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세속화 도전 앞에 선 한국교회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교회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은 신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온 국민들에게도 큰 위로와 희망을 준 사건이었다. 아시아 청년들이 신앙의 힘으로 세상의 빛이 되기를 당부하셨고, 시복식에서는 시대와 세상을 이겨낸 신앙의 위대한 가치를 설파하셨다. 시복식 직전에는 세월호 유가족 유민 아빠의 손을 꼭 잡아줌으로써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를 보여주셨다. 교황님께서는 한국 주교단과의 만남에서, 한국 교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친교를 드러내셨고 동시에 약간의 염려도 숨기지 않으셨다. 그 염려는 한국교회가 물질주의와 세속화의 도전 앞에 서있다는 것이다.


세속화란 일반적으로 사회와 문화의 여러 영역들이 종교적 제도와 사고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일컫는다. 이는 산업화되고 다종교적 상황 안에서 겪는 일반적 과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과정 안에서 교회와 신앙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젖어드는 경향들이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세속화에 따른 세속주의의 유혹이다. 신앙인들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이 복음과 교회의 전통에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크고 화려한 성전을 추구하고 입교자의 숫자에 집착하는 선교로 드러난다. 교회의 일은 능률과 효율을 추구하는 기업의 일처럼 여겨지고, 신앙인의 삶은 성공과 권력이라는 기준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교회 공동체는 한갓 사교 모임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신앙과 복음을 사유화하는 흐름이 있다. 이것은 신앙과 복음을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제한하려는 생각이다. 복음의 공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을 애써 무시하고 신앙과 교회는 개인의 마음과 영혼만 어루만져주면 될 일이지, 사회를 비판하거나 사회 문제를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흐름에 젖어드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주의와 신앙의 사유화 흐름은 곧바로 종교의 시장화(marketization)와 번영의 신학으로 이어진다. 교회의 메시지라는 상품은 자연스레 소비자의 취향을 고려할 수밖에 없고, 소비자는 자기 입맛대로 상품을 취사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길은 ‘예수 믿으면 성공’이라는 ‘번영의 신학’으로 끝맺는다. 종교, 또는 교회가 인간의 욕망을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부추기게 되는 셈이다.


교황님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에 따르면, 이러한 흐름에 교회가 도전받는 가장 깊은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가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가 없는 교회 공동체는 사교 모임으로 변하게 되고, 예언자적 누룩을 잃어버리며,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웰빙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갈림길 앞에 서있는 한국교회가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교황님께서는 한국의 주교님들께 살짝 해답을 보여주셨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대는 교회의 풍부한 유산인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고,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사도 시대의 이상은 여러분 나라의 첫 신앙 공동체에서 그 생생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상이 미래를 향해 순례하는 한국 교회가 걸어갈 길에 계속 귀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주교들과의 만남’ 연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09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노동사목을 담당하며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월 4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사회교리, 그 오해와 진실


사회교리가 진보 편을 든다구요?


‘프란치스코 효과’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4회째를 맞은 사회교리 주간, 세월호 참사, 정당 해산 판결, C&M 고공농성, 제주 강정…. 그 어느 때보다 사회교리에 관한 관심이 높습니다. 높은 관심만큼 말도 많고, 특정 정치집단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처럼 오해받기도 합니다. 본격적인 주제에 앞서 사회교리에 관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해 함께 나누려 합니다.


사회교리는 ‘사회’에 관한 문제일까요? 시선을 오로지 사회로 돌려 자신과 교회의 실천은 돌아보지 않은 채 비판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오해 때문에 사회교리를 이야기하는 사람더러 교회 안에서 ‘정치 이야기’ 하지 말고, 교회 밖에서 사회에 나가서 이야기하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길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교회의 자리도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 안에 있습니다. 사회교리는 ‘사회’에만 국한된 교리가 아니라,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인간, 태초부터 남자와 여자라는 공동체 안에서 창조된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과 함께 사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회교리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일종의 ‘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신앙은 ‘믿을 교리’와 ‘지킬 계명’으로 이루어집니다. 사회교리는 ‘지킬 계명’에 해당하고, ‘덤’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우리의 가정, 내가 속한 본당 단체나 구역, 반모임, 본당 사목협의회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내 모든 교계제도와 나아가 직장과 지역사회, 개별국가에서 국제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동체 안에서 지켜져야 하는 계명입니다.


어떤 이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사회교리 자체를 터부시합니다. 하지만 사회교리가 ‘사회’에만 국한된 교리가 아닌 것처럼 세속과 종교의 완전한 분리는 가능하지도 않고 정교분리의 본래 의미와도 어긋납니다. ‘정교분리’란 국가가 특정 종교의 이념을 절대화하여 종교가 이데올로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 다시 말해 종교가 본래의 고유한 기능을 잃고 하나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국가의 고유영역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고유한 권한을 가지고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회교리가 진보성향의 정치논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복지나 성윤리와 관련하여서는 오히려 진보진영의 논리와 정면으로 충돌할 때도 있습니다. 반대로 보수성향의 정책이나 노선이 사회교리와 부합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사회교리는 현상을 관찰하고 다양한 의견을 듣지만, 판단은 어디까지나 복음에 기초해서 이루어집니다. 겉보기에는 특정 집단의 목적이나 이해와 비슷해 보인다 해도 그 뿌리는 복음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회교리는 우리 신앙의 수준을 보여주는 ‘신앙의 온도계’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하면서 교회 가르침을 배우고, 미사 안에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사회교리라는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사회교리는 신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회교리에 반감을 갖거나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면 교회의 신앙교육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회교리에 대한 나의 이해혹은 나의 오해는 무엇을 바탕으로 합니까? 복음입니까? 세상입니까?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6)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14년 서품을 받고, 현재 서울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월 11일, 김성수 신부(서울대교구 고덕동본당)]


[사회교리 아카데미] 왜 노동은 덫이 되어 버렸나?


도구로 전락한 인간의 노동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덫에 걸린 신분으로 사는 것과 같다. 최근 5년 사이에 빈곤에서 벗어나는 비율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주식 배당이나 은행 이자 소득을 뜻하는 자본 소득에 비해서 노동소득의 비율 역시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이미 일자리는 10%의 대기업과 공기업의 좋은 일자리, 그리고 나머지 90%의 일자리로 양극화되었다. 90%의 노동자는 변변치 못한 보수로 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임금 노동자의 50% 이상이 언제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비정규직으로 일한다. 비정규직이 5년 안에 정규직으로 옮겨가는 비율은 20%도 되지 않는다. 이제 평생직장은 아련한 추억 속에서나 머무는 단어다.


반대로 2014년 1분기 기준으로 우리나라 10대 재벌기업의 사내보유금은 500조를 넘었다. 얼마 전 현대차그룹이 서울 삼성동 한전 부지를 감정가의 세 배가 넘는 10조5000억 원에 살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뿐만 아니라, 10대 기업집단의 보유금은 지난 5년간 2배 이상 늘어났다. 그런데도 재벌들은 경제가 어렵다고 엄살을 떨고 있고, 정부는 기업이 잘되는 나라를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세계 경제 10위권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불평등으로 따지자면 멕시코와 비슷한 수준이 되어버렸고, 빈곤율로 따지자면 터키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 나라에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부자 되기는 힘들다. 이 나라에서 노동이란 자신을 실현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존엄한 것이 아니라, 되도록이면 빨리 탈출해야 하는 덫이 되어버렸다.


왜 노동은 덫이 되어버렸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노동하는 인간」에 의하면, 노동은 두 가지 얼굴을 지닌다. 인격적인 얼굴과 도구로서의 얼굴이다. 인격적인 얼굴의 노동이란, 누가 어떤 노동을 하든지 그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인간됨을 실현하고 하느님이 하신 창조의 일을 지속시킨다는 의미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노동은 존엄한 것이고 이마에 땀을 흘리는 노동자 역시 존엄한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노동력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환산되어 값이 매겨진다. 그 값에 따라서 노동은 서열이 정해진다. 이것이 바로 도구로서의 노동이다. 노동이 인격적인 얼굴을 잃어버리고 시장에 내팽겨져 상품으로서 그리고 도구로만 여겨질 때, 노동은 인간의 발목을 잡는 덫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상품이라는 도구로 전락해버린 노동을 다시 인격 안으로 되돌리지 않고서는 노동의 미래는 없다. 노동이 시장을 벗어나거나 넘어서지 못하는 한, 노동은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시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장의 폐해를 줄일 수는 있다. 국가가 노동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정책을 쓰면 된다. 이를 ‘적극적 노동정책’이라고 한다. 가톨릭 사회교리가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듯이, 모든 노동자가 열심히 일한만큼 정당한 임금을 받도록 도와주고, 비자발적 정리해고로부터 보호해주고, 실직한 노동자들에게는 충분한 연금과 직업훈련을 제공하면 된다.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말은 말자. 지난 5년 동안 꾸준히 변두리로 밀려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서 지난 5년 동안 두 배 이상 늘어난 재벌의 사내보유금에 세금을 매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엇이든 하려고 하면 방법을 찾게 되지만,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려고 하면 변명만 쌓이는 법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노동사목을 담당하며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월 18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원리’ 동의해도 실천은 제각각


작년 말 정치권에서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는 서양속담이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큰 틀에서는 합의했다 말하면서 세부 실천사항이나 해석에서 각자의 속셈과 숨은 생각을 드러내면서 더 큰 입장 차이를 만들어내는 정치권의 행태를 두고 한 이야기였습니다.


사회교리는 복음에 기초하여 인간존엄성의 원리, 공동선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같은 주요 원리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 원리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테일에, 실천 중에 악마의 유혹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어 존엄하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가톨릭 신자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최근에 있었던 항공기 땅콩 회항문제, 아파트 경비원 폭행과 분신자살, 그에 따른 아파트 경비원 집단 해고와 같은 일들을 보면 과연 우리가 실천에서도 모두가 똑같이 존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공동선은 우리 사회와 정책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명을 실천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보다 많은 사람, 특별히 소외된 이들이 하느님을 닮아 존엄하게 살도록 하는 정책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욕심만 보장하는 정책을 따르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연대성은 공동선을 위해 투신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입니다. 이 세상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어둠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스도와 연대하고 힘을 모으기보다는 어둠을 키우는 한이 있더라도, 나의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려고 담합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보조성은 인간의 자율성과 자발성, 주체성을 중요시하는 원리입니다. 쉽게 말하면 힘이 세고 잘 안다고 고기를 잡아주면 안 되고, 스스로 고기를 잡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정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의 자율성과 자발성, 주체성을 중시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답답합니다. 국가가 각 지역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그들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공동체를 꾸려나가도록 지원해주고 있는지, 아니면 국익이라는 핑계로 소수 지역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암울합니다.


우리가 소유한 돈, 재산, 재능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말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더 가진 사람들이 세금을 더 내도록 해야 하고, 그래서 평등한 분배를 실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로 들어가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악마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사목헌장 24항의 다음 문구를 작성하셨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없다.” 그저 혼자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 있으면 자신이 더없이 훌륭한 신자로 보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서는 ‘너’가 있어야, 실천이라는 디테일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와 부모, 자녀에게, 각자가 속한 단체와 사회에서 이웃들에게’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실천이라는 디테일에 들어가 볼 때라야 내가 진정 누구인지, 내 신앙의 온도가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원리만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디테일을 복음의 빛과 기쁨으로 성찰하고 식별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14년 서품을 받고, 현재 서울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월 25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태초에 노동이 있었다


당신의 노동은 존중받고 있습니까


첫 인류의 이름 ‘아담’은 땅이나 흙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다마’에서 나왔다. 하느님이 흙을 빚어 만들었으니 흙에서 나왔다는 뜻이기도 하고, 평생 땅을 일구어 살아야 하는 운명을 지닌 ‘땅의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인류 창조는 땅을 일구고 흙을 빚은 노동으로 시작되었고, 인간에게 땅을 일구어야 하는 노동의 사명을 맡김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인간은 땅을 일구며 노동을 통하여 자연을 돌보고 만물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러니 사람은 땅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동하는 인간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더욱더 인간다워지고 또한 더욱더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간다. 노동은 인간에게 씌워진 죄의 굴레가 아니라,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멋진 일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노동이 있었다!


살짝 경제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고전 경제학에서는 생산의 세 가지 요소로 자본과 토지, 그리고 노동을 꼽는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합쳐져 생산이 이루어지고, 이 세 가지 요소로 수입에 대한 배분을 설명한다. 즉 수입의 종류를 따져서 말하자면, 자본이 만들어내는 수입을 이윤,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지대, 그리고 노동에서 나오는 수입을 임금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생각해보면, 생산의 세 요소들 가운데 노동이 가장 먼저 있었고,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땅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농사를 짓거나 공장을 짓기 위해서 땅을 고르고 변형시킨다 하더라도 결국은 하느님이 주신 것에 인간 노동이 더해졌을 뿐이다. 자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장이 세워지고 그 공장에서 새로운 생산물이 나오더라도, 그 공장은 하느님이 주신 것에 인간 노동이 더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 스미스는 자본을 ‘육화된 노동’이라고 했고, 리카아도는 ‘축적된 노동’, 그리고 마르크스는 ‘지나간, 대상화된, 죽은 노동’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성 요한 바오로2세 교황께서 지적하듯이, “우리는 우선 교회가 항상 가르쳤던 원칙, 즉 노동이 자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원칙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 원칙은 생산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은 항상 주요 동인(動因)이 되지만, 생산 수단의 집적인 자본은 다만 하나의 도구 또는 도구인(道具因)이 될 뿐이다. 이 원칙은 인간의 역사적 체험의 총체에서 얻은 명백한 진리”(노동하는 인간, 12항)인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자본 없는 노동을 상상할 수는 없지만,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노동이 자본보다 우선적이고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천명한다. 그런 뜻에서 자본은 인간의 노동에 봉사해야 하고, 경제는 인간에게 봉사해야 한다.


그러니 한 사회가 얼마나 건강하고 건전한지를 볼 수 있는 것은 그 사회가 얼마나 인간의 노동을 존중하고 노동자에게 정당한 대우를 주는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이 존중받기 보다는 토지에 대한 이익과 주식 등 자본에 대한 이윤이 더 손쉽고도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고, 심지어는 자본 이윤을 위해 인간 노동이 희생되기까지 한다. 투기나 주식투자보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 이것이 이 땅에서는 정말 꿈같은 일일까?


여전히 이 땅에서는 노동하는 ‘아담’들은 땅(‘아다마’)을 딛지 못하고 굴뚝 위에서 또는 철탑 위에서 겨울을 이겨내야만 한다. 또 어떤 ‘아담’들은 무릎과 팔과 머리를 땅에서 떼어놓지 못하고 있다. 그 아담들의 이름은 해고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러한 아담들이 자신들의 ‘아다마’(일터)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노동사목을 담당하며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2월 1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아이를 낳자고?


결혼 · 출산 꿈도 못 꾸는 ‘젊은이’


한 방송사의 ‘연애만 8년째, 결혼할 수 있을까?’라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본당에서 만나는 주일학교 교사, 청년들과도 나누던 이야기였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서 살아가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잘 모르는 어른들은 ‘한국전쟁 후에는 더 힘들었다’, ‘70~80년대에는 더 허리띠를 졸라맸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이(젊은것)들은…’이라며 말끝을 흐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매일 외식을 하고, 커피를 사서 마시고, 아끼는 일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이 아닙니다. 비정규 일자리로는 한 달에 120만원 벌기도 벅찹니다. 거기서 1/3에 가까운 월급은 월세로 내고, 통신비와 식비, 각종 공과금을 제외하면 남는 것도 없는데, 거기서 대출받은 학자금을 갚고 결혼할 나이가 됩니다. 빚을 갚기 위해 태어났는지 결혼하려면 또 엄청난 빚을 져야 합니다.


결혼하는데 들어가는 평균 비용이 남성 약 8000만 원, 여성 약 2900만 원이라고 합니다. 오랜 기간 연애를 하면서도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자신들을 위해서는 돈을 써보지도 못했는데, 결혼을 하려면 다시 빚을 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사회 안전망이라도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면, 그래서 일자리라도 안정적이라면 빚을 지고서라도 젊은 패기로 시작해보리라 주먹을 불끈 쥘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비율은 20%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 하나를 출산해서 대학졸업까지 시키는데 들어가는 평균 약 3억 원의 비용을 감당하라고, 결혼과 출산, 육아를 향해 도전하라고 누가 젊은이들에게 강요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최근 경제부총리의 경제 활성화 방안에 대해 대학생들이 대자보를 붙이고, 이 답안지는 F학점이라 비판합니다. 대자보에서 ‘우리는 순순히 아이를 낳아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청년들이 철없고 이기적이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입니다. 가정이 파괴된다면 사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가정이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가 가정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보조성의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가정을 파괴하고, 인간을 새로운 형태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계속해서 지적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가정이라는 첫 공동체를 축복하시면서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라고(창세 1,28 참조)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의 사회 구조에서는 가정 자체를 이루기가 힘듭니다. 신자들의 가정에서도 자녀를 신앙 안에서 양육하기가 어려운 구조입니다. 교회의 성윤리가 신자들, 특별히 젊은이들의 가슴에 가 닿지 않는 것도 이런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어느 정도의 원인이 있습니다.


가정을 향한 하느님의 명령과 축복에 반하는 사회의 구조는 인간에게 저주가 됩니다. 인간을 저주와 악에서 구원하고 하느님의 축복과 생명으로 이끄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 교회에 맡겨진 사명입니다. 그 교회는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 바로 ‘우리’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절망과 가정의 위기는 바로 우리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2월 8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정의로운 임금(賃金)


‘인간다운 삶’ 위한 정당한 대가 필요


월급만으로 먹고 살기엔 너무 힘들다고 한다. 턱없이 부족한 임금이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임금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있다. 특히나 우리나라 임금노동자의 반을 훌쩍 넘어버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북유럽의 선진국에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이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을 더 많이 받는다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언감생심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용도 불안정할뿐더러 임금도 정규직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적다. 똑같은 작업대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받는 임금은 턱없이 부족하기도 하고, 공정하지도 못하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 노동의 대가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공정하고, 어느 정도의 임금이 정의로운가?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에서부터 최근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노동하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일관되게 노동자의 가장 정당한 권리들 중의 하나로서 ‘정의로운 임금’을 주장하고 있다. 정의로운 임금이야말로 노동의 참다운 가치와 노동자의 존엄을 보호해주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따르면,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성인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란 가정을 꾸려 적절히 유지하기에 충분하고 가정의 장래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보수”(노동하는 인간 19항)이다. 이것 역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말씀이라 가슴에 와 닿기 힘들다. 더구나 한 사회의 상황과 기업의 조건들까지 고려해야한다면 복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주의 깊게 새겨들어야 할 말은 그 다음 구절이다. “이러한 보수는 … 다른 사회 조처를 통해 주어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회사에서 받는 임금 외에 우리 사회와 국가가 다른 조처를 통해서 가정 구성원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자녀 양육과 교육에 충분한 임금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가계 운영은 크게 두 가지 경로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로 받는 임금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얻는 급여이다. 앞의 것을 우리는 시장임금이라고 하고 뒤의 것을 사회임금이라고 한다. 사회임금은 실업, 노후, 의료, 주거, 보육과 교육 등 인간의 기본적 필요에 대해서 수당, 연금, 보험, 공공임대주택처럼 현금이나 사회서비스를 통해 제공받는 것이다. 예를 들면, 외국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자가 월 20만원의 아동수당을 지원받는다면, 이는 노동자가 임금인상 투쟁을 통해 시장임금 20만원을 인상한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나라의 사회임금 수준이 턱없이 낮다는 것이다. 한 가정이 먹고사는 비용(가계 운영비) 중에 사회임금의 비중이, 스웨덴 48.5%, 독일 38.8%이고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30.5%에 이르지만,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31.9%에도 한참 못 미치는 7.9%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가정이 먹고사는 비용, 학교가고 병원 가는 비용 등 모든 것을 자신이 벌어서 마련해야 한다. 즉 시장임금에만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고, 구조조정이라도 당하면 삶의 막다른 길에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정의로운 임금을 수량으로 정확히 기준을 세울 수 없다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사회임금의 수준을 OECD 평균치에만 올려도 우리 삶이 이렇게 팍팍하지도, 우리 인생이 이렇게 불공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보장과 같은 복지제도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라, 인간과 노동의 존엄이 요청하는 당연한 권리이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의로운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2월 15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교회는 왜 안 된다고만 하나요?


사회교리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신자들조차 교회의 가르침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올바로 실천하고 가르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신자들이 신앙을 장식품처럼 생각해서 삶의 진지한 문제에서는 교회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꼽아보면 이렇습니다. ‘사형제도 폐지, 낙태 반대, 치료 목적을 제외한 인공피임과 피임약 금지, 안락사 반대, 동성 간의 성행위 반대’와 같은 것들입니다.


얼핏 보기에 서로 다른 주제 같기도 하고, 하나같이 교회의 가르침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주제들입니다. 사회교리에서도 가정과 관련한 부분에서 이 문제들을 다룹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사형제도와 관련하여서는 저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그렇게 벌을 줘야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된다고 합니다. 낙태나 피임은 교회가 정말 세상 물정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라고, 요즘 세상에 아이를 낳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렇게 무책임하게 낙태와 피임이 안 된다고만 말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저렇게 고통 받는 것을 보느니, 안락사를 통해 빨리 저 세상으로 보내주는 것이 인간적이지 않느냐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동성애 행위를 하더라도 성적 취향을 존중해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이에 대한 교회의 입장 바탕에는 사회교리의 첫 번째 원리인 ‘인간 존엄성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와 참여의 핵심인 ‘자유’가 있습니다.


교회가 인간이 고통 받는 상황을 외면하거나, 단지 글자로 안 된다고 규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고통 받고 일그러진 최후의 순간, 바로 그 모습까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모습이고 그렇기에 생명이 소중함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신비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 때문에 교회는 아무리 죄가 크고, 고통스럽고, 기르기 어려워도 사형과 안락사와 낙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회교리에서 인간의 자유는 제멋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바로 이 인간 존엄성을 선택하는 자유,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그분을 닮은 모습으로 사는 자유입니다.


피임과 동성애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성’(性)이 인간 생명과 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모두 성관계에서 생명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 간의 성행위와 인공적인 피임은 이 둘을 인위적으로 분리시킵니다. 생명에 대한 책임감 없이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면서 이를 ‘자유’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피임은 가임기에 성관계를 절제하는 자연피임입니다. 이는 생명과 성을 분리시키지 않고,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한 절제와 희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동성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동성 간의 성행위를 통해 쾌락을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정한 의미와 바탕에 깔린 생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신자들에게 필요합니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단죄할 것이 아니라, 먼저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하며 함께 십자가를 지자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사회교리는 우리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교회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1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노동자의 경영 참여


“노동자는 노동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노동자들이 기업의 경영에 원천적으로 참여할 수가 없다. 오히려 노동조합의 정당한 요구와 단체행동마저도 경영에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수십억에서 수백억 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에 시달리는 실정이다. 노동자의 처지와는 반대로 현행 근로기준법이 해고의 요건을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고만 규정하고 있어서, 많은 기업들이 자의적 기준으로 판단하여 큰 부담 없이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은 경영에 참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영상의 필요에 의해 정리해고를 손쉽게 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사업장 문제와 경영에 대한 의사 결정에는 참여하지도 못하면서 책임은 뒤집어써야 하는 처지다.


우리의 이런 현실과는 반대로 가톨릭교회는 노동자가 기업 경영에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미 여러 차례 밝혔듯이, 사회교리는 자본에 대해서 인간의 노동이 우위에 있다고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다. 태초에 인간의 노동이 있었고, 자본은 그 후에 생겨난 것이다. 우리가 자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 역사를 통해 쌓이고 쌓여 축적된 것이다. 이런 뜻에서 노동하는 인간은 노동의 결과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노동의 과정에 대해서도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결과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은 노동자가 이윤에 대해 정당하게 몫을 나누어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정의로운 임금에 대해서는 <가톨릭신문> 2월 15일자 참조) 노동자는 노동의 결과 뿐 아니라 노동의 과정 자체에도 참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얼마나 생산할 것인지, 노동의 조건이 어떠해야 하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일해야 하는지 등 노동의 과정을 책임지고 결정하는 부분에도 참여해야 한다. (<노동하는 인간> 14항, 그리고 <팔십주년> 47항 참조)


실제로 많은 나라들은 자본(경영)과 노동이 사업장 안에서의 문제에 대해 함께 책임지고 결정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를 공동결정제도라고 하는데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그리고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 일상적으로 시행하는 제도다.


특히 독일의 공동결정제도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주식회사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참여해야 하고, 작업장의 경영 문제에 대해서는 감독위원회에 노사 동수로 참여하며, 작업장 안에서는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노동과정, 즉 노동강도, 노동조건, 노동시간 등을 함께 결정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990년대 초반 폴크스바겐 자동차 회사에서는 경영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노동자들이 서로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눔으로써 정리해고 없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공동결정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공동결정제도는 노동과정을 결정하는데 있어 노동자들이 참여함으로써 노동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과 자본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유익한 제도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유럽의 공동결정제도는 사회교리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를 통해서 실현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만 더 이야기하자. 1976년에 독일 기업가들이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강제한 공동결정법이 위헌이라며 제소했다. 그러나 독일연방 헌법재판소는 기업의 소유권과 공동결정권은 상호배치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소유권은 자본주에게 속하지만 경영에 관한 내용은 사회적 차원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결정권이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8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신앙인의 윤리적 잣대


당신의 실천 온도는 몇 도인가요?


우리는 흔히 윤리(倫理)와 도덕(道德)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둘은 약간 다릅니다. 윤리가 사람과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지켜야 할 도리와 규범’이라는 성격이 강하다면, 도덕은 이를 구체적인 상황에서 개인의 양심에 따라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학문에 비유하자면 윤리는 원론이요, 도덕은 각론이고, 마차에 비유하자면 윤리는 마차의 바퀴이고, 도덕은 그 바퀴를 굴려 목표점을 향해 나아간 자국이라 하겠습니다. 도덕적 실천을 위해 올바른 목표와 그에 도달할 수단을 제공하는 윤리가 필요하지만, 도덕이 되지 못한 윤리는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


윤리 원칙 중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고 평가하는 부분이 바로 법입니다. 법의 토대에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공동체가 지향하는 목표인 윤리가 자리하며, 그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가령 헌법과 같은 법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그에 따른 인권과 같은 가치를 지향하고 보호합니다. 도로교통법과 같은 실천적인 규정들도 직접적으로 윤리적 가치를 지향하지는 않지만, 인간 생명의 보호라는 가치를 간접적으로 지향합니다. 이처럼 법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윤리적 가치를 강제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최소한을 위한 마지노선이지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바는 아니지요. 따라서 법만 잘 지킨다고 도덕군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지난 2월 26일 헌법재판소의 간통죄에 대한 위헌선고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사회 구조 및 결혼과 성에 관한 국민의 의식이 변화되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다 중요시하는 인식이 확산됐다”며 “간통행위에 대해 이를 국가가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적정한지에 대해서 국민의 인식이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를 반기기라도 하듯이 콘돔, 피임 관련 주식들이 대거 상승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습니다. 단지 일시적인 결과이거나 억측일 수도 있습니다. 간통죄가 형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하여, 민사재판에까지 가지 않는 무죄라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사회가 법에 담고자 하는 윤리적 가치의 내용, 혹은 그 마지노선과 우리 신앙인이 살아가야 할 윤리적 가치의 마지노선은 분명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회사에서나 성당에서나 지역사회에서, 우리는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에게 윤리규범은 단순히 국민의 의식변화나 인식확산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언급했듯이 교회는 사회교리에서도 가정에 대한 교회의 기존 입장을 확실히 합니다. 바로 성관계는 오로지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혼인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과 생명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가정 안에서 부모와 함께 자랄 새 생명의 권리 또한 보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 윤리적 가치를 담기 위해 법을 제정하고 폐지하는가, 그 가치가 신앙인인 나에게도 타당한가, 나는 신앙인으로서 내가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윤리적인 가치를 실천하는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가, 아니면 윤리원칙이 바뀌기를 바라거나 내 입맛에 맞게 고치면서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합리화하는가…, 사회교리를 공부하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입니다. 내 실천의 온도는 몇 도인가요?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15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낙수효과


기업이 잘되면 서민도 잘 살 수 있나?


기업이 잘돼야 서민이 잘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기업이 잘돼야 일자리도 늘어나고, 일자리가 늘어나야 서민들의 소득이 늘어난다는 말이다. 언뜻 듣기엔 그럴듯하다. 그래서인지 정부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온갖 행정 규제들을 철폐해야 한다고 나선다. 대형 건물을 짓기 전에 거쳐야 하는 여러 규제도 철폐하고, 경미한(?) 환경오염 때문에 공장을 돌리지 못하는 환경 규제도 당장에 철폐하잔다. 이렇게 기업이 잘되도록 국가가 앞장서서 도와준다. 그런데 기업이 잘되면 서민도 잘 살 수 있을까? 정말 그럴까?


불행하게도 통계청과 한국은행에서 나온 여러 통계들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바와 다르다. IMF가 있었던 1998년 이후 처분가능국민소득 중에 가계 소득과 기업의 소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살펴봤더니, 기업의 소득은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특히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를 외치며 친기업 정책으로 일관한 이명박 정부에서는 아주 가파르게 증가했다. 그러나 기업소득이 증가할 때 가계소득 역시 증가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줄어들었다. 특히 기업소득이 가파르게 증가한 이명박 정부에서 가계소득은 가파르게 내려앉았다. 최근 10년 이상 삼성전자를 비롯한 현대자동차 등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은 계속해서 사상 최대 규모의 영업이익과 매출이익을 올렸다고 전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삶이 나아졌다는 소식은 들을 수가 없다. 1인당 국민소득도 계속해서 좋아지는데, 왜 우리는 가난한가?


기업이 잘돼야 서민이 잘된다는 이론을 경제학에서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라고 부르는데, 기업과 부자들의 항아리에 물이 차서 넘치면 가난한 이들에게도 물이 흘러간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 이론은 검증이 안 된 가설이자 우리 사회의 통념일 뿐이다. 적어도 우리의 현실에서는 기업이 잘되는데도 서민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경제논리와 그것에 바탕한 현실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을 거부”하라고 가르친다.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은 이렇게 말한다. “일부 사람들은 자유 시장으로 부추겨진 경제 성장이 세상을 더욱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낙수효과 이론을 여전히 옹호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혀 확인되지 않은 이러한 견해는 경제권을 쥐고 있는 이들의 선의와, 지배적 경제제도의 신성시된 운용방식을 무턱대고 순진하게 믿는 것입니다!”


1997년에 발표된 영국 주교회의의 가르침 ‘공동선,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의 비판은 더욱 신랄하다. “경제 법칙의 당연한 귀결로서 이미 부자인 사람들이 더욱 부유해지면 덜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도 개선된다는 그들의 주장에 우리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의 주장은 실제 경험뿐만 아니라 상식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들의 경제적 이익 추구를 정당화하고자 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기업이 잘된다고 곧바로 서민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서민의 삶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오히려 기업의 이익이 서민들에게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정부가 여러 가지 규제를 통해서 조정해야 하고, 또 복지 제도를 더욱 더 보편적으로 확대해나가야만 한다. 정부가 대기업의 편에 서서 규제 철폐만을 외치는 것은 서민들의 경제에 도움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효율적인 시장경제를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진짜로 서민들의 삶이 걱정이 된다면, 연대성에 기초한 공동체적 가치를 확산시키고 그것을 제도로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22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올바른 교육 방향


교육, 하느님의 모상을 이끌어내는 일


무상급식, 등교시간, 사교육비 절감, 대학등록금과 같은 교육 이슈들이 가득합니다. 그때마다 교육 정책에 일관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각자의 정치, 경제적 입장과 지위에 따라 첨예한 갈등이 조성되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도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가?’와 같은 담론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이제 교육은 개천에서 용이 나게 하는 촉매제도, 사회변화의 원동력으로서의 가치도 잃어버리고, 기득권의 세습을 위한 장치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거셉니다. 노력하는 교사들도 많이 있고,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족한 부분을 좀 더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한 때 우리 사회에서 ‘마이클 샌델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질문 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기차가 달리는데 브레이크는 고장이고, 눈앞에는 갈라진 철길이 놓여있습니다. 한쪽에는 여러 명의 노동자가, 다른 한쪽에는 한 명의 노동자가 있을 때 방향키를 쥔 나는 누구를 죽여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이를 두고 수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숫자의 문제와 사람의 가치를 단순히 명수로 계산할 수 있느냐에서부터 보다 복잡한 윤리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그 선택을 강요하는 철로의 설계와 설정 자체가, 다시 말해 이미 주어진 환경에서 결정을 강요하는 규칙은 폭력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삶에서 반드시 어딘가에 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환경, 내가 만든 규칙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철길 위의 노동자일 수 있고,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누구를 죽일지 결정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면 바꿔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바뀌지 않았다면 어쨌든 각자의 위치에서 양심적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행동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만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조적인 악도 판단하시겠지만, 그 안에서 내 할 바를 했는가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양심적인 결단을 내리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올바로 판단하도록 도와주는 일은 교육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교육은 인간의 존엄성을 우선으로 가르쳐야 하고, 참여와 연대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또 학생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 결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주체로서 대하면서 보조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가꾸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상적이라고 폄하할 것이 아니라,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은 자신의 소명을 실현해야 하고, 나아가 사회의 규칙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정해진 틀을 바꿔나갈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그리스도인 교육 선언」, 2항 참조).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 사회의 교육은 정해진 답을 강요합니다.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직 모른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적이고 양심적인 판단을 하는 법을 아예 배우지 못하도록 마비시킵니다. 자유와 보조성은 없고, 강요된 답과 그에 대한 보상만이 있습니다. 역지사지의 원칙은 양시양비론으로 변질되어, 판단을 미루게 하고 복음적 실천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지지하는 교육정책은 우리 아이들이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삶과 사회에서 실천하도록 도와주고 그럴 힘을 길러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과 재물이라는 우상을 쫓게 만들고 있습니까?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29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정의로운 에너지 사용


핵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지난 3월로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난지 4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그 영향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미 후쿠시마와 그 주변 지역에는 동식물들의 돌연변이가 나타났다. 머리가 둘 달린 자라가 나오는가 하면, 몇 개가 함께 붙은 토마토, 머리가 열 개나 되는 해바라기도 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동식물보다 생애주기가 더 긴 사람에게도 돌연변이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의학자들의 의견이다. 이처럼 핵발전소가 생태계에 끼치는 치명적 손상은 짧은 시간에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86년의 체르노빌 방사능 유출사건과 더불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건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안전한 핵발전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핵발전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전기를 좀 덜 쓰고, 핵 발전 외의 다른 방법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길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기 위해 먼저 전기 소비와 관련해 전력난의 주범이 누구인지 물어보아야 한다. 2013년 감사원의 지적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가정용 전기 소비는 다른 선진국(OECD 회원국)과 비교하여 절반에 미치지도 않지만, 산업용 전기는 평균 1.75배를 더 많이 쓴다. 그럼에도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여 산업용 전기는 절반가량의 값으로 공급해주고 있다. 전력난의 주범은 기업인데, 어찌된 셈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은 절반가격으로 사용하지만 서민들은 두 배의 가격으로 전기를 사용하는 셈이다. 그러니 싼값에 전기를 사용하는 기업으로서는 다른 에너지를 대체하거나 개발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감사원의 지적은 누가 전기를 줄여야 하고, 누가 전기세를 더 내야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기업이 싼값에 사용하는 전기를 줄이지 않고서는 핵발전소를 벗어날 수 없다. 더 나아가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많은 나라들이 핵발전소를 폐쇄하거나 줄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독일 같은 경우는 이미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하였고 다른 방식의 에너지 생산을 통해서 경제적으로도 재미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런 에너지 생산이 비싸다고 되풀이하면서 오로지 위험천만한 핵발전소만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이미 2012년에 수명이 다한 월성1호기를 10년을 연장해서 가동하기로 결정했고, 2007년에 수명이 끝난 고리1호기조차도 더 연장해서 사용하려고 한다.


