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사야서의 형성 과정


이사야서에는 모두 66개의 장이 결집되어있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이들이 모두 동일한 시대의 것들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책의 저자가 여럿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구약성서의 적지 않은 책들이 다수의 저자들에 의한 합성물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무명인 데 반하여,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어떤 시대에 살았던 한 인물의 이름 아래 전해진다(1,1). 많은 사람들은 이사야서 전체가 이 한 사람에게서 유래한다고 믿었고 또 아직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에 관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견해는 기원전 2세기에 저술된 집회서에 잘 나타나있다. 히즈키야 임금의 치세 아래 예언자들의 활동에 대해서 말한 다음, 이 책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사야는 강한 신통력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았으며, 슬피 우는 시온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세상 종말까지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었으며 감추어진 일들을 사전에 미리 알려주었다”(집회 48,24-25).


그런데 저자가 여럿이라는 사실이 이 예언서의 통일성을 말하는 데에 저해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 통일성은 몇 세기를 걸쳐 펼쳐지는 지속성 속에서, 그리고 특정 주제들의 항구성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여럿이라는 점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는 이른바 제2이사야의 작품이 시작되는 40장의 첫머리에 나타난다. 어떤 분명한 중간 과정도 없이 그 배경이 기원전 8세기에서 갑자기 기원전 6세기의 유배 시대 한가운데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사야는 홀연히 사라지고, 아시리아는 바빌론으로 대체되어 이후 이 바빌론만이 자주 언급된다. 그리고 바빌론을 정복하고 유다인들이 귀향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장본인인 메대와 페르샤의 임금 고레스가 여러 번 직간접적으로 언급된다(41,2; 44,28; 45,1).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40장과 함께 새로운 책이 시작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제2이사야서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따로 이야기될 것이다.


40-66장이 이렇듯 분명하게 특색지어진다 하더라도, 이것들만이 이 예언서 가운데에서 분명하게 이사야 시대 이후에 생겨난 부분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36-39장이, 물론 여러 중요한 변형들과 함께, 열왕기 안에 들어있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열왕 18,13-20,19). 또한 34-35장은 유배 시대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으며 제2이사야의 작품과 유사하다. 끝으로 통상 ‘이사야의 묵시록’이라 불리는 24-27장은 기원전 8세기 사람들의 사고와 표현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예언자 자신과 결부되는 본문들 안에서도(1-12; 13-23; 28-33), 주석가들은 일정한 분량의 단편들이 예언자보다 후대의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저자의 단일성을 인위적으로 증명하려 드는 일이 없이, 이사야서의 합성적인 성격을 수긍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이사야 예언서의 형성 과정을 제시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많은 부분 가설을 내포하고 있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완성은 56-66장이 전제하는 바와 같이 유배 시대 이후, 그리고 귀향 이후에 이루어진다. 편집자들은 흩어져있는 조각들만이 아니라 이미 진정한 의미의 문집들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서의 핵심은 주로 자서전적인 요소들 특히 자기의 소명과 예언자로서의 사명 수행에 대해서 예언자 자신이 들려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6장).


예언자 자신이 직접 기록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 8,1.16 및 30,8과 같은 본문들에 의해서 밝혀지기는 하지만, 그가 선포한 신탁의 기록은 많은 부분 그가 직접 하지 않고, 그의 지시에 따라서 또는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가 선포한 말과 사건들 사이의 일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사야의 제자단은 먼저 그의 가족들, 곧 상징적인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자기의 사명 수행에 참여시킨 아들들과, 8,3에서 여예언자로 불리는 그의 아내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확대된 제자단은 (어떤 이들은 이 집단을 진정한 의미의 ‘이사야 학파’라 부르기도 한다) 스승의 신탁들에서 출발하여 문학적 활동을 하게 된다. 이들은 또한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의 파괴 그리고 유배라는 대환난 이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핵심이 되는 성실한 “남은 자들”을 이루었음에, 또는 적어도 그들을 예시했음에 틀림없다.


이사야서 안으로 들어간 문집들의 수와 규모에 대해서는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함께 모아진 전체 신탁들과 역사 이야기들은 대부분의 다른 예언서들, 특히 예레미야서와 에제키엘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세 부분을 포함하는 전통적인 도식 속으로 삽입되었다.


가. 이스라엘에 내려지는 심판에 대한 예언.

나. 이방 민족들의 불행에 대한 예언.

다.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약속.


그런데 여러 모음들이 이사야서에 받아들여질 때에, 종종 이미 위와 똑같은 도식으로 구성되어있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편집될 당시에 이 전체적인 틀 속으로 다시 분류하여 집어넣기에는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1-39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단락들을 나누어볼 수 있다.


1 책 전체의 도입 부분으로서, 여러 시대의 신탁들 가운데에서 가려낸 것들로 이루어졌으며, 예언자의 선포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녔다.

2-12 이스라엘과 유다에 관한 예언들로서 대부분이 이사야서에서 가장 오래 된 것들이다.

13-23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신탁들.

24-27 주로 묵시록의 성격을 띤 문단.

28-33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약속과 위협을 담은 다양한 신탁들.

34-35 또 다른 묵시록적 단편들.

36-39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당시 이사야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 


2. 예언자 이사야


1) 예언자의 활동


계속해서 새로운 부분이 첨가되는 과정이 끝나지 않는 열린 책이었던 이사야서는 도서관에, 어쩌면 예언서들의 도서관 그 자체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선집이라는 면이 예언자 이사야가 생애 중에 그리고 사후에 백성의 기억 속에 남아 수행한 본질적인 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 비범한 인물은 기원전 740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예언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의 활동은 적어도 40년에 달하는 기간에 걸쳐 전개된다. 그가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한 것은, 아자리야라고 불리기도 한 우찌야 임금의(2열왕 15,1-7 참조) 오랜 치세 아래 유다가 누렸던 번영의 시대와 일치한다. 그러나 번영은 사치의 팽배, 모든 토지들을 독점하는 지주 계급의 출현,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억압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그래서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에 반대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단죄하고, 그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야보다 몇 년 앞서 아모스 예언자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똑같은 언사를 사용한 적이 있다.


이사야가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타난 것은 아하즈 임금의 치세 초기의 일이다(2열왕 16,1-20). 당시,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는 아람 왕국과 사마리아를 수도로 한 이스라엘 왕국은 점점 위협적으로 되어가는 아시리아의 세력에 대항하려고 시도하는 반면, 유다 왕국의 아하즈는 자진해서 아시리아 임금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해결 방안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아하즈는 연합 전선 안으로 자신을 강제로 끌어들이려는 이 두 이웃 나라에 대항하여 징벌군을 보내줄 것을 아시리아 임금에게 요청한다.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나지만 아하즈는 자기의 친아시리아 정책을 계속한다. 기원전 734년을 전후하여 이 일이 일어난 뒤, 이사야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십여 년간 공적인 생활에서 물러나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스라엘의 여러 지방에서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아시리아 세력의 점진적인 상승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시리아는 기원전 722년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된다.


기원전 716년 히즈키야 임금이 아하즈를 계승할 때(2열왕 18 - 20), 이사야는 다시 정치 무대의 전면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새 임금은 주님께 성실하면서도, 국정 수행에 있어서는 예언자의 조언을 조금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사야는 종교적인 이유로 해서, 유다가 비록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이라 할지라도, 에집트 및 그 밖의 인근 민족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계속 반대한다. 어떠한 당위성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연합 전선의 구축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이사야는 주님에 대한 충실성을 요구한다. 그는 바로 이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시각을 통해서, 아시리아가, 주님에게 반항하고 그럼으로써 그분에게 일종의 적이 되어 그 교만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백성을 책벌하기 위한 하느님의 막대임을 점점 선명하게 보게 된다.


기원전 701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군대가 퇴각하게 되는데, 이는 이미 이사야 예언자에 의해서 예고되었던 바이다. 이렇게 일어난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예언자와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근본적인 의견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이사야의 품위를 높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예언자 이사야가 왕족에 속한다고 추측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언자로서의 그의 사명에서 유래한다. 많은 이들이 그의 조언을 청하기는 하였지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따랐다. 공적인 종교 대표자들 곧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그에게 야유를 퍼붓기까지 하였다. 이사야가 순교하였다는 전통은 분명히 외경에 속한다(「이사야의 승천」이라는 외경과 에녹서 11,37). 이사야서의 머리글(1,1)에 따르면 이사야가 박해자 므나쎄 임금 시대에는 이미 살고 있지 않았음이 확실하지만, 그러한 이사야 순교의 전설 안에서 우리는, 자주 확인되는 바처럼 예언자가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실패를 체험한 것이라는 생각의 반향을 감지할 수 있다.


이사야의 본질적인 자질들 곧 그의 권위와 고귀함,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자기 민족에 대한 열정은 그의 언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언적인 신탁들이 지니고 있던 일정한 전통적 규칙들에 부합하면서도, 그는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언어 기술과 함께 그것들을 자기 예언에 적용시킨다. 이따금 해학으로 가득한 언어 유희, 동일한 자음 또는 모음을 되풀이하는 두운법과 반해음,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은유 등이 그것이다. 그가 교육을 받았던 현인들에게서처럼 현실은 그에게 의미가 가득한 것으로 드러난다. 자연의 요소들 곧 불, 땅, 그리고 물과 바람 등은 그에게 삶과 죽음의 세력이라는 이중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우리 주변의 현실처럼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이중적인 면을 표현한다. 이 모든 것이 놀라운 간결성과 함께 말해진다. 그는 불필요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이 이사야서에서 평범하고 장황하게 표현된 일정한 문장들을 예언자 자신의 말과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언어가 표현의 능력만이 아니라 창조력을 지니고 있다면, 성서에서 이에 대한 최선의 예증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사야서이다.


2) 예언자의 선포 내용


예언자의 선포 내용은 그의 사람됨, 그리고 그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파견된 당시의 정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사야는 항상 정해진 상황 안에서 그리고 그 상황을 위해서 말하고, 그의 자세는 자기 민족과 함께 그 자신이 체험한 바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독창성을 희생시키기 전에는 그의 메시지를 어떤 도식적인 내용으로 변환시키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어좌에 좌정하여계신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항상 현존해있는 이 예언자가 또한 자기의 역사 및 제한성과 함께 이 세상에 현존해있듯이, 우리는 그의 메시지 안에서 일정한 불변의 것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사야에게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이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곧 당신의 백성과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 밖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온다. 그래서 이를 이사야 학파 신학의 특성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이 거룩함은 독점적인 성격, 또는 구약성서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시기가 많은’ 성격으로서, 종교적 차원에서건 정치적 차원에서건 우상들과 공유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이사야에게 있어서는 자기 민족과의 연대 속에서 전체 인류에 대한 전망이 결코 배제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몰상식과 그에 따른 삶에 의해서만 그 자명성이 부정되는 이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어떠한 정황에서건 교만,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 그리고 인간들이 하느님의 눈길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수단과 책략들 속에 들어있는 자만은 언제나 단죄되는 것이다.


이 초월적인 하느님께서는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계시며, 이 역사는 세상의 역사와 무관하게 전개될 수 없는 동시에, 이것과 항상 일치하지도 않는다. 이사야가 즐겨 말하는 하느님의 계획 또는 그분의 뜻은 감추어져계신 하느님의 것으로서 인간으로서는 흔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유능하기로 평판이 높은 고문들보다도 항상 더 슬기로운 것이다. 하느님 계획의 지상권을 강하게 확신하면서도, 예언자는 인간의 활동과 또한 그의 자발성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다. 인간은 결코 이것들과 반대되는 형태로 구원받거나 단죄받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이사야가 항상 자기 민족에게 촉구했던 항구적인 자세로서의 신앙이라는 용어 안에 내포되어있는 것이다. 이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때처럼(7,1과 각주 참조), 사리에 어긋나는 듯이 보일 정도로, 그리고 일반적인 견해에 역행할 정도로 단호한 신앙을 말한다. “너희가 믿지 않는다면”, 곧 너희가 견고하지 않으면, “정녕 서있지 못하리라”, 곧 너희는 확고하지 못하리라(7,9; ‘믿다’와 ‘서있다’를 뜻하는 두 동사는 히브리말에서 동일한 한 어근에서 파생한 두 가지 변화형으로서, 이 어근은 ‘견고하다, 확고하다’의 뜻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예언자는 이러한 일종의 언어 유희로써 신앙의 깊은 뜻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굴의 신앙 역시 조용하고 겸손한 신뢰로써 이루어진다(30,15).


인간에게 요구되는 이러한 견실성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함, 또 당신의 왕위를 완전하게 정립시키고자 하시는 의지로써 베푸신 징표들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11,9에 나오는 ‘주님을 앎으로 가득한 땅’이라는 주제 참조). 예루살렘에 설치되어있는 다윗의 왕좌는 하느님의 천상 어좌의 복사품이다. 이사야는 다윗의 전통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설사 왕국의 계승이 중단될 수가 있음을 예견하면서도, 그에게 있어서 미래의 이상적인 임금은 항상 다윗의 자손일 뿐이다. 그의 메시아 사상은 왕국적 메시아 사상이다. 다윗 왕조는 유다와 이스라엘 그리고 다윗이 건설한 옛 제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이사야가 다시 채택하여 갱신하는 옛 전통에 따르면, 장차 모든 민족들이 모여들 세계의 중심인 예루살렘에 설립된다(2,1-4). 다윗과 예루살렘은 이사야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두 주요 주제로서, 그는 자기의 청중들에게 이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켰으며, 그의 제자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상황에 적용시켰다. 이렇게 해서 메시아 사상은 장차 예루살렘이 세계 중심적이고 보편적인 구실을 수행하리라는 내용과 함께 이사야서의 제2부와(40-55장) 제3부에서도(56-66장) 계속 그 중심부에 남아있게 된다. 


3. 제2 이사야서


1) 제2이사야 예언자의 시대와 그의 활동


이사야서 40-55장에 들어있는 메시지의 연대는, 이 이사야서 제2부가 페르샤의 승리, 바빌론인들의 쇠퇴, 메소포타미아에 유배 중인 이스라엘인들의 임박한 해방을 선포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제2이사야서는 기원전 550년과 539년 사이, 페르샤의 고레스 2세 대왕이 메대 왕국의 아스티아즈와(550년) 리디아 왕국의 크레수스를(546년) 제압한 다음(이사 41,2-3 참조), 그리고 바빌론을 침공하기 전에(이사 45-48) 선포되었다. 이 고레스 2세는 결국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의 마지막 임금인 나보니드가 통치를 잘못함으로써 백성 대부분이 반대하고 일어선 것에 힘입어, 전투를 할 필요도 없이 해방자로 환영을 받으면서 바빌론으로 입성한다.


나보니드 임금에게 명백하게 반기를 들던 갈대아의 사제들은 이 페르샤 임금의 이러한 승리를 그들의 최고신인 마르둑과(예레 50,2 참조) 그의 시종들인 벨 신 및 느보 신의(이사 46,1 참조) 덕택으로 돌린다. 그 영향으로 이스라엘인들의 거주지에 이르기까지, 몇몇 사람들은 이 일련의 사건들 안에서 이러한 거짓 신들의 개입을 보려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명의 예언자인 제2이사야는 유배 온 자기의 동포 가운데에서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동포들에게 세상의 유일한 주인은 주님뿐이심을 주지시킨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확신 속에서(이사 48,16), 그는 구원 곧 바빌론의 억압에서의 해방, 자기들의 거룩한 땅으로의 귀환 그리고 예루살렘의 복구를 선포하는 것이다.


해방은 ‘칠 년에 일곱을 곱한 햇수’ 동안의 유배 기간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기원전 587-538). 이방 출신이면서도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라 불리는 고레스를 통해서 당혹스럽기까지 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이 해방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굴욕에서 영광으로 건너가게 만든다. 그들이 거룩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옛날의 에집트 탈출보다 더욱 훌륭한 새로운 탈출로 이루어질 것이다. 예언자는 에집트에서의 탈출을 상기시키면서, 당신의 계획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성을 강조한다. 에집트 탈출을 능가하는 것으로, 그는 하느님의 일관된 계획, 곧 온 세상을 포괄하는 그분의 보편적인 왕국의 결정적인 실현을 엿보게 한다(52,7-10). 이 왕국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창건되기 때문에, 이 거룩한 성읍은 화려한 복구를 체험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예루살렘으로 해서 하느님에 의해서 이룩된 구원이 모든 인간들에게 예외없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체험하게 되는 구원의 첫째 요소, 곧 바빌론의 멸망과 고레스에 의한 해방은 무엇보다도 40-48장에서 다루어지고, 그 구원의 두 번째 요소, 곧 새로운 탈출은 40장에서 55장에 이르는 제2이사야서 전체에 걸쳐서 되풀이된다. 그리고 세 번째 요소, 곧 시온의 재건과 보편적인 구원의 강조는 무엇보다도 49-55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제2이사야 예언자의 활동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1) 첫째 단계(40-48장)


전체적으로 구원을 선포하면서 예언자는 네 가지 오류를 교정시킨다.


가.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주님을 탓하면서 용기를 잃은 자들에게(40,27) 예언자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이유를 상기시킨다. 첫째는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권능은 온 세상에 빛난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분의 성실성은 역사에 빛난다는 것이다.


나. 자기들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고마워할 줄 모르신다고 주님을 탓하는 몰염치한 자들에게(43,22-24) 예언자는, 고마워할 줄 모르는 자들은 자기네 불행의 원인인 죄악을 쌓아온 그들 자신이라고 반박한다(43,24-28).


다. 이방인 출신 해방자를 선택하셨다고 주님을 탓하면서 화를 내는 자들에게(45,8-10) 제2이사야는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로서 그들이 품고 있는 교만을 지적한다(45,11-13).


라. 바빌론의 번영을 가져왔다는 그곳의 신들에 이끌린 자들에게 예언자는, 참되신 하느님만이 유일하게 미래를 예고하고 만들어가실 수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과정에서, 또는 흔들거리는 신상들처럼 효력이 없는 이 자칭 신들이라는 존재들에 대한 풍자에서, 이 물신(物神)들에게 신빙성이 없음을 보여준다(41,24; 42,17; 44,21; 46,8; 48,5).


첫째 단계의 목적이 바로 이러하다. 48장의 마지막 단락에서 제2이사야서의 중간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이 예언자의 생애 가운데에 일어나는 하나의 전환점을 예감하게 된다. 지금까지 말해졌던 주제들은 포기되고 이제 새로운 주제들이 등장한다. 또한 그의 선포는 이스라엘의 정예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48,22의 각주 참조).


(2) 둘째 단계(49-55장)


이스라엘인들 가운데서 가장 성실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예언자의 메시지는 세 가지 면에서 주목된다.


가. 그들의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될 것이다. 곧 예언자처럼(50,4-11) 박해받는 이들은(51,7-8) 위로를 받고(51,1-8), 억압받는 이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나. 시온의 복구가, 예언자 호세아와 그 후계자들이 그렸던 것처럼, 남편인 하느님과 그의 아내인 이스라엘 공동체 사이에 이루어지는 부부간의 재회로서 서술되고 경축된다. 곧 과부가 되었던 예루살렘은 다시 남편을 찾게 되고, 아이를 갖지 못했는데 이제 다시 아이를 낳게 되며, 그리고 불충했던 예루살렘은 변함없이 계약을 지키시는 주님에 의해서 다시 정숙한 아내가 된다(49,14-26; 51,9 - 52,12; 54).


다. 진정한 하느님, 만물의 하느님에 대한 민족들의 회개가 점점 더 강조된다. 이 민족들은 점차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에 경탄하고(49,7; 52,10; 이는 이미 40,5에서도 언급됨),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알기를 갈망하며(49,23; 55,5; 이는 이미 45,14-15.23-25에서도 언급됨), 온 세상에 대한 진실한 신앙의 증인인 주님의 참다운 종에 의해서 계몽되고 변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49,2.6; 53,11).


2) 주님의 종들과 ‘주님의 종’


이렇게 요약되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과정에서 제2이사야는 모두 21번에 걸쳐 “종”이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그 가운데 단 한 번은 복수로(54,17), 또 다른 한 번은 노예가 되었다는 경멸의 뜻으로 쓰인다(49,7). 그리고 나머지 19번은 주님의 종에게 유리한 의미로 쓰여진다. 그중 14번에 걸쳐 이 종은 본연의 이름 곧 “이스라엘” 또는 “야곱”으로 불리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 나머지 5번의 경우에 이 종은 무명으로 남는데, 문맥에 따라서 이 칭호로 불린 이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42,1; 44,26; 50,10; 52,13; 53,11).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종 역시 계속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것인가? 한 인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민족 내의 작은 집단인가? 아니면 한 개인인가? 위에 나열한 다섯 구절 이외의 경우들 곧 “이스라엘” 또는 “야곱”이 나오는 구절들에서도, 주님의 종은 단순히 이스라엘 전체를 의인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의인화가 들어있는가? 그래서 똑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이 모든 가설들은 나름대로 지지될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그렇게 되어오고 있다.


해당 본문들이 문맥에서 지니는 직접적인 뜻만을 먼저 고려할 때, “종”이라는 낱말은 차례로 다음의 인물들을 가리킬 수 있다. 곧 이스라엘 전체, 정예의 이스라엘인들, 제2이사야 자신, 그리고 페르샤의 임금 고레스이다.


가. 민족 전체로서 주님의 종인 이스라엘


41장에서 48장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실제로 주님의 종이라 불린다. 나머지 구약성서와의 관계에서 볼 때 이는 새로운 사실이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들 외에는 드물게 그리고 후대의 본문들에서만 이에 상응하는 명칭이 이스라엘에게 적용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예레 30,10; 시편 136,22).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이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선택된 민족이 에집트에서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후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했음을 강조한다. 이 섬김은 비단 하느님에게 종속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당신의 계획에 대한 계시를 받고 이를 실현하는 데에 협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을 정도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41,8-16과 44,1-5에서는 하느님께서 어떠한 애정으로 당신의 종 이스라엘에게 정성을 기울이시는지를 볼 수 있다.


나. 소수의 뽑힌 이들로서 주님의 종인 이스라엘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는 선별된 사람들이 활약한다. 자기의 청중들 가운데 일부에게서 배척을 받은 예언자는(50,6-9.11) 이제 49장에서부터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집단에게로 향한다(50,10). 이 집단은 병행 명칭인 이스라엘-야곱으로는 한 번도 불리지 않지만, 계속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49,3). 그러나 전체가 아니라 축소된 이스라엘, 정선된 사람들, 남은 자들이다(46,3). 49,5-6을 이들에게 적용한다면, 이들의 첫 번째 임무는 전체 이스라엘인들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이고, 그들의 주 임무는 민족들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52,13-53,12의 시 역시 이렇게 정선된 이스라엘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여긴다.


다. 제2이사야 자신이 주님의 종


예언자 자신이 정선된 이스라엘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유배로 끌려와서 억압받는 그가 동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위로를 얻어야만 했다. 사려깊은 제자처럼 그는 자기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를 전달하였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사람들의 회의와 적대감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모욕을 받으면서도 그는 하느님에게 계속 충실함으로써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자기에게 동의하는 이들을 강화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꿋꿋하게 활동을 계속한다(50,4-11).


라. 주님의 종인 고레스


제2이사야의 메시지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많은 이들에게 거슬리는 것이 되기도 하지만, 고레스의 사명에 대한 예언자의 선포 내용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페르샤 임금도 참으로 하느님의 종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다시 살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고레스의 계획이 성공하도록 만드시는 만물의 주인이시고, 고레스는 ‘예루살렘은 재건될지어다.’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계획을 성공으로 이끄는 그분의 종이다(44,26-28).


헛된 신들에게 바쳐진 쓸모없는 신상들과는 대조적으로(41,24.29), 고레스는 하느님의 입김으로부터 영을 받은 그분의 선택된 자가 아니겠는가?(42,1) 고레스는, 역사가 인정하듯 온화한 통치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이 주님에 의해서 내려진 판결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이 판결을 수행하면서도 바빌론에 의해서 희생된 자들, 곧 억압적인 통치의 멍에 아래에서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이국땅에 억류됨으로써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42,3). 그는 나약해짐이 없이 자기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할 것이다. 고레스는 주님의 종인 이스라엘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을 복구시킴으로써, 사람들을 당신의 빛으로 비추시고 그들을 당신의 계약으로 결집시키시려는 하느님 계획의 전개를 촉진시킨다(42,1-7).


