자들의 모습을 조 토마스를 통해 보면서, 너무도 나약한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을 조용히 반성한다.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11월호>


김백순: 내 마음은 마치 산과 같다


순교자 김백순(1769(?)-1801년)은 노론 대가의 선비로 본관은 안동이며, 김건순 요사팟의 사촌형이다.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에 척화를 주장하고, 1639년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여, 이듬해 심양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좌의정을 역임했던 김상헌의 후예이다. 나라와 임금께 바친 선조의 충성으로 그에게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그 후손에게도 정문을 세울 허가를 받았다. 해마다 임금은 병자년에 절개로 죽은 이의 자손들을 거느리고 진배의 예를 행하였는데, 예가 끝나면 제사에 참례한 사람들에게 ‘충량과’라는 과거를 보게 하였다. 이렇게 그에게는 빨리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었다.


김백순은 명문가의 후예였지만 서울에서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가난을 면하고 영예를 얻기 위해 벼슬길로 나갈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순전히 출세하려는 야심으로 글공부에 전념하였는데, 동양 성현들의 철학서를 공부하면서 차츰 그 철학적 이론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모호하고 모순되어 의심과 혼란에 빠졌다.


회의와 혼란에 빠진 그는 성현의 글귀라 하여 그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마침내 사물과 인간의 궁극적 가치와 의의에 대해 사색하며 진리에 목말라했다.


정문이 세워진 명문가의 후예로 가난을 이기고 출세해 보려던 김백순은 당시 세상의 어지러움을 보고 참된 진리에 목말라하면서 벼슬길에 나갈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이제 해마다 임금이 절개로 죽은 이의 자손들을 거느리고 진배의 예를 행하고, 충량과를 보게 하던 제사에 참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제사에 참례하지 않는 까닭을 "주나라를 존중하는 정성이 제사에 있는 것이 아니오. 오늘날 제사에 참례하는 사람은 오로지 과거에 급제할 기회만 엿보는 것이니, 그것은 매우 성실하지 못한 일이오. 그래서 나는 참례하지 아니하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참 진리에 목말라하던 그는 노자와 장자의 책을 읽었다. 그는 노장의 무위자연과 신선사상을 접하면서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데 주목하고, 이에 그가 그 동안 생각했던 바를 가지고 나름대로 새로운 이론을 세웠다.


그는 자신이 죽어도 아주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기초를 두고 새로 만든 이론을 친구들을 찾아가 강설하였다. 그런데 그의 설명을 들은 친구들이 "자네 말은 매우 이상한데, 자네는 아마 그 모든 것을 서교에서 따왔지?" 하고 대답했다. 친구들의 지적은 김백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너무나 놀라워하며 ‘우리의 지능을 초월하는 나의 새 이론을 듣고는 모두가 그것이 서교에서 왔다고 하니 그 종교에는 무엇인가 아주 위대하고 비상한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김백순은 '나는 남보다 뛰어난 견해를 얻었는데 남들이 서교라고 하니, 반드시 미묘한 이치가 있을 것이 틀림없는 서교를 알아보리라.' 결심하고 천주교에 진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사귀고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했다. 불사불멸하는 영혼의 존재, 상선벌악, 천주존재와 강생구속 등 천주교 주요 교리를 연구하며 그는 비로소 종교적 진리에 대한 오랜 갈증을 풀었다. 그리고 그 진리가 갖는 한없는 매력에 끌려들고 그 진리가 주는 놀라운 생명력에 취했다. 두 해에 걸친 그의 연구 결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는 스스로 확신을 가졌다고 느끼고 굳게 믿기 시작하며, 온 마음을 바쳐 천주교가 명하는 모든 본분을 충실히 지켰다.


이제 신앙생활을 실천하는 신자가 된 김백순은 성실하고 정성어린 권고로 그의 어머니를 신자가 되게 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아내였다. 원래 야심이 많았던 아내는 항상 남편의 출세와 영예를 기대하며 갈망해 왔다. 그런데 과거 준비로 공부하던 남편이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문제에 관심을 두더니 마침내 서학도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껴 분노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실망과 분노는 남편을 비난하고 욕설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김백순은 너그럽고 침착하게 아내의 반항을 진정시키며 자신의 신앙생활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친척 중 어떤 사람이 그에게 천주교에 대해 묻자 그는 힘차게 "이것은 참되고 위대한 도리요, 사람은 누구나 따라야 하니 나같이 하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아내는 김백순을 벼슬길로 가도록 백방으로 손을 썼다. 아내는 친정 어른의 도움을 청했다. 어느 날, 외숙부가 그를 보러 왔다. 외숙부는 김백순을 타이르고 유혹하여 천주교를 버리고 출세의 길을 택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대는 충절과 명문가의 후예가 아닌가. 나랏님도 그대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특은을 베풀고 계시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입신출세하여 가문의 영예를 보전하고 나라에 충성하려 하지 않는가. 오히려 국법을 어기고 사학에 심취하니 어찌 군자의 도리인가."


김백순이 답했다. "나는 사학에 물든 바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믿고 있는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만민이 믿어야 할 참 종교입니다. 세상에 누구도 부모에 효도하고 임금께 충성함을 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느님은 천지대군이시고 만민의 참 어버이십니다. 천지대군께 충성하고 참 어버이께 효도함을 금할 군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외숙부의 온갖 논지와 이설이 김백순의 도도한 논리를 당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해도 말을 듣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외숙부는 마지막으로 비장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네가 내 말을 끝내 듣지 않으면 너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 김백순은 "내가 차라리 숙부와 의절을 하더라도 결코 천주와 의절은 못하겠습니다." 하고 조용히 대답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친구들은 그와 상종하지 않기로 하고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통고하였다. 그의 친척들은 그를 집안에서 내쫓기로 결정하고 문중에서 축출하였다. 이렇게 현세의 모든 것들이 그를 버리고 떠났다. 그러나 이 용감한 신입교우인 김백순은 오히려 태연하였다. 모두가 그를 떠난다는 통보를 해올 때마다 "내가 천주를 안 뒤로는 내 마음이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아니하니, 내 마음은 마치 산과 같다."라고만 말하였다.


1801년 봄, 김백순은 밀고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그는 금부에서 모진 매를 맞으며 심문을 당했다. 그는 굳건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다가 늙으신 어머니와 영원히 결별한다는 효성에 못 이겨 잠시 허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금부로 이송되어 배교를 취소하고 신앙을 고백하여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는 끝내 세례성사를 받지 못한 예비신자로 1801년 5월 11일 참수형을 받고 32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예를 얻었다. 그의 순교는 피로 씻는 혈세가 되었고, 혈세는 그에게 개선의 교회로 들어갈 영광스런 권리를 주었다.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12월호>


신유박해 순교자(12) - 홍인 레오


아버지 홍교만 뒤따른 효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1801년 1월 10일, 음력)으로 시작된 신유박해는 그 해 12월 22일(음) 척사윤음으로 끝날 때까지 두어 단계의 전개과정을 볼 수 있다. 그 시작은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통해 시파와 벽파의 당파간 권력다툼인 정치성을 띄고 있었다. 그래서 정치적 반대파의 희생이 크게 부각되고 주로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에서 희생자를 냈다.


그러던 3월 12일(음)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박해는 더욱 가열되고 확산되었다. 전라도에서는 3월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그 집안 인척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을 문초하던 중에 서양선박을 불러들이려는 계획이 탄로되었고, 이 계획에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이 관련되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당시 조선조정에서 새로운 국면의 의구심을 갖게 했는데, 그 해 9월에 황사영이 체포되어 발단된 백서사건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게 했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의 실정을 말하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군함의 파견 등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천주교가 국가전복을 음모하려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신유박해의 전개과정을 정리해 보면 주문모 신부의 자수사건 이전까지는 천주교 문제를 정치적 투쟁의 방편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더 컸었는데, 주문모 사건 이후에는 유항검이 서양선박을 불러들이려 했다는 소위 대박청래사건이 드러나고, 이어서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노출되면서 이제 천주교 문제는 조선왕조의 운명과 관련된 역모사건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유박해의 희생자를 황사영의 백서에서는 3백여 명이라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방의 희생자와 그 자신 및 백서사건에 연루된 희생자들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니 희생자는 적어도 3백명 이상이고 처형된 사람만도 1백여명인데 여기에 유배된 사람을 약 4백명으로 보면 도합 약 5백여명에 달한다. 그러니까 신유박해 희생자는 3백여명 이상이고 5백여명 이하가 되는 셈이다.


이제 초기의 경기, 충청도 지역 순교자를 보면서 비록 그의 사형집행은 늦게 이루어졌으나 일찍이 아버지와 함께 체포당한 홍인(레오, 1757~1801)을 먼저 본다. 홍인 레오는 아버지 홍교만 프란치스코(가톨릭신문 제2247호에 소개)와 함께 2월 14일에 잡혀 포천 옥으로 이송되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조용한 홍인은 포천고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젊은 시절 가문과 지위를 이용하여 인간적 명예를 얻고 출세하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러던 그가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고 받아들여 신자가 된 후로는 일체의 세속적 출세를 버리고 오직 하느님을 섬기며 그 교리를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효성이 지극하던 그는 아버지 홍교만이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고서도 입교하기를 주저하며 확신을 갖지 못함을 보고 정성을 다해 기도하며, 아버지가 가졌던 교리상의 의심을 풀어드리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아버지는 그의 열성에 모든 의심을 풀고 굳은 신앙으로 입교하게 되었고, 그는 아버지에 이어서 다른 식구들에게도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가르쳤다. 그는 특히 냉담교우들에 대해서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힘차게 격려하였다. 이렇게 그는 냉담자 회두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더불어 많은 외교인들을 입교시키기도 했다. 홍인 레오가 이렇게 사도적 열의에 불타는 모습으로 복음선교에 진력하면서 보여준 그의 겸손은 모든 이들을 감복하게 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가장 겸손한 말밖에는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남의 장점과 재주와 착한 행실에 대하여는 돋보이게 하기를 좋아하였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우러러 볼 만 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이 그의 겸손에 대해 특별히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아버지와 함께 체포당하여 옥에 갇혔다가 고향으로 이송되어 고향의 관아에서 신문 받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 때 아버지 홍교만은 먼저 사형언도를 받고 순교한 뒤였다. 그는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자기 자신을 입교시켰던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겠다는 열의와 효성으로 그의 마음을 굳건하게 지탱해냈다. 이러한 그의 용기와 인내를 보고 포졸들이 감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갖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서 더욱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님을 위해 사형판결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님을 증거하기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었다. 1801년 12월 27일(음) 그는 포천에서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대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참수 순교하였다. 홍인 레오는 그의 가문과 인품으로 보아 당대를 능히 풍미하며 출세하여 세속의 행복을 누릴 만 했다. 그러나 그는 세속의 모든 영화를 뒤로하고 44세의 약관으로 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 며칠 동안 놀랍게도 시신이 살아있는 것같이 보였고, 그 주위에는 밝은 빛이 어리어 있었다고 한다. 포졸들과 많은 외교인들이 이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고는 크게 놀라워하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3일>


신유박해 순교자(13) - 옥중 간절한 기도로 동료 격려한 이중배 마르티노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평화의 절실함을 깨닫듯이 슬픔과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기쁨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참 기쁨은 모든 고통과 슬픔을 압도한다. 여기 죽음을 이긴 부활의 참 기쁨에 겨워 종일토록 부활 찬미경을 노래한 순교자가 있다. 그는 조선 후기 서학은 남인학자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진리이기에 당파를 초월해서 할 수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소론(小論)에 속한 학자로서 영세 입교하여 순교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분이 바로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이다.


그는 소론(小論)에 속하는 전주 이씨 집안의 자손으로 경기도 여주 고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격이 곧고 굳기는 했지만 난폭하고 화를 잘 내었다. 그는 또 비상한 힘과 용기를 가졌는데, 의술(醫術)을 조금 지니고 있으면서 분에 넘치는 야심을 가진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가 여행할 때는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낮에는 쉬고 밤에만 걷는 기벽(奇癖)이 있었고, 그 외에 자주 아무 거리낌없이 난폭하고 불의한 행동으로 이웃에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이러한 이중배가 1797년 그의 친구 김건순(金建淳) 요사파의 권고로 이종사촌인 원경도(元景道)와 함께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세례성사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 후부터 새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기 성격을 억누르고 다만 정직하고 굳셈만을 보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독실한 신앙생활로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키고 넘치는 열성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그가 입교시킨 아버지와 아내와 함께 아무에게도 숨김없이 신앙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경신년(1800년) 3월에 지극한 절제로 사순시기를 보낸 이중배는 부활절을 맞아 넘치는 희열에 찬 모습으로 친구이며 착실한 신자인 정종호(鄭宗浩)의 집으로 부활축일을 지내러 갔다. 정종호의 집에서 또 다른 신앙의 동지들을 청하였고, 모인 사람들은 고기를 삶고 술을 장만하여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이들은 길가에 둘러앉아 모두 큰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삼종경을 외고 나서,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흥에 겨워 바가지를 두드리며 희락경과 기도문을 거듭 노래하였다. 그들은 종일토록 부활찬미가를 소리 높이 부르고 장만해 간 음식을 나누었다. 이들의 우정에 넘치는 그리고 신심 깊은 부활잔치는 하루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전해들은 관아에서 포졸들을 보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가 부활잔치 중에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관아에서 관장은 이들을 엄중히 문초하고 주리를 틀며 매질했다. 그러나 그들은 포악한 형벌 중에서도 부활축제의 기쁨을 잃지 않았다. 참 기쁨은 어떤 역경도 압도한다. 그 죽음도 이긴 부활의 기쁨 앞에 어떤 고통이 장애가 되리오! 특히 이중배는 옥중에서 활기찬 열정과 간절한 기도로 동료들을 격려하며 옥중 생활을 거룩하게 살았다. 그는 옥중에서 효성 지극한 임희영을 입교시키고, 조용삼을 허약한 몸으로도 위대한 영적 승리를 얻는 순교의 길에 동참하게 했으며, 동료들의 마음을 약하게 할 어떤 계기도 준엄한 자세로 막아냈다.


마침내 이중배 자신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험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가 초라한 모습으로 옥에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고 말했다. "너는 백발이 성성한 네 아비를 버리고 죽고자 하느냐?" 어떤 형벌도 의연히 이겨낸 이중배는 아버지에 대한 효성으로 찢어지는 듯한 마음을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아버님, 저는 효성의 본분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아마 저의 처신이 별로 용감해 보이지는 않을 것 입니다마는 아버님도 저와 마찬가지로 교우이시니 우리는 사물을 더 높은 시야에서 보아야 합니다. 인정에 끌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배반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버님 깊이 판단하십시오"하고 간절히 아뢰었다.


하느님은 이 영웅적인 신앙에 대해 병을 고치는 치유의 은혜로 상을 주시기라도 한 듯 이중배는 이후 옥중에서 그의 의술을 발휘했다. 평소 그가 의술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옥중에서 그의 치유능력은 이내 퍼져나가 일약 유명해졌다. 당시 옥중의 동료들은 열이면 열이 그의 치료를 받고 다 나았다고 했다. 옥중의 원경도의 상처도 여러번 치유했으며 포졸들도 그들의 병든 가족을 데려와 치료를 받고 갔다.


어느 날 포졸들이 몰려와 그 선풍적 인기를 일으키게 한 의학서적을 보자고 청한 적이 있었다. 이중배는 "나는 독특한 처방이 없소. 다만 천주를 섬기기만 할 뿐이요. 당신들이 의술을 배우고 싶다면 우선 나처럼 천주를 믿어야 하오"하고 대답했다. 포졸들이 "당신이 책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고 주장하니 우리가 어떻게 배울 수 있겠소?"하자 이중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마음속에 타지 않는 책들이 있으니 당신들을 가르쳐서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충분하고도 남소"


그는 옥중에서 수많은 병자를 치료해 주어 낫게 하고, 포졸을 감복시켜 입교하게 하여 열심한 교우가 되게 했다. 이중배와 동료들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의금부의 결안이 확정되자 여주로 내려와 1801년 4월 25일 여주읍 내 성밖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10일>


신유박해 순교자(14) - 조용삼 베드로


양근(楊根)고을에 살던 한양 조씨가문의 양반 조재동은 불행하게도 상처하고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그는 몹시 가난해지자 더 이상 살길이 없어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여주(驪州)고을 점돌에 살고 있는 임희영이라는 양반집에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임희영은 그들을 너그럽게 대하고 있었지만, 조재동의 큰아들 조용삼(?-1801년)은 기질이 심약하고 외양도 못생기고 병약할 뿐만 아니라 세상물정에 캄캄한데다가 가난하여 아버지를 따라 동생과 함께 더부살이하는 처지이니 모두가 그를 업신여겼다. 그래서 그는 나이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못 들었고 관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놀렸는데 정약종(丁若種)만은 허약한 그의 몸 안에 있는 위대한 영혼을 알아보았다. 약종만은 용삼을 극진히 대하고 그의 신앙과 덕을 찬양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던 1800년 4월에 포졸이 임희영을 체포하러 그의 집에 찾아들었을 때 조용삼 베드로와 그의 아버지 조재동도 함께 잡혀가게 되었다. 길을 가는 동안 아버지 조재동은 아들에게 "이번에 나는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으니, 나는 틀림없이 순교자가 될 것이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물었다. 조용삼은 "아무도 자기 결심과 자기 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약하고 불쌍한 제가 어떻게 감히 순교하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자식의 나약한 대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관장 앞에 끌려가 첫 번째 심문을 받을 때부터 아버지는 슬프게도 굴복하고 말았다. 참으로 인간의 어리석은 자만과 자기 과신으로는 결코 주님의 진리를 증거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되었다.


관장은 조용삼에게 "너도 배교하여라"하니, 조용삼은 "저는 배교할 수가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아니 네 아버지가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는데 너는 죽기를 원한단 말이냐? 그것은 효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그런 길을 가더라도 자식들이 그 본분을 다하기를 계속한다면 그것을 어찌 효도를 어기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각자가 자기 부모를 공경하고 섬겨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모보다 먼저 또 부모 위에 천지만물의 대왕이시며 공통된 아버지이신 분이 계시니, 그 분이야 말로 제 부모에게 생명을 주셨고 제게도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관장은 화가 나서 여느 때보다 더 혹독한 고문을 곁들인 심문을 거듭하였다. 조용삼은 이 형벌로 무릎이 부러져 종지뼈가 다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등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관장은 형벌과 권고가 소용없음을 알고 아버지를 데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는 네 아들 때문에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들에게 말하라. 네 말 한마디로 너희 둘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이 바로 너에게 달렸으니, 마음을 돌리도록 네 아들에게 권고하라" 그리고는 조용삼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버지를 혹독하게 치게 하였다. 조용삼은 소리쳤다.


"저는 인륜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저 때문에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하기를 원치 않으니, 우리 둘을 살려 주십시오"


뼈가 부서지는 고통도 이긴 조용삼은 아버지에 대한 효도 때문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용삼은 관아에서 나오다가 이중배(李中培)를 만나 그의 충고를 듣고는 맹목적인 효성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게 되었다. 그 밤을 통회의 눈물로 새우고는 날이 밝자 관장 앞에 다시 나아가 "제가 어저께 한 일을 지금 후회합니다. 그러니 사또께서는 저의 죄대로 죽이시고 아버지는 그의 원대로 다루어 주시기 바랍니다. …각자는 자기의 행실대로 다루어져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관장은 용삼의 허약한 모습만을 보고 쉽게 다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는 엄중히 심문하며 위협하였다. 그러나 이제 조용삼은 어제의 그가 아니었다. 이후 혹독한 형벌로 인해 몸이 어스러졌으나 그의 신앙은 더욱 굳건해졌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피투성이의 몸으로 "하늘에는 두 임금이 없고, 사람은 두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만 하느님을 위하여 죽는 것뿐입니다. 저에게 더 이상 물어 보시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저는 이제 다른 말씀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하고 용감히 그의 신앙을 고백했다. 관장은 외양으로는 허약해 보이던 그의 몸 속에서 놀랍고 위대한 불굴의 넋과 영혼을 보며 내심 두려웠다.


그의 마지막 신앙고백이 된 "하늘에는 두 임금이 없고, 사람은 두 마음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이틀 후인 1801년 2월 14일 그는 옥중에서 베드로를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바로 숨을 거두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예비신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그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에 불빛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퍼졌다. 포졸들과 구경꾼들이 그것을 확인하러 갔는데, 그 장소에는 불이 아니라 현란한 광채가 보였다. 이로 인해 당시 그 고을 사람들은 조용삼 베드로에게 크나 큰 공경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장한 순교의 모습을 깊은 경의와 신뢰를 갖고 전하게 되었다.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17일>


신유박해 순교자(15) - 임희영 : 부친 유언 따르다 순교한 효자


1801년 4월 25일 여주(驪州)고을에서는 다섯 증거자들의 거룩한 죽음이 있었다. 28세의 원경도(元景道 요한), 53세의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 50세 가량의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정종호(鄭宗浩), 그리고 나이도 세례명도 알 수 없는 임희영(任喜永)이 그들이다.


이제 이들 증거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1800년 3월 위의 다섯 증거자 중 대표격인 이중배와 원경도가 정종호의 집에서 부활축일을 함께 보내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형벌을 받고 있을 무렵에, 같은 고을인 여주에 임희영이란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은 열심한 신자였으나 그만이 고집을 부리며 신앙생활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신앙생활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라며,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려면 눈도 귀도 또 다른 모든 관능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무리 권고하고 타일러도 그는 결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죽게 되어 그를 불러 마지막으로 간곡히 말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을 떠나도 아무런 한이 없겠다."


그러나 아들은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말하였다. "네 태도를 보니 내가 죽은 뒤에 조상들에게 드리는 관례적인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 같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 이제 잘 들어라. 네가 나 죽은 뒤에 제사를 지내면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겠다. 그러니 네가 제사를 지내려거든 상복도 입지 말아라. 내가 내 자식으로 알지 않는데 상복을 입을 것 없다!"


이 말은 실로 그에게는 놀라운 충격이었다. 차라리 무서운 저주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임희영은 묵묵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자식에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렇게 분노에 찬 극단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부자의 의를 끊겠다는 말을 했어도 다만 침묵하고 있는 임희영의 묵묵부답은 참으로 기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틀 후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말이 없던 임희영은 분명한 애통의 표시를 하고, 상복을 입었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자식으로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관례적인 제사는 하나도 드리지 않았다. 그의 모든 일가친척과 친지들은 그를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불만과 불평을 숨기지 않았다.


경신년(庚申, 1800년) 봄에 소상(小祥)이 돌아왔는데, 그는 아무런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행동이 알려지자 여주목사가 포졸을 보내어 그를 체포하고 문초를 했다. "나는 네가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네가 부모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고 비난하니,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임희영은 그의 아버지 앞에서처럼 오직 침묵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도 옥으로 끌려가 이중배와 원경도 등 그의 동료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천주교 신자들과 같이 취급당했다. 1800년 10월에 증거자들은 감사 앞에 다시 불려 나갔다. 그 날 감사는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즉시 석방하여 자유의 몸이 되게 하겠다고 부드럽게 회유했다. 그러나 증거자들의 용감한 신앙고백이 있을 뿐 감사의 회유가 통하지 않았다. 감사는 그들 모두를 결안(結案)하여 서명을 시키고 모진 매를 때려 하옥시켰다.


세례도 받지 않았고 다만 침묵해 아직 외교인인 임희영은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한 달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심문을 받았지만 줄곧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혹독한 형벌에도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았다. 감사가 "너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면서 왜 제사를 드리지 않는가? 끝내 제사 드리기를 거절한다면 죽이겠다"고 위협했으나 임희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10월의 심문이 있은 후 이제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면서 같이 있던 교우 한 사람이 임희영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하느님을 공경하지도 않으면서 그대가 당하는 형벌은 아무 소용이 없소. 오히려 굴복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더 나을 거요!" 하고 말하였다. 그때서야 임희영은 비로소 대답을 했다.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 유언을 하시면서, '나를 위해 제사를 드리면 내 아들이 아니니 상복도 입지 말라'고 말씀하셨소. 그런데 이제 내가 상복을 입었으니 어떻게 내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소. 나는 나를 죽이면 죽을 뿐이지 제사는 결코 드리지 않겠소!" 하고 결연히 말을 맺었다.


옥중의 교우들은 그의 굳은 결심과 효성을 보고 그를 권고하여 교리를 가르쳤다.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성은 아버지와 함께 참신앙을 가짐으로써 더욱 완성되는 것임을 이해시킨 것이다. 임희영의 아버지께 드리는 효성은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효성으로 승화되어 마침내 신앙에로 이르게 했다. 그는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그의 동료들과 함께 기쁨에 찬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나이도 그리고 세례명도 전해지지 않은 순교자 임희영은 그 효성이 신앙으로 승화된 가장 한국적인 순교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24일>


임희영 - 효성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증거자


순조 원년(1801년), 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전국적인 백해가 시작되었던 그해가 어두운 불안 속에 밝아왔다. 정조가 24년에 승하하자 순조는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잇게 되었다. 궁중의 어른이라 하나, 친정 오빠 김구주의 귀양과 죽음으로 가슴에 한을 품고 있던 여인, 영조의 계비 정순황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맡게 도니 정치적 미래가 예측할 수 없는 불안에 싸여있었다. 김 계비는 정치적 보복을 국가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은밀히 위장하고, 선왕 정조의 정례예절인 인산례가 끝나기 무섭게 천주교 박해령을 내렸다. 역사의 이 어둡고 외로운 한 굽이에 한국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거룩한 순교의 붉은 피가 민족의 구원사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1801년 4월 25일 경기도 여주에서는 다섯 증거자들의 거룩한 죽음이 있었다. 28세의 원경도 요한, 53세의 최창주 마르첼리노, 50세의 정도의 이중배 마르티노와 정종호, 그리고 나이도 세례명도 알 수 없는 임희영이 그들이다. 그들 가운데 임희영을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은 신앙의 동지이며 벗들이었다.


1800년 3월에 이들 가운데 대표격인 이중배는 원경도와 함께 부활절의 기쁨을 같이 나누려고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들은 술을 거르고 고기를 삶아 산기슭 오솔길 옆에 자리잡고 최창주와 함께 불활 찬미경을 소리 높이 읊었다. 이렇게 영적 기쁨에 넘쳐 종일토록 술을 마시고 고기를 나누며 부활 찬미경을 거듭 노래했는데, 이 일이 관가에 알려져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임희영은 이때 신자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신자도 아니면서 천주교인들과 한 옥에 갇혀 그들과 같은 취급을 당하여 옥고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임희영은 심문을 받을 때나 옥중에서도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은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여서 그가 옥고를 치르는 까닭도, 신상에 관한 내력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800년 10월에 들은 감사 앞에 다시 불려나가 심문을 받았다. 그날 감사는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곧 풀어주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하겠다고 부드럽게 회유했다. 그러나 증거자들은 용감한 신앙고백이 있을 뿐 회유가 통하지 않았다. 감사는 그들 모두에 대해 결안하여 서명을 시키고 모진 매를 때려 하옥시켰다. 그런데 임희영은 세례도 받지 않았고 천주교를 신봉하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침묵한 채 한 달에 두 번씩 천주교 신들과 함께 심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침묵했다.


혹독한 매질에도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았던 임희영에세 감사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는 네가 돌아가신 부모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비난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너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면서 왜 제사를 드리지 않는가? 끝내 제사를 드리기를 거절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래도 임희영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심문과 형벌을 받고 이제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면서 그 동안 옥고를 함께 치른 이중배가 조심스럽게 임희영 곁에 다가와 말했다. "그대가 천주님을 공경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부모의 제사를 거절하여 당하는 형벌이 무슨 뜻이 있겠고. 오히려 굴복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더 나을 거요." 그러자 임희영은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이제 더는 살 가망이 없는 처지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말문을 열어 그 까닭을 말했다.


그는 양반이며 풍천 임씨 가문으로 여주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때 그의 부모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열심한 천주교 신자였는데, 그만이 고집을 부리며 신앙생활을 거부하였다. 그는 신앙생활이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며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려면, 눈도 귀도 또 다른 모든 관능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무리 권고하고 타일러도 그는 결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죽게 되어 그를 불러 마지막으로 간곡히 말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무 한이 없겠다." 이들은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말하였다. "나는 이제 오늘내일 사이에 죽을 것이다. 그런데 네 태도를 보니 내가 죽은 뒤에 조상들에게 드리는 관례적인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 같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네가 내말을 듣지 않았으니 이제 잘 들어라. 네가 나 죽은 뒤에 제사를 지내면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겠다. 그러니 제사를 지내려거든 상복도 입지 말아라. 내가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데 상복을 입을 것 없다."


이 말은 그에게는 놀라운 충격이었다. 무서운 저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임희영은 묵묵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자식에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렇게 분노에 찬 극단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부자의 의를 끊겠다는 말을 했어도 다만 침묵하고 있었다. 실천하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그의 침묵이 그의 진실됨을 웅변하는 것일까. 그의 침묵은 그렇게 신비스러운 고집이었다.


이틀 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말이 없던 임희영은 분명한 애통의 표시를 하고 상복을 입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관례적인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상례를 따르는 관례적 허식과 제사를 일체 드리지 않자. 그의 일가 친척들은 놀라 눈으로 그르 쳐다보며 불만과 불평을 숨기지 않았다. 경신년 봄에 소상이 돌아왔는데 그는 아무런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이 알려지자 여주 목사는 포졸을 보내어 그를 체포하고 문초했다. "네가 천주교 신자가 아닌데 어찌하여 제사를 드리지 않느냐?" 임희영은 그의 아버지 앞에서처럼 침묵했다. 목사는 거듭 다그쳤다. "네 만일 끝내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너를 죽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임희영은 오직 침묵할 뿐이었고 옥으로 끌려가 마치 천주교 신자처럼 취급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저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유언을 하시면서 '나를 위해 제사를 드리면 내 아들이 아니니 상복도 입지 말라'고 말씀하셨소. 그런데 이제 내가 상복을 입었으니 어떻게 내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소. 나를 죽이면 죽을 뿐이지 제사는 결코 드리지 않겠소" 하고 결연히 말을 맺었다. 그의 침묵은 태산같았고, 행동은 도도히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무서운 침묵 그 뒤에 뜨거운 효성이 활화산처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옥중의 교우들은 그의 굳은 결심과 효성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께 향한 그 놀라운 효성은 아버지와 함께 참신앙을 가짐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깊이 이해하도록 그를 권고하여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 드리던 임희영의 효성은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효성으로 승화되어 마침내 신앙에 이르게 되었다. 깊은 상처로 죽음만을 기다리며 지쳐있던 옥중은 뜨거운 교리교실이 되었고 지극한 영신 수련장으로 변했다. 임희영은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그의 동료들과 함께 신앙의 형제로 여주의 다섯 순교자 속에 들었으며, 효성이 신앙으로 승화된 가장 한국적인 순교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801년 4월 25일, 여주의 다섯 순교자들의 목을 친 회자수는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옥을 지켰던 포졸은 뒷날 옥쇄장직을 버리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경향잡지, 1999년 4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16) - 원경도 요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지방으로도 이어져 초기교회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희생당하였다. 여주에서는 1800년에 이미 체포당한 천주교 신자들이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판결을 받아 결안이 확정된 뒤 다시 그들의 고향인 여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다. 1801년 3월 13일(음) 여주 성문 밖에서는 이중배, 임희영, 정창주, 정종호, 원경도 등 다섯 순교자들이 참수되었다. 이들이 바로 부활찬미경을 함께 부르다가 같이 잡혀와서 옥고를 치르며 서로 격려해 온 신앙의 동지들이다. 이때 같이 옥고를 치렀던 조용삼은 모진 형벌에 끝내 옥사 순교하였다. 옥에서 만나 함께 심문을 받던 임희영을 영세 입교시킨 옥중생활은 참으로 신앙인 다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포졸 중에 한 사람도 이들의 옥중생활을 보고 신자가 되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도 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이렇게 옥중생활을 통해서도 거룩한 복음을 전하며 포교하였던 것이다.


원경도(元景道 요한, 1773 ~1801)는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고향에서 외교인으로 살았다. 그는 김건순 요사팟의 인도로 이종사촌인 이중배와 함께 입교한 후부터는 남다른 열성으로 계명을 지키고 신자로서의 본분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신앙생활에 충실한 그는 당시 여주지방의 열심한 교우들과 자주 연락하면서 교회의 일들을 돌보았고, 신자들과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위한 신심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종사촌 이중배와 함께 1800년 부활축일을 지내러 정종호의 집에 함께 갔던 것이다.


원경도 요한은 부활의 환희에 북받쳐 그렇게 큰소리로 찬미경을 함께 부르다가 체포당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잡혀가면서도 부활찬미가를 소리 높여 부른 신심행사의 기쁨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의연히 감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부활찬미가를 부르던 곳에서 관아로 압송되어 가는 길목에 원경도의 집이 있었다. 늙으신 어머니는 자식이 잡혀간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고 버선발로 뛰어나가 아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는 포졸들에게 다가가서 아들을 잠시라도 만날 수 있도록 청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 아들을 잠깐만이라도 만나려는 청은 냉혹하게 거절당했다. 원경도는 그 애절한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메였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시던 성모님의 고통과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함께 묵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 일행이 관아에 도착하자 관장은 그들에게 공범자와 천주교를 믿도록 유혹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고, 하느님을 배반하라고 요구했다. 이때 원경도 요한은 그들 무리를 대표하여 말했다. "저희 천주교에서는 어떤 사람을 밀고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므로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은 더욱 할 수 없습니다"고 말하며 명백하게 밀고와 배교를 거절하였다. 관장은 형리들로 하여금 주리를 트는 등 모진 형벌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이 가혹한 고통 중에 일행의 대표격인 이중배 마르티노(가톨릭신문에 소개되었음)가 놀라운 용기와 격려로 동료들의 인내심을 자극하여 굳건히 이겨내게 하였다. 이 옥중에서 원경도는 그의 장인이 되는 최창주 마르첼리노가 체포되어 와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6개월 이상이나 함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들은 한 달에 두 번씩 관장 앞에 끌려가 심문과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이들은 이 극악한 상황에서도 따뜻한 그리스도적 사랑을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순교의 장하고도 힘든 길을 용감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이들의 옥중생활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감동시켜 포졸 중에 한 사람도 이들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기까지 하였다.


이때 원경도의 가족들은 그의 마음을 움직여 옥에서 풀려나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가족들은 자주 늙은 여종을 보내 집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부인의 실상을 몹시 슬프게 전하였다. 한 번은 여종이 와서 더욱 슬픈 모습으로 어머니와 부인의 이야기를 했는데, 원경도는 그날 따라 다른 때와는 달리 몹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자 이중배 마르티노가 다가와서 이야기하고 있는 늙은 여종을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자 여종은 그 위엄에 질려 더 말하지 못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이들은 이렇게 옥고를 함께 치르면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더욱 굳게 마음을 다지도록 했다.


