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곧 하느님 나라에 이어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호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부딪치는 다양한 문제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획을 연재합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그 뒤에 그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마르 12,13∼17)


이 성경 구절을 접할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예수님의 영민하심, 달변가 예수님, 간악한 인간 군상들, 식민지 상황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다양한 예수님의 모습과 그분을 둘러싼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머릿속으로 그려지겠지만 저는 어느 하나로 예수님의 모습을 단정 짓기보다는 현재도 이어지는 인간의 역사, 다툼, 갈등, 번민 속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다섯 절밖에 되지 않는 짤막한 내용이지만 세상은 물론 하느님 나라와 관련된 많은 묵상거리들이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볍게 얼핏 생각해 보아도 황제와 하느님으로 상징되는 세속 권력과 하느님의 신앙과 그 행위와 규범에 대한 생각이 교차되고, 오늘날에도 쉴게 볼 수 있는 삶의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바리사이의 태도, 헤로데 당원 같은 협잡과 부패에 물들고 기회주의자들의 잔꾀 넘치는 불의한 모습도 엿볼 수 있으며,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는 데나리온이라는 화폐 개념도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때로부터 200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이 성경 구절이 낯설게 들리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이 성경의 내용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양한 삶의 양상들을 함축하면서 삶의 본질적인 측면을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위의 말씀을 무 자르듯 뚝 잘라서 예수님이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들려주시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 주님이 이 말씀을 통해 들려주시는 뜻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이나 ‘황제의 것’에 시선이 박혀버린 우리의 마음과 시각을 돌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그 의미는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합니다.


당신의 모습을 따라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진 인간 자체가 바로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 있으니,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통해 얻은 결실과 소득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계신 대목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바라보는 눈길을 조금만 차원을 높여 주님께 돌리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고 방식과 행위도 바뀌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렇듯 인간을 향하고 계신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배우는 것을 신학이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어(헬라어) 테오스(theos, 신)에 로고스(logos, 학문 . 말)가 합쳐진 단어인 신학은 말 그대로 ‘하느님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이라는 언어 자체가 주는 부담감이나 중압감에서 벗어나, 이 학문은 그렇게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2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2) 하느님의 뜻과 정신에 맞는 경제활동


우리는 신학이 하느님에 대한 학문이고, 신학을 배운다는 것은 어렵기만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 기쁘게 달려가고,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세상에 둘도 없은 멋진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안에서 신학의 의미를 살피고 찾아내 하느님을 조금씩 더 깊이 배우고 알아가는 여정에 나설 것입니다. 신학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내어 모시는 학문이라면 지레 겁먹을 필요 없겠죠.


우리는 이 여정에서 특별히 경제라는 영역을 먼저 들여다볼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다양한 분야 가운데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 세상의 많은 문제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경제를 둘러싼 문제는 생각보다 광범위하여 의식주(衣食住)와 함께 문화, 역사, 오락, 취미 등 대부분의 인간의 행위가 경제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경제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이기에 신학과도 완전히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경제 문제는 실천적인 인간 삶을 다루는 윤리신학과도 밀접하고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경제 문제가 윤리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물질, 자연, 환경이 인간생활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얘기한 ‘데나리온’으로 표현되는 돈이나 금력(金力), 나아가 세속의 권력 또한 인간으로부터 비롯되고 인간을 위해 생겨난 것이기에 ‘황제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 일상에서 부딪히는 선택의 기로에서 하느님의 뜻과 정신을 바르게 선택하는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안목과 행위는 상식적인 인간과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경제란, 나아가 경제 윤리란 무엇일까요? 라틴어로 오에코노미아(Oeconomia?경제?經濟)는 사람이 재화를 생산하고 이를 통해 욕구를 충족시키는 활동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즉,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는 달리 양이 한정되어 있어 매매나 점유의 대상이 되는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해서 소비에 이르는 모든 인간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 28)는 성경의 첫 장을 읽을 때, 이 말씀에서 땅(자연자1원)이 바로 인간의 지배(노동)를 통해서 인간 자신에게 유익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자원은 지상과 지하, 해양과 우주 등에 여러 모습으로 무한하게 펼쳐져 있지만, 매우 제한된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자원들 또한 지극히 단순한 형태일지라도 자연과학의 연구와 개발, 지혜와 노동을 통해서 인간에게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머릿속으로 과거의 지구와 우주의 역사를 떠올려 보십시오. 수십 억 년에 걸쳐 이 지구에서 살다간 무수한 생물들 가운데 실제 지구에 지배력을 행사한 존재가 있었던가요. 인류가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생존해온 시간이 350만 년이라고 할 때 1억5000만 년이라는 엄청난 기간 동안 지구상에 존재했던 공룡이 과연 지구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롯이 인간만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만이 자신의 노동과 얼이 담긴 경제적인 생산 활동을 통해 이 세상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고 땅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노동, 정신, 영성을 바탕으로 한 경제 활동만이 참다운 의미에서‘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자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5월 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3) 경제활동, 하느님 창조사업 동참하는 행위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노동을 포함한 경제활동이 한 인간과 가정, 사회와 인류에게 선익을 주는 일일뿐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거룩한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경제활동에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선악(善惡)과 진위(眞僞)를 식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필요하게 됩니다. 특히 경제활동을 둘러싼 문제는 경제행위를 주도하는 이들의 생존과 직결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엄격한 척도와 규범, 규율이 요청됩니다. 경제 영역에서 요구되는 이러한 윤리적 척도를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경제윤리입니다. 따라서 경제윤리는 경제 생활과 관련된 인간의 존재 양식 및 행동 방식을 규정하는 윤리적 태도 내지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규범을 말합니다.


아울러 경제윤리는 경제 생활 전반에 걸친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의 바른 경제적 태도와 방향, 실천사항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경제윤리는 경제의 주체가 되는 생산자, 소비자, 지역 사회와 국가, 국가들이 지켜야 할 윤리적 규범을 밝히고, 다양한 경제적 관계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사회 신학적 판단 기준과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따라 연구하며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 경제적 가르침과 윤리는 이러한 일반적 경제윤리를 인도해야 할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윤리신학에서 보는 경제윤리는 그 궁극적 출발점이 하느님의 계시, 성경 안에 나타난 체험과 실천, 교부들의 가르침, 교회의 가르침 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윤리는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숭고한 정신과 의지에 비추어 경제의 본질, 의미, 목적 등을 살피면서 이와 관련된 여러 요소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결국 경제윤리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정의, 평등, 분배 행위가 올바르게 이루어지는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경제 행위의 모형과 전형을 찾는 일을 그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다양한 경제 현상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문제들을 담고 있는 문헌이 바로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노동헌장(Rerum Novarum, 1891)>입니다. 레오 13세 교황은 자본주의로 인하여 발생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레오 13세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신앙에 따라, 모든 이가 물질적 자원과 부를 적절하게 분배하고 사용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시민사회는 경제 성장에 힘쓰면서 부(富)의 적절한 분배를 위해 노력하고, 약자와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며, 노동자에게는 정당한 임금을 지불해야 할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미성년자를 노동현장으로 내몰아 착취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노동자들의 결사와 단결권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 후 교황 비오 11세는 <노동 헌장> 반포 40주년이 되는 해인 1931년 회칙 <사십주년(Quadragesimo Anno)>을 반포하여 경제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원칙을 다시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오 11세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자체에 동의하면서도, 극단적 개인주의, 통제 불능의 경제적 지배, 생산자인 기업의 횡포, 대중과 서민을 도탄에 빠뜨리는 절대적 자유 경쟁 등은 그리스도교적 사상과 인간관, 세계관에 반대된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보는 사회 질서는 공동체의 정의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경제 질서의 쇄신과 바른 윤리질서에 따라서 모든 개인과 가정, 사회의 선익을 위해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야만 합니다. 이후로도 여러 교황들께서는 그 시대의 변화에 상응하는 경제적 가르침을 펴오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5월 2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4) 교회 눈으로 바라본 가난의 참모습


육체를 지닌 인간은 물질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은 소위‘다 걸기’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무한 경쟁 시대, 입신출세 지상주의가 그 결과입니다. 도대체 가난의 참모습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 사회는‘가난’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가난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가난의 척도나 범주는 다양하고, 한 인간이나 집단의 사상과 인격적, 지적, 영적 시각에 따라 가난을 보는 입장과 해석은 매우 다릅니다. 상대적 빈곤이라는 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난을 보는 잣대가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위대한 성현들께서 실천한 가난은 인류에게 불변하는 만고의 가르침입니다.


언젠가 시사주간지에 우울한 기사 하나가 실렸습니다. ‘집이 가난하면 꿈도 가난하다’는 기사였습니다. 한 국회의원실의 보고서를 기초로 한 이 기사에서는 이른바 강남 3구라고 불리는 서울 강남, 서초, 송파구와 관악, 구로, 금천구 등 강북지역 초중고 아이들의 꿈을 비교하며 가난하면 꿈도 가난하다는 분석결과를 내놓고 있었습니다. 강남 3구의 아이들 경우 의료인, 법조인, 교수, 연구원 등 이른바 고수입이 보장된 사회를 주도하는 직업군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데 비해, 관악, 구로, 금천구 아이들은 직업안정성이 높은 교사, 회사원, 공무원 등에 대한 선호가 높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양극화로 가는 현상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로 갈수록 심화되고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갈수록 부의 편중이 심해지고 사회양극화가 심화되는 사회구조에서‘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열심하고 성실하게 살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과거 서민들의 성공은 아득한 전설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빈곤한 집의 자녀들은 경쟁사회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꿈마저 양극화되고 있는 현실 앞에 교회는 온 백성에게 어떤 건전하고 균형잡힌 가르침을 내놓아야 할까요? 물론 근본적으로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보는 척도가 젊은 세대의 꿈과 이상까지도 억압하고 왜곡시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질적 가난과 낮은 꿈과 이상의 대물림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가난의 문제는 교회와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교회의 삶의 자리가 세상이고, 바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주님께 바르게 인도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의 문제와 함께 사회의 여러 가지 사안들에 대한 적절한 가르침을 끊임없이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난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좋은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주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성경에는 가난을 의미하는 말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우선 구약에는 사회적 약자, 타인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자인 ‘에비욘(ebyo^n)’을 비롯해 신분과 지위 따위의 명예와 관련된 가난인 ‘달(dal)’, 가난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회, 경제적 가난인 ‘라쉬(rasˇ)’, 가난에 대한 가장 강한 의미로 사회적인 불의와 억압에서 빚어진 가난인 ‘아니(a ̄ni^)’, 종교적인 의미로서 고난과 고통을 통해 영적으로 겸손한 자를 뜻하는 ‘아나우(a ̄na ̄w)’ 등 가난과 관련된 다양한 어휘들이 등장합니다.


구약에 이토록 가난과 관련된 말이 많다는 것은 이미 구약시대인 오래 전부터 가난은 인간이 세상에 출현한 이래 그대로 방치하거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바라만 볼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6월 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 가난한 이웃 돌보는 일은 우선적인 선택


주님은 가난한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여겨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가난의 다양한 실태를 엿볼 수 있는 말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가장 저급한 경제상황으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가난인 ‘페네스(pene ̄s, π´ενηζ)’와 페네스와는 달리 비참한 생활조건으로 도움이 필요한 절대적인 가난의 상황에 놓인 ‘프토코스(pto ̄chos, πτωχ´οζ)’가 있습니다. 프토코스는 ‘거지’ 혹은 ‘아주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지만 ‘하느님 앞에 비천한 사람’이라는 종교적 의미와 어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상대적 가난’과 ‘절대적 가난’의 개념이 이미 2000여 년 전인 예수님 시대에도 일상적으로 쓰일 정도로 가난의 문제는 인류에게는 오래 전부터 화두가 되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를 지닌 가난의 실체를 살필 때 유의해야 할 것은 가난을 단지 물질적인 부분에만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이면서 정신적, 영적인 부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좀 더 들여다보면 구약에 나타난 ‘가난’의 내용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선민(選民) 사이에는 가난이 존재하는 사실 자체가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가난 속에 산다는 것은 이미 인간사이의 유대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친교가 파괴된 것이기에, 더 이상 하느님 사랑이 머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가난은 죄가 표면에 드러난 상징이고 표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체험한 물질적 가난은 그들을 영적 성장으로 이끌었으며, 그들 안에‘야훼의 가난한 사람들(ana ̄wi^m, □)’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가난은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자격을 얻는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자기 자신의 모습 전부를 맡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후기 유다 사상에서‘하느님 앞에 겸손한, 그분께만 의지하는’영적인 가난의 개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신약의 복음사가 가운데 마태오 성인이 쓴 복음서는 가난의 물질적 측면과 영적인 측면 모두에 초점을 두고 전개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하느님께 향해야 할 삶의 모습으로‘마음의 가난함’을 말하고 있으며, 영적인 차원의 의지적인 가난도 반드시 하느님 나라를 위해 필요한 덕목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가난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투신을 바탕으로 하며, 나아가 핍박받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희생적이고 열린 사랑으로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나누고 내어주는 봉사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복과 해방, 영원한 삶을 위해 온 몸과 마음으로 인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실존 그 자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가난의 궁극적 언어와 실천은 바로 ‘사랑’의 구체적 열매이고 결실입니다. 하느님과 인류의 화해와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였고, 가난의 절정이라 할 십자가의 죽음까지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 여기시며, 가난한 이들 안에서 자신의 현존과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물욕을 포기하려는 노력’으로 가난을 선택하고 사랑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은 우선적인 선택사항이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교회 사도직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삶을‘나눔’으로 본받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며, 가난이라는 악을 극복하고, 가난이 몸에 배이도록 익혀나가는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과제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사회회칙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향한 관심을 늘 우선적으로 표명해오고 있으며,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는 사회상황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과 함께 의식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6월 12일, 이용훈 주교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6) 가난, 인간 존엄성 수호 위한 극복 과제


가난한 이들에 복음전파는 공의회 핵심 주제


오늘날 경제 사정으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는 가정과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팎에서도 가장 큰 논의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물질적 부족으로 나타나는 문제, 곧 가난의 과제는 교회가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로 가난 때문에 고통 받고 신음하는 세상을 그대로 보고 지나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그 본질적 사명과 사상에 따라 사회회칙 등 다양한 가르침을 통해 가난한 이들에 대해 관심을 단 한 번도 소홀히 한 때가 없었습니다. 아울러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서고자 하는 노력이 한계를 드러낼 때마다 살과 뼈를 깎는 심정으로 참회하며 새로운 다짐과 실천을 경주해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급변하는 현대사회와 발맞추어 2000년 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을 보전하는 가운데 새로운 방향과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정확히 인지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 가난을 통해 하느님 백성이 세상의 성사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습니다.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와 공의회 교부들은 저개발국가들의 비참한 현실 앞에서 교회가 먼저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온 백성이 평화를 지향하는 교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기본권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교회로서 존재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공의회의 핵심적 주제 자체라고 보면서 가난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였고, 공의회의 결실인 여러 문헌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의헌장과 사목헌장을 통해 교회가 바로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 위해 가난한 모습을 세상에 보여야 하며, 뭇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공의회 이후, 교회 문헌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대의식이라는 한층 넓은 시각으로 공의회가 제시한 쇄신 방향을 따라 가난에 대한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재천명하게 됩니다. 먼저 교황 바오로 6세는‘노동과 사회문제’를 전 세계 차원으로 다룬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을 반포합니다. 이 회칙은 가난한 이와 부자와의 개별적 관계 이전에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 사이의 관계에 각별한 관심을 두면서 노동과 가난 문제를 사회적이고 세계적 차원의 문제로 바라봅니다. 나아가 개별적 인간과 모든 민족들의 전인적 품위와 발전을 고양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후 바오로 6세 교황은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1975)를 반포하면서 교회는 세상에 사는 선의의 모든 이들을 기아, 질병, 빈곤, 식민주의의 잔혹, 생명의 극한 상황 등으로부터 해방시켜주어야 하고, 또한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뒤를 이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을 기념하여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1987)을 반포하면서 특별히 후진국의 사회적 상황을 염두에 둔‘발전’의 문제를 핵심주제로 하여, 전지구적이고 세계적인 빈곤 실태의 이유와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교황은 이 사회회칙에서 물질적 재화 결핍에 못지않게 인간성 자체,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이 피폐해지고 파괴되는 형태의 가난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교회가 복음에 따라 도움을 청할 수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공동선이라는 시각과 관점에서 집단들의 선익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도움을 베풀어야한다는 사회적 관심과 배려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황께서 가난 문제 해결을 통한 전 세계 모든 민족들의 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을 위해 그리스도적 덕목인 연대성의 기치 아래 일치와 화목을 도모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회칙「새로운 사태」 100주년을 기념하여 반포한 회칙「백주년」(Centesimus Annus , 1991)에서는 사회교리 전체의 근본 방향이 인간의 권리 보존과 인간 존엄성의 회복임을 재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근대 이후 역대 교황들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여러 문헌들은 가난의 문제가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부여하신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반드시 인류가 극복해나가야 할 과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6월 1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7) 형제적 결속 · 연대로 가난 극복해야


가난한 이들 편에 설 때 그리스도적 정의 실현


가난의 문제는 이제 몇몇 개인이나 일부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 온 인류의 문제가 된 지 오래입니다. 더욱이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경제적 발전과 도약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가난의 문제는 인류의 존립,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창조하고 배려하신 인간 존엄성의 존립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눈앞에서, 태어나 세상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가녀린 생명, 철없이 뛰놀아야 할 어린 나이에 혹독한 노동으로 내몰리는 저개발국가의 미성년 어린이, 노예와 같은 노동에 혹사당하는 여성노동자, 비위생적이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노동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품위라고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노동현장에서 영육이 지친 수많은 노동자 등 결국 호구지책을 해결하고자 빚어지는 질식할 것만 같은 노동현실의 부조리와 비인간화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런 참담한 노동현실에 침묵하고 계시는지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수십 년의 인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오늘의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가난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해결 방안에 대해 밝은 전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가난이 어느 개인의 사고와 이해, 실천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인류가 공통적으로 당면한 과제이며, 따라서 형제적 결속과 연대를 통해 극복하고 풀어나가야 할 과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기점으로 하여 그 정신과 전통적 사회적 가르침에 따라서 교회는 복음적 가난의 영적 가치와 실천과제에 새로운 힘과 희망, 숨결을 샘솟게 하였는데, 이른바‘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인 선택’의 의미를 높이 들어올린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인류가 극복해야 할 상황을 전제로 해서 나온 메델린과 푸에블라 문헌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은 1년 뒤 개최된 ‘남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데, 「메델린 문헌(Medellin Conclusiones)」은 1968년 8월 24일부터 9월 6일까지 콜롬비아 보고타와 메델린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단 총회가 내놓은 결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메델린 문헌에서는 교회의 가난, 정의, 평화라는 주제를 통해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가난한 이들과 연대를 맺을 의무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은 「푸에블라 문헌」으로 이어지면서, 이때부터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신구약 성경과 초세기 교회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늘 가난한 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 인권을 박탈당한 이, 여러 이유로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다양한 복지활동을 중단없이 지속하여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든 교구는 사회복지회, 혹은 사회복음화국 차원에서 이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위의 문헌들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는 사목적 배려를 통해 교회가 부정과 부패, 불의의 문제에 대해 강력한 예언자적 자세를 취하도록 확실한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가난의 문제가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서 비롯된 물질적 가난과 비참한 상황이 인간과 단체, 그리고 한 계층의 이기주의적 욕망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교회는 다양한 사회적 가르침을 통해 가난한 이들 편에 설 때, 그리스도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행복과 평화, 바람직한 자기성취와 만족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며, 인간의 진정한 품위와 존엄성이 제자리를 찾도록 인류를 위해 온전히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 복음의 가치를 따라 친교와 나눔과 섬김의 삶에 충실하기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6월 2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 용산 참사,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


도시 재개발로 사회 발전 이룬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난에 대한 성서적 이해와 교회 문헌들에서 가르치는 가난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난이 한 시대의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교회가 이러한 빈곤과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남겨진 몫은 우리 주위에 놓인, 가난 때문에 발생하는 현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가짐과 선택, 실천에 따라 주님이 가신 길에 동참할 수도 있고, 외면하게도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부치실 만큼 간절히 원하셨던 세상의 평화와 안녕, 정의가 바로 우리의 희생, 절제, 행위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솔선수범하여 주님 나라 건설을 위한 도구와 방편이 되지 않는다면 주님의 구원사업은 제자리에 머무르게 됩니다.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서 쉬 지워지지 않는 가슴 아픈 일 하나가 떠오릅니다. 문명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고 싶은 않은 일입니다. 이른바‘용산 참사’입니다. 2009년, 막 시작된 새해의 설렘에 들떠 있던 1월 20일 우리는 도심 한복판인 서울 용산 4구역 철거 현장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사건 개요는 건물 옥상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경찰, 용역 직원들 간 충돌이 벌어지는 가운데 발생한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지만, 이 사건은 가난으로 빚어진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갈등이 낳은 참담한 사건입니다. 이 일을 두고 숱한 말들이 오갔지만, 그리스도적인 눈으로 볼 때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이 사건에서 우리는 인간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일들의 이면에는 늘 비인간적인 모습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도시 재개발과 정비를 통해 사회가 발전하고 생활이 더욱 편리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발 이면에는 신음하는 소외계층이 증가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막대한 개발 이익을 챙기는 계층도 있습니다. 개발로 인한 비인간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다보니 관련 당사자들은 극도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 젖어들어 서로를 짓밟게 됩니다. 관련이 없는 이들은 남의 집 불난 것 구경하듯 무관심하게 바라봅니다. 이런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가난’이라는 난제는 더욱 풀기 어려운 숙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부자는 더욱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되고,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해지는 이른바‘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현상은 가난한 이들이 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하게 해 인간이라는 존재감마저 상실하고 있습니다. 경제개발이 서서히 진행되더라도 서민과 대중의 인권이 보장되고, 도덕의식을 바로 세우는 일이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인정과 도리를 외면하며 무자비한 폭력이 질주하는 현실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 신앙인과 동떨어진 정치 사회적인 주제 내지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역시 세상을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하는 주체인 만큼 세상의 문제를 외면하며 지성소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용산 참사가 터진 후 가톨릭교회는 몸소 현장을 찾아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처지와 입장에서 생각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며 십자가상 죽음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온전한 몸짓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우리나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시 재개발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새롭게 점검할 수 있었고, 결국 정부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시 재개발 모델을 고민하여 내놓는 성과와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교회가‘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의 여정을 펼치는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7월 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9) 그리스도적 감수성으로 본 세계화


교회 생활 전반에 새로운 삶의 규율 요구


우리 주변에서 감수성(感受性)이란 말이 다양하게 쓰이는 것 같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하다거나 감수성이 예민하다, 청년 같은 감수성을 지녔다 등과 같은 말처럼 어떤 사람의 성격을 말할 때도 쓰이고, 대중적 감수성, 문화적 감수성, 인권 감수성 등과 같이 어떤 흐름이나 트렌드를 말할 때도 자주 쓰입니다.


이렇게 쓰이는 감수성이란 말은 간단하게 말해서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을 말합니다. 달리 말해 내외계의 자극변화를 수용하는 적극적인 자세 내지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서건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돋보이게 되는 게 보통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적 감수성을 지니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肉化)하셔서 이 땅에 오신 것도 결국은 인간적 감수성으로 인류에게 당신의 지극하신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눈으로, 곧 예수님의 사상과 의지, 관점으로 세상에 다가서려 노력할 때 그리스도적 감수성이 풍부해지리란 점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늘 가까이 하고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진리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만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을 닮고자 하는 마음, 바로 그리스도적 감수성도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값지고 은혜로운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감수성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다양한 문제와 의제를 던지고 있는 세계화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세계화를 둘러싼 문제들은 경제와는 따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범세계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세계화의 조류는 정치와 사회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 경제적인 면 등 모든 측면에서 국제 질서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를 이념적 토대로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는 결코 어떤 신념이나 제도 등으로도 되돌리기 힘든, 어쩔 수 없는 지구촌의 흐름이 된 지 오래인 듯합니다. 세계화는 따라서 하느님 백성의 모든 삶, 단지 영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선 인간 삶의 모든 부문에 대해 사목적 관심을 기울이는 가톨릭교회에 있어서도,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현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계화가 빚어내고 있는 국제 질서와 국가 및 사회의 모든 면에서의 질적이고 양적인 변화의 양상은 가톨릭교회의 사목과 신앙, 교회 생활 전반에 광범위하고 폭넓은 변화와 새로운 삶의 틀과 규율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세계화는 교회의 모든 사목 정책과 사목적 실천과 영적인 배려와 돌봄에 있어서 더 깊은 고민과 연구의 대상과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 없으며, 향후 십수년 이후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전망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변수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적 감수성으로 바라볼 때,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세계화의 흐름에 대해 느끼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경제적 불평등과 이로 인해 사회 전반으로 확산일로를 걷고 있는 소외계층을 품고 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미 가톨릭교회는 오래 전부터 세계화가 야기할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해왔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0년대 후반부터 교도권에 바탕을 두고 발표하는 각종 문헌들에서는 물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계화의 문제에 대한 우려의 뜻을 피력한 것은, 이 문제가 매우 중대한 사안이며, 외면하거나 피할 수 없는 세상의 흐름이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세계화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제3세계와 그 지역교회 안에서 교회가 맞닥뜨려야 할 사목적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표명되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7월 1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0) ‘강자’ 위주 시장원리만 따르는 세계화


경제 · 물질만능주의 등 세계화가 빚어낸 부작용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적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리한 예언자적 인격을 지니셨던 분이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특별히 세상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는 가난의 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며 소외의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는 모습으로 온 인류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며 호흡을 함께했습니다.


교황은 지난 1999년 11월 6일자로 발표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아시아 특별총회의 후속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Ecclesia in Asia) 제39항에서 경제적 세계화 과정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세계화의 긍정적 효과들을 인정하면서도 “세계화가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과 더불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가난한 나라들을 경제적, 정치적 국제 관계들의 주변부로 몰아내는 경향을 낳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사랑의 눈이 아니고선 볼 수 없는 부분까지 보고 있는 것입니다.


교황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세계화는 “아시아 사회들을 세속주의적이며 동시에 물질주의적인 소비주의적 세계 문화 속으로 급속히 몰아가고 있다”고 우려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1월에는 교황권고 「아메리카 교회(Ecclesia in America, 1999. 1. 23)」를 발표했는데, 여기서도 교황은 세계화의 문제를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문헌에서도 교황은 문화적 세계화에 대해서‘아시아 교회’와 같은 문제를 보고 있습니다.


“특히 아메리카에서 더욱 두드러지고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세계화 현상은 현대 세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강자 위주인 시장 원리에만 따르게 되면 세계화의 결과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경제 최우선주의, 실업, 공공 서비스의 감소와 저하, 환경과 자연 자원 파괴, 빈부 격차의 심화, 빈곤을 더욱 열등하게 만드는 불공정한 경쟁 등이 그러한 부정적인 결과입니다. 교회는 세계화의 긍정적인 가치들을 인정하면서도 세계화의 물결에 따르는 부정적인 측면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아메리카 교회」, 제20항)


이처럼 교회 공식 문헌들 외에도 교황은 수시로 세계화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점들을 지적해오고 있습니다.

1998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교황은 “빈곤의 지속, 세계화에 수반되는 새로운 불평등”으로서 외채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소외 없는 세계화’를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한 나라의 외채가 그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올가미가 되고 있는 현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 인식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지구촌 전체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는 국가와 지역 단위에서 해당 사회 구성원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러한 영향은 주로 가난한 이들, 소외 계층의 삶을 더욱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나기 십상입니다.


가까이 우리 주변만 둘러보더라도 시장중심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 등으로 이기주의적인 사고가 갈수록 팽배해가고 있고, 실업과 비정규직, 양극화, 빈부격차 문제는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들이 몰려있는 제3세계, 저개발국의 서민층, 특히 농촌과 농업, 자영업 등의 붕괴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 안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은 구체화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사목적 관심과 연구, 대안의 모색은 긴박하고 절실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세계화가 빚어내는 이러한 부작용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적 감수성으로 어떠한 방향과 자세를 갖춰 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며 판가름날 것 입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7월 1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 한국교회가 당면한 ‘세계화의 부작용’


실업과 빈부격차 문제가 사회적 악영향 끼쳐


돌이킬 수 없는 추세로 갈수록 끝 간 데 없는 넓디넓은 모습으로 질주하고 있는 세계화에 대해 그리스도적 감수성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자세를 갖추어야 할까요. 세계화가 던져주고 있는 도전에 어떻게 응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찾아 나설 수 있는 대안은 한마디로 연대성과 유대감으로부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연대성의 구체적인 지침은 교회가 강조해오고 있는 사회교리로부터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권고 「아메리카 교회(Ecclesia in America, 1999. 1. 23)」 제55항에서 비그리스도적인 모습의 세계화에 맞서는 ‘연대의 세계화’에 대한 그리스도적인 시각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교황은 이 문헌에서 “세계화된 경제는 사회 정의의 원리들에 비추어 분석되어야 하며, 그러한 경제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국제적인 공동선의 요구들을 존중하여야 한다”고 역설하고 “아메리카교회는 국가간 화합을 더욱 증진하여 참으로 세계화된 연대의 문화를 조성하도록 도와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세계화의 부정적인 결과들을 줄이는 데에 협력하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가톨릭 사회교리가 교회의 세계화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핵심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습니다. 특히 가톨릭 사회교리는 더욱 심화되어가고 있는 빈부 격차와 이로 인해 파생되는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 방안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사회 교리에 대한 재성찰과 재구성의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교황 레오 13세가 19세기 산업혁명과 노동자의 권리 문제 등과 관련된 시대적 도전들에 대해서 충실한 사회교리적 사목 대안을 제시하였듯이,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산업혁명 당시에 버금가는, 오히려 더 큰 변화의 소용돌이와 기로에 서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가르치는 사회교리에 대한 전면적인 재성찰과 그에 따른 시대적 환경에 대한 재적응과 재해석의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회교리를 새로운 시대적 환경, 변화하는 시대와 끝없이 노정되고 있는 세계화의 부작용들을 비추어보는 방편과 성찰의 수단으로 삼아야 할 뿐만 아니라, 좀 더 충실하게 그것을 현실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세계화의 영향과 결과가 한국교회에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 필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불공정한 국제 질서와 사회 현실을 낳고 있는 세계화의 부작용들은 이미 한국교회의 중요한 사목적 과제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더 가난한 이들로 불릴 수 있는 이주민들에 대한 사목입니다.


세계화로 인해 가난의 문제가 더욱 확산되면서 실업과 빈부격차 문제는 가장 광범위하게 사회적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 양극화의 결과는 그대로 사회적 양극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교회 안에서 이에 대한 과감하고 적극적이며 전향적인 접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세계화의 문제는 오늘날 교회가 당면한 불가피한 과제이지만, 동시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긴박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보편교회의 과제는 바로 한국교회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목적 과제이며, 세상을 주님께 인도하고 복음화하는데 있어 가장 절실한 영역과 부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7월 2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 ‘소외없는 세계화’ 위해 늘 깨어 노력해야


‘거대 공룡’ 세계화, 그리스도 시각으로 바라보고

가난한 이와 연대하며 신(新) 칠죄종 등 배격해야


오늘날 교회가 피할 수 없이 만나고 있는 세계화라는 거대한 공룡 같은 존재는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신앙인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그리스도적인 시각과 자세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특히 가뜩이나 어려운 가난한 나라의 빈곤층이 겪는 삶은 세계화의 영향으로 인해서 도저히 헤어나기 힘든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 있고, 이런 상황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세계화가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으로 말미암아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어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소외 없는 세계화’의 필요성을 주창하면서, 선의의 모든 이들과의 연대 속에서 세계화가 제기하는 광범위한 도전들에 대해 교회 내적, 외적 대응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세계화의 골이 깊어지면서, 많은 교회 전문가들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의 도전에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이미 극심해져 있고, 점점 더 심화되어가고 있는 빈부 격차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 가톨릭 사회교리를 재구성해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 이른바 비서구 지역교회의 급속한 성장으로 세계화되어버린 가톨릭교회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교회가 세계화의 도전에 적절하게 대처해나가기 위해서는 지역 주교들을 비롯한 지역교회의 역할이 더욱 절실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세계화라는 이름의 공룡이라고 해도 그 공룡이 서식하는 생태환경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각 지역교회와 주교회의는 더 많은 역할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각 지역교회는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강조한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늘 깨어있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이해관계가 다른 수많은 종파와 정치적 노선들 사이에 가교를 건설하고, 경제적 세계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동의 전망을 구축해나가야 합니다.


거센 세계화의 조류 속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변화는 매우 힘겨운 응전이 될 수밖에 없음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세계 발전을 위한 세계 정치지도자들의 의지가 갈수록 퇴색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같은 우려가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일례로 십수년 전 제3세계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선진국들의 지원 목표는 GNP의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갈수록 이 목표는 하향조정되어 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가까이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전체적인 부의 규모는 커지고 있으나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부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따라 가난한 이들에게는 세계화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기회가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지난 2008년 교황청 내사원이 발표한 ‘세계화 시대의 신(新) 칠죄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지에 소개된 내용에 따르면, ‘세계화 시대의 신 칠죄종’은 환경파괴, 윤리적 논란의 소지가 있는 과학실험, DNA 조작과 배아줄기세포 연구, 마약 거래, 소수의 과도한 축재(蓄財), 낙태, 소아성애 등입니다. 기존의 칠죄종이 개인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때, 신 칠죄종은 오늘날 세계화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죄악들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입니다. 특히 이들 대부분이 경제적 욕구와 이기주의로부터 배태된 것이라는 점은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스스로를 파괴의 구렁텅이로 내몰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7월 3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 ‘신자유주의’의 산물 세계화의 양면성


긍정적 측면 있지만 무한경쟁 부추겨 양극화 심화

세계적 차원에서 ‘빈익빈부익부’ 확대재생산 초래


세상 한가운데 서 있는 교회가 오늘날 갖게 된 중요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는 하루가 다르게 급속하게 변하는 세계화의 조류 속에서 어떤 입장과 태도를 가져야 하고,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성경 말씀처럼 새로운 시대 새로운 흐름 앞에서는 이에 맞갖은 새로운 이해와 돌파구가 요구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화가 부정적인 면만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과도하게 국경에 얽매여 있던 재화나 자본, 인간 문화 교류 등에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원활한 소통을 가져오게 하여 적지 않은 선익과 이익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의료기술이 가난한 나라로 이전되어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빈곤층의 사람들이 새 생명을 찾는가 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었던 기업과 그 운영자들이 선진 자본의 도움으로 새로운 꿈과 기업문화를 열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계화가 비판을 받고 있는 부분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국경을 넘어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선진국의 독점자본, 초국적 자본들, 금융자본들이 세계시장에서 무소불위의 지배적인 권리를 행사하며 무한경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화의 다른 얼굴인 신자유주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일상화되어 있다시피한 ‘세계화’나 ‘자유화’라는 용어도 신자유주의의 산물로, 결국 이 둘은 동전과 양면과도 같습니다. 1970년대 이후 세계적인 불황이 온 지구촌을 덮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대두된 신자유주의는 자유시장과 규제완화, 재산권을 중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론자들은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은 경제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오히려 악화시킨다고 보고,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시장의 자율적인 경향이나 흐름에 맡기지 않고, 공공복지 제도를 확대하는 것은 정부의 재정을 팽창시키고, 근로의욕을 감퇴시켜 이른바 ‘복지병’을 야기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경제를 지향함으로써 비능률을 최대한 해소하고, 경쟁시장의 효율성 및 국가 경쟁력을 유도하고 강화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나라에서 축적된 자본의 이동과 이윤 추구 활동은 강화되지만, 노동자들의 이동과 복지는 그만큼 뒷전으로 물러서는 반세계화의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저개발국가일수록 장기불황과 실업, 그로 인한 빈부격차 확대, 양극화 등으로 인한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선진국의 시장개방 압력뿐 아니라 유전자조작식품 등 선진 기술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하는 무역 공세 속에서 저개발국가들은 자국의 농업, 공업, 서비스업, 심지어 국민들의 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의료복지까지도 잃어감으로써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첨예한 갈등 현상이 전 세계 도처에서 빚어지고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농업의 많은 부분을 해외의 다국적 곡물시장이나 경제공동체 동맹체계에 의지하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근래에는 인천경제자유구역 송도국제도시를 필두로 대형 국제병원 등 외국의료기관 유치가 기정사실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외국 영리병원이 국내에 진출하게 되면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 산재의료기관 적용을 받지 않게 돼, 고비용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부유한 계층에게는 양질의 혜택이 돌아가겠지만, 그렇지 못한 빈곤계층이나 서민대중에게는 의료비 급증과 중소병원의 몰락으로 이어져, 그간 유지되어온 의료제도의 근간을 뒤흔들어 공공재인 의료서비스가 침몰하거나 후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흔히 동일시되는 숨어있는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환경문제에 있어서도 선진국들은 자신이 치러야 할 비용을 저개발국가로 이전함으로써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세계적 차원에서 확대재생산 체제로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일례로 미국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합의한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줄이기 위한 교토의정서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회비용을 가난한 나라들에 떠넘기며 방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8월 2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4) ‘자유’ 뒤에 숨어 횡포부리는 모순적 얼굴


가난하고 약한이들 더욱 밀어내는 신자유주의

정의로운 식별력 지니고 불의에 맞서 싸워야


신자유주의는 얼핏 보면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부여하신 천부적이며 고귀한 선물인‘자유’를 내세우고 있어서 거부감 없이 선뜻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게다가 ‘새로움(新)’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어 있으니 마음이 움직이기 쉬운 대상 내지 개념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자기모순적인 얼굴들을 적잖게 보이고 있어 교회는 이런 모습들에 신중하고 조심스런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유를 주창하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축적된 자본을 배경으로 시장에서 독과점적 횡포를 행사하고 있는 힘센 자신들의 이익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 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인 약자들의 시장 진입을 방해하거나 완전한 시장경쟁을 회피하여, 오히려 자유 시장 경제를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에 따라 소규모 자본을 지닌 약자나 가난한 이들은 갈수록 경쟁시장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현상이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우리 주위에서 일어납니다.


비근한 예로 동네마다 하나둘씩 있는 소규모의 슈퍼마켓을 둘러싼 현실을 잠시 살펴봅시다. 자유경쟁을 내세워 어느 날 갑자기 대형마트나 대형슈퍼마켓들이 동네 곳곳에 들어서면서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동네 상권(商圈)까지 싹쓸이하는 통에 동네 구멍가게나 소규모 슈퍼들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금년 7월 1일부로 한-EU FTA(자유무역협정)가 발효되었지만, 이 협정에는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입점제한 조치가 명시되지 않아 이런 상태로 간다면 머지않아 우리 이웃 가운데 소매업을 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어질 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수출중심의 대기업들은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국제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점유율을 높이며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대기업들이 경이로운 기록적인 고수익을 거두는 상황에서도 그 납품업체들은 적자를 면치 못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결과적으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시장은 물론 일상생활에서조차 사상적으로나 이념적인 혼란을 부추기며 ‘자유’를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만 끌어가고 있는 게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현실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끊임없이 경쟁의 대열에서 밀어내고, 나아가 두 번 다시 재기하기 힘든 나락에 빠뜨려 헤어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 교회는 계속해서 우려의 목소리를 표명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정의로운 식별력과 태도를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1997년 열린 아메리카 특별 주교대의원회의 후속 문헌을 발표하면서 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된 신자유주의적 흐름과 관련해,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이윤추구와 시장 경제는 사회적 약자들을 더욱 더 소외되게 만든다고 강력한 어조로 경고한 바 있습니다.


교황은 아메리카 대륙, 특히 중남미 지역의 가난과 사회적 고통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그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경제적 세계화를 꼽았습니다. 아울러 낙태, 안락사, 사형제도 등 우리 사회에 죽음을 부추기는 문화의 그늘을 짙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흐름에 준엄한 경고를 보냈습니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난한 나라의 외채 문제, 환경 오염, 인종 차별, 무기와 마약 밀매, 폭력과 테러 등 신자유주의가 낳는 불의에 대해 맞서 대항하고 싸울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이 수차례에 걸쳐 신자유주의 흐름에 의해 세계화된 경제가 사회적 정의의 원칙에 따라 철저한 감시와 점검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교황이 가난한 이들뿐만 아니라, ‘가진 자와 권력을 가진 자’들을 새롭게 복음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와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하는 삶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8월 2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5) 국가마저 ‘쇼핑’하는 글로벌 기업의 권력


효율만 따져 무한경쟁 · 적자생존 당연시하는 현실

소외된 이들 위한 배려는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나


신자유주의는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인간에게 유용한 재화, 생산과 소비를‘자유’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활기를 불어넣어 인류를 이롭게 하는 면이 있는가 하면, 그 자유의 힘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온갖 부조리와 불의를 낳기도 합니다.


인류에게 밝은 희망을 안겨줄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신자유주의는 해를 거듭할수록 온갖 악취를 풍기며 천덕꾸러기로 전락해가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개인과 사회의 편리를 위해 만든 옷이 오히려 몸통을 위험에 부쳐 옥죄어 들어가는 형국입니다. 몸이 자라서 옷이 몸에 맞지 않게 되면 그 옷을 바꾸거나 벗어던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성장을 방해해 몸에 막대한 해악을 끼칩니다.


어느새 신자유주의가 시장은 물론 우리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되면서‘효율성’이 중요한 가치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일면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동장치 없는 폭주기관차와 같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사회 모든 영역에서 효율성만 드러나고 다른 인간적 가치들이 사라지면서 사회는 무한 경쟁과 적자생존의 구조가 당연한 듯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복지나 사회안전망 등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회적 배려는 점차 이차적, 부차적인 부분으로 밀려나면서 갈수록 소외되는 이들이 늘어만 가는 게 눈앞의 현실입니다.


이런 사회나 국가는 능력 있는 이가 대접 받는 ‘능력 위주의 사회’ 혹은 승자만 살아남는‘승자독식사회’로 굳건하게 자리 잡게 됩니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만 보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세상을 만드신 주님이 바라시는 모습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1987)을 통해 개인과 사회가 얽혀서 만들어내는 ‘죄의 구조’를 심각한 현대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빚어내는 비극적인 사태로 진단한 바 있습니다. 이 죄의 구조를 깨트리기 위해서는 개인의 회심과 사회적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세상에 죄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죄의 구조부터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 세계 단일시장(Global Market) 대 국지적 정부(Parochial Government)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가장 먼저 가시화되는 게 기업과 국가의 위상 변화입니다. 즉, 민간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기업이 국가 위에 올라서게 되어 국가보다 힘이 더 세지는 경우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계화로 인해 경제와 시장이 한 권역, 단일한 지구촌이 되면서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가고 있지만, 기업을 비롯한 경제 주체들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국가권력은 여전히 ‘지역적’ 또는 ‘국지적’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시장과 시장을 움직이는 기업은 세계 전체를 단위로 해 힘이 커졌는데, 기업을 상대로 규제를 하고 세금을 매기는 국가나 정부는 여전히 동네 내지 마을 단위라는 얘기입니다. 이러다 보니 초국적 기업들이 국가마저‘쇼핑’하고 다니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태가 도처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당신네 나라는 세금을 얼마나 깎아줄 수 있나.’, ‘당신들은 어떤 규제를 풀어 줄 수 있는가’, ‘옆 나라는 우리에게 이런 편의와 이득을 주는데, 당신네 나라는…’


방송이나 신문을 살펴보면 국가와 이런 식의 흥정을 하며 쇼핑을 하고 다니는 국제 기업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금력(金力)이 최고 권력이 된 신자유주의 치하에서 글로벌 기업 CEO들은 주요 국가의 국가원수와 동격의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국가원수들이 세일즈를 위해 글로벌 기업들을 찾아다니는 게 일상화되고 있으니 기업들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기업이 국가권력 위에 올라서 버린 오늘의 세상,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글로벌 마켓(Global Market)의 씁쓸한 판도와 영역 위에서 가난한 이들은 갈수록 소외되고 돌파구마저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9월 11일, 이용훈 주교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6) 양극화 현상 심화시키는 세계화의 덫


기업 이익 위해 경계 허물고 국가와도 흥정

소외된 이들은 갈수록 힘들어져 갈등 증폭


미국에 델라웨어(Delaware)라는 주가 있습니다. 인구가 60만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인구 수로 보면 미국에서 제일 작은 주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의 특징 중 하나는 소비세(sales tax)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현상은 델라웨어 주의 기업유치 전략입니다. 한때는 포춘 500(Fortune 500) 즉, 미국 내 500대 대기업의 60%가 델라웨어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기업을 유치했습니다. 주 차원에서 기업이 낼 세금을 깎아주거나 규제를 대폭 풀어주고 완화한 결과입니다. 기업들은 실제 일은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하고, 이곳에는 작은 사무실 하나 차려놓고 그곳을 본사라 하면서 수익이 델라웨어 본사에서 발생하도록 회계처리를 합니다. 결국 델라웨어 주나 기업이나 모두 이익을 누리게 됩니다.


문제는 다른 주에 있습니다. 델라웨어 주 같은 곳에 기업을 뺏기게 되니 결국 주정부 간에 경쟁이 붙으면서 기업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러한 현상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 세계적인 기업인 코닝이 우리나라의 문을 두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국은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나?” “그것 가지고 되겠어… 좋아, 우리는 중국으로 가.”


코닝은 우리 정부와 협상을 하다 결국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중국으로 가차없이 발길을 돌려버렸습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국가마저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기업, 이게 바로 신자유주의가 외쳐온 세계화(Globalization)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신자유주의의 첨병들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뛰는 첨병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귀에도 너무 익어버린 IMF(세계통화기금), World Bank(세계은행), WTO 같은 기관들입니다. 이 기관들이 권고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신자유주의의 한가운데 서 있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지난 경제위기 때 이들 기관의 권고를 충실히 따르다 세계화의 덫에 빠져버린 뼈아픈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 외에도 각종 평가기관들도 신자유주의를 부추깁니다. 이제는 어린 아이들도 낯설지 않은 S&P, 무디스(Moody’s), 피치(Fitch) 같은 평가기관들은 신용등급 평가를 통해 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데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이들 손에 한 나라의 경제도 휘청댈 정도이니, 과연 누가 그런 힘을 준 것일까요.


- 양극화의 덫


신자유주의적인 질서가 양극화를 초래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부인하기 힘든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잘사는 나라 자본가들은 글로벌 분업체제를 한껏 활용해 전 세계를 무대로 해서 돈을 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럴 기회가 없습니다. 글로벌 분업체제 아래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일자리를 임금이 낮은 나라로 가져가버려 오히려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노동의 종말(The End of Work)』을 쓴 리프킨(Jeremy Rifkin)은 2000년에서 2003년에 이르는 3년 동안 미국에서 약 300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또 2000년 이후 지금까지 약 700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업은 여기에 다시 값싼 임금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옵니다. 단순노동을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는 더 힘들어지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신자유주의 구조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극화는 사람들 간에 갈등을 만들고, 이러한 갈등이 증폭되면서 결국 사회 전체가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악순환의 사태를 낳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9월 25일, 이용훈 주교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7) 지속가능한 성장 가로막는 신자유주의


양극화에 따라 중산층 줄고 저소득층 늘어

구매력 저하로 결국 사회 · 경제 발전 위축돼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양극화는 우리 실생활에서도 체감할 수 있는 적잖은 문제를 안겨줍니다.


양극화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중산층은 줄어들고 저소득층이 늘어나는 현상이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어느새 초미의 관심사가 된 양극화라는 현상은 실상은 단편적인 현상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양극화로 인해 가난한 이들이 계속 늘어나고 또 이렇게 늘어난 가난한 이들의 상황이 계속 악화되면서 재화나 용역을 활용할 수 있는 응용력과 구매력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게 되어 자본주의 경제 자체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습니다. 경제가 제대로 순환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소비가 있어야 하는데,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구매력을 잃게 되거나 저조한 흐름으로 가면 결국 지속가능한 성장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 둔화되는 성장


신자유주의가 초래하는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지속가능한 성장이 벽에 부딪히면서 시장경제가 위축되고 사회경제적 발전 자체가 둔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신자유주의야말로 성장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세계화로 인한 국제적 분업체제로 후진국도 성장할 기회를 갖게 되고, 선진국은 나름대로 투자에 따른 이익도 보고 낮은 가격의 상품생산에 따른 국가 차원의 이익도 챙기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론대로 이러한 체제가 순조롭게 순환되었다면 지속가능한 성장의 고리가 만들어졌을 테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실제로 최근의 평가와 연구에 의하면 신자유주의 구도가 성장을 둔화시키고 있습니다.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장하준 교수(경제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질서가 자리잡고 난 다음에 세계 경제가 성장한 것은 2% 정도밖에 되지 않은데 반해 그 이전인 1970년대나 그 앞 세대의 성장률은 3% 정도가 됩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질서가 확고히 자리잡은 상태에서 세계적인 경제성장은 후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계적인 연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신자유주의 질서가 지닌 문제는 작금의 미국 금융위기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융자본(기업)이 미국 정부에 대한 정치적 우월성까지 확보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여 결국 위기로까지 치닫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미국 정부의 묵인 아래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는 금융자본들이 끊임없는 파생상품을 만들면서 미국뿐 아니라 지구촌의 여러 나라에 경제 위기를 확산시킨 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더 큰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음에도 그런 현상이 그대로 지속될 것이라는 어두운 측면입니다. 지금 우리 실생활에서도 체감할 수 있는 이러한 문제점을 바꾸자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 나라와 그 국민마저도 자신들의 이익 추구의 목표와 대상으로 만드는 초국가적 자본들의 무한경쟁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출범시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들 사이의 조세경쟁 등 불필요한 경쟁을 막을 수 있는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실질적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전 세계를 무대로 국가마저 손쉽게 넘나드는 자본들의 첨병 역할을 하는 각종 기구들의 활동을 적절히 규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확대일로에 있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깊이 발을 딛고 선 이들이 이 문제를 푸는 열쇠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 신앙인들, 특히 사회 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사회지도층 그리스도인들의 몫이 더욱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0월 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8) 고용불안 부추기는 ‘노동유연화정책’


통계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수 꾸준히 증가

임금불평등 · 간접고용 등으로 삶의 질 낮아져


어떤 권한에는 그에 걸맞은 책임이 따르는 게 상례이지만 우리 삶 곳곳에 깊이 파고든 신자유주의적 삶의 궤적들을 좇다보면 그 반대의 경우를 만나게 되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 노동유연화정책


신자유주의가 세상에 퍼뜨려놓은 부조리한 모습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비정규직과 간접고용으로 대변되는 노동유연화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어려움을 몰고 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IMF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노동유연화정책은 노동자들의 불안정 고용상태를 만성화시키고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통계상으로만 보더라도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2001년 8월 737만 명에서 2007년 3월 879만 명까지 계속 증가하였습니다. 2007년 8월부터 다소 감소해 2008년 8월에는 840만 명으로, 전체 1600만 노동자 가운데 52.1%이지만, 이는 경제침체로 인한 경제활동인구 자체의 감소와 간접고용 형태의 증가 때문일 것입니다. 2007년 7월부터 시행된 이른바‘기간제 보호법’(사용기간 2년 이상을 계속 근로하는 노동자를 정규직 또는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노동법)이 일부의 비정규직을 간접고용 형태인 파견업체의 정규직 노동자로 만든 것입니다.


