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환경 회칙 -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1. 식별을 위한 성찰 - 교황 새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 1장을 중심으로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을 대신해 인류에게 보내는 편지


“우리는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대답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면서도 “다른 사람의 삶에 참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아보는 폭넓고 심오한 감수성을 키울 필요가 있다”(「복음의 기쁨」 155항)고 호소한 교황이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다녀간 프란치스코 교종이다. 그는 자신의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의 강론 부분에서 이같이 밝혔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특히 ‘사목자’들에게 한 호소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보낸 편지


프란치스코 교종이 6월 18일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회칙’이라고 부르지만, 모든 사람이 돌려가면서 읽으라고 보낸 편지(encyclical letter)라 할 수 있다. 그날 저녁 어느 뉴스 보도는 교종의 이 회칙을 두고 미국의 어느 정당이 즉각 반발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놓고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교종의 회칙이 길어서 읽는 데 힘이 들기는 하겠지만,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다면 평화신문 독자들도 꼭 읽어보면 좋겠다. 왜 그 회칙이 그렇게 즉각적으로 반발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더 바란다면, 우리의 현실, 우리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자문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교종은 오늘의 우리가 “자기 파괴적 악행을 키운다”고 본다. 어떻게? “(우리가 키우는) 그 악행들을 보려 하지 않고, 그 악행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중요한 결정을 미루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가장함으로써”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교종은 이를 한 마디로 “회피”의 면허증이라고 부르면서, 이 면허증으로 오늘의 우리는 “지금의 생활 방식과 생산과 소비 모델을 지속”(「찬미를 받으소서」 59항)시키려 한다고 지적한다.


신음하는 대지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는 절규에 대한 응답이다. 그것도 ‘사람들의 삶에 실제 영향을 주는’ ‘폭력’ 때문에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하는 응답이다. 교종은 편지에서 우리의 누이와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우리에게 탄원하고 있다고 알린다. “이 누이가 지금 우리가 그녀에게 입힌 상처 때문에 울부짖습니다.…우리는 그녀에게 [그것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찬미를 받으소서」 2항). 누이란 누구인가? 나와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닌가? 그 누이는 또 누군가의 어머니이다. 그 어머니가 또 자식들이 입힌 상처 때문에 고통스럽게 울부짖는다. 이 누이이며 어머니는 바로 ‘대지’이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교종의 편지가 ‘환경’에 관한 것이라 대뜸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럼 자연을 보호해야지!” 할 수도 있겠으나, 그분은 그렇게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 “환경의 악화와 인간의 타락과 윤리의 퇴보”(「찬미를 받으소서」 56항)가 긴밀히 결부돼 “끔찍한 불의”(「찬미를 받으소서」 36항)를 저지르고 있지만, 대다수 우리는 “회피”의 면허증을 가지고 그 불의에 침묵한다. 그러는 사이에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는 신음하고, 하늘과 땅과 물에서 자신의 존재로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무수한 피조물의 찬미 노랫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무수한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나라들은 배제되고 버려져 존재하지 않게 된다(「복음의 기쁨」 53항 참조).


구조적 원인은 어디에서?


교종은 「찬미를 받으소서」 회칙 제1장에서 ‘우리의 공동 가정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고 묻는다. 오염과 기후 변화, 물 부족, 생물 다양성 상실, 인간 삶의 질 저하와 사회의 붕괴, 지구의 불평등 문제들에 대한 검토를 제안한다. 교종은 이 문제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면서 이를 “더 이상 카펫 아래에 쓸어 넣을 수 없다”고 언명한다. 그리고 이 검토가 우리의 “고통스러운 자각” “세상의 고통을 인격적 고통으로 전환시키기”, 그리고 “행동의 길 찾기”를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찬미를 받으소서」 18항).


교종은 이어 지구가 앓고 있는 ‘병의 증세’를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소개하면서, 문제를 야기한 배경 곧 구조적 원인을 밝힌다. 그러면서도 그에 따르는 ‘불편함’이나 ‘비난’을 회피하지 않는다. 좀 지루하지만 회칙이 언급하는 내용을 옮긴다.