순교자들은 이렇게 감옥 속에서 함께 기도하고 격려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치욕과 고통의 상징인 감옥생활을 공동기도를 바치는 기도소가 되게 하였고, 함께 교리공부를 하는 교리실이 되게 하였으며, 또한 순교의 길을 함께 하기까지 서로를 격려하는 공동영신수련소가 되게 했다. 순교자들은 그들이 사는 곳이면 그곳이 어떤 곳이든지 이처럼 거룩한 장소로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성지라고 부르는 순교사적지는 바로 그들이 숨어살던 심산유곡이요, 주님을 증거하며 옥고를 치르던 감옥이며, 장하게 목숨을 바친 사형집행장들이다.


마침내 원경도 요한은 동료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서 결안을 받고 그의 고향인 여주로 이송되어 성밖에서 함께 참수순교하니 그때가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그의 나이 28세였다.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1일>


신유박해 순교자들(17) - 최창주 마르셀리노와 정종호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이며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던 해인 신유년은 어두운 불안 속에 밝아 왔다. 이 역사의 한 의롭고 외로운 구비에 순교자들의 거룩한 피는 더욱 붉게 대지를 적시며 흘렀다. 1801년 4월 25일 여주의 다섯 순교자는 고향 땅을 자신의 증거의 피로 적시며 영원한 고향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부활찬미가를 종일토록 불렀던 신앙의 동지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이중배 마르티노, 임희영, 원경도 요한은 이미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용기와 바른 신심을 갖고 순교의 길을 함께 간 조용삼 베드로도 보았다. 이제 여주의 다섯 순교자 가운데 최창주(崔昌周, 1748~1801년) 마르셀리노와 정종호(鄭宗浩, 1750-1801년)를 살펴보겠다.


최창주는 여주고을에 사는 양반으로 '여종'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온 가족과 함께 입교하여 성실하고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딸 중에 한 사람인 최소사 발바라는 아버지의 교훈과 모범을 따라 열성적으로 하느님을 믿으며 뒷날인 1840년 1월 4일 전라도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를 미루어 보아도 최창주의 가정이 얼마나 성실한 신앙생활을 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최창주는 일찍이 1791년에 제사문제로 일어났던 신해박해 때 광주에서 체포되어 관아에 끌려갔었는데, 그만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된 적이 있었다. 최창주는 이때부터 하느님을 배반한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순교로서 자신의 죄를 씻을 결심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였다. 1800년에 이르러 다시 교우들이 체포되어 가는 것을 본 그의 아내는 위험을 피해 숨어있기를 권유했다. 그러자 그는 "염려하지 마시오. 내가 잡혀가고 없어도 당신은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오"라며 부인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시 몸을 피하도록 간절히 권유하자 최창주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서울로 피신하기로 했다. 길을 떠나가던 그는 도중에 또다시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밤 여주관아에서 나온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관아로 압송되자 관장은 누구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공범자는 누구냐고 심문했다. 최창주는 "천주교에서는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 누구의 이름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며 단호히 대답했다. 관장은 그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명하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옥에는 이미 체포된 그의 사위 원경도와 이중배, 정종호, 임희영 등이 함께 있었다. 그는 이들 신앙의 동지들과 6개월 이상을 함께 지내며 여러 차례 혹독한 심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심이 흔들리는 말은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던 10월경에는 경기감사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감사는 매우 부드러운 말투로 배교한다는 한마디만 하면 즉시 자유의 몸이 되도록 풀어주겠다고 유혹했다. 이때 최창주는 동지들을 대신하여 "모든 사람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고 섬기는 은총을 받았으니 우리는 그분을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분을 위해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며 굳은 신앙의 의지를 밝혔다. 경기감사는 더 이상 이들을 어찌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는 그들의 결안에 수결을 놓게 하고 형벌을 가하고는 하옥시켰다. 이들 신앙의 동지들은 그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이 순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굳건하게 나아가도록 서로 권면하고 함께 기도하는데 더 열성을 보였다.


이 옥고를 함께 한 다섯 순교자 중에 부활찬미가를 부르기 위해 모였던 집의 주인은 정종호였다. 그 역시 여주출신으로 신자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여 세례명이나 어릴 적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1800년 부활절에 그의 절친한 친구인 이중배, 원경도 등이 그의 집으로 와서 가족과 함께 부활축일을 보냈다는 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충실히 신앙생활을 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길가에서 큰소리로 기도하고 기쁨에 가득 찬 마음으로 부활찬미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이 기이한 신앙인의 잔치가 외교인에 의해 밀고되어 체포당한 후에 이들은 옥고를 함께 치르며 순교의 승리를 얻었다. 정종호는 심문과 형벌을 받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아름다운 옥중 생활을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했다. 그는 이중배가 하느님의 은총 속에 많은 환자를 치료하여 낫게 하고 원경도의 상처도 치료하여 여러 차례 낫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원경도와 최창주의 늙은 종이 가족의 모습을 눈물겹게 호소하면서 마음이 흐트러지도록 유혹할 때 준엄한 태도로 늙은 종을 꾸짖어 그를 물리쳤고, 나약해진 조용삼에게는 다시금 바른 신심으로 용기를 갖도록 격려하여 함께 순교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말없이 효도하던 임희영을 영세 시켜 순교할 수 있도록 이끌었으며 마침내 한 포졸마저 신자가 되도록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하여 여주의 다섯 순교자들이 참수되던 날 휘강이 중 하나가 핑계를 대고 빠져 혼자서 이들 순교자의 참수형을 집행했던 휘강이는 양심의 가책이 너무도 심한 나머지 강물에 빠져 자살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남기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8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18) - 유한숙과 윤유오 야고보


대왕대비의 천주교 박해령이 내리자 조정의 대신들은 일제히 그동안의 온건책을 버리고 천주교도를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잇달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정약종의 심문에 참여하였던 영부사 이병모는 "이들 흉악한 역적의 경우는 남을 죽이는 것보다 그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며 "엄히 심문하여도 한결같이 진술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 완고하기가 목석과 같다"고 하면서 이들을 엄형에 처하라고 주장했다.


1801년 2월 지중추부사 등 현직관리 수십 명이 연명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올려지고 이미 지목된 신자들에 대한 심문과 탄핵이 가중되는 가운데, 앞서 본 바와 같이 2월 26일에 정약종을 비롯하여 최필공, 이승훈, 최창권, 홍교만, 이존창, 홍낙민이 처형됐다. 이때 이가환과 권철신은 고문을 이기지 못해 옥사하였으며 정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장기현으로 귀양가도록 확정됐다. 이들의 박해를 자세히 알아보면, 서울에서의 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정약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공주로 이송되어 참수 당하였고, 이 무렵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무명의 순교자와 함께 청주에서 잡힌 이종국은 공주에서 처형당했다. 경기도 포천에서는 홍교만이 아들 홍인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아버지 홍교만이 먼저 서소문 밖에서 정약종과 함께 순교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주에서는 일찍이 부활찬미경을 함께 부르다 잡혀온 신자들이 이때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이 확정된 후 각자의 고향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는데 원경도, 임희영, 최창주, 이중배, 정종호 등이 그들이다. 이때 함께 체포된 조용삼은 옥사하였다. 이후에도 대왕대비는 박해를 멈추지 않고 아직도 숨어있는 서학도를 조속히 체포하라고 독려하고 나섰다.


그러자 음력 2월 30일에 좌부승지 김근순은 홍낙임, 송문로, 유기주 등을 탄핵하였다. 이로 인해 송문로는 전라도 녹도진으로 유기주는 진도군 금갑도로 유배되었고, 3월 10일에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부로 오석중은 전라도 영광군으로 각각 정배되었다. 그런 다음 특별한 혐의가 더 드러나지 않자 박해는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들어가는 듯하다가 3월 14일 주문모 신부가 자현하여 자수함으로써 박해는 새로운 국면을 띄며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자현과 순교하기까지 즉, 주신부가 의금부에서 심문과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지방인 양근에서는 유한숙과 윤유오 등 13명이 처형되었고, 4월 2일에는 서소문 밖에서 정철상, 최필제와 중인출신인 정인력, 윤운혜, 정복혜, 이합규 등 6명이 처형되었는데, 이제 신유박해의 새로운 국면의 전개에 앞서 이들 중 몇 사람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한다.


먼저 유한숙(兪汗淑, ?~1801년)이다. '사겸'이라고도 불리던 유한숙은 경기도 양근지방의 동막골에서 살던 향반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입교한 뒤 한동안 친척인 동정녀 이아가다의 동정생활을 돕기 위해 그를 보호하며 외교인들의 눈을 피해 서울의 윤점혜 아가다에게 데려다 주기도 했다.


그는 양근의 유력한 신자로서 누구보다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세속의 쾌락을 버리고 오로지 기도와 묵상으로 신심을 굳혀나갔다. 그러던 중 체포되어 경기도 감사인 이익운으로부터 심문과 형벌을 달게 받고 끝내 배교하지 않아 사형판결을 받고 고향인 양근의 길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는 가운데 참수형을 당하니 그때가 1801년 음력 3월 13일이었다. 유한숙이 참수형을 당할 때 함께 참수형을 받은 사람이 윤유오(尹有五, ?~1801년) 야고보이다. 이때 양근에서는 7명의 신자가 함께 체포되었는데 모진 형벌 속에도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한 사람은 유한숙과 윤유오 둘 뿐이었다.


유한숙과 같이 윤유오 또한 그에 대한 기록이 매우 단편적이어서 그 행적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의 집안은 본래 경기도 여주지방의 양반이었고 양근으로 이사한 다음 그가 태어났다. 집안 전체가 열성적인 천주교 신자였으니 그도 일찍부터 가족과 함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양반으로 세속적 복락을 누릴만했던 그의 집안은 천주교 신앙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가족들을 한국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의 사촌 형인 윤유일 바오로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모셔오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1795년 6월 28일에 순교한 한국교회 초대역사에 높이 기억될 순교자이다. 동정녀로 유명한 윤점혜 아가다는 그의 사촌누이로서 순교자이며,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부친 윤장은 임자도로 귀양갔고 숙부 윤형은 해남으로 유배되었다. 또 다른 숙부인 윤관수는 고문 중에 옥사하였다.


이렇듯 그의 가계는 온통 천주교 신앙으로 인해 파산되고 희생된 그러나 놀라운 신앙의 증거자들이었다. 윤유오는 이러한 증거자들의 가족답게 모진 형벌과 심문에도 의연한 모습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마침내 고향의 신앙동지인 유한숙과 함께 고향 땅 큰길가에서 고향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참 삶의 길을 목숨 바쳐 증거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15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19) - 정인혁, 정복혜, 윤운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01년 3월 12일(음)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새로운 국면으로 가열되어 전개되기 시작했다. 주신부의 국문효수형은 4월 19일 새남터에서 집행되었는데, 주신부가 아직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고 있던 때인 4월 2일에 정철상, 최필제, 정인혁, 정복혜, 윤운혜, 이합규 등 6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들 가운데서 정철상과 최필제의 순교는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 이제 주신부의 순교를 살펴보기 전에 정인혁, 정복례, 윤운혜의 순교를 살펴보자.


정인혁(鄭仁赫, ?~1801년) 다두는 어디에서 출생하여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그에 대한 문초기록을 통해 그가 얼마나 열심한 신자였는지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1794년(정조 18년)에 백상옥이라는 교우로부터 천주교에 관해 전해듣고 곧 입교하여 교리에 따라 실천하는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당시 유명한 교우였던 최필제 베드로와 연락하면서 교회를 위해 일하였으며, 최창현 요한에게서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 5권을 빌려보기도 했다. 정인혁의 열심한 신앙생활은 모범이 되어서 그의 부친 정도홍과 형 정사혁도 그와 함께 최필공 토마스와 친교를 맺고 밤낮으로 상통하였다. 날이 갈수록 그의 신앙생활은 더욱 굳건해지더니 매월 7일에는 손경윤, 현계흠 등과 함께 김이우 바르나바의 집에 모여 천주교 교리를 강론하며 연구에 더욱 몰두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그들은 첨례에 참례하게 되었다. 이때 정인혁은 주변에 모여드는 여러 남녀 교우들과 교제하면서 교리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그가 경영하던 약국에 신자들을 은밀히 모아 교리를 강론할 정도로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3월 22일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는 주문모 신부의 숨은 곳을 말하고 다른 교우들을 고발하며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정인혁은 평소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그 모습대로 더욱 영웅적인 신앙고백으로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는 형조로 이송되었고, 형조에서는 그에게 사학을 신봉하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세상을 미혹하게 했다는 죄목을 씌워 사형을 선고했다. 그래서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정법에 의한 참수를 당하니 그때가 1801년 4월 2일(음)이었다.


정복혜(鄭福蕙, ?~1801년) 간디다도 이때 함께 순교했는데 그녀는 평민집안 출신으로 이합규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신심이나 교리 이해의 정도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일반평민의 노인으로서 남의 이목을 끌지 않는다는 점을 활용하여 교회 안의 남녀교우들과 지도자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중개하고 연락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교회활동을 크게 도운 여인이다. 그녀는 평범하고 작고 보잘 것 없었기에 무서운 박해 속에서도 감시를 피해 교우와 교우, 교회지도자와 교우 사이의 상호연락을 할 수 있었다. 작고 무시당해 이목을 끌지 못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던 이 위대함을 보며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문초록'에 의하면 '그녀는 여러 천주교인과 연결되어 천주학에 깊이 빠져서 부녀들을 유혹하여 자신을 따르게 했다'고 한다. 또 그녀는 세례를 받은 다음 친지인 조예산의 집에 자주 왕래하면서 그의 부인과 여러 과부들과 함께 교회를 위해 많은 심부름을 했다. 그녀는 특히 이합규, 조예산, 정광수, 강완숙, 한신애 등 당시 교회의 지도자급 남녀교우들의 매파로서 모든 연락을 담당했으며, 그 가운데 특히 강완숙과 한신애를 도와서 많은 일들을 하였다. 그녀는 박해가 일어나고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자 교회서적과 물건들을 거두어 한신애에게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녀는 박해 속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염하고 묻어주는 등 교회 안에서 험하고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이리하여 그녀는 '관변록'에서 소위 '사학의 매파'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정복혜 간디다는 박해 중에 체포되었지만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심문을 받고 원하던 대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윤운혜(尹雲惠, ?~1801년) 루시아 역시 이들과 함께 순교했는데 순교자인 정광수의 부인이다. 윤루시아는 순교자 윤유일의 사촌동생이고, 동정순교자 윤점혜의 친동생으로 경기도 양근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어려서 모친의 가르침으로 입교하고 결혼한 후 1799년에 서울로 올라와 살면서 교회 일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열성적인 여교우들과 왕래하며 천주교 서적과 성화를 제작하여 판매하는 일을 도왔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한때지만 주문모 신부를 집에 모시고 미사를 봉헌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등 신심을 더욱 깊고 확고하게 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들 부부는 체포되었고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인 정광수는 조정의 결정에 따라 고향인 여주로 이송되어 12월에 처형되었고, 오히려 부인인 윤운혜가 먼저 서소문 밖에서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순교의 피를 흘리며 승리의 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22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20) - 주문모 신부의 입국


한국에서 복음선교의 시작이 되는 1784년 명례방 김범우 선생 댁의 집회는 바로 그 이듬해 형조의 나졸에 의해 발각되어 집회는 해산되고 집주인인 김범우는 형조에서 매맞은 상처가 덧나 귀양지에서 선종하여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을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하는데, 1785년 이 사건 이후 권일신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재건운동 과정에서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교계체계와 성사집행을 모방하여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유항검 등 10여명의 지도자들이 스스로 신부 역할을 맡아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고해성사 등을 집행했다.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복음선교가 시작된 한국교회는 역시 세계교회 역사상 유례가 없이 이렇게 평신도들에 의해 임시성사가 집행되는 현상을 초래했다. 이들은 대단히 성실하고 정성을 다한 자세로 전례와 성사를 집행했다. 초창기 교리지식이 부족하여 시작된 이 임시성사 집행은 차츰 교리공부를 하면서 전례와 성사는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가 집행하는 것이며 또 사제들은 순결을 서원하여 독신생활을 한다는 대목을 읽고, 자신들의 행위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북경주교께 서신을 보냈다. 서신을 가지고 갔던 윤유일은 북경주교의 친서를 받아 왔는데, 한국에서의 새교회가 시작된 것을 기뻐했으나 교계제 모방과 평신도의 성사집행은 엄격히 금지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에 그들이 행한 성사집행이 교회법에 어긋남을 알고 즉시 중단했다. 한국 초대교회는 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비로소 사제의 필요성을 깨닫고 북경주교께 사제를 청원하는 사제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국 평신도들이 사제파견을 간청하는 서신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과 감격에 휩싸이게 하였다. 1790년 10월 6일자로 발송한 이 첫 사제파견 청원서를 본 북경주교는 이를 교황청에 전하였고, 교황 비오 6세는 크게 감동하시며 북경주교의 보호를 특별히 명하였다. 이에 북경주교는 1791년 2월 마카오교구 소속의 요한 도스 레메디오스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신부와 조선교회의 연락교우가 만나지 못해 신부의 입국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사제를 간절히 청원했던 조선교회는 사제를 맞아들이지 못한 체 1791년 '진산사건'이라고 알려진 박해를 받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 박해로 인하여 한국교회 지도층은 양반지식인층에서 완전히 중인계급의 지도자로 바뀌었다. 이때 교회의 새지도자로 최창현, 최인길, 지황, 강완숙 등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박해 속에서 재정난과 사제영입의 삼중적 고통을 겪으면서 각기 어려운 임무를 분담하여 북경에 다시 사제파견을 간청하였다. 북경의 구베아주교는 조선교회의 참상을 이해하고 박해 속에서 사목의 가능성이 높도록 조선인과 비슷한 모습을 지닌 중국인 신부 주문모 야고보를 선정하여 조선에 파견하였다.


주문모(1752~1801) 신부는 그 무렵 유행하던 방식에 따라 '벨로조'라는 포르투갈식 이름도 가졌는데 중국의 소주 곤산현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모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소년 주문모는 어렵게 자랐지만 총명하고 성실하여 칭찬을 받으며 글을 읽고, 과거를 준비했으나 잇달아 낙방했다. 20세가 되어 결혼하였으나 3년 만에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 혼자 살게 되었다. 그의 청년기 이 기이한 인생의 도정은 독특한 체험으로 생에 대한 회의와 정신적 편력을 하게 했지만 장년기에 들어설 무렵 천주교를 알고 안정을 얻어 북경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1793년 조선 입국에 실패하고 병사한 레메디오스 신부의 뒤를 이어 선교사로 임명된 주문모 신부는 그 사도직 수행을 위한 일반적 권한과 비상권한을 모두 받아 가지고 1794년 2월 북경을 떠나 20일 만에 조선 국경에 다다랐다.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1794년 12월 23일 윤유일과 지황의 안내를 받으며 머리를 조선식으로 꾸미고 옷을 갈아입어 조선인처럼 변장하고 강을 건넜다. 1795년 정월에 서울에 도착한 신부일행은 그 무렵 박해 속에 고난을 겪던 조선신자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교우들은 신부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맞아들였다. 신부 또한 극진한 교우들의 환영을 받고 '뒷날 내가 만약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들 이같은 환영을 받을 수 있을까'하며 그때를 회고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최인길 마티아 회장이 마련한 북촌의 계동에 머물렀다. 그는 미사성제를 드리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시키고 빨리 성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조선말 공부에 전력하였다. 그 해 성토요일 세례를 주고 또 보례를 행하였으며 몇몇의 선비에게는 한문으로 써서 고해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평신도들의 성사생활에 대한 열정과 사목자의 성직수행에 대한 사목적 열의가 한데 어울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초대교회의 불꽃같은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란 말처럼 이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첫 사목은 별로 신앙이 굳지 못한 양반집 자식 한영익이란 자에 의해 밀고 당했다. 조선조정과 국왕은 즉시 신부를 체포할 것을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명령하였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29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21) - 주문모 신부의 사목활동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시작된 한국교회가 박해와 빈곤의 난관을 무릅쓰고 10년 만에 사제를 모셔와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생활을 하게된 감격과 환희는 한영익의 밀고로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한영익이란 진사는 신부가 있는 곳에 인도되어 신부를 면회하고는 밀고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천주교를 공공연히 반대하고 조정에서 신임을 받고 있던 이벽의 동생을 찾아갔다. 이로서 의정부와 국왕인 정조까지 사실을 알게되고 체포령이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내려졌다.


다행히 배신자를 경계하여 행동을 염탐하던 교우들이 밀고사실과 조정의 체포령을 미리 알고 전해 주었다. 주문모 신부는 다급한 상황에서 우선 당시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최인길 회장이 혼자 남아 이제 곧 포졸들이 들이닥칠 집을 지키고 있었다. 최인길 회장은 이때 도망쳐 충분히 살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졸의 추적을 지연시켜 신부가 완전히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신부행세를 해 대신 잡혀갈 결심을 하였다.


최인길(1764~1795, 마티아) 회장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말을 알았으므로 신부행세가 가능했다. 그는 일찍이 교회 초창기에 김범우의 집에서 권일신, 정약용, 이벽 등과 함께 집회에 참여했다. 추조에 의해 적발되었을 때 이벽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사제영입을 위해 윤유일, 최창현, 지황 등과 힘을 모아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주신부가 입국하자 신부가 거처할 곳을 마련하였는데 이제 신부가 밀고 당하여 위험에 처했을 때 사제의 안전을 위해 대신 죽을 각오로 임하고 있다.


그는 중국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변장한 체 포졸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포졸은 집을 포위하고 다가와 물었다. "중국인이 어디에 있느냐?" "나요"하고 최인길 회장이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그는 곧 포장 앞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는 곧 착각한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신부는 수염이 많은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최인길 회장은 그렇지 않았다. 포청에서는 매우 원통하게 생각하며 다시 신부를 찾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신부를 모셔들인 다른 두 사람인 윤유일(1760~1795, 바오로)과 지황(?~1795, 사바)도 체포되어 최인길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신부를 모셔온 경위와 숨은 곳을 대라는 강요를 받고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굳은 결심과 놀랍고도 지혜로운 응답은 신문관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오직 명백하고 용감한 신앙고백이 사제의 숨은 곳을 말하라는 심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었다. 여러 차례의 고문과 형벌이 가해지고, 매를 몹시 맞아 팔과 다리가 뒤틀리고, 손바닥을 제외한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며, 무릎을 으스러뜨렸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들의 의지와 인내를 꺽지 못했고 사제에게 위험이 될 어떤 자백도 끌어내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은 오히려 이 고통 속에서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마침내 이들은 장살형으로 옥안에서 매맞아 죽음으로써 장한 순교의 영예를 얻었다. 참혹한 이들의 시신은 강에 던져져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양)이었으며 지황 사바는 29세쯤, 윤유일 바오로는 36세, 최인길 마티아는 31세였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신부를 맞아들였으며 신부의 안전을 위해 비참하게 매맞아 죽임 당하고 시신마저 강물에 던져진 이들의 순교는 세속적으로 보면 참혹한 불행으로 보이지만 한국교회가 존재하는 한 이들의 모범과 영웅적 승리는 기억될 것이다. 이들의 순교로 주문모 신부는 이후 강완숙의 경탄할 협조를 받아 1801년 순교할 때까지 6년 간의 사목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들이 비록 신유박해 순교자는 아니지만 이들이 남긴 위대한 신앙적 유산을 신유박해 순교자요 첫 사목사제인 주문모 신부와 함께 기억하지 않을 수 없어 간략히 밝혀 두고 가려 한 것이다.


사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이들의 아름답고도 눈물겨운 순교 사실을 접한 북경교회의 구베아 주교는 1797년 이들 세 순교자에 대해 이렇게 간절한 회고와 찬사를 남겼다. "북경교회와 나는 윤유일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을 내왕한 두 번의 여행에서 보여 준 신심과 정성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는 북경에서 고해와 성체성사를 하도 놀라운 열심으로 임하여, 우리 교우들 중 여러 사람이 이 신입교우에게서 복음실천에 통달한 오랜 교우와 같은 모범적인 겸손과 말과 덕행을 봄으로써 느낀 기쁨과 감탄 속에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1793년에는 지황 사바가 북경에서 지낸 40일 동안 그의 신심도 목도하였습니다. 이 도시의 신자들은 그가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을 때에 보여 준 그의 정성과 크나큰 열심과 감격해 흘리는 눈물을 보고 많은 교훈을 받았습니다. 최인길에 관하여는 그가 북경에 온 일이 없기에 눈으로 볼 수 없었으나, 이 교우가 최초의 회장들 중 하나였다는 것과 그의 열심과 신심과 하느님의 영광을 전파한데 보여 준 열성이 뛰어났다는 말을 조선교회를 통해 들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5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22) -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순교


급히 피신한 주문모 신부는 여회장 강완숙의 경탄할 협력을 받아 순교할 때까지 약 6년간 사목활동을 하게 되었다. 주신부는 언어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해지고 조선 풍속에 익숙하게 되자 지방을 조심스럽게 순회하며 사목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활동은 감시망을 피하고 밀고를 당하지 않도록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야 했다. 신부의 지극히 제한된 모든 일정은 강완숙 만이 알고 가장 확실한 교우들과의 접촉마저 삼가야 했다. 이로 인해 열심한 신자들이 신부를 뵙고 성사를 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례들을 무수히 남겼다. 이러한 여건에서도 신부가 오기 전 4천명이었던 신자 수가 1만명에 이르는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끊임없는 열성과 뛰어난 재능 그리고 놀라운 덕행으로 조선교회에 봉사했다. 당대의 신자들은 "주문모 신부는 일에 지칠 줄을 몰라 먹고 자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겨우 낼 정도였다. 밤에는 성직을 행하고 낮에는 책을 번역하거나 새로운 책을 지었다. 그는 자주 금식과 극기를 행하고 자기 본분에 온전히 헌신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신부는 신자들의 악습을 엄하게 그러나 지혜롭게 꾸짖어 개선하도록 지도하고, 신자들의 올바른 신심생활을 위하여 '사순절과 부활시기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신자들이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받을 준비를 할 때 갖추어야 할 마음의 자세에 대해 설명한 신심서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주문모 신부는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을 사랑했다. 그가 한양에 머물고 있을 때에 창골에서 화제가 나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큰 피해가 나고 있었다. 신부는 이를 가슴아프게 느껴 자신이 현장에 갈 수 없는 처지에서 송필립보의 아들을 대신 보내 불길에 성수를 뿌리고 오도록 하였다. 젊은이가 성수를 뿌리러 간 동안 신부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젊은이가 성수를 뿌리자 기이하게도 즉시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주문모 신부는 무서운 위험 속에서 지방순회 사목도 행했다. 여주의 윤유일, 전주 초남이의 유항검, 연산의 이보현, 양근의 권상문 등의 집과 고산, 공주, 온양, 내포지방에 들렀었다. 그러나 박해시기 사제의 안전을 위해 엄중한 비밀로 행해져 많은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는 또 북경에서 가졌던 모임을 본떠서 한국 최초의 평신도사도직 단체인 명도회를 창설하여 천주교 교리지식을 배우고 또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주신부는 이 집회를 무게 있고 절도 있게 조절하였으며 그의 열성에 감화되어 회원들이 서둘러 모여들었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교회 사목결과 보고와 조선조정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어 안전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실현시키기 위해 북경교회와 연락을 계속했다. 이때 주신부의 편지를 북경교회에 전하는 밀사의 역할을 황심과 옥천희가 믿음직하게 수행했다. 이들 편지 중에는 포르투갈 왕에게 대선박 사절단의 파견을 요청하여 조선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이 국교를 체결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도 있다. 당시 상황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어보려는 주신부와 조선교회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이는 전혀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주문모 신부는 조심성과 재능, 열성과 덕행으로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사목활동을 전개했으나 교활한 자들의 끊임없는 밀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냉담교우 김여삼은 개인적인 물욕과 어이없는 증오심으로 신부를 포청에 고발했다. 밀고자는 이때 관직과 보수를 보장받고 신부의 은신처를 안내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김여삼이 여행중 병이 들어 관리와 만나지 못해 이 밀고음모는 다행히 실패했다. 밀고와 감시를 피해 위험을 겨우 면해가던 무렵 마침내 정순왕후 김대비의 박해령이 내려지자 천주교 신자들을 본격적으로 색출하여 체포구금하고 형벌을 가하였고, 수많은 신자들이 특히 주문모 신부의 은신처를 추궁 받으며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받고 희생되는 것을 보고 차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가 중국으로 돌아가고 없으면 교우들이 자기 때문에 추궁 받는 희생은 없을 것이고 어쩌면 박해도 중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밀고를 피해 경희궁에 이틀을 숨었던 주신부는 귀국 길에 올라 조심스레 혼자서 의주까지 갔다. 압록강만 건너면 꿈에도 그리던 그의 고국 땅이요 죽음도 피할 수 있는 고향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한순간 착한 목자로서 그는 하느님 은총의 은밀한 계시를 느꼈다. 목자는 양떼와 운명을 함께 한다. 양떼는 목자를 위해 죽음으로 안전을 지켰는데 목자가 어찌 강을 건너 목숨을 구하리요! 그는 한양으로 돌아와 "내가 당신들이 사방에서 헛되이 찾는 그 신부요!"하고 관아에서 신분을 밝히고 자헌하였다.


1801년 4월 19일(음) 조정은 격론 끝에 주문모 신부의 군문효수형을 집행했다. 그 순간 청명하던 하늘에 무서운 선풍이 일고 거듭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쳤다. 모두가 이를 보고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구나!"하며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2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23) - 강완숙 골룸바

주문모 신부 모신 '첫 여회장'


낙엽이 진 가지에 하얗게 서리가 피고, 하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체포령이 내려진 주문모 신부를 한집 식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뒷간 장작나무 광에 숨겨 놓고 간을 말리며 지낸 지가 벌써 여섯 달이 됐다. 그런데 이제 겨울이 접어들면 추위를 막을 수 없는 광속에 신부님을 더 이상 모실 수가 없다. 그러나 포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신부님을 모시는 일에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도대체 시어머니의 신앙적 결단과 의지가 어떤지를 알 수 없으니 사랑방에 모시자고 의논해 보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그녀는 마침내 시어머니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단단한 결심을 하고는 먹지도 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은 채 탄식하며 울기만 했다. 며느리가 이토록 근심하며 울기만 하는 까닭을 알지 못하는 시어머니는 애가 탔다. 의원의 진맥도 싫다고 거절하는 며느리는 "어머님, 저의 병은 제가 압니다. 제 병은 마음에 든 병입니다" 하며 막무가내로 울기만 했다. 며느리가 점차 탈진하여 기진 해 가자, 며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던 시어머니는 울면서 말했다. "네 마음에 든 그 깊은 병의 사연을 끝내 내게조차 말하지 않으니 내 비록 억지로 말하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너 하나 믿고 사는 내가 이대로 혼자 죽게 할 수는 없다. 이럴 양이면 차라리 나도 너와 함께 죽겠다" 하고 시어머니도 식음을 전폐했다. 시어머니의 단단한 결심을 보고 못내 기뻐하며 그녀는 비로소 용기를 얻어 의논했다. "신부님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해 여기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신부님은 지금 피신하실 곳도 없으십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제가 목석이 아닌 바에야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덕행을 보고 위로를 받습니다. 신부님을 우리가 모실 수 있도록 어머님은 신부님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께서 이 일에 동의하신다는 약속을 해주신다면 저는 곧 마음의 평화를 얻겠습니다. 그리고 전에 가졌던 기쁨을 되찾아 어머님께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겠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태산처럼 믿고 비장한 다짐으로 며느리의 뜻대로 신부님을 사랑방에 모시게 했다. 이렇게 신중한 확인을 하며 우리나라에 오신 최초의 목자 주문모 신부를 포도청의 그 서릿발같은 탐색의 눈을 피해가며 6년간 사목할 수 있게 한 용감하고도 치밀한 여장부가 바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0~1801)이다.


순교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회장인 강완숙은 본래 충청도 내포지방의 향반(鄕班) 출신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몹시 영리하고 성격이 활달한데다 뛰어난 통찰력과 곧고 단단하며 용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착하고 너그러워 어머니의 까다로운 성격을 잘 참아냈다. 고결했던 그녀의 마음은 보다 높은 종교적인 것을 갈구하고 일찍이 불교에 뜻을 두고 출가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충청도 덕산에 살던 홍지영에게 후처로 시집갔으나 남편의 성품이 용렬하여 더욱 깊은 시름 속에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 그 무렵 천주교가 충청도까지 전해져 친척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듣고 "천주라면 하늘과 땅의 주인일 것이다. 이 종교의 이름이 바르니 그 교리는 진리일 것이다"하고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얻어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그 깊고 위대한 진리에 감명을 받아 크게 기뻐하며 천주교에 열중하여 신자생활의 첫걸음부터 영웅적인 덕행을 갈망하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감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주며 돌보다가 그녀 또한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옹졸한 남편은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겁이 나서 별거를 요구했다. 강완숙은 이로 인해 남편과 헤어져 서울에 살게되면서 여러 교우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더욱 전교에 힘쓰며 특히 사제영입운동에 투신하여 지황(池璜 샤바)을 도와 주신부의 영입에도 기여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탁월한 열의를 보자 즉시 세례를 주고 최초의 여회장(女會長)으로 삼아 교회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녀의 탁월한 덕성은 여회장 직을 총명하게 수행할 뿐만 아니라 남편과 헤어질 때 아들을 버리고 며느리를 따라와 함께 사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을 영세입교시키고 많은 처녀와 부녀자들을 감화시켜 입교하게 하였다. 그리고 당시 국왕인 정조의 사제가 되는 은언군 이인(李咽)이 그의 아들 상계군의 반역죄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자, 그의 거처인 경희궁에 쓸쓸히 남아있던 부인 송씨와 며느리인 과부 신씨를 찾아 그들의 불행을 동정하여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받아 끝까지 신앙을 지키게 하였다.


1801년 순조 원년에 전국적인 박해가 시작되자, 그 해 2월 24일 가족과 함께 강완숙도 체포되었다. 그녀는 체포당하면서도 주문모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그러나 주신부는 수많은 교우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고통 속에 죽어감을 가슴 아프게 여겨 스스로 자수하고 순교하였다. 강완숙은 주신부의 순교소식을 옥중에서 듣고, 치마폭을 찢어 주신부의 업적을 적어서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그 자료는 전해지지 못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9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교수)>


한국의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준 강완숙


낙엽이 지고 앙상한 가지에는 아침마다 하얗게 서리가 피고 하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강완숙은 초조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한영익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진 주문모 신부를 한집 식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뒷간 장작나무 광에 숨겨놓고 애간장을 태우며 지낸 지가 벌써 석달이 넘었다.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는 날씨 때문에 허술한 광속에서 더 이상 신부님을 모실 수가 없었다. 눈에 불을 켠 포졸들이 찾고 있는 신부님을 모시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시어머니의 속뜻을 아직은 알 길이 없는 터라 어떻게 신부님을 사랑방에 모시자고 의논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칫 신부님의 거처가 탄로 나는 날에는 무슨 변고를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처지였다.


