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


APOSTOLIC EXHORTATION

EVANGELII GAUDIUM

OF THE HOLY FATHER

FRANCIS


오늘날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관해, 주교, 성직자, 봉헌생활자, 그리고 평신도에게...


1.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의 삶과 마음을 채워줍니다. 그분께서 주신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은 죄와 공허함과 외로움에서 해방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기쁨은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이 교황 권고에서 저는 교회가 걸어야 할 새 길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화가 이 기쁨으로 가득 찬 새로운 장을 용감하게 열어가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I. 항상 새로운 기쁨, 나눠야 할 기쁨


2. 오늘날 소비주의가 휩쓸고 있는 심각한 위험은 자기만족의 탐욕스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황폐함과 번뇌, 가벼운 쾌락에 대한 무절제한 추구, 그리고 무뎌진 양심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자신만의 이익과 관심에만 몰두할 때마다,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자리가 그의 마음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이라는 고요한 기쁨을 더 이상 느끼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하려는 열망은 사라집니다. 이는 믿는 사람들에게도 실질적인 위험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후회하고, 분노하고 냉담해집니다. 이것은 결코 존엄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나온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아닙니다.


3. 저는 이 순간 모든 곳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새롭게 또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분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만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매일 그렇게 해주기를 청합니다. 누구도 이 초대가 특정인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누구도 예외 없이 당신의 기쁨을 가져다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만나려는 모든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갈 때마다 우리는 그분이 이미 거기서 팔을 벌린 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예수님께 “주님, 저는 스스로 속아 넘어갔습니다. 저는 수없이 당신의 사랑을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있습니다. 당신과의 계약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에게는 당신이 계셔야 합니다. 저를 다시 구원해주십시오. 주님 저를 다시 당신 구원의 품에 받아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릴 때입니다. 우리가 버림을 받을 때마다 그분께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다시 이렇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지치지 않고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분의 자비를 찾는데 지치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라고. “일곱 번씩 일흔 번”(마태 18,22)이라도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셨습니다. 수도 없이 반복해서 그분은 우리를 당신 어깨에 태우셨습니다. 누구도 이 무한하고 변함없는 사랑이 주신 존엄함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우리의 기쁨을 회복시킬 수 있는 이 사랑으로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머리를 들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치지 맙시다.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분명히 그렇게 합시다. 그분의 생명 말고는 아무것도 우리를 재촉하지 못하게 합시다. 그것만이 우리를 나서게 합시다.


4. 구약성경은 구원의 기쁨이 메시아 시대에 충만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기다리는 메시야를 기뻐하며 환호했습니다. “당신은 민족들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9,3) 이사야 예언자는 시온에 있는 이들에게 노래를 부르며 나가서 그분을 만나라고 권고했습니다. “시온 주민들아 소리 높여 환호하여라!”(12,6) 예언자는 제단에서 이미 그분을 만난 이들에게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40,9) 모든 창조물은 구원의 기쁨을 나눕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49,13)


즈카리야 예언자는 주님의 날을 고대하며 “겸손하고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을 환호하라고 부릅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9,9)


아마도 가장 감동적인 초대는 스바니야 예언자일 것입니다. 그는 구원의 기쁨을 기념하면서 백성에게 하느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음의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전율을 느낍니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3,17)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체험하는 기쁨,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초대에 응답하는 기쁨입니다. “얘야, 네가 가진 모든 것으로 자신을 잘 보살피고... 그날의 행복(즐거움)을 마다하지 말아라.”(집회 14:11, 14) 이런 말씀에서 부모 사랑이 얼마나 부드럽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5.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으로 빛나는 복음은 끊임없이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도 충분합니다. “기뻐하라!”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인사말입니다.(루카 1,28)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요한은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루카 1,41 참조) 마리아는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루카 1,47)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시작했을 때 요한은 “그래서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였습니다.(루카 10,21)


그분의 메시지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그분의 넘치는 마음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약속했습니다. “너희는 울며 비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요한 16,20) 그리고 그분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요한 20,20)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첫 그리스도인들이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었습니다.”(사도행전 2,26) 제자들이 갈 때마다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8,8) 제자들은 박해를 당할 때조차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13,52) 세례를 받은 내시는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습니다.”(8,39), 바오로를 가둔 간수와 “온 집안은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함께 기뻐하였습니다.”(16,34) 무엇 때문에 이 기쁨의 물결에 합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6. 그리스도인 가운데 부활이 없는 사순시기처럼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기쁨이 인생에서 항상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특히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시기에는 그렇습니다. 기쁨이 익숙해지고 변하기는 하지만 항상 인내합니다. 이는 빛의 서광처럼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다했을 때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 나타납니다.


저는 무거운 고통의 짐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그리고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히 우리는 믿음의 기쁨이 조용하지만 튼튼한 신뢰를 되살리도록 해야만 합니다. “당신께서 이 몸을 평화 밖으로 내치시어 저는 행복을 잊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내 마음에 새겨 나는 희망하네. 주님의 자애는 다함이 없고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어 아침마다 새롭다네. 당신의 신의는 크기도 합니다... 주님의 구원을 잠자코 기다림이 좋다네.”(애가 3:17, 21-23, 26)


7. 때때로 우리는 핑계 거리와 불만거리를 찾으려는 유혹을 겪습니다. 마치 수많은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분명히 행복할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합니다. 어느 정도 이는 우리의 “기술 사회가 즐거움을 많게 하는데 성공했으나, 기쁨을 낳기는 힘들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제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기쁨을 저는 내세울 것이 거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보았습니다.


저는 직업적 의무에 시달리는 가운데에서도 초연함과 단순함을 갖고 신앙에 충실한 이들이 보여주는 진정한 기쁨도 생각합니다. 그 모든 기쁨의 예들은 그 나름대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흘러온 것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저는 복음의 핵심을 우리에게 소개한 베네딕토 16세의 다음의 말을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의 결과나 사상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삶에 새로운 지평과 결정적 방향을 주는 어떤 사건, 어떤 사람과 조우하는 것이다.”


8. 하느님의 사랑은 풍요로운 친교로 열매를 맺는데, 오로지 이 하느님 사랑과의 만남 덕분에 우리는 편협함과 자기몰두로부터 해방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설 때, 우리가 완전한 진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화를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의 영감과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인생의 의미를 살리는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II. 즐겁고 위로를 주는 기쁨인 복음화


9. 선함은 언제나 널리 퍼지려고 합니다. 선함과 진리에 대한 참된 체험은 그 본성상 우리 안에서 자라려고 합니다. 그리고 심오한 해방을 체험한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들의 요구에 보다 민감해집니다. 선이 확장되는 것처럼, 선은 뿌리를 박고 발전합니다. 만일 우리가 존엄하고 완전한 생명에로 나아가길 바란다면,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좋은 것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토 5:14)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토 9:16) 우리를 참되게 체험하면 본성상 사랑은 우리 안에서 커지려고 합니다.


10. 복음은 우리에게 보다 높은 차원, 그러면서 결코 모자라지 않는 삶을 살 기회를 줍니다. “생명은 포기함으로써 자랍니다. 생명은 안락함과 고립됨으로써 약해집니다. 실재로 생명을 가장 잘 누리는 사람은 땅에서의 안전을 떠나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사명으로 흥분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복음화의 임무를 맡기려고 그리스도인을 부를 때, 교회는 단지 인격적으로 참된 완성을 가져오는 원천을 가리킬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원천에서 “우리는 심오한 법칙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건네주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만큼 얻을 수 있고 성숙해진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파견(mission)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장례식에서 금세 돌아온 사람처럼 보이지 맙시다. 우리의 열정을 다시 찾고 불사릅시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을 때조차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즐겁고 위로를 주는 기쁨입니다.... 때로는 번뇌하며, 때로는 희망을 갖고 나아갈 길을 찾고 있는 오늘날 세상이 낙심하거나, 의기소침하거나, 참을성 없거나 불안한 복음전파자로부터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기쁨을 받아들인 복음의 사목자, 열정으로 그 삶이 빛나는 복음의 사목자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새로움


11. 복음선포(preaching)의 쇄신은 냉담한 사람이나 미지근한 사람은 물론 신자들에게 신앙이 주는 새로운 기쁨을 얻게 하고, 복음화 작업이 주는 결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복음선포의 핵심은 항상 같을 것입니다. 즉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신 하느님께서 나이에 관계없이 끊임없이 당신의 자녀들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야 40,31)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복음”(묵시록 14,6)이십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리 13,8) 그러나 그분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청춘이시며 새로움의 원천이십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깊은 풍요와 지혜와 지식”(로마 11:33)을 항상 찬미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하느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부함은 너무 깊어서, 또 너무 넓어서, 우리 영혼이 아무리 많이 알게 된다 하더라도, 항상 그 안으로 파고들 수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모든 새로움을 갖고 오셨습니다.”고 했습니다. 이 새로움으로 그분은 항상 우리의 삶과 우리 공동체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어둠과 교회의 나약함의 시기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 메시지는 결코 수명을 다하여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가두려 했던 활기 없는 범주들을 뚫고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창조력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놀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원천이신 그분께 돌아가려고만 한다면, 그리고 복음의 본래 신선함을 되찾으려고만 한다면, 새로운 길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위해 창조의 새로운 길들이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는 표지와 언어들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참된 복음화는 항상 “새로운” 형태를 갖습니다.


12. 이 사명이 분명히 커다란 관대함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어떤 개인의 영웅적 행위라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명은 우리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뛰어넘는 주님의 으뜸이며 가장 위대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복음 선포자이시며 가장 위대한 복음 선포자”이십니다. 복음화의 모든 활동에서 첫째는 항상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과 협력하게 하셨고, 당신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진짜 새로움은 하느님 자신이 직접 가져오시고, 수많은 방법으로 불러일으키고, 재촉하고, 인도하고 그리고 수행하시는 그 새로움입니다. 교회의 생활은 항상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셨음을, 즉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1요한 4,19)는 것을, 그분만이 “자라게 하신다”(1코린토 3,7)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우리 인생 전부를 바쳐야 하는 그 임무에서도 우리가 기쁨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확신 때문입니다.


13. 이 사명이 갖는 새로움을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살아있는 역사에 대한 망각과 분리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기억은 이스라엘의 기억 그 자체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으로서, 우리가 “새로운 명령(신명)”이라 불러도 되는 우리 신앙의 어떤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가 매일 기념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깊게 참여해야 할, 그분 파스카의 사건인 성찬례(Eucharist)를 남겼습니다.(루카 22,19 참조) 복음화활동의 기쁨은 언제나 이 고마운 기념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우리가 끊임없이 탄원해야 할 은총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마음을 울렸던 순간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 예수님과 함께, 이 기념이 “큰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을”(히브리 12,1)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우리는 큰 기쁨을 갖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인 신자들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히브리 13,7).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와 비슷하며 우리에게 생명의 신앙을 소개했습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을.”(2티모테오 1,5) 믿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III. 신앙의 전달을 위한 새로운 복음화


14. 시대의 징표를 우리와 함께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재촉을 경청한 제13차 주교 시노드 총회가 ‘신앙의 전달을 위한 새로운 복음화’란 주제를 토의하기 위해 2012년 9월7일부터 28일까지 열렸습니다. 시노드는 새로운 복음화가 모든 이에게 제시한 일종의 호출이라는 것과 세 가지 주요한 배경들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첫째로, ‘일반 사목 직무’(ordinary pastoral ministry)의 영역입니다. 이는 “성령의 불로 타오르며 공동체 예배에 규칙적으로 참여하며 영원한 생명의 빵과 그분의 말씀으로 성장하기 위해 주님의 날에 모인 신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범주에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지만 진실하고 깊은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다른 신앙인들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일반 사목 직무는 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보다 더 완전하게 응답할 수 있도록 영적 성장을 도우려 합니다.


두 번째 영역은 “세례 성사가 요구하는 것을 따르고 있지 않은 신자들”입니다. 교회와 의미 있는 관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신앙이 주는 위로를 더 이상 체험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교회는 그들 마음에서 신앙의 기쁨이 되살아나서 복음에 헌신하는 회심이 이루어지도록 어머니의 심정으로 도우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복음화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항상 그분을 배척한 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아주 조용하게 하느님을 찾고 있는데, 이들은 그분의 얼굴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다못해 고대 그리스도교 전통을 갖고 있는 지역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들 모두는 복음을 받아들일 권리를 갖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배제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일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 것처럼 보이기보다, 자기들의 기쁨을 나누려는 사람처럼, 아름다운 지평선을 가리키는 사람처럼, 맛있는 잔칫상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처럼 보여야만 합니다. 교회의 성장은 그들을 개종 시켜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이루어집니다.


15.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추진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이것이 교회의 첫 번째 임무이기 때문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오늘의 선교 활동은 여전히 교회에 가장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 과업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선교 활동이 “교회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모범이 된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들은 우리가 “우리 교회 건물에서 조용하게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 없습니다.”고, 그리고 우리는 “오로지 유지하기만 하는 선교 직무에서 벗어나 분명하게 선교하는 사목 직무로 나아가야 합니다.”고 밝혔습니다. 교회에게는 이 과업이야말로 항상 무한한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이 권고의 범위와 경계


16. 저는 시노드 교부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 권고를 쓰게 되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저는 시노드가 기울인 노력의 풍부한 결실을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으며 복음화라는 교회의 일에 관한 이 특별한 부분에 대해 저만의 관심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오늘날 복음화와 관련한 문제들은 수도 없이 많으며, 이 자리에서 논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많은 성찰과 연구가 요청되는 그 많은 문제들을 탐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교회와 세상에 영향을 주는 모든 문제에 대해 교도권이 결정적이거나 확정된 언어로 제시해야만 한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각 지역에서 떠오르는 모든 문제를 식별하는 데 있어서 교황이 지역의 주교들의 자리를 차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건전한 “탈중앙화”가 추진될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17. 이 자리에서 저는 복음화의 새로운 국면에 처해 있는 전체 교회를 안내하고 격려하는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하기로 했습니다. 생명력과 열정을 갖는 복음화를 위해서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고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인류의 빛>의 가르침에 기초해서, 저는 여러 주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문제에 관해 충분히 토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a) 교회의 선교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개혁(reform)

b) 사목 활동가들이 직면한 유혹들

c) 교회, 복음을 전하는 하느님 백성 전체로서의 교회

d) 강론과 그 준비

e)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을 포함하는 문제

f) 사회에서 평화와 대화

g) 사명을 위한 영적 동기들


18. 저는 이런 주제들을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때로는 지나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세히 다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완전한 글을 제공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오늘날 교회의 사명에 있어서 중요하고 실질적인 함의를 드러내려는 방법으로서 그렇게 한 것일 뿐입니다. 중요하고 실질적인 이 함의들은 복음화의 특정 스타일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이 수행하는 모든 활동에 이를 채택하기를 요청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매일 노력을 기울이면서 성경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비 4:4)


제 1 장


교회의 선교 변형



19. 복음화는 예수님의 선교 명령에 순종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오 28:19-20) 이 구절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이 지구 곳곳에 퍼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I. 길을 나서는 교회


20.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길을 나서라”고 얼마나 재촉하시는지 끊임없이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새 땅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창세기 12:1-3 참조)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탈출기 3:10) 약속한 땅으로 백성을 데리고 가라(탈출기 3:17)는 부르심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한다.”(예레미야 1:7) 오늘날 “가서 제자로 삼아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변화무쌍한 시나리오를 갖고, 또 복음화라는 교회의 새로운 사명에 대한 전혀 새로운 도전으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울림은 우리 모두를 이 새로운 선교적 ‘외출’에 참여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각 그리스도인과 모든 공동체가 주님께서 가리키는 길을 반드시 식별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편안한 지역에서 나와서 복음의 빛이 필요한 모든 “변방”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서라고 부르시고, 우리는 여기에 복종해야만 합니다.


21. 제자들의 공동체를 활기차게 하는 복음의 기쁨은 선교의 기쁨입니다. 일흔 두 제자는 그들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기쁨을 느꼈습니다.(루카 10:17 참조)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웠을 때, 그리고 아버지께서 가난하고 작은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것을 찬미할 때 기쁨을 느끼셨습니다.(루카 10:21 참조) 오순절에 사도들이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가르치는 것을 듣고 첫 그리스도인들은 놀라며 이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 기쁨은 복음이 선포되었으며 결실을 맺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그러나 길을 나서는 것, 우리 자신 속에 갇혀 있지 않고 밖으로 나가 계속해서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러 떠나온 것이다.”(마르코 1:38) 일단 어떤 곳에 씨앗이 뿌려지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설명하려고, 혹은 더 많은 기적을 베풀려고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분을 다른 이웃 고을을 향해 길을 떠나도록 하십니다.


22. 하느님의 말씀이 갖는 능력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일단 뿌려지면 농부가 잘 때조차도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마르코 4:26-29) 교회는 이를 말씀이 갖는 감당할 수 없는 자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은 그것이 우리의 계산과 생각을 뛰어넘어 말씀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23. 교회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함께 여행한다는 것입니다. “친교와 사명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승의 모범에 충실히 따르면서, 오늘의 교회가 두려움이나 거리낌이나 망설임 없이 길을 나서서 모든 곳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진실로 중요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배제될 수 없습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천사가 선포한 것은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한다.”(루카 2:10)는 것이었습니다. 묵시록은 “땅에서 사는 사람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언어권과 백성에게 선포할 영원한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첫발을 내딛고, 속하고 지지하며, 열매를 맺고 즐거워합니다.


24. “길을 나서는” 교회는 첫발을 내딛고, 그들에게 속하며 지지하고, 열매를 맺고 즐거워하는 선교하는 제자 공동체입니다. 복음화 하는 공동체는 주님께서 주도하십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요한 4:19 참조)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 공동체는 과감하게 먼저 움직이며, 다른 이들에게 다가 가고,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 나서며, 사거리에 서 있다가 내버려진 이들을 환영합니다. 그 같은 공동체는 끊임없이 자비심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 자비심은 아버지의 한량없는 자비의 힘을 체험한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힘을 내서 첫발을 내딛읍시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갑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 안에 들어가셨고, 당신 자신 스스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고 하십니다. 복음화 공동체는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의 일상으로 들어갑니다.


복음화 공동체는 분리된 것을 이어줍니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낮춥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몸을 쓰다듬으면서 인간생명을 끌어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양의 냄새”가 나고, 양들은 기꺼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합니다. 복음화 공동체는 지지합니다. 사람들과 항상 나란히 걷습니다. 그 길이 아무리 어렵고 먼 길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복음화 공동체는 사도적 인내와 끈기 있는 전망에 익숙합니다. 복음화는 대부분 시간의 제약 없이 인내심을 가져야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선물에 충실한 복음화 공동체는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화 공동체는 항상 열매에 관심을 갖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공동체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앗이 싹 트는 것을 보면 푸념하지도 들뜨지 않습니다. 그는 말씀이 특정 상황에서 몸이 되어 새 생명의 결실을 내도록 길을 찾습니다. 그 결실이 아무리 불완전하거나 미흡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입니다.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는 출발선에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순교조차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는 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그 해방과 쇄신의 힘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화 공동체는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 공동체는 항상 즐거워하는 법을 압니다. 그 공동체는 모든 작은 승리도 기념합니다. 복음화의 과업에서 한 걸음이라도 나간다면 그 때마다 기념합니다. 기쁨의 복음화는 전례에서 아름다움이 됩니다. 전례는 선을 전파하려는 우리들이 매일 관심을 갖는 분야입니다. 교회는 복음화하며 전례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스스로 복음화 됩니다. 전례는 복음화를 기념하는 일이며, 또한 새로워진 교회가 자기를 내어주는 원천입니다.



II. 사목 활동과 전환


25. 저는 오늘날의 문헌들이 과거와 같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빨리 잊혀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제가 이 자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용적인 의의와 중요한 결과를 갖는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모든 공동체가 사목에서 또 선교에서 지금처럼 남아있지 않고 전환의 길을 따라 걷는데 필요한 노력을 다하길 희망합니다. “단순한 경영”은 더 이상 충분할 수 없습니다. 전 세계에 어디든지 우리는 “항상 파견의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26. 바오로 6세는 쇄신을 심화시키라고, 또한 쇄신이 개인들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자극하는 기념비적인 텍스트로 돌아갑시다.


“교회는 통찰의 눈으로 자신의 안을 바라봐야 합니다. 교회의 신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생하고 또렷한 교회의 자기 인식은 마땅히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하고 흠 없는 신부로서 바라보고 사랑하시는 교회의 이상적 모습(에페소 5:27)과 오늘날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교회의 실제 모습을 비교할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지체하지 않고 용맹하게 쇄신의 길에 나서게 하는 원천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지닌 결점들을 교정하려는 투쟁, 그리고 교회 자신을 교회의 모범이신 그리스도에 비추어 검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전환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자기 쇄신에 대한 개방성으로 제시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쇄신은 본질적으로 교회 소명에 충실성의 증대에 있다. 나그네 길에 있는 교회는 그 자체로서 또 인간적인 지상의 제도로서 언제나 필요한 이 개혁을 끊임없이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부름 받고 있습니다.”


복음화에 기울이는 노력을 방해할 수 있는 교회의 구조들이 있다. 좋은 구조들이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이것을 유지하고 평가하는 생명력이 있을 때야 비로소 이 구조가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새로운 생명과 참된 복음 정신과 “부르심에 대한 충실성”이 교회에 없다면, 어떠한 새로운 구조들도 곧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


27. 저는 “선교의 선택”을 꿈꾸고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을 변형시킬 수 있는 선교를 위한 자극 말입니다. 교회의 관습, 행동방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구조가 교회의 자기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적합하게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그런 변형을 꿈꾸고 있습니다. 사목의 전환이 요구하는 구조의 쇄신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조들을 보다 사명 지향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 모든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사목 활동을 보다 포괄적이고 개방적으로 만들려는 노력, 사목 활동가들에게 쉼 없이 길을 나서게 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노력,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벗으로 부르신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노력으로 말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오세아니아의 주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쇄신이 교회의 내부로 향하려는 미끼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그 목표로서 사명(mission)을 가져야만 한다.”


28. 본당은 구시대의 제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당은 엄청난 유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은 사목자와 공동체의 개방성과 선교의 창조성에 따라서 매우 다른 경로를 취할 수 있습니다. 본당이 복음화를 위한 유일한 제도는 아니지만, 만일 자기 쇄신과 끊임없는 적응을 할 수 있다면, 본당은 계속해서 “그 자녀들의 가정들 한 가운데서 살아 있는 교회”(26)가 됩니다. 이것은 본당 사람들의 생활과 가정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거나 혹은 선택된 몇 사람끼리의 폐쇄된 무리에 불과한 불필요한 제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당은 특정 지역에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본당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리스도교 생활의 성장을 위해, 대화와 선포와 사랑의 확장과, 경신례와 기념을 위한 환경입니다. 모든 활동에서 본당은 그 구성원들을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훈련시키고 격려합니다. 공동체 중의 공동체이며, 목마른 사람이 그 여정 중에 물을 마시는 거룩한 곳이며, 선교 활동의 중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본당을 검토하고 새롭게 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본당을 사람들에게 더 가깝게 만들고, 본당을 살아있는 친교와 참여의 장으로 만들고, 본당을 철저하게 사명 지향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9. 다른 교회 기구들, 기초 공동체들, 작은 공동체들, 사회운동들, 그리고 연합체들은 교회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입니다. 성령께서는 서로 다른 영역과 분야를 복음화 하기 위해 이들을 자라게 한다. 그것들은 자주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교회를 새롭게 하는 세상과 대화할 새로운 힘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풍요로움을 갖고 있는 지역 본당과 결합하고, 지역 교회(a particular Church)의 전반적 사목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통합은 우리가 복음에만 혹은 교회에만 집중하지 않도록 막아줄 것이며, 뿌리가 없는 단자들이 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30. 관할 주교가 이끄는 가톨릭교회로서 각 지역 교회도 마찬가지로 선교의 전환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역 교회는 복음화의 제1의 주체입니다. 왜냐하면 지역 교회는 어떤 특정 지역에 있는 하나의 교회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그 지역 교회 안에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온 그리스도의 교회가 진정으로 현존하고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지역 교회는 특정 지역에 구체화된 교회로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의 모든 수단을 갖추고 있지만, 지역적 특성을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달되는 지역교회의 기쁨은 그분을 모르는 곳에 그분을 전파하려는 관심으로, 동시에 새로운 사회문화적 배경을 갖는 곳이나 자기 지역의 변두리로 끊임없이 길을 나섬으로써 드러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지역교회는 그곳에 기꺼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선교 정신에 집중하여 활발히 결실을 맺기 위해, 저는 각 지역교회가 식별, 정화, 그리고 개혁의 적절한 과정을 밟기를 권고합니다.


31. 주교는 믿는 이들이 한 마음 한 영혼이었던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의 이상을 따라서(사도행전 4,32 참조), 항상 자기 교구 안에서 이 선교의 친교를 발전시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주교는 자기 백성 앞에 나서서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그들의 희망을 살려야 합니다. 때로는, 단순히 그들 가운데 겸손하고 자비로운 존재로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들 가운데 뒤처지는 사람을 도우며 뒤를 따라야 합니다. 혹은 과감히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그들을 따라야 합니다. 역동적이며 개방적이며 선교적인 친교를 촉진해야 하는 사명에 따라, 그는 교회법이 제시하는 참여의 방법들과 다른 형태의 사목의 대화를 촉진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 때 그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참여 과정의 주요 목적이 교회의 조직이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이에게 다가가려는 선교의 열정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32. 제가 다른 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저 자신도 실천해야 마땅하기 때문에, 저 역시 교황권의 전환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로마의 주교로서 저의 직무에 대해 제안한 것들을 개방적으로 검토할 것입니다. 그 제안들은 저의 직무 수행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직무에 부여하려 하셨던 의미에 보다 충실한 것이 되도록, 또한 오늘날의 복음화의 필요성에 보다 충실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들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수위권이 그 사명에 핵심적인 것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상황에 개방되어 있는 수위권 행사 방법을” 찾는데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그다지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교황직과 보편교회의 중앙구조들 역시 사목 전환(pastoral conversion)의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초기 총대주교좌 교회들(the ancient patriarchal Churches)과 마찬가지로 주교회의들(episcopal conferences)이 “단체정신(합의체적 정신 collegial spirit)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여러 많은 실질적 방법에 기여할” 위치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온전하게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교회의의 법률적 지위가 아직은 충분히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주교회의의 법률적 지위를 교의의 권위(doctrinal authority)를 포함해서 구체적인 직권을 가진 주체로 볼 수 있는 정도로까지는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중앙 집중화는 도움을 주기보다 교회의 생활과 교회의 선교 확대를 복잡하게 합니다.