△ 진보와 인간 능력에 대한 비이성적 신뢰(19항) △기술과 기업 이익의 결탁(20항) △ 내다버리는 문화와 자원 보존 능력을 결여한 산업 시스템(22항) △ 환경 문제를 악화시키는 악순환(24항) △ 환경 악화로 야기된 고통에 대한 광범위한 무관심과 동료에 대한 책임감 상실(25항) △ 일부 더 많은 자원과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의 이기적 관심(26항) △ 물 자원을 사유화하여 시장 규칙에 종속된 상품으로 만들려는 경향(30항) △ 거대 다국적 기업의 물 관리 시도(31항) △ 경제와 무역과 산업에의 근시안적 접근(32항) △ 기업의 이익과 소비에 기여하는, 악순환을 가져오는 인간의 자연 개입(34항) △ 거대한 경제 세력, 초국적 기업들의 경제적 이익(38항) △ 환경 파괴에 영향을 미치는 현재의 발전 모델과 내다버리는 문화(43항) △ 지난 200년 간 성장이 가져다준 부정적 측면들(46항) △ 가난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지금의 분배 모델을 합법화하려는 시도(50항) △ 구조적으로 부당한 거래 및 소유 시스템 (52항) △ 정치뿐 아니라 자유와 정의 문제까지도 장악하는, 기술-경제 패러다임에 토대를 둔 새로운 권력 구조들(53항) △ 경제와 기술의 결탁 그리고 이에 대한 나약한 정치적 대응(54항) △ 투기와 금융소득을 우선하는 경제 권력(56항) △ 충돌에 대처하려는 정치적 노력에 강하게 저항하는 막강한 금융 세력(57항).


교종은 이렇게 기득권 세력이 거북해 하고 불편해 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왜?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교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종은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를 통해서 약한 존재, 약한 사회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윤이나 무분별한 착취에 휘둘리는 또 다른 힘없고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존재들, 피조물 전체”(「복음의 기쁨」 215항)의 신음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28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환경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2. 서론과 1장 ②


‘생태’ 위기, 온 인류가 머리 맞대고 공동 숙제 풀어야


지난 호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불편함을 무릅쓰고 우리의 ‘누이와 어머니의 절규’를 듣고 응답한다는 요지의 글을 실었다. 응답에는 단순히 듣는 것만 포함되지 않는다. 아픈 사람과 의사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고통을 겪고 있는 아픈 사람에게 의사는 그냥 “아프시군요!” “어떻게 하지요?” “그냥 꾹 참으세요” 하지 않는다.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아픈지 묻고, 필요하다면, 첨단의료장비를 동원해 검사하고, 그래서 증세와 함께 그 원인을 찾아내어 그에 맞게 치료한다. 대개 병이 중할수록 혼자 하지 않고 협진을 한다.


회칙 1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오염과 기후 변화, 물 빈곤, 생물 다양성 상실, 인간 삶의 질 저하와 사회의 붕괴, 지구의 불평등 따위는 병의 증세들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래서 간단히 ‘환경’ 문제로 보려 할지 모르겠다. 실제로 언론에서는 ‘최초의 환경’ 회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오해’를 살 위험이 있다. 우선 이른바 ‘환경’ 문제는 전임 교종들도 끊임없이, 그것도 시급하게 응답을 촉구하며 호소했다.


둘째로 ‘자연 환경’으로 축소(환원)시킬 수도 있다. 그렇지만 회칙은 ‘생태’를 대체로 인간 환경(human environment), 자연 환경(natural environment), 그리고 사회 환경(social environment)의 종합으로, 그것들 사이의 분리시킬 수 없는 관계로, 더 나아가 ‘하느님의 창조’라는 ‘실재’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비유하자면,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는 ‘협진’하자는 초대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중병으로 온몸 곳곳에서 견디기 어려운 통증을 느끼는 어머니와 누이가, 하느님의 삼라만상이 살아있는 이 지구라는 행성이 지금 우리에게 울부짖고 있으므로, 형제와 자녀들이 모두가 하루빨리 모여서, 증세의 원인을 찾아내서 치료하자고 다급하게 초대한다. 협진하지 않으면, 결국 “하느님의 기대”(61항)를 저버려 “자기 파괴”(55항)가 될 것이므로.


