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이야기] 에제키엘


바빌론 탈출 선포하며 귀환의 희망 전해


- 예루살렘 다윗 성채 박물관에 있는 바빌론의 유배 생활을 묘사한 부조.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부·권력·명성을 가진 사람이 사회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 지도층이 갖추어야 할 높은 도덕성을 의미한다. 옛 이스라엘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를 꼽으라면 에제키엘을 빼놓을 수 없다. 에제키엘은 신분 높은 사제 출신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민족 존립의 위기를 겪을 때 그걸 극복하도록 이끌어준 예언자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즈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에제 1,3) 어린 시절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스물다섯 되던 해인 기원전 598/7년에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자로 살았기에, 그가 활동한 곳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현 이라크)였다. 유다 임금 여호야킨과 귀족들만 유배당한 시기에 함께 유배된 걸로 보아, 명문세족에 속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에제키엘은 시종일관 ‘사람의 아들’이라는 익명으로 자신을 감추며(3,1; 12,2 등),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투신하는 겸손을 보였다.


에제키엘은 히브리어로 ‘예헤즈케엘’이라 하며, 이름 뜻은 ‘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시다’이다. 본디 나이 서른에는(민수 4,2-3 참조)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로 봉직해야 했지만, 바빌론 유배라는 정황상 예언자 소명을 받고 활동했다. 그가 거주한 마을은 크바르 강 가 텔 아비브 정착촌(에제 3,15)으로 추정된다(크바르 강은 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들이던 운하다).


유배지에서 에제키엘은 유다 원로들이 찾아와 조언을 구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8,1; 20,1 등 참조) 하지만 예언을 밥벌이 삼아 백성을 속이는 거짓 예언자들이 주변에 워낙 많아, 소명 수행이 쉽지 않았다. 예루살렘과 성전 몰락을 예고하는 에제키엘과 달리, 거짓 예언자들은 바빌론이 곧 물러가고 평화가 찾아온다는 감언이설을 선포했기 때문이다.(13,10: “정녕, 평화가 없는데도 그들은 평화롭다고 말하면서, 내 백성을 잘못 이끌었다” 참조) 동료 유배자들도 듣기 싫은 질책이나 재앙을 선포하는 에제키엘을 달가워하지 않아 따돌리거나, 조롱거리·비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했던 듯하다.(2,6; 3,9; 21,5: “아, 주 하느님! 그들은 저를 가리켜, ‘저자는 비유나 들어 말하는 자가 아닌가?’라고 합니다” 참조) 이런 상황에서도 에제키엘은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면 자기 목숨도 위험해진다고 생각했을 만큼(3,16-21 참조), 백성 하나하나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다. 예루살렘 몰락 직전에는 하느님이 그의 아내를 앗아가시고 애도조차 허용하지 않으셨음에도 그 상황을 오롯이 견뎠다.(24,16-18: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이튿날 아침에 내가 백성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아픔에 말문이 막혀 애도조차 못하는 에제키엘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기쁨이자 자랑인 성전을 잃는 고통에 애도마저 잊게 될 것임을 예고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외로운 고투에 종지부를 찍은 건 예언대로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고 난 다음(기원전 587/6년)이었다. 그 이후부터 에제키엘은 참예언자로 인정받아, 유배된 백성에게 회복의 시대를 예고해 줄 수 있었다. 예루살렘 파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민족의 죄 때문에 재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며 심판을 선포했지만(1-24장), 나라 멸망 이후에는 제2의 탈출 곧 바빌론 탈출을 선포해 귀환의 희망을 심어주었던 것이다.(33-48장) 이렇듯 에제키엘은 이방 땅에서 제2의 모세처럼 나라 잃은 백성을 이끌었다. 하지만 정작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듯, 에제키엘도 자신이 예언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보지 못하였다. 시온 귀환은 그로부터 몇 십 년 뒤인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정치권의 판세를 뒤집었을 때 이루어졌던 것이다.


- 유프라테스 강 전경. 출처 위키피디아.


하느님과 민족을 향한 소명에 지와 덕을 다한 예언자 에제키엘. 고통이 따르는 임무를 맡고 일생을 투신한 그는 처녀의 몸으로 순종해 기꺼이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귀족 출신으로서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백성을 위해 헌신한 책임감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할 수 있겠다. 젊은 날 고향을 떠나 바빌론에 정착한 에제키엘은 그곳에서 마지막 생을 보냈으며, 무덤은 이라크 땅 힐라 마을 근처 알-키플에 있다고 전해진다.


* 김명숙(소피아) -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24일, 김명숙(소피아)]


[성경 속의 인물] 에제키엘


에제키엘은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예언자다. 그 역시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다니엘 예언자도 만났다. 에제키엘이 연장자였다. 그의 초기 예언은 예루살렘 멸망에 집중되었지만 유배지에서는 희망을 심으려 애썼다. 포로생활은 반드시 끝날 것이며, 그때에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새로운 언약’이 맺어질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유다인들의 결속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개신교에서는 에스겔이라 부른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세 단계’에 걸쳐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 첫 번째는 기원전 605년의 침공이다. 이때 여호야킴의 항복을 받아냈고 다니엘을 포함해 유력 인사들을 잡아갔다(2열왕 24,1). 두 번째는 주전 597년에 있었던 여호야킴과 그의 아들 여호야킨의 반란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이스라엘을 다시 굴복시켰고 에제키엘과 함께 만 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갔다.


세 번째는 기원전 586년에 있었던 전쟁의 종식이다. 바빌로니아는 오랜 포위 끝에 예루살렘을 뚫고 들어가 초토화시켰다. 예레미야가 그토록 반대했지만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는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유다인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성전과 성벽을 완벽하게 허물었고 활동이 가능한 남자들은 모두 포로로 끌고 갔다.


에제키엘은 유배지에서 활동을 재개하며 결국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도 알렸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비유와 상징을 통한 간접표현이 많았다. 환상과 환시도 예언서 여러 곳에 등장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에제키엘 예언서는 ‘구약의 묵시록’이라 불리기도 한다. 특히 40장 이후의 기록은 바빌론 포로가 끝난 뒤 성전재건과 유대교의 조직 강화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는 바빌론 인근 ‘크바르 강’ 유역에 살았다. 유프라테스 강에서 갈라져 나온 지류로 현재는 이라크에 속해 있다. 이곳에는 유다인 포로들의 집단 정착지가 있었다. 바빌로니아는 유다인들의 노동력이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곳에 모여 살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곳을 ‘텔 아비브’라 불렀다(에제 3,15). 히브리 말로 ‘텔’은 언덕이며 ‘아비브’는 봄을 뜻한다.


1909년 유럽을 떠돌던 유다인들은 약속의 땅인 팔레스티나에 살고 싶어 했다. 그들은 아랍 원주민들에게 비싼 돈을 주고 지중해에 연한 땅을 사게 된다. 그들은 이곳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에제키엘 예언서에 나오는 ‘텔 아비브’를 도시 이름으로 삼았다. 현재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도시가 되었고 국제공항이 있다. 에제키엘은 ‘주님께서 힘을 주신다.’는 의미다. 자신의 이름에 어울리게 유배지에서도 희망을 전했던 예언자다.


[2009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사람의 아들아, 일어서라(에제 2,1-8)


에제키엘서는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와 구약성서 더불어 3대 예언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나 표현이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성서 학자들 사이에서 두 예언서만큼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더구나 이 예언서에는 수많은 환시와 상징이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나오지 않을뿐더러 예언서의 골자를 이루는 신탁들도 일관성 없이 배열되어 있어서, 이 책을 통독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바빌론 유배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종말론적인 시야와 희망을 담아 전한 이 에제키엘서는 불신과 혼란에 시달리는 오늘의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른 삶의 방향과 제시해 준다.