세부 고용형태별로도 기간제근로와 가내근로는 감소하고, 장기임시근로, 호출근로, 용역근로, 시간제근로, 파견근로, 특수고용 형태는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2007년 7월부터 기간제 보호법이 시행되면서 기업들이 입법 취지대로 기간제근로를 정규직 또는 무기계약근로로 전환하기보다는 기간제 계약을 해지하고 필요한 인력을 호출근로 또는 시간제근로로 조달하거나 파견, 용역 등 간접고용으로 대체한 결과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규직과 비교해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이 49.9% 수준에 그치고 시간당 임금은 50.6%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임금불평등은 5.14배로, OECD 국가 중 임금불평등이 가장 심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2005년 4.5배)보다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저임금계층은 432만 명(26.8%)으로, 이 가운데 정규직은 49만 명(6.4%)이고 비정규직은 383만 명(45.6%)에 이르고 있습니다. 법정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노동자 175만 명(10.8%) 가운데 정규직은 9만 명(1.2%) 정도이지만 이에 비해 비정규직 노동자는 165만 명(19.7%)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는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는‘기간제 보호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대우가 거의 개선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간접고용은 삶의 질을 상상도 못할 정도로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파견근로와 용역근로 등으로 대변되는 간접고용은 2007년 8월 약 77만 명으로 파악되는데 용역근로의 증가가 두드러집니다. 대체로 파견근로는 여성이 많고 용역근로는 남성의 비중이 높게 나타납니다. 연령과 학력에 있어서는 50대 이상 간접고용 노동자의 비율이 49.4%로 거의 절반에 이르고, 학력은 중졸 이하가 40.9%로 다른 고용형태에 비해 학력수준이 낮게 나타납니다. 우리 사회의 가난한 계층을 이루고 있는 저학력 고연령 노동자들이 대거 파견이나 용역으로 전락해 빈곤한 계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나마 이들의 생존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노동조합 조직률에 있어서도 비정규직,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상황이 매우 취약해 이중 삼중고를 겪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노동부가 발표한‘2007년 전국 노동조합 조직현황’에 따르면, 노조 조직률이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47.9%에 이르는데 비해, 100~299인 사업장은 10.6%, 30~99인 사업장은 1.7%로 떨어졌고 30인 미만 사업장의 노조 조직률은 겨우 0.2%에 머물고 있어 소규모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과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인권부재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모습은 향후 한국교회의 모습을 전망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큰 변수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0월 2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9) 자유와 경쟁보다 정의와 연대 우선해야


효율 · 이익 위해 당연시되는 경영의 자유는

불법 파견 · 부당해고 등 사회정의 무너뜨려


경제를 잘 모르는 일반인이나 어린 아이들까지도 신자유주의로 인한 세계화 시대의 위력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가 지난 1997년 터진 IMF사태일 것입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난생 처음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하게 된 국민들은 큰 충격 속에서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너도 나도 금모으기운동에 동참했고, 막대한 공적 자금을 쏟아부어 부실기업을 살리는 일이 자신의 일인 양 함께했습니다. 온갖 절제와 희생도 감내했습니다. 평범한 가정의 가정경제와 삶을 옥죄게 될 정리해고제나 파견법이 도입된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그때는 그러한 정책이 과연 올바른가를 따질 겨를도 없었습니다.‘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디면 좋은 시기가 반드시 올 수 있다는 간절한 기대와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밑거름으로 세계가 놀랄 정도로 우리 사회는 비교적 빠르게 위기를 극복했지만 10여년 전 사람들이 애틋한 마음으로 나눴던 우애와 믿음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 아래서는 기업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기거나 정리해고를 하거나 비정규직을 쓰는 것은 경영상의 자유로 허용되고 시장의 경쟁 원리로 인정받습니다. 사회의 중요한 구성 요소들인 기업과 시장이 자신의 생존 규칙에 따라 미래를 계획하고 개척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업과 시장만이 사회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들은 아닙니다. IMF사태 당시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한 일반 국민이 실제로 이 사회의 지배적 다수이며, 이들로 이뤄진 국가라는 공동체를 질서있게 유지하려면 경쟁과 자유를 넘어서는 본질적이고 영속적인 가치와 규칙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바로 정의와 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상위법인 헌법이나 하위법인 노동법도 사회적 정의와 연대의 정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기업이나 시장도 사회의 한 구성 요소로서 경쟁과 자유 이상으로 불변하는 사회적 윤리와 도덕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정의와 연대를 실천해야 합니다. 기업이 갖는 경영상의 자유는 무제한이 아니며, 그것이 사회적 정의 혹은 사회가 향유하는 기본 권리를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부정과 부패에 물든 기업의 실상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동안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진중공업 사태가 단적인 실례입니다. 한진중공업이 부산 영도에 있는 조선소를 그대로 두고 필리핀 수빅만 경제자유구역에 70만 평에 달하는 조선소를 건설해 사업을 확장하는 가운데, 지난 2010년 12월 15일, 경영 악화를 이유로 생산직 근로자 400명을 희망퇴직시키기로 한 결정에 노조가 반발하면서 불거진 이 사태는 정리해고의 정당성에서부터 사내 하청의 활용이나 고용불안정에 따른 비용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치지 않아 교회가 가르치는 사회 정의와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를 불법 파견 받는 것이 별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지는 현실이나, 월 100만 원 받는 청소 도우미나 미화원의 임금을 줄이기 위해 80만 원의 파견근로자로 바꿔버리는 정책이 효율과 이익창출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되고 정당화되는 상황 등은 우리 사회가 인정과 도의, 기본인권을 외면하고 저버리는 비정한 사회 풍토를 조성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화 시대에 경영상의 자유가 전 지구적인 것만큼이나 사회적 정의 역시 전 지구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정당성 없는 정리해고나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려 착취 수준으로 이윤을 남기는 행위 등은 사회적 정의를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결국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유와 경쟁이라는 좁은 시야가 아니라, 정의와 연대라는 넓은 눈으로 나라와 세계 공동체를 보면 세계화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가치와 규칙이 절실함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실생활이 불편하고 경제적 불이익이 오더라도 이웃의 아픔과 어려움을 내 것과 우리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그리스도적 감수성이 더없이 필요한 때입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0월 3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20) ‘마태오 효과’로 인한 양극화 현상 고착


대기업 자본력 바탕으로 각종 사업 진출

중소기업 · 영세업자 도산 위기로 내몰아


요즈음 경제력의 급격한 부상과 함께 경제학자들의 기대와 우려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웃 나라인 중국 사회를 설명하는 말 가운데 낯설지 않게 등장하는 용어로 ‘마태오 효과(Matthew effect)’라는 게 있습니다.


40년 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의 저명한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빈익빈 부익부’현상을 설명하면서 처음 사용한 이 말은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2,13)는 구절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읽기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충분히 읽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이해 기술을 배우는 데 또래들보다 더 늦고, 따로 배워 익히지 않으면 계속 뒤처지게 되는 현상을 일컫기도 하는 이 용어는 경제학뿐만 아니라, 사회학이나 공학 등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며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경제 영역에서‘마태오 효과’는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더욱 부유해지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최근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 사회에서 상상도 못할 빈익빈 부익부의‘마태오 효과’가 나타나고 있어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누적 우위’ 이론이라고도 일컫는 ‘마태오 효과’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가 전 지구적으로 겪고 있는 양극화 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핵심용어입니다. 성경에도 등장할 정도로 분명 오랜 내력을 지니고 있는 이 현상은 경제뿐 아니라 정치·과학·교육·문화·기술 등 거의 모든 사회 분야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새로운 기술이나 방법을 창안해 해당 분야에서 이익을 선점하게 되면 선발 주자로서의 기득권과 우위를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우위의 누적과 실적을 가속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아이폰을 개발한 애플사의 경우가 단적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영국의 브랜드 컨설팅기업 ‘브랜드 파이낸스’가 전 세계 브랜드 가치를 조사해 발표한 상위 500개 글로벌 브랜드 순위에 따르면, 아이폰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애플사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에 이어 올해 단숨에 8위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애플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시장장악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글로벌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며 타 경쟁사들에 대한 우위를 확보해 나가고 있습니다. 애플사의 시장장악력의 바탕에는 수많은 협력업체들과의 발전적인 파트너십 관계, 즉 ‘동반성장’이 자리 잡고 있어 지속가능한 발전의 한 사례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애플사와 같은 경우는 손으로 꼽을 만한 특별한 사례로 대부분의 기업들은 자신이 선점한 시장에서 독과점적 이익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우위에 선 자신의 위치를 지속시키기 위해 전력을 쏟기 때문에 시장에서 양극화 현상이 고착되고 있습니다. 대기업들이 자신이 보유한 엄청난 자금의 운용과 회전, 유통망이나 판매력 등을 앞세워 중소기업이 담당하는 사업에까지 진출하면서 작은 자본으로 경쟁하던 기업들을 고사시켜, 결국에는 시장에서 퇴출시켜버리는 공정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최근에 발생한 비근한 예로 한 대기업이 자신이 지닌 자본력과 유통망을 배경으로 통닭을 저렴한 가격에 대량 유통시키면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던 영세 치킨집들이 줄줄이 도산하거나 어려움을 겪은 사례가 그러합니다. 이는 상도덕을 거스르는 범죄행위인 것입니다. 이처럼 ‘마태오 효과’는 시장에서 뿐 아니라 우리 삶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급격한 기술혁명과 세계화로 인해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문제들로 인하여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윤리를 바르게 정립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분석하고 바라보며, 온당한 식별력과 지혜로 경제생활을 배우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더욱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1월 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21) 교육분야에도 만연한 계층 간 불균형


과도한 사교육 경쟁 … 상위 소수 대학에 집중

고착화된 ‘마태오효과’로 양극화 현상 심해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키는‘마태오효과’가 날로 커지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인간미를 바탕으로 하는 사람 냄새가 사라지고, 명품과 유행, 외적이고 물적인 가치 등을 숭상하는 비정한 모습으로 포장한 허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과거와 비교해 보더라도 자본주의 체제는 하루가 다르게 급격한 변화와 함께 문명의 이기와 편리를 추구하고 있지만, 계층 사이의 불균형은 많은 이들에게 심각한 고독과 소외의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생산체제 자체가 비도덕적이거나 무가치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무한 경쟁을 통해 세상의 부가 소수의 한 계층의 전유물로 자리 잡고, 대중들이 기본적인 인간적 생활과 생계를 위협받게 된다면,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의 피나는 투쟁의 길이 펼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용자와 노동자, 부유층과 빈곤층, 특권층과 소외계층 사이의 적절한 존중과 상생, 나눔의 길이 막혀 있다면 노동자, 빈곤층, 소외계층으로부터 사회주의 정신은 자연발생적으로 싹트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이념적?현실적 논쟁이 적대적인 수준에서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무한 경쟁과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절대적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이익과 효율성만을 궁극적인 가치로 삼는 일, 외적 능력에 따라 사람에게 등급을 부여하는 일 등은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경제적 이익과 성과로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인정, 동정, 사랑, 우애, 효도, 봉사, 신앙, 영원한 생명의 추구 등을 실천하는 위대한 모습이 숨어있으며, 이는 외적인 수치와 잣대로 읽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경제적 이익과 효율이라는 관점에서만 사람을 본다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나치의 이념과 체제는 노동력 없는 노인, 장애인, 어린이는 아무 희망과 기대를 걸 수 없는 무익한 존재들로 보았습니다.


자본주의가 지닌 모순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마태오효과는 경제뿐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교육적인 면에서도 나타납니다. 단적인 예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대학등록금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학등록금은 미국 다음으로 높은 수준입니다. 국가의 경제력이나 장학금 혜택 수준 같은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세계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대학교육이 기본적으로 사학(私學)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국내 전체 대학에서 사립대학이 차지하는 비율은 80%가 넘습니다. 이는 국가적 차원의 백년대계라 할 대학교육이 사적인 영역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국가와 사회가 힘과 여력이 없어 사학이 중등교육과 대학교육의 전면에 나서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해온 기여도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학도 대기업이나 재벌이 운영하는 곳과 그렇지 못한 종교재단, 소규모 재단 사이의 재정자립도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렇다 보니 각 대학별로 내놓고 있는 장학금만으로는 등록금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는 구조적 문제가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한국 대학교육 문제의 핵심에는 굳게 유지되고 있는 대학 서열 구조가 있습니다. 서열 구조의 상층부에 자리 잡은 대학들은 엄청난 적립금이나 발전기금이 있음에도 등록금을 올립니다. 대학 재정 상태도 차이가 많이 있기에 동일한 척도로 예단할 수는 없으나, 등록금이 아무리 비싸도 학생들은 대학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입시는 사교육 경쟁의 장이 된 지 오래입니다. 학력신장 측면에서 보면 방과후 사설학원이 지대한 몫을 하며, 정규 중고등학교의 역할은 매우 축소되어 있습니다. 입시 지원자들이 대학입시를 위해 한 해 동안 학원비, 입시 전형료 등으로 지출해야 하는 돈만 해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사교육에 돈을 많이 쓴 부유한 가정 학생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고, 이들이 졸업해 사회의 고위 지도층에 자리 잡게 되고, 다시 이들의 자녀가 유수의 대학으로 들어가 마태오효과는 교육분야에서도 고착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1월 1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22) 부(富)·금력(金力) 따른 새로운 신분제 출현


인품 · 학식 아닌 학벌 · 재산 따위로 인물 평가해

비싼 등록금에도 불구, 대학 졸업에 사활 걸어


마태오효과는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기괴한 모습의 사회상을 세상에 정착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부(富)와 금력(金力)에 따라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신분제가 우리 사회에 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품이나 학식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던 것은 이미 오래 전 얘기가 된 듯하고, 오롯이 그 사람이 지닌 학벌, 재산, 지위, 능력, 수입 등이 판단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부모가 지닌 재력에 학벌까지 다음 세대가 물려받다 보니‘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더 이상 적용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대학 등록금 문제로 불거진 반값 등록금 논란은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모습 외에도 우리에게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대학에, 또는 대학 졸업장에 사활(死活)을 걸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이면에는 대학에 가야만, 대학 졸업장이라도 있어야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고가 구조적으로 우리 사회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대학 등록금 문제는 단순히 대학교육 차원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 문제를 통해 표출되는 우리 사회가 지닌 모순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언론 보도를 보면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등 노동 현장에서 용역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들의 사례가 종종 눈에 들어옵니다. 가난한 부모를 둔 대학생들이 자신을 둘러싼 고단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택한 대학, 그 대학에 다닐 등록금을 벌기 위해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열악한 처지에 놓인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경쟁하거나 반목해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 아버지, 형 같은 이들과 싸워 번 돈으로 대학을 다녀야 하는 처지가 참담하게 다가왔지만, 지금은 그저 돈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는 어느 용역 아르바이트 학생의 고백은 과연 우리 사회의 사실적 폐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등록금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해 정리해고, 청년실업, 용역노동 등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노동 현실의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우리 사회의 이러한 난맥상들은 통상적인 공교육과정을 충실히 밟아 기업이나 시장이 원하는 수준의 능력을 갖춘 인적 자원들이 적절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일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가 요구하고 제시하는 정상적인 과정을 착실히 밟아온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노동자로 살기 좋은 사회’가 되지 못하는 한, 대학 문제는 해결되기 힘들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대학 졸업이 인간의 품위, 정당한 노동자의 대우, 향후 가정과 미래를 보장하는 불가피한 도구요 과정이라고 인식하고 있기에 과도한 사교육과 무한경쟁, 대학입시의 끝도 없는 싸움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올해 대학 진학률은 83.8%로 지난해 82.8%보다 1%포인트 올라 역사상 최고를 경신했는데, 이는 유럽과 미국 등 해외 주요국의 대학 진학률이 50% 안팎인 것에 비해 매우 높은 수치입니다. 이는 고학력 실업자를 양산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유럽과 북미의 나라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좀 더 선명하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 사회가 오랜 경제위기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이들 나라에서는 취업 스트레스로 앞길이 유망한 젊은이나 한 집안의 가장이 갑자기 다니던 회사에서 실직 당했다고 당장 목숨을 끊는 일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사회안전망 구축에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마태오효과로 인해 사회 곳곳에서 생겨나는 파괴적인 결과를 최소화하거나 없애기 위해서는 이를 극복할 새로운 제도와 정책이 요청됩니다. 따라서 마태오효과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불평등을 제거하고 순화하기 위해서는 정부 등 공공부문의 개입이 필수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1월 2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23) 학문 대신 ‘스펙’에만 몰두하는 대학 현실


노동 유연화정책 · 대학 난립 등이 청년실업자 양산

교육의 본질 호도하며 취업에만 매달리게 만들어


마태오효과 때문에 일어나는 불균형 심화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 극단적인 모습으로 표출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청년실업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비롯한 매스미디어에서 어렵지 않게 대할 수 있는 청년실업 문제는 바로 오늘의 문제일 뿐 아니라, 곧 닥칠 가까운 미래의 문제이기도 해 그 심각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 졸업자 취업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취업난 때문에 생기는 일이겠지만 상아탑이라는 대학에서 편법을 써서라도 취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상황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학에 대한 평가가 학문적으로 이룩한 성과와 가치에 대한 평가보다는 대졸 취업자 수효라는 양적인 면에만 치우치는 측면으로 가고 있기에 매우 불편하고 우울한 현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발표한 2011년 9월 현재 청년(15~29세) 체감실업률은 11.3%로 정부가 발표한 공식 전체 실업률 3%를 한참 웃도는 수치입니다. 불완전고용상태에 있는 취업자가 청년층에 특히 많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도 고령화사회로 들어섰다고 하는데, 결국 고령화사회의 복지를 책임질 세대인 청년들이 안정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 과연 우리 사회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두렵고 암담한 일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청년실업 문제는 지난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사용자들이 당연시 해온 구조조정이라는 칼날과 노동시장 유연화정책이 시장에서 지배적인 흐름이 된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업이 바라는 대로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된 결과 사용자들은 대졸 신입사원에게 연봉 삭감과 함께 저임금 인턴 계약, 단기고용계약 등 불완전 취업을 메뉴로 제시해 놓고 선택하라고 옥죄고 있는 형국입니다. 또한 한 사람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교육과정에서 투자해온 가치와 비교할 때 지나치게 낮은 임금을 제시해놓고, 마치 요즘 젊은이들이 배가 불러 중소기업 취업을 꺼리는 것처럼 몰아가는 여론도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청년실업 문제의 이면에 대졸자 과잉공급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011년 대학 입학생은 고등학교 졸업자의 83%에 달하였습니다. 이는 선진국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인데, 졸업생을 수용하는 기업의 수요가 부족하니 실업문제는 뾰족한 대안을 찾기 어렵습니다. 국가, 사회, 기업이 연계하여 구조적이고 혁신적인 정신운동이 요청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정부와 정치인만이 풀어야 할 숙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문제가 생기기까지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당사자인 정부는 지난 10여 년간 90여 개의 대학 설립을 허용하고 고교 졸업생의 80% 이상 대학 진학이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진학률을 선도한 대학설립 준칙주의 도입(1995년)을 성공한 정책으로 자부하고 있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아울러 기업가들은 여전히 현재의 실패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을 대학과 청년들에게만 떠넘기고 자신들은 불완전 취업에 안주하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동시장 유연화정책으로 인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회적 비판에는 귀를 닫은 채, 시장주의의 불가피성만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사회에 첫 걸음을 내딛는 청년들의 취업의 질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업계의 잘못된 채용 태도를 방기하면서 대학에게만 취업률을 제고하라고 몰아붙이는 정부의 태도는 바른 재목을 키우는 교육의 본질마저 호도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현재와 같은 식의 채용 풍토가 지속된다면 대학교육에서 학문 탐구와 창의적 사고의 계발은 사라지고 수업 대신에 입사를 위한 스펙 관리에만 몰두하는 학생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어 결국 다음 세대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학문이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참 진리에 바탕을 둔 삶의 정신적인 토대들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바로 양심, 윤리, 정직의 원천인 절대주 하느님의 숭고한 정신을 망각한 채 세상이 경제제일주의를 중심으로 표류하는 모습을 막아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2월 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24) FTA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교회는 세상 속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지상의 나그네라는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고유한 존재태(存在態)로 인해 백성들과 함께 세상이 주는 십자가 앞에 서야만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대로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가져오는 존재가 교회이고, 또 그 교회를 이루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주는 십자가입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경제문제는 더욱이 사람, 나아가 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됩니다. 참과 거짓이 분명하게 가려지는 문제라면 별 어려움이 없겠지만 경제를 둘러싼 문제들은 대개 다양한 계층에 속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이해관계에 따라 첨예하게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판단을 유보하고 사태를 관망하기만 할 수도 없는데, 그로 인한 파장이 신자들의 삶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11월 22일 숱한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난제를 던져주고 있는 사안입니다. FTA를 둘러싼 문제를 놓고 찬·반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한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식량주권 훼손과 함께 농어촌, 농어민, 중소상공인, 자영업자, 노동자와 서민의 난관이 예상됩니다. 한·미 FTA 이전에 비준된 다른 FTA(한·칠레, 한·싱가포로, 한·유럽)에서는 관세폐지 예외품목을 확보하였으나, 한·미 FTA에서는 발효와 동시에 38%, 5년 이내엔 60%의 농축산물이 무관세로 들어오게 됩니다. 농업피해 보전대책과 수출농업 육성이 담보되지 않은 한·미 FTA의 발효시기를 연기하거나 폐기하고, 피해대책을 우선 보장하라고 연일 대중시위가 격화되고 있습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만의 입장으로만 세상이 던져주는 문제를 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진리의 푯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순간순간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예수님을 자신의 삶 한가운데 모시고 그분의 뜻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적인 갈등과 어려움이 클수록 더욱 하느님께 매달려 그분의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FTA를 둘러싼 문제뿐 아니라 그 어떤 일도 이런 자세로 대할 때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드러나고 또 그만큼 주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설 것입니다.


이제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도 익숙해져버린 FTA란 자유무역협정을 뜻하는 ‘Free Trade Agree ment’의 약자로 국가 간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무역 장벽을 제거하는 협정을 말합니다. 자유무역협정은 협정 당사국 간에 관세를 비롯한 무역장벽을 제거함으로써 보다 넓은 시장에서 자유무역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국제적 시장확대 조치라 할 수 있습니다. 새 천년기 들어 활발해지고 있는 FTA는 전 세계적으로 자유무역을 확대함으로써 세계 후생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전체의 완전한 무역자유화는 정치·사회·문화·경제적 요인 등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 실현하기 어렵고 현실적으로 그것이 실현된 적도 없습니다. 아울러 FTA는 결과적으로 협정을 맺지 않은 비동맹국에 대해서는 무역상 차별조치를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계 전체의 입장에서는 차별에 의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남미 여러 나라는 미국과 맺은 FTA로 인하여 식량주권을 온전히 박탈당한 채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농축산물 생산을 포기한 아이티에서 절대적 식량부족으로 버터를 넣은 진흙빵을 구워먹는 모습은 눈물겹습니다. 이렇게 균형을 잃은 종속적 체제로 가는 FTA는 제동을 걸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FTA는 필연적 선택이 아니라, 국가들 사이의 균형적이고 비례적인 법도를 따라 체결해야 하는 상대적인 선택 사안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한 인간과 가정, 사회와 인류에게 선익을 주는 일일뿐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거룩한 행위임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활동 과정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선악(善惡)과 진위(眞僞)를 식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잣대를 갖지 못한다면 가정과 사회, 국가가 위기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 파국을 맞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FTA를 둘러싼 문제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만, 사회의 구성원인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시적 안목에서 교회가 가르치는 재화의 보편적 원리와 국가 사이의 통상 윤리에 대해 귀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2월 1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25)

정치 · 경제 논리 편승한 FTA, 소외계층 양산 우려


현대 경제학은 자원의 제약이라는 조건 아래서 개인이나 사회의 선택 문제, 합리적 의사결정 문제를 주로 다루는 등 기술적, 기능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경제학은 경제활동에 담겨있는 ‘자연법칙’을 탐구하면서 과학적 접근방법을 취해 왔기 때문에 사회과학의 전형으로 여겨져 온 학문입니다. 전통적인 경제학은 부(wealth)의 생산·교환·분배 등 일련의 경제활동에 관한 자연법칙을 찾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구체적인 탐구대상은 다르지만 관찰되고 경험되는 현상들과 이성의 추론으로 자연법칙을 찾고, 과학적 접근방법을 취하여 학문적 성과를 낸다는 면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경제는 직접적으로는 사회경제 현상을 관찰대상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을 탐구대상으로 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의 심성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그분께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사회현상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경제활동을 포함한 사회현상은 인간 행위(act)의 결과인데, 그 행위는 사람의 의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의지는 결국 그가 지닌 가치관을 포함한 인식의 산물이기에, 어떤 가치관으로 대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대상을 두고도 서로 다른 행동양식과 결과로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미 FTA에서 어떠한 주님의 섭리를 읽어낼 수 있을까요.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이성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눈으로 올바로 바라보고자 노력할 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하느님 외에는 절대선이 없기에 인간의 일은 상대적일 뿐 아니라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한·미 FTA도 표면적으로는 두 나라 모두의 경제적 선익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두 나라 정부 모두 협정이 발효되면 자기 나라에서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자국민들에게 선전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일까요. 부문별로 이해득실이 있고, 결과적으로 생존권이 위협받는 계층들도 생겨날 가능성이 매우 크고, 사회 양극화현상도 심화될 것으로 예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2004년 4월 1일 칠레를 시작으로 2006년 3월 2일 싱가포르, 같은 해 9월 1일에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2008년 11월에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자유무역협정을 발효시켰습니다. 2007년 5월에는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협상을 시작해 2011년 5월 한-EU FTA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 7월 1일자로 잠정 발효됐습니다. 이 외에도 현재 캐나다·중국·일본·인도 등과도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FTA는 협정 당사국 상호간뿐만 아니라 주변국과 전 세계에 미치는 효과까지 여러 측면에서 면밀하게 검토하고 나서 추진하는 게 마땅하지만 많은 경우 정치적·경제적 논리에 편승하여 소외계층을 양산하고 그들의 삶이 배제된 가운데 진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는 경제의 본질적인 의미를 훼손하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외시장의 확보를 목적으로 한 거대경제권과의 동시다발적인 자유무역협정 체결은 상대적으로 시장 규모가 작고 경제적 여건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국가경제에는 오히려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미 적지 않은 나라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미국과 FTA를 체결한 중미 국가들의 경우 협정 이후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심지어 식량주권마저 훼손된 실증적 사례들이 적잖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일례로 세계 최대시장이라 할 미국의 국제정책센터가 지난 11월에 내놓은 ‘자유시장으로 인한 중미의 식량위기’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 평균 40%대에 달하던 중미지역의 농업용지는 2005년 미국과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이 체결된 후 2008년에는 7.4%까지 곤두박질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의 농업 자체가 붕괴돼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이주하면서 실업률이 급상승하고 삶의 질은 오히려 과거보다 떨어지는 악순환을 낳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미국과 FTA를 맺는 것 자체를 부정하거나 반대할 수는 없으나 불공정 계약체결의 요소가 있다면 재고해야 합니다. 특히 먹거리의 핵심인 국내의 농축산업이 붕괴되고, 금융과 서비스 시장의 개방으로 국내의 소기업과 영세상인들을 벼랑으로 내몰아 빈곤층의 고통이 가중되고 사회의 양극화를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이는 결코 하느님의 뜻도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월 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26)

시대 징표 제대로 보고 올바른 몫 선택해야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화를 삼가고 드러내지 않는 것을 예(禮)이자 지혜로 여겼습니다. 한 번 노할 때마다 한 번 더 늙고 한 번 웃을 때마다 한 번씩 젊어진다(一怒一老 一笑一少)라고까지 하며 화는 속으로 삭이고 참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화내는 데는 더디셨던 분인 것 같습니다. 늘 사람들의 삶과 처지를 헤아려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기도 하고 기적을 행하시기도 하면서 당신을 청할 때 물리치지 않으시고 도움을 주시는 모습이 흡사 한없는 자애로움으로 자녀들을 대하는 아버지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도 간간이 분노를 드러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주로 겉과 속이 다른 바리사이 같은 사람이나 무능함을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에 화를 내시곤 합니다. 성경을 통틀어 예수님께서 가장 큰 분노를 터트리시는 장면은 아마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져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요한 2,13-16 참조)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시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집이 장사꾼들의 흥정과 돈 바꾸는 소리로 가득해 난장판이 된 모습을 강도의 소굴에 비교하시면서 예수님은 무서운 분노를 터트리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 찾아오신다면 어떻게 하실까 상상해볼 때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시대는 주님의 눈물을 보게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 몸이 바로 성전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세상 곳곳에서 성전이 허물어져가는 소리가 진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물질주의와 세속화를 탓하는 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속화라는 흐름은 대체로 경제, 또는 경제적인 바탕에서 비롯된 것이 많습니다.


우리 시대의 표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FTA(자유무역협정)를 둘러싼 사회현상들도 결국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자원이나 그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생산물은 유한한데 더 가지려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갈등이 빚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 시대의 대세라고까지 일컬어지는 FTA가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데 있습니다. FTA가 아니더라도 인간다운 세상이 실종되었다고 말하는데, 이제는 먹고 살기 힘든 이들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는 가운데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아우성쳐대는 모습을 이미 세상 도처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맺은 FTA만 보더라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이나 수입업자 등 몇몇은 혜택을 보겠지만 농민과 영세중소상인, 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같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있는 이들은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될 게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이로 인한 갈등 양상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아울러 철저한 대비 없이 한·미 FTA를 밀고 나갈 경우 미국에 대한 경제적 종속이 심화돼 농업의 파괴는 물론이거니와 초국적 투기 자본에 의한 금융 장악과 국부 유출, 일자리 감소, 환경 파괴 등으로 인해 우리 삶은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아름다운 세상과는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께서 또다시 분노를 터트리시기 전에 그리스도인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보고 각자의 자리에서 올바른 몫을 선택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월 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27)


한 · 미FTA, 양극화 심화의 ‘늪’


한·미FTA(자유무역협정)로 인한 파급력은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사회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FTA는 단순히 상품무역의 자유화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의 전 영역을 포괄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지난 2004년 7월 미국이 호주와 체결한 FTA의 경우를 보면, 그 포괄범위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상품에 대한 시장접근, 농산물, 제약, 국경을 초월한 서비스, 금융서비스, 전자상거래, 투자, 지적재산권, 정부조달, 경쟁정책, 분쟁해결 절차 규정, 노동, 환경 등 그 범위는 국민경제의 거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미국과 국경만 달리할 뿐 경제적으로 같은 나라나 다름없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경제적 논리로만 보더라도 자유무역협정 체결 당사국들 수준이 비슷하면 양쪽이 이득을 볼 확률이 높지만 한국과 미국같이 격차가 큰 경제권이 합쳐지면 작은 쪽이 경쟁으로 인해 불이익도 많이 받게 되고 파산에 이르는 분야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허약한 부분이 많은 우리 국민경제에 FTA로 인한 다른 충격요인이 발생한다면 그 파급력은 매우 위험한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경제 분야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 영향은 현재로서는 예측조차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전문가들은 시간을 두고 FTA가 우리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면밀히 검토해 피해는 최소화하고 국가경제에는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체결되길 주장해왔던 것입니다.


한·미FTA는 비록 경제 영역에서 일어난 문제이지만 그 영향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사회의 양극화와 더불어 갈수록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양극화도 더욱 심화될 수 있습니다. 가까운 예만 보더라도, 이전까지 지역사회에 뿌리내리고 잘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자영업을 하던 중산층 신자들이 대기업의 진출로 인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상황인데, 여기에 더 막강한 자본력을 갖춘 미국 기업들이 진출한다면 그 결과는 파탄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또 한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 되는 노동과 사회복지 분야에 미칠 여파도 만만치 않을 전망입니다. 우선 국내기업을 인수한 외국인 투자자는 고용승계 의무, 내국인의 일정비율 고용 의무, 노동기본권의 보장, 환경기준의 준수 의무 등으로부터 사실상 자유롭게 됩니다. 또 경로우대 제도 등 사회복지 차원에서 국가가 규정한 의무사항들을 지켜야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외국 기업이나 자본이 우리 사회에 깊숙이 들어오면 올수록 노동을 둘러싼 환경과 사회복지 수준이 저하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이처럼 한·미FTA는 경제적 득실에 머물지 않고 개개인의 생활에까지 깊숙이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나 서비스와 투자 분야에서 개방된 시장은 이전으로 돌릴 수 없게 한 래칫조항(역진방지)은 공공정책에도 적지 않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됩니다. 예를 들어 스크린쿼터의 경우 협정에는 ‘73일 이상’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 정부가 60일로 축소하고 나면 나중에 다른 사정이 생겨 조정의 필요성이 생기더라도 원래의 73일로 복원하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이는 경제자유지역 내 영리병원 허용이나 공기업 민영화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정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사결정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자신이 판 늪에 빠지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평신도들이나 교회에도 돌아오게 됩니다. 따라서 너무나 거시적인 담론이어서 자신과 동떨어진 문제로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둘러싼 이웃과 사회의 문제라는 점을 직시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판단과 대처 방안을 함께 모색하고 찾아나서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월 1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28) 에이브러햄 링컨과 자유무역


예수님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관세를 철폐하고 자유무역을 장려하게 되면 모든 경제부문의 우리 노동자들도 유럽에서처럼 노예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고 보호무역을 역설하는 이러한 주장을 내놓고 강하게 지지한 사람은 미국인들뿐 아니라, 인종과 국경을 뛰어넘어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으로 칭송받기도 한 이 같은 링컨 대통령의 대외정책은 요즘 시대를 잘못 읽어낸 정치지도자의 치명적 실수로까지 오르내립니다. 어떤 이는 링컨 대통령의 이러한 정책이 그가 범한 가장 큰 실수 가운데 하나라고 하지만 꼭 그런 것인지는 되새겨볼 문제입니다. 링컨 대통령을 둘러싼 이러한 논쟁은, 어떤 위대한 사람의 시의적절한 판단이나 발언도 상황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처지에 놓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링컨 대통령의 발언이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를 본다면 그의 발언을 앞뒤 딱 잘라 시대착오적인, 사리판단을 제대로 못한 결과였다는 비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재임하던 19세기 당시 미국은 기술력이나 경제력 등 많은 부분에서 유럽에 비해 한참이나 뒤처져 있었습니다. 우수한 기술력을 갖춘 유럽의 여러 나라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자체적으로 산업을 양성함으로써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유럽 국가들에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상황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기에 링컨 대통령은 미국이 경제적으로 굳건한 기반을 가질 때까지는 철저한 보호무역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그가 비록 정보화시대가 아닌 역사적 과거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과 정신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링컨 대통령의 모습에서 읽어내야 할 부분은, 국정 책임자들이 다양한 국제 관계들 사이에서 공동선을 위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판단과 고려가 필요한지, 나아가 정책적 결정이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등을 면밀하게 살필 수 있는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국정을 책임진 지도자들의 자질은 링컨 대통령과 같이 자신의 판단에 대한 책임의식과 그 기반이 되는 인류를 향한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우리는 「최고 경영자 예수 JESUS CEO」 「예수의 인간경영」「서번트 리더십」 「성경으로 배우는 리더십과 축복경영」「예수형인간」 등 예수님의 지도자적 자질이나 경영자적 능력을 거론하는 서적이나 간행물들을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이런 매체들은 예수님의 가장 크신 능력을 뭐라고 얘기할까요. 공통적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구체화되어 살아 움직이는 소통 능력, 겸손함 등을 꼽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지도자들 가운데서 이러한 예수님의 자질을 얼마나 찾아볼 수 있을 지 돌아본다면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체 국회의원 가운데 결코 적지 않은 신자 의원들마저 당리당략에 빠져 자신이 딛고 서있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반교회적이고 반인륜적 입법에 동의하는 현실에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향기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전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죽음의 그늘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일과 그 일에 대한 가치 판단을 경제적 문제로 환원시켜 개인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공동체를 망가뜨릴 뿐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 파괴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뚜렷한 푯대나 방향도 없이 신자유주의 조류에 몸을 내맡긴 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거센 풍랑에 난파당하지 않고 안전한 항구에 들어가려면 모든 사회 구성원의 하나된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인간적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성부께 의탁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되새기며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 가치를 두는 자세가 더없이 필요한 때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월 2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29) 이상한 모습의 가난


여러분은 어떤 가난을 살고 있습니까?


‘부(富)나 자산(資産)이 있는데도 가난하다.’


예전 같으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법한 이런 말이 근래에는 일상적이거나 상식으로까지 통하는 현실과 대면하면서 우리는 가난과 부라는 개념이 모호해 매우 혼란스럽게 느껴집니다. 가난이라는 개념도 그 시대의 사회 현실과 경제를 둘러싼 다양한 양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주위에서는 집이 있지만 오히려 집 때문에 가난하게 사는‘하우스 푸어(house poor)’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집이라는 드러난 자산 때문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임에도 곤경을 겪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식교육으로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리타이어 푸어(retire poor)’, 곧 은퇴라는 말은 물론이고 스스로를 ‘리빙 푸어(Living Poor)’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계 소득이 줄어들었는데, 육아 교육 등에 갈수록 돈이 많이 들어 이러저런 대출로 힘겹게 생계를 이어가는 ‘생활의 빈곤’ 상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젊은 세대들 가운데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된 ‘잡 푸어(job poor)’는 취업 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니고, 자격증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돈을 많이 지출하는 경우입니다. 취업을 위해 이른바 스펙을 쌓는 비용까지 포함시킨다면 사실 오늘날의 ‘잡 푸어’ 문제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이비 푸어(baby poor)’라는 용어는 출산으로 인한 양육비, 교육비 등 아이들을 위해 지출되는 돈들로 인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노후 대비는커녕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빈곤하게 살아가게 되며, 그 가난을 다음 세대에까지 물려줘야 하는 현재의 우리나라 젊은 부부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해 부각되고 있는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워킹 푸어(working poor)’가 아닐까 합니다. 말 그대로 직장은 있지만 날로 확산되는 비정규직과 저임금 등으로 인해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이들을 지칭하는‘워킹 푸어’는 경제난과 맞물려 증가하고 있는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가구 구성원 가운데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전체가구를 대상으로 측정한 평균가구 소득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해당됩니다. 이들 ‘워킹 푸어’는 쉬는 날 없이 일을 해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요즘 청년층들은 다른 연령층에 비해 열악한 소득으로 인해 ‘워킹 푸어’로 내몰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취업난으로 인한 고통이 가장 심한 청년층(20~30세)의 임금 수준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취업 대란의 영향으로 일자리를 찾는다 해도 주로 저임금 산업에 종사하는 탓입니다.


이처럼 가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단어들이 많은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여러 가지 양상의 가난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난으로 인한 문제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가난의 진정한 의미와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강조해온 가난의 정신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재물과 재능의 마지막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은 관리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 사람은 잠시 관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 재물과 재능을 좋은 일에 잘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이기적 욕망과 교만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 이런 과도한 욕심과 교만이 숱한 죄악을 낳아왔음을 보아왔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곤경에 빠져 신음하는 사회와 이웃 형제를 도우며 사는 가난의 정신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힘든 때일수록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가난을 살고 있습니까?’


[가톨릭신문, 2012년 2월 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30) 함께할 영성과 그리스도적 실천의 기회로 삼아야


올바른 경제활동의 목적 망각하지 말자


오늘날 우리는 일찍이 접해보지 못했던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해 생겨난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새로운 분수령 앞에 서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옥죄고 있는‘가난’을 떨쳐보고자 자유무역이라는 방편을 선택한 나라의 사람들은 이 미증유의 사태가 자신의 삶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듯 한 사회 전체가 맞닥뜨리게 되는 고비나 위기는 늘 새로운 세상을 향한 불안한 가능성을 지니고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게 됩니다. 같은 출발선 위에 서있다고 하더라도 수동적이고 미온적인 태도로 주어지는 상황에 몸을 내맡길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삶을 향한 정신적 무장과 실천으로 헤쳐 나갈 것인가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질 게 분명합니다.


많은 나라들이 체결한 FTA를 둘러싼 관계들 속에는 빛과 어둠이 함께 존재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나라들이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차지하려고 경쟁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나라에 더 많은 어둠이 드리우게 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생존이 걸린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쪽도 양보하기가 쉽지 않고, 이로 인해 불평등이 내재되어 폭발할 가능성이 어느 영역에서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FTA라는 틀 안에서는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윈-윈 전략’이 통하기가 힘들고 한쪽이 극심한 곤경에 허덕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미 FTA를 체결한 나라들의 상황을 돌아봐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 1992년 미국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한 멕시코는 이 협정이 양극화를 해소하는 등 국가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NAFTA 발효 후 현재까지 국민소득 중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노동소득분배율은 점진적으로 하락해 양극화가 더 심화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경제성장률도 NAFTA가 발효되기 이전의 절반 수준인 3%대에 머물고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도 반대로 떨어져 삶의 질은 예전보다 못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또한 NAFTA 발효 후 10여년 사이에 농촌에서 500만 명이 넘는 실업자가 발생해 농업이 사실상 붕괴상태에 처했을 뿐 아니라, 매년 30만 명이 일자리를 찾아 미국 국경을 넘어 불법이민자 신분으로 전락하는 등 머리 아픈 사회문제를 낳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NAFTA로 미국식 의료체계가 도입되면서 국가적 의료시스템마저 붕괴되어 가난한 사람들은 심각하게 아프지 않으면 병원 갈 생각도 하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유무역협정은 각 나라와 지역의 상황과 맞물려 예기치 못한 다양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그림자는 가난한 이들 가운데 더 짙게 드리우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 섰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도 더 가난한 이들을 향해 열려 있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어떤 특정 조직의 이념이나 이해관계만을 내세우게 될 때 그리스도의 사랑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의 경제문제뿐 아니라 영성적인 면까지 고려해 다가서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경제는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사다리이자 발판일 뿐, 그 자체가 결코 삶의 목표나 본질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제는 그동안 우리가 형성해 온 문명에서 인간성을 풍요롭게 해주는 중요한 영역이기에 결코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창조적 지혜를 총동원해서 사회 전체의 정신적 만족과 영성적 성숙의 끈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곧 경제활동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목적의식을 망각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인류가 역사문화적으로 축적된 삶의 가치와 의미를 깊이 가슴에 새기는 가운데, 인류 공동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공동선을 지향하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 건설을 위해 교회가 가르치는 지상재화와 경제생활의 규범과 원리를 실천하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2월 1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31) 우리 시대 착한 사마리아인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29-37)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강도를 만나 곤경에 처한 사람의 참 이웃은 거룩한 직분의 사제도,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인임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다인들이 마주치는 것조차 꺼리는 상종 못할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의 삶을 당신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모델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선 마지막에 예수님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통치하시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방법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다양한 경제 현상과 이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면서 우리는 순간순간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해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관계들도 결국 관련 당사국들 사이에 이웃으로서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경제문제를 매개로 한 이웃관계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처럼 누가 우리의 참 이웃인지, 참 이웃이 되려면 어떠한 관계를 맺어나가야 하는지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국가 사이에 이익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세계 무역환경 속에서는 오히려 이웃의 개념이 무의미해질 때가 적지 않게 생겨납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처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비유에서처럼 자신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여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이들을 결코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미 FTA를 비롯해 우리나라가 세계 여러 나라들과 확대해나가고 있는 자유무역협정들은 결국 기존의 익숙하던 경제시스템을 새로운 혁명적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분명 경제적 이득을 누리는 이가 있을 것이며, 아울러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대적으로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이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징표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경제적 논리에 묻혀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서 발아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잊고 있거나 유보하고 있지 않는지 끊임없이 돌아보길 요청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주라는 준엄한 명을 거부하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2월 1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32) 우리 시대 착한 사마리아인


예수님 눈으로 세상 모든 일 볼 수 있어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 경제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라는 의미 외에도 한국 사회의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좌우하는 중요한 가늠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만년이라는 역사 동안 한반도에서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형성되어온 민족 고유의 문화와 전통 안에 녹아있는 가치관이 외부와의 관계성 속에서 재정립되는 시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미 FTA는 미국, 나아가 국제사회 안에서의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한 번 발효되면 두 번 다시 돌이키기 어려운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려되는 것은 한·미 FTA는 법으로서의 규제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국민 각자의 양심이나 판단력을 점진적으로 무력화하거나 마비시켜 새롭게 도입되는 가치체계와 정치경제체제를 영속화시킬 위험성마저 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FTA로 인해 밀려들어오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체계에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체계에 따라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루아침에 살아오던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이로 인한 부작용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해결책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우리는 마르코복음에 등장하는 ‘하느님 나라’의 관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FTA 등으로 인한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시작됐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인해 완성될 나라이기에 오늘의 세상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부조리한 면이 적지 않습니다. 이 땅의 제도들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제도도 완전할 수 없고 부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난 인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좀 더 선하고 인간에게 유익이 되는 제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써 왔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제도도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완전하다고 여기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강요할 때 빚어졌던 슬픔과 고통이 인류 역사 안에는 적잖이 새겨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에서 “종살이의 멍에를 메고 있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 주인을 크게 존경해야 할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1티모 6,1)라고 말합니다. 언뜻 보면 바오로 사도가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을 동물이 메는 ‘멍에’라고 말함으로써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불완전한 사회제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불완전한 상태에 있고, 우리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제도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멍에가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에 따라 개선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그에 마땅한 대가를 치르면서 하느님의 가치가 세상 안에 싹을 틔우고 뿌리내려 가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당장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한계와 부조리를 직시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정신에 부합하는 대안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에게 참된 이웃, 형제가 되어주는 길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2월 2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33) 우리 시대 착한 사마리아인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회인가?


우리는 풍요롭고 평화로울 때 그것의 소중함을 잊고 그 가치를 돌아보는데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국민총생산과 교역량, 1인당 국민소득 등 경제지표 성장에만 목을 매는 모습이 일상화되고 있는 가운데, 마치 경제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사회병리적 문제가 한꺼번에 사라지기라도 하는 양 경제제일주의가 삶 깊숙이 파고들어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공동체, 나눔, 평화 등 경제문제들과 거리가 있는 비경제적 가치들은 삶의 부수적인 부분으로 전락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물론 경제가 삶의 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경제력이 증가한다고 더 행복해진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지난 1948년도만 하더라도 교역량에 있어 세계 100위였는데 이제는 10위권 안에 드는 나라가 됐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더 행복한 사회가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에 눈길을 맞춘 하느님 나라 백성이라면 얼마나 더 잘살게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더 하느님의 정의에 부합되고 어떻게 해야 공동체적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는가, 그래서 얼마나 더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회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그 길을 보여주십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이 그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 1,27)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참 이웃이 되어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FTA문제뿐 아니라,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주위의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지 우리에게 묻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서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국제 질서와 관련해 어떤 자세를 취하시고 어떻게 국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심판하시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 넘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길을 막는다. … 그러므로 이제 나는 곡식 단으로 가득 차 짓눌리는 수레처럼 너희를 짓눌러 버리리라. 날랜 자도 달아날 길 없고 강한 자도 힘을 쓰지 못하며 용사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아모 2,6-7.13-14)


정의를 훼절함으로써 어떤 이는 더 잘살게 되고, 다른 이들은 더욱 헐벗고 굶주리게 된다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리라는 것이 성경이 들려주는 가르침입니다.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강대국들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보다 훨씬 부강한 우리나라도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 깨어있어야 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하느님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그것에 맞서 일어설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법을 수호하는 일입니다. FTA를 둘러싼 문제를 생각할 때도 우리나라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국가주의의 입장에 서는 것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 대해서도 정의를 요청하며, 자신보다 약한 나라에게 온정과 관대함을 펼치는 제도인지 살필 때, 주님의 정의가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익이 선’이라는, 모든 것을 경제적 문제로 환원시켜버리려는 세상의 흐름과 맞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FTA와 관련해 이로 인한 실익보다는 하느님의 정의의 입장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먼저 살피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판단이 어려울수록 상황에 관계없이 불변하는 척도인 복음의 정신을 전할 수 있는 예언자적 자세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3월 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34) 착한 사마리아인과 나쁜 사마리아인


자유무역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광풍(狂風)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The Good Samaritan Law)’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로, 자신에게 특별한 위험을 가져다주는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해 주지 않은 행위를 처벌하는 법입니다. 이 법은 자신에게 피해가 없는데도 어려운 상황에 놓인 다른 사람을 구조하지 않은 ‘구조 불이행’(Failure-to-Rescue)을 저지른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프랑스를 비롯해 가까운 중국 등 적지 않은 나라에서 이러한 법을 두고 있습니다.


법으로 사람의 선행을 강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약자를 보호해야만 하는 이런 제도를 시행하는 일은 오늘날의 세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참다운 이웃은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사랑을 나누는 이들이며, 이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되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고 강조합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하루가 멀다 하고 진행되는 급격한 세계화로 서로 다른 지역 국가들 사이의 국제무역이 일상화되고,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복잡다단한 국제 상황 속에 ‘나쁜 사마리아인’이란 말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쁜 사마리아인’은 이기적인 부자나라들을 가리킵니다. 이들 나라들은 자신들은 보호무역으로 이득을 챙길 만큼 다 챙기고 나서 개발도상국들이나 후진국들이 공정한 경쟁에 못 뛰어 들게 하기 위해 자유무역(Free Trade)을 권하고 심지어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에서 파생되는 자유무역의 폐해와 국제관계 안에서 드러난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고 자유무역의 거짓 신화만을 과대포장해 정보에 어두운 이들을 속여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더 깊은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실제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자유무역의 선두 주자라고 알려진 영국과 미국이 실은 부자나라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심하게 자신들의 나라에 대해서는 강력한 보호무역정책을 실시한 나라였다는 점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입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키케로가 “과거에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항상 어린아이처럼 지내는 셈이다. 과거의 노력을 무시한다면 세계는 늘 지식의 유아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과거의 ‘진실’을 바로 알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 게 오늘날 국제관계에서 벌어지는 모습들입니다.


자유무역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의 광풍(狂風)이 지구촌 구석구석을 휩쓸면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곳도 거의 없습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 나라의 국부를 압도하기까지 하는 막대한 자본을 앞세운 초국적기업들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발을 빼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투자나 활동을 규제하는 나라들에게 본때를 보일 수 있는 정도로 막강해져 있습니다. 나아가 부자나라들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나라에 대해서만 투자 결정을 내리고,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국제협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이러저런 제한을 부과해 결국 자신들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제 경제 전쟁이 일상화된 국제사회에서 ‘착한 이웃’, ‘우호’라는 말은 겉포장에 지나지 않는 수사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이런 정의가 사라져 버린 듯한 국제관계 속에서, 특히 경제를 둘러싼 관계들 속에서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몫을 고민해 봐야 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3월 1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35) 착한 사마리아인과 공정무역 (1)


불평등한 국제무역 바로잡는 ‘윤리적 소비’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세계화의 광풍(狂風)이 세상을 휩쓸면서 가난한 이들을 지켜주던 희망의 촛불은 갈수록 잦아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가 희망이 되고 복음이 되는 삶을 살아 주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너무도 거대한 흐름이어서 넘어서기는 고사하고 숨쉬기조차 힘든 상황이라 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 희망을 주면서 끊임없이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내야 한다고 성경은 천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분명히 명령한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마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 너의 하느님이 함께 있어 주겠다.”(여호 1, 9)


도저히 거스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흐름 앞에서도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주님 말씀만을 믿고 세상을 향해 눈을 더 크게 뜨면,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대안’이라는 씨앗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와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세계화라는 폭풍 앞에 존재조차 느끼기 힘든 미풍(微風)처럼 보일지라도 그 미풍 속에 주님의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가까이서 아주 미소한 모습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윤리적(착한) 소비’라고도 불리는 공정무역(Fair Trade)입니다. 저개발국 생산자에게 합리적 대가를 지불해 지구촌의 빈부 격차를 줄이자는 뜻에서 시작된 자발적인 움직임입니다.