게다가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는” 하느님 백성이다. 주님 제대에 모여 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느님께 “주님을 찬미한 삶”을 제물로 봉헌한다. 그래서 자꾸 서로 다짐한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그런데 주님을 찬미하려는 우리 삶이 너무나 강력하게 광범위하게 그러면서도 피할 수 없이 도전을 받고 있다. 하느님께 봉헌할 제물을 마련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하느님 사랑의 무수한 역작이 전시되어 그 존재 자체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는 ‘이 행성’의 미래가 걸린 문제들이 ‘급속도’로 밀려들고 있다.


그래서 교종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우리 행성의 미래를 [지금] 어떤 식으로 꾸릴 것인가’에 관한 새로운 대화를 긴급하게 호소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환경의 도전과 그 인간적 뿌리들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며 악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찬미를 받으소서」 14항).


교종은 도전을 피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도전에 용감히 맞서고 극복하며 새로운 과정에로 그 도전을 편입시키는 길이 참된 평화, 참된 발전에 이르는 길이라 믿는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227항 참조). 또 우리 모두 실재주의자가 되자고 권고한다(「복음의 기쁨」 108항 참조).


물론 교종의 이 신념은 인류와 하느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결코 당신의 사랑의 계획을 돌보지 않으시거나, 우리를 창조하신 것을 뉘우치지 않으십니다. 인류는 여전히 우리의 공동 가정을 건설하는 데 함께 일할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찬미를 받으소서」 13항).


우리는 어머니와 누이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공동 가정’에서 ‘인류 가족’으로 살 수 있다. 그래서 공동 숙제를 풀기 위해 가족이 ‘다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대화’를 하자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5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3. 서론과 1장 ③


세계적 환경 악화, 50년 전 ‘핵위기’와 비견


대화하려면 먼저 서로 만나야 한다. 그리고 처지를 털어놓아야 한다. “사실들을 정직하게 바라보기”(61항)가 그것이다. 의사가 아픈 사람을 꼼꼼하게 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교종은 ‘사실들’과 함께 “지금 상황에 대한 생생한 분석”(17항)을 제시한다. “땅에서, 물에서, 공기에서 그리고 모든 형태의 생명에서 볼 수 있는 병의 증세들과 그 분석”(2항)을 말이다. 과학적으로나 일상의 경험으로 볼 수 있는 증세들은 ‘사실들’이다.


왜 그런 증세가 나타난 것일까?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처방’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회칙은 그 처방에서 양극단이 있다고 본다. “진보의 신화를 집요하게 붙잡고 있으면서, 생태 문제들은 어떠한 윤리적 고려들이나 근본적 변화 없이도, 그리고 단순히 새로운 과학기술을 적용하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이 그 하나다. 이는 ‘진보’가 만병통치약이라며 먹으라는 식이다.


“사람들과 사람들의 모든 개입은 이 행성에 위협일 뿐이며, 생태 시스템을 위태롭게 한다. 따라서 이 행성 위에 사는 사람의 수를 줄여야 하고, 모든 형태의 개입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른 극단이다(60항). 이는 ‘삶’이 곧 ‘죄’라는 식이다. 물론 “오염과 타락을 보여주는 몇몇 분명한 표지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피상적으로 보기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보지 않는” ‘태연한 회피’, ‘문제의 부정’, ‘무관심’도 있다(14, 59항 참조). 양극단도, 무관심도, 병을 치료해 증세를 없애는 길이 아님은 분명하다.


왜 ‘새로운’ 대화인가? 그 이유를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해보았다. 우선, 인류는 ‘새로운 사태’를 맞았다. 인류는 “여러 면에서 인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불균형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다(17,18항). 이 ‘세계적 환경의 악화’는 “50여 년 전 ‘핵위기’에 임하여 비틀거렸을 때”(3항)의 상황과 견줄 만하다.


다음으로, ‘환경 악화’라는 증세를 완화하고 중병의 뿌리를 치료하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나름대로 칭송할 만한 결실을 내기는 했지만(26, 37, 38, 55, 58항), 문제의 “심각성과 시급성, 광대함”(15항)에 비하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환경 위기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많은 노력들이 실효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14항).