33. 선교의 핵심에서 사목 직무는 “우리는 이미 그런 식으로 다 했어”하고 말하는 자기만족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공동체에서 복음화의 목표, 구조, 스타일과 방법을 다시 생각하는 이 과업에서 과감하고 창의적이기를 바랍니다. 목표를 성취하는 수단을 자치적으로 찾지 않고 세운 목표는 필연적으로 환상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이 문헌에서 제시한 지침을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그리고 용감하게 그리고 활발하게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고 현실적인 사목적 식별 속에서 특히 주교들의 지도를 따라서 서로 형제로서 자매로서 서로 의지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III. 복음의 핵심에서부터


34. 우리가 모든 것을 선교에 맞춘다면, 그것은 메시지를 소통하는 방법에도 영향을 줄 것입니다. 인스턴트 커뮤니케이션과 때때로 편견을 갖는 미디어 보도를 볼 수 있는 오늘날, 우리가 전파하는 메시지는 왜곡되거나 부수적 측면에 환원될 위험이 아주 큽니다. 그런 식으로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이 본래적 의미가 담긴 맥락에서 벗어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전파하는 메시지가 부수적인 것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이 부수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메시지 핵심을 담고 있지도, 전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청중이 우리가 말하는 것의 배경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혹은,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말하는 것에 의미, 아름다움, 매력을 부여하는데, 청중이 우리가 말하는 것을 그 복음의 핵심과 연결시킬 수 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35. 선교 스타일에서 사목 직무는 수많은 교의를 집요하게 토막 내서 전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누구도 배제하거나 제외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실질적으로 다가갈 선교 스타일과 사목 목표를 채택한다면, 메시지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메시지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웅장하며, 가장 매력 있으며, 동시에 가장 필요한 것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메시지는 알기 쉬워야 합니다. 메시지는 그 깊이와 진리를 놓치지 않으면서,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36. 계시된 모든 진리들은 같은 거룩한 원천에서 나오며, 같은 신앙심으로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들 가운데 어떤 것은 복음의 핵심을 직접 표현하는데 좀 더 중요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은 돌아가시고, 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드러난 하느님이 구원하시는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교리의 여러 진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와 이루는 관계는 서로 다르므로, 진리의 서열, 또는 ‘위계’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을 포함한 교회의 모든 가르침에 대해서, 그리고 신앙의 도그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37.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은 덕목들 사이에, 그리고 그 덕에서 나오는 행동들 사이에 그 나름의 ‘위계’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디아 5,6)입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의 행동들은 성령의 내적 은총을 가장 완벽하게 겉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새 법(the New Law)의 기초는 성령의 은총 안에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에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토마스는 그래서 외적 행동과 관련해서, 덕목 가운데 ‘자비’야말로 가장 위대한 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자비는 그 자체로 덕목 가운데 가장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덕들은 자비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무엇보다도 그 덕들의 부족함을 메워주기 때문입니다. 그 자비를 통해 그분의 전능하심이 가장 위대하게 드러납니다.”


38.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사목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의회의 가르침은 교회의 오랜 신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첫째, 복음을 가르칠 때 균형감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는 어떤 주제를 빈번하게 다루는지, 가르침에서 그 주제를 얼마나 강조하는 지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례주년에서 어떤 본당 사제가 절제를 열 번 말하지만, 사랑이나 정의를 두세 번만 말한다면 불균형이 나타나고, 엄밀하게는 복음을 가르치거나 교리를 가르칠 때 가장 많이 제시되어야 할 그런 덕(사랑과 정의)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보다는 법에 대해서, 그리스도보다는 교회에 대해서,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교황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할 때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39. 덕목 사이에는 유기적 일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이상에서 그 어떤 덕도 제외될 수 없음과 같이 어떤 진리라도 부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 메시지가 갖는 통합성은 해체되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각 진리는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갖는 조화로운 전체성에 결합됐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진리들은 중요하며 서로를 밝게 비춰줍니다.


가르침이 복음에 충실할 때, 특정 진리들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해집니다. 또 이 때 그리스도교 도덕이 단순히 스토아 철학의 한 형태도, 자기 부정도, 단순한 실천 철학도, 혹은 죄와 거짓의 목록도 아님이 분명해집니다. 그 모든 것 이전에,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께 응답하도록, 다른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보라고, 다른 사람의 선익을 찾아 길을 나서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 초대를 모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덕들은 사랑의 이 응답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초대가 강하게 그리고 매력적으로 빛나지 않으면, 교회의 가르침의 체계는 사상누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기입니다. 이는 가르치는 것이 자칫 복음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교의적 관점 혹은 도덕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메시지는 그 신선함을 잃을 위험이 있을 것이며, “복음의 향기”가 더 이상 나지 않을 것입니다.



IV. 인간적 한계로 구체화되는 사명


40. 교회는 그 자체로 선교하는 제자입니다. 교회는 계시된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진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의 임무는 “교회의 판단이 성숙해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다른 학문도 고유한 방법으로 이 일을 돕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과학에 관해서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런 연구를 높이 평가하는데, 그 학문은 “교회의 가르치는 사명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사항들을 이끌어내는 것을”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수많은 주제들을 연구하고 자유롭게 성찰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철학 사조, 신학 사조, 사목실천 사조들은 존중과 사랑의 정신으로 성령에 의해 조화를 이룬다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갖는 그 풍부함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인도하고 아무런 해석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단일한 교리체계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 비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그 같은 다양성이야말로 소진될 수 없는 복음의 풍요로움이 갖는 다른 모습들을 드러내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합니다.


41. 동시에, 오늘날 빠르고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 속에서, 우리는 변치 않는 진리들을 새로움을 갖고 나타나는 언어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신앙의 보고는 하나입니다. ...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신앙인들이 완전히 정통적인 언어로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과 거리가 먼 어떤 것을 취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그 언어들 사이에 말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인류에 관한 진리를 소통하려는 거룩한 의도를 갖고, 때로는 거짓 신이나 실제로는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닌 인간적 이상을 신앙인들에게 줍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 실체를 전하는 데에는 실패하면서 어떤 공식적 표현에만 매달립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절대로 잊지 맙시다. “진리는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 양식의 쇄신은 현대인에게 변치 않는 의미를 갖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됩니다.”


42. 이 모든 것이 복음을 가르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이 갖는 아름다움을 모든 사람이 분명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바란다면 말입니다. 물론 교회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에게 쉽게 이해시키고 납득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십자가의 그 어떤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신앙은 분명히 불명료함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불명료함이 우리 신앙에 동의하는 이들이 갖는 확고함을 손상시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명료한 이성과 논증을 넘어 ‘사랑’이라 불리는 누이가 됩니다. 우리는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의 삶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삶은 언행일치와 사랑과 증언으로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의를 불러일으킵니다.


43. 교회의 지속적 식별 과정에서, 교회는 어떤 관습이 복음의 핵심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비록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적절하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아름다운 것일 수 있지만, 복음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더 이상 기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주저하지 말고 재검토해야 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당대에 분명히 실효성이 있었지만 백성의 생활을 형성하고 지도하는데 더 이상 유용성을 갖지 않는 그런 규칙이나 규정을 갖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하느님 백성에게 주신 규정들은 “매우 적다”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는 후대에 교회가 연이어 내놓은 이용한 규정들은 “신자들의 삶에 짐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의 종교가 봉사의 형태가 되도록 절제되어야만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반드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수세기 전에 하신 이 경고는 오늘날 정말로 시의적절한 것입니다. 교회의 개혁과 모든 이에게 다가갈 수 있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개혁을 숙고할 때 반드시 이 점이 그 기준의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44. 더구나 신앙이나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형제자매로 동행하는 목자와 교우들은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행동에 대한 인책성(引責性)과 책임은 무지, 부주의, 폭력, 공포, 습관, 무절제한 감정과 그 외에 정신적 사회적 요인들 때문에 줄어들거나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적 이상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목자와 교우들은 인내와 자비를 갖고 인격적 성장에 동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인격적 성장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에게 저는 고해소가 고문실이 아니라, 우리가 최선을 다하도록 자극하는 주님의 자비를 만나는 곳임을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인간이 갖는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만 더 나가갑시다. 그것이 겉으로는 질서정연해 보이면서 어떤 어려움도 직면하지 않으며 지내는 일상보다 더욱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주는 매력과 위안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사람 안에 신비롭게 활동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랑은 사람들의 업적과 실패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45. 우리는 복음화의 과업이 언어와 환경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복음화의 과업은 구체적인 환경에서 복음의 진리를 효과적으로 소통시키는 길을 찾습니다. 물론 언제나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복음의 진리와 선함과 빛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선교의 마음은 이 한계를 아는 것이며, 스스로 “약한 이에게 약한 사람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토 9:22)이 되는 것입니다. 선교의 마음은 결코 스스로를 가두어서도, 자기의 안전지대로 피해서도, 완고함과 방어책을 채택해서도 안 됩니다. 선교의 마음은 복음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성령의 길을 식별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래서 항상 좋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비록 그 과정 중에 신발에 거리의 흙이 묻더라도 말입니다.


V. 열린 마음을 지닌 어머니



46. “길을 나서는” 교회는 그 문이 항상 열려 있는 교회입니다. 변방에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세상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다른 이들을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여기저기 달리는 것을 멈추고 길 위에서 비틀거리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의 열망을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때로 우리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는 아들이 돌아올 때 들어올 수 있도록 항상 문을 열어놓습니다.


47. 교회는 그 문이 항상 활짝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개방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표지는 우리 교회의 문들이 항상 열려 있어서 성령의 인도로 누군가 하느님을 찾기 위해 왔을 때 그가 문이 닫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닫혀 있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문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교회의 생활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야만 합니다. 성사의 문이 사소한 이유로 닫혀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그 자체로 “문”인 세례 성사의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성체성사가 성사생활의 완성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사람을 위한 상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위한 강력한 약이며 영양제입니다. 이런 신념은 우리가 뭐든지 과감함과 신중함으로 고려하라는 사목적 결론을 낳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은총의 촉진자라기보다는 은총의 심판자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요금 징수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아버지의 집이며, 그곳에서 나름대로 문제를 갖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한 곳입니다.


48. 만일 전체 교회가 이런 선교의 열망을 취한다면, 교회는 아무도 제외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먼저 가야합니까? 복음을 읽어보면 답은 분명합니다. 우리 친구들과 부유한 이웃보다는 오히려 가난하고 아픈 이들, 일상적으로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루카 14:14)입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 메시지의 선명함을 약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설명도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고 항상 “가난한 사람은 복음의 우선적 수취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유롭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건설하시려 오신 하느님 나라의 표지입니다. 완곡하게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뗄 수 없는 유대가 있습니다.” 제발 그들을 버리지 마세요.


49. 길을 나섭시다. 그리고 모든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건네기 위해 나갑시다. 제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제들과 교우들에게 자주 한 말을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온 교회에 말씀드립니다.


저는 갇혀있으면서 자기만의 안전에 몰두하는 건강하지 못한 그런 교회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입고 멍들고 먼지 묻은 교회를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리에서 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교회가 스스로 중심이 되려고 애쓰다가 결국 강박관념과 절차의 그물에 걸려버리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은 그만큼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가 그리스도와 우정을 나눔으로써 얻는 힘과 빛과 위로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신앙 공동체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 인생에서 목표와 의미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입니다.


저의 희망은 재가 되어버릴 두려움이 아닙니다. 거짓 안전감을 주는 구조들 안에, 우리를 무자비한 심판으로 만드는 규칙들 안에,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는 습관들 안에 갇혀 있는 두려움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주하는 사이에도 굶주린 사람들이 우리 문 앞에 서 있고, 예수님께서는 지치지 않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6,37)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말입니다. 그것만이 저의 두려움입니다.


제2장

위기에 처한 공동의 헌신



50. 복음화와 관련된 기본적인 물음을 다루기 전에 우리가 살고 노동해야 할 환경을 간략하게 다루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처치 방법을 수반하지 않는 “진단의 과잉”이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우리는 불편부당하고 치료적인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현실문제를 다루는 순수한 사회학적 분석의 도움을 언제나 제대로 받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여기서 제가 제시하고 싶은 것은 복음적 식별에서 훨씬 중요한 것일 텐데, 선교에 나서는 제자가 취하는 이 접근은 “성령의 힘과 빛으로 육성되는” 접근입니다.


51. 현실을 자세하고 완전하게 분석하는 것이 교황의 임무는 아니지만, 저는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무엇보다도 꼼꼼하게 탐구하기”를 권고합니다. 이것은 사실 막중한 책임입니다. 실제 어떤 현실을 효과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면 비인간화의 과정을 밟을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되돌리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충돌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구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선한 정신의 움직임을 선택하고 악한 정신의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저는 보편적 교도권의 여러 문헌들이 다양하게 분석한 것들뿐만 아니라, 지역과 대륙의 주교들이 제시한 것까지도 승인합니다. 이 교황권고에서 저는 사목적 전망에서 교회선교를 쇄신하는 추진력을 약화시키거나 제한할 수 있는 몇 몇 요소들을 간략하게라도 살펴볼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하느님 백성의 존엄함과 생활을 위협하기 때문에, 혹은 교회의 기구들과 교회의 복음화 사업들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I. 오늘날 세상의 도전들


52. 우리 시대 인류는 많은 분야에서 이루어진 진보에서 보듯이 역사의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의료, 교육, 정보통신 같은 분야에서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일들을 칭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대다수의 현대인이 하루하루 겨우 살고 있으며,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수많은 질병이 퍼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이른바 부유한 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삶의 기쁨은 수시로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어지고 폭력은 기세를 올립니다.


불평등은 점점 더 또렷해집니다. 그것은 일종의 생존 투쟁입니다. 그것도 인간이 존엄성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에서 치러지는 것입니다. 이런 전대미문의 변화는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양적, 질적으로 집중적인 발전을 이루어졌고, 그 발전된 과학과 기술을 자연과 생명 분야에 즉각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권력, 곧 특정할 수 없는 종류의 권력을 이끌어냈습니다.


배제의 경제를 거부합시다


53.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인간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분명한 한계를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 같은 경제는 사람을 죽입니다. 어떻게 나이 든 노숙자의 죽음은 뉴스가 되지 않으면서, 주식시장이 2포인트 하락한 것은 뉴스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배제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선 음식을 버리는 상황에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서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불평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릅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희생시켜서 살아갑니다. 그 결과로 대다수의 사람이 배제되고 주변화 되고 맙니다. 노동도 못하고, 가능성도 없고, 벗어날 수단도 없이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사용하고 버려도 되는 소비재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버릴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문화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착취와 억압에 관한 문화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입니다. 배제된 이들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일부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배제된 이들은 사회의 하층민이나 그 변두리 사람이나, 공민권을 빼앗긴 사람들이 아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사회의 한 부분조차 되지 못합니다. 배제된 이들은 “착취를 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버려진 사람들이며, “쓰다 남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54. 이런 맥락에서 어떤 이들은 낙수이론을 계속해서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 낙수 이론은 자유시장으로 이루어진 경제성장이 세상에 더 큰 정의와 포용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견해는 사실로 입증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경제 권력으로 무장한 이들의 선심과 지금의 경제 시스템을 신성시하는 작업들에 대해 조악하고 순진한 신뢰를 보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는 동안 배제된 이들은 여전히 기다리고만 있을 뿐입니다.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혹은 이기적 이상에 몰두하는 것이 바로 무관심의 세계화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거의 모두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아무런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물을 흘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라는 듯이 말입니다. 번영의 문화는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장이 새로운 것을 내놓으면 전율합니다. 그러는 동안 아무런 기회도 갖지 못하여 망연자실하며 사는 사람들은 단순한 구경꾼으로 전락합니다. 물론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돈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거부합시다


55. 이런 상황을 일으킨 원인 가운데 하나를 사람이 돈과 맺은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돈이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금융 위기가 인간이 으뜸임을 부정하는 인간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과합니다. 황금 송아지를 경배하던 과거(탈출 32:1-35)가 무자비한, 그러나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는 돈이라는 우상으로, 참된 인간적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비인간적인 경제의 독재로 나타납니다. 금융과 경제에 영향을 주고 있는 전 세계적 위기는 그 경제적 불균형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을 단지 무엇인가 필요한 존재, 곧 소비가 필요한 존재로 환원시키고 있습니다.


56. 소수의 소득이 증대되는 동안, 행복한 소수가 즐기는 번영에 비추어, 대다수의 사람의 소득격차는 더 벌어집니다. 이 불균형은 시장과 금융투자의 의 절대자율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들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 이데올로기들은 공동선의 불침번이 되라는 임무를 맡고 있는 국가의 권리, 즉 어떤 형태로든 시장과 금융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의 행사를 거부합니다. 그럼으로써 보이지도 않는, 그러나 실질적인 새로운 독재자가 나타났는데, 이 독재자는 일방적으로 그리고 임의로 그 법칙과 규칙을 강요합니다. 부채와 대부이자의 누적 역시 각 나라의 경제 잠재력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게 하며, 시민들이 실재 구매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여기에다 광범위한 부패와 자기 잇속만 차리는 탈세도 더해야 하는데, 이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권력과 소유에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수익을 늘일 수만 있다면 자연처럼 훼손하기 쉬운 것은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이런 시스템에서, 신성한 것이 되어버린 시장의 이익 앞에서 모든 것은 무력해지고, 시장의 이익이 유일한 규칙이 되어버립니다.


봉사하기는커녕 지배하는 금융 제도는 거부합시다


57. 이런 태도의 배경에는 윤리의 거부, 그리고 하느님의 거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윤리는 비웃어도 되는 조롱거리쯤으로 간주됩니다. 윤리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것, 곧 생산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왜냐하면 윤리는 돈과 권력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윤리가 이런 현상을 인격을 실추시키고 상황을 조작한다고 단죄하기 때문에, 윤리를 위협으로 느낄 뿐입니다. 실제로, 윤리는 시장의 범주를 벗어난 어떤 헌신적인 응답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시장의 범주가 절대화될 때 하느님은 오직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엇, 경영할 수 없는 그 무엇, 위험하기까지 한 그 무엇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완전한 자기실현과 모든 형태의 노예화로부터의 자유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윤리(비 이데올로기적인 윤리)는 시장이 균형과 보다 인간적인 질서를 가질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저는 금융 전문가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고대 현인의 격언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부를 이웃과 나누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계를 빼앗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부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것이다.”


58. 윤리적인 요소들을 고려하여 금융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접근방법에 대한 확실한 변화를 요구합니다. 저는 정치지도자들이 결단력을 갖고, 또 미래를 바라보며 이 도전에 응답하기를 촉구합니다. 물론 각각의 경우가 갖는 특성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이란 인간에게 봉사해야지 절대로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교황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똑 같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교황에게는 부자는 반드시 가난한 사람을 돕고, 존중하며,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환기시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관대한 연대를 권고합니다. 저는 경제와 금융이 인간을 위한 윤리적 접근으로 돌아올 것을 권고합니다.


폭력을 양산하는 불평등을 거부합니다


59. 오늘날 우리는 많은 곳에서 보다 더 큰 안전을 요구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그리고 백성 사이의 불평등과 배제가 없어지지 않으면, 폭력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더 가난한 백성들이 폭력을 휘두른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등한 기회가 없다면,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공격과 갈등은 증가하기 좋은 토양을 만나고 결국에는 폭발할 것입니다. 어떤 사회든 - 지역, 대륙, 지구 차원이든 - 과격한 그룹에게 여지를 남겨둔다면, 어떠한 정치 프로그램이나 사법부나 감시 시스템에 쏟는 정치적 자원도 안정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평등이 시스템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폭력적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경제 시스템이 그 뿌리부터 부당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선이 확산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을 묵인하는 것 역시 그 악영향을 확산시켜 어떤 정치적 사회적 시스템도, 그것이 아무리 견고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소리 나지 않게 붕괴시키고 맙니다. 만일 모든 행동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면, 한 사회의 제도화된 악은 지속적인 해체와 죽음의 가능성을 갖습니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은 부당한 사회구조들로 구체화된 악입니다. 우리는 소위 “역사의 종말”(지금이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시장 자유주의로 역사가 완성되었다는 의미의)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지속가능하고 평화로운 발전의 조건들은 아직 적절하게 구체화되고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0. 오늘날 경제 메카니즘은 터무니없는 소비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등과 고삐 풀린 소비주의는 사회조직에 겹겹이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불평등은 궁극적으로 폭력을 낳습니다. 무력에 의존하는 그 폭력은 해결할 수도, 해결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무력에 의존하는 폭력은 안전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는 사람들에게 거짓 희망만 제공할 뿐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해결책을 마련하기는커녕 무기와 폭력이 새로우면서도 보다 더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가난한 나라와 더 가난한 나라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그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합니다. 검증되지 않는 일반화에 빠짐으로써 그들은 그 나라들을 안정시킬 수 있는 “교육”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변으로 내몰린 이들을 오히려 분통터지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 그 나라의 정부들, 기업들, 기구들에서 - 그 지도자들의 정치 이념이 어떤 것이든,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부패를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문화의 도전


61. 우리가 현재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도전을 외면하지 않고 맞서려 할 때 복음도 전해야 합니다. 이 도전들은 종교 자유에 대한 분명한 공격이나 그리스도인에 대한 새로운 박해의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종교 탄압과 박해가 증오와 폭력의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보이고 있는 광범위한 무관심과 상대주의가 더 큰 문제입니다. 무관심과 상대주의는 전체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의 위기와 환멸에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조직 전체에 해를 끼칩니다. 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주관적 진리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시민들은 개인적인 성취와 인간적 욕망을 뛰어넘는 공동의 계획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인정해야만 합니다.


62. 오늘날 주류 문화에서는 외적인 것, 즉각적인 것, 가시적인 것, 빠른 것, 표피적인 것, 그리고 잠정적인 것을 우선합니다. 실질적인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밀려납니다. 많은 나라에서 세계화는, 경제적으로 발전했지만 윤리적으로는 쇠약해져버린 다른 문화를 쫓아서, 그 고유의 문화적 토대를 급속하게 해체한다는 것, 사상과 행동 양식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여러 대륙에서 열린 시노드에서 주교들이 제기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주교들은 수년 전 회칙 <사회적 관심>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아프리카 나라들을 “기계의 한 부품, 거대한 바퀴의 톱니”로 만들려는 시도가 빈번하게 이루지고 있습니다. 또 주교들은 “이것은 사회 홍보의 영역에서도 일어나는 문제로서, 대개 북반부에 있는 센터들에 의해서 운영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들(아프리카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을뿐더러, 그 국가들이 처한 문제 또는 그들의 문화적 특질에 관해서도 합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같은 취지로, 아시아의 주교들도 “아시아 문화를 향해 다가온 외부의 영향을 주목하였다. 대중매체에 과도하게 노출된 결과로 새로운 행동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미디어와 오락 산업의 부정적 측면이 전통적 가치들, 특히 혼인의 신성함과 가정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63.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종교운동의 확산은 가톨릭 신앙에 도전이 됩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근본주의가 되려하고, 어떤 것은 하느님이 없는 영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물질주의, 소비주의, 그리고 개인주의 사회에 대한 인간적 반작용입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빈곤에 처한 사람들과 사회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사실 인간적으로 큰 고통 속에서 겨우 살아가면서 즉각적인 문제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일정부분 독특함이 없지는 않지만, 이런 종교운동은 개인주의적 문화가 팽배한 곳에서 세속적 이성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진공상태를 채워주게 됩니다. 만일 세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 일부가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본당이나 공동체의 구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혹은 단순하건 복잡하건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다루면서 관료주의적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많은 곳에서 행정적 접근이 사목적 접근을 압도합니다. 복음화 활동은 제쳐두고 대신 성사를 관리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도 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64. 세속화(secularization) 과정은 신앙과 교회를 사적이며 인간적인 영역으로 축소시키려 합니다. 더 나아가, 초월적인 것을 철저하게 거부함으로써 세속화 과정은 윤리의 타락을 가져오고, 개인과 집단의 죄의식을 약화시키며, 상대주의를 키웁니다. 이런 것들은 전체적으로 방향감각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특히 변화에 민감한 사춘기와 청년기에 그렇습니다. 미국 주교들이 올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교회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객관적 도덕규범을 주장하지만, “우리 문화에서 교회의 이 가르침이 부당하다고, 즉 기본 인권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개인의 권리를 절대시하는 신념과 결합된, 도덕 상대주의의 형태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시각에서는 교회가 특정한 편견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우리는 정보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우리에게 데이터를 퍼붓고 있습니다. 모든 정보는 그 중요성에서 동등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그리고 이는 도덕적 통찰 영역에서 현저한 가벼움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대응해서 우리는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고, 성숙한 도덕적 가치의 발전을 격려하는 교육을 제공해야 합니다.


65.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세속주의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에서, 여론은 그리스도 신자가 소수에 불과한 나라에서조차, 가톨릭교회를 신뢰할 수 있는 제도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를 가장 힘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과의 연대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제도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습니다. 교회는 평화, 사회의 조화, 토지와 생명 수호, 인권과 사회적 권리 등에 영향을 주는 문제들의 답을 찾는데 있어서 중재자로서 항상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가톨릭 학교와 대학들이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움도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에 관한 신념에 충실해서 어떤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여론에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이 충실성을 알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66. 가정은 심각한 문화적 위기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모든 공동체와 사회적 유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의 경우, 이 유대의 약화는 특별히 심각합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초 세포이며, 차이점을 갖고 있지만 서로에게 속한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부모가 자기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혼인을 마음만 먹으면 수정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구축할 수 있는 것쯤으로, 단순히 감성적 만족을 위한 형식쯤으로 여기려 합니다. 그러나 혼인이 사회에 기여하는 불가결한 요소는 남녀의 감정이나 일시적 요구를 초월한다. 프랑스의 주교들이 가르친 것처럼, 혼인은, “그 정의상 덧없는, 사랑의 감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서로 완전한 생명의 친교를 맺는다는 것을 의무로 받아들인다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67. 오늘날 세계화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개인주의는 인격적 관계가 갖는 안정성과 발전을 약화시키며, 가족의 유대를 왜곡하는 생활태도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친교는 인간 상호 인격적 유대를 치유하고, 증진하고, 강화시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관계는 이 친교를 요구하고 촉진합니다. 사목 활동은 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특히 일부 나라에서, 여러 형태의 전쟁과 갈등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을 존경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중개하고, 관계를 강화하고, 그리고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려는 확고부동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고상한 목표를 추구하고 권리들을 수호하려는 여러 다양한 단체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사회와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다는 표지입니다.


신앙의 토착화에의 도전들


68. 어떤 민족의 - 대부분 서구에 있는 - 그리스도교적 토대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이곳에서는, 특별히 가장 궁핍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가 갖고 있는 가치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성령이 씨를 뿌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연대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 경우에 그곳에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성령의 자유롭고 무제한적인 활동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는 통상적인 “말씀의 씨”를 인정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씨는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이 있는데,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회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고유의 표현과 수단을 갖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특색으로 하는 문화가 갖는 막중함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현대 세속주의의 맹공이 있기 전에, 복음화된 문화는 그 한계를 갖고 있음에도 단순히 신자들의 숫자를 합하는 것 이상의 더 많은 자원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화된 대중문화는 보다 공정하고 믿음이 가는 사회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연대와 신앙의 가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훌륭하다고 인정할만한 특별한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69. 복음을 토착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화들을 복음화 시켜야 합니다. 가톨릭의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들에서, 문화의 복음화는 이미 존재하는 풍부함을 촉진하고, 기르고,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종교적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들이나 철저하게 세속화된 나라들에서, 문화의 복음화는 문화를 복음화하기 위한 새로운 과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는 장기적 계획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각 문화와 사회 그룹은 정화와 성장이 필요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대중문화에서도 복음으로 치유해야 할 결함을 볼 수 있습니다. 남성우월주의, 알코올 의존증, 가정폭력, 저조한 미사참여, 마술로 이어지는 운명론적 혹은 미신적 생각등을 그 결함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대중적 경건함은 그 자체로 이런 결함들로부터의 해방과 치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70. 때때로 그리스도교적 경건함이 갖는 힘을 강조하기보다는 특정 그룹의 전통과 외적 표현을 더 강조하는 경우도, 혹은 다른 모든 것을 대신하려는 사사로운 계시로 추정되는 것을 더 강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인적이며 감성적인 신앙생활을 반영하는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교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대중적 경건함’에 부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사회의 진보나 평신도의 양성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이런 외적 표현을 보급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그들은 경제적 이익이나 다른 이에 대한 권력을 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근 수 십 년 동안 가톨릭교회가 젊은이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는 데 실패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톨릭 전통에 환멸을 느끼며 더 이상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점점 더 많은 부모들이 그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게 해주지 않으며,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신앙 공동체를 향한 분명한 이탈(exodus)도 있습니다. 이런 실패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가정 안에서 대화할 기회의 부족, 소통 매체의 영향, 상대주의의 주관주의, 시장을 먹여 살리는 무절제한 소비주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의 결여, 환영하는 분위기를 갖고 있지 못한 교회 기구들,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서 신앙적 충실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점 따위가 포함됩니다.