공정무역은 진솔한 대화, 불의를 불식시키는 경제적 흐름의 투명성, 인간의 기본적 생존권 등을 바탕으로 하여 국제무역에서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국가들 사이의 우호적 거래입니다.


공정무역은 18세기 영국에서 노예무역과 노예제도 폐지를 염두에 두고 실시된 설탕불매 운동이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뜻있는 종교인들이 중심이 돼 노예노동으로 생산된 서인도제도의 설탕 대신 노예들이 생산하지 않는 동인도지역의 설탕을 대체 구매하자는 대대적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결국 이 운동으로 1807년 노예무역이 폐지되고 1833년에는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노예제가 폐지되기에 이릅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1950년대 말, 영국의 국제적인 빈민 구호 단체인 옥스팜(Oxfam)이 홍콩에 거주하는 중국 난민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판매한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이후 이와 같은 움직임은 공정무역 단체를 만드는 시민운동으로 이어져 1964년 세계 최초의 공정무역 기구인 ‘옥스팜 페어 트레이딩(Oxfam Fair Trading)’이 탄생하고, 1967년에는 네덜란드에서 ‘페어 트레이드 오가니사티에(Fair Trade Oganisatie)’가 설립돼 제3세계 극빈 노동자들을 살리는 운동이 보다 본격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정무역은 가난한 나라에서 경제발전의 혜택에서 소외된 생산자들과 노동자들에게 보다 나은 거래 조건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에 기여하게 됩니다. 공정무역단체들은 소비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생산자들에게 지원을 제공하고, 기존의 무역 관습과 법규를 개혁할 수 있도록 의식 개선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공정무역만으로는 갈수록 격해지는 양극화 문제라든지 경쟁에서 승리한 이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승자독식의 세상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대우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의 기반을 제공해줌으로써 그들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면, 그래서 하느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맛들일 수 있다면 분명 뜻있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공정무역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만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3월 1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36) 착한 사마리아인과 공정무역 (2)


오늘날 ‘착한 소비’ … 초대교회 공유경제 재현


이른바 ‘윤리적(착한) 소비’를 바탕으로 한 공정무역은 세계화로 넘실대는 각박한 경쟁시장에서 그리스도적 가치를 지켜나가고 하느님 나라를 지상에서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1997년 만들어진 국제공정무역상표기구(FLO)는 일정한 기준에 맞는 상품을 공정무역 제품으로 인증해주고 있습니다. 공정무역 제품으로 인증을 받게 되면 생산자들은 최소한의 가격을 보장받습니다. 자유무역 체제에서는 생산량이 대책없이 증가할수록 생산자의 삶이 피폐해지기 쉽지만, 공정무역 체제는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일례로, 세계 시장 가격이 최소 가격보다 올라가면 현재의 세계 시장 가격대로 지불하고 그 아래로 내려가지 않도록 조절하며 엄격한 감독을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유통 구조를 최소화해서 거기서 생기는 이익의 많은 부분이 생산자에게 돌아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공정무역 상품에는 사회간접자본의 개발을 위해서 일정액을 생산자에게 추가 지불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를 ‘사회적 초과 이익’이라고 하는데, 이것으로 생산기술을 개발하거나 마을에 병원과 학교를 세우거나 도로를 포장하거나 상수도와 전기 시설 등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어떤 곳은 연금제도를 만들어서 노령으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을 보장해주고 있기 때문에 공정무역이 지닌 가치는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격이 일반 제품보다 조금 비싸더라도 기꺼이 그것을 선택하는 행위는 단순히 ‘착한 소비’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착한 소비자들이 많아짐으로 인해 붕괴 지경에까지 내몰렸던 농촌의 가정들이 생산활동을 유지할 수 있게 돼 마을 공동체가 발전하고,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만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합리적 소비’의 차원을 넘어 사회, 나아가 환경, 생태계까지 생각하는 ‘윤리적(착한) 소비’가 우리 삶의 뿌리가 되고 확산될 때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이 전개했던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공유경제의 모습이 전 세계로 확대되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윤리적 소비’는 인간, 동물, 환경을 착취하거나 적어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 형태를 의미합니다. 즉, ‘합리적인 소비’가 비용의 최소화, 효용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제적인 면에 중점을 둔다면, ‘윤리적 소비’는 환경, 노동, 동물 보호와 같은 도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고려하는 소비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윤리적 소비를 삶의 준거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윤리적인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환경 보호, 인권 보호 등 사회적 책임을 갖고 윤리적 생산을 하는 기업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런 기업은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 사라지고 윤리적 경영을 하는 기업들이 늘어나 좀 더 인정과 연민이 넘치고 사람냄새 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 가치와 하느님 나라의 가치가 현존하는 모순적 상황에서,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바보스럽게 보일지라도 ‘홀로’가 아니라 ‘함께’할 수 있는 가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상의 순례자인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이기도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4월 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38) 착한 사마리아인과 공정무역 (3)


올바른 소비생활, '창조활동' 동참하는 것


소비는 인간은 물론이고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피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 28)고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은 좋은 것들을 사람에게 주시며 양식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창조 때부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소비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고 지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소비활동에는 생산활동을 포함한 광범위한 경제활동이 전제된다는 것입니다. 천지창조에서도 볼 수 있듯 창조(생산)한 이후에야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소비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소비활동이 곧 창조활동에 동참하는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리는 소비자의 힘


이처럼 소비와 생산 활동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실제로 일상에서 쉼 없이 이뤄지고 있는 소비활동은 소비 자체만으로 그치지 않고 소비의 연장선상에서 생산활동을 비롯해 그 생산이 이뤄지는 환경과 생태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단적인 예로 한 유명 아웃도어 의류업체를 둘러싼 동물학대 논란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업체는 윤리적 생산을 강조해왔지만, 실제로는 동물학대를 통해 대량생산된 거위 털로 제품을 만들어온 사실이 폭로되면서 상당수 국가에서 불매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해당 산업계의 생산방식과 관행이 바뀐 것은 물론 소비자들의 소비 양식도 바뀌는 등 적잖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례에서 보듯 소비자의 선택은 사회적으로나 생태적으로도 건강한 소비와 생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자신뿐 아니라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소비활동의 중요성을 보여주듯 ‘소비는 일종의 투표 행위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소비행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모습이 현격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사회와 환경을 생각하고 건전하고 함께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염원한다면 ‘윤리적(착한) 소비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잣대를 가지고 윤리적인 소비를 해나가야 할까요.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고 있는 많은 단체와 사람들은 ▲ 사람과 노동을 위한 소비 ▲ 농업과 환경을 살리는 소비 ▲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 소비 ▲ 건전한 문화를 위한 소비 등을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노동을 위한 윤리적 소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거리가 그 어느 때보다 좁혀진 이 시대에도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생산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기까지 합니다. 지금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제3세계 가난한 나라에서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생계를 위해 이윤추구의 수단과 방편이 돼 희생되고 있는 현장이 비일비재합니다. 아동노동문제뿐만 아니라 저임금·장시간 노동, 열악한 근로조건, 환경 파괴, 노동의 기본권리 박탈 등 노동자의 본질적 권리가 크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또한 불평등한 무역 구조로 인해 제3세계 가난한 생산자들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큰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공정무역(Fair Trade)’입니다.


가난한 생산자들에게 공정한 임금을 지급하고 적절한 노동 환경에서 만들어진 상품만을 거래하고, 지속가능한 사회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눔의 정신이 바탕이 된 윤리적 소비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의한 세상을 바꾸는 저력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4월 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39) 착한 사마리아인과 공정무역 (4)


윤리적 소비는 지구 생태계 살리는 지름길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영위해오던 소비생활의 양식을 바꿈으로써 지구 반대편 어딘가 절망의 그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가정이 웃음을 되찾고 굴욕적 노예의 모습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분으로 새로운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기뻐 눈물짓는 장면을….


우리가 윤리적 소비를 통해 가능하게 된 공정무역으로 인해 달라질 수 있는 세상은 경이로운 선물을 지구촌 곳곳에 선사하게 됩니다. 다만 가까이서 보고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이렇듯 윤리적 소비는 우리 지구상에 있는 한 가족의 웃는 얼굴을 되찾아주는 소중한 행위이며 세상에 주님의 마음과 사랑을 심는 아름답고 창조적인 운동입니다.


농업과 환경을 살리는 윤리적 소비


우리는 평소 의식하지 못하지만 음식을 소비하는 활동만 보더라도 단순히 먹거리가 몸으로 들어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수많은 경제활동과 연계돼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에 이로운 농산물을 찾아 섭취하는 행위는 소비자 개인의 선택에 머물지 않고 수많은 ‘파생효과(Derivative Effect)’를 낳게 됩니다. 파생효과란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일로 인해 크고 작은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는데, 특히 발명이나 기술상의 새로운 변화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광범위한 영향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까운 예로 소비자들이 농약과 화학비료 등을 쓰지 않은 유기농 쌀이나 농산물을 선택해 소비하는 일은 단순히 그 개인이나 가족의 건강을 위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소비자에게는 개인적인 선택일 뿐이지만 이러한 소비자들이 많아질 때 유기농산물을 생산하는 농민과 농업계에 희망과 안정을 주면서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농산물이 오가는 유통망도 새롭게 구축됩니다. 이렇게 되면 패스트푸드와 인스턴트식품 등 이른바 정크 푸드(junk food)로 우리 몸뿐 아니라 사회까지 병들게 하는 소비시스템을 혁신하여 결과적으로 우리 밥상 공동체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농약 등 화학약품으로 인해 파괴되는 생태계를 보호하는 결과로도 이어집니다. 유기농업이 활발해져 동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는 경작지 면적이 늘어나면 다양한 생물들이 찾아오게 돼 그만큼 생태계가 오염된 환경을 벗어나 풍요로워지게 됩니다. 또한 경작지 자체가 깨끗하게 유지됨으로써 공기 정화 기능도 확대되는 등 파생효과가 커지면서 국민 건강뿐 아니라 생태계 자체의 건강도 좋아지게 됩니다. 이렇듯 윤리적 소비는 자신과 가족은 물론 지구 저 반대편의 친구와 형제를 살릴 뿐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 생태계의 많은 생명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아울러 윤리적 소비자라면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소비하는 ‘로컬 푸드(Local Food)’ 운동에도 적극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운동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우선적으로 소비함으로써 장시간 유통 과정에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함부로 농산물에 뿌려지는 농약과 방부제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합니다. 나아가 농산물 유통 거리를 단축시킴으로써 탄소배출량도 줄여 지구온난화를 막는 일에도 도움이 됩니다.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적 가치를 가지고 조금만 더 고민해서 윤리적인 선택을 할 때,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세상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경제활동 안에서도 윤리적 소비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는 길임을 깨닫고 보다 많은 이들이 이 길에 함께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는 소명을 부여받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4월 1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40) 착한 사마리아인과 윤리적 소비 (1)


윤리적 소비로 ‘안전한 먹거리’ 되찾자


우리 조상들은 먹는 일을 신성하게까지 여겼습니다. 먹거리를 구하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힘겹고 때로는 목숨까지 담보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먹는 일은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먹는 일은 삶에 있어 가장 신성한 행위나 과정이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또한 음식은 곧 약이자 우리 몸의 일부일 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줄로 보았기에 지도층이나 황제들조차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을 중요한 소명과 책무로 생각해 몸소 농산물을 심고 수확하는 모범을 보였던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삶을 보더라도 식사 율법은 신성한 규율로 정할만큼 그 품격을 높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식사 율법은 정결함과 신성함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 윤리적 소비


이렇듯 인간의 생존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먹는 일은 중요한 소비활동이자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경제활동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먹거리와 먹는 행위를 신성하게 여기는 자세나 태도가 사라진다면 개인의 삶은 물론 경제활동 전체가 점차 그 신성함과 건강함을 잃어가게 될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 생산수단과 생산력의 발전에 힘입어 먹거리 문제는 많이 해결된 듯 보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경제적 이익에만 마음이 어두워 먹거리의 청결함과 위생은 외면한 채 대량생산에 열을 올림으로써 갖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식용 육류를 싼값에 대량으로 공급하기 위해 좁은 우리에 많은 가축을 한꺼번에 몰아넣고 기르는 오늘날의 축산 방식은 가축들에게 심한 스트레스와 질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가축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항생제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또한 지나치게 사용하면서 내성이 생겨 항생제를 투여해도 병이 잘 낫지 않는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이런 가축들의 폐사를 막기 위해 더 강한 항생제를 과도하게 쓰게 되고, 이렇게 생산된 육류를 사람이 섭취하면서 깨닫지 못하는 사이 사람의 몸 안에도 항생제가 축적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동물은 동물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병들어가는 자연스럽지 못하며 부도덕한 먹거리 순환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소비 방식을 바꿔 윤리적 소비를 하게 된다면 오랫동안 잠재적으로 길들여진 잘못된 삶의 양식도 바뀌게 됩니다. 자연상태에 가까운 방사시설이 갖춰진 곳에서 기르는 닭과 달걀을 소비하고, 깨끗하고 쾌적한 시설을 갖춘 축사에서 가축들이 사육되도록 관심을 가지며, 항생제와 성장 촉진제를 사용하지 않은 육류 제품을 찾는 소비자가 늘어날 때,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걱정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유전자조작식품(GMO), 식품첨가물이 지나치게 들어있는 가공식품 등을 소비하지 않는 것도 우리 건강을 지키는 최적의 윤리적 소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 생태계를 보전하고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로하스(LOHAS 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라고 하는데, 이는 자신의 건강한 삶을 중시하는 ‘웰빙’과는 달리 공동체 전체를 먼저 고려하여 의식 있는 삶을 선호하면서 환경에 끼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소비생활을 실천하는 생활방식을 뜻합니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뿌리내려 미국 소비자만 보더라도 약 30%인 6700만 명이 로하스족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이 같은 생활방식이 신재생에너지, 친환경레저산업, 유기농산물 등 관련 산업군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렇듯 어느 개인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우리 신앙선조들이 꿈꾸었던 나라일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 성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4월 2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41) 착한 사마리아인과 윤리적 소비 (2)


지역 환경과 경제 살리는 ‘공정여행’


생태계를 고려하지 않은 사람들의 무분별한 경제활동으로 인해 초래된 기후변화를 비롯한 범지구적인 환경위기는 이제 막다른 길로 치닫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내가 먼저 죽을 판인데’라는 미래 세대를 담보한 경제적 논리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당장 눈앞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서 지구환경을 위험에 몰아넣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 비롯된 ‘로하스’라는 윤리적 소비활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와 지구 생태계까지 보존하는 운동으로 이어져 선진국에서는 농산물은 물론이고 공산품의 생산양식까지 바꿔놓을 정도로 의미있는 생활방식으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습니다. 로하스로 대변되는 윤리적 소비활동은 화석에너지에 의존해온 기존의 경제개발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는 개념조차 모호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 삶이 자기 주변을 돌아보기 힘들 정도로 각박하고 힘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도 보았듯이 조그만 의식 변화와 의식적인 실천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건전한 문화를 위한 윤리적 소비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선진 사회에 근접한 나라일수록 삶의 양식이나 질 문제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선진화된 나라일수록, 특히나 경제적으로 풍족한 국가일수록 건전한 문화를 향유하기 위한 모색과 노력을 다채롭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공정(착한)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임여행이라고도 하는 공정여행은, 여행을 할 때 지역 경제에 별 보탬이 되지 않으면서 자연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관광산업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어떻게 하면 현지 주민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공정여행은 여행자들이 대형 리조트나 호텔 체인 대신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박업소와 식당을 이용하고, 현지인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 등 여행하는 곳 현지의 원주민과 문화를 배려하는 여행 소비 형태를 말합니다. 대형 숙박시설이나 여행사들의 대부분은 그 지역과 별로 상관이 없는 대기업들이 투자해 수익의 대부분이 지역 바깥으로 빠져나가 지역경제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머물지 않고 공정여행은 여행지의 문화와 생활을 체험하고, 여행 중에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등의 의식적인 활동을 통해 여행지의 환경을 온전히 보존함으로써 여행을 단순히 주어진 여가를 개인적으로 소비하고 즐기는 방편에 그치지 않고 함께 나누는 건전한 문화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은 여행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면이 적지 않습니다.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 7-9)


현대인들은 소유를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많이 가질수록 강해진다는 과시욕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청빈과 복음 선포자의 자세를 일치시키는 말씀이지만, 모든 이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지상의 순례자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반성하도록 일깨우고 있습니다. 물질을 따라, 물질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에 기대 살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여행은 사랑이신 주님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만드신 더 큰 세상과 만나고, 그 세상 속에 깃든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인 것입니다. 공정여행은 세상을 순례하는 처지인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여행자가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실천할 수 있는 보배로운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4월 2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42) 소비자이자 투자자인 그리스도인 (1)


세계 경제 시장 긴장시킨 ‘노라 내시’ 수녀


우리는 앞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경제행위를 영위하려는 소비자들이 윤리적 소비 등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정신을 선택함으로써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건전하게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을 모으다시피한 전 재산을 사회와 공익재단에 기부하기도 하고, 자신의 육체적 건강을 돌보기 위해 재충전을 하거나 쉬어야 할 시간에 소외된 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참여하거나 돈을 벌어야 할 때 돈과는 무관한 듯 보이는 이웃을 위한 일에 나서는 사람들의 행동들은 윤리적이고 영성적 가치를 선택함으로써 변화된 삶의 태도가 확장, 발전해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약한 개별 존재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던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대한 도전이 교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대안적 행동들로 변화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부활을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활체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60대 후반의 한 여성이 뉴욕 맨해튼에 있는 세계 최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를 찾았습니다. 임원 3명이 나와 정중히 그를 맞이했습니다. 이 여성은 골드만삭스 측에 과도한 임원 연봉 제한, 경영 투명성 제고, 취약계층 지원 등 세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일반인 평균 연봉을 3시간에 벌어들이는 최고경영자들의 고액연봉은 부도덕하며 정당하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초국적기업의 임원들을 긴장하게 만든 이는 다름 아닌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수녀회 소속 노라 내시 수녀였습니다.


내시 수녀가 이런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경제활동의 부산물인 환경오염과 노동자들의 저임금 등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오던 그는 투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로 다짐하며 수녀들의 퇴직금을 종자돈으로 ‘기업사회책임위원회’를 만들고 주식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에는 ‘기업책임 실현을 위한 종교간 센터(the Interfaith Center on Corporate Responsibility: ICCR)’에 가입하기에 이릅니다. ICCR은 그리스도교 교리를 기반으로 투자를 통해 행동에 나서는 단체로 운용하는 기금 규모가 1000억 달러에 달합니다.


내시 수녀는 문제가 되는 회사를 선정해 주주총회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위력이 발생했습니다. 수녀회에서 임원진 면담을 요구할 때 해당 기업이 거부하면 그 파장은 감당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내시 수녀는 1981년 세계적 다국적기업 제너럴 일렉트릭(GE) 주주총회에 참석해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중단할 것을 촉구합니다. 당시 GE 최고경영자 잭 웰치 회장은 내시 수녀의 활동에 감명을 받아 그를 만나기 위해 헬기를 타고 직접 수녀원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최대의 군수업체로 꼽히는 록히드 마틴 CEO 로버트 스티븐스와 메이저 석유회사인 BP 칼 헨릭 스반베리 회장은 회사 경영에서 내시 수녀의 의견을 항상 참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성 프란치스코 수녀회는 다양한 회사의 경영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맥도날드에는 소아비만 대책을, 세계 최대 에너지기업인 엑슨 모빌에는 석유 채굴로 지반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대책을 요구했습니다. 세계 최대 유통회사인 월마트에는 매장에서 성인 비디오게임을 철수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수도회가 조용히 펼쳐온 주주 권리운동은 미국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심으며 기업들의 실질적 변화는 물론이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수녀들의 퇴직금이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수도자들의 선택은 세상 속에 서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세속이 던져주는 도전들에 어떻게 응전해 나갈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5월 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43) 소비자이자 투자자인 그리스도인 (2)


물질 · 이기주의에 길들여진 ‘현대인’


한 나라의 위세를 능가하는 초국적 기업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주님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고 하느님 나라의 영토를 조금씩 넓혀나가고 있는 미국 성 프란치스코 수녀회 수녀들의 활약상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내시 수녀는 자신들의 활동이 기업을 위기에 빠뜨리려는 게 아니라,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시 수녀는 “우리 사회에 탐욕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가 자리잡았다”면서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이러한 기업들과 거리의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철학적이고 윤리적 괴리가 있다”며 탐욕과 이기심이 밀려들고 있는 미국 문화에 우려의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내시 수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어마어마한 급여나 이익을 가져가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기업 엘리트들이나 이들에 동조하는 세력들 때문에 탐욕의 문화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기업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 활동은 일반 소비자들과는 동떨어진 활동이 아니라, 기업들이 자신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잘못을 고쳐나갈 수 있도록 빛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경제 주체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비자로서뿐만 아니라 투자자로서도 사회의 경제적 안전망을 공고히 하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빛을 발한 게 수녀들이 보여준, 투자자로서의 대안적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리적 소비가 현대를 살아가는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이루고 공동체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한 축이라고 한다면, 기업이 건전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투자는 또 다른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정의로운 사회, 건전한 기업문화를 세워나가기 위해 근래 들어 도드라지고 있는 움직임이 ‘사회책임투자’입니다.


사회책임투자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나 단체를 통해서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에 돈을 맡기거나 보험이나 연금에 가입하거나 주식과 같은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방식 등으로 자신의 자산을 증식하는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익성만 따지지 자신이 맡긴 돈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운용하는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수익이 되는 것만 좇아 별 생각 없이 자산을 투자하고 운용할 때 자신의 돈이 윤리적 가치나 종교적 신념과는 무관하거나 오히려 이와 반대되는 일에 사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생명의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은 돈이 사람을 죽이는 살상용 무기 생산에 투자될 수도 있고 환경을 오염하거나 파괴하는 산업에 쓰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산 운용에 있어 이러한 모순을 해소하고 자연과 함께하는 인간다운 삶의 증진이라는 관점에서 자본의 흐름과 기업 활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운동이 바로 ‘사회책임투자(Social Responsible Investing, 이하 SRI)’입니다. SRI는 재무적·금융적 성과뿐만 아니라 공공선이라는 목적을 더하여 투자를 행하는 투자 전략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윤리적 가치나 종교적 신념에 상응하는 자산 운용과 기업의 공익성·사회적 성과와 함께 이에 대한 합리적 평가에 따른 투자를 통해 기업들이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게 합니다. 나아가 기업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을 지는 활동을 유도함으로써 사회 전반의 변화를 도모하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적 시각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지만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찌든 우리 세태에서는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닐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5월 1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44) 소비자이자 투자자인 그리스도인 (3)


성경에 바탕을 둔 ‘사회책임투자(SRI)’


‘사회책임투자(SRI)’라고 이름 붙여진 행위도 결국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관에 따라 내리는 선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회책임투자의 뿌리는 성경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 정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아동, 곧 미성년자 노동이 성행하고, 노예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퀘이커 교도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노예거래상으로부터 자금을 철수함으로써 사회책임투자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이 운동의 본격적인 맹아가 싹텄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20년대에 가톨릭교회가 앞장서서 최초의 사회책임투자 정책인 ‘Thoughtful Christian‘s Guide to Investing(사려 깊은 그리스도인들의 투자 가이드)’를 세웠습니다.


이 정책을 바탕으로 1928년에는 24개 윤리 펀드를 만들어 자산을 투자하면서 주류, 담배, 도박, 무기 사업 등을 투자대상에서 제외하는 ‘부정적 스크리닝(Negative Screening)’ 방법을 채택해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후 1986년 미국 주교회의는 ‘모든 이를 위한 경제(Economy for All)’를 통해 “교회는 이제 소외와 빈곤에 대한 구조적 시각을 가지고 경제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신앙은 제대 앞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 경제 시장은 경제정의에 따라서 사회에 공헌함으로써 신앙을 드러낼 수 있는 첫 장소가 되기도 한다”고 천명하며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현대적인 의미의 SRI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시민권과 여성의 권리, 반전과 환경운동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회, 환경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때였습니다.


미국 대학생들은 건전한 지성을 길러내는데 돌아가야 할 대학자금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베트남전쟁 관련 기업으로 흘러들어간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등 SRI의 초기 형태를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1970년대 이르러 SRI는 미국 투자자들의 폭넓은 관심을 끌게 됩니다.


일례로 1971년에 미국 감리교 신자들이 설립한 최초의 SRI펀드인 ‘팍스 월드 펀드(Pax World Fund)’는 군수산업, 담배산업, 도박산업 등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반하는 기업에 대한 투자를 거부합니다.


SRI가 결정적으로 급부상한 것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펀드가 생기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미국이나 유럽의 수많은 노동조합과 종교계 펀드들은 남아공 기업이나 이들과 거래하는 기업에 투자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80년대 들어 뉴욕, 매사추세츠, 캘리포니아 등 주정부들이 각각 수백 억 달러 규모의 연기금을 남아공에서 철수하기로 하면서 이 투자철회운동은 절정에 이릅니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환경문제가 대두하면서 SRI의 관심은 일반적 윤리문제에서 급속히 환경 분야로 넘어갑니다. SRI는 환경 관련 기술을 갖춘 기업에 투자하면서 무분별한 자원 개발로 인한 자연 파괴에 경종을 울립니다.


이렇듯 그리스도 정신으로 바탕으로 한 SRI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창조질서 보존에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5월 2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45) 소비자이자 투자자인 그리스도인 (4)


가톨릭 비롯한 종교인들의 경제활동


미국 사회에서는 천주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들이 ‘사회책임투자(SRI)’를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1920년대부터 일찌감치 사회책임투자에 눈을 뜬 미국 가톨릭교회는 지난 1991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의 경제행위는 적당한 수익과 가톨릭 이념으로 윤리적, 사회적 책임을 실천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놓았습니다.


아울러 ▲ 해악을 끼치는 업종은 피하기(avoid evil : 도박, 주류, 낙태 산업 등) ▲ 좋은 일에 투자하기(do good : 친환경기업, 대안 투자 등) ▲ 적극적으로 기업 활동에 참여하기(주주 운동 등) 등의 투자 전략까지도 제시했습니다. 2003년에는 사회책임투자 가이드라인을 정립해 사회책임투자 운동에 대한 방법, 투자 과정, 투자 선별 원칙과 주제까지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퀴나스펀드(110억 달러), 가톨릭 기사 펀드(20억 달러), 그리스도인 형제 투자펀드(40억 달러) 등의 투자 펀드를 통해 사회교리를 기반으로 한 그리스도적 가치를 기금 투자 결정에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1977년부터 제3세계의 아동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오고 있는 미국 장로교회의 경우, Mission Responsibility through Investment(MRTI)를 통해 남아프리카 문제나 환경문제 등에 있어서 솔선수범하고 있습니다. MRTI는 사회책임투자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청지기로 살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에게 위탁된 재물이 먼저 우리 가족의 경제적 필요를 충족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정의를 추구하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돌보며, 다른 피조물과의 조화를 꾀하는 데 사용되기를 바라고 계신다. 따라서 사회책임투자는 우리의 신앙과 투자를 일치시키는 방법이 된다.”


베트남전 반대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계기로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971년 설립한 미국의 대표적인 사회책임투자운동 단체인 ‘기업책임 실현을 위한 종교간 센터’(Interfaith Center on Corporate Responsibility:ICCR)는 해마다 100개가 넘는 기업에 직접적인 투자뿐 아니라, 주주의 권리로 그리스도적인 가르침에 부합하는 사회, 환경, 책임 경영을 촉구하며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청지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 275개 회원단체와 뮤추얼펀드 등 협력·참여 회원을 중심으로 운용하고 있는 투자자금의 규모만 1100억 달러에 이릅니다.


하지만 투자운동적 측면만으로 오늘날 SRI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SRI의 성장세가 눈부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다국적 SRI 운동단체인 사회투자포럼(Social Investment Forum) 자료에 따르면, 펀드 시장이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 전체 펀드투자자금의 약 15%는 SRI 펀드에 투자되어 있습니다. 미국 SRI 펀드시장은 1984년 400억 달러에서 95년엔 6390억 달러로, 99년 1조4900억 달러, 지난 2005년에는 2조3400억 달러로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새롭고 건전한 풍조와 신선한 흐름들을 맨 앞에서 이끌고 있는 건 대개 종교적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이들입니다. 실례로 지난 2001년 영국 전체 SRI 펀드 1200억 파운드 가운데 종교 또는 자선단체 자금은 314억 파운드에 이릅니다. 일반투자자 자금 35억 파운드보다 10배나 많은 수치입니다. 인권과 윤리 등의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며 냉혹한 자본주의에 대한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던 오랜 종교의 전통이 SRI를 통하여 새롭게 부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5월 2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46) 지상의 순례자인 그리스도인


기업 · 사회 변화시키는 ‘투자운동’


사회책임투자(SRI)는 ‘돈에도 윤리가 있다’는 복음 정신에서 비롯된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RI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금융시장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실에서 ‘투자운동’ 역시 기업과 사회를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정화해나가는 하나의 새로운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기업이 도덕이나 환경 등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면 당장은 기업이 발전하는데 유리할지 모르지만, 그 비용과 함께 대대로 해악을 끼치는 결과물까지도 고스란히 국가나 사회 전체가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모 그룹의 탈세 사건이나 낙동강 페놀유출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이러한 비용 전가는 결국 사회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윤리적 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를 지닌 SRI가 활성화되어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 현상과 문제를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특히 SRI를 위한 연구와 조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1990년대 이후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기업의 환경영향 평가를 통해 사회적 위험을 가늠해 투자 포트폴리오를 짜는 게 SRI의 일반적 방식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책임투자운동은 크게 네 가지 형태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윤리적 예금이라고도 불리는 ‘연대성 예금’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객관적 기준에 의해 선정된 건전한 은행과 협력해 환경보호와 기아예방 등과 같은 특정 목적을 갖는 계좌를 개설해 시민들의 예금을 유치, 그 수익의 일부를 이런 목적으로 활동하는 비영리 사회복지단체나 시민운동단체에 지원하는 형태입니다.


둘째는 투자자가 자신의 윤리적 가치나 종교적 신념을 기준으로 기업의 사회적 성과를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주식 채권 등에 선별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기업활동을 유도하는 ‘사회적 선별 투자’(윤리적 투자) 방법입니다.


셋째는 ‘대안적 투자’라고 불리는 방법으로 협동조합과 같이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비영리 기업과 금융기관에 투자함으로써 지역 경제 안에서 중소기업 육성과 노동자 권익 옹호를 극대화하는 형태입니다.


넷째는 투자자나 주주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올바른 기업을 선별해 투자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를 함으로써 기업 현실에 참신하고 정직한 변화를 유도하는 ‘주주권리운동’입니다.


어떠한 형태의 사회책임투자운동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투자한 돈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비윤리적인 기업에 흘러들어가 결국에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파괴하는 데 사용되지 않도록 깨어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자자인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책임투자운동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수익률뿐 아니라 사회 경제 정의 실현이라는 큰 흐름에 동참하게 된다는 인식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분명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로운 사랑을 실천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용기 있는 행동은 세상과 갈등을 빚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2티모 3, 12)이라는 말씀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셨던 것처럼 그리스도 신안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선포하고 모든 대안적 노력을 기울일 때 하느님 나라가 한발 더 가까이 온다는 엄연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6월 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47) 사회책임투자와 그리스도인 (1)


사회의 지속 성장 위한 ‘그리스도적 실천’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 세상에 씨를 뿌려온 사회책임투자(SRI)는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구가해 나가려면 윤리적 선택과 그리스도적 실천에서 성장 동력을 찾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를 비롯한 영미권 선진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사회책임투자운동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비롯한 각 종교 관계자들과 단체들이 종파를 초월해 연대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해외 가톨릭교회 사례


세계적인 사회책임투자운동 단체로는 1971년 설립된 미국의 ‘기업책임 실현을 위한 종교간 센터’(ICCR)를 비롯해 캐나다 교회와 책임투자에 관한 특별공동체(TCCR, 1975년 설립), 영국 책임투자를 위한 교회일치위원회(ECCR, 1989년 설립)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성공회, 유다교 등 여러 종교계가 연대한 가운데 이들 종단에 소속된 각 기관과 교구, 수도단체, 병원, 출판업체 등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이들 단체들은 각 기업에 사회책임투자 기본원칙과 평가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노동을 착취하거나 인권을 유린하는 기업 문화나 활동을 그리스도적으로 바꿔나가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 동등한 고용기회 부여 ▲ 유전자조작식품 확산 억제 ▲ 담배 제조·광고 종료 ▲ 군수품 해외 판매 금지 등 경제적 영역은 물론 ▲ 지구온난화 방지 ▲ 인종차별 금지 ▲ 균등한 의약품·건강 보건 서비스 혜택 제공 ▲ 극빈국 부채 탕감 등으로 보폭과 시야를 넓혀 공동선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1970년대 말 가톨릭교회 주도로 만들어진 ‘기아 퇴치와 발전을 위한 가톨릭위원회’(Comite Catholique contre la Faim et pour le Developpement : CCFD)를 중심으로 ‘기아와 발전 펀드’가 만들어짐으로써 사회책임투자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30%, 신자 및 일반 투자자가 70% 참여해 조성한 이 펀드 운용 수익금은 자회사인 국제개발사(SIDI)를 통해 개발도상국들의 소규모 금융기관 등에 지원되어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적지 않은 CCFD는 한국교회 평신도 양성을 위한 장학금을 후원하기도 하고 우리농마을 건설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전 세계 80여 개 나라에서 500여 개 개발사업을 지원하며 그리스도적 가치를 세상에 전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운동단체를 중심으로 구미 각국에서는 연구·평가기관과 투신운용사가 설립되어 실무를 맡는 등 체계적인 발전을 거듭해나가고 있습니다. 미국 그리스도형제회투자서비스사(CBIS, 1981년 설립), 영국 핸더슨SRI팀(77년), 미·영 이노베스트(Innovest) 국제연구소(95년), 미국 킨더 린덴베르그 도미니(KLD) 투자신탁사(95년)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KLD사는 지난 2001년 세계 최대 소매업체인 월마트가 노동 착취를 일삼는 기업들로부터 납품을 받는다는 이유로 미화 14억 달러 규모의 월마트 주식을 처분함으로써 잘못된 기업문화에 경종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미국 가톨릭남자수도단체인 ‘그리스도 형제회’가 1981년 설립한 투자서비스기관 CBIS는 올바른 윤리적 투자를 권장하고, 그 수익금을 교육사업에 돌림으로써 신앙과 금융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괄목할만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6월 1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48) 사회책임투자와 그리스도인 (2)


사회책임투자의 모범 ‘아퀴나스펀드’


눈에 띄지 않는 우리 일상 곳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뿌리신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소중하게 가꿔나가기 위한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각종 펀드를 활용한 사회책임투자운동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가톨릭 펀드가 전체 펀드 중 12.5%를 넘어설 정도로 사회책임투자운동이 활성화되어 있어 우리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미국 가톨릭교회는 주교회의 차원에서 주교회의와 각 교구 운용자금 중 사회책임투자 분담비율을 30%로 정하고 이를 미국교회가 2000년 5월 텍사스 주 댈러스에 설립한 아퀴나스펀드 등에 투자해 사회책임투자(SRI)운동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가치 투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운용기금만 미화 2억 달러에 이르는 아퀴나스펀드는 가톨릭 펀드 중 유일하게 미국 주교회의 입장에 따라 신앙에 부응하는 투자 활동을 펼치고 있어 늘 교회 안팎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이름을 딴 이 펀드가 다른 사회책임투자 펀드와 다른 특징을 꼽는다면 아퀴나스펀드의 회장이자 CEO를 성직자가 맡아 사회적 요소를 스크린하기보다는 기업들과의 대화와 주주권리운동을 실행한다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퀴나스펀드의 최고책임자인 프릉크 라우쳐 신부는 “아퀴나스에서 개발하는 펀드의 사회책임투자 가치와 기준은 주교회의에서 세운 것이며 우리는 단지 가톨릭 투자자들이 쉽게 그들의 신앙에 부응하는 투자를 활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펀드의 성격과 위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퀴나스펀드는 낙태와 피임 등 도덕적 윤리적 이슈들뿐만 아니라 그때그때 주교들에 의해 제기되는 주택보급문제, 차별문제, 대량살생무기 등 사회적 이슈들을 구체적인 판단 요소들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낙태 반대 등 생명문제와 관련해서는 미국 사회에 단호한 입장을 밝히며, 엄중한 척도와 규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퀴나스펀드가 6년 동안 개발한 4개의 펀드는 5년간 수익률이 23.97%에 이르러 가톨릭 투자자들이 사회책임투자를 해도 상대적으로 일반 시장의 수익률에 비해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아퀴나스펀드는 대부분의 경우, 우선 기업 경영인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자세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기업 정책을 바꾸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기업에 이득이 된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기업이 입장을 바꾸고 최고경영자들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적잖은 성과를 거둬왔습니다. 제너럴일렉트릭(GE)사에서 여성의 관리직 비율을 높이기로 한 결정을 이끌어낸 것과 NBC사가 TV 방송사 중에 가장 폭력이 적은 네트워크 순위에 머물 수 있게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월풀(Whirlpool’s)사가 가족계획 지원 펀드를 그만두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파이저(Pfizer), 머크(Merck), 존슨앤존슨(Johnson &Johnson), 업존(Upjohn) 등 세계적 제약회사들이 프랑스제 먹는 피임약인 RU-486을 미국 내에서 제조하지 못하게 막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아퀴나스펀드는 소극적 청지기 역할을 뛰어넘어 더 많은 이들이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사도로 나서기를 원하는 가톨릭 투자자들에게 하느님 나라 운동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6월 1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49) 사회책임투자와 그리스도인 (3)


그리스도적 가치 구현하는 투자


고도로 발달하고 있는 금융분야에서 아퀴나스펀드 등 사회책임투자(SRI)펀드로 사회책임투자 운동을 이끌고 있는 교회의 모습은 지상을 순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역할과 의무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습니다. 사회책임투자는 마땅히 모범을 보여야 하는 지위나 위치에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적 가치를 깨달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일상에서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 사회책임투자는 경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지역사회에도 크게 공헌하는 투자방식으로 발전해나가고 있습니다.


사회책임투자가 활발한 미국에서는 2001년 중반부터 가톨릭 투자자를 겨냥한 다양한 투자 상품이 개발되었습니다.


칼라일사회투자(Carlisle Social Investments)는 공식적으로, 지난 1991년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와 가톨릭 협의회가 마련한 투자 가이드라인을 적용한 투자 상품을 내놓았습니다. 칼라일사회투자는 원죄 없으신 마리아수도회 세무스 핀(Seamus P. Finn) 신부를 윤리자문위원으로 고용해 투자 대상과 투자 적격 여부를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가톨릭 정신에 어긋나는 낙태산업을 비롯해 피임과 담배, 알코올, 포르노그래피 산업 등을 투자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아울러 투자에 있어 인권문제나 노동권, 평화와 비폭력, 환경보호와 공동체 투자 등과 같은 측면들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미시간 주에 본사를 둔 슈바르츠(Schwartz) 투자 자문회사는 가톨릭 신자인 도미노피자 창립자 톰 모나한(Tom Monaghan)의 요청에 따라 2001년 5월 1일 가톨릭윤리에 기초를 둔 아베마리아 가톨릭 펀드(ticker: AVEMX)를 조성해 자본시장에도 그리스도의 정신이 스며들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슈바르츠사는 낙태를 통해 이익을 얻는 의료회사와 제약회사를 펀드에 편입시키지 않거나 비윤리적 가정정책과 관련된 기업을 투자 대상에서 걸러냄으로써 가톨릭 펀드로서의 가치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펀드는 620여 개 미국 유사펀드(Multi-Cap) 중 2006~2008년 3년간 최고의 수익을 내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곳 가운데 하나인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본사를 두고 있는 ARK사회책임뮤추얼펀드(2001년 설립)는 2001년 5월 1일에 ARK 사회이슈 성장 펀드(ARK Social Issues Capital Growth) 등 4개의 펀드를 개발해, 교회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회문제와 연관해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펀드들은 공통적으로 낙태와 피임 관련 기업을 비롯해 원자력, 무기, 담배, 알코올, 도박 산업 등 교회의 정신을 거스르는 기업들을 투자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일반 신자들이 일상에서 그리스도적 가치를 분명히 인지하고 구현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지난 2010년 4월에는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한 533개 유럽 기업으로 구성된 최초의 주가 지수 ‘스톡스 유럽 크리스천 지수(The Stoxx Europe Christian Index)’가 출범하기도 했습니다. 교황청이 검증하는 이 지수에 편입된 기업들은 포르노, 도박, 무기, 담배 또는 피임과 관련된 사업을 하지 않는 업체들이기 때문에 윤리적 선택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시켜 줍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6월 2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0) 한국 경제현실과 사회책임투자운동 (1)


사회적 책임 분담하는 사회를 위해


기업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왔을 뿐 아니라, 사회 발전의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고용창출과 이윤의 사회환원 등을 통해 사회에 적지 않은 유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기업 차원의 사회복지사업이나 비영리재단 설립 등 각종 공익사업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분담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습니다. 이윤 극대화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면서 이를 위해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거나 탈세, 불공정거래, 주가조작 등의 불법행위를 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가 하면, 노동자와 소비자의 권익을 무시하고 환경오염 등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행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의한 현실에 맞서 그리스도적 가치를 전파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사회책임투자(SRI)입니다.


유럽의 경우 2003년 기준으로 3360억 유로 수준의 SRI펀드가 운영 중입니다. 지난 1990년 영국과 스웨덴 등의 국가들이 연기금 사회책임투자법을 통과시킨 것이 유럽의 SRI펀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1999년 처음으로 SRI펀드가 등장한 이후 현재 11개의 펀드로 성장하여 2006년 기준 18억 달러의 규모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책임투자운동의 현재


우리나라 사회책임투자운동의 뿌리도 가톨릭교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난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사태를 맞으면서 경제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출범한 천주교대안경제연대가 모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대안경제연대는 한국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와 사회책임투자운동의 해외사례를 연구하던 중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운동이라는 공감대를 마련하고 1년여의 준비 끝에 YMCA 등 개신교 단체와 함께 2000년 11월 ‘사회책임투자운동’을 출범시킵니다. 2003년 1월 기업책임시민연대로 이름을 바꿨다가 2007년 4월 (사)기업책임시민센터로 재창립되어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는 사회책임투자운동은 미국의 대표적인 사회책임투자운동 단체인 ‘기업책임 실현을 위한 종교간 센터’(ICCR)를 벤치마킹해 설립되었습니다. 기업책임시민센터는 ICCR과 마찬가지로 범종교성을 추구하지만 가톨릭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이 이사회 멤버로 참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신교 목사, 원불교 교무, 불교 스님 등도 이사회 멤버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성심수녀회 등 5곳의 수도회를 비롯해 중소기업 5곳, 비영리기관 1곳 등 10여개 기관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2008년 2월 현재 우리나라의 SRI 시장 규모는 1조9000억 원대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책임투자를 할 때 비재무적 측면의 참고 자료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하는 기업 수는 51개로 전체 기업에 비해 숫자도 미미할 뿐 아니라 정보 공개 내용도 만족스럽지 못한 편입니다. 한마디로 아직 우리나라는 SRI 규모나 인프라 등 모든 면에서 걸음마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09년 국민연금공단이 유엔책임투자원칙(UN PRI)에 서명한 이래 SRI형 위탁사를 꾸준히 선정해 투자함으로써 2012년 5월 현재 공단의 SRI 규모가 4조원을 넘어서는 등 새로운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7월 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1) 한국 경제현실과 사회책임투자운동(2)


대안경제사회 실현 위한 값진 노력


우리 사회의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뜻을 모아 만든 (사)기업책임시민센터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홍보와 기업들의 불법행위 감시, 사회책임투자운동 등을 펼치며,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이며 가시적인 한 자락을 드러낼 수 있는 대안경제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범교회적인 차원의 대응은 아직 부족하다는 게 전반적인 평가입니다.


기업책임시민센터의 전신인 사회책임투자운동은 지난 2003년 12월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사회책임투자 상품 ‘사회책임투자-머니마켓펀드(SRI-MMF)’를 발매해 100억 원의 기금을 조성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2005년 펀드 자산 규모가 최소 5000억 원으로 제한되면서 이를 중단하고 삼성ㆍLG전자(2006년), 삼성화재ㆍ신세계(2007년)를 대상으로 한 ‘주주운동’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회책임투자운동은 사회적 관심을 얻지 못하다가 2006년 장하성펀드 등장 이후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로 인해 사회책임투자운동은 실험 모델에서 대안 모델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한국을 필두로 일본, 싱가포르, 타이완 등 아시아지역 여러 나라에서도 사회책임투자운동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며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 따라 사회책임투자와 관련한 사회교리 실현을 위한 연구 조사와 교회 내 경제문제 전담조직 구성의 필요성 등이 갈수록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마태 9, 17) 담아야 하듯 새롭게 부각되는 사목적 환경과 요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기름이 떨어진 어리석은 처녀들(마태 25, 1-13)처럼 신랑이 왔는데도 우왕좌왕하다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사회책임투자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투자시장에 자신의 가치관을 투사하여 관철시키려는 종교는 그리스도교만이 아닙니다. 유다교와 이슬람교 신자들도 자신들의 율법에 기초한 투자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에서는 유다교 율법을 준수하는 기업에만 투자하는 ‘코셔 펀드(kosher fund)’의 수요가 증가세에 있습니다. 최초의 코셔 펀드는 약 10년 전 출범했는데 지금은 규모가 약 2억6300만 달러에 이릅니다. 또한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따르는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투자도 전 세계적인 경제난 속에서도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경제적으로 선진화된 사회에서 사회책임투자가 그리스도교를 비롯해 유다교, 이슬람교 신자들뿐 아니라, 양심적인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주목을 받는 이유는 각자의 윤리관에 따라 투자를 하여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면서, 아울러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사회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통하여 기업과 사회 환경을 변화시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점차 확산되어가고 있는 사회책임투자(SRI)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실천이며 그리스도교 윤리를 기반으로 한 경제정의 실현과 시장의 인간성 회복을 지향하는 일입니다. 이렇듯 SRI는 그리스도인들의 선택과 목적의식적인 행동에 따라 경제적 가치와 신앙의 가치가 상충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7월 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2) 공동선 추구하는 사회적 기업


복음적이지 않은 오늘날의 경제활동


가톨릭 사회교리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한 성장을 거듭해오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시스템 안에서 인간 존엄성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정신을 강조해왔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1891년 교회 최초의 사회회칙인 ‘노동헌장(Rerum Novarum)’이 발표된 이래 복음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사회교리를 통해 인간성 회복을 위한 기업의 시대적 소명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복잡다단해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교리의 핵심은 인간적이면서도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인류 발전을 위한 공동선 개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현실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듯이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전 인류의 발전을 위한 모색이나 전망은 고사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포용 등 인간적인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기업들은 시장경제 안에서 독과점이나 거대자본 등을 통해 상대방을 압도하는 공포와 소비자들의 중독을 기제(機制)로 삼아 이기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방식에 길들여져 왔습니다.


이러다 보니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상대방에 대한 강제와 착취까지도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기업이 사회에 대해 지니는 책임은 최대한 이익을 많이 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대량 실업 사태, 장기 불황, 환경오염 등 심각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익을 많이 내는 대기업이나 독과점기업 등에 오히려 더 큰 혜택을 주고, 무죄한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이 그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한경쟁이 세계화하고 있는 글로벌시대에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전쟁은 더 이상 독과점, 저임금노동, 열악한 노동환경 등 복음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유지되는 경쟁력이 기업의 존립과 발전의 원천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공동선을 배제한 채 이뤄지는 기업활동이 벽에 부딪히고 있는 현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국 월가로부터 촉발된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부익부빈익빈 현상, 자연환경 파괴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렇듯 결코 지속가능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세계화 현실 속에서 기업이 갖는 사회적 사명에 대한 깊은 성찰이 그리스도 정신으로 무장한 기업인들 사이에 일어나 우리 세상에 신선한 생명력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기업인들이 일궈나가고 있는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은 새로운 시대에 참신하고 열정적인 방식으로 사회에 유익과 선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이런 기업들만이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이타적 기업 경영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가치를 더 앞세우는 이타적 모습의 사회적 기업은 자기중심적 경영패러다임을 초월하여,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인간적 소통과 공감을 통해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보다 높은 공동체 가치를 창출해내고 있습니다.


독일 성 베네딕도회 재정담당 책임자이자 영성의 대가인 안셀름 그륀 신부는 “경영이란 다른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적 가치를 토대로 한 사회적 기업의 출현은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적 선택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괄목한 만한 실례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7월 1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3) 사회적 문제 풀어나갈 사회적 기업


그리스도적 ‘사회적 기업’ 확대 고대


가난이 던져주는 그늘과 그로 인한 고통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보다 인간적이면서도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대안을 찾으려는 다양하고 건실한 이념과 실천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이 땅에 뿌려왔습니다.


우리는 가난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비롯된 방법과 실천이 그 자체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현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경제활동을 영위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이웃과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는 따뜻한 경제시스템을 운영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음도 보았습니다.


우리가 서있는 경제 영역과 경제 시스템 안에서 각자가 지닌 위상이나 역할은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제안과 실천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난으로 인한 아우성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정부나 일반 사기업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적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새로운 출구로 근래 주목받고 있는 것이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입니다. 경제적 환경이나 사회적 배경에 따라 사회적 기업의 개념과 요건 등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회적 기업은 바로 ‘영리적인 기업활동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발생한 수익은 사회적 목적을 위해 환원하는 기업’을 말합니다. 달리 말해 기업 활동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수익과 공익 달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기업들은 저소득자를 비롯해 고령자, 장애인, 성매매 피해자, 장기실업자, 이주민, 새터민, 수형시설 재소자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일자리나 사회서비스 등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적 공익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의 특성’인 전통적인 기업관에 공공성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특성’을 접목시키면서 사회적 통합 서비스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기업들은 효율적인 사회적 가치 창출이라는 시장의 요청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불완전한 경쟁 등으로 인해 시장에 의한 자원배분의 효율성이 확보되지 못하는 ‘시장의 실패’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자원의 공정한 분배 등 본래 의도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거나 기존의 상태를 오히려 더욱 악화시키는 ‘정부의 실패’를 시정하고 보완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사회적 가치 창출의 시장실패론과 정부실패론의 대안으로 사회서비스의 대안생산체제로서 등장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 안전망의 형태로 등장하게 된 사회적 기업은 유럽,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활발하게 영역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영국에는 6만여 개의 사회적 기업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6년 현재 영국 전체 고용의 5%, GDP의 1%를 차지하며, 약 50조 원에 이르는 매출액을 기록할 정도로 산업계는 물론 사회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정신을 반영하는 사회적 기업의 저변확대를 온 사회구성원들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7월 2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4) 사회교리에 바탕 둔 사회적 기업


새로운 시대의 기업활동 ‘이익’ 보다 ‘사회적 가치’ 지향


‘경제적 가치’와 함께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기업 형태인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은 공동선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입니다.