셋째로, 지난 호에서 소개한 바대로 “방해자들의 강력한 저항” 때문인데, 여기서는 두 가지 정도만 소개한다. 하나는 사회의 여러 영역이 “진보와 인간 능력에 대한 비이성적 자신감”을 갖고 “보다 위험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데(19항), 이는 ‘인간 삶의 질 저하와 사회 붕괴’ 그리고 ‘세계 차원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악순환’을 불러온다. “과학기술-경제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새로운 권력 구조들이 우리의 정치뿐만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압도”(53항)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더 큰 병을 주면서 효과는 덜한 약을 주는 셈이다.


넷째로, ‘리더십의 부재’와 ‘국제 차원이 정치적 대응의 나약함’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경로를 밟을 수 있는 리더십이, 다가올 세대를 향해 편견 없이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한 관심을 갖고 지금의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리더십이 없습니다”(53항). “환경에 관한 지구 정상 회담의 실패는 우리의 정치가 기술과 금융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54항).


마지막으로, “절대로 우리는 지난 200년 동안 우리의 공동 가정에 상처를 입히고 학대한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교종은 그냥 이야기만 나누자는 것이 아니다. 교종은 “새롭고 보편적인 연대”(14항)의 길을 나서려 한다. 소극적으로는 “끔찍한 불의에 대한 침묵의 증인”(36항)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지”(61항) 않기 위해서, “자기 파괴적 행동”(55항)을 멈추기 위해서다. 적극적으로는 “대지의 울부짖음과 사회적 약자의 울부짖음을 같이 듣기”(49항) 위해서 “차별화된 책임”(52항)을 짊어지기 위해서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12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4. 서론과 1장 ④


지금의 발전모델은 응급 종합 정밀검사가 필요합니다


메르스가 우리 앞에 갑자기 등장했다. 사람들이 절절맸다. 대형 병원의 첨단 의료 기술이 있으며,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 국가의 일류 행정이 있으므로 안심해도 괜찮다는 데도 그리 절절맸다. 그러면서도 애써 태연했다. “고령의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이나 위험하지!” 하면서…. 실제로 ‘기저 질환과 메르스가 만나면 치명’임을 보여주었다.


지나친 단순화겠지만, 회칙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령의 기저 질환’을 생각해보자. 신체적으로 면역력이 약한데다가 심혈관계 질환이나 당뇨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심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 해도 제약은 또 얼마나 많은가.


회칙의 1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몇 가지 실재가 바로 이 ‘고령의 기저 질환’에 해당된다. ‘인생’에서 모든 ‘생’이 결합되어 있는 ‘생태계’(ecosystems)로 확장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공동 재화인 ‘기후’를 ‘당’ 혹은 ‘혈압’이라 해보자. 우리 몸에 당과 혈압이 있어야 하듯이, 지구에도 기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과 혈압 수치에 이상이 생기면 어찌 되겠는가? 물론 몇 가지 조처를 할 것이다. 운동과 식이요법과 투약이 그것이겠다. 그런데 운동을 못 할 정도로 약한 사람은? 너무 가난해서 식이요법을 할 처지가 못 되면, 국민건강보험제도 같은 것도 없는데 너무 가난해서 병원을 찾을 형편이 못 된다면…. 그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면, 그냥 남의 딱한 처지에 불과한 일일까?


기후 변화가 생태계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서도 너무 태연하다. 기후 변화는 ‘온난화’를 불러오고 있으며, 그 온난화가 해수면을 상승시키고 있다. 회칙은 가정법의 문장으로 “지금의 이 추세대로 가면 비상한 기후 변화와 전례 없는 생태계의 파괴와 모두에게 미칠 심각한 결과들을 제대로 목격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구 인구의 1/4이 해안과 그 주변에 살고 있으며, 대도시 대부분이 해안 지역에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해수면 상승이 극단적으로 심각한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24항) 하고 걱정한다.


회칙은 그 심각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예상한다. “기후 변화가 가져올 최악의 충격은 아마도 다가올 수십 년 안에 개발도상 국가들이 겪을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 가운데 많은 이가 온난화와 관련된 현상에 현저하게 나쁜 영향을 받는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 그들에게는 기후 변화에 적응하거나 혹은 다른 자연 재난들과 맞설 수 있는 재정 활동이나 자원들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사회적 약자’는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후 변화에 동물과 식물들은 적응할 수 없으며, 그들은 (사라지거나) 이주할 수밖에 없고, 이는 차례로 사회적 약자의 생계에 악영향을 미칩니다”(25항).


