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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곁에는 늘 조력자가 있다. 영웅이 영웅다워지도록, 영웅의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묵묵히 도와주는 이들, 그들이 바로 조력자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 그 곁에도 수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 ‘신앙’이 목숨을 잃는 이유가 되던 그 시절에 두려움을 잊고 김대건 신부를 곁에서 도왔던 이들을 찾았다. 살아서도 전 생을 바쳐 신앙을 이어가며 김대건 신부를 도왔던 이들은, 믿음을 지켜내려 죽은 후에도 103위 성인 반열에 올라 김대건 신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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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유산을 남기다 - 김대건 부친 김제준· 당고모 김 테레사
 
김대건 신부 일가는 알려진대로 신앙 명가(名家)다. 김대건 신부와 그의 부친 김제준(이냐시오) 역시 그 피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김제준의 조부 김진후는 1814년에 순교했고, 그 2년 뒤 백부 김한현이 순교했으며 그 23년 후 김제준 자신 또한 순교했다.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도 7년 뒤 김제준의 뒤를 따랐다. 32년 사이에 4대가 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버린 것이다.
 
김제준은 충남 솔뫼에서 태어나 백부 김한현을 통해 사학을 배웠으며,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시작할 무렵인 1835년 무렵에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 산중(山中)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양 선교사가 정하상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샤스탕 신부에게 이냐시오라는 세례명을 받고, 회장의 직책을 맡아 교우들을 권면하며 생활하였다. 아들 김대건을 사제로 키우자는 모방 신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 1836년 15세의 어린 아들을 유학시키기로 결정하고 멀리 마카오로 아들을 떠나보내게 된다.
 
1839년 기해박해 때 포졸에게 잡혀 문초를 당하면서 그의 아들이 국법을 어기고 외국으로 나간 사실이 드러났기에, 국사범으로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 때 김제준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배교를 선택하기도 하였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 형관 앞에서 배교한 사실을 취소하며 “서양인을 데려온 것과 자식을 외국에 보낸 것은 모두 천주를 공경하여 받들려는 까닭이었다”고 당당히 고백, 결국 1846년 서소문 밖에서 44세의 일기로 참수 치명한다.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아버지의 사촌 자매)인 김테레사 역시 부모를 따라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수절할 뜻이 있었으나 결혼을 명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교우에게 출가하였다. 남편 손요셉이 신앙을 지키다 해미에서 순교한 후, 중국에서 입국한 유방제 신부의 살림을 돌보며 생활하게 된다. 김테레사는 살아서도 치명하고 싶다는 뜻을 드러냈었고, 박해가 일어나자 시골로 피신하기를 거절하고는 포졸에게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일곱 달을 옥에서 보낸 후,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사제 못지 않은 열정으로 사제 곁에서 - 평신도 현석문
 
현석문(가롤로)은 대대로 벼슬을 지내던 서울 중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01년 순교한 아버지 현계흠의 가르침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지며, 전 생애를 선교사들과 교우들을 돕는 데 바쳤다.
 
이 땅에 주교나 신부가 아직 한 명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을 무렵, 현석문은 유진길·정하상·조신철 등과 함께 늘 교회 일을 상의했고, 선교사를 모셔오는 일과 한국 성직자를 양성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대건·최양업 등 신학생을 외국으로 보낼 때와 그들이 입국할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동행했다.
 
앵베르 주교가 현석문에게 ‘순교자의 행적 기록’을 만들라는 당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기에, 그는 스스로 순교자에 대한 자료와 증언을 수집하여 순교자 소전인 ‘기해일기’를 만들어냈는데,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김대건 신부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집을 마련해주는 등 최초의 한국인 사제 곁에서 그의 생활을 돌봤다.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체포 직후 그도 압송되었고, 김대건의 순교 사흘 후 그 뒤를 따랐다. 
 