도시문화에서 오는 도전들


71. 새로운 예루살렘, 거룩한 도시(묵시록 21:2-4)는 모든 인류가 가야할 목표입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인류와 역사의 완성이 도시에서 실현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호기심을 끕니다. 우리는 도시의 가정에, 도시의 거리와 광장에 계시는 하느님을 보는, 신앙의 시선으로 우리 도시들을 관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개인이나 그룹이 자기 생활에서 용기와 의미를 찾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동반합니다. 그분은 우리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들 가운데서 연대, 형제애, 그리고 선과 진리와 정의를 향한 열망을 키우십니다. 이 현존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고 드러내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진실한 마음으로 찾는 사람에게서 숨지 않으십니다. 비록 그들이 불투명하고 투박한 태도로 모호하게 그분을 찾더라도 말입니다.


72. 도시에서는 시골과는 다르게, 생활에 있어서 종교적 차원이 여러 생활태도로 나타납니다. 도시의 일상생활 리듬은 장소와 사람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빈번하게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투쟁에는 생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또 생명에 대한 깊은 이해는 종종 심오한 종교적 감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한 우물가에서 나눈 대화처럼(요한 4:1-15), 우리 역시 (도시의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이 점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73. 새로운 문화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인들이 의미를 만들어내고 또 해석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곳에서 말입니다. 대신 그리스도인이 이 문화에서 새로운 언어, 기호, 메시지와 패러다임을 취하는데, 이 새로운 언어와 기호, 그리고 메시지와 패러다임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합니다. 그렇지만 종종 이 새로운 접근법은 예수님의 복음과 대립하기도 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문화가 생겼으며, 도시에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시노드는 오늘날 이렇게 넓은 지역에서 발생한 변화와 그 변화가 만들어낸 문화가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우선적 현장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기도와 친교를 가져다 주는 혁신적인 공간을 상상하도록 부추깁니다. 도시 주민에게 보다 의미가 있고, 도시 주민의 마음을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상상합니다. 매체의 영향을 통해, 도시 지역은 동일한 문화적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 변화들은 도시의 생활 방식도 뚜렷하게 바꾸고 있습니다.


74. 하느님과 다른 사람,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방식에 빛을 비출 수 있고, 핵심적인 가치들을 불러일으키는 복음화가 요청됩니다. 새로운 이야기방식과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있는 곳에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도시의 깊숙한 영혼에 가져가야 합니다. 도시들은 여러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규모가 큰 도시에서는 공동의 상상력과 삶에 대한 꿈을 공유하는 그룹들 안에서 연결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적 상호작용이 생겨납니다.


새로운 문화들과 비가시적 도시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다양한 하위문화들이 공존합니다. 그리고 종종 분리와 폭력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루기 어려운 대화를 위해 봉사해야만 합니다. 한편으로는 개인적 생활과 가정생활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수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비 시민” “반쪽 시민” 그리고 “여분의 도시 사람들”도 많습니다. 도시는 일종의 영구적 유동성을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도시는 그 거주민에게 수없는 가능성을 제공하면서도, 많은 사람에게 삶의 완전한 발전을 가로막는 특정한 장애물을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명암은 고통스러운 아픔을 가져옵니다. 세상의 많은 지역에서, 많은 도시는 수천의 군중이 자유와 정치 영역의 권리와 정의와 다양한 것을 요구하는 군중의 시위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위는 무력으로도 잠재울 수 없을 것입니다.


75. 우리는 도시에서 인신매매, 마약거래,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착취, 노인과 영아의 유기, 다양한 형태의 부패와 범죄행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교류와 연대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곳이 빈번하게 소외와 상호불신의 공간이 됩니다. 주택과 단지는 서로를 결합하고 통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격리되어 보호하기 위해 건설됩니다. 복음 선포는 이 같은 환경에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기반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도시들에 생명의 풍부함을 부어주시려 하기 때문입니다.(요한 10:10 참조)


복음은 통합되고 온전한 인간적 생활을 제시합니다. 이 인간적 생활이야말로 도시가 앓는 질병에 가장 좋은 치료약입니다. 비록 단일하고 확실한 어떤 한 복음화 프로그램이 이 복잡한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문화와 모든 도시에서 인간적 생활을 충만하게 살고, 복음의 증인이라는 누룩으로서 모든 도전에 응하는 것은 우리를 더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것이며,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II. 사목활동가들이 직면한 유혹들



76. 저는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헌신적으로 일하시는 분들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주교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겸손하게 숨어서 봉사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사목활동가의 그 많은 활동들을 길게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저는 우리 모두가 오늘날 세계화된 문화 속에서 직면할 수밖에 없는 도전에 대해서 성찰하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날 세상에서 교회가 기여하고 있는 것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그것이 정의롭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 그리고 수많은 교회의 사람들이 범한 죄에 대해 우리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과 고통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사랑을 실천하며 자신의 삶을 내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을 치유하거나, 임시병원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돕습니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에서 다양한 의존(중독)의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는 선물입니다. 그들은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교육에 헌신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잊고 있는 노인을 돌봅니다. 그들은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가치를 소통시킬 길을 모색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불러일으키신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헌신합니다. 저는 자신의 생활과 시간을 즐겁게 희생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보여준 아름다운 모범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저 자신을 보다 완전히 내놓으려는 노력에 있어서 저를 지탱해주고 위로해줍니다.


77. 그러나 이 시대의 자녀로서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오늘날 세계화된 문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문화는 나름의 가치와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면서도, 우리를 제한하고, 익숙하게 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사목 활동가들이 도움과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공간은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향한 개인적 사회적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하는 곳, 가장 심오한 물음과 일상의 관심을 공유하는 곳, 우리의 생활 자체와 경험을 복음의 빛으로 깊이 있게 식별하는 곳”을 말합니다. 동시에 저는 사목 활동가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몇 가지 특별한 유혹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싶습니다.


선교 영성이라는 도전에 응답합시다


78. 오늘날 우리는 축성된 사목자를 포함해서 많은 사목 활동가한테서 자신의 개인적 자유와 안락함에 대한 무절제한 관심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의 신원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즉 자신의 생활에 덧붙여진 것쯤으로 보게됩니다. 동시에 이들은 영성생활을 다른 사람과의 만남, 세상과 관계 맺기, 혹은 복음화를 위한 열정을 촉진하지는 않는, 단지 특별한 위로를 주는 경건한 실천 정도로 여깁니다. 그 결과,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많은 사람들한테서, 비록 그들이 기도할지라도, 극도의 개인주의, 정체성의 위기와 열정의 소멸을 볼 수 있습니다. 극도의 개인주의, 정체성의 위기, 그리고 열정의 소멸은 서로를 키우는 악입니다.


79. 때때로 우리의 미디어 문화와 일부 지성계는 교회의 메시지와 관련해서 냉소주의와 회의주의를 유포시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목 활동가들은, 비록 그들이 기도할지라도, 일종의 열등감 콤플렉스를 갖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그리스도인 정체성과 신념을 숨기거나 상대화합니다. 이것은 악순환합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와 관련해서 불행해집니다. 그들은 자신의 복음화 사명에 공감하지 않으며, 이는 자신의 헌신을 약화시킵니다. 그들은 결국 다른 모든 사람처럼 되려는 집착 때문에 사명이 갖는 기쁨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도 갖고 있는 것을 가지려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복음화 활동은 억지로 하는 것이 되고, 거의 힘을 쓰지 않으며, 극히 제한된 시간만 여기에 할애합니다.


80. 사목 활동가들은 그렇게 (실천적)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상대주의에 빠진 그들의 영성이나 사고방식의 스타일이 무엇이든, 상대주의는 교조적 상대주의보다 더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이 상대주의는 자신의 삶의 방식을 형성하는 깊은 마음의 결정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실천적 상대주의는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는 듯이 행동하고,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결정하고, 다른 이들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목표를 세우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교리와 영성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분명하게 갖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사명을 수행할 때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기보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정적 안전, 권력에의 욕망, 현세의 영광을 찾는 생활태도에 빠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는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우리 스스로 선교의 열정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이기심과 영적 나태를 거부합시다


81. 세상에 소금과 빛을 가져다 줄 선교의 활력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할 때, 많은 평신도들은 자기가 사도의 일 가운데 상당부분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워하고, 자기의 자유로운 시간을 할애해야 할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몇 해 동안 교리교육에 기꺼이 매진할 뜻을 갖고 있는 훈련된 본당 교리교사를 찾는 것이 오늘날 매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자유로운 시간을 지키는 데에만 사로잡힌 사제들도 생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주로 자기의 개인적 자유만을 지키려 하는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화 과업이 우리를 불러 사명을 부여하고, 우리를 그것으로 채우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쁘게 응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위험한 독인 것처럼 치부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사명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것을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결국 무기력하고 나태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82. 문제는 과도한 활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합한 동기도 없고, 그 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기쁘게 하는 영성이 없이, 잘못 수행하는 활동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은 필요이상으로 힘들어지고, 때로는 질병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만족스럽고 행복한 피곤함과는 거리가 멀고, 긴장, 부담, 불만, 그리고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가 됩니다.


이렇게 나태한 사목을 불러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비현실적인 계획에 몰두하고, 자기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심을 갖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일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바랍니다. 몇 가지 계획에만 집착하거나 부질없는 성공을 꿈꾸어서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과 직접 만나지 않음으로써 자기의 일을 비인격화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정보다는 지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나태해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활의 리듬을 지배하고 싶어 합니다. 즉각적인 결과에 집착하는 시대에, 사목활동가가 불일치, 가능한 실패, 비판, 곧 십자가의 낌새를 견딘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83. 그렇게 해서 이 모든 것을 갖춘 거대한 실타래가 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상생활에서 ‘잿빛 실용주의’가 그것입니다. 그 속에서 모든 일이 정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신앙은 그 힘을 잃고 소심해집니다.” 일종의 무덤의 심리가 발전하고 교회를 천천히 박물관의 미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들은 현실, 교회, 그리고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는 가운데, 희망을 잃은 채 무기력한 우울함에 빠져드는 유혹을 체험합니다. 이 무기력한 우울은 “죄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빛을 발하고 생명을 전해야 하지만, 결국 어두움과 내적 싫증만을 만들어내는 그런 일에 사로잡히고, 천천히 사도직을 향한 모든 열정을 소비하고 맙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저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스스로 복음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헛된 염세주의를 거부합시다


84. 복음의 기쁨은 결코 누구도 혹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요한 16,22 참조) 세상의 죄악이, 그리고 교회의 죄악이 우리의 헌신과 열정을 약화시키는 핑계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죄악을 우리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도전으로 바라봅시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어둠 속에서 항상 비추는 성령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물에서 어떻게 포도주가 나오는지, 어떻게 잡초 속에서 밀이 자라는지를 식별하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연지 5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순진한 낙관론과는 거리가 멀고, 여러 어려움에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보다 강해진 우리의 현실주의가 결코 성령과 성령의 풍부함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다시 복자 요한 23세가 1962년 10월12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일에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때로는 우리는 신중함과 기준을 갖고 있지 않지만 열정를 불태우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백성은 파괴와 변명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듯이 항상 참화만을 예견하고 있는 파멸의 예언자들과 달라야만 한다고 느낍니다. 이 시대에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관계의 새로운 질서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인간질서는, 인간의 노력으로 그리고 모든 예상을 뛰어 넘어서, 탁월하고 측량할 수 없는 하느님 계획의 완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계획안에서는 모든 것은, 하다못해 인간의 방해까지도, 교회에 보다 큰 선익이 될 것입니다.”


85. 열의와 대담함을 질식시키는 보다 심각한 유혹 가운데 하나는 패배주의입니다. 패배주의는 흠을 잡고 환멸을 느끼는 염세주의로, “음침한 성격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승리를 온전히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전투에 나설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감 없이 출발한다면, 우리는 이미 전투에서 반쯤 진 것이며, 우리는 재능을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럽지만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바오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음을 마음에 새기며, 굴복하지 않고 전진해야 합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토 12:9)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항상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동시에 승리의 표지로서, 악의 공격 앞에서도 진취적인 부드러움은 낳습니다. 패배주의라는 악령은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도 밀과 잡초를 분리시키려는 유혹의 형제입니다.


86. 어떤 곳에서는 분명히 영성의 “사막화”가 진행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없이 사회를 건설하거나 혹은 그 그리스도교적 뿌리를 제거하려 한 결과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마치 과잉으로 착취되어 사막으로 변하고 있는 땅처럼, 그리스도교가 결실을 내지 못하고, 스스로 고갈되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에 가하는 폭력적 반대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하는 조국에서 자신의 신앙을 숨기도록 강요합니다. 이런 곳 역시 다른 형태의 고통스러운 사막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정과 일터는 신앙을 보존하고 전달해야 할 곳입니다. 그럼에도 이 가정과 일터마저 메마른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막 체험부터, 텅 빈 곳에서부터 우리는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이 갖는 기쁨을, 그 기쁨이 갖는 생생한 중요성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우리는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 갖는 가치를 재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에는 종종 함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드러내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의 표징들, 인생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갈망의 표지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사막에서는, 모범된 삶으로 약속의 땅을 가리키고 그 희망을 이어가게 하는 신앙의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살아있는 샘물이 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이것은 무거운 십자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 자신을 생명을 주시는 물의 원천으로 우리에게 건네주신 것은 십자가에서입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였습니다. 그리므로 우리 스스로 희망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새로운 관계에 동의합시다


87. 오늘날 통신 수단과 네트워크는 유래 없는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함께 사는 “비법”, 어울리고 교류하는 “비법”, 서로 포용하고 지지하는 “비법”을 찾아내고 공유해야 할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혼돈스럽지만 참된 형제애의 체험, 연대의 행렬, 거룩한 순례가 될 수 있는 밀물에 발을 담구는 “비법”을 찾아내고 공유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발생하는 더 많은 가능성은 모든 사람들이 교류하고 연대할 수 있는 더 많은 가능성을 줍니다. 만일 우리가 이 경로를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만큼 좋을 것이며, 그 만큼 고통 따위를 누그러뜨릴 것이며, 그 만큼 자유롭게 하며 희망을 충족시킬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울타리에서 나와 다른 이들과 결합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유익합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은 ‘내재주의’라는 쓴 독약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는 우리의 이기적 선택 때문에 악화될 것입니다.


88. 그리스도교의 이상은 의심, 습관적 불신, 우리만의 자유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오늘날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모든 방어적 태도들을 극복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자유가 주는 편안함으로 피하려 합니다. 혹은 복음이 갖고 있는 사회적 측면인 현실을 부정하면서 몇 몇 가까운 사람들 끼리만의 소규모 모임 속으로 피하려 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육체가 없고 십자가가 없는, 그런 순수하게 영적이기만 한 그리스도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세련된 장치가 제공하고, 명령에 따라 켜고 끌 수 있는 시스템이나 스크린이 제공하는 인간적 상호 관계만을 원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은 위험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우리에게는 도전이 되는 그들의 물리적 현실을, 그들의 고통과 탄원을, 친밀하고 지속적인 우리의 상호활동에 영향을 주는 그들의 기쁨을 직접 만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참된 신앙은 자기를 내어 주는 것,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 봉사하는 것, 다른 사람과 화해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의 순환에로 부르셨습니다.


89. 고립은 내재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이 고립은 하느님께서 자리잡을 수 없는 거짓 자율성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종교의 영역에서 고립은 해로운 자신만의 개인주의에 맞춘 영적 소비주의의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영성에 대한 요구와 거룩한 것에로의 회귀는 분명치 않은 현상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도전은 무신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갈망하는 것에 적합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립의 길로 가면서 그 갈증을 풀지 않도록, 혹은 다른 이들에 관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한, 그런 예수로 자신의 갈증을 풀지 않도록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이 자신에게 치유와 해방을 주고, 생명과 평화를 주는 영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국 자신의 생활을 참으로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지도 못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도 못하는 그런 다른 해결책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90. 대중적 종교심의 참된 형태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대중문화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구체화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것들은 모호한 영적 힘이나 에너지와의 관계가 아니라, 성인들과 마리아,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를 수반합니다. 그것들은 몸과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도피주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 맺기를 키웁니다. 우리 사회의 일부에서, 우리는 공동체 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웰빙 영성”의 다양한 형태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혹은 우리 형제자매에 대한 책임을 멀리하는 “번영의 신학”에, 혹은 자기중심성 이상이 아닌 자아감 없는 체험들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91. 한 가지 중요한 도전은 인격적이며 헌신적인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도록 하는 하느님과의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절대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도망치는 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깊고 탄탄한 유대를 맺지 않은 채, 스스로 숨으려 하거나, 다른 이들과 거리를 두려 하거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조용히 훌쩍 떠나려 하거나, 혹은 이 임무에서 저 임무로 떠나려 할 때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다른 곳들을 꿈꾼다. 그리고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닌다. 그러나 많은 이들을 꾀어낸다.”


그것은 마음을, 때로는 몸까지도 비틀거리게 하는 잘못된 처방입니다. 우리는 유일한 길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올바른 태도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지 배우는 것임을 인정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저항감 없이 다른 사람들을 같은 길을 걷는 동료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을 말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그들의 목소리에서, 그들의 탄식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당하게 공격을 당하거나 배은망덕한 일을 당할 때조차도, 형제애로 살겠다는 우리의 결정을 포기하지 않으며, 십자가의 예수님을 포용하면서 겪는 고통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92. 실제 우리는 참된 치유를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그 길은 우리를 쇠약하게 하는 대신에 치유하는데, 그 길은 바로 신비로운 형제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웃의 거룩함을 보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다른 이들의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것은 바로 형제적 사랑입니다. 지금 여기서, 특히 우리가 “작은 양 떼”(루카 12,32)하고 할 때, 주님의 제자들은 땅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인 공동체로 살아야만 합니다.(마태오 5,13-16 참조) 우리는 항상 복음에 충실하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공동체를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영적인 세속성을 거부합시다


93. 영적인 세속성은 경건함과 교회에 대한 사랑의 모습 속에까지 숨어 있는데, 이는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영광과 인간적 웰빙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을 다음과 같이 질책하신 이유입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이는 곧 “자기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필리비 2,21) 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과 그룹 속에 스며들어서 그 사람들과 그룹들에 의지하면서 여러 형태를 띠고 나타납니다. 그것은 정교하게 개발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항상 외적인 죄와 결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범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에 스며들었다면, “단순히 도덕적인 다른 모든 세속성보다 정말로 훨씬 불길한 것이 될 것입니다.”


94. 이 세속성은 서로 깊게 결합된 방법으로 불타오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지주의의 매력, 곧 순전히 주관적인 신앙인데, 이는 자신을 위로해 주고 빛을 밝히기 위한 특정 체험이나 일군의 사상과 일단의 정보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만의 생각과 느낌에 자신을 가두어버리고 맙니다.


다른 하나는, 특정 규칙을 준수하거나 과거의 특정 가톨릭 스타일에 철저하게 충실하기 때문에 우월감을 느끼고 자신의 힘만을 믿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아 도취의 신펠라지오주의입니다. 이 경우 교리와 규칙에 충실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신 자아도취적이고 권위적인 엘리트 의식을 갖게 합니다. 복음화 대신에 다른 사람을 분석하고 분류합니다. 은총을 향하는 문을 여는 대신에 자신의 힘을 조사하고 검증하는 데 소진합니다.


이 두 경우에, 누구도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나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인간중심의 내재론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를 혼합한 형태인 이 두 개의 세속성에서 참된 복음화의 추동력이 나타나기란 불가능합니다.


95. 이런 교활한 세속성은 여러 태도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 태도들은 서로 맞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똑 같이 “교회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례와, 교리, 교회의 특권에 여봐란 듯이 몰두하지만, 복음이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에게 실제로 미치는 영향과 현 시대에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 교회의 생활은 박물관의 일부 혹은 선택된 소수의 재화 같은 것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다른 경우, 이 영적인 세속성은 사회적 정치적 소득이 주는 매력 뒤에, 혹은 실용적인 일들을 관리할 수 있다는 그들의 자부심이 주는 매력 뒤에, 혹은, 자기에게만 도움이 되며 자아를 실현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강박이 주는 매력 뒤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보여주기 위한 관심으로 나타나며, 겉치장, 만남, 저녁식사와 연회로만 이루어지는 사회생활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경영, 통계, 계획과 평가에 몰두하는 기업가 정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그 수혜자는 물론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 조직으로서 교회입니다. 여기에는 육화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리스도의 흔적은 없습니다. 폐쇄된 엘리트 그룹이 형성될뿐입니다. 길을 나서고 멀리 있거나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찾지 않습니다. 복음적 열정 대신에 만족과 방종이라는 공허한 즐거움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96. 이런 식의 생각은 작은 권력에도 만족하는 사람들의 허영을 키우기도 합니다.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 분대의 이등병이 되기보다는 패배한 부대의 장군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허영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대단한 사도적 계획을 꿈꿉니까! 패배한 장군처럼 얼마나 꼼꼼하게 계획을 세웁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의 교회로서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희생과 희망, 매일의 투쟁과, “우리 이마의 땀”을 만들어내는 노동 속에서 출실하게 보낸 삶의 역사이기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이뤄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스페인어로 이것을 “habriaqueismo”라고 부르는데, 높은 데에서 지시를 내리는 사목전문가와 영적 지도자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환상에 사로잡히고, 우리 백성이 겪는 어려움이나 실제적인 삶과 만나지 않습니다.


97. 이런 세속성에 빠진 사람은 위에서 그리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합니다. 그들은 자기 형제자매가 예언하는 것을 배척합니다. 그들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불신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끊임없이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보이는지에만 매달립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자신만의 내재성과 이익이라는 제한된 지평에만 열려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죄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진정한 용서를 향해 문을 열어놓지도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선한 것으로 가장된 엄청난 부패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울타리에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사명을 유지함으로써, 그 같은 부패를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박한 영적 사목적 장식을 갖고 있는 세속의 교회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교회를 숨 막히게 하는 이 세속성은 오직 성령의 순수한 공기를 들이마심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외적인 광신 속에 숨은 교회의 자기중심성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복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들 가운데서 서로 싸우는 것을 거부합시다


98. 하느님 백성 가운데에서, 그리고 교회의 여러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이웃 속에서 그리고 작업장에서,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조차 얼마나 많은 싸움이 질투와 시기 때문에 벌어집니까! 영적 세속성은 일부 그리스도인을 다른 그리스도인과 싸우게 합니다. 자신의 권력, 특권, 즐거움, 그리고 경제적 안전 추구에 방해가 된다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더 큰 교회 공동체의 일부로 사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권력 중추부의 측근 그룹”을 만들어냄으로써 일종의 배타의 정신을 갖고 삽니다. 풍부한 다양성을 갖고 있는 전체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대신에, 그들은 그 자체로 다르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저런 그룹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99. 우리의 세상은 전쟁과 폭력으로 찢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나누는 광범위한 개인주의로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개인주의는 자기만의 웰빙을 쫓아감으로써 사람을 서로 맞서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과거의 갈등과 분열이 재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이 그 공동체에서 형제적 친교라는 빛나고 매력적인 증거를 제시해줄 것을 특별히 요청합니다. 여러분이 서로를 얼마나 돌보는지, 여러분이 서로를 격려하고 동행하는지를 모든 사람이 보고 감탄케 합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온 마음으로 아버지께 바친 기도입니다.


“그들이 모두 ... 우리 안에 ...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그리하여 ...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질투라는 유혹을 경계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한 배를 타고 같은 항구를 향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은사, 모두를 위한 그 은사에 기뻐하는 은총을 청합시다.


100. 역사의 분열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 용서와 화해로 부르는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기억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형제적 화해를 이룬 공동체를 실제로 보게 된다면, 그 증거가 빛나고 매력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 공동체가, 또 봉헌생활을 하는 사람조차 다양한 형태의 적개심, 분열, 중상, 비방, 뿌리 깊은 반목, 시기,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특정 이념을 강요하는 것, 심지어는 분명히 마녀사냥으로 보이는 박해까지 견뎌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견뎌야 할 길이라면, 우리는 누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101. 사랑의 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우리에게 사랑의 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사랑의 법이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서로 사랑하도록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우리 모두에게 권고했습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그리고 다시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디아 6,9) 우리 모두에게는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순간 아마 우리는 누군가에게 화가 나 있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시다. “주님, 저는 이 사람에게, 또 저 사람에게 화가 납니다. 저는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내가 화를 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사랑을 향해, 그리고 복음화 행위를 향해 내딛는 아름다운 발걸음입니다. 오늘 기도합시다! 우리 스스로 형제적 사랑이라는 이상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교회의 다른 도전들


102. 단순하게 말해서 평신도는 하느님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품을 받은 교역자는 소수이고, 그들 대다수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는 자신의 신원과 사명을 점점 더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평신도에게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이 평신도들은 공동체의식이 매우 강하며, 사랑의 실천과 교리교육, 신앙의 기념에 대단히 충실합니다. 동시에 평신도의 책임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습니다.


세례와 견진에 기반을 둔 평신도의 책임은 모든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꽤 많은 경우에 평신도들은 중요한 책임을 맡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는 평신도를 의사결정에서 배제하는 과도한 성직자 중심주의 때문에 평신도들이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교회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이 평신도 사도직에 몸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도직은 사회, 정치, 경제 영역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상당 수준까지 침투시키는 일에는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평신도 사도직이 복음을 사회의 변형에 적용하는 데 쓰이지 않고, 대부분 사도적이 교회 안의 활동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평신도의 양성, 그리고 직업과 지성 생활의 복음화는 사목에 있어서 중요하고도 대표적인 도전입니다.


103. 교회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감수성, 직관, 다른 여러 탁월한 능력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여성의 특별한 배려심, 절대적이라 할 수는 없을지라도 모성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특별한 배려를 생각합니다. 저는 많은 여성이 백성과 가정과 그룹을 인도하는 데, 그리고 신학적 성찰에 새롭게 기여하는 가운데, 사제들과 함께 사목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실재를 드러낼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주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성은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필요하다. 여성이 일터에서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다른 여러 환경, 즉 교회와 사회조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04. 여성의 정당한 권리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그 존엄성에서 평등하다는 확고한 신념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가볍게 피해갈 수 없는 무겁고 도전적인 물음을 제기합니다. 사제직을 남성에게만 유보하고 있는 것은 성찬례로 자신을 내어주신 신랑 그리스도의 표지입니다. 이것은 토론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사적 권한(sacramental power)과 일반 권한(power in general)을 지나치게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불화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사적 권한을 말할 때, “우리는 존엄함이나 거룩함의 영역이 아니라 기능의 영역에 있습니다.” 직무 사제직은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채택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귀한 존엄함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세례성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제를 (모든 은총의 주요 원천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통합시킨 것(configuration)이 그를 다른 사람들 위에 세우려는 고양을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기능들은 “상호간에 상대적 우월성을 있음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사실 마리아라는 한 여성이 주교들보다 더 중요한 분입니다. 직무 사제직의 기능이 “교계적”이라고 간주될 때조차 “그것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성원들이 갖는 거룩함에 따라 배열된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직무 사제직의 핵심과 축은 지배를 의미하는 권력이 아니라 성체성사를 관리하는 힘입니다. 성체성사는 직무 사제직이 갖는 권위의 원천입니다. 그 권위는 항상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봉사입니다. 이 점은 목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 생활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에서 여성이 맡을 역할과 관련해서, 이 점이 무엇을 수반할 것인지를 보다 면밀하게 알아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105. 전통적인 방식의 청년 사목활동 역시 사회변화의 충격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종종 통상적인 구조 안에서 자신의 관심, 욕구, 문제, 그리고 상처에 대한 반응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른으로서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인내심을 갖고 듣는 것, 그들의 관심과 요구를 인정하는 것,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똑 같은 이유로, 교육 분야에서 기울이는 우리의 노력이 기대하는 결과를 내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의 연합과 운동이 일어나고 자라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기대와 심오한 영성과 보다 실제적인 소속감 추구를 충족시킬 새로운 오솔길을 비추십니다. 그러나 이런 연합들이 교회의 전반적인 사목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106. 젊은이에게 접근하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더라도, 두 영역에서는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젊은이를 교육하고 복음화 해야 한다는 자각과 젊은이들이 더 큰 리더십을 행사해야 한다는 시급한 요구가 그것입니다. 오늘날 상호 관계 맺기와 헌신에 위기를 맞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 앞에서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자발적인 사업과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자기 교구와 다른 지역에서 봉사그룹이나 선교단체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합니다.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모든 거리에, 모든 마을에, 지구 구석구석에 기쁘게 전하는 “거리의 선포자들”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다!