이제 회칙은 예상하는 심각한 상황이 ‘증세’로 나타나고 있다고 밝힌다. 마치 메르스의 증세인 고열이 있는데 바라보기만 하는 형국이다. “환경의 타락으로 악화된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이주한 사람들이 수가 비극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 슬프게도 그 같은 고통에 대부분 무관심합니다.” 그 무관심은 무책임이다. 최근 수십 년의 온난화의 원인은 “사람들의 활동 결과로 배출된 온실가스의 고도 집중”(22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시민사회의 토대인 “사람에 대한 책임감”(25항)을 잃어버린 표지다.


기후 변화와 온난화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지난 2세기 동안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을 토대로 지속시켜온 인류의 발전 모델이 가져온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그 증세가 ‘병의 증세’여서 문제다. 메르스 정도가 아니다. 행성 전체에, 인류 전체에 그것도 미래 세대까지, 사람만이 아니라 창조질서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에게 심각한 ‘악영향’으로 나타나는 증세다. 단순한 ‘부작용’이 아니다. 시급히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치명적’일 수 있다.


마치 지구가 고령의 기저 질환 상태로 치닫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지구가 겪는 고통, 사람이 겪는 고통, 피조물이 겪는 고통, 사회가 겪는 고통은 견디기 어려운 고열의 증세가 될 것이며, 그 증세에 대해 회피와 외면, 무관심과 무책임을 초래하는 그런 ‘발전 모델’은 바이러스쯤 되겠다. 회칙은 지금의 발전 모델을 재검토(정밀검사)하자고 촉구한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19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5. 서론과 1장 ⑤


중병, ‘지난 200년 성장과 발전모델’ 증세, ‘사람의 삶의 질의 저하와 사회의 고장’


지난 호에서는 ‘기후 변화’라는 ‘증세’를 예로 들었다. 증세의 그 악화 속도가 너무 심상치 않아 하루라도 빨리 정밀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교황은 호소한다. 이때 그나마 다행인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체의 어느 한 부위에서만 한 가지 증세가 나타나고, 그 부위에만 나쁜 영향을 주는 경우다. 물론 ‘형편이 허락한다면’이란 전제 조건이 있지만, 해당 전문의를 찾아가 응급 정밀검사하고 원인을 찾아 진료하면 된다. 그런데 만일 그 증세가 곳곳에서, 즉 자연에서, 사람에게서, 사회에서, 그리고 전 지구 차원에서 나타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을 우리는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회칙의 1장은 그 ‘증후군’(상황)을 ‘신선한 분석’(17항 참조)으로 소개한다.


회칙은 ‘오염과 기후 변화’(20~26항) 문제뿐만 아니라, ‘물과 관련된 논쟁점’(27~31항)과 ‘생물 다양성의 상실’(32~42항) 문제도 함께 다룸으로써, 하늘과 땅과 물에서 급속도로 악화되는 각각의 증세를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아! 교황이 환경 전체에 관한 회칙을 냈구나! 교황이 자연 보호를 호소했구나! 그러니까 앞으로 환경 보호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군!”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누군가는 회칙을 불편하게 여기며 일부러(?) 여기까지만 읽고 싶어 할 것이다. 아마 ‘과학기술-경제 패러다임’을 맹신하여, “윤리적 고려들이나 근본적 변화”를 배제하고 “새로운 과학 기술을 적용”하면, 환경 문제쯤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일 것이다(60항 참조). 그러나 회칙은 이런 태도를 “투기와 금융소득 추구를 우선하려는 현재의 전 지구적 체제”를 정당화하려는 ‘경제 권력’의 시도라고 단호하게 거부한다(56항). 이 경제 권력의 눈에는 자연도, 사람도, 사회도, 하다못해 ‘지구와 우주’도 시장의 규칙에 따라야 할 ‘상품’으로만 보일 것이다.