‘주님의 종’과 관련해서 이상과 같은 설명들이 제안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다소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본문들을 존중하면서 얻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만이 유일한 가능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히브리말로 된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해낸(칠십인역) 그리스화한 유다인들은 42,1에 나오는 무명의 종에게 이름을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옮긴다: “……나의 종 야곱, 나에게 선택받은 자 이스라엘…….”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정의와 그분이 세상에 전하라고 맡기신 ‘율법’을 민족들에게 제시하는 이는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 본문에 대한 구두 번역 및 설명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아람어로 된 주석서인 타르굼은, 한 개인으로서의 하느님의 “종”에 대하여 말하는 신탁들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내놓는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후대에 와서 곧 그리스도교 시대의 도래 이후에 편집된 타르굼의 많은 단락들 가운데, 주님의 종의 고통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을 읽어내고, 종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에서는 장차 올 메시아의 승리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게 된다. 반면에 이사 50,10에 서술된 “종”에서는 단순하게 우리가 제2이사야라고 부르는 예언자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52,13에서는 42,1과 43,10에서처럼 주님의 종을 메시아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2이사야의 신탁들은 내용이 풍부하고 미래를 향해 열려있다. 그래서 “종”이라는 무명의 칭호 속에 감추어진 이런 개인 또는 저런 집단에 의한 그 의미들의 실현은 부분적이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어떠한 실현도 제2이사야에 의해서 예고된 세계에 알맞는 사명을 남김없이 다하였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제2이사야의 많은 본문들이 예수의 인물 및 업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예수께서는, 그의 죽음이 죄사함의 제물로서 하느님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지고(53,10: 이는 구약성서에서 매우 새롭고도 유일한 단언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강력하고 생산적인 삶이 약속된(53,9-12) 완전히 의로운 종인 것이다(50,9; 53,9).


3) 하느님의 모습


제2이사야는 하느님의 모습에 대하여 매우 인상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그 그림의 주요 선들을 말해보기로 한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하시며 결코 비길 수 없으신 분, 그 옆에 다른 어떤 신도 존재할 수 없는 분이심을 예언자는 되풀이하여 강조한다.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분 이전에 또 그분 이후에 어떤 존재도 있을 수가 없다(43,10; 44,6). 모든 것 이전에 또 모든 것의 원천에 그분은 존재하시고 당신 홀로 만물을 창조하셨다(44,24). 하느님의 행동에만 유보된 이 ‘창조하다’라는 동사는 제2이사야와 함께 그 사용 빈도가 잦아진다. 곧 구약성서 전체에서 모두 44번 나오는데, 제2이사야서에만 16번 쓰이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창조로 규정함으로써 이 용어를 갱신하고(43,1.7.15), 또한 새로운 탈출과 관련해서도 창조를 이야기한다(41,20; 48,7). 사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의 당신의 권능을 당신의 구원 계획에 이용하신다. 창조 때 원초의 혼돈에서 세상의 요소들을 끌어내시고, 또 당신의 자녀들을 에집트의 강제 노동에서 끌어내셨기 때문에(51,9-10), 그분께서는 당신께 충실한 이들을 바빌론 유배로부터 해방시키실 수 있으며, 이러한 그분의 구원 행위는 창조력의 새로운 폭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41,17-20).


이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더더구나 그러하다. 이스라엘을 창조하시기 전에 만물의 하느님, 우주의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셨다(45,12).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기 전에 그분께서는 노아와 계약을 맺으셨다(54,9).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동의어들로 일컬어지는 인류 전체를 잊으신 적이 없다: 인류 또는 아담의 자손들, 모든 사람(본디는, 육신), 민족들, 나라들, 성읍들, 족속들, 먼 섬들, 세상 끝들 등. 이 모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하느님의 세력권 안에 들어있다. 그들의 오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미하고 나약한 존재들로서 전능하신 분의 손안에 있다(40,6-7.15-17; 51,6). 악은 불행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심판자이신 그분의 눈앞에 모든 인간들은 서있는 것이다(47장). 그들은 결국 모든 이들을 구원의 기쁨으로 초대하시는 구원자의 부름을 듣게 된다(45,22-24; 55,3-4).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렇게 보편주의적인 시각들도 이스라엘의 특권을 폐기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한다. 절대적인 방식으로 “거룩하신 분”께서는(40,25) 동시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시다(제2이사야서에서 모두 12번). 진실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이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특별히 선택과 부름을 받고 세상에 파견된 증인인 민족 안에서 더욱 그러하다(43,10-12; 44,8). 이 신앙인들의 공동체는 아브라함과(41,8; 51,2) 야곱과(43,27), 유다와(48,1) 다윗을(55,3) 내세우고, 그리고 여기에서 모세를 직접 지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활동 곧 장차 도래할 구원의 담보이며, 현재는 감소되었지만 앞으로도 그 후손들이 존속할 뿐만 아니라 쉬지 않고 불어날 것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약속으로서의 에집트 탈출을 끊임없이 상기한다. 사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 백성을 돕고 희망을 북돋아주며, 떠받쳐주고 후원해주고 인도해주시며, 거짓 신들과는 달리 당신만이 혼자 예고하고 성취하실 수 있는 당신의 구원 계획에 참여시키신다.


주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키면서 보여주시는 항구성은 제2이사야에게서 매우 특별한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그것은 “정의”로서 모두 28번 나오는데, 거의 모두가 법률적 정의의 유리한 면이나, 또는 각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바를 나누어주는 분배 정의에 의해서 보장된 공정성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이 “정의”는 당신의 구원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성실성이기 때문에, “구원”과 거의 동의어가 될 수 있는 것이다(45,8,21; 46,13; 51,5.6.8).


제2이사야서에 22번 나오는 말마디로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은 그분의 성실한 사랑은 물론 그분의 항구한 정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정성은 목자나 임금의 정성만이 아니라(40,11; 41,21; 43,15; 44,6; 52,7), 무엇보다도 먼저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43,6; 45,10-11), 자식들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49,15-16), 그리고 아내에 대한 남편의 정성이다(54장). 그분의 사랑은, 아무리 크고 되풀이되는 인간의 죄라 할지라도, 그것을 없애주시고(43,25; 44,22) 완전히 용서해주시기까지(55,7) 참고 극복하는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두 가지 면을 나타낸다. 그분께서는 한편으로는 풀어주고 구제하며 해방시키시고, 또 무엇보다도 구원자로서 구원해주신다(41,14을 비롯하여 모두 17번). 다른 한편으로 그분께서는 다시 모으고 격려하며 위로하신다. 제2이사야서의 첫번째 낱말로서 9번 되풀이되는 이 ‘위로하다’라는 동사는, 흔히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이 예언서의 어조를 결정짓는 구실을 한다. 이러한 격려는 불행과 악에서의 구원 이상의 것을, 공동체가 다시 모여 평온하고 행복한 생활로 되돌아감 그 이상의 것을 가져온다. 그것은 이 밖에도 이러한 은혜를 받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광명 자체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하느님의 이 ‘광채’는 제2이사야서에 7번 나오는 “영광”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 낱말은 히브리말에서 본디 ‘무게’를 뜻한다. 실제로 하느님의 이 ‘광채’는, “이스라엘에게 당신 영광을 드러내셨다”(44,23),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49,3) 등으로 선포되는 데에서, 5번에 걸쳐 “영광”이라는 낱말로 옮겨진다. ‘큰 무게를 지니신’ 하느님께서는 결국 “모든 사람(본디는, 살덩이)”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40,5),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느님 덕택으로 이 세상의 삶 안에서 ‘무게를 지닐 수 있게’ 하신다(43,4). 제2이사야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부지런히 우상들을 만들어서 그것들에게 인간적인 “영광”을 집어넣으려는(44,13) 장인들의 가련한 작업과, 당당하게 믿는 사람들을 만들어내시어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신적인 “영광”을 부여하시는 창조주의 눈부신 업적 사이의 대립이 두드러진다.


이것이 제2이사야가 보여주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인간에게 그토록 관대하신 이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에게 감사드리도록 부름을 받는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예언자는 주님에게 되돌아오도록(44,22; 55,7 등), 그분을 찾고(51,1) 만나뵙도록(55,6), 그분의 말씀을 듣고(48장 등) 빵보다 더 큰 양식이 되는 그분의 계시를 향유하도록 자기 동포들을 부른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라고 격려하기 위해서 제2이사야는 하느님을 위하여 노래하도록(42,10), 그분 안에서 기뻐 뛰도록(41,16과 그외 6번), 그분에게 환성을 올리고(42,11과 그외 11번) 기뻐 소리치도록(49,13), 즐거워하도록(54,1), “기쁨과 즐거움”을 증거하도록(51,3.11) 권유하는 열렬한 부름을 되풀이한다. 이러한 합창에는 유배자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 나아가 세상의 모든 민족들만이 아니라 세상 자체와 우주의 모든 요소들, 하늘과 별들, 바다와 그 심연까지도 모여와야 한다. 그리하여 한 목소리로, 세상의 단결과 인류의 일치를 원하시는 하느님을 노래하고 기뻐하는 우주의 찬미가를 울려퍼지게 해야 하는 것이다. 


4. 제3 이사야서


1) 제3 이사야서의 문제


이사야서 40-55장에서 56-66장으로 넘어가 보면, 이 둘 사이에는 사고와 어휘의 유사점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조와 새로운 표현들의 차이점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한편 이사야서의 이 마지막 부분 안에서도 이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본문들 사이의 다양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주석가들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가. 어떤 이들은 이사 56-66장을 일종의 편집물, 곧 저자나 생성 연대와 관련해서 각기 다양한 단편들의 인위적인 집합으로 여긴다. 이러한 설명은 이 작은 책에 들어있는 시들 사이에 일정한 부조화가 있음을 전제한다. 사실 모든 것을 동일한 한 저자의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 사이의 상대적 통일성을 찾아내기를 너무 쉽게 포기해서도 안될 것이다.


나. 다른 이들은 56-66장 역시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 땅에 재입주하는 문제에 봉착한 제2이사야에게서 유래한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예언자 스스로 자기만의 고유한 표현들을 변형시키면서까지 자신을 표절할 가능성이 별로 없고(40,3과 57,14; 52,12와 58,8; 49,23과 60,16 등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작품들 사이의 차이점들이 유사점들보 다 더 중요하게 드러남을 부정할 수도 없다.


다. 끝으로 또 다른 성서학자들은 이사야서의 마지막 11개 장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제2이사야에게서 영감을 받아 유배가 끝난 뒤 20여 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자기의 사명을 수행한 동일한 한 예언자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선은 매우 일관성이 있는 60-62장을 이 제3이사야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56,9-57,21과 58장과 59장, 그리고 65장과 66장의 대부분을(비록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이 마지막 두 장을 별개의 것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이 예언자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없다. 이 밖에 뚜렷이 눈에 띄는 시 두 개가 있는데, 63,1-6과 63,7-64,11이다. 이것들이 제3이사야에게서 유래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조심스럽게 그의 작품 속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시는 그의 관심사에 부응함을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66,18-24는 편집자들의 손에 의한 부록이고, 성전 재건 후에 발설되었을 56,1-8은 가장 후대의 본문이면서도 제2이사야서와의 문학적인 접촉 때문에 서두에 위치하게 되었을 것이다(56,5는 55,13을 상기시키고, 56,1은 46,13과 51,5.6.8을 되풀이한다).


2) 예언자와 그의 활동


이 무명의 예언자는 기원전 537년과 52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유배자들의 첫 무리가, 본디 유다의 제후였다가 나중에 총독으로 임명된 세스바쌀의 지휘 아래 귀향하였다(에즈 1,8-11; 5,14; 1역대 3,18의 칠십인역 본문).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기초를 놓기는 하였지만(에즈 5,16), 곧바로 대내외적인 여러 어려움으로 해서 작업이 중단되었다. 그래서 약식의 제의나마 속개하기 위해서 제단만이라도 세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하였다(에즈 3). 조금씩 조금씩 다른 유배자들의 집단들이 되돌아오는데, 그 가운데에는 대사제 요수아와 유다 왕국이 망하기 전 마지막 임금 여호야긴의 손자로서, 페르샤 정부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고등 판무관인 세스바쌀을 계승한 즈루빠벨도 들어있었다.


이 사람들의 권위 아래 예루살렘과 이 거룩한 성읍 주변을 재건하려고 노력한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부류들로 혼합된 집단이었다.


가.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즈 2; 느헤 7). 이들은 주로 유다와 시므온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서 이들 가운데에는 사제들도 많았다. 이들은 황폐하고 노략질당한 지역에 재입주하는 데에 곤란을 겪게 된다.


나. 본국에 남아있던 유다인들. 이들 가운데에는 이스라엘의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있었지만, 귀향자들의 종교적인 열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우상숭배자들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유배자들의 땅에 자리를 잡고 살아야 했었는데, 귀향한 그들에게 재산권을 양도할 용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분열을 제3이사야서의 많은 구절들에서 볼 수 있다.


다. 이방인들. 유배 기간 동안에 많은 이방인들이 유다 땅에 정주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오기도 하고(60,10; 61,5 참조),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온으로 귀향할 때 따라오기도 하였다(60,9; 66,20 참조). 점점 수가 많아진 이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백성과 얼마나 동화될 수 있었는가가 문제이다.


라. 디아스포라에 남아있는 유다인들. 이들이 멀리 떨어져있기는 하지만(57,19 참조) 이들을 위해서도 귀향길이 준비되어야 했다(57,14; 62,1). 그리고 이들은, 주님께서 이미 모아들이심으로써 특권을 받은 이들 외에, 그분께서 다시 모아들이고자 원하시는 이들이다(56,8).


예언자는 이렇게 상이한 구성 요소들로부터 일치되고 거룩한 백성을 다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네 가지 큰 난관에 부딪친다.


- 늦어지는 구원에 의해서 야기되는 희망의 위기.

- 끈질기게 계속되는 타락, 곧 우상숭배.

- 여러 정황들에 의해서 발생한 분열 곧 동포들 사이의 미움.

- 상이한 부류들의 결합으로 증가된 위험, 곧 이방인들에 대한 멸시.


희망의 위기는 귀국자들이 절감했던 실망감에서 온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파괴되어있는 채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느헤미야 시대에 가서야 재건된다(기원전 445-433). 성전은 공사 초안만 잡혀있을 뿐이었고, 예전의 성전보다 그나마 덜 아름답게라도 지어진 것은 시간이 더 흐른 뒤인 기원전 520년에서 515년 사이였다. 생활 여건을 보더라도 외적으로는 일종의 경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 내적으로는 고국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좋지 않았다. 이러한 괴로움 속에서 거의 절망 상태에 빠진 열성 신도들은 늦어지는 구원과 전혀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 같은 주님과 관련해서 그분을 끊임없이 비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불평을 잠재우기 위해서 제3이사야는 일면 구원이 도래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죄악을 드러내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구원의 틀림없는 원천인 하느님의 성실성을 재확인한다.


예언자는 이 밖에도 거짓 신들에게서 도움을 찾는 우상숭배자들을 회개시키려고 한다. 이들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 성전 매춘, 부정한 동물들을 제의에 사용하는 것(65,4; 66,3.17 참조), 강신술(65,4), 이른바 멜렉-몰록 신(57,9) 또는 갓과 므니와 같은 신들을 경배하는 것과(65,11) 같은 타락한 종교 의식에 빠져있었다. 이러한 탈선을 교정하기 위하여 예언자는 두 가지 증거를 들어 위협한다. 곧 구원을 베풀 수 없는 거짓 신들의 무능과,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참되신 하느님의 권능이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파기하는 자는 동시에 자기 동포들과의 계약도 깨는 자다. 그래서 이 유다인들 사이에 실제로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주민들을 수탈하는 지배자들이 있고(56,8-57,1) 이웃들을 약탈하는 자들이 있다. 또한 상호 부조의 거절과 폭력, 정의의 거부와 임의로 동포를 제명하는 행위 등도 보게 된다. 예언자는 이러한 중죄들을 엄하게 고발하고, 이것들이 참다운 경신례와 부합하지 않음을 드러낸다(58장 등).


이스라엘 동포에게조차 흔히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대관절 이방 손님들에게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외국인들과 관련해서 이사야서 56-66장은 여러 가지 자세를 드러낸다.


- 어떤 구절들은 악을 고집하는 나라들은 파멸하리라고 말한다(63,3-6; 64,1과 66,15-16.24 참조; 여기에다 59,18의 후반부와 첨가문으로 여겨지는 60,12를 보탤 수 있다).


- 다른 구절들은 이방 민족들이 예루살렘을 섬기리라고 말한다(60,3-11.13-17; 61,5-9; 62,2-8; 66,12).


- 그러나 가장 흥미를 끄는 문제들은 이방인들을 하느님 백성의 품안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해서 제기된다. 이 비유다인들은 자기들이 격리될 것을 두려워하지만(56,3), 이사 56-66장의 신탁들은 이들에게 매우 밝은 전망을 펼쳐보인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곤경에 빠진 어떠한 유랑민이라도 도와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58,7), 이 밖에도 회개한 이방인들을 자기네 성전으로 맞아들여야 하고(56,3-7), 그들에게 사제직을 양도할 것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66,21).


3) 하느님의 모습


하느님의 이러한 요구 사항들이 표현되는 것을 들으면서, 우리는 제3이사야가 그린 하느님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다.


주님께서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며(64,3) 영원한 분이심을(57,15) 제3이사야는(제2이사야는 길게 강조하는 반면에 짧게) 상기시킨다. 그분께서 창조주이심을 이 예언자는 되풀이하지만 제2이사야보다는 드물게 말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알고 있으며(66,2) 나아가, 이는 특기할 사항으로서, 그분께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창조하실 것임을 덧붙인다(65,17; 그리고 66,22도 참조). 그는 다른 구절들에서는 하느님께서 회개자들의 마음에서 찬미가(57,19) 흘러나오게 하시고(이 역시 하느님의 창조 행위이다), 그리고 새로운 예루살렘을(65,18) 창조하신다고 분명히 말한다.


만물의 창조주로서 주님께서는 만물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그분께서 이방인들을 위하여 당신 백성에게 어떠한 보편적 수용의 자세를 명하셨는지 보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에게 영감을 주시어, 당신 백성에게 개인적인 책임감을 강조함으로써 보편주의를 장려하도록 하신다. 어떠한 구분도 없이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이 똑같이 선택된 백성에 소속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써 확실하게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성실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불경한 자들도 있다. 이스라엘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더 이상 그 구원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요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부르신다(56,7; 66,18).


그러나 모든 민족들이 모여오는 것은, 아직도 그 특권이 존속하는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이루어져야 할 바이다.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께서는(57,15) 계속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남아계신다(60,9.14에서 두 번 이렇게 불리신다). 물론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야곱이, 제2이사야서에서는 17번 나오는데 반하여, 56-66장에서는 한 번도 이렇게 불리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배신한 자들에 대립되는 충실한 이들을 부르기 위해서 선택된 용어가, 제2이사야서에서는 단수로 쓰여지면서 선택된 민족을 가리키는 데 반하여, 제3이사야서에서는 항상 복수로만 사용됨도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밖의 다른 표현들은, 야곱과 유다의 후손들이고(65,9) 모세에 의해서 인도된 민족이며(63,11-12) 전세계 종교의 중심이 되도록 예정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하느님의 민족, 그리고 그분의 몫이요 그분의 상속자인 민족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적인 애정을 상기시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온 세상을 향한 사명 수행을 준비시키시면서, 유일하고 참된 아버지로서(63,8.16; 64,7) 절대적으로 성실한 당신의 사랑과(65,16) 전적으로 모성적인 정성을(66,13) 증언하신다. 동정으로 가득하신(63,9) 하느님께서는 백성이 저지른 죄악을 잊어주시고 그들을 낫게 해주시면서 용서까지 해주신다(57,16-18; 64,8). 당신의 친구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당신의 영광과 영화를 부여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자”로서 도움을 주시고,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다시 모아들이신다. 이 일을 하시면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정의”, 곧 인간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없이 지켜오신 당신의 약속들에 대한 절대적인 성실성을 드러내신다. 이미 제2이사야서에서 보았던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제3이사야는,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인을 막론하고, 악인들에게는 어김없이 불리하고 선인들에게는 유리하게 수행되는 하느님의 심판을 덧붙인다. 사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서만 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벌하시기 위해서 그와 함께 법정에 들기도 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그분의 보편적인 판결은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것이 된다(66,16.24).


사랑에 성실하시고 구원에 능하시며 심판에 틀림이 없으신 이러한 하느님 앞에서 인간들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분을 배척하면 불행을, 그분을 받아들이면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을 받아들임은 회개와 기쁨에 찬 찬미만이 아니라, 동시에 열성적인 순종도 전제로 한다. 제2이사야가 주님에 대한 “경외”를 단 한 번만 말하는 데 반해(50,10), 제3이사야는 이를 세 번 또는 네 번에 걸쳐 되풀이한다(57,11; 59,19; 63,17). 에즈라서와만 공유하는 독창적인 특징으로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황송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자기의 청중들에게 촉구한다(66,2-5). 이렇게 하느님을 섬김은 도덕적으로 선한 품행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커다란 경신례적 성실성을 요구하게 된다. 제3이사야서에서 성전은 12번, 거룩한 산은 5번 언급되고, 이 밖에도 경신례적 행동들을 가리키는 용어들은 매우 많다(안식일이 3번, 그리고 사제직, 제단, 희생제물, 단식 등). 제3이사야에 따르면 도덕과 종교는 불가분의 것들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기 이웃을 사랑한다고, 그리고 자기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함은 공허한 것이 될 뿐이다. 


5. 성서 전통 속의 이사야서


결국에 가서 이사야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을 통틀어 유일한 작품으로서 예언서들의 경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후 이 책은 새로운 역사를 겪게 된다. 쿰란에서 이사야서의 여러 단편들과 (쿰란의 주요 수사본이라 불리는) 이사야서 전체의 두루마리가 발견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들을 참다운 이스라엘, 그리고 성실한 “남은 자들”로 여겼던 에세네파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이사야서 전체가 하나의 기획서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쿰란의 주요 수사본과 함께 가장 오래된 성서 수사본이 복구되었는데, 이는 유다인 성서전승가들에 의해서 전해진 마조라 본문보다 천년 이전의 것이다. 마조라 본문과 비교할 때 쿰란의 수사본은 단순히 철자법상의 문제들만이 아닌 수많은 변형들을 지니고 있는데, 본문의 뜻을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은 아래 번역의 각주에 명시될 것이다. 이사야서가 유다인들에게 불러일으켰던 관심은 칠십인역이라 불리는 그리스어 번역본에도 나타난다. 이 역본에는 가끔 번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번안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히브리어 본문과는 다른 본문들이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칠십인역은, 번역 원본인 히브리어 본문에 접근할 수 있는 길 하나를 열어주고, 이 번역본이 만들어진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 공동체가 수행한 이사야서의 재독(再讀)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증언해준다는 면에서 유익하다.