107. 많은 곳에서 사제와 축성생활에서 성소 부족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공동체 안에서 사도적 열정이 없어서 사람을 열광하게 하고 끌어들이는 힘이 식은 탓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다른 이에게 소개하려는 생활과 열정과 욕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참된 성소가 일어날 것입니다. 유별나게 헌신적이거나 기쁘게 생활하지 않는 사제가 있는 본당에서도, 형제적 생활과 공동체의 열정은 젊은이가 하느님과 복음의 가르침에 자신을 봉헌하려는 열망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그 같이 살아있는 공동체가 끊임없이 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공동체의 젊은이에게 특별한 축성의 길을 용감하게 제시한다면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사제직 지망자들에 대한 보다 나은 선발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학교는 그 동기가 특히 감정적 불안, 권력 추구, 인간적 명예, 혹은 경제적 풍요 따위와 관련되어 있다면 그 동기가 무엇이든 그 지망자를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108.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완전한 진단을 제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동체를 초대해서 공동체와 그 이웃이 직면한 도전들을 알아내고, 제가 제시한 이러한 전망들을 풍요롭게 하고 완성해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공동체들이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읽으려 할 때마다 젊은이와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젊은이는 우리더러 희망을 새롭게 하고 확장하라고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류에게 새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줍니다. 우리가 오늘날 세상에 생명을 주지 않는 관습과 구조에 더 이상 향수를 품고 거기에 머물지 않도록 말입니다.


109. 도전은 극복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현실주의자가 됩시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 우리의 담대함, 우리의 희망으로 가득 찬 헌신을 잃지는 맙시다. 우리 스스로 선교의 활력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제 3 장

복음 선포



110. 저는 오늘날 도전 가운데 몇 가지를 성찰했습니다. 이제 저는 모든 시대 모든 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을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명백히 선포하지 않는 복음화는 있을 수 없으며, 모든 복음화 사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 아니라면 복음화는 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아 주교들의 관심을 인정하면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교회가 “그 섭리대로 가야할 길을 온전히 가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기쁘게 인내심을 갖고 끊임없이 전하는 것, 곧 복음화가 여러분에게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I. 하느님 백성 전체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111. 복음화는 교회의 과업입니다. 교회는 복음화를 일으키는 단위로서 계급조직이나 제도 이상의 무엇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우선 하느님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걷는 백성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삼위일체에 뿌리를 둔 신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 순례하는 백성으로, 그리고 복음화를 실현하는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아무리 제도적으로 표현되더라도 교회는 그 제도적 표현을 항상 초월합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이런 이해를 간략하게 검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궁극적 토대를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그리고 감사하게도 주도하신 데에서 발견됩니다.


모든 이를 위한 하나의 백성


112.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그분 자비의 작품입니다. 어떤 인간적 노력으로도,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렇게 위대한 그분의 선물에 칭송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순전히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들 당신께 이끄셔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시어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변형시켜서 우리 삶으로 당신 사랑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성사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화 활동을 통해 그분께 협력합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활동하는 하느님 은총의 도구입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시노드를 성찰하면서 이점을 매우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첫 말씀, 참된 주도성, 참된 활동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며, 우리 자신 그분의 거룩한 주도성에 들어감으로써만, 이 거룩한 주도성에 애원함으로써만,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우리도 복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은총의 우선성의 원리야말로 우리가 복음화를 성찰할 때 항상 빛을 비추는 횃불입니다.


113. 하느님께서 행하셨고 교회가 기쁘게 선포하는 구원은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모든 시대 모든 사람과 결합시키는 길을 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고립된 개인들이 아니라 한 백성으로 함께 부르시기로 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개별적으로 스스로, 혹은 자신 만의 노력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인간 공동체의 생활에는 수많은 인격적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인격적 관계는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고려하시면서 우리를 당신께 끌어들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셨고 부르신 이 백성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배타적이며 선발된 그룹을 만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마태오 28,19)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하느님의 백성 안에 있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 3,28) 하느님과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두려워하거나 무관심한 모든 사람들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숭고한 존경과 사랑을 갖고 당신 백성의 일부가 되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114. 교회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빚어진 위대한 계획에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류 한 가운데서 그분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우리가 사는 세상에 선포하고 가져다주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은 종종 길을 잃습니다. 세상이 걷는 여정에는 종종 격려가 필요하고, 희망이 제시되어야 하며, 용기를 불어넣어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비를 아낌없이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환영받는다는 것을, 사랑받는다는 것을, 용서받는다는 것을, 그리고 복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격려를 받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얼굴을 갖고 있는 한 백성


115. 하느님의 백성은 지상의 백성들 안에서 구체화됩니다. 각 백성은 그 나름의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 안에 있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이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문화의 개념은 유용합니다. 문화는 그 사회의 생활양식, 곧 그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과, 다른 피조물과, 하느님과 관계 맺는 특정한 방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되는 문화는 백성의 삶 전체를 포괄합니다.


각 백성은 그 역사의 여정에서 정당한 자율성을 갖고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그것은 인간이 “그 본성에서 반드시 사회생활이 필요하며”, 사회 안에서 현실과 관계를 맺는 구체적인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사회와 관련해서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인간은 항상 어떤 문화 안에 있습니다. “본성과 문화는 매우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은총은 문화를 가정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선물은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문화에서 구체화됩니다.


116. 2천년 동안 수많은 민족들이 신앙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꽃을 피웠으며, 그들 고유의 문화가 갖는 언어로 이 신앙을 후대에 전했습니다. 어떤 공동체가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마다 성령께서는 변형시키는 복음의 힘으로 그 문화를 풍요롭게 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그리스도교가 단순하게 하나의 문화적 표현만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는 자기 본성에 절대로 어긋나지 않으면서, 복음 선포와 교회의 전통에 흔들림 없는 충실성을 갖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정착시킨 민족과 문화가 갖는 다양한 얼굴들을 반영할 것이다.” 하느님의 선물을 체험한 다양한 백성들 안에서, 그 나름 고유한 문화에 따라서, 교회는 그 참된 보편성을 드러내며 “그 다양한 얼굴들이 갖는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복음화된 민족이 갖고 있는 그리스도교 관습 속에서, 성령께서는 교회에 계시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주고 교회에 새 얼굴을 줌으로써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십니다. 토착화를 통해 교회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문화와 함께 교회 고유의 공동체를 이끌어 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는 복음을 선포하고 이해하고 사는 방식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와 형식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는 서로 다른 문화가 갖는 가치들을 채택하고 “패물로 단장한 신부”(이사야 61,10 참조)가 됩니다.


117. 제대로 이해한다면, 문화의 다양성은 교회 일치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보내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형시키고 복된 삼위일체의 완전한 친교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십니다. 복된 삼위일체의 완전한 친교에서 모든 것이 그 일치를 이룹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백성의 조화와 친교를 구축하십니다.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의 유대인 것처럼, 성령께서는 바로 그 조화 자체이십니다.


은사의 풍성한 다양성을 가져온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획일성이 아니라 많은 측면을 가졌으면서도 조화를 꾀하는 일치를 창조하십니다. 복음화는 성령께서 교회에 부어주신 이 다양한 보물들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단일문화와 단조음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면 육화의 논리를 우리는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문화가 복음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발달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지만, 그렇다고 계시된 메시지가 그 문화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계시된 메시지는 문화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문화, 혹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문화의 복음화에 있어서, 아무리 아름답고 오래된 것이라 하더라도, 특정 문화형식을 복음과 함께 부과하는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항상 어떤 문화적 외모를 갖지만,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자신의 문화를 불필요하게 숭배하게 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참된 복음화의 열정보다는 환상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118. 오세아니아의 주교들이 교회가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지역의 문화와 전통에서 이해하고 제시하는 것을 개발할 것을” 요청했으며, “교회의 신앙과 생활이 각 문화에 적합한 정당한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선교사들이 원주민 그리스도인과 조화를 이루며 활동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대륙의 민족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표현할 때, 유럽의 민족들이 특정 역사에서 발전시킨 표현 양태를 모방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어떤 특정 문화의 표현과 이해의 테두리 안에 가둬둘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단일 문화도 우리의 구속이라는 신비를 남김없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선교하는 제자입니다


119. 성령께서는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하게 하는 힘으로 활동하십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복음화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 기름부음 덕분에 거룩합니다. 성령의 인도는 하느님 백성을 신앙고백에 있어서 오류가 없도록 합니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잘못이 없다는 뜻입니다. 비록 하느님의 백성이 그 신앙을 설명하지 못할 수는 있더라도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진리로 하느님 백성을 인도하여 구원에로 이끄십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의 일부로서, 하느님께서는 믿는 이들 전체가 신앙 감각을 갖추도록 했는데, 이 신앙의 감각은 인류가 무엇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것인지를 식별하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현존은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실재들과 같은 종류의 것들을 주십니다. 그리고 인류가 그 실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주십니다. 인류가 그 거룩한 실재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할 때조차도 말입니다.


120. 세례의 효력으로 모든 하느님 백성은 선교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마태오 28:19 참조) 교회 안에서 그 지위가 무엇이든, 혹은 신앙에 있어 훈련 수준이 어느 정도이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복음화의 일꾼입니다. 전문가들이 계획을 수립하고 나머지 신앙인들은 단순한 수동적 수령자가 되는 그런 복음화 계획을 그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새 복음화는 모든 세례 받은 사람의 인격적 개입을 요구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복음화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실제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밖으로 나가 그 사랑을 선포하는데 많은 시간이나 오랜 훈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 그만큼 선교사가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제자”이며 “선교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항상 “선교하는 제자”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확신하지 못한다면, 첫 사도들을 바라봅시다. 첫 사도들은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치자마자 즉시 그분을 기쁘게 선포하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자마자 선교사가 되었고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요한 4,39) 말입니다. 바오로 성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곧바로 예수님을 선포하였습니다.”(사도행전 9,20; 22,6-21 참조)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121. 물론 우리 모두가 복음화의 일꾼으로 일하면서 성숙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훈련을 원하고, 복음을 더 또렷하게 증언하고 사랑하기 위한 더 나은 훈련을 원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복음화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복음화의 사명을 연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가 어디에 있든 예수님을 전달할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에게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증언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함에도 가까이 계신다는 것, 그분의 말씀, 그분의 힘을 우리에게 건네시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그분이 없다면, 여러분의 삶이 변해버린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여러분이 깨달은 것, 여러분을 도와 살게 한 것, 여러분에게 희망을 준 것,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을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이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사명은 평범함에 빠져 머물지 말고 계속해서 성장하라고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시해야 할 신앙의 증언은 우리로 하여금 바오로 성인처럼 말하게 합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필리비 3,12-13)


민중의 경건함이 갖는 복음화 하는 힘


122. 같은 방식으로, 그들 가운데 복음이 토착화된 여러 민족들이 바로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는 적극적인 집단주체이거나 집단일꾼입니다. 각 민족이 그 고유한 문화의 창조자이며 그 고유한 역사의 주역이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한 민족이 끊임없이 창조하는 역동적인 실재입니다. 각 세대는 나름의 존재론적 환경에 접근하는 일련의 방식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줍니다. 다음세대는 그 고유한 도전에 직면했을 때 물려받은 문화를 다시 공식화합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가 속한 문화의 아들이 되며 동시에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단 복음이 어떤 민족 사이에 토착화되면, 그들의 문화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 민족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도 전달합니다. 따라서 복음화를 토착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선물을 자신들의 재능에 맞추어, 자신들의 삶으로 번역합니다. 그럼으로써 그 민족이 받아들인 신앙을 증언하고, 새롭고 훌륭한 표현과 함께 풍요롭게 합니다. 그래서 “한 민족은 끊임없이 자신들을 복음화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민중이 갖는 경건함이 중요성을 갖습니다. 이 경건함은 하느님 백성의 자발적 선교활동을 참되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입니다. 물론 그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123. 민중의 경건함은 일단 신앙을 받아들이면 신앙이 어떤 문화의 형식으로 구체화되며 끊임없이 전달된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한 때 사람들이 낮게 보았던 이 민중의 경건함은 공의회 이후 수십 년간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Evangelii Nuntiandi)는 이 분야에 관해서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오로 6세는 민중의 경건함이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만 알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민중의 경건함은 사람들이 믿음을 증언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거의 영웅적 희생과 관대함을 갖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베네딕토 16세는 라틴 아메리카와 관련해 이야기하면서 민중의 경건함이 “가톨릭교회의 보물”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 백성의 영혼을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124. 아파레시다 문헌은 성령께서 대중의 경건함에 부어주신 풍요로움을 무상의 주도성이라고 기술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민중의 경건함을 통해 자기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는 사랑받는 이 대륙에서 주교들은 이 대중의 경건함을 “민중의 영성” 혹은 “백성의 신비주의”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기층문화에 육화된 영성입니다.” 그것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추론적인 설명보다는 상징의 방법으로 그 내용을 보다 잘 발견하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행동에 있어서 ‘하느님을 믿는 것’ 보다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을 더 강조합니다. 그것은 “신앙을 살아가는 정당한 방식입니다. 교회를 느끼는 방식이며 선교사가 갖는 태도입니다.” 그 자체로 선교사가 되게 하는 은총을, 스스로의 테두리에서 걸어 나와 순례의 길을 나서게 하는 은총을 가져다줍니다. “자기 아이들과 더부어, 초대한 또다른 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성전을 향해 여행하고 다른 형태의 대중의 경건함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복음화 하고 있다는 몸짓이 됩니다.” 우리 자신 이 선교의 힘을 억누르거나 조절할 생각을 하지 맙시다!


125. 이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착한 목자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심판하려하지 않고 사랑하려 합니다. 사랑으로 태어나 함께 자란 애정으로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함 안에 현존하는, 특히 그들의 가난 속에 있는 신학적 생명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아픈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들의 굳건한 신앙을 생각합니다. 그 어머니는 비록 신앙조목에 대해 거의 제대로 알지 못하더라도 로사리오에 매달리거나, 초라한 집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마리아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바치며 모든 희망을 걸거나, 혹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부드러운 사랑의 눈으로 응시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런 행동을 두고 순전히 인간적인 노력으로만 하느님을 찾으려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행동들은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성령께서 하신 활동으로 성장한 신학적 생명을 드러낸 것입니다.(로마 5,5)


126. 토착화한 복음의 결실인 대중의 경건함은 우리가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복음화의 활동력입니다. 우리가 이를 가볍게 여긴다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대신 끝이 없는 토착화의 과정을 심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그 활동력을 촉진하고 강화해야 합니다. 민중의 경건함을 드러낸 것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신학의 터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새 복음화를 모색하는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을 직접 만나자


127. 오늘날 교회가 선교의 뜻 깊은 쇄신을 체험하려고 할 때, 일상의 책임으로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된 설교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웃이건 완전히 낯선 사람이건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선교사가 어떤 가정을 방문했을 때 하는 대화 중에 드러나는 것처럼 그것은 비공식적 설교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가져다줄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견하지 않은 때에 어떤 곳에서든, 거리에서, 도시의 광장에서, 노동을 하는 도중에, 여행 중에도 그런 일은 생길 수 있습니다.


128. 항상 존중하는 마음으로 점잖게 행하는 이 설교에서 첫걸음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기쁨, 희망,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할 때, 혹은 마음을 움직이는 다른 많은 요구를 할 때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을 꺼낼 수 있습니다. 성경구절이나 관련된 이야기를 읽어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항상 근본적인 메시지, 곧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건네주신 분의, 당신의 구원과 우정을 우리에게 주시고 살아계신 분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인격적 사랑을 명심해야 합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에게 이 메시지는 증언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 증언을 반드시 겸손하게 전해야 합니다. 이 메시지는 풍부하고 심오해서 언제나 우리의 파악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항상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메시지가 직접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적 증언과 몸짓을 통해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성령께서 그 특정 상황에서 인도하시는 방법으로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적절한 상황이 허용된다면, 이 형제적이며 선교적인 만남은 그 사람이 드러내고 싶어 하는 관심사와 관련된 짧은 기도로 마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자기의 관심을 누가 듣고 이해하고 있다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실제로 그들의 생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29.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절대로 변할 수 없는 내용으로 여기고, 외워서 배운 고정된 형식으로만 전달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 메시지의 소통은 기술하거나 유형화할 수 없는 수많은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지며, 수많은 몸짓과 표지를 갖고 있는 하느님 백성은 복음 메시지 소통의 집단적 주체입니다. 만일 복음이 어떤 문화에서 구체화된다면, 그 메시지는 더 이상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만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소수 종교인 그런 나라에서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 복음 선포를 격려하면서, 특정 교회들은 더 적극적으로 토착화를 준비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복음은 각 문화에 적합한 범주로 선포됩니다. 따라서 이런 지역에서는 복음이 그 특정 문화와 새로운 종합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 진행은 항상 더디며, 그 때문에 우리는 몹시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용기를 꺾는다면, 창조적인 사람이 되기보다는 편한 상태로 머물러 그 어떤 진전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역사의 과정에서 아무런 적극적 역할도 맡지 못할 것이고, 대신 교회가 활기를 잃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저 방관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복음화하는 친교에 봉사하는 은사


130. 성령께서는 복음화 하는 전체 교회를 다양한 은사로 풍요롭게 합니다. 성령의 이 선물들은 교회 쇄신과 교회 건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선물들은 보관하라고 작은 집단에 위임하고 안전하게 맡긴 일종의 유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교회의 몸에 통합되어, 중심이신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고, 그리고 마침내 복음화하려는 추진력에 도달합니다. 어떤 은사가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분명한 표지는 그 교회적 성격에 있습니다. 즉 그 은사의 진정성은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해 거룩하고 충실한 하느님 백성의 생활과 조화롭게 통합될 수 있는 능력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가져오신 새롭고 참된 어떤 것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선물이나 영성을 가리지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보다 더 직접 겨냥하고 있는 은사라면, 은사의 행사는 그만큼 더 교회적일 것입니다. 은사가 진정하고 신비로운 결실을 가져오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비록 친교가 고통스러울 때조차, 친교 안에서 행사되어야 합니다. 이런 도전(친교)에 응답하는 가운데, 교회는 이 세상에서 평화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131. 사람 사이, 공동체 사이의 차이들은 가끔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성의 원천이신 성령께서는 모든 것에서 좋은 것을 가져올 수 있으며 그 좋은 것을 복음화에 유용한 수단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다양성은 항상 성령의 도움으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분만이 다양성, 복수성, 다중성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일치를 가져오실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가 다양성을 갈망할 때, 우리는 자신 안에 갇혀 배타적이고 불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비슷하게 우리가 우리의 인간적 계산에 기초해서 일치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우리는 일률적 획일성을 강요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문화, 사상, 교육


132. 다른 문화에 복음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은 그것을 직업, 학문, 과학의 영역에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 이성, 그리고 학문 사이의 조우를 의미합니다. 이 때 교회는 신뢰성, 즉 일종의 창의적인 호교론의 문제에 관해서 새로운 논리와 접근법의 개발을 기대합니다. 이 창의적인 호교론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에의 문을 많이 열어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메시지 선포를 위해 이성과 과학의 일부 범주들을 채택할 때, 그 범주들은 복음화의 도구가 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입니다. 채택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밝게 비추고 쇄신하기 위한 성령의 수단으로 바뀝니다.


133. 복음 전파자가 각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혹은 복음이 전체 문화에 선포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목 신학 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이나 인간 경험과 대화하는 신학은 복음의 메시지를 어떻게 다른 문화적 배경과 그룹에 가장 잘 전할 수 있는지를 식별하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복음화에 헌신하는 교회는 학문과 문화, 세상과 대화를 나누려는 신학자들의 학문적 노력과 그 은사를 높이 평가하며 격려합니다. 저는 신학자들이 그 봉사를 교회의 구원 사명의 하나로 수행해주시를 바랍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그렇게 할 때, 교회와 신학은 복음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과 탁상공론의 신학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34. 대학은 학문간 교류하고 통합하는 방법으로 이 복음화 헌신을 정교하게 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탁월한 환경이 됩니다. 언제나 교육 활동과 복음의 분명한 선포를 결합시키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가톨릭 학교는 문화의 복음화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자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어 적합한 방법을 찾는데 더 많은 창의성을 가져야 할 그런 나라와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II. 강론



135. 그러면 전례 안에서 가르치는 것을 살펴봅시다. 이는 사목자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저는 특히 그리고 어느 정도 세세하게 강론과 그 준비에 대해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중요한 직무에 대해 너무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우리는 그 관심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은 사목자가 자기 백성과 나누는 친밀성과 소통의 능력을 판단하는 초석입니다. 우리는 신자들이 강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신자들과 신품을 받은 교역자 모두 강론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강론을 듣는 것이, 성직자는 강론을 하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슬픈 일입니다. 강론은 실제로 성령과 하느님의 말씀과 쇄신과 성장의 끊임없는 원천에 대한 강렬하고 행복한 체험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36. 가르침에 있어 우리의 자신감을 회복합시다.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그분께서 인간의 언어를 통해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확신합시다. 바오로 성인은 선포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빌어서 다른 사람에게 가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0,14-17 참조)


선포하는 사람의 말로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셨습니다. 그들은 사방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마르코 1,45 참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마르코 6,2 참조) 그들은 그분께서 권위를 갖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마르코 1,27 참조)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려고”(마르코 3,14) 세우신 사도들은 그들의 말로써 모든 민족을 교회의 품에 불러들이셨습니다.(마태오 16,15. 20 참조)


전례 안의 강론


137. 다음의 진술은 기억할만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례로, 특히 성찬례에서 선포하는 것은 묵상과 교리를 위한 시간이라기보다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이 대화에서 구원의 위대한 업적이 선포되며, 거룩한 계약의 요구사항들이 계속적으로 재론됩니다.” 강론은 성찬례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합니다. 강론은 성사적 친교에 도달하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대화에서 최고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형식의 교리교육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강론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과 이미 세워놓으신 대화를 한 번 더 채택하는 것입니다. 선포하는 사람은 자신의 공동체의 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어디서 하느님을 향한 열망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불타오르는지, 어디서 한때 사랑의 대화였던 그 대화가 방해를 받아서 메마르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38. 강론은 대중매체가 전하는 것과 같은 오락의 한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강론은 기념하는 것에 의미와 생명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양식입니다. 왜냐하면 강론은 ‘전례’라는 구조 안에 위치한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론은 간결해야 하고, 연설이나 강의와 모양을 갖춰서는 안 됩니다. 강론을 하는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면 청중의 주목을 끌 능력을 갖고 있을 수 있지만, 그 경우에 그의 말이 신앙의 기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강론이 그렇게 너무 길어지면, 전례 기념에 두 가지 특성 요소, 즉 균형과 리듬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전례라는 배경에서 가르침이 이루어질 때 그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기념 중에 부어주시는 은총의 중재가 되어야 합니다. 전례의 기념에서 강론을 한다는 것은 강론이 회중과 강론을 하는 사람을 모두 생활을 변화시키는 성체 안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서 강론을 하는 사람의 말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회중은 주님의 일꾼이 아니라 주님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의 대화


139.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성령의 끊임없는 내적 활동으로 항상 스스로를 복음화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원리가 설교가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교회가 어머니라는 것, 어머니가 자기 자녀에게 말하는 같은 방법으로 교회가 설교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가르친 것을 아이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신뢰합니다. 자녀는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더구나 착한 어머니는 하느님께서 자기 자녀에게 주신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녀의 관심에 귀를 기울이고, 그 관심에서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한 가정을 감싸는 사랑의 정신은 어머니와 아이를 대화로 이끕니다. 그 대화에서 어머니와 아이는 가르치고 배우고, 교정을 체험하며, 좋은 것을 깨달으면서 성장합니다.


그와 비슷한 것이 강론에서 생깁니다. 복음을 불러일으켰고,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같은 성령께서는 설교가가 하느님 백성의 신앙을 듣게 하고, 성찬례 때마다 옳게 가르치는 방법을 찾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설교는 백성의 마음에서 그리고 그들의 문화에서 생명의 원천을 발견합니다. 그 원천의 도움으로 설교가는 무엇을 반드시 말해야 하고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모국어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에 관해서도 우리는 “어머니의 문화”인 모국어(2 마카베오7,21. 27 참조)로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한테는 더 잘 듣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 언어는 용기와 힘과 열정을 자극하는 그런 음악과 같은 것입니다.


140. 어머니와 회중이라는 이 환경은, 주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이 환경은 설교가의 친밀감, 그 목소리의 따뜻함, 말하는 태도의 솔직함, 자세에서 나오는 기쁨으로 강화되어야 합니다. 강론이 지루할 때조차도 이 어머니와 회중의 정신이 현존한다면, 강론은 반드시 결실을 낼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의 지루한 조언이 적절한 때에 자녀의 마음에서 결실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141. 우리는 당신의 고상한 가르침과 요청으로 보통 사람을 끌어들이고, 당신의 신비를 모든 이에게 드러내기 위해, 주님께서 당신 백성과 대화할 때 사용한 자료들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백성을 바라보시는 방법에 그 비밀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약점과 결점 그 이상을 보셨습니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루카 12,32) 예수님께서는 그 정신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가득차서, 그분은 작은이들을 당신께 보내주신 아버지를 찬양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0,21)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말씀하시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십니다. 설교가는 그 똑같은 기쁨을 그의 청중에게 전하기 위해 매진해야만 합니다.


마음에 불을 놓는 말씀


142. 대화는 진리의 소통 그 이상의 것입니다. 대화는 말하는 기쁨에서 이루어집니다. 대화는 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의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풍요롭게 합니다. 이 풍요로움은 목적이 아니라, 대화 속에서 서로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순전히 교훈적이거나 교의적인 말씀, 혹은 성경 주석에 관한 강의로 남는 그런 말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강론은 강론에서 발생하는 마음의 소통, 준성사적 성격을 갖는 마음의 소통에는 부족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강론에서, 진리는 선과 미와 서로 협조합니다. 강론의 진리는 추상적 진리들이나 냉정한 삼단논법을 다루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선의 실천을 격려하기 위해 사용한 이미지가 갖는 아름다움을 전달합니다. 신자들의 기억은 마리아의 기억처럼 하느님께서 하신 놀라운 것들과 함께 흘러넘쳐야만 합니다. 신자들의 마음은 그들이 받은 사랑의 실천과 기쁨에서 나온 희망을 갖고 자랍니다. 신자들의 이 마음은 성경의 한 마디 한마가 명령이라기보다는 선물이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143. 설교의 토착화라는 도전은 사상이나 분리된 가치들이 아니라, 하나로 종합한 것을 선포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종합이 이루어지는 곳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하나의 종합으로 백성을 비추는 것과 분리된 사상으로 백성을 비추는 것 사이의 차이는 마음으로 느끼는 열정과 지루함 사이의 차이와 같습니다. 설교가에게는 훌륭하지만 어려운 임무가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 곧 사랑하는 마음을 결합시키는 임무 말입니다.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대화는 그 사이의 계약을 강화시키고, 사량의 유대를 결합시킵니다.


강론 중에 믿는 이들의 마음은 침묵을 유지하며,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게 합니다. 주님과 그의 백성은 어떤 중개도 없이 직접 수많은 방법으로 서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강론에서 주님과 그의 백성은 누군가 도구로 봉사해주기를, 또 자기가 선택해도 되는 대화 방법으로 자기들의 느낌을 표현해 줄 누군가를 원합니다. 말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매개 수단입니다. 말은 말하는 두 사람만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제시하는 중개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입니다.”(2코린토 4,5)라는 신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144. 마음으로 말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단순히 불타오른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충만한 계시가 마음을 밝혔으며, 전 역사에 걸쳐 교회와 충실한 백성의 마음속에서 하느님 말씀이 여행하신 길이 마음을 밝혔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미천했을 때 세례를 통해 우리를 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은 회개한 자녀로서, 마리아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서, 우리한테 또 다른 포용을 바라게 합니다. 즉 영광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포용 말입니다. 우리 백성이 이 두 포용 가운데 살고 있다고 느끼도록 돕는 것은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어렵지만 아름다운 임무입니다.