그녀는 이러한 안타까운 심정에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병들어 눕게 되었다. 시어머니의 뜻을 알아야 심부님을 모시는 일을 의논할 수가 있는데 도대체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잠도 자지 않고 먹지 않은 채 탄식하며 그저 울기만 했다. 며느리가 이토록 근심하여 울기만 하니 시어머니는 속수무책으로 애만 태웠다. 며느리가 점차 기운을 잃고 탈진하여 기진해지자 자뭇 심각해졌다. 며느리를 잃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어머니는 마침내 며느리에게 눈물로 말했다 "내 마음에 든 그 깊은 병의 사연을 끝내 나에게는 말조차 하지 않으니 내 비록 억지로 말하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너 하나 믿고 사는 내가 이래도 너를 혼자 죽게 할 수는 없으니 이럴 양이면 차라리 나도 너와 함께 죽겠다." 시어머니도 식음을 전패했다.


시어머니가 죽음으로써 삶을 함께 하겠다는 이 단단한 결단을 보고 그녀는 못내 감격하며 또한 기뻐하였다. 비로소 용기를 얻은 그녀는 시어머니께 의논했다.


"신부님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갖기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신부님은 지금 피신하실 곳도 없으신 형편입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제가 목석이 아닌 바에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 어머님, 저는 지금 어머님의 덕행을 보고 위로를 받습니다. 신부님을 우리가 모실 수 있도록 신부님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께서 이 일에 동의하신다는 약속을 해주신다면 저는 곧 마음의 평화를 얻겠습니다. 그리고 전에 가졌던 기쁨을 되찾아 어머님께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겠습니다."


시어머니는 이미 며칠을 굶은 채 며느리의 결의에 찬 말을 들으며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하며 또 소중한 일인가를 깨닭았다. 말없이 한동안 반짝이는 눈빛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시어머니는 생각했다. 못난 아들의 두 번째 아내로 들여온 며느리, 전처의 어린 아들과 딸을 그토록 지성으로 길러낸 며느리, 지극한 효성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한 며느리, 마침내 옹졸한 아들이 제 복을 차버리듯 이 며느리와 별거할 때 미어지는 가슴으로 아들을 버리고 며느리를 따라서 서울로 이사오기까지 믿고 의지하던 며느리, 시어머니는 조용히 며느리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태산처럼 믿고 비장한 다짐으로 며느리의 뜻을 따르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렇게 신중한 확인을 하며 우리 나라에 오신 최초의 목자 주문모 신부를 포도청의 그 서릿발같은 탐색의 눈을 피하여 여섯해 동안이나 사목할 수 있도록 한 용감하고도 치밀한 이 여장부가 바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0-1801년)이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帛書)에서 순교자요, 한국 최초의 여회장으로서 특히 여섯해 동안 사제를 숨겨 모신 강완숙의 지극한 치밀함과 놀라운 대담성을 칭찬하여 "당시 조선교회의 남녀를 통틀어 그녀를 따를 공로자는 다시없다."고 하였다.


강완숙, 그녀는 분명 선구자의 고독과 선각자적인 연민을 더없이 곱고도 치열하게 불태운 한국의 새 여인상으로 민족의 구원사에 부각되어 있다. 그녀는 문화사적으로 그리고 한국의 여성사적 측면에서도 사임당 신씨와 견줄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으로 한국의 새 여인상을 귀중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향잡지, 1997년 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24) - 강완숙과 아들 홍필주


강완숙 골롬바를 체포한 관리들은 주문모 신부의 숨은 곳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무서운 주리를 틀었다. 그러나 그 혹형 중에서도 강완숙은 입을 열지 않았고, 마치 감각이 없는 사람같이 자세를 흩뜨리지 않아 형리들이 자기들끼리 "저건 여자가 아니고 귀신이다"하며 감탄했다.


강완숙은 형벌이 잔혹할수록 더욱 굳건한 모습으로 옥중관리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하느님의 진리가 옳음을 동양고전과 공자와 성현의 글에서 인용하여 증거하였다. 강완숙의 정연한 논증과 해박한 지식에 관리들은 더욱 감탄하여 "유식한 여인네, 비길 데 없는 여인"이라 부르며 비상한 놀라움에 망연자실할 지경이었다. 관리들은 이 때문에 더욱 그녀를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해 가장 심하고 잔인한 형벌을 생각해내어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러나 그들의 형벌이 혹독한 만큼 그보다 더 높은 강완숙의 초자연적인 인내가 확인될 뿐이었다.


강완숙과 함께 옥고를 치르던 동료 여교우들은 이제 그 몹쓸 감옥을 기도소가 되게 했다. 그들은 참혹한 옥고를 치르며 함께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여 감옥이 영신수련소가 되게 하였다. 이 아름다운 옥중 신앙공동체의 눈물겨운 모범을 주님께서는 또한 깊은 은총으로 지켜주시는 듯 했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치 제헌의 때를 기다리는 듯이 그들은 더욱 기뻐하였고, 특히 그들이 죽기 전날에는 신령한 영적 희열에 취한 것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도 열렬히 바라던 날 1801년 5월 22일에 강완숙과 동료 여교우 4명은 수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군중은 그들의 얼굴에 거룩한 기쁨이 빛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형장에 이르러 강완숙은 형을 집행하는 관리에게 말했다.


"법에 사형을 받는 사람들의 옷을 벗기라고 명해졌으나 여자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을 것이니 옷을 입은 체로 죽기를 청한다고 상관에게 알리시오"


허락이 내려졌고 그 순결한 여인들은 만족하게 여기며 십자성호를 긋고 머리를 형리에게 내밀었다.


강완숙 골롬바가 사제를 도와 펼친 사도직 활동의 당대함과 활달함 그리고 무섭도록 놀라운 치밀성과 용감함은 한국 여성만이 갖는 특성과 위대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특히 그녀의 가정생활과 동료 여인들을 이끈 심원한 인간미와 신앙심 그리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보여준 덕성 가운데 특히 그 지혜와 인내는 영원한 한국의 여인상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녀가 옥중에서 보여준 모성애로 전실의 아들 홍필주(필립보, 1774~1801)를 격려하여 순교의 길로 나아가게 한 대목을 잠시 살펴보자. 홍필주는 충청도 덕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강완숙 골롬바가 후처로 결혼한 홍지영의 전실 소생인 아들이다. 그는 본래 성품이 착해서 계모인 강완숙을 따라 입교하여 신자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신앙생활에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모시며 따랐는데, 강완숙이 한양으로 올라왔을 때에 함께 와서 주문모 신부를 은밀히 모시면서 주위의 교우들이 감탄할 정도로 열성적인 신자로 바뀌었다. 홍필주는 매일 미사에 복사하면서 어머니 강완숙과 함께 주문모 신부의 손발이 되어 열성적으로 헌신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당할 때 그도 어머니와 함께 연행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는 심문 중에 특히 주문모 신부의 행방에 대해 혹독한 추궁과 고문을 받았다. 그도 어머니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어려운 옥중생활의 고통을 잘 견디어냈으나 시간이 흐르고 고통은 끝이 없어 점차로 마음이 흔들려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강완숙은 이때 아들의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몹시 염려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옥에서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먼발치로 아들을 보게 되자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님께서 네 머리 위에서 너를 보고 계신다. 네가 그와 같이 눈이 어두워 스스로 멸망할 수 있느냐. 내 아들아! 용기를 내고 천당 복을 생각하여라!" 어머니의 격려를 받은 홍필주 필립보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용감하게 신앙의 증거자가 되었다.


홍필주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용열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새어머니 강완숙을 모실 수 있었기에 순교자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그는 1801년 8월 27일(음력) 서소문 밖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승리하니 그때 나이 28세였다.


아들을 격려하여 그 뒤를 따르게 하고 먼저 순교로 자신을 제헌한 서소문 밖 순교자 강완숙이 하늘나라로 개선해 갈 때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 등 남자교우와 함께 강완숙의 영원한 신앙동지인 문영인, 한신애, 강경복, 김연이 등 여자교우들 또한 함께 순교하였다. 이들 여교우들이 만약 그대로 강완숙의 집에서 신앙공동체를 지속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들의 순교를 보기로 하자.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26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25) - 문영인 비비안나


문영인 비비안나(1775~1801)는 강완숙과 함께 순교한 동정녀들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중인계급의 양가출신으로 아버지와 숙부가 미관말직에 있었는데, 다섯 딸 중에 셋째 딸이었다. 그녀가 일곱 살 때 궁녀를 모집해 가는 관리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두 언니를 숨겨두고 영인은 어리니 염려하지 않았는데 관리들은 어린 영인을 데려갔다. 그래서 그녀는 궁궐에서 자랐다.


총명하고 뛰어난 용모로 보는 이를 감탄하게 했던 영인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궁녀로 머리를 올리고 글씨를 잘 썼기에 문서 쓰는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외교인이었으나 어머니가 열심한 신자로 자기 딸이 궁중에 있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근심했다. 가끔 영인이 집에 다니러 나올 때마다 어머니와 언니들이 간곡히 신앙생활 하기를 권고하면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어머니와 언니들이나 잘 신봉하셔요. 나는 궁중에 갇혀 있는 몸이라 여러 가지 미신행사에 참석해야 되니 지금은 너무 어려워요. 내가 늙어서 궁에서 나올 수가 있게되면 그 때에 신봉하겠어요" 했다.


영인은 어느 날 궁녀들과 어울려 저녁 다과를 먹고 즐기다 헤어져 물러갈 때 별안간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정신이 혼란하여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병은 점점 더 깊어져 그녀는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뛰어난 미모와 재능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지만 궁녀의 신분으로 신앙생활이 불가능했던 그녀는 이 까닭 모를 병으로 궁을 나온 것이 계기가 되어 교리를 배우고 기도하며 세례명을 비비안나로 하여 입교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성사를 받은 다음 날 그녀는 병이 완전히 나았다. 이 급작스런 완쾌가 비상한 은혜였는데 그것이 명백한 기적임을 알 수 있는 일이 계속되었다. 궁에서는 왕의 총애를 받는 영인을 위해 의원과 간병할 궁녀들을 보내왔다. 그런데 세례성사를 받고 완쾌한 그녀는 궁에서 의원과 궁녀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한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는 현상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무수한 약을 먹고 침을 맞게 되었는데 궁중의 의원이 그녀의 집을 떠나면 거뜬히 낫고 궁중에서 누가 오면 병이 나는 이 기이한 현상은 계속되었다.


문영인은 궁에서 온 의원과 궁녀들이 나가자마자 아무런 고통 없이 다시 일어날 때마다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아주 건강한 몸을 위해 약을 많이도 허비하고, 침도 쓸데없이 많이 놓는구나!" 그녀는 더욱 읽고 기도하는 데에만 전념하여 죄의 그림자도 정성껏 피하여 그 열심한 신앙생활의 명성이 교우들 사이에 알려지기도 했다. 그녀는 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그들을 본받으려 노력하며 그들을 따라 순교하려는 열의를 드러냈다. 의원들은 3년 동안 그들이 가진 모든 의술로 치료했지만 그 이상한 병을 고칠 방법이 없음을 알고 치료를 포기하였고, 그녀의 이름을 궁녀의 명부에서 삭제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녀는 물론 아무런 병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녀는 김섬아 수산나와 함께 강완숙을 도와서 주문모 신부의 시중을 들고, 교우간의 연락을 취하고, 피신하는 교우들을 은밀히 숨겨주기도 하며, 전교에 힘을 써 입교자를 내는 등 모든 일들을 모범적인 헌신과 효성으로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고 신부는 딴 곳으로 피신하자 문영인은 어머니께로 돌아와 순교의 시기를 기다렸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원치 않으시는가!"하며 조용히 기다리던 그녀는 포졸들의 가택 수색으로 그녀의 은밀한 신앙생활의 단서가 발각되었다. 포졸이 "너도 천주교인이냐?"하고 묻자, "그렇습니다, 확실한 천주교신자 입니다"라고 서슴지 않고 대답한 문영인은 포졸들에게 다과를 대접하고 어머니께 하직인사를 드린 후 포도청으로 끌려갔는데 그 때 나이 26세였다.


관리들은 그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궁에서 그렇게 잘 교육받은 너같이 젊은 여인이 어떻게 국법이 금하는 사교를 따를 수가 있느냐. 도대체 국법의 준엄한 형벌을 받아 죽고 싶단 말이냐!"하고 다그치자, "저는 제가 공경하는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유혹의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관리들은 연약한 여인에게 그토록 강인한 저항력이 있음에 화가 나서 "궁녀였던 여인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하며 다른 이들과는 달리 더욱 혹독하게 고문하였다.


구전에 따르면 그녀의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솟구쳐 꽃으로 변해 떠올랐다고 한다. 관리들은 이러한 현상에 놀라워하며 목격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절대로 발설하지 못하게 단속했다고 한다. 문영인이 형장에 끌려갈 때 포졸들은 구경꾼들을 물리치려 했는데 그녀는 "마음대로 보게 놔 두셔요. 짐승 죽이는 것은 얼마든지 보러 가는데, 사람 죽이는 것을 왜 못 보겠어요"하고 만류했다. 마침내 참수형이 집행되고 그녀의 목을 칠 때 그 상처에서 젖과 같은 흰 피가 흘러나와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주님께서는 이 동정순교자인 여인에게 로마의 동정순교자 성녀 마르티나를 위해 보여주셨던 기적을 다시 내려 주셨다.


<가톨릭신문, 2001년 9월 2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젖같이 하얀 피를 흘린 동정 순교자 문영인 비비안나


주문모 신부를 도와 우리 나라 초대교회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를 두고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당시 조선교회에서 남녀를 통틀어 그보다 더 큰 공로자는 없다고 했다. 1801년 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여회장 강완숙이 순교할 때 일곱 명의 다른 동료 순교자들이 함께 참수되었는데 이 가운데 넷은 여교우였다. 이들은 강완숙과 함께 옥중에서 열심히 기도하여 감옥을 기도소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죽음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영적 기쁨에 찬 모습을 보였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 수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그들은 기도하고 서로 격려히며 주님을 찬양하였다. 군중은 여교우들의 얼굴이 거룩한 기쁨으로 빛나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며 감동했다. 형장에 이르자 그들이 사형을 주재하던 관리에게 말하였다.


"법에는 사형을 받는 자들의 옷을 벗기라 하였으나 여자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우리는 옷을 입은 채로 죽기를 청한다고 상관에서 전하시오."


이 청이 받아들여지자 그들은 만족하여 성호를 긋고 머리를 형리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순교자들의 헌신이 이루어졌다. 이때 순교한 다섯 명의 여교우들은 강완숙(姜完淑), 강경복(姜景福), 문영인(文榮仁), 김연이(金連伊), 한신애(韓新愛)였다.


조선시대에 여자가 형벌을 받을 때는 본디 이름은 없앴으며, 기록에도 성을 밝히지 않고 순전히 재판을 위해 그들에게 지어준 이름으로만 불렀기에 여자 순교자들의 이름은 대부분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강완숙과 그 동료 순교자들의 성은 실록(순조, 원년, 정범조 "해좌집")에 밝혀져 있고, 문영인의 성이 문씨라는 것도 다른 문헌("징의")에 기록되어 있다.


이 다섯 여교우들의 판결문은 거의 비슷하다. 주문모 신부한테 교리를 배워서 세례를 받고 입교하여 교회일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으며, 추적 받는 교우들을 여러 번 피신시켰고 상본과 책을 비롯한 성물들을 집에 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문영인(비비안나, 1776?-1801년)은 중인계층의 양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숙부와 미관말직에 있었는데 다섯 딸 가운데 셋째 딸인 영인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궁녀를 모집해 가는 관리가 그의 집을 찾아왔다. 아버지는 두 언니를 숨겨두고 영인은 나이가 어리니 염려하지 않고 두었는데 관리들은 그만 어린 영인을 데리고 가버렸다. 이리하여 영인은 궁궐에서 자라게 되었다. 총명하고 뛰어난 용모로 보는 이를 감탄하게 했던 영인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궁녀로 머리를 올리고, 문서를 쓰는 일을 맡았다.


그때 영인의 아버지는 교인이 아니었으나 열심한 신자였던 어머니는 자기 딸이 궁궐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음을 몹시 근심했다. 영인이 집에 다니러 가끔 나올 때마다 어머니와 언니들은 그에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간곡히 권고했다. 그러면 영인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어머니와 언니들이나 잘 믿으세요. 저는 궁에 갇혀있는 몸이라 여러 미신행사에 참석해야 지되니 지금은 너무 어려워요. 제가 늙어 궁에서 나올 수 있게 되면 그 때 믿겠어요" 했다.


어느 날 영인은 궁녀들과 어울려 저녁 다과를 먹고 돌아오다가 별안간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치료를 받았으나 병은 점점 깊어져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어머니는 딸의 상태가 위험한 것을 보고 어느 때보다 강하게 입교를 권했다. 궁녀의 신분으로 신앙생활이 불가능했던 그는 까닭 모를 병으로 궁을 나온 것이 계기가 되어 교리를 배우고 기도하는 가운데 비비안나로 세례를 받아 입교하였다. 그의 병은 놀랍게도 세례성사를 받은 다음날 완전히 나았다. 이 놀라운 체험을 한 영인은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교리를 배웠다.


이 급작스런 완쾌가 예사롭지 않은 은혜였는데 그것이 명백한 기적임을 알리는 일이 계속되었다. 궁에서는 임금의 총애를 받던 영인을 위해 의원과 간병할 궁녀들을 보냈다. 그런데 세례성사를 받고 완쾌한 영인은 궁에서 의원과 궁녀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한 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었다. 궁중의원들이 들고 온 약을 먹고 침도 많이 맞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의원이 돌아가면 거뜬히 낫고 궁중에서 누가 오면 병이 생기는 기이한 현상이 계속되는 자신의 상태를 보며 영인은 하느님께 감사하였고 소리내어 웃으며 말하였다. "건강한 몸을 위해 많은 약을 허비하고, 침도 쓸데없이 많이 맞는구나."


읽고 기도하는 데에만 전심하여 죄의 그림자도 피하는 열심한 그의 신앙생활은 곧 교우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그들을 본받으려 노력하며 순교하려는 열의를 드러냈다.


의원들은 3년동안 그들이 가진 모든 의술을 다해 영인을 치료했으나 이상한 병을 고치지 못하여 치료를 포기하였고, 마침내 그의 이름은 궁녀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아무런 병도 나지 않았으며, 다만 깊이 감사하며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는 김섬아 수산나와 함께 강완숙을 도와서 주문모 신부의 시중을 들고, 교우끼리 연락을 취하며 피신하는 교우들을 은밀히 숨겨주면서 전교에도 힘써 입교자들을 내는 등 모범적인 헌신과 효성으로 모든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주문모 신부를 딴 곳으로 피신시킨 뒤 문영인은 어머니에게 돌아와 순교할 날을 기다렸다. '천주께서는 나를 원치 않으시는가?' 하고 생각하며 지내던 어느 날 포졸들이 그의 집을 수색하러 들이닥쳤다. 영인이 신앙생활을 한 흔적을 찾아낸 포졸들이 "너도 천주교인이냐?" 하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확실한 천주교 신자입니다." 영인은 포졸들에게 다과를 대접하고 어머니께 하직인사를 드린 다음 포동청으로 끌려갔다. 그 때 그의 나이가 26세로 전해진다.


관리들이 비비안나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궁에서 그렇게 잘 교육받은 너같이 젊은 여인이 어찌 국법으로 금하는 사교를 따를 수가 있느냐, 도대체 국법의 준엄한 형벌을 받아 죽고 싶단 말이냐!"하고 다그치자 영인은 대답했다. "저는 제가 공경하는 천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어떠한 유혹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관리들은 연약한 여인에게 그토록 강인한 저항력이 있음에 화가 나서 "궁녀였던 여인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며 다른 이들과 달리 더욱 혹독하게 고문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의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꽃처럼 변해 솟구쳤다고 한다.


사형선고를 받은 영인이 형장에 끌려갈 적에 포졸들이 구경꾼들을 물리치려 하자 "마음대로 보게 놔두세요. 짐승 죽이는 것은 얼마든지 보게 하면서, 사람 죽이는 것을 왜 못 보게 하세요?" 하며 만류했다.


마침내 참수형이 집행되어 그의 목을 치자 젖과 같은 하얀 피가 흘러나와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종정 순교자인 이 여인에게 로마의 동정 순교자 성녀 마르티나에게 보여주셨던 기적을 다시 내려주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문영인 비비안나는 그토록 그리던 주님 품에 안겼다.


<경향잡지, 1997년 12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28) - 황일광 시몬


철저한 신분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삶은 그것 자체가 치욕인 것처럼 비참했다. 권문세도를 누리는 사대부들이야 아예 별도로 친다 하더라도, 일반 서민들도 상종해주지 않는 천민 중의 천민 층의 하나가 소 잡고 돼지 잡는 일로 생계를 꾸려 가는 소위 백정(白丁)들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천한 것들이었다. 일반서민 신분의 어린이들조차 나이가 얼마든지 관계없이 백정을 보고는 야자로 부르며 예대하지 않고 마구 놓아 말했다. 그들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으니 동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따로 저들끼리 모여 백정촌을 이루고 살아야 했다.


황일광(黃日光, 1756~1802)은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백정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비참했다. 온갖 멸시와 천대 속에서 동리밖에 백정촌에서 종들보다 더 낮은 천한 것들로 취급받으며, 사람도 아닌 것처럼 품위를 잃은 존재로 다루어지는 수모를 무수히 겪었다. 그것은 그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슬픈 유산이었다. 그리고 풀려날 수 없는 운명의 멍에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뛰어난 지능과 예민한 정신을 지녔으며, 매우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을 타고나 열렬한 마음으로 살았다. 그의 지능과 통찰력은 오히려 자신의 슬픈 유산과 운명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더 큰 고뇌에 차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뚤어지지 않고 열렬한 마음으로 솔직하고 명랑한 성격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천민도 사람임을 엄숙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천주교가 이 땅에 선교되면서 인간평등사상은 실현되었고, 이 당연한 평등이 지극히 불평등한 사회에서 용납되지 못해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천주교 전래의 가장 큰 사회적 영향의 하나가 바로 인간평등의 정신을 이 땅에 실제로 이루어 내며 체험하게 한 것이다.


1798년 황일광은 그 한 많은 생의 중반에 이르러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의 인도를 받아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그는 목마른 열정으로 천주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교우들은 그가 천민 중에 천민인 백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초대교회 평신도들의 열절한 형제애는 따뜻한 애정으로 그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평등하게 대우했다.


백정인 황일광은 난생 처음으로 그것도 지존한 양반들에게 예대를 받았다. 이럴 수가 있는가! 그는 감격했다. 비로소 사람의 대접을 받은 기쁨에 전율하며 주님을 찬미했다. 그는 "나는 두 개의 하늘이 있다. 하나는 이미 이 세상에 또 하나는 후세에 이렇게 해서 두 개다"라고 기뻐하며 말했다.


황일광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상도 벽촌으로 동생과 함께 옮겨 살며, 그의 천한 신분을 이용하여 박해 중에 있는 교우들과 쉽게 연락을 취했다.


1800년경 그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 정약종(丁若種)의 집에 하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신앙적 열성은 더욱 깊어져 모든 신앙인들을 감탄케 했다. 8개월 뒤 서울로 올라와 땔나무를 사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당했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포졸들에게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나리들은 나를 남원(南原)고을에서 살기 좋은 옥천(沃川)고을로 옮겨주니 이 큰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라고 했다. 그는 이 위기에서 천성의 명랑함을 발휘해 남원고을(나무하러 가다)에서 옥천고을(감옥으로)에 가게 되었음을 빗대어 말하여 내심으로는 순교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황일광 알렉시오는 옥중의 무서운 심문에도 불구하고 품위를 지키며 너무도 고상하게 그리고 거룩하게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여 심문하던 관리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철저한 신분계급의식에 물들어 있는 관리들에게 그의 고결한 증언은 오히려 역겹게 느껴졌다. 백정이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이 거룩한 증거자의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했다. 그러나 황일광은 "만 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님을 배반하지 않겠으니 저를 마음대로 해 주십시오"하면서 의연했다.


이 장한 순교자의 결안은 순조 원년 12월 26일에 내려졌고 그의 출생지인 홍주로 보내어 사형집행을 당하게 하였다. 부러진 다리로 들것에 실려 가면서 그 고통 중에도 그는 그의 타고난 명랑성을 보존하였다. 아내와 아들이 최후까지 그를 도우려 따라왔으나 정(情)으로 어떤 유혹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그들을 가까이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의 고향 홍주에서 1802년 2월 2일 김귀동과 함께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너무도 비천한 신분의 백정이었기에 그토록 그의 덕행은 대조를 이루며 모든 교우들 사이에 유명해졌다. 교우들은 그를 가장 훌륭한 증거자들 중에 하나로 기억하며 경의와 감탄하는 마음으로 그의 생애를 전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진리가 우리나라 초대교회에서 그렇게 장하고 아름답게 증거 되는 은혜로움을 우리는 황일광 알렉시오에게서 본다.


<가톨릭신문, 2001년 9월 23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29) - 김건순 요사팟


조선시대는 철저한 신분계급사회였다. 그런데 천주교는 이 신분과 계층을 넘어서 양반과 평민, 천민에 이르기까지 순교자가 나와 하느님 진리의 보편성을 이 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당시 천주교를 박해했던 당파인 노론(老論)의 가문에서도 증거자가 나와 참으로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만인 모두의 것임을 알게 해주고 있다.


김건순(金建淳, 1775~1801년) 요사팟은 노론대가의 자손인데, 종가집안의 양자가 되어감으로서 벼슬과 명예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노론 안동 김씨 집안인 그의 종가는 경기도 여주에 있었다. 종가에는 선조인 상헌(尙憲)이 나라에 큰공이 있었으므로 대대로 벼슬을 이어받아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집안이 되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영리하고 특이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아홉 살 때에 죽지 않는 길을 열어 준다는 노자의 선도(仙道)를 배울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글방 훈장에게 논어를 배웠는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할 것'이라는 대목에서 훈장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면 멀리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고, 마땅히 멀리해야 한다면 공경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인데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으니 훈장이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북경의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쓴 천주교 입문서가 있었는데, 김건순은 열두 살 때에 이 책을 즐겨 읽고 천당지옥과 그 존재의 필요성을 논하고 또한 그 책에서 다루어진 여러 가지 다른 문제를 토론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그가 대신의 작위에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커가면서 그는 학문을 광범하게 하였으니 경서, 역사, 불교와 노자의 도리, 의술, 음양서, 병서까지 두루 섭렵했다.


이르던 중 그의 재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가 열여덟 살 때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양부의 장례를 치름에 있어 상복(喪服)은 송(宋)나라 제도를 그대로 따라 써서 옛날 법을 많이 잃었었는데 이것을 바로 잡아 시행하였다. 이 때 권철신에게 문의하여 어떤 예식들이 경서에 근거를 두지 않았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속된 선비들이 풍습을 어기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맹렬히 힐책하였다. 김건순은 즉시 글을 지어 대답하였는데 그 인용한 근거가 매우 넓고도 흡족하고 문장이 유창하여 당대 제일가는 학자 이가환이 보고서 감탄하여, "나는 도저히 바라다보지도 못하겠다"고 했다. 이 일로 그의 재능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건순은 평소 집에 있을 때에는 성격이 원만했고 효성이 두터웠으며 성실하고 너그러워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집안이 부유하여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남을 위해 희사하는 데에 즐겨 썼으며, 자기 자신을 위한 것에는 아주 필요한 것밖에 쓰지 않아 매우 검소하였다. 그가 나들이로 서울에 갈 때면 그의 집 앞에 교군과 말몰이꾼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든지 한번이라도 김건순을 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우리가 그의 인품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이 때까지도 김건순은 천주교에 대해 극히 간접적으로 듣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이중배 등 몇몇 친구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 북경에 가서 서양학자들에게 유익한 지식을 많이 얻어다가 전파할 계획을 세웠었다고 한다. 이 때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인(南人)들이었으며 자신은 노론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를 부러워하고 진리를 사모함이 대단했지만 들어갈 길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한 시골 교우로 인해 미카엘 대천사의 신상을 얻어 보고, 천주교가 술법(術法)과 서로 통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강이천이란 사람과 함께 술법에 종사하게 되었다. 강이천은 소북(小北)의 선비로 심성이 단정치 못하여 이 나라가 절대로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장차 소란해지면 이 술법을 배워서 기회를 타 정권을 잡으려고 했는데, 김건순은 그런 줄도 모르고 그와 교제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를 올바르게 연구하려는 진실한 원의를 가졌던 김건순은 그 집안이 속해 있는 노론에는 고명한 신자가 없음을 알고, 마침내 남인 집안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하고 권철신 암브로시오에게 사람을 보내 종교문제에 대해 토론하기를 청했다. 권철신은 즉시 동의했다. 그러나 두 집안의 세습적 적대관계로 인해 공공연하게 만날 수가 없어서 김건순은 밤에 남몰래 권철신의 집을 찾아갔다.


처음 몇 차례 만남에서 그는 하느님의 존재와 삼위일체의 신비를 쉽게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강생의 신비에 대한 교리를 듣고는 완전히 낙담하고 실망하여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벼락을 맞던지 어떤 천벌을 받아 죽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여러 날 동안 권철신의 집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도 하늘이 천벌을 내리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권철신의 집으로 가서 연구를 시작했다. 성령의 은총이 그를 감쌌을까? 그는 자신의 이성을 신앙에 굴복시키며, 자기가 졌다고 고백하고는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가톨릭신문, 2001년 9월 30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30) - 김건순의 종형 김백순


지난호에서 보았듯이 천주교를 박해하는 세력인 노론 대가에 속한 김건순이 이렇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 그의 마음이 바르다는 말을 듣고 주문모 신부는 편지를 보내 복음의 참된 정신을 알렸다. 그리고 신기한 물건이나 마술적 힘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였다. 김건순은 감격하여 그 동안의 잘못 몰두했던 술법에 관한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구원의 바른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김건순이 주문모 신부께 세례성사를 받고 요사팟이란 세례명으로 입교할 때, 그의 친구들도 그를 따라 입교했다. 그들 중 이중배 마르티노와 원경도 요한은 뒷날 여주에서 영광스럽게 순교했다.


김건순 요사팟은 영세 입교한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굳건하고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의 겸손은 그의 공로와 그 크기가 같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교우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천주교 박해를 주도하던 그의 가문은 그를 크게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 해 동안 그는 매우 괴로운 가정의 박해를 받았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배교한다는 지극히 형식적인 말 한마디를 얻어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김건순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자기 본분을 충실히 지켜나갔다. 그는 정약용이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배교문에 서명하여 배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괴로워했지만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1801년 마침내 박해가 일어나고 김건순도 체포당했다. 권력 있는 그의 집안은 온갖 조치를 취했다. 심문이 시작되고 주문모 신부와도 대질심문을 받았다. 관변측 기록은 이 때, 김건순이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고 배교하는 언사로 시종일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기어이 사형을 집행 당했고, 그의 종가에서는 그의 양자입양마저 파기하여 없었던 것으로 했다. 그가 관변측 기록대로 배교했다면 그 권문세가에서 양자를 어찌 이렇게 내버려 둘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그에 대한 황사영 백서의 기록을 주목한다. 백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처형당할 때 시민들에게 '세상의 벼슬이나 명예는 모두가 헛되고 거짓된 것이오. 나 역시 약간의 명망이 있고 벼슬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헛되고 거짓된 것이기에 버리고 취하지 않았소. 오직 하느님의 성교만이 지극히 진실한 것이기에 이것을 위해 죽음도 사양치 않는 것이오. 당신들도 이 뜻을 자세히 알도록 하시오'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였는데 장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했습니다"


김백순(?~1801년)은 김건순의 종형이다. 그의 신분과 배경으로 보아 그도 김건순과 같이 분명 정치적으로 가해자의 편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한시 바삐 공직에 나가 명예를 얻고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생각밖에 없었다. 김백순은 순전히 입신양명을 위한 방편으로 글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출세를 위해 학업에 전념하던 그는 성현들의 책을 읽으면서 서로 모순되고 모호한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그 의심 속에서 참된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노자의 글과 그 밖의 글을 읽으면서 사람이 죽어도 아주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그 나름대로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설명해 보았다. 그랬는데 친구들은 그의 주장을 듣고서는 "자네 말은 매우 이상한데 자네는 아마도 서학에서 그 모든 것을 따온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친구들의 이 지적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서학에 그런 도리가 이미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서학에는 우리의 지능을 초월하는 원대하고도 비상한 그 무엇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곧 천주교인들을 찾아 만나고 교리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확신을 갖고 교리를 신뢰하며 온 정성을 다해 천주교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며 계명을 지켰다.


그는 먼저 어머니를 권면하여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친척들에게도 "이것이 참도리이고, 위대한 도리요. 사람은 누구나 이 도리를 따라야 하니 나와 같이 하시오"하고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다만 세속적 야망을 버리지 못한 그의 부인은 입신양명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남편을 원망하며 비난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외숙부가 찾아와서 온갖 방법으로 김백순을 변심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김백순의 의연한 모습에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백순은 "나는 숙부와 의절을 하더라도 나의 하느님과는 의절치 못하겠습니다"라고 조용히 답했다. 이 때부터 그는 친구들과 친척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을 안 뒤로는 내 마음이 결코 흔들림이 없어 마치 산과 같다"고만 하였다.


1801년 봄에 김백순은 한 배교자의 밀고로 붙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고, 3월 29일 서른 두 살의 약관으로 순교하였다. 그가 옥중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는 말은 없다. 그는 혈세(血洗)의 증거자이며 파당을 초월한 하느님 진리의 수호자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10월 14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의 순교자들(1) - 다시 그들을 기억하며


21세기가 시작되는 2001년, 금년은 신유박해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신유박해는 1801년(순조1년)에 일어난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로, 조선시대 천주교의 4대 박해 가운데 하나이다. 이 박해는 1801년 1월 10일(음력)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되어 12월 22일(음력)에 반포한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신유박해는 초기 한국교회나 당시 조선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박해의 의의와 영향을 간추려보면 첫째, 이전에 있었던 지역적, 부분적인 박해와는 달리 최초의 전국적이며 본격적인 박해로서 조선시대의 사목을 위해 어렵게 입국한 첫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초대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순교하거나 유배당하였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이후 두 번째 사제가 입국할 때까지 33년간 목자 없는 교회로 버려지고, 지도자마저 사라져 지리멸렬한 상태로 빈사상태에 이르는 타격을 받았다.