(구약성서 새번역) 에제 2. 1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2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때 나는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4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하여라. 5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6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비록 가시가 너를 둘러싸고 네가 전갈 떼 가운데에서 산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을 보고 떨지도 말아라. 그들은 반항의 집안이다. 7 듣든 말든 너는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그들은 반항의 집안이다. 8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말아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에제키엘 예언자는 기원전 597년 1차 바빌론 유배 때, 스물다섯의 나이로 여호야긴 임금과 함께 바빌론에 끌려와서 유배 제5년(593년)에 소명을 받고(1,1), 2차 바빌론 유배 기간(587-539년)인 570년경까지 예언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동안 예레미야와 같은 시기에 예언직을 수행하였지만, 그 둘이 예언을 한 장소와 배경은 서로 반대였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활동한 반면, 에제키엘은 바빌론에서 활동하였다. 또 예레미야가 편지로 바빌론 유배자들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반면,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예언서의 문체와 내용에 드러난 에제키엘의 성격과 예언 활동은 매우 특이하다. 그는 ‘모순의 예언자’이다. 사제로서 엄격한 규범과 규정을 중요시하면서도 때로는 그것들을 훌쩍 뛰어넘어 행동한다. 수많은 환시를 보고 때로는 여러 날 동안 탈혼 상태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가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과 신탁, 그리고 그가 전한 환시들의 묘사는 정확하고 빈틈없다. 그는 열정적인 이상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냉정한 현실주의자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그들의 멸망을 가차없이 예고하다가, 이스라엘의 재기와 부흥을 선포한다. 이 같은 에제키엘의 상반된 모습과 활동은 그가 받은 소명과 직접 관련있다. 그는 이스라엘 운명과 역사의 대전환기, 곧 옛 질서와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에 소명을 받았으므로, 그의 예언과 신탁에는 절망과 희망, 파괴와 회복,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게 된다.


에제키엘이 소명을 받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그는 갈대아인들의 땅 바빌론에 끌려와 유배살이를 하던 어느 날, 유프라테스강의 지류인 그발강 가에서 주님의 강력한 손길을 느끼고 주님의 발현을 체험하면서(1장) 부르심을 받았다. 소명은 “사람의 아들아, 일어서라.”(2,1)는 하느님의 분부로 시작된다. 이 구절과 에제키엘 예언서 여기저기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문학에서 천상의 신비스런 존재를 가리키는 칭호나,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께 부여했던 칭호와는 다르다. 주님의 놀라우신 발현 앞에서 제 발로 설 수조차 없는 연약하고 비천한 존재를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존재에 불과한 에제키엘에게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하시고는 그에게 당신의 영을 보내신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진흙덩이에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으신 것과 같다(창세 2,7).


하느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일어선 예언자를 반역의 민족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면서, 그들이 예언지를 통하여 선포되는 당신의 말씀에 반항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항(출애 4,1; 이사 6,9-10; 예레 11,21; 아모 2,12 등 참조)은 예언자들의 소명 이야기에서 널리 알려진 소재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하지 말아라.”(에제 2,6)고 이르신다. 그리고 그들이 듣든 말든 상관없이 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신다(2,7). 말씀을 전하는 소명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거부 때문에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소명은 말씀을 전하는 이의 거부로도 무효화하지 않는다. 예언자들은 대부분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두려워하고 망설였다. 모세가 그랬고(출애 3,7-4,17) 예레미야가 그랬으며(예레 12,1-3; 15,10-21). ‘야훼의 종’도 그랬다(이사 42,18-20; 49,4). 그러나 일단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로 마음먹으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보람과 행복을 약속해 준다.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분부대로 그분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집어삼켰더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2,8; 3,3).


에제키엘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떠오른 주제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고대 근동인들은 신들이 저마다 일정한 영역을 지니고 그 영역 안에서만 거처를 정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알았다. 이스라엘인들이 포로로 끌려온 바빌론 땅의 신은 야훼 하느님이 아니라 벨과 마르둑이었다. 낯선 신, 벨과 마르둑의 영역 안에서도 이스라엘인들은 과연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가? 에제키엘 예언자는 어느 때보다, 그리고 어느 예언자보다 수많은 현시를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강하게 체험하였다. 그가 체험한 하느님은 벨이나 마르둑과는 비교도 안되는 초월자이시지만 당신 백성의 삶에 직접 개입하시는 내재자(內在者)이시다.


에제키엘서는 예언자의 직무를 세 가지로 소개한다. 환시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과 말씀을 받고, 말씀과 신탁을 선포하며, 상징적 행위들로 하느님의 말씀을 현실화한다. 이 활동들을 오늘의 그리스도 영성에 비추어 풀이하면 명상과 말씀 선포와 실천이라 하겠다. 에제키엘이 이해한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복을 내리시지만(소명 이야기 : 1-3장), 거역하는 자들의 죄악은 반드시 징벌하신다(이스라엘의 징벌 : 4-24장; 다른 민족들의 징벌 : 25-32장). 그러나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이들을 새롭게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새 예루살렘과 새 이스라엘 33-48장).


위에서 우리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현실주의자로 규정하였다.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현재의 고통과 시련이 그 죄악의 결과였다고 정확하게 지적한 점에서는 그를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의 재건과 부활을 꿈꾸었다는 점에서는 이상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역사와 지역을 뛰어넘는 거룩한 하느님께서 거룩한 백성과 함께 거룩한 공간에서 함께 사실 수 있기를 고대하였다. 이런 그의 꿈과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상징적 언어가 필요불가결하였던 것 같다. 대표적인 예가 바빌론 군대에게 짓밟혀 황폐하게 되었다가 다시 일어나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표현한 에제키엘서 37장의 상징적 언어이다.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37,7-8 “구약성서 새번역”). 이렇게 다시 힘줄과 살이 붙고 살갗이 덮인 뼈들에 하느님이 보내신 숨이 닿자, 그 뼈들은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엄청나게 큰 군대를 이루었다.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힘은 징벌을 위한 파괴에서도 드러나지만, 낮추어진 것을 들어올리고 약한 것을 일으켜 세우며 부서진 것을 회복시키는 데에서 더 크게 드러난다.


[경향잡지, 1999년 4월호,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성서의 세계 - 구약] 에제키엘 : 최초의 영성 지도자


심판, 참회, 회개, 희망의 모든 예언자들 가운데서 에제키엘은 분명히 가장 극적이고도 걸출한 인물이다. 그의 예언 전체는 말씀과 상징적인 행위가 어우러진 독특한 조화로 두드러져 보인다. 사실 이 두 가지 요소가 촘촘하게 짜여진 에제키엘 예언서를 읽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메시지로써만이 아니라 십자가 위의 구원 행위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시었다. 에제키엘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한 전형이라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힘을 주신다.” 또는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의 그 이름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멸시당하는 사람” 또는 “비천한 사람”이라는 부지였다. “하느님의 힘”이 된 “비천한 사람”의 아들은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그들의 완전한 정치적 패배, 성전과 도읍의 파괴, 귀양살이를 하는 현재의 비참한 처지가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시는 하느님의 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라는 하느님의 사명을 받았다. 에제키엘은 해골산 위에서 성전인 당신 몸의 파괴를 통하여 힘있는 분, 주님이 되시고 새로운 세대의 맏이가 되신 그리스도의 내림을 예언하도록 영감을 받았다. 따라서 에제키엘만이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사람의 아들” 또는 “아담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예언자라는 사실은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공동 번역에서는 “너 사람아”라고 부른다.) 그는 참으로 새로운 세대의 정신적인 아버지다. 그 새로운 세대는 하느님의 영이 정화수를 끼얹어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시고 새 마음과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신 세대다(36,25-27). 무덤을 열고 일어나(37장), 평화의 영원한 계약 안에서 목자 다윗의 주위에 모여드는(37,24) 새로운 이스라엘을 그는 본다. 그는 새로운 성전, 새로운 나라를 본다(40-48장). 거기에는 끝없이 깊어지는 하느님 영의 강물이 흐른다. 에제키엘은 무덤에서 일어나는 새 사람처럼 유배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대표한다. 그는 새로운 창조의 맏이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아담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에제키엘이 자기 민족과 전인류에게 설파한 예언의 메시지 전체는 예언서의 첫 장에 기록된 하느님 영광의 찬연한 현시 속에 담겨 있다. 에제키엘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그발강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거룩한 현존이 성전에만 있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흩어져 있는 “여러 나라에서 얼마 동안 그들의 성소가 되어”(11,16) 주실 것이다. 그 현시를 몰고 온 폭풍은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의 강도를 상징한다. 에제키엘은 자기 예언서의 첫째 부분(4-24장)과 둘째 부분(25-32장)에서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을 알려 준다. 불빛이 뻗는 구름은 계약의 백성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상징한다. 네 생물과 네 바퀴를 지닌 병거는 전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인 지배를 상징한다. 영이 움직이는 눈이 달린 바퀴는 어디에나 계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가리킨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류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끌어 가신다. 네 생물의 얼굴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왔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설명은 네 복음 사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들은 다 확실한 근거가 없다고 본다. 네 생물 또는 천사들(케루빔)은 하느님의 영광을 지키고 떠받든다. 가까이할 수 없는 빛 속에서 드러나는 사람의 모습은 육화의 신비에 대한 예언적인 암시로 해석되어 왔다. 옥좌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에워싸는 무지개는 하느님과 그 피조물들 사이에 있는 평화의 상징이다(창세 9,13 참조). 그리스도교 예술에 있어서 이 환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다스림을 표현하는 표본이 되어 왔다. 이 환시는 참으로 부지의 아들 에제키엘이 이교도들의 땅에서 보았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였다. 심판 속에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에제키엘의 주 야훼는 바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러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부활하신 구세주이시다.