III. 가르침의 준비



145. 설교의 준비는 오랜 시간의 연구, 기도, 성찰, 그리고 사목의 창의성을 쏟아야만 하는 중요한 과업입니다. 저는 잠시 멈춰서 강론을 준비하는 한 방법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제안이 당연하겠지만, 저는 이 귀중한 일에 양질의 시간을 바쳐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임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떤 사목자는 수행해야 할 과제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 같은 준비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감히 매주 이 과제를 위해 개인시간과 공동시간 가운데 충분한 시간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중요한 활동에 시간을 덜 할애해서라도 말입니다.


강론 중에 활동하시는 성령께 대한 신뢰는 단순히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창의적인 것입니다. 성령께 대한 신뢰는 우리 자신과 모든 능력을 하느님께서 이용하실 수 있는 도구로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설교가는 “영성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사에 대해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사람입니다.


진리에 존경심을 가집시다


146. 성령을 기도 속에서 부른 다음, 첫걸음은 성경 본문에 우리의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본문이 우리의 강론의 기반이 되어야합니다. 어떤 특정 본문이 갖는 메시지에 머물러 그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존경심”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이 우리보다 항상 탁월하다는 것과 “우리는 말씀의 주인도 소유자도 아니며, 그 파수꾼, 전달자, 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의 겸손입니다. 말씀에 대한 이런 겸손한 태도와 경외하는 존경심은 그 말씀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 거룩한 두려움과 많은 주의를 기울여 말씀을 연구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른 모든 관심거리들을 제쳐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 본문에 시간과 관심과 집중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다른 모든 관심사를 놔두고 차분하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빠르고, 쉽고, 즉각적인 결과를 바라면서 성경의 본문을 읽으려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강론에 대한 준비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한참의 고요한 시간을 바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을 말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필요한 시간만큼 충분히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참된 제자들이 “말씀하십시오. 주님, 당신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2사무엘 3:9)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147. 무엇보다 우리가 읽은 말씀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분명해 보이지만 항상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즉, 우리가 연구하는 성경의 텍스트는 2-3천년이나 된 것이며, 그 언어는 오늘날 언어와 매우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번역된 말씀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거룩한 저자가 말하고 싶어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문헌 분석이 제공하는 다양한 도구들은 잘 알려졌습니다. 즉 반복하거나 강조하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본문의 구조와 특이한 말투를 확인하는 것, 여러 등장인물이 수행한 역할을 고려하는 것 따위가 그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본문의 세세한 것을 전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본문의 주요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구조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메시지 말입니다.


만일 설교가가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의 가르침은 거의 아무런 통일성도 질서도 갖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으며 다른 사람을 자극할 수도 없는 그런 여러 생각들을 단순하게 모아놓은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중심 메시지는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소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저자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가 만들어내고 싶었던 효과가 무엇인지 알게 합니다. 만일 본문이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라면, 그 본문은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권고하기 위해 쓴 것이라면 교의를 가르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에 관해 무엇인가 가르치기 위해 쓴 것이라면, 다양한 신학적 의견을 전개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찬미와 선교적 파견을 위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하기 위해 쓴 것이라면, 최근 뉴스에 관해 말하기 위해 그 본문을 사용하지 않도록 합시다.


148. 분명히,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메시지의 의미를 합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메시지를 교회가 전한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연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성경 일부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영감을 불어넣었다는 것과, 어떤 특정 지역의 백성이 그들의 인격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도록 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이게 성경 해석에서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것은 같은 성경의 다른 가르침과 모순이 되는 잘못되거나 부분적인 해석을 방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르쳐야 할 본문이 특별하고 독특하게 강조한 것을 우리가 약화시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루하고 헛된 가르침이 갖고 있는 결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선포된 본문이 본래 갖고 있는 힘을 전달하지 못하는 그 무력함입니다.


말씀을 인격화 합시다


149. 설교가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과 인격적으로 대단히 친숙해야만 합니다. 말씀에 대한 언어학적 혹은 주석적 지식이 분명히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씀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깊게 파고들어 자신 안에 새로운 전망이 생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부드러운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그 말씀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자라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강론을 준비할 때, 매일 그리고 매주 우리의 열정을 쇄신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교역자의 거룩함의 정도는 말씀의 선포에 실제 효과를 본다”는 것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설교합니다.”(1테살로니카 2,4)는 바오로 성인의 말씀대로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르칠 말씀을 제일 먼저 듣는 사람이 되기를 열렬히 바란다면, 그 말씀은 분명히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에게 전달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가득한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마태오 12,34)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독서 말씀이 갖는 그 모든 광채가 먼저 사목자의 마음에서 울려 퍼진다면 신자들의 마음에서도 그 말씀이 울려 퍼질 것이다.


15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그 말씀으로 빛이 나지 않으면서 다른 이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그런 교사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오 23,4) 야고보 사도는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 3,1)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가르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철저하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일상에서 구체화 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르침은 결실을 많이 내는 진지한 활동이 될 것입니다. “설교가가 계획한 것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그런 활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우리가 설교 내용을 준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그 말씀에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히브리 4,12) 것처럼 살아있으며 능동적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큰 사목적 중요성을 갖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목격한 것에 대한 증언을 선호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복음전파자 자신이 잘 알고 친숙한 하느님에 대해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51. 우리는 결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오솔길을 따라서 걸으면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또 성장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무기를 내려놓지 맙시다. 핵심은 설교가가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원하셨으며, 그분의 사랑은 항상 마지막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움과 조우했을 때, 설교가는 빈번하게 자신의 생활이 마땅히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것이며, 그렇게 위대한 사랑에 보다 완전하게 응답하기를 진정으로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만일 하느님의 말씀이 그의 생활을 움직이고, 그에게 도전하고, 그를 재촉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할 시간을 바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거짓 예언자, 사기꾼, 천박한 협잡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빈곤을 인정하고 헌신하면서 성장하기를 열망함으로써, 그는 항상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사도행전 3,6)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아있고, 자유로우며, 창의적인 존재로서 우리를 이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당신 말씀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우선 우리 마음으로 들어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지적 분야만이 아니라 전 존재에 걸쳐 설교가를 감화시키고 사로잡아야 합니다. 말씀을 재촉하신 성령께서는 “교회의 시초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성령에 사로잡히고 인도되는 모든 설교가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그 성령께서 설교가의 힘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말씀을 그의 입술 위에 얹어주십니다.”


영적 독서


152. 주님께서 당신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을 듣고, 우리 자신이 성령으로 변형되는 특별한 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입니다. 그것은 기도 때에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우리를 비추고 새롭게 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성경 독서로 기도하는 것은 본문의 중심 메시지를 규명하기 위해 설교가가 연구하는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그 연구로 시작해야만 하고, 그 다음에 그 같은 메시지가 자기의 삶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를 식별하는 것입니다. 한 본문을 영적 독서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본문을 우리한테 편리한 대로, 우리가 이미 결정한 것을 확인하는 데 이용하고, 우리의 사고방식에 맞추어서 읽기 쉽습니다. 이런 독서는 자칫하면 거룩한 어떤 것을 우리를 위하여 이용하게 하고, 이러한 혼동을 하느님 백성에게 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가끔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2코린토 11,14)는 말씀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153. 하느님 앞에서 본문을 침착하게 읽는 동안에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 이 본문이 ‘저한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이 본문으로 바꾸고 싶으신 저의 삶은 무엇입니까? 제가 이 본문 때문에 불편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왜 이 본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까? 혹은 제가 이 본문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를 움직이는 이 말씀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저를 사로잡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것이 저를 사로잡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할 때 유혹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불편함이나 부담을 느끼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다른 일반적 유혹은 이 본문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의미를 자신한테는 적용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분명한 의미를 약화시키기 위해 핑계거리를 찾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아직 준비하지도 않은 어떤 결정을 요청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너무 많을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때문에 하느님 말씀과 만나면서 더 이상 즐거움을 얻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 하느님보다 인내심이 강한 분이 없다는 것과, 어느 누구도 그분보다 더 이해하고 기다리는 분이 없다는 것을 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항상 앞으로 나서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완전한 응답을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단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바라보고 자신을 당신 앞에 정직하게 내놓으라고, 그리고 우리가 아직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당신께 청함으로써 계속해서 성장하라고 하실 뿐입니다.


백성의 말을 들읍시다


154. 설교가는 백성의 말을 들어야 하며, 백성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야 합니다. 설교가는 말씀을 묵상해야 하지만, 백성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설교가는 “삶과 세상의 열망, 풍요로움과 한계, 세상이 기도하는 방법, 세상이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삶과 세상을 관찰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런 것들이 인간적 모임의 이런 저런 특징입니다.” 그러면서 설교가는 “실제 백성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그들의 표지와 상징에, 그들의 물음에 답을 내놓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설교가는 성서 본문을 인간 상황에, 즉 하느님 말씀의 빛을 얻고자 외치고 있는 그들의 체험에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심은 똑똑함이나 계산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경건하고 사목적인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건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기 위한 영적 감수성”이며,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를 찾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이런 저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준비는 복음적 식별 연습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빛 속에서 “하느님께서 역사의 환경 속에서 울려 퍼지게 하시는 부르심을 알아보려고 노력합니다. 이 환경에서 그리고 이 환경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믿은 이들을 부르십니다.”


155. 그런 노력을 기울일 때, 재회의 기쁨, 절망의 순간, 혼자가 되는 두려움, 다른 이들이 고통에 대한 동정심,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같은 보통 사람이 겪는 체험이 우리에게는 부족하겠지만, 그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백성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 폭넓고 깊은 감수성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도 묻지 않는다면 절대로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백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최근 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텔레비전이 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이 개종, 경신례, 형제애와 봉사에의 헌신 따위를 요청하실 때, 그 하느님 말씀이 강렬하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어떤 사실과 스토리로 시작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현안에 대한 설교가의 해설을 듣고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들도 항상 있을 것입니다.


강론의 자원


156. 어떤 사람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훌륭한 설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즉 설교를 구체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백성이 듣지 않거나 음미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마도 메시지를 제시하는 적절한 방법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화의 내용이 갖는 분명한 중요성이 절대로 그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심오한 영적 관심과 비슷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에 봉사하는 데 우리의 모든 재능과 창의성을 투입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이웃에게 형편없는 것을 주지 않으려는 훌륭하고 적극적인 이웃사랑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잘 다가가기 위해서 강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조언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간결하게 말하고, 알면서도 침묵하는 사람이 되어라”(집회 32,8)


157. 몇 가지 예를 들어서, 우리의 가르침을 풍요롭게 하고, 보다 호소력 있게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원들을 찾아봅시다.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가르칠 때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즉 어떻게 마음 속에 상을 그리게 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례들이 특정 요점을 분명히 하는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사례들은 보통 마음에만 호소합니다. 반면에 이미지들은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사람들이 더 잘 음미하고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을 사로잡는 이미지는 메시지를 낯익은 것으로, 편한 것으로, 실질적인 것으로, 일상과 관련된 것으로 만듭니다. 훌륭한 이미지는 사람들이 메시지를 맛볼 수 있게 하고, 복음을 향한 욕구를 불러일으켜 그 의지를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옛 스승께서 저에게 말씀하신 훌륭한 강론은 “생각, 감성, 이미지”를 가져야만 합니다.


158. 바오로 6세는 “신자들은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단순하고, 명료하고, 직접적이며, 제대로 적용된 가르침이라면 그 가르침에서 커다란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단순성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헛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언어가 백성이 이해할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설교가는 자주 청중의 일상 언어가 아닌 단어, 곧 학습 중에 배운 단어와 특별한 배경을 갖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단어들은 신학이나 교리교육에 적합하지만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교가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에게 너무 익숙해서 모든 사람이 당연히 그 단어를 이해하고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백성의 언어에 맞추어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삶을 공유하고 사랑의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성과 명료성은 다릅니다. 우리의 언어는 단순할 수 있지만, 우리의 가르침은 분명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제대로 구성되지 않거나, 논리적 전개가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 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강론의 주제가 단일하고, 문장 사이의 분명한 관계와 질서를 가져서, 백성이 설교가의 말을 쉽게 따라잡아 그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159. 훌륭한 강론의 다른 특징은 그것이 긍정적이란 것입니다.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강론보다는 무엇을 더 잘 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강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강론이 부정적인 어떤 것에 대한 주의를 끌었다면, 마찬가지로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가치를 가리키려 해야 할 것입니다. 강론이 불평, 탄식, 비판, 그리고 비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긍정적인 가르침은 항상 희망을 주고, 미래를 가리키며, 우리를 부정에 덫에 걸린 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보다 더 호소력 있는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 사제, 부제 그리고 평신도가 자원들을 발굴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만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IV. 보다 깊은 선포(케리그마)의 이해와 복음화



160. 주님의 선교 명령에는 신앙의 성장이 포함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오 28,20) 따라서 첫 번째 선포가 지속적인 양성과 성숙을 요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복음화는 성장의 과정을 겨냥합니다. 그 성장 과정은 각 사람과 그의 삶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진지하게 취하는 것입니다. 복음화는 이 성장의 열망을 자극해서, 우리 각자가 온 마음을 다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 2,20)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161. 이런 성장의 소명이 주로 혹은 배타적으로 교의 형성과 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으로 보여주신 모든 것을 “지키는” 것과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덕목들과 함께 첫째 계명이면서 가장 큰 계명인 새 계명,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가장 잘 알아보게 하는 그 계명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명백하게, 신약성경 저자들이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메시지의 핵심을 제시하려고 할 때마다, 이웃사랑을 핵심 조건이라고 제시합니다.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이는 바오로 성인의 말씀입니다. 바오로 성인에게 사랑의 계명은 율법을 완성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핵심과 목적입니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갈라디아 5,14)


바오로는 자기의 공동체에게 그리스도인 생활을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으로 제시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도...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길... 빕니다.”(1테살로니카 3,12) 마찬가지로 야고보 성인도 그리스도인이 율법 전체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신 지고한 법을”(야고보 2,8) 이행하라고 권고합니다.


162. 다른 한편 응답과 성장의 이 과정은 항상 하느님의 선물을 뒤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태오 28,19)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아버지의 무상의 선물과 그분 은총의 우선성(에페소 2,8-9; 1코린토 4,7 참조)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영광을 드리는 그 변치 않는 성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변형될 수 있습니다.


선포와 신비의 전달인 교리교육


163. 교리교육은 신앙의 성장에 기여합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좌와 여러 주교회의가 발행한 교도권을 갖는 다수의 교리교육 관련 문헌과 보조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사도적 권고 <Catechesi Tradendae>(1979), <교리교육의 일반 지침>(the General Catechetical Directory 1997), 그리고 그 내용을 이 자리에서 다시 다룰 필요가 없는 다른 문헌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 몇 가지를 간략하게 고찰하고 싶습니다.


164. 교리교육에서도, 우리는 첫 선포 혹은 케리그마가 갖는 근본적인 역할을 재발견했습니다. 케리그마는 모든 복음화 활동과 교회 쇄신 노력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케리그마는 삼위일체적입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습니다. 그분은 죽음과 부활로써 우리에게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를 보여주시고 전하십니다. 교리교사의 입술에서는 다음의 첫째 선포가 끊임없이 울려 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분은 당신을 비추고 당신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매일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첫째 선포인 것은 그것이 처음에는 존재하고, 그 후에 잊어지거나 다른 더 중요한 것으로 대치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중심 선포이기 때문에 질적인 의미에서 첫 째 선포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반드시 자꾸 들어야하는 선포, 우리가 교리 교육 전 과정에 걸쳐 이런 저런 방법으로 반드시 밝혀야 하는 선포, 어떤 수준이든 어떤 순간이든 선포해야 할 것이기에 ‘첫째’ 선포인 것입니다.(126) 그 때문에도, “사제는 - 다른 모든 교회 구성원처럼 - 그 자신 끊임없이 복음화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계속 성장해야만 합니다.”


165. 우리는 교리교육을 통해서 케리그마 보다 더 “확실한” 무엇으로 인도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의 그 선포보다 더 확실하고, 심오하고, 분명하고, 의미가 있으며 지혜로 가득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교육은 케리그마를 더 깊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교리교육의 활동은 언제나 케리그마를 밝게 비추고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교리교육이 다루는 모든 의미를 보다 완전하게 이해하도록 해줍니다. 케리그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한함을 향한 열망에 부응하는 메시지입니다. 케리그마가 중심이라는 것은 오늘날 가장 필요한 요소들을 강조합니다.


교리교육은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이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의무 이전에 하느님 구원의 사랑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교리교육은 진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자극해야 합니다. 교리 교육은 기쁨, 격려, 생생함, 그리고 조화의 균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들에 대한 가르침은 때로는 복음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 몇 가지 교의 정도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메시지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즉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에게는 접근가능성, 대화준비성, 인내, 심판하지 않는 따뜻함과 환대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166. 최근 수십 년 동안 발전한 교리교육의 다른 측면은 신비를 전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전체 공동체를 포함해서 체험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 하나이고, 그리스도교의 시작을 드러낸 전례의 표지들을 새롭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많은 규범과 프로그램들이 신비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쇄신 작업과 관련해서 아직까지 충분하게 검토되지 못했습니다. 신비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쇄신은 교육에 대한 각 공동체의 식별에 기초해서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교리교육은 말씀의 선포 가운데 하나이며, 항상 그 말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적합한 배경에 따른 호소력 있는 제시, 설득력 있는 표상과 기호 사용, 폭넓은 성장과정의 주입, 그리고 모든 인간적 요소를 듣고 응답하는 공동의 여정 안에 통합시키는 것도 필요합니다.


167. 교리교육의 모든 형태는 “아름다움의 길”을 잘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옳고 참된 무엇일 뿐만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삶이 아름다운 무엇이며, 삶을 새로운 광채와 심오한 기쁨으로 채울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참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모든 것은 주님이신 예수님과 조우하는 길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학적 상대주의를 계발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미학적 상대주의는 진리, 선, 그리고 미 사이의 불가분 유대를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조우는 미에 대해 새롭게 존중하는 것입니다. 즉 미를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존중하고, 미를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진리와 선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빛나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존중합니다.


만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아름다운 것만 사랑한다면, 절대미의 계시이신 강생하신 아드님은 최상으로 사랑할 만한 분이며, 우리를 당신 사랑의 유대 속으로 끌어들이십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길’로 교육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을 전수하려는 노력의 일부여야 합니다. 각 개별 교회는 복음화에 있어 새로운 “비유의 언어”로 신앙을 전달하기 위해 과거의 유산 위에 기초하면서 현대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표현양식을 얹은 예술의 이용을 장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표징과 표상, 말씀을 소통하고 구체화하는 세상, 그리고 다른 문화 배경에서 존중받는 다양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것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눈에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전통적인 것이 아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특별히 매력적이라 한다면, 그것들 역시 과감하게 찾아내야 합니다.


168. 교리교육의 도덕적 요소는 복음이 갖는 생명의 길에 대한 충실성에 있어 성장을 촉진합니다. 이 도덕적 요소는 지혜의 삶, 자기 목표를 달성하는 삶, 그리고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삶이 얼마나 매력적이며 이상적인 것인지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 긍정적 메시지의 빛 속에서는 도덕적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죄악을 배척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불길한 예언을 하는 전문가, 온갖 위험과 일탈을 들춰내는 완고한 재판관이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는 의욕을 돋우는 제안을 전하는 기쁜 심부름꾼, 복음에 충실한 삶에서 빛을 발하는 선과 미의 수호자여야만 합니다.


성장 과정에서의 인격적 동반


169. 역설적으로 익명성 때문에 힘들어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삶의 세세한 것에 집착하는 문화에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병적인 호기심에 집착하는 문화에서, 교회는 필요할 때마다 다른 사람을 보다 더 교감하면서 자세하게 살펴봐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품을 받은 교역자와 다른 사목 활동가는 그리스도의 친밀함과 그의 인격적 시선의 향기를 선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 사제, 수도자와 평신도 - 이런 “동반의 예술”을 전수해야 할 것입니다. “동반의 예술”은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는 법을 가르칩니다.(탈출기 3,5 참조) 이 동반하는 걸음걸이는 그리스도교 생활 안에서 치유하고, 해방하며, 성장을 장려하는 우리의 친밀함과 우리의 따뜻한 시선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확고하고 안정된 것이어야 합니다.


170. 자명한 것 같지만, 영적 동반은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인도해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피할 수 있다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실존적으로 고아, 무력한 사람, 오갈 데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 주변만 맴돌며 아무 곳에도 가지 않음으로써, 순례자가 되는 것, 떠돌이가 되는 것을 그만둡니다. 만일 그들의 지기몰두를 지지하는 어떤 치료 같은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께로 향하는 순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과의 동반은 역효과를 낳을 것입니다.


171.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우리한테는 타인과 동반하는 경험을 갖추고, 신중함과 이해심, 인내심과 성령께 순응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과정에 정통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무리를 흩어버리려 하는 늑대로부터 양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듣는 기술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듣는 것 이상입니다. 소통에서 듣는 것은 친밀함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개방입니다. 이 친밀함 없이는 참된 영적 만남이 생길 수 없습니다. 들으면 바른 태도와 말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냥 방관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 같이 존중하고 공감하며 들음으로써만 참된 성장의 길로 들어설 수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하게 응답하고, 그분이 우리 삶에 뿌리신 씨앗의 열매를 맺는 그런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누구나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가질 수 있으나, 그러면서 끈질긴 “불순한 성향” 때문에 덕목을 실천하는 데 머뭇거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을 온전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덕목의 유기적 조화는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습관 속에’(in habitu) 존재합니다. 비록 어떤 형태의 조건이 그런 고결한 습관들의 ‘작동’을 방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백성이 한걸음씩 신비를 온전하게 취할 때까지 한걸음씩 인도할 교수법”이 필요합니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복자 피터 페이버는 “시간은 하느님의 사자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172. 다른 사람을 동반하는 사람은 각 사람이 처한 하느님 앞에서의 처지와 그분 은총 속에 있는 그의 삶이 ‘신비’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누구도 이 신비들을 겉으로는 완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다른 이의 행동으로 나타난 객관적인 악을 확인한 것을 기초로 해서, 그의 행동을 바로잡아 그가 성장하도록 도우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마태오 18,15 참조) 그러나 그들의 책임과 유죄를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마태오 7,1; 루카 6,37 참조)


그렇게 훌륭하게 동반하는 사람은 절망이나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스스로 치유되도록, 스스로 씨름하도록, 스스로 십자가를 끌어안도록, 스스로 모든 과거를 뒤로 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전혀 새로운 길을 나서도록 초대합니다. 다른 이가 우리와 동반하며 우리를 돕는다는 인격적 체험과, 우리와 동반하는 그에게 개방하는 인격적 체험은 다른 사람에 대해 공감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 인격적 체험은 그들의 신뢰를 얻는 올바른 길을 찾도록 해줍니다. 또 우리가 마음을 열게 하고 성장할 준비를 갖추는 올바른 길도 가르쳐줍니다.


173. 진정한 영적 동반은 항상 복음화에 봉사한다는 배경에서 시작하고 발전합니다. 바오로와 티모테오와 티토의 관계는 그들의 사도적 활동 중에 이루어진 이 영적 동반과 양성의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각 도시에 머무르면서 “해야 할 남은 일을 정리하는”(티토 1:5; 1티모테오 1:3-5 참조) 사명을 맡긴 바오로는 그들에게 개인적 생활과 사목 활동에 관한 규칙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적 동반이나 독립된 자기실현 같은 것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선교의 제자들은 선교의 제자들을 동반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174. 하느님 말씀은 오직 강론만 살찌게 하지 않습니다. 복음화 자체가 듣고, 묵상하고, 기념하고, 증언하는 그 말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은 복음화의 원천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말씀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스스로 복음화 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복음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전보다 더 완전히 교회의 모든 활동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특별히 성찬례에서 듣고 기념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을 키우고 내적으로 힘을 불어넣어주어, 일상생활에서 복음을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게 합니다. 이미 말씀과 성사를 대립시킨 옛 관행을 벗어난 지 상당히 오래되었습니다. 살아있으며 효력을 내는 그 말씀의 선포는 성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며, 성사에서 그 말씀은 최대의 유효성을 달성합니다.


175. 성경 연구는 모든 믿는 이에게 열려 있는 문이어야 합니다. 계시된 말씀야말로 우리의 신앙을 전수하려는 모든 노력과 교리교육을 근본적으로 풍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를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과 친숙해져야 합니다. 복음화는 교구, 본당, 교회 단체들이 개별적으로 또 공동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기를 장려하면서도, 진지하고 지속적인 성경연구의 기회를 제공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 혹은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맹목적으로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은 것이 있어서 알아야 할 것이 남아있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시된 말씀이라는 장엄한 보물을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제 4 장

복음화의 사회차원



176. 복음화를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풍부함, 복잡함, 역동성을 갖는 복음화의 실체를 포기하려는 모든 시도, 곧 복음화를 부분적으로 혹은 단편적으로 정의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복음화를 메마르게 하고 왜곡하기까지 할 뿐입니다.” 저는 이제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에 관한 저의 관심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사회적 차원이 적절하게 실현되지 않는다면, 복음화 사명이 갖는 참된 통합적 의미를 왜곡할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I. 공동의 반향을 일으키는 케리그마, 사회의 반향을 일으키는 케리그마


177. 케리그마는 분명한 사회적 내용을 갖습니다. 복음의 핵심에는 다른 이들과 결합된 생활과 공동체 생활이 있습니다. 첫 선포의 내용은 분명히 사랑에 중심을 둔 도덕적 함의를 갖고 있습니다.


신앙고백과 사회에 대한 헌신


178. 무한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한 분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무한한 존엄성을 주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각 사람이 하느님의 바로 그 사랑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각 사람을 고결하게 한 무한한 사랑에 대한 의심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분의 구원은 사회적 차원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들까지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신다고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인간 환경과 모든 사회적 유대를 꿰뚫으려 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는 성심의 무한한 창조력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심은 인간사의 매듭이 아무리 복잡하게 엉켰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풀 수 있는지를 압니다.”


복음화는 성령께서 하시는 이 해방의 활동에 협력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비 자체인 삼위일체는 우리가 거룩한 친교의 이미지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순전히 우리만의 노력으로 완성과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환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복음의 핵심에서 복음화와 인간적 진보 사이의 깊은 연계를 봅니다. 인간적 진보는 반드시 복음화의 모든 활동에서 그 표현방식을 찾고 전개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물이신 바로 그 사랑으로 다시 그분을 사랑하라고 초대한 첫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생활과 행동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응답을 가져옵니다. 그 응답이란 이웃의 선익을 열망하고, 찾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179.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과 참된 형제적 사랑 사이에는 이렇게 분리할 수 없는 유대가 있습니다. 이 유대는 여러 성경 본문에 나타나는데, 그 본문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 모든 본문을 잘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본문의 메시지가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공동체에 실제적인 결과를 낸다는 것을 확실하게 찾아내지도 않은 채, 그냥 당연하다고 간주하거나, 거의 기계적으로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해롭습니까! 왜냐하면 그 때문에 우리는 놀라움, 흥분, 형제애와 정의의 복음을 살려는 열정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형제와 누이가 우리 각자를 위한 육화의 연장임을 가르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 다른 이를 대하는 태도는 초월적 차원을 갖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오 7,2)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비에 상응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죄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이 구절이 분명히 밝힌 것은 모든 도덕률의 기본이 되는 위대한 두 계명 가운데 하나로서, 또 완전히 거저주신 하느님의 선물에 부응하는 영적 성장을 식별하기 위한 가장 분명한 표지로서,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서 우리 형제와 누이를 향해 가는 것”을 절대적 우위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사랑의 봉사는 교회 사명의 구성요소이며, 교회가 교회임을 드러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본성으로 선교의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이해하고 지원하고 촉진하는 동정과 효과적인 사랑이 많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 도전


180. 성경을 읽어보면 복음이 단순히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응답은 단순히 궁핍한 개인들에게 우리의 작은 인간적 몸짓으로 나누어 주는 행동으로, 일종의 “메뉴에 따른 사랑”으로, 혹은 오직 우리의 양심을 편하게 하려는 일련의 행동들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루카 4,43 참조) 복음은 이 세상에서 통치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서 통치하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이 보편적 형제애, 정의, 평화, 그리고 존엄을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가르침과 생활은 모두 사회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찾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오 6,33) 예수님의 사명은 당신 아버지의 나라를 시작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오 10,7)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181.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으며 자라고 있는 그 나라는 우리 존재를 모든 차원에서 끌어들이고, 바오로 6세가 참된 발전에 적용한 식별의 원리를 환기시킵니다. 참된 발전은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만일 복음화가 복음과 인간의 구체적인 생활과의 상호활동, 즉 복음과 개인적 생활과 사회적 생활 사이에 지속하는 상호활동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복음화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내재된 보편성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며, 그분의 구원 계획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 데 모은 것”(에페소 1,10)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로마 8,19) 때문입니다. 여기서 “피조물”은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명은 보편 목적을 갖습니다. 사랑의 그 명령은 실존의 모든 차원, 모든 개인, 모든 공동체 생활 영역, 그리고 모든 백성을 포함합니다. 인간적인 것 어느 것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 왕국을 찾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항상 역사를 일으킵니다.