둘째, 천주교를 사악한 무리로 규정하는 반교문을 반포하여 천주교를 언제든지 박해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신자처벌의 선례를 남겨 신앙의 자유를 박탈됐다. 그리고 천주교를 또 반국가적 종교로 인식하여 배척하면서 천주교와 함께 서학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서양의 발달된 과학문명까지 배척하여 조선의 과학기술이 낙후되고, 근대화의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셋째, 이 박해를 계기로 세도정권 수립의 발판을 마련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은 정수왕후 김씨는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체제공 일파를 제거하고, 또 남인 공서파를 이용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과 노론의 시파를 물리치고 세도정권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넷째, 이 박해가 초대교회에 참혹한 타격을 주었지만 오히려 이후 교회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것은 살아남은 신자들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심산유곡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며 신앙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천주교가 오히려 전국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신유박해를 거치며 교회의 지도층이 양반 선비층에서 서민계층으로 그 중심으로 옮겨져 만중신앙으로 자리잡고 깊이 뿌리 내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이하여 이 뜻깊은 박해 전후기에 순교한 증거자들의 삶과 죽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을 살펴보려는 것은 단순히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위대한 증거자들의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해야할 또 다른 까닭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한국교회의 박해시기를 교회 창설 때인 1784년부터 교구가 설정되던 1831년까지를 초기박해기로, 교구설정 이후부터 신교의 자유가 묵인되던 1882년까지를 후기 박해기로 나누어보면 초기와 후기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박해기의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연구와 노력에 의해 교회가 창설되고 유지, 발전하던 평신도의 교회로 주님의 은총속에 성직자의 종교 교육 없이 평신도가 스스로 교리를 체득하며, 신앙을 토착화했던 교회로 성령이 직접 인도하신 교회라 한다면, 후기 박해기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교황청의 허가로 조선선교를 맡아 입국하여 성직자 중심의 교회로 되면서, 교회문화가 서구화되고, 선교사의 사목적 특성에 종속화 되어 역동하던 평신도의 토착화한 영성이 침잠해가는 교회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초기 박해기에 해당하는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은 서양선교사들의 사목적 정책이나 사상적 영향을 덜 받은 순수한 한국인의 영성을 지닌 순교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을 살펴보며 생각하려는 것은 그들을 통해 그들을 총해 초기 교회의 토착화한 신앙과 그 열절한 한국인의 영성을 살펴봄으로써 새천년을 맞고 있는 우리 시대에 절실히 요청되는 신앙생활에 대한 새로운 열정과,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새로운 방법과 한국인의 사고와 정서에도 거부감 없는 복음의 새로운 표현을 찾아보고자 함에 소중한 뜻을 둔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가슴에 살아 있는 그래서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함께하는 순교성인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는데 의의를 두려한다.


우리는 지금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노력으로 소중한 한국순교성인 위를 모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순교성인의 탄생에는 시복시성의 복잡하고 엄격한 교회법 절차에 치중한 나머지 그 성인들 가운데 몇몇 위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인들에 대해서는 사랑과 존경을 느끼지 못한 체 모셔지기만 하여 마치 관제성인을 모시는 것 같은 처지가 된 현실을 깊이 성찰해야 하겠다.


이제 바뀐 교회법에 따라 각 교구에서 추진되고 있는 시복시성운동에 즈음해, 먼저 그 대상자들에 대한 다양하고 적절한 소개로 우리 마음에 새겨 사랑할 수 있는 성인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 기획이 작은 도움이 되기를 간절한 빈다.


<가톨릭신문, 2239호,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2) - 참수 순교자 최필공


1800년 음력 6월 28일 정조(正祖)가 재위 24년만에 승하하였다. 천주교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펴던 그의 죽음은 천주교와 남인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純祖)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궁중의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攝政)이 되어 정사를 마음대로 처리하게 되었다.


대왕대비는 원래 노론 벽파에 속해, 정권을 잡자마자 반대파인 남인 시파와 천주교 신자들을 물리치려했다. 장례예식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그녀는 11월 하순에 시파 사람들을 몰아내고 벽파 사람으로 채웠다. 그러자 이어 천주교를 박해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해 12월 17일(음) 최필공이 다시 체포되는 것을 신호로 삼아 최필제와 오현달 등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당해, 불안하던 염려는 마침내 1801년 1월 10일(음) 대왕대비의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현실로 변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된 신유박해는 한국초대교회 거의 모든 지도자들을 순교나 귀양으로 상실하게 하였다. 이제 이 박해때의 순교자들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최필공(崔必恭, 토마스, 1745∼1801)은 서울의 중인계급으로 궁중 의관(醫官)집안출신이었다. 최필공이 벼슬을 얻지 못하자 몹시 가난하게 살았는데 그는 너무 가난하여 나이가 찼으나 혼인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솔직하고 너그러운 그의 성격이 천성적으로 착하고 진실되어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신뢰를 받았다.


1790년 그는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그는 입교하는 날부터 크나큰 열성으로 영혼 구원의 일만 생각하여 육신에 대해서는 필요한 것을 돌보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때가 많았다. 그의 열정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면서 두려움도 없이 천주교를 공공연히 전파하였다.


그는 때때로 한 길 가운데 군중속에 멈추어 서서 "천지의 큰 임금을 반드시 섬겨야 합니다. 만물의 위대한 주를 어찌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외쳤다. 그는 아마도 우리 나라 가두선교의 효시로 일컬어도 좋을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 무렵 그의 열성은 비록 그가 새로 입교한 신자이기는 해도 가장 열심한 신자 중의 하나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1791년 신해박해로 용감한 가두선교자 최필공은 형조에 끌려가 모진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천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언제나 천주께 대한 본분을 다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고 용감하게 대답한 뒤에 그에게 가해지는 어떤 형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이 신앙고백을 되풀이하여 마지않았는데 어떻게나 순진하고 솔직하며 확신에 찬 모습으로 말하였던지 보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의 순진 무구한 확신은 마침내 정조 임금께 알려지고 정조는 최필공의 목숨을 보존하여주고자 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그를 회유하여 몇 마디 굴복한 말만이라도 얻어내도록 하는데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형조에서는 갖은 유혹으로 그를 회유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조는 마지막으로 최필공의 옥에 낡은 숙부와 동생을 들여보내 눈물로 간청하여 이 용감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했다. 최필공은 사람으로서 만가지 회포와 감개에 복바쳐 가슴 메이는 슬픔을 느꼈다. 그 쓰라린 고통 가운데서 우리의 증거자는 참혹하게 울면서도 참 임금이시오, 참 아버지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단호히 그의 태도를 밝혔다.


형리들은 이제 오직 준엄한 사형판결 선고만 남았음을 알면서도, 정조의 의도와 그들 자신마저 저 용감한 최필공의 자세에 감복하여 최필공이 임금의 뜻에 순종한 것처럼 했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정조는 최필공의 목숨을 보존하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며 곧 그에게 의관의 집안에서 얻을 수 있을 좋은 자리를 주게 하고 집을 마련해 주며 장가도 들게 해주었다. 그러고도 정조는 거듭 최필공이 굴복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최필공이 이 세상에서 누린 세속적인 행복은 이 짧은 기간이 전부였다. 그는 비록 거짓이라도 배교의 대가로 얻은 세속적 복락에 대해 이내 무섭게 회개하였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이로 인해 그는 1799년 다시 형조에 불려가 신문을 받고 이번에는 정조 앞에서 천주교가 참된 진리임을 웅변하였다.


정조는 극형을 주장하는 형조의 요청을 무시하고 그를 석방시켜주었다. 최필공의 순진 무구한 신앙고백은 그렇게 정조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최필공이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는 1801년 2월 26일(음) 정약종, 이승훈등 다섯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으로 갔다. 망나니는 아직 경험이 적어 그의 목을 단번에 치지 못했다. 첫 번째 칼에 상처만 났다. 최필공은 조용히 손을 들어 자기 상처를 갖다댔다, 피가 흥건히 젖은 손을 떼어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외쳤다. "보배로운 피!" 과연 그 피는 보배로웠다. 그 피는 순교의 피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씨앗이 되는 피였다.


<가톨릭신문, 2240호,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최필공 토마스 - ’보배로운 피’의 증거자


서울의 중인 계급 출신 최필공(1745-1801년)의 집안은 궁중의 의관(醫官)이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뜻이 굳세며 의로웠고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 뛰어난 풍모를 지녔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대에 와서 벼슬을 얻지 못하여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너무 가난하여 나이가 찼으나 결혼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솔직하고 너그러운 성격 탓에 사람들에게 호감과 신뢰를 받았다.


1790년, 그는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곧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입교하는 날부터 열성으로 영혼 구원에만 마음을 쓰고, 육신을 돌보는 일에는 꼭 필요한 것조차 잊는 때가 많았다. 그의 신앙적 열정은 시간이 흘러도 식지 않고 오리혀 깊어져 두려움을 모르는 듯 천주교를 공공연히 전파하였다. 그는 한길 가운데 서서 "천지의 큰 임금님을 반드시 섬겨야 합니다. 만물의 위대한 주님을 어찌 섬기지 않겠습니까?" 하고 외치기도 하였다. 아마도 우리 나라 가두 선교의 효시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가장 열심한 신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길거리와 군중 속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던 최필공은 그의 입교 사실과 열렬한 신앙생활로 관헌의 눈을 피할 수 없게 되어,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형조에 끌려가게 되었다. 형조에서 모진 심문을 받으면서도 이 최초의 가두 선교자는 "사람은 누구나 천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언제나 천주께 대한 본분을 다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고 용감하게 자신의 신앙 결의를 밝혔다. 그리고 어떤 형벌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최필공은 거듭되는 심문과 형벌에도 한결같은 목소리로 끝없이 신앙고백을 되풀이하였는데, 얼마나 순진하고 솔직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말하던지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이런 그의 모습은 마침내 정조에게 알려지고 정조는 최필공의 목숨을 보존해 주려고 하였다. 정조는 그를 회유하여 몇 마디 굴복하는 말이라도 얻어내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형조에서는 갖은 유혹으로 그를 회유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늙은 부친과 형을 감옥으로 불러와 눈물과 간청으로 마음을 움직여보려 했다. 최필공은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격정과 슬픔으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참 임금이시고 참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나는 결코 배반할 수 없소!" 하고 단호하게 그의 태도를 밝혔다.


최필공을 회유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마저 실패하자 형리들은 오직 사형 판결만이 남았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형리들은 임금의 뜻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 자신도 그의 의연한 자세에 감동하면서 깊은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


형리들은 임금에게 최필공이 회유되었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그러자 정조는 그가 마음을 돌린 것을 크게 기뻐하면서 그에게 의관의 집안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벼슬을 내리게 하고, 집을 마련해 주었으며 결혼도 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최필공이 임금의 은혜로 이 세상에서 누린 세속의 행복은 이 짧은 기간이 전부였다. 그러나 곧바로 그는 비록 거짓일지라도 배교의 대가로 세속의 복락을 얻은 것을 회개하였다. 사실 최필공이 실제로 심문의 고통을 이기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가 형리들이 임금에게 아뢴 거짓말들에 대해 강력하게 항변하지 못한 심약한 마음을 가졌던 것인지, 어떻게 해서 그가 회유되었다는 보고가 임금에게 전해졌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필공이 자신의 죄(거짓으로 배교를 통해 얻은 세속의 행복)를 몹시 슬퍼하였고 신자로서 열성을 되찾아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신앙의 본분을 지켜나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1799년 다시 형조에 불려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정조가 친히 심문한 적이 있었는데, 뒷날 순교자 신태보가 편지에서 소개한 기록 가운데 한 대목을 보면 이렇다.


"국왕 : 나도 천주교 서적을 읽어보았다만 네 생각에는 그 도를 불도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으냐?


교우 :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불교와 비교해서는 안되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과 만물이 하느님의 은혜로 생겨났사옵고 보존되는 것도 또한 한가지이며, 다른 은혜 곧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위대하시며, 우주의 아버지이시며 주재자이신 그 천주의 강생구속만 이루어지는 것이옵니다. 아무 뜻도 없고 원리도 없는 도를 어떻게 감히 이 종교와 비교하겠습니까? 여기에는 참된 결과와 참된 지식이 있나이다.


국왕 : 그러나 네가 만물의 지극히 착하고 위대한 주재자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 내려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더구나 약한 자들에게서 모욕적인 죽음을 당함으로써 세상을 구할 수 있었단 말이냐? 그것은 믿기가 매우 어렵다.


교우 : 중국 역사를 읽어보면 탕 임금이 온 백성이 7년 가뭄으로 죽게 된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손톱을 깎고 머리를 자르고 초석을 두른 다음 빈 들로 나가 울며 고행하면서 기도를 바쳤는데, 그 기도가 끝나려면 충족한 비가 이천 리나 넘는 지역에 내렸다고 합니다. 그대부터 백성들은 임금을 성왕이라 불렀사옵니다. 그러하온데 구속의 은혜는 얼마나 더 크옵니까? 예전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미래 사람이나 모든 백성과 세상 만물이 이 구속에 젖어있사옵고 그것만으로 보존되나이다. 전하, 그러므로 전하께옵서 그것을 믿기 어렵다고 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나이다….


그런 다음 임금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그 교우를 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형조와 대신들이 그를 사형에 처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정조는 "진리는 스스로 지탱되는 것이니 매사가 마침내는 바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더 두고 보자" 하면서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정조가 1800년 재위 24년만에 죽자 최필공 토마스는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그리고 정조 이후 조정의 권력 변화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다. 1800년 음력 12월 17일에 체포된 최필공은 옥에서 만난 신앙의 동지들, 정약종, 이승훈 등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1801년 음력 2월 26일(양력 4월 8일)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렇게도 곧은 성격과 고귀한 진실성으로 정조 임금도 감동시킨 그는 형장에서도 바르고 의연했다. 망나니는 최필공의 당당한 모습에 질려 목을 치면서 단번에 끝내지 못해 첫 번째 내리친 칼에는 상처만 나고 말았다. 최필공은 조용히 손을 들어 자시 성처에 갖다 댔다가 피가 흥건히 젖은 손을 다시 떼어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서 외쳤다. "보배로운 피!" 과연 그 피는 순교의 피요, 그를 구원한 승리의 피였다. 또한 천국에 이르는 문을 여는 피요, 하느님을 증거하는 피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씨앗이 되는 보배로운 피였다.


<경향잡지, 1999년 7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3) - 홍낙민 루가


가두선교의 효시라 할 최필공이 1801년 2월 26일(음) 서소문 밖에서 "보배로운 피"를 외치며 순교할 때 정약종, 혹낙민, 최창현, 이승훈 등이 함께 참수당했다.


이제 이들 순교형장의 신앙동지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홍낙민(洪樂敏, 1740∼1801)루가는 충청도 예산 사람으로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서울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그가 서울에서 살게 되면서 이승훈, 정약용 등과 교분을 맺고 가까이 지내면서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여 세례명을 루가라 했다. 이 때가 바로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복음선포가 시작되던 무렵인 1784년 경이였는데 그는 초대 교회에서 교리에 밝은 교우로 알려졌다.


그러나 1791년 전산사건 당시 그는 정조(正祖)의 강압에 굴복하여 배교했다. 교리에 밝다던 그의 배교는 다른 교우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홍낙민은 첫 번째 배교를 곧 뉘우치고 묵주기도를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고 엄격히 대소재를 지켰다.


이 회개의 생활이 탄로가 나 그는 1795년 다시 체포되어 15일간 옥고를 치렀다. 이 때 그는 또 다시 나약함을 보였다. 이어 1797년에 정조께 천주교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는데 임금으로부터 보고 내용이 분명치 못해 태도가 모호하다는 책망을 듣고 거듭 나약함에 빠져 천주교를 모함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가혹하게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가 승하하고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천주교인에게 억울죄를 적용하여 체포토록 했을 때 홍낙민도 다시 체포되어 의금부에 수감되었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천주교를 배반하였으므로 의금부에서는 그를 살려주고 매질하여 꾸짖고 귀양보내기로 했다. 그는 관례에 따라 귀양보내기 전에 우선 다리에 매를 맞았다.


그런데 이 매를 맞는 동안 그는 기묘한 심정으로 그 사이 몇 차례 주를 배반했던 것에 대한 뉘우침과 이제는 더 이상 목숨을 구걸하여 비겁하게 주를 배반할 수 없다는 강한 신앙에의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심약해 배교를 거듭하기는 했어도 열심히 묵주기도하며 통회했던 그를 주님께서 고문당하는 순간에 자비로이 이끄셨던 것일까. 홍낙민 그는 이제 더는 나약한 자가 아니었다. 선혈이 낭자한 형장에서 머리를 들고 관리들에게 말했다.


"제가 지난날에 한 모든 것들은 목숨을 비겁하게 보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또 매질을 당하고 망신을 당하니 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부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용감하게 죽고자 합니다. 제가 섬기는 천주님은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만물의 주재자이십니다. 이마두(마태오 릿지)신부와 다른 선교사들은 우러러 볼만한 도리와 성덕을 가진 사람들이며 그들의 말은 모두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천주를 위하여 죽고, 그렇게 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고자 합니다."


재판을 주재하던 정승들은 홍낙민의 굳건한 신앙고백에 경악하고 또 격노했다. 모여있던 사람들도 모두 이 용맹한 증거앞에 놀라워하며 서로 웅성거렸다.


이 사살이 곧 대왕대비 김씨에게 급히 보고되었다. 대왕대비는 나약해 보였던 홍낙민의 놀라운 반증에 몹시 노여워하며, 그에게 더욱 혹독한 고문을 가하여 배교하게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가혹한 매질로 홍낙민 루가의 몸은 으스러졌다. 피투성이로 의식을 잃은 그를 옥으로 끌고 가 더러운 멍석바닥에 던져 놓았다. 한참이나 뒤에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상처마다 흐르는 피를 보았다. 그는 손으로 온 몸에 흐르는 피를 씻으며 "이제 나는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배반을 속죄하는 피로 보답하려는 그의 철저한 심정을 주님께서 자비로이 받아주시고 어여삐 축복해 주신 영적 평화와 행복을 그는 그렇게 체험하였으니라! 그를 사형에 처한다는 결안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홍낙민 루가는 ’죽음을 자기의 이전의 배교에 대한 별로 기꺼이 당하고자 한다.’고.


마침내 그가 그의 영원한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서소문 밖 죽음의 형장으로 가기 위하여 수례에 올랐을 때 그의 얼굴은 기쁨에 빛났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형장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천주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권고하기를 마지않았다. 순교의 동지 정약종이 형장에서 감동적인 마지막 강설(講說)을 할 때 그는 크게 찬동하며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시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하고 외쳤다. 그는 이렇게 51세로 참수 순교하여 생을 마쳤다.


이런 사실을 기록하여 남겨준 그 시대의 증언자들은 "배교하였다가 순교자가 되는 것은 보통 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다. 사람들이 단언하는 바에 의하면 홍낙민 루가는 매일 묵주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공무를 집행하는 중에도, 그의 집에 많이 찾아오는 손님과 친구들 가운데서도, 그는 묵주기도를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한다. 아마도 이(묵주기도를 통한 성모)신심의 실천이 글에게 그다지도 비상한 은총을 받게 해 주셨을 것이다"라고 전해주고 있다.


<가톨릭신문, 2241호,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4) - 최창현 요한


한국 사람으로서 복음성서를 맨 처음 읽은 사람은 문헌상으로 광암 이벽이다. 그러나 이 복음서를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사람은 호를 관천(冠泉)이라 부르던 최창현(崔昌顯, 요한 1759∼1801)총회장이다. 그는 한자로 된 복음서의 발췌본인 성경직해(聖經直解)와 성경광익(聖經廣益)에서 최초의 한글을 성서라 할 한글본 "성경직해"를 번역해냈다.


한글본 성경직해는 한문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을 한글로 번역한 것인데 위 두 권의 한문본 중에서 당시 한국의 교회 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택해서 한 권으로 편찬한 것이다. 그래서 한글본 성경직해를 한 때 "성경광익직해"라 부르기도 했다. 한글본 성경직해에는 86개에 달하는 연중 주일과 축일의 복음 구절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성서의 전체적인 번역은 아니다. 그러나 이 한글본에 실려있는 복음성서의 분량은 4복음서 전체의 구절 총 3709절 중에 30.68%에 해당하는 1138절이다. 초대 한국교회 신자들은 이 한글본 성서직해를 통해 우리말 성서를 읽을 수있었다. 그들은 최창현이 번역한 성경직해를 손으로 옮겨 적은 필사본으로 읽었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이름없는 한 여교우의 집에서 압수한 천주교 서적 중에서 이 책이 나오고 있었음이 "사학징의"의 기록에 있는 것으로 보면 일반신자에게까지 얼마나 널리 읽혀졌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창현은 성서의 첫 번역자지만 더욱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그는 한국초대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총회장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양 초전골의 중인출신이다. 그가 비록 중인 출신이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며 견문을 넓혔고, 조용한 성품에 매우 슬기로웠으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젊은이로 자라났다. 그는 광암의 권고로 복음선포가 이루어지던 해인 갑진년(1784년)겨울에 입교한 후 한결같은 신앙생활로 당대 가장 존경받는 덕망 높은 총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총회장 최창현은 을묘년에 순교한 최마디아(최인길 최장)의 족질인데 그의 집안에는 진실한 교훈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여 평화롭게 몸을 삼가고 공명하게 힘쓰기를 20년 동안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그는 보기에도 순수하고 말이 간단하면서도 옳았으며, 누가 혹 의혹이 생기거나 환난을 당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는 그의 얼굴만 한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 일도 아니요 어려운 일도 아님을 스스로 되었습니다. 또한 몇 마디의 말만 들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활짝 열렸으며, 도리에 대한 강론은 자세하고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으므로 비록 예사로 말하고 듣기 좋게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즐겨 듣고 싫증이 나지 않아 사람의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듣는 사람들에게 신령스러운 이익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의 천명에 순종하고 겸손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왔으며 남보다 뛰어나게 다른 점도 없었고 또한 험잡을 행동도 없었습니다.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 제일 높았으므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관아에서도 최창현이 뛰어난 지도자로 교인의 영수임을 알고 체포하고자 했다. 그는 박해가 크게 벌어질 것을 예감하고 교우의 집에 피해 있었는데 신유년(1801년) 정월 초 닷샛날 몸이 불편하여 집으로 돌아와 조리하였다. 그런데 밀고자 김여삼이 이를 염탐하고 포도부장을 인도하여 아흐렛날 체포 당하게 되었다.


최창현은 그의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형벌을 받았는데 모진 매를 맞을 때는 기절하여 땅에 엎드려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매질이 끝나고 관리가 죄목을 헤아리자 벌떡 일어나 십계명을 강론하여 밝혔다. 관리가 제4계에 부모를 효도로 공경한다는 대목에서 "내가 부모를 공경한다면 어찌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고 따지자 그는 "잘 생각해보십시오. 밤에 잘 때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맛 볼 수가 없지 아니하오.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소?" 하고 되물으며 천주교는 부모를 결코 그렇게 허례허식으로 공경하지 아니 한다고 했다. 포도청 심문과 금부에서 자신의 신앙을 용감히 증언한 그는 총회장답게 형리들 앞에서 십계명을 강론하고 호교문을 적어서 관리들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의 순교의 피로 그 강론과 호교론이 주님의 진리임을 증거하였다.


덕망이 높아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양반출신들도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총회장 최창현은 교회창립 당시 신자로 사제가 없던 때 평신도에 의해 형성되었던 임시교단의 일원으로 임시성사집행에도 선임되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활동이 잘못임을 알고 즉시 중단하면서 자세 영입운동에 협력하고 주문모 신부 입국후에는 신부의 사목활동을 총회장으로서 충직하게 도왔다.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 가장 높던 그가 최필공, 적양종, 홍낙민과 함께 1801년 4월 8일(양) 순교의 빛나는 영광을 얻었을 때 그의 나이 43세의 장년이었다.


<가톨릭신문, 2242호,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최창현 요한 - 성서의 첫 번역자


우리 나라 복음 선구자 광암 이벽 선생이 처음으로 찾아간 이들은 주인P급 친구들 가운데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활기차고 박력있는 말을 듣고 곧 응하였는데 그 가운데 최인길, 김종교와 함께 최창현(1759-1801년)이 들어있었다.


최창현은 한양 초전골의 중인 출신이다. 그는 비록 중인 출신이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며 견문을 넓혔고, 조용한 성품에다 매우 슬기로웠으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젊은이로 자라났다. 그는 복음선교가 이루어지던 해인 1784년 겨울에 광암의 권고로 입교한 뒤 한결같은 신앙생활로 당대 가장 존경받는 총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초대교회 최고의 평신도 가운데 한 사람인 정약종을 한없이 칭찬하여 소개하면서도 "그의 덕망은 관천(최창헌의 호)에 미치지는 못했지만…."이라 했다. 과연 최창현의 덕망은 모든 이가 우러러볼 만했다. 황사영은 백서 32행과 33행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총회장 최창헌 요한은 중인입니다. 을묘년에 순교한 최 마티아(최인길)의 족질인데 그의 집안에는 진실한 교훈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선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여 평화롭게 몸을 삼가고 공명하게 힘쓰기를 20년 동안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그는 보기에도 순수하고 말이 간단하면서도 옳았으며, 누가 혹 의혹이 생기거나 환난을 당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서는 그의 얼굴만 한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일도 아니요, 어려운 일도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고, 몇 마디 말만 들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활짝 열렸습니다.


강론이 자세하고도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어, 비록 예사로 말하고 듣기 좋게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즐겨 듣고 싫증이 나지 않아 사람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므로 듣는 사람에게 신비스러운 이익이 아주 많았습니다. 천명에 순종하고 남에게 겸손함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왔으며 남보다 뛰어나게 다른 점도 없었고, 또한 책망받는 행동도 없었습니다. 교우들 가운데 덕망이 제일 높아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이 입정동(笠井洞)에 있었으므로 호를 관천(冠泉)이라고 하였습니다. 조화진(배교한 밀고자)이 충청도를 염탐하여 최 요한이 교인의 영수임을 알았으나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이즈음 최 요한은 백해가 크게 벌어질 것을 알고 교우의 집에 피해있다가 신유년(1801년) 정월 초닷샛날 몸이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몸조리를 하는데, 초아흐렛날 밤중에 김여삼(밀고자)이 포도부장을 이끌고 와서 체포하여 포청에 가두었습니다.


십여 일 뒤에 치도곤 열 세대를 맞았는데, 매를 받을 때는 기절하여 땅에 엎드려 마치 묵은 사라 같더니, 매질이 끝나고 관리가 죄목을 세자 벌떡 일어나서 성교의 십계명을 강론하였습니다. 관리가 "네가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를 지내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밤에 잘 때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하오?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소?" 하고 되물으니 관리는 대답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뒤 정 아우구스티노(정약종)와 같은 날에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43세였습니다."


백서에 적혀있듯이 총회장이며 교우들 가운데 덕망이 가장 높아 존경받던 최창현 요한은 이승훈 베드로, 최필공 토마스,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이베르, 홍락민 루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1801년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빛나는 영광을 얻었다. 포도청과 금부에서 용감하게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밝힌 그는 총회장답게 형리들 앞에서 십계명을 강론하고 호교론을 써서 관리들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의 강론과 호교론이 주님의 진리임을 순교의 피로 증거하였다.


그는 한국교회 창립 당시의 신자였다, 평신도들이 세운 교회에 단 한 명의 사제도 없을 때, 성품성사에 대한 교리를 미처 알지 못하며 평신도가 임시 성사집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최창헌도 선입되어 사제단으로 활동했다. 드러나 북경주교에서 이 활동이 잘못임을 듣고 곧 중단하면서 사제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아 사제 영입 운동을 폈다. 최창현 요한은 이때 숙부인 최인길 회장을 도와 사제 영입 운동에 협력하였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에는 신부의 사목활동을 충직하게 도왔다.


주문모 신부는 최창현이 덕망이 높고 그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를 총회장에 임명하여 신자들을 이끌도록 하였다. 그는 비록 주인이었지만 양반들도 그의 지도를 받아들였다. '조용하고 슬기로웠고 견식이 넓고 마음이 용감하고 확고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던 그를 '당시 교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을 바치던 총회장이었다'고 달레 신부는 그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적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복음성서를 맨 처음 읽은 사람은 문헌상으로 광암 이벽이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처음 한글로 번역한 사람이 바로 최창현 요한이다. 그는 한자로 된 복음서의 발췌본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에서 최초의 한글 성서라 할 한글본 "성경직해"를 번역했다. 한글본 "성경직해"는 한문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을 한글로 번역한 것인데, 이 두 권의 책 가운데 당시 한국의 교회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택해서 한 권으로 편찬한 것이다. 그래서 한글본 "성경직해"를 한때 "성경광익직해"라 부르기도 했다.


한글본 "성경직해"에는 86개에 달하는 연중주일가 축일의 복음구절이 한글로 번역 수록되어 있다. 물론 한글본 "성경직해"는 성서 전체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 한자로 된 발췌본인 중국의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처럼 주일과 축일에 해당하는 성서만 번역하여 실은 책이다. 그러나 한글본 "성경직해"에 실려 있는 복음서의 분량은 4복음서 전체 구절 총 3,709절 가운데 30.68%에 해당하는 1,138절이다. 초대 한국교회 신자들은 이 한글본 "성경직해"를 통해 우리말 성서를 읽을 수 있었다.


달레 신부는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관천이란 호로 더 잘 알려진 창헌이라고 불리는 최 요한도 역관 지안의 아들로서 … 천주교에 나온 뒤로 모든 교회서적들을 자기 손으로 베끼고, 그것으로 크게 봉사하였다. 그의 책 베끼는 솜씨가 어찌나 평판이 높았던지 책을 가지고 싶은 교우들은 그것을 얻으려고 그를 찾아갈 정도였다. '주일과 축일 성경의 해석'이라는 한문책을 조선말로 번역한 사람이 그였다고 한다."


최창현 요한이 번역한 한글본 "성경직해"는 손으로 옮겨 적은 필사본으로 초창기 일반 신자사이에 널리 읽혀졌다. 이 사실은 1801년 박해 때 이름없는 한여교우 집에서 압수한 천주교 서적 가운데 이 책이 나왔음이 "사학징의"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천주교가 4복음서의 체계적 번역서를 갖게 된 것은 한기근 바오로 신부가 번역해 1910년에 출간한 "사서성경"이다. 그러나 순교자 최창현이 번역한 "성경직해"는 "사서성경"이 나온 뒤에도 교회안에서 널리 읽혀졌다. 한국교회가 박해속에서도 4복음서의 30.68%에 해당하는 한글본 복음서를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과 뛰어난 번역, 수려한 문체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며, 그와 함께 최창현 요한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경향잡지, 2000년 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유박해 순교자들(5) - 최필제 베드로


늙은 아버지는 이미 한번 옥고를 치르고 난 아들이 천주교에 다시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몹시 걱정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천주교로부터 떼어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최필제는 아버지의 만류가 있을 때가 가장 괴롭고 힘들었다. 그는 지극히 공손하고 온유한 태도로 천주 공경이 참되고 올바름을 간절히 설명하며 함께 신앙생활 하기를 오히려 청하기까지 했다.


서울의 중인 출신으로 자를 자순(字順)이라 했던 최필제(崔泌第 베드로, 1769∼1801)는 일찍이 길거리에서 열정에 북바쳐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외치던 순교자 최필공의 사촌동생이다. 그는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약장사로 생업을 삼아 부모를 봉양하여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한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약제를 다루어 약값이 싸고 질이 좋다며 모두 그를 더욱 신임하였다.


그리고 타고난 성품이 참되고 온유하였는데 그 진실하고 충직하며 중후한 성품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서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가 어진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최필제는 1790년경 내포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여 최필공과 함께 활약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일어난 신해박해때 사촌형과 함께 체포당하여 그만 배교하고 풀려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후 한동안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냉담하였다.


그러던 그는 신해박해 이후 비참한 상태에서도 굳건한 신앙생활을 하며 눈물겹게 사제영입 운동을 벌이는 모습을 차츰 자신의 불성실을 뉘우치기 시작했다. 1793년경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그는 옛 동지들의 외롭고 힘겨운 활동에 동참했고 이윽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해 사목활동을 펼 때 정약종 황사영 등과 함께 더할 수 없이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자식의 모습이 염려스러워 기회 있을 때마다 만류했는데 한번 배교를 뉘우치며 새 삶은 시작한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혈육의 탄압을 놀라운 슬기와 의지로 이겨내며 자신의 굳은 신앙의지를 힘있게 느끼게 하였다. 그는 가족의 탄압을 오히려 굳고 심원한 신심을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고 더욱 열절한 사람으로 가족에게 성실하여 참 사람의 계율을 아름답게 실천해 갔다.


축첩의 폐습과 남존여비의 일상화된 관습을 버리고 아내를 정중하고 사려 깊게, 한 인격체로 대하며 사랑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평등으로 부부애를 이 땅에 실현해 낸 첫 효시라 할만 했다. 이러한 그의 삶을 주문모 신부가 보고 탄복하였다. 신부는 그를 칭찬하여 "부부 정절을 지키며 훌륭하게 끝을 맺는 이가 아주 드문데, 이 부부는 지조가 갈수록 굳어지고 고통을 이겨 주님께 공을 세우는 일에 부지런하니 참으로 어진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사촌형 최필공도 최필제를 언제나 존중하고 두려워했다. 나이가 어린 아우 뻘이지만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여 행하고 한 가지도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최필공에게는 항상 천주교를 헐뜯고 배척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돌아가며 욕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도 그의 사촌인 최필제에 대해서만은 감히 흠잡아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최필제의 자를 부르며 "천주교에서 취할 사람은 오직 자순 한 사람뿐"이라고 칭찬했다.


신유박해의 기운이 감돌고 그의 사촌형이 잡혀간 이틀 뒤 주님봉헌 대 축일을 맞아 이른 새벽 한길 가에 있는 약방의 안쪽 방에 몇 사람의 교우들과 함께 모여 축일 기도를 바치다가 포졸에 발각되어 오현달과 함께 잡혀 관아로 끌려갔다. 그는 옥중에서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지만 그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동료를 고발하라는 어떤 유혹과 위협에도 오직 침묵하며 의연하여 오히려 관리들을 감복하게 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그의 종형이며 신앙의 동지인 최필공 토마스를 만나 함께 옥고를 치르며 서로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최필공이 먼저 정약종등과 함께 순교하자 그의 순교에 대한 열망이 더욱 굳어졌다.


그 때 늙으신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옥고를 다시 치르게 되자 너무 상심하여 병석에 누웠다가 세상을 떠났다. 옥중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최필제는 지극한 효성으로 애통해하며 관원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일시 귀가를 청하였다. 당시 조선의 형법에는 이를 허가하게 되어 있었다. 비록 죄인일지라도 일시 귀가하여 상주로서 의무를 행하게 했었다.


허락을 해준 관리는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이번 기회에 상례를 마치고 멀리 도망쳐 생명을 구하라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러나 최필제는 정한 날짜에 돌아왔다. 지극한 효성으로 상례를 마치고 정한 날짜를 어기지 않으려고 무한히 애쓰며 돌아와 국법을 준수하고 또한 공적 신의를 지켰다.


그는 돌아와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돌아가셨음을 기뻐하며 옥중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배교했던 것을 기워 갚기를 원하네. 내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내 머리를 바치는 일이네."


그는 1801년 5월 14일 정철상 등 5명의 교우들과 함께 그의 소원대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며 자신을 주님께 봉헌했다.


<가톨릭신문, 2243호,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신앙 실천의 선구자 홍유한


무섭게 비바람이 몰아쳤다. 밤하늘을 찢어 놓는 섬광을 타고 천둥은 가슴속까지 흔들어대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초조한 마음으로 산모퉁이를 돌아가던 농부는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밤새 몰아친 비바람에 산이 무너져내려 밭이고 논이고 흔적도 짐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농부의 가슴은 삶이 온통 무너져 내린 폐허를 보는 것 같았다. 비록 산자락 밭일망정 여생의 보금자리로 삼으려고 반평생을 절약해 산 것인데 허무하게도 산사태로 무너져버렸다. 농부는 삶이 조각난 허허로움에 망연자실하였다.