기업 활동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여 축적된 수익은 사회적 목적을 위해 환원하는 것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은 우리 시대가 찾아낸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엿보게 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기업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사회적 기업의 목표가 사회교리의 바탕을 이루는 교회 정신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기업은 단순히 당면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차원이 아니라, 사회교리의 기본원리에 토대를 둔 기업 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구김살 없이 보장받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기업의 경제활동과 관련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회칙 「진리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에서 “새로운 시대의 기업활동은 이익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보다 높은 사회적 가치를 지향함을 궁극적 사명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이것이 이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진리안의 사랑을 통해서 이뤄진다”(38항)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기업경영은 오로지 소유주의 이익만 고려해서는 안 되며 노동자, 고객, 여러 생산요소의 공급업자, 하위 공동체 등 기업 생존에 이바지하는 모든 이해관계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확신이 증대되고 있다”(40항)고 강조합니다. 또한 이해관계자 중심의 경영패러다임이 자본주의의 기본이 되는 이익추구 행위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이익 창출로 귀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현대사회에서 기업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단순한 이익극대화를 넘어서는 사회적 공동선 구현에 있습니다. 인류공동체의 선익을 지향하는 기업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여러 계층의 인간들로부터 공감과 신뢰를 얻게 되고, 이들의 희생적 헌신을 통해 높은 사회적 목표와 이상을 실현하게 됩니다. 기업의 종사자들은 자신의 일터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하게 되고, 소비자는 그 기업의 생산품을 더욱 신뢰하고 사랑하게 되어 건실한 경제적 순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 자본은 이러한 기업의 선순환적 모습을 통해 더욱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투자를 하게 되고, 지역사회는 공동체 안에서 기업에 관심과 자긍심을 보내게 되어 이해관계자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는 경제구조가 뿌리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시대의 경제패러다임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바로 ‘공동체’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와 사랑이 바탕이 된 기업 경영 관점은 이타적인 행위가 도덕적 당위성 외에도 경제적 합리성에 따라 운영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나아가 건강한 경제생태계에서 상대방의 이익과 시스템 전체의 건전함이, 곧 자신의 이익으로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적 기업이 성장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경제적 양극화와 복지수요 증가 등 경제활동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 바탕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7월 2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5) 소통과 나눔의 사회적 기업


빈곤 · 차별 · 환경오염 등 사회문제 해결 위해

건전한 ‘공동선’ 목표로 사회적 기업 나서야


그리스도적 가치를 토대로, 우리 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와 물신주의를 극복하려는 사회적 기업의 출현과 함께 나타나는 새로운 기업경영 이념이나 이론들은 전통적 기업형태들이 보여 온 것과는 현저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곧 이들은 정부조직, 비정부기구 등 다양한 형태의 사적ㆍ공적 영역을 포함하는 더욱 새롭고 포괄적인 사회적 연대를 이룰 것을 요청하며 호소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소통과 나눔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을 통해 건전한 공동선을 목표로 한 균형 잡힌 조화로운 연대의 모습을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특히 하루가 다르게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고 확산되어 가는 현대사회에서, 인간다운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빈곤ㆍ차별ㆍ부패ㆍ환경오염ㆍ생명경시 풍조 등 끊임없이 생겨나는 국제적 문제에 대해 국제기구들의 역할뿐 아니라, 이타적 지향을 지닌 사회적 기업들의 몫도 갈수록 그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며 전 지구적 차원으로 위상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 범위는 지역과 민족 등 국지적이고 제한된 울타리를 넘어서 전 인류의 과제를 풀어야 하는 실로 막중한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창세 1, 27)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가톨릭 사회교리는 “인간의 침해할 수 없는 존엄과 자연규범의 초월적 가치가 경제적 차원에서도 적용되어야 함”(「진리 안의 사랑」 45항)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의 정신에 따르면, 기업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인간을 착취나 희생의 대상으로 도구화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정의롭지 못하며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구촌 전역에 양극화와 승자독식이라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에 따라 ‘세계화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운 가운데 쉬 걷히지 않을 것 같은 두터운 절망의 어둠을 뚫고 희망의 한줄기 햇살이 되고 있는 존재가 사회적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기업의 탄생과 발전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일찌감치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튼 영국의 경우, 200년이 넘는 사회적 기업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본주의가 지닌 한계와 병폐에 빨리 눈을 뜨고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고용기업체의 5%인 6만여 개의 사회적 기업이 존재하며, 등록제의 사회적 기업인 CIC(Community Interest Company)도 5000여 개나 됩니다. 다른 대륙에 비해 자본주의의 씨앗이 일찍 뿌려진 유럽의 경우 사회적 기업이 포함된 사회적 경제는 생산과 고용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경제·사회적 기여도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 선진국의 경우 사회적 기업을 축으로 한 연계활동이 왕성하고 민간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아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이미 궤도에 올라있는 선진국들의 발전된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오랜 세월 만들어온 시스템 안에 담긴 모든 이에게 선익이 되는 ‘공동체’와 ‘사랑’의 정신일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8월 1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6) 예수님 닮은 사회적 기업


'현실적 사랑'에 목마른 우리들...


그 어느 때보다 상생과 나눔, 기부 등 사랑의 실천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가시적이고 현실적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합니다.


국가는 국가대로, 사회와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선의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들의 활약은 단연 눈길을 끕니다.


양극화, 실업률 증가, 생태계 교란, 환경파괴, 생명가치 추락 등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높아질수록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도록 하는 사회적 기업의 역할은 더욱 절실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의 다양한 형태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여러 가지 모습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기업에 대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 1999년 보고서에서 ‘기업가 정신 및 기업적인 전략으로 조직되지만, 주요 목적은 이윤 극대화가 아닌 사회적·경제적 목적을 모두 추구하는 단체로 나라마다 그 법적 형태가 다르다’고 설명하고, ‘사회적 배제와 실업(失業)에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공익을 위한 모든 민간 활동’이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사회적 기업’의 다양한 모델을 제시하고 ‘사회적 경제’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한 벨기에 리에쥬대학 사회적 경제센터(Centre d‘Economie Sociale) 소장 자크 드푸르니(Jacques Defourny) 교수(경영학)는 사회적 기업을 4가지 경제적 기준과 5가지의 사회적 기준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4가지 경제적 기준은 ▲지속적인 수익활동 ▲높은 수준의 자율성 ▲상당한 정도의 경제적 위험 ▲최소한의 유급 근로자 고용이며, 5가지 사회적 기준은 ▲지역사회 및 공공이익을 명시적 목표로 삼을 것 ▲시민 집단이 설립하는 조직 ▲자본소유에 기반을 두지 않는 의사결정구조 ▲이해관계자의 의사결정 참여 ▲이윤의 제한적 배분 등입니다.


이처럼 사회적 기업의 정의나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은 사회적 기업이 처한 환경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일상에서 낯설지 않은 용어가 된 사회적 기업이란 표현은 1990년 이탈리아에서 발간된 ‘사회적 기업’(Impresa Sociale)이란 잡지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 힘을 얻게 된 것은 이보다 앞선 1978년 영국의 프리어 스프렉클리(Freer Spreckley)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1981년 비치우드 칼리지에서 발간된 ‘사회적 기업 감사-협업회사의 운영’(Social Audit-A Management Tool for Co-operative Working)에서 사회적 기업을 “지역 사회를 근거로 사회적이고 상업적 목적을 추구하며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조직”이라고 정의하고, “자본이 노동을 고용하는 전통적 개념에서 벗어나 노동이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적 기업은 사회적인 회계감사를 받는 기업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기업은 그 출발부터가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다가서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대로 닮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8월 1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7)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기업


참된 ‘가난의 정신’ 실천하는 장


‘공동체’와 ‘사랑’을 뿌리로 하는 사회적 기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을 보고 느낀다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 일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뜻에 보다 가까이 다가선 사회적 기업일수록 하느님 나라의 많은 부분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숱한 고난 끝에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주인공 ‘크리스천’의 여정을 그린 영국 작가 존 버니언의 소설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은 세속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말해줍니다. ‘크리스천’을 통해 작가는 물질적인 욕망뿐 아니라, 정신적인 욕망 등 세속이 던져주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져 스스로 가난해지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들어갈 수 없다는 긴박하고 절절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아울러 이 소설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참될 때 세상의 때를 벗고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하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회적 기업은 이처럼 참된 가난의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기업은 사회적 환경이나 문화적 전통 등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사회적 기업이 가장 먼저 발달한 영국의 사례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과 배울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국형 사회적 기업은,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하면서 기업이 영리활동을 통해 취약계층 지원과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복지 민영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게 특징입니다.


영국에서는 사회적 기업이 점차 저변을 넓혀감에 따라 이들을 돕는 조직들이 계속 생겨나면서 ‘사회적 연대’의 새로운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을 처음 만든 프리어 스프렉클리(Freer Spreckley)는 클리프 사우스콤(Cliff Southcombe)과 1997년에 첫 전문가 사회적 기업 파트너십 회사를 세워 사회적 기업을 돕기 시작합니다. 이런 사회적 기업 지원단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1997년에 창설된 ‘사회적 기업 런던’(Social Enterprise London, SEL)입니다.


SEL은 런던에 지역적 기반을 두고 있는 3500여 개의 사회적 기업 가운데 2000여 개가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사회적 기업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SEL은 사회적 기업 경영 지원을 비롯해 교육, 1대1 컨설팅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사회적 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업 관련 지원정책 연구와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사회적 기업 육성을 위한 인프라 조성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SEL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의 창업과 안정적 경영에 필요한 내용을 전반적인 분야에 걸쳐 교육하는 일반 프로그램과 신규 시장 개척이나 공공서비스의 사회적 기업화와 같은 특성화 프로그램이 그것입니다.


또한 영국의 자원봉사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for Voluntary Organi sations(NCVO)는 지난 2000년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지속가능 자본지원 프로젝트’(Sustainable Funding Project)를 만들어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 후 ‘미래빌더’, ‘센트리카’, ‘채리티은행’ 등에서 자본금을 지원받게 되면서 사회적 기업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을 둘러싼 영국 사회의 이러한 모습들은 가난이 숙명(宿命)과 질곡(桎梏)으로만 받아들여지는 우리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이 어떤 기적과 희망을 낳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8월 2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8) ‘오병이어’ 닮은 사회적 기업


작은 것 포기하고 얻은 ‘나눔의 기적’


사회적 기업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공유자산으로 키워내고 있는 영국 사회의 모습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과 많이 닮았습니다. 학자들은 초대교회 예루살렘 공동체가 지닌 가장 특유의 모습으로 상부상조의 경제 조직이라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희생을 각오한 용기 있는 열정에 뿌리를 둔 신앙적 자세를 갖추고 있었고 이는 그들의 나눔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 32)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 35)는 성경 말씀처럼 형제적 사랑으로 가난을 선택함으로써 공동체가 더불어 부유해지는 모습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상부상조의 행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갈망하던 종말론적 사상과 현세 재물에 애착을 갖지 말라는 예수님의 교훈(마태 6, 19. 24)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사회적 기업 런던(Social Enterprise London, SEL)의 활동에서도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런던의 사회적 기업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SEL의 2009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SEL의 운영자금을 지원하는 주요 조직으로는 런던 개발 공사(London Development Agency)와 런던 지방자치단체(London Councils)가 있는데, 각각 총 수입의 35.1%와 31.7%에 달하는 금액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SEL이 런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지방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재정적 지원 외에도 런던에 근거를 마련하고 있는 Business Link in London, 런던 시정부(London Government) 등이 협력 파트너로서 SEL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SEL과 함께 살펴볼 만한 조직이 영국 사회적 기업연합(Social Enterprise Coalition, SEC)입니다. 사회적 기업 운동에 의해 2002년 설립된 SEC는 사회적 목적을 지닌 단체나 기업이 개별적으로는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힘들다는 인식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산업부의 지원을 받는 SEC는 영국 내 모든 사회적 기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전국 네트워크 조직으로 사회적 기업 홍보 및 정보를 공유하고 사회적 기업의 창립 및 육성을 위한 정부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영국 전역에 있는 1만여 개가 넘는 사회적 기업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SEC의 핵심업무 중 하나는 사회적 기업이 자신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네트워킹하며, 사회 전체에 유익이 되는 사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정부 차원에서는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 지원 기관에 기금을 분배함으로써 지역별로 활성화되어 있는 사회적 기업이 더욱 활성화되도록 돕고 있습니다.


SEC에 따르면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2009년 현재 6만2000개에 이르는 영국 내 사회적 기업들이 약 80만 명에 이르는 고용을 창출하고 있으며, 매출 규모도 약 240억 파운드(약 43조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조그만 것을 포기했을 때 거두는 나눔의 기적을 이처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5000명에게 베푸신 빵의 기적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아낌없이 내놓은 선의의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9월 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9) 상생의 발판 ‘사회적 기업’


‘고용 창출’ 교회가 관심 가지고 협력해야


사회가 책임져야 할 공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이미 양과 질적인 면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영국형 사회적 기업은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사회적 기업의 역사와 풍토가 일천한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기업이 제 몫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은 물론 영국에서처럼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국형에 비해 ‘이탈리아형’ 사회적 기업은 소속 구성원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전통적인 협동조합 형태를 띠고 있어 그리스도교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음미해볼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우 이미 1980년대에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를 강조하는 새로운 형태의 협동조합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사회적 기업의 정의에 맞는 조직 형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사회적 협동조합은 1991년 제정된 ‘사회적 협동조합법’에 의해 정의되고 있습니다. 이 법은 사회적 복지, 건강, 교육 서비스 등을 담당하는 ‘A유형 조합’과 고용 창출에 중점을 두는 ‘B유형 조합’ 등 두 종류의 사회적 협동조합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B유형 조합은 취약계층(disadvantaged people)의 일자리 창출에 초점을 맞춰 소속 직원의 최소 30% 이상이 취약계층 노동자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어 2005년 ‘사회적 기업법’이 제정되어 복지 서비스, 노동 통합, 환경 서비스, 건강, 교육 등 이른바 ‘사회적 효용’을 추구하는 사회적 기업에 법적 인증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사회가 발전시켜온 사회적 협동조합 모델은 지역사회의 발전과 신뢰, 사회적 자본, 민주주의, 복지서비스 생산과 제공 등을 통해 사회적 기업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진화된 모델로 평가됩니다. 이 사회적 협동조합은 집단적 이익(collective interest) 목적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영리 조직과 유사한 관리자산을 가지고,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효율성을 추구합니다. 사회적 협동조합에는 노동자를 비롯해 자원봉사자, 공공분야, 공동체 멤버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함으로써 해당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특정한 요구에 적합한 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게 됩니다.


사회적 협동조합의 주된 전략은 서비스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조합의 규모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목적 달성을 위한 새로운 계획을 만들어내고, 주로 지역 단위에서 기업연합을 통하여 조직화하고 집단화하여 적절한 규모의 혜택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지역의 사정을 잘 아는 다양한 경제주체들이 모여 지방, 나아가 전국적 차원의 필요에 부응하면서 사회발전을 위한 경제적 토대를 다져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1980년대부터 발전해온 이탈리아 내 사회적 협동조합 컨소시엄은 2000년에 이르러 지역 명부(Regional Registers)에 오른 수만 총 207개에 이르고, 1998년 이후 50%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사회적 협동조합은 사회정책, 노동시장정책, 나아가 이탈리아 복지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협동조합과 그 대표가 지역사회의 범복지적 계획을 다루는 ‘위원회(table)’에 참여하는 일이 더욱 늘어나면서 단순한 서비스 제공자가 아닌 정책입안가로서의 활동도 늘어나고, 이러한 경향은 더욱 확대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2005년에는 7200여 개의 사회적 기업이 24만4000명에 이르는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고 하니, 일자리 문제로 적잖은 모순과 어려움에 놓여 있는 우리 사회가 눈여겨보고 도입을 시도하는 것이 사회복음화 과제 중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고용 창출에 교회가 관심과 협력을 기울이는 것은 안정적인 복음화 사업이 순항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9월 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60)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기업


사회적 기업 관리하는 ‘컨설팅 기업’


그리스도교 전통이 강한 유럽 여러 나라들은 사회적으로도 유용성이 확인된 사회적 기업을 북돋워주기 위한 다양한 제도와 정책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또 다른 형태의 발전과정을 걸어가고 있는 북미지역의 경우에는 유럽과는 조금 다른 방향과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정책적 배려가 전제된 유럽형 사회적 기업과는 달리 미국과 캐나다 등 ‘미국형 모델’은 정부의 지원 없이 민간의 자발적 기부 문화에서 시작되고 있기에 사회적 기업에 대한 정부 차원의 명문화된 제도적 지원이 없습니다. 따라서 유럽에 비해 사회적 기업의 유형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영리와 비영리 사업 사이의 구별이 모호하고 기술이나 경영혁신을 통해 사회적 가치 실현과 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벤처기업들까지도 사회적 기업의 범주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자금 조달도 유가증권을 발행하거나 펀드를 조성해 운영하는 경우가 많고 사회적 취약계층을 지원한다는 공익적 미션 아래 영리적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들도 모두 사회적 기업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는 미국에는 사회적 기업을 위한 컨설팅 업체가 따로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을 위한 사회적 기업인 셈입니다. 사회적 기업은 자선 봉사 단체와 달리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익을 내야 하는 기업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공익을 위한 활동을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영리만 추구하는 일반 기업보다 더 많은 어려움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 때문에 사회적 기업 컨설팅 업체들이 나서서 사회적 기업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관련 사업을 점검하고, 필요할 경우 사회적 기업들에 투자를 해서 이익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착한 컨설팅’을 하는 컨설팅 업체의 등장은 사회적 기업을 영속적으로 지원한다는 측면에서 창업 못지않게 중요한 활동으로 꼽힙니다.


미국 사회적 기업의 메카인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해 있는 로버츠 기업개발기금(the Roberts Enterprise Development Fund, REDF)이 대표적인 사회적 기업을 위한 컨설팅 업체로 전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뉴욕 월가에서 기업 인수합병(M&A)으로 명성이 자자한 사모펀드 KKR의 설립자로 월가식 금융자본주의의 대표주자였던 조지 로버츠가 1985년 설립한 REDF는 사회적 기업을 단순히 육성하는 게 아니라, 자본 투자를 통해 사회적 기업이 성장하면 이윤을 회수해 다른 사회적 활동에 투자합니다.


실리콘밸리 일대 ‘착한 기업(사회적 기업)’ 생태계의 중심에 서있는 REDF는 현재 3000만 달러의 자금을 운용하며 청소년에게 아이스크림 등을 팔게 해 대학 진학을 돕는 주마벤처스, 재활 카페를 통해 소외계층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버클루 등 연간 12개 안팎의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며 새로운 기업모델을 창출해나가고 있습니다.


REDF는 사회적 기업들에 대한 적절한 컨설팅을 위해 전문가들이 모여서 만든 과학적 방법으로 사회적 기업을 평가합니다. 특히 사회적 기업을 평가할 때 사회적 약자들에게 얼마나 더 나은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사업인지를 따져 봅니다. 또한 사회적 기업들에 대한 투자에도 ‘효율성’과 ‘경쟁력’을 접목시켜 착한 기업들이 경쟁에서 뒤지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주는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신 복음 속 주님의 모습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9월 1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61) 약자에게 도움 주는 사회적 기업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시는 ‘주님’


사회적 기업을 돕는 사회적 기업들까지 생겨나면서 피비린내만 진동할 것 같은 경쟁시장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채워나가고 있는 사회적 기업들의 모습에서 인류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적을 떠올리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로버츠 기업개발기금(the Roberts Enterprise Development Fund, REDF)이 지원하고 있는 몇몇 사회적 기업들의 모습만 봐도 그리스도인들의 선택이 어떤 결과는 낳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마린 카운티에 위치한 사회적 기업 ‘버클루’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회적 기업입니다.


1970년 11월에 캘리포니아주 마린 카운티에서 우울증 등 정신장애로 고통을 겪고 있던 지역주민들을 도와주는 농장으로 출발한 버클루는 이후 발전을 거듭해 1986년부터 가벼운 정신장애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직업교육을 시켜 일자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 거듭납니다.


버클루를 방문하면 1층 현관에 자리 잡은 블루 스카이스 카페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언뜻 보면 여느 카페와 다를 바 없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 등으로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이 교육을 받고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블루 스카이스 카페에서는 3개월 동안 대인 관계, 돈 계산, 음료 제조와 이력서 작성 등을 가르칩니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는 이들은 재생의 길을 걸어 사회 전체에 선익을 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면 이들이 사회에서 버림받고 방치되었을 때 마약, 알코올 중독, 각종 비행과 범죄에 노출됨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비용을 줄여주고 있습니다.


버클루는 샌프란시스코 인근 마린, 소노마, 나파 등 3개 카운티에 재활 카페를 마련해 연간 300명의 소외계층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고용한 기업에게는 정부에서 세제 지원 등의 혜택을 줍니다. 버클루의 재원은 지방자치단체 및 기업들의 지원, 블루 스카이스 카페 등의 수익 사업을 통해 마련됩니다.


‘주마벤처스’는 저소득층 청소년들이 대학 진학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독특한 사회적 기업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등에 총 3개 사무실을 운영하는 이들은 연평균 400명의 학생들에게 회계 교육, 금융 거래 방법 등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즈, 오클랜드 레이더스 등 프로 미식축구, 야구, 농구팀과 계약을 맺고 경기가 열릴 때마다 학생들이 경기장에서 간식을 판매해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주마벤처스가 저소득층 청소년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애쓰는 것은 교육을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위함입니다. 주마벤처스는 청소년들의 입시 준비도 돕고 있는데 대학 진학률이 90%에 이릅니다. 특히 이들은 지속적인 지원을 위해 수익사업을 적절히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 예로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의 운영권을 확보해 학생들이 아이스크림을 팔 수 있는 가판점을 여러 군데서 운영함으로써 수익성을 높입니다.


이런 주마벤처스의 활동은 경제적 이유로 대학 진학이 꿈에 그치던 청소년과 그 가정에 새로운 삶의 희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시던 주님의 구체적이고 뜨거운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9월 2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62) 나라를 풍요롭게하는 사회적 기업


‘하느님 나라’ 미리 체험해볼 수 있는 장


사회적 기업은 학교에서 들어보지 못한 사회공동체를 살리는 많은 내용들을 배우면서 꿈을 나누는 또 하나의 생명과 사랑 나눔의 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해볼 수 있는 장이라는 점에서 교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로버츠 기업개발기금(the Roberts Enterprise Development Fund, REDF)이라는 일개 사회적 기업이 거두고 있는 결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들의 삶에 놓인 아픔과 질곡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힘 등 가진 바를 내어놓는 모습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셔서 기쁨이 되어주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REDF는 자신들이 투자한 사회적 기업이 안정적 고용을 유지한다고 무조건 높은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고용을 유지한다 해도 최저임금 수준의 단순 일자리(entry level job)에 머물면 오히려 빈곤을 고착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과감히 퇴출시키기도 합니다. 사회적 기업의 목적은 최소한의 일자리가 아니라, 건실하게 미래를 보장하는 제대로 된 일자리 창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회적 기업에 투자함에 있어서도 ‘효율성’과 ‘경쟁력’을 함께 연결해야 합니다. REDF가 강조하는 사회적 기업 투자의 핵심 원칙은 “착한 기업이라고 봐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착한 기업’이 경쟁에서 뒤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사회적 소명만 앞세워서는 아무리 뜻이 훌륭한 사업이라도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고, 결국 사회적 자원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합리적인 선택으로 인해 현재 REDF가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들을 망라하는 노동자의 78%는 2년 이상 일자리를 유지하고 평균소득이 300% 이상 늘었습니다. 나아가 REDF는 이제 더 이상 설립자인 조지 로버츠(George R. Roberts)가 기부하지 않아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재정 자립도가 높아졌습니다. 사회적 기업 육성을 통해 빈곤 퇴치, 소수민족 청소년 교육 등 지역사회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보고, 글로벌 금융기업 UBS, 휴렛패커드 등 다른 기부자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REDF는 이러한 사회적 지지와 성과를 디딤돌로 나라와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기여도와 역할을 점점 더 확대해나가고 있습니다. REDF가 개발해 실용화한 사회적 기업 평가방법도 사회적 기업 생태계를 건전하게 만들어 가는데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을 과학적 방법으로 평가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모여서 만든 ETO(Effort To Outcome) 2.0이라는 시스템은 사회적 기업의 활동으로 사회적 가치가 얼마나 향상되었는지를 수치화해서 비교 평가합니다. 특히 REDF는 사회적 기업을 평가할 때 사회적 약자들에게 얼마나 더 나은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사업인지를 따져 봄으로써 삶의 질을 생각하는 새로운 기업문화를 형성하는데 획기적이고 경이로운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REDF가 이루어온 결실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생각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의식적인 선택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 수는 해를 거듭할수록 늘고 있어 복음서에 등장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는 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성체성사의 삶을 현실화하는 신앙인의 도리이자 사명일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9월 3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63) 그레이스톤 베이커리


‘직원을 고용하기 위해 빵을 만든다’


미국형 사회적 기업들은 물질주의가 넘실대는 현대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정의가 샘솟는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세우고 있습니다.


주로 사회적 혜택, 환경보호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미국과 캐나다의 사회적 기업 연대체인 ‘사회적 기업연합’(The Social Enterprise Alliance, SEA)은 사회적 기업을 위한 교육과 정보 교류를 담당하며, 매년 비영리단체(NPO), 공정 거래(fair trade), 디지털 통합(digital inclusion), 마이크로 파이낸스(micro-finance) 등을 포함한 사회적 기업 리더들의 총회인 사회적 기업 정상회의(Social Enterprise Summit)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사회적 기업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우리로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사회적 기업으로는 잘 알려진 로버츠 기업개발기금(the Roberts Enterprise Development Fund)을 비롯해 그레이스톤 베이커리(Greyston Bakery), 뉴욕에서 유명한 ‘집짓는 사람들’, 캘리포니아에서 알려진 루비콘 프로그램(Rubicon Programs), 캐나다 온타리오의 키즈링크(Kidlinks), 커뮤니티 부자 벤처(Community Wealth Ventures), 장거리 전화 통신 회사인 워킹 에셋(Working Assets)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브라우니를 만들기 위해 직원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을 고용하기 위해 브라우니를 만든다’는 경영철학으로 유명한 그레이스톤 베이커리는 많은 배울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레이스톤 베이커리는 저명한 학자의 길을 걷다가 스님이 된 버나드 글래스맨(Bernard Glassman)이 1982년 뉴욕주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용커스의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한 곳의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문을 연 가게였습니다. 현재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100여 명의 종업원 대부분은 실업자였거나 노숙자들이었고, 심지어 약물중독에 시달린 경험이 있거나, 한 번쯤은 감옥에 다녀온 전과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글래스맨 스님은 이들에게 건전하고 가치있는 삶을 되찾아주기 위해 사업을 펼쳤던 것입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명상으로 시작하는 규칙적 제빵 작업 스케줄, 마약을 끊어야만 기거할 수 있는 무료 아파트, 젊은 엄마들이 일터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료 유아원 등을 세워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한 것입니다.


영리회사인 베이커리와 함께 활동하는 비영리재단인 그레이스톤 재단은 매년 2200여 명의 회원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칩니다. 재단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업을 주고, 직업훈련을 시키고, 저소득자들을 위한 집이나 아파트 제공, 어린이 돌보기, 학교 방과후 프로그램,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를 일으키는 HIV 바이러스를 가진 사람들의 건강 돌보기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소외된 이웃들을 도움으로써 지역사회 발전과 동시에 인간의 잠재력을 향상시키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력이 바탕이 되어 소매상급 제과점으로 시작된 그레이스톤 베이커리는 오늘날 350만 달러 이상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을 뿐 아니라, 백악관에도 그레이스톤에서 만들어진 쿠키가 배달되는 등 저변이 확대되어 든든한 뿌리를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모습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채워나가고 있다는 선명한 증명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0월 1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64) 우리나라 사회적 기업 현황


재정 지원 체계 하루빨리 구축해야


우리 일상으로 깊숙이 다가선 사회적 기업은 결국 정부나 어느 개인의 힘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사회적 경제 현상에 대한 해결책과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기업의 사회공헌과 사회운동을 결합해 시너지효과를 얻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적인 애덕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로 경제적 영역이 중심이 되었던 과거에 비해 근래 사회적 기업은 복지, 보건과 위생을 필두로 주택, 아동보육, 교통, 식품, 농산물, 환경서비스, 레저 등 인간의 삶과 관계된 거의 전 분야로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거창한 목표나 목적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사회적 기업이 단계적으로 실천해나가고 있는 일자리 창출을 통한 고용확대, 생태계 보전, 건강 의식 향상, 장애인 권익 증진, 재활용 활성화 등의 활동은 결국 주님의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향유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기업들의 눈부신 발전과 성가(聲價)에 미래 사회에는 모든 비정부기구(NGO)가 사회적 기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미래연구소인 텔어스연구소(Tellus Institute)는 사회적 기업이 최대 인구를 보유하는 제4의 권력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합니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 사회적 기업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점차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07년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여 사회서비스를 확충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목적으로 ‘사회적 기업 육성법’을 만들어 시행해오고 있습니다. 정부가 직접 나서 기초생활수급자 등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고용 창출에 중점을 두던 정책을 수정해 민간영역인 사회적 기업이 이러한 역할을 맡도록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부 인증 절차, 창출된 이윤 가운데 2/3의 사회적 목적 재투자(상법상 주식회사인 경우) 의무조항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사회적 기업은 정부 주도로 육성되는 ‘영국형 사회적 기업’을 많이 닮아 있습니다. 관련법이 제정된 이듬해인 2008년 말 현재 총 218개의 사회적 기업이 노동부 인증을 받아 465억 원 매출에 28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기획 및 마케팅 역량, 조직구조 분화와 인적 자원 관리의 안정성, 자금 조달의 어려움 등 많은 면에서 부족한 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고용 효과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고용의 질이나 사업의 지속성 등에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대기업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대기업들과의 연계 사업으로 사회적 기업이 창출되고 있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재정지원 서비스를 하는 은행이나 창업투자회사 역할을 하는 사회적 기업이 없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사회적 기업인 로버츠기업개발기금(REDF)처럼 사회적 기업을 돕는 사회적 기업이 늘어나 지속가능한 발전을 해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때, 사회적 기업이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부를 비롯한 정부 차원에서도 단순한 인력 지원만이 아닌 재정 지원 체계를 하루빨리 구축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 차원에서도 시대의 징표를 잘 읽어냄으로써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현장에서 주님의 도구가 되어 이 세상에 하루빨리 경제적 평화가 정착되는 하느님 나라가 오도록 늘 깨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0월 2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65) 종교계 사회적 기업 현황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 전하는 ‘교회 발자취’


지난 1997년 발생한 IMF 외환위기는 교회 안팎으로 적잖은 시련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아울러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투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경제적 어려움 속에 희망을 잃어가고 있을 때,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종교계는 사회적 약자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가는 길을 안내함으로써 인간의 외적 안정적 삶과 정신적, 영성적 선익을 도모하는 종교 본연의 몫을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펼쳤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이 시기에 시대적 상황에 대한 통찰을 통해 사회적 기업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이미 다른 종단에 비해 오랜 체험과 역사를 지닌 빈민사목이나 노동사목 등 사회 안에서의 다양한 사목적 활동을 통해 오늘날 사회적 기업의 단초가 되는 튼실한 토대와 기반을 다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불교 등 다른 종단들보다 앞서 사회적 기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교회 차원에서 다양한 모색과 행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뜻있는 이들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 자선과 기부 등 나눔 문화가 우리 사회에 널리 확산되고 뿌리내릴 수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나아가 서구 선진교회의 경험과 역사를 바탕으로 사회적 기업이라는 새로운 씨앗을 들여올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어낸 통찰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여전히 제도 미비, 이해 부족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그간 기울여온 노력에 비해 사회적 기업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경험을 통해 보았듯이 사회적 기업은 복음화의 중요한 방편이기도 하기 때문에 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이웃종교의 사회적 기업


그런 면에서 사회적 기업을 둘러싼 이웃종교들의 활동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지난 2010년 5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열매나눔재단)와 기독교경영연구원이 주최해 열린 ‘기독교 사회적 기업가 아카데미’는 가톨릭교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이 행사에서 개신교 목회자들은 사회적 기업의 신학적 선교적 의미를 성찰하고 지적하면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기업을 활용할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이를 위한 교육과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개신교계는 이어 2010년 12월 정부와 공동으로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에서 기독교 사회적 기업 활성화를 위한 세미나를 열어, 개신교회가 운영하는 복지사업들을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려는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나아가 사회적 기업이 한국 개신교가 추진해야 할 하나의 소명이 된다는 공감대를 이뤄냅니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개신교계가 ‘선성장 후복지’로 지나치게 양적 성장을 강조하고,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하여 사회적 신뢰를 잃어버림으로써 개신교의 교세가 감소하게 됐다는 냉철한 비판과 평가가 깔려 있습니다. 이 같은 이론적 작업을 바탕으로 2011년 4월에는 개신교계 초교파 단체인 ‘기독교 사회적 기업 지원센터’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 사회적 기업을 발족시키고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해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개신교는 사회적 기업의 의미를 경제적인 측면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신학적·신앙적으로 접근하면서 선교의 새로운 돌파구로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도 발 빠르게 사회의 징표를 읽고 사회를 향한 경제적 정의를 정립하기 위한 의식 전환과 교회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0월 2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66) 종교계 사회적 기업 경향


소외된 이들에게 먼저 손 내미는 사회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이웃종교의 모습에서도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섭리를 찾아낼 수 있을 때 우리는 “깨어 있어라”(마르 13, 37)는 주님의 말씀을 일상의 삶에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적 성장에 매달리는 바람에 오히려 퇴조의 길을 걷고 있는 개신교의 현재는 가톨릭교회에도 적잖은 성찰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멀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약화되고 말았다는 반성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업을 통해 다시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는 개신교회의 인식 전환은 매우 바람직한 본보기입니다.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사회적 기업


개신교에서는 사회적 기업을 비즈니스 선교(Business As Mission, BAM)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신교의 직접적인 복음 전도 방법을 적대시하고, 선교사에게 비자 발급을 허락하지 않는 지역에서 유용한 선교전략이 되어온 비즈니스 선교의 일환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로벌 무한경쟁으로 전 세계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초래된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선교전략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비즈니스 선교에서 근래 들어 새롭게 주목받는 것은 공생ㆍ협력의 패러다임입니다. 이기적이고 파편화된 ‘나’가 아니라, 협력하고 참여하며 공존하는 ‘우리’가 힘을 얻으며, 협력적이고 개방적이며 참여적인 사회적 기업이 새로운 대안으로 힘을 얻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 사회적 기업은 지역사회의 사회문제 해결을 통해 선교적 가치를 창출하는 비즈니스 선교의 전략적 모형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이 가지고 있는 참여적 의사결정 구조는 지역사회와 주민들을 기업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자립적 또는 자치적 일터교회의 바탕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사회적 기업을 통해 지역사회의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개척선교의 핵심적인 전략이 됩니다.


눈을 넓혀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약한 아시아 등지에서 선교의 거점 역할을 하는 사회적 기업은 선교사 역할을 하는 사회적 기업가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적 기업의 이념과 정신을 현지인들에게 교육할 수 있는 장을 확보하게 해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회적 기업은 현지인들에게 부담이나 거부감을 줄 수 있는 성경이나 교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성경적 사상이나 교리에 바탕을 둔 정신과 사상을 전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과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를 뛰어넘어 ‘공동체’적 경제 원리를 추구하는 사회적 기업은 경제적 가치에 앞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지닌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해법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적 가치관을 세상에 심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회적 기업은 면면한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숨 쉬고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원리를 새롭게 이해하고 실천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들 가운데서 당신의 뜻을 펼치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잘 읽어낼 수 있도록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사랑을 나누는 맑은 정신으로 사회를 직시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1월 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67) 개신교 사회적 기업의 배울점


지역민과 서로 협력하는 ‘소통의 장’


사회적 기업의 신학적 선교적 의미를 인식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사회적 기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개신교회는 다른 종단에 비해 다양한 모습의 사회적 기업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안에서 다양한 양상의 사회적 기업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연구와 투자를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회적 기업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와 실천을 밑거름으로 개별 교회들이 사회적 기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직접 찾아가 컨설팅을 해주고 있으며, 게다가 ‘1교회 1사회적 기업’ 참여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개신교회의 모습은 가톨릭교회에도 적잖은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개신교계 사회적 기업의 첫 번째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사회공익형 교육기업인 ‘파워스터디’입니다. 이 기업은 사교육비 거품을 제거하고 교육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교회가 지방자치단체 등과 연합해 새로운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일부 상위 학생들만이 누리는 혜택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꿈을 키우고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교육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개신교회와 교육기관이 교육 공간을 제공하고 ‘파워스터디’가 교육기자재 구입 및 장치, 교육운영, 광고홍보 등을 통해 실질적 도움을 주어 공익형 교육 사업을 실시함으로써 호평을 얻고 있습니다.


개신교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회적 기업 가운데 또 하나가 무하마드 유누스에 의해 설립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뱅크를 모델로 한 소액창업 자금 대출사업을 하는 ‘밑천나눔뱅크’입니다. IMF 사태의 여파가 가시기 전인 2003년 지역교회인 숭의교회가 서울역 앞 쪽방촌 주민을 돕기 위한 밑천나눔공동체 운동의 일환으로 설립한 밑천나눔뱅크는 쪽방촌 안에 자활 의지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창업자금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울러 자활프로그램과 연계해 직업훈련을 병행함으로써 안정적인 사업을 지속하도록 도와 양극화 해소에도 일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역사회 안에 거점을 두고 있는 교회를 기반으로 동네 카페 형태의 작은 규모로 출발하여 전국적으로 세를 넓혀가고 있는 사회적 기업인 공정무역 카페 ‘커피밀’은 지역사회와의 소통과 함께 선교의 거점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러한 개신교회의 활약상은 다른 이웃종교에 자연스럽게 전해지면서 종교시설 내에 누구나 부담없이 찾을 수 있는 카페 등 쉼터를 마련해 지역사회를 위해 개방하는 모습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개신교 안에서 사회적 기업이 새로운 선교의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지난해 12월에는 교계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기업들의 상품 판로를 열어주기 위한 기독교사회적기업 박람회가 열릴 정도로 교회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박람회에는 개신교계 사회적 기업 15개 업체의 상품이 전시되고, 교회와 사회적 기업을 이어주는 업무 협약식도 진행돼 큰 찬사를 받은 바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와 지역공동체, 그리고 정부가 서로 협력해 상호 소통의 장 역할까지 하는 사회적 기업의 확산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네트워크를 통해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전하시고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전 생애를 걸고 따르는 사람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1월 1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68) 불교 사회적 기업의 배울 점


‘문화적 역량’으로 지역민 참여 이끌다


우리나라는 서구 선진사회에 비해 사회적 기업가 양성 및 성장 인프라가 미흡한데다 재정적 지원을 정부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사회적 기업이 성장 발전해나가는데 있어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어렵게 출발한 사회적 기업들이 꾸준한 기업활동을 통해 수익을 얻고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일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사라지는 일이 심심찮게 생겨나기도 합니다.


불교의 경우는 천주교나 개신교에 비해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기반이나 사회운동적 성격의 역량과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불교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사찰들이 다른 이웃종교들이 지닌 기반시설들과 비교해 볼 때 일반인들의 생활터전과는 지리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해나가기 위해 불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지원과 협력시스템을 갖추어 지역사회에 기반을 마련하는데 일차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 활성화를 위해 ▲ 전문인력 양성 ▲ 재원 마련 ▲ 범종단 차원의 지원시스템 구축 ▲ 인적·물적인 자원교류를 위한 협력 네트워크 구성 등을 과제로 꼽고, 다방면에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불교계의 모습은 한국교회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불교계보다는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불교계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신자들의 관심과 참여도도 낮은 실정입니다.


불교계 사회적 기업들은 우리 문화 안에서 상대적으로 풍부한 불교문화 유산을 바탕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디딤돌로 삼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들이 지닌 역사적·문화적 역량을 기반으로 지역사회의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사회적 기업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점은 우리도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불교 사회적 기업의 대표적 사례로 불교문화를 디자인하는 벤처기업 밈(mim, made in mind)을 들 수 있습니다. ‘밈’은 문화콘텐츠 기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잊혀가는 전통문화 자원을 발굴하고, 이를 상품화하여 판매함으로써 교류(소통)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나아가 저개발국가에서 자신의 문화를 지킬 수 있도록 고유의 문화를 활용한 상품을 개발해 경제활동의 근간이 되도록 지원하는 한편,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사업을 펼치는 등 사회적 책임의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습니다.


이웃종교들에도 잘 알려져 있는 ‘(주)연우와 함께’는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 중앙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2009년 10월에 설립된 불교계 사회적 기업으로 ‘착한 소비, 착한 나눔’을 모토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사찰음식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한 식자재 공급 사업을 통해 착한 소비를 촉진하고, 불교생태마을을 조성하는 등 자신들이 지닌 특성을 최대한 살려 활용하는 모습은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참신한 귀감(龜鑑)이 됩니다. 또한 사찰과 불교 생산자를 발굴 육성하고, 착한 생산자와 소비자의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지속가능한 자립형 사회적 기업을 만드는 모습은 경제정의 실현 차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1월 1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69)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기업


“지역과 사회에 주님의 깊은 뜻 전합니다”


우리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의 이념과 정신은 성경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공동체적 삶과 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혈연이나 지연에 따른 공동체 의식이 유난히 끈끈한 동양권에서 매우 유용한 사목적 접근 방식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 삶의 토대를 이루는 경제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적인 접근을 강조하고 교육하는 것은 배금주의와 물질주의, 개인주의 등에 물들어 그리스도적인 가치와 멀어지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 성경적 물질관과 경제관을 심어줌으로써 참신한 가치관의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에 뿌리를 둔 경제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은 단순히 경제적 이득을 나누고 공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문제 해결의 판도를 바꾸는 쇄신의 역할까지 맡는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회적 기업이 일궈가는 사회적 경제의 모습은 인간의 끝 간 데 없는 경쟁 속에서 잃어가고 있는 그리스도적인 경제의 척도와 원리를 회복함으로써 사회를 성화시켜 나가는 복음화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기업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잘 읽어내 지역과 사회에서 펼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역사에 부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도전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회적 기업(경제)은 오랜 수도원 전통을 밑거름으로 한 협동조합의 정신과 철학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수도자들의 삶에서 비롯된, 종교적 사랑에 근거한 나눔과 연대 정신에 기초한 경제 공동체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에 뿌리를 둔 한국교회 내 대표적인 사회적 기업으로 위캔(wecan)센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샬트로 성바오로 수녀회가 지난 2001년 중증장애인 재활시설로 설립한 위캔센터는 장애인 유형 중 취업이 가장 어려운 지적 장애인에게 경제적 자립과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한 직업재활서비스를 제공해오고 있습니다.


위캔센터에서는 지적장애인 40여 명이 반죽, 성형, 포장팀으로 나뉘어 우리밀 과자를 생산하면서 진정한 사회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치료공동체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1년 11월 광주대교구 직업재활시설로 설립돼 사회적 기업 인증을 받은 엠마우스 산업도 좋은 본보기입니다. 천노엘 신부(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이끄는 사회복지법인 무지개 공동회 소속으로, 지적ㆍ자폐성 장애인들이 일하는 직업재활시설인 엠마우스 산업에서는 40여 명의 지적ㆍ자폐성 장애인들이 가톨릭 전례양초와 화장지 등을 생산해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라는 울타리를 기반으로 지평을 넓혀나가고 있는 사회적 기업들은 대체로 위캔센터처럼 우리 사회는 물론 교회 안에서도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는 장애인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한 복지적 측면에서 접근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근래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사회적 기업 유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랜 역사와 연륜을 지닌 교회 내 사회적 기업들의 경우 많은 수가 소외된 이들의 일자리 문제에 많은 시간과 자산을 투여하고 있는 ‘일자리 제공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 새로운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세상을 아름답게 바꿔나가고 있는 사회적 기업은 하느님 사랑의 오묘한 진리를 엿보게 해줍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1월 2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70) 다양한 가치 담은 사회적 기업


지역사회에 ‘하느님 사랑’ 전하는 통로


성경을 보면 예수님 곁에는 늘 온갖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비롯해 갖가지 신체적 어려움을 지닌 장애인, 노인, 세리, 여인, 어린이 등 가난한 이들이나 소외된 이들이 함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치유되고 기쁨을 얻을 뿐 아니라, 때로는 주님과의 더욱 깊은 친교를 통해 그분을 닮아가고 성실한 제자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 일상에 깊이 다가온 다양한 모습의 사회적 기업의 나눔과 도움은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희망과 재생의 길이 된다는 측면에서 예수님 사랑의 정신을 구현하는 아름다운 본보기일 것입니다.


일할 수 있는 능력과 뜻을 지니고 있음에도 일을 할 수 없었던 장애인이나 가난한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위캔(wecan)센터와 같은 ‘일자리 제공형’ 사회적 기업에 비해 근래에 와서는 다양한 가치를 담아내는 사회적 기업들이 생겨나면서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대전지역 사회적 기업으로는 최초로 대통령상까지 받은 ‘대전 민들레 의료생협’은 지역사회에 보건의료라는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며, 사회적 기업의 새로운 모범을 창출해나가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민들레 의료생협은 지역주민들이 공동으로 출자해 병원을 만들고 공동으로 소유·운영하는 의료공동체인데, 수익에 얽매이지 않는 의료시스템 덕분에 가난한 이들도 돈 걱정 없이 인간다운 대우를 받으며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지역사회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전하는 좋은 통로입니다. 이 때문에 지난 2002년 300명의 조합원이 뜻을 모아 문을 연 민들레 의료생협은 이제 2800여 명의 조합원이 함께하는 협동조합으로 성장했습니다.


최근에는 활동영역을 넓혀 대전 서구 둔산동에 내과와 한의원, 치과 등을 갖춘 두 번째 병원도 마련하는 등 성숙한 사랑을 기반으로 커가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이렇게 민들레 의료생협처럼 지역주민들에게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은 ‘사회서비스 제공형’ 사회적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기업들에 비해 사회복지법인 하상복지회에서 운영하는 ‘도서출판 하상점자’는 또 다른 모습을 지닌 사회적 기업입니다.


시각장애인에게 필요한 정보를 공급하는 일을 주로 하는 ‘하상점자’는 점자(點字)로 된 인쇄물을 비롯해 전자도서, 음성도서 등을 제작해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의 빛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새 상품 개발에도 힘써 점자가 있는 명함과 달력 등을 제작해 보급하면서 점자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함께 기울이고 있습니다. 나아가 점자성경과 소리성경책, 교리서 등도 만들어 전국 각지에 있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보급함으로써 장애인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선교사 역할까지 하고 있습니다.


하상점자에서 점자교정 업무를 비롯해 교열·출판 분야, 간행물 기획·편집 분야 등 에서는 일하고 있는 20여 명의 직원들 가운데는 시각장애인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장애를 지닌 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면서 사회적 약자에게 사회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일자리 제공형과 사회서비스 제공형 사회적 기업의 모습을 다함께 찾아볼 수 있는 기업은 ‘혼합형’ 사회적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기업들은 서로 다른 여건에 처해있는 이들 사이의 사회통합, 사회적 약자 배려, 공동체적 가치 제고 등을 통해 복음정신의 사회적 실현에 앞장섬으로써 사회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2월 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71) 무담보 소액대출 ‘마이크로 크레디트’


소외된 이들에게 ‘삶의 희망 · 재활’ 선사


무담보 소액대출인 ‘마이크로 크레디트’를 통해 가난한 이들의 자활을 도우며 새로운 대안공동체의 가능성을 인류에게 선사한 공로로 지난 20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회적 기업의 대열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경제학과 교수였던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박사가 빈곤 퇴치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1983년 설립한 그라민 은행은 땅이 없는 농촌 사람들이 자영업 등을 통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담보 없이 소액신용대출을 해줘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창출해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회적 기업을 설립해 소액대출을 받는 저소득층을 고용함으로써 이들의 자활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라민 은행은 빈민층에 이동전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라민폰을 비롯해, 전력 사정이 어려운 농촌에 전기를 공급하는 그라민샥티, 프랑스의 유제품 회사인 다농과 제휴하여 어린이용 유제품을 생산하는 그라민다농 등 지역사회의 발전을 돕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기업들을 설립해 공동선을 실현하며 아름다운 가치를 세상에 퍼뜨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라민 은행의 사회적 기업 만들기는 ‘가난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세상’ ‘굶주린 채 잠드는 아이가 없는 세상’ ‘피할 수 있는 질병으로 요절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지향하고 있다니, 비록 종교나 이념은 다를지라도 많은 부분이 복음적 가치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라민 은행처럼 종잣돈이나 사회적 기반이 부족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의 자활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곳 가운데 하나가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가 지난 2008년 6월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기쁨과희망은행’입니다.


교정시설에서 나온 지 3년이 안 된 사람이나 범죄피해자 가족들을 대상으로 창업자금을 빌려주는 무담보 대출은행으로 출발한 기쁨과 희망은행은 지금까지 100명이 넘는 이들에게 20억 원이 넘는 돈을 대출해 삶의 희망과 재활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출소자와 범죄피해자 가족 전용 ‘마이크로 크레디트’ 전문기관으로는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기쁨과희망은행은 대상자를 위한 인성교육과 사회·경제적 이해, 시장조사와 좋은 점포자리 찾기, 사업계획서 작성의 원리와 실습교육 등을 위해 창업교육을 실시하고 경영지도도 해줌으로써 꿈을 잃어버렸던 이들이 새로운 삶을 설계해 나갈 수 있도록 획기적이고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매년 10만 명 넘는 이들이 교도소와 구치소 등 교정시설에서 나와 사회에 적응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기쁨과희망은행의 대출규모는 큰 편은 아니지만, 전과(前過)라는 낙인이 찍혀 새 출발의 기회를 쉽게 얻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컴컴한 터널 속에서 만난 한줄기 빛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울러 이 은행은 사회적 냉대와 무관심 속에 방황하는 출소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줘 이들을 재범과 감옥으로 내모는 범죄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범죄로 인해 사회가 치러야 하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세상을 기쁨과 희망의 공동체로 가꿔나가는데 의미 있는 소중한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에서 발아한 희망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들이 세상 곳곳으로 더 많이 퍼져나가 튼실한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 만나며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2월 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72) 사회적 협동조합의 시대


무한경쟁시대의 착한 ‘대안 기업’


사회적 기업을 통해 성장해온 사회적 경제가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세상에 짙게 드리우고 있던 그늘이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은 이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어 사회적 협동조합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특히 올해는 유엔(UN)이 정한 ‘세계 협동조합의 해’여서 전 세계적으로 협동조합이 새롭게 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에 발맞춰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12월 29일 협동조합기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올해 1월 26일 공포되었고, 12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는 많은 부분 가톨릭 정신과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무한경쟁시대에 착한 대안 기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협동조합은 우리 사회 저변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승자독식 문화와 신자유주의, 양극화를 극복해 사람 냄새 나는 공동체를 이뤄갈 수 있는 씨앗으로 기대를 모으며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은 협동조합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업체를 통해 공동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자율적 단체’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리추구가 첫 번째 목적인 일반 기업체와는 달리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생겨난 새로운 형태의 기업이 바로 협동조합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협동조합은 매우 독특하고 가치 있는 기업모델로, 빈곤을 낮추고 일자리를 창출한다”며 협동조합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미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주위에서 친근한 대안경제 체제와 조직을 갖춘 협동조합은 영리회사의 독과점에 대응해 고품질의 재화와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무한 경쟁시장에서 지대한 순기능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의 경쟁력은 원가경영과 조합원의 공동 운영과 단합된 행동강령 실현에 있는데, 그 형태 또한 소비자협동조합, 생산자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노동자협동조합, 사회적 협동조합, 신세대협동조합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협동조합의 힘은 경제적 위기를 맞을 때 잘 드러납니다. 지난 2008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국제 금융위기 때에도 협동조합들은 좋은 일자리를 유지하고 물가안정과 지역경제를 안정시키는데 적잖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특히 이 시기를 겪으면서도 전 세계 협동조합 은행 가운데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은 은행이 단 한 곳도 발생하지 않아 협동조합의 위력과 안정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했습니다.