이사야서 특히 그 제2부 및 제3부(40-66장)는 시편과 함께 신약성서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다. 그 가운데 일부는 명백한 직접 인용문들이고 나머지는 쉽사리 알아볼 수 있는 차용문들이다. 임마누엘의 탄생을 예고하는 이사 7,14가 마태 1,22-23에서 되풀이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유에 의한 가르침은 청중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복음사가들이 말하는데(마태 13,14; 마르 4,12), 이는 이사 6,10의 본문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포도밭이나 모퉁잇돌과 같은 이사야서의 중요한 이미지들은 신약성서에서도 자주 나온다. 또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입술만에 의한 예배(마태 15,8과 이사 29,13), 종말의 시간을 묘사하는 그림에 나오는 것으로서 천체들이 빛을 잃는다는 것(마태 24,29와 이사 13,10), 그리고 가지와 그루터기, 특히 주님의 종과 관련된 주제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사야서로부터 출발해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새로운 약속들과 임박한 심판 앞에 놓여있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사야서가 성화(聖畵)와 그리스도교 찬미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겠다. 여러 대성당의 정면 현관, 신심 서적 속에 들어있는 삽화들, 그리고 많은 성가들이 각자 제 나름대로 이사야서를 되풀이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상, 이사야서라는 이 하느님의 특별한 증인보다 계시를 더 적절하게 표현하고 신앙을 더 많이 불러일으킨 책도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성서의 세계] 예언자 이사야 - 임마누엘’의 예언자 이사야 


1. 이사야 예언서


모두 6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사야 예언서에는 각기 다른 시기에 상이한 예언자에 의해 선포되었던 말씀들이 담겨져 있다. 먼저 1-39장은 본래의 이사야 예언서(제1 이사야 예언서)로서 왕조시대인 기원전 740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했던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와 행적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라고 시작되는 40-55장 부분은 유배시대(기원전 587-538년) 중반 고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예언자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 부분이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에 함께 수록되어 있는 관계로 제2 이사야 예언서라 부른다. 마지막 단락인 56-66장은 유배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직후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예언자의 선포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구분하여 제3 이사야 예언서라 부른다. 여기서는 1-39장이 전하는 본래의 이사야 예언자를 먼저 만나 보기로 한다. 


2. 이사야 예언자


히브리어로 ‘야훼께서는 구원하신다.(구원이시다)’라는 의미를 지닌 이사야는 기원전 760년경 예루살렘의 명문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 후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인 기원전 740/739년 20대의 젊은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는 요담(740-735년), 아하즈(735-716년), 히즈키야(716-687년) 임금 시대에 예언자로서 활동을 하였는데, 아시리아의 임금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기원전 701년까지 약 40년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는 ①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삶의 규범인 시나이 계약(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② 하느님께서 다윗 왕조를 세우시어 당신 백성을 정의로 다스리도록 하셨다는 다윗 계약을 신학적 바탕으로 하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고발하고,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을 촉구하였으며, 나아가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밝히고 있다. 


3. 시대적 상황


이사야가 예언자로서 활동했던 당시는 이스라엘이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던 격동기였다. 먼저 내부적으로 공동체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위협하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일부 권력가들의 횡포, 극심한 부의 편중, 이기적 향락주의로 말미암아 본래 이웃(특히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정의를 구현해야 할 공동체 내부에는 부정과 불의, 억압과 착취가 만연하였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혼합주의가 다시 번창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아하즈 임금의 경우 아시리아의 신들을 인정하고 공적으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2열왕 16,10-18)


외부적으로는 당시 고대근동 지방을 장악하려던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인해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었으며, 남왕국 유다 역시 강대국들의 세력경쟁 틈바구니에서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지 아니하고, 현실적인 이익과 쾌락을 추구하며 강대국에 의지하는 정치적 기회주의에 기울어지고 만다. 이러한 행위들은 결국 하느님이 자신의 주님이심을 거부하고, 그분의 권능을 부정했던 당시 이스라엘의 잘못된 삶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4. 이사야 예언서의 전체 구조


대부분의 다른 예언서들처럼 이사야 예언서도 ①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고, ② 이방 민족들에 대한 불행 선포, ③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약속이란 주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선포된 말씀을 내용에 따라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


1장 예언서 전체의 도입부분으로 선포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

2-13장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신탁말씀으로 가장 오래된 부분

13-23장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신탁들

24-27장 대부분 묵시록의 성격을 띤 글들의 모음

28-33장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심판과 약속의 다양한 신탁들

34-35장 묵시록적 단편들

36-39장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격 당시 이사야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 


5. 예언자의 주요 선포 내용


1) 이사야의 소명


이사야가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 불리움을 받은 소명이야기(이사 6장)는 이사야 예언서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예언자 자신의 체험에서 유래하는 하느님에 대한 사상(神觀)과 예언자로서의 자의식(自意識), 그가 선포하게 될 하느님 말씀의 핵심적 내용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집약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환시(幻視)를 통해 목격한 하느님은 천상 어좌에 앉아 계시며 세상에 당신의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임금으로서, 그분의 현존이 지상 성전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으시는 초월적인 분이시다.(1절) 그리고 그분을 모시는 천상적 존재인 스랍들의 외침을 통해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며, 만군의 주님이심이 계시된다. :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3절)


이처럼 위대하신 하느님 앞에서 이사야는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이며, 입술이 더러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5절)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에게 다가오시어 그를 정화하여 죄를 용서해주시고, 당신의 말씀을 전할 사자로 준비시키신다.(6-7절) 이제 당신을 대신하여 파견될 이를 찾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이사야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8절)라고 응답한다. 이러한 이사야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태도는 그가 하느님의 소명을 하느님께서 죄인인 인간에게 부여하시는 무상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어 하느님께서는 이사야를 파견하시기에 앞서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역설적인 방식으로 제시하신다.(9-10절) 여기서 “이 백성”은 자신의 것,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마음이 완고한’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이처럼 반항적이고 알아들으려 하지 않는 청중들에게 이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심판 선고(11절ㄴ-13절ㄹ)와 구원 약속(13절ㅁ)을 선포하는 마지막 부분은 이사야의 사명을 설명하면서, 예언서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2) 이스라엘의 잘못된 삶에 대한 고발


당시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는 포도밭의 노래(5,1-7)에서 단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농부가 정성을 다해 포도밭을 가꾸듯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에집트의 노예상태에서 구해내시고, 40년 광야여정을 인도하시며, 시나이 계약을 통해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마침내 가나안에 정착하여 왕국을 이루어 살기까지 온갖 사랑과 정성을 다 기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좋은 포도가 아니라 ‘들포도’를 맺고 만다. 즉 하느님께서는 공정과 정의를 바라셨는데, 이스라엘에는 온갖 불의와 억압에 의한 피흘림과 울부짖음이 가득하다.(5,7) 구체적으로 지도자들은 도둑의 친구들로서 뇌물과 선물만을 좋아하고(1,23), 법을 집행하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박탈하며(10,1-2), 가진 자들은 자신의 재산 증식과 향락에 빠져 “주님의 업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주님의 손이 이루신 일에는 눈을 돌리지도 않는다.”(5,12)


그리고 과거의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처럼 종교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이 거행하는 형식적이며 습관적인 모든 경신례는 더 이상 하느님의 즐거움이 아니라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역겨움이 되고 말았으며,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기도까지도 거부하시게 되었다. :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1,15)


또한 이사야는 급변하는 국제정세 가운데 아시리아(아하즈 임금)나 에집트(히즈키야 임금)의 힘에 의존하려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기회주의를 경고한다. 즉 “인간일 뿐 하느님이 아닌”(31,3) 강대국에 의지하는 이러한 행위 이면에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신뢰하지 않고, 구원의 원천이신 분을 저버리는(30,15) 이스라엘의 커다란 죄악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30,1) 이에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믿었던 아시리아(10장)와 에집트(19-20장)가 하느님의 심판으로 결국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을 촉구하고 있다. :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7,9)


3) 하느님의 심판 선포와 회개의 촉구


이사야는 이처럼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29,13)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되었음을 엄중하게 선포한다.(5,3-6) 이와 함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진정 회개하여 참된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무엇보다도 먼저 거룩하신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자녀다운 자세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1,10; 28,12)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여야 하며, 나아가 구체적인 삶 안에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1,16-17)


4)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메시아 예언


하느님의 심판은 단지 과거 잘못에 대한 응분의 처벌만이 아니라 구원의 미래를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28,23-29) 나아가 이사야는 하느님의 결정적인 구원의지를 세 차례에 걸친 메시아 예언을 통해 선포하고 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낳을 아들의 이름 임마누엘이 상징하듯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7,10-17), 오실 그분의 어깨에는 다윗의 왕권이 놓이고 그 왕국은 공정과 정의로 다스려질 것이며 끝없는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다.(9,1-6) 그리고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위에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 머무르게 될 것이다.(11,1-9)


지금까지 만났던 이사야 예언자는 오늘날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가져야 할 근본자세를 일깨워주고 있다.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이 형식적이며 습관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인격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의지하거나 자신의 교만함에 빠지지 않고, 우리 생명의 원천이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나아가 예언자가 선포했던 임마누엘 예언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강생의 신비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돌보아주시는 놀라운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


[월간 빛, 2002년 6월호,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성서학 교수)]


[성서의 세계] 예언자 - 제2이사야 -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유배시대에 구원의 희망을 선포한 제2 이사야 예언자 


이사야 예언서의 40-55장은 바빌론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왕국이 멸망한 후 질곡의 유배생활(기원전 587-538년)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예언자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 부분이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에 함께 수록되어 있는 관계로 제2이사야 예언서라 부른다. 


1. 유배시대 - 신앙과 정체성의 위기


제2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활동했던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지인 바빌론에서 다른 민족들과 이방 종교들 아래 절망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다. 나라를 잃은 슬픔, 끌려간 낯선 유배지에서의 사회적, 경제적 고통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앙의 위기”였다. 하느님 현존의 표징이자 구원의 가시적 보증이었던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왕조를 상실한 이스라엘은 언제나 그들의 주님으로서 당신 백성 가운데 머무르시며 돌보아 주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지 반문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정복자 바빌론 제국의 신들보다도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런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라는 의심과 회의에 빠져들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있어 ‘존재의 의미’, 곧 그들의 ‘정체성’을 뿌리채 뒤흔드는 위기였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제2이사야 예언자는 먼저 유배의 시련이 왜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밝힌 다음, 하느님의 위로와 다가올 구원을 선포함으로써 절망에 빠져 있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창조신앙, 선민사상, 계약과 같은 거룩한 전통들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백성들의 신앙을 다시금 확립시키고, 그들이 선택된 백성으로서 수행해야할 사명을 제시하고 있다. 


2. 유일하신 하느님


제2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하게 될 메시지의 신학적 바탕은 “하느님의 유일성” 사상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창조신앙을 유배지인 대제국 바빌론의 이방 민족들 가운데에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야말로 유일하시고 참된 신(神)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나는 주님, 모든 것을 만든 이다. 나는 혼자서 하늘을 펼치고 나 홀로 땅을 넓혔다.”(44,24) 즉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로서 유일무이한 분이시다. 그리하여 예언자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시작이요, 나는 마침이다. 나밖에 다른 신은 없다.”(44,6)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어 그는 이스라엘이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바라보던 정복자 바빌론의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닌 “우상”임을 밝히고 있다. 즉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이란 사람이 나무를 베어 일부는 땔감으로 몸을 덥히거나 빵을 굽는데 사용하고, 남은 토막으로 제작하여 만든 신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44,9-20) 이처럼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는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그분만이 세상 전체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세상 만민이 그분의 계획안에 포함됨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3. 이스라엘에 대한 위로의 말씀


예언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에 앞서 ‘왜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유배라는 시련을 겪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고, 그분의 법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손수 그들을 약탈자에게 내놓으셨다는 것이다.(42,18-24, 참조 43,22-28)


그러나 이제 예언자는 고난의 유배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이 범했던 죄에 대한 값이 치러졌음을 선포하면서 하느님의 위로 말씀을 전하고 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40,1-2) 


4. 구원자 하느님 : 이스라엘의 해방


1) 구원의 근거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이제 더 이상 도움 받을 희망이 없다고 체념하고 있던 유배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는 그들이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제 들어라, 나의 종 야곱아,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아. 너를 만드신 분, 모태에서부터 너를 빚으시고 너를 도우시는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44,1-2) 비록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로 주님이신 하느님을 배반하고 멀어져 갔지만 그들은 일찍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던 이들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멸망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유배를 통해 당신 백성을 정화시키시고 다시금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을 당신의 오른팔로 붙들어 주시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41,8-16)


2) 구원의 도구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서 페르샤 임금 고레스를 지명하여 부르신다. “나의 종 야곱 때문에,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 때문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르고,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 네게 칭호를 내린다.”(45,4) 여기서 칭호란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45,1)로서 구약성서에서 도유 의식은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게 될 사람을 성별하기 위해 행해졌다. 특히 이방인이 기름부음 받은 이로 불리운 것은 이례적인 경우로 하느님의 보편적 주권을 드러내고 있다.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을 유배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의도는 “해뜨는 곳에서도 해지는 곳에서도 나밖에 없음을,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45,6)이었다.


3) 구원 사건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로부터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될 구원 사건을 새로운 탈출, 즉 제2의 출애굽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옛날 하느님께서 에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선조들을 당신의 놀라우신 권능으로 해방시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듯이 이제 이스라엘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새로운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43,19-21)


4) 구원의 기쁜 소식


그리하여 이제 하느님께서 이루실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이 유다의 성읍들에게 선포되어진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거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신다’하고 말하여라.”(40,9) 이스라엘에게 선포되는 기쁜 소식은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의 왕권을 행사하시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양떼를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는 목자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40,11) 결국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돌보아 주신다는 것이 기쁜 소식의 궁극적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5. 구원된 이스라엘의 모습


제2이사야 예언서의 후반부(49-55장)에는 구원의 사건을 전해주는 전반부(40-48장)와는 달리 구원된 이스라엘이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먼저 예루살렘이 의인화되어 하느님의 배필로 제시되는데, 남편이신 하느님께서는 아내인 예루살렘이 지은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맞아들이신다. 이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본래의 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받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서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 네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54,7-8) 이처럼 다시금 구원을 받은 예루살렘은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화려한 모습으로 묘사된다.(54,11-17) 나아가 이스라엘은 이제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를 받고 그분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민족들을 위한 증인으로 파견되기에 이른다.(55,1-5) 


6. 이스라엘의 새로운 자기 이해


이처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맞게 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이스라엘이 수행할 사명을 제시함으로써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1)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


예언자에게 있어 구원의 기쁜 소식은 일차적으로 유배 중의 이스라엘 백성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나아가 다른 민족들에게로 확대되어진다. 왜냐하면 창조주이신 야훼의 구원행위는 본질적으로 보편적 범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야훼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뭇 민족들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분으로, 당신의 구원 계획은 궁극적으로 세상 모든 민족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선택신앙의 새로운 해석


이러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계획 안에서 이스라엘이 어떠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는가?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예언자는 세 가지 주요 개념, 즉 ‘종’, ‘의인화된 예루살렘’, ‘계약’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종이라 함은 존재론적으로 주인이신 하느님께 전적으로 속한다는 긴밀한 관계를 의미할 뿐 아니라, 기능적인 측면에서 하느님께서 부여하시는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야할 의무가 있음을 나타낸다.


둘째, 의인화된 예루살렘은 구원된 이스라엘의 영광된 모습을 세상 가운데 드러냄으로써 야훼만이 구원을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이심을 증거하고, 야훼의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 나아오는 민족들의 목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셋째,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시는 계약(55,3)을 통해 이제 하느님의 백성은 “민족들을 위한 증인”으로 내세워지게 된다. 이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구원을 입어 영화롭게 된 자신의 모습을 통해 뭇 민족들을 부르게 되고(구심적 의미의 선교), 이스라엘을 모르는 민족들이 달려오게 될 것이다.(55,5)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유일하심과 보편적 구원의지를 세상에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43,8-13; 44,6-8)


제2이사야는 유배의 시련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위로 그리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한 희망의 예언자라 하겠다. 또한 그의 보편적 구원사상과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증인으로서 자신의 구원된 모습을 통해 뭇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유일하심과 자비를 증거하도록 선택되었다는 자기 이해는 오늘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우리 자신들이 실천해야할 예수님의 근본사명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하겠다.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마태 28,19-20)


[월간 빛, 2003년 1월호,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성서학 교수)]


[성서의 세계 -구약] 이사야 : 주님의 길을 닦으라 


“대림”(待臨) 곧 기다림이란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극히 매혹적인 말이다. 적을 물리치고 개선하는 왕을 기다리는 것이다. 승리의 금관을 쓴 왕이 온갖 전리품과 수많은 포로들을 이끌고 돌아올 때 성읍은 온통 환희의 도가니로 변하고, 거리는 축제의 물결에 휩싸여 환호와 노래로 뒤덮인다. 밤이면 문마다 창마다 불을 밝혀, 왕의 영광이 온 성읍을 비추게 한다.


그러나 교회 전례력의 대림 시기는 이 지상의 승전을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는 왕 중 왕을 기다린다. 그분은 세상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어 평화의 나라를 세워 주신다. 이것은 곧 하느님의 구원 활동이며 진정한 의미의 역사이다. 베들레헴의 비천한 마굿간에서 태어난 저 아기의 탄생은 바로 이 영광스러운 기다림의 시작이다. 예언자들은 인간의 비천한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야를 열어 주고 있다. 예언자들은 서로 관통하고 있는 “상징”과 “실재”, 인간성과 신성,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고 있다.


당신 도읍에 오시는 주님의 내림에 대한 기쁨을 이사야보다 더 절절하게 체험한 예언자는 없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예루살렘의 진정한 아들로서 왕들의 자문역을 맡은 귀족이었다. 다윗의 도읍은 이사야에게 있어서 역사의 돌쩌귀였으며 고난을 거쳐 미래에 찬란히 빛날 희망봉이었다. 그의 모든 예언은 예루살렘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고뇌에 찬 노작이었다.


이사야는 한 나라가 세계 정복을 시도했던 시대에 살았다.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이 니느웨에서 기원전 745년 왕좌에 오른 후 권력 기반을 다지고 군대를 조직하여 아시아 민족들을 한 세기 이상 지배하였다. 기계 병기를 개발한 아시리아인들은 전 근동을 약탈하고, 점령지의 주민들을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여러 민족과 나라가 지닌 지방 신(神)들을 척결하고. 뿌리가 뽑혀 버린 힘없는 대중들 위에 그들의 신 아수르의 주권을 확립시키고자 하였다. 기원전 738년에 디글랏빌레셀이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침공하자, 다마스커스와 사마리아는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하였다. 유다 왕 아하즈가 이 동맹 가입을 거부하자, 다마스커스와 사마리아 왕들은 아하스를 제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공격해 왔다. 바로 이때 이사야는 아하즈 왕에게 “동정녀와 아기”라는 징표를 준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14). 아시리아가 다마스커스와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예루살렘과 아하즈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북부는 아시리아의 영토가 되어, 역사상 최초로 ‘약속된 땅’의 일부가 외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사야는 그 주민들이 먼저 구세주를 보게 되리라고 예언한다(9,1).


디글랏빌레셀이 기원전 727년에 죽자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지배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지만, 새로운 왕 사르곤이 다시 침공,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 주민들을 아시리아로 강제 이주시켰다(28,1-4). 사르곤의 후계자 산헤립 시대에 아시리아의 물결은 유다 왕국의 남부에까지 밀려들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포위당한 채 항복을 요구당하는 수모를 기술하고 있다(36장). 당시의 유다 왕 히즈키야가 아하즈에게는 없던 신앙을 지녔기에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2열왕 19,34). 살아남은 사람들은 경건한 왕 요시아 밑에서 개혁을 서두르지만 아시리아의 쇠퇴기에 주어진 평온은 잠시뿐이었다. 갈대아인 느부갓네살이 아시리아의 영토를 확보한 다음 곧바로 유다를 침공하였다. 기원전 597년에 예루살렘이 최초로 함락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제 바빌론 유배 생활이 시작되어, 60여 년 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빌론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귀환령을 내릴 때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사건들이 모두 이사야서의 역사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사야서를 읽으며 우리는 예언자의 여러 가지 설교와 발언들을 그 제자들이 후대에 수집, 정리, 편찬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예언서의 장절 구분은 그보다 더 후대에 정리된 것으로 그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야서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부분(1-35장)은 “경고의 책”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주로 아시리아에 대한 투쟁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는 예언들을 담고 있다. 막간에 해당되는 둘째 부분(36-39장)은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를 기술하는 내용으로서 주로 열왕기 하권 18-20장의 내용을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셋째 부분(40-66장)은 소위 “위로의 책”으로서 바빌론 유배 생활과 ‘남은 자’들의 예루살렘 귀환에 관련된 내용이다. 이 부분은 이사야 예언자 자신이 썼다고 볼 수 없어, ‘제2 이사야’서라고도 한다.


이사야는 그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계시의 빛 속에서 보고 있다. 밀려드는 아시리아 군대에 위협을 당하고 있는 유다 백성은 홍해에 가로막힌 채 파라오 군대의 추격을 받았던 조상들의 처지와 같았다. 그때 모세가 소리쳤다.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주실 터이니 모두들 진정하여라”(출애 14,14). 이사야도 자기 세대에 이렇게 권고하였다. “마음을 돌려(회개하고) 진정하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다. 고요히 믿고 의지하는 것이 힘을 얻는 길이다”(이사 30,15). 그 절박한 운명의 순간에 이사야는 왕에게 경고한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7,9). 이 말씀이 바로 이사야 메시지의 핵심이다. 오로지 신앙만이 선택된 백성을 세상의 탁류에 휩쓸리지 않는 견고한 반석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예언자 자신이 바로 이러한 신앙의 살아 있는 “표징”이다. 바로 예언자의 이름 예사야후는 “오직 주님만이 구원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커다란 두 가지 “표징”을 보여 주시고자 이사야 예언자를 보내셨다. 구원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토대로 한 그 표징은 곧 “동정녀와 아들 임마누엘” 그리고 “고난받는 종”이다. 어두운 하늘에서 고요히 빛나는 별처럼 아시리아의 성난 물결 위에 드높이 “동정녀와 아들 임마누엘”의 표징이 찬연히 빛나고 있다. 또한 바빌론 유배의 무덤을 뚫고 일어서는 새로운 생명의 확실한 희망으로서 “고난받는 종”의 표징이 세워진다.


아시리아 군대의 잔인한 정복과 학정에 날카롭게 대비되어, 어머니와 아기의 모습 그 자체는 자비와 사랑의 아름다운 표정이다. 인류 역사의 모든 국변에서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도 전횡적인 군사 통치가 난무하는 이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평화의 상징인 것이다. 어머니와 아기의 표징은 남정네들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잔혹한 방법에 대한 결정적인 심판이다. 모자상은 언제나 사랑이 폭력보다 더 강하다는 진리를 남자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이사야의 표징에 있어서 그 어머니는 동정녀이다. 동정녀인 어머니는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드러내고 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낳을 아기는 육정이나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으로 태어나는 까닭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8,10)는 임마누엘 아기는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이다. 그 아들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고 완전한 화해를 이룬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오는 햇순처럼 그는 태어나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11,1).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9,5). 임마누엘에 대한 이러한 예언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아시리아 군대가 홍수처럼 밀려들 때에, 예루살렘은 다윗 가문의 왕 히즈키야의 신앙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1백여 년 뒤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하였다. 유다의 왕과 그 백성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바빌론 포로 생활의 그 암울한 처지에서 구원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또 다른 표징이 드러난다.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날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 바로 그 표징이다. 동정녀의 해산과 마찬가지로. 부활은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표징이다.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며 끌어 올리기도 하시는”(1사무 2,6) 까닭이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고난받는 종은 우리의 반역죄로 상처를 입고 우리의 악행으로 으스러뜨려졌으며,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이사 53,5-6). 고난받는 종의 모습은 멸망의 길에 접어든 사람들에게는 부질없는 것일 테지만,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권능을 뜻하는 것이다. 인류의 죄악을 대신하여 받는 그 종의 고통은 마침내 부활로 끝난다.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 하리라”(53,11).


고난받는 종에 대한 이러한 예언은 다윗 가문의 마지막 왕 여호야긴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바빌론의 감옥에서 고생을 하다가 풀려나 “바빌론에 있던 다른 왕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았다”(2열왕 25,28). 이 예언은 또한 바빌론의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민족의 해방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고난받는 종에 대한 이 표징은 오로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안에서만 성취되는 것이다. “구약의 복음사가”가 생생하게 기록한 메시아의 강생과 수난과 부활의 목적은 곧 교회의 표상인 예루살렘의 새로운 탄생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한 묘사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미래를 보았던 이사야의 통찰력은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시대의 징표를 보도록 눈을 열어 주신 모든 사람들이 내다 보는 전망이다.