사회가 제기하는 물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182. 불확정적인 상황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새로워지고 발전해야 하며, 또한 토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주요 사회원리들이 그저 아무에게도 도전하지 않는 일반적 원칙들로 남지 않으려면, 반드시 - 자세하게 다루지 않더라도 - 구체적이 되어야 합니다. “복잡한 현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실질적 결론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목자들은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아서 백성의 삶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권리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복음화 과업은 각 인간 존재의 통합적 발전을 포함하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사적 영역에 제한되어야 한다고, 종교는 오직 천국을 위해 영혼을 준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가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영원성에서 그 행복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누리게 하기 위해”(1티모테오 6,17), ‘모든 사람’이 누리도록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전환은 “사회질서와 공동선 추구와 관련된” 생활의 그 모든 영역과 측면을 특별히 검토할 것을 당연히 요구합니다.


183. 따라서 누구도 종교는 사회생활과 국가생활에 영향을 주지 말고, 시민제도의 건전함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의견을 밝힐 권리가 없는 것으로서, 개인 생활의 내적 지성소에 귀속되어야만 한다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누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캘커타의 복자 데레사의 메시지를 교회와 침묵 속에 가둬야 한다고 주장하겠습니까?


진정한 신앙은 - 절대로 편안하거나 순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데 - 항상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열망을, 가치를 전하려는 열망을, 우리가 발견한 그 어떤 좋은 것을 이 세상에 남기려는 열망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이 장엄한 행성을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행성에 우리를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비극과 투쟁, 희망과 열망, 강함과 나약함을 모두 지니고 이곳에 머무는 인류가족을 사랑합니다.


지구는 우리의 공동 가정이며, 우리 모두는 형제이며 누이입니다. 만일 정말 “정치의 주요 책임이 사회와 국가의 공정한 질서를 세우는 것”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비켜나 있을 수도 비켜나서도 안 됩니다” 사목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것은 핵심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긍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제안을 하고, 변화를 꾀하며, 그런 의미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에서 태어난 희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교리의 성찰 단계든 실천 단계든 사회 분야에서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의 헌신”을 결합시킵니다.


184. 지금 이 자리에서 오늘날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근심스러운 많은 사회 문제들을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일부를 제2장에서 다루었습니다. 이 ‘교황 권고’는 사회문헌이 아닙니다. 다른 여러 주제에 관한 성찰을 위해서 우리는 <간추린 사회교리>(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라는 가장 적절한 도구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이 <간추린 사회교리>의 활용과 연구를 추천합니다.


더 나아가, 교황이나 교회도 사회 현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혹은 현안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데 독점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저는 바오로 6세의 통찰력이 있는 관찰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다양한 상황 앞에서, 통일된 메시지를 밝히고, 보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큰 뜻도 아니며 우리의 사명도 아닙니다. 각 지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각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책임입니다.”


185. 저는 이 시대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가장 큰 두 문제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두 주제가 인류의 미래를 형성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보다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첫째 주제는 사회 안에 가난한 사람을 포함시키는 문제이며, 둘째 주제는 평화와 사회적 대화의 문제입니다.


II. 사회 안에 가난한 사람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186. 가난해지셨고 항상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과 가까이 계셨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야말로 사회가 가장 무시하는 구성원들의 통합적 발전에 관한 우리 관심의 근거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우리는 탄원을 듣는다


187.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발전을 위한, 그들을 사회의 완전한 일원이 될 수 있게 하는 하느님의 도구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가난한 이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온유하고 주의 깊은 사람이 되어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서야 합니다. 성서를 그저 힐끗 살펴보아도 은총의 우리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가난한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려 하시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이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 너를 보낸다.”(탈출기 3,7-8, 10)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그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구원자를 세우셨다.”(판관기 3,15)


가난한 사람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하느님의 도구인 우리가 만일 그 탄원에 귀를 막는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계획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 가난한 사람이 “너희를 걸어 주님께 호소하면 너희에게 죄가 될 것이다.”(신명기 15,9) 가난한 사람의 곤궁을 향한 연대의 결여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가난한 사람이 “비참한 삶 속에서 너를 저주하면 그를 만드신 분께서 그의 호소를 들어주시리라.”(집회서 4,6)


자연스럽게 오래된 물음이 다시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1요한 3,17) 억압받는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에 관해 야고보 사도가 얼마나 무섭게 말했는지를 기억합시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사기로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야고보 5,4)


188. 그 탄원에 마음을 둘 필요는 그 자체로 해방하는 은총의 활동에서 나온다는 것을 교회는 알았습니다. 그 은총이 우리 각자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부여된 사명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자비의 복음과 인류에 대한 사랑에 이끌리는 교회는 정의를 위한 부르짖음을 듣고 모든 역량을 다해 그 부르짖음에 응답할 뜻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6,37) 이 말씀은 우리가 만나는 이들의 실제적 궁핍을 덜어주려는 일상의 연대 행위뿐만 아니라,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고, 가난한 이들의 통합적 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일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연대”라는 말이 약간 진부하게 때로는 불충분하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대”는 산발적인 관대한 행동 그 이상의 중요한 무엇을 지칭합니다. “연대”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사고방식, 즉 소수에게 돌아갈 선보다는 모든 이의 삶을 우선하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냅니다.


189. 연대는 재산의 사회적 기능과 재화의 보편 목적이 사유재산보다 우선하는 것들이라는 점을 깨달은 사람의 자발적 반응입니다. 재화의 사적 소유는 그것을 보호하고 증대시킬 필요로 정당화됩니다. 그것은 그 재화가 공동선에 더 잘 기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문에 연대는 반드시 가난한 사람에게 속한 것을 되돌려주려는 결의로 실천해야 합니다. 연대가 갖는 이런 신념과 습관을 실현할 때, 이 신념과 습관은 다른 구조적 변형에 이르는 길의 문을 열어 그 변형을 가능하게 합니다. 새로운 신념과 태도를 낳지 않는 구조의 변화는 그 구조가 머지않아 부패하고 억압적이며 비효율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줄뿐입니다.


190. 때로는 전체 민족,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민족 전체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인권의 존중뿐만 아니라, 민족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인권조차도 개인적 권리들 혹은 보다 부유한 민족의 권리들을 터무니없이 수호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습니다. 각 민족은 고유의 문화와 자율성을 갖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행성이 모든 인류에게 속하고 모든 인류를 위한 것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부 민족이 자원이 부족하거나 발전이 덜 된 곳에 태어난다는 그 사실이 그들이 낮은 존엄성을 지니고 살고 있음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되풀이해 말해야 합니다. “남보다 잘사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남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너그러이 양보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권리에 대해 적절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자기 나라의 탄원과 전망을 넘어 다른 민족과 지역의 탄원을 듣고 그 전망을 확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연대의 정신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연대는 “모든 민족이 각자의 운명을 스스로 해결하게 도울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신을 완성시키도록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191. 모든 곳에서,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목자의 도움과 함께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브라질의 주교들은 이를 훌륭하게 밝혔습니다.


“우리는 매일 브라질 백성의 기쁨과 희망, 고생과 슬픔을 (우리의 짐으로) 짊어지고 싶습니다. 특히 땅과 집이 없고, 음식이 없고 건강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골과 도시의 특정지역에서 그들의 권리를 희생시켜가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고생과 슬픔을 말입니다. 그들의 빈곤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를 위한 식량이 충분하다는 것과 굶주림은 재화와 소득의 잘못된 분배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잘못된 분배는 일반화된 낭비와 사치로 더욱 악화됩니다.”


192.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더한 것을 갈망합니다. 우리의 꿈은 더 높이 날아오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모든 민족의 영양 상태나 “품위 유지”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느 시대든 그 어떠한 것이든 모든 복지와 번영”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육, 건강관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용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삶의 품위를 드러내고 증진시키는 것은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참여적이며 상호 협력적인 노동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임금은 그들이 다른 모든 재화를 취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 모든 재화는 사실 우리가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헛수고를 하지 않으려면 복음에 충실해야 합니다


193. 다른 이의 고통으로 우리가 움직일 때 비로소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를 우리가 실현하는 것입니다. 자비에 관해 가르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그리고 그 말씀이 교회의 생활 속에 울려 퍼지게 합시다. 복음은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오 5,7)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다른 이에 대한 우리의 자비가 하느님의 심판의 날에 우리를 변호해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장차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받을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는 가차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보 2,12-13)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에집트) 탈출 후 유다인의 영성이 갖는 훌륭한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 전통은 자비가 얼마나 좋은 가치인지를 강조합니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그리하시면 임금님의 번영이 지속될 것입니다.”(다니엘 4,24) 지혜문학은 자선을 궁핍한 사람을 향한 자비의 구체적 실천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 집회서는 이런 사랑을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합니다. “물은 타오르는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30)


신약성경에도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1베드로 4,8) 이 진리는 교부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교 신앙의 자기중심적 쾌락주의에 대한 저항 및 예언 문화를 창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 가지 예만 소개합니다. “우리가 만일 불길의 위험에 처했다면, 분명히 그 불을 끄기 위해 물로 달려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죄의 불꽃이 우리의 결점에서 타오른다면, 그리고 그 때문에 곤경에 처한다면, 자비의 일을 수행할 기회를 가질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자비는 마치 수문이 이미 열려 있어 불을 끌 수 있는 분수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194. 이 메시지는 너무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너무 단순하고 훌륭해서, 어떤 교회의 해설도 그것을 상대화시킬 권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본문들에 대한 교회의 성찰은 그 본문이 갖는 힘을 약화시키거나 애매모호하게 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그 권고를 용감하고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간단한 것을 왜 복잡하게 만듭니까? 개념상의 도구들은 그것이 설명하려는 실체와의 접촉을 높이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우리를 그 실체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적 사랑에, 겸손하고 친절한 봉사에, 정의와 가난한 이를 향한 자비로 우리를 부르는 성경의 권고들이 특별히 그런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를 그런 방식으로 보라고 당신 말씀과 행동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왜 그렇게 분명한 것을 가리려합니까? 우리는 단순히 교의상의 오류에 빠지는 것에 관심을 두면 안 됩니다. 우리는 빛으로 가득한 이 생명과 지혜의 오솔길에 충실히 남아 있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합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정설의 수호자들이 견딜 수 없는 불의한 상황과 그것을 지속하는 정권에 대해 수동적이고 혹은 무저항적이고, 관대한, 심지어 공범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195. 바오로 성인이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갈라디아 2,2)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갔을 때, 그들이 제시한 확실성의 기준은 그가 가난한 사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 2,10 참조) 이 중요한 원리, 즉 바오로 공동체는 이교도의 자기중심적 생활태도에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이 원리를 강조한 것은 새로운 자기중심적 이교 신앙이 자라고 있는 오늘날에도 시의적절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아름다움을 항상 적절히 성찰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절대로 없애서는 안 될 하나의 표징이 있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사회가 내다버린 사람들에 대한 선택이 그것입니다.


196. 때때로 우리는 심장과 마음이 굳어버린 것을 봅니다. 우리는 잘 잊고, 빗나가고, 현대 사회가 제공하는 소비와 오락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들에 넋을 잃습니다. 이것은 모든 차원에서 일종의 소외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한 사회조직의, 생산의, 그리고 소비의 형태들이 자신을 선물로 봉헌하는 것과 인간들 사이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 때 그 사회는 소외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백성안에서 가난한 사람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197. 하느님의 마음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정말 그렇기 때문에 그분 자신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토 8,9) 우리의 전체 구원역사는 가난한 사람의 현존을 특징으로 합니다. 구원은 거대한 제국의 끄트머리 작은 동네의 비천한 처녀가 “예”라고 응답함으로써 우리에게 왔습니다. 구세주는 구유에서, 동물들 가운데서,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처럼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와 함께 성전에 봉헌되셨습니다. 그것은 양을 바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봉헌제물이었습니다.(루카 2,24; 레위 5,7 참조) 그분은 평범한 노동자들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분은 빵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자기 손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재산을 빼앗긴 군중이 그분을 따랐습니다. 이는 그분의 말씀이 보여줍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보내셔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기 때문이다.”(루카 4,18) 그분께서는 슬픔으로 짓눌리고, 빈곤으로 무너져버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당신 마음에 그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그분께서는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셨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다. 그런데 너희는 나에게 먹을 음식을 주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 모든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가 하늘나라의 열쇠가 된다고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마태오 25,5 참조)


198. 교회에게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은 문화적, 사회학적, 정치적, 혹은 철학적 범주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신학적 범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에게 “당신의 첫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이 신적 우선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필리피 2,5) 가질 자격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으로 고무된 교회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가르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실천에서 우선성을 갖는 특별한 형태이며, 교회의 모든 전통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선택은 - 베네딕토 16세가 가르친 것처럼 - “그분의 빈곤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할 만큼,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절대적입니다.” 그것이 제가 가난한 교회,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를 원하는 이유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신앙의 감각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생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압니다.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새 복음화는 그들의 삶에서 활동하는 구원의 힘을 인정하고, 교회의 순교 길에서 그들을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하며,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며, 그들을 위해 말해야 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나눠주시려는 신비스러운 지혜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199. 우리의 헌신은 증진과 보조를 위한 활동이나 프로그램에만 배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움직이게 하시는 것은 제멋대로의 행동주의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다른 이를 “어떤 점에서는 우리 자신으로” 생각하는 정중함입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이 정중함은 다른 이에 대한 참된 관심의 시작입니다. 이 관심은 나를 고무시켜 다른 사람의 선을 효과적으로 추구하도록 합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선량함, 그들의 생활 체험, 그들의 문화, 신앙을 살아가는 그들의 방법이 지닌 진가를 인정하게 합니다.


참사랑은 항상 관조적이며, 필요나 허영, 단순한 외모를 넘어서는 아름다움 때문에 그에게 봉사하게 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데, 그 사랑은 그에게 무엇인가를 거저 줍니다.” 가난한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위대한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존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 가난한 이를 위한 진정한 우선적 선택이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와 다르고, 자신의 개인적 혹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려는 모든 시도와 다른 점입니다. 실질적이며 진실한 이 친밀감에 기초해야만 가난한 이들이 걷는 해방의 길에서 우리는 그들과 합당하게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마음 편하다는 것을 보증할 것입니다. 그런 접근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실을 가장 위대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없다면, “그 자체로 사랑의 탁월한 형태인 복음 선포는 잘못 이해되거나 말의 바다 속에 가라앉을 위험이 있습니다. 현대의 대중매체 사회에서 그 말의 바다는 매일 우리를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200. 이 권고는 가톨릭교회 신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가난한 사람이 겪는 최악의 차별은 영적 배려의 결여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가난한 사람 대부분은 신앙에 대해 특별한 개방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에게 하느님의 우정, 하느님의 축복, 하느님의 말씀, 성사의 기념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이 걷는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리의 우선적 선택은 주로 탁월하고 우선적인 종교적 배려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201. 누구든지 자신만의 생활태도가 다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 같은 핑계는 학계, 사업 분야나 직업 분야, 그리고 교회의 여러 분야에서도 들리는 공통된 현상입니다. 비록 평신도의 핵심적인 소명과 사명이 세상 현실과 인간 활동을 복음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가운데 누구도 가난한 이와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에서 예외가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전환,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의 집중, 정의와 평화를 향한 열정, 가난한 이들과 빈곤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됩니다.” 저는 이런 말들이 아무런 실질적 실천 효과는 없이 해석과 토론만 불러일으킬까봐 두렵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는 개방성과 준비성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이 쇄신된 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창의적 방법들을 모색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경제와 소득의 분배


202.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는 일은 미룰 수 없습니다. 이는 좋은 사회 질서를 위해서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회를 약화시키고 무너뜨리는 사회적 질병을 치유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적 질병은 사회를 새로운 위기로 내몰 수밖에 없습니다. 시급한 문제에 대응하려는 사회복지 사업은 단순히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 자율을 배척하고,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세상의 빈곤 문제를 풀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은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 자율과 관련해 생긴 그 어떤 문제들도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평등은 사회적 병고의 뿌리입니다.


203. 모든 경제 정책이 반드시 실현해야 할 관심사는 각 개인의 존엄과 공동선 추구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 인간 존엄과 공동선추구는 참되고 통합적인 발전을 위한 전망이나 계획을 갖고 있지 않은 어떤 정치적 담론을 채우기 위해 밖으로부터 유입한 단순한 부가물 쯤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시스템이 넌덜머리가 난다고 증명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윤리의 문제를 제기할 때, 재화의 분배를 언급할 때, 노동의 보호와 약자의 존엄함 수호를 이야기할 때, 정의에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간접적으로 이야기할 때, 넌덜머리가 납니다. 때때로 이런 문제들은 말잔치의 주제가 됩니다. 이 말잔치는 이 문제들을 하찮은 것으로 만듭니다. 사업은 소명, 그것도 거룩한 소명입니다. 단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생에서 더 큰 의미를 추구한다는 조건에서 그렇습니다. 이 인생의 더 큰 의미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의 재화를 증대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이 그 재화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공동선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204. 우리는 더 이상 시장에 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정의의 성장은 경제의 성장을 전제하면서도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정의의 성장은 특별히 더 나은 소득분배, 고용자원의 창출, 단순한 시혜정신을 넘어서는 가난한 이의 통합적 발전을 위한 결정, 계획수립, 작동, 그리고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책임한 인기영합주의를 제안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경제가 노동력을 감소시키면서 이익을 증대시키려는 시도와 그럼으로써 배제된 이들의 계급을 확대시키는 것 같은 새로운 독에 대한 처방들을 경제가 더 이상 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205. 저는 이 세상에 퍼진 죄악의 깊은 뿌리 -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죄악이 아니라 - 를 치유하기 위해 진지하고 효과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더 많은 정치인들을 우리에게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비록 자주 훼손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한 고상한 소명이며 사랑의 높은 차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집단 안에서 맺는 거시적 관계의 원리”라는 것을 확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사회 조건, 백성, 그리고 가난한 사람의 삶 때문에 괴로워하는 정치인이 더 많이 등장하기를 주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정부 지도자들과 금융 지도자들이 이 점을 유념하고 그들의 전망을 넓혀, 모든 시민이 품위 있는 노동, 교육과 건강한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일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왜 하느님께 돌아가 그들의 그런 계획들을 불러 일으켜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까? 초월성에 문을 열면, 새로운 정치 경제적 사고를 가져올 수 있다고 굳게 확신합니다. 그 새로운 사고는 경제와 사회의 공동선 사이를 갈라놓은 장벽을 허무는 데 도움이 됩니다.


206. 경제는 그 용어가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의 공동 가정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예술이어야 합니다. 이 세계 전체가 우리의 공동 가정입니다. 이 세계 곳곳에서 내린 각각의 중요한 경제적 결정은 다른 모든 곳에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어떤 정부도 공동의 책임을 고려하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세계적 문제들에 대한 지역 차원의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세계적 문제들이 그 해결의 어려움을 갖고 지역 정치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건강한 세계 경제를 원한다면, 역사의 이 전환점에서 필요한 것은 몇몇 나라가 아니라 각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모든 나라의 경제적 웰빙을 실현하는 상호작용의 보다 유효한 방법입니다.


207. 만일 어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난한 사람들이 존엄성을 갖고 살도록 돕는데,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 효과적인 협력과 창의적인 관심을 갖지 않고 편안하게 자기들만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공동체는 아무리 사회문제에 관해서 많은 말을 하고, 정부를 비판하더라도,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공동체는 종교적 활동, 비생산적인 회의와 공허한 이야기 등으로 위장한 일종의 정신적 세속성의 바다로 떠내려 갈 것입니다.


208. 혹시 저의 이 말에 불쾌한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어떤 개인적 관심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무관하게 애정과 최선의 의도를 갖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저의 말은 적이나 공격자가 하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저는 오직 개인주의적이고, 무관심하며,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도와서, 그런 무가치한 사슬에서 자유로워져 보다 인간적이고, 고귀하며 결실이 풍부한 삶을 생각하고 살도록, 이 지상에 있는 그들의 현존에 존엄함을 가져오도록 돕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상처입기 쉬운 이들을 위한 배려


209. 가장 탁월한 복음전파자이며 복음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장 작은이들과 동일시했습니다.(마태오 25,40 참조)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킵니다. 그러나 성공과 자립을 강조하는 지금의 모델은 느린 사람, 약한 사람, 혹은 생활에서 기회를 찾는 데 재능이 부족한 사람을 도우려는 노력에 투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210. 새로운 형태의 빈곤과 취약성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우리에게 아무런 즉각적이고 확실한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노숙자, 의존증자, 난민, 원주민, 점점 고립되고 버려지고 있는 노인, 그리고 다른 많은 이를 생각합니다. 저는 특별히 이민자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떤 국경도 없는 교회의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신을 모든 이의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모든 국가에게 관대한 개방을 권고합니다. 이 개방은 해당 지역의 정체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오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 통합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삐거덕거리는 불신을 극복하고, 서로 사른 사람을 통합해서, 그 통합 자체를 발전의 새 요소로 만드는 그런 도시들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건축학적 디자인에서도 다른 공간의 가치를 우호적으로 인정하고, 그것들을 연결하고, 결합한 공간들로 가득 찬 그런 도시들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211. 저는 다양한 종류의 많은 인신매매 희생자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언제나 비탄에 빠집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기 4,9)는 하느님의 절규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 모릅니다. 노예 생활하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매일 은밀한 수용시설에서, 매매춘 굴에서, 구걸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어린이들 안에서, 서류를 갖추지 않은 노동자들의 착취 속에서, 그렇게 죽이고 있는 형제자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맙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공모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모든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악랄한 범죄망은 우리 도시에 튼튼하게 자리 잡았으며, 많은 사람이 편하고 조용하게 공모한 결과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있습니다.


212. 배제, 혹사, 폭력의 상황을 견디고 있는 여성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우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없을 때가 빈번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힘없는 가족들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수많은 영웅적 행위를 매일 끊임없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213. 교회가 특별한 사랑과 배려로 돌보고 싶은 약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하고 순진합니다. 오늘날 이 아이들의 인간 존엄성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빼앗고, 그것을 거부하는 이는 누구나 처벌하려는 법을 통과시키는 등 그들과 관련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종종 그들의 생명을 수호하려는 교회의 노력을 조롱하는 한 방법으로 교회의 입장을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반계몽주의적인 것으로, 보수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시도들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수호는 각 개인과 모든 사람의 다른 인권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발달 단계에 있든, 항상 신성하며 침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자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목적이며, 절대로 다른 문제들을 푸는 수단이 아닙니다. 일단 이 자각이 사라지면, 인권 수호의 견고하고 항구한 기초도 사라집니다. 그리되면 인권은 언제나 지금 있는 눈앞의 권력에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각 개인의 생명이 갖는 침해할 수 없는 가치를 인정하는 데에는 이성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그 주제를 신앙의 관점에서도 본다면 “인간의 인격적 존엄에 대한 모든 침해는 하느님께 복수를 울부짖는 것이며, 각 개인의 창조주에 대항하는 공격입니다.”


214. 이 문제가 인간의 가치에 관한 우리의 메시지와 내적으로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점에 관해서 철저하게 정직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절대로 개혁으로 혹은 “현대화”로 간주되는 그 어떤 것의 주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생명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진보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우리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여성들과 적합하게 동반하는데 그다지 한 일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는, 특히 여성들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이 강간이나 극단적 빈곤 상황의 결과일 때, 낙태는 여성들이 갖고 있는 심각한 고통을 해결하는 빠른 방법처럼 보입니다. 누가 그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꿈쩍도 않고 남아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215. 또 다른 약하고 무력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빈번하게 경제적 이익이나 무차별적 착취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저는 피조세계 전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의 청지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몸 덕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세상과 우리를 가깝게 결합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신체적 만성질환을 느끼듯이 땅의 사막화를, 그리고 고통스러운 신체 손상을 느끼듯이 종의 멸종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생활과 미래 세대에 영향을 미칠 죽음과 파괴의 자취를 우리가 지나간 자국에 남겨놓지 맙시다.


저는 이 자리에서 몇 해 전 필리핀의 주교들이 행한 감동적이며 예언적인 비탄의 목소리를 저의 것으로 삼고자 합니다.


“믿을 수 없이 다양한 곤충이 삼림에 살며 그들의 과업을 수행하느라 바빴습니다. 새들은 숲의 창공을 날아다녔습니다. 새들의 밝은 깃털과 다양한 노랫소리는 푸른 숲에 색깔과 노래를 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특별한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이 땅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것을 파괴해도 되거나 불모의 땅으로 만들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단 하루 밤만 비가와도 여러분 지역에는 초코렛 갈색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그 강물은 땅의 생명의 피를 바다로 흘려보내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파시그강 같은 하수구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헤엄을 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오염시킨 그런 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가 경이로운 바다를 색깔과 생명을 빼앗은 물속의 무덤으로 만들었습니까?”


216.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우리 모두는 작지만 강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약한 세상을 보살피고 보호해야할 사명을 갖습니다.


III. 사회에서 실현해야 할 공동선과 평화



217. 우리는 기쁨과 사랑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평화라는 열매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갈라디아 5,22참조)


218. 사회에서의 평화는 사회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지배함으로써 생긴 분쟁 제거나 단순한 폭력의 부재 정도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참된 평화는 가난한 사람들을 달래거나 침묵하게 하는, 그래서 보다 유복한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자기들이 생활양식을 유지하고, 대신 다른 이들은 이들의 만족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그런 사회구조를 정당화시키는 구실이 될 수도 없습니다. 부의 분배,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인권을 포함한 이런 요구들을 서류로 합의를 만들거나 만족스러운 소수를 위한 일시적 평화를 가장해서 억누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은 자신의 특권 포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안락함보다 높은 가치입니다. 따라서 이런 가치들이 위협을 받을 때, 예언자는 반드시 그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219. 평화는 “권력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을 피하는 것”도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의 세계, 인간 사이에 보다 완전한 정의를 갖춘 그런 질서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매일매일 노력해 꼴을 갖춰가는 것입니다.” 결국, 통합적 발전의 결과가 아닌 평화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 평화는 항상 새로운 갈등과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220. 모든 국가의 시민은, 권력을 쫓아 휩쓸리고 권력으로 휘둘리는 그런 군중이 아니라, 헌신적이며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활동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갖는 사회적 차원을 드높입니다. “책임감 있는 시민의식은 일종의 덕이며, 정치생활의 참여는 도덕적 의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러나 ‘시민’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그 무엇을 요구합니다. 시민이 된다는 것은 계속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는 모든 새로운 세대가 참여해야만 합니다. 평화로운 문화의 교류, 다양한 모습을 갖는 문화의 교류를 증진시킴으로써, 이를 (시민이 된다는 것을) 성취하려는 의지와 통합의 열망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더디지만 끈기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221. 평화, 정의, 그리고 형제의식에서 한 백성이 형성되는 과정은 모든 사회적 실재 속에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갖고 연결되어 있는 네 가지의 원리(인간 존엄성, 공동선, 보조성, 연대성의 원리)에 의존합니다. 이것들은 교회의 사회교리의 기둥들에서 나옵니다. 이 원리들은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본적이고 으뜸가는 준거인 매개변수”로 기여합니다. 그 빛으로 저는 이제 사회생활의 발전을 인도할 수 있고, 다양성이 각자의 몫을 다하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는 한 백성의 형성을 인도할 수 있는 네 가지 특별한 원리를 전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 원리들의 적용이 각 나라 안에서, 그리고 전체 세계 안에서 평화의 참된 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합니다


222. 만족과 한계 사이에는 일종의 지속적 긴장이 존재합니다. 만족은 완전한 소유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한계는 우리 앞에 세워진 벽입니다. 대체로 말하면, “시간”은 항상 우리 앞에서 지평을 여는 표현으로서 만족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순간은 한계와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의 순간과 목적인으로서 유토피아적 미래라는 지평 그 사이에서 균형을 갖고 삽니다. 이 목적인은 그 목적자체로 우리를 이끕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백성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의 첫 번째 원리를 보게 됩니다. 즉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합니다.