이 때문에 협동조합은 전 세계적으로 시장경제의 또 다른 한 축으로 주목받으며 우리의 생활방식과 경제 질서를 바꾸어놓을 만큼 큰 영향을 미치며 발전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협동조합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나라로 꼽히는 핀란드, 뉴질랜드, 스위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은 전 세계적으로도 살기 좋은 나라 순위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는 나라가 뛰어난 경제 발전과 복지 수준을 동시에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공익우선과 나눔정신이 바탕이 된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이는 모든 이가 인간 존엄성을 유지하며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생산 현장에서의 민주주의가 정치 제도의 민주화를 강화하고 지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2월 1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73) ‘공동선’ 고려하는 협동조합


축구 명문 ‘FC 바르셀로나’가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의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협동조합은 경제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익을 추구하지만 이윤 동기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않고 공동선을 먼저 고려합니다. 협동조합이 잘 발달돼 있는 국가와 지역에서 그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느 동네의 가게나 가까운 편의점에 가도 쉽게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오렌지주스 썬키스트(Sunkist)가 협동조합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태양(Sun)의 입맞춤(Kissed)’이라는 뜻을 지닌 썬키스트는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오렌지 브랜드입니다.


1877년 미국의 대륙횡단 철도 개통은 캘리포니아에만 국한되었던 감귤 소비를 미국 전역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는데, 감귤 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감귤 재배농가들은 오히려 도매상들의 횡포에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1893년, 감귤 재배농가들이 ‘남부 캘리포니아 과일거래소’를 만들어 감귤의 판매와 유통사업을 직접하게 됩니다. 1905년에는 조합원이 5000여 농가로까지 늘었는데 이는 감귤산업의 45%에 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거래소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늘날 썬키스트협동조합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 썬키스트협동조합은 미국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주의 6000여 감귤 재배농가를 조합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최고급 오렌지의 대명사가 된 썬키스트, 오렌지를 직접 재배하고 유통하는 것이 바로 그 시작이었습니다.


성공적인 협동조합의 예로 꼽히는 곳 가운데는 축구클럽도 있습니다. 세계적 축구스타 ‘리오넬 메시’가 뛰고 있는 스페인 FC 바르셀로나도 실제로는 17만3000여 명의 조합원이 운영하는 축구협동조합입니다.


세계 최고의 축구클럽 중 하나인 FC 바르셀로나는 1899년 11월 29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를 기반으로 탄생합니다. FC 바르셀로나는 1936~1939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중 클럽의 회장이 프랑코군의 공격에 숨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는데, 일종의 ‘시민 정신’을 대표하는 축구팀으로 거듭났습니다.


그 후, 협동조합의 형태로 이 정신을 계승하게 됩니다. 다른 축구팀들과는 달리 FC 바르셀로나는 출자자인 시민이 주인입니다. 보통의 스포츠구단이 기업이 주인이 되어 경영에 참여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따라서 구단주 격인 회장도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 뽑습니다. 회원 중 가입경력 1년 이상이면서 18세가 넘는 이라면 누구나 6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회장 선거에서 회장을 선출하는 투표 권한을 갖게 됩니다.


FC 바르셀로나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110여 년간 유니폼에 광고를 싣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스포츠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기보다는 시민구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포츠정신을 굳건히 지켜내고 있다는 자부심을 지닌 FC 바르셀로나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빈국을 돕는 일을 통하여 전 세계적인 아동문제에 참여하면서 매년 거액을 후원하기도 하는 등 가난한 이들과 공존 공영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의 협동조합의 존재는 사회적 경제의 풍토가 아직 척박한 우리로서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주위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이자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이 선한 의도를 갖고 사회적 공동선을 실현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면, 하느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내려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12월 2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74) 협동조합의 나라 ‘이탈리아’


공동선을 위한 150년 동안의 움직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성숙을 통해 그리스도의 완덕(完德)에 도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체험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도 결국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회적 경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세상을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사회적 협동조합이 경제시스템 안에서 모범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들을 살펴보면 협동조합 안에 자리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럽에서도 협동조합 활동이 매우 역동적인 모습으로 손꼽히는 이탈리아는 ‘협동조합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협동조합이 아름답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지난 1854년 토리노 노동자들이 만든 소비자협동조합을 시작으로 움트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협동조합은 15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공동선을 목적으로 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주님 보시기에 좋은 열매를 거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양적인 면에서만 보더라도 이탈리아에서는 국내총생산의 30%를 협동조합이 차지할 정도로 경제는 물론 사회·정치·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북동부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 지방이 독보적인데, 약 4만3000여 개에 이르는 이탈리아의 협동조합 중 1만5000여 개가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에밀리아-로마냐의 주도(州都) ‘볼로냐’는 이탈리아 협동조합의 수도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에밀리아-로마냐 국내총생산의 30%를 볼로냐가 차지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업 50개 가운데 15개가 협동조합입니다. 볼로냐 주민들에게 협동을 통한 생활 방식은 매우 익숙합니다. 소비자협동조합부터 농업이나 건설 등 삶과 밀접한 대부분의 분야가 협동조합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70% 이상을 지역에서 생산하고 지역에서 소비하는 생산·유통 소비조합, 실직자·노숙자들을 조합원으로 참여시켜 고용인원의 30%를 취약계층으로 하는 사회적 돌봄서비스 협동조합 등을 통해 사회적 완전고용을 이뤄내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볼로냐의 경우 전체 시민의 3분의 2가 한 곳 이상의 협동조합에 가입돼 있는 조합원일 정도입니다.


지난 2006년 캐나다의 레스타키스 교수(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교)가 쓴 <더 에밀리안 모델>에 따르면, 에밀리아-로마냐의 경우 인구는 이탈리아 전체의 7% 수준이지만, 국내총생산(GDP)의 9%를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이탈리아 전체 수출의 12%를 차지하고 있고, 각종 기술 등 관련 특허도 30%가 이 지방에 속해있는 협동조합과 기업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에밀리아-로마냐 지방은 제조업을 비롯해 서비스업 등 거의 모든 업종에 걸쳐 협동조합과 중소기업의 네트워크로 성공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공정과 나눔을 강조하는 민주주의 정신이 기업의 철학과 기능에 스며들어 있으며, 협동조합의 원리가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사회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이탈리아도 10% 안팎의 높은 실업률을 보이고 있지만, 협동조합 천국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해고가 없는 협동조합 중심의 지역경제 특징을 잘 살려냄으로써 약 3%대의 실업률을 유지하면서, 유럽에서 제일 잘사는 5대 도시 중 하나로 꼽히며 행복지수가 높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정신을 인식하고 전개하는 협동조합이 공동선이라는 사회적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월 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75) 국제협동조합연맹(ICA)


공동선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


전 세계 협동조합들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비정부기구(NGO)인 국제협동조합연맹(International Cooperative Alliance, ICA)에는 93개국의 236개 협동조합연합체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난 1895년에 설립돼 11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ICA는 전 세계 8억 명이 넘는 조합원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으로 꼽히는 핀란드, 스웨덴, 아일랜드, 캐나다 등의 나라에서는 인구의 절반이 조합원입니다. 국민소득에서 협동조합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 나라를 보면 핀란드, 뉴질랜드, 스위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 이른바 나라 규모는 작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강소국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나 산업에서 협동조합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선진국대열에 올라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ICA는 전 세계 300대 협동조합을 선정했는데, 여기에 포함된 협동조합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가톨릭 정신이 밑거름으로 잘 다져진 이탈리아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이탈리아에서는 20여 년 전인 지난 1991년에 ‘사회적 협동조합법’이 제정되어 협동조합운동의 모범을 보이며 협동조합의 새로운 지평을 꾸준히 확대해나가고 있습니다. 이 법에 따르면 사회적 협동조합(Social Cooperatives)은 ▲ 사회 서비스, 복지 서비스 및 교육 서비스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A타입’ ▲ 농업, 공업, 상업, 서비스 등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B타입’ 등으로 대별(大別)되어 있습니다. 또한 제한적이긴 하지만 조합원에게 이윤을 배분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북동부를 가로지르는 곳에 위치한 에밀리아-로마냐는 이탈리아 20개 주 가운데 하나이지만 조금은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2만2124㎢의 면적에 인구 430만 명 정도로,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경기도 면적의 2배 정도에 인구는 3분의 1이 조금 넘는 수준이지만, 협동조합으로 인해 이곳 사람들은 삶 속에서 특별한 체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에밀리아-로마냐 주에는 40만 개의 기업이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활동에 참여하기 힘든 노인과 어린이 등을 제외하면 5~6명이 하나의 기업을 구성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지역에는 도시라면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대규모 공단이나 대기업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밀리아-로마냐 주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사는 지방으로 꼽힐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잘사는 도시로 정평이 나있어 매년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에밀리아-로마냐 주가 이렇게 된 데에는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들의 힘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 지방에 튼실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내수와 수출을 담당하며 지역경제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 800개 가량이 협동조합이라니 이 지역경제에서 협동조합이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를 바탕으로 공동선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민주적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협동조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결실을 보여주며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삶을 체험하게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월 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76) 코프 아드리아티카


어려움 속에서도 나누는 ‘친교·사랑’


‘협동조합의 나라’ 이탈리아에서도 ‘협동조합의 천국’이라 불리는 에밀리아-로마냐의 주도(州都) 볼로냐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살짝 엿보게 해주신 인간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볼로냐 사람들은 생필품을 사러 장보러갈 때 ‘마트’나 ‘마켓’ 간다는 말보다 ‘코프’ 간다는 말을 더 많이 씁니다. ‘코프’라고 불리는 ‘코프 아드리아티카(Coop Adriatica)’는 소비자협동조합으로 지역에서 생산하는 로컬 푸드와 공산품을 주로 판매합니다. 이곳에 진열된 제품의 70% 이상이 에밀리아-로마냐 지역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코프에서 유통되는 농산물이나 축산물 등은 모두 ‘얼굴이 있는 생산자’가 직접 만들어 공급하는 것들입니다.


코프는 이곳에서 유통되는 상품에 대해서 자체 친환경 인증시스템을 구축해 관리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신뢰를 판매하는 것입니다. 코프의 제품은 가까운 맛집에서도 세계 4대 와인협동조합 중 하나인 이 지역 ‘리유니트와 치브(Riunite&Civ)’의 와인과 함께 그대로 찾을 수 있습니다. 지역사회에 기반을 두고 지역사회를 위해 이바지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입니다.


코프 조합원이 아니어도 코프 매장을 이용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볼로냐 주민들은 가격이 다소 비싸더라도 믿을 수 있는 자기 지역 상품이라는 생각에 25유로의 조합비를 내면서 이용하는 것을 전혀 아깝지 않게 여깁니다. 게다가 조합원은 코프 매장에서뿐만 아니라 코프가 운영하는 서점, 극장, 식당 등에서도 최대 30%까지 할인 혜택을 받습니다. 또한 조합원은 배당금을 일정 금액 적립하면 이자를 받을 수도 있고, 필요할 때 돈을 빌릴 수도 있습니다.


코프는 빈곤 대응 활동의 일환으로 매장 내 상품가치를 잃은 식료품을 폐기처분하는 대신 매년 11월 마지막 토요일 ‘음식 나눔의 날’에 이탈리아 전역에서 노란 봉투를 가진 사람이라면 매장의 물건을 양껏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이색적인 기부행사도 열고 있습니다. 다 쓰고 난 세제 통을 들고 와 매장에 설치돼 있는 자판기 기계에서 용액을 직접 담아가 환경오염을 줄이는 치밀함은 매우 감동적인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코프에서 발생한 수익 대부분이 지역문화 활동, 올바른 식습관 형성과 소비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지원,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지원 사업, 의료장비 지원과 장학금 지원 사업 등 사회공헌활동과 조합원에 대한 배당금 등으로 지역사회에 고스란히 재투자된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이윤을 올리면서도 지역경제 기여나 지역사회 공헌은커녕 의무 휴일조차 외면하는 우리나라 대형마트들과는 전혀 딴판이어서 사람냄새 풍기는 잔잔한 교훈을 줍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코프와 같이 어려움 속에서도 나눌 줄 아는 친교와 사랑에서 교회의 진정한 섬김과 교류를 보고 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세계적으로도 그 시스템이 잘 알려진 코프는 이페르 코프(Iper Coop) 등을 비롯한 대형 쇼핑몰 16개와 중소형 쇼핑몰 138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코프에는 2010년 현재 105만 명의 조합원이 가입해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이 낸 기금이 무려 19억 유로에 달합니다. 2009년 말 매출액만 20억 유로(약 2조9000억 원)에 달할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드러내고 있으니 협동조합의 힘은 놀랍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인류가 노력하면 머지않아 정의가 꽃피고 사랑이 둥지를 트는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월 1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77)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


높아만 가는 전 세계 ‘청년 실업률’


인류의 근현대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협동조합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세계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급증하였습니다. 이는 협동조합이 위기를 극복하는 강한 체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협동조합을 경험해본 이들이라면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협동조합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경제’는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해온 인류의 오랜 지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랜 옛날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모은다거나 품앗이로 모내기를 한다든가, 저수지나 하천, 숲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규칙을 만들고 지켜온 것 등이 모두 사회적 경제에 속합니다.


사회적 경제는 이렇듯 다양한 영역에 걸쳐 공동선을 위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사회구성원들의 통합과 전체적 선익을 도모하면서 인간적 향상을 추구하며 공동체 발전에 원동력이 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인류가 진화시켜온 사회적 경제의 한 모습인 협동조합은 나눔, 사랑, 정의, 평화 등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가르침을 잘 담아내고 있는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지역 협동조합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으며, 어떻게 세상을 바꿔나가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일찌감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이탈리아도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몸살을 앓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2012년 10월, 실업률이 11.1%로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하는가 하면, 20~30대의 청년실업률은 36.5%를 기록해 미래를 암울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메카’로 불리는 에밀리아-로마냐 지방은 놀랄 만큼 평온합니다. 이 지역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협동조합들의 네트워크가 어마어마한 외부 충격을 고르게 흡수하는 ‘완충경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협동조합 네트워크에는 실업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협동조합들이 좀처럼 해고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협동조합들은 고용을 축소하기보다 전체 임금을 삭감해서라도 일자리를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엄청난 경제위기의 파고 속에서도 이 지역의 실업률은 3%를 밑돌고 있습니다.


이처럼 에밀리아-로마냐의 힘은 신뢰와 협동의 네트워크에서 나옵니다. 경쟁력 확보의 비결이 동시에 위기 타개의 비결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탈리아 협동조합 공동체들이 누리는 안정과 평화의 바탕에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향유했던 신뢰와 협동을 보장하는 독특한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협동조합들의 협동조합으로 불리는 협동조합 연합체인 ‘레가 코프(Lega Coop)’가 있어 개별 협동조합을 대변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단위 협동조합들은 당기순이익의 3%를 레가 코프에 적립해 ‘조합기금’(coopfund)을 조성하고, 레가는 이를 협동조합에 대한 홍보, 정치적 옹호 및 대변, 협동조합 설립과 발전 지원, 공동 활로 등을 모색하는데 활용합니다. 이뿐 아니라 레가는 단위 협동조합이 파산하거나 어려워질 때 이 기금을 사용해서 실업자를 다른 협동조합에 취직시켜주거나 기업에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조합원들은 안심하고 경제활동을 펼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협동조합들의 모습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믿음을 바탕으로 한 나눔과 사랑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월 2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78) 협동조합 돕는 협동조합


자연스럽게 협동조합 정신에 물들다


협동조합의 역사와 현재는 경제적 평화가 거저 주어지는 주님의 선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믿음과 사랑, 그리고 실천을 통해 세상 속에서 캐낼 수 있는 소중한 보화임을 보여줍니다.


협동조합들을 돕는 협동조합인 이탈리아 ‘레가 코프(Lega Coop, 이하 레가)’는 아직 그리스도 정신이 일천한 우리 사회에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 현실에 비춰보면 레가의 활동은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이기만 합니다. 우선 이익만 바라보는 경제 풍토에서는 당기순이익에서 3%를 떼어내 공동의 미래를 위해 적립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 경제적 상황이 어려울 때 상대적으로 여건이 나은 협동조합 들이 자발적으로 일자리를 나눠 힘들어하는 조합원들을 돕는다는 것도 쉬운 선택은 아닙니다. 어려움마저 나누고자 하는 절절한 형제애가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입니다.


나눔과 사랑에 앞장서고 있는 레가는 지난 1886년에 설립돼 12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레가에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소매업을 비롯해 건설업, 제조업, 서비스업, 금융업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약하는 1만5000개의 협동조합이 가입돼 있습니다. 레가 외에도 협동조합연합회(CCI), 협동조합총연합(AGCI), 이탈리아협동조합연합(UNCI) 등의 협동조합 중앙조직이 있는데, 이탈리아 협동조합 전체의 50%가 이러한 연합체에 속해 있습니다.


레가는 단위 협동조합이 조성한 ‘조합기금’을 협동조합 발전기금으로 활용해 매년 수십 개의 협동조합 설립을 지원하고, 수천 명에게 ‘착한 일자리’를 찾아주고 있습니다. 조합원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경우 전직(轉職)에 필요한 교육훈련도 협동조합 네트워크 내부에서 이뤄집니다.


계층 사이는 물론 세대 사이에서 치열한 일자리 경쟁으로 노동의 질이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이로 인해 노동 현장에서의 자살률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레가의 성과는 몇몇 통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소속 조합원 855만 명에, 연 매출액 5650억 유로(약 840조 원)로 웬만한 국가 수준을 상회합니다.


레가를 비롯한 이탈리아 협동조합들은 중요한 결정이나 전략적 방침도 조합원 총회에서 1인 1표로 결정합니다. 보유한 주식 수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는 주주자본주의 하에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규모가 커질수록 초창기의 첫 마음과 정신을 잃기 쉽습니다. 하지만 레가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협동조합들은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도 공동체를 지향하며 견고한 연대의 모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탈리아 협동조합들이 민주성과 개방성을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철저한 교육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협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된 지역에서는 협동조합들이 어린이집 같은 보육시설을 설립해 운영하는 공동육아도 자연스런 일상의 문화가 된 지 오래입니다.


이런 토양 속에서 자란 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의 정신에 젖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나눔과 사랑의 협동조합은 사람과 그 문화마저 그리스도화 하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월 2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79) 협동조합이 지닌 ‘힘’


“교육 없는 ‘협동조합’은 없다”


그리스도교 정신과 전통이 강한 지역이나 문화 속에서 협동조합들이 좋은 열매를 거두고 있는 현실은 협동조합이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적·제도적 산물임을 뛰어넘어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담고 있는 역동적인 조직임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다양한 방향 모색과 실천을 통해 발전시켜가고 있는 협동조합이라는 제도 안에는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하는 진리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협동조합이 경제위기 등 다양한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빛을 발하는 것도 바로 협동조합이 지닌 이러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로서 협동조합이 세상 속에서 탁월하고 빼어난 모습을 드러내는 힘은 바로 그리스도교 전통을 바탕으로 한 교육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 분포돼 있는 협동조합들은 거의 예외 없이 조합원들에 대해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교육만으로 쉽게 조합원으로 가입해 활동할 수 있는 곳도 있지만, 사회적 책임과 영향력이 큰 협동조합일수록 다양하고 단계적인 교육과정 이수를 통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합의 정신과 전통이 몸에 배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협동조합들 가운데는 조합 가입 의사를 밝히고 5년이 지난 뒤에야 정식 조합원이 될 수 있는 곳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만 봐도 협동조합운동에서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협동조합의 나라’ 이탈리아만 봐도, 협동조합의 도시라 불리는 트렌토나 볼로냐 등 협동조합이 지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도시일수록 어릴 때부터 ‘협동조합’에 대한 교육이 철저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중·고교 과정에서는 물론이고 초등학교 때부터 정규 교과과정에 협동조합에 대한 교육을 필수과목으로 하는 다양한 커리큘럼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교육 내용은 협동조합의 정신과 역사, 작동 원리 등 협동조합을 둘러싼 일반적인 것이지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러한 이론보다 협동조합을 통해 이뤄지는 직·간접적인 체험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나 형제의 손을 잡고 ‘코프(Coop)’ 등 협동조합 공동체를 오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의 체계와 정신 등을 배우게 될 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성을 함께 키워나감으로써 실천적인 나눔과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존재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일상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체화되는 정신들은 사랑, 나눔, 일치, 협력, 평화 등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에 맞닿아 있어 굳이 누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가톨릭 정신에 젖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태어날 때부터 수많은 조합원들의 관심과 배려를 통해 건강한 먹을거리와 따뜻한 정신적 지지 속에서 자양분을 섭취하며 성장해나갈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특별한 수고를 더 기울이지 않더라도 일상생활과 밀접한 협동조합 안에서 전인적인 성장이 이뤄지는 것이니, 이만큼 효율적인 교육의 장도 없을 듯합니다. 이처럼 교육과 협동조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에 ‘교육 없는 협동조합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2월 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0) 다양한 협동조합들


노동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귀중한 밑거름


지상에서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순간순간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 이 또한 크나큰 은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역(苦役)과 피땀으로 다가오는 노동은 본래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유지, 보존하기 위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창조적인 모습을 세상 속에서 드러내며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창조질서를 유지하는 도구이며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노동을 통하여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역사(役事)에 참여한다고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노동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이었으며, 노동의 여러 형태 안에서 창조주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닮은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노동은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신성한 의무이자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동의 가치가 훼손돼 노동이 기쁨이 아니라, 고통과 짐이 되는 현실은 결코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활동에 참여하는 노동의 참 가치를 잘 드러내는 인간의 경제활동 가운데 하나가 (사회적) 협동조합(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사람이 노동을 통해 창조해내는 가치가 형제를 위한 봉사일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데 귀중한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협동조합 어린이집 ‘라치코냐’


이탈리아 북동부 에밀리아-로마냐 주 주도(州都) 볼로냐 남동쪽에 있는 인구 3만 명의 소도시 ‘산라자로 디 사베나(San Lazzaro di Savena)’에서 운영되는 어린이집 ‘라치꼬냐’(La Cicogna)는 협동조합의 가치를 잘 보여줍니다.


라치꼬냐는 이탈리아 돌봄서비스 협동조합 카디아이(CADIAI) 등이 볼로냐 시와 민관 파트너십을 형성해 추진하는 ‘카라박(CARABAK) 프로젝트’로 세워졌습니다. 카라박 프로젝트는 카디아이뿐만 아니라, 급식노동자협동조합 ‘캄스트’, 건축노동자협동조합 ‘치페아’ 등 4곳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보육시설을 설립·운영하는 사업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치페아 소속 건축노동자들은 보육시설 공사를 맡고, 캄스트 소속 급식노동자와 카디아이 소속 유치원 교사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게 됩니다.


개인이 이룰 수 없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럿이 힘을 합쳐 협동조합을 만들듯이, 개별 협동조합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 협동조합끼리 뭉쳐 어린이집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온 대부분 협동조합들은 농민이나 노동자, 수산인, 소비자 등 특정 계층과 직능별로 조직돼 각 집단 구성원의 공동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에 달리 카라박 프로젝트는 협동조합을 통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조합원으로 참여시켜 보육이라는 사회적 목적 실현과 일자리 창출, 지역사회 공헌 활동 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따라 라치코냐 등 11개의 어린이집이 운영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확대해나갈 예정이라니 보육 문제가 사회적으로도 골칫거리가 되어있는 우리 사회가 눈여겨 볼만합니다.


조그만 어린이집이지만 어려서부터 이 안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만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소중한 체험이며 산교육이겠습니까.


[가톨릭신문, 2013년 2월 1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1) 주거문제의 좋은 대안 ‘무리’(Murri)


오늘날 내집 마련은 헛된 꿈인가?


문화를 형성하는 인간의 노력(사회적 노동)은 노동에 의해 그 품위가 향상될 뿐만 아니라 노동 그 자체에도 기여합니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역사하시는 세상 안에서 주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게 되고, 더 나아가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맞갖게 자신과 삶의 목적을 성취하며 발전시켜 나가게 됩니다.


인간은 노동의 주체이면서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기 때문에, 노동에 의해 자기 자신의 인격적 품위와 존엄성을 형성하며 유지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품격을 드높이며 진정한 인간이 됩니다. 아울러 노동을 통해 고유한 역사적 사명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인간과 노동이 분리되고 소외되는 현실은 창조질서에 맞지 않는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이 크게 위협받는 일입니다.


노동이 소외되는 현실은 주거권을 둘러싼 우리의 일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 발전을 구가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내 집 마련은 꿈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많은 경우 건설사의 폭리와 부동산 투기가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유럽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들이 주거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 때 1963년 설립된 이탈리아의 주택건설협동조합 ‘무리(Murri)’는 좋은 대안을 보여줍니다.


‘무리’는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주택 수요자들이 만든 협동조합입니다. 집을 사려는 수요자들이 일반 건설회사들이 공급하는 주택을 수동적으로 구입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집을 직접 짓는 것을 모토로 설립되었습니다. 현재 가입된 조합원만 2만3000여 명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주택건설협동조합 중 하나입니다. 50유로의 조합가입비만 내면 집을 구입하거나 임대할 수 있는 권리를 얻습니다.


조합이 조합원의 집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무리’가 짓는 집은 가격에 비해 높은 품질을 자랑합니다. 친환경 자재를 사용하고, 태양광 설비를 갖춘 에너지 절약형으로 집을 짓는 등 사람은 물론 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최소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사업이 진행됩니다. 그러면서도 집값은 시중의 80%, 임대가격은 시중의 60% 수준에 불과합니다. 주택을 구입하기 위해서 내야 하는 중도금을 6회 분납할 수 있으며, 분납 시기 역시 조합원 사정에 따라 조절 가능합니다. 10년을 임대 형태로 살다가 돈이 생겨서 주택을 구입하게 될 경우, 10년 간 낸 임대료를 제외한 금액만 내면 됩니다. 지금까지 ‘무리’가 건설한 주택은 1만2000여 채로, 볼로냐 지역의 경우 지역 주택 공급의 2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집을 짓는 과정도 민주적이어서, 건축 허가 과정부터 조합원들에게 상세한 정보가 제공되고 주택의 설계와 시공에 조합원들의 의견이 반영됩니다. 건축 사업이 진행되는 지역의 집을 구입하고 싶은 조합원들은 1만 유로(약 1600만 원)를 조합에 내고 분양 신청을 합니다. 경쟁률은 3:1 정도로 조합에 가입한 기간이 길수록 기회를 얻을 확률은 높아집니다.


‘무리’의 경우 주택가격 거품과 건설사 부실화 등의 원인이 되는 은행 빚이 아니라, 조합의 내부 적립금으로 주택을 짓기 때문에 당장 집이 팔리지 않아도 자금 압박에 시달리지 않아 조합원에게 피해가 거의 없습니다. 2010년 현재 ‘무리’의 내부 적립금은 4700만 유로에 달해 조합원들이 안심하고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협동조합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도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2월 2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2) 우리와는 다른 모습의 활약상


창조적 노동 가치 보여주는 협동조합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을 사회화시키고 주님의 창조 역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인류가 발전시켜온 다양한 형태의 경제 구조나 시스템들은 인간의 창조 의지와 활동을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합니다. 인간이 만든 수많은 경제 제도 가운데 협동조합은 인간성을 잘 구현하면서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훌륭한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구현해나가고 있는 협동조합들은 창조적 노동의 가치를 잘 보여줍니다.


노숙인 자활협동조합 ‘코프 라 스트라다(coop la strada)’


이탈리아의 사회적 협동조합 가운데 지난 1988년 노숙인들의 자립을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설립된 협동조합인 ‘코프 라 스트라다’는 협동조합운동의 긍정적 잠재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직업이 없던 노숙인들이 중심이 된 ‘라 스트라다’의 조합원들은 노숙자 쉼터를 관리하는 일뿐 아니라, 공중화장실이나 공원 청소, 경비 업무 등을 맡아 하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도록 서로 돕고 격려하며 자신들의 조합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격리와 수용 중심으로 노숙인 정책을 펴는 우리 사회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자활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구현하고 인간성을 꽃피울 수 있도록 돕고 격려하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합니다.


문화협동조합 볼리 그룹


볼로냐에서 활동하는 문화협동조합 ‘볼리’ 그룹은 문화를 통해 청소년 문제에 다가서는 성숙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난 2003년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조직형태를 바꾼 ‘볼리’는 청소년 교육과 영상제작 등 다양한 문화사업을 통해 지역사회의 문화를 혁신하는데 앞장서 오고 있습니다.


150여 명의 직원 가운데 130여 명이 조합원인 ‘볼리’ 구성원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들이 하는 일에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볼리’는 협동조합으로서 장점을 살려 볼로냐시의 교육청과 협력해 청소년들이 적극적이고 자주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줌으로써 젊은이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이 공익성 있는 축제를 하거나 학교 행사를 할 때 관련 전문가들을 보내 더욱 몰입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일회적인 행사에 머물지 않고 청소년들이 올바른 가치관과 맞갖은 능력을 키우도록 도움을 줍니다. 여름학교를 열어 2~3개월 동안 현장학습, 예술 교육 등을 하며 청소년들의 인성 계발에 힘을 합하고 있습니다.


또 지역 라디오 방송에 참여하고 신문을 발행해 주민들과 소통하며 음악·문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뿐 아니라 영화제를 열고 소비자들과 사회 초년생을 위한 강습을 진행하는 등 지역이 문화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펼침으로써 지역문화를 살찌우면서 청소년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경제위기 속에서도 ‘볼리’는 오히려 지역주민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 강한 결속력을 자랑하며 더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협동을 통한 나눔과 사랑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다양한 모습의 협동조합들의 활약상들은 뜻을 모으고 잘 조직하면, 누구나 예외없이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동체를 풍요롭게 성장시킬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3월 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3)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이정표


인류가 함께 만들어야 할 ‘경제적 평화’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각종 분쟁 등 인간들이 벌이는 다툼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경제적인 문제나 원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경제적 평화가, 인류가 함께 만들고 누려야 할 모든 평화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를 위하여 창조된 인간은 인류 평화의 사도로 이바지할 소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인류 역사는 평화가 하느님의 진리, 자유, 사랑, 정의를 토대로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로운 사랑을 실천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며, 그 헌신은 종종 주님의 정의와 어긋난 현실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여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과 멀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해나가기 위한 지혜의 산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협동조합(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셨던 것처럼 인간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노력을 기울여야 할 대안적 가치들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오늘날 인류가 체험하고 있는 협동조합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적인 가치는 바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나눔과 협동의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협동조합의 종류나 활동이 다양해지고 있는 현실은 그만큼 나눔과 사랑의 영토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해고자들이 세운 급식협동조합‘리스토3’(Risto3)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이탈리아 곳곳에서도 대량해고의 칼바람이 불고 있지만 트렌토 현에 위치한 급식협동조합 ‘리스토3’(Risto3) 종사자들은 누구도 해고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지역 내 회사와 병원, 학교 등 곳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트렌토 지역 내 급식업의 선두 주자로 발돋움한 리스토3이 바로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세운 곳이어서 노동자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1978년, 주정부 법률에 의해 학교 급식을 담당하던 기관들이 문을 닫으면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된 요리사와 여성 직원들은 오랜 기간 동고동락(同苦同樂)해온 믿음을 바탕으로 협동조합을 창업하지만 1년 만에 실패하고 맙니다. 협동조합에 대한 학습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1982년 조합원들은 다시 뜻을 모아 전문경영인을 초청해 실패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교육을 받으며 재기(再起)에 나섰습니다. 긴축경영 1년 만에 흑자를 내기 시작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2년 현재 조합원 400여 명에, 1000명이 넘는 직원을 구성원으로 둔 건실한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한 리스토3은 자신들이 경험한 해고의 아픔을 바탕으로 협동조합 정신을 밑거름 삼아 어떠한 어려움도 함께 헤쳐 나가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협동조합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들은 협동조합들이 지닌 장점들을 잘 드러냅니다. 같은 업종의 일을 하더라도 제도적인 혜택은 물론이고 사랑이 바탕이 된 믿음과 나눔으로 기적과 같은 성과를 거두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하는 이정표를 바르게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3월 1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4) 몬드라곤협동조합


그리스도적 사랑이 일으킨 ‘기적’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협동조합’하면 사회주의 국가의 협동농장 등을 떠올려 백안시하던 사회적 분위기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도 승승장구하며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협동조합들의 좋은 평판은 협동조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협동조합들 가운데 협동조합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확 바꿔놓은 곳이 있습니다. 바로 ‘협동조합의 기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스페인 몬드라곤협동조합공동체(Mondragon Corporation Cooperative, 이하 몬드라곤협동조합)입니다.


2012년 현재 총자산 54조 원, 연매출액 30조 원, 스페인 재계 서열 7위, 8만 명이 넘는 일자리…. 하나의 협동조합이 가진 경제적 위상치고는 상상을 초월하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제조업 분야뿐만 아니라 유통업, 금융업, 지식서비스 부문까지 아우르는 대기업이 협동조합이라는 사실 또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렇듯 기적이라고 부르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몬드라곤협동조합의 시작은 그리스도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기적의 싹이 튼 곳은 스페인 북부 피레네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퇴락한 광산도시 몬드라곤(Mondragon)이었습니다. 갓 사제품을 받은 26살의 호세 마리아 아리즈멘디아리에타(José María Arizmendiarrieta. 1915-1976) 신부가 1941년 2월 첫 사목지로 몬드라곤교구에 부임해오면서 기적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리즈멘디 신부는 스페인 내전 후 인구의 80%가 떠나 황폐화된 몬드라곤 시골마을에서 아이들을 위한 기술학교를 세우고 희망을 전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가르친 것은 인간다운 삶을 향한 희망과 이를 위한 불굴의 도전정신이었습니다.


아리즈멘디 신부는 자신이 직접 길러낸 이들이 정작 일자리가 없어 힘들어하자 마을 사람들의 뜻과 힘을 모아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5명을 주축으로 1956년 11월 12일 몬드라곤 시내의 한 주물공장에서 ‘울고르’(ULGOR)라는 이름의 생산협동조합을 탄생시킵니다.


석유난로 등을 만들어내던 이 조그만 협동조합이 바로 몬드라곤협동조합의 모태가 돼 사랑과 나눔의 저수지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반세기만에 세계 최대의 협동조합으로 성장한 몬드라곤협동조합은 산하에 금융기관인 신용협동조합 ‘카하 라보랄(노동인민금고)’을 비롯해 소비협동조합인 ‘에로스키’(Eroski), 조합원들에게 건강보험과 노후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사회복지조합인 ‘라군 아로’(Lagun Aro)는 물론이고 조합원 자녀들을 전인적 사회인으로 양성하는 몬드라곤기술대학 등 거의 사회 대부분의 영역을 포괄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공동체들을 이루고 있습니다.


현재 260여 개의 협동조합형 사회적 기업들이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형제애를 나누고 있는 몬드라곤협동조합은 모태가 된 울고르 설립 이후 순익 기준으로 연평균 7.5%, 일자리 창출 규모로 연평균 10% 성장해오고 있습니다.


몬드라곤협동조합 공동체 조합원들은 저마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모두 자신이 하는 일에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따뜻한 예수님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하느님 나라를 자신들의 손으로 일궈가고 있다는 공감대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기적과 큰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3월 1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5) 몬드라곤의 기적


하느님 나라 ‘진리’ 구현하는 공동체


세상 많은 이들로부터 ‘협동조합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스페인 몬드라곤협동조합공동체(Mondragon Corporation Cooperative, 이하 몬드라곤협동조합)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누렸을 법한 불평없이 소유물을 나누던 기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선 가장 부러운 것이 예수님을 닮은 소통의 모습입니다. 누구든 1만4000유로(약 2000만 원) 이상 출자하면 조합원이 되어 경영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조합원은 출자금 규모와 관계없이 1인 1표를 행사해 이사진을 선출하고 경영진을 임명하는 등 중요한 사안에 자신의 의사를 개진할 수 있습니다.


몬드라곤협동조합이 일궈가고 있는 세상은 자체적인 토론문화에서 잘 드러납니다. 몬드라곤협동조합에서는 조합의 정책이나 운영 방향과 관련해 중요한 사안이 생길 때,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합원들과 소통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감대와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을 수 있는 사안일수록 조합원들 간의 토론은 지루할 정도로 심도있게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윤을 중시하는 다른 기업들에 비해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몇 배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더 큰 추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소통의 힘이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도 몬드라곤협동조합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배경입니다.


몬드라곤협동조합에는 우리 문화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회장’, ‘CEO’, ‘사장’, ‘대주주’, ‘재벌’ 등의 개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조합의 주인이 어느 특정인이 아니라 출자를 통해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조합에 속한 공동체에서 직접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경영진이라고 해서 일반 조합원에 비해 특별히 큰 혜택을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합의 임원이나 간부는 전체 조합원들을 위한 봉사정신과 사명감을 바탕으로 더 큰 책임을 지는 자리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이러한 조직문화로 인해 조합의 대표나 간부와 조합원들은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적 가족이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고, 이 때문에 모두가 투철한 주인의식을 발휘하며 기적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몬드라곤협동조합에는 ‘해고’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조합 소속 사업체가 착한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서로 도우며, 비록 사업체가 좌초위기에 있다고 해도 노동자들은 해고되거나 쫓겨날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조합 안에서 전직을 위한 교육을 받고 조합에 속한 다른 사업체에서, 다른 일을 하며 새로운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끝까지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점은 조합 내에 일자리가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일자리가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일자리를 양보한 조합원은 자신이 받던 기본급의 80%를 실업수당으로 받으며 새로운 투신을 위한 모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몬드라곤협동조합 공동체의 모습은 철저한 신뢰와 연대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몰아닥친 2008년 이후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하고 정리해고에 나서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서도 단 한 명의 해고 없이 오히려 1만5000여 명의 신규고용을 창출하며 안정적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몬드라곤은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3월 2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6)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


하느님 나라 향한 ‘하나된 공동체’


얼굴 표정뿐 아니라 삶의 방식 등 모두가 제각각인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마음으로 하나된 ‘친교의 공동체’를 일궈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마다 살아가는 모습들 속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어낼 때 일치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드러내시는 주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앎을 실천에 옮기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십자가이지만, 절박한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일상에 한층 다가선 협동조합들의 모습들 속에서 인간사뿐 아니라, 온 세상을 주재하시는 최고경영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의 탄생을 되새겨보는 일도 인류 역사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축구의 본고장 영국 맨체스터가 ‘협동조합의 고향’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노동자들의 하나된 마음, 그리고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18세기 산업혁명 당시 맨체스터 인근 로치데일(Rochdale)은 중요한 면직물 공업도시였습니다. 그렇지만 ‘배고픈 40년대’라 불린 1840년대의 불황기에는 노동자 6명 가운데 5명이 겨울철에 덮을 모포가 없을 정도로 참혹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생산의 기계화로 일자리와 임금이 줄어드는 가운데 독과점 식료품 사업자들의 횡포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습니다. 모래를 섞은 설탕을 팔거나 저울을 조작해 쇠고기나 버터 양을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1844년, 이런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바꾸기 위해 로치데일의 직물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28명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지닌 신앙인들을 비롯해 감리교의 금주운동가, 차티스트운동가, 사회주의자 등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들은 ‘종교와 정치에 대한 중립’을 원칙으로 세워 각자의 신념을 꺾지 않으면서 서로를 존중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바꿔나가기 위해 마음을 모아 1년에 1파운드씩 출자금을 걷어 작은 가게를 열고 직접 버터, 설탕, 밀가루 등 식료품을 구입해 조합원에게 공급하기로 의기투합합니다.


협동조합의 효시가 된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Rochdale society of equitable pioneers)’의 출발은 이처럼 소박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함께 꾼 꿈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에서 보통선거권 쟁취투쟁(차티스트운동)이 일어나 실제로 성인 남녀의 보통 평등 선거권이 인정된 것은 1928년입니다. 그러나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노동자들은 이미 설립 초기부터 남녀 구분 없이 ‘1인 1표’의 평등한 세상을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선택이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모습에 주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가톨릭신문, 2013년 3월 3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7)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


‘착한 소비’ 지향하며 사랑 실천


인류가 역사 속에서 찾아내 발전시킨 협동조합이라는 보물은 어둠 속에서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뵙게 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협동조합 자체가 사람이 만들어낸 제도이기에 완전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의 많은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점은 분명한 듯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지상에서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함”(에페 4, 13)을 들려줍니다. 170년 전, 산업혁명의 본고장 영국 로치데일에서 살았던 가난한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의 씨앗이 뿌려져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본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보여준 삶은 그들 가운데 주님이 함께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합니다.


가난에 배고픔을 달고 살아야 했던 28명의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만든 최초의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인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은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는 진리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이 세기를 뛰어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굳건한 생명력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로서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윤리적(착한) 소비’를 지향했다는 점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적 배경이나 정치적 신념 등이 모두 달랐던 초창기 조합원들은 배움이 깊지 않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사랑과 배려를 통해 한마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로치데일 조합 조합원들은 당장 자신에게 경제적인 이득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웃을 배려하며 자연환경까지 생각하는 활동을 펼쳐 나갑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가족과 형제, 한 식구나 다름없는 이웃이 함께 소비하는 것이니만큼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정성이 담긴 사업과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로치데일 조합은 설립 초기부터 투자한 자본에 대해서는 고정된 이자를 지불하고, 이익금은 조합에 출자한 비율이 아니라 조합이 운영하는 매장에서 물품을 구매하는 등 조합을 이용한 비율에 따라 분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소비자조합의 기본 구조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로치데일 조합원들은 처음 세운 식품점이 큰 성과를 거두자 협동 공장과 방직 공장까지 설립해 공유와 나눔의 영역을 넓혀나갑니다. 조합원이 1만 명을 넘어 사회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게 되자 도매 부문도 개척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게 됩니다. 조합원들은 자신들이 함께 거둔 수익을 교육과 자선 사업 등에 기부하며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활동을 확산시켜 나갑니다. 이들의 삶에 담긴 나눔과 사랑은 핵분열을 하듯 빠르게 번져나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로치데일 조합은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이를 모범으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소비조합 설립이 확산되어 놀라운 성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의 발상지답게 온갖 이념과 사상이 난무하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름다운 초심을 지켜온 로치데일 조합 노동자들의 삶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해줍니다. 로치데일 조합원들이 보여준 상호 존중과 그 바탕에 견고히 자리잡고 있는 사랑 실천은 상상도 못했던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 많은 이들이 주님의 섭리를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4월 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8) 사랑을 바탕으로 한 ‘로치데일…조합’


가난한 노동자들이 함께 꾼 ‘꿈’


협동조합이란 말의 연원이 된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Rochdale society of equitable pioneers)’의 역사에는 온갖 시련을 극복해온 인류의 지혜가 담겨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최초의 협동조합인 로치데일 조합을 구상했던 설립자들이 추구한 삶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개인의 소소한 이익을 내세우기보다 공동체의 발전과 미래를 먼저 생각하고 서로를 배려한 로치데일 조합원들의 선택은 지금도 협동조합운동의 밑거름으로 남아 시대를 뛰어넘는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이 지구촌 최초의 산업단지가 조성된 역사를 간직한 영국 맨체스터에서 발아했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품게 합니다. 맨체스터 인근 로치데일 시내 골목길 한 모퉁이 허름한 창고를 빌려 시작된 로치데일 조합 조합원들은 결코 영리만 바라보고 조합을 만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초심을 살펴보는 것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큰 공부가 될 것입니다.


로치데일 조합원들이 함께 뜻을 모아 만든 조합의 운영원칙을 보면 수백 년 전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미 협동조합의 기본 원칙으로 잘 알려진 ▲1인 1표제 ▲정치 및 종교상의 중립 ▲조합에 의한 교육 ▲이자의 제한 ▲구매액에 따른 배당 ▲시가판매 등이 당시 가난한 노동자들이 합의한 원칙들인데 이는 오늘날에도 협동조합들의 존립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로치데일 조합의 정관이 상상을 뛰어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창기 설립자들은 정관에 조합원들을 위한 주택건설을 비롯해 공업생산, 농업, 교육, 나아가 자치정부까지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조합원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한 완전한 자주와 동맹을 통해, 영리 추구에만 매몰돼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전락한 사회체제를 서로간의 사랑과 상호부조를 기초로 조직된 협동조합의 제도로 바꾸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과 같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사라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자신들의 조합에 담아냈던 것입니다. 서른 명도 안 되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함께 꾼 꿈이 오늘날 어떻게 자라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보면 주님의 섭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협동조합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이탈리아 볼로냐대학 스테파노 자마니(Stefano Zamagni) 교수(경제학)는 협동조합을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빈부와 계급과 인종은 물론 사상과 이념 등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이 존중받는 세상을 향한 노동자들의 상상력은 설계했던 것 이상으로 확장되어 주님 보시기 아름다운 세상의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로치데일 조합원들의 인간 사랑을 향한 상상력을 담아내던 허름한 창고는 지금도 로치데일 골목길 그 자리에서 협동조합의 이정표로 우리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한 사람의 꿈은 그저 꿈으로 그칠 수 있지만, 함께 같은 꿈을 꾸면 현실이 됩니다.” <돔 헬더 카마라(Helder F. Camara) 대주교>


인류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자신을 한없이 낮추셔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엿보게 해주는 협동조합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겸손과 배려만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웅변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4월 1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9) 경제민주주의의 대안


협동과 단합이 보여준 ‘큰 힘’


인류는 세계대공황 등 위기가 닥칠 때마다 사회보장제도 같은 인간적인 요소들을 거둬들여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면서 슬기롭게 진화해왔습니다.


만능으로 여겨지던 시장경제와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을 것처럼 생각되던 자본주의 체제가 승자독식의 폐해와 소외 등 비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 세상에 등장한 협동조합은 ‘집단지혜’(Collective Intelligence)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보잘것없는 위치에 있던 가난한 이들이 마음을 모아 싹을 틔운 협동조합은, 그것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 지켜내고 발전시켜온 이들이 없었더라면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명멸해간 다른 제도나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선진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뿌리를 내려가며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협동조합은 근래 들어 더욱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지난 200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전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도 협동조합을 ‘경제민주주의의 대안’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오스트롬 교수는 개개인의 지나친 욕심으로 공동체의 자원이 고갈되는 소위 ‘공유의 비극’ 상황에서 시장도 정부도 아닌 지역 주민들의 자치적 노력에 의한 공유자원 관리가 유효하다는 대안을 제시해 노벨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목초지 관리에 있어 목초지의 사유화나 정부의 규제보다 주민들의 자율적, 자치적 해결책이 더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규제나 강제적 수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실제 그 문제에 관계된 사람들, 즉 시민과 지역 사회의 결정이 더욱 효율적일 수 있다고 본 오스트롬 교수가 협동조합의 정신과 목표에 대한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영국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을 이끈 선구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도 바로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는 공동체였다는 점에서 조합원들이 함께 공유했던 비전이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갈수록 자본의 힘이 위력을 더해가고 노동자들은 생산시스템의 일개 부속물로 전락해가는 사회 안에서 로치데일 조합원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했다면 아마 로치데일 조합도, 협동조합운동도 오늘의 모습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로치데일의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협동과 단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고, 자신들의 그런 신념과 미래를 담아낼 그릇으로 협동조합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개인의 욕심을 부추겨 인간을 개별화하고 단절시켜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 경제와 사회 체제는 분명 하느님이 바라시는 세상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세상을 이긴 로치데일 조합의 성공은 세계 여러 나라로 확산돼, 1937년 국제협동조합연맹(International Co-operative Alliance·ICA)은 로치데일 조합원들이 세운 협동 원칙을 기초로 협동조합원칙을 공식적으로 채택합니다.


지금도 되새겨보면 노동자들의 지혜와 실천에 놀라움을 갖게 됩니다. 세상이 안겨주는 온갖 고통에 찌든 노동자들이, 그것도 배움의 기회를 많이 가져본 적이 없는 소외된 이들이 어떻게 오늘날에도 빛이 사그라지지 않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는지 하느님의 섭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4월 2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90) ‘미그로’ 와 ‘코프’


전 세계로 퍼져나간 ‘협동조합’


28명의 조합원들이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한 영국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의 성공 소식은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기에 충분했습니다. 산업혁명이 전 세계로 파급되면서 그만큼 비슷한 아픔과 고민 속에 놓여있던 이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국을 방문해 로치데일의 성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유럽 각국의 선구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여건에 맞춰 협동조합을 발전시켜나가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농업이 발달한 프랑스에서는 농촌지역 농민이 주도한 생산협동조합 형태로 협동조합운동이 시작됩니다. 독일도 가축을 공동으로 구입하기로 한 농민들이 ‘프람멜스펠트 빈농구제조합’을 설립하면서 협동조합이 빛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국가별로 자생해 성장하던 협동조합은 1884년 영국과 프랑스의 협동조합 운동가들이 국제적 협동조합 교류를 제안하면서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은 현재 96개국 267개 회원 단체가 가입하고 회원 수만 10억 명에 달하는 유엔 산하 최대 비정부 기구로 성장했습니다.


협동조합의 왕국 ‘스위스’


스위스에는 유럽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큰 협동조합인 ‘미그로’(MIGROS)가 있어 스위스 다운 협동조합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스위스 사람들의 협동조합 사랑은 유별납니다. 스위스에서는 어딜 가나 우리나라만큼 대형소매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위스의 대형소매점들은 우리나라처럼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가 아니라 협동조합 매장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스위스 최대 소매유통기업인 ‘미그로’와 유통업계 2위인 ‘코프’가 보유하고 있는 조합원 수는 인구의 70%가 넘는 500만 명, 식품시장 소비점유율은 40%가 넘습니다. 700만 명 인구 중 500만 명이 협동조합 조합원이다 보니 스위스 사람들은 장을 보러 갈 때 “미그로(코프) 간다”는 말이 자연스럽습니다.


미그로는 스위스 곳곳에 600개 매장, 직원 8만3000여 명을 두고, 2010년 기준으로 32조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코프도 직원 5만3000명, 2010년 매출 29조원을 기록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미그로는 스위스 전역에 있지만 중앙집권적이라기보다는 지역협동조합을 지향합니다. 지역본부가 자체 결정 권한을 갖고, 여러 위원회를 두어 공동으로 의사 결정을 합니다.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1년에 1억 프랑(약 1286억 원) 이상을 교육과 문화에 투자합니다. 그 중 하나가 ‘미그로클럽 스쿨’입니다.