그때 농부에게 판 밭이 산사태로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밭값을 가지고 온 한 선비가 있었다. 농부는 그럴 수는 없다고 사양했지만 선비는 한사코 밭값을 되돌려주고 갔다. 세상에 이런 어른도 계시는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일찍이, 그 선비가 말을 타고 길을 가던 중에, 질퍽이는 빗길에 짐을 진 채 힘겹게 걷고 있는 노인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노인을 태워 백리 길을 걸어서 모셔다 드리고 돌아간 분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이미 팔아버린 밭인데 산사태 로 무너졌다고 되물려주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농부의 가슴은 놀라움과 감사의 정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 재생의 은인은 뒤돌아봄도 없이 휘휘 사라져갔다. 농부는 눈물 고인 눈으로선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거듭 되뇌었다. 나도 저분처럼 살고 싶다.


이 선비가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한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이다, 명문가의 후예인 그는 8,9세 때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하여 신동이라 하였다.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조선인들의 전설로 소개하며 사량(士良);이라 불리기도 한 홍유한은 전설의 인물이 아니라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제자로 밝혀졌다.


홍유한은 16세기가 되던 해인 1742년 성호 이익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 무렵 이익은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 등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통해 서학을 연구하면서 천주교에 대해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완한다는 보유론(補儒論)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때 홍유한은 그 문하에 있으면서 누구보다 예리한 관찰력과 영민한 의지력으로 먼저 천주교의 계시진리를 발견했다. 그는 학문으로서 서학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서학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는 유학과 불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 마음 깊이 새겼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새로운 삶을 살 것을 굳게 다지고 1757년 고향인 경상도 예산(禮山)으로 내려왔다. 구원의 진리를 얻은 홍유한은 신앙실천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괘념하지 않았다. 전례력도 없고 기도서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7일마다 주일이 온다는 것을 알고 매달 7월 14일 21일 28일에 모든 육신 일을 멈추고, 세속의 모든 것을 물리치며 기도에 전념하였다. 또한 금육일을 알 수가 없어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 한 가지는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그 까닭을 묻는 사람들에게는 다만 "본성의 탐욕은 억제되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는 칠극에서 터득한 덕행을 그대로 살면서 육욕을 통제하여 30세 이후부터는 정절의 덕을 실천하였다. 그는 자비와 정의감이 투철했지만 희노애락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위엄을 지켰다.


홍유한은 이러한 신앙생활에 어떤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 1775년 더욱 한가하고 고적한 곳을 찾아 경상도 순흥지방 소백사 구들미(현재 구구리)로 옮겼다. 이 적막한 곳에서 더욱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며 묵상과 기도에 깊이 잠긴 만년을 보내다가 1785년 1월 30이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에 단 한 분의 사제도 만나본 적이 없다. 따라서 단 한 번의 미사, 성사, 강론을 듣거나 참례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학문에서 신앙으로 전환한 첫 신앙인으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며 자랑스럽게 기억되고 있다.


<경향잡지, 1997년 2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불꽃같은 삶을 산 복자 가이오: 일본 속의 한국인 전도회장


교황 비오 9세는 1867년 7월 7일 일본의 순교자 205위를 복자로 선포하였다. 205위 순교복자 가운데는 우리 나라 사람이 열 명이나 포함되어 있는데, 복자(福者) 가이오(Caio)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가이오는 일찍이 인생의 참된 행복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명상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나 한적한 산속 동굴로 들어갔다. 이 젊은 독수자(獨修者)는 동굴 속에서 혼자 철저히 순결을 지키며 자기 극복을 위해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명상에 잠겨있는 그에게 한 위엄 있는 분이 나타나 "용기를 가져라! 일 년 안에 너는 바다를 건널 것이요. 많은 노력과 피로를 겪은 뒤에 네가 바라는 바를 이루리라"고 했다.


바로 그해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젊은 독수자 가이오는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를 태워 일본으로 가던 배가 대마도 가까이에서 풍랑을 만나 파선되었다. 다행스럽게 가이오는 해변으로 밀려나와 겨우 생명을 구했다. 생명을 구하고 다시 자유의 몸이 되어 구도자의 길을 계속 걷던 그는 승려들의 엄격한 생활에 매료되어 일본 교토(京部)에 있던 유명한 절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가이오는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음을 뉘우치며 절을 떠났다. 절을 떠나 마을로 내려오던 그는 마을의 한 부인을 만났다. 부인이 가이오를 보고 물었다. "당신이 절을 떠나는 것은 구도자로서 그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까?" 가이오는 "아니오 내가 찾는 길이 절에는 없어 떠남이요, 내 구도적 갈망은 오히려 더 깊을 뿐입니다."


그러자 부인이 그를 예수회학교로 데려가 사제를 만나게 해주었다. 가이오는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면서 메마른 사막이 물을 빨아들이듯 진리를 받아들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세례를 청하였다. 그에게 교리를 가르치던 신부가 세례 기념으로 상본 한 장을 그에게 주었을 때 그는 깜짝 놀라며, "아이구! 내가 동굴에 있을 때 나타나 지금까지 내게 일어난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그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파란만장한 생애로 진리를 추구하며 독특한 영적 체험을 하고 성세성사로 입교한 그의 삶은 마치 밤하늘에 불타는 한 덩이 횃불과 같았다. 그는 선교사를 수양하며 병자, 특별히 나병환자들 간호에 헌신하였다. 지나칠 정도로 행하는 극기와 보속, 불행한 이웃에 대한 헌신, 선교사들을 위한 봉사에 열중하여 그들의 노고와 위험을 함께 하며 형제들의 영혼구원에 열성을 다했다.


이 선택된 영혼이 보여주지 아니한 덕행과 모범이 없었다. 가이오는 그가 세례 받기 이전부터 자기에게 내려주신 무수한 주님의 은총을 깊이 감사하며 그 모든 봉사를 조금도 힘겨워하지 않고 기쁨과 감사의 표시로 행하였다.


불꽃으로 타오르는 듯한 삶을 살던 그는 일본의 금교정책으로 체포되어 나가사키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가장 포악한 옥리가 그를 고문하여 온갖 형벌을 가하여 배교하도록 했다. 그리고 가이오가 배교하면 큰 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기고만장한 형리는 토굴 속에 감금된 가이오에게로 갔고, 일주일이 될 무렵 오히려 형리는 지극히 온순한 태도로 형리직을 사직하고 천주교 신자가 되겠노라고 하여 관리를 놀라게 했다.


어떤 형벌이라도 가이오의 배교를 기대할 수 없음을 안 관리는 이미 수많은 고초를 겪은 그에게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가이오는 타는 불길이 아니라 약하게 이는 불속에서 서서히 타죽게 하는 화형을 당했다. 이 불속에서 가이오는 순교했다. 그러나 그 잔인한 화형은 오히려 주님을 향한 불꽃같은 복자 가이오의 장엄한 삶을 더욱 고결하게 완성시켰다.


<경향잡지, 1997년 3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사제를 위해 목숨을 대신 바친 최인길


포청의 나졸들이 몰려온다는 놀랍고도 화급한 전갈을 받고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1764-1795년) 회장은 몹시 난감했다.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인가! 황망한 가운데 신부님의 은신처가 얼른 떠오르지 않아 안절부절했다. 우선 믿을 수 있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에게 막무가내로 신부님을 부탁했다. 그러나 포졸의 추적으로 늦출 수 있어야 했다. 사제가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시간을 얻어야 한다. 그는 잠시 호홉을 멈추고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정조 18년 2월, 북경을 떠난 주문모 신부는 얼음이 얼기를 기다렸다. 그 해 12월 변문에 이르러 윤유일과 지황의 안내를 받은 그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깊은 밤에 압록강 얼음을 타고 외주관문을 넘었다.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12월만인 1795년 정월 서울에 도착한 주 신부는 사제를 기다리던 조선 교우들의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 처음으로 사제를 맞이한 우리 나라 교우들은 마치 천사를 맞은 것처럼 기뻐하며 즐거워하였다.


최인길 회장이 서울 북쪽에 마련한 집에 머물며 주문모 신부는 조선 교우들의 열의에 깊이 감동하여 쉬지 않고 조선말을 배웠다. 그해 주 신부는 부활성야 첫미사를 봉헌했고, 성체를 받아 모신 교우들은 감격에 겨워하였다. 이러한 흥분과 희열에 찬 교우들은 조심성을 소홀히 하였고, 그 틈에 배교자가 밀고를 했다. 배교자는 진사 한영익이었다. 몇 일전에 개심을 약속하고 찾아온 그는 신부를 만나 조선에 들어온 경로를 알아냈고, 이를 광암 이벽의 형이며 박해자인 병사 이격에게 밀고한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임금 정조는 그해 6월 27일 포도대장 조진규에게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을 은밀히 내렸다.


밀고자 한영익의 수상한 거동을 보고 그의 뒤를 살피던 열심한 한 교우가 형조에 내려진 체포령을 미리 정탐하였고 이 사실을 급히 알렸다. 최인길 회장은 몹시 난감해졌다.


일찍이 김범우의 집에서 가졌던 집회에서 한국교회 창립을 함께 하며 회장의 직무를 맡았던 그는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평신도만의 교회에서 사제의 필요성을 통절히 깨닭고 윤유일과 지황이 구만리길 북경으로부터 사제를 모셔올 때 그는 철저히 빈곤했던 당시의 어려움 속에서 사제를 모실 집과 경비를 마련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런데 목자를 맞이한 양떼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에 밀고를 당하다니….


최인길 회장은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우러러보았다. 순간 굳은 결의를 마음속 깊이 다졌다. 신부가 피신할 시간적 여유를 주고자 자신이 신부인 양 변장하기로 한 것이다. 옷을 바꾸어 입고 마치 주문모 신부인 것처럼 꾸민 최 회장은 신부를 체포하러 들이닥칠 포졸들을 기다렸다.


포교는 수하 포졸을 거느린 채 신부가 머물던 집을 에워싸고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중국 옷을 입은 사람이 유유히 앞뜰을 거닐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중국인 신부가 있다는데 누구냐?"고 물었다. 최인길 회장은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듯 거닐기만 했다. 포교가 다가서서 다시 확인 할 때 역관이었던 회장은 유창한 중국말로 대답했다. 포교는 중국신부임에 틀림없으리라 생각하고 최인길 회장을 포청으로 압송했다.


사제를 대신해 최인길 회장이 잡힌 사실이 밝혀지자 화가 난 포청에서는 가혹하고 모진 매를 쳤다. 거듭된 심문과 참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는 끝내 사제의 행방을 숨겼고, 손바닥을 제외하고는 성한 곳이 없도록 비참한 상처를 입었다. 1795년 6월 최인길 회장은 피끓는 동지 윤유일 지황과 함께 사형언도를 받았다. 최인길 회장의 영웅적 인내와 침묵은 그 뒤 6년동안 주문모 신부의 사목을 가능케 한 밑바탕이 되었다.


<경향잡지, 1997년 5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열여섯 번의 고문을 겪은 증거자 박취득


조선 조정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심문하고 박해를 집행하는 책임자는 형조판서 김화진이었다. 그는 서학도들을 심문하고 그 과정을 보고하면서 "서학도들을 매맞고 심문을 당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다스릴 방법이 없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우리 나라 초대교회 신자들은 순교를 열망하며 주님의 진리를 증거하니 결코 형조의 형벌과 죽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형조의 으름과 위협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취득과 원 야고보, 정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는 서로 절친한 친구이며 신앙의 동지였다. 한 때 이들은 지나친 열망으로 함께 순교하기 위하여 서로 밀고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의 존엄성을 깨닭고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 순교는 주님의 사랑의 소명 앞에 겸손하게 대령했을 때 주님의 은총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열의와 용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은 이들의 착한 열정을 받아들여 장소와 시간은 같지 않았지만 이들 모두에게 차례로 순교의 월계관을 씌워주셨다.


충청도 홍주(洪州)출신의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 ?-1799년)는 홍주의 면천(沔川) 고을에서 덕망이 높아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믿음이 굳고 용기가 대단하였다. 1791년 박해가 일어나자 전국 각지의 신자들이 잡혀가게 되었다.


그 무렵 면천고을에서도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여러 달째 갇혀있었다. 이들의 비참한 옥살이를 위로하러 자주 찾아보며 용기를 복돋아주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박취득이다.


어느 날 그는 옥에 갇힌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 관문을 두드리고 과감히 들어가 관장 앞에 서서 외쳤다. "무죄한 사람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가두는 것은 무서운 죄가 아닙니까?" 관장은 화가 나서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천주교 사건으로 옥에 갇혀있는 박일득의 동생, 홍주 사람 박취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즉시 체포되었다. 관장은 그의 목에 무서운 칼을 씌우고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나무칼이 너무 가벼우니 쇠로 된 것을 씌워주시오" 하고 말했다.


관장은 매우 난처해졌다. 박취득이 인심을 얻고 덕망이 높아 온 읍내가 동요하고 불평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관장은 더 이상 단죄하지 못했으나 물리쳐 내놓고 해미와 홍주 관아로 데려가 잔인한 매질을 하게 되었다. 박취득은 한 달 남짓 옥고를 치른 뒤 조정의 명에 의해 석방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이 밀고되고 1797년 홍주고을에 다시 박해가 일어나자 곧 박취득에게 체포령이 내렸다. 그가 몸을 숨기자 포졸들이 박취득 대신 그 의 아들을 잡아갔다. 어머니는 라우렌시오에게 "이제는 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고 말하였다. 박취득은 어머니의 말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었고 주님의 도움심을 구하며 그해 8월 19일 자진해서 관아로 갔다.


첫 번째 심문에서 관장이 물었다. "어찌하여 국왕과 관장이 금하는 나쁜 도를 따르느냐?" 그러자 박 라우렌시오는 "저는 나쁜 도리를 따르지 않고 다만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님을 숭배하라고 가르치는 참 종교와 계명을 지킬 뿐입니다. 저는 천주님을 공경하고 다음에서는 임금님과 관장들, 제부모와 다른 어른들을 공경하며 제 친구들, 은인들, 형제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고 증언하며 매를 맞았다.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십계명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너도 지황처럼 죽기를 원하느냐?" 관장은 더욱더 배교를 강요하며 위협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제게 은혜를 한없이 베풀어주셨는데 저의 죄는 무수하니 죽어 마땅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네가 무슨 죄를 범했느냐?" 관장이 되묻자 그는 대답했다. "저는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옥리들은 그에게서 돈을 좀 뜯어내고자 그의 두 발에 쇠고랑을 채우고 갖은 학대를 하였다.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정의 위해서 죽을 각오는 되어 있지만 만약 돈을 줄 마음이 있었다면 옥에도 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고문을 받아들였다. 이 말은 형리들의 분노를 더욱 살수밖에 없었고 더욱 혹독한 매질을 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심문때 관장은 그를 형틀에 올려놓고 때리며 집게로 살을 집어 뜯게하였다. 숱한 고문에도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세 번째 심문부터 관장은 그에게 죽음의 위협을 가했다. 라우렌시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심문을 이겨나갔다. "임금은 육체의 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님만이 영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죽은 뒤의 상과 벌을 정해놓으셨고, 아무도 그것을 면하지는 못합니다. 죽어야 한다면 그것이 대숩니까. 인생이란 사라져버리는 이슬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인생은 나그네길이요,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네 번째 심문에서 증거자 라우렌시오는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불행중에 가장 큰 것이니 살기를 원하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모든 이에게 공통된 감정입니다. 그러나 천주님은 만인의 첫째 아버지이시고 만물의 최고 주재자이시니 저는 죽을지라도 그분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여 오히려 관장을 탄복시켰다.


그 뒤 위협과 형벌을 여러 차례 받으면서도 그는 한결같았다. 다만 그가 더 이상 봉양하지 못할 어머니를 생각하니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제가 죽은 다음에는 제 어머니가 사또의 수중에 있겠지만 어머니도 천주님께로부터 창조되었으니 천주님께서 그를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 무렵 그는 어머니께 편지를 드렸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불효자 라우렌시오는 옥중에서 어머니께 제 심정을 알려드립니다. 저는 항상 천주님을 지성으로 섬기고 부모께 효성을 다하여 형제와 화목하고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할 때마다 천주님의 명을 지키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봄과 가을은 흐르는 물과 같이 지나가고 세월은 부시로 치는 돌에서 튀어나오는 불빛과 가아서 길지 못합니다. 특별히 조심하셔서 천주님의 명령에 충실히 지키십시오. 제가 옥에 갇힌 지 두 달즘 되었을 때 저는 어떻게 해야 천주님의 은덕을 얻을 수 있는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얼핏보았습니다. 이 발현(發現)이 약간 흐리기는 하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고문을 열 여섯 번이나 당했고 곤장을 천사백대나 맞았다고 한다. 라우렌시오는 매맞은 채 옷을 벗기고 진흙에 버려지기도 하였으며 여드레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마침내 1799년 음력 2월 29이 오전 11시 옥사함으로써 박취득은 증거자로써 장한 삶을 마쳤다.


<경향잡지, 1997년 7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자신의 운명을 예측한 증거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조선시대 한양에 곧고 바른 선비가 있었다. 선비는 동리 어린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스스로 훈장이 되었다. 어느 날 학동들이 훈장님께 여쭈었다. "훈창님, 훈창님께서는 서학도를 어떻게 보십니까?" 훈장이 답하길 "나는 아직 서학에 대해 특별히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첫째 이 땅에도 많은 종교들이 허다히 있는데 굳이 서양 종교를 믿는 것이 과연 옳은가 싶고, 둘째로는 이 나라의 백성은 모름지기 임금께 충성해야 하거늘 임금께서 금하는 종교를 굳이 믿는 일은 마땅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했다.


며칠 뒤, 당고개에서 서학도들을 처형한다는 소식을 들은 훈장은 '임금의 뜻을 거스른 자들의 최후를 내가 한번 봐야겠다' 하는 생각에 형장으로 나갔다.


깊은 사념에 잠긴 채 돌아오는 그는 학동들은 불러놓고 말했다. "나는 아직도 서학에 대해 특별히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오늘 나는 서학도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마리 새도 죽음에 울부짖는 소리가 애처롭고 슬프다 하였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본 서학도들은 너무나도 평화롭다 못해 오히려 웃는 모습으로 죽어갔다. 어떻게 그토록 거룩하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반드시 까닭이 있으리라. 이제 나는 그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서당문을 잠시 닫고 떠난다."


이 선비가 본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국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죽음은 확실히 비범했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 하나인 이보현 프란치스코의 죽음 또한 비범한 죽음이었다.


이보현(李步玄, 1768-1795)은 충청도 덕산고을 황보실(현재 당진군 길덕면)의 부유한 양갓집 자손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고집스럽고 꿋꿋한 면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보현은 마음이 비뚤어져 제멋대로 행동하며 망나니로 자랐다. 몹시 난폭하고 참을성 없이 욕정을 충족하는 그를 어느 누구도 억제시키지 못했다.


본능적인 욕구대로 살던 가련한 젊은이가 스물네 살이 되던 해였다. 그때 이보현은 열심한 신자이며 뒷날 황사영과 함께 순교한 황심(黃沁)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운 그는 세례성사를 받고 입교하였다.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 신자가 된 짧은 시간 동안 프란치스코는 모근 사람이 놀랄 만큼 자기 변신을 했다. 그는 지난날 저지른 몹쓸 소행을 말끔히 고치고, 본성을 억제하며 단정하고도 조용하게 처신했다. 프란치스코의 변모된 모습에 이웃사람들은 감회하였다.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려했지만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여 결혼해서 가장이 되었다.


그의 열심은 날로 더해졌고, 보속과 고행에 열중하였다. 때로는 고향을 떠나 산중에 들어가 나물만 먹고 지내며 하느님을 섬겼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금욕을 엄격히 실천했으며, 순교로 목숨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방법이라고 마음을 거듭 다졌다.


마침내 진산사건이 일어나고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족과 동네 교우들을 격려하였다. 날마다 그는 예수 그리스토의 수난을 강론하고 신앙을 고백하며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교우들을 격려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사람들에게 술을 많이 담그라고 일렀다. "마지막 잔치를 차려서 온 동네 사람들을 대접하려는 것이니 빨리 해야 한다."


며칠 뒤 정말로 포졸들이 나타났다.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찾는 포졸들 앞에 나서며 말했다. "나는 천주교인일 뿐 아니라 당신들이 나를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는 포졸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런 뒤 이보현은 관장 앞으로 끌려가 심문당하였다. "네 선생은 누구이고 공범자는 누구이며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느냐?"고 관장이 묻자 이보현은 대답했다. "제 선생과 동료들은 고향에 있습니다. 책은 몇 권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모두가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사또께 바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중대한 일이기에 그 책을 내게 보일 수 없단 말이냐?" "그 책들은 만물의 대군이신 천주님께 대하여 말하는 것이기에 함부로 사또의 손에 맡길 수 없습니다." 관장은 매질하여 옷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이 사건을 통지 받은 감사는 이보현을 그의 출생지로 넘기라고 명했다. 그래서 이보현은 해미로 이송되었다. 해미의 영장은 "어찌하여 고약한 도(道)를 따름으로써 국왕이 금하시는 것을 하느냐?"고 심문하였다.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임금과 관장들이 알지 못하는 성교(聖敎)를 어찌하여 그렇게 모욕적으로 규정하십니까? 사람의 기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님이라면 어떻게 우리의 대군대부이신 천주님을 공경하지 않겠습니까."하고 응답했다.


영장은 형리를 불러 갖가지 형틀을 준비시키며 거듭 말하였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고백하라." 이보현은 거절했다. "어디나 선생과 제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대면 저처럼 다루실 테니 차라리 제가 죽을지라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한나절 동안 계속되는 형벌로 몇 하례나 까무러쳤지만 꿋꿋이 버티며 굴복하지 않았다. 상처투성이가 된 프란치스코는 큰 칼을 쓴 채 옥에 있으면서도 만족스런 표정으로 기뻐하였다. 늘 하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를 강설하며 함께 기도드리고 갇힌 사람들을 격려한 것이다.


두 번째 심문에서 영장은 무서운 형구들을 늘어놓고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피할 수 없으니 모든 것을 고백하고 천주를 배반하라." 그러자 이보현은 강하고 다부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왜 그런 말을 또 하십니까? 신민(臣民)이 자기 임금을 배반하면 그에게 벌을 주십니까, 상을 주십니까? 사또께서는 임금의 녹을 받으시니 저를 법대로 다스리십시오."


그는 혹독하게 계속되는 심문과 형벌을 용감히 견디어냈다. 너무도 굳은 그의 의지에 관장도 탄복하였다. 마침내 이 프란치스코에게 장살형(매를 무수히 맞고 죽는 형벌)이라는 선고문이 내려졌다. 그는 이 무서운 선고문에 기쁘게 서명하여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다음날 그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기쁘게 먹고, 장터에 조리돌려졌다. 그리고 망나니들의 참혹한 매질이 시작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는 1795년 음력 12월 15일이었다.


장하에서 처참한 상처로 숨진 그의 시신을 거둘 때 그의 얼굴은 싱싱하고 웃음을 띠고 있어 동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신비롭고도 평화로운 그의 미소를 보고 많은 이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박해 속에서도 신자들은 증거자의 죽음을 보고 오히려 늘어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경향잡지, 1997년 8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하늘의 큰 광채에 둘러싸여 순교한 이도기 바오로


1797년, 충청감사 한용화(韓用和)는 공주에서 도내의 모든 수령에게, 천주교인들에게 체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천주교를 없애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난폭한 조처로 충청도의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체포되어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희생된 증거자들에 대한 시록은 단 한 사람 정산일기(定山日記)의 주인공 이도기(李道起, 1743-1798년) 바오로의 것이 있을 뿐, 오직 주님만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고통 당한 사람들을 알고 계신다. 그때 순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이도기 바오로의 행적으로 보며 그 동료 무명 순교자들을 함께 기리고자 한다.


충청도 청양 고을에서 태어난 이도기는 글을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천주사랑의 덕행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외교인을 입교시키는데 썼으며, 박해를 피해 대여섯 번씩이나 이사를 하면서도 가는 곳마다 열심한 신자들이 생기게 했다. 그렇게 옮겨다니다가 마침내 정산(定山)고을의 한 옹기촌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며 살게 되었는데 그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그러던 1797년 6월 8일, 갑자기 무장한 포졸들이 들이닥쳐 가택을 수색하고 집에서 일하던 그를 마을 근처 숲속으로 끌고 가 매질하였다. 그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인 채 관장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읍내 저잣거리를 돌며 군중들에게 모욕을 받는 조리돌림을 당했다.


이도기는 공맹의 도에 젖어 편견에 찬 관장의 심문에 지극히 겸손하고도 간절한 태도로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였다.


"너는 성현의 도를 아는 자로서 어찌 사교를 믿는단 말인가!" "저는 사교를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믿고 있는 것은 천주교인인데 천주교는 사교가 아니라 만인이 믿어야 할 참 종교입니다." "그래, 공맹의 도를 버리고 거짓을 따름이 옳단 말인가?"


관장이 거듭 다그치자 이도기는 간절하고도 열렬한 태도로 "저는 무식한 탓으로 선비들의 몫으로만 되어 있는 공자와 맹자의 도는 알지 못합니다. 불도는 스님들에게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창조주와 창조질서 그리고 십계명 등 천주교의 기본 교리에 대해 차례로 설명했다.


관장은 빈틈없고 조리 있는 이도기의 흐르는 물 같은 논설에 속으로 크게 놀라워하면서도 따져 물었다. "너의 말에 일말의 진실이 있기는 하다마는 너는 결국 속았다. 중국에서 리마두(마태오 리치 신부)는 자신의 놀라운 지식으로 백성을 속였다. 너는 어째서 그 속임수를 보지 못하느냐!"


"리마두가 비록 박식하다고는 한 그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중국에서 전파한 도리는 그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천지대군의 도리요, 천주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진리인 것입니다. 임금님의 말도 지극히 조심하여 전하고 따라야 하거늘 하물며 이 세상 임금과는 비길 수도 없는 천주님의 말씀이야 어떠하겠습니까!" 하며 이도기는 그가 믿고 있는 리마두의 지식이 아닌 '하느님의 구원의 진리'임을 분명히 하였다.


관장과 포졸들은 이도기 바오로의 겸손하고도 열절한 신앙고백에 깊이 감동하여 어떻게든 이도기를 풀어주려고 하였다. 그들은 이도기가 도망가기를 은근히 바라 옥문도 잠그지 않고 한눈을 팔며, 밤사이 도망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날이 하얗게 밝아 포졸들이 와보니, 옥문이 절반이나 열려있었는데도 이도기는 옥중에 그대로 앉아있는 것이었다. 옥쇄장이 매우 딱하게 여겨 물었다.


"여보시오, 어찌 그리 물정도 눈치도 없단 말이요? 참으로 딱하시오. 보면 몰라서 그렇게 버티고 앉아 계시는 거요?" "이보오, 옥쇄장. 당신은 죄수를 지킴으로 국록을 먹는 사람이 아니요? 당신은 당신이 할 일이나 하시오. 나는 내가 옥안에 있든, 옥 밖에 있든 주님의 진리만 증거하면 그만이요."


옥쇄장이 더욱 안타까워하며 말하였다. "우리가 모두 당신을 동정하고 있음을 그렇게도 모르시오. 겉으로 한번만 주를 모른 척하면 될 일을 그렇게 고집을 피우시오. 고집을 피우니 우린들 어찌하겠소. 그러다가는 매맞아 죽기 꼭 알맞소." 이도기는 이 유혹을 준엄히 물리치며 답했다. "이보시오, 내가 매를 맞아 죽을 지, 굶어 죽을 지, 혹은 어떻게 죽을 지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실 일이요, 나는 내가 어떻게 죽든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다만 기뻐할 뿐이요."


그는 유혹을 물리치고 모진 매를 맞으며 비참한 옥고를 치르면서도 아내에게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면회 오지 말도록 부탁하였다.


"앞으로 누가 당신더러 무슨 말을 내게 전해달라 하더라도,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할 성질의 것이라면 내게 전하지 마시오. 마음이 약해질지 모르니까 말이요. 그 동안 나 때문에 수고가 많았소. 이제 내일부터는 면회 오지 마시오."


아내는 남편의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알 수 없었으나 옥바라지해온 수고에 대한 인사말로 생각하고 다음날도 조심스레 먹을 것과 갈아입을 옷을 들고 면회를 갔다. 이도기는 아내가 계속 면회 오는 것을 보고 다시 아내를 불렀다.


창살을 가운데 두고 부부가 마주앉았을 때, 이도기는 옷자락을 펼쳐 살이 터져 으깨어진 참혹한 상처를 보여주며 말하였다. "부인, 보시오 나도 사람인데 어찌 이 상처가 아프지 않겠소, 내가 단지 주님만을 향해 있을 때는 이 고통을 이길 수가 있고 그러나 부인께서 오시면 내가 어찌 부인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소. 내가 부인을 보게 되면 사랑하는 아내를 보는 기쁨은 누리지만 이 상처의 고통은 이길 수가 없고, 그러니 면회를 오지 마시오."


아내는 남편이 왜 면회를 오지 말라는지 그제서야 알아듣고 면회를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도기의 옥고는 계속되었다.


사형집행일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기쁨으로 가득차 창백하던 얼굴이 환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 밝은 얼굴을 보고 포졸들은 감탄하였다. 모진 매를 맞고도 그는 합장하여 기도하며, "주님께서 내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매를 쳐서 뜨겁게 채주신다"고 오히려 감사했다.


더 견딜 수 없는 고문으로 기진했을 때, 포졸이 마지막으로 배교를 권하며 유혹하였다. "아직도 때는 늦지 않았다. 배교하겠느냐?" 순교자는 외쳤다. "결코 할 수 없소." 그의 입술은 새카맣게 타고 생명의 입김도 겨우 붙어있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르던 그는 "성모 마리아여! 당신께 하례하나이다" 하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극한 상황이 몇 차례 거듭되는 동안 관장은 그에게 물 한 모금도 주지 않도록 엄격히 다루었다.


1798년 6월 12일 저녁, 이도기에게 포악한 형벌을 가하라는 관장의 명을 받고 포졸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심한 매질에 거룩한 순교자의 온몸으로 짓이겨지고, 정강이가 부러져 하얗게 드러난 뼈에서는 골수가 흘러 땅을 적셨다. 손바닥을 제외한 몸 전체 어느 한 곳도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이던 증거자는 이윽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그곳에서 피와 물이 흘러내리면서 숨을 거두었다.


남편의 면회를 눈물로 참았던 부인은 포졸의 전갈로 남편의 죽음을 알고 통절히 울었다. 그때 옥쇄장이 부인을 위로하여 말하였다. "부인,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당신 남편이 죽던 열 이튿날 밤에 하늘에서 큰 광채가 비추어 당신 남편의 시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내가 보았소."


<경향잡지, 1997년 1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김광옥 안드레아 - 내일 정오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온 나라를 흽쓴 박해의 매섭고 차가운 칼날이 6월에 잠시 멈칫하더니, 형조에서는 7월에 또다시 사형선고를 내렸다. 1801년 음력 7월 17일 충청도의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 김정득(金丁得) 베드로, 전라도의 한정흠(韓正欽)스타니술라오,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김천애(金天愛) 안드레아 등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뒤 한국교회의 역사는 순교자들의 장한 죽음으로 계속된다.


김광옥 안드레아(1741-1801년)는 내포 지방 예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훌륭한 자질을 타고나서 마을에서 오랫동안 관직을 맡아 관아에서 직책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워낙 성미가 급하고 과격한 편이어서 가끔 신경질을 부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무서워하였다.


그러던 그이가 50세가 될 무렵 내포의 사도라 불리우던 이존창(李存昌)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교우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기광옥이 미관말직이나마 관직에 있고 또 과격한 성격을 아는 터라 모두 놀랐는데, 뜻밖에도 그는 매우 열심히 교우의 본분을 지키며 교리를 따랐다. 사순시기에는 금식과 절제로 극기하며, 사랑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천주교의 덕을 부지런히 배우고 실천하여 성격을 누그러뜨리고, 타고난 훌륭한 자질로 덕행을 쌓는데 성공하였다.


안드레아는 집안과 친구들 앞에서 드러나게 신앙생활을 하며, 교리를 설명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아침저녁으로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며 모든 사람한테 겸손되이 예의를 지키는 안드레아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양처럼 순한 어린이 같다며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1801년 우리 나라에 최초의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 그이는 마을에서 너무 잘 알려졌기에 공주 무성산으로 즉시 피신했다. 그러나 밀고자의 신고로 예산에서 나온 포졸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이는 포졸들에게 "내가 집에 앉아 기다린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을 것이요. 왜냐하면 내가 약한데 내 힘을 믿는 것 같았을 테니까 말이요. 그래서 몸을 피해 모면해야겠지만 마음속으로 순교를 가장 큰 소원으로 삼았오. 오늘 잡힌 것은 천주님의 뜻이니 매우 기쁘오" 하며 천상의 기쁨의 찬 모습을 흩뜨리지 않아 포졸들과 보는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관장은 김광옥 안드레아를 즉시 심문하여 공범자들과 천주교 서적을 내놓으라고 명하자, 안드레아는 "저와 신앙을 함께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천주교와 관련된 책으로 말씀드리자면 너무 소중한 것이기에 진리를 알고자 하는 뜻이 없으신 사또께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사또는 몹시 화기 나서 고문을 더욱 심하게 하였고, 안드레아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큰 칼에 씌어져 감옥에 갇히고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심문이 이어졌다.


김광옥을 치던 형리들의 매가 부숴지고, 치도곤을 맞은 김광옥의 뼈가 으스러졌지만 그는 용감하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사또, 어떤 회유나 위협도 소용없습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 임금의 명을 어길 생각이십니까? 저도 천주의 명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신 하느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사람의 은밀한 생각과 감정과 의향마저 살펴보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 감히 마음속으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섬기는 사람에게 주시는 놀랍고 두려운 초인적인 능력과 보호를 우리는 이 태산과 같이 굳은 증거자에게서 본다. 그에게 고문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관장은 당황하고 기가 막혀 다시 물었다. "아니, 도대체 너는 죽는 것이 그렇게 좋으냐? 너는 아내와 자식이 있다. 네가 한마디만 하면 돌아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을 터인데, 어째서 형벌을 받으려 고집하느냐?" 증거자는 대답했다. "삶과 죽음이 저에게 어찌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천주님을 배반하면서까지 그들과 함께 살 생각이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처한 처지가 다릅니다. 임금의 녹을 받는 사또께서는 그분의 명을 따라야 하고 저는 사또께서 그 명을 집행하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저는 매를 맞아 죽더라도 주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모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안드레아는 기쁨과 평화를 지닌 채 사형언도를 받고서 빛나는 얼굴로 자신이 받게 될 순교의 은혜를 기뻐하며 천주님과 동정 성모님께 감사드렸다. 또 그이는 이 천상의 기쁨과 평화를 옥중의 동료와 외교인들에게도 나누었으며, 큰 소리로 기도하며 교리를 힘차게 가르쳐, 듣고 본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김광옥은 청주병영으로 이송되었다가 서울로 옮겨져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조정의 명으로 고향인 예산에서 처형당하게 되었다. 사형집행지인 예산으로 가는 길목에서, 역시 사형언도를 받고 대흥으로 가던 김대춘을 만났다. 영원한 영적 동지인 두 증거자는 길을 가는 동안 서로 격려하며 위로했다. 세속적으로 두 증거자의 겉모양만 본다면 그들은 참혹한 죄인의 모습이요, 참담한 죽음의 형장으로 가는 것이다.