영원한 계약을 저버린 백성의 저 비참한 참상은 오늘도 온갖 갈등과 증오로 찢겨진 분쟁 지역에서 이사야가 보았던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들은 곤경에 빠지고 허기가 져서 헤맬 것이다. 위를 쳐다 보나 땅을 굽어 보나 보이는 것은 고통과 암흑, 답답한 어둠뿐, 마침내 그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리라”(8,21-22). 예루살렘 위에 다시 떠오르는 빛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장벽을 없애는 것이다. 이사야가 가르친 대로, 우리 구세주이신 임마누엘의 강생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을 믿는 신앙의 다리를 세우는 것이다.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시는 큰 길을 닦는 일이다. 그것은 곧 회개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대인 편역)


[경향잡지, 1989년 5월호, 다마수스 빈첸]


[성서의 세계 - 구약] 하느님의 충실한 사절 호세아와 이사야 


하느님의 명령을 통한 실패


추방된 아모스가 기록을 통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북왕국에 부친 반면에, 다른 예언자 하나가 같은 왕국에서 그 사명을 시작했다. 바로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다. 이 예언자의 소명은 몹시 이상한 과정을 지니고 있고, 그 이야기를 읽는 현대의 많은 독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서를 덮어 버리고 싶어한다.


호세아와 주님의 최초의 만남(호세 1,2)은 그의 소명에 대한 환시를, 즉 호세아가 하느님께 당신의 백성을 위한 예언자가 되라는 임무를 받은 신현을 암시하는 듯하다. “야훼께서 호세아를 시켜 하신 말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너는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 이 나라가 야훼를 저버리고 음란을 피우고 있구나.’ 호세아는 야훼께 이 말씀을 받고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맞았다”(호세 1,2-3).


자연스럽게 나오는 독자의 첫 번째 반응은, 예언자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면, 그에게 주어진 명령에 대한 일종의 반감이다. 즉 하느님이 그와 같은 일을 명하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다. 그처럼 “거의 절망적인” 질문에 대해 아주 다양한 설명들이 서로 충돌하며, 모든 설명들이 하느님에 의해 의도된 동기, 즉 인내와 동정에 간신히 이른다. 이처럼 어려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한데 이 설명으로 호세아의 예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몹시 냉혹한 표현으로 (그리고 라틴어 번역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그에 대한 확실한 원인이 되었는데)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읽을 때 그 명령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모욕적으로 들린다. 즉 하느님은 예언자에게 남편을 버린 여자와 결혼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그 경우 호세아는 부정한 여인에게서 사생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임무는 모든 히브리적인 가르침과 모순이 되고, 나아가 그러한 일을 행할 경우 예언지는 죽음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레위 20,10; 신명 22,22).


따라서 이 이야기는 보다 관대한 설명을 요하고 그렇게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진술 자체를 조사하는 일이 될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그것을 주의 깊게 살펴볼 때, 호세아가 결혼해야 하는 여자는 간음한 여자라고 불리지 않고 바람기 있는, 즉 음란한 여자라고 불렸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그녀는 행실이 방탕하기는 하였어도 결혼한 여자는 아니었다. 이 여자의 변덕스러움은, 비록 지극히 위험하기는 해도, 결혼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이는 슬픈 장래의 전조이다.


이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했다. 사실 음란한 욕망 속에서 고멜은 다른 사람들에게 갔고 그들에게서 구애를 받았다. 그러한 낙담 뒤에 호세아는 하느님께 자기의 아내를 새로운 사랑으로 다시 차지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야훼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너는 정부와 놀아난 네 아내를 찾아가 다시 사랑해 주어라.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에게 마음이 팔려 건포도 과자 따위 - 즉 바알의 우상 식탁 - 나 좋아하는 데도 이 야훼가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 주어라’”(호세 3,1).


이러한 비교에서 예언자와 예언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발견된다. 호세아는 그의 파멸적인 결혼으로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표지요 상징이 된다. 예언자가 방종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듯, 하느님께서는 고멜처럼 변덕스럽고 불충실한 이스라엘과 일치를 이루신다. 그러한 슬픈 결혼은 백성을 위해 생생한 설교가 된다. 여러 달 여러 해 동안 지속되면서, 모든 히브리인으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불안하게 여기고 반성하게 해야 할 설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이 모든 설교는 시대가 지나면서 더 이상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이미 여러 해 전에 호세아와 고멜에서 출발한 설교는 새로운 긴장을 받아들여야 했고 절정에 이르러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탄생과 아이들에게 붙여진 낯설지만 의미 있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아들은 하느님의 명을 통해 “이즈르엘”이라 불리었다. “…… 오래지 않아 예후가 이즈르엘에서 죄없는 사람들을 죽인 죄값을 예후 왕조에 갚아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시킬 것”(호세 1,4)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아이는 “천더기”라고 불리었다. 왜냐하면 “다시는 이스라엘 가문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지 않을 것”(1,6)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버린 자식”이라 불리었다. 왜냐하면 “너희는 이미 나의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아니다.”(1,9)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세 이름이 그만큼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과 질책이 된 것은 분명하다.


호세아의 메시지의 절정은 도망간 여인으로 인한 고통, 그녀를 다시 얻기 위해 참아 내야 할 벌 그리고 마지막 화해에 있었다. 이러한 국면에서 그의 사랑은 변절자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반영이다. 호세아의 치욕과 실패는 하느님의 분명하고 강한 질책을 담고 있으나 또한 위안을 주는 약속도 담고 있다. 그의 삶은 이스라엘이 전부는 아니라도 언제나 선택된 백성, 하느님의 신부(新婦)였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드러내고 환기시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정력적이고 왕다운 웅변가


이사야라는 이름은 가장 중요한 성서 가운데 하나, 일련의 예언서들 가운데 첫째요 가장 중요한 책을 당연히 생각나게 하나, 동시에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예언적 인물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이사야는 성서에서 유일하게 하느님의 예언자요 사절로 묘사된다. 우리는 그의 성소와 그의 예언적 활동을 분명히 읽을 수 있으나, 그의 탄생과 혈통 그리고 그의 숨겨진 삶과 그의 죽음에 대해선 아무것도 읽지 못한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왕가의 자손이고 나아가 다윗 가문의 왕자라고 한다. 훨씬 후대의 어떤 유다 전승은 그를 예루살렘에서 기원전 796년부터 768년까지 다스렸던 아마지야 왕의 동생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빛나는 기원에 대한 입증은 예언 자체에서, 즉 언어의 형태와 고상함 그리고 표현의 장중함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이사야가 예루살렘의 귀족 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의 예언을 읽는 사람에게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도시의 삶에서 얻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집과 거리, 성벽과 탑에 대하여 말한다. 그의 관심사는 거의 대도시의 삶에 집약된다. 게다가 그는 상류 계급의 관습을 알고 있고, 예루살렘 귀족들의 집, 의복, 장식들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나라 전체를 마치 예루살렘을 보고 묘사하듯 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예루살렘의 운명, 영광, 악습은 전국가 생활의 종합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가 혈통이 의심스럽다면, 적어도 그가 예루살렘 궁전과 성전의 그늘에서 살았다고 결론내릴 필요는 있다.


어쨌든 그는 성전의 홀에서 예언적 소명의 환시를 받는다.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다녔다. 그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그 외침으로 문설주들이 흔들렸고 성전은 연기가 자욱하였다”(이사 6,1-4). 예루살렘의 귀족 계급은 수도의 성소에서 하느님과 만났다.


이사야는 단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성전에서 부름을 받은 유일한 예언자일 뿐 아니라 또한 자발적으로 자신을 바친 유일한 예언자이기도 하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부르셨을 때 구실을 대고 빠져 나가려고 애썼다(예레 1,6). 모세는 그의 형 아론이 자기 대신 갈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출애 4,10). 오로지 이사야만이 임무를 열망 속에 받아들였다. “그때 주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여쭈었다”(이사 6,8). 그는 자기가 불리는 순간에 망설이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태연하게 임무를 받아들였고, 태연하게 백성과 왕자들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그들의 경고와 위협에 얼굴을 내밀었으며, 나아가 모든 백성들에게 선포한 재난이 일어난다 하여도 결코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기원전 735년에 아람과 북왕국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고 아하즈 왕을 위협했을 때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은 바람에 휩쓸린 수풀처럼 흔들렸다”(7,2).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이사야는 “표백물 건조장에 이르는 길가” 윗저수지 수로 끝에서 검열을 하고 있던 왕 앞에 용기 있게 나타났다. 이 물은 중대한 관심사였다. 거기에는 군대와 시민의 생명이 달려 있었다. 오로지 이사야만이 이 일을 하찮고 무관심한 것으로 간주하는 듯했고, 아하즈에게 차분하게 있으라면서 “연기 나는 두 횃불 끄트머리에 불과한 것”에 놀라지 말고 정신을 잃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포위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이사 7,4).


훨씬 뒤의 세대, 정확하게는 히즈키야 치세 때 예루살렘은 아시리아인들에게 포위 공격을 받았다. 다시 한 번 이사야의 입에서 같은 말이 나왔고, 다시 한 번 그의 태연 자약함이 드러났다.


히즈키야가 상당히 허약해져서 죽어 갈 때 이사야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태연하게 그의 말이 올려 나왔다. “너의 왕실에 마지막 유시를 내려 기강을 바로잡아라. 너는 곧 죽게 될 것이며 다시 회복되지 못하리라”(이사38,1). 그리고 하느님께서 히즈키야의 기도를 수락하셨을 때,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절로서 선포하게 된다. “네 기도를 내가 들었고, 네 눈물을 내가 보았다. 내가 너의 수명을 십오 년 더 연장시켜 주리라”(이사 38,5).


백성들 앞에서의 그려한 태연함과 그러한 초월적 힘이 단지 그의 혈통 때문일 수 있겠는가? 그에게 그러한 귀족적 우월감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신적인 접촉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차분한 확실함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덕분이 아니겠는가? 이사야는 단지 왕가의 연설가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하느님의 지각있는 예언자였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l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1년 8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1-8) 


아모쓰(12소예언자 가운데 하나인 아모스가 아님.)의 아들 이사야는 기원전 8세기 중엽의 유다 예언자이다.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이사야는 히브리 예언자들 가운데 가장 출중한 예언자였으며, 그의 이름으로 쓰인 이사야 예언서는 구약성서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시들을 담고 있다. 이사야서의 메시지는 강하면서도 우아하고,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장중하다. 또한 본문 안에는 일상 삶에서 끌어낸 표상과 직유들이 풍요롭게 나온다.


이사야는 기원전 765년경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25세에 예언자 소명을 받았다. 이사야가 환시와 더불어 소명을 받던 바로 그해(기원전 740년)에 아자리야라고도 불리는 우찌야 임금이 죽었다.


(구약성서 새번역) 1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있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3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4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5 나는 말하였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숲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하여졌다.”

8 그때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다.


이사야는 천상 환시 가운데서 소명을 받는다. 6장 1절의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라기보다 하느님이 계시는 천상 궁궐을 말한다. 이곳에서 날아다니는 ‘스랍’은 히브리말로 ‘타오르는’이라는 뜻인데, 본디 이 낱말은 시나이 광야에서 불평하던 이스라엘을 물어죽인 불뱀을 가리켰다(민수 21,6-8; 신명 8,15). 그러나 여기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는 천상 존재로 드러난다. 고대 근동에서 스랍들은, 몸은 동물이나 얼굴과 손은 사람인 혼합적 존재이다. 스랍들의 ‘타오르는’ 모습은 4절에 묘사된 하느님의 현현 때에 발생하는 번개를 상징할 수 있다. 스랍들이 주님의 거룩하신 현존을 두고 외치는 소리,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은 이미 이사야 이전의 전례에서 사용되던 환호에서 따왔을 것이다. 천둥과 연기를 동반한 거룩하신 분의 현현은 이사야를 몹시 두렵게 하였다. 하느님의 얼굴을 뵈오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출애 3,6; 판관 6,22; 1열왕 19,13 등). 그때에 스랍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이사야의 입에 갖다 댄다.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주님께서 그의 입에 손을 대신다(예레 1,9; 다니 10,16 참조). 이로써 이사야는 입술이 정화되어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할 준비를 갖춘다. “누구를 보낼까?” 주님의 물음에 이사야가 선뜻 나서서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대답한다.


이사야는 비극의 예언자 예레미야와 달리 소명을 받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머뭇거리거나 후회하는 일 없이 예언직을 올곧게 수행하였다. 그는 평생 예루살렘에 머물며 다윗 왕실의 조언자로 임금들의 통치에 깊숙이 간여하였다. 그의 예언 활동은 네 임금, 곧 요담과 아하즈와 히즈키야와 므나쎄의 통치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이사야서의 신탁은 아하즈와 히즈키야 시대의 두 사건에 집중된다.


첫 번째 사건은 아하즈 시대에 있었던 아시리아 임금 디글닷-빌네셀 3세의 이스라엘 침공이다. 기원전 734년 북왕국 이스라엘 임금 베가는 아람 임금 르신과 결탁하여 아시리아를 거슬러 반역을 꾀하였다. 그들은 유다 임금 아하즈에게도 함께 동맹을 맺자고 부추기지만 거절당하자 아시리아를 치기 전에 유다부터 먼저 공격하기로 한다. 다급해진 아하즈는 아시리아에 원병을 요청하고 그곳의 이교 신앙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이사야는 아하즈의 결정에 반대하였다. 이사야가 염려한 대로 아시리아는 이스라엘과 다마스커스를 패배시키고 아하즈를 구해 주었으나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였다. 디글닷-빌네셀 3세는 이스라엘을 셋으로 나누어 아시리아의 한 지방 장관이 니니베에서 직접 다스리도록 조처하고, 베가를 살해한 뒤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임금이 된 호세아에게는 사마리아와 그 주변 지역만 남겨주면서 무거운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아시리아 임금은 남부 유다 왕국도 자신의 신하국으로 삼고 해마다 엄청난 액수의 조공을 바치며 아시리아 제국에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 시기에 나왔을 이사야 예언자의 신탁이 이사 6-11장에 소개된다.


두 번째 사건은 히즈키야 시대에 일어난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이다. 기원전 705년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는 아시리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반기를 들었다. 아시리아 임금 사르곤 2세가 죽은 데다가 이집트 25왕조의 임금 샤바코가 지원을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사르곤의 후계자 산헤립은 왕위에 오르자 처음 몇 년 동안 동쪽의 왕국들, 특히 바빌론과 전쟁을 벌였고,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데만 4년이 걸렸다. 아시리아 제국 동부를 평정한 산헤립은 701년 팔레스티나에 진군하여 유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유다의 모든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유다를 말살하려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한 채 공략하였다. 이때 이사야가 나서서 히즈키야를 돕는다. 히즈키야는 유다의 우물을 모두 틀어막아 아시리아 대군이 물을 얻지 못하게 한 다음, 예루살렘 주민들을 위해서는 518m나 되는 지하 터널을 파고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기혼 샘의 물을 실로암 못에까지 끌어들였다(2열왕 32,1-8). 히즈키야가 판 지하 터널은 오늘날 관광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사 37,36과 2열왕 19,35에 따르면 주님의 천사가 흑사병으로 아시리아 진영을 치니, 아시리아 병사 십칠만 오천 명이 쓰러졌다. 산헤립은 예루살렘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니니베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아시리아의 예루살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주님께서 히즈키야와 이사야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유다는 이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잃은 것이 많았다.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의 모든 성읍이 파괴되었고, 히즈키야는 자신의 왕좌를 유지하고 아시리아가 다시 쳐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엄청난 조공을 아시리아에 바쳐야 했으며, 유다의 백성은 예루살렘 · 성전 · 유다가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은 불의와 악을 저지르면서도 이런 헛된 믿음에 안주하는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을 단죄한다.


이 두 사건을 겪으면서 이사야는 유다의 임금들에게 외세에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께 충실할 것을 호소한다. 아하즈에게는 아시리아의 도움을 청하지 말고, 히즈키야에게는 이집트의 도움을 청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사 7; 9; 11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임마누엘 환시는 유다 임금들이 주님의 길을 충실히 따르면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어 번영을 누리게 해주실 것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아하즈와 히즈키야가 이사야의 호소와 경고를 배척하자 이사야는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온 땅에 큰 복을 가져올 미래의 임금 메시아에게 관심을 돌린다(이사 9,1-6; 11,1-9).


이사야는 귀족 출신으로 하느님의 소명을 받고 주저함없이 초지일관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였다. 그는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유다 왕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왕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큰 도움을 주었지만, 유다 임금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예언 활동은 그가 시도한 개혁의 성패와 관계없이 후대의 예언자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신탁은 바빌론 유배를 겪던 제2이사야서(40-55장)와 제3이사야서(56-66장)의 저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고, 하깨와 즈가리야와 같은 유배 이후 시대의 예언자들에게 메시아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나아가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삶과 사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경향잡지, 1998년 12월호,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네 개로 구성된 ‘야훼의 종’의 노래(이사 42,1-9; 49,1-7; 50,4-11; 52,13-53,12)는 제2이사야서(40-55장)의 주된 내용이자, 이사야서 전체의 백미이다. 그런데 이 노래에 나오는 ‘야훼의 종’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그를 특정 개인으로 보는 이들은 모세와 같은 예언자나 고레스 대왕 같은 임금, 또는 제2이사야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와 반면 그를 집단으로 보는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나 주님의 계명과 유다교 전통에 충실한 소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후대에 와서 이 ‘야훼의 종’을 다니엘서(11,33-12,10)에서는 안티오키아의 박해 때에 유다 종교와 전통을 충실하게 지키려 한 유다인들로 이해하고, 신약성서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였다.


어떻게 이런 해석들이 가능한가? 우리는 제2이사야서의 관련 대목들에서 저자가 ‘야훼의 종’이 맡은 역할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살펴봄으로써 그 대답을 찾아보자. 먼저 둘째 노래에서 그가 받은 소명을 규명하고, 나머지 세 노래에서 그 소명의 구체적 내용을 밝히기로 한다.


(구약성서 새번역)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신 분이시니

내가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미치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2이사야서가 쓰여진 것은 바빌론 유배 동안(기원전 586-539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약속인 가나안 땅도, 나라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왕정 제도도, 주님의 처소인 예루살렘과 성전도 다 빼앗기고 망연자실하였다. 민족 전체를 구성하고 보호해 줄 제도적 기반인, 땅과 임금과 성전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일으켜줄 왕족, 귀족, 사제, 학자(서기관), 심지어 장인(匠人)들마저 적국의 수도 바빌론으로 끌려간 상태였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야훼의 종’은 소명을 받는다. 바빌론에서 유배살이하는 유다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명은 유배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뭇 민족들의 빛이 되어 하느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미치게 하는(49,6) 일까지도 포함한다.


하느님은 이 임무를 맡은 ‘야훼의 종’을 모태에서부터 손수 빚어 만드시고 소중하게 여기셨으며, 그의 힘이 되어주셨다(49,5). 그래서 그는 섬들과 먼 나라 민족들에게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49,1) 하고 외친다. 소명을 받은 이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는 모세의 소명 대목(출애 3-4장)과 이 소명 대목을 본떠 만든 예레미야의 소명 대목(예레 1,4-10)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예레미야를 ‘모세와 같은 예언자’로 불렀듯이 ‘야훼의 종’도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야훼의 종’이 받은 소명과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는 첫째 노래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그는 온화한 성격을 지녔지만 용기와 끈기를 가지고 맡은 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것이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지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42,2-4). 공정을 세우는 일은 무엇을 말하는가? 뭇 민족들의 빛이 되어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는” 것이다(42,7). 이처럼 공정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야훼의 종’은 하느님께 특별한 보호와 선택과 사랑을 받는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42,1).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은 셋째 노래에서 더욱 극적으로 그려진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50,6-7).


이처럼 공정을 세우는 일에 충실하고 주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야훼의 종’이건만 그에게 엄청난 시련과 고통이 닥친다. 그러나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닌 그는 이 모든 시련과 고통을 묵묵히 견뎌낸다. 넷째 노래는 이렇게 그 모습을 전한다. “그는 주님 앞에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53,2-3).


그가 이처럼 고통을 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서 넷째 노래의 저자는 구약성서의 어떤 대목에도 알려지지 않은 ‘대속적 고통’의 주제를 끌어들인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한 징벌이 그에게 내려졌고 그의 상처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양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53,4-6). 여기서 말하는 죄악은 바빌론 유배의 원인이 되었던 이스라엘 조상들의 우상숭배와 온갖 불의를 말한다. 그런데 히브리말에서 ‘죄’는 죄지은 행위뿐 아니라, 그 불행한 결과까지도 포함한다. 따라서 ‘야훼의 종’은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악뿐 아니라, 그 결과로 그들이 당하는 온갖 불행과 재난도 함께 지고 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감으로써 이스라엘은 어떤 혜택을 입게 되는가? 유배자들은 조상이 지은 죄의 결과를 당연히 짊어져야 했다. 그러나 ‘야훼의 종’이 죄의 결과인 고난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묵묵히 받아들임으로써(53,7) 백성에게 제2의 출애굽을 열어주었다. 기원전 539년 페르샤의 고레스 대왕이 바빌론에 끌려온 유다의 유배자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선포한 해방령이 바로 제2의 출애굽이었다. 여기서 주님께 사랑받는 ‘야훼의 종’이 왜 그다지도 참혹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밝혀진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더 나아가 죄악의 불행한 결과에 짓눌린 자들을 구원하려고 당신의 사랑하는 종을 으스러뜨리고 병고에 시달리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고통받는 ‘야훼의 종’의 운명은 역전된다.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52,13).


‘야훼의 종’의 노래는 신약성서에 그다지 자주 인용되지는 않지만(요한 12,38; 사도 8,32-33; 로마 10,16: 1베드 2,21-25)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데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의 바탕으로 삼은 신약성서 저자들이, 우리 죄 때문에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셨다가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신 그분의 운명을 ‘야훼의 종’과 비교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위에 인용한 구절들만으로도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야훼의 종’이 이사야서의 문맥에서 누구를 가리키든, 이 유명한 노래의 저자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몇 세기 뒤에 나타날 위대한 인물을 두고 정확한 예언을 한 셈이다.


[경향잡지, 1999년 2월호,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이사야서는 그 시대적 배경과 내용과 문체에 따라 보통 셋으로 나눈다. 먼저 시대적 배경을 보자. 제1이사야서(1-39장)는 아하즈와 히즈키야의 통치 시절(기원전 735-687년)을, 제2이사야서(40-55장)는 다윗 왕조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가져온 바빌론 침공과 유배 시절(586-539년)을, 제3이사야서(56-66장)는 유배 이후 이스라엘의 재건 시절(539-500년)을 다룬다.


그 다음 내용상, 제1이사야서는 아시리아인들의 억압과 침략 앞에서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도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반면, 제2이사야서는 55장 3절 외에는 다윗 왕조에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고, 예루살렘은 중요한 실체라기보다 일종의 종교적 상징으로 제시되며 성전에 관해서는 단 한 번 언급한다(44,28). 제3이사야서는 제2이사야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윗 왕조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의 미신적 예식을 비난하는 한편, 메시아 시대에 예루살렘이 가지게 될 새로운 의미와 역할을 선포한다.


마지막으로 문체를 놓고 볼 때, 이스라엘에 위기와 멸망을 불러들이는 우상숭배를 단죄하는 제1이사야서는 간결하고 직선적이며 단호하고, 바빌론 유배 시절에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제2이사야서는 장중하면서도 서정적이며, 메시아 시대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제3이사야서는 앞의 두 책에 비하여 설득력과 박진감은 다소 떨어지지만 원숙한 필체로 두 책의 내용을 포괄한다.


이제 제2이사야처럼 이사야 예언자의 제자이며 무명의 신탁 선포자인 제3이사야가 어떤 소명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가 받은 소명이 제3이사야서의 중심 주제인 메시아 시대의 정의(正義)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자.


(구약성서 새번역) 이사 61. 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2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3 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정의의 참나무’

‘당신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라 부르도록 하셨다.