한 사제의 아들이었던 에제키엘은 귀족 계급에 속했으므로,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 함락 후 유배지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다. 그는 “유배의 예언자”다. 에제키엘은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의 뜻을 밝혀 준다. 예레미야처럼 그는 권력 정치의 틀 속에서 그 의미를 찾지 말라고 타이르며, 물리적인 힘으로 민족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정치적인 혁명을 도모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한 시도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물질에만 연연하게 하여, 그들 실패의 정신적인 원인 곧 죄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그들의 중대한 죄상을 깨닫도록 히는 것이 예언자의 첫째 의무요 근본 책무다. 에제키엘은 그 예언서의 첫째 부분(4-24장)에서 이 임무를 수행한다. 하느님의 영광은 바빌로니아의 군대 때문에 성전을 떠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그 영광을 더럽힌 역겨운 짓 때문에 하느님께서 지성소를 떠난 것이다(8-11장). 에제키엘은 장마다 이스라엘의 암울한 죄상을 거울처럼 비쳐 주고 있다. 그는 “제 생각에 끌려 다니며” 멋대로 지껄이는 거짓 예언자들을 거침없이 고발한다(13장). 오직 사랑만이 일으킬 수 있는 분노로써 그는 하느님의 불충한 아내 예루살렘을 질타한다(16장). 그러나 이 모든 고발과 위협은 백성들을 참회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시고 죄인들이 회개하여 생명을 얻게 되기를 원하신다. 에제키엘은 백성을 그 전체로서만 말하지 않는다. 참회와 회개는 무엇보다도 그 개인의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영혼을 그 행실에 따라 심판하신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공동체의 껍질 아래 자신의 개인적인 책임을 감출 수는 없다. 심판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회개하라. 그러면 살리라. 살려느냐? 마음을 고쳐라”(18장).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최초의 영성 지도자였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에제키엘은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이스라엘 가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전한다. 예언서의 둘째 부분은 이교 백성들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25-32장). 이스라엘의 패배는 결코 이교 신들의 승리일 수 없다. 모든 민족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심판하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도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를 민족주의적인 “복수심”의 발로라고 보는 것은 완전한 오해다. 죄인들의 죽음을 언짢게 여기시는 주 야훼께서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패망한 민족들에 대한 예언자의 만가에서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찾을 수 있다(27, 32장).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부정한 모든 것을 불태워 그 도읍을 마침내 원초의 순수에로 되돌려 놓듯이(24장), 이방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또한 그들의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을 그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자기네 하느님으로 알게 하려는 것이다(28,26).


에제키엘은 예언서의 가장 중대한 대목인 마지막 부분(33-48장)에서 이러한 긍정적인 메시지로 돌아간다. 33장이 그 전환을 이루고 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온 사람이 “수도가 함락되었다.”(33,21)는 소식을 전해 준다. 실질적이고도 철저한 회개로써 “새 마음”을 갖기 전에는 물리적인 힘으로 정치 권력의 회복을 도모하지 말라는 에제키엘의 경고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왕으로 세워 놓은 시드키야가 반기를 들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과 그 도읍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파멸에 대한 에제키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왕국은 멸망해 버렸다. 백성들은 어떠한 힘도 없었다. 이제 영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어야 한다. 에제키엘은 희망의 예언자가 되었다. 33장은 모든 영적 쇄신의 근본 조건으로서 회개를 거듭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 장들에서는 이스라엘의 재생의 모습을 그려 나가고 있다. “이스라엘 산들의 기름진 목장에서” 당신의 양떼를 기를 메시아적 목자를 하느님께서 세워 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재생이 시작된다(34장). 시온산의 영광은 세일산과 에돔, 이 세상의 나라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영의 세례로써 이스라엘 가문의 마음을 바꾸어 주겠다고 장엄한 서약을 하신다(36,25-27). 마른 뼈들의 환시는 이스라엘의 재생이 하느님 영의 역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37장). 이 아름다운 장들은 각기 보편적인 전망, 즉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영적 쇄신에 참여하리라는 전망으로 끝을 맺고 있다(36. 37. 38장; 37,28). 구원 역사의 이러한 보편적인 전망은 마곡의 왕 곡(두꺼운 지붕 또는 박공이라는 뜻의 이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38-39장).


이스라엘에 재생을 가져다 주시는 하느님의 권능과 거기에 따르는 투쟁을 보여 준 다음, 예언자는 새로운 공동체를 묘사한다(40-48장). 이 난해한 대목을 예로니모 성인은 “신비의 미로”라고 부른다. 성전의 기본 구조와 치수, 국토의 경계선 등 여러 가지 세부 묘사는 영신적 완덕의 규범 내지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가문이 “제 스스로 얼마나 부끄러운 죄를 지었는지 알게 되도록”(43,10) 성전의 참 모양을 밝혀 주신다. 이러한 간단한 설명으로 그 세부 묘사의 미로를 파고들 수는 없는 일이지만, 43장 12절에 나오는 기본적인 “건축법”에 대한 이해로 만족하여야 할 것이다. “성전은 이렇게 짓는 법이다. 산꼭대기를 돌아가며 울타리를 친 경내가 모두 거룩한 곳이다.” 이전의 성전 건축법은 성(聖)과 속(俗)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었다(43,8). 그러나 새로운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성속의 구별은 폐기될 것이다. 거기서 인간의 삶 전체가 거룩한 산으로 들어 높여져 전우주를 성화하는 까닭에 그곳을 참으로 거룩하고 거룩한 곳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거룩하고 거룩한 곳”이라는 이름은 절대 신성 불가침의 좁은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천지 사방에 거룩함을 비쳐 주는 중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지성소와 세상을 갈라놓는 장막은 영원히 찢어지고 말았다. 성전과 도읍과 나라를 갈라놓는 경계선은 이제 없어지고 말았다. 성전의 연장이 도읍이고 도읍의 연장이 나라다. 성전 동쪽 문턱에서 솟아 나오는 물(47,1)이 도읍과 나라로 흘러 들어간다. 그 강물에서 헤엄치는 것이 곧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며 사는 신앙이다. 참 신앙이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는 자리다. 그 신앙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도읍지의 이름은 “야훼 삼마”(주님 여기 계시다)이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대인 편역)


[경향잡지, 1989년 7월호, 다마수스 빈첸]


[성서의 세계] 예언자 에제키엘 (2) -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리라!”

- 상징과 환시의 예언자 에제키엘


에제키엘 예언자의 선포 메시지는 예루살렘 멸망(기원전 587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져 부정과 불의에 빠져 있던 왕조시대 말엽에는 준엄한 하느님의 심판(4-24장)이 선포되었지만, 왕조가 멸망한 후 유배의 시련을 겪게 된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하느님께서 이루실 구원(33-48장)이 예고되고 있다. 결국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심판으로 ‘마른 뼈’ 신세로 전락한 이스라엘에게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시며,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로 ‘다시 살아날 것’임을 선포하였던 것이다.(37,1-14)


1.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선포(4-24장)


1) 이스라엘의 죄


그 옛날 이스라엘 선조들이 하느님의 놀라우신 업적으로 에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광야의 여정을 걸어갔을 때, 시나이 산에 이르러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과 규정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며 하느님과 계약을 맺게 된다. 바로 이 시나이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십계명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을 구원하신 하느님만을 믿고 섬기며,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고,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한마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을 말한다.