순교의 길을 함께 가던 안드레아와 김대춘은 예산과 대홍의 갈림길에서 헤어져야 했다. 내일 정오에 김광옥은 예산에서, 김대춘은 대흥에서 참수(斬首)당하기로 되어있었다. "교우(敎友)여! 내일 정오에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그들은 사형이 집행될 날 정오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이들의 감동적인 약속은 주님만이 완성시켜 이루어지게 해주실 수 있다. 주님께서는 과연 그렇게 해주셨다.


비장한 감격에 잠긴 채 서로를 격려하며 약속을 다짐하고, 김광옥은 다음날 예산에서 일곱 달 동안의 옥고를 마감하는 순간을 맞았다. 그는 혹독한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해 들것에 실려 형장으로 운반되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의 기도'를 드렸다. 구경꾼들이 놀라며 "참 이상한 일이로군, 죽는 것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며 형장으로 가는 사람이 있네"라고 말했다. 안드레아는 이 말을 듣고 "그것은 내가 오늘 천주님 곁으로 가서 끝없는 복락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형장에 도착하고 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안드레아는 "내 기도를 마치지 못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하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치고 나서 스스로 사형대에 머리를 두고 몸을 숙였다. 그러나 망나니가 칼을 헛쳐서 어깨만 다치게 하였다. 그러자 김광옥은 벌떡 일어나 수건으로 피를 닦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조심해서 목을 단번에 자르도록 하게" 하고 더할 수 없이 침착한 모습으로 주님께 목숨을 바쳐 제헌하는 순교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김광옥 안드레아의 나이 60세였다.


이제 순교자들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죽인 사람도,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도 시대와 함께 역사 속으로 흘러갔지만 우리는 지금 왜 그들을 기억하며 이토록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일까. 그들은 참된 모습은 세속적인 겉모습과는 결코 다르다. 그들은 진리의 증거자이며 선각자요, 구원의 빛을 밝힌 참된 승리자들이었다. 이것이 증거자의 참모습이다. 진정한 영적 안목만이 이를 보고 깨닭게 한다. 이것이 시대와 역사를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는 까닭이라 하겠다.


<경향잡지, 1998년 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이여삼 바오로 - 스스로 이마에 물을 부은 순교자


1801년 천주교 박해의 모진 바람이 전국을 휩쓸었다. 이는 소장 혁신세력이 모두 꺾이고, 다시 보수로 돌아가는 사건이었다. 한국 초대교회는 이 박해로 양반계층의 교회 지도자를 모두 잃게 되었고, 중인과 서민이 이끄는 교회로 전환되었다. 교우들의 신앙생활도 근거지를 산간벽지로 옮겨 교우촌을 이루었고, 밀고를 피해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어야 했다. 황사영은 당시의 상황을 그의 백서에서 이렇게 개탄하면서 비장하게 호소하고 있다. "교우 가운데 고명하고 힘있는 사람들은 다 죽고 무식한 하류층과 부녀자들 뿐으로 지도자가 없는 상태여서, 현재로서는 재선 방법을 찾을 수 없으며 이대로 가면 10년 안에 또 다른 박해가 없더라도 한국교회는 자멸하게 될 것입니다. 양이 목자를 잃고도 풀을 먹고 자라고, 젖먹이가 어미를 잃고도 온전히 살아가기를 바랄 수 있지만 저희들은 백 번을 생각해도 실로 살 길이 없습니다. … 아!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죽기 전에 어떻게 성교회가 끊어져 없어지는 것을 봅니까!"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이 처참한 상황에서 한국 초대교회는 순교의 피로 역사를 물들이며 전개되었다. 1811년 교황과 북경의 주교한테 보낸 2통의 편지에는 순교자들의 사적과 신입 교우들의 고통을 진술하였고, 목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조선교회 평신도들의 간절한 청원이 구절마다 배어있어, 이 글을 읽는 북경의 주교와 선교사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게 사제를 모셔오기 위한 노력을 은밀히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방 관청에서 행하는 박해로 순교의 피를 기약 없이 흘려야만 했다. 우리는 순교의 피로 이어지는 초대교회의 역사를 잠시라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812년 충청도 흥주에서 이여삼(?-1812, 바오로)이 순교하였다. 그는 양반 집안의 4형제 사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성가정을 이루었던 이들은 1791년 박해 때 온 가족이 전라도로 피신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들은 다시 공주로 피신하였으나 이듬해 2월에 이여삼은 셋째형과 조카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조카는 석방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뒷날 샤스탕 신부의 명으로 1839년 순교하기 전에 "옥중수기"를 남긴 순교자 이태권(李太權)이다. 그의 "옥중수기"는 한국 초대 교회의 소중한 자료로서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다행히 조카는 풀려났지만 형과 함께 유배되었던 이여삼은 10년 동안 귀양살이를 해야했다. 1812년 오랜 유배생활에서 풀려났지만 또 다른 고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친첫 몇 사람이 체포되었다가 이여삼을 고발했다. 더욱이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은 이여삼이 귀양에서 겨우 풀려나 살고 있던 전라도 금산군가지 포졸들을 인도하여 그를 다시 체포하게 했다. 이로써 이여삼은 신앙 때문에 세 번째 감금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형벌 가운데서 꿋꿋하였고, 관원들의 혹심한 심문에도 한결같이 의연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여삼은 홍주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갇혀있었는데, 그가 받은 심문과 고문을 어떠한 모습으로 견디며 신앙을 증거했는지 자세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관원이 그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도록 형식적으로나마 몇 마디 굴복하는 말을 하도록 유혹했으나 그의 자세가 추상같아 관원들이 오히려 숙연해졌으며, 외교인 친구들이 그를 구하고자 간곡한 회유를 여러 번 권하였으나 단호히 물리치고 천주를 위해 죽기를 결심했다고 한결같이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여삼을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형을 선고했다. 마침내 1812년 11월 어느 장날, 관가에서는 이여삼의 사형을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힘센 형리들이 삼모장으로 곤장을 치기 시작하였다. 살이 터져 짓이겨지고 피가 솟구쳐 흘렀다. 이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이여삼은 신음 한마디 없이 고통을 오로지 주님께 봉헌했다. 관장은 꼼짝않고 쓰러진 이여삼이 죽었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매질하던 형리는 거친 호홉을 내쉬며 피투성이가 된 그를 살폈다. 이때 이여삼은 고개를 들고 "목이 몹기 타니 물 한 모금만 주시오" 하고 청했다. 이 뜻밖의 요구에 모두가 놀랐다. 매를 치는 형리도 목이 타는데 매맞아 피투성이가 된 사람은 오죽하랴! 형리들은 이미 사형이 언도된 사람의 마지막 청을 들어주며 그에게 물을 한 그릇 떠다주었다. 이여 삼은 마치 장엄한 예식을 행할 때처럼 피투성이로 만신창이 된 몸을 조용히 일으켜 꿇어앉았다. 그리고 그 물로 타는 목을 축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의 이마에 물을 부으며 십자성로를 긋고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나를 씻기노라. 아멘" 하며 세례성사 때 물로 씻는 예식을 행하는 것이었다. 사제가 없던 시절 아직 세례성사를 받지 못한 예비신자였던 그는 죽기 직전에 세례성사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이 세례는 자신에게 스스로 세례를 줄 수 없기 때문에 효력은 없다. 다만 죽음을 앞두고 세례성사를 받고자 하는 이영삼의 열절한 신앙을 우리는 깊이 새기는 마음으로 묵상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이여삼은 스스로 예식을 마치고 관장을 올려다보며 "제가 죽기를 원하신다면, … 여기를 치도록 하시오" 하면서 자신의 옆구리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곳을 형리가 두 번 치자 그는 숨을 거두었다.


 그가 순교하던 바로 그 순간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지나가던 세 명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들은 길을 가면서 문득 찬란한 광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저것이 도대체 무슨 광채인가? 불빛도 아닌데 참으로 찬란한 광채로군. 이상도 하다." 그리고는 무심코 지나왔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교우였다. 그가 집에 돌아 온지 사흘 뒤에 이영삼이 장하치명으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날짜와 시각을 따져보니, 그 광채가 나타났던 시각과 꼭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감동하여 주님을 찬미하며 더욱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여삼의 시신은 그의 친척들에게 장사지내게 내어주었다. 신자가 아닌 친척들이 시신을 거두는데, 매를 맞아 갈기갈기 찢기었을 시신에는 아무런 상처의 흔적도 없고, 오히려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채가 발하는 것을 보고는 몹시 놀랐다고 한다. 친척 가운데 몇 사람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깊이 감동하여 마음을 돌려 그때부터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여삼의 이름은 그 뒤 오랫동안 홍주 포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형리들은 교우들이 형벌을 받는 동안 "이여삼처럼 매를 참고 받아야 하는 거야."라며 격려 아닌 격려를 하기도 하였고, 더러는 굳건한 교우들의 옥중생활과 그 죽음을 보고는 "저 사람은 이여삼 같아" 또는 "아무래도 이여삼만은 못한 것 같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순교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라는 말처럼 한국초대교회는 순교의 피와 순교자의 무덤 위에서 꽃피어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 교회의 정원에 핀 한떨기 꽃인가? 아니면 옛날 포졸들처럼 무심하게 순교자의 모습을 입에 담고 있는 정원 밖의 나그네인가? 순교자가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순교적 삶을 살아야 함은 바로 지금 난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이여삼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그토록 받고자 하던 세례성사를 끝내 받지 못한 채 죽었고 하지만 그대들은 세례성사를 받는 놀라운 은혜를 주님께로부터 받으셨소. 세례성사를 받은 그대들은 과연 얼마나 열절한 마음으로 기뻐했는지요? 그리고 세례성사를 받은 뒤에 어떻게 바뀐 삶을 지금가지 살고 계신지 묻고 싶소."


<경향잡지, 1998년 2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원 야고보 - 왜 나의 대사를 그르치려는가


한국 초대교회 순교자들인 박취득 라우렌시오, 원야고보, 정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이렇게 넷은 절친한 친구였다. 이들은 서릿발 같은 박해속에서 순교하려는 열의로 가득 차서 서로를 밀고하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다. 밀고하지는 않았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들의 착한 열의를 받아들이시기라도 하듯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차례로 잡혀가 영광스러운 순교의 피를 흘리는 영예를 얻었다. 이들은 충청도 응정리에서 살았으며, 같은 시기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 원 야고보는 1793년에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의 사촌형이다. 원야고보는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곧고 활달하였는데, 그 좋은 바탕에 신앙을 받아들여 온갖 덕행의 싹을 트게 하고, 덕행을 실천하여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신자가 된 뒤부터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자신의 재산을 쓰기로 결심하고 날마다 자선을 실천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더욱이 드는 지난날의 탐식과 탐욕의 죄를 보속하려고 금요일마다 금식하였다. 무엇보다도 천주교를 알리려고 곳곳을 찾아다녔고, 주일이나 축일이면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음식을 나눌 때, "오늘은 주님의 날이니 거룩한 기쁨으로 이날을 지내야 하고, 천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산을 나눔으로써 그분의 은혜에 감사해야합니다."라며 여러 가지 교리를 설명하였다.


열심한 신앙생활이 널리 알려지자 1792년 관장이 원 야고보를 체포하려고 포졸들을 보냈다. 이때 그는 몸을 피할 여유가 있어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원시장은 포졸들에게 잡혀 비장하게 순교하였다. 야고보는 더욱 열절한 마음으로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순교할 열망으로 더 이상 피신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놓고 기도와 신심생활을 계속했다. 때로는 큰 길에서 신앙을 고백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포졸들은 그를 보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이즈음 그는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 신부를 찾아가 성사 받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주 신부는 "교회에서는 두 명의 부인을 데리고 사는 사람을 배척하니 당장 여기서 나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며 거절하였다. 원 야고보는 물러나서 사흘 밤낮을 눈물로 탄식하며 음식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이를 본 사람들이 매우 딱하게 여겨 이 사실을 주 신부께 알렸다. 주 신부는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 곧 첩을 쫓아보내겠는가? 그대가 분명하게 약속하면 성사를 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오." 원 야고보는 "정말이지 저는 교회법으로 아내와 첩을 가지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발 성사만은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여 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첩에게 말했다. "천주교인은 첩을 둘 수 없고, 또한 첩이 될 수도 없소"라고 말한 다음 그녀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주선하여 돌려보냈다. 주 신부와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원 야고보는 영적 준비를 갖추고 절친한 신앙의 벗인 박취득가 함께 덕행을 닦고 심신을 수련하여 순교를 열망하여 드러내놓고 행하는 신심생활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던 포졸들이 첩을 보내고 신자로서 올바른 생활을 시작하자 그를 체포한 것이다.


1798년 덕산 포졸들에게 잡힌 원 야고보는 옥에 갇혔지만 한 달 동안 심문을 당하지 않았다. 심문이 지연되는 까닭이 포졸들의 농간이라고 생각한 그는 "나를 관자에게 출두시키든지 석방하든지 하라" 하고 용감하게 독촉하였다. 마침내 관아에 호출되어 심문이 이루어졌다.


관장이 물었다.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것이 참말이냐?"


"예, 과연 천주님을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려고 천주교를 봉행합니다"라고 원 야고보는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관장이 다그쳤다.


"그렇다면 네 공범들을 말하라."


원 야고보는 "저와 같이 천주님을 섬기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이 간절한 사람이 셋이 더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아마도 열의에 찬 신앙 동지들이 서로 밀고하여 함께 순교하자고 한 약속했던 일을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 말을 한 뒤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관장은 "더 분명히 말하라"며 거듭 다그쳤지만, 원 야고보는 "만번 죽어도 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답했다. 이로 인해 매질과 주리를 트는 형벌을 받았으나 그의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덕산에서 심문과 형벌을 견딘 원 야고보는 홍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무서운 고문을 또 당했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줄기차게 교리를 설명하던 그는 다시 덕산으로 옮겨져 고문을 받다가 두 다리가 완전히 부러지고 말았다.


또다시 감사의 명으로 그는 충청도 병사(兵使)가 머물고 있는 청주로 압송되던 날이었다. 아내와 자식,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그들을 가까이 오라도 하여 "천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할 때에는 인간 본성의 정을 따르지 말아야 하네. 모든 공생과 고통을 잘 참아 받으면 우리는 기쁨 가운데 천주님과 착하신 동정 마리아 곁에서 서로 만나게 되네. 자네들이 여기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고 내게 해로울 수밖에 없네. 그러니 제발 이성을 따라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게" 하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첨이었던 여인이 사람을 보내어 마지막으로 한 번 보기를 원했지만, 원 야고보는 "왜 나의 대사를 그르치려는가!" 하며 청을 거절하였다. 그는 두 다리가 완전히 부서지는 형벌에도 의연하였지만 혈육의 정 앞에서 마음이 흔들림을 걱정하여 이성으로 협조를 부탁하였고, 연연한 세속의 정도 주님 사람의 질서 밖에서는 한갓 장애물이라는 것을 준엄히 선언하며 대사를 그르치지 말라고 장하게 호소하였다.


인간의 본성으로 견디기 어려운 이 고통을 이겨낸 원 야고보의 위대한 인내, 이는 그리스도교 진리의 승리일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그 인내를 보상해주실 수 있으리라.


청주에 이르러 원 야고보는 마지막 심문을 당했다. 영장은 그를 살려주겠노라며 배교하라고 유혹하였다. 하지만 그는 "저는 9년째 천주님을 위해 순교하기를 원하였습니다"라는 결의에 찬 대답을 하고는 어떠한 심문과 형벌에도 의연히 침묵했다. 영장은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자 화가 나서 하루종일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위대한 증거자 앞에서 이성을 잃은 영장은 다음날 다시 고문을 시작하여 거의 한달 내내 태장, 주장, 곤장, 주리 따위의 온갖 형벌을 가했다. 마침내 주님께 그의 장한 결의가 받아들여져 원 야고보는 1799년 3월 13일 장하치명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70세였다.


그런데 그가 죽은 뒤 상처투성이인 육체는 신비로운 광채에 휩싸여 있었으니, 그 모습을 보고서 50여 가구가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순교의 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 되었으며 박해 속에서도 한국 초대교회가 성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다! 하루를 살더라도 순교자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경향잡지, 1998년 3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김시우 알렉스 - 주님! 이 몸의 소망입니다


을해년(1815년) 음력 2월 22일 청송(靑松) 노래사(老來山) 기슭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있었다. 김시우 알렉스(1781-1815년)는 차가운 밤하늘의 영롱한 별빛을 바라보며 주님을 애절하게 불렀다. "주님! 당신을 따르는 것이 이 죄인의 소망입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거두어주소서." 그렇지 않아도 반신불수의 몸에다 포승이 옥죄여 고통스러웠고, 걸을 수 없도록 묶인 채 끌려가면서 가끔씩 의식을 잃기도 했다. 종아리에 흐르던 피가 신발 속으로 들어감을 느꼈고, 무릎과 종아리의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온몸을 떨어야 했다. 그는 이렇게 노래산 교우 촌에서 포졸들에게 잡혀 경상도 경주감영으로 압송되는 중이었다.


'어떻게 노래산의 교우촌을 관아에서 알았을까?' 김시우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가운데서도 일말의 의심과 놀라움에 치를 떨었다. 숨은 신앙의 보급자리였던 경상도 신간벽지의 교우촌이 완전히 뿌리뽑히고 마는 슬픔과 통한의 눈물 속에서 밤하늘의 별빛은 흐려졌다.


1814년, 무섭고 참혹한 흉년이 들었다. 한 해 동안 지은 농사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일찍이 사람들이 겪어본 적이 없는 무서운 기근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길가에 쓰러져 죽어갔다. 이 불행한 시기에 경상도 북부 산간벽지에 있던 교우촌 신자들의 삶은 더욱 비참했다.


1801년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나 우리 나라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모두 희생되고 오가작통법이 시작되어 신자들은 철저히 밀고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살아남은 교우들도 마을에 더 이상 머물러 살 수 없게 되자 신앙생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산간벽지 심산유곡에 은밀히 모여든 신자들은 그곳에 작은 교우촌을 이루고 추위와 굶주림과 맹수의 위협을 받으면서 오직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영적 기쁨으로 함께 살았다. 이렇게 1801년 박해 이후 경상도 북부 산간지역에 몇 개의 교우촌이 이루어졌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 지내게 된 이 교우촌 사람들은 어쩌면 역사 밖에서 잊혀진 채 망각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1814년 가뭄과 홍수로 입은 재해는 비참한 기근을 가져왔고, 이 기근 속에 숨겨진 교우촌이 역사 안으로 들어와 밝혀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온 나라를 휩쓴 1814년 흉년에 교우촌 신자들은 오히려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그 까닭은 비록 풀뿌리와 나무껍질일망정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나누어 먹고 함께 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모자라는 것은 나누며 함께 하는 마음인 것 같다.


이런 불행 가운데 전지수라는 부끄러운 배교자가 경상북도 북부 산간벽지에 숨어사는 교우촌 사람들을 등쳐먹으려는 흉악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는 경상도의 교우촌을 돌아다니며 돈과 옷가지를 구걸하였다. 교우들은 순박하게 성서 말씀에 따라 나그네를 그리스도처럼 대접하고 곤궁한 가운데도 힘껏 도와주었다. 전지수는 그 흉년에도 교우촌을 돌아다니며 얻어먹고 살 수 있었다.


그 해가 저물고 겨울이 되면서 노래산은 눈에 덮였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교우촌이 눈 속에 묻히면서 더 얻어먹을 것이 없음을 잘 아는 전지수는 교우들의 하찮은 재산을 노려 배은망덕하게 이 교우촌을 안동관아에 밀고하였다. 전지수의 밀고를 받은 안동관아에서는 교우촌 신자들을 한꺼번에 다 잡아들이려고 교우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때를 노렸다. 그때가 을해년 음력 2월 22일, 부활전야였다.


날이 저물자 교우들은 굶주림과 추위속에서도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부활찬미경을 합송하려고 한자리에 모였다. 고통 속에서도 영적 기쁨을 누릴 줄 알던 교우촌 신자들이 부활찬미경을 합송하면서 잔잔한 희열에 젖어들 때, 밀고를 받고 때를 노리던 포졸들이 별안간 횃불을 들고 들이닥쳤다. 놀라고 당황한 교우들 가운데 청년 고성대와 성운 형제가 앞서서 포졸들에게 대항했다. 포졸들은 이 당찬 저항에 놀라며 불을 들어 자신들이 관아에서 나온 포졸임을 밝혔다. 산적들의 습격인 줄 알았던 교우들은 포졸임을 알고는 곧 양처럼 순하게 포승을 받았다.


김시우는 마비되지 않은 손으로 축일표와 기도문을 들고 교우들과 함께 예식에 참례하고 있었는데, 포졸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반신불수인 그를 병신이라 하여 도외시한 것이다. 순교의 기회를 놓치는 안타까움과 동료들과 떨어져 버려질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는 포졸들에게 호소했다. "이 보시오 포장, 나도 천주님을 공경하는 천주교 신자인데 어찌 나만 잡아가지 않으려 하오." 포장은 두려운 줄도 모르고 나서는 반신불수 김시우를 얄밉게 보고 그도 동아줄로 결박하여 다른 교우들과 함께 관아로 끌고 갔다. 알레스는 기쁜 낯으로 순교의 핏빛 길을 따랐다. 청송 노래산 산길, 성한 사람도 걷기 어려운 길을 반신불수의 몸으로 포승에 묶인 채 경주가지 백리가 넘는 길을 참혹하게 끌려간 그는 무릎아래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상처투성이로 옥에 던져졌다.


경주감영에서 심문을 받으며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여러 차례 형벌을 당해야 했는데, 몸은 비록 불구이나 항구한 신앙 자세에 관원들도 감탄하며 그를 칭찬하였다.


김시우는 경주에서 상급 관청인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감사가 그에게 물었다. "네가 예수를 흠숭한다고 했는데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의 매에 맞아 죽은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에게 맞아 죽은 사람을 흠숭할 이유가 무엇이며, 그런 죽음이 어찌 훌륭하단 말인가." 김시우가 대답하였다. "9년 동안 장마가 졌을 때, 하우(夏愚) 임금께서는 온 나라를 두루 다니시며 백성을 구하려고 온갖 일을 다하셨습니다. 이런 행동을 어찌 훌륭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후세 사람들은 그를 성군이라 합니다. 그러나 하우 임금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물질로 구원했는데도 고금에서는 그 이름을 칭송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계만방의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렇듯 은혜를 베푸신 이를 섬기지 않는 자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감사께서도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흠숭하며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알렉스는 큰 언변을 지녔고 동서고금의 역사와 문학에 통달하여 관아에서 심문 때마다 창조주이신 천주님의 존재, 강생과 구속, 상선벌악 등 주요 교리를 열절하게 증언했다. 감사는 불구자인 김시우에게 번번히 짐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그의 턱을 쳐 말을 못하게 하고 고문을 더욱 심하게 가하였다.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고 결안문에 수결을 놓았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는 날을 옥중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김시우는 반신불수의 몸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짚신을 삼을 수 없었다. 종일 짚신을 삼아 바쳐야 옥중에서 공전으로 국밥 한 그릇을 얻어 먹을 수 있는데, 짚신을 삼지 못했기에 먹을 것을 줄 수 없었다. 굶주림과 형벌로 그는 더욱 쇠약해졌다. 18일 동안 굶었을 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고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난 뒤 숨을 거두었다.


그 때 알렉스는 동정의 신부이었다. 신자들은 그를 참으로 영예로운 증거자의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경향잡지, 1998년 4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김강이 시몬 - 강원도 원주의 첫 증거자


태백산맥이 용틀임하는 강원도는 산세가 깊고 험해서 무수한 박해로 고초를 겪었더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좋은 피신처가 되었다. 1801년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가 있은 뒤 많은 신자들이 강원도로 이주했다. 그러던 1815년, 경상도에서 일어난 박해 때 잡혀간 신자들 가운데 몇 명이 모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강원도로 피신한 신자들을 밀고하는 일이 생겼다. 이로 인해 박해의 손길이 강원도까지 미치게 되었고, 강원도의 으뜸 고을인 원주에서도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드러낸 이가 나타났다. 바로 김강이(金綱伊, 1755-1815년) 시몬이다.


김강이는 '여생'이라 하기도하고 '여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충청도 서산지방의 중인 출신이었다. 그느 어려서부터 성격이 고상하고 용맹하였으며 가세도 넉넉하였다. 김강이가 어떻게 천주교를 알고 신자가 되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신부가 입국하기 전에 영세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도 초대교회의 신앙 선조들처럼 책으로 교리를 배우고 신앙 동지들과 함께 신앙을 실천함으로써 입교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신자가된 뒤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시몬은 집안에서 거느리던 종들을 모두 모아 자립할 수 있을 정도의 재물을 나누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너희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다." 그리고 나머지 재산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고향을 떠났다. 그는 신앙적 삶에 전념하려도 친지와 친척을 더나 동생 김창귀 타데오와 함께 전라도 고산으로 이사하였다. 영적 목마름으로 주님의 길만 찾으려는 시몬에게 자비로운 섭리의 손길이 뻗쳐 그곳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나라의 사목을 위해 최초로 입국했던 주문모 신부는 1795년 4월 고신에 살았던 당대 한국교회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분이었던 이존창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김강이는 신부님을 뵙게 되었고, 그 감격과 기쁨으로 몇 차례 신부님의 처소를 머물면서 온갖 영적 목마름을 다 풀었다. 그리고 뜨거운 열정으로 봉사하며 신자들한테 모범을 보였다.


이러한 열성 때문에 181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관아에서는 김 시몬을 유력한 천주교 지도자로 지목하고 그의 인상과 특징을 적은 것을 포졸들에게 나누어주어 사방을 두루 다니며 그를 잡아들이라고 했다. 박해 때 포졸들한테 인상과 특징을 적어 체포하게 한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이 때문에 시몬은 1년 이상 숨어 살아야 하는 곤경에 처했고, 그가 숨어사는 동안 아내가 체포되어 1년동안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기도 했다.


김강이는 좀더 안전하게 몸을 숨겨야 했고 또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등짐장수로 변신하기로 결심하고, 등짐장수꾼들 틈에 끼여 외교인인 것처럼 행세하며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 치열한 박해를 피해 등짐장수로 변신하면서도 은밀하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파하였고 몇 명의 등짐장수를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영세한 뒤 오직 영적인 삶을 갈구하여 종들과 재산을 버리고 고향을 떠났던 그가 포졸의 추적을 피해 등짐장수로 변신했지만 그 생활로 신앙생활을 할 시간도 자유를 가질 수 없었다. 고심하던 가운데 박해의 고삐가 주춤해진 틈을 타 그는 이 생업을 버리고 경상도 머루산으로 피해 농사를 지었다. 이때 김시몬이 권유하여 입교한 신자 몇 사람이 그를 따라 가족을 데리고 함께 들어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 이웃의 몇 집이 또 영세하여 교우촌을 더 넓혔으나, 포졸들의 추적이 계속되자 교우촌 사람들은 이사를 거듭하며 울진까지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 되었다. 김강이의 마지막 정착지도 이곳이다. 울진에서 경상도 박해 때 잡혀간 시몬의 하인의 마지막 정착지도 이곳이다. 울진에서 경상도 박해때 잡혀간 시몬의 하인이 밀고하여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만 것이다.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를 묶고 그가 가진 재산을 탐욕스럽게 휩쓸어갔다. 그리고 안동관아로 압송된 때가 1815년 4월이었다.


김 시몬이 안동관아 옥에 이르렀을 즈음 이미 갇혀있던 많은 교우들을 만났는데 모두 굶주림에 지친 참혹한 모습이었다. 얼마나 굶었는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행동마저 느리고 둔탁해서 눈물겹기만 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본 그는 포졸들이 약탈해간 자신의 가산을 돌려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관장에게 가산을 돌려줄 것을 청했다.


굶주림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엄숙한 진실이다. 먹어야 함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의 욕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증거자들은 이 절박한 원초적 본능의 욕구도 하느님 사람의 질서 안에서만 용납했다. 이 준엄한 순교자들의 모범이 있는 한 주님 사랑의 지서를 위반한 우리의 잘못을 합리화할 수 있는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겸허한 자세의 회개가 있어야 할뿐이다.


관장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포졸들을 꾸짖고 가져간 물건들을 모두 가져오게 했다. 그는 돌려 받은 가산을 모두 갇혀있는 교우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옥에 갇혔던 교우들은 참혹한 처지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뒤 그는 포졸들에게 원망과 분노를 사 문초를 다할 때마다 더욱 가혹한 홀대를 받아야 했다. 가혹한 문초에도 굴하지 않은 김강이의 모습을 더욱 얄밉게 생각한 포졸들은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지만 그는 의연히 이겨냈다.


5월에 시몬은 동생 타데오와 함께 살았던 강원도로 이송되어 원주감영으로 옮겨졌다. 여기서 몇몇 교우들을 만났는데 이들도 그와 함께 이웃하며 은밀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원주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옥에 갇히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들은 바로 강원도의 첫 증거자들이요 원주감영에 투옥된 최초의 신자들이다.


시몬은 이곳에서 자랑스러운 원주의 첫 증자로서 결연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원주감영의 형리들은 말로만 듣던 천주교 신자들의 의연한 자세와 부드러우면서도 강철보다 더 강한 의지를 직접 보고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명심에 불타 모질고 거친 형벌로 신자들을 위협하며 심문하였다. 형리들의 심문이 모질수록 그는 더욱 굳건하고 결연한 태도를 보이며 모든 형벌과 유혹을 이겨냈다. 그러나 통탄스럽게도 고난을 함께 했던 타데오가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변절하자, 형이 아우의 변절을 대신 갚기라도 하듯 더욱 준열함 신앙심관 인내를 보여 관장과 형리들을 감동시켰다.


이러한 김강이 시몬의 불굴의 의지를 보고 더 이상 회유할 필요가 없음을 깨닭은 관장은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리도록 처리했다. 조정의 회시가 내려와 사형을 집행하려 할 때 그는 중병을 앓고 있었다. 관장은 중병을 앓고 있는 이를 사형시킬 수 없다며 집행을 연기했다. 그는 그토록 원하던 참수순교를 하지 모하고 다만 주님 섭리에 겸허하게 의탁하여 1815년 11월 5일 숨을 거두었다. 그는 60세를 넘긴 나이에, 옥에 갇힌 지 8개월만에 원주의 첫 증거자가 되었다.


<경향잡지, 1998년 5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 한국 제2의 동정부부 순교자


세계 순교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동정부부 순교자라 하면 우리는 곧 이 루갈다와 유 요한을 생각한다. 순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동정부부 순교자는 한 쌍이 더 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일생을 목자 없는 한국교회에서 사제를 모시려 헌신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북경을 다녀오면서 겪었던 기이한 일화를 자주 이야기했다.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 있는 어느 교우와 은밀히 연락하여 성밖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정하상 성인이 의주에서 짐을 운반하려고 구했던 말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이 약속한 날짜를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하루 늦게 서울에 도착한 성인이 조심스럽게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급히 성인을 찾는 교우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약속한 날짜에 만나기로 했던 서울 교구의 가족이 그 날 모두 관헌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성인은 한편으로 놀라워하면서 말이 다쳐 늦어진 것 때문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닭고 이를 주님의 섭리하고 기억했다.


성인이 하던 성직자 영입운동 근거지를 제공하고 헌신적으로 도와주다가 잡혀간 주인공이 바로 한국 제2의 동정부부 순교자이다. 숙(淑)이라는 관명으로 더 알려진 조명수 베드로와 권 데레사 부부는 초대교회의 박해 속에서 순결한 백합과 순교의 종려나무 가지를 함께 얻었다.


달레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이 아름답고 거룩한 부부를 소개하면서 "신부가 없어 성사를 받지 못하고 미사성제에 참여하지 못하면서도 이와 같이 훌륭한 신자들을 배출하고, 이렇게까지 기묘한 일을 행하는 교회를 가진 민족에게 우리는 크나큰 기대를 갖는다."고 격찬하고 있다.


경기도 양근 태생이 조숙 베드로는 양반집 자손이며 정하상 성인께서 유배지에 찾아가 수하하였던 조동섭 유스티노의 가까운 친척이다. 1801년 박해 때 나이가 어렸던 조숙은 양친과 함께 강원도에 있던 외가로 피난 가서 살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출중한 재능을 보였고, 성품이 착하고 친절하여 나이보다 훨씬 의연하고 성숙했다. 그러나 박해는 계속되고 종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다른 교우들과 접촉이 끊어진 상태에서 베드로는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게 되어 냉담 상태에 이르고 만다. 그의 이러한 상태는 권 데레사와 혼인을 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반면 권 데레사는 어릴 때부터 교리교육의 혜택을 받았지만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2년 뒤 아버지마저 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잃고 만다. 고아가 된 4남매의 막내인 그녀는 어렵게 살았지만 온화하고 상냥한 성품과 애덕으로 외로운 남매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나이가 차면서 그녀의 정신과 덕이 아름다운 용모와 어울려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데레사는 영적인 증진에 더욱 힘쓰며 주문모 신부님을 뵙고 성가를 받는 행운을 맞았을 때, 주님께 사진을 온전히 봉헌하려는 순결한 삶을 굳게 다졌다. 하지만 박해의 시련과 고통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그녀가 18살이 되던 해의 박해에서 큰오빠 권상문은 순교하고 작은오빠 권상학은 추자도로 귀양가게 되자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직 어린 조카를 데리고 서울로 피난했다.


친척들은 과년한 데레사를 얼른 결혼시키기로 하고 혼사를 서둘렀다. 그녀는 자신의 신앙과 순결을 지키려던 영적 결심을 이해 받을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보이지 않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친척의 강권을 피하지 못하여 21살에 결혼하게 되었다. 데레사는 그의 상대가 냉담 상태에 있는 신자임을 알고는 기도하며 자신의 영적 결심을 지킬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였다.


첫날밤 신랑과 마주하였을 때, 데레사는 기도하며 준비했던 편지 한 장을 조용히 내놓았다. 남편에게 순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면서 자신의 결심에 남편이 함께 해 줄 것을 간절히 청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간결하고 거룩한 그 편지를 받아 읽는 순간 참으로 기이하게도 베드로는 오랜 신앙적 열성이 분출하듯 가슴에 차 올랐다. 그 밤에 백년가약을 맺은 이 젋은 부부은 서로 신앙 안에서 남매처럼 생활하기로 약속했다. 그들을 밤새워 주님께 기도하고 감사했고, 더할 수 없는 화목함 가운데 동정부부의 아름다운 삶을 꾸려갔다.