지역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으로 1년에 45만 명이 이용한다고 합니다. 좀 더 저렴하게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수강료 일부를 미그로에서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미그로는 이렇듯 협동조합 정신을 바탕으로 유통업계 1위 자리를 유지해오고 있지만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해외시장 진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경제제일주의적 관점에 젖어 살아온 이들에게는 이상하게까지 보일 일이지만 이윤 추구보다 조합원의 복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협동조합 정신이 뿌리내리고 있는 스위스에서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집니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를 조사하면 늘 수위권에 꼽히는 스위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바탕에 깔린 그리스도교의 나눔 정신을 늘 일상에서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눔과 사랑이 일상이 된 사회이기에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4월 2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91) 사랑 · 나눔 몸소 실천한 ‘두트바일러’


스위스인을 위해 존재하는 ‘미그로’


지난 2008년 스위스에서는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계적인 대형마트 체인인 까르푸가 스위스에서 철수를 선언한 것입니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소매유통전문 협동조합인 미그로(MIGROS)와 코프(Coop Swiss) 두 협동조합과의 경쟁에서 밀려 더 이상 이익을 실현할 수 없게 된 탓입니다.


미그로는 철저히 지역사회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운영 방식과 함께 공익우선의 전통을 바탕으로 굳건한 신뢰를 받고 있는 국민기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스위스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2008년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금융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면모를 보였습니다.


미그로가 이처럼 국민기업으로 거듭나기까지에는 많은 이들의 사랑과 헌신이 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90년 역사를 지닌 미그로는 1923년 창립 당시만 해도 주식회사 형태의 사기업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이런 미그로를 오늘날의 협동조합으로 탈바꿈시켜 온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미그로의 창업자인 고틀리프 두트바일러(Gottlieb Duttweiler, 1888~1962)였습니다. 취리히에서 미그로를 설립한 두트바일러는 처음부터 커피, 쌀, 설탕, 파스타, 코코넛오일, 비누 등을 트럭에 싣고 마을을 순회하며 판매하는 ‘직거래’라는 혁신적인 사업방식을 도입했습니다. 회사 이름도 도매와 소매의 중간이라는 뜻을 담아 미그로(Migros)라고 정했습니다. 그는 중간 유통 마진을 줄여 경쟁자들보다 40%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미그로가 대기업 반열에 오른 1941년 그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결정을 합니다. 미그로를 보다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던 그는 모든 스위스 사람들에게 기부한다는 취지로 자신의 회사를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누구든 10스위스프랑만 내면 조합원이 되어 미그로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7만5000명이 그의 뜻에 함께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물질제일주의에 물들고 많은 이들의 눈길이 경제적 이익창출이라는 폐쇄적인 울타리에만 머물고 있는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두트바일러는 협동조합 전환 후에도 어느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미그로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체계를 마련해나갑니다. 일반 조합원, 지역 조합, 연합회 등 3단계로 이뤄진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고, 사업 방향은 조합원이 뽑은 대의원이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7인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도 주요한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적 정신을 바탕으로 창립 때부터 지구환경과 지역사회를 생각하는 경영방식을 실천해오고 있는 미그로는 1957년부터 해마다 전체 매출의 1%(2010년, 약 1260억 원)를 사회공익을 위한 사업에 지출하며 지역 주민들 사이로 스며드는 활동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창업자의 정신을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계승해 오고 있는 미그로는 ‘스위스를 위해, 스위스인을 위해 존재하는 협동조합’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며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미그로는 조합원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이 있으면 외주업체에 맡기기 보다는 직접 제조를 통해 판매하며 소비자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약국과 주유소 등도 운영하고 있지만 국민들의 건강에 관심이 많았던 두트바일러의 뜻에 따라 지금까지도 미그로 매장에서는 술과 담배를 판매하지 않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그로를 통해 나눔의 정신이 얼마나 세상을 아름답게 바꿔나갈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나눔과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준 두트바일러의 삶에서 예수님의 자취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은 듯 보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5월 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92) 소비자협동조합 ‘미그로’


스위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기업


오늘날 스위스는 많은 나라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그 부러움의 배경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도 있겠지만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스위스 다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위스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는 아름다운 삶의 바탕에 협동조합 정신이 스며들어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에 형제적 사랑과 나눔을 통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화인을 새긴 사람은 바로 스위스 최대 소비자협동조합인 미그로의 창업자 고틀리프 두트바일러(Gottlieb Duttweiler)입니다.


오늘날의 스위스를 일구는데 누구 못지않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두트바일러는 ‘스위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투표에서 2위에 꼽히기도 했습니다. 1위에 선정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차치하더라도 3위를 차지한 테니스 스타 로저 페더러, 4위 교육학자 페스탈로치, 5위인 적십자 창설자 앙리 뒤낭 등 세계적 명성을 떨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제치고 두트바일러가 2위에 오른 것은 협동조합을 통해 스위스 국민들에게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선사하여 협동하며 함께 사는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국민들에게 협동조합이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한 축인 동시에 윤리의 근간으로 만든 미그로는 여러 차례 세계에서 가장 ‘지속가능한 기업’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위스에서 가장 강력한 브랜드, 가장 인기있는 기업,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도 공인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미그로의 영예로운 지속적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그리스도 정신이 바탕이 된 사랑과 나눔의 있었기 때문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미그로의 실재를 살펴보는 것은 협동조합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스위스 취리히 림마트 거리(Limmat strasse)에 있는 미그로 본사 매장 내에서 선보이고 있는 생수, 음료수, 과자, 화장품 등은 대부분 미그로가 직접 만들고 파는 것들입니다. 우리나라 대형마트의 PB(Private Brand, 유통업자 상표) 상품은 가격을 낮추기 위해 외주를 주는 게 보통이지만 미그로는 가격이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품질을 맞추기 위해 직접 제조에 나선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미그로에서 구입할 수 있는 농산물은 각 지역 미그로 물류센터에 모아져 가까운 매장부터 먼저 배분됩니다. 근교에서 재배하는 품목과 그 지역 소비자가 원하는 품목 위주로 판매가 이뤄집니다. 축산물은 농민이 도살장으로 가축을 보내면 협동조합이 받아서 미그로에 출하하는 방식입니다. 미그로와 관련된 모든 제품의 생산과 유통에는 이처럼 사회와 환경에 대한 책임의식이 속속들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그로는 소비자들의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브랜드파워를 바탕으로 다양한 사업 진출에도 성공하며 협동조합 정신을 널리 확산시켜나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소매업 이외에 조합원들을 기반으로 백화점 체인, 의류 매장, 주유소, 은행, 여행, 급식 등 협동조합 정신이 관철될 수 있는 다양한 사업 영역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스위스 최대 주간신문인 ‘위클리 미그로’등 조합원들과 미그로를 묶는 다양한 소통 도구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미그로는 무한경쟁의 사회 구조 속에서 상대적 빈곤계층을 외면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함께 살아가는 법을 들려줍니다. 만인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경제정의 실현은 그리스도인이 풀어야 할 과제요 숙제일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5월 1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93) 전 세계 수많은 협동조합


자신들의 이익, 지역 사회로의 ‘환원’


지난 2012년 월드워치(World Watch) 통계에 따르면 지구촌 10억 명 이상이 협동조합에 가입해 있다고 합니다. 협동조합이 우리 생각보다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도 농촌 지역에서도 가계 소비 수요의 67%를 협동조합이 담당할 정도입니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이탈리아 트렌토에 있는 유릭시(EURICSE·협동조합 및 사회적 기업에 관한 유럽연구소)에 의뢰해 매년 발간하는 <세계 협동조합 모니터> 조사에 따르면 세계 400대 협동조합의 2010년 매출액이 2조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랫동안 협동조합을 연구해온 학자나 전문가들에 의하면, 협동조합은 인적 결사체와 기업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가집니다. 따라서 협동조합이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려면 인적 결사체라는 협동조합의 특성이 기업적인 측면에서 좋은 성과와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다시 인적 결사체를 강화하는 선순환이 이뤄져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여러 협동조합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그로(MIGROS)를 비롯한 스위스의 협동조합들은 자신들이 거둔 이익(profit)을 ‘환원(turn over)’이라 부를 정도로 지역 사회나 공동체로의 환원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환원 방식도 전적으로 조합원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협동조합에 필수인 교육을 필두로, 예술, 레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환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종의 학원(club school)을 운영해 일반 학원보다 1/3~1/4 가량 저렴한 가격으로 외국어, 운동, 직업교육 등을 실시하는가 하면 공원을 조성해 보다 많은 이들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이제는 국민이 주인인 ‘국민기업’에 가깝게 되어버린 미그로 그룹의 정식 명칭은 ‘미그로 협동조합 연맹(Migros cooperative alliance)’입니다. 미그로 그룹에는 유통업체 미그로를 비롯해 금융기관인 미그로뱅크, 철도회사 몬테 제네로소, 식품회사 델리카 등 65개 업체가 속해 있습니다.


이들 업체의 운영 및 관리는 취리히, 루체른 등 스위스 각 지역에 있는 10개의 지역협동조합에서 선출된 이사회 임원들이 맡고 있습니다. 지역협동조합은 자립 사업체로 스스로 결정 권한을 가집니다. 또 누구라도 10스위스 프랑(약 1만3000원)을 내면 지역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지역협동조합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본부는 구매와 생산을 관리하고, 지역협동조합들의 의견을 모아서 사업을 추진하는 임무를 맡습니다.


미그로 그룹에 속한 업체에서는 위험한 사업이나 환경에 위해를 끼치는 분야에 투자를 할 수가 없습니다. 10개 지역협동조합들이 모인 위원회 절차를 통과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최소 시간에 최대 이익을 창출하려는 주주 중심의 기업 행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이익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만들어가려는 것이 조합원들의 공동 목표입니다.


이렇듯 어린 시절부터 협동조합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해오다 보니 스위스에는 ‘미그로 키드’와 ‘코프 키드’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협동조합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성맨’이나 ‘현대맨’과 같이 개인적인 성공과 자부심에 더불어 나눔과 사랑의 향기가 더해진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지 상상해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온 누리에 퍼지는 산업평화의 모습일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5월 1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94) 사회성장의 동력 ‘협동조합’


국가경쟁력 · 국가투명성 세계 1위 ‘핀란드’


‘낙오자 없는 학교’를 표방하면서도 탁월한 학업성취도를 이끌어내 많은 나라들의 롤모델이 되기도 한 북유럽의 핀란드가 협동조합 강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던 핀란드가 오늘날 국가경쟁력 세계 1위, 국가 투명성 1위, 범죄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살기 좋은 나라가 된 배경에는 사회적 협동조합이 있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국민소득에서 협동조합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 나라로 꼽히는 핀란드는 민간분야에서뿐 아니라, 많은 공공영역에서도 협동조합이 활력을 주고 있으며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핀란드가 지닌 힘의 원천이 사랑과 나눔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교 정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실버요양조합 ‘로푸키리’


“노인 요양시설에 가지 말고 노인 공동체를 만들자”


핀란드 수도 헬싱키 외곽의 한 아파트 단지. 이곳에는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아파트가 있습니다. 평균 나이 70세 안팎인 58가구 69명의 주민이 모여 사는 곳으로, 얼핏 보면 여느 노인요양원과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노인들이 직접 아파트 설계부터 디자인을 계획한 데다 공동의 생활 규칙까지 정해 생활하고 있는 곳이라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노인의,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실버요양조합 ‘로푸키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말로 ‘마지막 전력질주’라는 뜻을 지닌 로푸키리의 시작은 지난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헬싱키에 갓 은퇴한 할머니 10여 명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남은 인생 서로 의지해가며 외롭지 않게 살아보자며 실버 공동체를 구상했습니다. 마음을 모은 할머니들은 우선 시유지를 싼 값에 임대해 1층과 꼭대기 층에 공용공간을 마련하고 2층부터 6층까지 58가구를 배치한 공동생활주택을 세웠습니다. 시가보다 저렴한 입주금(56m² 2억5500만 원)에 노인끼리 모여 사는 공동체가 생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60~80대 노인들의 입주신청이 쇄도했습니다.


현재 로푸키리의 노인들은 식사와 청소, 빨래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을 같이 해결해나가고 있습니다. 입주자들은 매주 월~금요일 오후 5시 공동식당에 모여 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데, 6개 조로 나눠 매주 돌아가며 식사를 준비합니다. 세탁실·관리실·사우나·체조실·회의실 청소도 이런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게다가 합창단이나 요가클럽 등 15개 동아리를 만들어 활기찬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들이 활동하고 있는 문학클럽은 공동 문집을 내기도 했고, 연극클럽은 전문 극단의 도움을 받아 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합니다. 입주자들은 소말리아 이주 여성을 불러 수영을 가르치고 대신 영어를 배우는 식의 재능 나눔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노인이라는 굴레를 만들어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삶이 아니라, 협동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삶에 밴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적 가치를 나누고 있기에 다른 공동체들에게도 많은 신선하고 실용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핀란드 사회를 발전시키는 배경에는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그리스도교 정신이 굳건히 버티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요람까지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하느님을 닮은 인류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본질적인 소망이자 염원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5월 2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95) 협동조합 강국 ‘핀란드’


총 인구 보다 ‘조합원’ 수가 많은 나라


협동조합 강국 핀란드가 오늘의 선진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꾸준히 사회 성장의 동력 역할을 해온 협동조합의 힘과 역할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협동조합에 가입한 이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여러 협동조합에 가입하면서 조합원이 전체 인구를 추월하고 있을 정도로, 협동조합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일례로 핀란드는 농부가 많지 않지만, 농부 1명당 평균 4.1개의 협동조합에 가입돼 있을 정도로 농업부문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이 활발합니다. 이 때문에 핀란드는 성인의 84%가 협동조합원일 정도로 가히 ‘협동조합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 협동조합교육네트워크(coop network studies·이하 CNS)에 따르면 핀란드 인구는 520여 만 명인데 비해 협동조합 조합원수는 7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협동조합은 핀란드 국민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핀란드 내 협동조합 형태의 상점 점유율은 50%, 금융은 1/3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경제와 사회, 공공복지 등 많은 분야가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니,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있는 우리로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핀란드 사람들의 삶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협동조합은 19세기 말 러시아로부터 독립운동이 한창일 때 태동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유와 자주를 향한 모색 속에서 협동조합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사실은, 경제가 유용한 삶의 도구가 아니라 벗어던지고 싶은 굴레가 되고 있는 암울한 현실에 처해있는 우리에게 많은 반성과 성찰에 잠기게 합니다.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협동조합의 정신은 핀란드의 정치 사회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쳐 1906년 남녀 모두에게 보통 평등 선거권이 부여됨으로써 핀란드는 북유럽에서 최초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누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 헬싱키대학 경제학 교수이자 협동조합 연구자인 하네스 게파드(1864~1933)는 협동조합 정신이 핀란드가 난국을 헤쳐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1899년 핀란드협동조합연합회인 펠레르보(Pellervo)를 설립해 핀란드에 협동조합을 전파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펠레르보는 협동조합을 직접 지원하기보다 정부정책과 법 제정이 협동조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선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결실로 펠레르보가 만들어지고 3년 후인 1902년 중앙협동조합은행이 결성된 것을 필두로, 1904년 소매업협동조합중앙회가 설립되는 등 같은 업종끼리 모여 연합체를 꾸리며 빠르게 성장합니다.


이렇듯 독립운동이라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발전해온 핀란드의 협동조합은 영리를 추구하는 사적 부문뿐 아니라, 공공의 영역에 있는 사회서비스까지 담당하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은 물론 건실한 미래 전망과 함께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핀란드 정부도 역사를 통해 협동조합이 사회서비스를 담당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이를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비록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협동조합의 바탕에 깔린 나눔과 연대의 정신이 세상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사랑의 결실을 맺어나갈 때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음을 핀란드를 통해 보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6월 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96) 의료 복지문제 풀어나가는 ‘또이보’


협동조합의 새로운 패러다임 보여줘


총인구보다 협동조합에 가입한 조합원 수가 훨씬 많은 핀란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사랑을 잘 가꿀 때 만들어갈 수 있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잘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에서는 협동조합이 시장이나 민간 영역에서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국가나 사회가 책임져야 할 공공의 문제에도 적극 관여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해결사 역할까지 해내고 있습니다. 대체로 민간영역과 공공영역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는 우리에게는 이런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협동조합이 어떻게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공공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는지 쉽게 상상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많은 공공분야에서 협동조합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핀란드의 모습을 보면, 선의의 뜻을 잘 모을 때 국가에 의지하지 않고도, 또 시장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높은 수준의 삶을 유지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가꿔나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19세기 말 독립운동 과정에서 협동조합의 씨앗이 뿌려진 핀란드에서는, 시민들이 서로 믿고 협동하면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하였습니다. 협동조합의 출발은 소비자나 생산자들 사이의 연대와 협동이었지만, 오늘날 우리 시대의 협동조합들은 이러한 단순한 영역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지난 1997년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만들어진 ‘오수스꾼따 또이보’(Osuuskunta toivo, 이하 또이보)는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협동조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줍니다.


‘희망 협동조합’이란 뜻의 또이보는 핀란드 복지체계의 사각지대에서 싹이 텄습니다. 핀란드가 유럽연합에 가입하고 실업률이 가파르게 상승하던 당시 핀란드 국민들은 무상의료와 영리병원 사이에서 적절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심리학, 임상 사회복지, 의학, 연구, 심리상담치료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전문가 8명이 모여 협동조합 방식으로 의료복지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만든 게 또이보였습니다.


또이보는 먼저 5~12살 사이 어린이들 중 과잉행동 장애를 보이는 아이들을 돌보는 상담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아이들의 장애는 아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사회 전체가 관련된 경우가 많은데 기존의 의료체계는 이를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을 위해 지역고용지원센터와 손잡고 각종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직접 청년들을 만나 그들이 겪는 가정문제와 대인관계의 어려움, 알코올중독 등 여러 가지 원인들을 제대로 진단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나갔습니다. 특별히 정신적 재활이 필요한 청년들이 이를 치료하고 직장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이 사업을 진행한 8~9년 동안 600여 명의 청년들이 이곳을 거쳐 갔습니다.


그 가운데 절반은 가시적인 변화를 보였으며 10~20%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을 정도로 극적인 변화를 보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또이보는 상담을 통한 심리치료와 재활을 돕기 위한 코스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회가 감당하지 못하는 서비스영역을 메우며 핀란드가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심어주신 탈렌트를 나눔으로써 도저히 넘어서기 힘들 것만 같던 장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 있는 핀란드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엿보게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6월 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97) 주택조합 ‘호에스베’(HSB)


집 없는 설움, 협동조합으로 해결


많은 나라들의 부러움을 사며 복지국가의 모델로 손꼽히는 북유럽의 스웨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주거협동조합(이하 주택조합) 조합증을 선물할 정도로 협동조합이 삶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부동산, 특히 주택 문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겪는 난제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스웨덴은 복지국가의 모델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이 문제를 협동조합이라는 열쇠로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스웨덴의 대표적 협동조합 중 하나인 주택조합 ‘호에스베(HSB)’는 건축가 스웬 벨란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비롯한 모두가 쉽게 자기 집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데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모이면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923년에 설립돼 90년의 역사를 지닌 호에스베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평범한 스웨덴 국민들은 자기 집을 갖지 못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벨란다는 소유의 차원을 넘어 집은 그 자체로 삶의 질과 연결된다는 인식 아래 좋은 집, 아름다운 집을 지어 널리 보급하는데 힘을 기울입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스웨덴 주택들은 대부분 집안에 욕조가 없는 구조였습니다. 당시 스웨덴 사람들은 노동자들에게는 욕조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벨란다는 하루의 고된 일과를 끝낸 뒤 깨끗하게 씻고 나서 느끼는 개운함이 인간의 정신까지 고양시킨다고 생각해 처음으로 집안에 욕조를 설치한 주택을 설계했습니다.


이렇게 호에스베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협동조합’ 방식을 택함으로써 가파르게 성장합니다. 한달에 300크로나(약 5만원) 정도를 내면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호에스베에는 현재 55만 명이 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40만 명은 호에스베가 지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15만 명은 아직 입주하지 않고 조합비를 내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주하지 못한 조합원들을 위해서는 자기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저렴하게 지낼 수 있는 임대주택을 함께 제공함으로써 주거 문제가 삶의 올가미가 아니라 희망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호에스베는 협동조합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돈을 많이 낸다고 특혜를 주지 않습니다.


액수보다 얼마나 오랫동안 꾸준히 조합원으로 저축을 했는가가 입주 순서의 기준이 됩니다. 이 때문에 호에스베 조합원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친인척들이 첫 조합비를 내고 아이 이름으로 만든 조합원증을 선물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될 즈음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호에스베의 성장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설립 초기 자신들의 이권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일반 건축회사들을 중심으로 무수한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일부 건축자재 공장에서는 호에스베와 거래를 끊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굴하지 않고 30년대부터는 자체적으로 자재공장을 만들어 자신들의 뜻을 지켜나갑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주택보험 회사들이 폭리를 취하자 호에스베는 이에 문제를 제기하며 자체적으로 주택보험을 만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영리 주택보험 회사들의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호에스베의 노력으로 스웨덴 가구의 22%는 주택조합이 지은 집에 살며, 어려서부터 협동조합의 사랑과 연대 정신을 생활화하고 물질적 나눔을 통하여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6월 1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98) 협동조합의 가능성 보여준 프랑스


예수님 사랑 바탕으로 한 ‘협동조합’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협동조합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적잖은 기여를 한 프랑스도 협동조합의 힘과 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나라입니다.


‘교회의 장녀’라고 불릴 만큼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톨릭의 뿌리가 깊은 프랑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이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협동조합입니다.


프랑스 최대 협동조합 인비보


사치품과 화장품 산업, 패션의 중심 등으로 알려진 프랑스는 농업강국이기도 합니다. 총인구 6400만 명 중 1800만 명(28.7%)이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프랑스는 유럽연합(EU) 최대의 농업 선진국입니다. 농가당 평균 경지면적이 53.9㏊에 달하며 EU 27개국 농업생산의 18.4%를 차지합니다. 특히 포도주(63.1%), 밀(25.5%), 옥수수(21.6%) 등의 품목은 EU에서 해당 산업을 좌우할 정도입니다. 이를 반영하듯 프랑스는 2011년 농업부문에서 157억 유로(약 23조원)의 흑자를 냈습니다.


이러한 농업강국 프랑스를 이끄는 배경에는 농산물 협동조합 인비보(In Vivo) 그룹이 있습니다. 인비보는 241개 지역 협동조합이 출자한 연합 사업체로 프랑스 최대 협동조합입니다. 주요사업은 ▲ 종자 · 농자재 ▲ 사료 · 동물약품 ▲ 곡물 수출입 ▲ 농업용 자재유통 등 4개 부문으로, 회원조합과의 공동 투자를 통해 총 74개의 손자회사(지분투자 포함)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핵심 사업인 곡물 유통과 사료 사업은 해외 60개국에 진출해 있습니다. 유럽에서 곡물 거래량 1위, 국내 곡물 저장 능력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비보의 지난해 매출액은 57억 유로(8조5000억 원), 배당 전 순이익은 7380만유로(1096억 원), 임직원은 6730명에 이릅니다.


인비보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비보는 회원조합과의 명확한 역할 분담을 통한 공동 투자를 원칙으로 합니다.


곡물 수출사업의 경우 회원조합은 생산을 담당하고 계열사인 ‘인비보 그레인’은 컨설팅·매입·저장·시장교섭과 해외판매를 담당하는 식입니다. 회원농협이 생산한 곡물을 시장가로 매입해 저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최적의 시점에 세계 시장에 내다팝니다. 믿음에 바탕 한 이러한 철저한 분업시스템으로 지난해 기상이변으로 주요 생산국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곡물부문 사업은 전년보다 85%나 성장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또한 인비보는 전 세계 네트워크를 활용한 연구개발(R&D)을 바탕으로 시장을 철저히 분석하고 사업계획을 수립함으로써 협동조합의 장점을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사료와 동물약품을 취급하는 ‘인비보 NSA’의 경우 모든 사업은 프랑스·브라질·베트남·인도 등 전 세계 12개 연구소에 소속된 130여 명의 과학자들이 다양한 품종 및 지역적 특성 등을 고려해 이뤄낸 연구개발 결과를 바탕으로 이뤄집니다. 축종별 축적된 자료와 연구결과를 서로 공유하고 동물약품 개발·판매·컨설팅에 접목시킴으로써 시너지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경쟁이 치열한 국제 곡물시장에서 인간 중심적이며 친환경적인 접근을 통해 자신들이 만들어낸 제품에 가치를 입혀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 인비보의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바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2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99) 캐나다 ‘데자르뎅’


협동조합 비영리조직 발전에 큰 기여


우리에게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 국민의 80% 이상이 그리스도인인 캐나다는 협동조합이 매우 발달한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역사로 인해 주민의 88%가 가톨릭 신자인 퀘벡 주는 협동조합의 색다른 면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전체 국민 가운데 반 이상인 1800만 명(53%)이 협동조합에 가입한 캐나다에서도 퀘벡 주는 3300여 개의 협동조합이 있고, 주 인구의 70%가 1개 이상의 협동조합에 가입해 있을 정도로 협동조합이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협동조합과 주민들의 삶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캐나다에서 규모가 가장 큰 신용협동조합인 데자르댕(Desjardins)은 퀘벡 주 주민들의 사랑과 자부심이 밴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자르댕의 역사는 캐나다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1867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조례(The British North America Act:BNA ACT)’에 따라 ‘캐나다자치령’이 된 오늘날의 캐나다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영토에 비해 혹독한 기후와 적은 인구로 인해 국가로서 성장 발전해나가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20세기에 들어서 캐나다로서는 영국으로부터 외교 자주권을 찾는 일과 함께 인구증가책이 중요한 사회적 현안이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도 이민을 적극 장려했지만 이민을 왔다가도 조건이 더 나은 미국으로 재이주해 가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 이민을 통한 실질적인 인구 증가 효과는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프런티어가 끝났음이 발표되자 캐나다 정부는 세계 각지에서 이민을 적극적으로 모집하는 동시에 밀개량을 비롯한 기술혁신을 통해 한랭기후에서 거주가 가능하게 만들어나갑니다. 그 결과 캐나다는 지속적인 이민을 통해 성장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데자르댕이 움트던 20세기 초, 가톨릭 신자들이 대부분인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거주지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가까운 금융기관도 없어 신자들은 원금의 수십 배에 달하는 고리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이 필요해 150달러를 빌렸는데, 3000%의 고리대로 인해 5000달러를 갚아야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이들이 적잖게 생겨났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알퐁스와 도리멘 데자르댕 부부는 고리채로 경제적 악순환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위해 유럽의 신용조합 모델을 받아들여 1900년 퀘벡의 레비(Levis) 지역에서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합니다.


데자르댕 부부는 가난한 이들도 쉽게 조합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출자금 5달러를 매주 10센트씩 1년 동안 나눠 낼 수 있게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데자르댕은 보험, 투자, 컨설팅 등 다양한 영역에서 20개 자회사와 422개 지점을 두고 지난 2012년 기준으로 580만 명(퀘벡 인구는 약 770만 명)의 조합원과 4만7000명에 이르는 종사자를 보유하고 자산 1900억 달러(203조 원), 1년 순이익 17억 달러(1조8000억 원)에 달하는 북미 최대의 신용협동조합으로 성장했습니다.


데자르댕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같은 파생상품은 아예 취급하지 않고, 1970년대부터 연대저축기금을 만들어 협동조합과 비영리조직이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는 등 데자르댕 부부의 사랑의 정신을 묵묵히 실천하며 하느님 나라를 넓혀나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와 기적이 아닐 수 없으며, 이런 모형은 전 세계로 파급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6월 3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00) 산악장비 협동조합 ‘MEC’


사랑 · 연대 · 협동의 실천 본보기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어떠한 대상에 사랑을 느끼고 나아가 자긍심까지 품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수많은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홍수 속에서 피부에 와닿는 참 사랑을 나누고 체험하기 힘들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유럽 사회만큼이나 그리스도교 문화가 깊숙이 배인 캐나다에서는 협동조합이 그러한 매력을 지닌 존재로 자리 잡아오고 있습니다. '산악장비 협동조합(Mountain Equipment Co-op, 이하 MEC)'도 캐나다 국민들의 자부심이 살아 숨 쉬는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데이비드 윈게이트, 롤랜드 버튼, 짐 바이어스, 랍 브루스, 사라 올리버, 사라 골링, 최초 조합원 여섯 분의 비전과 헌신, 그리고 정의로움에 감사드립니다. 이분들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는 조합원이고, 우리 사업에서 어떤 사사로운 이익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첫 출자 지분 5달러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서로 소송을 걸어 다툰 적도 없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연례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해, 집에서 싸온 음식을 나눠 먹습니다.”


MEC 홈페이지의 회사 소개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글입니다. 이 짧은 글 속에 6명의 설립자에 대한 수백만 조합원의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밀도 짙게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MEC의 시작은 아직 등산이 대중화되지 않은 197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밴쿠버는 로키산맥 줄기로 등산인구가 많은 곳입니다. MEC가 태동하던 1970년대 초만 해도 캐나다에는 제대로 된 등산장비전문점이 없어서 간단한 장비 하나를 사려고 해도 미국 시애틀에 있는 매장을 찾아 국경을 넘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캐나다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새로 구입한 등산장비들에 대해 관세를 내야 하는데, 캐나다 등반인들은 꾀를 내 미국 쪽에서 며칠 간 등산을 하면서 새 장비에 일부러 흠집을 내고는 헌 장비라 우기며 국경을 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행이 만연하자 미국 경찰도 '탈세등반'을 단속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1970년 여름 밴쿠버 UBC 대학 산악부의 짐 바이어스가 동료들에게 협동조합을 제안하고 나섭니다. 바이어스의 열정에 의기투합한 산악부 회원 6명은 마침내 1971년 8월, 1인당 출자금 5달러씩을 모아 협동조합을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첫 사무실은 UBC 대학의 학생회관 구석방을 임대해 마련했습니다.


수익은 조금만 남겨 싸게 팔고 민주적으로 운영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애당초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라, 협동으로 산악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자는 목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자금이 부족해 사업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정찰 가격보다 싸게 팔다보니, 일부 업체는 아예 물품 공급을 끊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함께 힘을 모으면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협동조합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게 했습니다. 협동조합의 취지를 이해하게 된 이들이 하나둘 조합원으로 동참하면서 1980년에 들어서는 조합원 수가 5만 명을 넘어서기에 이릅니다. 조합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지속적으로 쌓여 2009년에는 급기야 조합원 300만 명을 넘기게 됩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이들이 키워온 아름다운 공동체 MEC는 이렇게 캐나다인들의 자부심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상 속 가까이에서 사랑, 연대, 협동의 아름다운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사랑을 세상과 사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7월 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01) 협동조합의 살아있는 교과서 ‘MEC’


‘그리스도적 정신 · 가치’ 세상 곳곳에


등산가들 사이에 캐나다 ‘산악장비 협동조합’(Mountain Equipment Co-op, MEC)의 아웃도어 의류나 등산 장비는 내구성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MEC에서는 그 흔한 바겐세일도 없습니다. 평소에 싸게 팔기 때문에, 따로 기간을 정해 세일을 하는 것은 평소 MEC 매장을 이용하는 조합원들에게 역차별이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제품 생산과정에서도 조합원의 목소리를 전적으로 반영합니다. 또한 MEC에서 판매하는 모든 물품은 하루 동안 써본 다음 구매 여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제품에 손색과 하자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MEC는 영리기업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않을 많은 분야에서 그리스도적 정신과 가치를 펼치고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로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환경보호 등 공동선을 실현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기 때문에 캐나다인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일례로 영업이익이 아니라 1년 매출의 1%를 공익을 위해 사용합니다. 지난 1987년에는 환경보존기금을 만들어, 개발로 인한 훼손 위기에 처한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스모크 암벽을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2012년에는 환경보존을 위한 1달러짜리 손가방 4만 개를 판 4만 달러로, 캐나다 열두 해안지역 환경보전 사업에 힘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MEC 제품이 내구성을 내세우는 것도 쓰레기를 가능한 한 줄이자는 취지와 맞물려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대자연 속에서 주님이 베푸신 온갖 좋은 것들을 향유하되 그것을 이웃, 나아가 자자손손 후세와 길이 나누고자 하는 MEC의 정신은 그들의 활동 속에 고스란히 녹아나고 있습니다.


MEC의 잉여금 배당 정책을 보면 이같은 정신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MEC는 최소한의 잉여금만을 남겨 이를 각 조합원에게 현금이 아니라 출자지분으로 배당합니다. 배당액은 조합원이 1년 동안 MEC 매장에서 물품을 구매한 실적에 비례합니다. 이렇게 배당하다 보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각 조합원들의 출자 지분 규모가 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MEC에는 어떤 이유에서든 조합원 간에 차등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MEC는 해마다 일정량의 재원을 투입해 조합원의 과도한 출자 지분을 현금으로 사들이는 출자 지분 상환 정책을 마련해, 조합원 간의 격차를 해소하고 있습니다.


조합원 출자에서부터 이러한 기조는 그대로 반영됩니다. 출자금은 조합 창립 당시나 지금이나 똑같이 5달러입니다. 조합원이 되는 그날부터 6명의 창립 조합원과 똑같은 권리를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5달러 이상은 받지도 않고, 조합원이 아닌 사람에게는 물품을 팔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협동구조를 철저히 지켜나가기 위해 잉여금도 최소한으로 남기고, 따라서 조합원에게는 좋은 상품을 싸게 공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익보다는 협동이 우선되고 협동이라는 가치로 작동하는 이같은 선순환은 상승효과를 낳게 됩니다.


사랑과 신뢰가 밑거름이 된 MEC는 40년 만에 캐나다 전체 국민의 10%를 웃도는 370만 명의 조합원을 확보해 캐나다 최대의 아웃도어 브랜드로 성장했습니다.


2011년 한 해 매출만 2억 7000만 달러(약 3200억 원)에 이르는 MEC는 캐나다 전역의 15개 대형 매장에서 15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일하며 그리스도적 가치를 세상 곳곳에 전하며 협동조합의 살아있는 교과서로 불리며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7월 1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02) 캐나다 안티고니시 운동


경제대공황에서 벗어나게 한 ‘협동조합’


오염되지 않은 대자연이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오는 캐나다에서는 협동조합도 색다른 매력을 풍깁니다.


캐나다에서는 주변에 무엇인가 개선해야 할 점이나 필요한 것이 있을 때 협동조합에서 답을 찾고, 나아가 문제 해결 과정을 주 정부와 관련기관에서 도와주는 시스템이 자연스럽습니다. 협동조합이 캐나다인들의 삶과 품성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캐나다 협동조합의 매력을 알기 위해서는 캐나다의 전설적인 협동조합 운동인 안티고니시(Antigonish) 운동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티고니시 운동이란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의 읍 단위 조그만 마을인 안티고니시 지역에서 일어난 협동조합운동을 말합니다.


흔히 극한의 어려운 시기라 불리는 1920~30년대, 세계적인 경제대공황으로 황폐화된 노바스코샤 경제는 30년대에도 전혀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절망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당시 캐나다 동부 해안지역의 농부들과 어부들은 구조적 경제 시스템의 폐해가 가져오는 어려움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절망으로 아우성치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목격한 두 사제들의 투신으로 노바스코샤 지역에는 새로운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게 됩니다.


1920년대 말, 가톨릭교회가 노바스코샤 주에서 운영하던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 대학(St. Francis Xavier Extension Department)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던 지미 톰킨스(J.J. Tompkins) 신부와 그의 조카인 모제스 코디(Moses Michael Coady) 신부는 고질적인 경제난의 원인을 지역경제 시스템의 부실함과 함께 주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이들은 곧 지역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행동에 나섰고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 당시 2265개의 학습모임에서 많은 이들이 협동조합의 정신을 익히며, 342개의 신용협동조합과 162개의 각종 협동조합 조직을 탄생시키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안티고니시 운동이 큰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 대학의 성인교육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당시 캐나다 동부 연안의 많은 이들은 공공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톰킨스와 코디 신부는 자신들이 활동하던 대학에서 협동조합과 지역개발 관련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안티고니시 운동을 위한 많은 실천가들을 양성해냈습니다.


두 번째 요인으로 지역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후원과 참여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공동체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에 안티고니시 운동의 실천가들이 시골 구석구석의 마을, 공동체와도 연결될 수 있었으며 또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힘이 실릴 수 있었습니다. 특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만드는 신문, 팸플릿, 라디오 방송 등은 이 운동의 강력한 소통수단 역할을 하며 많은 이들을 한데 일치시키고 결속시킬 수 있었습니다.


작고 소박한 시작이었으나 안티고니시 운동은 캐나다를 넘어 전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도 사비에르 대학 부설 코디 국제연구원(Coady International Institute)은 캐나다는 물론 개발도상국의 사회변혁과 자조운동에 많은 영감을 불어 넣고 있습니다.


안티고니시 운동의 명성은 6.25전쟁 직후 자조운동을 시작하려던 한국에도 전해져서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1993년 선종)와 장대익 신부(서울대교구·2008년 선종)가 코디연구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신협운동의 산파 역할을 하게 되니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7월 2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03) 캐나다 퀘벡 RDC


신규 협동조합 체계적 설립 돕는다


북미지역에서 협동조합을 가장 먼저 도입한 캐나다 퀘벡 주는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주와 함께 ‘협동조합의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협동조합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교 정신이 충만한 퀘벡은 협동조합과 관련된 각종 정책과 제도가 잘 정비돼 있는 것은 물론, 협동조합을 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도 풍부해 하느님 나라의 한 자락을 엿보게 해줍니다.


주민의 70%가 1개 이상 협동조합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퀘벡의 협동조합원은 캐나다 전체 조합원의 50%를 차지할 정도입니다. 9000개가 넘는 협동조합에서 15만5000여 명이 일하는 캐나다에서도 퀘벡지역 비금융권 협동조합은 연간 115억 달러(약 14조 원)의 경제 규모를 일궈내며 지역과 국가 발전에 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당기 순이익도 매년 8.5%씩 성장하고 있어 많은 나라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협동조합이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퀘벡은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 경제가 이제 막 씨앗을 뿌리고 있는 우리에게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퀘벡에서는 협동조합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주 단위 협동조합연합회를 비롯해 분야별 12개 퀘벡협동조합연합회(CQCM), 11개 지역개발협동조합(Regional Development Cooperatives: RDC), 정부 부처, 협동조합투자공사 등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퀘벡 주정부와 협동조합은 신규 사업 창출, 일자리 창출, 지역개발, 사업의 지속가능성, 주요 지표 개선, 새로운 수요 대응 등 공동 목표를 위해 함께 노력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게 지역개발입니다. 조합원 이익 극대화를 넘어 지역개발이란 그림을 함께 그려나가는 것입니다. 지역개발은 신규 협동조합 설립 지원으로 나타납니다. 지방정부에만 맡겨두는 게 아니라 지역개발협동조합(RDC)이 중요한 역할을 나눠 맡습니다.


지난 1985년 신규 협동조합 창업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RDC제도는 퀘벡에만 있는 독특한 협동조합 모델입니다. 퀘벡 주정부가 매년 450만 달러를 퀘벡협동조합연합회(CQCM)에 배정하면 CQCM은 주정부에서 받은 450만 달러에 자체적으로 56만 달러를 출연해 총 500만 달러 규모로 사업을 추진합니다. 실질적인 협동조합 창업 컨설팅 업무는 RDC가 맡아 CQCM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성과에 따라 사후 대금을 정산받는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합니다.


RDC는 신규 협동조합 설립에 필요한 법 지식, 자금조달, 기술 서비스를 지원합니다. 또 협동조합 부문별 연합회 결성을 장려하고, 다양한 회의를 통해 공동의 필요를 모색하는 역할도 합니다. 이러한 효율적인 지원 체계와 적절한 컨설팅에 따라 신규 협동조합의 생존율은 높아지게 됩니다.


일례로 홈케어서비스가 협동조합들의 관심사였던 1990년대, RDC 주도 아래 은행, 보험, 식품 유통 등 발전된 부문의 협동조합들이 힘을 합해 12개의 신규 홈케어서비스 협동조합 신설을 지원한 바 있습니다. 홈케어서비스 협동조합이 생겨남에 따라 노인, 장애인 등 소외된 이들이 보다 손쉽게 전문 서비스 기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같은 RDC의 활약은 협동조합이 사람들의 새로운 필요에 부응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정신을 기초로 하여 실천적인 사랑과 나눔의 영토를 넓혀갈 수 있는 힘이 있음을 확인시켜줍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7월 2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04) 협동조합을 돕는 ‘협동조합’


캐나다 사회경제제도와 사회경제의 힘


누가 봐도 여러 가지 환경이 썩 좋다고 할 수 없는 북미지역에서 캐나다 퀘벡 주를 ‘협동조합의 천국’으로 일궈 누구나 부러워하는 곳으로 만든 배경에는 퀘벡의 독특한 협동조합 모델인 지역개발협동조합(Regional Development Cooperative : RDC)제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역개발협동조합(RDC)은 한 마디로 협동조합 창립을 돕는 협동조합으로, 지난해 12월 1일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 이후 협동조합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합니다.


퀘벡 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RDC들은 네트워크 컨설팅 서비스를 통해 신규 협동조합 설립에 필요한 창업기술을 지원하고 있어 협동조합운동이 새롭게 불붙고 있는 우리로서는 시사 받을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현재 퀘벡 주 17개 행정구역 가운데 11개가 설립돼 있는 RDC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나라들에서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는 ‘일자리’ 만들기에서 놀라운 역량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지난 1986년 설립된 몬트리올과 퀘벡 라발지역개발협동조합은 180개 협동조합을 조합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회원 가입은 의무나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뤄집니다. RDC 운영자금은 주정부 예산과 서비스 수익, 회비 등으로 충당되고 있습니다.


퀘벡 주 전체로는 2800개 협동조합 가운데 1080개 협동조합이 RDC에 가입돼 있습니다. 이들 RDC는 지난 10년간 1만1000개가 넘는 일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또 2004~2006년까지 160개 협동조합 설립을 지원해 1223개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2011년 기준으로 최근 3년 동안 327개 협동조합이 RDC를 통해 설립됐으며, 1234개 일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때문에 RDC는 협동조합 창립을 촉진하기 위한 매개체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83%를 경제 사정이 취약한 시 외딴지역 가난한 이들이 많은 곳에서 성과를 내어 협동조합이 지향하는 바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12개에 이르는 퀘벡협동조합연합회(CQCM)가 협동조합 정책을 총괄한다면 RDC는 협동조합운동의 최전선에서 협동조합이 지역경제개발 파트너들과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우선순위를 잘 파악해 새로운 협동조합 설립을 지원함으로써 지역주민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 있는 RDC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는 천사나 다름없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RDC는 협동조합이라는 가치로 연대하고,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지역의 사회적 자산을 확충함으로써 ‘일자리’ 문제 해결은 물론 ‘복지’, ‘경제 활성화’ 등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음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건강한 경제 생태계를 조성해나가는데 역량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RDC의 위상과 역할에 착안해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지난 2월 13일 전북지역에서 지역순환형 자립경제 기반 구축을 목표로 내세운 전북지역개발협동조합(RDC)이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눈길을 먼저 돌림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RDC를 통해 주님께서 바라시는 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8월 1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05) 퀘벡 주정부와 협동조합운동


협동조합의 힘, 네트워크의 힘


전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협동조합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사회적 경제의 다채로운 모습들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가는 고상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협동’을 통해 인간 공동체만이 창출해낼 수 있는 아름다운 가치를 잘 가꿔나가고 있는 이들을 볼 때면 그들이 이미 하느님 나라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생각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 캐나다의 10개 주 가운데 가장 큰 면적의 퀘벡 주는, 인구가 캐나다 전체의 23%에 불과하지만 국내총생산에 있어서는 늘 그 이상을 점유할 정도로 캐나다는 물론 북미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은 캐나다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곳 가운데 하나가 된 퀘벡이라는 지역은 네트워크와 이 네트워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정부의 힘을 잘 보여주는 곳이어서 협동조합운동에서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은 우리로서는 배울 바가 적지 않습니다.


협동조합(운동)의 가능성을 인지한 퀘벡 주정부는 이미 지난 1960년 정부 직제 안에 최초로 협동조합 부서를 설치함으로써 협동조합(운동)을 국가 단위에서 공동체가 함께 풀어가야 할 몫으로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합니다.


퀘벡 주정부는 협동조합 부서를 중심으로 협동조합에 필요한 다양한 제도와 정책을 마련해 협동조합 설립과 성장을 뒷받침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정부의 노력에 힘입어 퀘벡에는 소비자협동조합을 비롯해 생산자협동조합, 근로자협동조합, 연대협동조합, 근로자 소유 협동조합 등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들이 태어나 그 어느 곳에서보다 왕성한 생명력을 키워오고 있습니다.


이 같은 노력의 결실로 퀘벡 주에만 2800개 협동조합(비금융권, 금융권 포함 3300여 개)이 활동 중이며, 종사자는 9만2000여 명, 조합원은 무려 120만 명을 헤아립니다. 이처럼 정부와 지역사회가 협동조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며 서로 필터링하면서 시너지효과를 거두고 있는 모습은 갑을(甲乙) 문화로 시끄러운 우리 사회로써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퀘벡 주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2005년 11월 세제 개편 등을 통해 협동조합운동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협동조합법을 개정하였습니다. 아울러 3개년 협약을 맺고 창업 기술지원, 특화된 창업 가이드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협동이 결실을 본 까닭에 최근 3년간 캐나다에서 설립된 협동조합의 60%가 퀘벡에서 만들어졌을 정도입니다. 퀘벡 인구가 캐나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퀘벡 협동조합의 성과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1999년부터 2009년 10년 동안 캐나다 전체에서 협동조합이 창출한 일자리(37%)의 절반에 해당하는 15.5%를 퀘벡에서 창출하는 성과를 올렸으니 협동조합의 천국이라 불릴 만합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전문가들은 ▲ 협동조합의 원칙에 부합하는 방향 설정 ▲ 지역사회 고유의 원칙 존중 ▲ 협동조합운동과 정부 사이의 긴밀한 협력 ▲ 금융조달 등 협동조합에 대한 전문적 지원 ▲ 협동조합 사이의 강력한 네트워킹 등 통합적인 구조를 협동조합의 성공요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퀘벡은 협동조합이 하나의 대안적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정신을 바탕으로 인간이 만들어가는 공생적 공동체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8월 1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06) 캐나다 퀘벡주 ‘샹띠에’


아름다운 공동체적 삶을 개척하다


하느님 마음에 드실 만한 공동체적인 삶의 모습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캐나다 퀘벡의 사회적 경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샹티에(Chantier)입니다.


프랑스어로 ‘작업장’이라는 뜻을 지닌 샹티에는 7000여 개에 이르는 다양한 사회적 기업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네트워킹하는 ‘사회적 경제 대표자 연석회의’를 일컫는 말입니다.


샹티에의 출발은 퀘벡 주의 실업률이 10%가 넘는 등 극심한 경제 침체에 빠져있던 199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12%에 달하는 높은 실업률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자 가장 먼저 나선 이들은 여성들이었습니다. 1995년 5월말 퀘벡 여성단체들은 ▲ 최저임금 인상 ▲ 동일노동 동일임금 ▲ 이주여성노동자의 권리 보장 ▲ 공공복지부문에서의 일자리 창출 등 9개 항을 정부에 요구하며 10일 동안 ‘빵과 장미의 행진’을 펼칩니다.


샹티에는 실업과 경기침체에 대응하고자 하는 이러한 사회적 연대의 흐름 속에 사회적 경제 조직들의 연합체로 1995년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샹티에의 가장 큰 역할은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시민단체 등의 연대와 협력 네트워크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주정부는 위기 타개를 위해 머리를 맞대자는 샹티에의 제안을 받아들여 1996년 주정부를 중심으로 기초단체, 경영자협회, 노동자연맹, 사회단체 대표가 모인 ‘퀘벡의 경제·사회 미래에 관한 연석회의’를 마련합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나가기 위해 저축해온 돈을 자발적으로 출연하여 ‘연대기금’을 조성합니다. 주정부는 이 기금에 매칭펀드 형태로 참여하는 한편, 노동자에게는 소득세를 감면해주고, 연방정부는 이에 따른 세수 감소를 보전해 주었습니다.


퀘벡의 사회적 경제가 유지 발전해올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사회연대기금이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샹티에는 1997년 1000만 달러 규모의 ‘퀘벡사회경제투자네트워크기금(RISQ)’을 조성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기업에게 5만 달러까지 무보증 신용 대출을 시작했습니다. 기금이 원활하게 사회적 기업으로 흘러가도록 기업심사 및 평가 방법, 리스크 기준도 바꿉니다.


이후 사회적 경제 조직의 규모와 자금 수요가 꾸준히 커지면서 새로운 형태의 운영자금 조달 수단이 필요해집니다. 조달한 자금을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인정함으로써 사회적 기업의 안정적인 기업 활동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단기성 부채 차입 형태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자본조달 수단으로써 ‘인내자본’(patient capital)이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인내자본은 일반 금융기관의 단기 대출 관행과 달리 장기 대출 방식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대출한 뒤 곧바로 갚아야 하는 단기 자금과 달리 장기라는 점에서 채무를 떠맡은 사회적 경제 진영의 안정적인 재정 운용을 돕게 되는 것입니다. RISQ를 통해 자금을 빌린 사회적 기업은 15년 동안 원금상환 유예 혜택을 받습니다. 이 기간 동안 사회적 기업들은 고정 이자만 내면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키워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적 연대를 통해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치를 창출해 세상에 안정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샹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만들고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8월 2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07) 캐나다 퀘벡 장기금융 프로그램


사회적 약자 존엄성 지키며 창업 도와


캐나다 퀘벡의 사회적 경제를 든든하게 지탱해오고 있는 ‘사회적 경제 대표자 연석회의’샹티에(Chantier)는 ‘작업장’이라는 말뜻 그대로 공동선을 위해 힘을 합친 이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맞닥뜨린 위기를 함께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맞댄 샹티에의 활동으로 퀘벡 주는 다른 어떤 곳보다 빨리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하느님 나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샹티에는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시켜 나가기 위해 그 젖줄 역할을 하는 장기금융 프로그램인 ‘인내자본’(patient capital) 조성에 힘을 기울입니다. 퀘벡의 사회적 경제시스템이 만들어낸 독특한 제도인 인내자본은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 기업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이 인내자본에는 경제활동의 한 축을 맡고 있는 노동자들뿐 아니라 노조와 주정부 등 보통 대립관계에 서있기 쉬운 경제주체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내자본은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창업할 수 있도록 돕는 자본입니다. 그러나 상환 의무가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자선기금과는 다릅니다. 사회적 경제 조직들은 인내자본을 통해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유지하고 차입으로 인한 경영권 상실 위험을 방어하며, 투자금 상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샹티에는 지난 2006년 연방정부가 연기금을 통해 조성한 투자기금으로부터 3000만 달러, 주정부에서 1000만 달러, 그리고 자체 기금 1250만 달러 등 총 5250만 달러 규모의 인내자본을 조성합니다. 아울러 사회적 기업의 가장 큰 애로점인 자금 조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대출금 상한 규모도 종전 5만 달러에서 150만 달러까지 30배로 늘립니다. 캐나다 최대의 신용협동조합인 데자르댕(Desjardins)도 이러한 연대기금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인내자본들로 이뤄진 연대기금이 이뤄낸 성과는 가히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1996년 당시 주정부를 중심으로 기초단체, 경영자협회, 노동자연맹, 사회단체 대표가 모인 ‘퀘벡의 경제·사회 미래에 관한 연석회의’의 제안에 따라 보육과 주거, 환경,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설립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이뤄집니다. 이에 힘입어 10여 년 동안 탁아 서비스를 제공하는 협동조합 등을 통해 2만5000여 개 일자리가 만들어졌고,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1만 호가 건설되면서 관련 산업분야에서도 일자리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가 확산되면서 일자리가 늘어나게 되고 다시 이와 관련된 경제 분야에서 협동조합이 설립되는 선순환 과정을 통해 실업이 극복되고 경제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퀘벡 주의 다양한 연대기금을 통해 설립된 사회적 기업만 2008년 말 기준으로 1880여 곳에 달하며, 12만6000여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결실을 일궈내게 됩니다. 단순한 연대조직에서 출발한 샹티에는 이제 퀘벡 주정부 상설기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뜻있는 이들의 아름다운 모색을 통해 (지방)정부와 시민사회단체가 협력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는 샹티에의 도전의 역사를 통해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만들어내는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9월 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08) 캐나다 퀘벡 ‘연대협동조합’


‘조직이기주의’ 병폐 해결하다


캐나다 퀘벡의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가 함께 성장한 배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연대협동조합(solidarity cooperatives)입니다.