곁에서 생활을 돕다 - 정철염, 김임이

정철염은 교우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자라서 포천 지방 수평에 사는 양반 김씨 집 하인으로 들어갔으나, 주인이 외교인이기에 미신을 강요하고 배교를 종용할 뿐 아니라, 심지어 첩으로 삼으려하므로 서울로 도망, 1845년부터 김대건 부제의 집에서 가정부 역할을 했다. 김대건 신부의 곁에서 그의 식사·의복 등 생활 전반을 돕다가 1846년에 체포, 교살되어 순교의 영광을 차지한다.
 
김임이 역시 교우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신앙을 접했으며, 열일곱이 되었을 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부모가 결혼을 재촉했을 뿐 아니라 주변 외교인들이 그녀를 이상히 여기기 시작하자, 몸을 피해야만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으로 왕비궁의 침모로 들어가 3년을 지냈다. 그 후 친척집 등을 전전하며 살다가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일시 귀국해 정한 거처에서 김신부를 위해 봉사했다.
 
“김신부님이 박해를 당하게 되면 나도 신부님을 따르게 될 것이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김임이는 김신부 체포 후 포졸들에게 붙잡힌다. 옥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며 70여 일을 버티고 9월 20일 옥에서 교살, 순교자와 동정녀라는 이중의 영예를 차지하며 3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김대건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다- 임치백, 남경문
 
임치백은 어려서부터 신앙을 익히지는 못하였고 결혼 후 그의 아내와 아들이 먼저 입교하였기에 천주교를 접했다. 그들이 그에게도 세례받기를 권했으나 늘 “뒷날에 입교하겠다”고 말했다. 신자는 아니었으나 교우들을 형제처럼 사랑하여 의지할 곳 없는 교우 4, 5명을 그의 집에서 지내게 할 만큼 물심양면으로 교우들의 신앙 생활을 지지했다.
 
1846년 임치백은 그의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신부를 따라 연평도로 갔다가 김신부와 함께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감영으로 찾아가 아들의 석방을 청원한다. 하지만 감영측은 요구를 들어주기는 커녕 그를 잡아 가두고 천주교를 믿는 지를 묻는다. 이에 임치백은 “비록 오늘까지 실천하지는 않았으나 어찌 천주를 공경하고 섬길 마음이 없겠습니까?”라 답해 사학 죄인으로 분류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배교’를 말하면 언제든 살아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 세례도 받지 않은 그가 신앙을 택한 것이다. 서울 감옥에서 임치백은 우연히 김대건 신부를 만나게 되는데 이 계기로 인해 그의 신앙은 더욱 굳어진다. 김신부의 교리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천주교를 믿겠노라 결심하고 옥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임치백의 지인들은 지금까지 실천하지도 않은 신앙이니 일단 배교하고 목숨을 살리라 권하였지만 그는 “천주는 나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을 결심을 하고 있고, 이미 죽은 사람이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며 자신의 신앙을 밝힌다. 3개월 후 포도대장이 그에게 사형 선고가 곧 있을 것이라 알려주자 “나는 아무런 공적도 없으나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천국에 가게 되었다”며 즐거운 기색을 보였다 한다. 1846년 43세의 나이에 모진 매질로 옥에서 순교한다.
 
남경문은 교우 허 바르바라와 결혼하면서 천주교를 접하고, 주변 교우의 권유로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로부터 회장에 임명된 후로는 유신부가 지방 교우들을 방문하러 다닐 때마다 따라다니며 복사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박해가 그친 후 점차 냉담하기 시작하여, 여 교우를 첩으로 거느리고 그 사이에서 아기를 낳는 등 타락한 생활을 3년이나 지속하게 된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김대건 신부를 만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 성사를 받고는 첩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등 새 삶을 시작한다. 방탕했던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 매일 새벽 오랫동안 기도를 하고 한 겨울동안 불을 때지도 않고 지내는 등 고행을 하기도 했다.
 
비록 방황한 시기가 있었으나 회개하였고, 김대건 신부 체포 직후 포졸들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칠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옥에서도 고된 매질과 회유를 모두 이겨내며 순교하기를 갈망, 1846년 교살되어 순교를 달성한다.


[2009년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 - 이 땅에 빛을, 가톨릭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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