바로 이러한 삶의 규범에 비추어 에제키엘은 왕조시대 말엽 이스라엘의 종교, 사회생활을 고발하고 있다. 사제였던 에제키엘은 먼저 우상숭배에 빠져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멀어져있던 이스라엘의 생활을 질책한다. 그들은 높은 언덕과 산봉우리, 나무 아래에 제단을 쌓고 온갖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쳤으며(6,13), 예루살렘에 있던 하느님의 성전에서도 ‘질투의 우상’(8,5),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과 혐오스러운 짐승’(8,10), 아카디아의 담무즈 신(8,14), 태양(8,16)을 숭배하는 역겨운 짓들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예언자는 당시의 폭력과 불의가 난무하던 사회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22장) 사회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사자가 먹이를 노리듯 백성들의 재물을 착취하고(22,6.25), 사제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짓밟고 그분께 바쳐진 거룩한 물건들을 더럽혔으며(22,26), 예언자들은 주님께서 일러주시지 않았는데도 자기 멋대로 거짓 환시와 속임수 점괘를 남발하였던 것이다.(22,28) 또한 백성들도 사회생활의 가장 근본 계명인 부모님 공경을 소홀히 하였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부류인 이방인과 고아 그리고 과부를 외면하고 학대하였으며, 성(性) 윤리가 무너져 간음과 근친상간이 만연한 실정이었다.(22,7-11)


2) 이스라엘의 반항의 역사


예언자는 당시 죄에 빠져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갔던 상황이 이미 이스라엘이 살아왔던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16, 20, 23장) 이스라엘이 한결같으신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하느님을 배반하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에집트에서 해방시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하셨던 그때부터 하느님께 반항하기 시작하였다.(20,6-8) 이어 광야에서 목마름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이 물,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다시 한번 체험하였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를 따르지 않았고 안식일을 더럽혀 하느님께 반항하였다.(20,10-27) 그리고 하느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데리고 들어갔을 때에도 그들은 온갖 혐오스러운 우상들을 섬겨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20,28-31) 그러므로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강한 손과 펼친 팔로, 퍼붓는 분노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어 계약의 의무를 지우겠다고 선언하신다.(20,32-38)


이러한 예언자의 역사 이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부정한 아내의 역사’로 제시하고 있는 16장과 정부들(아시리아, 에집트, 바빌론)의 품을 열망하여 찾아다녔던 두 자매, 즉 오홀라(사마리아)와 오홀리바(예루살렘)를 바로 그 정부들의 손을 통해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리라는 23장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다.


3) 하느님의 심판-예루살렘의 멸망


이처럼 하느님을 배반하여 반항을 일삼아오던 이스라엘은 결국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초래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의 고난이었다. “비탄과 탄식과 한숨”, 예언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받아 먹은 두루마리에 적혀있던 이 말씀은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으로 드러나게 되고, 예언자는 자신의 상징적 행위들을 통해 다가오는 비극적인 상황을 예고한다.


에제키엘은 벽돌로 예루살렘 성읍과 그 둘레를 에워싼 공격보루와 공격축대를 만든다.(4,1-3) 이 모습은 예루살렘의 포위와 함락에 대한 하느님의 확고한 결정을 예시하고 있다. 그 뒤 예언자는 바닥에 왼쪽 옆구리를 대고 390일(또는 190일),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40일 눕는다.(4,4-8) 이 행위는 하루를 한 해씩으로 쳐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그들의 죄로 겪게 되는 유배 햇수를 가리키고 있다. 이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에게 여섯 가지 곡식을 섞어 만든 재료를 인분으로 구워 빵을 만들라고 명하신다.(4,9-17) 예루살렘 멸망 후 이스라엘이 먹게 될 이 빵은 정결을 중시하던 그들에게 있어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될 부정(不淨)한 것이었다. 밭에 여러 곡식들의 씨앗을 섞어 뿌리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 규정(레위 19,19)처럼 여러 곡식을 섞어 만든 빵도 부정한 것인데, 하물며 인분이나 쇠똥과 같은 부정한 땔감을 사용했다는 것은 부정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하겠다. 나아가 식량을 하루에 200그램의 음식과 0.65리터의 물로 제한한 것은 유배 때 겪게 될 생활의 곤궁함을 나타낸다. 또한 예언자는 자신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 삼분의 일은 성안에서 불로 태우고, 삼분의 일은 성을 돌며 내려치며, 나머지 삼분의 일은 바람에 날린다.(5장) 이러한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맞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단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즉 주민의 삼분의 일은 성안에서 흑사병과 굶주림으로 스러져 가고, 삼분의 일은 성 둘레에서 정복자의 칼에 쓰러지게 되며, 또 삼분의 일은 고향을 등지고 외국으로 유배나 유랑의 길을 나서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보따리를 꾸려 나서는 모습 역시 유배지로 끌려 갈 백성들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12,1-16)


마침내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고(10장), 바빌론에서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근근히 존립해오던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고 거룩한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33,21)


2. 하느님의 구원 선포(33-48장)


예루살렘 멸망(기원전 587년) 이후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겪게 된 고난이 그들 자신이 범했던 죄의 결과임을 지적하면서, 아울러 하느님의 심판은 끝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참다운 백성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한 정화의 시작임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절망 속에 빠져 있던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의지를 열정적으로 전한다.


1)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리라!(37장)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마른 뼈로 가득 찬 골짜기를 보게 된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적인 말씀을 통해 뼈에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심으로써 다시 살릴 것임을 예언자에게 일러주신다. 이 환시는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37,11)라고 탄식하던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새로운 생명이 부여되리라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전하고 있다.


2) 새 마음을 통한 새 계약의 체결


이제 하느님 친히 당신 백성의 목자로 나서시어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리라.”(34,16)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죄에 물들어 있던 이스라엘을 정결케하고 새 마음과 새 영을 불어넣어 주시며,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심으로써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시고,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이끌어 주시고자 하신다. 여기서 마음이란 인식의 주체일 뿐 아니라 의지와 행동의 주체를 의미하는데, 이처럼 이스라엘은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사람이 됨으로써 하느님께로 나아오게 될 것이다.(36,24-28)


나아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평화의 계약’을 맺게 될 것인데(34,25), 그때 비로소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있음을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임을 알게 될 것이다.(34,30)


3) 새로운 공동체(40-48장)


에제키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환시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전해 받고 새롭게 탄생하게 될 공동체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새 공동체의 삶에 있어서 그 중심은 전통적으로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며 참된 경신례가 올려지는 장소인 성전이 될 것이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4년째 되던 해(기원전 573년)에 주님의 손에 이끌리어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으로부터 오시어 머무르시게 될 성전은 ‘하느님 어좌의 자리, 그분의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이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43,7 참조)이 될 것이다.


이어 예언자는 하느님의 도구로서 그분의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전하고 있는데, 그들은 사제와 레위인 그리고 제후들이다.(44-46장) 먼저 사제는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와 그분을 섬기고, 경신례를 주관하며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하느님의 법규에 따라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직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레위인은 사제들을 도와 성전에서 시중드는 일을 맡게 된다. 그리고 제후들은 백성의 지도자로서 왕조시대 폭력과 억압, 수탈을 일삼던 임금들과는 달리 ‘공정과 정의’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어야 할 임무를 맡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제키엘은 성전에서 솟아 흐르는 물의 환시를 전하고 있는데,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나게 된다.(47장) 구약성서에 있어 물이 솟아나는 샘은 생명력을 부여하는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따라서 여기서 성전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생명력을 지닌 “생명수”는 곧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약성서의 요한계 문헌들은 이 예언이 인류를 위해 희생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새로운 성전이며(요한 2,21), 그분의 옆구리로부터(요한 19,34) 영원한 생명의 물이 흐른다.(요한 4,14) 요한의 묵시록은 희생된 어린양의 천상 어좌에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제시하고 있다.(묵시 22,1-2)


환시와 상징적 행위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였던 예언자 에제키엘. 그는 당시 이스라엘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열정적으로 선포하였으며, 나아가 하느님과 함께 온전히 구현될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였던 예언자라 하겠다.


[월간 빛, 2002년 12월호,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성서학 교수)]


[성서의 세계] 예언자 에제키엘 (1) - 유배 시대 초기의 예언자 '에제키엘'

- 시대적 상황과 소명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와 더불어 구약의 3대 예언서를 이루는 에제키엘 예언서는 남왕국 유다가 강대국 바빌론 제국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라는 민족적 비극을 겪게 되었던 시기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뜻을 열정적으로 선포하였던 예언자 에제키엘의 활동을 전하고 있다. 에제키엘은 주로 환시와 상징적 행위들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의 선포 내용은 예루살렘의 멸망(기원전 587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왕조 말엽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심판경고가 주류를 이루다가, 왕조 멸망 후에는 유배의 시련을 겪게 된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예고가 강조되고 있다.