결국은 경제성장을 위해 기업에 싼값의 전기를 공급하고, 싼값에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핵발전소를 계속 늘려나가는 것이 우리 정부의 정책이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사실상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 전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도권을 위해, 수도권에서 400㎞나 떨어져 있는 지역에 위험천만한 핵발전소를 짓고 거기서 생산하는 전기를 송전선을 통해 수도권으로 가지고 가겠다는 발상은 지역 주민에게 고스란히 피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모두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국가 재정을 낭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밀양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송전탑 문제의 핵심과 본질은 바로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지역 주민의 피해와 희생 위에 전기를 생산하고 공급하겠다는 정의롭지 못한 에너지 정책이다.


모든 일이 다 비슷비슷하겠지만, 언제나 약하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만 이래저래 손해 본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 힘들다. 따라서 에너지 자원을 둘러싼 문제와 정책 역시 인간의 존엄성과 모든 이를 위한 공동선, 그리고 정의의 원리와 연대의 원리(간추린 사회교리, 470항)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실 정의로운 사회에서만이 정의로운 에너지 정책이 가능하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4월 5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세월호 참사로 바라본 ‘사회교리’


4월 16일 세월호 1주기, 곳곳에 현수막과 위로의 글, 추모의 글이 올라옵니다. 어떤 이들은 추모의 글을 감성팔이에 비유하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악영향을 주니 이제 그만하라고도 합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잃은 이들도 아닌데, 안타깝긴 하지만 왜 정부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까지 보상해주어야 하냐는 말도 합니다. 다른 이들도 지지 않고, 언제 유가족이 보상을 요구했느냐는 말부터, 정부의 대처 미흡과 특별위원회 구성이 지지부진했던 일, 미 대사습격에서 보여준 빠른 대처와 달리 세월호 때에 대통령을 비롯해 당국자들이 보여준 모습은 무엇이냐고, 진실은 무엇이냐고 항변합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4년 8월 124위 순교자의 시복식과 아시아 청년대회를 위해 한국을 찾은 자리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시고,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순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지난 3월 사도좌 정기방문 차 바티칸을 방문한 한국 주교단에게 교황님께서 하신 첫 질문은 ‘세월호 문제가 어떻게 되었느냐?’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투고 지쳐서 잊을 때, 예수님은 한 순간도 이를 잊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회교리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정치공동체(정부)의 기능이 무엇인가, 이를 보도하는 언론은 어떠해야 하는가, 개개인의 참여와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와 같은 다양한 시각에서 사회교리적 접근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모든 접근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고 당시 정부의 반응과 후속조치는 사고를 당한 학생들과 승객들, 유가족들의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였는가, 과연 경제가 한 인간의 존엄성보다 중요한가, 언론은 이를 위해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였는가, 나는 진정 아파하는 이들과 연대하고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참여를 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경제를 살리는 일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존엄성을 보장한다던가, 천안함이나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지하철과 같은 참사를 끌어들여 비교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비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선 사고를 겪은 이들의 아픔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였다는 핑계로 지금 내 앞에서 아파하는 이들을 외면하거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논리를 앞세워 문제의 본질을 흐릴 수는 없습니다.


언론에서 보도하는 다양한 입장, 개인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논리에 따른 다양한 판단, 모두 나름 타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이런 거시적인 틀에서만 논의할 때에 우리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회의 구조, 큰 틀을 핑계로 가장 작은 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 정치와 경제는 설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아픔에서 시작할 때에 비로소 인간을 위한 정치와 경제가 보입니다. 사회교리는 바로 그 한 인간의 존엄성과 아픔에서 시작합니다. 거창한 중립이 아니라, 복음을 토대로 사랑의 구조, 사랑의 정치와 경제를 가르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마태25,45)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4월 12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연민과 연대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하자


지난 3월 한국 주교단의 사도좌 정기방문이 있었다. 이미 언론 매체를 통해 잘 알려졌듯이, 한국 주교단을 맞이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질문은 “세월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느냐”는 것이었다. 지구 반대편의 가장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연대의 표시였다.


작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방한 이틀째부터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고 위로하셨고, 그들에게 전해 받은 세월호 리본을 끝까지 달고 계셨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셨다.


“나는 유족들과 연대하기 위해 이것(세월호 추모 노란 리본)을 달았습니다. 이것을 달고 반나절쯤 뒤에 어떤 이가 다가와 ‘떼는 게 더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러한 말씀과 태도는 그리스도교 사랑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낮은 사람들, 가장 아픈 사람들,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연민과 연대로 드러난다. 가톨릭교회 사회교리는 이러한 연민과 연대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교황의 말씀이 보여주듯,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의 영역이기 이전에 신학과 신앙의 영역이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으며,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셨다. 하느님은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2코린 8,9) 우리 가운데 오셨다. 예수께서는 고통받는 이들과 가난에 짓눌린 이들에게 하느님 마음속에 그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음을 확신시켜 주었고,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마태 25,35)고 말씀하시며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이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 하셨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불의한 사회구조와의 싸움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빵을 나누는 연대를 통해서,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연민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 말고는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두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자발적 가난을 통하여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오늘날 이웃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물질에 대한 신앙인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 없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사랑의 형태인 복음 선포는 오해를 받거나, 대중 매체에 좌우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날마다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는 말의 홍수에 침몰될 위험’(복음의 기쁨, 199항)이 있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사회교리의 원리는 한편으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신하는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들에게는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투신의 영성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많은 이들에게 오해와 염려를 주는 것도 사실이다. 교황께 “중립을 지키기 위해 세월호 리본을 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그 분의 염려가 그러하다. 그러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교황의 말씀이 정답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정치 논리와 정치적 선택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이 1주년이 지났다. 가장 아파하는 이들과 얼마나 가까이에 교회가 서있었는지 스스로 물어볼 때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평화신문, 2015년 4월 19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이민, 내가 속한 나라의 기준점


피부색 달라도 주님 나라에선 ‘한 형제’


오늘(4월 26일)은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입니다. 성소주일은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립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특별히 사제성소와 수도성소에 대한 부르심의 핵심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한 우리 안에 양들을 모으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는 해마다 5월 1일이나 그 전 주일을 이민의 날로 정해 기념합니다.


이민은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민이 있고, 사회 문화적인 영향으로 이루어지는 이민이 있습니다. 또 개인적인 이유로 이민을 결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가정과 고향, 나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민을 제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많은 사회문제가 생겨납니다. 정책적인 부분이 갖추어져 있지 않을 때에는 이민들의 의료, 주거와 관련된 기본적인 인권 보장도 어렵습니다. 노동에 대한 임금을 받는 과정에서의 차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문화적인 부분에서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 이민 2세대, 3세대들이 겪는 차별과 경제적인 부담감도 매우 큽니다.


우리나라는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이미 생산인구의 부족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많은 이민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이민 인구 중 약 60%에 가까운 이민이 직업을 구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조사되고 있어서 이 현상은 더 분명합니다. 하지만 청년들의 실업률이 높아가면서, 높은 실업률에 대한 불만이 이유없이 이민을 향하기도 합니다.


농촌을 돌아보면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집은 거의 대부분 이민의 자녀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입니다. 알코올중독이나 장애가 있는 남편, 늙은 시부모님을 부양하는 일도 힘들 텐데, 식당이라도 다녀서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다만 얼마라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이들은 계속 일을 합니다. 하지만 새 가족들은 혹시 한국국적을 얻게 되면 가정을 떠날까봐 이들이 쉽게 국적을 얻게 해주지 않습니다. 이들이 사회와 직장에서 받는 차별은 더욱 커지고, 심할 때는 현대판 노예처럼 갇혀서 식모살이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우리가 이민의 날과 착한 목자 주일을 함께 지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 우리 안에 있는 양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겉으로 드러나는 울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느냐 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참으로 한 형제, 자매입니다. 특별히 그렇기 때문에 이민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큰 도전이고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세상에만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저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콜로 3,1참조)


내가 눈에 보이는 나라와 국경, 피부색만 따져서 ‘우리’를 가르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나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양들의 울타리 안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우리 안에 있는 양이 되고자 합니까?


그들도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16)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4월 26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이상과 현실


더불어 사는 삶, 오늘날에도 실천돼야


예수 부활 대축일이 지나고 교회는 매일 미사의 제1독서로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읽고 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첫 번째 교회공동체를 건설하는 이야기이다. 유다의 빈자리를 마티아가 메우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보여준 것과 같은 많은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며, 부활하신 주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도 전해준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예루살렘의 첫 번째 신자 공동체의 삶과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감동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교회의 첫 신자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고, 자기 재산을 내놓고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 가운데 아무도 가난한 이들이 없었다(2, 44-45, 4, 32-35)고 전한다.


사도행전의 이러한 이야기가 얼마나 역사적 신빙성이 있는지 또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공동체가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이러한 이상은 20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계속해서 교회 공동체의 모델로서 또한 교회 공동체의 이상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도 교회의 이러한 이상은 지금 우리에겐 불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사실 초대 교회처럼 모든 생활을 다 내어놓고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면 수도자들 말고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동시에, 초대 교회의 이상을 지향하면서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를 조직해낼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 삶과 사회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예로서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좋은 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 하나만 들자면, 소득에 비례해서 보험료를 내고 필요에 따라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소득에 비례해서 보험료를 내기에 소득의 재분배 효과가 있다. 또한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어르신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 전체의 사회적 연대가 아주 작은 영역에서나마 이루어지는 셈이다. 더욱이 이러한 혜택이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모든 병의원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니 사실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이 그리스도교적 이상과 가치관에서 출발해서 만들어진 정책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사도 교회의 이상을 어느 정도 실현하게 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적 이상과 가치에 맞는 정책을 만들고 증진하는 방식으로 우리 삶과 우리 사회를 조직해내는 일, 바로 이것이 사회교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의 사회회칙 <새로운 사태>에서부터 시작해서 교회는 여러 다양한 정책과 제도를 제안하고 있다. 그 대부분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국가보조와 사회보장에 대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안들이 유럽의 복지정책의 윤리적 기초가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사회교리는 그리스도교의 이상과 구체적인 정치경제 현실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3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가정이 없는 가정의 달


여러분의 가족은 안녕한가요?


5월은 성모성월이자 가정의 달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회교리는 가정이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가 가정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면, 가정이 없는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령화, 저출산, 이혼율 증가에 따른 편부 편모 혹은 조손 가정의 증가, 1인 가구, 특히 노인층에서의 1인 가구 증가와 같은 문제들이 우리 가정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회가 가정을 위해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숫자일 뿐인 경제지표를 끌어올리기 위해 가정을 희생시키는 사회구조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개선되지 않는 노동문제와 그를 쫓아가는 교육문제로 인해서 여전히 학생들과 청년들은 경쟁으로만 내몰립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고유함과 존엄성을 생각하고 실천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회 안전망도 없는 상황에서 취업전쟁에 내몰리고, 그나마 구한 직장으로는 자녀를 양육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자연히 극심한 저출산으로 이어집니다. 단지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자녀를 생각하면, 하나를 키워보면 더 낳기가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연구발표에 따르면 지금 추세로 가면 한국은 2300년에 세계 최초로 인구소멸국가가 된다고 합니다.


사회적인 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은 더욱 부족하고, 사람들은 내적인 공허함을 느낍니다. 가정에서 위로를 받고자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사소한 의견 차이도 대화를 통해 풀어갈 능력이 없는 채로, 혼인과 가정에 대한 준비가 없는 채로 혼인했기에 이혼율은 높아만 갑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배우자를 원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시간에 쫓겨서, 등 떠밀리다시피 한 혼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아이들이 받습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구조에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은 스마트폰과 컴퓨터 게임, 혹은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영상들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힘이 부칩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손자녀들을 돌보고 용돈을 받기도 하지만 힘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나마 돌볼 자녀라도 있는 노인들은 행복합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단칸방에서 하루 종일 폐지를 모으며 힘들게 살다가 고독사하는 노인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사회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하고, 정부와 정책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사회교리는 이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만드신 공동체,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인간이 이루도록 허락하신 첫 공동체인 가정과 그 안에서 하느님 모상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존엄한 소명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며 한숨을 쉬고, 청년들과 노인들을 바라보며 걱정만 하는 것은 신앙인이 할 일이 아닙니다. 걱정하고 기도한 만큼 이제 우리 신앙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도록 행동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다음 가정의 달에는 조금 더 가정의 자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10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이윤과 사회적 책무


기업의 소유주는 누구인가?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대한항공 승무원이 대한항공과 조현아 전 부사장에 대해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로열패밀리’인 조 전 부사장이 탑승하기 전 특별 서비스 교육을 받았고, 그런 교육에는 조 전 부사장에게 사용하면 안 되는 언어와 기내 환경음악 볼륨, 수프의 최적온도, 수하물 보관방법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한항공 쪽에서는 특정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등석 승객을 위한 맞춤서비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 문화와 조직 문화에서 볼 때 충분히 있을만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실제로 우리나라 재벌 회사에서는 창업주와 그들의 2, 3세에 이르는 일가족 경영인들을 모두 오너(owner)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이 기업의 “주인”이고, 그들이 그들 기업에서 가지는 결정권은 제약이 없는 듯하다. 그러니 그들에게 기업은 자신의 것이고, 그들의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기업이 가지는 이러한 문화를 이해한다면, 조 전 부사장을 비롯한 일가족을 위한 ‘로열패밀리 매뉴얼’이 없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본다면, 한국의 재벌 기업에 있어서 창업주 일가족 경영인들에게 오너라는 명칭이 정당한지 의문이다. 실제 우리나라의 재벌 총수 일가가 가지는 주식지분은 사실상 5%도 되지 않는다. 5%도 되지 않는 지분을 가지고 기업과 기업 집단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벌 2, 3세 중 한 명이 회사에 취직한 후 몇 년이 지나지 않고서 회사 임원이 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정의롭지도 않고 효율적인 기업 경영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이렇게 5% 미만의 지분을 가지는 총수 일가를 소유주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일뿐더러, 주식회사라는 회사형태를 보더라도 ‘오너’라는 명칭은 정당하지 않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주식회사라고 부르는 회사 형태는 17세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식민지 무역을 위해 국왕의 특허를 얻어 설립된 ‘동인도회사’ 또는 ‘남해회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회사의 사업 규모는 엄청나게 커서 필요한 자본을 모으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던 반면, 사업 자체는 언제나 큰 위험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 이 모든 사업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고 회사를 운영할 수 없었지만, 식민지 무역을 계속해야 하는 국가의 특허를 얻어 유한책임의 원칙으로 자본을 모집하고, 투자자들이 유한한 책임을 지도록 허가를 받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회사의 형태에서는 오늘날 총수와 같은 소유주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소유주가 없는 회사 형태에서 오너를 호명하고, 오너에게 모든 결정권을 맡기며, 그들을 위한 온갖 제도와 관행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재벌 기업의 문화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 서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건강한 시장 경제를 좀먹고, 비효율적인 기업 문화를 만드는 주범이다.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이윤을 부정하지 않지만 기업이 사회적 책무를 무시하고 이윤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지 않지만 사유재산권이 사회적 기능을 넘어서지 않도록 사유재산의 권리에는 규제가 필요(간추린 사회교리, 177항)하다고 가르친다. 당장에 우리나라의 건강한 시장 경제를 무너뜨리고, 이른바 ‘갑’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재벌의 오너들에게 적절한 규제가 필요할 때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17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연대와 공생


하나되어 화합해야 할 오늘날 신앙인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사도행전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 날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다른 민족들에게 모범이 되었던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사도 2,42-27 참조)


오는 5월 29일은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교황님과 함께했던 지난 시복미사의 감동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순교자들의 삶을, 그들이 살았던 신앙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전 세계에 유래가 없는, 선교사 없이 스스로 복음의 씨앗을 싹틔운 교회입니다. 그 계기는 조국과 사회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당시 혼란스러운 조선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학이라고 불리는 천주학, 천주교 교리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신앙과 복음에서 무엇이 국가와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인지를 찾은 것입니다.


성령 강림 때 초대교회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선조들도 가진 것을 서로 나눴습니다. 기회가 허락하는 대로 모여서 성경을 읽고, 사제를 만나 고해성사와 미사에 참례하기를 애타게 바랐습니다. 양반과 평민, 천민의 구분 없이 참 형제요, 자매로 지냈습니다.


124위 복자 중 황일광 시몬 복자는 천민 출신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신자들의 모임에 갔을 때 당대의 석학이었던 양반들이 그의 옷소매를 끌어서 마루 위로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천민은 감히 양반들과 같은 자리에 오를 수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황일광 시몬은 어리둥절했습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천주교회는 이 땅에 들어올 때부터 조상제사라는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념과 충돌했고,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였던 신분제도와 충돌했습니다. 왕족에서부터 양반, 평민, 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교우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제들은 교우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교우들은 사제를 대신해 잡혀갔던 선조들이었습니다.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치 안에서, 한 분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고, 한 분 스승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삶으로 살아낸 선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진보라는 이름으로 형제 자매를, 심지어 주교까지도 신앙인도 아니라고 비난하는 수도자와 신자들, 보수라는 이름으로 형제 자매는 물론이고 주교와 사제까지 반미, 종북이라며 매도하는 이들로 갈라져 있습니다. 사제들과 신자들 중에는 아직도 하느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를 분리시키려 하고, 이 세상의 가치와 이념, 나라를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 위에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신분의 차이가 신자들 서로를 참 형제 자매로 부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도 천국을 미리 맛보지 못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과 이 땅의 순교자들은 신앙이 저 세상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사회, 우리나라의 부조리를 복음으로 밝히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인으로서 사회교리를 배우고 실천하고자 한다면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일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24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부패와 민주주의


정치적 부패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가 우리나라 정치와 민주주의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자유선진당과 새누리당으로 옮겨 다니며 국회의원을 했던 성완종 경남기업 대표가 지난 정권의 자원외교 비리에 관한 수사에 반발하며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메모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 메모에는 현 정권 실세 정치인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고, 죽기 직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들에게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건넨 것으로 언급했다. 이 문제로 사퇴한 총리와 경남도지사는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나머지 정권 실세들에게까지 수사가 확대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러한 비리와 부패 앞에서 우리가 함께 성찰해봐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기업의 비자금 문제이다. 개인기업도 아니고 주식회사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이 비자금으로 조성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노동자들의 합당한 권리 요구에는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손해배상소송 등을 통해 탄압하는 기업들이 이렇게도 쉽게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기도 하다. 만일 유럽처럼 노동자 대표들이 주식회사 이사회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기업의 회계를 감시할 수 있다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도 가톨릭 사회교리가 꾸준히 가르쳐오는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노동하는 인간 14항)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둘째로, 경남기업에서 나간 돈이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가서 망해가는 기업의 재무 개선(work out) 특혜로 되돌아왔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가는 자금은 대개 특정 기업의 특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기업이 더 많은 노력과 연구개발 그리고 창의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로비와 접대로 기업을 유지할 때, 그 경제가 튼튼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이런 식의 정치와 경제의 유착 구조는 건강한 시장경제를 무너뜨린다. 더 나가서 이러한 부패는 국가의 올바른 통치를 위협하고, 국회와 같은 대의기구의 결정을 가진 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전락시킨다. 그래서 법과 제도 자체가 이미 가진 자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지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게 되어버린다. 그럼으로써 정치적 부패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공동선에 걸림돌이 되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결과는 낳게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410-412항).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많은 사람이 정치란 원래 더러운 것이고, 또 정치인은 “그놈이 그놈”인지라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도 정치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마치 더 깨끗한 것이고 바람직한 신앙인의 자세인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자세와 태도야말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더욱 부패하게 하고, 그 폐해가 고스란히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오게끔 하는 것이다. 사회교리가 말하는 참여의 원리는 선거와 투표에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라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공동체 전체의 일에 계속적으로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것, 그리고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사람과 정치권을 꾸준히 감시하고 감독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정치적 부패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주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건강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노동자와 서민의 삶이 힘들어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건강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후퇴하기 때문이다. 더러운 일이라고 치부하고 물러설 일이 아니라 우리들의 더 많은 관심과 감시가 필요하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31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사제직의 본분


그리스도의 심장과 고동을 같이하며


오는 6월 12일 금요일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은 신자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완벽해서 존경과 지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사제직에 대해 걸고 있는 변함없는 기대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물론 다른 모습도 보입니다. 신자들이 사제를 심지어 주교까지 종북, 정치사제라며 손가락질 하고, 또 다른 신자들은 사제와 주교들이 사회참여에 대한 의무를 저버렸다며 존경과 지지를 철회하자고, 자발적으로 냉담하자고 외칩니다. 사제직의 본질적인 사명보다, 강론 때 정치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길거리에서 미사를 하는 것이 합당한지와 같은 현상적인 문제를 더 많이 이야기하면서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중심으로 남을 손가락질하지는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사제직의 본질은 무엇보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위해, 나아가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 있습니다.(「현대의 사제양성」 16항 참조) 신앙은,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은 개인 신심이나 교회 안의 예식 차원에만 국한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구원은 교회와 가정, 학교, 일터에서 살아가는 인간 전체의 구원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국가의 정치문제에 간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권리로 인간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정당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38-40항 참조)


사회 안에서 복음을 실천하고, 그 복음의 빛으로 사회를 복음화 하는 노력은 누구보다 먼저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평신도의 몫입니다.(「복음의 기쁨」 102항 참조) 사제는 평신도들이 이러한 역할을 하는 신앙인으로 자라도록 그들을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고, 사회 분야에서의 사목활동의 본질과 방식, 연결 발전을 결정짓는 필수적인 근거인 사회교리를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제직의 본질에서부터 솟아나야 합니다. 바로 온 교회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 마음, 예수님의 성심을 닮은 마음에서부터 솟아나야 합니다. 아무리 현실적인 필요가 급박하다 하더라도, 눈앞의 고통이 크다 하더라도 이러한 사제직의 본질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또 다른 의미의 세속주의가 사제직 안에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공공연하게 신앙과 세상에 대한 참여를 분리시키면서, 신앙을 세상의 기호품처럼 만들어버리는 세속주의는 큰 문제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가장 본질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만의 정의와 논리에 우리에게 전해진 신앙을 종속시키는 세속주의도 경계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 때문에 우리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복음의 기쁨」 98항 참조).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모든 사제들이 자신들의 본질적인 사명을 다시 깨닫고, 교회와 세상을 향한 봉사에 충실할 수 있도록, 사회교리를 배우고 마음에 새겨서 신자 공동체와 함께 앞장서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참된 선교사가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는 사제들에게 넓은 마음을 주소서. 어떠한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끝까지 항구하며 그리스도의 심장과 고동을 같이하고 겸손과 충실과 용기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거기서 유일한 행복을 찾는 넓고 강한 마음을 주소서. 아멘.”(복자 바오로 6세 교황)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6월 7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정치 공동체의 역할


공동선 실현 위한 경제정책 마련해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의 영역들을 크게 나누어 보면 정치와 경제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주식이나 펀드를 해본 적도 없고 신문의 경제 기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시장 경제 한 가운데서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정치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정치의 한 가운데 살아간다. 세속적인 영역이라고 외면하더라도 우리는 정치와 경제를 벗어나서 살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영역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신앙의 가르침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우리는 경제 영역 안에서 이마에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고, 바로 그 노동의 대가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한다. 사실 우리가 경제라고 번역하는 ‘economy’라는 말은 옛 그리스 말에서 ‘집’ 또는 ‘살림살이’를 뜻하는 ‘oikos’에서 나왔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얻은 것은 자신과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런 뜻에서 가톨릭 사회교리는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는 인간의 자연적 권리라고 천명한다.


그러나 경제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 이익추구의 자리이기도 하다. 개인도 그러하고 집단도 그러하다. 특히나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이다. 물론 많은 기업가들 중에서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윤리적 경영을 하거나, 또는 사회적 필요를 위해 투자를 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기업과 경제가 이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 추구이다 보니 그 목적을 향해 달려가다 보면 관성의 법칙 때문에 이윤 추구가 탐욕으로 쉽게 변한다. 이윤 추구를 위해 노동자를 착취할 수도 있고, 비용 절감을 위해 환경을 해칠 수도 있으며, 안전하지 못한 작업환경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좀 더 정의롭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과 이익 추구가 탐욕으로 변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규제를 가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사회교리는 “사유 재산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재산권을 규제할 필요”(간추린 사회교리 177항)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기업의 이윤추구가 탐욕으로 변하지 않도록 누가 통제해야 하나? 즉, 사유 재산권에 대한 규제를 누가 할 것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정치 공동체이다. 국가는 기업이 시장 안에서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여 이윤추구를 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되지만, 각종 법률과 규제와 점검을 통해서 기업의 이윤 추구가 탐욕으로 변하지 않도록 통제해야 한다. 그래서 기업이 이윤 추구는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범위 안에서, 생태와 환경에 큰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지역 주민과 청소년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의 존엄과 권리를 박탈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도록 국가가 계속해서 감시하고 통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국가가 사회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시장을 조절하고 통제해야 한다(요한 바오로 2세 「백주년」 35항)는 것이 가톨릭교회 사회교리의 중요한 뼈대이다.


국가와 정치가 이러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민들이 가난하다. 온갖 경제법칙과 좋지 않은 경기를 내세워 변명하더라도, 가장 기본적으로는 정치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경제정책을 무너뜨리고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계 10위권의 부자나라 대한민국에서 대다수 서민이 가난한 이유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더 발전하고 성숙하도록 우리가 깨어있어야 한다. 좋은 정치가 우리의 삶을 좋게 만든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6월 14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해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이름을 짓습니다. 이 아이가 이렇게 자랐으면 좋겠다하는 바람을 담아 이름을 짓고, 아이의 앞날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름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고,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라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부르는 게 맞습니까? 아니면 남한과 북한으로 부르는 게 맞습니까? 아니면 북괴라던가 미국의 식민지라고 불러야 합니까?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부른다면 이 둘을 독립된 정부로 인정하고, 고유한 통치이념을 가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일 겁니다. 이러한 인정이 있을 때라야 서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으로 부른다면 이 둘이 하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분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 하나가 되려고 한다는 사실도 말해줍니다. 이러한 생각을 해야 우리가 서로 다시 하나 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북괴라던가 미국의 앞잡이라던가 하는 이름도 있습니다. 이 표현은 서로를 적으로 대하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생각,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이름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신학생 때에 저와 동기들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새터민 청소년 공동체를 알게 되어 새터민 아이들의 검정고시 공부를 도와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이 아이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했을까요? 새터민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탈북자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그 아이들에게는 아이들 자신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이름으로 그 아이들을 불러주는 것, 그 아이들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일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그 학생이 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아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그 아이에게 어떤 딱지를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시작할 때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날을 정하고 기도한다고 해서 잘못된 이념을 인정하자거나, 아파하는 이들의 아픔을 덮자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공산주의의 유물론은 가톨릭신앙과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공산주의라고조차 말할 수 없이 세습화된 북한의 정권이나 과거 그들이 한 잘못은 분명 비난 받아야 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전쟁의 아픈 기억은 분명 모두가 잊지 말고 되새겨야 하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러한 모든 이름 붙이기는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기 위해서, 일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6월 25일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날이 있는 주간을 보내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인들이 앞장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며, 적대 세력 간의 균형 유지로 격하될 수도 없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78항.) “그보다 평화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질서의 확립을 요구한다.”(「간추린 사회교리」, 494항.)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6월 21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정보와 민주주의


가난한 사람들 배려하는 시각 갖춰야


‘서울시는 메르스와 싸우고, 정부는 괴담과 싸운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그도 그럴 것이 정부와 청와대의 메르스 대책에는 어김없이 유언비어와 괴담을 유포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가 공개한 메르스 발병 병원에는 인터넷 사용들이 지목한 병원도 몇 개 포함되어 있으니 완전한 유언비어라고 할 수만은 없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공개하지 않다가 뒤늦게야 여론에 밀려서 공개한 정부의 탓도 적지 않다. 결국 정부가 제때에 정보를 공개하고, 제대로 대응했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언비어와 괴담의 진원지가 우리 정부의 비밀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와 핵발전소 문제를 비롯해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현안에 대해서 제대로 된 사회적 숙의보다는 이런저런 소모적인 논쟁들이 사실은 정부의 비밀주의와 전문가 중심주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정보가 시민들에게 ‘제대로’ 제공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올바르게’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나 대중매체의 경우, 이데올로기적 편향이나 권력의 압력에서 자유롭기도 힘들고, 거대 자본과 기업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기도 힘들 수밖에 없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언론이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기 힘들다는 말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이번 메르스 감염과 관련하여 감염 병원을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던 정부가 삼성병원의 눈치를 본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광고주 대기업의 눈치 때문에 해당 기업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 힘들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시민들에게 제대로 공개되지 않고 또 올바르게 제공되지 않는 정보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시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상황과 현실들, 제시된 문제 해결책을 모르고서는 제대로 된 참여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그러므로 복잡한 사회생활 영역에서 정보와 의사소통을 위한 여러 형태의 도구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면서 실질적인 다원주의를 보장하고, 적절한 법률을 통해서 이들 도구를 공평하게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간추린 사회교리 414항)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더불어 시민들에게 제공되는 정보가 이데올로기적 편향이나 특정 이익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해서는 안 되고 공동체의 공동선을 향해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416항 참조)는 것 역시 명백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섬세한 식별의 능력이 요구된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정보 가운데 올바른 정보를 가려내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난한 사람들의 눈’이다. 성장이나 발전 등 우리의 물질적 욕망을 충동하는 정보는 의심해봐야 한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관점, 그래서 인간과 노동의 존엄을 기초로 하는 정보야말로 공동선을 위한 정보라고 볼 수 있다.


식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비판과 참여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르지 않고 왜곡된 정보에 대해서는 계속적으로 비판하고 감시해야 한다. 그것이 정부이던 언론매체이던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시민들이 공동체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참여 없이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루기는 힘들다. 또한 공동체의 일에 공동선의 정신으로 참여하라는 것이 사회교리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래서 올바른 정보를 요구하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 시민의 자질이기도 하지만,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이기도 하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6월 28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이기적인 시선과 행동


메르스(MERS)보다 무서운 것


온 나라가 메르스라는 중동호흡기증후군 때문에 한바탕 난리를 겪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각종 모임과 행사가 취소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많은 본당들이 시니어 아카데미 휴교와 조기방학을 결정하고, 주일학교 행사를 취소했습니다. 물론 이런 때에 모두가 함께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이를 통해서 다른 것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와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정부의 대처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회교리에서 정치공동체의 토대와 목적은 인간(「사목헌장」 25항)이라고 가르칩니다. 정치공동체는 자신의 토대와 목적인 인간에 봉사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이미 수차례 지적되었지만, 초기 정부의 미흡한 대처와 국민에게 안겨준 실망감에 대해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안이 있을 때에만 흥분하고, 정작 선거와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의 순간에 이를 잊어버린다면 이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사회교리는 정치공동체가 올바로 기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참여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이 선택을 내리는데 있어서 신앙인으로서 복음적인 시각을 갖도록 가르칩니다.


다음은 이러한 복음적인 시각을 기르고, 복음적인 선택을 도와주어야 하는 정보의 부재입니다. 초기에 정부의 미흡한 대응과 정부 관계자들의 실망스런 모습은 국민들의 불안을 가중시켰습니다. 불안이 컸던 것은 내가 메르스인지 의심된다 하여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에서 분류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질병을 전염시키지 않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론의 중요한 역할에는 이러한 정보를 올바로 전달하는 것과 그에 대한 대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그를 비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은 국민의 불안감만 가중시키고, 국민의 알 권리를 충분히 보장해주지 못했습니다.


