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식 기도가 뉴에이지라고요?

[교회상식 속풀이-박종인]


어느 피정집에 들러 이러 저러한 대화를 주고받던 과정에서, 한때 좌선식 피정을 프로그램으로 도입하려 했다가 그것이 뉴에이지 운동으로 오해 받을 소지가 있어서 포기했다는 사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신자 학생은 건강을 위해서 요가를 배우는데 그것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어찌해야 할지를 물어왔습니다.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련기간 동안 좌선 자세로 기도를 해 온 저로서는 좌선식 기도가 그런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는 별로 생각을 않고 살아왔기에 좀 의아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하는 요가에 대해서도 저 개인적으로는, 그게 아예 힌두교도가 되려는 것이 아닌 이상 별 문제가 없다고 이해합니다. 


문제는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는 매우 두리뭉실한 문화적 움직임(그러나 매우 전방위적으로 퍼져 있는)으로 포착되고 있는 ‘뉴에이지’(New Age)라는 것이 어떤 속성을 지니는지 잘 모른다면, 우리가 증언해야 할 신앙과 멀어질 가능성에 충분히 노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려 때문에, 교황청 문화평의회와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는 ‘생명수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the bearer of the water of life)-“뉴에이지"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 이라는 제목의 문헌(이하, 문헌)을 반포하였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뉴에이지가 그리스도교 신앙과 대별되는 점들을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유행과도 같은 이 흐름에 “뉴에이지”라는 이름을 달게 된 것은,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뜬구름 같은 이야기로 여기면 딱 좋을 듯하지만, 점성술에 의하면 물고기자리의 시대가 끝나고 삼천년기를 맞이해서는 물병자리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군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물고기자리 시대가 저문 것은 그리스도교가 이제 한물갔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뉴에이지는 무엇 하나 어떤 틀에 갇히기 싫어하는(그러면서도 특정한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하기에 우리는 딜레마를 느낍니다) 오늘의 풍조에 매우 잘 맞아 보입니다. 아니면, 뉴에이지적인 태도가 이미 이 세상에 넘쳐 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아무튼, 이 흐름은 딱히 종교라 할 수 없지만, 점점 더 많은 호소력을 얻고 있는 더 넓은 맥락의 밀교적 종교성 안에 두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대안 영성처럼 대안 종교의 분위기를 띠는 것이지요.

아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을, 간단히 어떤 것이라 정의하기는 쉽지 않으나, ‘대안적 영성’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직화된 종교가 그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그러니까 만족스런 답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러한 종교를 거부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다른 곳에서 ‘영성’을 찾아 왔습니다. 그것을 대안 영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나아가 뉴에이지의 핵심에는 특정 종교들의 시대는 끝났다는 확신이 깔려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뉴에이지는 기성제도가 채워 주지 못하는 갈증을 채워 줄 수 있다는 매력을 지니는 듯하게 보입니다.


대안 영성이나 대안 종교의 매력적인 포장에 대해 문헌은 현대 소비사회가 그것을 조장하고 있다는 통찰을 보여 줍니다. 눈뜨고 당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주위를 둘러보세요. “웰빙” 문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내적인 평정과 숭고한 정신을 지향하고 있지만, 그것을 위해 다양한 소품들이 준비되어 있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져 잘 포장된 상품들을 소비합니다. 이런 분위기는 서구사회나 서구화된 사회에서 쉽게 확인됩니다. 윤회사상이나 명상 등의 동양문화들이 서구사회에서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이고 이런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해줄 다양한 소품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소비문화와 엮여 뉴에이지의 흐름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이 역시, 개인주의적 흐름입니다. 함께 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버립니다. 누군가와 만나는 일이 버겁기에 홀로 하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전철 안에서 주위를 둘러보시면, 스마트폰 덕에 우리는 각자가 자기 취향대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뉴에이지는 한 가구에 한 대씩 팔았던 상품을 이제는 개인에 한 대씩 팔 수 있는 상품을 생각하게 합니다. 개인을 공략하는 것이 시장을 넓히는 일이 된 셈입니다.