1. 에제키엘의 생애와 시대적 상황


남왕국 유다의 요시야 임금(기원전 640-609년)이 신명기 정신을 바탕으로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종교개혁(2열왕 22,3-23,25)을 본격적으로 단행하던 기원전 622년경 에제키엘은 부지라는 사제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러나 그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7세기 말엽은 바빌론 제국의 부상(浮上)과 함께 고대 근동지방의 세력판도가 바뀌는 격동의 시기였다.


기원전 612년 강대국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바빌론과 메대의 동맹군에게 함락되자 위협을 느낀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기원전 610-594년)는 바빌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왕국 유다의 팔레스티나 지방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에 요시야 임금은 기원전 609년 북진하는 이집트을 맞아 므기또에서 전투를 벌이나 전사하고 만다.(2열왕 23,29-30) 그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여호아하즈는 재위 삼 개월만에 이집트에 의해 폐위되고 여호야킴 임금(기원전 609-597년)이 남왕국 유다를 다스리게 된다. 그는 파라오 느고에 의해 임금으로 옹립된 까닭에 이집트의 세력 하에 안주하였으며, 당시 예언자로 활동하던 예레미야를 박해하기도 했던 포악하고 하느님께 불충한 군주였다.


그 후 기원전 605년 가르그미스에서 대세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여기서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은 이집트 군을 격파하고 고대 근동지방의 패권을 차지한다. 이때 남왕국 유다 역시 바빌론의 종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기원전 601년 여호야킴은 바빌론 군이 본국으로 철수한 틈을 타 반기를 드는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였다가 결국 전사하고(2열왕 24,1-4)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기원전 597년 바빌론 제국의 대규모 침공으로 마침내 예루살렘은 점령되고, 정복자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 임금을 비롯하여 많은 지도층 인사들과 장인(匠人)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는데, 이것이 바로 1차 유배이다.(2열왕 24,10-17) 이때 사제인 에제키엘도 포로들과 함께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바빌론은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키야를 임금으로 내세운다. 그는 의지가 약하고 우유부단했던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임금으로, 그의 재위 동안(기원전 597-587년) 왕국은 친바빌론파와 친이집트파 그리고 독립파 등이 벌이는 정쟁에 휘말려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기원전 593년경 에제키엘은 포로로 잡혀간 지 5년째 되던 해에 바빌론 남쪽의 성읍 니푸르 부근에 있는 유프라테스강의 수로 가운데 하나인 ‘그발강’ 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한편 고국에서는 기원전 589년 예레미야 예언자의 반대(예레 27장)에도 불구하고 시드키야 임금이 이집트의 지원 아래 띠로, 시돈과 동맹을 형성하여 왕국의 독립을 시도한다. 그러나 기원전 587년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온 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남왕국 유다는 멸망하게 된다.(2열왕 25,1-7)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중심지였던 성전은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떠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2차 유배이다.


당시 유배지에서 이러한 민족적 비극을 맞았던 에제키엘은 개인적으로 아내를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에제 24,15-19) 그 후에도 예언자는 유배의 시련 가운데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신앙의 위기에 봉착했던 동족들을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그의 예언 활동은 기원전 571년경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되는데(에제 29,17), 나머지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2. 예언자 에제키엘


에제키엘은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신다.’란 뜻을 가진 그의 이름처럼 특히 유배 시대 초기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잘못된 삶의 결과로 겪게 된 유배의 혹독한 시련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이끌었던 예언자다.


본래 사제였던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유배 때 바빌론으로 잡혀가 생활하던 중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출신배경은 그의 선포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유배지에서 활동하였지만 그의 선포는 예루살렘과 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그리고 장차 하느님께서 그 곳에서 이루실 일들을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에제키엘은 ‘가슴속에 두 가지 영혼을 담고 있는사람’이라 묘사되듯이 상이한 특성들을 함께 내포하고있는 독특한 예언자이다. 즉 그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준엄하게 선포하면서도 구원의 희망을 전하였던 하느님의 사자(使者)였고, 여러 환시를 보고 때로는 탈혼상태에 빠지면서도(에제 1,1.4이하; 3,10-15) 명철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학자였으며, 엄격한 규범을 준수하는 사제인 동시에 그러한 것들을 초월하는 예언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말을 통한 선포와 함께 환시와 다양한 상징적 행위들을 사용했다는 점도 다른 예언자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라 하겠다.


3. 선포 내용의 구조


에제키엘 예언서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민족적 비극인 기원전 587년의 왕국 멸망과 유배를 전환점으로 하여 심판의 예고(첫째 부분)에서 구원 선포(셋째 부분)로 넘어가는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사이에 놓여 있는 둘째 부분에는 남왕국 유다의 멸망과 연관된 이웃 나라들에 대한 예언이 수록되어 있다.


4. 예언자의 소명


예언서의 첫 부분인 1-3장은 에제키엘 사제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의 하느님 체험과 예언자로서의 사명에 대해 전해주고 있다.


1) 소명의 시기와 장소(1,1-3)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에게 처음 말씀을 내리시고 당신의 예언자로 선택하신 것은 여호야긴 임금의 유배 제5년, 즉 기원전 593년이었다. 이때 에제키엘의 나이는 30세 가량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1,1 첫머리에 제시되는 ‘제 삼십년’이란 표현을 그의 나이와 연관시켰던 3세기 오리게네스 교부 이래의 해석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소명을 받은 장소는 유배지 바빌론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인 ‘그발강’가이다. 따라서 에제키엘은 1차 유배시기에 유배지에서 예언자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2) 하느님 현현 체험(1,4-28)


에제키엘은 환시 가운데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다. 환시란 하느님 현현의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에제키엘은 신비로운 형상들을 목격하게 되며, 그들 머리 위 궁창 위에 있는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 영광’의 형상을 보게 된다. 이처럼 종교적으로 부정한 땅인 유배지 바빌론에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하느님 현존에 대한 기존의 사상을 뛰어 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유다인들은 하느님이 예루살렘의 성전에만 현존하시는 것으로 믿어왔으나(1열왕 8,11), 이 사건을 통해 하느님은 장소적 제약에 얽매이시지 않는 초월적이신 분, 온 땅의 지배자이심이 계시된 것이다.


3) 하느님의 부르심(2,1-3,15)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목격하고 땅에 쓰러져 있는 에제키엘을 “사람의 아들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2,1)하고 부르신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란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한계, 부족함을 함축하고 있는 개념으로 ‘하느님의 영광’과 대조를 이룬다. 즉 에제키엘은 인간의 실존적 제한성을 지닌 채 하느님의 도구로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결정을 나타내는 말씀, 즉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는 두루마리를 건네시면서, “네가 보는 것을 받아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3,1)하고 이르신다. 이에 에제키엘이 그 두루마리를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3,3)고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모신 예언자가 체험한 내적인 충만함을 의미한다. 이어 하느님께서는 그를 이마가 단단하고 마음이 굳은 자들, 당신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는 반항의 집안, 곧 이스라엘에게로 파견하신다.


4) 이스라엘의 파수꾼(3,16-27)


이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이 예언자로서 수행해야 할 사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파수꾼임을 밝히신다. 본래 파수꾼이란 성(城)의 망루에 서서 외적의 침입을 발견하고, 성안의 백성들이 미리 대처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에제키엘 역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잘못을 징벌하기 위해 의도하고 계시는 심판을 미리 경고함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악한 길을 버리고 참다운 하느님 백성으로서 살아가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월간 빛, 2002년 11월호,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성서학 교수)]


에제키엘 입문


1. 이스라엘 역사의 대전환기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와 함께 이른바 ‘삼대 예언서’를 이루는 에제키엘서는 “제 삼십년 넷째 달 초닷샛날”이라는 말로 시작한다(1,1). 이때 에제키엘이 계시를 받고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햇수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유다 왕국의 요시아 임금이 종교개혁을 실시한 해(기원전 621년)를 기준으로 했다든가, 신바빌론 왕국 느부갓네살 임금의 통치 기간을 가리킨다는 등,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그런데 2절에는 “여호야긴 임금의 유배 제 오년”이라는 다른 연대가 나온다. 이로써 원래는 1절의 말만으로 충분했는데, 이 예언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어떤 말마디가 빠졌든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로 해서, 2절의 설명을 보태야만 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한편, 3세기의 오리게네스 교부 때부터, 이 “삼십”이라는 숫자가 에제키엘의 나이를 가리킨다는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추측이 제시되었다. 이 추측이 맞을 경우, 에제키엘은 25살 때 여호야긴 임금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온 것이 된다. 이렇게 에제키엘은 성전에서 사제직을 수행하는 대신 이국 땅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유배의 햇수가 바로 에제키엘서의 시간의 기준이 된다. 1장 2절 외에도 8,1; 26,1; 30,20 등 곳곳에 ‘제 몇년 몇월 몇일’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마지막 40,1에는 “우리의 유배살이 제 이십오년 연초 초열흘날, 곧 성읍이 함락된 지 십사년째 되는 해”라는 가장 길고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에제키엘은 ‘유배 때의 예언자’인 것이다. 그러나 이 유배는 처음이면서 작은 것에 불과하다. 그는 유다 왕국의 완전한 멸망과 더 큰 유배를 예고해야 한다. 