사회교리를 단지 구호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삶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메르스 앞에서 손을 씻고 입을 가리는 나는 얼마나 나의 죄에서 손을 씻는지, 나의 신앙을 해치고 나를 이기적으로 만드는 무관심과 욕심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경계하는지 말입니다. 나는 얼마나 아파하는 이들의 존엄성을 걱정했고, 진심으로 그들과 연대했는지, 그들의 존엄성을 보장해주는 공동선이 커지도록 어떤 선택을 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나만 안 걸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지하철에서 누가 기침이라도 하면 눈을 찌푸리고, 이 상황을 핑계로 그동안 귀찮았던 일을 미루고 형제자매들과의 연대를 잊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메르스라는 사안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단면과 나 자신의 한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회교리의 원리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 존엄성의 원리, 공동선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 참여와 실천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사회와 정부가 이 사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는 저 원리들을 지켰는지 반드시 각자가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메르스로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의 쾌유를 위해, 질병과 싸우는 의료진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이 기억을 사회교리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다음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7월 5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국가와 정부의 역할


메르스 사태로 본 공동선


메르스(중동 호흡기 증후군) 감염 사태가 끝나지 않고 있다. 이 사태의 원인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방역당국과 정부의 초기대응 실패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초기 대응 실패의 가장 큰 부분은 역시나 감염 병원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점이다. 우리 정부의 비밀주의와 의사결정구조에 큰 문제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초기 대응 이후의 감염 확산에 대해서는 공공의료의 부족이 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 우리나라의 공공의료기관은 3671곳으로 전국 의료기관의 5.7% 밖에 되지 않는다. 그마저 3500여 곳은 보건소이고, 실제 공공의료기관은 200곳 남짓의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메르스와 같은 감염병 환자를 위한 음압 격리병실은 184개에 불과하다. 메르스 감염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국내 최고의 삼성서울병원에는 정식 음압병상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보잘것없는 공공의료가 지난 정권과 이번 정권에서 빠른 속도로 후퇴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정부부터 계속해서 의료 민영화가 추진되고 있으며, 이번 정부에서는 경남의 진주의료원이 강제 폐업됐다. 바로 이러한 공공의료의 후퇴와 부족이 메르스 확산의 주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반대로, 의료를 비롯해서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사회공공성을 강화하자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개념이 바로 ‘공동선’이다.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이 밝히고 있듯이, 공동선이란 “인간이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이고, 이러한 조건들은 기본적인 의식주, 적절한 교육의 혜택, 필요한 의료 혜택, 노동에 대한 권리,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포함한 종교의 자유 등이라고 규정한다(사목헌장 26항). 이러한 조건들은 인간이라면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고,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제공받아야 한다. 따라서 공동선의 원리를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언어로 바꾸어보자면, 사회공공성과 보편적 복지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공동선을 증진하는 것은 정치공동체의 1차적인 의무이다. 특히 국가와 정부는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정당화되고 그 의의를 발견하며, 공동선에서 비로소 고유의 권리를 얻게 된다.”(사목헌장 74항)


이러한 공동선의 원리는 창조의 신비에 바탕하고 있다. 창조의 시간에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의 재화를 인간에게 주셨다. 단지 아담과 이브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주셨다. 모든 인간이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인간이고, 빈부나 피부색을 초월하는 인간이다. 이를 가톨릭 사회교리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 원리’라고 한다. 하느님의 창조에 기인하는 지상 재화는 모든 인간에게, 즉 보편적인 목적으로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효율성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의료나 교육, 노동과 주거와 같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조건들조차 시장에 내어놓고 상품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되도록 인간에게 필수적인 조건조차도 영리법인화(민영화)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지점에 메르스 감염의 확산이 자리 잡고 있다.


메르스 사태를 보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보다는 사회 공공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가는 길이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지키는 신앙의 길이기도 하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7월 12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혼인의 본질


동성애, 다른 것일까? 틀린 것일까?


최근 미국 연방 대법원의 동성애에 대한 판결이 인터넷과 신문기사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SNS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프로필에 동성애를 뜻하는 무지개 색상을 넣은 사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동성애 지지자들도 지난 6월 28일 서울광장에서 퀴어 문화 축제를 열었습니다.


이미 동성 간의 혼인 예식을 허용하고 있는 미국 그리스도 연합교회(UCC)와 미국 장로교 두 개신교단에 이어, 미국 성공회도 지난 7월 1일 동성 커플에 대한 결혼예식을 허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면서 혼인 예식과 교회법에서 남편과 아내라는 표현대신 ‘커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특정 성(性)에 관련된 용어를 삭제했습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은 이러한 흐름이 진보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가톨릭교회도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짧은 지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모든 내용을 다룰 수도, 모두가 수긍할만한 답변을 내어 놓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는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교회의 가르침을 간단히 짚어보면 좋겠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성(性)을 이해할 때, 결코 생명과 분리시켜서 이해하지 않습니다. 부부 간의 사랑은 성관계를 통해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부 관계 밖에서의 모든 성행위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하는 자위행위나 생명에 대한 책임감 없이 행해지는 비 배우자 간의 성관계, 혼전 성관계, 매매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동성 간의 성행위 또한 생명을 지향하지 않기 때문에 동성 간의 성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 동성애 성향을 가진 이들 자체나 그들의 모든 행위를 단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로, 이 일이 동성결합이 합법인지 불법인지, 이에 대해 지지할 것인지 반대할 것인지와 같은 피상적인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인 교회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받아들입니다. 답답해 보일 때도 있지만, 분명 교회는 오래전부터 그들을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가정의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가정과 관련된 다른 문제들과 함께 혼인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이고, 가정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반성이 있을 때라야, 이 모든 논의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이 일을 통해 신앙과 실천,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미국 성공회나 개신교에서 보여준 것처럼 단순히 사회 분위기와 다수결로 결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만의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더 주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굳어버리고 교조화 된 신앙은 우리의 현실, 실천과 유리되기 쉽습니다. 무엇이 우리 신앙의 본질인지, 그것을 이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를 철저하게,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이를 해결하는 열쇠는 십자가입니다. 서로 상대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으로 끝낼 수도 있고, 각자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복음의 길을 따라가 부활이라는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보다 치열하게 고민하는 신앙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7월 19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불경기 이겨내기


물질주의 · 소비주의 유혹 물리쳐라


불경기 또는 불황이 계속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최고의 불경기라고 한숨이 가득하다. 이리 저리 돌아봐도 사람들의 얼굴엔 활기가 느껴지지 않고, 모두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종편 방송들은 메르스 사태 때문에, 더 멀리는 세월호 참사 때문에 이런 불경기가 계속 되는 것처럼 호도하지만 틀린 말이다. 불경기 또는 불황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피할 수 없는 흐름과도 같은 것이다. 이 흐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수출 위주, 대기업 위주, 부자 위주의 경제 정책을 써온 정책당국의 탓이라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불황 속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최근의 경제 지표들을 보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는 더욱 변두리로 내몰리는 형국이다. 예를 들면, 최근의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 지수는 30여 개 선진국 그룹 가운데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멕시코와 비슷한 지경이다. 올해 초 보건사회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빈곤 탈출률이 22%로서 최근 10년 사이에 최저치라고 한다. 빈곤 탈출률은 말 그대로 가난에서부터 벗어나는 비율을 뜻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5명 중 1명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통계가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의 처지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말이다. 부과 권력이 세습되는 만큼, 그 반대에는 가난 역시 세습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남미의 자본주의 모습으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디를 가나 물질재화는 넘쳐나고 있지만, 나눔과 분배의 구조가 잘못된 탓에 많은 이들이 변두리로 몰려나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로또를 기대하거나, 주식 대박은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노동자가 될 것이면서, 내 자녀에게만은 노동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거나 기대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노동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이 더 좋은 조건에서 일하도록 우리의 제도와 법을 바꾸는 것이고, 나만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하기보다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에서 탈출하도록 여러 가지 복지 정책들을 정비하고 고쳐나가는 길이다. 나 홀로 계층사다리를 오르기 보다는 우리 모두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고 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빈곤의 원인이 개인의 게으름이거나 윤리적 나태 때문이 아니라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는 사회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원인에 맞는 처방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 역사 상 최초의 사회회칙이었던 1891년 레오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가 오늘날 우리와 비슷한 조건과 상황에서 나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최고 목자의 처방은 노동의 존엄을 회복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존중하며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보장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레오 교황의 노동에 대한 가르침은 120여 년을 지난 오늘까지도 유효한 사회교리의 가장 큰 기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덧붙인다면, 오래된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과 태도 역시 바뀌어야할 것이다.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들은 더 많은 물건을 팔기 위해 사람들의 욕망을 충동한다. 자동차를 사는 것은 이미 그것에 결부된 환상(fantasy)을 사는 것이며, 좋은 아파트를 사는 것은 이미지를 사는 것일 뿐이다.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의 유혹에서 해방되어, 소비와 소유를 줄이는 것은 오랜 불황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이다. 스스로 물질에서부터 거리를 두고, 불편함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불황 극복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비와 소유에서 해방되는 길은 그리스도교의 깊은 영성으로 되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26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높아만가는 취업 문턱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청년 교사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주년을 기념하는 2015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부터 2016년 11월 20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까지를 자비의 특별희년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우리 교회 안에서 새롭게 하자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Gravissimum Educationis)에서 교회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지상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재확인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교육의 진보와 확대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별히 가톨릭 학교와 관련하여서는 “가톨릭 학교의 고유한 사명은 자유와 사랑의 복음 정신으로 활력에 넘치는 학교 공동체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 모든 인간 문화를 궁극적으로 구원의 소식과 결부시키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대부분이 대학생이자 청년인 각 본당의 주일학교 교사들을 생각해보면 한숨부터 나옵니다. 이미 4년제 대학의 1학년부터 학생들은 두꺼운 파일에 자기소개서와 각종 자격증 혹은 공무원 시험정보를 들고 다닙니다. 대학교 방학 프로그램으로 기업탐방을 다니면서 매일 다른 기업에 가서, 어떤 기업이 돈을 더 많이 주는지, 내가 무슨 스펙을 더 쌓아야 하는지를 고민합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자격증과 입사시험을 위한 사교육은 끝나지 않습니다. 늘어가는 학비부담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해야 합니다. 돈을 주고 자기소개서를 대필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기업에서 실시하는 직무 적성검사에서도, 솔직하게 답을 하기보다 합격하기 위해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학원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대학교도 취업학원으로 변해가는 요즘, 가톨릭 학교조차 사회의 분위기만 따라가고 있을 뿐, 자유와 사랑의 복음 정신은 찾기 힘듭니다.


이런 사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 뒤처지기로 결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름행사 준비를 위해 아르바이트 하는 시간도 포기하고, 자격증과 시험공부를 할 시간도 없고, 시험은 물론 기업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교사를 하면서 느꼈던 체험을 담은 담백한 자기소개서는 전문적인 글쟁이들에게서 받아온 대필 자기소개서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적성검사마저 찍어주는 학원이 있는지도 모르고, 다닐 돈도 없고 그저 솔직하게 직무 적성평가에 응했더니 돌아오는 답은 낙방입니다.


이 모든 것은 누구 한 사람이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교회와 기업, 대학교와 정치권 모두의 잘못된 선택으로 생긴 결과입니다. 이런 구조에서 교회의 미래라고 말하는 청년들은 신앙을 배우고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청년인 주일학교 교사들로부터 신앙교육을 받는 우리의 청소년들의 신앙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세속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가톨릭학교와 교회가 고용인으로 있는 일터, 신자 기업인이 소유한 기업부터 무엇을 기준으로 인재를 채용하는지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운영하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의 분위기를 따라 살지 않고, 우리부터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들과 그들을 가르치는 청년 교사들을 위해서 반성하고 고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8월 2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성경의 안식일과 희년


불평등 해소 · 정의 사회를 위한 시간


“물신숭배는 악마의 배설물이다.”


지난 7월 초 남미를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시 한 번 분명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얼굴을 가진 경제 모델’을 촉구했다. 많은 이들, 특히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나 우리나라의 보수 인사들은 교황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식으로 비난하지만, 교황은 거침없이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고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있다.


교황의 행보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이 아니며, 교회의 전통 안에서 볼 때도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신앙인들의 실천은 이를 증명한다. 무엇보다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이 그러하다.


이미 시작부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했고, 가난한 이들을 편드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구약성서 안에서 드러나는 신앙인들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는 안식일과 희년이라는 종교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제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복음서의 여러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 율법에 맞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안식일 율법을 없애시려는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 사람들의 형식주의를 배격하신 것이었다. 안식일 규정을 부자와 권력자들만 지킬 수 있게끔 풀이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뒤집어 놓은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오히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마르코 2,27)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실제로 안식일 정신의 근간은 휴식과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노예와 여성이 노동을 담당하고 있던 사회에서 7일 중의 하루를 일을 중단하고 쉬어야 한다는 것은 인권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7년 중에 1년을 쉬는 안식년은 안식일의 확장이다. 안식년에는 사람과 가축만 쉬는 것이 아니라 땅도 쉬어야 한다. 6년 동안 농사지은 땅에는 농사를 짓지 않고 놀리는 것이다. 사람만 쉬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물이 쉬어야 하고, 온 생태계가 창조의 시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더 나아가서 안식년을 일곱 번 보내고 난 다음 해, 그러니까 50년마다 이스라엘 민족은 희년을 지냈다. 희년에는 노예들을 풀어주어야 하고, 빚을 탕감해주어야 했다. 50년 동안 토지와 재산의 불균형을 다시 원상회복시켜야만 했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와서 12지파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준 그 상태의 재산으로 되돌아가는 해가 바로 희년이었다.


희년은 가난과 불평등이 한 세대를 뛰어넘지 못하게 한 규정이었다. 루카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을 주님의 희년을 선포(루카 4,16)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 시작했다.


안식일·안식년·희년의 정신은 하느님이 빚으신 참다운 인간과 우주를 회복하는 것이다. 불평등을 없애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것이다. 그것의 선포를 예수님은 당신 사명으로 받아들이셨다. 오늘의 교황 역시 이를 선포하는 것이다. 가난과 불평등은 경제 자체에서 나오기 보다는 부자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법에서 나온다. 안식일의 법은 그것을 뒤집는 것이다. 안식일과 희년의 규정은 하느님께서 거저 베풀어 주신 구원 사건이 정의와 사회적 연대의 원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과 안식년, 희년의 규정은 축소된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25항)라고 말할 수 있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8월 9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광복의 기쁨


빛을 되찾다(光復)


지난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광복 70주년의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는 와중에 우리는 지난 70년 간 풀지 못한 숙제의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국내 갈등의 잠재적 요소로 남아있는 친일세력 청산 문제는 물론이고, 위안부를 비롯해 일본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보상문제, 역사왜곡, 독도문제와 같은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광복의 기쁨과 함께 시작된 분단의 상처, 북방한계선과 같은 여러 정치적, 군사적 문제들은 분명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광복이라는 한자어를 글자 그대로 보면, ‘빛을 되찾는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에게 빛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부활성야 전례에서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노래하며 그분의 부활, 빛을 되찾음을 경축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부활찬송에서 노래하듯이, 이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짙은 어둠을, 우리 안에 뿌리깊이 자리잡은 죄와 그 상처를 마주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빛은 바로 그 어둠 속에 비추고, 그 어둠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의 광복을 이야기할 때에도 단순히 일본의 강점과 그에 따른 어두운 상황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어둠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광복이라는 기쁨은 우리의 임시정부가 독립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그래서 전후 보상과 영토 문제, 친일세력 청산의 문제에 있어서 당당한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어둠을 안고 있습니다. 청구권자금이라는 형태로 과거 우리가 겪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당장 급한 눈앞의 자금 지원을 위해 국민의 아픔을 외면한 정치인들의 행동, 냉전시대에 한일관계를 적당히 봉합하여 자유진영의 최전방으로 삼고자 했던 강대국들의 움직임이라는 어둠도 분명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수많은 피를 흘리고도 정전협정의 협상테이블에 주체로 앉을 수 없었던 우리의 모습을, 그 과정에서 정전협정과 북방한계선 설정 자체가 갖고 있는 분명한 모순도 직면해야 합니다. 정전협정에서 해상의 군사분계선은 설정되어 있지 않았고, 후에 쌍방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설정되었습니다. 당시 해상군사력이 없던 북한은 이에 대해 명시적인 인정도 거부도 하지 않았다가 오늘날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연평해전과 같은 참사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지만, 우리가 주체가 되지도 못하고 맺은 협정과 그 이후 역사적 현실의 어둠은 솔직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회교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과정은 ‘관찰’, ‘판단’, ‘실천’의 세 단계를 거칩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아전인수격의 역사해석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현대사가 안고 있는 아픔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관찰). 이를 분열과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말고 십자가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비추어야 합니다(판단). 세상의 판단에 휘둘리지 말고 이 어둠에 작은 불빛을 밝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실천). 특히 올바른 현실인식(관찰)이 있을 때에 사회교리를 통해 올바른 신앙의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우리가 우리 어둠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여 진정한 빛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김성수 신부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8월 16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텔레비전에서 해방되기


대중매체 꼼꼼하게 따져보자


어느 연구조사기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령 인구의 대부분이 여가시간의 대부분을 텔레비전을 보면서 보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더욱이 텔레비전 시청의 대부분은 종편 방송에 채널을 고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송에 채널을 고정하는 이유가 단지 재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령 인구의 대부분이 경제적 여유가 없고, 또한 여가 시간을 즐길만한 문화적 사회적 조건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긴 하지만, 사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방송과 언론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신뢰를 가지고 있다. 방송에 소개된 식당은 어느덧 ‘맛집’이 되고, 전파를 탄 여론은 다수의 의견으로 변한다. 수많은 텔레비전 채널 중에 특정한 채널에 고정시키는 시간은 길어야 3분이기 때문에, 방송사들은 시청자들의 채널을 잡기 위해서 되도록 주위를 끌만한 내용과 표현으로 방송을 채운다. 그래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내용과 표현으로 시청자들의 채널을 고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니 텔레비전 보도가 객관적이거나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순진한 생각이거나 어쩌면 신화에 가까운 생각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텔레비전은 이제 단순히 “바보상자” 그 이상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말하듯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텔레비전을 통해 전파되는 저속한 상업주의는 건강한 대중문화를 왜곡할 뿐 아니라, 다양한 의견과 여론을 바탕으로 하는 건강한 민주주의를 해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 역시 대중 매체와 뉴스 미디어 현상에 대해 깊은 우려(간추린 사회교리 414-416항)를 가지고 있다. 건강한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 공동체의 상황과 사실들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 해결책들이 서로 공유되고 서로 개진되어야 한다. 대중 매체를 통해서 우리 공동체 안의 여러 정보와 의사소통을 위한 여러 형태의 도구들이 존재해야만 실질적인 다원주의와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 매체의 세계에서는 흔히 이데올로기, 사적인 이익 추구, 정치적 통제와 여론의 왜곡, 집단 간의 경쟁과 알력 때문에 뉴스 미디어가 왜곡되고 있다. 이것이 교회가 염려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왜곡 현상 앞에서 건강한 대중문화도 형성되기 어렵고, 건강한 민주주의도 성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끊임없이 인간의 존엄성과 우리 사회의 공동선이라는 기본적인 도덕적 가치와 윤리적 원리들이 대중 매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사회의 상업주의 앞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우리의 몫이다. 무엇보다 먼저, 꼼꼼히 따져보고 대중 매체를 접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텔레비전 시청은 많은 판단력과 비판력을 필요로 한다. 재미있다고 마냥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을 보낼 일이 아니다. 텔레비전 시청은 최소한으로 하고, 그 시간에 신문과 잡지,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 더욱 좋을 일이다. 더 나아가서 텔레비전을 아예 보지 않으면 어떨까? 내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말하자면, 텔레비전을 아예 보지 않으면 더 재미있고 더 가치 있는 일들이 생겨난다. 기도할 시간은 넉넉해지고, 이웃에 대한 연민도 깊어진다. 게다가 세상을 보는 눈은 오히려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 어쨌든 자기 처지에 따라 텔레비전에서 해방되어야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8월 23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쳇바퀴에서 벗어나기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는 사회


예전에 어떤 신부님께서 담배 끊는 법에 대해 말씀해주신 것이 기억납니다. 담배를 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그냥 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 말고는 담배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고 술을 많이 마십니다. 다음날 숙취에 고생하면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인간관계 때문에, 상황이 어쩔 수 없다 하며 다시 술잔을 잡습니다.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고선 고해소에 들어갑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저 사람 때문에, 이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며 다시 죄를 짓습니다.


사회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선거가 끝나고 나서야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된 다음에야 후회합니다. ‘내가 잘못 선택했구나.’ 하지만 곧이어 다시 잊어버리고 같은 선택을 합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경쟁에서 살아남은 지도층은 경쟁을 강요하는 교육제도를 만들고, 그 안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은 상황이 그렇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받아들이고 경쟁하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경쟁을 강화하고, 사람을 큰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보다 효율적인 도구로 만드는 사회를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이 상황에서, 이런 쳇바퀴 같은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아무런 행동 없이 그저 비판만 하고, 속상해만 한다면 변화하는 것은 없습니다. 획일화된 사회, 경쟁을 강요하고 효율만을 찾느라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는 사회가 틀렸다면, 스스로가 큰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런 선택에는 다수로부터 외면당하고 손가락질 당하는 박해가 따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이기심보다 공동선을, 내 욕심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없다면 변하는 것도 없습니다. 좋든 싫든 우리 모두는 이미 쳇바퀴 위에 서있고, 그 쳇바퀴는 굴러가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왜 내가 이 쳇바퀴를 굴려야 하는가라고 생각만 할뿐 아무 것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물론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쳇바퀴를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얼마 전 복자로 선포되신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현대인들은 진정한 것에 굶주리고 있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은 가짜나 거짓을 싫어하고 진실과 정직을 찾고 있다. 이 시대의 표지에 대해서 우리는 주목해야 하겠다. “당신은 당신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참으로 믿고 있습니까?” 당신은 믿고 있는 것을 실천하고 있는가? 당신이 행하고 있는 것을 말로 알리고 있는가? 생활의 증거는 선교의 참된 효과를 거두는 데 중요한 조건이 된다.”


이제 여름휴가와 여름 방학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추수의 계절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쳇바퀴를 돌릴 것인지, 나의 삶, 우리의 세상을 진정한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행동할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 김성수 신부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8월 30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경제 민주화


우리나라 경제와 재벌 문화


이제는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한때 ‘경제 민주화’는 지금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핵심적 공약사항이었다. 사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에 여야를 떠나서 경제 민주화를 내세우고, 그 핵심적 내용이 재벌의 기업지배구조를 투명하고 공정하게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재벌의 폐해가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에 재벌이라고 불리는 기업집단의 역할이 컸고, 지금 역시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 역시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긍정적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한국 경제가 마치도 동맥경화에 걸린 것처럼 제대로 순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재벌 체제인 것이다.


재벌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 경제의 동맥경화를 불러일으킨다. 첫째는 소수의 재벌 기업집단이 우리나라 전체의 산업과 시장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예를 들자면, 몇몇 재벌의 대형마트는 재래시장이나 골목상권에 돈이 돌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다. 대형마트뿐만 아니라 웬만한 빵집과 편의점, 심지어 교통카드의 최대주주가 재벌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재벌의 독점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자영업을 비롯한 서민경제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재벌은 대체로 특정 개인 또는 ‘총수 일가’의 혈족이 다수의 대규모 독과점 계열사들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총수 일가가 많아야 5% 정도의 주식으로 50% 이상의 의결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함으로써 수많은 계열사와 이해당사자의 의사에 반해 자기 이익을 거두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롯데그룹의 싸움에서 잘 볼 수 있듯이, 1%도 되지 않는 지분으로 95조에 달하는 기업집단을 차지하려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벌어지는 막장 드라마를 서민들은 우두커니 지켜봐야 한다. 대기업과 우리나라 전체 산업, 그리고 시장 전체가 몇몇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러한 몇몇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완화시키는 경제 민주화야말로 자유경쟁을 기본 원리로 하는 건강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위해서도, 또 어렵게 살아가는 수많은 자영업자와 노동자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경제에 있어서 독점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미 1931년 비오 11세 교황께서 <사십주년>이라는 사회회칙을 통해 경고하고 있다. 이 회칙 41항에 의하면, 경제적 독점은 자본주의 경제의 근간인 자유경쟁을 무너뜨리고 있고, 동시에 자유경쟁의 자연적 귀결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제적 독점은 경제 영역에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권력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고, 더 나가서는 국가 간의 충돌까지 야기한다는 것이 비오 교황의 근심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세계 전쟁을 예측한 탁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비오 11세 교황의 이 탁월한 통찰은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경제적 독점이 공동선을 지켜야 하는 국가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독재’(56항)로 출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처럼, 오늘날 독점적 기업집단은 우리 경제의 건강한 순환을 막고 있는 부정적 측면이 너무나 크다. 재벌의 경제적 독점과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서민 경제 나가서 국민경제 전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개혁’이 아니라 ‘재벌개혁’이다. 하여, 다시 ‘경제민주화’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9월 6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그리스도를 증거한 이들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신자들에게 교육을 하거나 예비신자교리를 할 때, 마더 데레사 수녀님, 이태석 신부님, 김수환 추기경님, 최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던 중 성직자, 수도자가 아니라, 신자들이 보다 직접적으로 삶의 모델로 삶을 수 있는 이들이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작년 8월에 시복되신 124분의 복자가 떠올랐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중 성직자는 주문모 신부님 한 분뿐입니다. 비록 시대가 다르다고 하지만, 바로 이 땅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한 이들입니다. 그들의 삶을 돌아보면 그 자체가 사회교리 실천사례의 보고입니다.


일전에 소개한 복자 황일광 시몬은 천민 출신이었는데, 천민이 댓돌 위에 감히 올라설 수도 없던 시대에 양반 교우들은 그의 손을 잡아 툇마루에 함께 나란히 앉아 주님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황일광 복자는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신분과 경제력이라는 어마어마한 벽을 넘어서 사랑을 실천한 신자들의 삶이 있었습니다.


손경윤 제르바시오 복자는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도우려고 아주 큰 집을 매입해서 바깥채는 술집으로 꾸미고, 안채에서는 교우들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복자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생활을 했지만, 겉으로는 번지르르 하지만 신앙의 실천은 없는 우리와 다른 의미에서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생명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한 성(性)의 의미가 사라지고, 쾌락만을 쫓는 오늘날, 복자 조숙 베드로와 권천례 마리아 동정부부와 같은 이들의 삶은 사랑의 핵심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해줍니다. 내 삶에서 나를 내어줄 생각이 없을 때, 나의 모든 행위들이 얼마나 메마르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변하는지 깨닫게 해줍니다.


9월은 순교자성월입니다. 순교자 공경은 사업이 아니라, 신자들의 변화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들이, 평신도들이 이 땅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 이들, 사회의 통념과 잘못된 제도에 맞선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념에 이념으로 맞서고, 논리에 논리로 맞선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의 진리로 무장하고 하느님의 자비로 맞선 이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모범이 될 것이고, 이 땅의 사회교리, 이 땅의 실천신학이 가능하게 해줄 것입니다.


“신앙은 순교자들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4년 8월 16일 시복미사 강론 중.


* 김성수 신부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9월 13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오늘날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공동선의 열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놓고 말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지나쳐서 국론이 분열되는 등의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다른 이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독재로 회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 해봐야 별거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같은 땅에서, 같은 제도 아래에서 살면서 서로가 이렇게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이처럼 ‘민주주의’라는 말만큼 서로 다르게 생각하면서도 똑같이 표현되는 말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서 그 사회의 민주주의의 발전과 수준이 다른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해하는 민주주의와 실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수준, 그리고 독일 사람들이 이해하는 민주주의와 독일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를 1인 1표에 근거한 보통선거권, 주기적인 선거, 정당 간의 경쟁을 통한 정부의 구성 등 민주적 경쟁의 규칙을 확립하는 절차상의 최소 요건을 갖춘 정치체제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출발점이고 최소한의 조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충분하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또는 이런 식의 민주주의 해봐야 서민들 삶이 더 나아지지도 않으니 민주주의 해봐야 별거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프랑스의 정치사회학자 토크빌이 파악하듯이 선거 제도가 아니라 ‘사회의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절차적 조건을 갖춤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 위에서 그 사회가 어떤 지적, 도덕적, 문화적 토양을 발전시키는지에 따라 더 좋은 내용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선진적인 민주주의와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톨릭 사회교리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다. 즉, “참된 민주주의는 단지 일련의 규범들을 형식적으로 준수한 결과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엄, 인권 존중, 정치 생활의 목적이며 통치 기준인 공동선에 대한 투신과 같이 민주주의 발전에 영감을 주는 가치들을 확신 있게 수용한 결과이다.”(간추린 사회교리, 407항)


사회교리에서 말하는 참된 민주주의는 제도와 절차를 넘어서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사회의 공동선을 얼마나 발전시키고 증진시키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국가의 존재 이유 자체가 공동선을 발전시키는 것임을 분명히 천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회의 인권과 공동선의 수준은 대다수의 서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부 정책으로 평가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나라 10대 대기업의 사내 보유금은 2배 이상 늘어난 반면,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 탈출률은 꾸준히 하락해왔다. 열심히 일해도 일어서기 힘든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의 수준은 멕시코와 비슷한 수준이 되어버렸고, 빈곤율은 터키와 비슷한 수준이 되어 버렸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우리 사회의 공동선의 수준은 상당히 낮고, 국가와 정부는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민주주의 해봐야 별거 없거나 또는 민주주의가 지나쳐서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못해서 우리 삶이 이렇게 힘든 것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 직장노동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9월 20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기분 좋은 명절


더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 한가위입니다. 삼국사기에서 신라시대 우리 조상들이 한가위를 지냈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왕이 육부(六部)를 정한 뒤, 이를 두편으로 나누어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部內)의 여인들을 거느리게 하고, 길쌈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름, 즉 한가위가 되면 그 공을 가려 지는 편은 음식을 준비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모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게 하였으니, 이를 가배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편을 갈라 이기고 지는 것은 경쟁을 통해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의 길쌈은 겨울을 날 옷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모두를 위해 일의 능률을 올리고 동기부여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일을 마친 후에는 음식을 준비하여 이를 함께 나누며 즐겼습니다.


사회교리에서 자본주의와 사유재산, 경쟁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를 통해 효율을 촉진시키고, 그 높아진 효율로 인간을 위해 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편을 이기기 위한 경쟁, 내가 모두 갖기 위한, 나만을 위한 사유재산,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가지수와 성장률이라는 숫자를 위해 봉사하는 자본주의는 교회가 옳다고 가르치는 것들이 아닙니다.


명절은 공동선을 위해 서로 애써온 이들이 자신의 공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허물과 부족함을 용서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렇게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기 위한 힘을 다지는 자리였습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평소보다는 더 행복할 수 있었고 풍요로웠습니다. 저절로 “더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내고 있는 명절은 어떠합니까? 음식준비, 부모님 모시는 문제에서 이 사회의 세대 간 갈등을 드러내고, 성묘 가서 절하는 문제로 종교갈등을, 정치 이야기하며 정치갈등, 사회갈등, 남북갈등의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명절을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인간 존엄성, 공동선의 우선성이 올바로 자리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명절이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쁨을 나누고, 아픔을 위로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 핵가족화, 노령화와 같은 수많은 문제 안에 있는 우리 가정과 그 구성원들의 아픔, 이산가족 문제로 힘싸움을 하는 남과 북, 그 사이에서 눈물 흘리는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들, 주당 노동시간을 둘러싸고 팽팽한 줄다리기 중인 노동자, 고용주, 정부. 한가위를 맞아 자신들이 겪는 대립과 갈등의 원인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경쟁하고 자신의 주장을 펴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사회교리는 하느님께서 결코 포기하실 수 없는 인간 구원을 이루기 위해 변화하는 각자의 삶에서 말씀을 육화시키려는 치열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이번 명절은 잠만 자고, 텔레비전과 컴퓨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대화가 사라진 명절, 고속도로에서의 고생만 기억나는 한가위가 아니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삶을 서로 나누고, 그 안에서 신앙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고 나아갈 방향을 함께 찾으면 좋겠습니다. 그 노력이 이 사회의 소외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향하길, 그래서 한가위가 끝난 후 성큼 다가올 겨울 앞에서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김성수 신부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9월 27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노동의 존엄


노동개혁과 국가의 역할


노사정위원회가 노동시장 개혁에 합의했다고 한다. “합의”라고 하지만 사실상 노동계의 투항에 가깝다.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과 청년 일자리를 위한 개혁이라고 하지만, 그런 명분은 허울뿐이고, 그 내용을 따져보면 대기업의 민원을 처리해준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임금피크제, 일반해고 조건 완화,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과 파견 근로 허용 업종의 확대 등이다. 임금피크제란 임금의 상한선을 정해서 그 이상의 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행법상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에 의해’ 정리해고가 가능하여, 기업 쪽의 자의적 해석에 의해 정리해고가 사회문제로 발전(예를 들면 쌍용자동차)하는 마당에 성과를 내지 못하는 개별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 또한 기간제 노동과 파견 노동으로 대표되는 비정규직 노동의 기간을 더욱 늘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는 업종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노동조합과 교섭을 통해서나 노동자들의 동의를 얻어서 기업의 규칙(취업규칙)을 바꾸어야 가능한 일인데, 이것 역시 노동자들의 동의 없이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이번 노동개혁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내가 보기에는, 정규직 숙련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거나 또는 그들을 쉽게 해고시켜서 비정규직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서 그 자리에 청년들을 메우겠다는 뜻으로 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1998년 IMF의 요구대로 정리해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꾼 결과, 오늘날 많은 노동자가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는 곧바로 노동소득의 감소로, 그리고 이는 멕시코와 브라질 수준의 양극화로 이어졌다. 이런 경험에서 보자면, 이번 노동개혁은 더 많은 실업자를 양산하고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노동 문제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성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노동하는 인간>에 의하면, 기업이 직접 고용주라면 국가는 간접 고용주라고 할 수 있다. 정책과 제도, 법률 등을 통하여 기업과 노동자 사이의 직접적 고용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이처럼 큰 영향력을 가진 국가는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가 정의롭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노동력을 지닌 모든 사람들의 적절한 고용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분야에 있어서 정의롭고 올바른 상태에 대립되는 것은 실업 상태, 즉 노동 능력이 있는 사람을 위한 일자리가 없는 상태이다.…간접 고용주라는 이름에 속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실업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실업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죄악이며, 실업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실제로 사회의 재앙이 될 수 있다.”(18항) 적어도 이런 면에서 지금 정부는 고용 문제에 대해서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와는 반대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가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기반을 두어서 살펴볼 사례가 없지 않다. 네덜란드나 독일에서 있었던 사회적 대타협이다. 간단히 말하면, 법정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 40시간 노동에서 38시간 또는 36시간으로 줄이는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시간이 줄어든 만큼의 소득을 양보하고, 기업은 줄어든 노동시간을 채울 노동자를 고용하면 된다. 이런 방식이야말로 진짜 사회적 대타협이고, 진정한 노동개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교리의 공동선과 연대성의 정신을 실현하는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제도를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보다 더 인간과 노동의 존엄을 중심에 두고 모색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본다. “실업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죄악”이라는 성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호소를 잊지 말자.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과 신학대학 교수를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0월 11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복음을 전하라


사회교리 없는 선교는 팥소 없는 찐빵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교회는 전교주일을 통해 교회 본연의 사명인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신자들에게 가르칩니다. 전교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저는 현대사회에서 선교의 핵심열쇠는 바로 사회교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조금 힘을 주어 말하면, 사회교리 없이는 현대사회에서 선교란 불가능하고, 교회의 미래조차 장담할 수 없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전교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이 사회교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바로 교회 공동체가 사회교리를 배우고 이를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매달 200만 원씩을 저축한다고 생각해봅시다. 1년이면 2400만 원, 5년이 걸리면 1억2000만 원입니다. 그렇게 10년을 모으면 2억4000만 원입니다. 수도권에서 한 가정이 살아갈 수 있는 집 한 채를 마련하기도 어렵습니다. 게다가 매달 200만 원씩을 고스란히 저축할 수 있는 젊은이는 거의 없습니다. 부모에게 손을 벌린다한들 매달 200만 원씩을 자녀의 미래를 위해 모아줄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있을까요?