223. 이 원리 때문에 우리는 당장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계획에서 만나는 어려움, 역풍, 혹은 불가피한 변화를 참을성 있게 견디게 합니다. 이 원리는 만족과 한계 사이의 긴장을 받아들여 시간에 우선성을 두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가 사회정치활동에서 종종 관찰하는 잘못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간과 과정보다는 공간과 힘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공간을 우선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함께 현재 안에 필사적으로 가둬두려고 한다는 것, 모든 힘의 공간들과 자기과시의 공간들을 소유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과정들을 구체화시켜서 억누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우선한다는 것은 ‘공간을 소유한다기보다는 과정을 시작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은 공간을 다스리고, 공간을 비추고, 공간을 끊임없는 확장의 고리 속에서 되돌아갈 가능성 없이 서로 연결시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에서 새로운 과정을 창출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에서 열매를 맺는 지점까지 그 과정을 발전시킬 수 있는 다른 사람과 그룹들을 끌어들이는 행동들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하지 않지만, 분명한 신념과 강한 끈기를 갖고 말입니다.


224. 가끔 저는 오늘날 쉽고, 사람들이 빠른 단기적인 정치적 소득을 내지만 인간의 만족을 높이지는 않는, 그런 즉각적인 결과를 얻으려 하지 않는 대신에, 백성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창출하는 데 실제 관심을 기울이는지 의구심을 갖습니다. 역사는 아마도 “한 시대를 적절하게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는 그 시대의 역량과 특성에 따라 충만하고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인간 실존을 어느 정도로 발전시키고 성취하려 했는가를 묻은 것이다”라는 로메로 가르디니가 설파한 기준에 따라 이를 판단할 것입니다.


225. 이 기준은 복음화에도 적용됩니다. 복음화는 더 큰 그림, 적합한 과정에의 개방성, 장기적 안목을 주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당신 지상 생활 동안 당신 제자들이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 그들이 성령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점을 자주 경고하셨습니다.(요한 16,12-13 참조) 밀과 가라지의 비유(마태오 13,24-30 참조)는 복음화가 갖는 중요한 점을 도식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왕국에 침입해서 해로운 것을 뿌릴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밀의 선함에 패퇴할 것입니다.


일치는 갈등을 극복합니다


226. 갈등은 무시하거나 감출 수 없습니다. 갈등은 반드시 직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갈등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전망을 잃어버리고, 우리의 지평은 위축되며, 실체 그 자체는 붕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갈등 속에서 우리는 실체가 갖는 일치성에 대한 감각을 잃습니다.


227. 갈등이 발생했을 때,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고 마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는 듯이 자기 갈 길을 갑니다. 그들은 그 일에 손을 씻고 자기 삶을 계속합니다. 다른 이들은 그 갈등의 포로가 되는 식으로 그 갈등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들은 방향을 잃고, 자기들의 혼돈과 불만을 제도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일치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분명히 제3의 길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갈등을 다루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것은 기꺼이 먼저 갈등에 용감하게 맞서고, 그것을 해결하고 새로운 과정의 고리에 그 갈등을 연결시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오 5,9)


228. 이 방식으로 불일치 중에서도 친교를 구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일은 갈등의 겉모습을 넘어서 다른 이들의 존엄함을 보려는 위대한 사람만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서 우정을 구축하는 데 있어 불가결한 한 원리, 즉 일치가 갈등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연대는 그 심오하고 가장 매력적인 의식으로 삶의 자리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하나의 길이 됩니다. 이 삶의 자리에서 갈등, 긴장, 그리고 충돌은 다양하면서 생명을 불어넣는 일치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혼합주의나, 어떤 것을 다른 것에 흡수시키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양 쪽에 모두 타당하고 유용한 것을 보존하는 해결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29. 복음에서 나온 이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 시간과 영원, 육과 영, 사람과 사회, 그 모든 것을 당신 안에 하나로 만드셨다는 것을 환기시킵니다. 그 분 안에서 이루신 모든 것의 일치와 화해의 표지는 바로 평화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소 2,14)


복음의 메시지는 항상 평화의 인사로 시작합니다. 평화는 모든 시대에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고 유종의 미를 거둡니다. 평화는 주님께서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심으로써”(콜로새 1,20) 세상과 세상의 갈등을 이기셨고 화해시키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성서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다른 것들을 화해시키는 자리가 우리 자신 안이라는 것, 분열과 붕괴로 위협을 받더라도 우리의 삶 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일 마음이 수천 조각으로 흩어진다면, 사회 안에 참된 평화를 일구어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230. 평화의 메시지는 일종의 협상으로 얻어내는 안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가져다준 일치가 모든 다양함을 조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에 관한 것입니다. 그 평화는 새롭고 믿음직한 종합을 창출함으로써 모든 갈등을 극복합니다. 다양성은 화해의 과정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갈 때, “화해를 이룬 다양성”을 가져오는 일종의 문화적 계약을 보증할 때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콩고의 주교들이 “우리의 인종적 다양성은 우리의 부입니다... 마음의 전환과 화해를 통해서, 일치 안에서만 우리와 우리나라가 모든 차원에서 발전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밝힌 것처럼 말입니다.


실재들은 관념들보다 중요합니다


231. 관념과 실재 사이에는 일종의 항구적 긴장이 존재합니다. 관념은 애써서 성취해야 하는 반면에 실재는 단순하게 존재합니다. 관념들이 실재들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려면, 둘 사이에는 끊임없는 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말의 영역, 이미지의 영역, 수학의 영역에서만 남아있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실재들이 관념들보다 위대하다는 세 번째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 원리는 실재를 포장하는 다양한 수단들을 물리칠 것을 요구합니다. 즉 순수함이라는 천사의 형식들, 상대주의라는 독재들, 공허한 수사들, 실제보다 더한 이상적 목표들, 역사와 관계없는 근본주의라는 상표들, 친절함이 없는 윤리 시스템들, 지혜가 없는 지적 담화들 같은 것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232. 관념들은 - 개념의 역작들은 소통, 이해와 응용(praxis)에 기여합니다. 실재들과 유리된 관념들은 기껏해야 분류하고 정의를 내릴 수 있지만 확실한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 비효과적인 이상주의(관념론)와 유명론(명목론)을 낳습니다. 우리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이성으로 계발된 실재들입니다. 형식적 유명론은 조화로운 목적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는 조작되고, 화장품이 우리 몸에 대한 실질적 관심사가 됩니다. 자기들의 제안이 그렇게 분명하고 논리적인데 왜 사람들이 이해하지 않고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지를 모르는 정치지도자들이, 또 그런 종교지도자들도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순수한 관념의 영역에 빠져서 정치나 신앙을 수사학(레토릭)으로 환원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단순함을 떠나서 대부분 사람에게 낯선 합리성을 도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33. 실재들은 관념들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 원리는 말씀의 육화와 말씀의 실천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1요한 4,2) 실재의 원리, 이미 살을 취하신 말씀,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살을 취하려 하는 말씀의 원리는 복음화에서 핵심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를 도와 교회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라는 것을 보게 하고, 우리 백성의 생활 속에 복음을 토착화한 성인들을 잊지 않게 하며, 교회의 풍부한 이천년 역사가 갖는 열매를 수확하게 합니다. 마치 우리가 복음을 다시 만들어내기를 바란다는 듯이 이 보물과는 유리된 사고체계를 찾아내려는 척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 원리는 우리의 말씀을 실천하도록, 그 말씀의 결실을 내는 정의와 사랑의 과업을 수행하도록 재촉합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 말씀을 실재로 만들지 않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고, 순수한 관념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며, 생명력이 없고 결실도 못내는 자기중심주의과 영지주의로 마치는 것이다.


전체가 부분보다 위대합니다


234. 세계화와 지역화 사이에도 내적 긴장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편협함과 진부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역도 살펴봐야 합니다. 지역은 우리 발을 딛고 있는 땅입니다. 세계화와 지역화는 모두 우리가 양극단 가운데 하나에 빠지는 것을 막아줍니다. 한 극단은 다른 모든 사람 뒤에서 보조를 맞추면서, 빛나는 다른 사람들의 세상을 사모하면서, 모든 시대를 멍청히 바라보며 환호합니다. 또 다른 한 극단은 민속학의 박물관으로, 동떨어진 세상으로, 똑 같은 것을 반복하도록 정해진 세상으로, 새로운 경험과 만날 수 없는 세상으로, 하느님께서 그들의 경계 밖에 내려주신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는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235. 전체가 부분보다 더 위대합니다. 그러나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그래서 제한된 특정 물음에 지나치게 몰두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지평을 넓혀서 우리 모두에게 이로움이 될 더 큰 선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버무리거나 뿌리를 자르지 않으면서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비옥한 땅과 우리의 원래 장소가 지닌 역사에 우리의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작은 규모로 우리 인근에서, 그렇지만 더 큰 전망을 갖고 일할 수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공동체 생활에 파묻힌 사람이라면 자기의 개별성을 잃지 않고 자기의 정체성을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개인적인 성장을 위한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입니다. 세계적인 것을 질식시켜야 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다고 특별한 것이 열매를 못 맺는 것도 아닙니다.


236.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델은 구체(球体)가 아닙니다. 구체는 그 부분들보다 더 크지 않습니다. 구체 표면의 모든 점은 중심에서 같은 거리에 있으며, 각 점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의 모델은 다면체입니다. 다면체는 그 모든 부분들을 수렴하며, 각 부분들은 그 독창성을 유지합니다. 사목활동과 정치활동은 이 다면체에서 함께 각자의 최선을 추구합니다. 그곳에는 가난한 사람과 그들의 문화, 그들의 열망과 그들의 잠재력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 때문에 의심스러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그 어떤 것을 갖고 기여합니다. 이 다면체는 사람을 수렴한 것입니다. 보편적 질서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개별성을 유지합니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한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이 바로 이 다면체 모델입니다. 이 다면체 모델 사회에는 진정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237. 그리스도인에게, 이 원리는 복음의 전체성 혹은 통합성을 환기시킵니다. 교회는 이 복음의 전체성과 통합성을 우리에게 전하고 그것을 선포하라고 내보냅니다. 복음의 풍요로움과 충만함은 학자와 노동자, 기업인과 예술가,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을 끌어안습니다. 각 사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은 고유한 방식으로 전체 복음을 받아들이며 기도, 형제애, 정의, 투쟁과 기념의 표현양식으로 그것을 구체화시킵니다.


기쁜 소식은 가장 작은 이 가운데 누구라도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무리 속으로 데려오시는 착한 목자의 기쁨입니다. 복음은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이며 모든 민족을 비추는 언덕 위의 도시입니다. 복음은 원래 전체성의 원리를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즉 복음이 항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될 때까지, 복음이 인류의 모든 측면을 치유하고 강화할 때까지, 복음이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 식탁에 모아들일 때까지, 복음은 항상 기쁜 소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전체는 부분보다 더 위대합니다.


VI.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사회적 대화



238. 복음화는 대화의 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세 대화 영역이 있습니다. 이 대화들은 교회가 인간의 완전한 발전을 증진하고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국가와의 대화, 사회와의 대화 - 이는 문화와 대화, 학문(과학)과 대화를 포함합니다. - 그리고 비 가톨릭교회의 다른 신앙인과의 대화가 그 세 영역입니다.


이 모든 대화에서 “교회는 신앙이 제공하는 빛을 통해 말합니다.” 교회는 지난 이천년 동안 이 신앙의 빛을 체험 했으며, 항상 인간의 생명과 고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이 빛은 믿지 않는 사람도 풍요롭게 할 수 있고, 그들의 삶도 의미가 있으며, 이성을 자극해서 이성의 전망을 확대시킵니다.


239. 교회는 “평화의 복음”(에페소 6,15)를 선포하며, 이 광대한 보편적 선을 수호하는 데 모든 국가와 국제 공권력과 협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평화 자체이신(에페소 2,14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침으로써, 새 복음화는 모든 세례 받은 사람에게 평화를 이루는 사람, 화해를 이룬 생활에 대해 믿을만한 증인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대화가 만남의 한 형식으로서 자리 잡은 그런 문화에서는, 공정하고, 반응하며, 포괄하는 사회라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일치와 합의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역사적 주체, 곧 주요 장본인은 전체로서의 백성과 그들의 문화입니다. 단일한 계급, 소수, 그룹, 혹은 엘리트가 주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소수를 위한 소수나, 모든 이를 위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계몽된 소수나, 혹은 목소리 큰 소수가 만들어낸 계획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계획은 함께 살자고 초대하는 사회적 문화적 합의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40. 사회의 공동선을 증진하고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입니다. 보조성과 연대성의 원리에 기초해서, 그리고 충분하게 이루어진 정치적 대화와 합의에 기초해서, 국가는 모든 이의 통합적 발전을 위한 작업에 있어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 역할은 위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이 역할은 사회적 겸손을 필요로 합니다.


241. 국가와 대화를 나누고, 사회와 대화를 나누면서, 교회는 모든 개별 현안을 위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다양한 분야와 함께 교회는 각 사람의 존엄과 공동선에 가장 잘 부합하는 그런 프로그램들을 지지하고 지원합니다. 그 일을 할 때 교회는 인간 생활에 근본적인 가치들과 정치 활동에서 드러날 수 있는 확신들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신앙과 이성과 학문(과학) 사이의 대화


242. 학문(과학)과 신앙 사이의 대화 역시 평화에 기여하는 복음화 활동에 포함됩니다. 실증주의와 과학만능주의가 “확실한 과학의 지식이 아닌 다른 모든 형태의 지식의 유효성을 받아들지 않는” 반면에, 교회는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은 경험과학에 적합한 학문방법들과 철학, 신학, 그리고 신앙 자체 같은 다른 영역의 지식 사이의 종합을 요청합니다. 철학과 신학, 그리고 신앙 영역의 진실은 자연과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신비에로 우리를 끌어올려 줍니다.


신앙은 이성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신앙은 이성을 찾고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나오며,”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화는 과학의 진보를 존중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어느 단계에 있든 인간 생명이 중심이며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과학의 진보가 존중하도록, 그 진보에 신앙의 빛을 비추고 자연법이 스며들게 하고자 합니다. 이 대화로 사회의 모든 분야는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대화는 새로운 사상의 지평을 열고, 이성의 역량을 확장시킵니다. 이 대화는 조화와 평화의 길이기도 합니다.


243. 교회는 과학의 놀라운 진보를 억누를 뜻이 전혀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심어주신 무궁한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기까지 합니다. 엄격하게 특정 영역의 탐구에 집중하는 - 과학이 이성이 논박할 수 없는 어떤 결론에 도달할 때마다 신앙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끌지만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과학적 의견이 신앙의 도그마와 같은 비중을 갖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일부 과학자들은 자신의 진술과 주장을 확신함으로써 자신의 과학적 역량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이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고요하며 생산적인 대화의 길을 차단하는 특정 이데올로기의 전파에 있습니다.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


244. 교회일치에 대한 책무는 주 예수님께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21) 하신 기도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분열을 극복할 수 있다면, 교회가 “세례로 교회에 들어왔지만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 못한 교회의 자녀들에게서 교회의 그 고유의 충만한 보편성”을 실현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신뢰성은 훨씬 더 커질 것입니다. 우리는 동행하는 순례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의심이나 불신을 제쳐두고 동료 순례자를 진심으로 신뢰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것, 즉 하느님의 얼굴에서 빛나는 평화에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른 이를 신뢰한다는 것은 일종의 예술이며 평화도 예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오 5,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평화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우리 가운데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랜 예언을 실현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리라.”(이사야 2,4)


245. 이런 전망으로, 교회일치는 인류가족의 일치에 기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바르톨로메우스 1세 총대주교(His Holiness)와 캔터베리 대주교인 로완 윌리엄스 대주교(His Grace)가 시노드에 참여한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선물이면서, 그리스도교임을 드러낸 값진 증언입니다.


246. 그리스도인,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 사이의 분열을 드러내는 증언이 갖는 심각성을 고려할 때, 일치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급합니다. 이 대륙의 선교사들은 빈번하게 갈라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악한 표양(스캔들)이 불러일으키는 비판, 불평, 조롱을 언급합니다. 만일 우리가 공유하는 신념에 집중하고, 진리의 위계질서 원리를 명심한다면, 우리는 선포, 서비스, 그리고 증언을 공동으로 드러내기 위해 확실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돕는 일치에의 헌신은 더 이상 단순한 외교의 문제나 강요된 굴종의 문제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복음화에 절대 필요한 길이다. 폭력으로 황폐하게 된 여러 나라에서 보이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은 평화의 누룩이 되어야 할 사람들에게 갈등의 또 다른 원인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중요한 일들이 우리를 결합시키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일 성령께서 풍부하게 무상으로 하시는 일을 믿는다면, 우리는 서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까! 이는 상대에 대해 그저 더 잘 아는 것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성령께서 그에게 뿌린 것(은사)을 거두어들이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상대에게 그것을 뿌리신 목적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은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가지 예만 들자면, 정교회 형제자매와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 가톨릭신자들은 주교의 단체성(episcopal collegiality)의 의미에 대해서, 그 집회성(synodality)의 경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울 기회를 갖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은사의 교환을 통해 보다 완전한 진리와 선에로 우리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유대교와 맺는 관계


247.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이기 때문에”(로마 11,29) 유대 민족이 맺은 하느님과의 계약은 결코 철회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유대 민족을 특별히 존중합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부분을 유대인과 공유하고 있는 교회는 계약의 백성과 그들의 신앙을 교회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의 거룩한 뿌리 가운데 하나로 여깁니다.(로마 11,16-18)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유대교를 낯선 종교로 여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그분을 섬겨야 할 사람들(1테살로니카 1,9)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한 분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그분의 계시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248. 이스라엘 자녀들과의 대화와 우정은 예수님의 제자 생활의 일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정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견뎠고, 계속해서 견디고 있는 끔찍한 박해를, 특히 그리스도인을 포함시킨 박해를, 통렬히 그리고 진정으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249.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백성 가운데에서 계속해서 일하시며, 그들이 당신 말씀과 만남으로써 흘러나온 지혜의 보물을 계속해서 낳습니다. 그 때문에 유대교의 가치들을 받아들일 때 교회도 풍요로워집니다. 그리스도교의 일부 믿음이 유대교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과 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이며 메시아라고 선포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상호 보완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즉 히브리 성경 본문을 함께 읽을 수 있으며, 서로 도와서 하느님 말씀의 보고를 조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많은 윤리적 확신과 민족들의 발전과 정의에 대한 공동의 관심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종교간 대화


250. 비그리스도교 종교인과의 대화는 다양한 장애와 어려움, 특별히 양 쪽의 근본주의 형식 때문에 장애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진리와 사랑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종교간 대화는 세상의 평화를 위한 필요조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른 종교 공동체는 물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이 대화는 우선 인간 실존에 관한 대화, 혹은 인도의 주교들이 말한 것처럼, 단순히 “그들에게 개방하고 그들과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것”에 관한 대화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 이야기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의와 평화에 기여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면서 서로 결합할 수 있습니다. 평화와 정의에 기여할 의무는 우리가 무엇이든 교환할 때 기초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대화는 그 자체로 윤리적 헌신입니다. 그것은 단순하고 실질적인 검토 이상의 무엇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 상황을 이끌어낼 것입니다. 특정 주제를 다룰 때 기울여야 할 노력은 하나의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양측은 정화되고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노력들은 진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251. 항상 친밀하고 진지한 이 대화에서는, 반드시 대화와 선포 사이의 본질적 유대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유대는 교회가 비그리스도인과 맺은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시켜 줍니다. 손쉬운 혼합주의는 궁극적으로 전체주의적 몸짓이 될 것입니다. 이는 보다 큰 가치들의 주인이 아닌데도 그 가치들을 무시하려는 이들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몸짓을 말합니다. 참된 개방성은 항상 자신의 심오한 확신에 변함없고, 자신의 정체성에 분명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른 쪽의 확신과 정체성을 개방적으로 이해하고, 대화가 서로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모든 일에 “예”하는 외교적 개방성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이들을 속이는 방식이며, 진정으로 나눔을 위해 자신이 받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지 않으려는 거절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복음화와 종교간 대화는 반대되기는커녕 서로를 지지하고 살찌게 합니다.


252. 이슬람교도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국가에서 그들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국가들에서 자유롭게 경배할 수 있으며 완전히 사회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슬람의 경전들은 일부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마리아를 깊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슬림들이 매일의 기도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지, 충실하게 종교 예절에 참여하고 있는지 경탄할 만합니다. 많은 무슬림들은 생명의 영원성이 하느님에게서 오고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는 굳은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도 윤리적 생활과 가장 어려운 사람을 향한 자비로 하느님께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253. 이슬람과의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적합한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들이 흔들림 없고 기쁘게 자신의 정체성을 간직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상대가 갖고 있는 가치를 인정하고, 상대가 강조하는 관심을 존중하고, 공유하는 믿음들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이슬람 전통의 국가에서 그리스도인이 존중받고 수용되기를 희망하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나라에 온 무슬림 이민자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포용해야만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을 흠숭하고 신앙을 실천할 자유를 허용해달라고 이슬람 전통의 나라들에게 요청하며 또 겸손하게 탄원합니다! 이슬람교도가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누리는 그 자유를 생각해서 말입니다! 우리를 좌절시키는 폭력적인 근본주의에 관련된 일들을 대하더라도, 참된 이슬람교도에 대한 우리의 존중이 이슬람 전체에 대한 증오에 찬 일반화를 피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이슬람과 코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모든 형태의 폭력과 대립하기 때문입니다.


254. 비그리스도인도, 하느님의 은혜로운 초대로 자기 양심에 충실할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살 수 있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화은총의 성사적 차원 때문에, 하느님의 활동은 그들 안에서 표징과 의례, 거룩한 표현을 낳기 쉽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들은 다른 이에게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라는 공동체적 경험을 깨닫게 해줍니다. 비록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사의 의미와 효과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것들은 비그리스도인을 무신론적 내재론이나 순전히 개인적인 종교 체험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일으켜 세우신 매개들일 수 있습니다. 같은 성령께서는 어느 곳에나 다양한 형태의 실천적 지혜를 가져다주시는데, 이 실천적 지혜들 덕분에 사람들은 고통을 견디고 더 큰 평화와 조화 속에서 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수세기에 걸쳐 형성된 이 보화에서 이익을 얻을 수도 있는데, 그 보화는 우리가 믿음을 갖고 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자유의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대화


255. 시노드의 교부들은 종교자유를 기본적 인권으로 보았으며, 종교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종교자유는 “자신이 참되다고 판단한 종교를 선택할 자유와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자유”를 포함합니다. 건전한 다원주의는 차이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건전한 다원주의는 종교들을 개인의 양심이라는 고요한 어둠 속으로 몰아넣거나, 혹은 교회, 회당, 모스크 건물이라는 폐쇄된 경내로 추방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종교를 사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상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권위주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불가지론자 혹은 믿지 않는 소수를 존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믿고 있는 다수의 확신을 억누르거나, 풍부한 종교적 전통을 무시하는 그런 무차별적 존중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그런 것은 관용과 평화보다는 분노를 키울 것입니다.


256. 종교가 공공생활에 미치는 효과를 고려할 때 우리는 종교를 실천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지성인들과 진지한 언론인들이 종교의 결점을 말할 때 자주 유치하고 피상적으로 일반화시킵니다만, 그들은 믿는 이들 모두가 - 혹은 종교 지도자들 모두가 - 똑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일부 정치인들은 차별하는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혼동을 이용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종교적 고전들이 모든 시대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서 종교적 확신을 반영하는 글들을 경멸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글들은 새로운 지평을 열고, 사상을 자극하고, 마음과 심장을 확장하는 영구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경멸은 일종의 이성주의라는 근시안에 기인합니다. 단순히 종교적 믿음을 배경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작품들을 버리는 것이 과연 이성적이고 사리에 맞습니까? 그런 작품들은 심오한 인본주의적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들을 종교적 상징과 가르침으로 채색되었지만 이성에 부합하는 어떤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257. 우리는 이 진선미의 최상의 표현과 원천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스스로 어떤 종교전통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여전히 진지하게 진리와 선과 미를 추구하는 이들과도 가까이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인간존엄을 수호하고, 백성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구축하고, 피조물을 보호하는 데 있어 이들을 귀한 협력자들로 여깁니다. 이방인의 법정 같은 새로운 아레오파기는 만남의 특별한 장소가 됩니다. 이곳에서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가 윤리, 예술, 그리고 과학의 근본적인 주제들에 관한 대화에, 그리고 초월의 탐구에 관한 대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문제를 안고 있는 이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한 길이기도 합니다.


258. 인류의 미래에 분명히 중요한 사회적 현안에서 출발해서, 저는 복음 메시지가 불가피하게 사회적 차원을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말과 태도와 행동으로 그 메시지를 드러내도록 격려하고자 했습니다.


제 5 장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화활동가


259.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화활동가란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두려움 없이 개방되어 있는 복음화활동가를 의미합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는 사도들을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각각의 사람에게 그/그녀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경이로운 행적을 전하는 사자로 만드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복음의 새로움을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반대자를 만났을 때조차 과감하게(parrhesia) 선포할 용기도 주십니다. 오늘 기도에 튼튼히 뿌리를 내려 그분을 다시 부릅시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활동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우리의 메시지는 공허한 것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말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현존으로 변형된 삶으로 선포하는 복음화활동가를 원하십니다.


260. 이 마지막 장에서, 저는 그리스도교적 영성의 종합을 제시하거나 기도, 성찬례의 거행, 혹은 신앙의 전례적 기념과 같은 엄청난 주제들을 탐구하려하지 않겠습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교도권이 내놓은 문헌과 위대한 저술가들이 내놓은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 보물을 바꾸거나 발전시키려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단순히 새 복음화의 정신과 관련한 몇 가지 성찰을 제시하고 싶을 뿐입니다.


261. 어떤 것에 “혼이 실렸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보통 개인의 활동과 공동의 활동을 격려하고, 유발하고, 기르며,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지칭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화는 자신의 인격적 성향과 원의가 있음에도 의무감으로 수행하는 일련의 과업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열정, 기쁨, 관대함, 용기, 끝없는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 찬 복음화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알맞은 단어를 찾고 싶습니다. 그것을 제가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격려의 말도 성령의 불이 우리 마음을 태우지 않는다면 충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혼이 실린 복음화는 성령께서 인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라고 부름 받은 교회의 혼이시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영적 동기와 제안을 제시하기 전에, 저는 또 다시 성령께 호소합니다. 저는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를 새롭게 해주시고, 교회를 흔들어 깨우시고 재촉하시어, 교회가 모든 민족을 복음화하기 위해 과감하게 길을 나서게 해주시기를 탄원합니다.