공동선을 지향하는 공동체나 모임마저도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조직이기주의’입니다. 변형된 관료주의의 병폐로 지적되기도 하는 조직이기주의는 큰 난관을 헤쳐 온 조직일수록 그 폐해가 나타나기 쉽습니다. 조직이기주의는 어려움을 극복해오면서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자신이 힘겹게 얻게 된 안정적인 위치와 누릴 수 있게 된 이익에 매몰돼 애초 함께 지향해온 사회정의나 사랑, 공동선 등 고귀한 가치를 제거하거나 잊게 만듭니다. 이 때문에 조직이기주의는 하느님 나라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대, 사랑 등 공동의 가치 실현을 목표로 하는 협동조합도 지나치게 조합원들만의 이익을 추구하게 될 경우 지역 사회나 경제에 역기능을 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한 예로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영리기업과 마찬가지로 지역의 자원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수수방관함으로써 지역 공동화(空洞化)현상을 불러오기도 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아웃소싱을 도입하면서 실업률이 높아지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퀘벡의 협동조합운동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퀘벡에만 있는 협동조합 모델인 연대협동조합은 이러한 ‘조직이기주의’로 인해 빚어지는 현실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연대협동조합은 법적으로 조합원 자격을 대폭 개방해 소비자와 노동자는 물론 연대협동조합 목적에 공감하는 외부인과 기업도 ‘후원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퀘벡에서는 ‘조직이기주의’의 벽을 뛰어넘어, 민간단체와 지방정부가 연대협동조합을 통해 지역사회가 봉착한 문제를 농업·제조업·건설업·유통업·문화·의료·사회서비스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적절히 대응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퀘벡의 사회적 경제부문의 비영리조직들은 기부, 기탁금, 정부보조, 프로그램펀딩, 채무보증, 자체자금 조달 등을 통해 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금조달 방식으로는 시장활동을 통해 사회·경제·환경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경제적 약자들이 협동조합을 통해 자신들의 희망을 키워갈 수 있도록 촉매 역할을 하고 나선 것이 캐나다 국민들이 자랑하는 신용협동조합 데자르댕(Desjardins)이었습니다. 데자르댕이 주도해 지난 1971년에 세워진 데자르댕 연대경제기금(Caisse d‘economie solidaire Desjardins)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연대협동조합과 비영리조직 등에 젓줄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적 금융체제가 활기를 띠도록 해 경제시스템이 선순환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연대협동조합이 더욱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업종이나 조합원 구성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이해와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령화가 진전되고 있는 캐나다의 사회적 여건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은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어떠한 경제적 파도에도 휩쓸리지 않고 건실한 경제를 이뤄올 수 있었던 캐나다 협동조합들의 모습은 성숙한 의식만이 나눔과 섬김의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세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9월 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09) 행복지수 세계 1위 ‘덴마크’


‘더불어’ 사는 협동 · 나눔 정신의 나라


자연을 이용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가꿔나가는 경제활동을 영위하다 보면 인간이 자연과 동떨어진 별개의 존재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약이 많은 존재인 인간이 근시안적 눈으로 자연에 다가설 때, 인간이 그 속에 함께 머물러야 할 자연은 철저히 ‘대상화’되어 한낱 이용 대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떠넘긴 수많은 상처로 인해 자연도, 인간도 덩달아 신음하게 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척박한 자연과도 함께 호흡하며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가꿔가는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낙농업의 나라’로 알려진 북유럽의 복지국가 덴마크는 악천후와 습한 서북풍 등으로 ‘폐병의 나라’, ‘소아마비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척박한 환경의 나라였습니다. 그런 덴마크가 1인당 국민소득 5만6000달러(2010년 기준)의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더불어’ 살아가려는 협동과 나눔의 정신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개신교가 중심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전체 인구의 90%가 넘는 덴마크에서는 믿음을 바탕으로 고양된 그리스도 정신이 다양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뿐 아니라 자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연을 극복과 개발의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로 바꿔나가는 덴마크 사람들의 놀라운 능력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복지국가로 손꼽히는 덴마크 국민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은 협동조합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연대와 나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 육류수출 1위, 돼지 도축 규모 유럽 1위인 ‘대니시 크라운(Danish Crown)’이 ‘행복지수 세계 1위의 나라’ 덴마크가 자랑하는 세계적 기업임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이 회사가 축산협동조합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두 명의 덴마크 사람이 열차의 옆자리에 탔다면 그 열차가 종착역까지 가는 45분 사이에 하나의 협동조합이 만들어진다고 할 정도로 덴마크에서는 협동조합 설립이 흔한 일입니다.


핵발전소 건설과 이에 따른 문제들로 시끄러운 우리에게는 에너지 문제까지 협동조합으로 풀어가는 덴마크가 부럽기만 합니다.


코펜하겐에서 3.5㎞가량 떨어진 미델그룬덴(Middelgrunden) 해안가에 가면 풍력 터빈 20개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코펜하겐 사용 전력의 약 4%인 40㎿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터빈을 가동하는 곳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미델그룬덴 풍력전력협동조합입니다. 에너지의 생산과 분배를 국가 차원에서 공기업이 관리하는 우리로서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미델그룬덴 풍력전력협동조합은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던 코펜하겐 시민이 주축이 되어 1997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시민 7명이 10달러씩 내서 자본금 70달러로 시작한 조합은 ‘우리 지역 에너지는 우리가 책임지자’는 뜻을 가지고 시민들에게 다가가 8600명으로부터 총 3000만 달러를 모아 오늘의 모습으로 키워낼 수 있었습니다.


풍력 터빈이 힘차게 돌아가는 풍경으로 상징되는 덴마크의 모습은 우리에게 자연 속에 깃든 하느님의 숨결을 돌아보게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9월 1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0) 자연과 더불어 사는 덴마크


협동조합 바탕, 에너지 수입국서 수출국으로


에너지는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필요한 ‘혈액’과 같습니다. 산업화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 쓰는 에너지 소비량은 경제발전에 비례해 급속도로 증가해오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가 1973년 39억 명에서 2010년 68억 명으로 1.74배 늘어나는 동안 에너지 사용량은 61억TOE(Ton of Oil Equivalent·석유 1톤이 연소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의 양)에서 127억TOE로 2.08배나 증가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과 같은 화석연료는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 가운데 81%에 이를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60년 넘게 석유와 천연가스 등을 마음대로 사용한 결과, 예전에는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석유와 가스 등을 요즘은 깊은 바다나 퇴적암의 일종인 셰일층 등에서 어렵게 생산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현재의 에너지 자원들이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화석연료 고갈, 환경 및 기후 변화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에너지 사용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이제 단순히 어느 한 지역이나 국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덴마크가 보여주고 있는 모범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덴마크는 해외의 에너지 자원에 의지하던 에너지 수입국이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전 세계적인 1·2차 석유파동을 겪으며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정부는 물론 국민들 사이에서도 형성되기에 이릅니다. 이에 따라 1976년 국가 에너지 계획과 대안에너지 계획을 마련하면서부터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석유를 대체하기 위한 노력으로 에너지 절약의 효율화와 풍력발전을 중점 육성한 결과 1978년 세계 최초로 풍력발전기가 세워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정부도 풍력발전기를 구매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주고 풍력발전 차액을 지원하는 등 지원책을 꾸준히 내놓아 풍력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재생 가능하고 환경친화적인 에너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덴마크는 지난 1991년 처음 해상 풍력발전단지를 조성하게 됩니다. 수도 스톡홀름 근처의 미델그룬덴 단지뿐만 아니라 12곳에 해상 풍력발전단지를 만들어 환경과 에너지 문제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해오고 있습니다.


덴마크 서안에 있는 혼 해상단지는 미델그룬덴 단지보다 5배가 큽니다. 2003년 코펜하겐 남쪽 뉴스테드 해상풍력단지에는 풍력발전기 72개가 설치돼 14만5000여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연간 600기가와트(GW)의 전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덴마크 전체로는 5200여 개의 풍력발전기가 연간 3752㎿의 전력을 생산해 전체 소비전력의 24%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힘입어 국가 전력 생산량에서 풍력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유럽연합(EU)에서 가장 높습니다. 석유가 나지 않는 나라임에도 에너지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신해 현재 유럽연합에서 유일한 전기 수출국이 된 덴마크의 저력은 바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협동조합운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주님의 뜻에 맞갖게 잘 활용해 후세대에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전해주려는 덴마크 사람들의 노력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끼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9월 2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1) 덴마크의 에너지 정책


인간 · 자연의 공존공영 가능성 열어


교회는 물론이고 인류의 역사를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무수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러한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이들이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마태 24, 30)이라고 말합니다. 특히나 그리스도인들이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그에 맞갖은 삶을 선택하고 실천에 옮긴다면,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 세상을 바르고 정의롭게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를 이끄시는 주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이 단순히 하면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라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주님의 사랑은 인류를 넘어 당신이 창조하신 온 피조물을 향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온갖 것을 다스리게’(창세 1, 26) 하신 뜻이 단순히 ‘지배’가 아니라 ‘공존’임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아름다운 정신을 볼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자연과의 조화와 하나됨을 통해 공존공영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덴마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덴마크 곳곳에 세워진 풍력발전단지에서 힘차게 돌아가고 있는 풍력발전기들은 생태계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유익하고 풍요로운 세상의 환경을 사람들이 향유하도록 가시적 노력과 상징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력을 비롯한 자연에너지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투자를 통해 현재 전 세계 풍력발전기의 30%, 특히 해양 풍력발전기는 90%가 덴마크 산이 차지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덴마크에서 네 번째로 큰 기업으로 연매출액이 10조원이 넘는 베스타스(Vestas)는 풍력 분야 세계 1위의 업체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베스타스를 비롯해 지멘스 등 350여 개의 풍력발전산업 관련 기업체에서만 2만5000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져 경제에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풍력 관련 기술 수출은 전체 덴마크 수출량의 8.5%에 이를 정도입니다. 덴마크에서 이처럼 풍력발전이 발달한 것은 산지가 없고 평평한 지형과 강한 해풍 등 지형적 영향도 있지만, 그보다는 에너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입니다.


덴마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구상에 있는 생물체를 열분해시키거나 발효시켜 연료를 얻는 바이오매스(biomass) 에너지 연구를 통해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는 등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자세와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덴마크 정부는 오는 2020년까지 풍력과 바이오매스의 비중을 각각 42%와 20%로 끌어올리고, 38%만 화석 연료를 통해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나아가 2035년부터는 화석연료를 전혀 쓰지 않기로 목표를 정하고, 2050년에는 아예 석유나 가스 사용량도 ‘0’으로 떨어뜨린다는 ‘화석 연료 제로(0)화’를 선언했습니다. 에너지 생산 전부를 풍력, 태양광 등 신재생 에너지로 충당한다는 야심 찬 구상입니다. 에너지 정책이 신재생 에너지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온실가스 배출량은 오히려 1990년 대비 20% 가까이 줄었습니다.


대체 에너지로 핵발전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신재생 에너지를 선택해 어려운 길을 걸어가고 있는 덴마크 사람들의 삶에서 겸손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0월 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2) 독일 ‘라이파이젠’ 시장


교회정신 바탕 협동조합 근간 만들어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서도 견실한 성장세를 보여 부러움을 사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독일입니다. 유럽발 재정위기라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독일은 탄탄한 경제력으로 유럽의 ‘소방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저력은 지난해 2월 말 기준으로 독일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총 2598개의 경제사업 협동조합, 1255개의 시민은행(Volksbanken)·신용협동조합, 904개의 산업별 협동조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수치는 독일 국민 4명 중 1명은 협동조합 조합원이며, 독일 경제의 기반이 사실상 협동조합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독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의 독일을 일궈낸 뿌리에 협동조합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자 독일도 이 물결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변국에 비해서 산업화 과정이 늦었던 독일은 1840년대에 이르러서야 자본주의 대량생산 전환 과정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자유로운 자영농민층이 주체가 되어 아래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봉건적 토지소유자가 지배 권력자와 야합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도시의 영세 독립 소생산자들과 농촌의 소작농들은 불가피하게 상업자본가의 고리채(高利債)에 의존해야 했고, 경제적으로 수탈당하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47년에 대기근이 강타하면서 독일 농민들은 기아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가난한 이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던져준 이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라이파이젠(F.W.Raiffeisen)이었습니다. 1849년 라인강 중류 농촌지역 바이어부쉬의 시장으로 부임한 라이파이젠은 농민들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가난의 사슬을 끊지 못하는 원인을 찾게 됩니다. 라이파이젠 시장이 찾아낸 가난의 뿌리는 고리채였습니다. 봄에 농사대금을 고금리로 빌려 쓰다 보니, 가을에 수확한 농산물 대부분을 빚과 이자를 갚는데 갖다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라이파이젠 시장은 가난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방안으로 마을 기금을 조성해 굶주린 주민들에게 곡식을 외상으로 나눠줬습니다. 1849년에는 프람멜스펠트 빈농구제조합을 설립해 농민들이 가축을 구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조합원 60명이 무한연대책임으로 돈을 빌려 가축을 사고, 5년 동안 나누어 갚는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는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았던 라이파이젠은 그 시대의 가난한 이들인 농민을 마음에 품었던 것입니다. 라이파이젠의 주도로 농민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신용협동조합은 1862년 라이파이젠은행(Raiffeisenbank)으로 성장했습니다. 라이파이젠 신협의 성공은 삽시간에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의 농촌 지역으로 퍼져나가 고리채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고치고 다듬은 100줄의 법률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단 한 줄이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고 말했던 라이파이젠은 그리스도교 정신을 그대로 협동조합에 결합시켜 오늘날의 협동조합의 근간을 만들어 ‘협동조합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교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분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0월 1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3) 신협이 만든 기적


인류의 새로운 금융문화를 꽃피우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일에 일생을 바친 프리드리히 빌헬름 라이파이젠(F.W.Raiffeisen). 그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신은 한 알의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를 이루듯 커다란 결실을 맺어 인류에 봉사한 모범사례입니다.


라이파이젠이 활동하던 당시 독일에도 은행이 있었지만 대자본을 필요로 하는 중공업 분야를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도시의 영세 소상공인들을 비롯해 조그만 일이라도 벌여 생계를 꾸려가려는 가난한 이들은 자본의 부족으로 고통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지켜보던 독일 작센 주 중북부 도시인 델리치의 시장이자 베를린의 국회의원이었던 헤르만 슐체 델리치(Schulze-Delitzsch)는 라이파이젠 신협을 벤치마킹해 1850년대 독일의 도시 지역에 민중은행을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델리치는 부자들을 중심으로 한 은행만이 활개를 치던 당시 금융시장 환경 하에서 노동자, 농민, 수공업자, 소상인 등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고리대자본을 배격하고, 가난한 이들 스스로가 예금자와 차입자로 조직화되어 자신들을 위한 금융중개조직을 설립해 운영하도록 합니다. 델리치가 세운 이러한 금융조직은 이후 도시형 신용협동조합의 모델이 됩니다. 그는「서민은행으로서의 대부조합」이라는 책을 출판해 신협의 이론적 토대를 닦는가 하면 독일에서‘최초의 협동조합법’을 제정하는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시작된 신용협동조합운동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널리 확산되어 나갑니다. 라이파이젠(Raiffeisen)이 농촌지역의 농민들을 위해 세운 신협은 반세기만인 1905년에 1만3000개의 조합, 약 120만 명의 조합원을 보유하게 될 정도로 성공을 거둡니다.


또, 델리치(Delitzsch)가 도시지역의 수공업자, 소상인,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설립한 신협은 1905년에 이르러서는 1000개 이상의 조합, 약 60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릴 정도로 급속도로 성장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를 돕도록 한 독일의 신협 모델은 19세기 후반에 들어 가까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비롯해 스위스,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일본, 중국, 미국, 캐나다 등 다른 대륙으로도 확산되어 인류에 새로운 금융문화를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20세기 초반 스칸디나비아반도를 거쳐, 20세기 중반에는 호주, 일부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국가 등으로까지 확산됩니다. 이렇듯 신협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기에 이릅니다.


유럽의 협동조합금융은 유럽 전체 예금시장의 21%, 대출시장의 19%를 차지할 정도입니다. 미국의 경제활동인구 가운데서도 신협 가입자는 무려 40%에 이릅니다. 각 지역은 물론이고 직장마다 신협이 많이 개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백악관 신협의 조합원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간 대부분의 신협은 크게 세계신협협의회와 유럽 협동조합은행연합회에 가입되어 가난한 이들의 삶에 젓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삶을 온 몸으로 살아낸 라이파이젠(F.W.Raiffeisen)의 선택은 ‘겨자씨의 비유’로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엿보게 해줍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0월 2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4) 네덜란드 협동조합은행 라보방크


세대 뛰어넘는 신뢰와 협력의 힘


일반적으로 협동조합을 말할 때 흔히 소규모 공동체 기업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협동조합기업이라고 해서 모두 작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전 세계 300대 협동조합기업들의 경영실적을 집계해 발표하는 ‘글로벌 300’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현재 ‘글로벌 300’의 총매출은 무려 1조6000억 달러에 이릅니다. 세계 9위 경제대국인 스페인의 국내총생산을 능가하고, 8위인 러시아에 조금 못 미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대규모 협동조합기업이 가장 많이 활동하고 있는 분야는 역시 협동조합 전통이 뿌리 깊은 농업입니다. 농업분야 협동조합 대기업들의 총매출은 4720억 달러로 ‘글로벌 300’의 28.85%를 차지합니다. 농업 다음으로 규모가 큰 분야는 금융으로 ‘글로벌 300’ 협동조합기업들의 총매출은 4300억 달러로 전체의 26.27%에 이릅니다.


‘글로벌 300’에 속해 있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은행’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네덜란드의 라보방크(Rabo bank)는 우리나라 농협중앙회가 50년 만에 사업구조개편을 준비하면서 벤치마킹할 정도로 모범적인 협동조합 모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구의 3분의 1이 가톨릭 신자인 네덜란드에서 최대 은행그룹인 라보방크는 세대를 뛰어넘는 신뢰와 협력으로 협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조합원 180만 명, 48개국의 고객 1000만 명, 직원 5만8700명. 자산 6525억 유로(약 959조 원). 2010년 말 라보방크가 만든 성적표에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자부심이 녹아있습니다.


네덜란드 경제를 떠받치는 튼튼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라보방크는 19세기 중엽 독일 농촌에서 시작돼 큰 성공을 거둔 라이파이젠(Raiffeisen) 신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898년 가난한 농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 115년의 역사를 지닌 라보방크의 조직은 역피라미드 형태입니다. 협동조합 이사장이 맨 아래에 있고, 조합원이 제일 위쪽에 있습니다. 1개의 중앙 라보방크가 아래쪽에 있고, 141개의 지역 라보방크가 그 위에 있습니다. 라보방크 관계자들은 “우리는 141명의 어머니와 1명의 딸로 구성돼 있다”고 자랑합니다. 지역단위의 라보방크들이 어머니이고, 중앙 라보방크가 딸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141개 지역은행은 12개의 지역대표자회의로 묶이고, 이 12개의 지역대표자회의에서 6명씩 선출해 중앙대표자회의(72명)를 구성합니다. 1년에 4번 열리는 중앙대표자회의에서는 이사회의 주요 정책을 심의하고 정책대안을 제시합니다. 경영은 전적으로 전문경영인이 맡아서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라보방크의 이사장이 무보수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장이 높은 보수를 받으면 결국 조합원의 경제적 부담으로 돌아가고 자리다툼이 빚어질 수 있다는 염려에서 출발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라보방크는 창립 이래 지금까지 100% 무배당 원칙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선배 세대가 라보방크의 활동으로 불어난 이익잉여금을 나눠가지지 않고 후배 세대와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에 대비해 온전히 물려준 것입니다. 세대를 뛰어넘은 이러한 협력의 힘은 지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속에서도 라보방크의 안정성과 건전성을 뒷받침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세대 간 협동 정신을 드러내고 있는 라보방크는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펼칠 수 있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0월 2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5) 아는 만큼 보이는 진리


지역 님비현상으로만 몰리는 ‘밀양’ 문제


우리는 지금까지 전 세계 곳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퍼뜨리며 몸소 주님의 나라를 일구면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경제공동체들의 면면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좋은 것’(마태 7,11)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설파한 괴테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형제애를 기울이는 만큼 세상 어디에서나, 작은 일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모습으로 다가오셔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 시대에 주시는 징표를 제대로 읽어 깨닫고 믿음의 지표로 삼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 당신께서 초대하신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목도하고 있는 몇 가지 사회 현안 가운데서도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76만5000볼트에 이르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는 밀양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교회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시시비비를 가리기 쉽지 않은 사안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본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밀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을 단순히 지역 님비현상으로만 바라보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밀양 문제의 이면을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본다면 잘못된 경제관과 왜곡된 경제논리가 깊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애초에 밀양에서 문제가 일어나게 된 발단은 정부의 잘못된 에너지정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가기 위해서는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이 필수불가결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70년대에 세운 에너지정책의 골간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바람에 적잖은 문제에 봉착해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정부는 산업 발전을 독려하기 위해 기업의 전기세를 아주 낮게 책정해 공급하는 정책을 폅니다. 우리나라 전체 전기 수요의 80%가 넘는 산업용 전기를 쓰는 기업들은 이러한 정책에 편승해 굳이 전기료를 절감하며 공장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경제 발전과 함께 에너지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또한 효율만을 따지다 보니 안정성이나 미래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핵발전 중심의 에너지정책을 고수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밀양 송전탑 문제도 결국 대도시의 에너지 수요를 위해 지역의 가난한 이들의 희생을 토대로 추진되는 국가 에너지 시스템의 문제를 집약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블랙아웃 위험이 발생할 때마다 도처에서 강조하고 국민이라면 당연히 절감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는 가정용 전기가 실제 전체 전기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대에 불과합니다.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와 이를 맞추기 위한 에너지 공급의 악순환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돌아보고 헤아릴 줄 알 때 우리는 경제적, 시간적 손실에만 눈과 귀가 쏠리게 해 무엇이 하느님의 참뜻인지 생각지 못하게 만드는 불의한 현실과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1월 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6) 에너지 문제


‘무심한’ 에너지 정책 … 생태계 파괴


늘 주님을 향해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일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단지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경남 밀양에서 76만5000볼트에 이르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통해 우리는 에너지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주님께서 우리 시대에 주시는 말씀(징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별 신경 안 쓰고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는 ‘산업의 쌀’이라고도 불립니다. ‘쌀’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원이듯이 에너지는 인류에게 다양한 효용을 제공하는 각종 산업을 일으키고 경제활동이 이뤄지도록 하는데 ‘쌀’과 같은 핵심적 역할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는 인류가 개발해낸 모든 산업을 가능하게 하고 경제의 융성과 퇴락을 좌우하는, 한마디로 경제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에너지를 둘러싼 정책은 ‘국책사업’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정부의 책임 아래 진행될 만큼 중요성을 띠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이러한 중요성에 비해 에너지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신중하게 돌아보길 요청하고 있는 듯 합니다. 대부분의 화석 에너지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하면 무신경하다고 할 정도로 에너지 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너무나 당연히 우리 주위에 있고 별 불편 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무관심 속에 에너지를 둘러싼 경제활동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돌이킬 수 없는 다양한 문제를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인간이 무수한 주님의 창조물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생태계 파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논란들도 결국은 인간의 편의와 효율만을 강조하는 정책이 빚어내고 있는 문제입니다. 알려진 대로 밀양 송전탑 건설은 부산 기장군 신고리에 계속 증설되고 있는 핵발전소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핵발전 단지인 고리·신고리 핵발전소 단지에는 기존의 고리 1~4호기와 신고리 1~2호기에 이어 향후 신고리 3~8호기를 더 세울 예정입니다. 한 장소에 무려 12기의 핵발전소가 들어서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곳에서 생산된 전기는 밀양 주민들과는 무관하게 경남 창녕군 북경남 변전소까지 송전된 후 청도군을 지나 대구로 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에너지 문제는 국민 모두의 생활과 밀접한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핵발전소 건설을 둘러싼 문제는 현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안전과 생명을 위험에 부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밀양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 드러난 문제의 실체는 투명한 사회적 공론화 과정 없이 소수의 전문가들과 관료들의 손에 의해 일방적으로 에너지 정책이 수립되고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농촌의 70. 80대 노인들의 시름과 몸부림이 우리 시대에 던져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일지 돌아보게 합니다. 주님은 과연 누구와 함께 계실까요.


[가톨릭신문, 2013년 11월 1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7) 효율에만 몰두하는 ‘경제현실’


'사람' 위한 경제 우선돼야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인류공동체가 오랜 세월 함께 만들어온 경제라는 제도와 흐름의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경제라는 인간의 발명품은 때로는 역사를 움직여 나가는 수레바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안겨주는 굴레가 되기도 합니다. 가까이는 20세기에 겪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비롯해 현재도 무수히 벌어지는 전쟁과 살육들의 이면에는 어김없이 경제를 둘러싼 문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들을 통해 인간의 경제활동이 인류공동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다양한 모습의 선익을 안겨줄 뿐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도구이며, 하느님 나라를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거룩한 행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효용을 주는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고 분배하고 소비하는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경제활동은, 하느님 모상대로 지어져 당신의 창조성을 선물로 받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지상의 나그네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뗄래야 뗄 수 없는 경제활동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올바로 실현되는지, 나아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경제활동의 모습과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에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인간이 영위하는 경제활동에는 스스로의 선택을 돌아보며 행위에 대한 선악(善惡)과 진위(眞僞)를 식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잣대를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인 사회교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 곳곳에 깊숙이 파고든 경제활동들의 궤적들을 좇다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노동유연화정책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비정규직 문제입니다. 지난 1997년 IMF사태로 외환위기를 겪은 후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해나가기 위한 방안으로 도입된 노동유연화정책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 많은 아픔을 낳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굳이 여러 통계를 들지 않더라도 비정규직으로 인한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사안입니다.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 대형할인마트 등에서 일하는 이들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채워진 지 이미 오래전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과반수를 넘어선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감내해내야 하는 노동 환경과 조건입니다.


통계청이 지난 10월 24일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정규직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254만6000원으로 1년간 8만6000원(3.5%) 인상된데 비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142만8000원으로 3만5000원(2.5%) 늘어나는데 그쳤습니다. 특히 성별과 연령, 교육수준, 근속기간, 직업, 산업 등 모든 조건이 동일할 때, 달리 말해 같은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신분이 나뉠 때 임금 격차는 11.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눔’ 대신 ‘효율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위한 경제가 아니라, 경제를 위한 사람에 중점을 두는 한 서민들과 소외계층의 아픔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가 영육간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기를 바라셨던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경제활동의 불균형과 비인간화를 극복하는 노력과 실천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1월 1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8) 가난한 이들의 눈물


‘국책사업’ 누구를 위한 것인가


주님의 자녀로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온 말 가운데 하나가 시대의 징표를 잘 읽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는 우리가 일상에서 관심을 기울이거나 즐겨 듣는 뉴스 가운데 하나인 일기예보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날씨에 따라서 우리의 일상생활이 다양한 변화를 겪듯이 시대의 징표에 따라 무수한 신앙적 결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티나 땅의 동남쪽에는 거대한 사막이 자리하고 있었고, 서쪽에는 지중해가 있었습니다. 지중해에서 발달된 비구름이 몰려오면 팔레스티나 땅에는 비가 내리고, 사막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팔레스티나 땅은 이내 달아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이 보여주는 자연의 징표가 사람에게 중요한 것처럼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서 드러나는 흐름, 즉 시대의 징표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에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어떤 사랑을 행해야 할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징표는 지상의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하느님 백성들이 자신이 속한 세상을 직시하고 하느님 말씀에 근거하여 시대적 상황을 해석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신앙의 눈으로 각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 등을 통찰하여 그 내면에 담겨진 하느님의 현존과 뜻을 파악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시대의 징표는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두기 위해 세상에 다가서려는 그리스도인의 인식과 태도를 결정하는 신앙 행위의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혼란을 겪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현상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국가 단위 경제활동에 대한 판단입니다. 지난 세월 국책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이뤄진 다양한 거시경제 활동들에 대해 그리스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행동하지 못함으로 인해 그 시대를 살아간 무수한 사람과 생명들에게 아픔을 안겨준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단적인 사례가 지난 정권 시절 진행된 4대강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에도 핵발전소 건설을 비롯해 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 크고 작은 일들이 버젓이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불의가 행해지고 있음에도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복음적 시각을 갖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현실과는 너무 멀리 있는듯합니다.


엄청난 예산과 자원이 투입되는 국책사업일수록 특별히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존엄성을 침해해 고통을 안겨주기 쉽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겪는 아픔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자유’의 제한입니다. 4대강사업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로 선택의 여지도 없이 반강제적으로 삶터에서 쫓겨나는 이들이나,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조상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야 할 처지에 있는 밀양 초고압송전탑 건설지의 70~80대 어르신들이 바로 그런 이들입니다. 교회는 자유를 ‘모든 인간이 지닌 최상의 존엄성의 표징’(「간추린 사회교리」 199항)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하찮게 여기거나 의식적으로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귀를 막아버린 적은 없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고 계심을 깨닫고 자신이 처한 처지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 노력할 때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로 성큼 다가설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1월 2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9) 국책사업과 그리스도인의 눈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자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르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고백하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공허한 고백이 적잖게 넘쳐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누가 주님의 참다운 자녀인지 구별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성경에 능통하고 하늘의 징표에도 민감했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이론과 설득은 큰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들의 위장전술에 현혹되어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은 가까이서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경험하고 직접 그분을 대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은 외면한 채 세상을 새롭게 하는 깨달음에는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로 대변되는 사이비들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 인간 삶의 현장인 세상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나 혹세무민과 곡학아세가 횡행하는 때일수록 주님이 안겨주시는 십자가의 무게는 더 버거워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참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사이비들이 가장 격하게 부딪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경제활동의 장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제현상들 앞에서 그간 우리 시대가 던져주는 징표를 가볍게 흘려보지는 않았는지 뼈아픈 성찰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국가’ ‘민족’ ‘충성’이라는 담론들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떠올려본 적이 얼마나 되는지 반성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멀리 되돌아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민족’이나 ‘국가’ ‘충’ 등을 절대적인 덕목으로 받아들이는데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래서 ‘국책사업’이란 이름을 내걸고 이뤄지는 일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규범과 척도를 멀리 던져둔 채 정부의 도덕적 책임과 의무의 정당성을 따지는 일을 불경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책사업’이란 이름 앞에서는 하느님과 교회정신, 사회적 가르침을 벗어던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가까운 예로 지난 정부에서 이뤄진 4대강사업을 추진한 주체 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들의 삶이나 선택에서 하느님을 어떤 자리에 모시고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든, 공공의 개입은 공평하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경제적 주도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거스르지 않도록 개인의 활동을 대신하지 않아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54항)고 가르칩니다. 아무리 국책사업이라도 공동선과 공공질서가 정한 한계 안에서 모든 경우에 책임 있는 태도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자유는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된 것이라도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은 무엇이든 거부할 수 있는 능력’(「간추린 사회교리」 200항)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그리스도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2월 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0) 인간의 존엄성과 경제정의


불의 · 부패 앞에 정의를 펼쳐라


우리는 신앙의 해를 보내며 특별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강조한 ‘시대의 징표’를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공의회를 소집하는 교황 헌장 ‘인간의 구원(Humanae Salutis, 1961.12.25.)’에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면서, 비록 인류의 앞날을 암울하게 하는 요소들이 세상에 산재해 있지만 교회와 인류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긍정적인 징표들을 발견하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시작하는 개막 연설에서도, 불길한 사건들로 인해 고조된 세상의 종말 분위기와 교회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섭리는 현 역사의 순간에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을 지니고 난관을 헤쳐가라는 복음적 낙관론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나아가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 4. 11.)’를 통해 ▲ 참된 사회화 ▲ 노동자 계층의 향상 ▲ 여성들의 공적 활동 진출 등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지표들을 전형적인 시대의 징표로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메시아적인 징표를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오늘날 시대의 흐름과 사조도 그리스도인이 올바른 신앙의 눈을 통해 보지 못한다면 그 핵심과 본질을 상실한 채 방황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왜냐면 동일한 시대의 징표를 바라보면서도 신앙의 깊이나 감수성 등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0여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해방을 알리는 구원의 징표이자 동시에 반대 받는 표적이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말해 줍니다.


우리는 강력하고 복잡한 영향을 미치는 경제제일주의와 그 사상 한복판에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초대받은 신앙인들입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신앙은 이러한 경제가 생산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의하여,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가 혹은 해를 끼치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미국 주교회의 사목교서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정의를’(1986) 1항)고 가르칩니다.


자본주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미국 주교회의가 내놓은 메시지는 ‘모든 경제적 결정과 기구들은 반드시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느냐 혹은 격하시키느냐 여부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한다’(위 문헌 13항)면서 경제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경제에 봉사하거나 굴종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어떤가요. 우리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수많은 경제활동 속에서 처절한 몸부림과 아우성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믿는 것과 실제 생활, 그리고 보다 큰 공동체에서 실천하는 것을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이 실제 생활의 현장이야말로 주님이 바라시는 경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기의 현세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바로 신앙을 통하여 각자 부름 받은 그 소명에 따라 현세 의무를 더더욱 이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43항)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개인과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불의와 부패 앞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 주님의 정의를 펼칠 것을 절실하고 긴급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2월 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1) 노동의 질과 인간의 존엄성


‘품위’ 있는 노동현실을 위하여


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이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지식과 기술들이 쏟아져 나오고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기발한 상품과 정보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직장에서는 효율을 내세운 사업·구조 조정과 이에 따른 인원 감축, 부단한 기술혁신과 적응에 대한 요구들이 끝간데 없이 폭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낯선 단어가 된 지 오래입니다. ‘아르바이트’, ‘임시직’, ‘기간제’,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오히려 우리 삶을 대변해주기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무한 경쟁’으로 표상되는 우리 시대는 끊임없이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이는 삶의 질,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마저 훼손시키는 악순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자리를 사고파는 노동시장에서 고용주들이 유연성과 효율성만을 강조하다 보니 노동의 질은 계속 추락하기만 하는 현실입니다. 이는 경제성장률과 자살률과의 깊은 상관관계를 통해서도 쉽게 드러납니다.


실제 우리나라 사회경제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40대 연령층이 자살률이 가장 높은 것은 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회학자들을 비롯한 경제학자, 의학자 등 각계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실의 원인으로 경제적 요인을 꼽기도 하지만, 이로 인해 가족기능이나 정서적·사회적 안전망과 보호막이 약화되어 노동과정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시각이 적지 않습니다.


최근 직장인 6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33%가 업무과다, 조직 부적응 등 직업성 스트레스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것을 고려한 적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또 3명 중 1명은 심인성(心因性) 질환을 경험하고 있고 가까운 미래에 신체적, 정신적 소진(burn out)이 올 것이라고 응답했습니다.


누구나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스트레스가 직장에서나 가정 등에서 적절히 치유되지 않으면 몸과 마음에 부정적이고 병리적 변화가 생깁니다. 이러한 변화는 불안감, 긴장감, 우울증, 집중력 저하 등을 불러일으켜 개인뿐 아니라, 연쇄적으로 가정, 직장과 사회 공동체의 ‘삶의 질’까지 떨어뜨립니다.


노동이 인간에게 좋은 것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며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기완성을 이뤄 더욱더 사람냄새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비정규직을 둘러싼 현실은 단순히 차별적인 저임금과 심각한 고용불안 등의 문제만으로 그치지 않고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의 질을 뿌리째 뒤흔들며 결국 인간 존엄성 훼손으로 이어진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다시 사회 전반으로 빈곤을 확대시키고 양극화를 구조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해 심각한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이어집니다.


교회는 “노동의 보수는 각자의 임무와 생산성은 물론 노동 조건과 공동선을 고려하여 본인과 그 가족의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도록 제공되어야 한다”(사목헌장 67항)고 가르칩니다. ‘품위’와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노동 현실에 대해 같이 아파하고 나누는 마음을 가질 때, 하느님나라를 세우는 발걸음을 훨씬 가볍게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3년 12월 1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2) 효율과 인간의 존엄성


‘효율성’이 인간 소외 현상 부추겨


어제오늘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무한 속도경쟁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효율’이 모든 것을 대체하고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힘을 지닌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와 효율은 동일한 가치를 지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온갖 좋은 말로 포장된 ‘효율’이라는 물신(物神)과 자주 맞닥뜨리게 됩니다. 고효율, 에너지 효율, 열효율, 냉난방효율, 공부효율…. 효율이 높은 것만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인 양 받아들이게 만드는 현란한 광고와 그럴듯한 포장과 설명에 압도당합니다. 이러한 문화에 젖어 익숙해져버린 이들에게 낮은 효율은 나쁜 것, 나아가 ‘악’으로까지 인식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경제활동 영역에서 더욱 심각하게 드러납니다. 일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지닌 장애인들이나 노인들이 경제활동에서 겪는 아픔과 고통은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근래에는 ‘잉여인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효율성 차원에서만 인간의 가치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이 일상화되는 풍토에 젖어들고 있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잉여인간’이라는 말은 나머지란 뜻의 ‘잉여’에 ‘인간’이 붙은 단어로 ‘남아도는 인간, 쓸모없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특히 열심히 공부해 ‘스펙(경력)’은 웬만큼 쌓았지만, 일할 데가 없어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인터넷을 뒤져보는 게 전부인 젊은이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어느 사회학자가 명명한 ‘88만원 세대’(저임금 비정규직이 일반화된 시기에 평균 월급 88만원의 덫에서 벗어나기 힘든 젊은이들)와 얼핏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잉여인간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붙인 자신을 비웃는 별칭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는 소외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잉여인간’은 순전히 경제적 관점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직장은 물론이고 어느 사회나 공동체에서건 잉여인간으로 취급받는 것은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실직(失職)은 고사하고 직장에 취직해 일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젊은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닌 큰 부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거룩함에 토대를 두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경제윤리관은 ‘경제생활은 개인의 인격적 존엄성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공동체의 연대감을 받쳐줄 수 있어야 한다’(미국 주교회의 사목교서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정의를’(1986) 28항)고 가르칩니다.


과거에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잉여가 됐다면 오늘날에는 일할 의지와 무관하게 매년 수십만 명의 잉여인간이 세상에 나오고 있으니, 분명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은 아닐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사태의 심각성을 짐짓 모른 체하고, 주류 언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사실조차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관심은 우리 스스로 인간을 쓸모있는 부류와 쓸모없는 부류로 나누는 죽음의 문화에 젖어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에 즉각 응전할 수 있도록 늘 깨어있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2월 2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3) 인간적인 모습의 고용과 정의


불완전 고용의 한계와 부정적 영향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다양한 모습의 가난이 존재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가 경험하고 있는 가난의 현실 가운데 하나가 ‘계약직’, ‘비정규직’ 등으로 불리는 기간제 근로자의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기간제 근로자 가운데 계약기간 2년이 지나 정규직으로 신분이 바뀌는 비율은 10명 중 1명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지난 2007년 7월부터 시행된 이른바 ‘기간제 보호법’(사용기간 2년 이상을 계속 근로하는 노동자를 정규직 또는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노동법)에 의해 무기계약직으로 간주돼 고용이 보호되는 근로자 비율은 절반 수준이었습니다.


고용노동부가 2010년 4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기간제 근로자 2만 명을 표본으로 노동이동과 근로조건 변화 등을 파악한 ‘고용형태별 근로자 패널 9차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기간제 근로자 120만8000명(추정치) 중 명시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했거나 정규직 일자리로 옮긴 사람은 18만3000명(15.1%), 무기계약 간주자는 38만7000명(32%)으로 집계됐습니다. 무기계약 간주자는 같은 사업체에서 2년 이상 일해 기간제법에 따라 정규직에 준하는 고용 보호를 받는 근로자를 말합니다.


같은 사업체에서 2년 이상 근속한 기간제 근로자는 총 53만7000명이었는데, 이 중 명시적 정규직으로 전환한 수는 7만5000명(13.9%)로 나타났습니다. 무기계약 간주자 38만7000명을 제외하면 2년 넘게 한 직장에서 일했는데도 정규직 또는 무기계약 간주로 신분이 바뀌지 않은 근로자는 7만4000명(13.8%)에 이릅니다.


이러한 기간제 근로자 중에는 정규 교원이 파견이나 연수나 휴가 등으로 1개월 이상 직무에 종사할 수 없어 후임자 보충이 불가피한 경우에 임시적으로 채용하는 기간제 교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간제 교사 수(유치원 포함)는 지난 2009년 1만7429명에서 2010년 2만6590명, 2011년 3만8252명, 2012년 4만1616명 등으로 매년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또, 전국 17개 시·도 교육청이 제출한 자료를 보면 중·고등학교 정규 교사는 42%, 기간제교사는 50%가 담임을 맡고 있어 오히려 기간제교사가 정규 교사보다 담임을 맡는 비율이 더 높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사립 중등학교 기간제 교사 비율이 공립보다 무려 3배나 많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기간제 교사들이 느끼는 신분상의 불안과 그에 따른 여파가 학교 교육 현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기간제 교사들은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소신 있게 학생들을 지도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 퇴직금은 물론 방학 중에는 급료를 받을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을 뿐 아니라, 교원 연수 등의 혜택에서도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현실은 교사들의 의욕 감퇴로 이어지고 결국 교육의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습니다.


교회는 “불완전 고용의 상태 혹은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고용되었을 때 이러한 경제조건은 포괄적인 정의의 요구에 못 미치는 것”(미국 주교회의 사목교서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정의를’(1986) 73항)이라고 가르칩니다.


기형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노동 현실을 극복하고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첫걸음은 가난,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일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1월 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4) 경제활동의 최종 목적은 ‘인간’


일자리 없이는 인간 존엄도 없습니다


“일자리가 없으면 인간의 존엄성도 없어지게 됩니다.”


경제학자나 노동운동가의 말이 아닙니다. 지난 2013년 9월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섬 사르데냐를 사목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인해 실업 등 일자리가 불안정한 상태에 처해있는 수천 명의 노동자와 지역주민들을 격려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켜나가는 동력을 제공하는 경제활동의 최종 목표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시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존중되지 않는 경제 행위, 또 그러한 상태를 묵인하는 사회처럼 절망적이고 비그리스도적인 세상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행하는 어떠한 경제활동이 성장과 효율을 가져다준다 하더라도, 그 성장과 효율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인간이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간추린 사회교리’ 331항)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신성한 의무로 여기는 교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한순간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칙은 가난한 이들, 소외당하는 이들, 어느 모로든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 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182항)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을 더 옥죌 만한 얘기가 들리는 것 같아 염려스럽습니다. 바로 의료분야를 비롯해 철도ㆍ전력ㆍ물 등의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겠다는 소식입니다. 경쟁체제를 도입해 경제를 선진화하겠다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돼 있지만 실상은 공공재(公共財)를 전적으로 시장에 맡기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를 다루는 분야를 공공부문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재화가 어떠한 특정인은 소비하고, 어떤 사람은 소비하지 않아도 되는 재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프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고,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철도 등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며,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전기를 쓰지 않을 수 없고, 생명을 유지하려면 물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공공부문에는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공공분야를 일반적인 시장에서 거래하는 상품과 똑같이 취급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될 수밖에 없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경제활동의 궁극적 목적인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구매능력 유무가 절대적 가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은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처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발표한 투자 활성화 대책은 ▲ 의료기관 자회사를 통한 영리활동 허용 ▲ 외국인환자 병상비율 규제 완화 ▲ 법인 약국 허용 등 경기 부양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 내용은 의료민영화 정책으로 방향을 잡는 일입니다. 정부의 구상대로 되면 의료산업의 효율은 높아지게 될지 모르지만 대다수 서민들은 지금보다 몇 배나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의료서비스를 받아야 하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혼자서 앓아야 하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 내 파산의 60%가 과도한 의료비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효율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의료민영화 정책은 가난한 서민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위이며, 이는 결코 하느님이 바라시는 세상의 모습은 아닙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1월 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5) 인간이 사라진 경제활동, 민영화


“민영화로 가장 이득 보는 사람은 누구?”


오늘날과 같은 복잡다단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성경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거침없이 당신의 깊은 뜻과 참 생명의 길을 열어보여 주시는 예수님의 지혜에 탄복하게 되는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지혜는 인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바탕으로 세상 만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담고 있는 것이기에 누구라도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도무지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힘든 때일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라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혜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모든 지혜의 샘이자 지식의 뿌리인 그리스도의 사랑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왜곡되게 나타나 진리를 허물어뜨리는 상황마저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현실들 속에 이러한 불의가 똬리를 틀고 혼란에 빠져있는 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사상을 비롯한 모든 도덕적 가치와 규범, 진정한 인간애는 사라지고 뼈대만 남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단적인 예가 철도 등 기간시설과 의료 등 공공재까지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려는 민영화 정책입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형이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민영화’는 때때로 이름을 바꿔가면서 더욱더 혼란을 부추깁니다. ‘공기업 선진화’나 ‘경쟁체제 도입’ ‘OO산업 발전방안’ ’공기업 개혁방안’ 등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조리한 문제 상황을 단 한 번에 개선해 효율을 높임으로써 경제나 살림살이에 결정적 도움이 될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고 선진화하기 위해 경쟁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얻는 경제적 효율성에 대해, 관계된 이들뿐만 아니라 시민의 입장에서도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일거에 정리해줄 수 있는 물음이 있습니다. “민영화를 통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근래 대자보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던져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은 기간산업을 비롯한 공공부문의 민영화가 국민 전체의 이익이 아닌, 거대자본과 관료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계산된 움직임 내지 시도’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에 적잖은 울림과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한동안 민영화 논란의 중심에 있던 철도 자회사 설립을 전제로 한 수서발 KTX 분할에 대해 정부는 국민연금기금을 59% 투입하기 때문에 민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상식의 잣대를 놓고 생각해보면, 국민연금기금을 어떠한 투자처에 넣는다는 것은 시장에서의 수익을 추구하는 시장펀드(자본)가 참여하는 것이나 조금도 다름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철도산업 민영화를 통해 국민연금기금이 거두게 될 수익은 반대로 국민들에게는 ‘민영화 비용’으로 고스란히 전가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민영화 방식은 KTX 수서발 철도 자회사 설립과 같이 ▲ 자회사 형식을 통한 시장자본 참여 방식을 비롯해 ▲ 민간위탁 ▲ 지하철 9호선 식 민간투자사업 등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인간이 아닌 자본 위주의 정책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분야에서건 문제가 없는 곳이 없겠지만, 기능한 한 많은 이들의 지혜를 모으고 마음을 한데 합칠 때,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1월 1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6) 경제정의와 사회 참여


형제애 결여가 사회 문제 야기


근래 들어 그 어느 때보다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높은 현실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목소리가 높은 곳 가운데 하나가 경제활동 영역이라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영위하는 경제 행위가 하느님의 뜻과 뭇 대중의 선익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불공정과 불의를 싫어하시는 분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주 너희 하느님께서 역겨워하신다”(신명 26,16)는 가르침은 경제를 포함한 인간 삶의 모든 부분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관심이 높아진 경제정의와 관련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교회의 사회 참여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줍니다. 교황은 지난해 11월에 발표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교회에게,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은 사회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 ”라고 강조하고 “노숙인이 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건 뉴스가 안 되지만, 주식시장이 단 2포인트라도 떨어지면 뉴스가 되는 게 말이 되느냐”라며 불의한 현실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교황은 또 배제와 불평등의 사회를 비판하며 “오늘날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으며,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착취하고 있다”면서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은 “더 이상 사회의 밑바닥이나 변방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일원도 아니며, 버려진 잉여가 되었다”고 아파합니다.


경제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사회 현실에 대한 교황의 날카로운 분석과 지적은 자본주의의 첨단을 걷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도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성찰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연설에서 소득 불평등 문제를 언급하는 가운데 「복음의 기쁨」을 인용해 경제정의 실현을 위한 연대와 공동 노력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또,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폐해를 강조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불편하게 받아들여 온 공화당마저도 최근 들어서는 교황의 권고를 적극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폴 라이언 미 하원 예산위원장은 “교황이 빈곤과의 싸움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며 경제정의를 외치는 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교황은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을 맞아 발표한 「형제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담화에서도 “그리스도인이 영리에 대한 욕망이나 권력에의 갈증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국가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격차를 좁히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렇듯 경제정의를 둘러싼 교회 안팎의 흐름은 한국교회에도 새로운 모색을 촉구하고 있는 듯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형제애의 결여에서 빈곤을 비롯한 많은 사회 문제의 뿌리를 찾고 형제적 관계의 재발견과 서로를 위한 봉사의 자세를 문제 해결의 실마리로 제시한 것은 눈여겨 볼 부분입니다. 왜냐면 실마리를 찾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회적 관심과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이러한 사회적 관심과 관련해 “만약 사회와 국가의 의로운 질서가 정치의 주요 과업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싸움에 변두리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복음의 기쁨」 183항)며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1월 1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7) 경제정의와 경제민주화


잃은 양 한 마리 찾아 떠나는 마음


한때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여와 야를 불문하고,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어 모두가 시대정신(Zeitgeist)이나 되는 양 경제민주화를 외친 게 엊그제 일 같은데 지금은 그런 목소리를 찾기도 힘든 실정입니다.


하지만 최근 한 대학생이 붙인 대자보에서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은 여전히 경제민주화가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으로 유효함을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각종 경제 수치가 올라가고 있음에도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되고 세상살이의 경쟁은 격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중돼 삶의 질은 계속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중산층은 사라지고 소수의 부유층과 절대다수의 빈곤층으로 사회가 갈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만들고 또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이라면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으로 떠오르게 된 연유를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징표라고 할 수 있는 경제민주화는, 인간이 배제된 채 경제적 수치와 성장만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해온 우리 시대의 그림자인 경제생태계의 불공정을 하느님의 질서로 되돌리기 위한 시금석이자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장 실패의 원인을 함께 찾고 한데 힘을 모아 극복해나가기 위한 공존· 공생· 상생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사상 최대의 빈부격차, 1000조 원에 이르는 가계부채, 비정규직 양산과 청년실업, 전세대란, 과중한 사교육비와 출산율 저하, 경쟁 위주의 교육 시장화, 유통재벌의 골목시장 침탈, 부문간·지역간의 발전격차 등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불공정이 난무하는 경제 현실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면 건전한 사회 발전을 위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미래의 지속가능한 발전은 더욱 담보하기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 경제민주화는 지속가능한 건강한 사회를 위한 선택이자 투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는 하느님의 공정이 실현되는 경제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과업입니다. 경제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하고 완전하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공정(公正)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 1-16)에서 볼 수 있듯 하느님의 공정은 뒤처지고 소외된 이들마저 돌아보고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더 걱정하며 찾으시는 것이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계산법은 우리의 생각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분의 계산법은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길, 줌으로써 얻는 길, 낮아짐으로써 높아지는 길, 모욕을 당하고 손해를 봄으로써 영광을 얻는 길, 죽음으로써 살게 되는 길입니다.