에제키엘은 유배 제 오년에 “유배자들과 함께 그발 강가에” 있다가, “하늘이 열리면서 ……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시를” 보게 된다(1,1). “그발 강”은 바빌론 남쪽의 성읍 니푸르 부근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의 수로 가운데 하나이다. 에제키엘을 위시한 유다인들은 “텔-아비브”라는 마을에 배치되어(3,15), 이 수로를 만드는 작업에 투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특히 1장에서 24장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이 유배지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문제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겉으로는 바빌론의 귀양살이가 틀을 이루지만, 안으로는 예루살렘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 또 장차 거기에서 일어날 사건들이 관심의 초점이다. 그런데 예루살렘과 바빌론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짧은 기간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유배자가 마음대로 장소를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에제키엘의 활동 무대가 문제로 떠오른다. 


먼저 에제키엘은 바빌론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만 머무르면서 유다가 멸망할 무렵에 활동하였다는 설명이 제시된다. 그러나 이 주장이 만족스럽지 못하자, 이를 수정한 이른바 ‘두 무대 활동 가설’이 나온다. 에제키엘이 전기에는 예루살렘에서, 후기에는 바빌론에서(또는 거꾸로 전기에는 바빌론에서, 후기에는 예루살렘에서), 혹은 이 두 곳을 오가면서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에제키엘은 “네 동포 유배자들에게 가서 일러라.”라는 사명을 받는다(3,11). 그는 일차적으로 유배자들에게 파견된 예언자이다. 이 유배자들은 비록 한 지방에서만 살고 정해진 작업을 해야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에제키엘의 경우에는 원로들이 모일 수 있을 정도의 집도 가지고 있다(8,1). 사람들은 이 유배살이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배자들은 언젠가는 돌아갈 조국의 땅을 그 무엇보다도 더 많이, 더 간절히 그리워하였다(시편 137 참조). 그 고국 땅은 격동의 혼란 속에 있다. 예루살렘과 바빌론 사이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서로 다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예언자는 지금의 유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서운 운명이 고국과 동족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유배자들의 관심의 초점인 예루살렘에 관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된다. 


이렇게 유다의 운명적인 시간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것처럼, 에제키엘은 바빌론에서 활약한다. 예레미야는 유배자들에게도 편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예레 29장). 에제키엘 역시 편지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예언하였다. 


그렇다면 ‘첫째 유배’는 무엇이고, 다가오는 멸망과 더 큰 유배는 무엇인가? 


이때 근동의 패자는 신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임금이다. 그는 이미 기원전 605년 왕자의 신분으로 근동 전역의 운명을 결정짓는 가르그미스 전투에서 경쟁국 에집트의 느고 파라오를 쳐부순 적이 있다. 이로써 이 지역의 양 축인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를 잇는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종주국도 바뀐다. 그러나 느고가 609년에 왕위에 올린 유다의 여호야킴은, 이러한 정세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예언자까지 죽이면서 자기의 안락과 호사만을 좇는 이기주의자이면서 동시에(예레 22,13-17; 26,20-23), 국제 정세를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는 우둔한 군주였다. 그래서 이 폭군은 기회를 엿보다가 601년에, 드디어 대제국에 반기를 드는 무모한 모험을 단행한다(2열왕 4,1). 느부갓네살의 입장에서는, 유다가 비록 조그만 왕국이기는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저항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유다를 징벌할 여유가 없어, 이웃 여러 나라를 시켜 유다로 쳐들어가게 한다. 이 와중에 여호야킴이 전사하고, 열여덟 살의 여호야긴이 그 뒤를 잇게 된다. 마침내 598-597년에는 느부갓네살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면 공격을 단행한다. 즉위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여호야긴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다. 


그리하여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을 함락한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왕궁과 성전의 기물들을 앗아가고, 임금을 비롯하여 모후와 왕비들도 잡아간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지도층 인사들도 많이 끌어간다. 그 가운데에는 사제 가문의 출신 에제키엘도 끼어 있었다. 이것이 ‘제1차 유배’이다. 


충격적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태는 이제 내리막길을 달린다. 그러나 유다 땅에서 새로운 지배 계급을 형성한 인사들은, 우유 부단한 시드키야 임금을 끼고 반바빌론-친에집트 정책을 편다. 그들은 에집트의 사주를 받아, 독립을 쟁취할 뿐더러 바빌론에 빼앗긴 기물들을 되돌려 받게 되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예레미야 예언자만이 이러한 정치적, 특히 종교적 오판, 광신적 민족주의에 맞서 고군분투한다(예레 27장 참조). 그러나 예레미야의 노력은 허사로 끝나고, 유다 왕국은 끝내 바빌론에 다시 반기를 든다. 결국 기원전 587년 8월에 예루살렘이 함락된다. 왕자들은 처형되고, 임금은 눈이 뽑힌 채 귀족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간다. 약탈을 당한 궁궐과 성전은 불에 타 파괴된다. 유다 왕국이 망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하느님의 성전은 이교도들의 손에 의해서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하느님께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보다 더 큰 충격과 비극은 있을 수 없었다.


2. 민족 비극의 한가운데에 선 예언자


에제키엘은 조국과 동족에게 거침없이 다가오는 이 큰 불행을 유배지에서 바라보며, 그리고 이 운명적인 587년 이후에는, 폐허가 된 조국과 뿔뿔이 흩어진 동족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예언자의 이름으로 모아진 에제키엘서는 상대적으로 긴 책이면서도, 그 안에 이 예언자 개인에 대한 사항은 별로 적혀 있지 않다. 그는 부지라는 사제의 아들이다(1,3). 그래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이룬다. 사실 에제키엘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사제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는 또 혼인까지 했는데,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될 즈음에 부인이 갑자기 죽는다(24,18). 유배를 당해 끌려간 그는 또 자기 집에서 원로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말을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한다(8,1; 20,1). 


그런데 에제키엘서 전체를 살펴보면, 그가 예언자들 가운데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여러 가지 환시를 보고 때로는 며칠씩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1,1.4 이하; 3,10-15; 3,22 이하; 37,1 이하 등). 그는 많은 상징 행동을 하고, 이따금 농아 증세와 마비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또 자기 집에 앉아 있으면서도 예루살렘을 돌아다니는 환시를 보기도 한다. 이런 특이한 현상을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으로는 에제키엘이라는 인물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는 내적 긴장 상태의 사람이다. 어쩌면 바오로 사도나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처럼 몸이 성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경 쇠약에 걸린 것은 아니다. 그는 바오로처럼 하느님의 세계와 그분의 계획에 깊이 관여된 인간이다. 여기에서부터 내적인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심리적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에제키엘은, 어떤 학자가 지적하였듯이, 가슴 속에 두 가지 영혼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규범과 규정 속에 사는 사제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것을 초월하는 예언자이다. 또한 정열적인 설교가이면서, 모든 것을 아주 정확하게 기술하는 저술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차없이 멸망을 선포하는 사자이면서, 구원을 예고하는 예언자이다. 그는 탈혼 상태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면서, 냉철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또 열정적이면서 동시에 심사숙고하고, 꿈꾸는 듯한 이상주의자면서 현실적이며, 냉정하면서도 동정심 많은 인간이다. 


이러한 극단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 바로 그의 소명이다. 그리고 이 소명은 대전환기의 소명이다. 그는 멸망해 가는 세계와 새롭게 일어나는 세계의 중간에 선 예언자인 것이다.