I. 새로워진 선교의 추진(력)이 필요한 이유들


262.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화활동가는 기도하고 일하는 복음화활동가입니다. 사회적이고 선교적인 확실한 확장이 없는 신비적 관념은 복음화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영성이 없는 논문이나 사회적 혹은 사목적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일방적이고 불충분한 제안들은 소수의 그룹한테만 퍼질 뿐이며, 복음을 축소시키기 때문에 그 일부 사람을 넘어서는 빛을 발할 수 없게 됩니다.


필요한 것은 활동과 헌신에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적 공간을 계발하는 능력입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을 경배하고 기도 속에서 말씀과 만나지 않고, 주님과 지속적으로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의 일은 쉽게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피곤함과 어려움의 결과로 힘을 잃고, 우리의 열정은 사라집니다. 교회는 시급히 기도로 심호흡을 크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기쁘게도 기도에 전념하는 그룹, 중재기도에 전념하는 그룹, 하느님 말씀을 기도 속에서 읽는 그룹, 그리고 끊임없이 성체를 흠숭하는 그룹들이 교회 생활의 모든 차원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랑의 요구와 일치하는 않는 개인주의적이며 배타적인 영성을 제시하려는 유혹을, 육화가 갖는 함의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유혹을 배척해야만 합니다.” 기도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사명에 삶을 봉헌하지 않는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사유화된 생활태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일부 거짓 영성 속으로 피신하게 할 수 있습니다.


263.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과 역사 속의 수많은 형제자매를 잘 명심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들은 복음 선포에 있어서 기쁨, 불굴의 용기와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일들이 예전처럼 쉽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우리는 로마제국이 복음 메시지, 정의를 위한 투쟁, 혹은 인간 존엄성 수호를 받아 전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역사의 모든 시기는 우리를 먹이로 삼는 육욕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적 약점. 자아도취, 자기만족과 이기심 따위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항상 이런 저런 가면을 쓰고 현존합니다. 그런 것들은 특정 상황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인간의 한계에 기인합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그 문제들이 더 어렵다고 말하지 맙시다. 단지 다를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앞서 가셨고, 그 시대 어려움에 맞선 성인들한테서도 배웁시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 성인을 닮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이유들을 재발견하기 위해 잠시 멈출 것을 제안합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과 인격적으로 만납시다


264. 복음화를 하는 주요 이유는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 즉 그분의 더 큰 사랑에로 우리를 몰아대는 구원의 체험입니다. 사랑하는 그분을 말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그분을 지목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그분을 알릴 필요를 느끼지 않는 그런 사랑이 있다면, 도대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사랑입니까? 만일 우리가 이 사랑을 나누려는 강렬한 열망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 마음을 한 번 더 흔들어주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분의 은총을 애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미지근하고 피상적인 실존을 흔들어 일으켜주시기를 청해야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그분 앞에 섬으로써, 그분이 우리를 보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눈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눈길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9)고 하셨던 그 날 나타나엘이 얼핏 본 그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 있는 것이, 성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그리고 단순히 그분 현존 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분께서 우리의 삶을 흔들어 그분의 새로운 생명을 나누게 할 때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선포하는”(1요한 1,3) 것입니다.


복음을 나누려는 가장 훌륭한 자극은 복음을 사랑하며 묵상하는 데서, 복음 구절에 머무는 데에서, 그리고 복음을 마음으로 읽는 데서 나옵니다. 그렇지만 만일 그 자극이 생기려면 묵상의 정신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보다 인간적으로 만들며 새로운 생명에로 이끄는 어떤 보물이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묵상의 정신은 이를 항상 다시 깨닫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귀한 것은 이 보물 말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265. 예수님의 전 생애, 그분이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 그분의 활동들, 그분의 성실함, 그분의 관대한 매일의 행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의 완전한 자기 증여는 귀한 것이며, 그분의 신적 생명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그것을 다시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야말로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사도행전 17,23)


복음은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과 우정을 맺고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창조된 것입니다. 복음은 이 심오한 요구에 응답합니다. 가끔 우리는 이 점을 잊기 때문에 복음 선포의 사명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복음의 핵심 내용을 적절하고 아름답게 표현한다면, 분명히 그 메시지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심오하게 동경하는 것에 이야기를 걸 것입니다.


“성령께서 활동하심으로써 이미 각 개인과 사람들 안에, 비록 무의식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에 관한 진리, 사람에 관한 진리, 어떻게 죄와 죽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에 관한 진리를 알려는 기대가 있다는 것을 선교사는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선교사의 열정은 그리스도께서 그 기대에 응답하고 계시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복음화의 열정은 이 확신에 기초합니다. 우리는 기만할 수 없는 사랑과 생명의 보물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혹시키거나 실망시킬 수 없는 메시지를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우리를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해서 우리를 떠받치고 품위 있게 해줍니다. 그 메시지는 절대로 시대에 뒤지지 않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의 메시지가 다른 어느 것도 도달 할 수 없는 그 곳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끝없는 슬픔은 무한한 사랑으로만 치유할 수 있습니다.


266. 그러나 그 확신은 그리스도의 우정과 그분의 메시지를 맛보는 우리 자신의 체험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함으로써 떠받쳐야만 합니다. 예수를 아는 것과 그분을 알지 못하는 것, 그분과 함께 걷는 것과 눈감고 걷는 것,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과 그 말씀을 모르는 것, 그분을 묵상하는 것과 묵상하지 않는 것, 그분을 섬기는 것과 섬기지 않는 것, 그분 안에서 우리의 평화를 찾는 것과 찾지 않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인격적 체험으로부터 확신하지 않는 한, 우리가 뜨거운 복음화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분의 복음으로 세상을 건설하려는 것과 우리 자신만의 생활태도로 그렇게 하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생활이 좀 더 풍요로지며, 그분과 함께 모든 것에서 의미를 더 쉽게 찾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음화를 하는 이유입니다. 결코 제자가 되기를 멈추지 않는 선교사는 예수님께서 자신과 함께 걷고, 자신에게 말하고, 자신과 함께 숨쉬고, 자신과 함께 일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 사업 한가운데에 자신과 함께 살아계신 예수님을 느낍니다. 우리가 선교적 헌신의 핵심에 현존하시는 그분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열정은 금세 쇠약해지고, 우리가 건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자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활기와 열정을 잃을 것입니다. 확신하지 않고, 열정적이 않고, 확신을 가지 못하고, 사랑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누구도 납득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267. 우리는 예수님과 결합하여 그분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그분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결국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에페소 1,6) 살고 행동합니다. 우리가 끈기 있게 그리고 온전하게 헌신하기를 바란다면 다른 모든 동기를 제쳐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이야말로 결정적이고, 가장 심오하고 위대한 동기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 이유이며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 모든 순간에 찾았던 것은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아들로서 그분은 영원히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요한 1,18) 계신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선교사라면 그것은 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선호하고 흥미를 갖고 있는 그 모든 것, 우리의 지식과 동기들을 넘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보다 더 큰 영광을 위해 복음화를 합니다.


한 백성이 된다는 영적 향기


268. 하느님 말씀은 우리가 한 백성임을 인정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1베드로 2,10) 영혼들을 위한 복음화활동가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백성의 생활에 가까이 있으려는 영적 맛을 발전시키고, 그 맛이 그 자체로 더 큰 기쁨의 원천이라는 것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명은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며 동시에 백성을 향한 열정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 지탱해 주시는 그분의 심오한 사랑을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눈이 멀지 않았다면, 사랑으로 불타는 예수님의 시선이 당신의 모든 백성을 포용하며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이 당신 백성을 당신께 끌어들이시기 위해 우리를 이용하시길 바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분은 당신 백성 가운데서 우리를 취하셔서 당신 백성에게 보내십니다. 이런 소속감이 없다면 우리의 심오한 정체성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269.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당신 백성의 핵심에로 데려가는 그 복음화 방법의 모델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이에게 보여주신 그 친밀함을 묵상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습니까! 만일 그분이 누군가에게 말씀하신다면, 그분께서는 깊은 사랑과 관심으로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바라보시며 사랑하셨다.”(마르코 10,21) 그분이 눈 먼 사람을 가까이 부르셨을 때(마르코 10,46-52 참조), 먹보요 술꾼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걱정하지 않고(마태오 11,19 참조) 죄인들과 먹고 마실 때(마르코 2,16 참조)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다가가기 쉬운 분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죄 많은 여인이 당신 발에 기름을 붓는 것을 가만히 놔 두시는 데에서(루카 7,36-50), 니코데모와 밤까지 함께 있는 데에서(요한 3,1-15) 그분의 감성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당신의 전 생애를 살아간 방식의 절정입니다. 그분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는 사회 구조에 완전하게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모든 이와 삶을 나누고, 그들의 관심에 귀를 기울이고, 물질적 가난과 영적 가난을 도우며,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며, 우는 사람과 함께 웁니다. 우리는 다른 이와 팔짱을 끼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는 일에 헌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무감에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부담이 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고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격적 결정의 결과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270. 때때로 우리는 주님의 상처를 멀리하는 그런 부류의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불행을 쓰다듬어 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스러운 살을 쓰다듬어 주는 것을 그분께서는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적 불행의 소용돌이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해주는 그런 곳을 찾아나서는 것을 멈추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의 삶의 현실에 들어가고, 약함으로 힘을 갖는다는 것을 깨닫기를 희망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마다, 우리의 삶은 경이롭게 악화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한 백성이 되기 위한 것임을, 한 백성의 일부가 되기 위한 것임을 철저하게 체험합니다.


271. 세상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희망의 이유들을 제시하라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판하고 비난하는 원수처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듣고 있습니다.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1베드로 3,16) 그리고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로마 12,18) 또 우리는 “악을 선으로”(로마 12,21) 극복하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라”(갈라디아 6,10)는 말씀도 듣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낫게 드러나려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야”(필리피 2,3)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스스로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누렸습니다.(사도행전 2,47; 4,21, 33: 5,13)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깔보는 고관대작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백성을 위한, 백성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교황의 이이디어도 아니며, 여러 사목적 선택 가운데 하나도 아닙니다. 희망의 이유들은 하느님 말씀 안에 담겨있는 명령들이며,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확실해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명령의 힘을 감소시키는 어떤 해석들도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해석하지 말고, 주석을 달지 말고 그 희망의 이유들을 살아갑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 한 가운데에 불을 밝히려 분투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과 삶을 나누는 선교의 기쁨을 알 것입니다.


272.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과의 결합으로 이끄는 영적 힘입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걸으며,”(1요한 2,11)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1요한 3,14)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1요한 4,8) 베네딕토 16세는 “우리 이웃에게 눈을 감는 것은 하느님께도 눈을 멀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사랑은 결국 “어둑해진 세상을 항상 환히 밝힐 수 있으며 계속해서 살며 일할 수 있게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유일한’ 빛은 결국 사랑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영성을 살 때, 우리의 마음은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선물 앞에 활짝 열립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새로운 무엇을 배웁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인정하기 위해 눈을 뜰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지식의 빛으로 성장합니다. 만일 우리가 영성 생활의 진전을 원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지속적인 선교사여야만 합니다.


복음화 활동은 마음과 심장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 활동은 영적 지평을 열어줍니다. 그 활동은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에 보다 더 민감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활동은 제한된 영적 구조물 너머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헌신하는 선교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적시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샘이 되는 기쁨을 압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찾는 데에서,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데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만이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의 개방성은 기쁨이 흘러나오는 한 원천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기”(사도행전 20,35) 때문입니다. 달아나고, 숨고, 나누기를 거부하고, 주기를 멈추며, 자신만의 편안함에 우리 스스로를 가둔다면, 우리는 더 잘 살지 못합니다. 그 같은 삶은 천천히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273. 백성 한 가운데 있어야 할 저의 사명은 그저 삶의 일부거나 떼어낼 수 있는 어떤 배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사명은 일종의 “여분”이거나 혹은 그저 내 삶의 다른 한 순간 같은 것이 아닙니다. 대신 그 사명은 나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는 나의 존재로부터 뿌리를 캘 수 없는 그 어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는 하나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빛을 가져오고, 축복하고, 생기를 주고,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고 자유롭게 하는 이 사명의 날인을 받고, 소인이 찍힌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갖고 있는 간호사, 영혼을 갖고 있는 스승, 영혼을 갖고 있는 정치인,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있기를 선택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우리의 활동과 사적인 생활을 분리시키고 나면, 모든 것은 잿빛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부족한 것들을 인지하고 확인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 백성이 되기를 그만 둡니다.


274. 우리가 다른 사람과 우리 삶을 나눠야 하고, 우리 자신을 후하게 아낌없이 건네주어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들이 외모, 능력, 언어, 사고방식 때문에, 혹은 어떤 만족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의 작품이며,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 영광의 어떤 것을 드러냅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무한한 동정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생활 속에 현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귀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드러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각각의 사람은 ‘굉장히 거룩하고 우리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적어도 더 나은 생활을 하도록 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우리 삶을 봉헌해야 할 이유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경이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담을 무너뜨리고 우리 마음을 얼굴과 이름으로 가득 채울 때, 우리는 그 경이로운 일을 성취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께서 하시는 신비한 활동


275. 제2장에서 우리는 깊은 영성이 없으면 회의주의, 운명론, 그리고 불신의 늪에 빠진다는 것을 성찰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생각하고, 노력을 기울여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명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의미 있는 결과를 내지 못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내 스스로 안락함과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는가?”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로는 선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안락함, 게으름, 막연한 불만, 그리고 공허한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내세우는 악의 있는 핑계일 뿐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멸의 태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희망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죽음을 물리치셨으며 지금은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살아계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됩니다.”(1코린토 15,14) 복음은 우리에게 첫 제자들이 떠나가서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코 16,20)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고, 체험하도록 초대를 받습니다. 부활하시어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희망의 샘이시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할 도움을 거두어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176.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의 어떤 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스며든 생명력을 갖습니다. 모든 것이 죽은 것 같은 그곳에서 부활의 표징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힘입니다. 종종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변 곳곳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불의, 악, 무관심, 그리고 잔인함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암흑 속에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항상 생명을 갖고 살아나고 이윽고 결실을 맺는 것도 진실입니다. 파괴된 땅에서 생명이 뚫고 나옵니다. 그 생명은 완강해서 결코 정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어둡다고 하더라도, 선은 항상 다시 나타나서 퍼집니다. 이 세상에서 매일 아름다움이 다시 태어납니다. 그 아름다음은 역사의 폭풍을 뚫고 변형되어 떠오릅니다. 가치들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갖고 다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마지막 때로 보인 그 상황에서도 언제나 일어섰습니다. 그 같은 것이 부활의 힘이며, 복음화를 수행하는 모든 사람은 그 힘의 도구들입니다.


277. 동시에, 새로운 어려움들이 끊임없이 생기고 있습니다. 실패의 체험들과 인간적 나약함이 그것인데, 이들은 많은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끔 어떤 임무가 기대했던 만큼 만족스럽지 못하고, 결과는 그다지 없고, 변화는 더디며, 점점 싫증을 내기 쉽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싫증이나 피로함 때문에 일시적으로 팔을 내려뜨리는 것과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만성적 욕구불만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영구히 팔을 내려뜨리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자신에만 몰두하고, 인정, 환호, 보상과 지위를 쫓아 경력관리에 몰두하기 때문에 투쟁에 싫증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팔을 들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붙잡지 않는 것이며, 거기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이 같은 경우에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인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 곧 복음이 온갖 핑계거리 더미 속에 파묻히고 맙니다.


278. 신앙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그분께서는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분께서는 신비롭게 개입하실 수 있고, 그분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리고 그분께서는 당신의 능력과 무한한 창조력으로 악에서조차 좋은 것을 가져오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분께서 역사 속에서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묵시록 17,14) 이들과 함께 승리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믿읍시다.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 와 있고, 여기저기서 다른 방식으로 자라고 있다고 말합니다. 큰 나무로 자라게 되는 작은 씨앗처럼(마태오 13,31-32 참조),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적은 양의 누룩처럼(마태오 13,33 참조), 잡초 속에서 자라고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하는 좋은 씨앗(마태오 13,24-30)처럼 말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새로 번영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새 세상의 씨앗을 모든 곳에 뿌립니다. 비록 씨앗들이 파헤쳐지더라도 다시 자랍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이미 은밀하게 이 세상 역사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실을 한 올 한 올 엮여 천이 만들어지듯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헛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살아있는 희망의 이 행렬을 그저 지켜보는 구경꾼으로 남아있지 않게 하소서!


279. 자라고 있는 씨앗을 항상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내적인 확실성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분명한 역류에서조차 활동하실 수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토 4,7) 빈번하게 이 확신은 “신비감”이라 합니다. 신비감은 자신을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 맡기는 모든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확신을 갖고 아는 것까지 포함합니다.(요한 15,5 참조) 이 풍성한 결실은 때때로 보이지 않을 수도, 파악하기 어려울 수도, 계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결실을 맺는지 안다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삶의 결실이 풍부할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확신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행동들 가운데 어느 것도, 다른 이들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의 행위들 가운데 어느 것도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행동은 단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고결한 노력 가운데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인내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마치 하나의 생명력처럼 우리 세상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의 일이 결실을 맺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명은 사무처리, 투자, 혹은 인본주의적 활동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명성을 듣고 몇 사람이나 모였는지를 세는 그런 전시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보다 대단히 심오한 그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측정법을 동원해도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전혀 가본 적 없는 세상 다른 지역에 축복의 비를 내리시기 위해 우리를 제물로 이용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서 활동하십니다. 우리는 감히 놀랄만한 결과를 보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헌신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 뿐입니다. 창의적으로 그리고 활발하게 헌신하면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포근한 품속에서 쉬는 법을 배웁시다. 계속해서 전진합시다.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립시다. 그분께서 우리의 노력에 대해 적절한 때에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합니다.


260. 우리가 선교의 열정을 생생하게 유지하려면 성령을 굳게 신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나약함에도 우리를 도와주시는”(로마 8,26)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굳은 신뢰에도 자양분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께 끊임없이 간구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선교의 노력을 쇠약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치유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신뢰하는 것은 방향을 잃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찾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깊은 곳에 잠수한 것과 같습니다. 저 자신도 그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자신을 인도하도록 허락하는 자유보다 더 위대한 자유는 없습니다. 마지막 세세한 것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려고 하지 않고, 그 대신에 그분께서 우리를 비추고 인도하고 지도하게 하시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우리를 인도하도록 하는 것만큼 위대한 자유는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롭게도 결실이 풍부하다는 의미입니다.


선교의 힘인 중재 기도


281. 특별히 복음화의 과업을 차지하고, 다른 이의 선을 찾도록 우리를 움직이는 기도 가운데 하나가 중재의 기도이다. 잠시 바오로 성인의 마음을 엿봅시다. 그분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 봅시다. 그분의 기도에는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필리피1,4,7) 여기서 우리는 중재기도가 참 묵상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묵상에는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282.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됩니다. “먼저 여러분 모두의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들립니다.”(로마 1,8) 그 기도는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 코린토 1,4) “나는 여러분을 기억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필리피 1,3) 그 기도는 절대로 의심하지 않고, 부정적이지 않으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기도는 깊은 신앙에서 나온 영적 시선입니다. 그 기도는 하느님께서 다른 이의 삶 안에서 하고 계시는 것을 알아보는 영적 시선입니다. 동시에 그 기도는 다른 이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복음화 활동가가 기도를 하고 일어설 때, 그의 마음은 보다 많이 열립니다. 자아도취에서 자유로워져서 좋은 일을 하고 자기의 삶을 다른 이와 나누려 열망합니다.


283. 위대한 하느님의 사람은 위대한 중재자입니다. 중재는 “삼위일체의 성심 안에 있는 누룩”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구체적 상황에 빛을 비추고 변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는 하나의 길입니다. 우리의 중재가 하느님의 마음을 쓰다듬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재로 그분은 항상 그곳에 먼저 계십니다. 우리의 중재로 얻은 것은 그분의 힘, 그분의 사랑, 그리고 그분의 풍요로움이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또렷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II. 마리아, 복음화의 어머니


284. 성령과 함께, 마리아는 언제나 사람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녀는 제자들과 함께 성령께서 오시기를 기도했습니다.(사도행전 1,14) 그래서 오순절에 일어난 선교의 폭발이 가능했습니다. 마리아는 복음화 활동을 하는 교회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 없이는 교회가 절대로 새 복음화의 정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 백성에게 주신 예수님의 선물


285.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몸으로 세상의 죄와 하느님의 자비를 극적인 만남을 견뎠을 때, 발 아래서 당신 어머니와 벗이 위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결정적 순간에, 당신 아버지께서 당신께 맡기신 그 일을 완전히 마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신 벗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9,26-27) 돌아가시면서 하신 이 말씀이 주로 당신 어머니에 대한 배려와 공경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특별한 구원 사명의 신비를 드러내는 하나의 계시 공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남겨두셨습니다. 오직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이 이제 이루어졌음”을 아셨습니다.


십자가의 밑에서, 새 창조의 결정적 시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마리아께 이끄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머니 없이 여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마리아를 데려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어머니의 이미지에서 복음의 모든 신비를 읽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성의 이 아이콘을 남겨두지 않고 교회를 떠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탁월한 신앙으로 그분을 이 세상에 모셔 오신 마리아는 “여인의 나머지 후손들, 곧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과도 동반하십니다.


마리아, 교회, 그리고 신앙 공동체의 각 구성원 밀접한 결합은, 각 신앙인들이 그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그리스도 낳는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며, 그 결합을 복된 스텔라의 이사악은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영감을 받은 성경에서, 동정 어머니인 교회의 보편 감각으로 말한 것은 동정녀 마리아의 개별 감각으로 이해됩니다. ... 보기에 따라서, 각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말씀의 신부가 된다고,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다고, 그리스도의 딸과 누이가 된다고, 동정이면서 동시에 출산을 하게 된다고 믿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자궁이라는 임시 천막에서 아홉 달 동안 머무르셨습니다. 그분은 마지막 날까지 교회의 신앙이라는 임시천막에 머무르십니다. 그분께서는 충실한 영혼의 사랑과 지식 안에 영원히 머무르실 것입니다.”


286. 마리아는 형편없는 배내옷과 풍부한 사랑으로 마구간을 예수님의 가정으로 바꾸실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찬미한 아버지의 종입니다. 그녀는 우리 생활에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관심을 기울이시는 친구입니다. 그녀는 그 마음이 칼에 찔렸고 우리의 모든 고통을 이해하시는 여인입니다. 모든 이의 어머니로서, 그녀는 정의의 산고를 겪고 있는 사람을 위한 희망의 표지입니다. 그녀는 당신의 모성애로 우리 마음을 신앙에 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가까이 끌어당겨 전 생애에 걸쳐 동반하는 선교사입니다. 참된 어머니로서, 그녀는 우리와 함께 걷습니다. 그녀는 우리와 함께 투쟁하고, 변함없이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감쌉니다.


그녀의 많은 호칭들이 성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복음을 받아들인 각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으며, 그녀는 그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의 한 부분이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가 마리아 호칭을 가진 성당에서 자기 자녀가 세례 받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새 자녀를 낳아드린 마리아의 모성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는 표지로 말입니다. 그 많은 성당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어떻게 당신 자녀를 모으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자녀는 순례자로서 그곳에서 마리아를 보기 위해, 그리고 마리아한테 보이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온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기 삶에서 겪는 고통과 피곤함을 견뎌낼 힘을 하느님한테서 찾습니다. 그녀가 후안 디에고(Juan Diego)에게 하신 것처럼, 마리아는 그 순례자들의 귀에 어머니의 위로와 사랑을 속삭입니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너의 어머니인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


새 복음화의 별


287. 우리는 살아있는 복음의 어머니께 중재를 청합니다. 복음화의 새로운 국면에로의 이 초대를 모든 교회 공동체가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마리아는 신앙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신앙 속에서 살며 앞장서 가십니다. 또한 “그녀의 탁월한 신앙의 순례 여행은 교회가 항상 따라가야 확실한 안내서입니다.” 봉사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할 신앙의 여정에서 마리아는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오늘 우리는 그녀를 바라보고, 우리가 구원의 메시지를 모든 이에게 선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새 제자들이 다시 복음화 활동가가 되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이 복음화의 여정에서 우리는 무미건조함, 어두움, 그리고 피곤함까지도 느낄 것입니다. 마리아 자신도 예수님의 어린 시절 나자렛에서 그런 것들을 체험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 기쁨에 넘치는 좋은 소식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시작에서 마음이 특별하게 무거워진다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특별한 무거움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을 빌면, 일종의 신앙의 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장막’으로서 그 장막을 통해 사람은 볼 수 없는 분에 가까이 가야만 하고, 신비와이 친밀함 속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288.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는 마리아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한 번 더 사랑과 부드러움이라는 혁명적 본성을 믿게 됩니다. 그녀에게서 우리는 겸손과 부드러움이 약한 사람의 미덕이 아니라, 스스로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위해 다른 이를 함부로 대할 필요가 없는 강한 사람의 미덕을 봅니다. 마리아를 묵상하면,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셨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신”(루카 1,52-53) 하느님을 찬송한 그녀는 정의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가정적인 따뜻함을 가져다주시는 분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그녀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루카 2,19) 사람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크고 작은 사건에서 하느님 성령의 자취들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우리의 세상에 있는, 인간의 역사에 있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는 하느님의 신비를 끊임없이 묵상합니다. 그녀는 나자렛에서 기도하고 노동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또한 도움의 여인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다른 이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서둘러”(루카 1,39) 마을을 떠납니다. 정의와 부드러움 사이의, 묵상과 다른 이에 대한 배려 사이의 이 상호 작용은 교회 공동체가 마리아를 복음화의 모델로 보게 합니다. 우리는 그녀의 어머니다운 중재를 탄원합니다. 교회가 많은 사람을 위한 가정이 되게 해달라고, 모든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새 세상의 탄생을 여는 길이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자신감과 흔들릴 수 없는 희망을 가득 채워주시는 그 힘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록 21,5) 마리아와 함께 우리는 이 약속의 실현을 향해 자신 있게 나섭니다. 그리고 마리아께 우리는 기도합니다.


동정이시며 어머니이신 마리아님,

성령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비천한 신앙 그 깊은 곳에

생명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영원하신 한 분께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다급하게 부를 때

우리도 “예”라고 스스로 대답하게 도와주소서.

어느 때보다 긴급한 이 때

예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가득한 마리아님,

당신은 세례자 요한에게 기쁨을 건네셨습니다.

자기 어머니 자궁에서 기뻐 뛰놀게 했습니다.

기쁨으로 가득차서 당신은 노래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위대한 일을.

내려놓을 수 없는 신앙으로

당신은 십자가 아래에 서계셨습니다.

바로 거기서 당신은 부활의 기쁜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기다리며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복음화 하는 교회가 태어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이 낳은 새로운 열정을 이제 저희가 갖게 해주십시오.

그 열정으로 모든 이에게 죽음을 물리치는 생명의 복음을 가져다주기를.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거룩한 용기를 주소서.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라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도록.


듣고 곰곰이 생각하시는 동정녀여,

사랑의 어머니, 영원한 혼인잔치의 신부여,

교회를 위해 빌어주소서.

당신은 교회의 순수한 표상입니다.

교회가 스스로를 가둘 담을 치지 않게 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는 열정을 잃지 않게 하소서.


새 복음화의 별이시여,

우리가 빛나는 증인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친교, 봉사의 증인, 불타는 신앙의 증인, 온유한 신앙의 증인,

정의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복음의 기쁨이 땅 끝까지 미치게 해주시고,

이 세상 변두리까지도 밝게 비추게 해주소서.


살아있는 복음의 어머니,

하느님의 작은이들에게 기쁨의 샘이신 어머니,

우리를 위해 기도하소서.


아멘. 알렐루야!


로마 베드로 광장에서.

11월 24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임금을 기념하며,

그리고 신앙의 해 폐막을 기념하며,

2013년, 저의 교황재위 첫 해에,

프란치스코가.

(완결)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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