자녀의 집 마련과 교육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가계부채는 늘어만 갑니다. 20, 30대의 평균 임금이 200만원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미래를 위한 저축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합니다. 미래를 장담할 수도 없으니 그저 즐기자 하고, 그런 젊은이들의 돈을 노린 자본주의 세력은 그들의 구매욕과 쾌락에 대한 욕구를 공략합니다. 더욱 자극적이고, 쾌락주의 일변도로 흐르는 죽음의 문화를 양산해 갑니다.


가정을 이루지 않는, 한편으로는 이룰 수 없는 젊은이들, 그나마 있는 것마저 나누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 소비하게 만드는 문화, 가계부채와 소통의 단절로 다투는 가정이 늘어갑니다. 정작 나누어야 할 사람들은 나누지 않고, 어려운 서민의 살을 도려내어 젊은이들을 살리겠다는 허울뿐인 ‘임금피크제’로 인해 노년의 삶은 더욱 불확실해집니다.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채 일자리 몇 개 늘어난다고 해서 청년들이 희망을 갖고 미래를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누가 성당에 나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요? 교회의 길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구원입니다. 사회교리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어야, 자신의 존엄성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현대사회에서 사회교리를 외면한 선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우리의 선교는 어떠한지 돌아보는 한 주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상황에 맞추어, 복음화가 모든 인간의 권리와 의무, 인간의 성장과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가정생활, 사회생활, 국제 관계, 평화, 정의, 개발 등에 관한 명시적인 메시지, 특히 오늘날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해방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복자 교황 바오로 6세 「현대의 복음 선교」 제29항)


* 김성수 신부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0월 18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반대받는 표징


‘좌파’로 오해받는 사회교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한국을 다녀가신 지 벌써 일 년이 지났나 싶은 요즘, 언론은 쿠바와 미국 방문 등 그분의 소식을 계속해서 전한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시고 한결같으시다. 작은 차를 타고 이동하시고, 가장 낮고 가장 아픈 자리로 향하신다.


미국 의회에서 하신 연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치는 인간과 사회 공동선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시며, 경제적 기득권에 많은 영향을 받는 정치 현실을 염두에 두시고 “정치는 경제와 금융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이민자와 난민, 가난한 사람들의 존엄을 대변하시며 미국사회가 그들에게 폭넓은 관용를 베풀어야 한다고 촉구하셨다. 특히 노숙자들과의 만남 도중에는 “하느님의 아들도 노숙자로 세상에 오셨다. 집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며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고 대변하셨다.


마찬가지로 유엔 연설을 통해서도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는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셨고, 국제 금융경제 질서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소외로 몰아넣고 있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국제 사회의 관심과 연대를 촉구하셨다.


어느 인터뷰를 통해서 교황께서 “가톨릭 사회교리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한 적은 없다고 확신한다”고 밝히셨듯이 이러한 말씀과 행동들은 인간의 존엄을 천명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교회의 사회교리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럼에도 소수의 기득권을 대변하는 미국의 극우방송과 극우성향의 정치인들은 교황이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며, 또는 “좌파 교황”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다수는 아닐지라도 기득권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며 그들의 존엄이 훼손당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복음을 읽다보면 예수님도 그러한 처지에 내몰렸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 여성 예언자 한나는 예수님이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 34)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예수님은 공생활 내내 정치와 종교, 경제 영역의 기득권자들의 미움을 받았으며, 실제로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라도 죽일 음모(루카 22,1-2 요한 11,45-53)를 꾸몄다. 그리고 예수님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았고, 백성을 선동했으며, 자신이 임금이라고 참칭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당했다. (루카 23, 1-5) 이미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 36)고 밝히셨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예수님을 오해하고, 예수님께 누명을 덮어씌운 것이다.


이러한 반대 받는 표징은 2000년 전 예수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도 주어졌고, 지금 여기의 우리 사회 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하는 교회의 사명(사목헌장 4항),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천명’하고 ‘인간 존엄성이 침해받는 것을 고발’(간추린 사회교리, 107항)하는 사회교리의 사명이 종종 정치 개입이나 ‘좌파’라는 비난에 맞부딪히고 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러했고, 미국 극우 방송이 그러하듯, 자신들의 이해관계부터 따지는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인다. 두려워 말자.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고 불의를 고발하는 것은 교회 본연의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경우에 이런 선택이 반대 받는 표징으로 돌아오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모든 예언자들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랬듯이. 그것이 교회의 길이기 때문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과 신학대학 교수를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0월 25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신앙인과 연대성


피는 물보다 진하다? 신앙은 피보다 진하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며 그들의 모범을 본받도록 신자들을 격려합니다. 또한 이 날을 통해서 이미 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천국에서 하느님을 뵈오며 영광을 누리고 있는 성인들과 우리가 결합되어 있음을 기억하도록 가르칩니다. 우리는 주일미사 때에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에 특별히 연대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1인 가구 500만 시대를 맞이하면서 2015년 현재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26.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인 가구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오래전부터 생겨난 현상으로 핵가족화와 저출산으로 인해 가족에 대한 기존의 개념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특정 형태의 가족이 연대성에 더 적합하다거나, 1인 가구와 같은 가족 형태가 지나친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촉진하고 연대성을 해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1인 가구와 저출산으로 인해 발생하는 많은 사회 문제가 있지만, 앞서도 몇 차례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에서만 오는 결과가 아니라, 정치권과 국가가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형태의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든 신앙인이 이루는 연대성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대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중심으로 연대하는가입니다.


특정 주장을 관철시키거나,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한 집회에서의 연대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 혹은 개인이나 집단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을 위한 연대입니다. 이런 경우에 개인과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이들 혹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반하는 이들은 이 연대에서 제외됩니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연대는 이보다 더 진합니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 혹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더라도 혈연은 이를 뛰어넘어 그들을 연대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익이나 가치에 의한 연대보다 배타적인 성격도 지닙니다.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앙은 피보다 진합니다. 이 땅에서 먼저 살아간 우리 신앙 선조들, 순교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이익을 뛰어넘어서, 신분과 이념, 제도와 가치를 모두 뛰어넘어서, 심지어 혈연까지도 넘어서서 서로 사랑하고 연대했습니다. 이 연대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연대,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연대입니다.


나의 이익 때문이든, 추구하는 가치 때문이든, 혈연 때문이든 그 무엇도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느님과 수많은 성인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이들 특별히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이루는 이 연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잘못이 있어서 그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내가 한 가족이기 때문에, 한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모신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죄와 악의 현실에 진심으로 “제 탓이오”를 외치며 연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인한 구원에서도 멀어질 것입니다.


* 김성수 신부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1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시민사회와 국가


종북몰이에 흔들리는 보조성의 원리


오늘날 언론매체를 통해서 또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대화 안에서 ‘시민사회’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시민사회’ 개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개념틀이기도 하고, 또 가톨릭 사회교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시민사회란, 한마디로 “정치(국가와 정부)와 경제(시장) 영역에서 비교적 독립되어 있는 문화적 단체적 자원과 관계의 총체”(간추린 사회교리 417항)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시장과 국가를 제외하고 가정에서부터 출발해서 우리가 이루는 모든 모임과 단체, 즉 종교적인 모임과 결사, 동문회와 친목회와 같은 모임, 더 나가서는 시민사회단체와 같은 공적 영역에서의 결사까지 우리가 맺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뜻한다.


그러나 사회를 바라다보는 관점은 다양하기에 각자의 이론과 이념의 입장에 따라서 다양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시민사회의 영역을 축소하려는 경향들이 있다. 예를 들면 독재와 같은 전체주의에서는 시민사회를 국가의 영역과 통제 속으로 통합시키려는 경향이 있고,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이데올로기는 시민사회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반대로 시장의 영역을 확대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에 거슬러 가톨릭교회는 한 사회를 정치공동체(국가)-경제적 삶(시장)-시민사회라는 삼분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 세 영역이 전체주의나 신자유주의의 경향을 거슬러 서로 자율적이고 균형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관계 안에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경제제도나 정치가 인간을 위해서, 더 나가서는 인간의 존엄을 위하고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개인들이 결속하여 이루는 시민사회가 국가나 정치에 우선하며, 시민사회는 국가의 모태이고,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시민사회에 봉사해야 하고 시민사회의 구성원인 개인과 집단에게 봉사(간추린 사회교리 418항)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가톨릭 사회교리는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선성을 주장하며, 이러한 관계를 규정하는 원리로서 ‘보조성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보조성의 원리는 더 작은 조직과 단체를 위해서 더 큰 조직은 보조적으로만, 즉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만 개입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더 작은 조직과 단체의 역할과 활동을 위해서는 더 큰 단체의 역할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뜻이며, 시민사회와 국가의 영역에서 말하자면 시민사회의 자율적인 역할과 활동을 위해서 국가의 권력은 제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과 문제들은 지극히 우려스럽다. 특히 시민사회 안에서 자유롭게 형성되어야 하는 여론에 대해서 국가와 정부가 다양한 방법으로 개입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그렇지 않던, 국가기관이 인터넷 공간에서 여론을 조직하고 왜곡한 것은 보조성의 원리와 민주주의를 위배하는 심각한 범죄이다. 또한 학문과 교육의 영역에서 논의해야 할 것을 국가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와서 논쟁을 일으키는, 이른바 국정 교과서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비판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시민사회의 자율적인 의사 개진과 비판, 사고와 활동 방식을 두고 정부나 정치인들이 나서서 ‘종북’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가장 심각하게 보조성의 원리를 위배한다. 많은 경우 그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낙인은 시민사회의 영역을 축소하고 국가 권력을 확대하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과 신학대학 교수를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8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교육의 방향성


평신도의 복음화 소명을 위한 교육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으로 교육에 관한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부상한 가운데, 우리 아이들은 11월 12일에 2016년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오늘 11월 15일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국정화 교과서 논란이 한창 뜨거울 때, 한 개신교계 신학교에서 “복음서도 네 개나 있는데…”라는 현수막을 붙인 적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정권이 바뀐 후에 실록을 수정하면서도 이전의 판본을 그대로 보존한 점, 승정원 일지나 비변사의 기록 등을 남겨 일방적인 해석을 경계한 지혜를 생각한다면 분명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이념적이고 잘못된 선택입니다. 물론 역사 교과서국정화에 찬성하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이 국정화에 대한 찬반논쟁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교육에 관한 이슈가 생길 때마다 책임자들이 국민 앞에 나와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어떻게 하겠다, 무엇을 위해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결국 아이들을 위한, 미래를 위한 사회건설이 아니라, 결국 자본을 위한 사회건설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교육이 교육답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육은 여전히 대학입학을 위한 공교육, 취업을 위한 대학교육으로 전락한 채 자본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교육으로 남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평신도 주일을 맞는 우리는 교육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무엇보다 교육의 주체가 되어야 할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 진지하고 가슴 아프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피동적으로 지침이나 명령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구상과 계획으로 사람들의 정신과 풍습, 사회 공동체의 법제와 조직을 그리스도화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복자 교황 바오로 6세 「민족들의 발전」 81항)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들과 수없이 쏟아지는 기사와 칼럼은 서로 다른 주장과 이야기를 하지만, 근본적인 방향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결국은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인 형태를 보입니다. 먼저 이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평신도들이 무엇보다 복음과 사회교리에 비추어서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문화, 사회, 경제, 정치 영역에서 일상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공동선에 이바지할 수 있고, 나아가 자기 편의나 금전의 이익을 버리고 정치를 하는 이들이 더 많아질 수 있습니다. (참조 「사목헌장」 75항)


수능시험을 통해 아이들은 12년의 공교육이라는 긴 달리기를 마쳤습니다. 그들이 새롭게 마주해야 하는 다시 시작되는 길은 어디로 이어지고 있을까요? 또 어디로 이어져야 할까요? 그 길은 누가 만든 길일까요? 이 길에서 교회는 그들에게 어떤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을까요? 또 그 길에서, 교회가 이정표를 제시하는데 있어서 우리 평신도들의 사명과 역할은 무엇일까요?


전례력으로 한 해가 마무리되어 갑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대림시기의 둘째 주간에 우리는 다섯 번째 사회교리주간을 지냅니다. 개별 사안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그 논의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바를 성찰하는 풍요로운 사회교리 주간을 보낼 수 있도록 지금부터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그를 위한 핵심적인 가치는 복음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복음적 열정이 모든 평신도들의 가슴에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 김성수 신부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15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시장에 대한 국가의 책임


‘약육강식’ 경제 영역에 평화 · 정의 세워야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를 나무에 비유하자면, 인간 존엄성의 원칙은 뿌리에 비길 수 있다. 이 뿌리에서부터 나오고 동시에 이 뿌리를 실현하는 두 개의 큰 기둥은 보조성과 공동선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보조성의 원리가 개인과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한계를 설정하는 원리라고 한다면, 공동선의 원리는 시장, 즉 경제적 영역에 국가 권력의 책임과 의무를 지우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공동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현실, 특히 경제 영역에서 벌어지는 인간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미 17세기 사회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말했듯이 ‘자연적인 상태’로서의 사회는 “만민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요, 그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homo hominis lupus)”일 뿐이다. 비록 홉스를 비롯한 근대 초기의 사회철학자들에게 무질서한 자연 상태는 국가와 권력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었지만, 오늘날 경제 영역에서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우리의 경제 현실은 전쟁터요 더 강한 짐승들만 살아남는 ‘동물의 왕국’과도 같다.


1931년 비오 11세 교황의 회칙 <사십주년>도 그런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오늘날 무엇보다도 명백한 것은 부의 축적뿐만 아니라 거대한 권력과 경제의 독재적 지배력이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다…현대 경제 질서의 특징인 이 권력의 집중은 최강자의 생존만을 허용하는 무제한한 자유 경쟁의 자연적 귀결이다(41항).”


그렇다면 이 전쟁터를 누가 평화의 나라로 만들 것이며, 어떻게 동물의 왕국을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며,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이사야 11,6) 가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약육강식의 동물의 왕국을 공생의 공원으로 만들어야 하는 중요한 임무는 정치와 정치공동체(국가)에게 맡겨져 있다. 바로 이러한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지우는 원리가 공동선의 원리이다. 먼저 ‘공동선’이란 “인간이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자기완성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사목헌장 26항)를 가리킨다. 이는 공동체 전체의 평화와 안전, 공정하고도 정의로운 사법 체계 등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조건도 포함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음식과 주거, 모두가 참여하는 노동,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의료혜택과 교육, 문화와 교통 등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포함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사회의 공동선의 크기는 공공복리 또는 보편적 복지의 크기와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국가를 포함한 정치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하여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완전한 자기 정당화와 의미를 얻고, 공동선에서 본래의 고유한 자기 원리를 이끌어낸다.”(사목헌장 74항)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마치도 동물의 왕국과도 같은 경제 영역, 즉 시장에 대해서 규제하고 조절(백주년 35항)함으로써 개입하고, 특히 노동자를 비롯한 약자들의 인권이 훼손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하며, 시장의 독점을 방지하도록 노력해야 하며(백주년 48항), 지나친 사유 재산의 권리행사를 규제(간추린 사회교리 177항)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할들이야말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고, 정치와 국가의 고유한 의무이자 책임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정치는 흔히 폄하되기는 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복음의 기쁨 205항)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소명인 것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과 신학대학 교수를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22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인류를 향한 공격


참 평화를 주소서


현지시각으로 지난 11월 13일 금요일 밤, 프랑스 파리에서는 민간인을 향한 무차별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프랑스 정부와 미국 정부는 즉시 테러와의 전쟁을 위한 협조 원칙을 공고히 했고, 미국 대통령은 이 테러행위를 “인류를 향한 공격”으로 규정했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이런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앞에서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미국과 프랑스에 대한 테러 집단의 공격으로 규정하고 ‘이슬람국가(IS)’라든가 ‘알카에다’라든가 하는 테러집단을 모두 소탕하자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 프랑스가, 더구나 프랑스의 죄 없는 민간인이 피해자의 위치에 있는 것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손쉽게 그들만 제거한다고 해서 평화가 찾아오는지는 의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양시양비론의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민간인과 프랑스도 참가한 시리아 공습으로 인해 사망한 민간인들의 삶은 “인류에 대한 공격”이 아닌지 묻습니다. 그러면서 이 일은 패권국이 경찰국가를 자처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세상을 경영하려는 욕심이 낳은 결과라고 합니다. 또 지중해에서 수많은 난민이 죽어갈 때 그들을 외면한 국가들의 결정은 “인류에 대한 공격”이라고 규정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물음도 제기합니다. 그래서 도달하는 결론은 둘 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한쪽을 일방적인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언가 더 고민을 한 것 같지만 그 다음의 구체적인 행동이 없습니다. 그저 한쪽만 가해자나 피해자로 몰아가지 말라는 논리만이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 사람들은 음모론을 펼칩니다. 미국에서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도 그런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패권국가가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분쟁을 뒤에서 조장하고 있다는 설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의 주장들은 대부분 말 그대로 주장에 가깝습니다. 이들 역시 어떤 음모론을 펼치고, 퍼즐 조각을 짜맞추는 듯한 게임을 즐기면서 시시비비를 논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담론들이 오고가는 중에 희생자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희생자들을 바라보고, 그 마음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가해자들을 위해서도 진심으로 아파합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진심으로 희생자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해자들이 죽음의 길을 버리고 생명의 길로 돌아오도록 그들을 용서로, 하느님의 자비로 초대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구조적인 모순을 참으로 인식하고 사랑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만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러 오십니다. 나는 평화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그분께서 주시는 참 평화가 이 세상에 펼쳐지기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며, 적대 세력 간의 균형 유지로 격하될 수도 없다.(「사목헌장」 78항) 그보다 평화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요한 바오로 2세 「백주년」 51항)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질서 확립을 요구한다.”(「간추린 사회교리」 494항)


* 김성수 신부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29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불경기 탈피


공동선은 어떻게 증진되는가


불경기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힘겨워하고 있고, 특히나 가난한 사람들과 청년들의 삶은 더욱 고달프다. 정부로서도 불경기를 이겨내려고 경제 성장 또는 경기 부양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대기업들에게 엄청난 보조금을 지급하는가 하면, 아파트나 자동차 같은 값비싼 재고품을 빨리 처리할 수 있도록 세금도 깎아주고 있다. 기업 활동에 방해가 되는 여러 가지 규제들을 철폐해주며, 더 나아가 노동자들을 더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기업 활동을 도와주면 빠른 시간 안에 경제 성장이 이루어질 것이고, 경제가 성장하면 모두가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모든 이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무턱대고 신뢰할 수는 없는데, 그 믿음이 현실이 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러한 믿음의 뿌리는 이익추구와 효율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라는 윤리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익을 산출하는 모든 행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기에 윤리적으로 옳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각자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극대화하게 되면 사회 전체의 수익으로 귀결될 것이라 믿는다. 즉, 개인선의 총합은 결국 공동선을 이룬다는 주장이다. 이런 믿음은 시장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한다. 개인이 개별적으로 능력껏 재화를 생산하면 그 생산된 재화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소비와 분배를 조정해준다는 것이다. 이른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가격을 결정해주고, 모든 이에게 재화를 분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시장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자유로운 경쟁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론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막연한 믿음을 채워주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시장 그리고 자유로운 경쟁이 가능한 시장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벤처기업이 사라져가고 대형마트의 위세에 골목상권이 위축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도 아닐뿐더러, 막연한 믿음처럼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현실이 보여준다. 오히려 오늘날의 시장은 약육강식의 밀림처럼 변해간다. 그러니 각 개인이 각자 자기 능력껏 자신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수익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그 개인의 이익추구로만 멈추거나 때로는 사회 전체의 이익에 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개인선의 총합이 공동선이 된다는 시장의 원리는 성립되지 않는다(간추린 사회교리 164항 참조). 오히려 가톨릭교회는 “시장의 힘으로 생긴 이익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신념을 명백히 거부한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시장의 힘의 최종 결과를 철저히 검토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자연법, 사회정의, 인권, 공동선의 이름으로 이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시장의 힘이 공동선의 이름으로 적절히 규제될 때, 선진 사회에서 자원과 수요를 조화시키는 효과적인 메커니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잉글랜드 웨일즈 주교회의 「공동선」 77, 78항).”


경제가 성장하거나 또는 국내총생산(GDP)이나 국민소득이 높아진다고 곧바로 모두가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우리나라 경제가 보여주듯, 오히려 양극화가 더욱 깊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공동선을 증진하는 것은 국가를 비롯해 우리 사회 전체가 소득 분배, 일자리 창출, 진보와 복지를 향한 새로운 계획(「복음의 기쁨」 204항 참조)을 세우고 모두가 참여하여 결정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선의 총합이 곧 공동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과 신학대학 교수를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2월 6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자비의 희년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닮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주년을 맞이하는 지난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자비의 특별 희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 제3주일이자 자선주일인 오늘 각 교구의 주교좌성당에서도 자비의 희년을 기념하여 주교좌성당 문을 여는 전례를 거행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발표하신 교황칙서 「자비의 얼굴」을 살펴보면, 자비의 희년을 지내는 우리가 고려해야 할 세 가지 차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차원은 바로 구세사에 대한 강조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느닷없이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과 교회의 전승 전체를 관통해서, 다시 말해 구세사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에게 가장 분명히 드러내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통해서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만납니다. 우리는 미사와 고해성사와 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야 합니다.


두 번째 차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의 심화입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연설에서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는 엄격함이 아닌 자비의 영약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 우리 공의회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셨음을 기억할 때 우리가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로 배우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차원은 교회의 사명에 대한 강조입니다. 교회는 구세사 안에서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의 자비를 전례 안에서 기억하고 기념하며 현재화합니다. 또한 이를 시대와 문화에 맞게 적절한 언어로 가르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전례 안에서, 특별히 미사와 고해성사 안에서 하느님 자비를 현재화하고 체험했다면, 교회 가르침이 살아있는 가르침이라면,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자신의 사명을 올바로 수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 위한 회개의 표지인 단식과 자선, 기도가 교회 내적인 차원에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


이를 사회교리의 차원에서 간단하게 풀어 말하면, ‘교회가 전하는 하느님의 자비를 미사와 성사 안에서 느끼고, 배우고 실천하자’가 됩니다. 자비의 특별 희년은 그저 신심행사와 순례지 성당을 방문하며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위한 전대사를 얻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이들은 이 세상의 악과 어둠에 맞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선택하는 용기 있는 신앙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이 희년에 그리스도인들이 자비의 육체적 영적 활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곧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며,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자비의 영적 활동도 잊지 맙시다. 곧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 김성수 신부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2월 13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시민사회의 우선성


국민 대하는 정부 시각 · 태도 “변해야”


얼마 전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자칭 ‘노동개혁’이라 부르는 노동정책 입법화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지난 정부에서 미국 쇠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고 한다. 익숙한 풍경이긴 하지만, 경찰은 시민들의 행진을 막으려고 경찰 버스를 촘촘히 주차시켜 길목을 차단하는 이른바 ‘차벽’을 만들었고, 시민들은 물리력을 동원하여 그 버스를 끌어내려 했다. 경찰 버스를 끌어내는 시민들에 대해 경찰은 캡사이신이라는 최루액을 쏘았고, 군중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또 안전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물대포를 쏘았다. 그 과정에서 농민 한 분이 물대포를 얼굴에 맞고 쓰러져 뇌진탕으로 중태에 빠져있다.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은 입장의 차이에 따라 뚜렷하게 갈린다. 한편에서는 경찰의 과잉 대응이 빚어낸 결과로 보는가 하면, 정부와 보수 언론 쪽에서는 폭력 시위 탓으로 돌린다. 여기서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은 없지만, 그날 이후 정부의 대응은 우려스럽다. 대통령은 그날 시위를 두고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IS에 빗대며 무관용으로 대응하겠다고 했다. 검찰은 폭력행위가 없더라도 복면을 쓰고 시위에 나서면 기소하겠다고 밝혔고, 몇몇 장관들의 명의로 주요 일간지에 나온 정부 광고는 ‘불법과 폭력 시위를 이 땅에서 발 못 붙이게 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불법과 폭력 시위를 엄벌하겠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정부의 이러한 대응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엄벌로써 통제하고 감독하기 보다는 그날 10만 명이나 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거리로 나왔는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요구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그렇고,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와 정치의 올바른 역할을 위해서도 우리 정부의 시각과 태도는 좀 변해야 한다. 먼저, 정부의 정책이나 의견에 비판적이거나 반대하는 의견을 적으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시민사회의 다양한 의견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조정(사목헌장 75항 참조)하는 과정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국정교과서 고시에서 볼 수 있듯이 정부가 시민사회에 지나치게 개입해서도 안 된다. 국가 권력의 한계는 명확하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의 ‘보조성’의 원리가 가르치는 바다. 마찬가지로 정부가 시민들의 삶을, 특히나 시민들의 생각이나 사상을 통제하고 감독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감시와 통제 그 자체로 우리 정부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유민주주의를 배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는 국가와 정치가 시민사회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국가와 정치의 뿌리이자 모태는 시민사회이며, 국가와 정치는 시민사회 안에서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있으므로 시민사회가 국가에 우선한다(간추린 사회교리 417-8항)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말하는 시민사회의 우선성, 보조성의 원리, 민주주의의 원리는 국가 권력의 한계와 범위를 설정하는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원리에서 볼 때, 아직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위태로워 보이고, 정부의 태도가 퇴행적으로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튼튼하고 성숙한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는 데에 있다. 북유럽의 성숙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는 강력한 노동조합과 진보적인 정당 위에서 생겨날 수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과 신학대학 교수를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2월 20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찾아가는 사목


예수님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기


오늘은 저희 본당에서 느낀 점을 나눠볼까 합니다. 주임신부님이신 백성호 세례자 요한 신부님과 함께 자비의 희년을 맞아 전 신자 가정을 대상으로 가정 축복식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 특히 독일교회에서는 주로 주님 공현 대축일에 신자들의 가정을 축복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집집마다 대문이나 문 상인방에 ‘20+C+M+B+16’과 같은 글귀가 분필로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뒤의 숫자는 그 해의 연도를 나타내고, +는 십자가이며, CMB는 ‘Christus Mansionem Benedicat’(그리스도께서 이 집을 축복하십니다)라는 라틴어 문장의 약자입니다. 이를 변형해, 자비의 희년을 시작하면서 신자들의 가정에 하느님의 자비가 가득하기를 기도하고 축복하는 예식을 갖고 있습니다.


집안 형편 때문에 혹은 청소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사제의 방문을 부담스러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축복 예물은 일체 받지 않고, 음식은 물론 물 한 잔도 마시지 않고, 현관문을 열어 놓고, 문 앞에서 집 축복을 하기로 여러 차례 공지하고 신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700세대 정도, 주일미사에 나오는 거의 모든 신자 가정이 가정 축복식을 신청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자신 안에 갇혀 있지 말고, 양들을 찾아 나아가는 교회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판을 짜놓고 신자들을 기다리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교회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과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가정 축복식을 진행하면서 조금은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우리 성당 주변, 늘 지나다니던 이 길가에 이렇게나 많은 신자 가정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늦은 시간에 퇴근하기 때문에 성당에서 시간을 내어 봉사하지도 못하고, 가까스로 주일미사에만 참석하는 사람도 있었고, 성당에서 자주 얼굴을 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청소년,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사회의 양극화로 어려운 가정이 많아진다는 통계는 여러 차례 접했는데, 신자들의 가정도 그랬습니다.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청년들 가정에도, 성인 형제자매들의 가정에도 어려운 가정이 있었습니다. 다만 사목자들이 찾아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신자들이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사목자의 방문을 꺼려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집에 오는 사제를 예수님처럼 기쁘게 환영했습니다. 그동안 스스로가 신자들이 부담스러워한다 여기며 가지 않은 것은 아닌지 부끄러웠습니다.


교회의 중산층화는 사제의 중산층화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사제들의 의식과 생활수준이 중산층화 되었기 때문에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신자들 중에 기꺼이 식사를 대접하고, 내가 찾아가기에 깨끗한 집에 사는 신자들을 주로 만나게 되고, 그러면서 교회가 중산층화되었다고 핑계만 늘어놓았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늘 곁에서 사목자들을, 교회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자비의 희년을 지내면서 교회가 신자들의 얼굴을 통해,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얼굴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자비를 듬뿍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김성수 신부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2월 27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재화의 보편적 목적


모든 사람이 사용하도록 창조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창세 1,29)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땅을 일구어 그 열매를 따먹게 하셨다. 그리고 그 열매는 단지 아담과 하와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창조는 첫 인류만이 아니라 첫 인류로 시작해서 마지막 인류까지를 위한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이다.


이렇게 하느님 창조의 열매가 특정한 몇몇 사람이나 인종이나 계급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가 말하는 ‘지상 재화의 보편적 목적’ 원리가 뜻하는 바다. 즉,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모든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서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사목헌장 69항)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교회는 사유재산권을 부정하지 않지만, 반대로 최고의 가치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보다는 지상 재화의 공동 사용권이 우선한다.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의 남용을 배격하고, 그 한계와 범위가 적절하게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빛으로 비추어 볼 때, 신앙인들은 사유재산과 자본의 증식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마치도 금과옥조로 여기는 ‘성장’ 또는 ‘시장’에 대해서 경계해야 한다. 경제성장만 하면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거나 시장이 지상 재화를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해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경제성장률이 2% 수준의 지금 정부를 두고서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고, 경제성장률이 제법 되었던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시절에도 오히려 양극화가 꾸준히 진행되었다. 경제 성장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으로 모든 사람이 잘 사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시장의 기능이 재화를 모두에게 적절하게 분배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러한 메커니즘으로서 시장은 실패했다. 어쩌면 시장의 법칙 때문에 모든 이에게 재화가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 것이다.


지구상의 곡식은 부족함이 없는데 아직도 많은 이들은 굶주려야 하고, 지구상의 의료품은 모자람이 없는데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은 질병에 시달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시장의 법칙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먹을 만큼 충분한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굶주림은 재화와 소득의 불의한 분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분노(복음의 기쁨 191항)”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묵상해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가 성장한다고 모두가 잘 사는 것도 아니고, 기업이 잘 된다고 모두가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서는 사유재산권과 시장의 자유에 규제를 가해야 한다. 동시에 사회보험과 사회보장을 더욱 확대하는 등, 이른바 보편적 복지를 더욱 확대해나가야 한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재벌집 손자에게까지 왜 급식을 해주어야 하냐며 자산조사를 통한 선별적 복지로 나가야 된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자산조사로 국가의 복지를 제한하면, 받는 게 없으면서 주는 이와 주는 게 없으면서 받는 이들로 곧장 나누어진다. 자산조사를 통한 선별적 복지의 결과는 사회 통합이 아니라 분리이고, 가난한 이들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보험과 보장을 통한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는 것이 바로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그 나름대로 실현(사목헌장 69항)하는 길이며, 그것이 바로 공동선의 증진이다. 그리고 또 하나, 바로 이 방향이 윤리적으로 옳은 길일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길이기도 하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과 신학대학 교수를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월 1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정치 공동체


우리의 정당은 정당한가?


올해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총선 때마다 등장하는 공천갈등, 예산안 처리 과정과 쟁점법안 처리에서 당내 갈등, 당 대 당 갈등, 입법부와 행정부의 갈등을 보여주었습니다. 총선 준비를 시작한 정당도 있고, 내부 문제로 인해 소속의원들이 탈당한 정당도,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며 생겨난 정당도 있습니다.


교육에서 교사의 문제, 교회에서 성직자의 문제가 중요한 것처럼, 정치 문제에 있어서, 특별히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정당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국어사전에서 정당이란 “정치적인 주의나 주장이 같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 정당이 정당한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과제를 서로 다른 차원에서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본래의 목적을 찾는 일입니다. 국어사전에서도 정당의 최종목적은 정치적 이상의 실현입니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이를 보다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정당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정치 공동체의 최종 목적은 ‘공동선의 실현’이어야 합니다(사목헌장 74항 간추린 사회교리 413항). 사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현 정당들은 정권교체를 통해 권력을 얻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시민사회의 열망을 한데 모으고 공공의 책임이 전체에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해야 할 의무는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참으로 필요한 도덕적 요소는 모두가 외면한 채 영향력 확대와 개인의 경제적 이익에만 눈이 멀어 있습니다.