3. 에제키엘 예언서


예언서를 통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이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방식, 곧 사건별이나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에제키엘서도 다른 예언서들처럼 일종의 ‘선집’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언뜻 보기에는, 같은 주제가 직접 관계가 없는 여러 갈래로 전개되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말씀들이 선택적으로 일관성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34장에서는 목자와 양떼의 주제들이(예레 23,1-6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여러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1장에는, 서로 잘 부합되지 않는, 분명 중복되는 요소들이, 또는 문법의 일관성을 무시하고 덧보태진 세부 사항들이 뭉쳐있다.


이러한 부조화에 대한 큰 책임은 에제키엘의 제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논리성에는 별 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스승의 신탁들을 토막낸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3,22-27; 4,4-8; 24,15-27과 33,21.22는 계속되는 한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들일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때로 서로 직접 관련이 없는 신탁들을 인위적으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예컨대 21장에서는 “칼”이 서로 무관한 단락들을 잇는 ‘연결 낱말’로 쓰인다. 곧 주님의 칼(6-12절), 잘 갈아 날이 선 칼(13-22절), 바빌론 임금의 칼(23-32절), 암몬인들을 치는 칼(33-37절) 등이 그것이다. 이 제자들은 또 같은 신탁을 되풀이한 것으로도 보인다. 예컨대 ‘주님의 의로운 길’에 대한 생각은 18,1-32와 33,10-20에 거의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그렇다고 에제키엘이 이 책의 이러한 현재 상태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에제키엘 자신이, 자기가 이미 쓴 문장들에 갖가지 세부적인 내용들을, 그리고 기존의 장들에 갖가지 단락들을 때로는 너무 많이 채워넣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음에는 틀림없지만, 애초의 조화를 깨뜨리게 된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환시 이야기라든가(1-3장; 8-11장) 예언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4,4-17) 보충하였다. 


이러한 구조적, 문법적 문제들이 이 예언서를 읽기에, 그리고 우리말로 옮기기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에제키엘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간단한 구조로 정돈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예루살렘 멸망 이전 

(1) 환시와 소명: 1-3장 

(2)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 4-24장 


2. 이민족들에 관한 예언: 25-32장 


3. 예루살렘 멸망 이후 

(1) 구원 예고: 33-39장 

(2) 새 예루살렘: 40-48장 


이렇게 세 단계로 이루어진 에제키엘서는 전체적으로 첫째 단계에서 셋째 단계로 넘어가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것은 곧 심판의 예고에서 약속의 예언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라는 일대 비극적 사건이 그 경계를 이룬다. 멸망과 불행을 통하여 구원과 행복이라는 새로운 시작의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이웃 나라들에 대한 예언은 바로 이 비극적 사건과 연관이 있다. 유다 왕국에 불행을 끼치고 슬픔에 빠진 유다인들을 조롱하는 민족들에게 응분의 징벌을 예고하는 것이다.


4. 에제키엘의 가르침


에제키엘의 삶과 자세를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 둘 있다. 하나는 하느님 영광의 현현으로서, 이것이 사제인 에제키엘을 예언자로 만든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서, 이것이 멸망의 선포자 에제키엘을 구원의 예고자로 변화시킨다.


(1) 하느님 영광의 현현


에제키엘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영광에 사로잡힌다. 이 영광은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나는데(1,28; 3,23; 8,4; 10,1; 43,2), 그때마다 에제키엘은 그 모습을 보고서는 대경 실색하며 실신 상태에 빠진다(3,15). 


그렇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본 것인가? 먼저 폭풍이 휘몰아치며 거대한 구름 한가운데에서 번쩍거리는 불이 보이고, 딱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생물들이 나타난다. 이 날아다니는 네 생물은 궁창 같은 것을 받치고 있는데, 그 위에는 어좌 하나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어좌에는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인 채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다. …… 이것이 주님 영광의 모습이다(1,4-28). 


결국 에제키엘은 자기의 대선배 이사야가 본 환시와 같은 것을 본다. 그러나 이사야와는 다른 맥락에서 다른 특징을 지닌 환시를 보게 된다. 이사야는 주님의 초월성, 온 세상의 임금이신 분의 영광에 대한 숨막힐 듯한 계시를 받는다(이사 6,3). 그런데 온 세상의 임금이시라는 점이 에제키엘의 원래 서술에는 직접적으로 들어있지 않다. 그 대신, 그는 자기의 원초적 직감을 흐리게 할 수도 있는 부차적인 면들을 첨가시킴으로써, 이 진리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이로써 바빌론의 동물 신화에서 따온 환상적인 짐승들에 대한 긴 서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언자는, 바빌론인들이 우주의 모든 힘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여겼던 이 짐승들을 주님을 섬기는 존재로 배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환각을 일으킬 듯한 바퀴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들도 나름대로 주님의 영광이 어떤 곳으로든 거침없이 움직이면서 전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계시로 압도당한 에제키엘은 자기의 왜소함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님의 영광 앞에서, 비천하고 하찮은 “사람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는, 서있을 수조차 없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될 수밖에 없다(1,28; 2,2; 3,14-17.22-23). 그러한 그에게 주님의 손이 무겁게(3,14) 내리시고(1,3; 3,22; 8,1; 33,22; 37,1; 40,1), 또 그분의 영이 내리시어(2,2; 3,24; 11,5) 그를 들어올리신다(3,12.14; 8,3; 11,1.24; 43,5). 


그러나 예언자는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나와 예루살렘에서 멀어지는 것을 본다(11,22.23).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거처인 시온을 떠나시는 것이다. 유다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듯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일어난 극적인 결별의 동기를,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땅의 풍토병과 같은 이 악의 중대함과 만연함과 깊이를 밝혀내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다. 이 죄는 폭행이며 사람들의 피를 쏟는 범죄 행위이다(7,23; 9,9; 16,36; 18,10 등). 이러한 죄를 예언자는 적어도 한 번, 하느님에 대한 불경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36,18). 에제키엘이 가장 큰 죄로 여기는 것은 우상숭배이다(14,1-8). 그는 이 불경이 이스라엘 땅의 모든 언덕 위에서, 모든 큰 나무 밑에서(6,3.6.13; 16,16; 20,28.29) 자행되는 모습을 본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8장). 그는 성전의 안뜰 대문 어귀(3-6절), 뜰(7-13절), 북쪽 대문 어귀(14.15절), 안뜰 성소와 제단 사이(16절) 등 곳곳에서 우상숭배가 벌어지는 표시들을 확인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또한 백성이 일상 생활에서 저지르는 부패와 부정과 부도덕이기도 하다. 이것을 예언자는 성소에서 사용되던 죄의 고백 형식을 빌려 서술한다(18,5-9; 22,3-12.23-30). 


에제키엘은 죄가 역겨운 짓이며 혐오스러운 짓이라고(6,9; 16,22.52) 계속 되풀이하여 말한다. 그것은 배우자를 배신하는 부정이고 간통이며 창녀짓이다. 예언자는 이 주제를,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 ‘버려진 아기의 비유’에서 전개시킨다. 이 여자 아기는 받아주고 좋아해주는 이 없이 피투성이로 들판에 버려지지만, 주님께서 발견하여 살려주시고 양녀로 받아들이신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리신다. 그러나 이 여자는 종국에 가서 “뻔뻔스러운 창녀”로 전락하고 만다(16장). 에제키엘은 오홀라(북부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와 오홀리바(남부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라는 두 자매, 몰염치한 창녀짓에 자신을 내맡기는 이 두 여자의 역사로써, 이 주제를 되풀이하여 설명한다(23장). 


결국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빠져버린 이 추잡한 부정의 뿌리가 교만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소돔의 이방인들(16,49-50), 띠로의 임금(28,2.5.17), 에집트인들(30,6.18), 그리고 파라오들이(32,12; 35,13) 저지른 죄이며,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만하는(16,15.56) 아내 이스라엘이 범한 죄악이기도 하다(7,20.24; 33,28). 이는 또한 당신 뜻에 따라 당신 백성을 인도하라는 하느님의 분부를 저버린 유다 임금이 저지른 죄악이다(21,30-31). 