기원전 539년 가을, 바빌론을 정복하고 ‘바빌론의 임금’이라는 칭호를 얻은 페르샤의 고레스 대왕은 538년 바빌론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유다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2역대 36,22-23; 에즈 1,1-4). 이 칙령은 고향으로 반드시 돌아가라는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폐허가 된 고국으로 돌아가기보다는 바빌론의 안정된 생활에 안주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고향으로 발길을 옮긴 사람들은 소수의 무리였다. 여러 무리의 유다인들이 제후 세스바쌀, 여고니야의 손자이며 다윗 왕조의 계승권자인 즈루빠벨, 대사제 스사랴의 손자이며 그 역시 대사제인 예수아 등 출중한 지도자들의 지휘 아래 아마도 서로 다른 시기에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에즈 1-2장).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들은 제사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고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다. 북쪽 사마리아 주민들의 방해에도 굴복하지 않고 귀환자들은 예언자 하깨와 즈가리야의 독려로 516년 마침내 성전 건축을 마무리하고 예배를 정식으로 드리기 시작하였다(에즈 5-6장). 그뒤에 사제 에즈라와 총독 느헤미야가 도착하여 이민족과의 혼인을 단죄하고 전례와 윤리와 제도의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에즈 7-8장; 느헤 1-2장).


겉으로 보기에 이스라엘의 복구와 재건은 이처럼 매끄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3이사야는 하깨와 즈가리야에게 없는 안목과 통찰을 가지고서,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감히 추진하지 못한 개혁을 더 넓고(보편주의) 더 궁극적인(메시아적 종말론) 차원에서 선포하였다. 제3이사야서에 따르면 바빌론 유배자들이 고향에 돌아와 이루어낸 상황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제2이사야가 우상들의 헛됨을 조롱하고 그것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런 도움이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지적한다. 반면, 제3이사야는 그처럼 헛되고 무능한 우상들을 섬기는 악습들에 또다시 빠져든 백성을 맹렬하게 비난하고 고발한다(57,3-13).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바빌론 유배살이에서 제2 출애굽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우상숭배와 더불어 제3이사야는 겉치레 예배와 신심을 고발한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과 그 예배가 회복되는 시점에서 모두가 외적인 예배와 형식보다 진정한 예배인 공정과 정의를 외면하고 있는 것을 통탄한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것이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께서 반기시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58,5-7)


이런 생각은 위에서 인용한 예언자의 소명 신탁(61,1-3)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신탁에 묘사된 내용은 제2이사야서에 나오는 고통받는 야훼의 종의 소명을 반영한다. 서로 일치되는 요소들을 열거하자면, 주님께서 선택하시어 성령을 주심(42,1), 자비심을 가지고 겸손하게 봉사함(42,2-3),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풀어줌(42,7), 정의에 대한 언급(42,1. 3-4. 6) 등이다.


제3이사야의 소명 신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정의이다. 이사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이 정의는 하느님 편에서 볼 때 당신 백성에게 자비와 사랑을 충만히 드러내시고 당신이 약속하신 구원을 성취시키시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정의는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단순히 개인들의 짓밟힌 권리를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구원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 정의의 개념은 제1이사야서, 제2이사야서, 제3이사야서를 거치면서 점차 확장된다. 제1이사야서의 주 관심사였던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도성의 확고한 존립은 제2이사야서에 들어오면서 그 역사적 실체적 의미 대신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되고, 제3이사야서에 와서 메시아 시대의 희망으로 발전한다. 하느님께서 다윗 왕조에게 약속하신 내용은 단순히 한 왕조의 존립과 번영에 머무르지 않고, 제3이사야서에서 결국 메시아를 통하여 온 세상 민족을 영원한 구원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불러모으시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번영에 국한된 하느님의 정의 개념이 인류 구원과 연결되면서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차원을 지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제3이사야의 소명은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도시의 보존, 그리고 성전의 재건과 형식적인 전례의 회복 등 외적인 정치 · 종교 제도의 확립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가 완전히 실현될 메시아 시대를 선포하고 앞당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3이사야는 이 소명을 자신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시온의 남은 자들에게까지 확장시킨다. 그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었는데, 이들이 ‘정의의 참나무’ 또는 ‘당신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가 된 것이다.


제2이사야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노래’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속죄하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예고하고 형상화한 것이라면, 제3이사야의 소명 신탁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신 그분의 공생활 전체를 미리 예고하고 집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루가 복음서 저자가 이를 예수님의 나자렛 첫 설교에서 공생활의 청사진으로 제시한 것은 매우 적절하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하느님의 정의를 이웃 사랑에 연결시켜 모든 이에게 메시아 시대의 구원에 동참하기를 요구하는 이사 58,6-10의 말씀은 마태오 복음의 ‘최후심판의 비유’에 그대로 반영된다.


[경향잡지, 1999년 3월호,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예언서 여행] 이사야서 입문 


1) 이사야 예언자는 누구인가?


‘야훼는 구원자’ 또는 ‘야훼께서 구원하시다’는 의미를 지닌 이사야 예언자는 기원전 760년경 아모츠의 아들로 태어났다(1,1a). 그의 이름은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그분의 계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선포되고 또 실현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집회서의 저자는 “거룩하신 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의 청을 곧바로 들어 주시어, 이사야의 손으로 그들을 구해주셨다.”(48,20)고 증언한다. 


2)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적 배경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의 임금 우찌야,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서”(1,1b) 활동했다. 이사 6,1은 이사야 예언자가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기원전 740년/739년) 예언자로서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 이사야 예언자가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열왕 21,16을 근거로 수많은 예언자들을 죽인 므나쎄 임금(기원전687∼642년)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3) 이사야서의 구분 기준


전체 66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사야 예언서를 자세히 읽어 보면, 그 안에는 이사야 예언서가 한 예언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정황들이 등장한다. 성경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기준을 근거로 이사야서를 제1이사야서(1-39장)와 제2 이사야서(40-55장), 그리고 제3 이사야서(56-66장)로 나누어 설명한다.


① 시대 배경의 차이


팔레스티나가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기원전 8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제1 이사야서는 황금만능주의와 우상숭배에 빠진 남부 유다 왕국의 현실(2열왕 16,10-18 참조)과 백성들 사이에 성행한 사회적인 불의를 고발하면서(이사 1-5장 참조), 다윗의 후손으로서 ‘공정과 정의’(이사 9,6)를 실현할 새로운 임금의 출현을 예고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년)를 배경으로 하는 제2 이사야서는 고대 근동의 패권이 바빌론에서 페르시아로 옮아갈 것임을 예고하면서, 야훼의 ‘기름부음 받은 이’, 즉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한다(45,1).


이사 57,14-20; 58,1-12; 60-62장; 65,16b-25; 66,6-16의 신탁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제3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직후(기원전 538∼520년)에 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은 하까이와 즈카르야 예언자들의 격려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② 중심 주제의 차이


제1 이사야서는 예루살렘과 그곳 주민들의 죄를 고발하고 그에 대한 재앙을 선포한다(1,2-3.21-31; 3장 등 참조). 그와 함께 비록 언제인지는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미래에 있게 될 야훼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한다(2,2-5; 4,2-6; 5장 등 참조).


제2 이사야서는 바빌론 유배의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배에서의 귀향(41,17-20; 43,1-7.16-21; 48,20-22; 49,8-26 등 참조)과 예루살렘의 번영을 선포한다(44,24-28; 52,1-12; 54장 참조). 특히 이 부분에서는 ‘고통받는 야훼의 종’(42,1-9; 49,1-7; 50,4-11; 52,13-53,12)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릴 하느님의 구원 선포가 중점적으로 전개된다.


제3 이사야서는 고유한 중심 주제가 발견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고발하고(56,9-12; 57,3-13; 59,1-8 등 참조)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는(59,16-20 등 참조) 등 제1 이사야와 제2 이사야에서 다루어진 주제들을 반복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재건과 관련된 선포들은(57,14-21; 58,12 참조) 제3 이사야가 앞의 두 부분과 다른 시대적인 배경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4) 이사야서의 구조


이사야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선포 → 이민족들에 대한 불행 선포 →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약속’이라는 전통적인 도식을 따르고 있다.


A. 심판의 책(이사 1,1-39,8) 1장 도입부, 2-12장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에 내린 신탁, 13-23장 이민족들에 내린 신탁, 24-27장 이사야의 묵시록(묵시문학적 단편 모음), 28-33장 유다 왕국에 대한 약속과 위협, 34-35장 작은 묵시문학적 단편 모음, 36-39장 이사야의 회고록.


B. 위로의 책(이사 40,1-66,24) 40,1-48,21 이스라엘의 해방에서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 49,1-55,13 죄의 속죄와 이스라엘의 영적인 해방, 56,1-66,24 포로들의 귀환.


[2010년 3월 14일 사순 제4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서동원 다미아노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교수)]


[예언서 여행] 제1 이사야서의 중심내용과 신학 사상 


1) 제1 이사야서의 주요 부분 설명


①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 이야기(이사 6,1-13)


이스라엘의 예언자 특히 고전 예언자는 신분과 세습에 의해 직무를 수행하는 사제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통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이들이다. 그들은 환시를 보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하느님의 소명을 받는 특별한 체험을 한 뒤 예언자로 활동했다. 그런데 그들의 소명 체험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정한 양식으로 정형화되어 성경에 표현되었다. 하벨(N. Habel)은 다음과 같은 6가지 단계를 통해 하느님과 예언자의 만남과 부르심을 대화 형태로 구성한다. ① 신대면(하느님과 예언자의 만남이 하느님의 부르심과 예언자의 응답으로 이루어짐), ② 서언(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난국을 시사하고, 하느님과 예언자의 관계가 표현된다), ③ 예언자에 대한 하느님의 사명 부여(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파견함), ④ 반대(부르심을 받은 이의 항변과 거부), ⑤ 도움의 약속(하느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이의 반대를 무마시키기 위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통해 보증해 주심), ⑥ 표징(하느님께서 부르심을 받은 이에게 그의 소명을 확인시키는 징조를 보여 줌). 이 양식은 모세(탈출 3,1-12), 기드온(판관 6,11-17), 예레미야(예레 1,4-10)의 소명 사화에서 잘 나타난다.


② 임마누엘의 표상(이사 7,10-17)


‘임마누엘’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에 두 번 등장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7,14). “그리하여 강물은 유다로 밀려들어 와 목까지 차게 되리라. 그 날개를 활짝 펴서 너의 땅을 온통 뒤덮으리라. 아, 임마누엘”(8,8). 이 구절들은 아시리아의 침공과 관련해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다윗 왕실에게, 구체적으로는 아하즈 임금에게 내리는 예언이다(7,10-13).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임마누엘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 왕손을 가리킨다는 견해, ㉡ 그중에서도 특히 아하즈 임금의 아들 히즈키야를 뜻한다는 견해, ㉢ 이사야 예언자의 아들이라는 견해, ㉣ 새로운 이스라엘, 곧 하느님이 함께 하는 미래를 배태한 남은 자(상징적인 시온의 모습), 그리고 ㉤ 그 당시에 태어나던 익명의 아기를 일컫는다는 견해(종말론적 - 메시아적 성격) 등이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 학계에서 ‘임마누엘’이 이사야의 동시대적인 상황에서 정확하게 ‘메시아의 등장을 예고하는 구절이었다’는 견해는 찾기 힘들다. 오히려 그 의미가 상당히 모호한 이름이라는데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2) 제1 이사야서의 중심 신학 사상


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느님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호칭에서 잘 드러난다(1,4; 5,19.24; 10,20; 12,6; 30,11.12.15; 31,1; 36,23). 이 호칭은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 이야기에서 ‘거룩하시다’라는 스랍들의 환호에서도 강조되듯이(6,3), 그의 고유한 하느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거룩함’(聖性)은 하느님께서 단순히 인간과 다르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본성이 공정하고 정의롭고 선하다는 것을 표현한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몸소 정의를 실천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 백성이 당신과 같은 거룩한 존재가 되어 세상의 다른 민족과는 달리 그분과 같은 행동을 하기를 바라신다(참조 1,2-17; 3,16-4,1; 5장; 9,18-10,11).


②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


이사야 예언자의 핵심 메시지인 ‘야훼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주 하느님과 그분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신뢰’이다. 이 믿음은 주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는 관계의 기초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주 하느님을 전폭적으로 의탁하는 인격적인 행위를 말한다. 제1 이사야서의 핵심 부분으로 알려진 ‘임마누엘 소책자’(6,1-9,6) 및 ‘한 분이신 주님’(28,1-31,9 참조)이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자기 존립과 구원의 유일한 바탕으로 삼는 것, 곧 당신 백성인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7,14)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2010년 4월 18일 부활 제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서동원 다미아노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교수)]


[예언서 여행] 제2 이사야서(이사 40-55장)의 신학 사상 (1) 


이사야 예언서의 제2부(40-55장)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기원전 551∼529년)가 고대 근동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때부터 기원전 539년 바빌론에 무혈 입성하기 직전까지의 기간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1. 제2 이사야 예언서의 구분


50여 개의 작은 신탁이나 시들만이 나열되어 있는 제2 이사야서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부분(40-48장과 49-55장)으로 명백히 나누어 볼 수 있다. ㉠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된 대상이 첫째 부분에서는 주로 야곱 - 이스라엘, 둘째 부분에서는 시온 - 예루살렘으로 언급된다. ㉡ 첫째 부분에서는 야훼 하느님의 유일성과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이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바빌론의 멸망에 이어 이스라엘 백성이 맞게 될 해방을 노래하지만, 둘째 부분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귀향에 이어 예루살렘과 시온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선택된 민족의 영화가 그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할 ‘기름부음 받은 이’로 선택한 키루스가 41-45장에만 등장할 뿐, 후반부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2. 제2 이사야 예언서의 신학 사상


1) 제2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하느님


① 창조주 하느님


제2 이사야 예언자는 세상을 창조하신 야훼 하느님을 세상의 주인이시며,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분으로 선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야훼 하느님의 창조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탈출(제2의 출애굽)과 연결되어, 그들의 바빌론으로부터의 탈출과 유다 땅으로의 귀향을 제2 이사야 예언자는 야훼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로 규정한다(43,1.7.15; 48,7).


영원하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완성자이시기 때문에 그분 이전에 또 그분이 후에 다른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으며(43,10; 44,9-20.24; 46,5-6), 당신의 역동적인 말씀으로(55,10-11)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44,24).


제2 이사야 예언자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구약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전적으로 표현하는 히브리어 동사 ‘바라’를 사용한다. 이 동사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모두 54번 등장하는데, 이 중 16번이 제2 이사야서에서 사용되고 있다. 제2 이사야 예언자는 이 동사를 통해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펼치시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와 구원 행위를 표현한다.


② 유일하신 하느님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에 내포되어 온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가장 분명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예언자가 바로 제2 이사야이다. 그는 야훼 하느님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44,6; 45,18.22; 46,9) 지상의 어떠한 세력도 그분께 대항할 수 없는 분으로 표현하는(40,12-26) 반면에 이방인들이 믿는 신은 아무 쓸모도 없고(41,24; 44,9-20), 인간의 역사 안에서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는 나무토막들과 쇠붙이와 같은 존재라고 부른다(40,19-20; 46,5-7).


③ 구원자이신 하느님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주님으로서(45,11-18; 48,12-16), 세상 창조 때부터 구원 계획을 구상하셨고, 아브라함과 야곱을 불러 이들을 출발점으로 하여 당신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도록 준비하셨다(41,8-10; 51,1-30). 다른 예언자들처럼 제2 이사야 예언자도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론 유배를 그들의 죄에 대한 야훼 하느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보지만(42,24-25; 48,17-19),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당신의 본래 계획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정화하여 구속하는 것이 바로 그분께서 의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48,9-11). 그러므로 제2 이사야 예언자는 자신의 동포들에게 그들을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만을 믿고 그분만을 의지하라고 호소한다(40,27-31; 51,1-16). 이러한 호소를 통해 그는 바빌론 유배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시기를 보내며 실의와 좌절에 빠진 자신의 동포들에게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확신과 용기를 부르짖었다.


④ 아버지이신 하느님


제2 이사야 예언자는 그의 예언서에서 ‘사랑하다’는 동사를 두 번 사용하는데, 두 번 다 하느님이 주어로 한 번은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48,14) 다른 한 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43,4).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당신 백성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자주 그리고 다양한 상징적인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이스라엘 백성의 임금이신 하느님께서(41,21; 43,15) 등 당신의 백성을 바빌론 유배로부터 구원하시려는 지금 그분의 왕권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데, 제2 이사야 예언자는 그 모습을 목자라는 은유를 통해 더욱 뚜렷이 표현한다(40,11).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자녀로 삼아 그들에게 구원과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으로 이어진다(43,6; 45,10-11). 제2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강하다고 역설한다(49,14-15). 이스라엘을 ‘빚어 만드신’(45,11)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어머니보다 더 자애로운 ‘어머니’이시다. [2010년 5월 9일 부활 제6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서동원 다미아노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교수)] 


[예언서 여행] 제2 이사야서(이사 40-55장)의 신학 사상 (2) 


2) 주님의 종


① 주님의 종은 누구인가?


제2 이사야 예언서에는 ‘주님의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네 가지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이사 42,1-4(5-9); 49,1-7(8-13); 50,4-9(10-11); 52,13-53,12]. 지금까지 많은 성경학자들이 이 노래들에 대해 수많은 연구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제2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하고 있는 ‘주님의 종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첫째로, 거의 모든 유다교 주석가들은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LXX)과 그리스도교의 메시아적 해석에 반대하면서 ‘주님의 종’을 현존하는 또는 이상적인 이스라엘 백성, 혹은 그 가운데에서 선별된 단체로 해석한다(집단적 해석). 이 해석의 출발점은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이사 49,3)는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종으로 불리고, 자주 한 개인처럼 말해진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사 49,5-6에서 ‘주님의 종’이 이스라엘 백성을 복구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종을 이스라엘 백성 또는 그 가운데에서 선별된 단체로 해석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 둘째는 개인적 - 예언자적 해석이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주님의 종’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에서 활동한 이사야, 예레미야, 또는 제2 이사야로 보기도 하고, 장차 재림할 모세 또는 세상의 종말에 나타날 예언자로 보기도 한다.


㉢ 셋째는 개인적 - 왕적 해석이다. 비록 제2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의 종’에게 ‘임금’이라는 칭호를 한 번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주님의 종’은 예언자보다는 임금의 모습을 더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주님의 종’을 다윗의 후손으로 바빌론에 끌려간 임금 또는 그의 자손, 또는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로 불렸던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이사 45,1)로 제시하기도 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이상적인 임금으로 제시된 메시아로 이해하기도 한다.


② 주님의 종의 노래에 대한 설명


첫째 노래(42,1-4)는 주 하느님께서 친히 선택하시어 당신의 영을 불어 넣은 ‘주님의 종’을 장엄하게 소개한다. 이 노래에서 ‘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충실히 선포하고, 이 땅에 하느님의 가르침(율법)을 전하는 제2 이사야 예언자 자신에 비유되기도 한다. 주 하느님께서 민족들을 다스릴 전권을 위임하신 이 종은 세상의 다른 통치자들과는 달리 조용하고 부드럽게, 또 절망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면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다.


둘째 노래(49,1-7)는 ‘주님의 종’이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모태에서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49,1-4; 참조 예레 1,5) 주님의 구원이 세상 끝까지 미치도록, 세상의 빛이 될 사명을 받았다(49,5-6 참조)고 만민에게 선포한다. ‘이스라엘’로도 불리는 이 종(이사 9,3 :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실패해 사람들로부터 심한 멸시를 받기도 하지만, 자신을 종으로 빚어 만드신 하느님께서 그의 힘이 되어 주심을 확신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는 일꾼만이 아니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심으로써, 세상 임금들이 그를 경배하게 된다(7절).


셋째 노래(50,4-9)에서 ‘주님의 종’은 자신의 존재와 사명 수행의 역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밝힌다. 주님의 특별한 제자인 이 종은 자기 임무를 회피하지 않고 자신을 때리며 모욕하는 자들 앞에서 비켜서지도 않는다. 그는 주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해주시기에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걷는다.


가장 긴 넷째 노래(52,13-53,12)는 당신의 ‘의로운 종’에 대한 주님의 말씀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52,13-15; 53,11-12). 그 사이에(이스라엘인들이나 이민족들, 또는 둘 다 일 수도 있는) 일단의 사람들의 보고와 고백이 나온다. 이 종은 학대받고 천대받다가 마침내 처참한 종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죄가 ‘우리’의 죄임을, 그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짊어지고 갔음을 그가 자신을 ‘많은 이들’을 위한 ‘속죄제물’로 내놓은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주님은 당신 종이 자신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음을 선포하고 그를 ‘더없이 존귀하게’ 들어 높이신다.


③ 신약성경 안에서의 주님의 종의 노래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의인으로서 ‘고난받는 주님의 종’(50,4-9), 특히 속죄의 죽음을 겪는 주님의 종(52,13-53,12)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되고 실현되었다고 해석한다. 신약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된 주님의 종의 노래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사 53,12 ⇒ 루카 22,37; 이사 53,10-12 ⇒ 마르 10,45; 14,24; 이사 53,1-12 ⇒ 사도 8,26-39 등.


[2010년 6월 6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서동원 다미아노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교수)]


[성경산책 구약] 이사야서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민족들을 위한 구원을 베푸십니다 


히브리 예언서의 첫 번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사야서는 총 66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책의 핵심 부분은 이사야에게서 나왔지만, 많은 자료가 이사야의 제자들이나 다른 예언자들에 의해 첨가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사야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 이사 1,1-39,8(제1이사야), 이사 40,1-55,13(제2이사야) 그리고 이사 56,1-66,24(제3이사야).


대부분의 예언이 기원전 765년 경에 태어난 이사야 예언자에 의해 선포된 이사 1-39장은, 무엇보다 먼저 ‘시온’을 그 위에 성전이 솟아있는 곳, 하느님 현존의 장소, 그리고 하느님 구원의지의 표징으로 언급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받고 사랑받는 백성이지만, 동시에 그분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고 하느님의 징벌 아래에 놓여진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신탁을 전합니다. 그러나 이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 회개하고 정화된 ‘남은 이들’에 관한 희망을 예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당신 백성을 공정과 정의로 통치하는 임무를 다윗 왕조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제2이사야 예언자에 의해 바빌론 유배 시대 때에 선포된 말씀들인 이사 40-55장에서는, 기쁜 소식을 외치는 서문(이사 40,1-31)에서 암시하듯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행하실 ‘새로운 것들’ 위에 관심이 놓여집니다. 우상들의 공허함과 대조되는 하느님의 우주적 통치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거의 하나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특별히 예언자는 ‘야훼의 종’(42,1-4; 49,1-6; 50,4-9; 52,13-53,12)이라는 인물에 관해 언급합니다. 해당 본문들이 문맥에서 지니는 직접적인 뜻만을 먼저 고려할 때, ‘종’이라는 낱말은 차례로 이스라엘 전체, 정예의 이스라엘인들, 제2이사야 자신, 그리고 페르시아의 임금 고레스를 가리킬 수 있지만, ‘야훼의 종’의 고통은 이스라엘과 모든 인류를 위한 속량임을 예언합니다.


유배 이후의 신탁들로써, ‘예루살렘의 구원’을 포함하는 하느님의 우주적 구원에 관한 신탁이 특히 두드러지는 이사 56-66장에서 제3이사야 예언자는 예언서의 다른 부분들과는 달리 경신례의 실행, 성전 그리고 율법들, 특히 안식일 준수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서 당신 백성과 관계를 맺고자 하십니다. 유일하시며 결코 비길 수 없는 분이신 하느님의 이 거룩함은 결코 우상들과 공유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즉 그분 옆에는 다른 어떤 신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써 당신의 성실한 사랑과 항구한 정성을 드러내시면서 이스라엘과 세상 모든 민족들을 위한 구원을 베푸십니다. 구원자로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는 그분께서는 다른 한편으로 다시 모으고 격려하며 위로하십니다.


만물의 창조주로서 주님께서는 만물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부르십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그분의 보편적인 판결은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것이 됩니다.