둘째는 진보와 보수라는 낡은 틀을 벗어 버리는 일입니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경제적인 관점의 차이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과 독립운동 세력이라는 민족주의의 문제, 남과 북의 분단에서 비롯한 이념갈등이 더해져 한결 복잡한 양상을 보입니다. 이는 친일경력이 있으며 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남한에서는 보수진영에서 정치활동을 한 전력이 있는 정치 인사들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단순히 이원화해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색깔론으로 변질시켜선 안 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편향성이 아니라, 도덕성과 공동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셋째로 이를 위해서 시민사회가 정치 공동체에 대해 갖는 우선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교회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존재합니다. 인간은 가정과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를 실현하고자 노력합니다. 이를 보다 쉽게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바로 공동선의 확대이며 정치공동체의 존재이유도 여기에 있고, 이념적인 추구도, 정권교체의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당은 개인과 시민 사회의 공동선에 대한 열망을 반영하고 추구하는 일을 등한시한 채 정당 간, 정당 내의 싸움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당은 정당한가?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을 단순히 헌법과 민주주의, 법치에서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복음의 기준에서 던질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소속과 이념을 떠나서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5-26)


* 김성수 신부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월 10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


인간과 사회 모두를 위해 움직인다


요사이 여러 사회 문제에 교회가 적극 개입하고 있다. 10년 이상 계속되어온 밀양송전탑 반대로 시작해서 핵발전소 반대로, 제주도 강정의 해군기지 반대에서 평화운동으로, 쌍용자동차로 시작해서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런 만큼 교회 안에서 찬성하고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으며, 반대와 거부의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나름대로 일리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 입장 중에서 교회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특히 교회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 개입해야지 구체적인 국가정책이나 이해관계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그러하다. 교회는 윤리와 인간문제의 전문가이므로, 구체적인 사회의 영역에서는 다른 전문가들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과학기술의 영역인 핵발전소를 반대하거나, 구체적인 국가정책인 해군기지를 반대하거나, 이해관계의 영역에 속하는 노동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뜻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과학기술이나 국가정책이 한 사회의 문화와 윤리, 그리고 정치경제적 영향과 관계없이 마치도 진공관 안에서 이루어지듯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며 투명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연과학의 역사는 과학기술이 다양한 사회적 영향을 받아 진화하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과학기술은 한 사회의 가치와 윤리, 자본과 노동의 관계 등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는 것이다. 더욱이 한 국가의 정책은 한 사회의 여러 이해관계들을 조정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특정 이해를 대변하기도 한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우산장수와 짚신장수를 함께 만족시키는 정책은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과학기술과 국가정책이 기업과 자본에 의해 영향을 받고, 또 심한 경우에는 기업과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언론과 미디어에 의해 마치도 모든 구성원을 위한 것인 양 호도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과학기술의 영역이거나 전문적인 정책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교회가 윤리와 인간 문제의 전문가라는 이유로 사회와 국가의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교회(종교)와 세상(세속) 사이를 갈라놓고 교회가 세상의 일에 관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세속화의 하나이며, 더 나가서는 특정한 이해관계의 입장에서 사회적 공론과 사회 각 분야의 민주적 통제를 부정하는 발상일 뿐이다. 우리가 윤리라고 하는 부분은 개인의 양심과 내면에 관계된 것일 뿐 아니라, 한 공동체의 올바른 규범과 생활방식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윤리는 각 사람이 직접 맺고 있는 기본적인 관계에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러한 사회적인 관계는 법률과 제도, 정치와 정책 등의 구조에 의해 언제나 매개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윤리의 핵심인 사랑 역시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의 원칙”(베네딕토 16세, 「진리 안의 사랑」 2항)이 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관심은 인간의 참다운 발전과 사회가 인간의 모든 차원을 존중하고 신장시키는 사회로 발전”(성 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1항)하는 데에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다. 종교는 국가 사회 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라고, 국가 사회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다.”(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183항)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과 신학대학 교수를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월 17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올해 기억해야 할 일들


2016년을 바라보며


벌써 2016년을 시작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각자가 한 해를 시작하면서 세운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그 계획이 나만의 계획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뜻 안에서 특별히 ‘자비의 희년’을 지내면서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는 신앙인의 계획인지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올 한 해를 지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았으면 하는 일들을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먼저 올 한 해가 자비의 희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희년 따로, 삶 따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올 한 해 동안 신앙인으로서 나의 결정과 판단이,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것인지,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루카 6,36) 이루어지는 일인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은 일본 위안부 문제와 4월 16일 세월호 2주기에서처럼 소외된 이들, 상처받은 이들을 어루만지는 일입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성명서에서도 밝힌 것처럼 국민의 공감대와 역사적 반성이 필요한 문제를 그저 돈 몇 푼과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할 수 없고, 정부 간 합의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릴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위로가 무엇인지, 그를 통해 우리 사회가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다음은 준공식을 앞두고 있는 제주 강정 해군기지 문제입니다. 평화의 섬 제주를 지키고자 하는 수많은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해군기지 건설은 진행되었습니다. 현실적인 필요와 경제적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지역 주민들의 삶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육지와 달리 가족같은 끈끈함을 보여주던 제주 섬마을 강정의 주민들은 분열되었습니다. 아직도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서로 다른 가게만 찾고, 얼굴도 마주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삶의 문제를 바라보지 않으면서, 당사자들의 삶은 고려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평화와 안보를 이야기할 수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4월 13일에 있는 국회의원 총선거도 기억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소명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선을 확대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선거구 확정부터 삐걱거린 이번 총선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선거가 아니라, 참으로 국민을 위한 선거, 진정한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한 그런 선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해마다 맞이하는 의미들이 있습니다. 5월 가정의 달, 6월 호국보훈의 달, 8월의 광복절, 9월 민족의 명절 추석, 이밖에 순간순간 새롭게 우리를 맞이할 다양한 사건 안에서, 특별히 부조리하고 고통스러운 구체적인 현실에 직면하여 내가 신앙인임을 잊지 말고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모르면서 하느님만 아는 것은 자만을 낳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모르면서 우리의 고통만 아는 것은 절망을 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중용을 지키게 되는데,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느님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 블레즈 파스칼


※ 지금까지 ‘사회교리 아카데미’ 집필을 맡아 수고해주신 김성수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호부터는 이동화 신부님께서 단독 집필해주시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월 24일, 김성수 신부]


[사회교리 아카데미] 소비사회


풍요로운 삶에 가려진 ‘빈곤’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 한편으로는 빈곤의 사회다.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가난을 탈출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고 빈곤은 고스란히 대를 이어 물려져 내려온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 사회는 풍요의 사회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의 소비 수준을 살펴보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고 우리나라와 경제 규모가 비슷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소비를 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사람들은 빈곤을 부지런하지 못한 개인의 문제로 돌려버리기도 하고, 끝없는 경제 성장이 모든 사람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풍요의 ‘소비사회’는 끝없는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후기산업사회의 자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대량생산으로 이루어지는 풍요로운 사회는 쌓여있는 생산물을 처리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소비를 인공적으로 부추길 수밖에 없다. 소비와 소유에 대한 개인의 욕구와 욕망은 광고와 마케팅 기술에 의해 더욱더 정교해지고 더욱 부풀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대나 막연한 믿음과는 달리 인간이 경제적 선택(특히 소비)을 할 때도 그러하고 정치적 선택(특히 선거)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선택들이 주체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에게 정보가 많은 것 같지만, 실상 그 정보의 대부분은 광고와 정치 선전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주체적으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구조적으로 선택당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우리의 풍족한 소비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그리고 다른 어느 곳보다도 더욱 풍요로운 삶을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와 시장의 강제에 의해 억지로 요청된 것일 뿐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소비 생활을 돌아보면, 우리의 필요와 자연스러운 욕구를 넘어서서 사물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마치 자신인양 생각하거나 또는 그 사물을 가지면 자신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필요에 의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환상에 기초해서 소비하는 것이다. 이른바 명품이라고 불리는 옷과 가방이 그러하고, 어떠한 악조건도 뛰어넘을 자동차가 그러하며, ‘사는 곳이 나를 말해준다’고 광고하는 아파트가 그러하다. 이런 사물들을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것은 판타지(fantasy)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맛과 취향도 사실은 명예와 지위 획득의 사회적 ‘구별짓기’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된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분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소비사회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렇게도 비판하던 우상 숭배, 특히 물신(物神) 숭배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끝없는 경제 성장’이다.


끝없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 그리고 끝없는 경제 성장 이데올로기의 덫에 걸린 사회를 극복하는 길은 그리스도교의 가난의 영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어야 한다. 물론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거나, 그 극복 역시 개인의 책임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욕망과 이데올로기 위에 세워진 이 사회를 극복하는 것은 개인의 회심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복음적 요청으로서 가난은 극단적인 무소유의 요청이 아니라, 소유와 소비에 의존하여 자기 자신을 정립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하느님께 돌아서는 길이고, 하느님이 새겨주신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찾고자 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가난으로의 방향 전환이 이 우상의 사회를 극복하는 길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월 31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대한민국 청년에게 없는 것


가능성 없기에 나라를 떠나고 싶다


막 사제품을 받고 보좌신부로 사목했던 첫 본당에서 한 청년이 찾아왔다. 그때는 고등부 학생이었는데 벌써 30대 중반의 청년이 됐다.


그저 그런 지방 사립대를 나와 중소기업 몇 곳에서 일하다, 이제는 이민을 준비한다고 한다. 못 먹고 사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이민까지 가야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마치도 준비했다는 듯이 너무나 명쾌한 이유를 내놓았다.


첫째, 자신이 돌아다녀보거나 이리저리 알아본 호주나 북유럽 등의 나라에서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먹고 살만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 1시간 일해서 얻는 최저임금 6030원으로는 점심식사 한 끼는 커녕 커피 한 잔 마시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최저임금조차도 지켜지지 않는 사업장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나라들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오히려 험한 일을 할수록 얻는 소득이 높다는 것이다. 1시간 일하면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앞에서 언급한 외국에선 레스토랑이나 가게 같은 곳에선 말할 것도 없고, 농장이나 공장 같은 곳에서도 일을 시작하고 끝내는 시간, 쉬는 시간 등이 확실해서 험한 일이라 하더라도 혹사 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8시간 노동에 쉬는 시간이 확실한 사업장은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윗사람의 눈치를 엄청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민을 가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청년들이 가지지 못하는 게 바로 가능성이란다. 지금 고생하더라도 미래 가능성이 있다면 견디고 이겨내겠지만, 가능성은 커녕 지금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만 태산이라는 것이다.


이 청년의 이야기를 단지 한 개인의 주관적 느낌이나 생각으로 치부할 수 없다. 사실관계가 확실한 지 볼 필요도 있고, 또 주관적 시선이 강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오늘날 우리의 노동현실과 청년들이 처한 현실이 어떠한 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진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노동자들의 평균 소득은 낮고, 노동시간은 훨씬 더 길고, 노동 강도도 훨씬 더 높다. 노후연금이나 의료, 교육 등의 사회적 보장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은 비정규직이며, 비정규직의 소득은 정규직의 60% 정도이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 번 비정규직으로 시작하면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통계가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가난에서 벗어나는 경우(즉 빈곤탈출률)는 최근 10년 동안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또한 노동으로 버는 소득(근로소득)은 점점 낮아지고 있는 반면, 은행 이자나 주식 배당금과 같은 자본소득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부와 가난은 각각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부모가 가난하면 나도 가난하고, 부모가 비정규직이면 나도 비정규직인 것이다.


그 청년의 마지막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신부님, 우리나라 청년들이 가지지 못한 게 뭔지 아세요? 첫째는 가능성이고, 둘째도 가능성이고, 셋째도 가능성이에요. 빨리 짐 싸서 이 나라를 떠나는 게 정답입니다.”


그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그에게 뭐라 답해야 할까? 이런 상황 앞에서 교회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상황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사회교리는 바로 이 도전에 대한 응답에서 출발한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2월 7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환대와 연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에서 연대까지


의학의 기원과 발전이 그러하듯이, 의사와 병원의 시작 역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고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병원, 즉 환자를 받아들여서 회복할 때까지 보살펴주는 종합병원은 16세기에 와서야 등장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형태의 의료기관을 호스피탈(hospital)이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가톨릭교회, 특별히 수도회가 실천해온 ‘환대(hospitality)’에서 나온 말이었다.


실제로 중세와 근세를 거치면서 많은 수도회들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환대의 정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수도원이 자리 잡은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빵을 나누는가 하면, 수도원의 몇 개의 방은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들을 위해 언제나 남겨두었다. 병자들을 위해서 의료 봉사를 하는가 하면, 병자들이 수도원에 머물면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수도원을 열어놓기도 했다. 병자들을 환대(hospitality)하던 수도원의 시설이 종합병원(hospital)로 바뀌게 된 것이다.


더 나가서, 많은 수도자들은 나병이나 페스트 같은 무서운 전염병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병자들과 동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벨기에의 다미안 신부는 나병 때문에 “저주받은 섬”이라고 불리던 몰로카이에 기꺼이 들어가서 나병환자들의 삶에 동반했다. 자기 자신도 나병으로 고통 받았지만 몰로카이 섬을 떠나지 않았다. 이처럼 그리스도교가 오랫동안 실천해온 환대란 단순히 손님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난하고 약하고 아픈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 나가서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단순한 환대를 넘어선다. 즉,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찾아가서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참다운 환대는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것,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이들을 변호하고 대변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빵을 나누어주는 것을 넘어서서, 나의 공간을 비워 내어주고, 시설을 만들고,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아픈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연민에서 시작하여, 가난한 이웃을 받아들이는 환대로, 그리고 그들의 여정에 동반하고 그들의 처지를 변호하는 연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사랑의 최고 형태는 약자와 맺는 연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정치적 선택과 결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많이 풍요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삶에 힘겨워 하는 이웃들이 적지 않다. 아닌 게 아니라 세계 경제 10위권의 우리나라가 복지 제도로 따지자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0여개 나라 가운데 꼴찌에 가깝다. 4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사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환대’의 정신을 실천하는 길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응답하기 전에,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다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호소를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하신 명령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고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발전을 촉진하도록 일하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우리가 부딪히는 구체적인 곤경에 대처하는 연대성의 작은 일상적 행위도 의미합니다. 이는 어쩌다가 베푸는 자선 행위 이상의 것입니다. 이는 소수의 재화 독점을 극복하고 공동체 차원에서 모든 사람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전제로 합니다.”(「복음의 기쁨」, 188항)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2월 21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사회구조와 사회교리


사람을 살리는 구조 변화가 먼저입니다


공관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결심을 한 최초의 계기는 안식일 논쟁(마태 12,14)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노동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다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는데, 이 일이 당장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흠 잡혔던 것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주시는 “노동”을 감행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하여, 적어도 외적으로는 안식일 법 규정을 완전히 뒤집어 엎으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일탈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뿐 아니라 헤로데 당원까지 한통속이 되게 만들었다(마르 3,6).


복음서들은 여러 차례 예수님이 병자들을 만났을 때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또 병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등, 예수님과 병자들의 관계에 대해 전한다. 그러나 적어도 안식일 논쟁에서는 세 복음서 중 어떤 복음서도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안식일이라는 사회적 제도와 법규를 둘러싼 갈등을 전해줄 뿐이다.


원래 안식일에 관한 제도와 법률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억압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 자신들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들 사이의 관계, 더 나가서는 자신들과 우주만물과 맺는 관계를 규정하는 법률이었다. 안식일은 인간이 노동의 고역에서 해방되는 날이고, 안식년은 땅과 자연이 해방되는 해이며, 안식년이 일곱 번이 지나고 난 다음해에는 모든 사회적 관계가 해방되어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는 희년이다. 해방과 회복의 해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안식일은 해방이 아니라 억압의 법 규범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규정이 아니라 죽이는 규정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특히나 아픈 사람,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 가난한 사람에겐 더욱 가혹한 법이었다. 이렇게 법과 제도가 한 사회 안에서 굳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옳고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쉽사리 그 규범을 넘어서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사회의 제도와 법률, 문화 등의 구조들이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가치인 이웃사랑을 방해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랑의 가치를 증진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구조라고 부르는 법률, 제도, 문화 등이 인간관계와 사회관계를 규정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회구조 안에서 영향 받고 그 안에 갇혀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겠다고, 사랑하며 살겠다고, 정의롭게 살겠다고 다짐해도 우리 사회가 선하고 정의롭게 변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와 법률이라는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쇄신시키는 것 역시 사랑의 실천이요 정의를 위한 투신이 된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애덕의 실천은 자선 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빈곤문제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들에 대처하는 것도 포함”(간추린 사회교리 184항)한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의 원칙”(베네딕토 16세 「진리 안의 사랑」 2항)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사회구조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며, 가톨릭 사회윤리는 법과 제도를 포함하는 사회구조의 윤리이다. 그리고 사회구조라는 담을 넘어서서 그 담 자체를 바꾸고 고치는 것을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흔히 폄하되기는 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205)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2월 28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우상숭배의 뿌리


물질 향한 욕망으로 하느님과 멀어지다


성경, 특히 구약성경의 역사는 죽음의 우상과 생명의 하느님 사이의 끝없는 싸움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은 이집트 거짓신들에 대한 생명의 하느님의 힘찬 승리를 보여준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집트 신들의 억압과 착취의 세계를 벗어나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모세에게 불평을 쏟아놓았다. 광야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뀌어도,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의 배를 채워도 그들의 불평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모든 금붙이들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금송아지가 이집트에서 자신들을 이끌어낸 신이라고 여기며,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고 놀며 축제를 벌였다(탈출 32,5-6). 이스라엘 백성은 억압과 착취를 당당히 끊어버리고 이집트를 탈출했지만, 자신들의 삶과 정신 안에 내면화된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을 실현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과 그 믿음의 상징으로서 금송아지로부터는 탈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랜 광야 생활 끝에 정착한 가나안 땅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풍요의 신이었던 바알 신을 섬기는 일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합은 시돈 왕 에드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고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도 만들었다. 이러한 바알 우상에 맞서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가르멜 산에서 대결하여 승리하였다(1열왕 18, 20이하). 오므리 왕조를 물리치고 등장한 예후 역시 모든 바알 예언자와 사제들과 대결(2 열왕 10,18-27)하였고, 예언자 호세아도 바알 종교의 영향이 만연하여 야훼를 바알이라고 부를 정도로 부패한 이스라엘을 질책하였다(호세 2,16).


이처럼 구약성경의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 중의 하나는 우상숭배와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우상숭배가 단순히 마술적이거나 미신적인 종교심성 또는 특정지역에 한정된 토속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상숭배의 뿌리는 그것보다 훨씬 깊다. 금송아지와 바알 신은 풍요를 약속한다. 그리고 물질적 풍요에 대한 인간의 깊은 욕망은 금송아지와 같은 상징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뿌리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불평했다. 더 많은 풍요를 원하며 금붙이로 신을 만들었다. 이러한 욕망은 현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환상 속에 있는 것이기에 끊임없이 지속되고, 인간과 공동체를 파괴시키며, 새로운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인간 욕망과 사회 구조의 순환하는 시스템이 우상숭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상숭배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대면했던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역시 똑같은 도전을 받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분명히 지적하시듯, 오늘날 우리 시대의 새로운 우상은 돈이다. 고대의 금송아지에 대한 숭배가 돈에 대한 물신숭배라는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물신숭배는 비인간적인 경제적 독재의 구조와 풍요로운 소비에 대한 욕망 사이의 순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복음의 기쁨」 55항 참조). 이러한 비인간적 경제 모델은 여러 가지 얼굴과 이름을 가지는데, 그것들은 다름 아닌 ‘효율’ ‘경쟁력’ ‘경제성장’ 등으로 표현되며, “기업이 잘 돼야 서민이 잘 된다”는 말로 나타난다. 역사적 현실과 사회적 맥락에서 떨어뜨려 놓으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일 뿐이다. 경제성장과 기업의 이익이 곧바로 서민들의 복지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다.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예수님이 빵을 거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빵이 많다고 모두가 풍요롭게 사는 것도 아니요 인간답게 사는 것도 아니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6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선거용 민주주의


국민 대변하는 제대로된 정치를


선거철이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 하는데, 돌아가는 꼴은 강호의 무림천지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대통령에서부터 지역의 국회의원을 꿈꾸는 사람들까지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예사롭지가 않다. 모든 게 선거를 앞둔 이들의 말과 행동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선거철에 맞춰 각 정당의 경쟁도 서로 날카로워지고, 각 정당 내부에서도 후보자 공천 기준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자기 정당 안에서, 그리고 자기 지역구 안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런 치열한 경쟁과는 달리 진짜 고민해봐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이 없다. 이미 브라질이나 멕시코와 같은 수준으로 치달은 양극화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평화에 대해서, 그리고 양극화에 대해서 정부와 다른 견해를 드러내면 어김없이 종북이니 좌파니 하는 정치적인 꼬리표가 붙여진다. 무서워서 그런 건지 더러워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정치엔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다. “보수는 개혁”이라는, 마치도 “동그라미는 네모”라는 말장난만 난무하다.


원래 민주주의는 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대표해서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회적 집단 사이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에서 빚어지는 사회적 갈등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갈등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적인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타협하고 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게 민주주의다. 그리고 그 이해관계를 정치적 결사체, 즉 정당이 정치적으로 대표(representation)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각각의 사회적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정치 결사체가 제대로 존재하거나 기능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특히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 농어민,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정당은 제대로 제도권 정치 안으로 들어오기 힘들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선거제도가 대의 민주주의의 원리를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두 거대정당은 전체 유권자의 투표수에 비해 과잉 대표되고 있으며, 반대로 소수의 정당들은 과소 대표되고 있다. 지역으로 눈을 돌려보면, 이런 현상이 정치와 민주주의를 얼마나 훼손하는지 분명히 볼 수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부산광역시 의회 선거에서 특정 거대 정당의 득표율은 67% 정도였지만, 20년간 줄곧 시의회에서 이 정당의 의석수는 거의 100%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서 보수적인 언론과 정당의 정치적 선전도 한몫을 더한다. 수출 대기업을 우선적이고 중심적으로 지원해서 경제 성장을 이루면, 그 혜택이 모든 국민에게 돌아갈 것인 양 선전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것으로 극소수 부자들의 자기변호에 불과(영국주교회의 「공동선」 72항)하다.


이런 결과로, 두 거대 보수 정당이 모든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대변(모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지만)하는 정치 지형이 이루어졌다. 어제 저 당에 있던 사람이 오늘 이 당으로 옮겨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양극화와 불평등 구조는 더욱더 심화되었다. 사실 정치와 민주주의의 과잉이 서민을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치와 민주주의가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민주주의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대표할 힘을 갖춘 성숙한 시민사회와 사회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간추린 사회교리」 417항)가 필요하다. 그런 전제 없이,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선거 때만 요란한 선거용 민주주의일 뿐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13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사회적 다원주의와 민주주의


민주주의 발전 가로막는 경제 집중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나친 집중화는 지난 시기 우리 사회가 이루어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날 우리 사회의 발전에 족쇄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먼저 경제의 집중화를 들 수 있겠다. IMF 금융 위기 이후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 재벌이 등장했다. 물론 이전에 재벌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또한 근대화 초기에 수출과 기술 개발에 기여한 역할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거대 재벌은 상속되는 가족 소유와 총수 중심의 경영체제로 우리나라 경제의 효율성과 건전성을 위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보다는 지대추구라고 불리는 국가 보조금을 타먹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미 창출된 가치를 빼앗는 방식(예를 들어 대형 마트나 골목길 빵집을 생각할 수 있다)으로 건강한 시장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경제의 집중화를 만들어내는 거대 재벌의 등장은 여러 형태로 민주주의의 작동을 저해하고 왜곡한다. 자신의 경제적 이해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행정-입법-사법부에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자금을 뿌리는 것은 이미 오랜 관행이라 보인다. 정부의 주요 정책 결정과 국회의 입법 행위에 거대 기업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공적 행위와 소수 기업집단의 이해관계와 사적 이익의 경계가 무너진다. 그리고 이런 사회 구조는 언론을 통해서 신화와 우상으로 변형된다. 기업이 잘돼야 경제가 잘되고 서민이 잘 산다는 신화로, 그리고 어느 기업이 없으면 우리나라 경제가 망한다는 식의 우상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소수 부자들의 생각을 자신들의 생각으로 아무런 비판과 성찰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구조와 사회의 통념은 우리 사회의 교육, 문화, 지역 속으로 퍼져 들어가 하나의 단일한 가치 체계를 만들어내고, 다양한 영역의 권력과 영향력을 단일한 체계로 집중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집중화는 민주적이고 자율적이며 주체적인 발전, 그리고 균형적이고 수평적인 발전을 가로막는다. 이런 사회는 제도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하더라도, 또 선거를 통해서 공직자를 선출하고 있다하더라도 사실상 민주주의라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사회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다원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기초해 있다. 인간의 사회적 본성은 단일한 형태가 아니라 여러 다른 형식의 표현된다. 그러므로 사회를 형성하는 여러 요소들은 각자가 그 안에서 자신의 특성과 자율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간추린 사회교리 151항)가 되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현세 사물의 정당한 자율성”(사목헌장 36항)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정치공동체는 이러한 현세 사물의 정당한 자율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발전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 안의 각각의 영역과 집단에 대해서 지나친 간섭과 개입은 삼가야 하고, 도와주는 방식으로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조성의 원리가 의미하는 바다. 그러나 다른 영역과 중간적인 집단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해치는 힘이 있다면, 다른 영역과 집단을 위해서 그 힘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시장의 힘이 지나쳐서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다원성을 훼손한다면 그 힘은 통제되어야 한다. 공동선의 원리가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와 같은 절차를 잘 따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다원주의에 기초하여 보조성과 공동선의 원리가 균형 있게 이루어낸 결과(간추린 사회교리 407항)라고 할 수 있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20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세상 속 신앙인


물살을 거슬러 연어처럼


상본이나 성화 안에서 물고기를 쉽게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으니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상징으로 물고기가 제격이다. 재미있게도 옛 그리스 말의 물고기(Ichthus)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말의 그리스 알파벳 머리글자로 이루어진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로마와 그리스로 전파되었을 무렵, 신앙인들은 물고기가 새겨진 나뭇조각이나 돌을 가지고 다니며 자신들이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드러내 보였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그리스도인들의 지하 무덤인 까따꼼베의 프레스코 벽화에서도 물고기를 볼 수 있다. 초세기 신자들은 이렇게 자신들끼리 소통했고, 또한 모진 박해도 견뎌내었다. 물고기의 표식은 그리스도교의 신앙 내용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고, 또 한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하는 표식이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했다.


이처럼 물고기가 신앙인의 정체를 드러내준다면, 물고기 중에서도 연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 안에 있지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고기 표식은 박해 시대에 비밀스럽게 자신이 신앙인임을 알려주던 표식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거슬러 살아야하는 신앙인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세상을 거스르는 존재로서의 집단적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해왔는지 보여준다. 특히 2-3세기의 교부 시대는 유대교와 유대 지역을 떠나 교회가 더 넓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던 때였다. 이즈음에 교회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학문적으로 설명되기 시작했고, 미사전례 형식이 서서히 고정되기 시작했으며, 평일과 주일, 축일과 대축일이 구분되기 시작했고, 성사가 집행되기 시작했다. 교리와 전례를 통해 교회 안에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면, 교회 바깥을 향해서도 세상과는 다른 윤리와 이웃사랑의 실천을 통해 외적 정체성 역시 뚜렷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세상과는 다른 뚜렷한 윤리와 실천의 기초는 ‘대조사회’(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분도출판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대조사회란 마태오 복음의 산상설교를 근본으로 삼아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고 대조되는 새로운 세상을 뜻한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삶의 태도로 삼고 그 가르침이 사회 속에 확산되어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형성되도록 실천하는 대조사회의 삶에 모든 신앙인이 초대받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세상을 거스르고 세상과 싸움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했다. 교부 디오니시오스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 그들을 변호하기를 설교했으며, 떼르뚤리아누스는 황제에게 순종하지 말고 정의에 순종하라고 가르쳤다. 떼르뚤리아누스와 더불어 오리게네스 역시 그리스도인은 황제의 군대에서 복무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변화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을 거슬러 세상과 싸워야만 했다. 고된 일이나 명예나 삶의 안락함도,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내어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물살을 거슬러,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물고기는 연어가 아닌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물고기로 차려진 아침식사에 제자들을 초대(요한 21, 12)하신다. 세상을 거슬러 세상을 이기는 삶으로 초대하신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27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과학기술의 발전과 공공성


과학기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3월 11일 아침 조간신문은 일제히 이세돌과 알파고의 두 번째 대국 소식을 전했다. 이세돌의 두 번째 패배를 놓고, 정보의 불균형으로 인한 불공정 경기라고도 하고, 이제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할 것인지 걱정하는 칼럼도 나왔다. 그러나 굳이 알파고의 이야기를 들먹이지는 않더라도, 이미 많은 사람들은 과학기술문명의 지속적인 발전과 진보는 인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과학기술로 말미암아 인류는 더 오래 살고, 더 풍족하게 살 것이라 믿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학기술과 관련된 정책과 결정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핵발전소에 대한 교회의 염려를 표명하는 것은 교회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고, 밀양이나 청도 등지의 시민들의 반대는 지역 이기주의이거나 보상금이나 더 받아내기 위한 얄팍한 수 정도로 폄하된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에겐 아주 익숙한 것이겠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사고방식을 기술 관료주의적 사고방식(technocratic paradigm)이라 부르고 있으며, 인간중심주의와 더불어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불러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한다.(「찬미받으소서」 제3장) 실제로 과학기술 또는 더 넓은 의미에서 지식과 학문, 또 전문지식이라는 것은 사회문화적이고 정치경제적인 요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내적 논리로 이루어지는 초사회적인 현상이 아니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의 역사는 과학기술이 다양한 사회적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과학기술은 한 사회의 가치와 윤리, 자본과 노동의 관계 등에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점에 대해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기술의 산물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술의 산물은 결국 생활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특정 권력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적 기회들을 통제하기 때문입니다.”(「찬미받으소서」 107항)


바로 이런 이유에서 과학기술의 공공성에 대한 성찰과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기업과 자본에 의해 연구 개발되고 상품화되고 있다. 그 결과 기업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각종 특허권과 지적재산권의 개념이 확산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과학기술은 그 영향이 매우 포괄적이어서 과학기술자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과학기술의 영역에서의 정책결정도 그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사회구성원의 참여가 필요하다. 더욱이 오늘날 정부에서 추진하는 과학기술 연구와 정책은 그 재원을 시민들의 재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또한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고자 합니다. 경제는 이윤을 목적으로 모든 기술 발전을 받아들이며 인간에게 미치는 잠재적 악영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찬미받으소서」 109항)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통제, 많은 사회구성원들의 참여를 통한 민주적 통제, 그리고 지구와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는 각성을 통한 영성적 통제가 필요하다. 과학기술문명이 일정하게 인류의 수명을 연장하고, 물질적인 풍족을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인류의 대다수, 특히 검은 대륙에서는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에서도 해방되지 못했고, 굶주림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에 핵폭탄이나 핵폭발 등 수백 만의 목숨을 사라지게 하는 것도 과학기술문명의 진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3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찬미받으소서


지구를 위한 우선적 선택


2016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생태환경위원회’를 신설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산하 환경소위원회를 확대하고 승격하여 신설한다고 하니 더더욱 잘 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에는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드러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류 공동의 집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민 때문이었다고 하니, 보편교회 목자의 깊은 성찰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고 지역의 문제를 돌보는 한국 주교단에도 감사드릴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깊은 생태적 성찰은 여러 모로 우리 시대에 큰 울림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교리의 역사에서 커다란 이정표가 된다. 아일랜드의 신학자 도널 도어에 의하면, 사회교리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실천에서 그 편을 먼저 선택하는 특별한 형태의 우선을 말하는 것으로, 교회의 전통 전체가 이에 관한 증거를 갖고 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사회적 관심」 제42항) 실제로 사회교리의 첫 시작은 “근로자들 대부분이 부당하게도 비참한 처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던 최고 목자에 의해 “점차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인정머리 없는 고용주들의 무절제한 경쟁의 탐욕에 무참히 희생”되는 노동자들을 변호하고, “극소수의 탐욕스런 부자들이 가난하고도 무수한 노동자 대중에게 노예의 처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멍에”(레오 13세 「새로운 사태」1항)를 뒤집어씌우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면에서 사회교리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에 대한 교회의 사랑어린 응답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지구의 울부짖음에 연결시킨다. 이러한 통찰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구의 오염과 기후 변화, 그리고 물의 부족과 생물 다양성의 감소 등 지구가 겪는 아픔은 고스란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면, 물이 부족하면 깨끗한 물을 사먹을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 보다는 물을 사먹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피해가 돌아간다. 핵 방사능을 비롯한 지구 오염에 더 많이 노출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로, 가난한 이들을 울부짖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똑같이 지구를 울부짖게 하는 근본 원인과 다르지 않다는 반성이다. 즉,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또한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고자 합니다. 경제는 이윤을 목적으로 모든 기술 발전을 받아들이며 인간에게 미치는 잠재적 악영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많은 집단은 현대 경제와 기술이 모든 환경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또한 비전문적인 언어를 동원하여 전 세계 기아와 빈곤이 단순히 시장의 성장만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그러나 시장 자체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사회 통합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찬미받으소서」 109항)


마지막으로, 인류가 우주만물을 자신에게 이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이제 인류가 우주만물의 일부이고 우주만물을 벗어나서 살 수 없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지구는 우리에게 자연자원을 가져다주는 원천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고 함께 가꾸며 가야 할 우리 ‘공동의 집’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의 울부짖음은 고스란히 우리의 울부짖음이고, 특별히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이 아닐 수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에 더해서, 지구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며, 한국주교단은 최고 목자의 호소에 ‘생태환경위원회’의 신설로 응답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10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사회문제와 그리스도인


성찰과 실천으로서 사회교리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가톨릭 사회교리는 단일하고도 완결된 교리 체계가 아니다. 사회교리는 그 뿌리를 성경과 교회 가르침에 두고 있지만, 언제나 현재의 상황과 미래를 위해 열려있다. 사회교리를 말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윤리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나 시대와 문화가 다르면 성경의 가르침도 확대되고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미 교부들도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고리대금을 못하게 하거나, 황제 숭배나 전쟁 참여를 금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회교리는 이런 전통 안에 서있다. 그러나 사회교리가 성경을 통해 전해지는 계시와 교부들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성경과 교부들의 사회적 가르침과 윤리를 사회교리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의 가르침 「새로운 사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이후 교황과 지역교회 주교들의 사회적 가르침을 사회교리라고 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사회윤리와는 달리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사회교리는 노동문제에서 출발하여, 경제문제, 특히 국제적인 경제적 불균형과 정의의 문제,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까지 확대된다. 120년이 넘는 교회의 사회교리 역사 안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 그리고 보조성의 원리들이다. 반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구체적인 상황이다. 이런 면에서 사회교리는 한편으로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대한 깊이 있는 신학적 윤리적 이론체계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에 대한 신앙적 성찰이며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과 투신에 대한 초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 문제에 관한 교리의 가르침은 대개 다음의 세 단계를 통하여 실천으로 옮겨질 것이다. 먼저, 실제 상황을 두루 관찰하여야 하고, 그 다음에 사회적 가르침에 비추어 그 상황을 면밀하게 평가하여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 시대와 장소의 특성에 전통 규범을 적용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여야 한다. 이 세 단계는 흔히 관찰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세 마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요한 23세 「어머니요 스승」 236항)


먼저 ‘관찰’의 단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의 사회현상에 대해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살펴봐야 한다. 자신 주변의 가장 작은 일에서 시작해서 정부의 정책이나 제도 역시 우리 관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누가 결정하는지, 그 결정으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그 결정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판단’의 단계에서는 우리가 관찰한 사회 현상이 과연 복음적인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우리 판단의 근거는 신앙과 복음의 빛이고 사회교리의 원리를 포함하는 교회 가르침이다. 더불어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시는지도 식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행동’의 단계에서는 우리 사회가 더욱 복음적인 방향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을 일을 찾고, 계획하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야고 2,17)이며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야고 2,20)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이렇게 닫혀진 이론 체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성찰과 식별, 행동과 실천을 통해 더욱더 복음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교회의 초대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17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교회 가르침으로서 사회교리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


넓은 의미에서 사회교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해석하고, 그 세상을 좀 더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변화시켜 나가기 위한 실천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실제 상황을 두루 관찰하여야 하고, 그 다음에 사회적 가르침에 비추어 그 상황을 면밀하게 평가하여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 시대와 장소의 특성에 전통 규범을 적용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요한 23세 「어머니요 스승」 236항)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세상을 성찰하고 실천하는 사회교리의 방법론은 실상 우리가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성찰하며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바꾸어 나가는 영성생활의 방법론과 큰 차이가 없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하느님 말씀에 비추어 돌아보고 바꾸어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조금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가톨릭 사회교리는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이다. 교도권이란 교회의 예언자 직무에서 나오는 것으로, 교회의 목자가 하느님 백성을 가르치고 이끄는 권한을 뜻한다. 보편 교회의 최고 목자인 교황과 지역 교회의 목자가 “교회가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과 사회 구조와 사회 변화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드러낸 것”(「간추린 사회교리」 79항)이 바로 사회교리다.