한편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은,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이고 어머니는 헷 여자로서, 이교도적인 배경에서 생겨났다(16,3.45. 3절의 각주 참조). 예루살렘의 전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배신은(20장) 결국 타고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에집트에 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손을 들고 맹세하시면서,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하고 당신을 알려주셨지만(20,5), 이스라엘인들의 이 에집트 체류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다. 곧 이스라엘인들은 그뒤 그 무엇으로도 포기시킬 수 없는, 우상숭배에 대한 열정을 지니게 된 것이다(20장).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사명과 함께,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 한가운데에 예언자로 내세워진다. 하느님의 말씀은 음식처럼 예언자 안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단맛으로 그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3,2.3). 그러나 그는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라고 외칠 때마다(3,11), ‘가시로 둘러싸이고 전갈 떼 가운데로 빠져들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2,6 참조). 그렇지만 그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사실은 유배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아무리 반항한다 하더라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2,5). 


이런 에제키엘은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한 파수꾼’이다. 에제키엘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악인이 자기의 악한 길을 버리고 살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의인에게 생명을 지키려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해야 한다(3,16-21). 이는,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과는 달리(18,1), 죄를 지은 자만 죽고, 아들은 아버지의 죗값을 짊어지지 않으며, 아버지는 아들의 죗값을 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18,4-20). 의인이든 악인이든 저마다 자기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 혼자 책임을 진다. 


그러나 예언자가 만일 악인에게 경고하기를 게을리하면, 적절한 질책이 없어 죽어가는 이 악인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3,18). 예언자는 이제 더 이상 하느님 백성이라는 집단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 각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구원을 책임져야 한다. 이렇게 예언자의 책임 소재를 밝히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당시에는 예언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시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영감만을 따라,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의 말을 예언이라고 선포한다. 그래서 이들은 벽에 균열이 생겨 전체가 무너질 위험이 있는데도, 거기에다 회칠만 하는 미장이와 비슷하다. 백성의 죄악을 치유하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않고, 평화의 메시지만 공포하는 예언자들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13장).


(2) 예루살렘의 멸망


백성의 죄악은 무서운 심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예언자는 이 심판이 다가옴을 보고서는, 말과(7; 9-11장) 행동으로써(4-5장) 그러한 사실을 지칠 줄 모르고 예고한다. 이 예고는 어떤 사람이 와서 불행이 완료되었다고, 곧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파괴되고 불에 타버렸으며, 생존자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하는 그 슬픈 아침까지 계속된다. 


이것이 에제키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사건이다. 자기의 고통을 조금도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분부를 받기는 했지만(24,15-27), 그는 동포 유배자들이 겪는 것에 결코 못지 않는 아픔을 느낀다. 사실 그들은 고통과 절망이 너무나 커서, “우리의 죄와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 우리가 그것들 때문에 스러져가는데, 어떻게 산단 말인가?”(33,10), 그리고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하기에 이른다(37,11). 


이러한 절망 속에서 에제키엘은 전혀 새로운 메시지를 들고 나온다. 그는 우선, 불행에 처한 이스라엘인들을 빈정거림으로써 그들의 아픔을 더욱 크게 만든 나라들에게 징벌을 예고한다. 이스라엘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언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괴이한 말과 어려운 언어를 쓰는 많은 민족”이, 이스라엘보다 말을 더 잘 들으리라는 사실을 이미 예감한 바 있다(3,6). 그러나 이제는 이 민족들이 하느님의 심판정으로 소환된다(25-32장). 그 가운데에서 에집트가 으뜸 피고이다(29-32장). 에집트는 유다 왕국의 임금 시드키야가 맹세와 계약을 저버리고(17,19) 바빌론 임금에게 반역하도록 유인함으로써(17,15), 유다 왕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한편, 띠로는 적군에게 짓밟힌 예루살렘에 대해서 부당한 뜻을 품은 것으로 드러난다(26,2). 그리고 팔레스티나 땅에 있는 이웃 민족들, 곧 암몬, 모압, 에돔, 그리고 불레셋, 모두가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움을 품는 잘못을 저지른다(25장). 


그런데 지금까지 불행의 “예표”로서(12,6) 피할 수 없는 불행을 예고해야 했던 예언자는, 이제 구원의 선포자로 변모한다. 이미 이전의 신탁들에도 위로의 말마디가 들어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곧 심판과 멸망에서 살아남을 “남은 자들”의 주제가 여러 구절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주제는 스쳐지나가는 듯한 언급으로 그치기 때문에, 그것이 부차적으로 첨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예루살렘 주민들의 철저한 멸망을 암시하는 에제키엘의 상징 행동(5,1-2)은 12-13절에서 설명되지만, 예언자가 말하는 의도에 잘 들어맞지 않으면서 “남은 자들”을 가리키는 5,3-4절의 상징 행동에 대해서는 뒤에 어떤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이 구절이 원래의 신탁에는 들어있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반면에 9장에서는 이 주제가 분명히 드러난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처형되기 전에,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구분해내는 작업이 선행된다는 것이다(9,4). 


그래서 유다 왕국의 몰락과 예루살렘의 멸망 뒤에 “남은 자들”이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6,8-10; 9,4-8; 11,13; 12,16; 14,22.23). 그러나 이들은 보잘것없고 약할 뿐더러(11,3 참조), 어쩌면 예루살렘에 쌓아놓은 시체들에 불과한 자들이었다(11,7). 그래서 “남은 자들”에 대한 언급만으로써는, 유배자들이 지니던 그나마 가냘픈 희망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주의깊은 “파수꾼”인 예언자 에제키엘은 결국 “성벽이 무너진 곳으로” 올라선다(13,5 참조). 폐허 위에 올라서서 전혀 새로운 시작을 선포한다. 곧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다. 바로 바싹 말라버린 해골들이 다시 살아나는 신기한 장면이다(37,1-14). 물론 이것은 개별적인 육신의 부활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가 줄어들고 또 소멸되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생명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해골더미로 전락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당신 영의 그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시어 그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이다. 


유배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생명을 다시 얻은 백성, 그러나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 생명을 받은 백성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말씀하신 그대로 실천하시는 주님께서(12,25.28; 17,24; 22,14; 36,36; 37,14)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리라.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 너희의 모든 부정과 우상들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리라.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도록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36,24-28). 


이러한 이상적인 삶은 그동안 남북으로 갈라졌다가 이제 다시 통일된 나라에서 실현된다(37,15-28). 이 새 왕국의 백성은 더 이상 자격 없는 지도자들이 자행하는 억압과 착취의 희생물이 되지 않는다(34,1-10). 주님께서 직접 목자가 되시어 당신의 양떼를 잘 돌보신다(34,11-16). 그리고 전에 임금으로 갖가지 특권을 누리던 다윗의 후손들은 그저 백성 가운데에 있는 한 제후가 될 뿐이다(34,24).


(3) 궁극적 전망


예언 활동을 마치면서 에제키엘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삶을 드러내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다. 우선 그는 이 백성이 “마지막 때”에(38,8) 모든 원수들에 게서 승리를 거두게 됨을 본다.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스라엘과 맞선 적군 앞에는 호전적인 마곡 땅의 곡, 곧 “메섹과 두발의 우두머리 제후”가 서고, 그 뒤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시대의 원수들이 서있다. 이스라엘은 이들과 전투를 벌여 그들을 멸망시킨다. 그리고서는 그들의 무서운 무기들을 땔감으로 쓴다. 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그들의 시체들을 맹금과 들짐승에게 먹이로 내준다. 그리고 시체가 이스라엘 땅을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시켜 일곱 달 동안 적군의 주검들을 찾아 땅에 묻게 한다(38-39장).


끝으로 에제키엘은 이렇게 승리한 이스라엘이, 역시 새롭게 된 팔레스티나 땅에 정착하리라고 예고한다. 이 땅은 엄격히 수학적으로 경계가 그어지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분할된다(47-48장). 그리고 생명에 가장 중요한 물은 이 땅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성전에서 흘러나온다(47장). 이 성전은 매우 특별한 장소로서, 바로 이곳에서, 성전으로 돌아온 주님의 영광을(43,1-12) 찬미하는 전례가 모든 규정에 따라(40; 46장) 거행된다. 그리하여 성전은 이제부터 이 새로운 백성이 영위하는 삶의 진정한 중심이 된다. 그곳이 어떤 신비의 심장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언자가 자기 예언서의 마지막 말, 곧 “야훼-삼마(야훼님께서 여기 계시다)”라는 표현으로밖에 엿볼 수 없는 그런 신비이다(48,35).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