주님에게 중요한 것은 일의 능률이나 세상의 잣대로 가늠하는 효율이 아니라, 당신 자신께서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사람 그 자체입니다. 가장이 받은 품삯으로 사들고 갈 빵 한 조각을 종일 기다리며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있을 가족들에게 주님의 마음은 가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일상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용기있게 주님의 공정을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1월 2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8) 경제와 인간 존엄성 (1)


주님 가르침 따라 경제활동 기준 찾길


세상의 복음화를 통해 모든 인간의 행복과 복지에 앞장서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는 교회가, 인간이 영위하는 경제활동이 주님의 정의에 따라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고유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인간을 온갖 불행과 속박에서 해방하는 일은 경제적 여건에 의해 큰 영향을 받고 있기에, 사회 경제활동을 통하여 교회가 부정과 불의에 억눌린 이들을 보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회복음화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정상적 경제활동을 바탕으로 인간 사회에서 빚어지는 부정과 불의는 더 큰 악을 낳고 키우는 온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교회는 늘 깨어있는 자세로 모든 사태를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경제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생활 영역 안에서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고, 이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한 걸음씩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의 양보할 수 없는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소명일 것입니다.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다단한 경제활동의 윤리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오래전부터 교회가 강조해오고 있듯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경제활동 영역 안에서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이 보장받고 있는지 그 여부를 평가해보면 그 경제 체제나 시스템이 하느님의 정의에 부합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의 경제윤리관에 따르면, 인간의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의 목적은 자기완성과 성취, 이웃에 대한 기여와 나눔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정신에 따라 경제활동의 주체는 언제나 인간이며, 결코 인간이 경제와 노동에 예속되거나 기업과 생산활동의 한 요소로 전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경제 발전은 각종 경제 수치를 통해 드러나는 양적 성장보다는 개개인이 인간다운 품위와 최소한의 가정경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인간의 기본권을 실현하는 척도와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모든 경제활동은 인간의 존엄성이 구김살 없이 드러나고,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바르게 신장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우리 개인에게 넣어주신 재능과 창의력이 거침없이 발아하고 꽃을 피워 주님 창조사업의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속에서 경제활동을 통해 하느님 나라 사업에 기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각자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나 조건들 속에서 끊임없이 주님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경제활동의 정도(正道)와 기준을 찾고 또 그것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자들을 비롯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기업 및 국민경제의 정책에 대해 정당한 의견을 제시하고, 교회의 정신과 행동강령에 따라 힘을 모으는 일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날 신앙인을 자처하면서 하느님과 교회의 가르침과 방향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경분리(政經分離)라는 도식을 내세워 폐쇄적인 사고에 갇혀있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는 세상의 불의를 키우고 다양한 아픔과 불행을 생성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재화의 참 주인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시고 우리는 일시적으로 그 관리를 위임받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세상의 경제구조와 활동을 냉철하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평화신문, 2014년 2월 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9) 경제와 인간 존엄성 (2)


공동선 지향하는 윤리적 경제 개혁 절실


사람들은 보통 새로운 것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종종 그러한 것에서 의지할 만한 면을 찾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지난 과거에 대한 아픔과 현재에 대한 실망이 클수록 이러한 경향은 강해지기 마련입니다.


자유주의와 수정자본주의를 거쳐 1970년대부터 부각하기 시작해 20세기 말을 지배한 ‘신자유주의’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장밋빛 희망을 주는 듯했으나, 오래 가지 않아 결국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경제활동을 비롯해 각종 사회활동의 목적이 되어야 할 인간과 그 품위는 사라지고, 인간성은 피폐해져 하느님을 닮은 모상에서 멀어져갔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는 삶의 토대를 이루는 경제활동에서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적 모습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려의 목소리를 표명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정의로운 식별력과 태도를 가질 것을 촉구해오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유익한 공동선을 지향한 윤리적인 경제 개혁이 우리 시대의 긴박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개혁’ ‘혁신’ 등의 말로 ‘새로움’을 표방하는 어떠한 정책이나 시스템이 작동한다고 해도 그 안에서 인간성이 상실되어 위기를 불러온다면 하느님의 정의는 사라지고, 결국 인간의 기본권이 유린되고 만다는 사실을 역사는 극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정부가 국가기간산업인 철도 부문에 경쟁체제를 도입한데 이어 영리병원의 설립을 허용하는 등 의료 민영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식별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런 정책이 민영화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경쟁과 효율을 강조해 공공기관마저 영리기관으로 만들기 위한 민영화 과정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지난 1990년대 이후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변되는 영·미식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모델로 등극하면서 진행된 민영화정책이 낳은 많은 부작용들은 지난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와 동부 지역의 대규모 정전사태, 일본과 영국의 철도 사고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2010년 폭설로 영국의 관문 히드로공항이 사흘 동안 마비되었을 때 영국 공항을 재국유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2012년, 과거 IMF 위기를 맞아 외국 자본에게 팔아넘겼던 석유회사 YPF를 재국유화한 바 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 초 국가개혁의 이름하에 과감한 민영화를 추진해 석유를 포함한 에너지 산업, 전화와 가스, 심지어 도로 보수까지 가능한 모든 것을 민영화하였습니다. 국가채무를 해소하고 효율성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실제로는 막대한 국부가 해외로 유출되고 경제주권마저 상실해 다국적기업에 의해 경제정책이 실종사태에 이르는 뼈아픈 상황을 맞기도 했습니다.


물론 공기업의 방만함을 극복하기 위해 경쟁이 필요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장기적인 인프라, 공공가치의 유지, 국민의 생명 등과 직결된 분야의 민영화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효율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정신에 따라 인간 존엄성이 존중받는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불공정한 경제정책 등으로 인해 희생되는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그리스도교적인 경제 구조를 확산시키는 예방적 활동이 절실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늘 깨어있는 자세가 그리스도인과 정의의 삶을 펼치는 선의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2월 1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0) 경제활동과 여성


출산 · 육아로 단절되는 여성 경제활동


사람은 노동을 통해 자아를 성취하고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11월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는 의미있는 자료가 올라왔습니다.


2013년도 3분기 20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62.2%로 20대 남성(61.7%)보다 높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 수치는 지난 2012년 2분기 64.9%로 사상 처음 남성(63.4%)을 추월한 이래 6분기 연속 20대 남성을 앞선 현실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30대 이상부터 남성의 경제활동 참가율과 고용률은 90%대로 급격히 높아지는 반면 여성은 오히려 노동시장 참여율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3분기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30대 나이에서는 56.2%로 하락하고 40대와 50대에선 각각 65.1%와 60.1%로 상승하지만, 같은 나이대 남성의 경제활동참가율(89.2~93.8%)보다는 30%포인트 가량 낮은 수준을 보입니다.


이렇게 ‘M자’ 곡선이 나타나는 것은 결국 30대에 출산과 육아라는 장벽을 넘지 못하고 경제활동이 단절되는 여성이 적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경력단절여성(197만8000명)이 직장(일)을 그만둔 사유는 결혼(46.9%), 육아(24.9%), 임신·출산(24.2%)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 남성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격차는 2012년 생산가능인구(15~64세) 기준 22.4%포인트로 34개 회원국 중 4위에 올라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격차가 큰 국가는 터키(43.5%포인트)와 멕시코(35.2%포인트), 칠레(23.4%포인트)뿐이었습니다.


여성들이 일단 노동시장에서 이탈하면 재취업을 원하더라도 자녀양육과 병행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 힘든 게 우리 현실입니다. 그나마 어렵게 일자리를 찾더라도 돌아온 여성들을 기다리는 일자리도 비정규직과 같은 힘들고 고된 일이 대부분입니다. 일터를 떠나기 전과 다른 생소한 일을 하다 보니 여성은 여성대로 힘들고 오랜 시간과 역량을 투자한 재능은 사장되고 마는 실정입니다. 이처럼 여성의 경력단절에 따른 손실은 한 경제연구원이 지난해 5월에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1인당 생애 6억300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인 셈입니다.


노동(력)의 가치를 경제적 이익이나 재화로만 따질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러한 현실의 이면에는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들이 놓여 있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 전통적으로 육아는 공동체의 일로 인식이 되어 왔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가까운 예로 우리나라의 전통적 대가족 안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한 가족뿐 아니라, 한 마을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핵가족화가 이러한 아름다운 전통마저 사라지게 만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정부가 1980년대 말에 출산억제 인구정책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산율이 계속 줄어 또 다른 문제들을 낳고 있습니다. 자녀가 없어도 좋다는 젊은 부부 비율이 40%를 넘어선 현실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교회 활동과 성장, 신앙인의 태도와 가치 등을 보여주는 각종 수치들이 하향곡선을 그려온 것 또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뤄나가기 위해서는 경제뿐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널리 확산시켜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2월 2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1) 가난을 바라보는 눈


가난한 이웃이 보이지 않는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한 세대 전으로만 우리 자신들의 기억을 되돌려보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가난한 이들이 우리 주위에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사는 넝마주이에서부터 부랑인, 거리를 떠도는 노숙인과 걸인 등….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이러한 다양한 모습의 가난한 이들도 엄연한 우리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고 골목에서 구슬치기니 딱지치기를 하던 또래가 있었으며 할머니가 무거운 짐이라도 이고 집을 나설 때면 얼른 달려와 받아주던 동네 형이 있었습니다. 잡동사니가 그득한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도 이웃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거들고 싶어 하던 동네 아저씨도 정겨운 모습입니다.


간혹 먹을거리가 떨어진 이들은 동네를 다니면서 동냥을 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찬밥이지만 그들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 게 우리 인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추운 겨울이더라도 누가 굶고 있네, 얼어 죽었네 하는 일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가난한 가운데서도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나눔의 온기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인정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몇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 주위에서 ‘이웃’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먼 친척보다, 아니 사촌보다도 낫다던 이웃은 눈치를 봐야 하는 존재가 된 지 오래고, 때로는 사소한 다툼 때문에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일이 코앞에서 벌어지기도 합니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등 몇 푼의 경제적 이익 때문에 어울려 살아야 할 이웃을 모질게 팽개치는 무정한 세상이 만들어낸 살벌한 풍경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경제윤리관과 인간관이 빚어낸 비극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진 것만으로 사람을 구별하거나 냉대하는 일은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떠돌아다니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적게 가진 사람은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고, ‘잉여인간’으로 낙인찍혀 사회의 ‘짐’, 나아가 공공의 적으로까지 전락하고 마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진 이들이 느끼는 불편함 때문에 눈에 거슬리는 이들이 하나둘 우리 주위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평범한 이들도 어느새 그런 잘못된 사고에 젖어 이웃의 가난과 불편을 애써 외면하며 혐오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가난한 이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장소나 공간, 곧 게토라고 할 수 있는 어둡고 그늘진 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본성이나 유전자가 어느 날 갑자기 변한 것일까요? 언젠가 우리의 이웃이었던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스런 존재나 ‘물건’, 그것도 쓸모없는 ‘잉여물’로 보는 시각은 우리 사회는 물론 교회 안에서도 많은 상처를 남기고 눈물을 자아냅니다.


우리는 IMF 구제금융 사태로 외환위기를 겪은 후 친형제처럼 지내던 이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아픈 기억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이웃들을 소외시켜 내버린 원인제공자가 우리 자신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위에 가난한 이웃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이 그만큼 좋아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2) 의료 민영화 문제점


서민층은 의료 혜택 받지 말라는 것인가?


원격 진료와 의료법인의 영리 자회사 허용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의료 영리화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어 의료 민영화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돈이 세상을 움직이는 듯한 자본주의에 젖어 살다보니 종합병원을 영리기관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종합병원들은 주식회사가 아닌 법인이라는 형태로 운영됩니다. 건강보험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우리나라 의료체계에서는 영리병원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통해 공공보험으로 의료서비스를 받고, 병원은 공공보험을 통해 의료수가를 정하고 수익을 올리는 구조입니다. 이런 의료시스템 때문에 의료행위의 범위와 가격은 공공보험을 통해 통제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리병원은 이러한 공공의료보험보다는 사기업이 운영하는 사설 민영의료보험을 통해 의료행위를 하게 됩니다. 보험회사들은 각종 의료보험 상품을 만들어 제공하고 이러한 의료보험 상품에 가입한 사람들에게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수익을 올리게 됩니다.


보험회사가 운영하는 민영의료보험을 통해 소비자에게 의료행위를 하게 될 경우 의료서비스 가격이 비싸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소비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다양한 의료상품을 만드는 데도 돈이 들지만 영리병원에서 높은 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고가의 의료장비 등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게 되면 의료비도 올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는 민영 의료서비스는 고가의 의료행위로 이어지고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서민층은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의료체계를 갖고 있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첫 번째 공약 가운데 하나가 민영의료보험 중심의 의료체계를 바꾸는 것이었음을 떠올려보면 의료 민영화가 지닌 문제점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단적으로 미국의 치과 진료비를 비롯하여 일반 의료수가는 매우 높으며 저소득층과 소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보험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 체계는 낮은 수준이지만 공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IT 기술을 활용한 원격 의료나 의료법인의 영리 자회사 허용 등으로 의료의 산업화를 추진하면 이 공공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돈 있는 사람들은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높은 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좋을지 모르지만, 가난한 이들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의료서비스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치료비가 없어 병원을 전전하다 목숨을 잃는 가난한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만약 의료 민영화가 전면적으로 시행된다면 공공의료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이로 인해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보듬어 안고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떠올린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될 자세는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것입니다.


의료를 자본의 투자처 정도로 생각하는 관점을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선택일 것입니다. 일자리 창출과 경쟁력 제고라는 경제적 논리에만 매몰돼 몇 푼의 돈에 인간의 생명이 좌우되는 상황에 애써 눈감아 버린다면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맛보고 살아가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3) 가난의 풍경, 자살


‘형제적 사랑’으로 함께 극복해야


한 세대 전으로만 기억의 태엽을 되감아보면 우리 주위에는 마음 놓고 쉬며 놀만한 곳이 지천에 널려있었습니다.


마을 언저리에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너른 공터 한두 개쯤 없는 곳이 없어 수시로 동네를 돌아다니던 가설영화관이나 서커스 극장이 세워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골목 어귀에서는 언제든 고무줄놀이나 딱지치기 하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경제논리를 앞세운 산업화의 파고는 이런 아름다운, 인간다운 풍경을 한순간에 앗아 가버렸습니다. 이제 사람 냄새가 사라진 곳을 돈을 내야만 들어갈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곳들이 대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은 놀 곳, 마음 둘 곳마저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일까요, 가난한 이들 가운데는 유독 우울증이나 조울증, 강박증 등 예전에는 앓지 않던 병리현상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간, 그리고 인간다움이 사라진 세상이 또 다른 비용을 청구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것, 특히 돈에 눈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 눈은 한시도 ‘돈’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돈 중심, 경제력 중심으로 굴러가게 된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더 많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았으면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 그것도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어느 구에서 정상적 활동이 불가능한 두 딸과 근처 놀이공원 식당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넘어져 팔이 다치면서 곤경에 빠진 세 모녀가 함께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공공의료와 복지 전달 체계의 문제점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이러한 사회적 제도적 시스템에 앞서 ‘이웃’이 사라진 우리 시대의 슬픔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모녀를 죽음으로 내몬 주범은 누구일까요. 이웃의 아픔에 눈감아버린 우리 모두가 공범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이러한 비극이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8년째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2013년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 42명의 가여운 영혼들이 삶의 끈을 놓았습니다.


자살과 빈곤이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보건복지부가 1998~2007년 네 차례에 걸쳐 실시한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분석한 ‘건강 불평등 완화를 위한 건강증진 전략 및 사업개발’(2009) 보고서를 보면, 소득 하위 25%에 속하는 남자 가운데 설문 시점부터 과거 1년 사이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는 응답자가 13.0%였습니다. 상위 25% 상류층의 4.0%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치입니다. 실제 자살 사망률에 있어서도 ‘2000년 우리나라 성인 자살자의 인구 사회적 특성’(2005)에 따르면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인구에서는 한 해 10만 명당 7.9명이 스스로 몸을 끊었지만, 초등학교까지만 다닌 사람 가운데서는 10만 명당 121.4명이 자살을 선택해 두 집단의 자살 빈도는 무려 15.3배 차이가 났습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 한다’는 말에는 가난이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게으르고 어리석은 개인의 무능 때문이라는 잘못된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가난한 이를 한 형제로 받아들이고 가난을 함께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1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4) 가난의 풍경, 무관심


‘금전’으로 상처입고 내몰리는 현실


지상의 나그네와 순례자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또 그것을 삶 안에서 실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 생태계와의 관계 등 무수한 관계들이 바로 당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부여해 주신 인간의 소명과 본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관계’의 중요성을 제자들에게 무수히 강조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 관계 안에서 신앙이 자라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진리를 들려주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 5)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관계성에 대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참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주님의 가르침, 즉 기쁜 소식이 선포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곳은 수많은 관계가 형성되는 현장임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이 관계성을 통해 당신을 계시해 오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강생(육화)이라는 아주 직접적이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당신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과 그를 따르는 백성이라는 구약의 주종(主從)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훨씬 더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 삶 안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친구 관계(요한 15,15 참조)가 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낮춤, 그 분이 세상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와 함께 사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그 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인류의 행복과 평화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서로 기꺼이 삶을 나누고 봉사하는 교회의 공동체적 관계를 통해 주님의 나라와 거룩한 뜻은 지상에서 지속되고 확장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과 사랑을 펼쳐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관계의 지평을 넓혀 ‘포도밭의 일꾼’(마태 20,1-16)들처럼 충실히 하느님 나라를 일궈가야 할 소명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앞서도 보았듯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의식은 원래부터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던 본성이 아닙니다. 이러한 면에서 타인을 비롯한 세상에 대한 무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의 몫이 아니며, 주님을 거스르는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태도와 사고일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관계들이 무참히 훼손되고 그 흔적마저 지워 없애려는 움직임이 난무하는 게 오늘날 현실입니다. 잠시만 우리 주위를 찬찬히 돌아보면 무관심 속에 버려진 것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인간다운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관계 속에서 오히려 인간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현실이 비일비재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잘못된 경제적 관계 속에 아픔을 겪는 형제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2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5) 무관심 바탕으로 돈이 지배하는 세상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우리는 무관심이 결코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나 덕목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시작은 물론 끝까지 무수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되고 발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할 수 없듯이 서로 관계가 없는, 무관한 인간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과 이어진 무수한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도, 악마의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악의 세력과 가까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우리 삶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경제적 관계로 인해 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근한 예로 평생 원 없이 쓰고도 남을 만한 재산을 지닌 재벌가의 형제들이 상속 유산 때문에 다투는 모습은 이 세상에서 사탄이 부리는 계교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처럼 잘못된 경제관, 윤리관은 하루아침에 사람을 악마로 바꿔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경제관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인간이 자기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비롯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자기중심주의로 인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음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모든 자유를 허용하셨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였고, 그 결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맙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40일 동안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이야기를 통해서도 사람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의 위험성과 덫에 대해 들려줍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유혹 가운데 돌을 빵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여 보라는 첫 번째 유혹과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세 번째의 유혹은 아마 세상 모든 사람이 누리고 싶어하는 전형적인 삶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유혹을 한마디로 거절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그런데 우리 삶은 어떠한가요. 예수님께서 단호히 물리치신 유혹을 돈이라는 물신이 대신하고 있는 모습을 일상생활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주님의 집에서도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듯한 사고방식과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돈이라는 물신이 자신의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세상은 더욱 참혹한 모습입니다. 개인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중심주의가 세상 곳곳을 잠식해 들어가는 사이 이웃은 물론 형제마저도 경쟁상대, 나아가 적이 되고 마는 현실이 널려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형제들과의 관계가 훼손되면 모든 인간의 모상인 하느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돈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두 번째의 유혹마저도 마중 나가려는 듯 세상 곳곳에서 기세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서 힘을 얻어가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새 하느님에게서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돈이 우리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도록 늘 깨어있는 자세가 필요할 때입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3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6) 돈이라는 우상이 지배하는 세상


타인의 고통·슬픔에 무감각한 세태


그리스도인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하느님 나라의 영토는 어디까지일까요. 독실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만 매몰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하느님 나라에까지 눈길을 주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이런 면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도 ‘무관심의 세계화’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에 무감각한 세태는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이탈리아 최남단 람페두사(Lampedusa) 섬에서 일어난 난민선 전복사고는 이같은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내전과 핍박을 피해서,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조그만 배에 오른 아프리카 난민 500여 명 가운데 364명이 해변을 불과 800미터 앞두고 익사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폐선 직전 상태인 배가 고장났지만 지나가는 어느 선박도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해양구조대마저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의 배타적 이민법인 피니보씨(Fini-Bossi)에 따라 처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이유였습니다. 난민들은 담요를 쌓아 불을 질러 다급한 처지를 알리며 해양구조대의 도움을 절박하게 호소했지만 오히려 배 전체로 불이 번지고 말았습니다.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도 지나가는 배들은 이들을 외면했습니다. 근처에 사는 어부 몇이 통통배를 몰고 달려와 필사적으로 구조작전을 펼친 덕분에 그나마 155명이라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오래 물에 떠 있지 못한 어린이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뒤늦게 나타난 해양구조대는 난민을 구출하는 어민들에게 피니보씨 이민법을 설명하면서 난민들에게서 떨어질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먼저 도착하게 되는 람페두사에는 1999년부터 아프리카 난민 20여만 명이 들어와 유럽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2만여 명은 섬에 있는 열악한 수용소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 채 바다에 빠져 죽어갔습니다.


질주하는 세계화는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부지불식간에 피폐하고 어둡기 그지없는 인간성 상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아득히 먼 나라 얘기처럼 무감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죽어간 이들도 하느님 안에 한 형제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람페두사 앞바다의 비극이 벌어진 날 가장 먼저 달려온 이는 정부 책임자나 관리도 아닌 프란치스코 교황이었습니다. 교황은 그해 7월에도 취임 후 첫 공식방문지로 람페두사에 있는 난민수용소를 찾아 미사를 봉헌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난민의 비극에 “심장이 가시로 찔리는 듯 고통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3월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공감과 연대의 능력입니다. 전용 방탄차가 아닌 버스를 타며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목소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그의 행동은 형제의 고통에 둔감해진, 아니 애써 눈감고 있는 우리의 무관심을 일깨우는 ‘죽비소리’가 되고 있습니다.


“돈이라는 우상을 중심에 놓는 경제 체제가 비극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를 질타하며 가난과 불평등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하고 있는 교황에게 세상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는 이유를 마음에 새겨야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4월 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7) 유전무죄 무전유죄 세상


회장님 일당은 5억 원?


이른바 ‘황제노역’을 둘러싼 문제로 세상이 들끓고 있는 듯합니다. 모 법원장이 모 대기업 회장을 지낸 이에게 벌금 294억 원을 선고하면서 노역으로 대신할 경우 일당 5억 원으로 환산하여 49일 동안 노역하라는 판결을 하면서 불거진 ‘황제노역’ 문제는 우리 사회의 도덕성과 윤리관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합니다.


일당 5만 원인 일반적인 노역으로 계산하면 27년이 넘는 세월을 단 50일도 안 되는 시간으로 때울 수 있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적잖은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형벌은 저지른 범죄에 대해 고통을 주는 속성이 있습니다. 벌금형 제도는 가혹한 형벌을 제한하고 단기의 자유형을 최소화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입니다. 따라서 벌금형은 수용시설에 보내기에는 가혹하다고 판단되는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선고되고 보통 일당 5만 원의 노역금으로 환산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건에 따라 벌금형의 전체 액수만을 정하는 총액벌금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벌금을 선고받으면 30일 이내에 일시불로 완납하여야 합니다. 벌금을 내지 않으면 노역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재판부의 재량에 따라 노역장 유치기간이 정해지다 보니 하루 노역금이 고무줄 잣대라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이처럼 벌금형이 노역장 유치와 연결되면 벌금형 제도의 차별적 성격과 다양한 문제점들이 드러납니다. 형사사건의 약 90%는 벌금형으로 종결되는데, 벌금을 낼 돈이 없어 노역으로 대체하는 이들이 매년 4만 명이 넘습니다. 이들은 경제사정이 힘들어 생활이 어렵거나 몸이 성치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한마디로 돈 없는 가난한 이들은 조그만 잘못에도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게다가 강제노역 기간을 정하는데 있어서 합리적인 기준이나 규정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벌금형은 부유한 사람에게는 선처가 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혹한 형벌이 되고 마는 게 우리 사회의 모순입니다.


이와 같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사례는 우리 주변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힘 있는’ 유력자들은 사안의 위중함과 사회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풀려나는 반면 힘없는 서민에게는 형집행정지가 넘기 힘든 문턱이 된 지 오래입니다.


지난해 10월 법무부가 낸 ‘교도소 내 사망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교정시설 내 사망자 227명 중 37.4%에 해당하는 85명의 재소자가 형(구속)집행정지를 신청했다가 불허되거나 심사결정이 늦어져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들 중 연평균 8명 정도가 건강악화 등으로 형집행정지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됐고, 경기불황 여파 등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워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장 유치를 선택했다가 사망한 경우도 9건이나 있었습니다.


법률소비자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0% 정도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실에 동의한다고 합니다.


정당한 경제활동이나 영리행위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을 폄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황제노역’처럼 공정성과 형평성이 문제가 된다면 하느님의 정의가 제대로 펼쳐지는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난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는 사회, 가난이 죽음의 원인이 되는 사회라면 결코 공정한 사회일 수 없을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4월 1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8) 통일이 대박이 되려면


‘화해 · 치유’의 반석 필요하다


연초부터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이라는 발언으로 통일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 진보진영 등 제한된 영역의 의제로만 한정되다시피 해온 통일담론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물꼬가 트였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흥행이 크게 성공하다’ 또는 ‘큰 돈을 벌다’는 뜻쯤으로 해석되는 ‘대박’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국민들에게 통일의 중요성과 유익함을 새롭게 각성시킨 것입니다. 정부 차원의 통일준비위원회가 출범하면 통일담론은 더욱 확대되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일이라는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를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민과 더 큰 공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합니다.


그런 면에서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밝힌 통일 방안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를 희망합니다. 일각에서 나오는 비판처럼 ‘흡수통일’의 방법이 아닌 평화적 통일이 모색되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의 불안정한 급변 사태를 염두에 두고 남한에서 군사적 대응책 마련에만 온 힘을 기울이는 어리석음과 전쟁 상황으로 치닫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북한은 경제 발전을 위한 평화적 환경 조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상황입니다. 외자유치 없이 민생고 해결이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경제개발구를 설치하여 외자를 유치하고 대외 관광 문호도 확대하는 등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통일을 통해 경제통합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대박’을 실현하는 과정은 단순히 남한 기업들에게 이윤을 낼 수 있는 사업이나 시장 몇 개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남과 북이 한 형제로서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영역을 하나둘 넓혀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통일을 경제문제로만 환원해서는 안 되며, 정치·군사적인 문제도 함께 풀어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울러 통일경제가 단순히 경제적 이익만 창출하는 게 아니라 과도한 대외의존성, 심각한 양극화 등 우리나라 경제가 지닌 구조적 문제까지 해결하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을 현실로 일궈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물 안 개구리식의 냉전적 사고를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길에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뤄야 통일은 평화를 밑거름으로 화해와 치유의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형제애가 평화의 기초이며 평화로 향한 길”이라고 강조합니다. 남북 간 형제애 회복에 우리 민족뿐 아니라 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미래가 걸려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가장 높은 수준의 생활로서, 또 보다 인간적이며 지속가능한 발전으로서,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도 항구한 결의’인 연대의 정신으로 살 때에만 진정으로 성취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평화가 ‘사적 이익에 대한 욕망’이나 ‘권력에 대한 갈망’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통일은 주님의 기쁜 소식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가도록 초대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4월 2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9) ‘우리 안의 우리’로 이주민 받아들여야


전인류 일치의 첫걸음 ‘다문화사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사람들의 이동 현상으로 이주는 이미 ‘시대의 징표’로 떠오른 지 오래입니다.


전체 인구 대비 이주민 비율이 2.5%가 넘으면 다문화국가로 분류됩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이미 지난 2008년 이주민 인구가 2.5%를 넘어서면서 다문화사회가 되었습니다.


법무부 발표에 따르면 2012년 12월 말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은, 등록 외국인만 93만여 명에 이르고 단기 체류 외국인 32만여 명, 거소신고 외국인 19만여 명 등 총 144만여 명(2.8%)으로 다문화가 일상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 2010년, 우리나라의 총 혼인 건수(32만 6104건) 대비 국제결혼(3만 4235건) 비율은 10.5%로 결혼한 10쌍 중 1쌍이 국제결혼이라는 점이 이 같은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수적인 현상으로만 볼 때 우리 사회는 이미 다문화사회 성숙기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를 대하는 의식 수준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듯합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지가 다문화국가들을 대상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등급을 7단계로 나누었는데, 우리나라는 6등급에 해당한다고 할 정도로 한국인들의 다문화 수준은 국제적으로도 낮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100명 가운데 36명이 이웃 삼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외국인을 꼽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일상에서도 이주민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주민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이해들은 곳곳에서 사회 문제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다문화가정 자녀들의 집단 따돌림과 정체성 혼란, 경제적 이유로 인한 가정 불화, 3D 업종에 종사하면서도 여러 불이익을 당하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교회 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와 각 교구 이주사목 관련 부서 및 기관 등에서 이주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지만, 아직 일선 본당이나 신자들의 삶에까지 뿌리 내리지는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주민들을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도움을 베풀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시각이 여전합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인 그리스도인들조차 피부색이 다르거나 쓰는 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경원시하는 경우도 적잖게 보게 됩니다.


교회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자렛의 성가정도 이민이었음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기 예수를 노리는 죽음의 손길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한 성가정이 다시 무사히 귀환해 하느님의 역사를 펼쳐나갈 수 있었던 데는 하느님을 대신한 사랑의 손길이 늘 따라다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 이민 문제 해결에 헌신적으로 이바지해야 한다고 강조해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평신도들에게 사회의 모든 분야에 협력함으로써(평신도교령 10항) 이주민들에게 ‘이웃’이 되어 주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사목헌장 27항)


다문화가 인류를 하나로 일치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고 이주민을 ‘우리’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4월 2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40) 물질만능주의의 한 자락, 세월호 참사


사회문화적 요인이 빚어낸 전형적 인재


바로 눈 앞에서 지옥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지난 4월 16일 성주간 수요일에 일어난 ‘세월호’ 여객선 침몰사고를 눈물로 지켜보았습니다.


살려달라는 아우성은 고사하고 외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차가운 바다에 가라앉아버린 안타까운 생명들이 있습니다. 몇 날 며칠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울부짖음이 하느님 아버지께도 가닿았을까요. 주님께 매달릴수록 원망하는 마음이 수북이 쌓이는 오늘의 현실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참사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이번 사고를 두고 문제의 원인을 되짚는 많은 말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슬픔과 분노는 물론 자기혐오에 가까운 감정들까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폭주가 어떤 종착지에 다다를지 두렵기까지 합니다.


세월호 참사를 우리 사회의 안전 불감증이 빚어낸 전형적인 인재로 규정하는 목소리가 비등합니다. 국민들의 안녕과 행복보다 성장을 우선시하는 경제모델, ‘빨리빨리’와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문화 등이 세월호에 탄 꽃보다 아름다운 18세의 학생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며 사회문화적 요인을 참사의 배경으로 지목하는 시각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각에서는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비슷한 또다른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며 사회의 구조적 악을 수술하라고 소리 높여 외칩니다.


이런 분석들은 일면 일리가 있는 소리지만 성장우선주의와 안전과 도덕 불감증 등 고질적인 사회·문화적인 요인들로만 문제를 한정해서는 정확한 해법을 찾아내기 힘들 것입니다. 매번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반복되는 임기응변식 ‘땜질 처방’이 이번에도 이어진다면 300명이 넘는 이들의 희생에 누구보다 아파하실 분은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주님이실 것입니다. 오히려 이 같은 사회·문화적인 분석이나 판단은 결국 자기혐오와 타성만을 낳아 문제 해결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말로는 표현하기조차 힘든 고통의 현장에 함께하며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표징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희생된 이들을 위해 함께 통곡하며 울어주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아픔이 또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주님께 지혜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가 이번 참사의 희생자이자 동시에 공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이번 참사의 가장 저변에는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인명 경시 풍조와 배금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세월호에 탄 이들을 한 형제로 여겨 끝까지 아픔에 함께하고자 한 이가 얼마나 될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형제애에 대한 인식이 밑바탕에 깔리지 않는 한 평화와 사회정의는 불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결국 세월호 참사로 드러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불의와 부조리는 형제애가 희박해져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 참사와 희생자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재물에 대한 욕망이나 권력에 대한 갈증에 현혹되어 형제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5월 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41) 세월호 참사의 추악한 이면


한국사회의 총체적 비리 드러나


지금껏 이토록 많은 이들이 오랜 시간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했던 적이 있었을까요. 마지막까지 희망을 내려놓지 않고 어린 자녀들의 무사 귀환을 염원하는 부모와 한마음이 되어 온 국민이 통곡하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온 국민의 가슴에는 지우기 힘든 상처가 깊이 새겨지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 시대에 보여주시는 징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많은 이들의 희생과 고통은 헛수고에 그칠 것입니다. 이 또한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의 고통이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내 탓(Mea Culpa)’임을 되뇌는 데서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뜻과 경고를 진정으로 성찰하고 실천할 때 하느님 자녀로서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참사 소식의 이면은 파내면 파낼수록 악취가 진동하는 듯합니다. 일일이 손으로 꼽을 수도 없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추악한 면들이 이번 사태를 둘러싼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몇몇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포함한 정치·경제·사회·기업·공공기관 등의 전체적 비리와 부패임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도 잘 알고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 30-37)에서 등장하는 사제나 레위인처럼 이웃의 곤란을 보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쳐버린 이들이 바로 우리 자신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도 지나친 이들은 오늘날의 법 관념에 비춰보면, 적극적인 구조활동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음에도 이를 하지 않음으로써 ‘부작위에 의한 살인’을 저질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우리 사회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는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에 빠져있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합니다. 제노비스 신드롬이란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걸 주저하게 된다는, 이른바 방관자·구경꾼 효과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어떠한 분석과 평가를 내놓든지 간에 우리 사회의 어떤 누구도 이번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현상의 뿌리에 자본주의의 추악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는 배금주의와 개인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에 책임이 적지 않은 모 회장의 경우만 보더라도 자신의 취미활동에는 천문학적인 돈을 쓰면서도 생명이 달린 안전교육과 훈련비용에는 그토록 인색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하니, 그리고 이를 감시해야 할 관계당국을 비롯해 누구도 수십 년 동안 문제 한 번 제기한 적이 없다니…. 말문이 막힐 노릇입니다.


하지만 더더욱 슬프고 무서운 것은, 이런 끔찍한 사태를 낳은 정치사회적 구조와 혁신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과 개혁이 없으면 이 같은 비극이 또 반복되리라는 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이웃의 고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마지막까지 배에 남아 제자들을 대피시키다 목숨을 잃은 남윤철(아우구스티노·35) 교사와 몇몇 의인들로부터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5월 1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42) 인간의 얼굴을 한 ‘적정기술’


인간 삶의 질 궁극적으로 향상시켜


가난한 제3세계 나라나 오지 마을을 돕는 국제개발협력에서 이용되고 있는 ‘적정기술(適正技術, appropriate technology)’이 우리나라에서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적정기술’이란 그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정치적 · 문화적 · 환경적 조건 등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로, 인간 삶의 질을 궁극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을 말합니다.


적정기술은 마하트마 간디를 존경했던 1960년대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E. F. Schumacher, 1911~1977)가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란 개념으로 시작한 기술철학에서 유래합니다. 당시 슈마허는 선진국과 제3세계의 빈부 격차와 양극화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중 간디의 자립 경제 운동과 불교 철학에서 영감을 얻어 올바른 개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중간 규모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슈마허가 창안한 중간기술은 과거의 원시적인 기술보다는 훨씬 우수하지만 선진국의 거대 기술(super technology)에 비하면 소박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자본을 기반으로 대량의 제품을 생산하는 거대 기술과 달리 중간기술은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와 적은 자본, 비교적 간단한 기술을 활용하여 그 지역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생산 활동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중간기술은 대자본을 바탕으로 한 첨단기술에 비해 훨씬 값싸고 제약이 적은 기술이며, 기술이 사용되는 과정에서 인간이 소외되지 않고 노동을 통해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슈마허는 이러한 중간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제3세계의 빈곤 문제는 물론 자기 파괴적인 거대 기술로부터 야기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후 전문가들 사이에서 ‘중간(intermediate)’이라는 용어가 자칫 기술적으로 미완의 단계를 의미하거나 첨단 기술보다 열등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이 반영되어 ‘적정기술’이라는 용어가 더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적정기술은 그것을 생산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게 한다는 면에서 생태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제3세계와 선진국 사이의 기술적·경제적 격차를 가장 바람직한 방식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기술을 사용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인간의 발전에 맞춰진 기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반영한 대표적인 적정기술 제품으로는 주로 식수시설이 없는 아프리카지역에 많이 보급된 휴대용 빨대 정수기인 라이프스트로(LifeStraw)와 같은 구호 제품, 수동식 물 공급펌프(Super MoneyMaker Pump)와 같은 농업 관련 기술, OLPC(One Laptop Per Child)사의 XO-1 컴퓨터와 같은 교육용 제품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개발되어온 적정기술들은 가난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나눔’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리스도교적인 형제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효율만이 지상최대의 목표가 되어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 가운데서 인간이 사라져가고 있는 오늘날의 생산 활동 속에서 적정기술은 기술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되돌아보고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노동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5월 1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43) 경제논리로 접근하는 시간선택제 교사제


삶의 스승 없는 학교는 ‘지식 거래장’


교육은 국가와 사회 발전 주춧돌을 놓는 일이기 때문에 예부터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분야에도 경제논리가 깊숙이 침투하면서 백년지대계가 흔들리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고용률 70% 달성을 위한 시간제 일자리 창출 방침에 따라 올해 교원임용 때부터 정원의 3%(약 600명)를 시간제교사로 뽑겠다는 교육부 정책입니다. 2015년 800명, 2016년 1000명, 2017년 1200명 등 앞으로 4년간 3600명을 채용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정규 교사 근무 시간의 절반만 근무하는 시간선택제 교사는 정규직 교육공무원으로 주 5일간 오전이나 오후에만 근무하거나, 요일마다 자신이 원하는 근무시간에 하루 4시간 주 20시간 근무합니다. 그러면서 교과 수업, 학생지도만을 담당하고 행정업무는 맡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효율적인 제도처럼 보이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적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현재도 교육현장에는 정규 교사 외에 기간제 교사, 영어회화 전문강사, 체육 전문강사, 시간강사, 방과후교사, 특기적성강사, 보조교사(특수학급), 인턴교사(과학) 코디네이터 등 다양한 교사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교육정책이 바뀔 때마다 예산절감을 이유로 정규직 교사의 비율을 줄이면서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교사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정 업무를 맡지 않고 수업만 하고 퇴근하는 시간선택제 교사까지 등장한다면 학교는 어떻게 될까요? 담임도 맡길 수 없고, 학생 상담도 할 수 없고, 수업 준비와 교재 연구도 집에서 알아서 하는 교사로 채워진다면 학교의 효율적 인격교육, 건실한 발전은 실종되고 말 것입니다.


정부의 논리에는 교사를 단순한 지식 전달자로만 여기는 시각이 깔려 있습니다. 교육은 수업시간에만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학생의 등교지도부터 복장지도, 질서지도, 인성지도, 진로지도, 자기주도적 학습지도, 진로상담 등 등교 때부터 교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학교생활의 모든 것이 교육의 대상임에도 이런 면에 대한 고려는 없는 듯합니다. 수업만 하고 가는 시간선택제 교사 아래서는 기본적인 생활지도는 물론 함께하는 공동체생활, 이웃에 대한 배려, 나눔 등 그리스도교 교육에서 강조하는 목표가 이뤄지기 힘듭니다.


이처럼 시간선택제 교사제도는 교육정책이 아닌 경제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학생들입니다. 같은 교과를 두 명의 교사가 나눠 가르친다면 단절적인 수업으로 연속성과 일관성을 잃게 되고, 시간제 교사가 늘어날수록 그만큼 학생 지도에도 허술한 틈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육 전반의 질이 떨어지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바람직한 교육 방향과 방법을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몸소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그랬기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모름지기 교육은 지(知)·정(情)·의(意)를 모두 갖춘 전인(全人)을 키워내는 일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존경받는 삶의 스승이 사라지고 지식 전달자에 불과한 기능적 교사만 존재한다면 교육현장은 참 지혜가 아닌 죽은 지식만을 거래하는 시장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그리스도교 교육의 높은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늘 깨어있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5월 2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44) 신앙의 눈으로 본 일본 우경화


일본의 삐뚤어진 제자리 찾기


세상을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다 보면 정치 · 사회 · 문화 또는 외교적 문제로 드러나는 사안들 가운데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야기되는 일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만큼 경제는 인간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래 들어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문제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동성 확대를 통해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파격적인 경제 정책들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아베노믹스’로 일본 경기가 살아나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우경화 흐름이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일본 사회의 우경화 흐름과 아베노믹스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아베 총리의 정치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일본 경제의 생존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우경화 이유에 대해 동북아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일본의 지위에서 원인을 찾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과거 일본은 경제적인 면에서 독보적인 아시아 1위,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굳이 다른 나라를 신경 쓰지 않아도 국내외적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불황에 빠져 일본 경제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중국과 경제력이 역전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맙니다. 이러한 현실에 위기를 느낀 일본 국민들이 과거의 전성시기를 회복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찾게 되고, 경제 성장과 애국주의를 표방한 아베노믹스와 만나면서 급격히 우경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통계를 보면 일본인들 가운데 많은 수가 자신들이 아시아 다른 나라들에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 즉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통화 팽창과 임금 인상 등 아베노믹스에도 불구하고 경제 상황이 크게 호전되지 않자 하락하는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국수주의를 자극하는 우경화 행보가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인류의 미래를 함께 이끌어가야 할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젊은이들 가운데서도 경제력을 한국과 중국이 빼앗아간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자신들의 문화 콘텐츠가 안 팔리는 것은 한류로 인해 일본 문화시장이 위협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독도를 둘러싼 문제도 자신들의 영토를 우리나라가 빼앗아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인식들에 대해 ‘잘못됐다’고 말해주는 양심 있는 사람보다 아베 신조 총리처럼 교묘히 우경화를 조장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몰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의 몫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가톨릭교회는 지난 1996년부터 한·일 주교 교류모임을 정례화하면서 상호이해를 넓히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오고 있습니다. 그 결실로 한·일 청년 교류 모임은 물론 본당 간 교류, 교구 간 자매결연, 사제 파견 등 다양한 교류를 통해 신앙적 친교를 성숙시켜오고 있습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한 형제로서 두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연대해 진리를 진리라고 외치고 정의를 위해 함께 힘을 모아나갈 때 하느님 나라는 성큼 다가올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6월 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45) 초대교회의 교육과 오늘의 교육문제


물질 얻는 수단으로 전락한 교육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위기에 맞닥뜨릴 때마다 늘 되뇌는 말 가운데 하나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성경이 아직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던 초대교회 때는 어떻게 교육이 이뤄지고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개인이나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전해졌을까요.


깊이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한 개인이 태어나 제일 처음 속하게 되는 가정교회나 그를 둘러싼 지역공동체의 역할이 막중했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초대교회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행적을 중심으로 한 생명의 복음의 가르침과 정신이 교육 이념과 실천의 중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그분이 전해주신 기쁜 소식을 살아가는 길이 자칫 박해와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던 시절, 그리스도를 따르던 공동체는 ‘생명’이 절박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생명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최선의 과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친교를 바탕으로 나눔과 섬김, 봉사와 말씀 선포가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초대교회의 이러한 모습들은 활기를 잃고 퇴색되어 잃어버린 유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이나 공동체에서마저도 ‘생명’의 가치가 빛을 잃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물질’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공동체의 가치가 아니라 더 많은 세상의 명예와 권력, 재물을 얻는 것이 최고의 가치나 선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교육은 공동체가 공유해야 할 가치를 함께 만들고 전하는 장이 아니라,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경우에 따라 정치적 이익을 실현하는 수단과 방법으로 변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전인적인 인간을 키워내야 할 공교육은 부실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되고 그 자리를 사교육이 채우고 있는 게 오늘날 우리 현실입니다.


사교육이 지닌 문제는 수입에 비해 과다한 교육비 지출로 경제적 곤란을 겪는 계층을 뜻하는 ‘에듀푸어’(edupoor)라는 신조어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자녀교육에 모든 것을 걸며 소득 절반 가까이를 교육비에 투자하느라 빈곤층으로 전락한 에듀푸어가 305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아내와 자식을 유학 보내고 ‘돈 버는 기계’가 되어 몸과 정신이 모두 망가진 채 벼랑 끝에 내몰린 기러기 아빠도 50만 명에 이릅니다.


등골을 휘게 하는 사교육비 증가 현상은 어느 개인이나 한 집안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노후나 은퇴 준비에도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교육에 매달리느라 정작 자신들의 노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에듀푸어’가 노인 빈곤층을 뜻하는 ‘실버푸어’(Silver Poor)로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사교육으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문제들이 사회안전망을 해치는 국가적 문제로까지 확대되어 우리 사회 전체를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은 학력이 신분상승과 성공을 보장해준다는 맹신과 입시 위주의 학력지상주의, 물신주의 사회가 야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사회문제 앞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회의 흐름에 편승해 무비판적으로 부조리한 현실을 따라가기 보다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정신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사회적 평화와 안정을 담보하는 하느님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는 길을 찾는데 부심해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6월 8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46)

관피아, 오늘의 사두가이가 지배하는 세상


법과 도덕 위에 군림하는 ‘그들’


300명이 넘는 무고한 생명을 한꺼번에 앗아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후 우리나라 역사는 사고가 일어난 4·16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고 새롭게 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그렇게 될까 하는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시대의 최대 화두로 떠오른 ‘관피아’ 문제 때문입니다.


관료 출신 공무원들이 퇴직 후 공공기관이나 관련기관 등에 재취업하여 요직을 두루 독점하는 것을 비하하여 이르는 이 말은 관료와 마피아의 합성어입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을 근거지로 한 범죄조직 마피아에 빗대어 학연과 지연, 관연 등으로 얽힌 비리의 난맥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현재 세간에 오르내리는 관피아만 보더라도, 옛 재정경제부(MOFE)와 금융 및 재정기관이 합성된 모피아를 시작으로 세월호 참사를 초래한 해양수산부와 해운업계의 해피아, 국토해양부와 건설업계의 국피아, 산업통상자원부와 산업계의 산피아, 법무부와 법조계 및 로펌 등 법피아, 교육부와 학계의 교피아, 여의도 정치인과 정부 산하기관의 여피아, 원자력 전문학과 출신이 뭉친 원피아, 철도고·철도대학 출신이 철도공사와 철도시설공단을 장악한 뒤 유착고리를 형성한 철피아 등 일일이 손으로 꼽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이처럼 관피아 문화는 우리 사회 일부에 국한되지 않고 전반에 이미 뿌리를 깊게 내려 관행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이름이야 어떻든 법과 사회의 도덕규범을 무력화시키고 사사로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피아의 공통적 특질은 겉으로는 국민과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지난 시절 자신들이 관에서 누렸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사리사욕을 채우면서도 국민들로부터 사회지도층이라는 찬사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피아를 보며 예수님 시대 사두가이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다교 대사제와 고위 성직 계층의 직책을 독점하고 있던 사두가이들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 당대 사회에서 자신들이 누리는 부와 지위를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의 표시로 여기고 체제 유지를 옹호했습니다. 이 때문에 굳이 자신들이 받은 주님의 은총을 이웃과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날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사이비종교들에서 이러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사두가이들은 율법을 통해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백성을 율법의 노예로 만드는 일에 앞장섭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과는 정반대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합니다.


오늘의 우리 교회는 이러한 사두가이나 관피아의 모습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가톨릭교회가 여전히 다른 종교에 비해 국민들이나 사회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닌 듯합니다. 이는 교회가 중산층화의 길을 걸으면서 교회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진정으로 배려하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부유하고 힘 있는 이들로 채워진다고 해서 영향력이 더 커진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난한 모습으로 사셨을 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186~216항)은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담아 듣고 도와주라고 절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6월 1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47) 안전 불감증과 인간의 존엄성


경제 성장 부속품으로 전락한 우리들


올 들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외친 말은 ‘안전 불감증’ 입니다. 세월호에 타고 있던 300명이 넘는 무고한 생명을 바다 속에서 잃고 그 구조와 실종자 수색에서 정부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로써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고질적인 안전 불감증과 재난구조의 허술함이 총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크고 작은 인재(人災)에 의한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는 현실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여진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지난 5월 2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에서 지하철 추돌 사고가 일어나 249명이 다치는 일이 터졌습니다. 또 5월 26일에는 경기 고양터미널에 화재가 나 8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나기 불과 며칠 전 터미널 시설 전반에 대한 안전점검을 한 것이 밝혀져 충격이 더 컸습니다. 5월 28일에는 전남 장성 요양병원에서 화재가 발생해 2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사망자 대부분이 고령으로 혼자 거동이 불편해 불이 난 것을 알고도 대피하지 못해 아까운 생명을 잃었다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들 대부분은 총체적 인재로 인한 사고로 ‘안전 불감증’이 부른 대형 참사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사고가 생길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안전 불감증’이라는 말에는 생명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의식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여기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게 있습니다.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방송이나 신문 등 각종 언론을 도배하다시피 하는 ‘안전 불감증’이라는 진단이나 평가에 너무 쉽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용어 안에 사태의 진실이 전부 녹아있는 양 일반화하게 되면 정작 중요한 문제나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이나 사물, 현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진단이 없으면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은 언제든 다시 재발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일선 전문가들이나 사회학자들 가운데서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안전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을 안전 불감증으로만 돌리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각종 사고의 근본 원인을 안전 불감증으로만 몰아가는 것은 자칫 국가나 사회의 책임을 국민이나 개개인에게 전가함으로써 사태의 본질을 희석시켜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에서 드러나 듯 국가 주도의 압축적 고도성장을 통해 발전해온 나라입니다. 국가가 사회의 많은 영역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기획과 실천에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하였기에 경제·문화를 비롯한 사회의 많은 부분이 급성장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인간은 경제성장의 한 요소, 곧 필요불가결한 부속품으로 전락해 경제논리에 매몰되어 양적 성장만을 숭상하는 사회로 정착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경제논리 속에서 안전은 늘 뒷전에 머물기 십상이었고 우리 사회와 구성원들은 그것을 묵인해왔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두 눈을 부릅뜨고 인간의 존엄한 가치와 도덕성을 외쳐야 합니다.


사회 복음화에 무한 책임을 지닌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누가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