[2014년 6월 1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서울주보 4면, 김현 신부(동작동성당)]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26) 이사야와 이사야서


두 차례에 걸친 개정 증보판 이사야서 


- 쿰란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두루마리 


아직 기원전 8세기이지만, 이제는 남왕국 유다로 갑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예언자는 이사야입니다. 이사야서는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일단 분량이 많아서, 건너뛰고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신학적으로도 매우 비중 있는 책입니다. 신약 성경에도 여러 차례 인용되고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고찰할 때에도 중요한 책이 됩니다. 마태오 복음 1장 23절에 나오는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는 말씀도 이사야서의 인용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은 좀 딱딱하더라도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이사야서를 모두 이사야가 쓴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18세기까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사야서 1-66장 전체가 이사야라는 이름의 한 예언자가 쓴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의 임금 우찌야,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1,1)라는 머리글이 글자 그대로 이 책 전체에 적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40장 이하에서는 바빌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적어도 두 명의 저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 쓴 글들이 합쳐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19세기 말에는 제1이사야(1-39장), 제2이사야(40-55장), 제3이사야를(56-66장) 나누는 이론이 형성되었습니다.


20세기 초까지 교회는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모세오경을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사야서를, 적어도 그 상당 부분을 이사야가 쓰지 않았다고 하면 책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1940년대 이후로는 적어도 세 부분을 나누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집니다. 우리의 「성경」에도 1장 첫머리에 “이사야 예언서 제1부”, 40장을 시작할 때 “이사야 예언서 제2부”, 56장 앞에는 “이사야 예언서 제3부”라고 나와 있을 만큼 이 구분은 이제 누구나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세 부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차이점은 시대적 배경입니다. 이사 1-39장은 주로 아하즈와 히즈키야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아시리아의 위협이 크게 부각되며 예언자 이사야가 직접 등장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기원전 736~734년의 시리아-에프라임 전쟁과 기원전 701년 산헤립의 침공이 중요한 사건들로 나타납니다(기원전 8세기). 그러나 40장 이후에는 이사야는 나오지 않고 아시리아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바빌론에 대해서, 유배에서 돌아오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45장 1절에서는 키루스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기까지 합니다. 배경은 유배 끝 무렵인 기원전 6세기입니다. 한편 56-66장에서는 이미 유배에서 돌아온 후의 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더 늦은 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 외에 문체와 신학에서도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 세 부분을 완전히 갈라놓고 서로 다른 세 시대에 할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1-39장 안에도 후대에 첨가된 부분들이나 작은 손질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24-27장은 매우 늦은 시기에 첨가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략 말하자면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를 염두에 두는 것은 이사야서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사 1-39장만을 다루고,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는 각각 유배기와 유배 후의 예언자로 따로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세 부분을 마치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 책들처럼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앞부분에도 후대에 삽입된 부분이 있다는 점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사야서 제2부나 제3부는 각각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사야서 첫째 부분에 40-55장이 덧붙여져서 말하자면 개정 증보판이 된 것이고, 다시 56-66장이 덧붙여져 또 하나의 개정 증보판이 된 것입니다. 개정 증보판은 책 두 권이 아니라 한 권이지요. 이사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이 계속 자라났어도 이사야서는 늘 한 권이었습니다. 뒷부분을 덧붙인 사람들은 기존의 이사야서를 자신의 시대에 맞게 다시 해석하면서 책을 새롭게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비록 각 부분의 저자는 달라도 이사야서는 지금도 한 권의 책입니다.


기원전 8세기의 이사야에 대해 몇 가지만 언급해 둡니다. 이사야서 1장 1절에서는 이사야가 “우찌야,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환시를 보았다고 되어 있으나, 6장 1절에서는 그가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연대가 좀 어지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라면 기원전 740년경입니다. 36-37장에서 기원전 701년 산헤립의 침공 당시 이사야의 활동을 전해주고 그 이후로는 그에 대한 진술이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는 대략 그 무렵까지, 약 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활동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출생지나 가문에 대해서도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그의 글에는 높은 교육 수준이 드러납니다. 임금이나 고위 관리들과 어렵지 않게 접촉하며 정치적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나, 신학적으로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을 크게 중시했던 것으로 보나 그는 예루살렘 귀족 출신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랜 기간 활동한 예언자이기에, 각 시기의 활동에 대해선 다음번에 살펴보겠습니다. 너무 큰 책이라고 미리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14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27)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 7,9)


절체절명의 순간, 표징 보여주시는 하느님 


-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작 ‘이사야’, 프레스코화, 1729년. 


이사야서 1장 1절에서는 이사야가 “우찌야,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활동했다고 말합니다. 모두 기원전 8세기 남왕국 유다의 임금들입니다. 남왕국 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보다는 아시리아와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기원전 8세기의 문제는 언제나 아시리아입니다. 이사야와 미카의 시대 역시 아시리아의 확장에서부터 출발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6장에서는 그가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 곧 기원전 740년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찌야 시대에 무슨 활동을 했는지는 말하기 어려워지지요.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면, 기원전 745년에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아시리아의 임금이 된 후 아시리아는 이미 강력한 팽창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탐 시대도 이사야의 활동은 그리 분명치 않습니다. 이사야서에 직접 등장하는 임금은 주로 아하즈와 히즈키야입니다.


좀더 이른 시기였던 아모스와 호세아 시대,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가 시리아를 괴롭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여력이 없으니 이스라엘은 잠시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명백히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세력이 더욱 커질 때, 이제는 이스라엘에게도 문 앞의 작은 적 시리아가 문제가 아닙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손을 잡고서라도 점점 거세게 다가오는 아시리아를 막아야 했습니다. 아니, 둘이 손을 잡아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남왕국 유다까지 반 아시리아 동맹에 끌어들이려 합니다.


그때 유다의 임금이 바로 아하즈였습니다. 아하즈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에게 아시리아는 아직 강 건너 불이었기에,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동맹 제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리아 임금 르친과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남왕국 유다로 쳐들어옵니다. 이것이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입니다(기원전 736-734년, 이사 7장). 그들은 아하즈를 몰아내고 다른 사람을 왕위에 앉히려 합니다. 당황한 아하즈는 고전적인 실수를 범합니다. 오히려 강대국인 아시리아에게 손을 내밀며,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막아 달라고 합니다.


이사야는 벌벌 떨고 있는 아하즈를 꾸짖습니다. 어리석은 정치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뛰어난 외교적 판단력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나라와 손을 잡고 어느 나라와 싸워야 한다고 임금을 설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7,9)는 것입니다. 다윗 왕조를 선택하시고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아하즈를 굳게 서 있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임마누엘의 예언이 나오게 됩니다(7,10-17). 하느님은 유다를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아하즈에게 손수 표징을 보여 주시는데 그 표징이 곧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라는 이름을 가진 아기의 탄생입니다.


신약 성경의 인용으로 더 유명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1장 23절에서는 70인역의 그리스어 본문을 따라 이 구절을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고 인용하지만 이사야서의 본문은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로 되어 있습니다. 긴 설명은 생략하고, 그 젊은 여인은 아하즈의 아내이고 여인이 낳을 아들은 히즈키야입니다. 아하즈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800년 후에 있을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예고가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표징이었습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침입으로 다윗 왕조가 위협을 받는 순간에, 아하즈에게 아들이 태어남으로써 하느님께서 다윗 왕조를 보호하고 계심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이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적용된 것은,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 이르러 더 충만하게 실현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마태오 복음 사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아하즈는 이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아시리아의 군사 원조를 청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팔레스티나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던 아시리아는 유다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여, 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합니다. 더 시간이 흐른 다음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임금 호세아가 아시리아를 거슬러 일어나자,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 5세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킵니다(기원전 722년).


그럼 남왕국 유다는 어떻게 될까요? 물론 당분간은 위험을 피했고 멸망도 면했습니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강대국에 맡기는 것은 고대에나 현대에나 강대국에 대한 종속과 의존을 가져옵니다. 유다는 아시리아에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조공을 바치는 한 아시리아는 굳이 유다를 멸망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공은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었고, 종교적으로도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하즈의 정치적 판단에 대해, 그리고 이사야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아시리아의 도움을 청하지 않고도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 문제는 다음 주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21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28)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사 12,6)


하느님의 선택은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하기에 


유다 임금 아하즈 시대에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공격하려 했고 아하즈는 멀리 있는 강대국인 아시리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시리아는 시리아를 멸망시켰고, 좀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도 멸망시켰습니다. 그런데 점점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아시리아가 언제까지나 남왕국 유다의 편이 되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아시리아는 언제까지 유다의 우방이 되어줄까요? 그 대답은 국제 관계의 빤한 현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강대국 아시리아가 약소국 유다를 지켜주는 것은 아시리아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한에서라는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무너진 다음 홀로 남은 남왕국 유다에서는 아하즈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히즈키야가 임금이 되었습니다. 때로 이사야에게 비난받을 일을 하기도 하지만, 히즈키야는 대체적으로 말하면 괜찮은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아시리아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꾀했고, 이와 더불어 종교적으로도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사야는 종교적인 면에서는 아시리아의 영향을 벗어나려는 히즈키야의 시도를 지지하지만, 그가 아시리아에 맞서기 위해 다른 약소국들과 손을 잡고 특히 이집트의 군사 원조에 의지하려 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정치적 동맹은 아무 소용이 없고 중요한 것은 주님을 신뢰하는 것임을 역설하면서, 아시리아를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을 벌하시는 주님의 막대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임금은 그의 말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기원전 701년에는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침공합니다. 이사야는 처음부터 아시리아에 맞서려는 히즈키야의 시도를 단죄했으며,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 아시리아의 위협은 컸습니다. 유다 왕국은 이미 대부분 지역이 황폐해졌고, 남은 것은 거의 예루살렘뿐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히즈키야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성전에 올라가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 주님의 천사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18만 5000명을 친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죽어 있었고, 산헤립은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집트의 군사 원조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를 믿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지키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셨습니다.


이사야는 왜 늘 군사 원조를 청하려는 임금들의 시도에 반대할까요? 아시리아든 이집트든, 상대가 누구인지가 결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위험에서 구하려는 현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시도들을 모두 가당찮게 여깁니다. 그 이유는, 그가 문제의 핵심은 그러한 인간적인 요소들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결정에,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믿음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호칭으로 대변됩니다. 6장에서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뵙고는 자신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서 그 하느님을 뵈었으니 “나는 이제 망했다”고 말합니다(6,5). 속된 세상과 철저히 분리된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초월성, 절대성, 인간이 범접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그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인간의 역사를 결정하고 이끌어 가십니다. 하느님께서 역사를 심판하시며, 한 나라가 일어서고 무너지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시리아가 쳐들어온다고 두려워 떨 일도 아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망하지 않겠다고 이리저리 손을 내뻗을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사야에게는 전쟁을 위한 동맹이 무의미합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절대적인 하느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주 하느님께서 언제나 이스라엘의 편에 계시다고 믿고 안일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예루살렘을 선택하시고 돌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그러한 선택은 믿음이라는 크고도 어려운 응답을 요구합니다. 홀로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경쟁자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 아닌 자기 자신을 믿는 교만, 전쟁에서 군사력에 의지하고 아시리아나 이집트를 믿으려는 임금들의 시도, 정의와 공정을 바라시는데 피 흘림과 울부짖음을 열매 맺는 이스라엘을 하느님은 심판하십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의 죄와 공존할 수 없고, 하느님의 절대성은 죄에 빠진 이스라엘과 타협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아무 노력 없이 구원을 얻겠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위험한 상황 앞에서 인간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고 원조를 구할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평온함을 유지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그 평온함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멸망까지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심판은 완전한 멸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유배 이전의 예언자인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는 흔히 심판을 선고한 예언자로 이해되어 학자들 사이에서는 구원을 알리는 예언들은 모두 이사야 자신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설명하는 일부 경향들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전체에서 그리고 더 큰 역사의 맥락에서 그가 선포한 심판은 이스라엘의 정화를 위한 과정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눈을 멀게 하는 것 역시(6,9-10) 남은 자들을 통하여 새로운 미래가 열리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지나가야 할 한 단계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멸망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새로운 시작으로 이끄십니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28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39)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8)


온 세상 역사 이끄시는 분은 주 하느님 


지도를 잠시 보십시오.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의 지도입니다(기원전 6세기). 엄청납니다. 왼쪽 구석에 유다가 보이십니까? 고목에 붙은 매미라는 표현이 생각납니다. 소위 제2이사야는 이런 시대에 살았습니다.


이사야서 앞부분을 읽을 때에 보았던 것처럼, 아모츠의 아들인 이사야라는 예언자가 살았던 것은 기원전 8세기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 40장 이후 부분은 그 이사야 예언자가 쓴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예고했던 대로 과연 유다 왕국은 멸망의 길을 갔고,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많은 이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에제키엘이 활동하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지요. 그 후 시간이 좀더 흘러, 이제 유배가 끝날 때가 다가옵니다. 이 시기에 작성된 이사야 예언서 제2부, 곧 이사 40─55장의 저자를 편의상 제2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어디까지나 편의상 부르는 명칭입니다. 실제로는 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를 시작하는 첫 구절이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입니다. 그가 선포하는 위로는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해서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이사 40,2).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지어 나라가 멸망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어도, 이제 그 징벌의 기간이 모두 끝나고 유배에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국제 정세가 바뀌었습니다. 달이 차면 기울게 마련이듯, 세력이 절정에 달했던 바빌론도 어느덧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유다 왕국을 멸망시켰던 네부카드네자르가 세상을 떠난 다음 바빌론은 내정이 불안해져서 임금이 계속 교체되었고, 마지막 임금인 나보니두스는 종교적 이유로 마르둑의 사제들과 충돌했습니다. 세력을 갖고 있던 사제들이 임금과 같은 편이 되지 않았으니 나라가 평온할 수가 없습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바빌론에 쳐들어왔을 때, 나보니두스를 반대했던 사제들은 키루스에게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해방자로 여겨 환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빌론은 생각보다 너무나 쉽게 무너졌습니다.


이제 패권을 잡은 것은 페르시아입니다. 정복 민족들을 다스리는 방식에 있어서 페르시아는 바빌론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종교적으로도 페르시아인들은 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고, 또 저 넓은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도 페르시아는 무리한 힘으로 정복 민족들을 내리누르기보다 그들에게 어느 정도 숨통을 터주면서 그들을 자신 아래 매여 있게만 했습니다.


이러한 전환기를 맞아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선포합니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선포한 첫 번째 ‘위로’였습니다. 예전에 멸망을 선포하도록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를 부르셨던 하느님은(이사 6장 참조), 이제 해방을 알리라고 다시 예언자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심판을 선고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은 구원을 알려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기에는 이미 너무 지쳐버렸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예언자 자신도 도대체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희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때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8). 바빌론도, 페르시아도 모두 덧없는 풀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쥐고 흔들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제2이사야가 크게 강조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창조입니다.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이사 40,26). 그래서 태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온 세상 구석구석에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하느님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이사 40,25). 역사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느님은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실제로 어떻게 하셨을까요? 하느님은 뜻밖에도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를 통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키루스는 이교인입니다.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키루스가 이전에 바빌론이 멸망시킨 민족들을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그들이 각각 자신들의 성전을 복구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모세처럼, 기드온처럼 이스라엘 가운데서 구원자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통해 당신 백성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설명이 창조 신앙이고 주님 외에는 다른 하느님이 없다는 철저한 유일신 사상입니다. 이전까지는, 다른 신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다른 신들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제는 크게 중시하지 않았었습니다. 제2이사야에 와서는, 다른 신들이란 없고 우상이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 부각됩니다. 바빌론이라는, 페르시아라는 강대국들을 보면서 오히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역사를 이끄시는 분이 주 하느님이시라는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제2이사야, 분량은 그리 많지 않으나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돌아와야 하겠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13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0) “나의 의로운 종은…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이사 53,11)


타인 위해 수난·죽음 당한 ‘주님의 종’은 예수 


- 카라바조 작,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606년. 빌라도가 가시관을 쓰고 자주색 망토를 걸친 예수를 가리키며 군중을 향해 ‘이 사람을 보라’(에케 호모)고 세 번 외친 장면을 묘사한 작품. 


많은 이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하느님의 손에서 고통을 받는 종.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고통받는 주님의 종을 예고하는 것이 지난주에 읽기 시작했던 이사야서 제2부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네 본문에 ‘주님의 종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42장 1-9절, 49장 1-7절, 50장 4-11절, 52장 13절─53장 12절입니다. 하지만 성경 원문에는 단락이 나누어져 있거나 제목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라는 것은 19세기 말에 학자들이 붙인 제목입니다.


이사야서 제2부는 사실 ‘종’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종’은 이스라엘을 지칭합니다(41,8.9; 44,1 등). 그런데 가끔, ‘종’이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단락들이 있습니다. 이 노래들에서 ‘종’은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개인 또는 몇몇 사람들로 보입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단락들을 골라내어 ‘주님의 종의 노래’라 불렀습니다.


이 노래들에 나오는 ‘종’은 이사야 예언서 제2부의 다른 부분들에서 ‘종’으로 일컬어지는 이스라엘과 여러 점에서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자신의 죄에 대하여 죗값을 다 치렀고(40,2) 이제는 용서를 받게 되었는데(44,22),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종은 무죄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을 겪습니다(53,4-7.11). 또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권리를 돌보지 않으신다고 탄식하는데(40,27) 이사야서 49장 4절에서 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자신의 권리를 돌보아 주심을 믿습니다.


하지만 이 종이 누구인지는 잘 밝혀지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이 모세와 같이 먼 과거의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우리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당시의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 여호야킨 등 여러 인물이 후보로 등장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이 노래들이 역사상의 어떤 인물에게서 완전히 실현된 것이 아니라고 보아 미래의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이미 수렁에 빠졌습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를 읽으면서, 종이 누구인지를 밝히려는 데에 관심을 집중하면 결국은 실패합니다. 종은 여러 의미를 동시에 갖기 때문입니다. 종이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 종의 노래에서 종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아야 길이 열립니다.


첫째 노래(42,1-9)에서는 하느님께서 종을 선택하십니다. 그 종은 하느님께서 선택한 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입니다. 둘째 노래는(49,1-7) 종의 사명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셋째 노래는(50,4-11) 이 사명을 수행하며 종이 겪게 되는 운명을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이미 박해와 거부, 고통이 나타납니다. 마지막 넷째 노래는(52,13─53,12) 종의 죽음을 주제로 합니다.


이 노래들에서 종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 해도, 중요한 것은 주님의 종의 노래들이 보여주는 고통과 구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입니다. 특히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무죄한 종의 고통은 많은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전통적으로는 악인이 벌을 받아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거꾸로 고통받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여겼었습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는 이 도식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 종이 받는 고통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죄를 짊어지는 고통입니다. 종은 무죄하면서도 하느님께서 뜻하신 이러한 고통을 순종으로 받아들입니다.


종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이 노래들을 어떤 맥락 안에서 읽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종의 노래들을 따로 떼어놓고 읽을 때, 이 노래들만 모아놓고 읽을 때, 이사야서의 앞뒤 문맥 안에서 읽을 때 그 해석은 달라집니다. 그 가운데 주님의 종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는 해석은 구약과 신약을 모두 하나로 묶어 놓고 그 안에서 이 노래들을 읽을 때에 나오는 결과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 노래들을 읽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말씀들이 온전히 실현된다고 보았고 그래서 이 노래들을 인용하여 예수님께 적용시켰던 것입니다.


이 노래의 본래 저자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생각하고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노래를 예수님께 적용시키는 것은 구약이 신약에서 완성되고 성취되었다고 보는 전망 안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입니다. 이사야서의 다른 본문들에서도 그렇듯이(예를 들어 7장의 임마누엘 예언) 이 해석은 자주 주님의 종의 노래들을 인용하는 신약 성경 자체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 노래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다고 보았으며, 이 노래들을 통하여 그 수난과 죽음을 이해했습니다. 특히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나타나듯이 종의 죽음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었고 그 모습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을 비참한 모습이었으나, 그를 바라보던 이들은 그의 죽음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한 죽음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는 고통이 순전히 부정적이고 무가치한 것이며 고통당하는 사람 자신의 죄의 결과 또는 그가 받은 저주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시각이 나타나는데, 바로 그러한 의미의 고통과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27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2)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이사 56,1)


인간의 불공정과 불의가 구원을 가로막으니 


- 이스라엘인들의 귀환을 허락한 키루스 임금 부조. 


새 집에 이사하게 되어 기대에 부풀었는데, 막상 가 보니 수도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전기도 없으며 아직 도배도 안 되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니, 집이 반쯤 무너져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심정이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귀향이 드디어 이루어졌는데 왜 상황이 이 모양인지 설명해 주는 것이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제2이사야까지 읽고 나서도 이사야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이사야는 유배 중인 이스라엘을 위로하며 징벌의 기간이 끝나고 해방이 다가왔음을 선포했었습니다(이사 40─55장). 더 시간이 흘러, 이제 이스라엘은 바빌론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있습니다. 이 시기에 완성된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이 이사야 예언서 제3부(56─66장)이고, 이 부분의 저자를 편의상 제3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구체적인 한 인물이 있었던 것은 아닐 듯합니다. 여러 명의 저자와 편집자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누군가가 유배에서 돌아온 다음 아직 성전이 재건되지 않은 때에(기원전 538~520년 사이) 그의 시대를 배경으로 이사야서의 앞부분을 다시 읽으며 이 책을 완성했던 것입니다. 


예언자의 선포와 하느님의 약속은 어디로


논리적으로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이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서도 이 책의 내용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앞부분과 연결지어 생각할 때, 그의 문제는 앞에서 특히 제2이사야가 선포한 구원이 왜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2이사야는 유배 중인 이스라엘에게, 온 세상이 주님의 구원을 보게 되리라고 알리면서 “떠나라, 떠나라, 거기에서 나와라”(이사 52,11)고 귀환을 독려했습니다. 귀향길은 이집트에서 떠나오던 그 길보다도 더 영화로우리라고 목소리를 높였었습니다.


물론, 키루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고 덕분에 이스라엘은 유배에서 돌아왔지요. 기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나는 것 같은 체험이었습니다(에제 37장 마른 뼈 환시 참조). 그러나 돌아와 보니 여기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온갖 문제들이 벌어집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사야 예언서 제3부에서는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과 팔레스티나에 남아 있던 유다인들, 그 사이에서 살고 있던 이방인들, 팔레스티나 밖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다인들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룹니다.


기대했던 구원은 왜 실현되지 않을까요? 왜 이렇게 살기가 어려울까요? 하느님은 무엇을 하시는 것일까요? 과거에 예언자들이 선포한 약속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이자 사람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합니다. 하느님은 약속만 하시고는 그 약속을 실행할 능력이 없으신 것 아닐까? 이 어려운 상황에는 하느님도 어쩔 수가 없으신 것 아닌가? 더 이상은 하느님께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제3이사야는 대답을 제시합니다. “보라, 주님의 손이 짧아 구해 내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분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았고…”(59,1-2).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56,1).


하느님의 능력이 부족하여 구원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가까이, 문 앞에까지 와 있으나 그 구원이 실현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죄가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공정’은 이사야서에서 첫 장에서부터(1,27부터) 여러 차례 강조하는 주제입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정의와 공정’을 호소합니다.


여기에는 유배 이전 예언자들이 심판과 멸망을 선포할 때와 유사한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에제키엘의 경우를 기억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께서 바빌론의 신들보다 힘이 약하시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성전을 떠나가시고, 그래서 바빌로니아 군대가 성전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잘못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잘못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있었습니다. 지금의 상황 역시, 아직도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하느님 능력의 한계 때문이 아닙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잘못 때문에, 그 잘못이 구원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정의를 실천하라고, 단식하고 기도한다고 앉아 있기만 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보살피며 너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그들에게 나누라고 외칩니다(58장).


여기에 따라오는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정의와 공정을 실천한 이들만이 구원을 누릴 수 있다면,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이들은 구원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은 구원되고 다른 민족들은 멸망하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민족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구원의 여부가 갈라지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려 보이는 예루살렘의 미래는, 세상의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하러 모여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 공현 대축일에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기억하며 읽는 독서가 이 부분에서 나옵니다. 그날에는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56,3)은 주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온 세상에서 당신 백성을 모으십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이스라엘과 더불어 하느님의 백성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러한 전망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구원은 문 앞에 와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18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12 ㅣ No.3210

[성경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이사야는? (1) 


이사야는 어떻게 예언자가 됩니까?


그의 선택은 남달랐습니다. 이사야는 주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자 망설임 없이 곧바로 받아들입니다. 이러저러한 구실이나 핑계를 대며 소명을 거부하거나 피해보려 했던 다른 ‘주님의 사람’들과 달리 처음 찾아온 기회를 그대로 수용합니다. 