사회교리가 사회와 사회문제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해서, 교회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또는 시류에 영합하여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성경과 성전을 통해 전달되어지는 계시 진리와 인간 안에 하느님이 심어주신 양심과 이성을 통한 자연법 전통이라는 깊고 튼튼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 교회는 “사회교리로써 본연의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명에 충실”(「간추린 사회교리」 64항)하게 되고, “사회교리를 가르치고 보급하는 것은 부차적인 사안이나 활동이 아니고, 교회 사명에 덧붙여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교회의 봉사 직무의 핵심”(「간추린 사회교리」 67항)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바오로 6세 교황은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를 설립하고, 이 일을 맡기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황과 공의회의 “보편 교도권은 사회교리의 방향을 결정하고 사회교리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 한편, 사회교리는 주교들의 교도권 안에 통합되어, 주교들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여러 지역 상황에 맞추어 이 가르침을 번역하고 실천하면서 이 가르침에 정확한 뜻을 부여”(「간추린 사회교리」 80항)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강제할 수단을 교회가 갖고 있지 않으니 실천을 할지 말지는 신자 각자의 신앙의 결단에 달려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주교들을 향해 “종북”또는 “정치사제”라 비난하는 것은 신자들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적어도 이점에서 신자들은 교회와 목자들의 가르침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신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선한 의지를 가진 많은 사람들은 가톨릭 사회교리를 존중하고 있으며 깊이 대화하고자 한다. 그런 영향으로 유럽의 많은 국가와 정당들이 사회교리에 영감을 받아서 사회 전체를 위한 복지 정책을 내놓고 있다. 보조성의 원리와 공동결정의 원리를 담은 독일의 노동법이 특히 그러하다.


요사이 많은 교구에서 사회교리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런 강좌에 참여해보자. 무릇, 알면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24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에너지 소비사회


‘공동의 집’ 지구를 지켜라


이미 몇 차례 이야기했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특징을 들어보면 한마디로 소비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소비사회는 대량 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후기 산업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이후, 우리는 인류가 문명 생활을 한 이래 가장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풍족이 우리의 삶 자체를 풍요롭게 하거나 더욱 인간답게 만든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더욱 물질에 얽매여 살고 있고, 자연과 환경은 쉽게 사용하고 버려진 쓰레기로 고통 받고 있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면, 소비사회는 대량 생산으로 쏟아져 나오는 생산품들을 소비시켜야만 경제를 안정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광고와 마케팅 기술이 개발되고 발전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기술은 소비자의 욕구와 욕망을 계속적으로 부추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각 개인들이야 자신들의 선택과 소비가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소비자의 수요는 광고와 마케팅 기술이 만들어낸 욕구와 욕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라 생각되어지는 취향과 선호 역시 시장과 사회의 강제와 구조 안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소비 행태에 대한 미시적 분석은 우리 사회의 기술과 경제, 에너지 정책과 경제에 대한 거시적 분석으로 확대해 볼 수도 있다. 개인의 소비 행태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 그리고 에너지에 대한 우리의 필요와 수요 역시 우리 자신들의 주체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생산자와 시장의 힘에 영향을 받는다. 핵 발전 산업과 관련해서는 특히나 그러하다.


핵 발전 생산자들의 이해관계는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선전되어 왔고, 핵 발전 산업은 전문가가 아니라면 어떤 정보나 논의에도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폐쇄적으로 운영되어 왔다. 정부는 사회 전체의 에너지 수요를 적절히 조정하고,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는 노력보다는 핵 발전 생산자들에게 국민 세금으로 엄청난 연구개발비를 지원하는가 하면, 정부가 나서서 그들을 대변해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핵 발전 산업과 그 이익에 관련된 폐쇄적인 이익 집단을 ‘핵 마피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상 우리의 에너지 남용은 이러한 폐쇄적인 이익 집단의 선전에 의해 부추겨지고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기술-경제 사고방식(techno-economic paradigm) 또는 기술관료 사고방식(technocratic paradigm)에 대해서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태회칙이 경계하고 있다. 최근 반포된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직접적으로 핵 문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기술과 시장의 논리가 결합되어 생태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하며, 생태계를 보존할 수 있는 법적 틀을 반드시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경제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힘의 구조가 우리의 정치는 물론 자유와 정의를 지배”(53항)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익 집단 세력이 너무 크고, 경제적 이익 집단들이 손쉽게 공동선을 내쳐 버리고 정보를 조작”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제와 기술의 동맹은 그 즉각적 이익과 무관한 모든 것을 결국 배제”(54항)시켜 버린다. 이런 의미에서 생태계를 보존하는 우리의 노력은 개인적 영역에서 잘못된 소비 습관에 맞서 싸우는 것뿐 아니라, 더 큰 영역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통제 그리고 사회구성원들의 더 많은 참여를 통한 민주적인 통제 역시 필요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1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안보 소비사회


국방 · 안보 논의, 시민들도 참여해야


미국의 34대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유럽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감독하였다. 이 작전은 유럽 전선에서의 승리뿐 아니라 전체 전선에서 연합군 승리의 도화선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맥아더 장군의 후임자로 한국 주둔 미군을 관리하기도 했다. 이렇게 아이젠하워는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이끈 탁월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으로서 아이젠하워는 1953년 연설에서 “모든 총과 군함과 로켓은 결국 배고프고 춥고 헐벗은 사람들로부터 훔친 것”이며 “노동자들의 땀과 과학자들의 재능, 아이들의 희망을 소비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불행하게도, 냉전 중이던 당시에 그의 비판을 귀담아 듣는 이는 없었다. 그 후 1961년 대통령 퇴임 연설에서 그는 미국의 군부와 군수산업 세력의 결탁 체제인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가 군사 부문을 넘어서서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전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이는 결국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과정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전쟁 영웅이었지만 다른 한편 군수산업의 팽창을 경계하고 민주주의를 걱정한 정치가이자 예언자이기도 했다.


그가 경계한 대로, 실제로 과도한 국방비 지출로 경제를 부양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져가야 할 몫을 빼앗는 것이다. 오늘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미군 1명을 훈련시키고 무장하고 유지하는데 연 100만 달러가 든다. 그러나 2010년 조사에 따르면 빈곤선 아래로 떨어진 미국인의 수는 7명 중 1명꼴로 증가했다. 이런 의미에서 “군비 경쟁은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사목헌장」 81항)이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외침을 귀여겨들어야 할 것이다.


더 나가서, 오늘날의 소비사회에서 개인의 상품 소비는 물론 에너지와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소비 역시 소비자의 주체적인 선택과 결정보다는 생산자의 선전과 마케팅에 의해서, 그리고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생산자가 만들어 내는 신화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무기 생산자와 중개상들의 사고방식이 잠재적 안보 위협을 증폭시키고 사회 전 영역을 군사화시킬 가능성이 있으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군산복합체에 대한 경고대로 55년 지난 오늘날 미국은 항시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로 변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상당히 많은 국가들이 보호책으로 삼는 군비 경쟁은 평화를 확고히 유지하는 안전한 길이 아니며 또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균형도 확실하고 진실한 평화가 아니라는 확신을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한다. 군비 경쟁으로 전쟁의 원인들이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증대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신무기의 군비에 엄청난 재화를 소모하고 있는 동안에는 오늘날 전 세계의 수많은 불행에 대한 충분한 해결책이 마련될 수 없다”(사목헌장 81항). 따라서 평화의 첫걸음은 무력의 위협이 아니라 상호대화를 통해 신뢰를 쌓고, 그 바탕으로 군비 축소와 무장 해제로 나가는 것(「사목헌장」 82항 참조)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국방과 안보에 관한 논의에 소수의 폐쇄적인 전문가만이 아니라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또한 민주주의의 과정이기도 하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8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언론자유의 올바른 의미


한국 ‘언론자유지수’ 180개국 중 70위


세계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이 70위를 기록했다. 국제 언론감시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RSF)가 2002년부터 전 세계 180개국을 대상으로 평가하여 언론자유지수를 발표하는데, 2016년 언론자유지수에서 70위를 기록한 것이다. 이 단체는 현재 한국정부는 비판을 참지 못하고 있고, 미디어에 대한 간섭으로 언론의 독립성을 위협하고 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언론시민단체인 프리덤하우스의 2016년 언론자유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언론 상황은 199개 조사대상국 가운데 66위로서 ‘부분적 언론자유국’이라는 것이다. 이들 단체가 공통적으로 밝히는 바, 현재 우리나라 언론의 자기검열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언론이 정권과 권력에 예속되거나 통제받는다면, 설령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권력의 눈치를 본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과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선거 이외에는 정치와 정책 결정에 참여하기 힘든 구조 안에서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전달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나라의 주류 언론이 대기업화되어 자기 언론사의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거대 광고주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 역시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는 한 사회의 중심을 다원화하는 경향을 발전시키는 힘이어야 한다. 권위주의와 전체주의와 같은 비민주적인 사회의 특징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의 권력과 영향력이 한 사회 안에서 단일한 중심으로 응집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응집된 힘의 요소들을 해체하고 다원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언론은 이러한 일원적 응집을 극복하고, 다수의 의견이 자유롭게 소통되고 합리적으로 설득될 수 있는 영역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언론 자체가 거대 기업화될 경우, 이들은 여론 시장을 시장 독점의 논리로 지배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 모든 분야의 단일한 응집력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응집력을 강화함으로써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한다.


더 나가서는, 언론이 권력에 대한 감시의 기능을 잃어버리거나 기존 현실에 대한 비판의 힘을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에는 대기업으로서의 자기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기존 사회현실에 대한 정당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경우 기존 기득권의 이해를 몰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기 쉽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에 언론의 자유는 사실 19세기 민주주의에서 의견의 자유를 의미하는 언론의 자유와도 다르고, 가톨릭 사회교리의 ‘사상을 표현하고 전파하는 진리 탐구에 대한 자유’(「지상의 평화」 12항)와도 동일시 될 수 없다.


정보와 대중매체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 역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정보와 대중매체는 민주적 참여를 위한 주요한 도구이다. 이러한 도구를 통해서 실질적인 다원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이루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정보를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독점하거나 조종해서는 안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참조) 특히 대중 매체의 영역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내용(메시지)과 커뮤니케이션 과정(전달방법)뿐 아니라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기술과 정보의 분배에 관한 구조나 제도 역시 중요하다. 정보의 불균형은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를 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보와 대중 매체의 영역에서도 공동선을 위한 정책이 이루어져야 하고, 또 그러한 의사 결정 과정에 시민들의 많은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416항 참조)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15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제거되어야 할 불평등


대한민국은 ‘헬(hell)조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말 중에 이른바 ‘수저 계급론’이라는 게 있다. 한편에서의 부의 대물림과 반대편에서의 빈곤의 대물림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경제력과 직업 등으로 자신의 수저가 금수저인지 은수저인지 아니면 흙수저인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허투루 넘겨버릴 수 없는 이유는 최근에 나온 사회 통계들이 젊은이들의 이러한 절망적 직관들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저소득층의 ‘빈곤 탈출률’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고, 우리 사회의 경제적 상위 1% 또는 10%의 자산 비율 중에 상속과 증여의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주식 배당금이나 은행 이자 등의 자본 소득의 90%를 상위 10%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통계들이 가리키는 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부자는 열심히 일한 사람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 나의 사회적 계급과 지위는 나의 능력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주어지는 수저에 달린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신화가 되어버렸고,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맨주먹으로 시작했다’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버렸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 사회를 젊은이들은 ‘헬조선’이라고 표현한다. 지옥(hell)과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조선의 합성어이다. 안타깝지만 젊은이들 표현대로, ‘흙수저 물고 나온 당신에겐 헬조선’이다.


50년 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 역시 이러한 현상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인류가 이토록 풍요로운 재화와 능력과 경제력을 누려 본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 인구의 상당수는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고 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완전 문맹에 시달리고 있다.”(「사목헌장」 4항) 또한 “경제생활의 발전이 합리적으로 또 인간답게 지도되고 조정되기만 하면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바로 이 시대에, 때로는 더 자주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또 어떤 곳에서는 힘없는 사람들의 사회적 조건을 퇴보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쪽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거대한 군중은 아직도 생활필수품이 전혀 없는데, 어떤 사람들은 저개발 지역에서도 호화롭게 살며 재화를 낭비하고 있다. 사치와 빈곤이 함께 있다.” (「사목헌장」 63항)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정직이나 성실이라는 가치, 노동과 근검의 가치, 그리고 공동체 윤리와 공동체 의식이 건강하게 자리 잡기는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 전체를 파괴한다. 경제적 영역에서의 소수의 기득권 세력은 자신의 영향력을 경제적 영역 안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게 된다. 특히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치, 곧 공적 영역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칙은 1원 1표의 주식회사의 의사 결정 형태에 스며들게 되고, 민주주의는 급속도로 퇴행하거나 파괴된다. 더욱 심각하게는 경제 영역의 소수 독점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럼으로써 소수 독점이 정당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렇게 경제적 불평등은 단순히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비롯한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 심각한 문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가치를 파괴하는 윤리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경제적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가톨릭교회 사회교리의 핵심적 원리인 정의와 평등을 실현시키는 길(「사목헌장」 66항 참조)이기도 하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22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인간에게 봉사하는 경제


경제의 주체와 목적은 ‘인간’


일러스트 조영남지난 201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에서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모상을 경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죽음의 문화를 배척”하라고 가르치셨다. 지난해 유엔 제70차 총회 연설을 통해서도 경제의 주체요 목적은 인간이기에, 경제와 경제 제도는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어야 함을 일깨워주셨다.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이 반색하며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고민하는 가운데, 교황의 메시지에 난색을 표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교황이 남미 출신이라서 경제를 잘 모른다는 둥,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나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는 둥 이런저런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교황의 가르침은 가톨릭교회가 100년 이상을 지속적으로 사회교리를 통해 가르쳐 온 바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교황은 지난해 쿠바 방문을 마치고 비행기 안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단 한 번도 교회의 사회교리 너머에 있는 것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며 “사도신경을 외워보라면 난 준비가 돼 있다”고 농담을 던졌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봉사하는 경제 제도는 어떤 것일까?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은 경제생활의 몇 가지 원리들을 제시하는데, 이 원리들이 “인간이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사목헌장」 63항)이라는 것과 경제의 목적이 “오로지 인간에 대한 봉사”(「사목헌장」 64항)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무엇보다 먼저, 인간 노동의 우위성(「사목헌장」 67항)이다. 생산과 경제에 있어서 자본과 토지와 같은 요소들은 오로지 도구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동이야말로 경제생활의 다른 요소들보다 우월하다. 인간 노동의 최초 형태를 생각해본다면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가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하느님이 주신 자연 자원에 인간 노동을 투입한 결과물이 축적된 것이다. 그러니 인간 노동을 가장 우선에 두는 경제 제도가 필요하다. 둘째로, 기업 경영에 있어서나 더 넓은 차원에서 경영의 조건을 만드는 정치에 있어서나 모두 노동자의 참여와 공동의 결정(「사목헌장」 68항)이 이루어져야 한다. 경제 발전이나 노동 분야의 정책과 제도를 결정하는데 있어 소수의 집단이나 사람들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이런 결정들은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더욱 풍부한 논의와 참여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은 더욱 넓은 영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바탕이 되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재화, 특히 창조된 자연 자원은 모든 인류를 위해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를 사회교리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라고 표현한다. “다양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민족들의 합법적인 제도에 적용된 소유권의 형태가 어떠하든, 언제나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명심”해야 하고, “재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외적 사물들을 자기 사유물만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사목헌장」 69항)한다. 이는 사회교리를 넘어서서, 가톨릭교회가 처음부터 가르쳐 온 지상 재물에 대한 전통 교리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로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곧 구조조정이 시작될 모양이다. 구조조정이 곧바로 정리해고로 이어질까 염려된다. 정리해고로 이어지더라도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하고 공동의 결정으로 이루어지길 간절하게 빈다. 많은 노동자들이 갑자기 직장을 잃게 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이지만, 우리 경제와 노동 제도에 대한 윤리적 문제이기도 하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29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부자나라 가난한 사람들


열심히 일하는데 왜 가난한가


외국여행이라도 한번 가보면 세계 주요 도시의 중심에서 우리나라 기업 광고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길거리엔 우리나라의 자동차들이 돌아다니고, 외국인의 손에 우리 기업의 전자제품이 들려 있다. 마음 졸였던 외국 여행이 뿌듯함으로 채워진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나라는 세계 10위 권의 무역과 경제 대국이다. 그러나 이런 뿌듯함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당장 우리의 현실을 보면 기가 막히기 때문이다. 생계형 범죄는 이틀이 멀다하고 방송 매체에 올라오고 있으며, 젊은 친구들은 기가 죽어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신 어르신들은 만성질환과 가난, 고독과 싸우고 있다. 부자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왜 그럴까?


부자나라의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당장 일하지 못하고 소득이 없는 어르신들, 그리고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이 가난하다. 그런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거나,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부모 세대도 가난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 국가가 좀 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일반적인 우리 시민들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과 부조에 나선다고 생각하고 세금을 더 내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하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노동자들의 소득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재벌기업과 공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노동자들의 소득이 많지 않고, 더구나 우리나라 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소득 역시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빠는 물론이고 엄마와 대학 다니는 큰 자녀가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네 명의 가족이 겨우 먹고 살 만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신앙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실의 경제적 법칙은 신앙과는 관계없다고 여기며, 이런 비인간적 경제 법칙에 우리를 내맡겨야 할까? 그렇지 않다. 자연과 우주의 법칙도 조금씩 알아가면서 인류는 그 나름대로 자연에 순응하기도 하고 대처하고 극복하기도 하며 살아왔다. 그냥 경제법칙대로 따라가자는 말은 경제적 기득권자들의 자기 정당화에 불과하다. 신앙인들은 교회가 제시하는 “인간에게 봉사하는 경제”(「사목헌장」 64항)를 만들어야 할 윤리적 도덕적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 시작은 인간의 노동을 우선(「사목헌장」 67항)에 두는 제도와 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부동산(토지)과 기업 이윤(자본)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제도와 정책을 펴오지 않았는가. 그런 제도와 정책이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야말로 인간의 노동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마침 독일에서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자율적이고 공동의 결정을 존중하는 원칙을 깨고 작년 1월에 시간당 1만300원(8.5유로) 정도의 최저임금을 도입한 결과,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일자리가 늘어나서 실업률이 감소하고 노동자들의 평균 소득이 증가했으며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꽤 괜찮은 수준의 최저임금이 가난한 노동자들의 긴급한 필요를 해소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는 사회 전체의 적절한 소비를 증가시켰으며, 그것에 따라서 일자리도 서서히 늘기 시작한 것이다. 소비 진작을 위해서 부동산 취득세를 깎아준다든지 멀쩡한 날을 임시공휴일로 만드는 요란을 피울 일이 아니다. 경제 문제도 그러하고 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그러한데, 가장 깊은 밑바닥에는 경제 “법칙”이나 사회의 “법칙”의 문제보다는 윤리의 문제가 깔려 있다. 제도와 정책, 더 넓게는 정치가 하는 일은 얽혀 있는 이해관계 속에서 어떤 결정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지를 판단해야 하는 일이다. 소수의 이해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는 얽힌 것이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와 사회는 법칙이나 학문의 문제이기에 앞서 윤리의 문제다.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5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올바른 사회 질서의 열매


평화는 ‘정의의 작품’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위해 매일 같이 기도한다. 이러한 기도와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평화를 갈망하는 선한 의지와 마음을 가진 많은 이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평화는 아직도 먼 산과 같다. 이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평화에 대해 지나치게 피상적으로만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화에 대해 새로운 마음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는 적대 세력 사이의 군사력의 우위나 군사무기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미 강대국들의 무기고에 있는 무기들을 전부 사용하게 된다면, 이 무기 사용에서 오는 세계의 막대한 파괴와 그에 따르는 가공할 결과는 제쳐 두더라도 적대 진영 쌍방이 거의 완전히 몰살될 것이다”(「사목헌장」 80항). 군사력 위에 세워진 평화는 거짓 평화일 뿐 아니라, 모두의 파멸로 이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도 강자의 지배, 즉 전제적 지배나 독재 등의 힘으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침묵을 강요하는 것 역시 거짓 평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평화는 무엇이고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올바로 또 정확히 말하자면, 평화는 ‘정의의 작품’(이사 32,17)이다”(「사목헌장」 78항). 평화는 단일하고 독립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와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나 경제적 질서에 연결되어 있다. 평화는 정의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정의의 핵심 문제는 세상 재화의 균등한 분배와 공동선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평화는 우연히 또는 한두 가지의 해결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계속해서 추구되고 지켜져야 하고 이상을 향해 점점 접근되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나 “공동선이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평화는 결코 한 번에 영구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꾸준히 이룩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사목헌장」 78항). 그러므로 평화로운 세계를 위해서는 현재의 불의하고 불평등한 사회 질서를 올바르게 수정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평화는 궁극적으로 올바른 사회 질서의 열매(「사목헌장」 78항)이다. 올바른 사회 질서는 언제나 인간을 지향해야 하며, 사물의 안배는 인간 질서에 종속되어야 한다(「사목헌장」 26항). 그러므로 경제 질서나 정치적 질서가 인간보다 높은 서열에 배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든 사회 질서에서 ‘인간이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사목헌장」 63항)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전도된 가치와 질서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인간 중심적인 가치와 질서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참다운 평화를 이루기 힘들다. 이런 의미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 모두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고, 그럴 때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이 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라고 하신 주님의 가르침처럼, 평화를 갈망하고 이루는 노력은 정치공동체의 책무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정의와 평화를 증진하는 데 가톨릭 신자들의 공동체를 일깨우기 위하여 보편 교회의 한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제안(「사목헌장」 90항)했다. 공의회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바오로 6세 교황께서 설립하신 기관이 바로 정의평화위원회이다. 한국교회 역시 주교회의에서 각 교구에 이르기까지 정의평화위원회가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다. 모든 신자들의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할 때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12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영적 소비주의


개인주의 유혹에 허덕이는 신앙인들


교회의 장상들뿐만 아니라 교회에 신뢰를 두는 많은 이들의 고민이 깊어만 간다. 어떤 면에서 교회의 위기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신자 증가 비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물론 1980년대 후반 갑작스러운 신자 증가도 독특한 현상이었지만, 오늘날의 신자 증가 비율의 하락도 해석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신자 증가 비율이 하락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실제로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의 숫자 역시 눈에 띄게 늘지 않는다. 10년 전의 주일미사 참례자 수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성장’의 시대에 맞추어진 교회의 조직이나 기관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도 걱정이다. 예를 들면, 본당 신부들 사이에서는 서너 개로 늘여놓은 레지오 마리애의 ‘꾸리아’를 당장 어떻게 채울지 고민이라고 한다. 성소자의 감소로 어려움을 겪는 큰 수녀원이나 신학교의 고민도 비슷비슷한 듯하다. 활력 넘치던 청년이었던 한국교회가 빠른 속도로 유럽의 노년 교회로 변하는 중이다.


그러나 좀 더 내부자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더 큰 문제들을 발견하게 된다.


주일 미사에는 열심히 참여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교회의 계명과 실천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부활과 성탄 전의 고해성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수도 줄어들었고, 환자와 가난한 이를 방문하거나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레지오 활동으로 보고하는 이 역시 줄어들었다. 어렵고 힘든 일이야 누구나 피하려고 하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신앙과 사랑의 힘으로 어렵고 힘든 일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신자들을 찾기 어려워졌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어려운 일들을 묵묵히 하고 계시는 적지 않은 의인들 덕에 아직 교회가 생생하게 살아 있음도 알고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이 기도하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고, 영성을 추구하고 있지만 개인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신앙인들의 태도를 ‘영성 소비주의’(「복음의 기쁨」 89항)라고 비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서 벗어나 자기 사생활의 안락함 속으로 또는 가까운 친구들의 좁은 울타리 속으로 달아나며 복음의 현실적인 사회적 측면을 포기하고자 합니다 … 그런데 복음은 과감히 다른 이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만나라고, 곧 그들의 육체적 현존과 만나라고 끊임없이 초대합니다. 이는 그들의 고통과 호소를 또 잘 번져 나가는 그들의 기쁨을 직접 대면하여 만나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88항) 복음의 요청과 초대에 응하기 보다는 자기 사생활의 안락함이나 가까운 사람들과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도와 영성을 방편으로 삼는 것이 바로 ‘영성 소비주의’인 것이다. 특히나 신앙과 영성 생활을 자신의 ‘웰빙’을 위한 것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런 태도는 결국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는 ‘번영의 신학’(「복음의 기쁨」 90항)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런 현상들은 얼핏 보기에는 교회의 활력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교회를 내부에서부터 부패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어떤 것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험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 속의 소금이다. 소금은 부패를 막는다. 그리스도인은 소금으로서 자기 자신의 욕망과 환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욕망과 환상이 정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음의 기쁨’과 복음이 주는 위안은 이 세상의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해 서있는 이들이 가지는 기쁨이요 위안이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적지 않았던 ‘개혁’과 ‘쇄신’의 방향은 분명했다. 복음의 요청과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소금이 되는 길이었다.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19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기도와 단식과 자선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가톨릭 사회교리의 일차적 관심은 인간 사회의 질서와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는 복음과 신앙의 빛에 비추어, 그리고 동시에 사회교리의 도움을 받아서 정치와 경제의 질서, 사회와 공동체의 질서, 제도와 법률 등의 질서와 구조가 복음에 부합하는지를 규명하고 윤리적 판단을 한다. 그러나 현실의 질서에 따라서 살아갈지 또는 그 질서를 복음의 빛에 비추어 쇄신하며 살아갈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맡겨져 있고, 더 정확히는 우리 모두의 근본적인 회심에 맡겨져 있다. 오늘날 인간생활의 모든 면이 현실 질서와 구조에 갇혀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가진 자유의 능력은 그 구조를 넘어서 살 수 있도록 한다. 더욱이 이러한 모든 질서가 인간이 역사 안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런 질서를 더욱 인간적이고 복음적인 질서로 변형시키는 것 역시 인간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조 속에 살지만 그것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쇄신시키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소명이며 사회적 책임이다.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나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소명과 책임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하라고 가르쳐왔다. 무엇보다도 기도의 본질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마태 6,33)을 청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듯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마태 6,10) 청해야 한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죄와 악의 구조(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36항)는 하느님의 도우시는 은총 없이는 극복하기 힘들다.


오늘날 ‘소비사회’라고 일컬어지는 풍요로운 후기산업사회는 광고와 마케팅 기술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과 환상을 부추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자신의 소비와 소유를 통해서 자신 자신을 생각하고 평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물질문명 속에서 단식한다는 것은 단순히 끼니를 굶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참다운 단식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자신이 변화”(로마서 12,2)되는 것이다. 그러니 단식은 하느님이 주신 자기 자신을 되찾고 그 모습을 지키기 위해,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허상을 경계하고 울타리를 치라는 뜻이다. 이런 울타리 없이는 우리의 투신과 헌신도 쉽사리 권력과 향락 아래 무너지거나 그것들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자선은 단순히 자신의 남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도 부족한 것일지라도 기꺼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가서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의 원칙”(베네딕토 16세, 진리 안의 사랑, 2항)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참다운 자선은 자신의 재화를 나누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시간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의 질서, 경제적 제도와 구조, 그리고 정치적 질서를 쇄신시키고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다. 자선은 소규모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의 질서와 구조가 복음적이게 하는 모든 노력을 뜻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선은 사회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다. 그러기에 “정치는 흔히 폄하되기는 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205항)인 것이다.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26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정치와 종교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움직임


일러스트 조영남유신과 군사독재 시절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교회가 정부에 대해 비판이라도 하면, 어떤 이들은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을 들먹이며 교회를 비판한다. 정치와 종교, 정부와 교회는 분리되어 있으니 서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견이나 생각에 간섭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의 정교분리에 대한 이해는 올바르지 못하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살펴보자면, 313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칙령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는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고, 로마제국의 사실상의 국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국교화는 현대에까지 이어졌으며, 이태리와 스페인에서 가톨릭이 국교에서 벗어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며 영국은 아직도 성공회를 국교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고려 때에는 불교가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국교였다. 유교가 종교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으나, 조선의 국왕은 ‘종묘’와 ‘사직’의 제사를 주관한 사제였음은 분명하다.


이런 맥락 위에서 정교분리의 헌법적 원칙이 나오게 된다. 국교 금지를 비롯한 헌법상 종교규정은 미국의 수정헌법에서 시작되어 다른 나라로 영향을 끼쳤다. 미국 헌법의 종교규정은 종교 자유와 국교 금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우리나라 헌법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교의 자유는 내면적인 신앙의 자유와 외면적인 종교적 행위의 자유까지 포함한다. 예배, 종교적 집회와 결사, 종교교육, 선교 등의 자유가 종교 행위의 자유에 속한다.


미국 헌법과는 달리 우리 헌법에 명시된 ‘종교와 정치의 분리’는 적극적인 면에서는 국교의 금지 또는 국가에 의한 종교 활동을 금지한다는 뜻이고, 소극적으로 보면 국가에 의한 특정 종교의 우대 또는 차별 금지를 뜻한다. 그러니 정교분리를 상호 불간섭으로 이해하자면, 정부에 대한 비판은 물론이거니와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나 구국법회 같은 것도 이 원리에 어긋나고 위헌이 된다. 좀 더 근본적으로 보자면 ‘정교분리’의 원칙이 뜻하는 것은 종교적 영역에 있어서 국가 권력의 제한이다. 내면적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나 외면적 종교 행위에 있어서 국가 권력이 시민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특정 종교를 국가 권력이 자신의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들 사이의 종교 전쟁과 오늘날의 종교 다원적 현실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원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가톨릭 사회교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엇보다 먼저 보조성의 원리를 뜻하는 것이다. 신앙과 종교의 영역에 있어 국가 권력이 보조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뜻이고, 그런 의미에서 국가 권력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정치와 종교, 또는 국가와 교회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국가와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의 더 좋은 삶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와 정부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으로서 신앙 행위를 종교의 정치개입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교회의 사목자들은 인간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권리가 있다. 복음화 사명은 모든 인간 존재의 전인적 진보를 포함하고 또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복음의 기쁨」 182항). 더불어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무엇보다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제안을 하며 개혁적인 활동방향을 가리켜준다”(183항)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 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3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정치와 참여


정치는 공동선 추구… 선한 의지로 동참


간혹 신심 깊은 신자들 가운데 참다운 신앙인이라면 되도록 정치를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에게 정치란 세속적인 것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세속적인 것이다. 이 분들에겐 사제와 수도자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도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그분들 스스로도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문제에 대해 되도록 의사 표현을 자제한다. 그러니 특정 정당과 정파의 입장에서 사회교리를 왜곡하거나 사제와 주교를 향해서 ‘종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과는 결이 다른 분들이다.


어쨌거나 이런 신자들은 정치에 대해서 부정적인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나라의 교회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겠다. 오랜 박해와 순교의 역사 때문에 예전의 신자들은 되도록이면 국가 또는 정부에 맞서는 일을 회피했다. 더구나 프랑스 대혁명을 겪었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성향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이래저래 교회와 신앙인은 국가나 세속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몸에 배게 되었다. 실제로 일제 강점 아래에서도 교회와 신앙인은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니 오랜 구교우 집안의 신심 깊은 분들은 예전 신앙인들의 태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직접적인 이유는 여러 언론매체에서 흘러나오는 정치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나 종편 방송의 보도나 토론 패널들의 정치에 대한 관점은 권력 투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관점은 정치를 어떤 정당이나 정파 또는 어떤 진영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영역으로 본다. 어떤 정치적 사안이나 정책을 두고 벌이는 논쟁은 우리 사회의 공공성이나 시민들에게 끼칠 영향보다는 특정 정치인이나 집단의 사적인 이익을 위한 싸움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치는 언제나 말싸움이 난무하는 자리이고, 그까짓 거 이놈이 하나 저놈이 하나 똑같은 것이며, 정치하는 사람은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은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정치를 이렇게 본다면, 사실 신앙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거나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정치를 떠나서 살 수 없으며 오히려 정치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또 정치는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심지어 담배나 소주 가격을 결정하는 것도, 또 더 크게는 나의 정년 시기를 정하는 것도 정치가 하는 일이다.


이렇듯 정치는 공동체의 자원과 가치를 배분하는 일이며 동시에 그것을 위한 공동의 의사결정과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회에서 가장 큰 공동체인 정치공동체는 다른 작은 공동체를 도와주는 방식으로만 행동해야 한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이러한 원리를 ‘보조성의 원리’라고 한다. 그리고 정치공동체는 다른 모든 공동체들의 공동의 선익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이를 ‘공동선의 원리’라고 한다. 그러기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정치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정당화되고 그 의의를 발견하며, 공동선에서 비로소 고유의 권리를 얻게 된다”(「사목헌장」 74항)고 가르친다. 바로 이런 뜻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치는 흔히 폄하되기는 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복음의 기쁨」 205항)라고 가르치신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자신의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당장 굶주리는 이들에게 빵을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제도와 법률을 만들고 고쳐서 굶주리는 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이다. 권력 투쟁이 아니라 공동선의 실현으로서의 정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참다운 신앙인과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이 참여해야 한다. 더럽다고 피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복음의 기쁨」 182항)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10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경제의 참다운 의미


세계 전체를 관리하는 기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힘은 경제가 아닌가 싶다. 윤리적인 가치, 생명의 가치, 인간 삶의 가치 등 그 어떤 가치들도 경제적 가치 앞에선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 어떤 법칙과 논리도 경제 논리에 압도당하고 만다. 생명과 생태에 대한 가치는 가장 편리하고도 윤택한 삶을 선전하는 핵발전소 앞에서는 걸음을 멈추고, 공동체의 연대는 효율성 앞에서, 가난한 이웃에 대한 연민은 현실의 경쟁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경제적 가치가 가장 큰 가치이고, 경제 논리가 최고의 논리가 되어버렸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크고도 힘든 것이니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물질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점에 씁쓸하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가치관의 뒤바뀜, 가치의 무질서는 인간과 경제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경쟁을 통해서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으며, 그러기에 경쟁과 자기 이익을 부추길 때 더 많은 경제적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 대해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고, 경제에 대해서도 너무 피상적이다. 자기희생을 무릅쓰고서도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투신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경쟁보다 협력할 때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경제이기도 하다.