그들은 몹시 가난하였으나 가난을 기쁜 마음으로 참았고, 더욱 알뜰이 절약하여 더 궁핍한 이웃들에게 나누는 애덕을 베풀었다. 베드로는 이 무렵 지난 날 냉담했던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눈물을 흘렸고, 주변에 냉담한 이들을 보면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며 기어이 회두하게 하였다. 그리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열성을 다해 전교하였으며, 이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권 데레사는 남편이 자신의 소망을 들어준 것에 감사하여 어떤 선행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영적인 향상을 열망하여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일을 지키는 것은 물론 엄격한 금욕을 생활화했다. 가끔은 식음과 침식을 잊은 채 기도하였고 교리서를 읽고 이웃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등 신앙 생활의 모범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부를 찾아와서 교리의 해설을 듣고는 흡족한 마름으로 돌아갔다. 부부의 삶이 이토록 영성적 관심과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무르익을 무렵 정하상 성인을 만나 그들 집으로 사제 영입운동을 돕는 거점으로 내놓았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부부의 동정생활은 15년이나 이어졌다. 그 동안 그들의 거룩한 결심은 몇 차례 혹심한 유혹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데레사의 착하고 열절한 권유와 굳건한 의지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 부부는 어려움을 극복할 때마다 더욱 깊은 신뢰와 사랑을 느끼며 서로를 존경하게 되었다. 이들의 영적 사랑과 신뢰가 완숙해질 무렵 주님께서는 부부를 순교의 영광으로 그 삶을 완성시켜 주셨다.


1817년 3월 북경에서 돌아오는 정하상 성인을 은밀히 만나기로 미리 약속했던 날이었다. 베드로가 가르치던 예비신자가 간직한 축일표가 포졸한테 발각되어 부부는 성인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문초를 받을 때, 포청에서는 이들을 예사로 알고 심문했다가 크게 놀라는 일이 생겼다. 특히 데레사의 해박하고 깊은 지식과 정연한 논리 그리고 막힘이 없는 교리 응답에 포졸들도 감탄했다. 준엄한 문초에 겸손하고도 굳건한 자세를 보며 더욱 놀라며 혹독한 형벌을 가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기쁨에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데레사가 남편을 생각하는 열절한 사랑은 절정에 이르렀다. 고난을 함께 받자는 영적 결의와 한없는 사랑, 신뢰로 가득찬 편지를 옥중에서 적어 남편에게 바쳤다. 베드로 또한 아내의 사랑과 격려를 받아 관원들로 하여금 어떤 형벌과 심문으로도 그의 신앙을 굽힐 수 없음을 깨닫게 했다.


이 동정부부는 옥에 갇힌 지 27개월 뒤인 1819년 5월 21일(6월 13일이라는 증언도 있다.)에 참수되어 순교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었는데 그때 데레사는 36살, 베드로는 33살이었다. 처형된 데레사의 시신에는 3번 맞은 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지만 더없이 아름다웠으며, 그녀의 머리채는 대바구니에 담겨져 1839년 순교한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성인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바구니를 열면 현묘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향잡지, 1998년 6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이 막달레나 - 숨은 꽃이 내는 그리스도의 향기


힘겹고 어려운 고통을 당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며 격려하고 그 고통의 의미를 기억한다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성원이 있음을 알면 그는 고통 중에서도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철저히 외면당한채 끝없는 고통 속에 버려진다면 누가 그 힘든 고통과 절망을 견디어낼 수 있겠는가.


우리 순교사에 소중하게 간직된 무명 순교자들은 바로 그 도통과 절망을 넘어선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독은 작은 무덤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 그들의 생애와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동요쳐 그 고결한 의로움을 잊지 않게 한다.


1827년 전라도 곡성 덕실마을에 조그마한 옹기점이 자리하였고, 이곳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위해 주막 하나가 있었다. 일꾼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으며 주막집 주인은 예비신자였다.


가마에서 옹기그릇을 꺼내는 날, 늘 그렇게 해왔듯이 동네 사람들이 모여 그 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며 기쁨을 나누는 술자리가 벌어졌다. 이 술자리에 한백겸이라는 사람도 함께 있었는데 그는 순교자의 아들이었지만 성질이 포악하고 행실이 좋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보고 "훌륭한 순교자에게서 어떻게 저런 못난 아들이 나올 수 있었던 말인가?" 하고 한탄하였다. 그날도 술이 몇 순배 돌아 술기운이 돌자 이 못난 사람이 주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백겸은 자기 술잔이 너무 작다고 투덜거리면서 주막 주인과 옥신각신하다가 주막 주인의 아내에게 대들어 역을 퍼부으며 무지막지하게 손찌검까지 하였다. 신앙심이 아직 깊지 못한 주막 주인은 뜻밖의 모욕을 참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분한 마음에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가지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지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곡성관장을 찾아가 한백겸은 물론 평소에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교우들까지 고발하였다.


주막 주인의 고발을 받고 명백한 증거를 손에 넣은 곡성관장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포졸들을 보내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였다. 1827년 2월에 시작된 이 가슴 미어지는 일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포졸들의 횡포까지 더해져 참혹한 상황으로 확대되었다.


고발당한 신자들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누구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겼을 뿐 아니라 비좁은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했다. 아직 신심이 깊지 못하여 마음이 약한 신자들의 입에서 새오나오는 고발이 더해져 박해는 전라도 전역으로 번지게 되었다. 전라도 전역이 박해의 도가니에 빠지자, 천주교 신자들은 살길을 찾아 헤매며 그들 앞에 내려질 운명을 기다리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도망가는 신자들이나 남아있는 이를 막론하고 아무도 포졸들의 횡포를 피할 수 없었고, 포졸들은 삼엄한 경계를 펴며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잡혀가지 않은 신자라 하더라도 철저하게 약탈당하여 먹을 것도, 가진 것도 없어 잡혀가지 않은 사실을 결코 기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혹독한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배교하였고, 이 때 이들이 받은 문초의 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다. 3월 한 달 동안 계속된 박해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교우들은 환난 속에서도 굳건히 신앙을 지켰는데, 이들은 모두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때 전주감사는 이광문(李光文)이었는데 감사는 잡혀온 신자들을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다루었다. 그는 신앙을 고백하는 굳건한 사람한테 사형을 언도하지 않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료를 고발하지 않는 신자들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마땅히 사형에 처할 사정이 있어도 무한정 옥에 내버려두어 소리 없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게 하였다. 이 기묘한 방법은 결국 감사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성공하였다. 이 방법으로 신자들의 긴장은 풀리고 한없는 감옥생활의 무기력함과 소외감을 갖게 하여 전라도 지역은 가장 많은 배교자를 냈고, 또한 잊혀진 태 죽어가게 하여 주목할 만한 순교자를 아무도 남기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선도 보장되지 않은 비참함 속에 온전히 버려진 채 소외와 고독의 심연에서 신앙을 지켜낸 그 위대한 영혼들을 불행하게도 감사의 교활한 술책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몇 안 되는 소중한 이름만이 전해져 한국교회의 신앙유산으로 간직되었을 뿐이다.


그 가운데 성과 본명만 겨우 전해져 숨은 꽃처럼 살다가 순교한 여인이 바로 이 막달레나이다. 그녀는 초대교회의 온상이라 할 내포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씨는 신자로 이름이 알려진 이 바오로의 누이로서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여 신심이 깊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막달레나가 열일곱살이 되던 해에 교우인 이 안드레아에게 시집을 갔는데 주님께서는 이 혼인을 축복하시어 일곱 자녀를 내려주셨다. 그녀는 자녀를 정성껏 기르고 가르쳐서 훌륭한 신자로 키웠다. 특별한 재능이나 지식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한없는 자애와 성실로 모범을 보여 말보다 실천으로 자녀를 길렀다. 두드러지게 넉넉하거나 자랑할 것은 없어도 따뜻한 사랑 평화가 충만해 소박한 행복에 차있던 이 집안도 전라도 박해의 모진 바람에 휩쓸려갔다. 막달레나는 그 불행했던 박해 때 곡성에서 체포되어 광장 앞에 갔는데 관장은 막무가내로 그의 오라버니가 숨은 곳을 말하라고 윽박질렀다. 밀고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형제애를 저버리는 행위라는 걸 알고 있던 막달레나는 형벌을 꿋꿋이 참아 받으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관장은 이 여인에게서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어 전라감사가 쓰던 계략대로 귀양보냈다.


막달레나의 귀양자는 황해도 백천(白川)읍이었다. 여인으로 겪는 귀양살이의 고통과 돌아갈 기약 없이 아득한 외로움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차라리 옥에서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매맞고 뜨거운 마음으로 격려하며 함께 기도할 수 있었으면 하고 참혹한 옥살이를 바라기도 했다. 헤어진 일곱 자녀의 생사도 알 길이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은 어디에서 어떤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꿈에도 그리던 혈육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몹시 그리웠다. 그녀는 다만 어떤 처지에서라도 주님 구원의 은총 속에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사무치는 고독을 견디어야 했다.


막달레나는 백천읍에서 새로운 시련을 맞았다. 그녀가 귀양지에 도착하자 주민들은 여인의 몸으로 귀양살이를 하게 된 동기를 알고 도와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외로운 여인의 처지를 동정하기보다는 오히려 희롱하고 비웃으며 귀찮게 하고 학대하였다.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쓰라림이었다.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모욕을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인고의 세월은 흐르고 그녀는 적막한 고독 속에 병들어갔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다가 죽어간 그녀의 4년을 알지 못한 다. 병이 깊어가던 어느 날 그녀는 묵주를 들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그 자세로 한없이 깨끗한 영혼을 주님께 바쳤다. 1830년 11월 12일 그녀의 나이 쉰세 살이었다. 숨은 꽃처럼 기도하며 살다가 죽은 그녀의 생애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향기'였다.


<경향잡지, 1998년 7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김대권 베드로 : 내 신앙은 내 살과 뼈에 사무쳐있어


한국 초대교회의 탁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순교자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는 참수 순교하기 전까지 십삼 년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가 가옥에서 쓴 "옥중수기"를 보자, "내 다리의 살은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앉지도 못하였다. 날마다 물만 두세 탕기 먹을 뿐이었다. 상처는 곪아서 견딜 수 없는 악취를 풍겼으며, 감옥은 벌레와 이투성이라서 아무도 내게 접근하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하면 움직일 수 있었고, 이들이 가끔 내 골방을 치워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넉넉히 감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버려진 채 길고도 지루한 옥고를 견뎌냈다. 극한 상황에서도 사랑을 나누며 감사하는 삶을 갈아간 이 신앙의 영웅들을 지방 관리들은 옥에 내버려둔 채 시간을 끌어 지치고 무기력해지게 하는 술책을 썼다. 끝없는 고통만이 이어지는 옥중에서도 신앙 선조들은 더욱 굳건한 신앙을 고백하고 십삼년의 옥고를 견뎌내며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정태봉 바오로, 이태권 베드로, 이일언 욥, 김대권 베드로 등이다. 이들은 모두 십삼년의 옥고를 치르고 신태보와 함께 참수 순교한 증거자들이며, 모두 초대교회의 요람이며 중심지인 충청도 내포(內浦) 출신이었다.


이들 가운데 신태보와 이일언은 칠십을 넘긴 늙은 나이에 극악한 옥고에도 신앙의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일언(李日彦)은 형장으로 끌려갈 때 울며 따라오는 가족들을 향해 "내 여러 해 동안 옥에서 고생하다가 이제야 천국으로 가게되니 슬퍼하지 말고 나의 행운을 기뻐하라. 그리고 너희들도 훌륭한 신자다 되도록 노력하여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태권(李太權)은 심약하여 두 번이나 배교하고 풀려난 지난 날의 잘못을 되갚기라도 하듯 굳은 신앙을 증거하여 관헌을 경악하게 한 쉰 여덟 살의 장년이었다. 정태봉(鄭太奉)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평소 도마를 턱에 대고 순교하는 모습을 연습했던 그는 혹독한 형벌을 견디어 마흔세 사의 한창 나이로 순교의 피를 영광스럽게 봉헌하였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고 순교한 김대권은 체포된 경위, 장소 그리고 나이고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남신 옥중 생활과 생애의 한 대목이 소중히 전해질 뿐이다.


김대권(金大權)은 충청도 청양(靑陽)의 수단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에서 살았던 신자로서 1816년에 순교한 김화준 야고보의 형이다. 그는 어려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 입교하였으나 계명을 지키지 않아 신자생활을 하지 못한 채 살아갔다. 그러다가 양친이 죽은 뒤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공주로 이주하여 옹기점에서 일하며 끼니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아내와 불화로 부부싸움을 자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한바탕 언쟁을 벌인 뒤 베드로는 안방에서 자고 아내는 부엌에서 밤을 지새게 되었다. 그가 막 첫잠이 들어다가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지내던 하느님, 어린 시절에 동생과 함께 그토록 열심히 기도 드렸던 그 하느님의 음성이 자신을 부르는 듯하여 벌떡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 호랑이 한 마리가 부엌에서 잠자던 아내를 물고 달아나는 참이었다. 김대권은 황급히 소리를 지르며 호랑이를 쫓아가 겨우 아내를 구해냈으나 아내는 다리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다음날 베드로는 아내에게 조용하고 정중하게 말하였다. "이번 일은 우리가 너무 불화해서 생긴 일인데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건질 수 있도록 해주셨으니 우선 감사를 올려야 하겠소. 또 이 지엄하신 하느님의 교훈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잘 받아들여서 이제부터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일을 하면서 죽을 때가지 화목하게 살아가야 하겠오." 부부은 이렇게 다짐을 하고 하느님께 회개의 기도와 보속의 눈물을 흘리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김대권의 삶은 회개의 새로운 삶이었다. 그는 주일마다 집안은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탄축일이 되면 언제나 산으로 올라가 성서와 신심서적을 읽고 묵상을 하며 기도로 밤을 세웠다. 사순 시기가 되면 베드로는 더욱 열성을 다해 기도와 묵상을 하고 하루에 한 끼만 먹었는데, 그것도 밥 한 사발을 맹물에 말아 반찬도 없이 소금을 찍어먹으며 고신극기로 절제하였지만 그의 체력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마음속 깊이 순교를 열망하다가 1816년 동생이 순교할 때 사용하였던 나무토막을 찾아 가금 거기에 턱을 괴고 죽음과 순교를 묵상하며 깊은 침묵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1827년 전라도에서 박해가 일어나고 김대권도 다른 신자들과 함께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의 체포 경위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그는 동네 신자들에게 먼저 피신하도록 권유했고, 포졸들에게 잡힐 때는 마치 잔치 집에라도 가는 듯이 기쁨에 찬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는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았듯이 관원과 관장을 또한 무서워하지 않고 기쁨과 열의에 찬 모습으로 교리를 거듭 설명하며 신앙을 굳건히 증거했다.


"네가 그 사교를 믿는다는 말이냐?" 하고 관장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나는 절대로 사교를 믿지 않고 다만 하늘과 땅의 참 천주를 공경할 뿐입니다"라고 베드로는 대답했다. 관장은 김대권의 옷을 벗기고 혹독하게 매질하였다, 다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예수님과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만을 부르며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이러한 형벌에도 아랑곳없이 그가 "칠극"의 교리 내용을 거듭 설명하자 관원들은 쇠꼬챙이로 온몸을 마구 찌르는 형벌을 가했고, 결국 베드로는 혼절하여 의식을 잃고 민신창이가 되어 옥에 던져졌다. 그가 옥중에서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때 상처투성이의 몸을 바라보고는 "이것으로 천주의 은혜를 만 분의 일이라고 갚을 수 있겠는가?" 하며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려 옥중의 모든 신자들과 포졸까지도 감동케 하였다.


관장은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그의 아들을 데려다가 목에 칼을 겨누고 배교하지 않으면 못을 자르겠다고 위협했다. 김대권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내 아들이 이 일로 목이 잘린다면 이 아이에게나 나에게는 큰 영광이 될 것인데 어찌 사사로운 목숨에 연연하여 하느님을 배반하겠소!" 관장은 더욱 화를 내며 이제 배교하지 않으면 네 아들뿐 아니라 너도 함께 사형에 처해 도륙하겠다고 최후의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김대권은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하느님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내 살과 뼈에 사무쳐 있어서 사지를 자르면 그 하나하나에 이 생각이 배어있고, 뼈를 부수면 그 조각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만 번을 바꾸어 생각을 해도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관장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를 십삼 년 동안 옥에 버려두었다. 그는 옥에서 신앙동지들과 함께 고난 중에 있는 교우들을 격려하며 살다가 1839년 5월 29일 내 명의 교우와 함께 그토록 갈망하던 참수 순교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었다. 그의 마지막 증언은 수많은 옥중 순교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경향잡지, 1998년 8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이경언 바오로 - 순결과 청빈으로 산 증거자


조선시대 순조 임금 때에 서울 장안에 유순하면서도 강인한 성격을 지닌 선비가 살았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끼니를 잇지 못하였고, 부인의 성격이 고약하여 한시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선비는 수많은 곤욕과 풍파를 놀라운 인내로 견뎠고, 얼굴에는 언제나 화기가 가득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며 따랐다.


어느 날, 노파 하나가 선배의 집을 찾아와 조용히 편지 한 통을 내놓았다. 내용은 어떤 과부가 첩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간절한 청과 이를 받아들여 달라는 것이다. 과부의 재혼을 엄격히 금지하던 그때, 젊은 과부들을 이렇게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몹시도 가난하고 또 아내 때문에 힘들게 살아온 선비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복이 제 발로 찾아 온 격이었다. 하지만 선비는 편지를 들고 온 노파를 보고 작지만 엄중한 목소리로 "우리 천주교에서는 그런 법도가 없습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노파는 천주교는 왜 넝쿨째 굴러온 복을 차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젊은 과부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예물을 갖추어 정중하게 청하라고 노파를 계속해서 보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매몰차게 노파를 물리쳤다. 그러나 세 번째 간절한 청을 받자 선비는 노파를 따라나섰다.


노파는 놀랍고도 반가워 자신의 집으로 인내한 다음 자신은 과부의 유모라고 밝혔다. 날이 저물어 유모의 안내를 받아 어마어마한 부잣집 안채로 들어가자 소복한 젊은 과부가 등잔불을 들고 나와 예의를 갖추어 선비를 맞았다.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자세로 먼저 하느님의 계심과 천지창조, 영혼의 구원, 죄와 지옥의 영원한 죽음에 대한 교리를 들려주었다. 이들의 기묘한 만난은 이렇게 이루어졌고 선비는 두 번재 만남에서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원의 신비를 설명하고 천주교의 열두 가지 기도문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는동안 과부는 유모를 통해 값진 예물과 보화를 선비에게 예속해서 보냈지만 그는 재물들을 갖지 않고 유모의 집에 모아놓으니 여전히 가난하고 궁색하게 생활했다.


주님은 이들의 남만을 축복해 주셨고, 과부는 선비의 가르침을 소중히 마음에 새겨 열심히 기도문을 익혔다. 그들은 부부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된 것이다. '청혼을 구원의 기회로 승화시키자!' 이것이 선비의 본뜻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과부가 갑자기 병들어 눕게 되었다. 병은 급격히 악화되어 백 가지 약이 효과가 없었다. 유모로부터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은 선비는 그녀의 집으로 가 열정을 다해 아직 들려주지 못한 교리를 알려준 다음 대세를 주었다. 과부는 선비의 마지막 설교와 대세를 받은 지 3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과부가 세상을 떠난 뒤 유모는 그 동안 과부가 선비에게 보낸 수많은 재물을 선비의 몫으로 주려했다. 그러나 선비는 과부의 친척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그 동안 과부에게 빌려 쓴 돈을 갚는다는 이유로 재물을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이처럼 영웅적인 순결과 청빈을 동시에 실천한 이종회라고도 불리는 이경언 바오로(1790-1827년)이다. 그는 1801년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와 우리 순교사의 꽃인 동정부부 순교자 이순이 루갈다와 한 형제로, 참으로 천주교인다운 가정에서 훌륭한 종교교육을 받고 자랐다. 이경연은 몹시 가냘프고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강인한 성격과 유순하면서도 사려 깊고 동정심이 많은 착한 마음을 지녔다.


1801년 박해 때 그의 형과 누이가 참수당하니, 지체 높은 왕가의 후예였던 가문은 몰락하여 관직에서 추방되었고, 재산은 약탈당해 완전히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그때 겨우 열한살 이었던 바오로는 홀어머니와 형수와 함께 서울에서 가난하고 구차하게 살던 중 나이가 차서 중인(中人)집안의 처녀와 혼인하였다. 하지만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어려워지자 1815년에 어머니와 형수를 충청도 연풍에 사는 큰 형 집으로 보내고, 이들 부부만 서울에 남은 것이다.


이 바오로는 끓임 없이 성서를 읽었으며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교우들의 집을 방문하기를 좋아하며 교리 전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그는 냉담자들을 만나면 정성을 다해 권고하거나 열띤 토론과 뛰어난 변론으로 교우들을 격려하며 깨우쳤다. 또한 지지리 가난하면서도 불쌍한 이웃을 보면 어떻게든 도우려고 애썼으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 곤경을 덜어주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겸손되이 청한 이경언은 이를 알려준 형제에게 감사했고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고쳤다. 이러한 그의 심경은 옥중에서 현석문에게 쓴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 … 정말이지. 우리들의 우정은 보통의 우정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이 아무도 내 결점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니 지금 곰곰이 생각하면 형은 참으로 나의 보물이었습니다. …"


그는 기도와 묵상에 전념할 때는 주위에 누가 있어도 알지 못하였으며, 또 여인과 대화할 때는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아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경언의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의 모범된 자세를 따르려는 이들이 더욱 늘어났으며, 수많은 냉담자들이 회개했다. 또한 바오로는 생계의 한 방편으로 성서를 베끼고 상본을 모사하여 교우들에게 팔기도 했는데, 사실 그 돈의 대부분은 북경에 보내는 한국교회의 밀자들을 위한 여비로 쓰였다. 그는 북경 밀사 파견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데 가장 많은 힘을 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북경의 주교가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될 남녀 회장 몇 사람을 선발하라고 명하자 바오로는 회장들을 양성하는 데 열성을 보여 첫째 주일마다 자신의 집에 회장 후보자들을 모아 묵상 자료를 주며 참되 신심을 가지도록 격려했다.


마음속으로 항상 순교하고자 하는 열망을 지녔던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 자료로 삼았다.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죽을 준비를 하라고 권고하며 "방방곡곡에 천주교를 퍼뜨리려면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증거라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1827년 전라도에 박해가 일어나고 전주에서 문초가 벌어지자 그가 베껴서 전파한 책과 상본이 고발되어 전라감영에서 파견된 포졸들한테 같은 해 4월 21일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관헌들 앞에 출두한 이경언은 형과 누이의 영광스러운 발자취를 따라 용감히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였다.


1827년 6월 27일 옥중에서 기진하여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선종하기까지 이경언 베드로 쓴 수기와 편지는 교회사의 소중한 자료로 전해진다.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경언을 "조선교회의 가장 위대한 영웅의 하나!"라고 하였고, 그의 신앙고백을 "조선 신자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천주교인들에게 찬미를 받아 마땅한 모범을 남겨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향잡지, 1998년 9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신태보 베드로 : 옥중수기를 남긴 순교자


"네가 3도를 돌아다니며 사교(邪敎)를 전파하여 백성을 현혹한다니 그것이 참말이냐?"

"저는 사교를 믿지 않고 다만 천주의 교리를 따를 뿐입니다."

"그래 천주교를 믿으면서 그 교를 국법으로 엄금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어떻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잘 알고 한 것입니다."

"알고서 왕명을 어겼으니 너는 죽어 마땅하지 않겠느냐?"

"제가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상감께서 너희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하시니 마음을 돌리지 않겠느냐?"

"순경(順境)에 있을 때에는 임금을 섬기다가 역경(逆境)에 처해서 왕명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겁한 자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만 진리를 따르고 어려운 세월을 만나면 그것을 버리는 자는 그보다 더 비겁한 자입니다. 관장님은 법대로 처리하십시오. 저는 제 신념을 따라 행동하겠습니다."


순교자 신태보(1768-1839년)의 "옥중수기"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의 활동은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에 미쳤다. 특히 1801년 전국적인 박해로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려고 사제 영입운동에 참여하여, 친척이자 주동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이여진에게 북경에 다녀올 여비를 마련해 주는 등 온갖 노력과 활동으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 가운데 더욱 그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신태보가 남긴 두 개의 소중한 기록 때문이다. 첫째가 자신의 옥중 심문과 생활을 적은 "옥중수기"이다. 이는 당시 선교사로 한국에 와있던 프랑스 신부인 샤스탕의 요청으로 쓴 것이다. 둘째는 1801년 최초의 전국적 박해가 있은 뒤 살아 남은 여교우와 어린이들을 이끌고 눈 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산간벽지로 이동하는 여정을 적은 기록이다. 교우들은 밀고를 피하고 또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고향을 떠나 심산유곡에 숨어 은밀히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포졸의 감시 속에 여비도 장만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교우들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며 또 먼 여행을 할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짧지만 그가 남긴 기록으로 그때의 참상과 고난을 극복하여 산간벽지로 피신해 가던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신태보는 사제 영입을 위해 북경을 왕복할 여비를 마련하느라 많은 고생을 한 뒤에 이제는 오직 자신의 구령을 위한 기도 생활에 전념하려고 긴 유랑 끝에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서 홀로 살았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 그가 수많은 교회 서적을 필사하였기에 그가 베낀 교회 서적들이 증거물로 관헌의 손에 들어가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1827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밀고 당하리라고 짐작하여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려 있으나 그해 4월 22일 새벽닭이 울 무렵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상주에서 전주로 압송되면서, 전주 진영에서 문초를 받고 걷지도 못해 소와 말에 채워져 호송되고 있는 교우들을 만났다. 신태보는 그들과 밤을 세워 이야기하면서 그들에게서 관가에 압류된 책들 가운데 자신이 필사했던 책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행적을 숨길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옥중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한 그는 그 사실을 자신이 쓴 "옥중일기"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첫날 심문에서 앞의 문답이 있은 뒤 관장은 가장 가혹한 고문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내 팔을 뒤로 결박하고 팔과 등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넣고 나졸 하나가 그것을 다룰 참이었다. 그뿐 아니라 말총으로 꼰 밧줄을 가지고 양 무릎과 복숭아 뼈 있는 데를 묶어놓고는 양쪽 정강이 사이에 굵다란 몽둥이를 열 십자로 끼워 두 사람이 각각 한쪽 몽둥이 끝을 타고 앉아 누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등 뒤에서 끼운 몽둥이를 잡아당기고 또 한편으로는 다리 사이에 끼운 몽둥이를 힘껏 누를 적에 내 몸은 공중에 떠오르는 것 같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온몸의 뼈가 다 바수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까무러쳤다. 관장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결박을 좀 늦추어주라고 하였다. 잠시 후 의식을 회복하기는 하였으나, 햇빛이 활활 타는 관솥불같이 보였고, 팔다리가 모두 떨어져나간 것 같았고, 온몸이 불덩어리 같았다."


이러한 심문과 문초는 하루종일 이어졌고 포졸이 뾰족한 작대기로 옆구리를 찌르며 묻는 말에 답하기를 재촉하였다. 신태보가 다른 동료들에게 해가 미치지 않도록 간단히 답하고 침묵하자 관장은 호통을 치며 다시 고문을 명했다. "내 다리를 번쩍 쳐들고 양쪽 몽둥이를 힘껏 내리 눌렀다. 내 몸에는 이미 목숨이 붙어 있지 않고, 입에는 침이 바싹 마르고, 혀가 입 밖으로 힘없이 나오고, 눈이 툭 불거져 나오고, 온몸은 땀투성이가 되었다. '바른 대로 모두 불어.'하고 포졸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빨리 죽음을 내려주시기를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그날은 4월 그믐이었다. 밤이 되니 관장이 이렇게 말하였다. "날이 저물었군. 오늘은 첫날이기에 겨우 본보기만 보여주었을 뿐이지만 내일부터는 정말 호된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오늘 밤 잘 생각해서 목숨을 보전하도록 해라." 그런 다음 내 결박을 풀고 나졸 두 명이 다리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옥으로 데리고 갔고 이내 저녁을 갖다주었다. 그러나 나는 앉을 수도 없고,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밥 냄새를 맡으니 구역질이 나서 조금도 먹지 못하니 막걸리 한 사발을 입에 갖다대어 주기에 조금씩 몇 모금 마셨다."


신태보는 첫날 고문에 이미 앉지도 먹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큰 칼을 씌워 밤을 세우게 했다. 다음날 이여진이 숨은 곳을 말하라고 윽박질렀고, 그가 이를 거절하자 다시 고문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나는 다시 주뢰의 형벌을 당하게 되었다. 바로 얽은 것을 조이는 바람에 나는 벌써 의식이 거의 없어졌는데 너무 세게 눌렀기 때문에 몽둥이가 부러졌다. 이 소리를 듣고 나는 다리가 부러진 줄 알고 질겁을 하여 내려다보았다. 나는 말이 들리기는 하여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술을 갖다주었으나 받아 삼키지 못하였다."


신태보에 대한 심문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아침마다 문을 여는 소리가 음산하고 불쾌하게 들렸다. 그는 고문 중에 까무러치고 물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하면서도 "칠극"을 해설하고 교리를 설명하며 꿋꿋이 신앙을 고백했다. 마침내 사형이 내려졌으나 집행이 연기되었다. 옥에서 생긴 상처가 곪아 악취를 풍기는 가운데 시중드는 젊은 교우들의 애덕을 감사하는 말로 그의 수기를 끝내고 있다.


그는 13년의 옥고를 끝에 1839년 5월 29일 70세의 고령으로 전주 감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가 남긴 수기는 야만적인 고문을 신앙으로 이겨낸 영웅들의 모습을 후세들에게 증언하고 있다.


[경향잡지, 1998년 10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박사의 안드레아 - 관장을 감복시킨 지극한 효성


박보록(朴保綠) 바오로와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는 부자지간이면서 함께 옥고를 치르고 아버지는 옥사로, 아들은 참수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관명을 '도향'이라고 하는 박보록은 홍주 지방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 가산도 넉넉했으며, 고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1792년쯤 천주교에 입교했으나 1794년 박해 때 예비신자였던지라 배교한다 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신자의 본분을 열성으로 지켜가기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천주님을 섬기는 데에 여러 가지 세속사정으로 지장을 받게 될 것을 걱정하던 그는 재산과 일가친지를 두고 아들 박사의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신앙생활을 더욱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충청도 단양의 산골로 숨어들었다.


박 바오로는 태생을 숨긴 채 토박이로 행세를 하며 세속의 근심에서 벗어나 기도를 열중하며 영혼을 구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신부님을 찾아 정한 시간에 기도와 묵상에 몰두하였고, 나머지 시간에는 성서를 읽고 교리를 공부하며 신앙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넓혔다. 사람들은 바오로의 진실하고도 정성이 깃든 이웃 사라의 모범을 보고 그의 말을 경청하였고, 그의 말은 설득력이 더욱 커져 그의 집에 드나드는 아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 무렵 박보록은 자녀의 종교교육에 철저하여 사의 직접 가르쳤다.


1827년 전라도에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주님의 섭리에 의지하고 염려하지 말라며 교우들을 격려하고 스스로 순교의 열망을 품고 죽음을 준비하며 살았다. 언젠가 몹시 앓았는데 그는 아들과 식구들에게 "염려하지 말라. 너희들 앞에서는 죽지 않을 터이니."하고 말했다. 뒷날 바오로가 순교하자 사람들은 이 말이 순교를 열망하여 결코 병들어 죽지는 않으리라는 의지의 표현이었음을 알게 되어 그를 추모하였다.


1827년 4월 그믐, 주님 승천 대축일을 받아 바오로의 가족과 이웃들이 모여 축일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에 밀고자가 데려온 포졸들이 들이 닥쳐 부자를 체포하였다. 관아에 끌려와서 무서운 고문을 당한 박보록은 고문이 되풀이되자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껴 "이제 내 육신은 관장의 손에 맡기고, 영혼은 천주님의 손에 맡깁니다.."하고 부르짖었다. 형리들이 그의 뺨을 치고 수렴을 잡아 뽑고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 고통은 은혜이니 천주님께 감사한다."며 놀라운 인내로 그 고통을 이겨냈다. 관장은 결코 굽힘이 없는 노령의 그에게 사형을 내리고 옥에 가두었는데 집행이 늦어져 아들과 함께 12년 동안 옥중에서 영어의 생활을 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 속에 자란 박사의 안드레아는 신심생활에 열중했고, 나이가 차면서 신앙과 열성, 그리고 아름다운 효성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일상 행동에 규율이 있었고 모든 이에게 친절했으며 특히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가 병이 들면 그 곁을 떠나지 않았고, 또 부모가 먼저 식사를 하지 안으면 먹지 않았기에 부모는 아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억지로라도 먼저 음식을 들기도 했다. 아버지 박보록은 과음하지는 않았지만 술을 즐기는 편이어서 조금씩 반주로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안드레아는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아버지가 즐기는 술을 거른 적이 없었다. 아버지께 작은 기쁨이나마 만족을 드리려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엄격히 절재하면서도 기뻐하였다. 그는 볼일이 있어서 날 때에도 돌아올 날짜와 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돌아오기로 한 시간을 지키려고 비바람 속을 걷기도 하고, 밤길을 꼬박 걷기도 한 것이다. 안드레아는 부모의 조그만 눈짓이나 의사 표시라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겨 행동하였다.


하루는 아버지다 지나가는 말로 "우리 집이 너무 협소하단 말이야. 필요한 때에 몇 명의 교우들을 거두어주려면 방이 두세 개 더 있어야겠는데 …" 했다. 이 말을 들은 사의는 그날부터 일과를 평소처럼 하면서 외출할 때마다 어김없이 들보나 서까래로 쓸 것을 한두 개씩 들고 와 오래지 않아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방을 늘려 놓았다. 주위의 신자들이 이 복된 집에 모여들었다. 더욱이 아버지 박 바오로가 가난하지만 찾아온 손님들을 예의에 벗어나지 않게 대접하기를 바라기에 사의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더욱 근검절약 하여 손님 접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했다.


아버지께 대한 이 훌륭한 효성에 감동한 신자들이 얼마의 돈을 모아 너무도 가난한 그의 가게를 도와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님과 가족을 봉양하면서 진 빚은 언제라도 내가 혼자 일해서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하면서 교우들이 모아준 돈을 돌려보내고, 돌려보낼 수 없는 경우에는 그것을 더 가난한 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결코 자신의 가계를 위해 쓰지 않았다. 신입 교우이면서도 여러 가지 덕을 닦으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주님 사랑의 계명을 열절하게 실천하던 안드레아는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어 늙으신 아버지가 보여준 모범을 따라 형벌 중에 뛰어난 인내와 용기를 보여주었다. 부자는 함께 상주 진영에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조선 국법에는 부자가 같은 감옥에서 동시에 옥살이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아버지가 문초와 형벌로 몹시 쇠약해진 것을 보고 잠시라도 그 곁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지를 보살펴 드리면서 관장에게 아버지와 함께 지내도록 간절히 청원했다. 관장은 아들의 효성에 감복하여 "국법에 금하는 바이나 너의 청이 옳고 타당하니 그 지극한 효성을 보아 허락한다"고 했다. 이리하여 부자는 함께 심문을 받고 옥살이를 함께 했다.