다른 이들의 소명사화 몇을 꼽아본다면?


모세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분의 소명을 거부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탈출 3,11) 모세는 소명을 피하기 위하여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하였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 4,10) 그는 자신이 적격자가 아니니 다른 사람을 선택하라고 주님께 조르기도 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탈출 4,13) 


판관 기드온은?


가문에서 차지하는 자기 집안의 위치가 낮다는 점과 기드온이 집안에서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소명을 피하려 듭니다.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그에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 1,5) 그러한 주님 말씀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말재주가 없다는 구실을 들이대며 소명을 일단 거부합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이사야는 소명에 어떻게 응답합니까?


이사야 자신의 고백을 들어봅니다.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이사 6,8) 이사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파견해달라고 주님께 아룁니다. 


이사야는 소명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그는 하느님께서 죄인인 자신에게 값없이 건네주시는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어느 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시를 통하여 옥좌에 앉아계시는 하느님을 뵙고 나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말하였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이 고백에서 이사야가 죄에 물든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한 이사야가 예언자로 소명 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신의 입장을 벌써부터 꿰뚫어보고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소명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가 하느님 자비로 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정화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이사 6,7) 


정화는 무엇입니까?


정화는 하느님께서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심으로써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까마득히 인류를 초월하시는 지고의 하느님과 비천한 처지의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장애를 그분께서 친히 치워주십니다.


제아무리 힘센 자라고해도 인간은 누구나 지고의 하느님 앞에 두려움을 느끼며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그 자신이 저지른 크고 작은 죄악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공포에 떠는 인간?


첫 인간부터 그러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 3,8)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협하셔서가 아닙니다. 인간 내면의 세계, 곧 양심이 죄악에 물들었음을 자기 스스로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소명의 특징은?


하느님께서 혼자 중얼거리듯 자기 스스로에게 하시는 말씀을 이사야가 엿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이사 6,8ㄴㄷ) 바로 그때 이사야가 하느님의 직접적 부르심이라기보다는 사실상의 ‘하느님 혼잣말에’ 응답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ㄹ)


이와 같이 이사야 소명의 특징은 파견할 사람을 그분께서 직접 부르시지 않고, 간접적 방식으로 부르신다는 데 있습니다. 곧 영원하신 분께서, 곁에 있던 이사야로 하여금 그분의 뜻을 파악하도록 분위기를 마련해주신 다음에 그 자신이 예언직을 자원하도록 이끌어주신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이사야가 본 하느님 환시는?


그는 자신이 소명 받은 시기를 분명히 밝힙니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이사 6,1)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우찌야 임금이 기원전 740~739년경에 세상을 떠나므로 이사야가 소명 받은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예언자는?


자기 스스로 나서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러주시어 그분으로부터 그분이 원하시는 이들에게 파견되는 자입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인간 역사를 초월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의 시점에서 그분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일정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역사적인 존재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 시기를 분명히 밝힙니다. 


이사야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주님을 뵈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분 모습을 구체적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뵈었다.’고 명백히 고백하면서도 그분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용어는 단 한마디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현실 속에서도 아니고 환시 중에 본 것조차도 ‘주님 자신’이 아니라 그분 언저리, 곧 주변상황뿐이었던 것입니다.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계신 영원하신 분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실상 환시 속에서조차도 그분 옷자락만을 바라본 것이 그저 전부였습니다. 


이사야가 본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요?


당시 주변에서 가장 큰 건물은 물론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또한 이 성전은 그 부근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성전조차도 하느님은 물론이고 그분 옷자락을 담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크심, 그분의 초월성을 대변해주는 장면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11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성경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이사야는? (2) 


이사야의 하느님 체험은?


다음 구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사랍(천상의 존재)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이사 6,3)


이는 이사야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본 환시 중의 한 장면입니다. 우리말로 ‘거룩하다’로 번역하는 히브리말 ‘까도쉬’는 먼저 다른 존재와 구별됨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다’는 말은 그분은 인간을 비롯하여 다른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분이심을 뜻합니다. 천상의 존재들조차 그분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유는?


그분 얼굴을 직접으로 보면 죽는다는 전통에 따른 표현입니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11) “그래서 마노아는 아내에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뵈었으니 우리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오.’”(판관 13,22) 


하느님은 인간과 뒤섞일 수 없는,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라면? 그럼에도 그분과 인간의 통교가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인간과 동떨어진 채로 순수 초월적인 존재로만 머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초월적인 존재이면서도, 아니 그런 존재이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인간에게 다가오시어 우리와 함께 대화하시고 행동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요한은 훗날 영원하신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쉽게 요약해서 정의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1요한 4,8.16) 


인간은 그토록 거룩하시며 지존하신 하느님 앞에서?


크게 두 가지로 반응합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에 휩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측면을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가 환시 속에서 바라본 사랍들의 모습에서 엿보게 됩니다. 천상의 존재들인 사랍들이 한편으로는 날개 둘로 자신들의 얼굴을 가리고 날개 둘로는 발을 가리며 나머지 두 날개로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영원하신 분을 조금도 바라다 볼 수 없도록 눈 주변을 몽땅 가렸다는 뜻이고, 발을 가렸다는 것은 맨 살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도록, 곧 인간의 몸 전체를 다 가렸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사랍들의 모습을 정리하면?


하느님 면전에서 천상의 존재들조차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분을 조금도 바라보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천상의 존재들인 사랍들은 지존하신 분 주변을 돌면서 거침없이 기쁨의 찬가를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외쳤던 찬미소리는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였습니다.


한편으로 지존하신 하느님 앞에 공포에 떨 수밖에 없는 존재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께 찬송가를 읊어드리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하느님 앞에 두려워 떠는 인간은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받아 누리는 축복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한껏 부르게 됩니다. 


그분을 갑자기 만날 때 인간의 반응은?


초월적 존재인 지고의 하느님을 만날 때 인간은 자연스레 겁에 질리거나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이사야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환시 속에서 얼떨결에 지존하신 분을 뵙게 된 이사야는 부르짖습니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준비 없이 그분을 만난 인간은 그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니 그 누가 그분을 만나기에 합당한 준비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그분을 만나게 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지존하신 그분 앞으로 내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분께서 내게 가까이 다가오실수록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철저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깨달음은 한마디로 ‘나는 더러운 존재다’라는 인식으로 요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나는 - 내가 진실을 향한 존재라면 - 이사야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이사야는 무엇을 고백합니까?


그는 먼저 자신이 더러운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집단 전체에 대한 고백을 합니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이 집단 전체에 대한 고백 안에서 이사야는 그가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자신이 근본적으로 영원하신 분께 부당한 존재임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근본적으로 부당한 인간이?


티 없으신 지고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 편에는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열쇠는 오로지 거룩하신 하느님께만 있습니다. 그 열쇠가 바로 지난번에 본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영원하신 분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막혀있는 장애물, 곧 죄악을 씻어주시는 정화입니다.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6,6-7) 


영원하신 분을 뵐 자격이 없는 조금도 없었던(6,5) 인간 이사야가?


드디어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정화를 통하여(6,7) 그분의 예언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6,8) 


이사야가 선포해야 할 내용은?


예언자들이 흔히 선포하는 회개와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곧 이사야가 처음으로 부여받은 예언은 평범한 것이 아니라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었습니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6,9-10) 


도대체 이게 무슨 예언입니까?


일반적으로 예언자가 선포해야 할 내용의 정반대로 보입니다. 내용이 뒤집힌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이사야가 평생 외쳤지만 자신을 거부하는 백성의 모습을 총정리해주는 내용이라고 해석합니다. 백성이 그의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결국 벌을 받게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그리하여 이사야의 예언활동은 목덜미가 뻣뻣한 백성 때문에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을 요약해준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꾸짖으시는 ‘저 백성은’(6,9-10) 누구입니까?


다음 구절이 답을 준다고 봅니다. “그들은 비파와 수금, 손북과 피리 소리와 더불어 술을 마셔 대면서 주님의 업적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주님의 손이 이루신 일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다.”(5,12)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12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이사야와 아하즈 


긴 이사야 예언서가 모두 한 예언자의 작품입니까?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흔히 제1, 제2, 제3이사야로 나눕니다. 바빌론 유배 이전의 예언자를 제1이사야(이사 1-39장)로, 유배 기간의 예언자를 제2이사야(40-55장)로, 유배 이후의 예언자를 제3이사야(56-66장)로 구분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이사야를 셋으로 나누는지 그리고 제2, 제3 이사야는 누구인지는 차츰 보기로 합니다. 


본디 예언자 이사야(제1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742년, 아직 젊은 나이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사야는 기원전 700년경까지 40년이 넘도록 예언자로서 활동합니다. 그는 아자르야라는 별칭을 가진 우찌야 임금 통치시절에 등장합니다(참조: 이사 1,1; 2열왕 15,1-7). 그때는 유다왕국이 부유해져 번영을 누리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요와 번영은 겉으로는 행복을 가져다주었지만 큰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소수가 토지를 독차지하여 지주계급이 생겨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지주들 밑에서 억압을 당하는 일이 속출합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 제국은 무력으로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이사야는?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사회 불의를 고발하고 단죄합니다. 이사야는 정의를 거스르는 권력의 횡포를 단죄하고 하느님의 진노를 선포합니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이사 1,12-13) “너희는 정녕 잎이 시든 향엽나무처럼 되고 물이 없는 정원처럼 되리라. 강자는 삼베 조각이 되고 그의 행적은 불티가 되어 둘 다 타버리는 데도 꺼줄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1,30-31) 


비슷한 시기에 예언자 아모스는?


이사야보다 몇 년 앞서서 이미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왕국의 수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이사야처럼 하느님의 진노를 선포했습니다.


“사마리아 산에 사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어라. 힘없는 이들을 억압하고 빈곤한 이들을 짓밟으며 ‘우리가 마실 술을 가져와요.’ 하고 저희 남편들에게 말하는 여자들아!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셨다. ‘보라, 정녕 그때가 너희에게 다가온다. 사람들이 너희를 갈고리로 끌어가고 너희 가운데 마지막 한 사람마저 낚시로 채 가리라......’”(아모 4,1-3) 


당시 이스라엘왕국과 유다왕국이 처한 시대상황은?


한마디로 혼란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막강한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수도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한 아람왕국과 수도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왕국이 동맹을 맺어 연합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왕국의 임금 아하즈는 오히려 아시리아 임금에게 굴복하여 그에게 조공을 바쳐가면서 그의 보호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연합군의 유다왕국 침공은?


막강한 이스라엘 연합군이 유다왕국으로 쳐들어옵니다. “유찌야의 손자이며 요탐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하즈 시대에, 아람 임금 르친과 르말야의 아들인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지만 정복하지는 못하였다.”(이사 7,1) 그 당시 상황을 보는 유다왕국의 반응은 실로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뿐이었습니다. “아람이 에프라임에 진주하였다는 소식이 다윗 왕실에 전해지자,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 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렸다.”(이사 7,2)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이사야의 반응은?


예언자가 유다 임금 아하즈에게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들어봅니다.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이사 7,4) 이사야가 아하즈 임금에게 전하는 이 하느님 말씀은 어찌 보면 지금 유다왕국에 닥친 위급한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유다가 그들을 상대해 싸울 힘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생각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유다 임금을 비롯한 유다 백성은 앞에 펼쳐진 군사력만을 놓고서 인간적으로 판단하지만, 예언자는 눈앞에 펼쳐진 현상을 인간의 눈으로만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바라보고 그분의 안목으로 식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유다 백성의 눈에 용광로의 불처럼 엄청난 위력을 지닌 연합군이라 해도, 이사야의 눈에는 아주 미약한 존재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는 코앞에 진을 친 연합군을 보고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일 뿐이라고 하면서 유다 임금을 안심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가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인간의 뜻은 한계에 부딪친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분의 뜻에 어긋나는 인간계획은 좌절하거나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이사야는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다윗 왕실과 유다 백성에게 일깨우고자 합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 7,9ㄴ) 하느님 백성의 미래는 전적으로 그들이 누구를 믿느냐 하는 그들의 결단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유다 임금 아하즈는?


눈앞에 닥친 현실이냐 아니면 미지의 하느님이냐를 놓고 갈등을 겪습니다. 바로 그때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파견되어 그분 말씀을 전합니다.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이사 7,11) 그러나 아하즈 임금은 부드럽게 거절합니다. 하늘의 표징을 청하지 않되 주님을 시험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성경말씀을 실행하기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너희가 마싸에서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한 것처럼, 그분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신명 6,16) 


표징을 청하기보다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아하즈?


아하즈의 점잖은 거절은 겉으로는 율법에 걸맞은 신앙인의 경건성에서 나온 응답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영원하신 분께 대한 전적인 믿음이 부족한 데서 나온 응답일 뿐입니다. 그분을 따르려는 의지가 결여되어있으니 말입니다. 아하즈 임금은 오히려 자신의 길, 인간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지요.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로 맘먹었다는 표현입니다.


하느님께 표징을 청하면 그 순간부터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그분 계획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하즈는 바로 그 점이 싫었던 것입니다. 임금으로서 세상에서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었으니까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월호, 글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임마누엘’ 예언자 이사야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아하즈가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바로 그 시간에 이사야는 유다 왕실과 선택된 민족에게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을 예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사실 이사야가 선포한 이 표징은 무슨 비현실적이며 초월적 사건이 아니라 아주 일상적이고도 현실적인 현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젊은 여인은 누구?


예언자가 선포한 ‘젊은 여인’의 히브리말 뜻은 단순히 ‘임신할 만큼 성숙한 여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정녀’일 수도 있고 혼인한 여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훗날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칠십인역 그리스말 성서가 ‘동정녀’라고 번역해놓은 데서 ‘동정녀 잉태’라는 그리스도교 전통이 생겨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이 ‘동정녀 잉태’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젊은 여인과 임마누엘?


젊은 여인이 누구이든 여기서 중요한 것는 비록 아하즈 임금은 하느님을 직접 간접으로 거부하며 그분께 등을 돌린다 해도 이사야는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를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구약에 나오는 숱한 인물들 가운데 ‘임마누엘’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임마누엘 이름의 의미와 상징성을 더욱 돋보이게 해줍니다. 임마누엘은 단지 상징성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사야와 아하즈?


유다 임금 아하즈를 비롯하여 그분 백성이, 곧 인간이 그분께 등을 돌렸다고 해도 주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을 버리고 떠나지 않으신다고 이사야는 선언합니다. 결국에는 적군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주님을 저버린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될 때에도 이사야는 외칩니다. “아, 임마누엘!”(이사 8,8) 


임마누엘과 메시아사상?


제1이사야의 메시아사상은 다윗왕국 중심의 메시아사상입니다. 다윗왕조는 남부유다와 북부이스라엘의 중심이며, 모든 민족들이 모여올 세상의 중심 예루살렘에 우뚝 서게 됩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이사 2,1-4) 


다윗과 예루살렘은?


다윗(의 후손)과 예루살렘이 인류구원을 위한 세상 중심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제1이사야의 메시아사상은 제2, 제3이사야서에서도 지속적으로 그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메시아사상이 아주 잘 반영된 내용을 우리는 특히 루카복음서 안에서 발견합니다.


루카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출생지 베들레헴에서 나셨음을 강조합니다. 아울러 루카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긴 복음 선포 여정을 전합니다(루카 9,51-19,27 참조). 


루카와 예루살렘은?


이와 같이 루카는 예루살렘을 중심에 두고 복음서를 씁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이 도읍으로 정하여 오랫동안 다스리다가 하느님의 성전을 짓기로 계획한 바로 그 도성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루카복음서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실망하여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들까지도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도록 이끌어주십니다(루카 24,13-35 참조).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로 그곳 예루살렘 안에 머물며 기도하도록 당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7-49) 


루카는 두 번째 책에서?


루카는 두 번째 책 사도행전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할 성령의 힘을 받은 곳도 예루살렘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써 그분의 지상여정, 하느님 인류구원 위업이 예루살렘에서 완성되었다면, 이제 이 복음은 바로 그곳 -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끝까지 다다라야 함을 강조합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어받을 복음 선포의 시발점이 바로 예루살렘임을 강조하십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아하즈가 강대국 아시리아에 거는 기대는?


유다임금 아하즈는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칩니다. 그는 사절단을 꾸려 왕궁에 보관하고 있던 금과 은 등 보물을 아시리아 임금에게 선사하도록 합니다. 사신들은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에게 다음과 같이 아하즈의 전언을 고합니다. “저는 임금님의 종이며 아들입니다. 올라오시어, 저를 공격하고 있는 아람 임금과 이스라엘 임금의 손아귀에서 저를 구해주십시오.”(기원전 734년경) 유다 임금 아하즈의 친아시리아 정책은 한동안 계속됩니다. 


아시리아의 확장정책은?


그런 와중에 아시리아의 무력시위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확장일로를 걷고 있던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를 3년 간 포위하고 있다가 기원전 721년에 이스라엘왕국 전체를 멸망시킵니다.


아시리아를 둘러싼 군소왕국들 곧 아람왕국, 이스라엘왕국, 유다왕국의 모습은 마치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신라가 백제를 치고자 당나라와 연합[나당연합]했듯이 그런 상황을 연상하게 해줍니다.


북부 이스라엘왕국과 남부 유다왕국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 갈라진 채 서로 불목하며 제 갈 길을 갔습니다. 이스라엘왕국은 북쪽에 위치한 강대국 아시리아에게 맞서려 안간힘을 다했던 반면, 유다왕국은 오히려 아시리아에 아부하면서 그들의 세력을 끌어다 같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왕국을 공격하도록 유도했으니까요. 결국 북부 이스라엘왕국은 기원전 721년에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은?


자못 크다고 봅니다. 남부 유다왕국 아하즈가 바랐던 대로, 북부 이스라엘왕국이 멸망하게 되어 남부 유다왕국이 덕을 보았습니까? 북은 쓰러지고 남은 건실하게 견디어내게 됩니까?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북부 이스라엘왕국이 멸망한지 134여 년이 되던 기원전 587년에 신바빌론 제국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남부 유다왕국도 철저히 파괴되었음을! 남북이 힘을 합쳐도 부족할 판인데 한 민족이 갈라져 불목하다 보니 그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지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2월호, 글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이사야의 조언? 


남북으로 갈라진 다음에 다윗왕국의 정통성은?


물론 남부 유다왕국만 다윗의 대를 잇는 정통성을 주장하고 또 인정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북부왕국이 그냥 이단 왕국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북부왕국에도 엘리야나 아모스와 호세아처럼 큰 예언자들이 맹활약하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왕국을 이어 내려오는 정통성은 남부 유다왕국에 있었다고 해도, 북부 이스라엘왕국의 백성들 또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머뭅니다. 


이사야는 히즈키야 임금에게 어떻게 조언합니까?


아하즈의 대를 이어 히즈키야가 기원전 716년에 왕위를 계승합니다(참조: 2열왕 18-20). 새 임금 히즈키야 역시 이사야의 조언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아시리아에 맞서기 위해서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 민족들과 동맹을 맺으려는 임금의 정책에 반대합니다. “불행하여라,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이들! 그들은 병거의 수가 많다고 그것을 믿고 기병대가 막강하다고 그것을 믿으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지도 않고 주님을 찾지도 않는다.”(이사 31,1) 


이사야가 히즈키야 임금에게 한 예언은?


기원전 701년에 아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그때 이사야가 히즈키야에게 주님 말씀을 전합니다. “그(아시리아 임금)는 이 도성(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곳으로 활을 쏘지도 못하리라. 방패를 앞세워 접근하지도 못하고 공격축대를 쌓지도 못하리라. 자기가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이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2열왕 19,32-33) 


이사야 예언의 성취는?


이사야가 선포한 예언 곧 하느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다음 구절에서 봅니다. “그날 밤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이 모두 죽어 주검뿐이었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가서 니네베에 머물렀다.”(2열왕 19,35-36) 곧이어 산헤립은 자신의 아들들에 의해 살해당합니다.(2열왕 19,37) 


아시리아의 패배인가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아시리아 십만 대군이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물러갔는지를 구체적으로 캐내기도 힘들지만 단순히 이스라엘이 싸워 승리했다고 단언하기도 힘든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밤에 아시리아 군대를 쳤다는 뜻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옵니다. 헤로도토스는(기원전 5세기) 들쥐들이 퍼뜨린 흑사병으로 인해 삽시간에 십만 대군이 죽거나 쓰러져버렸다고 전합니다. 아무튼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주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유다임금 히즈키야가 취하는 정치적 기회주의 노선에 맞서서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주님께 충실하기를 요청합니다. “이집트인들은 인간일 뿐 하느님이 아니다. 그들의 군마는 고깃덩어리일 뿐 영이 아니다.”(31,3ㄱ) 


오늘 우리 주변의 현실은?


북쪽의 강대국 아시리아에 의존하려 하던 아하즈 임금이나, 남쪽의 강대국 이집트에 의존하려 하던 히즈키야 임금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있는 우리 대한민국도 이스라엘왕국과 유다왕국의 운명, 잇따르는 멸망을 보면서 같은 민족끼리 가능한 힘을 합쳐 가까워지려고, 또 하나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깊이 깨우치게 됩니다.


또 어디에 의지하기보다는 이웃나라들과 협력은 하되 가능한 스스로 일어서려고 끝까지 노력해야만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으며 강해진다는 교훈을 이제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갈라지면 멸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 11,17ㄴ) 


이사야가 가르쳐주는 바는?


이사야는 2700여년이 흘러간 오늘날 우리에게 주님 말씀을 전하면서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먼저 예언자의 꾸짖음을 봅니다. “회개와 안정으로 너희가 구원을 받고 평온과 신뢰 속에 너희의 힘이 있건만 너희는 싫다고 하면서….”(이사 30,15) 이어서 스스로 일어서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은 채, 우선 눈앞에 외적으로 강하게 보이는 강대국 이집트에만 의지하려는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폭로합니다.


“그들은 죄악에 죄악을 더할 뿐이다. 그들은 내 뜻을 물어보지도 않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파라오의 보호 속에 안전을 찾고 이집트의 그늘 속에 피신하려 한다.”(이사 30,1ㄷ-2) 그 결과는 빤하다고 이사야는 결론까지 내려줍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보호는 너희에게 수치가 되고 이집트의 그늘로 피신함은 치욕이 되리라.”(30,3) 


이사야가 우리에게 무엇을 당부할까요?


이사야는 정의와 공정이 물결치는 세상을 이루라고 주문합니다. 그는 하느님 뜻을 이렇게 전합니다. “보라, 임금이 정의로 통치하고 제후들이 공정으로 다스리리라.”(아서 32,1) 그렇게 하면 행복이 찾아오고 복이 솟아오른다고 말합니다. 정의가 물결치는 새나라, 꿈에도 그리던 새나라가 성립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저마다 바람 앞에 피신처, 폭우 앞에 대피처 같으며 물기 없는 곳의 시냇물, 메마른 땅의 큰 바위 같으리라. 그러면 보는 자들의 눈은 더 이상 들러붙지 않고 듣는 자들의 귀는 잘 듣게 되리라.”(32,2-3) 


우리가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나라를 예로 든다면?


스위스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80년대에 독일, 스위스에서 8~9년간 유학생활하면서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 배웠습니다. 유럽 강대국들로 빙 둘러 싸여있고, 그 한가운데 끼어있으면서 1~2차 세계대전의 격랑 속에서도 문화민족으로서 어느 나라도 부럽지 않은 ‘작은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스위스는 많은 관광객이 찾아들 뿐 아니라 여러 민족이 부러워하는 나라로 우뚝 서있습니다. 땅 크기는 남한의 반도 안 되며, 그나마 알프스를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가 많은데 ‘중립국의 틀 속에서’ 당당히 버티고 있는 스위스를 보면 배울 점이 꽤 있습니다.


땅 작고 인구도 적은 나라지만 아하즈나 히즈키야처럼 주변 어느 강대국에도 의존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우뚝 서려고 어제도 오늘도 있는 힘을 다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위스는?