사실 경제는 집안을 돌보는 살림살이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날 경제(economy)를 뜻하는 말은 옛 그리스어의 ‘집’(oikos)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기에 경제(economia)는 어머니가 집안을 돌보듯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도 집안을 돌보는 것을 ‘살림’이라고 했다. 모두를 먹이고 살리는 것이 바로 경제의 본질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바로 우리 공동의 집이라고 가르친다(「복음의 기쁨」 206항, 「찬미받으소서」 1항). 그러기에 경제는 세계 전체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참다운 의미의 경제는 시장 안에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고 경쟁을 추구함으로써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신뢰를 두지 않는다. 더 나은 소득 분배, 일자리 창출, 가난한 이들의 진보는 시장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이 반영될 때 가능한 것이다(「복음의 기쁨」 203-204항). 뿐만 아니라 경제가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 전체를 돌보는 것이라면, 이는 필연적으로 고통으로 울부짖는 피조 세계를 외면할 수 없다. 집안 살림(oikos)은 세상 모든 이를 돌보는 경제(economia)로 넓혀질 수밖에 없으며, 참다운 경제는 울부짖는 생태계를 돌보는 생태론(ecologia)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교부 이레네오는 하느님의 구원경륜을 일컬어 ‘구원의 경제(economia salutis)’라고 표현했다. 참으로 경제는 어머니다운 마음으로 사람을 돌보는 것이고 하느님다운 마음으로 우주 만물을 돌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경쟁과 이윤, 효율의 가치가 우리 현실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가치로 이루어진 생산력이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일을 걱정하며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참다운 풍요는 아닐 게다. 오히려 협력과 공동체, 연대와 연민, 그리고 생명과 생태의 가치가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이 더욱 크다. 그것은 또한 이웃과 화해하고, 우주 만물과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협동조합이 성공을 거두고, 공동소유와 공동책임을 실천하는 기업이 더 많은 성과를 낸다. 눈에 잘 띄지는 않겠지만 하느님 나라의 표지는 우리의 생각보다는 더 많다.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17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경제의 참다운 의미


사유 재산의 의미와 목적


일반적으로 경제생활 안에서 “나의 것” 또는 “나의 몫”을 존중하고 지키며 보호하는 것은 정의의 출발점이다. 이러한 사유 재산을 보호하는 제도로서 자본주의는 올바른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재물과 재산에 대한 집착과 그것을 하느님보다 우선에 두는 태도를 꾸짖어 왔지만, 재산의 사적인 소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언제나 존중해왔다. 어떤 면에서 재물과 재산은 하느님 경배와 이웃 사랑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가톨릭교회가 재산 소유 그 자체에 대해 존중하고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주로 가난한 이들과 관련해서이다. 특히 개별적인 노동자들의 재산 소유와 그것을 위한 정당한 임금에 대한 권리는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사회교리를 떠받드는 큰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사목헌장」 67항)에 의하면, 노동은 “직접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며, 마치 자기 도장을 찍듯이 자연의 사물에 자기 모습을 새기며, 자기 의지로 사물을 다스린다.” 또한 인간은 “자기 노동을 통하여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고, 자기 형제들에게 봉사하며,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창조를 완성하기 위하여 협력”한다. 그러니 노동은 인간 본성에서 나오고 하느님의 창조에 협력하는 존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보수는 시장 안에서 시장의 법칙대로 결정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과 그 가족의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도록 제공되어야 한다.” 이처럼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정당하게 “자신의 것” 또는 “자신의 몫”으로서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정의의 출발점이고, 자기 인격을 표현하는 것이며, 인간 자유의 신장이며 시민 자유의 조건이다. 더 나가서는 노동으로부터 정당한 보수를 얻는 것은 경제와 사회생활 전체를 지배하는 가장 첫 번째 원칙이다. 모든 경제 제도나 사회 제도는 이 원칙을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 세기의 자유방임의 시대에서부터 지금의 시장중심적인 자본주의에서는 “나의 것”과 “나의 몫”을 배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기본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사유 재산은 어떤 사회적 연관성, 제약, 의무와는 상관이 없고 타인의 개입이 전적으로 배제되며 개인의 완전한 자유의사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로 이해된다. 그래서 마치 개인이 소모품을 자유로이 사용하는 것처럼 토지나 가옥, 기타 공장과 같은 생산 수단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에 이러한 권리를 사유재산권이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가치관에 어긋난다. 비록 자신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서는 이웃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하느님의 피조 세계 전체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유 재산이라고 하더라도 사회 전체의 공동선을 거슬러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다.


더욱 근원적으로는 지상의 모든 재화는 하느님의 창조에서 나온 것이다. 토지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 자원에 인간 노동이 더해 얻어진 결과물이 축적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다양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민족들의 합법적인 제도에 적용된 소유권의 형태가 어떠하든, 언제나 재화의 이 보편적 목적을 명심하여야 한다.”(「사목헌장」 69항)


* 이동화 신부 (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24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그리스도인의 휴식과 여가


하느님 거룩함 드러내며 쉬어야


휴가철이다. 선진국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노동시간이 긴 우리나라에서 휴가철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입시준비로 여름 방학을 빼앗겨버린 청소년에게도, 학자금 마련으로 여름 방학을 내놓아야 하는 이 땅의 청년에게도 여름은 고마운 계절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여름휴가는 쉬는 날이 아니라 무언가를 또 해야 하는 날이 되어버렸다. 어딘가에 가야 하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휴식과 여가의 시간이 이제 시간과 공간과 상품을 소비해야 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고 또 앞으로 당분간 벗어나기 어려운 불황의 상황이니, 경제학자로서는 이렇게라도 소비가 진작되는 것이 다행스러울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효과적이고도 윤리적으로도 올바른 방법은 가난한 이들의 소득을 높여서, 특히 노동소득을 높여서 사회 전체의 경기를 부양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어쨌거나 오늘날 휴가는 소비사회의 또 다른 한 모습이고, 쉬는 시간이 아니라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시간으로 바뀐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휴식과 여가를 달리 보아야 하고, 또 달리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무엇보다 먼저 휴식을 해방으로 보도록 인도한다. 쉰다는 것은 종살이에서 해방된 민족(신명기 15,15)에게 가능한 일이다. 해방된 민족에게 휴식은 자신만을 위한 배타적 권리가 아니라, 다른 노동자와 가축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사회적인 것(탈출 23,12)이며 땅을 비롯한 우주만물이 하느님께서 이루신 창조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생태적인 회복이다. 우리의 휴가가 이웃과 사회에, 그리고 생태계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뿐만 아니라 휴식은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일과 안식일이 거룩한 것은 하느님이 이 날을 거룩하게 한데 있다. 그러기에 휴식과 여가는 자기 자신 안에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시간이다. 이마에 땀 흘려 일할 때도 그러하지만, 사람이 제대로 쉴 수 있을 때 더욱더 인간다워지고 더욱더 하느님다워진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휴식과 여가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고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적어도 이때만이라도 세상의 속도에서 후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고, 우주만물과 전체 생태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길러야 한다. 참다운 인간 존재는 그리고 그 행복은 소비하고 생산하는데 있지 않다. 오늘날 마치도 상품을 소비하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 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와 행복은 하느님 창조의 질서 안에서 회복되고 충만해진다.


이런 눈과 마음으로 우리의 휴가와 여가를 설계하자. 우리의 휴가를 휴가답게 보내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휴가와 여가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해보자. 우리의 고민을 풍요롭게 해줄 우리 시대의 한 어르신의 글을 소개한다. 전 세계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석 아빠스이신 노트거 볼프는 「그러니, 십계명은 자유의 계명이다」(분도출판사, 2014)라는 책에서 주일의 의미와 휴식과 거룩한 날의 의미를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준다.


“나는 너의 주 하느님이다. 나는 너에게 일상을 멈추고 거룩한 날을 지키라 명한다. 네 생애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고, 네 삶에 리듬을 찾기 위함이다. 나는 너에게 거룩한 날을 지키라 명한다. 너의 삶이 일과 돈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눈앞의 이득과 무관한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나는 너에게 거룩한 날을 지키라 명한다. 그리하여 네가 하느님을 위한 시간과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기 위함이며, 미사 중에, 하느님과의 만남 중에 너 자신에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 이동화 신부 (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31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달팽이의 지혜


크다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장마가 잠깐 멈춘 사이 내가 사는 이곳 신학교 교정에 달팽이가 다녀갔다. 오랜만에 보는 녀석이라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자기 등에 언제나 껍질을 얹고 다니는 게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느리고, 작고, 힘없는 이 녀석에겐 그래도 등에 업고 다니는 이 껍질이 유일한 피신처요 집일 게다.


실제로 달팽이는 자신의 껍질을 짐이나 부담이 아니라 피신처요 집으로 만들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한다. 달팽이는 섬세한 구조의 껍질을 겹겹의 소용돌이 모양으로 키우고 나면 껍질을 만드는 활동을 줄이거나 아예 중단한다. 소용돌이를 한 번 더 하게 되면 껍질의 크기와 무게는 엄청나게 증가해 버린다. 이렇게 되면 달팽이에게 껍질은 피난처와 안식처가 아니라, 짐이자 부담이 되어 버린다. 달팽이의 자유는 제한되고, 그의 삶은 껍질의 크기와 무게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에 쓰이고 마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달팽이의 지혜와는 달리 인간의 삶과 사회는 계속해서 껍질을 확대해나가는 방향으로만 달려간다. 성장, 발전, 부양, 개발 등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런 구호는 끊임없이 껍질의 크기를 키우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껍질의 크기가 달팽이의 삶을 더욱 안정되게 하는 것이 아니듯, 경제성장과 경기부양 등이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성장에서 오는 이득은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성장 때문에 짊어져야 할 부담과 짐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 경제에 심각하게 그리고 근원적으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경제와 상당히 깊이 연결되어 있는 에너지 문제도 비슷하다.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우리의 전기 생산과 소비가 적지 않다. 가장 더운 여름날 며칠의 낮 시간대의 전력 소비만 적절히 분배하고 조정한다면 실제로 우리에게 전기가 모자라지 않는다. 설령 조금 부족하더라도 다양한 방식의 전력 생산을 고민할 수 있을게다. 그런데도 온갖 위험과 불안을 안고 핵발전소를 등에 업고 살아야 할까?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혜택은 수도권과 소수의 부자들에게, 껍질의 부담과 무게는 지역과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핵에너지를 문제 삼았으니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북한의 핵미사일과 대량 살상 미사일을 방어하기에 필수적이라고 한다. 사드 배치 없이 이때까지는 어떻게 북한을 방어했는지, 또는 사드 있으면 앞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올는지 의문이다. 이미 남북한이 가지고 있는 무기와 군사력만으로도 한반도가 초토화되기엔 남고도 넘친다. 끊임없는 군비확산과 경쟁이 평화를 가져주지 않는 것이다. 그 큰 껍질을 또 누가 져야 할 것인지도 의문이다. 실제적으로 군사비의 사용이 안전과 평화에 직결되는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그 군사비 지출은 우리 사회의 긴급한 필요로 돌려져야 한다. 군사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81항 참조)


오늘날 우리 모두의 삶을,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힘겹게 하는 현실의 경제와 에너지, 군사력 강화는 직접적으로 정책과 정치의 문제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함께 행동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가 짊어진 문제는 우리 중심적인 생각과 삶의 방식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근본적으로는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의 등에 놓인 이 껍질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 아니면 우리의 삶을 제한하고 방해하는지 근본에서부터 질문해보아야 한다.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7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사회교리와 평신도의 소명


평신도는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


우리 주변엔 참으로 거룩하고 헌신적인 평신도들이 많다. 매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매주 레지오 마리애도 물론이고 소공동체 모임까지 열심이다. 본당에 행사가 있을 때면 아무 말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평소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나지 않는 일에도 열심이다. 한국교회의 초창기에, 사제가 없을 때는 사제 영입을 위해 온 힘을 아끼지 않았고, 사제가 있더라도 많지 않았던 그 시절 평신도가 공소회장으로, 선교사로 스스로 공동체의 일을 떠맡고 신앙을 전파했다. 평신도야말로 한국교회를 일구어낸 일꾼이었고, 우리 교회의 튼튼한 대들보이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유산에도 불구하고, 요사이에는 일부이긴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신심과 세속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평신도들이 없지는 않은 듯하다.


개인적인 신심과 세속적인 신앙생활은 ‘분리’를 특징으로 한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기억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한 번은 생각해볼 일이다. 기도로 하느님께 청하는 우리의 바람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많은 경우 하느님께 청하는 우리의 바람과 세상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루카 16,26 참조) 있어 서로를 분리하고 있다. 신앙과 세상살이 사이 역시 건너갈 수도 건너올 수도 없는 깊은 분리가 있는 듯하다. 어떤 면에서는 복음의 빛으로 세상살이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살이의 관점에서 신앙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래서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혹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신앙이 달리 해석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이런 현상은 비단 한국의 가톨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종교현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교의 교리가 세속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을 상실했다는 측면에서 종교사회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종교의 세속화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종교와 교리가 그 특성을 잃어버리고 마치 시장에서의 상품같이 변해버렸다는 면에서 종교의 시장화(marketization)라고도 한다. 오늘날 종교는 마치 소비자가 여러 냉장고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오늘날 이러한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다. 예수님은 분리되고 갈라진 세상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자기 동족만을 이웃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를 통해 이웃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더 나아가서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는 “원수”(마태 5,44)까지 넓혀진다. 하느님의 현존은 세상과 분리된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체험되는 것이 아니다(요한 4,21).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분리시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일치(마태 25장)시켰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찾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세상과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특별히 평신도들은 세상 한 가운데서 하느님께 불리움 받은 사람들이다. 평신도는 자신의 직업과 노동, 가정과 인간관계, 연구와 과학 활동, 사회생활과 경제 활동, 그리고 정치적 선택을 통해서 세상을 복음의 요구대로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평신도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노동조합에서, 법인 이사회에서 하느님의 거룩함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자기 손해에도 불구하고 정의롭고 공정한 선택으로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고, 아픈 이웃의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고 그들을 대변하고 옹호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세상의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특히 약자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낸다. 사실 평신도야말로 세상의 소금이며, 사회교리는 바로 그런 평신도들을 위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14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권리이자 의무로서의 참여


참 이웃이 되는 길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와 관련해서 여러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정부는 북한의 핵 공격에 대한 필수적인 방어체계라고 하지만, 너무 쉽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실제로 북핵을 막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지금의 무기만으로도 한반도를 초토화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이런 무기 체계를 도입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더구나 국제정치와 외교관계에서 잃을 것보다 얻을 것이 더 많은 지도 의문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서 판단할 문제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의 빛에 비추어,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윤리와 교리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마침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와 민족화해위원회의 공동 성명이 나왔으니 그것을 참고하면 좋겠다.


사드 배치 자체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성주 시민들에 대한 정부와 보수언론의 태도는 더 큰 문제다. 성주 주민들의 반대가 거세어지고 길어지니, 정부와 언론들, 특히나 종편 방송들에서는 성주에 “외부 세력”이 개입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반대하는 목소리를 외부 세력으로 몰아세우려는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정치적인 의도도 비민주적인 것이지만, ‘외부 세력’이라는 말 안에 담겨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무지 역시 큰 문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의회를 구성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모든 시민이 공적 영역의 문제에 대해서 참여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대통령도 그러하고, 의회 의원들 역시 시민들을 대리하는 것이지 그 뿌리는 결국 시민의 의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 사회교리는 국가보다 시민사회가 우위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국가는 시민사회와 시민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해야 하고, 다른 편으로 시민은 공적 영역의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의사를 개진하고 의사 결정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참여는 시민으로서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여는 “민주주의의 모든 질서를 이루는 주축 가운데 하나이고 민주주의 체제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민주 정부란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과 관련하여 국민을 위하여 행사되는 권한과 역할을 얼마나 부여받는지에 따라 규정된다. 따라서 모든 민주주의가 참여 민주주의여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190) 그러니 참다운 민주주의에서는 외부 세력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최근에 정부와 보수 언론은 마치 사드 배치가 성주라는 지역의 문제라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고, 그래서 성주 주민이 아닌 외부 세력은 개입하지 말라는 태도를 보인다. 사드 배치가 어느 한 지역의 문제도 아닐뿐더러, 설령 지역의 문제라 하더라도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보장해야 한다. 그럼에도 외부 세력을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시민을 배제하겠다는 뜻 밖에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우리에게 차라리 외부 세력이 될 것을 요구한다. 루카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는 가장 힘든 이에게 측은한 마음으로 다가설 것을 요구한다. 동족이었던 사제나 레위인은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굳이 동족도 아니면서 다 죽어가는 사람과 이상하게 엮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다가서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명하신 “이웃”이 되는 길이고, 참다운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된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자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참다운 사랑은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고,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advocacy)가 되어주어야 하고,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이다. 지금 성주의 시민들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21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그리스도인의 자유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


가끔 교회 안의 신문이나 이런저런 조사 결과들을 보면, 많은 신자들의 생각이나 의식 그리고 행동 방식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된다.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신자들은 혼인과 가정에 대해서도, 그리고 특히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신앙인들도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으니 어쩌면 세상의 흐름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방식에 강하게 영향을 주고 있고, 심하게 말하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가두어 놓고 있다. 이를 사회구조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제도와 법률은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으며, 우리가 어릴 적부터 이러저러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받아온 교육도 그러하다. 더욱 근원적으로는 사람의 행동 방식을 결정하게 하는 마음과 정신의 구조도 있다. 이러한 구조들은 오랜 시간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고, 사람들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 형성된 것이며, 또한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사회적 세력 사이에서 힘센 세력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조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각과 행위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가두어두는 강제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구조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냥 익숙한 대로 살기도 하고, 또는 현실과 구조에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맞추어 살기도 한다. 그러나 그 구조를 바꾸고 변형시키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흐름, 사회구조, 세상 현실 등에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지금 현재의 세상과 현실은 당연한 것도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살지만,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삶과 윤리의 기준은 지금 현실과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 나라에 비추어 지금 현실과 세상을 바꾸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깨어있어야 한다. 주님께서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르 14,38)고 하셨다. 주님 말씀처럼 깨어있기 위해서는 제대로 기도해야 한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이웃의 아픔과 세상의 아픔에 민감하고 깨어있다. 성경의 예언자는 사회에 불만을 가진 외부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세상의 아픔에 민감하고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참다운 예언자는 참다운 신비가일 수밖에 없다. 깨어있다는 것은 또한 양심의 문제이다. 양심은 인간의 마음에 심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앙인이든 아니든, 그리스도인이든 다른 신앙인이든 모든 사람들은 양심을 품고 산다. 그러나 양심을 마음 깊숙이 숨겨놓고서 세상의 흐름에 익숙해지면, 양심을 통해 울리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그러니 양심의 성찰도 필요하고 민감한 양심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한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민감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교리는 신앙인들이 깨어있고, 민감한 양심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깨어있고 민감한 양심을 가진 신앙인들이야말로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세상 흐름과 사회구조를 넘어서 바라보고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그러니 ‘세상이 이러해서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핑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따라서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로 세상에 산다. 우리가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세상을 넘어서는 자유가 승리한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이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갈라 5,1)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21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회교리 아카데미] 사회교리의 가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루카 9,2)하라는 사명을 받고 예수님께로부터 세상 속으로 파견된 사람, 곧 주님의 사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는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숨결이 묻어나는 이 땅 가까이 있음을 함께 사는 이들에게 선포하라는 사명 때문에, 세상 속 깊이 온 삶을 던지는 사도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재물 권력 온갖 잡신이 아니라, 생명·사랑·정의·평화의 하느님만이 참 하느님이심을 장엄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소중한 실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이기심이라는 두꺼운 벽에 둘러싸여 있던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의 선한 본성, 곧 사랑과 정의를 다시금 깨우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치열한 경쟁 끝에 획득한 승리의 환희가 아니라, 내 것 네 것 가르지 않는 소박한 나눔이 주는 잃어버린 참 기쁨을 되찾아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때로는 거짓과 불의마저 양식으로 삼아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헛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소유와 권력의 노예로서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섬김과 헌신의 참사람이 되라고 일깨우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새사람이 되고, 보잘것없는 새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차가운 이 세상의 딱딱한 껍질을 깨뜨려 감춰져있는 듯 희미한 하느님 나라를 빛처럼 환히 드러내자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로부터 하느님 나라 선포의 사명을 받은 거룩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미리 맛 본 하느님 나라를 마음에 담고 함께할 사람들과의 벅찬 만남을 희망하며 세상 속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가슴 벅차면서도 때로는 힘겨운 여정에서 사회교리는 든든한 길잡이가 됩니다. 사회교리는 “사람들의 행동에 지표가 되는 데 목적을 둔 교리”(사회적 관심, 41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교리는 때로는 낯설고 때로는 부차적이고 때로는 거북한 무엇으로 여겨집니다. 더 나아가 “신앙과 교회를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축소하려는 경향”(복음의 기쁨, 64항)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사회교리에 대하여 뿌리 깊은 반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교회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회에서 결정되고 이루어지고 겪는 일들에 무관심하지 않다. 교회는 사회생활의 도덕적 특징, 곧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교화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회 그리고 이와 함께 정치, 경제, 노동, 법률, 문화는 세속적인 지상의 실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구원 메시지와 구원 경륜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사회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인간과 관계가 있다. 사회는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인 인간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간추린 사회 교리, 62항)


교회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고,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데 헌신하시는 믿음의 벗님들과 함께 “교회를 통하여 현대인들 안에 울려 퍼지는 복음”(간추린 사회교리, 63항)인 사회교리를 통해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앞으로 차근차근 나누고 싶습니다.


* 지난 호까지 「사회교리 아카데미」 집필에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이동화 신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8지구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4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8지구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에파타와 언론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언론의 침묵'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또 다시 목숨을 건 단식농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활동 보장 및 세월호 특별법 개정 등을 촉구하기 위하여, 특조위원들과 세월호 가족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단식농성에 함께 하고 있는 준형이 아빠, 장훈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장은 지난 8월 2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보도 외압 및 왜곡편파보도 증언대회’에서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지금 광화문에서 유가족들이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누구도 우리가 단식을 해가면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도하지 않습니다. … 거짓말하거나 절반의 진실만 말하거나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보다 세월호 유가족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바로 언론의 침묵입니다.”


애써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언론과 이들이 진실의 전달자라 믿는 순진한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휘황찬란한 대도심 속 외로운 섬이 되어버린 세월호 광장에서 생사를 건 단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에파타!”(마르코 7,31-37)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 바깥의 소식을 들을 수 없고,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외부와 단절된 채 자신에게 갇힐 수밖에 없는 고립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립니다.


귀가 열리기 전에, 그는 이미 “에파타” 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다니 말이지요. “에파타”, 그에게 가장 절실했던 생명과 같은 한 마디의 말,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그러기에 “에파타”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건네는 희망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입과 귀를 막은 이들을 향한 준엄한 질책의 말씀이지 않을까요.


언론의 역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지 벌써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러갑니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안전 사회 건설을 촉구하는 힘겨운 몸짓이 이어지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세월호의 진실을 완전히 침몰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침묵하는 언론이 있습니다.


감히 “에파타”를 상실한 시대라 말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대중 매체를 통한 정보 전달은 공동선을 위한 것”이고 “사회는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494항)고 언론의 역할과 의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고 있는 뉴스 미디어 현상”(간추린 사회 교리, 414항)에 대해서 우려하는 교회는 “대중 매체의 세계에서는 흔히 이데올로기, 이익 추구, 정치적 통제, 집단 간의 경쟁과 알력, 기타 사회악들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분야 고유의 어려움이 악화되는 경우가 많음”(간추린 사회 교리, 416항)을 지적함으로써, “에파타”를 거슬러 침묵하는 언론과 이러한 언론을 조종하거나 이에 조종당하는 사람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꾸짖음으로부터 교회언론은 자유로울 수 있는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울 수 있는지요.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11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인권의 의미


한가위가 서글픈 이웃, 이주노동자


긴 한가위 명절의 마지막 날입니다.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풍성한 가을 결실을 나누며 오붓하게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위를 한가위답게 보낼 수 없었던 이웃들, 한가위 보름달을 더욱 서럽게 바라보았을 이웃들이 있고, 이들 중에서 특별히 고국을 떠나 낯선 곳에서 힘겨운 노동으로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됩니다.


이주노동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30여 년이 되었고, 이미 100만 이주노동자가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지만, 이들은 여전히 국외자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여성가족부가 2015년 9~11월에 성인 4000명과 청소년 3640명을 대상으로 벌인 ‘국민 다문화 수용성 조사’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자를 이웃으로 삼고 싶지 않다’는 응답이 31.8%로 미국(13,7%), 호주(10.6%), 스웨덴(3.5%) 등보다 크게 높았습니다.


또한 임금 체불, 사업장 내 폭행, 열악한 노동환경과 숙소, 외국인인력도입제도인 고용허가제를 악용한 인권 침해 사례가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8월 17일, 고용허가제 시행 12주년을 맞아, 장동만 외국인 이주·노동운동협의회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주노동자는 필요할 때 가져다 쓰고 쓸모없어지면 버리는 일회용 종이컵이 아닙니다. 이주노동자는 노예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이들에게 부여된 인권을, 노동권을 제약할 권리는 없습니다.”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루카 10,1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여러 고을로 파견하시어 그들을 환대하는 곳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환대한 고을은 구원받았지만, 그들을 배척하는 고을은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이들에 대한 환대는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운 덕목 중에 하나이며, 예수님을 사랑으로 품에 안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인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5장 참조).


갈수록 우리나라를 찾는 이주노동자들은 늘어나고, 그 중 일부는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지내기도 합니다. 비록 이들이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가난한 나라 출신인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꺼리는 힘겨운 노동에 자신을 내던지며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소중한 희망을 가꾸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노동력이라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 합법적 신분이냐 그렇지 않으냐는 법적 기준에 의해서, 배타적인 혈연적 가치에 의해서 판단될 수 없는 소중한 이웃입니다.


이주노동자를 손님처럼, 가족처럼


‘역지사지(易地思之)’, 곧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주노동자, 왜 조국을 떠나 낯선 곳에 둥지를 틀었을까요. 이들의 입장에 깊이 공감하기에, 이들이 “스스로 느끼는 절박한 처지를 착취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노동하는 인간, 23항)고 단호하게 선언한 교회는 이들을 손님을 맞아들이듯이 따뜻하게 품으라고 호소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241항 참조). 이에 더하여 다음과 같이 촉구합니다.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들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보장되어야 할 권리들을 자국인과 동등하게 누리도록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려는 생각이 확산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신중하게 감시하여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298항).


내년에는 더 이상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귀한 손님이요 정겨운 가족인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기쁨 가득한 한가위를 즐길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25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장애인과 인권


‘장애’가 아니라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장애인의 몸은 고깃덩어리가 아니다. 점수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장애등급제를 폐기하라.” 서울 광화문역 지하보도에 장기 농성장이 하나 있습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등 장애인단체와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이 지난 2012년 8월 21일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의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으니, 벌써 만 4년을 넘어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수많은 이들의 무관심 속에서 외롭지만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장애등급제’는 의료적 기준에 따라 장애 등급을 나누어 차등적으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입니다. 따라서 장애인 개개인의 환경과 경제적 수준 등을 반영하기 어렵고, 장애인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기보다는 수혜대상자라는 인식을 고착시키고, 장애 정도에 따라 사람을 등급으로 분류함으로써 심각하게 인권을 침해할 수 있습니다. ‘부양의무제’란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빈곤층이라도 직계 부양의무자가 일정 부분 소득이 있거나 일정 기준 이상의 재산이 있으면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즉, 가족 가운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의 취업여부를 떠나, 수급이 줄어들거나 수급이 끊기게 됩니다. 따라서 부양의무제가 오히려 복지사각지대를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십시오. 당신의 자리는 거기가 아닙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십시오. 당신에게는 모든 이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누가 당신더러 그곳에 있으라고 했습니까? 누가 당신더러 아무 시선 없는 곳에 숨으라고 했습니까? 당신의 오그라든 손이 보기 싫어 숨으셨습니까? 당신의 오그라든 손이 보기 싫다고 없어지라고 했습니까?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십시오. 당당하게 주저하지 말고 당신이 있어야 할 곳, 내가 초대하는 곳으로 기쁘게 나오십시오.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마십시오. 더 이상 자신을 숨기면 안 됩니다. 더 이상 다른 이들의 시선에 무릎 꿇지 마십시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십시오.’(마르 3,1-6에 대한 묵상) 예수님께서는 장애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죽여 지내야 하는 이들을 당신 가까이로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장애를 지닌 이들을 온전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완고한 마음을 녹이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정신적 육체적 장애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장애인들의 인간다운 삶을 방해하는 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장애 자체가 아니라, 그들을 대하는 비장애인들의 비뚤어진 시선입니다. 이 시선은 여러 가지 그릇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때로는 값싼 동정심으로, 때로는 무시나 배척으로 표현됩니다.


장애인은 자신이 지닌 육체적 정신적 장애뿐만 아니라, 자신을 향한 편견과 차별적인 여러 사회 제도로 말미암아 인간다운 삶을 방해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을 온전한 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비장애인 역시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고귀한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비록 겉으로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장애를 지닌 ‘사람’을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이 지닌 ‘장애’에만 집착하는 양심을 거스르는 내면의 장애에 스스로를 얽어매기 때문입니다. 이제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장애인을 향한 편견에서 벗어나, 그들을 존재 자체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장애인들의 손과 발, 마음이 되어줌으로써, 알게 모르게 우리 안에 쌓인 내적 장애를 허물어야 합니다.


“장애인들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 온전한 인간 주체이다. … 장애인들도 모든 권리를 가진 주체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능력에 따라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최대한 참여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간추린 사회 교리, 148항)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2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연대의 의미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북한의 핵개발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 양국의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한반도 배치 결정으로 인해 온 나라가 불안하기 그지없는 가운데, 지난 7월 2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사드 한국 배치 반대 결의대회’에서 전영미 사드성주배치반대 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도 죄스럽습니다. 일부 주민들만 촛불을 들어 주어 죄송합니다. 우리가 당해 보니 그 찢어지는 아픔을 알만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서울 올라와 유가족들한테 먼저 사과하고 모두들 진상규명 특별법에 서명했습니다. 밀양 송전탑 주민들에게도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동네 아니라고 모른 체 했습니다. 우리 성주가 당해 보니 그게 밀양주민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주만을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사드를 배치할만한 곳은 한반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과 밀양주민, 제주도 강정마을을 위해서도 싸우겠습니다. 우리 국민의 안녕과 생명과 평화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이는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에서 오히려 그동안 힘겨웠던 이웃에게 무관심했음에 대한 통회이며 앞으로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 하겠다는 눈물겨운 다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그러자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율법 교사에서 되물으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구였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이웃은 네 물음의 대상이 아니란다. 그러니 먼저 너를 간절히 원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이웃이 되어 주어라. 누군가에게 이웃이 되어줄 때에, 비로소 이웃이 누구인지 알게 될 테니까’라는 뜻이 아닐까요. ‘이웃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다가섬으로써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연대’입니다. 연대성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연대성은 가깝든 멀든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서 막연한 동정심 내지 피상적인 근심을 느끼는 무엇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도 항구적인 결의이다.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만인의 선익과 각 개인의 선익에 투신함을 뜻한다. 이런 결의는 완전한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 … 다름 아닌 이익에 대한 욕망과 권력에 대한 갈망임이 분명하다는 확고한 신념에 근거를 둔다.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이 같은 태도와 ‘죄의 구조’는 … 대칭적으로 이와 상반된 태도로만 극복이 가능하다. 타인을 착취하는 대신에 이웃의 선익에 투신하고 복음의 뜻 그대로 남을 위하여 ‘자기를 잃는’ 각오로 임하는 것이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억압하는 대신에 ‘그를 섬기는’ 것이다.”(사회적 관심, 38항)


연대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 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루카 4,18)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 헐벗은 이를 입혀 주고 아픈 이를 돌봐주는 것(마태 25,35-40 참조)입니다. 특별히 인간의 탐욕과 사회적 불의에 희생된 이웃들을 섬기고 돌보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루카 10,29-37). 따라서 연대성의 원리는 “‘우정’이나 ‘사회적 사랑’”(가톨릭교회교리서, 1939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대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무관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모욕적인 무관심이나 우리의 정서를 마비시키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습관과 파괴적인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합시다! 눈을 뜨고 세상의 비참함을, 존엄을 박탈당한 우리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외침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도움을 주어 그들이 우리의 현존과 우정과 형제애의 온정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자비의 얼굴, 15항)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9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공동선의 원리


모든 이를 살리는 죽음의 길


'한 농민의 죽음'과 '죽음의 시대'


지난 9월 25일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가 서울대병원 병상에서 317일간의 사투 끝에 선종(善終)하였습니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억울한 죽음이지만 굳이 선종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는, 젊은 시절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고 귀향 후 평생 농부로서 생명을 보듬었던 그의 삶의 이력과 이 땅의 죽어가는 농민과 농업을 살려야 한다고 외치다 살인적인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던 작년 11월 14일 이후 죽음의 여정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끝날 수도 없고 끝나서도 안 되는 고귀한 삶의 여정이 불의한 이들에 의해 유린되었기에, 임마누엘 형제의 죽음은 악종(惡終)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는 경찰은 물대포를 직사 살수하여 한 농민을 쓰러뜨려 중태에 빠뜨렸습니다.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여 이미 농민과 농업 살리기를 포기한 국가 권력은 이렇게 자신의 민낯을 부끄럼 없이 드러냈습니다. 임마누엘 형제의 죽음 이후 벌어진 양상은 더욱 가관입니다. 임마누엘 형제가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는 과정에서 머리를 다쳐 죽음에 이르렀음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서울대병원 측은 ‘외인사’가 아니라 ‘병사’라고 사망진단서를 발급했고, 검찰과 경찰은 사인을 조사하기 위해 부검영장을 청구했으며, 법원은 ‘조건부’라는 단서를 붙인 해괴한 영장을 발급했습니다. 생명을 돌보아야 할 의료인의 양심은 죽고 정의에 입각한 법치는 사라졌습니다.