형벌을 받아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안드레아는 아버지께로 가서 목에 채워진 무서운 칼을 쳐들어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드리니, 옥중에서 이 광경을 본 이들은 깊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고통을 참고이길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하느님께 대한 그의 흠숭은 지극한 효성이 승화되어 완성된 덕행이었다. 수많은 고문을 끝까지 용감하게 참아내고 사형 언도를 받은 뒤 12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옥살이를 하면서도 그의 효성과 동료 신자들에 대한 배려는 한결같았다.


아버지 박 바오로가 고령으로 옥고를 견디지 못한 채 이곳을 지복소로 알고 항구하고 충실하게 주를 섬기라는 장엄한 유언을 남기고 먼저 선종했고, 1839년 5월 26일 아들 안드레아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옥중 교우들은 이들 부자의 모범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 덕행을 전하여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기억했다.


<경향잡지, 1998년 1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유성태 라우렌시오 - 배교자 속에 보석 같았던 증거자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826년 우리 나라에 난대없이 서신을 보냈다. 그 내용은 일본에서 천주교 신자 6명이 배를 타고 도망쳤는데 아마도 조선으로 갔을 터이니 체포해 달라는 것이었다. 조정은 신장했고, 관헌들의 천주교인 수색은 강화되었다.


이는 1801년 신유박해가 마무리로 반포된 처사윤음(斥邪倫音)이 천주교 탄압의 법적인 근거가 되어 박해가 계속되게 하였고,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전개하던 교회 재건과 사제 영입운동을 더욱 어렵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1827년 음력 2월에 전라도 곡성에서 천주교인 밀고사건이 일어나 전라도 전역과 경상도 상주,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 지역까지 박해의 손길이 미치게 되었다. 가장 박해가 심했던 전라도 교회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한 분의 사제도 없이 대부분 예비신자였던 까닭에 이 박해 때 어느 시기보다도 배교자들이 더 많았다. 이 어려운 시기, 동료들이 신의를 버리고 떠난 빈자리에서 마지막까지 주님을 증거한 소수의 남은 자들은 보석처럼 빛나는 증거자가 되었고, 유태성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라도 곡성에서 시작된 정해박해(丁亥迫害)가 전라도 전역에 파급되어 24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전주 포졸들이 신태보를 추적하자 경상도 상주까지 박해의 불길이 번졌다. 유순지라고도 불리는 유성태(1789/1794-1828) 라우렌시오는 충청도 단양의 깊은 산골로 박해를 피해 이주했다. 그가 단양으로 피신하자 경상도에서 박해를 피해 숨어 다니던 친척들도 그에게도 왔다. 유성태과 그의 친척들은 깊은 골에 모여 기도하며 숨어서 박해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소박한 소원은 밀고자 때문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들은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1827년 5월에 체포되었다. 밀고자와 포졸들은 밀고로 받은 상금을 나누어 가졌고, 단양으로 잡혀간 신자들은 혹독한 심문과 온갖 고초를 겪었다.


형벌이 더욱 심해지자 잡혀간 교우들은 하나둘 배교하기 시작했다. 유성태는 그들의 나약함을 타이르고 주님께 충실할 것을 피눈물로 호소했다. 그러자 관장은 라우렌시로를 그들의 지도자로 지목하고는 더욱 심하게 형벌을 가했다. 마침내 천척들과 신앙의 동지였던 교우들이 배교하기 시작했고, 유성태만이 홀로 남아 버티게 되었다. 관장은 유성태의 굳건한 의지를 짐작하고는 교활한 술책으로 회유했다.


관장은 배교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들 놓아주고 싶다. 그러나 너희 두목인 유성태가 배교하지 않으니 아무도 놓아줄 구 없다. 이 놈만 배교한다면 모두 놓아주리라." 배교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유성태를 원망했다. 이들의 원망은 갈수록 심해져 외롭고 상처투성이인 유성태를 더욱 참담하게 했다. 유성태는 최후의 열정을 다해 간절하게 그들을 격려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이 지겨운 옥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들이 풀려나지 못하는 책임이 유성태에게 있기라도 한 듯이 그를 못살게 굴기까지 했다. 그에게는 형리들의 매질보다 동료들의 배신과 원망이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유성태는 어쩔 수 없이 배교한다고 하였고, 모두 함께 석방되었다.


라우렌시오는 풀려난 사람들을 각기 제 갈 곳으로 보내며, 지체하지 말고 도망가라고 일렀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주님! 저희의 나약함을 가련히 보소서. 그리고 저들이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회두의 특은을 베풀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그들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도록 여유를 주었다가 다시 단양관헌으로 돌아갔다. 관장은 배교한 그가 돌아오자 놀라고 당황했다. 유성태는 "이제 나 때문에 잡혀있어야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나는 내가 먼저 한 말을 지금 취소합니다. 나는 천지대군이신 주님께 이 목숨을 바치기로 했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그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자 관장은 격노하며 사정을 두지 않고 형벌을 가했고, 유성태는 온갖 고초와 형벌을 묵묵히 참아 받았다. 그의 의지를 보고 더 이상의 방법이 없어진 단양관장은 그를 충주감영으로 이송하였다.


충주감영에서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그를 더욱 가혹하게 다루었으나 유성태는 변함없이 굳건한 태도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아 오히려 형리들이 감복했다. 유성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제 조용히 순교의 시간을 기다리며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형은 귀양으로 바뀌었다. 법에 따라서 죽어야만 한다"고 항의하였다. 그러나 관장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함경도 무산으로 귀양보냈다.


관장은 그를 귀양보내면서 호송하는 포졸들에게 일렀다. "이 자가 도중에 백성들을 충동하여 몇 사람을 그 교리로 매혹할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감시하라." 이 말을 들은 라우렌시오는 "나는 도중에서 1만 명만 입교시키겠습니다"라고 했다. 관장도 유성태의 의지와 설득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감화력과 영향력을 알고 염려했던 것이다. 포졸들의 감시속에서 무산에 이르는 천리 길은 멀고도 고통스러웠다. 그는 귀양길에서 배교한 친척들을 기억하며 인간의 나약을 통절히 깨닭고 그 자신은 더욱 주님의 은총에 의지하였다. 그리고 배교자들의 보속을 자신의 삶으로 갚으려 했다.


주님께 향한 그의 열정은 유배지에 도착하여 더욱 용솟음쳐 올랐다. 기도와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드러내놓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가까이 오거나 기회가 닿기만 하면 포졸, 평민 가지 않고 전교했다. 사람들이 그의 열성과 놀라운 설득력에 차츰 동요하여 교리를 듣고 호감을 갖게 되자 현지의 관장과 관원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유배지에서 했던 거침없는 신앙생활과 포교활동은 그들의 비위를 크게 상하게 했고, 관헌들은 그의 포교활동을 막으려고 외딴 집에 연금시켰다.


유성태는 연금생활을 시작하며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지만 기력을 잃어갔다. 관원들은 그에게서 반성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며 음식까지 끊어버렸다. 얼마를 굶었을까! 그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굶주림과 고독, 그는 소리쳐 먹을 것을 달라고 간청했다. 관장은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음식을 그에게 갖다주게 하였다. 이 음식은 소금과 쌀가루를 섞어서 만든 떡이었다. 라우렌시오는 오랫동안 굶주린 위장에 소금덩어리 같은 떡, 먹고 나면 더 심한 갈증을 느끼며 죽게 되는 음식을 마지막으로 받아먹었다. 관장의 생각처럼 우리의 위대한 증거자는 그 떡의 반도 삼키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그의 순교일은 1827년 12월 또는 1823년 3월이라고 전해진다. 그의 나이 또한 35세와 40세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굳은 의지와 장엄한 유배생활의 모습을 전해들은 그의 친척과 동료들이 자신의 배교를 부끄러워하며 무섭게 뉘우치고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경향잡지, 1998년 12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김호연 바오로 - 집안의 박해를 이겨낸 순교자


순교자들은 선혈이 낭자하고, 살점이 튀는 매질과 뼈가 으스러지는 형벌에도 오히려 의연했다. 그러나 혈육의 정으로 호소하는 회유에는 눈물을 흘렸다. 혈육의 정을 이겨내기가 형벌보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집안의 박해는 이런 이유에 가장 견디기 힘들었는데 그것을 이겨낸 귀중한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 김호연 바오로(1796-1831년)이다.


김호연은 경상북도 안동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말이 적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장난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처음에 그를 바보로 착각하기도 했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여 스무 살이 될 무렵에 이미 대부분의 경서(經書)를 독파해 그 내용에 정통하였고, 윤리, 철학, 수학, 천문, 역학은 물론 불법(佛法)과 노자(老子)의 지극히 어려운 사상 등 온갖 종류의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그는 세속에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않았고 세속의 영광과 명성을 업신여겨 과거에 응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변의 많은 사람은 그를 선비로 알아보았고 그의 학식과 평판은 멀리까지 알려져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와 어려운 문제를 풀어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김호연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몰래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경상도 순흥지방의 태백산 줄기 아래로 들어가 조용히 학문에만 정진하려 했다. 그러나 이 피신은 하느님의 진리를 만나는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태백산에서 은거하고 있던 천주교 신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유식하고 열심한 신자였다. 그들의 만남은 언제나 학문에 대한 화제로 이어졌는데 김호연은 천주교 교리를 들으며 놀라움과 경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온갖 의문을 질문하였고 신자로부터 답을 들으면서 감탄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하느님의 진리를 알게 되면서 김호연은 기쁨과 감격을 이기지 못해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오! 나는 지금까지 줄곧 사람들에게는 그에게 맞는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우리 경서에는 이에 대한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어서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오늘에야 나는 참된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하고 고백했다. 김호연은 곧 천주교 서적을 얻어 읽기 시작했으며 온갖 미신 행위들을 끊어버리고 오직 하느님을 섬기며 은총을 구하는 일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20일정도 어려움을 참고 극기한 뒤 다시 신자를 찾아가 함께 산책하기를 청했다. 그들이 산책하며 작은 시냇가에 이르자 김호연은 미리 계획했던 대로 무릎을 꿇고 세례 예식을 행하여 줄 것을 간청했다.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청했던지 신자는 그의 정을 물리칠 수 없었다. 김호연은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온종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비할 수 없는 크신 은혜에 감사하려면 오직 순교하는 길밖에 없다"고 굳게 말했다. 이제 그의 열정은 놀라울 만큼 깊고 강해졌다. 그는 천주교 신자의 본분을 다하는 신심생활에 전념하여 세속일에는 더욱 마음을 두지 않았다.


얼마 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형과 아버지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하려 하였다. 그러나 처음 얼마 동안 천주교 교리에 호감을 갖던 아버지가 찬찬히 교리를 알아보면서 뜻밖에도 크게 노하여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교리를 따르려면 사당과 신주를 모두 없애고 조상의 위패마저 버리고 제사도 모시지 못하게 될 것이니 상감께서 천주교를 금하시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꾸짓고는 교우들과 교재를 끊고 천주교 서적들을 모두 불사르라고 명령했다. 또 아들의 신앙생활을 막으려고 무섭게 감시하며 학대하기 시작했다. 성질이 격한 그의 형에게 여러 차례 매질을 당하는 등 바오로는 가장 견디기 힘든 가족의 박해 속에 던져졌다.


김호연은 매우 허약한 체질을 타고났다. 그래서 계속되는 가족의 학대를 견디기 어려웠다. 또한 가족들의 학대에 굴복하여 신앙을 버리게 될까 두려워 몰래 집을 빠져나와 도망쳤다. 그는 은밀하고 조용한 장소를 택해 그곳을 떠나지 않고 꿇어앉아 기도를 드리고 성서를 읽으며 묵상하는 생활로 나날을 보냈다. 밤을 새워 묵상과 기도를 하다가 첫 닭이 울 때 비로소 조금 쉬는 시간을 가졌고 금요일과 토요일마다 단식하며 대제를 지켰다. 그는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이러한 생활을 멈추지 않아 마치 육신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럼에도 오히려 건강을 유지하였고 형색도 고왔다. 사람들은 이러한 김호연을 보고 하느님의 섭리가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라고 감탄했다.


김호연의 아버지는 아들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아들을 찾으려고 교우들을 관가에 밀고하려 했다. 김호연의 교우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면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쓰던 성물과 서적들을 교우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참 된 고향에서 다시 만납시다" 하며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김호연이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와 가족의 박해는 더욱 끔찍하게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참아 받으며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몇 주일이 지나자 중병에 걸렸고 허약한 몸에 기운이 다 빠져 무섭게 말라 들어갔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식칼을 들고 아들을 위협했다. "네가 천주교를 배교하고 죽으면 내 아들로 인정하겠다. 그러나 배교를 거절하면 이 칼로 너를 죽이고 나도 같은 칼로 죽고 말 것이다." 그러자 바오로는 간절하게 대답하였다. "아버지 말씀에 복종하려고 왕명을 어길 수 없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온 누리에 가장 높으신 임금이신데 어떻게 하느님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느님을 배반하라 강요하시는데 그것을 아버지의 본분이라 하겠습니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는 화가 치밀어 그대로 아들을 찌르려 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뛰어들어 겨우 위기를 모면하자 김호연은 다시 조용히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아무리 그렇게 극단적으로 하시더라도 저는 아버지의 명을 따르려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계명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모진 매를 맞았다.


다음날 아침 바오로는 늘 하던 대로 기도와 묵상을 하였다. 아침나절에 그는 정오가 되었느냐고 물어보더니 정오가 되자 삼종기도를 정성되이 바치고는 그대로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무릎을 꿇고 그의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그의 죽은 모습이 너무나도 고요하여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조차 알지 못할 정도였다. 때는 1831년 9월 어느 날이었다. 입교한 지 겨우 2년, 그의 나이 서른 여섯이었다. 그가 죽은 뒤 가족들이 관습에 따라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차려놓은 제상이 절로 무너졌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그를 가장 영광스러운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형벌보다 더 어려운 가족의 박해를 이겨낸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1999년 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황석지 베드로 - 내가 30년 동안이나 주님을 섬겨왔거늘…


순교자들이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며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1832년, 조선에는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보기 드문 홍수가 온 나라를 휩쓸어 가을이 왔어도 거두어들일 곡물이 없었다. 나라에 이렇게 큰 재앙이 들자 임금은 하늘에 재사를 드리고, 전국의 죄인들에게 특사를 내려 옥에 갇히거나 귀양을 간 사람들을 풀러주는 등 은혜를 베풀어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보려 하였다. 수해가 극심했던 만큼 임금이 내린 특사조차도 그 범위가 넓었다. 그래서 박해 때에 옥에 갇혔거나 귀양갔던 만은 신자들도 모두 풀려나 각자 교우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무렵 한국교회는 비교적 평온하였고 제2세대 지도자들인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베드로 등 동료들은 북경을 오가며 사제 영입운동을 극비리에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박해 속에서도 비교적 평온했던 시기에 뜻하지 않게 포졸의 습격을 받고 교우들이 관아로 끌려가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아마도 중앙 관아의 지시는 없었지만 하급 관아의 포교들이 교우들의 재산을 노려 노략질해 먹으려는 탐욕이 일으킨 것으로 짐작되는 사건이었다.


1832년 9월 10일 한밤중에 서울의 포졸들이 황 안드레아의 집을 습격하여 그의 삼촌 황석지 베드로(?-1833) 등 열 명의 인근 교우들을 체포하였다. 그들 열명 가운데 아홉 명의 신자들은 형벌을 견디지 못해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귀양을 갔지만 황석지 베드로만이 홀로 남아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였다.


황석지 베드로는 양반 신분으로 충청도 홍주(洪州)에 살고 있었다. 그는 성격이 점잖고 엄격한 사람으로 모든 일가 천척과 이웃의 존경을 받았는데, 누구도 그 앞에서는 장난스럽거나 상스러운 말을 감히 하지 못했다.


그가 마츤 살이 될 무렵 이웃에 살던 교우 김취득에게서 천주교교리를 배워 온 집안이 함께 입교하였고, 그때부터 환난을 무릎쓰고 한결같이 열심한 모습으로 교회의 본분을 지켜 모범을 보였다. 그러면서 가끔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입교하기 전에는 여러 교우들이 순교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그것은 지나친 영광이요, 너무 흥분한 상상력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런 잘못된 생각을 아주 버렸다."


이렇게 순교하려는 열망을 하던 이때, 그는 네 명의 아들을 차례로 잃는 불행을 당했다. 그리고 자식들을 잃은 슬픔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던 그의 아내마저 죽고 말았다. 이러한 시련을 당하면서도 황석지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식들과 아내가 착하게 주님의 섭리 안에서 죽었으며 또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동안 하느님께서 가족을 불러가셨음에 감사드린다고 했다.


홀로된 그는 그 뒤 서울로 와서 조카인 안드레아의 집에 얹혀 살다가 포교가 습격했던 9월 10일 밤에 체포되었다. 관장은 황석지의 신앙고백을 듣고 나서 그가 백발이 성성한 것을 보고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다만 형식적으로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황석지는 비록 형식적이나마 감히 주님을 부인하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했다.


황석지는 체포되었을 때 석방되기가 쉬운 편이었음에도 옥중의 고통을 참으며 순교를 열망했다. 그는 다른 교우들의 몸에서 나온 성물이나 압수된 서책들이 모두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말하라고 교우들에게 알려주었다. 박해시대에 다른 사람이 지니고 있다가 발각된 성물에 대해 이처럼 책을 떠맡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다른 교우들이 고발당할 위험을 막아주거나 교우들의 책을 가볍게 해주려는 일종의 형제애가 만연하였고, 이를 선의의 애덕으로 생각하였다.


황석지 베드로는 스스로 압수된 성물들의 주인으로 행세한 애덕의 실천으로 크나큰 곤경이 빠지게 되었고, 관장은 동정심은 오히려 분노로 변해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혹독한 문초 속에서도 황석지의 의연한 신앙고백은 다른 죄수들을 감동시켜 경탄하게 했다.


관장은 황석지가 여러 차례 문초를 당하고도 뜻을 굽히지 않자 그를 형조로 이송시켰다. 황석지는 형조에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고백하며, 주님을 버리는 대가로 목숨을 보전하기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인간의 인내와 한계를 넘어서는 가혹한 형벌들을 동원하여 그를 다스리려 했다. 황석지는 그 혹독한 형벌로 의식을 잃기 전에 이렇게 외쳤다." 나는 이미 늙었고, 이대로 주어도 얼마 있지 않아 죽을 것이오. 그런데 내가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의 계명을 삼십 년 동안이나 지켜왔거늘 이제 와서 부끄러운 말을 해서 단 한번에 하느님의 은혜를 잃어버리란 말입니까?"


우리는 황석지의 이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신앙고백을 들으면서, 스미르나 교회에서 필로멜리움 교회로 보낸 보고서 가운데 나오는,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스미르나의 주교인 순교자 폴리카르포와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폴리카르포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 지 90년이 되었으나 그분은 대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거늘 나더러 어찌 그분을 저주하란 말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이 두 분 순교자에게 함께 하시어 영감을 주신 성령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바로 우리들의 하느님이심을 이들의 신앙고백을 통해 놀랍고도 황홀한 감격 속에 깨닫게 된다.


이 신앙고백을 하고 나서 황석지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감방에는 외교인 죄수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김씨 성을 가진 한 선비가 있었다. 선비는 황석지의 거동과 특히 사형선고를 받고도 얼굴에 가득 찬 기쁨과 평화를 보고 놀라워하며 다가와 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갚아야 할 잘못이었는데 어찌하여 노인장은 죽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죽게 됨을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그렇게 행복해 보이십니까?"


황석지는 대답했다. "내가 섬기는 하느님은 천지 대군이시고 모든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분을 위해 만 번이라도 죽임을 당하고 싶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그 교리를 우리에게도 가르쳐주시오" 하고 죄수들이 말했다.


황석지 베드로는 그날부터 그들에게 천주교 교리와 계명을 설명하였다.


황석지는 특히 성모신심에 심취하여 성모님께 의탁하고 기도하녀서 옥중의 고통을 이겨냈다. 이런 생활로 8개월이 지난 뒤, 황석지는 중병이 들어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833년 11월의 어느 날, 지극히 평온한 가운데 옥중 순교하니, 그 때 그의 나이 일흔에 이르렀다.


황석지 베드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을 찾으러 갔을 때 감옥 안의 외교인들과 김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이렇게 말했다. "황석지 베드로께서 세상을 떠날 때, 이 감옥 전체에 환한 빛이 비쳤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러갔더니 그분의 감방에 신비로운 빛이 비치고 비둘기 한 마리가 그분 위로 빙빙 돌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분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그 평온한 죽음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경향잡지, 1999년 2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권 빈첸시오 - 조국의 복음 전파에 힘썼던 최초의 예수회 수사


1867년 7월 7일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일본의 순교자 205명을 복자로 선포하셨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열 명의 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강제로 잡혀가 일본에서 살다가 순교한 고결한 신앙의 선조들이다.


명나라를 틸 테니 길을 내달라는 당치도 않은 명분으로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이렇게 시작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이어져 7년을 끌었다. 집과 마을은 불타고 무수한 생명이 싸움터의 고혼이 되었다. 강산은 피로 물들고 왜군의 발굽에 짓밟힌 곳마다 가슴 아픈 한숨이 서리고 통한의 눈물이 고였다. 낯선 땅 일본으로 끌려가서 망향의 여생을 살았던 사람만도 오만 명이 넘었고 일본군에 잡혀 포르투칼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간 사람들의 수도 헤아릴 수 없어 이국 깡에서 서럽게 살아가며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그 피눈물 어린 삶을 영광으로 빛나는 신앙생활로 승화시켜 주옥같은 생애를 남긴 이들이 있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권 빈첸시오(1580-1626년)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빈첸시오의 아버지는 조선의 고관이었다. 그는 전선으로 나가면서 열세 살의 어린 자식인 빈첸시오가 목숨을 보존할 수 있도록 은신처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어린 아들은 두려움도 모르고 은신처에서 나와 싸움터를 구경하다가 곧장 대장군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천막까지 가게 되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자신의 천막으로 온 전쟁 고아를 보고 불쌍히 생각하여 그의 딸이며 또한 열심한 천주교 신자인 마리아(대마도주 소 요시모토의 부인)에게 보냈다. 마리아는 아버지가 전선에서 보낸 어린아이를 잘 보호하며 교회에 맡겨 교육시켰다. 그 아이는 1603년 규슈의 시키 섬에서 빈첸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렇게 하여 전쟁 중에 버려져 이름도 잊혀버렸던 어린아이는 권 빈첸시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빈첸시오의 성은 일반적으로 권씨로 보지만 강씨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의 일본 이름은 '가베아'라 했다.


권 빈첸시오는 예수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깊이 잠긴 채 믿음직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자신을 예수님 안에서 거듭나게 해준 신부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그들 곁에 머물렀고, 신부들의 포교와 사목의 여행길에도 항상 동행했다.


이때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일으켯던 도요코미 히데요기의 뒤를 이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이 내려지고 신부와 수사들이 살해당하고 여러 곳의 성당이 파괴되더니 마침내 1637년에 시마바라 반도에서 3망 7천여 명의 신자들이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일본에 진출해 있던 예수회에서는 일본에서 박해가 심해지자 동양 전교의 새로운 전초기지를 얻으려고 권 빈첸시오에게 그의 조국인 조선에 들어가 가능성을 확인해 보게 하였다. 빈첸시오는 바다를 건너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을 치른 뒤 조선정부의 해안감시가 철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발길을 돌려 중국으로 건너가 육로를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하면서 빈첸시오의 젊은 가슴은 사도적 열의에 불타고 조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꿈으로 부풀어올랐다. 북경과 압록강 변경을 오가며 7년을 한결같이 애썼지만 그의 꿈은 북만주의 고아야에서 외롭게 피어올랐을 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누루하치의 여진족이 세운 후금국과 조선의 긴장상태가 계속되어 그의 뜻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비록 꿈에 그리던 조국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선교를 위해 전루 14년 동안 땀을 흘린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620년 일본으로 다시 돌아간 권 빈첸시오는 시미바라 반도에 숨어서 졸라(Zola) 신부와 함께 일본인과 임진왜란으로 억울하게 잡혀온 수많은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열렬한 증거의 삶을 살았다. 조선 사람들에 대한 그의 감화력은 놀라웠으며 동포들은 그의 모범과 격려에 크나큰 위안을 얻었다.


권 빈첸시오는 자신을 예수님안에 다시 태어나게 해준 데 대한 애정과 감사의 정이 깊어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사제들과 함께 1625년 체포되어 시마바라의 감옥에 끌려갔다. 그곳은 특히 천주교 신자들을 괴롭히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 감옥이 아무리 끔찍했어도 권 빈첸시오를 놀라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감옥의 온갖 형벌과 가혹한 박해를 극기와 자기 정화의 계기로 삼았다. 그에게 심문과 형벌은 영신수련의 기회가 되었을 뿐이다.


그의 거룩한 극기의 삶은 포악한 포졸들마저 감동시켰다. 옥졸들이 빈첸시오를 존경하며 스스로 유순한 사람으로 바뀌자 관장은 놀라워하며 곧 다른 옥졸로 바꾸었다. 그러나 바뀐 옥졸들마저 잇달아 수감자의 천사 같은 모습에 감동하여 빈첸시오를 따라 신앙을 갖게 되자 관장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관장은 자신의 친척이 되는 무관에게 수감자 감시를 맡겼는데 그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사나운 짐승과 같은 자로서 천주교를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관이 권 빈첸시오와 동료 순교자를 만난지 일주일이 지나자 그 태도가 놀랍게 바뀌어 온순하기 짝이 없게 되더니 또 일주일 뒤에는 천주교 신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자 관장은 분하게 여겨 그 배신감을 갚기라도 하듯 무관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무관은 이제 짐승과 같았던 과거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저의 직책과 재산을 박탈하고 목숨마저 빼앗을 수 있을지라도 저의 정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니, 저는 천주교인으로 살고 또 천주교인으로 죽겠습니다."


관장은 빈첸시오와 그 동료들의 놀라운 감화력을 막으려고 증거자들을 따로 떼어 서로 격려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더욱 가혹한 형벌을 주기로 결심했다. 빈첸시오는 가혹한 형벌과 온갖 달콤한 유혹과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는 천주교인입니다. 결코 배교는 못하겠습니다." 관장은 권 빈첸시오의 옷을 벗기고 찬바람에 내놓고 단근질을 하며 참혹한 학대를 계속했다. 관장은 이성을 잃고 직접 곤장을 들고치기도 했다. 권 빈첸시오는 이 무서운 형벌을 받으면서도 조용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관장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독약을 먹여 피를 토하게 했지만 그의 잔잔한 미소는 가시지 않았다. 누구도, 어떤 가혹한 형벌도 거룩한 증거자 권 빈첸시오를 꺾을 수는 없었다. 빈첸시오는 추위를 막을 수 없는 엉성하고 작은 오막살이에서 24일 동안을 먹지도 못하고 내버려진 채 고통을 겪으며 기진해 갔다.


일본 왕은 이 거룩한 증거자를 나가사키로 옮겨 화형에 처하게 하였고, 1626년 6월 20일 졸라 신부, 토래 신부, 파체코 신부 등과 함께 화형이 집행되었다. 권 빈첸시오는 화형이 집행되기 며칠 전에 감옥 안에서 당시 예수회 일본 관구장이던 파체코 신부에게 자신을 예수회에 입회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신부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이미 사형이 확정되었기에 주님께 자기 제헌을 하게 될 그 자리에서 그의 서원을 받았다. 이로써 권 빈첸시오는 정식 수사로서 순교자가 된 것이다. 조국에 복음 전파를 시도했던 최초의 한국인이며, 최초의 예수회 수사인 그는 지금 일본의 순교 복자 205위 가운데 한국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게 기억되고 있다.


<경향잡지, 1999년 5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원시장 베드로 - 얼음에 덮여 순교


원시장 베드로(1732-1793년)는 충청도 응정리에서 부잣집 양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소 성격이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1788년경 그의 나이 쉰다섯이 넘었을 때 우연히 천주교에 대해 듣고 크게 감동하여 곧 입교했으나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교리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열망으로 하루는 집안 식구들에게 "나는 50년 이상을 무익하게 살아왔다. 내가 돌아오면 내가 떠난 까닭을 알게 될 것이다.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지 말아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그 뒤 일 년 이상이나 아무 소식도 없다가 어느 날 그가 돌아왔다. 원시장이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친척들과 친구들이 모여들어 호기심에 차서 그 동안의 사정에 대해 물었다. 그 많은 질문들을 웃으며 듣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십년 동안 나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소. 그러나 지금은 수 천년 동안 목숨을 보전하게 해주는 약을 가지고 있소. 그것을 내일 설명해 주리다." 다음날 그는 모든 친척들을 모아 놀고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계심과 원죄, 강생구속, 하느님의 계명, 천당과 지옥 등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였다. "자! 이것이 착한 뜻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영원히 사는 방법이오. 여러분은 모두 내말을 유언으로 알고 나처럼 천주교를 신봉하시오."


그의 권고는 생명력이 넘치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여 많은 사람이 그날부터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주님을 섬기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회개하고 신앙심이 더욱 피어진 것은 그의 말보다 모범적인 생활 때문이었다. 그는 그 사납고 거친 성격을 정복하여 일상의 모든 면에서 변함없는 온화함을 보여주었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어 그들의 어려움을 구해주고 정성을 다해 천주교를 알리는 모습에 모두 감탄하였다. 그는 삼십 가구 이상을 입교시키고 그의 사촌인 원 야고보와 함께 외교인 앞에서도 드러나게 계명을 지키는 열성을 보였다.


마침내 이 소식은 관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뒷날 그를 따라 순교하게 될 사촌 원 야고보의 열성적인 신앙생활이 두드러져 보였으므로 관장은 우선 원 야고보를 잡아오라고 포졸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의 권고로 도망가고 없었다. 포졸들은 원시장에게 물었다. "당신 사촌은 어디로 갔소?" "죽기가 무서워 숨었소. 그가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원시장이 대답하자 포졸들은 "우리는 관장의 명을 받고 천주교인인 그를 잡으러 왔소. 그러나 그가 도망가고 없으니 대신 당신을 잡아가겠소" 하고 말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사촌인 원 야고보를 대신하여 관아로 끌려갔다. 관원은 사촌이 어디로 몸을 숨겼는지 계속해서 심문하였지만 원시장은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그도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자임을 확인하자 관원은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천주를 배반하시오. 나는 사또에게 그 모든 소문이 순전히 모함이었다고 보고하겠소. 그러면 당신은 곧 풀려날 것이오."하며 유혹하였다. 원시장이 "나는 천주교를 배반할 수 없소."하고 단호히 거절하자 곧 감방에 가두었다. 그리고 여러 날 동안 배교하라는 독촉에도 별 효과가 없자 화가 난 관원은 그를 관장에게 보냈다.


관장은 그가 천주교 신자임을 거듭 확인하고는 "천주교를 배반하고 공범자들을 고발하라. 그리고 자시는 천주를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라. 그러면 너를 곧 놓아주겠다" 하며 배교를 강요했다. "천주를 배반하다니 절대로 안됩니다. 저는 또 다른 천주교인들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원시장은 관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관장이 다시 물었다. "너는 공범자들과 네 집에 있는 서책들도 신고하지 않겠단 말이냐?" "저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강인한 태도를 본 관장은 분을 이기지 못하여 주리를 틀게 하고 치도곤 70도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원시장은 모든 고문을 이겨내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람의 본분을 지켰다. 그리고 외교인들에게 미신행위의 헛됨과 참된 도리를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옥에 갇힌 그는 다음날 다시 출두하여 심문을 받았으나 한결같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는 전날보다 더 혹독한 치도곤을 맞았다. 이토록 참혹한 상태로 옥에 던져졌으나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는 오히려 아전과 포졸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고, 며칠 뒤에 그를 보러 옥으로 찾아온 한 교우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때까지 그는 예비신자였던 것이다.


그 동안 관장은 감사에게 보고하여 원시장 베드로를 매를 쳐서 죽게 하는 장살형을 받아냈다. 관장은 세 번째 심문 때 어마어마한 채비를 해 놓고 그 주위에 수많은 포졸들을 세워놓으며 위협했다. "네 목숨을 구해주려는 마음에서 모든 방법을 다 썼다. 그러나 네가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죽기를 원해서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이제 너를 쳐죽이라는 명령이 왔으니 이번에는 네가 죽을 것을 알라!" 원 베드로는 의연히 대응했다. "그것은 저의 가장 열렬한 소원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그의 결박은 더욱 무섭게 조여지고 혹독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형벌이 하루 종일 계속되었으나 원 베드로는 용감하게 견뎌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으스러져 손발을 쓸 수도 없었고 사람들이 그를 감옥으로 떼메어가야만 했다. 제 손으로 음식조차 먹을 수 없을 만큼 손발을 쓰지 못하게 된 그는 옥중 동료들이 물 한 숟갈을 입에 떠넣어 주었을 때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목마르다" 하시던 모습을 기억하였다.


감사와 관장이 원 베드로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마지막 수단을 부렸다. 자식이 아버지를 끊임없이 기다리며 찾는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전했던 것이다. 원 베드로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마음을 가누고 "그것이 제 마음을 크게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관장은 사형수에게 관례대로 주는 마지막 음식을 준 다음 될 수 있는 한 빨리 죽이려고 미친 득이 치게 하였다. 매질하던 형리가 먼저 기진하여 관장에게 말했다. "사또, 이 죄인은 매맞는 것을 느끼지 못하니 끝장을 낼 방법이 없소이다." 그 때 피투성인 채로 고개를 들고 원 베드로가 대답했다. "저는 매맞는 것을 느낍니다. 매가 모질어 뼈에 사무칩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여기 계셔서 저를 직접 굳세게 해주십니다." 이 말을 듣고 관장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저 놈은 틀림없이 귀신을 부리는 놈이다" 하며 더욱 가혹하게 매질하도록 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관장은 몹시 당황하며 매질을 단념하고 추운 겨울 밤 밖에 내놓고 물을 끼얹어 얼려 죽이라고 명령했다. 모진 매로 뼈가 으스러져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원 베드로는 굵은 밧줄로 묶여 기둥에 세워지고,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의 몸에 얼음이 뒤덮여지면서 사지가 점점 굳어져갔다. 원 베드로는 그 순간 주님의 수난을 묵상했다. "저를 위하여 매맞으시고 제 구원을 위하여 가시관 쓰신 예수님, 당신 영광을 위해 제 몸이 얼음에 덮여있음을 보소서." 1793년 1월 26일, 새벽닭이 두 번째 울 때까지 이렇게 끊임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목숨을 바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경향잡지, 1999년 6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