인구 5만여 명 남짓한 칸톤(州) 그라우뷘덴(Kanton Grauwuenden) 지역에서는 로만어를 씁니다. 그밖에 독일어, 불어, 이탈리아어 등 크게 세 가지 나라말을 국가공용어로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서로 갈라지지 않고 마음과 뜻을 합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위스는 독일어권 일부지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갖가지 지방사투리를 쓰는 지역들이 하나 둘 합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불어권에서 또 이탈리아어 권에서도 합세해 들어와서 지금은 25개 주들(Kantonen)이 하나같이 그들 나름의 특성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주며 배려해가면서 오늘의 스위스를 이루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3월호, 글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이사야 신학? 


스위스의 여러 민족들은?


그들은 라틴계 게르만계 할 것 없이 서로 생각이나 생활습성뿐 아니라 언어까지 다르면서도 서로를 이해해주려는 마음, 받아들여주고 배려하는 마음, 사랑과 관용의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그들 문화와 전통의 바탕에는 겉으로는 쉽게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신앙이 깔려있 습니다. 그러한 영성을 바탕으로 오늘의 스위스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이사야의 선포대로 인간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의지하는 법을 깨우쳤습니다. 


제1이사야의 신학을 몇 가지로 요약한다면?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의 신학을 간단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로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이사야는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셋째로 인간의 나약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나약성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강자에게 의존하려는 성향과 다른 하나는 자신을 드러내려거나 과대평가하려는 교만으로의 성향입니다. 


이사야 신학의 첫째 특징은?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로 묘사합니다. 이사야는 부르심 받을 때 그분을 ‘거룩하신 분’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섰을 때 얼떨결에 스랍들 곧 천상존재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외치는 환호소리를 듣게 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이사 6,3ㄴ) 이사야는 훗날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질책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지도 않고 주님을 찾지도 않는다.”(이사 31,1ㄷ)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보살피시는 분을 이르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선택된 민족으로서 다른 민족에 앞서 긴 역사적 과정 안에서 직접적, 간접적으로 하느님 자비와 구원을 체험해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곧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나 다름없이 자신을 선택하신 하느님과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 간의 고유한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이사야가 체험한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을 떠나서 존재하는 그런 거룩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 대한 그분의 자비로운 모습을 계시해주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시는 분으로 이해하며 그래서 이스라엘 또한 그분을 향해 정의롭게 살기를 요청하시는 분으로 체험합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정의는?


그 정의가 곧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일컫는 사법적 정의 개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정의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아가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펼쳐지는 개념입니다. 곧 외적 행위뿐 아니라 행위가 시작되는 마음 자세까지 포함하여 거기서 나오는 모든 행위의 과정과 그 결과를 포괄적으로 이르는 넓은 개념입니다. 


한 구절을 예로 든다면?


“주님께서는 정의를 실천하시고 억눌린 이들 모두에게 공정을 베푸신다.”(시편 103,6) 이 구절에서 ‘주님께서 이루시는 정의’는 곧 그분의 구원행위 일체를 다 일컫는 개념입니다. 이 시편의 하느님은 억눌린 이들과 맺으신 계약을 충실히 실현하심으로써 그들에게 구원을 선사하시는 분으로 우뚝 서 계십니다. 


이사야의 예언활동은?


그의 예언활동 목표는 자신이 체험한 ‘거룩하신 분’께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버렸다고 예언자는 확신했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아주 빗나갔으며 삐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지금 또 앞으로 무엇을 바라시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슨 계획을 전개하실 지를 깨우쳐주고자 합니다. 


이사야 신학의 두 번째 특징은?


하느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이사야는 선민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그분과의 관계가 어긋났음을 고발합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7,9ㄴ)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한마디로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 백성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단지 외적인 관계에서 끝나지 않고 마치 부모와 자식처럼 이 둘은 서로 끊어서도 안 되며 끊을 수도 없는 근본적인 실존의 관계입니다. 이사야는 배반한 이스라엘을 두고 한탄하시는 주님 모습을 전합니다. “내가 아들들을 기르고 키웠더니 그들은 도리어 나를 거역하였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1,2ㄴ-3)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이 무엇인지 다음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들은 거역하는 백성, 거짓된 자식들이며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려 하지 않는 자식들이다.”(30,9) 


이스라엘의 순종은?


마지못해서 하는 억지순종이 아니라 맘속으로부터 우러나와서 하는 능동적 순종, 즐겨 귀 기울임, ‘적극적 주님말씀경청’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분 말씀에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예전에 그들[그릇된 사제들과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곳은 안식처이니 고달픈 이들을 편히 쉬게 하여라. 이곳은 쉼터이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28,12) 


이사야의 경고?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태도와 그런 태도의 결과는 예언자가 다음에서 답을 줍니다. “백성들은 서로가 서로를, 저마다 제 이웃을 괴롭히고 젊은이가 노인에게, 천민이 귀인에게 대들리라.”(3,5) 2700여 년 전에 이사야가 앞을 내다보고 선포한 말씀이 오늘 우리 현실을 깨우쳐주고 있지 않습니까? “불행하여라,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 군마에 의지하는 자들! 그들은 병거의 수가 많다고 그것을 믿고 기병대가 막강하다고 그것을 믿으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지도 않고 주님을 찾지도 않는다.”(31,1) 벌써 그 옛날 이사야는 외적인 힘에만 매달리는 오늘 우리 현실을 내다보았습니다. 아니면 그 시절에도 오늘도 꼭 같은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일까요? 


이사야 신학의 세 번째 특징은?


인간의 교만을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이 눈에 보이는 것,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하느님을 뒷전으로 밀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교만의 죄가 인간 내면에서 고개를 들게 됩니다. 이사야는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까지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고발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시온의 딸들이 교만을 부리고 목을 빼고 걸어 다니면서 호리는 눈짓을 하고 살랑살랑 걸으며 발찌를 잘랑거린다.’”(3,16)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4월호, 글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성경 속 기도] (9) 이사야의 기도


지도자의 혜안, 하느님께 의지했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과 고난의 위기를 맞게 되면 그때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보내 당신의 뜻을 알리셨다. 이스라엘의 많은 예언자 중에서도 이사야는 뛰어난 인물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역사의 번영기인 기원전 8세기에 태어나 민족의 멸망을 예견하고 경고한 예언자였다. 이사야는 특히 하느님의 위엄을 보았고, 인간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이스라엘 종교가 궁극에는 파멸될 것을 내다보았지만 결국에는 메시아의 새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이다”(이사 9,6).


이사야는 하느님과 인간과 세계와 역사와 종말을 두루 통찰한 구약의 신학자이며 신약 종교의 초석을 놓은 구약 종교의 완성자, 개혁자라는 찬사를 받는 인물이다. 이사야는 유다왕 우찌야가 죽던 해(이사 6,1)인 기원전 739년쯤 예언을 시작했으며,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해올 때까지 활동하였다.


이사야가 활동한 당시의 국제 정세는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양대 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시대였다. 열강의 틈바구니에 낀 이스라엘은 어느 편이든 외국의 세력에 의존하려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는 이러한 위정자들의 정치적 태도를 반대하고 하느님만을 믿을 것을 강조했다.


이사야는 기도 중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고 그의 삶이 바뀌게 된다.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의 결과로 소명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표현한 대로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고대한다. 그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인다(이사 6,2-11). 이처럼 하느님께서 먼저 소명을 준비하시고 부르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나는 말하였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이사야는 예언자 중에서도 넓고 멀리 보는 예언자였고 강한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는 험한 시대에 활동했다. 당시 일반 백성도 쉽게 하느님을 배반하고 타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는 길을 제시하고 가르쳤다.


그는 비판할 때는 통렬했지만 격려할 때는 따뜻했다. 그는 특히 넓은 개방성을 지녔다. 개방성은 특히 지도자에게는 외곬으로 빠지지 않는 형평성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 되는데 그 힘의 비결은 이사야가 항상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 즉, 기도에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이사야의 모든 삶을 주도하신 분은 하느님의 성령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늘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를 끈을 놓치지 않고 살아간 예언자였다. 이사야는 늘 하느님과 대화인 기도를 통해 힘을 얻었고 지혜와 용기를 얻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갔다. 때로는 하느님 구원 역사에 감사 기도를 드렸고 하느님 찬송과 찬미를 잊지 않았다. 오늘날의 지도자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10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제2이사야의 신학? 


예언자가 말하는 인간의 공통된 성향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다 교만에 물들어있음을 이사야는 고발합니다. “모든 백성이, 에프라임과 사마리아의 주민들이 이를 알고서도 오만하고 자만한 마음으로 말하였다. ‘토담이 허물어졌으니 네모 돌로 쌓자. 돌무화과나무가 부서졌으니 향백나무로 대신하자.’”(9,8-9) “에프라임 주정꾼들의 거만한 화관은 발에 짓밟히리라.”(28,3) “우리는 너무나 도도한 모압의 교만에 대하여 들었다. 그의 거만과 교만과 방자함 그의 허풍에 대하여 들었다.”(16,6) 


물질에만 의지하는 인간, 그 교만의 결과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에만 신뢰하는 인간은 부모님을 통하여 자신을 낳아주신 하느님을 도무지 몰라보게 됩니다. 아니 눈에 얼핏 띠지 않는 하느님은커녕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까지도 애써 외면하는 죄를 별 거리낌조차 없이 범하게 됩니다.


자신의 뿌리인 부모님과 그 은혜도 모르고, 온 누리와 우리 모든 조상을 낳아주신 영원하신 분도 몰라보는 인간은 결국 자신의 뿌리를 캐려하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한 인간의 다음 모습은?


자기 자신의 본질까지도 알아보려 하지 않거나 모르게 되지 않겠습니까? 웬만한 강아지나 고양이나 소들도 제 주인을 알아보는 법인데 조상을 외면하는 인간은 교만의 늪에 빠져 산짐승이나 들짐승만도 못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사야는 하느님을 거역한 그런 이스라엘 - 인간을 두고 읊었습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1,3)


나아가 이사야는 그런 인간은 나락으로 떨어지리라고 선언합니다. “인간이 비천해지고 사람이 낮아지리라. 거만한 자들의 눈도 낮아지리라.”(5,15) 


하느님을 외면한 인간은?


그는 하느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 이는 자연스레 이웃과 피조물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관심은 이웃과 피조물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집니다(프란치스코 교황의 제49차 세계 평화의 날<2016.01.01> 담화 3항). 


그러나 겸손한 자는? 그의 기도는?


그는 살게 되고 그의 기도는 반드시 답을 얻습니다. 그 예를 히즈키야의 기도와 이사야의 중재기도에서 봅니다(이사 38,1-9; 2열왕 20,1-11). 중병에 걸려 죽음을 직감한 히즈키야 임금이 겸손한 자세로 슬피 통곡하며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예언자를 파견하십니다. “가서 히즈키야에게 말하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내고 이 도성을 보호해주겠다…”(이사 38,5-6)


죽음의 문턱에서 통곡하는 가운데 있는 힘을 다해 주님께 겸손하게 기도드린 덕분에 히즈키야 임금은 죽을병에서 치유 받았을 뿐 아니라, 15년을 더 살게 된다는 표징으로 선왕 아하즈의 해시계가 열 칸씩이나 뒤로 돌아가는 기적까지 맛보게 되지 않습니까? 


제2이사야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이사 40,1-2) 사실 제2이사야서 이끎말(이사 40,1-11)은 새 시대가 동터오고 있음을 알립니다. 


제2이사야서 이끎말을 들여다보면?


맹위를 떨치던 거대한 제국이 멸망하고 새로운 제국이 떠오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변화무쌍하던 당시 국제정세를 환히 펼쳐 보여주는 듯합니다. 북쪽에서는 아시리아 제국이 서산에 기우는가 하면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폭정을 일삼던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기운을 잃어갑니다. 반면 저 멀리 페르시아가 급부상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제국(오늘 날의 이란 땅)의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을 정복하여 그곳을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키루스는 다음과 같이 칙령을 반포합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 36,23)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아시리아나 바빌론 제국의 지배자들은 지금껏 정복한 나라 백성을 유배시키는 등 폭정을 일삼았지만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정복한 나라 주민들이 평화로이 살도록 도왔으며 그들 고유의 종교까지도 인정해주었습니다. 정복당한 소수민족들은 지금까지 맛보지 못하던 ‘획기적이고도 새로운 식민정책’을 맛보며 나름대로 새 시대를 꿈꾸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제2이사야의 신학은?


유다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던 예루살렘 성전을 잃고 나서 멀리 바빌론으로 떠나와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가 바로 ‘제2이사야’입니다.


하느님은 그로 하여금 바빌론 탈출이 이집트 탈출보다도 더욱 따뜻하게 펼쳐질 것이라는 ‘복음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1,11) 


제2이사야의 창조신학은?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만물의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반방에 선포합니다. 유배지 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제2이사야는 민족적 차원을 뛰어넘어 우주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나는 주님, 모든 것을 만든 이다. 나는 혼자서 하늘을 펼치고 나 홀로 땅을 넓혔다.”(이사 44,24) 그 어느 누구의 도움이나 재료도 없이 홀로 세상만물을 지어내신 분이기에 그분은 단 한분이십니다. 


제2이사야가 말하는 천지창조는?


고대 근동 설화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잡신들이 벌이는 싸움이나 투쟁의 결과로 얻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 홀로 당신의 자유의지로, 곧 말씀으로 이루신 업적이라고 선포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제2이사야의 창조신학에서 하느님은?


홀로 시작하시고 끝맺으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이사 44,6; 묵시 1,8.17 참조)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5월호, 글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성경 속에서 걸어나오는 사람] 제2이사야의 메시지? 


제2이사야는?


바빌론 유배지에 끌려와서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ㄷㄹ) 이스라엘 백성이 “너는 나의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들었을 때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누구의 위로보다도 큰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 말씀을 접하는 신앙인들에게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것이다(You are mine)”가 뜻하는 바는?


다음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43,2)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느님 친히 당신 백성을 곁에서 보살펴주신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다.”(43,3ㄱ) 


사실 이스라엘은?


한편으로 하느님 눈에 한낱 벌레와 같은 존재라고 예언자는 선언합니다.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그러나 그 앞에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와 뒤따라 나오는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는 표현이 눈길을 끕니다. 이어서 이사야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다시금 밝혀줍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41,14)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와 함께 눈 내리는 밤에 첩첩산중을 걸어 집으로 향하던 밤이 기억납니다. 캄캄한 어둠 속 눈길을 대충 더듬어 가는 밤이라 오싹오싹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왔지만 아버지가 나를 지켜주신다는 믿음 때문에 나름 든든했었습니다. 먼 타향에 와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 고생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이사야가 선포하는 하느님 말씀으로 큰 위로를 받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젖먹이?


제2이사야는 하느님 사랑을,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니와 젖먹이의 관계’에 견주어 설명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49,15) 이스라엘은 벌레와 같은 인간이라서 창조주 하느님께 사실 아무 것도 요청할 권리가 없지만 무한한 사랑을 지니신 그분께서는 비천한 인간에게 더없이 큰 자비를 베푸신다고 제2이사야는 선언합니다. 


우리 모두를 초대하는 제2이사야?


제2이사야는 바빌론 유배지에서 희망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이사 40,1-2)


제2이사야는 이제 자신의 예언을 마무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초대합니다.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제2이사야가 선포하는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레지오 단원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사 55,1) 그런데 이 구절을 자세히 읽다보면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돈 없이 값을 치르지 않고서 ‘사 먹으라’는 말씀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좋은 음식물을 ‘값을 치르지 않고서’ 나아가 ‘그것을 사 먹고 마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에 힘입어 성서 강의나 피정 강론 때, 가끔 자랑을 합니다. 제가 다녀본 나라들이 아주 많다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터키, 그리스, 유럽 여러 나라들, 몽골, 인도, 파푸아 뉴기니, 호주, 미국 등등 수많은 나라들을 고루 다 다녀 보았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것도 거의 경비를 들이지 않고 주로 공짜 여행을 했다고 확실하게 주장합니다. 그럴 듯하게 뽐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듣는 분들의 반응은 삽시간에 확 바뀝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제게 묻습니다. ‘그렇게 많은 나라들을 어떻게 돈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여행할 수 있을까?’ 이때 저는 제안합니다. 방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청중은 합창을 합니다. “예~ .” 그것에 그치지 않고 저는 한 수 더 뜹니다. 스위스 중앙 알프스 지역에 제 땅이 몇 곳 있다고 귀띔해줍니다.


사실 우리는 그 모든 나라들을 비행기나 배편으로가 아니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비행기나 배편이 아니라 지도를 보면서 지도 속에서 여러 나라들을 돌아봅니다. 실제로 갈릴래아, 예루살렘, 요르단 강, 사해, 소돔, 네겝, 헤르몬 산 등등, 곳곳을 꼭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가지 않더라도 지도책 안에서 수도 없이 다녀오곤 합니다.


그와 같은 답을 저는 제2이사야의 교훈에서 찾았습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사 55,1) 이사야의 깊은 영성 안에서 우리는 돈 없이 값없이 맛있는 음식을 ‘사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한없는 영적 목마름을 달래고 배고픔을 채우려면 먼저 주님 초대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 응답은 욕심과 허영을 버리고 그분의 초대에 장애가 되는 모든 미움과 교만의 옷을 벗어 버림으로써 시작됩니다. 가식과 죄악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회개가 돈 없이 값없이 그분이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하여 갖가지 맛난 것을 즐기며 축제에 참여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름답고 신비로운 알프스가 꼭 내 이름으로 등록된 내 재산이 아니라고 해도, 시골이나 도시에 내 이름으로 된 땅이 없다고 해도 내가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축복해주신 ‘우리들의 기름진 땅이요 비옥한 주님 자비의 옥토’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크나큰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세상 곳곳을 고루 다녀보지 못한다 해도 내 마음으로, 또 지도나 화면을 통해서 내 머릿속에서 내 생각으로 이곳저곳을 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절약한 것으로써 곳곳에서 내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주님 자비의 손길이 되어줄 때 우리는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목마름과 배고픔을 달래게 됩니다. 


만나 뵐 수 있을 때?


제2이사야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줍니다.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이사 55,6) 우리 생각을 조금만 바꿀 수 있다면! 내 마음을 조금만 비울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천국을 손톱만큼이라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를, 창조주의 위대하신 생명력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을 때는?


바로 지금이요 오늘입니다. 오늘이 바로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분께 돌아서서 조용히 내 죄를 고백할 때입니다. 제2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6월호, 글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제3이사야는? 


제3이사야서(이사 56-66장)의 저자는 누구일까?


이와 같은 물음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몇 가지 학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제2이사야 예언자의 제자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이사 56-66장을 쓴 제3이사야는 이사 40-55장을 쓴 제2이사야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제3이사야 시대의 유다왕국은?


많은 유다 백성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년)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옛 유다왕국의 모습은 참담했습니다. 50여 년간 버려져있던 성읍들과 도시들은 문자 그대로 폐허가 된 채 버려져 있었습니다. 기원전 587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수도 예루살렘 도심은 물론 예루살렘 성전까지 파괴됩니다. 민족의 정치 지도층은 물론 종교적 몰락으로 인해 유다인들은 이제 선민으로서의 정체성까지 의심하게 됩니다. 유다민족은 한마디로 위기에 빠집니다. 


유다민족이 맞은 위기는?


민족 지도자들이 다 바빌론으로 끌려가버려 유배가 끝난 다음에도 유다왕국을 이끌어나갈 지도층이 구조적으로 아예 없어진 것입니다. 곧 종교, 정치, 사회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갈 중심축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에 민족이나 국가의 틀이 흔들리게 되었으니 한 나라에 그보다 더 큰 위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작은 마을부터 도시에 이르기까지 유다왕국을 이끌 국가 지도자들의 부재 곧, 국가 공적 권력과 기관뿐 아니라 유다교를 이끌고 나갈 정신적, 내적, 영적 지도자까지 찾기 힘들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 참상을 전해주는 구절은?


다음에서 우리는 눈으로 보듯 당시 폐허가 된 유다왕국의 단면을 보게 됩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습니다. 시온은 광야가 되고 예루살렘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저희 조상들이 당신을 찬양하던 곳, 저희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집은 불에 타 버렸고 저희에게 보배로운 것들은 모두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64,9-10) 


유다인들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합니까?


우리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처럼 위기는 아직 끝이 아닙니다. 어둠이 가장 짙은 한밤중은 쉬지 않고 저 멀리서부터 밝아오는 새아침으로 향합니다. 바빌론 유배지에는 벌써부터 주님 구원의 손길을 선포하면서 끊임없이 새 희망을 안겨주었던 제2이사야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예고대로, 시간을 흘러 역사는 바뀌게 됩니다. 


역사는?


흘러가면서 바뀝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고 이제 새로운 패자 페르시아 제국 키루스가 중동의 패권을 차지합니다. 덕분에 유다는 해방 곧 새아침을 맞이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지(기원전 587년) 꼭 50년 만인 기원전 538년에 키루스 칙령으로 유다인들이 유배지에서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귀환 장면을 담은 구절은?


다음에서 생생하게 보게 됩니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재무상 미트르닷을 시켜 그것들을 꺼내 오게 한 다음, 낱낱이 세어 유다 제후 세스바차르에게 넘겨주도록 하였다. 그 품목은 이러하다. 금 접시가 서른 개, 은 접시가 천 개, 칼이 스물아홉 자루, 금 대접이 서른 개, 이급 은 대접이 사백열 개, 그밖에 다른 기물이 천 개였다. 그리하여 금 기물과 은 기물은 모두 오천사백 개였다. 세스바차르는 유배자들을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오면서, 이 기물들을 모두 가지고 왔다.”(에즈 1,8-11)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 집의 금은 기물들을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꺼내어 바빌론 신전으로 가져갔는데, 키루스 임금님께서 그것들을 바빌론 신전에서 꺼내시고, 지방관으로 임명하신 세스바차르라는 이에게 넘겨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세스바차르에게, 그 기물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또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다시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에즈 5,14-15) 이어지는 구절은 그렇게 유리한 여건이지만 아쉽게도 아직 성전공사가 깔끔히 진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엿보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이 세스바차르가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 집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어왔지만 아직 마치지 못하였습니다.”(에즈 5,16) 


유다인들의 움직임은?


많은 유다 백성이 성전을 재건하려고 시도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지어 바칠 수 있는 집이 어디 있느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66,1) 그럼에도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진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너의 성벽을 쌓고 그들의 임금들이 너에게 시중들리니…… .”(60,10) 


제3이사야의 활동 시기는?


기원전 520년 전까지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지부지 끌어오던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 공사가 기원전 520년에 이르러 제대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제3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 이후에 예루살렘 부근에서 예루살렘 성전 재건공사가 활발히 진행될 무렵까지 활동했다고 봅니다. 


유배에서 귀향한 유다인들은?


“온 회중의 수는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었다. 이 밖에도 그들의 남녀종이…… 이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에 다다랐을 때,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 가운데 몇 사람이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세우는 데에 쓸 자원 예물을 바쳤다. 저마다 힘닿는 대로 공사 금고에 바치니, 금화가 육만 천 드라크마, 은화가 오천 미나, 사제 예복이 백 벌이나 되었다.”(에즈 2,64-69) 에즈라는 이어서 당시 상황을 전해줍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백성 일부는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았다. 성가대와 문지기들과 성전 막일꾼들은 저마다 제 성읍에,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도 제 성읍에 자리를 잡았다.”(에즈 2,70) 


바빌론 유배 후 유다인들의 삶은?


크게 네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꼽을 이들은 바빌론으로 유배가지 않고 유다 땅에 그대로 남아있던 이들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야훼신앙을 견고히 지키며 살아온 정통 유다인들도 있었지만 많은 유다인들이 우상숭배와 혼합종교 형태의 잡신공경에 빠져있었습니다. 


유다 땅에 사는 두 번째 부류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입니다. 그들은 유다, 시므온, 벤야민 지파 출신 유다인들로서 야훼 하느님 신앙에 열정을 지니고 귀향했지만 폐허가 된 본국의 모습 속에서 여러 내외적 어려움에 부딪치게 됩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본국에 그대로 남아있던 유다인들이 잡신공경 등에 빠져있는 모습, 곧 그들의 배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국에 남아있던 유다인들은 유배지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의 종교적 열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속적으로 그냥 쉽게 살자는 뜻이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7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