‘살리기 위한 죽음’과 ‘살기 위한 죽임’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죽음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벗들을 보듬는 삶의 여정은 곧 십자가를 향한 죽음의 여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한 죽음의 길’을 걸으라는 간절한 초대입니다. ‘제 살기 위한 죽임의 길’을 포기하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더불어 함께 삶’을 위한 ‘공동선의 원리’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 교회는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한 공동선의 원리를 줄기차게 가르칩니다. 공동선의 원리는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 일치, 평등에서 나오는 것”(간추린 사회 교리, 164항)입니다.


여기에서 공동선이란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자기완성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사목헌장, 26항)를 가리킵니다.


곧 공동선은 개인을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가치를 지닌 사람답게, 사회는 소유나 권력에 따른 지배와 억압, 죽음 같은 경쟁이 아니라, 섬김과 나눔, 일치와 화해로 모든 인간이 살 맛 나는 인간사회답게 만들어 가는 제반 사회생활의 조건들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특별히 국가가 공동선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910항 참조). 오늘 한 농민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공동선의 현실과 국가 권력의 현주소를 직시하게 합니다. 살리기 위한 죽음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간 작은 한 사람과 살기 위한 죽임의 길을 비겁하게 뒤쫓는 큰 무리 가운데 우리는 과연 누구입니까?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16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복음선포


"교회 울타리를 넘어 이웃과 함께”


작년 11월 14일 백남기(임마누엘) 형제가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후 매일 오후 4시에 그가 입원해있던 서울대학교병원 응급실 앞마당에서 정문 옆 천막에서 미사가 봉헌됐습니다. 미사는 9월 25일 임마누엘 형제의 선종 이후 빈소인 장례식장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지난 10월 11일 저녁 8시 추계 주교회의에 참석 중인 김희중 대주교, 이기헌, 유흥식, 옥현진 주교가 함께 고인을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주례를 맡은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강론을 통해 임마누엘 형제를 죽음으로 몰고 간 현실과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작태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임마누엘 형제가 쓰러진 이후 줄곧 그 곁을 지키고 있는 모든 이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사고가 난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300일이 넘는 동안 응급실 앞마당에서 천막에서 지금은 장례식장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미사를 봉헌하며 함께하신 형제 사제들, 수도자들, 교우들이 계셔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겠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여주셨습니다.”


빡빡한 회의 일정을 쪼개 빈소를 찾아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한국교회 최고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바와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을 몸소 제시해주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당신을 따르고자 하던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삶을 사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똑같은 삶에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말고, 쉼 없이 밖으로 나가라고 독려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안위를 떠나 용기를 갖고 복음의 빛이 필요한 모든 ‘변방’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따르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0항)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렵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복음의 기쁨」49항) 교황은 특별히 사제들을 다그칩니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행사나 의식이 아니라 종교적 열정입니다. 사제들은 성공이나 출세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고통 받고 피 흘리고 빛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2013. 3. 28. 성 목요일 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 이전에 이미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밖에서 ‘길 위의 미사’를 드렸습니다. 용산 참사 현장에서, 죽어가는 4대강 곁에서, 제주 강정에서, 해고노동자들이 풍찬노숙하고 있는 현장에서, 광화문에서 세월호 가족과 함께. 그리고 인간 존엄성을 빼앗긴 이웃들이 있는 한,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려는 ‘작은 예수들’이 있는 한 ‘길 위의 미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길 위의 미사’에 초대하며 예전에 썼던 묵상 시(詩) 하나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길 위의 미사


성전 가운데 높게 매달려

미사 참례자를 압도하는 십자가는 없지만

함께 살기 위해 기꺼이 죽어야 할

십자가의 고통이 온 몸과 마음에 퍼집니다.


주님과 함께 있어야만 한다는

믿는 이의 의무감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루어주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이끌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무관심과 어색한 조화는

처음 만난 낯선 지체들조차도 하나로 묶는

순수하고 뜨거운 연대에 자리를 내놓습니다.


다른 이들 보듬지 않았던 안락한 일상에서 그저 좋은 말씀이려니 스쳐 보냈던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 깊숙이 파고들고

먹히시는 성체는 이제 먹히라고 다그칩니다.


세속과 분리된 순간의 거룩함의 자리에

추한 세상을 보듬어 변모시키는

성속의 갈림 없던 태초의 거룩함이 가득합니다.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23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책임 있는 권위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온 나라가 ‘최순실’이라는 블랙홀에 빠져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그러던 차에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박찬운 교수가 10월 1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의제자백이란 말이 있다. 소송상 용어인데 당사자가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명백히 다투지 아니할 때 자백으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 법률가 입장에서 요즘 돌아가는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이제 사태는 임계점을 넘어 의제자백론을 적용할 때가 되었다. 한마디로 메가톤급 의혹사건이 아닌가. … 최순실이 청와대를 등에 업고 기업들로부터 수백 억 원의 삥을 뜯어 미르와 K스포츠 재단을 만든 다음 사유화했다는 것이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독일에서 승마훈련을 받는데 … 가히 국가원수급 예우다. … 이런 게 만일 다 사실이라면 그것은 부당행위를 넘어 범죄행위이고 그 책임은 종국적으로 대통령이 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의혹이 사실무근이라면 대통령을 포함해 관련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 모든 법적 절차를 동원해서 사실관계를 명명백백하게 밝혀 의혹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대통령을 괴롭힌 의혹 제기자들에겐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럼에도 말이 없다. 청와대는 간간이 사실무근이라는 말만 할 뿐 어떤 유의미한 해명도 하지 않았다. … 상황이 이 정도면 게임은 끝난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는 이제 의혹이 아니라 사실로 확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련자 모두가 사실상 자백한 거나 마찬가지다. 의제자백 했다는 말이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루카 12,1)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루카 12,2)


복음 선포에 여념이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어느 날 바리사이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여야 할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심하게 꾸짖으십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탐욕과 사욕으로 가득하다고(루카 11,39). 외적인 규정은 충실히 지키지만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외면한다고(루카 11,42). 오만하게 생색내기를 즐기고(루카 11,43), 겉만 번드르르한 무덤 같다고(루카 11,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리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루카 12,1-2) 위선자들, 특히 사회 지도층에 있는 위선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면서 이들의 위선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고 있는 이들에 대한 위로와 희망의 말씀입니다.


‘최순실 진실’을 대통령, 청와대 관계자 등 ‘최순실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받고 있는 사회 고위층 인사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여전히 침묵이나 사실무근이라는 말로 일관하며 마침내 드러날 진실을 묻으려는 이들에게 도덕성에 뿌리를 둔 당당함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숨겨놓은 것을 드러내고 감추었던 것을 알림으로써 국민 앞에 민낯으로 서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최순실 의혹’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귀한 “책임 있는 권위”, 곧 “봉사의 정신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덕목들(인내, 겸손, 온건, 애덕, 함께하려는 노력)에 따라 행사되는 권위, 명예나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공동선을 활동의 참된 목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행사하는 권위”(간추린 사회 교리, 410항)를 값싼 노리개로 전락시킨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30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언론의 책임


"진실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꼽히는 최순실씨가 정국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10월 24일 ‘최순실 파일’을 보도한 JTBC와 최씨가 민정수석실 인사에 개입한 문건을 공개한 TV조선 등 종편의 활약이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와 SBS본부가 각각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지상파 방송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성명서의 중요 부분은 이렇습니다.


「KBS의 참담한 추락, 누가 어떻게 책임질 건가?」(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성명서)


“참담하다. 정말 참담하다. 어제와 그제 연이틀 온 나라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 국정 농락 뉴스를 보면서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끔찍하고 비참하다.… 공영방송으로서, 그리고 한때 가장 신뢰받고 영향력이 있는 뉴스를 만들었다는 KBS의 구성원으로서 이 희대의 사건 앞에서 KBS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로 떨어졌음을 직접 우리 두 눈과 귀로 확인해야 하는 현실이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그토록 반대하고 무시하고 조롱했던 종편이었는데! 이젠 KBS의 수백 명 기자들이 ‘오늘은 종편 뉴스에 무엇이 나올까?’ 긴장하며 기다리고, 베끼고, 쫓아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존심도 버렸고, 자랑스러웠던 과거의 기억도 잊었다.… 지난 수년간 청와대 권력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 ‘숨기고, 모른 체하고, 무시하다 마지못해 면피하기, 물타기’로 일관해 온 그대들만의 ‘언론 자유’, 그대들만의 ‘공정 방송’이 가져온 작금의 결과에 만족하는가?”


「언론이길 포기한 결과, 이제 만족하는가.」(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 성명서)


“사측은 이제 만족하는가. ‘회사를 위한다’며 후배 기자들에게 권력의 눈치를 보고 알아서 자기 검열해가며 ‘땡박뉴스’, ‘대한늬우스’ 만들어 박근혜 어전에 바치도록 한 결과에 말이다. ‘회사를 위한다’며 대주주와 경영진은 끊임없이 보도에 개입해 독립성과 자율성을 갉아먹고 온갖 출입처에서 기자들을 취재 대신 로비스트로 내몰아 온 결과에 말이다. ‘회사를 위한다’며 스스로 언론이길 포기해 자초한 오늘의 이 치욕적인 현실에 말이다. 어제 JTBC 보도는 국정을 농단해 온 박근혜 정권에 대한 사망선고인 동시에 스스로 언론이길 포기했던 모든 언론에 대한 파산선고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말하는 것’이 본연의 사명인 언론인들에게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말씀일 것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 아니라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마태 10,28)하는 마음으로,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진실을 밝히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 헌신할 때에만, 비로소 언론인은 스스로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정치권력으로 말미암아 국민이 고통을 받을 때에, 자의든 타의든 부패한 언론권력이 충견 역할을 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 “철저하게 진실을 왜곡하고, 대중 매체를 통하여 여론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전체주의 국가들의 고질적인 악습”(가톨릭 사회교리, 2499항)이 대한민국을 오염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부터 시작해 언론의 자유와 공정을 수호하려는 언론인들의 위대한 투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새롭게 이 역사를 이어가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언론인들이 불의한 권력과 탐욕스런 자본의 후견인이 아니라, 언제나 진실하고 정의와 사랑을 지키며 완전함으로써(사회 매체 교령, 5항 참조) 참 언론인으로서 거듭 태어나기를 기원합니다.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6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죄에 협력하는 것


대통령만이 죄를 지은 걸까요?


오직 당신 탓이야! 난 아무 죄 없어!


‘최순실 국정농단’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대통령에 대한 직접 수사와 함께 하야·탄핵 여론이 확산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11월 2일에는 10.2%로 떨어지는 등 지지층 와해 양상이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최대의 위기를 맞자 박 대통령의 최측근들은 하나둘씩 등을 돌리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선긋기에 나섰습니다.


미르·케이(K)스포츠재단의 기금 모금을 지시한 의혹이 있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2일 검찰 출석에 앞서 “모든 일은 대통령 지시였다”며 자신의 책임을 전면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정무수석으로 일하는 11개월 동안 대통령과 독대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집권여당은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비박계 의원들은 대통령과 친박계 지도부를 향해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최순실 의혹에 휩싸였던 사안에 대해서 근거 없는 비방이나 흑색선전이라 매도하던 사람들이 ‘잘 몰랐다’고 발뺌합니다. 박 대통령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던 콘크리트 지지자들이 대통령을 향해 ‘배신’이니 ‘하야’니 ‘퇴진’이니 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냅니다.


마치 ‘최순실에 놀아난 당신이 잘못한 거야. 그러니 당신이 책임져야 해. 난 아무 죄 없어’라고 씁쓸하게 자위하는 듯 싶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당사자들은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고 헌정파괴에 따른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난 몰랐어. 난 아무 죄 없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마태 18,15-18)


예수님께서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형제의 인격을 존중해서 처음에는 혼자 가서 깨우쳐주고, 말을 듣지 않으면 몇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깨우쳐주라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고, 이마저도 안 되면 더 이상 상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형제의 죄에 가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묵인하거나 침묵으로 방조하는 것조차도 안 된다는 엄중한 가르침입니다.


죄의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죄란 한 인간이 개인으로서 자유로이 저지르는 행동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행위가 아니고 언제나 개인적 행위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죄에 대한 책임을 구조라든지 조직 또는 다른 사람 등 자기 외부의 어떤 대상에게 전가”(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화해와 참회」 16항)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모든 죄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차원을 지니게 됩니다. 특히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다른 사람들의 죄에 협력할 때, 죄는 사회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그 죄에 직접, 고의적으로 관여함”, “그 죄를 명령하거나 권하거나 칭찬하거나 승인함”, “그것을 알릴 의무가 있을 때 알리지 않거나, 막을 의무가 있을 때 막지 않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호함”(가톨릭교회교리서, 1868항)을 죄에 협력하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부패한 죄악의 연대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대통령으로부터 기인한 검은 손아귀가 온 나라를 능멸하는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습니까?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13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경제 살리기


사람보다 거대 자본이 우선인 나라


경제 살리기? ‘노동’을 죽이고 ‘자본’을 살리기?


“지금 우리 안보가 매우 큰 위기에 직면해 있고 경제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국내외의 여러 현안이 산적해 있는 만큼 국정은 한시라도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벼랑 끝에 몰린 박근혜 대통령이 11월 4일 발표한 대국민 담화문 일부입니다. ‘국가 안보’와 ‘경제,’ 지난 4년 동안 줄기차게 외치던 대통령의 구호입니다. 마지막까지 이를 내세우며 자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대통령이 애지중지하는 경제 살리기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경제는 크게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축으로 이뤄집니다. 경제를 살리려면 ‘노동’과 ‘자본’ 모두 살려야 합니다. 지난 4년 동안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부 여당은 무엇을 했을까요? 이른바 ‘노동개혁 법안’을 통해서 쉬운 해고와 저임금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비정규직 양산, 노동 강도 강화, 실업급여 지급 조건 강화, 고용 불안정을 야기하는 파견직 확대 등을 추진했습니다.


이에 반해 자본과는 어떠한 관계를 맺었을까요? 10월 11일 포스코 권오준 회장을 시작으로 대기업 총수들에 대한 검찰의 줄소환이 이뤄지면서 대통령과 재벌 간 밀월관계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7월 24일 대기업 총수 17명을 불러 청와대 오찬간담회를 가진 뒤 총수 7명을 따로 독대했다고 합니다. 이후 삼성과 현대차, SK, LG 등 주요 그룹은 미르재단에 486억 원, 19개 그룹은 K스포츠재단에 288억 원을 출연했습니다. 시민사회단체는 모금 당시 원샷법(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요구하는 경제정책들이 추진된 점 등을 들며 법이 잘 처리되도록 부탁하는 차원에서 재단에 기금을 냈으며, 롯데그룹에 대한 수사나, SK와 CJ그룹 총수에 대한 사면과 복권, 삼성의 ‘3세 승계’ 등 기업들이 현안에 관해 청탁한 혐의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루카 4,18)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 가난한 이들, 묶인 이들과 억눌린 이들이 당신이 전하는 복음의 일차적 수혜자임을 드러냈으며(루카 4,18-19 참조), 행복 선언(루카 6,20-26 참조)을 통해 메시아의 통치, 즉 하느님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차지하는 핵심적인 위치를 선포했습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가난한 이들의 사회 경제적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를 경제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시는”(루카 1,53) 경제이고,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말고”(루카 6,30), “얼마 안 되는 양식으로 많은 사람이 배 부르는”(루카 9,10-17 참조) 나눔의 경제입니다.


‘사람 살리기’가 곧 ‘경제 살리기’입니다


노동이 “단순한 상품이나 비인격적인 생산 도구로 간주될 수 없음”(간추린 사회 교리, 271항)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주체인 인간이 거대한 생산 체계 속에서 “사용하다가 그냥 버리는 소모품”(복음의 기쁨, 53항)처럼 인식되고, 때때로 자본을 위해 희생되기도 합니다. 노동과 자본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상호보완 관계로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노동은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특성 때문에 생산성과 관련된 모든 요소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러한 원칙은 특히 자본과 관련하여 적용”(간추린 사회 교리, 276항)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윤을 창출하고자 노동력을 줄여 노동자들을 배제된 이들의 대열에 합류시켜 버림으로써” 독이 되어버린 경제가 아니라, “더 나은 소득 분배, 일자리 창출, 단순한 복지 정신을 넘어서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진보를 분명히 지향하는 결정, 계획, 구조, 과정”(복음의 기쁨, 204항)을 담아내는 사람 살림의 경제를 이뤄야 합니다. “인간이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사목헌장, 63항)이기 때문입니다.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20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들불처럼 번진 촛불


인간다운 사회 만드는 것이 교회의 임무


헌정파괴와 국정농단의 핵심인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각 교구와 남녀 수도회가 주관하는 시국미사와 기도회가 봉헌되고, 그리스도인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품는 교회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습니다”(묵시 21,3). 하느님은 인간 역사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마침내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몸소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님의 구원은 인간의 영적인 구원을 넘어, 영혼과 육신의 갈림 없는 단일체인 인간 전체(全人)와 모든 인류(萬人)의 완전한 구원입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11항 참조). 따라서 예수님의 구원은 “의인들이 죽은 다음 얻는 새 생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경제와 노동, 기술과 커뮤니케이션, 사회와 정치, 국제공동체, 문화와 민족 간의 관계와 같은 실재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도 현존합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1항)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구원사업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류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나누는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과 함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게 되었고 계속해서 모든 사람 가운데서 현존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그들에게 선포합니다… 구원의 봉사자인 교회는 추상적 차원이나 단지 영적 차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과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 있습니다.”(〃 60항) 그러므로 “교회는 스스로를 가두거나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인간에게 열려 있고, 인간에게 다가가며 인간을 지향해야 합니다.”(〃 86항).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82항)


교회와 정치 공동체의 관계


“정치 공동체와 교회는 그 고유 영역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입니다. 그러나 양자는 자격은 다르지만, 동일한 인간들의 개인적 사회적 소명에 봉사합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81항) 교회는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인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수호하고 인간다운 사회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교회 본연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록 교회는 직접적으로 정치활동에 개입하지 않더라도, 사회 전역에 갖가지 방식으로 난무하고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불의와 폭력을 고발할 의무와 인정받지 못하고 침해받는 권리들, 특히 가난하고 보잘 것 없고 약한 이들의 권리를 판별하고 수호하여 사회 정의를 세울 사명이 있습니다.(〃 81항 참조)


교회가 선포하는 하느님나라의 복음은 내세적 희망의 근거일 뿐 아니라 현실에서 성취해야 할 지상 과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정치권력 획득을 위한 직접적인 정치 투쟁과 정의로운 평화를 위한 투쟁을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는 전자를 정치 공동체의 몫, 후자를 교회의 몫으로 봅니다. “교회는 가장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 정치 투쟁을 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국가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8항)


교회는 자신의 안위와 보전을 위해 국가 권력의 맹목적인 추종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예언자적 입장에서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27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실천하는 믿음


그리스도인, 사랑으로 진리 증언해야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교회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지체로서 사랑으로 진리를 증언해야 합니다(에페 4,15-16 참조). 여기서 사랑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성체와 성혈로 생명의 양식이 되어주시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요한 13,34 참조), 벗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루카 10,25-28 참조). 이처럼 사랑하기 위해 하느님을 찾는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에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특히 “수많은 가난한 형제자매들은 도움을, 수많은 억압받는 이들은 정의를, 수많은 실업자들은 일자리를, 수많은 민족들은 존중을 고대하고 있습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5항). 하느님을 간절히 찾는 이든, 하느님을 불신하는 이든, 이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성사(聖事)로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여야 합니다(루카 4,18-19 참조).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거룩한 사명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위치임에도, 세상의 피눈물을 외면하고 교회 울타리에 안주하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인간 세상에 죄로 인해 어두움이 가득할수록, 인간에 대한 인간의 억압이 심해질수록, 함께 살아야 할 인간 세상이 탐욕과 불의로 분열될수록,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불신은 극렬하게 부딪히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불신을 극복하고, 언제나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느님, 언제나 세상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항구히 일하신다. 그분은 그리스도교인 전체가 깨어 있고 자신들의 사명을 의식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의 영을 보내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통해 세상 안에서 활동하고자 하신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느냐, 아니면 반대로 귀를 막고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느냐 이다”(게르하르트 로핑크, 「오늘날 무신론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2, 117쪽).


하느님은 결코 침묵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 정의와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하느님께 침묵을 강요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 파견되어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삶으로 증언하기보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 머무르려는 그리스도인의 위선적 안이함이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이들을 가로막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바로 구세주의 손과 발이 되기를 바라며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4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헌법 정신


정치 권위의 주체는 국민 전체


국민이 대통령을 낳고, 대통령은 국민을 섬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입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69조의 대통령 취임 선서문입니다. 주권자인 국민은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낳고, 대통령은 자신을 낳아준 국민 앞에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받들 때에 비로소 헌법의 고귀한 가치는 수호됩니다.


이른바 대통령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망신창이가 된 지금, 국민의 뜻은 분명합니다. 대통령 지지율 4%,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연일 전국에서 타오르는 수백만 촛불들. 비뚤어진 자식을 낳고 후회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국민은 대통령에게 물러나라고 엄중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이 낳은 대통령은 꿈적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죄과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전가에 여념이 없습니다.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고결한 대통령 선서를 스스로 폐기하고 국민과 맞서고 있습니다. 패륜입니다.


세상을 엎어라!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대통령과 그에 기대어 한 줌 권력을 탐닉하는 기회주의 정치인들로 말미암아 혼돈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루카 19,45-28)을 떠올립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성전, 곧 하느님과 사람이 만나는 거룩한 곳, 모든 이가 더불어 살아야 할 삶의 터전을 자신의 안마당으로 만들어버린 강도들, 곧 권력자들과 장사치들을 내치십시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이전에,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강생의 신비 자체가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머무시기에 거룩한 성전인 세상, 그러나 불의를 일삼는 소수에 의해 다수가 고통당하는 추악한 세상의 정화 사건입니다.


세상을 정화하러 오신 주님께서 당신의 성전인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십니다.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해 가난하고 약하고 억압받는 이들과 하나 되라고, 세상을 원래의 모습대로 당신과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기도하는 곳으로, 당신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는 거룩한 땅으로 만들라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보내십니다. 나눔과 섬김, 평화와 정의가 넘치는 거룩한 성전인 세상을 탐욕과 독점이 난무하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놓고, 이 소굴의 법칙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이들에게 당당하게 맞서라고 우리를 보내십니다.


국민이여, 불의한 대통령을 지체 없이 탄핵하라!


세상 정화의 소명은 현실 정치 영역에서 국민에 의한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심판과 교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정치 권위의 주체는 주권을 지닌 이들로 간주되는 국민 전체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국민은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들에게 주권의 행사를 위임하지만, 통치 임무를 맡은 이들의 활동을 평가하고 그들이 충분히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 바꿈으로써 이러한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특권은 보존됩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395항).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우리 헌법의 정신과 일치합니다.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11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정경유착


‘공동선’ 위해 가치 만드는 좋은 기업


“정경유착의 토대가 있기 때문에 최순실도 가능”


지난 6일 최순실 게이트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 1차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이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번 청문회는 정경유착 청문회다. 여기 앉아있는 그룹 총수들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기 능력 때문에 지금 위치에 다다른 것이 아니다. 아버지 덕분에 지위를 얻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부분 죄를 져서 감옥에 갔다 왔거나 기소 중이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다. 아버지 덕분에 돈과 권력을 얻은 전과자들이 한국경제를 이끈다는 이 사실이 한국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민들은 이들을 최순실 게이트 공범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공범이 아니고 주범이다. 정경유착의 토대가 있기 때문에 최순실도 가능한 것이다. 초법적인 재벌은 항시적 몸통이고 최순실은 지나가다 걸리는 파리에 가깝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을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정경유착을 못 끊는 이유는 단순하다. 재산과 경영권을 세금 안내고 세습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 탐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아마 여기 온 분들의 자손은 20~30년 후에 또 감옥에 가거나 이런 자리에 나올 것이다. 그런 일이 정말 벌어진다면 그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부패한 정치권력과 탐욕스런 경제권력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죄악의 연대’(화해와 참회, 16항 참조)를 이루어 공동선을 유린하는 추악한 역사가 이어진 오늘, 영원한 생명을 찾는 부자 청년(마태 19,16 참조)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투명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 거부할 수 없는 준엄한 명령으로 다가옵니다. 나름 계명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던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그러자 움켜쥔 것을 내놓을 수 없었던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의 길을 포기하고 탐욕스런 죽음의 길로 나아갑니다(마태 19,22 참조).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는 ‘좋은’ 기업


경제적 관점에서 기업은 이윤 창출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가톨릭사회교리는 단지 “이익의 효율적인 달성”을 성공으로 삼는 “기업”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위해 가치 있는 것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좋은 기업”(DOCAT, 187항)이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좋은 기업은 “유용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함으로써 사회의 공동선에 이바지할 능력을 갖추어야”(간추린 사회 교리, 338항) 하며, 일부 사람의 개인적인 이익만을 만족시키는 조직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유익해야 합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339항 참조). 또한 좋은 기업은 이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활동의 시작과 과정과 목적의 중심에서 공정하고 인간적이고, 사회적이고, 환경을 의식하며 행동”(DOCAT, 187항)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업을 운영하는 주체는 “주어진 권력과 재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용하는 행위로서 사회를 내부로부터 파괴하는 암 덩어리”인 “뇌물, 횡령, 권력 남용, 관직 비호”(DOCAT, 194항)등의 부패와 단호하게 갈라서야 합니다.


온 국민에게 생중계되는 청문회에서 수치스러운 민낯을 드러내야만 했던 재벌 총수들이 앞으로 과연 ‘내어놓은’과 ‘움켜쥠’ 사이에서, ‘함께’와 ‘홀로’ 사이에서, ‘청렴’과 ‘부패’ 사이에서, ‘살림’과 ‘죽임’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는지 우리 모두 똑바로 깨어 지켜보아야 합니다.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18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소박한 구유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는 연대


구유 : 아기 예수님을 모신 자리.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이다.”(루카 2,12)


구유는 가축들의 밥그릇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모셨다 해도, 구유는 포근한 요람이 아니라 구유일 뿐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우신 까닭은 구유를 요람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사람 사는 세상의 가장 낮고 천한 자리를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을 모실 곳은 구유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곤에 지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추위와 맞서며 캄캄한 밤을 지새우는 가난한 목자들에게 주님의 천사들이 주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안락하고 따스한 요람이 아니라 거칠고 마른 지푸라기 더미로 채워진 투박한 구유에 누워 계실 것이라는 슬픈 소식과 함께. 하지만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이 역시 기쁜 소식입니다. 간절히 고대하던 메시아, 뭇시선을 끌지 못하는 가난한 메시아에게서 바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복음의 기쁨」 53항)


오늘 아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하루에도 수십억 원씩 거래되는 주식 시장의 거래 현황판도, 돈과 권력, 학벌과 지위가 아귀다툼하는 죽음 같은 경쟁의 자리도, 신문을 뒤덮는 세일 광고도, 연말연시 분위기를 휘어잡는 백화점 진열장의 값비싼 물건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지, 어떠한 모습으로 오셨는지 아는지 모르지만 울긋불긋 시내 곳곳을 수놓은 요란한 크리스마스 장식등도, 공허한 캐럴소리도 아닙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웃들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외면하고 나눔과 베풂의 정신을 상실한 채, 자신만의 안락과 구원을 추구하는 교회공동체도 아닙니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려 숨조차 편히 쉬기 어려운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에, 자기 탓 없이 일자리 빼앗긴 이들의 축 쳐진 어깨에, 보금자리를 빼앗긴 이들의 피맺힌 가슴에, 불의한 국가 폭력에 쓰러진 가난한 이들의 싸늘한 품에, 전쟁과 테러로 죽어간 가난한 아이들의 채 피어나지 못한 고운 꿈 안에, 온갖 차별과 착취로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이들의 피토하는 울부짖음에, 인간의 탐욕으로 짓뭉개진 “우리의 공동의 집”(찬미받으소서, 1항)인 지구에, 생명 정의 평화를 보듬으려는 선한 이들의 작지만 결연한 몸짓에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대는 복음의 중심에 있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의 한국 주교들과 만남에서 행한 연설, 2014,8,14)


아기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서, 우리는 사치스런 요람이 아니라 소박한 구유를 준비해야 합니다. 2000년 전 아기 예수님을 소중히 받아 모셨던 거친 구유는 오늘도 여전히 구유여야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의 구유는 무엇입니까?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25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사회교리 아카데미] 부패의 정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


1961년이 저물어가는 12월, 이스라엘에서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란 전범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 친위대 중위, 유태인 업무책임자로 유태인의 체포, 강제이주를 계획, 지휘하고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인물입니다. 다른 전범들은 자신의 유죄를 인정했지만 아이히만은 항변했습니다. “나는 군인이었다.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군인이 상부의 명령대로 행동하는 것이 왜 유죄인가?” 결국 그는 1962년 6월 1일에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아이히만의 죄는 시킨다고 아무 생각 없이 행한 죄다. 우리 모두의 안에는 아이히만이 있다’고 했습니다.


온 나라가 대통령의 부패와 비리에 참담함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비리를 저지르고도 ‘내가 잘못한 것이 뭐죠?’라고 항변한 것은 비리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황당한 시민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부패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적 이득을 위해 공적 권력을 오용하는 것’입니다. 대통령 직무정지 원인은 비리와 부패 때문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공적 권력을 생각 없이 사사로이 오용한 것입니다.


대학교수였던 조원동은 2013년 3월부터 약 15개월간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고 2013년 7월 대통령의 지시로 ‘이미경 CJ 부회장’ 사퇴를 강요한 혐의로 기소되고 12월 14일, 청문회 끝에 ‘대통령이 시킨 대로 했는데 죄인이 돼버렸다’며 억울해 했습니다. CJ E&M이 운영하는 케이블 방송은 2012년 대선 당시 후보자 박근혜를 희화화한 프로그램을 방영했고 2013년 CJ창업투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을 그린 영화 ‘변호인’을 제작하여 1000만 관객을 모았습니다. 박 대통령과 측근들은 이런 CJ의 태도가 눈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원동은 권력의 지시를 따라 민간기업의 경영진을 교체했고 그로서 기소된 상황이 억울하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시켜서, 최순실이 시켜서, 이모가 시켜서, 수석비서관의 명령이라서…” 그들과 아이히만의 얼굴이 오버랩 됩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399항은,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 질서의 요구나 인간의 기본권 또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될 때, 국민들은 양심에 비추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 부당한 법은 도덕적으로 올곧은 사람들을 곤란에 빠트리는 양심의 문제를 제기한다. 도덕적으로 사악한 행위에 협력하도록 요청 받을 때 그들은 이를 거부하여야 한다.


그러한 거부는 인간의 의무인 동시에 인간의 기본권이기도 하다. 인간의 기본권은 바로 그 자체로서 국법으로 인정받고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삶이 버겁고, 막막하고, 그래서 시키는 대로, 책임 없이 살아가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아이히만이 되는 것도 아닌 바, 한 번 눈감고 약간만 비겁하면 삶은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답할 때, 복음과 양심의 소리를 듣고 선택하고 실천하는 사회교리가 생활화됩니다. 2017년, ‘세상 속의 신앙인의 몫’에 대하여 ‘사유’(思惟)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 양운기 수사(한국순교복자수도회) -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소속.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상임위원이며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다. 현재 나루터 공동체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월 1일, 양운기 수사(한국순교복자수도회)]


[사회교리 아카데미] 불의한 공권력에 대한 저항 :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


비복음적인 힘에 맞서라


‘군주민수’(君舟民水), ‘역천자망’(逆天者亡), ‘노적성해’(露積成海)


대학교수들이 2016년의 사자성어로 ‘군주민수’(君舟民水)를 선택했습니다. 순자(苟子)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사자성어인 군주민수는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2위에는 ‘천리를 거스르는 자는 패망하기 마련’이라는 뜻의 ‘역천자망’(逆天者亡)이 올랐습니다. 민심(民心)은 곧 천심(天心)이니, 이 역시 국민을 거스르는 지도자는 설 자리가 없음을 뜻합니다. 3위에는 ‘작은 이슬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룬다’는 ‘노적성해’(露積成海)가 올랐습니다. 이 세 가지 사자성어 모두, 그동안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선한 국민들이 불의한 권력자를 향한 준엄한 심판의 촛불을 들었던 작년 말의 역사적인 대장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한국민(大韓國民)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입니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곧 대한국민(大韓國民)임을 온 누리에 천명한 참으로 가슴 벅찬 법조문입니다. 대한민국은 탐욕과 권력에 눈이 먼 소수의 대한국민이 아니라, 5000만 대한국민의 나라입니다. 분명 그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드러난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지난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은 불의한 권력자들에 의해 농락당했습니다. 대다수의 선량한 대한국민들이 배제되고 밟히고 무시당함으로써 ‘대한국민의 대한민국’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수많은 대한국민들이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이게 나라냐?’라는 분노의 물음은 조국을 폄하하는 조롱이 아니라,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엇을 했는지 ‘작은 대한민국’으로써 자신을 향한 질책의 소리요, 자랑스러운 조국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다짐의 외침입니다.


불의한 공권력에 대한 저항 :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


정치공동체 안에서 행사되는 인간의 권위인 공권력과 하느님의 권위는 분명 구분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마태 22,21)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공권력과 함께 사회의 선익을 위해 이바지하는” 국민들은 “합법적 권위에 복종하고 공동선에 봉사하기 위해 정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면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239항).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의 권위는 하느님에게서 유래하기에, 인간의 권위는 하느님의 선한 의지를 드러내는 한에서만 정당성을 인정받습니다. 따라서 공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협력은 “인격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선익에 해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올바르게 질책할 권리와 때로는 의무까지 내포하고”(가톨릭교회교리서 2239항)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이나 기본 인권이나 복음의 가르침 등에 어긋날 때, 시민들은 양심적으로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습니다. 공권력의 요구가 올바른 양심의 요구에 어긋날 때, 공권력에 복종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복종과 정치 공동체에 대한 복종이 다르다는 데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으며”(가톨릭교회교리서 2242항),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기”(사도 5,29) 때문입니다.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월 8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