뉴에이지를 어떤 특정 조직이 퍼뜨리고 있다고 믿으며(음모론에 입각한 믿음이겠죠?)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로부터 벗어나 편안함이나 이완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뉴에이지는 그런 욕구에 어느 만큼의 해결책은 제시해 주는 듯 합니다.

사실 뉴에이지를 경계하는 교회는 이 점에서 고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얼마나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가? 다행인 것은 뉴에이지 때문에 소비능력이 있는 신자들은 떠나도 가난한 이들은 못 떠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보기에 뉴에이지는 결국 여가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이들에게 설득력 있는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늘 고단하고 고통스런 삶을 영위해야 하는 이들은 이웃의 손길을 하느님의 손길로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소중히 여겨야 할 사람들이고 고통과 맞서 싸우신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며, 뉴에이지의 유행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그들을 위해 어떻게 도움이 될지, 좀 더 광범위하게 그리스도교의 유구하고 풍요로운 유산을 신자들이나 비신자들에게 전달해 줄지 성찰해 봐야 합니다.


문헌은 뉴에이지가 보여 주는 지구를 지키고 자연을 보호하자는 태도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봐야할 부분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공권력을 앞세워 투기 자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에 대항하려는 조직적인 노력이 뉴에이지의 특성상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개인적이고 소비적이며 긴장이나 고통을 회피하면서 준엄하게 싸움판으로 뛰어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같이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사랑합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방향 지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개인과 공동체, 두 영역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합니다. 성경, 성사를 중심으로 한 기도가 중요합니다. 이런 모임을 통해 그리스도의 정신을 공유하게 되며, 사람과 사람이 교감하고 공감합니다.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좌선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매우 다양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불교에서 전해져 오는 신체적인 자세를 응용해 본 것입니다. 요가도 자세를 교정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힌두교의 전통이니 안 된다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타종교와의 대화 수준에서 말입니다.

불교를 연구하다가 거의 불자 수준의 삶을 살게된 동료 신부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제입니다. 그는 불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다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름을 잘 알고 있기에 어디에서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분명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서로의 고유함을 바라봐 줄 수 있습니다.

신앙교육의 배경이 전혀 없는 학생들에게 처음부터 종교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자기 성찰의 기술을 전달하기도 쉽지 않아서 잘 쓰는 방법이 명상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동양의 문화 안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 자기의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는 것은 새로운 체험이라지만 문화적으로 낯설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여건을 준비하도록 유도합니다. 이렇게 침묵의 소중함을 알려 주고, 더불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시간도 마련해 줍니다. 친구가 하는 이야기에 공감하는 방법도 모두 함께 배웁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각 개인의 경험을 공유합니다.


문헌은 이야기합니다. 심리학적 현상과 영성을 혼동함으로써 명상기술이 기도와 혼동되곤 한다고 말입니다. 명상기술이 기도의 훌륭한 준비는 될 수 있으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자기 발견의 수준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를 알면 알수록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신자들인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성사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이르는 매우 구체적인 일치를 체험하게 해 줍니다. 뉴에이지가 말하듯, 우주의 근원을 향한 에너지의 일치와 같은 식의 아주 모호한 신화(神化)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이 되어 가는(divinization) 여정에 있는 이들입니다.


뉴에이지에 대해 경계까지는 필요할지 몰라도 경기를 일으키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뉴에이지의 해악으로부터 충분히 자유롭습니다. 내적인 평화만을 추구하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물지 않으며, 지금 길에서 울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러 집을 나설 줄 안다면, 친구의 손이 따스하다는 것을 느낄 줄 아는 개방성과 관대함을 가졌다면, 그 사람들은 뉴에이지에 대해 신경쓰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타종교들과 맺는 관계를 보고 일부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향해 혼합주의라 규정하거나 (뉴에이지가 종교들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향을 보이는 혼합주의 색채를 띠다 보니) 그 대표 단체라고까지 간주한다고 하는데.... 좌선식 기도를 뉴에이지냐고 묻는 분에게 되려, 커피를 국그릇에 따라 마시면 안되나요? 라고 묻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