회칙은 ‘사람의 삶의 질의 저하와 사회의 고장’(43~47항)을 심각한 ‘증세’로 제시한다. 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며 명백하다. 사람도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로서 생명과 행복의 권리를 누려야 할 존엄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칙은 “환경의 악화와 지금의 발전 모델과 내다 버리는 문화가 사람들의 생활에 미친 결과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43항)고 밝힌다.


회칙은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몇 가지 ‘상황’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살기에 건강하지 않은 도시’ 환경과 ‘도시의 불균형 성장과 무분별 성장’이 그것이다. 도시 시민들은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유리와 금속 속에 갇혀…자연과의 물리적 접촉을 박탈당한다”(44항).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다. 도시 비대화에 따르는 문제들은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대중교통만 예로 들어보자.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 있다. 정원과 정원 초과, 만원과 혼잡과 콩나물시루는 점잖은 표현이다. ‘지옥철’이라는 끔찍함을 드러내는 표현도 있다.


다음은 우리도 ‘사회의 고장’을 금세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도시와 비도시에서, 특정 공간의 사유화로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지역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은 제한됩니다. … 이른바 도시의 ‘보다 더 안전한’ 지역에서는 정성 들여 아름답게 가꾼 녹색 지대가 있습니다만, 사회가 버릴 수 있는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 즉 좀 더 많이 감춰진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흔한 일입니다”(45항).


우리의 경우, 같은 도시라도 치안부터 교육과 사회복지 급여와 심지어는 도로 청결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불균형과 불평등은 거주 지역의 ‘땅값’에 비례한다. 범위를 넓혀, 도시 시민의 쾌적함을 위하여 비도시 시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우리의 비윤리적 핵에너지 정책도 ‘사회의 고장’의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지난 200년의 성장이 언제나 통합적 발전과 삶의 질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표지들입니다. 그 가운데 몇몇 표지들은 실제 사회적 쇠락, 즉 통합의 유대들과 사회적 결합의 유대들이 조용하게 파열하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합니다”(46항).


회칙은 자연환경의 타락뿐만 아니라 인간 환경과 사회 환경의 타락을 ‘증후군’으로 제시하며, 지난 200년의 성장과 발전 모델을 중한 ‘병’으로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26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6. 서론과 1장 ⑥


지구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 부족과 왜곡된 믿음


회칙은 1장에서 현재 우리의 ‘공동 가정’에서 목격할 수 있는 ‘증후군’을 소개하고 있다. 회칙은 자연(하늘과 땅과 물)과 사회에서 분명히 목격할 수 있는 ‘사태’들을 소개한다. 그 범위를 넓혀 마지막으로 ‘지구촌 차원의 불평등’(48-52항)을 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이와 관련하여 회칙은 불편한 모습 세 가지를 소개한다.


1. 인간과 사회와 환경의 타락은 서로 결부되어 있으며, 그 타락의 대가를 수십 억에 달하는 “이 행성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48항)이 희생과 고통으로 치르는데도, 그에 대한 인류의 인식은 너무나 미미하다. 회칙은 “배제된 이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국제 정치적 논의”에서 마지못해 다루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회의를 다 끝내고 회의실을 정리할 때 불태워 버릴 장작더미의 “맨 아래 처박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개탄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회칙은 그 원인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는 많은 전문가들과 의견 작성자들과 소통 매체들과 권력 중추들이, 배제된 이들의 문제를 직접 접촉할 일이 거의 없는 부유한 도시 지역에 있다는 사실, 즉 사회적 약자와 멀리 벗어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그들은 안락하게 삽니다. 그들은…즉 세상 인구의 대다수가 도달하기에는 너무 높은 수준에서 [모든 문제를] 추론합니다”(49항).


2. 회칙은 ‘지구촌 불평등’ 문제를 대하면서 ‘소수의 사람’이 “문제들을 직시하기를 거절하는 방식”과 “현재의 분배 모델을 합법화하려는 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 행성은 소수의 사람이 소비한 후 생긴 폐기물조차 다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자기들만…소비할 권리(the right to consume)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50항).


3. 회칙은 우리가 거의 생각해보지 못한 개념, ‘생태적 부채’와 ‘차별화된 책임’을 소개한다. ‘생태적 부채’와 관련해서는 아파레시다 문헌(2007년 브라질 아파레시다에서 열린 제5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채택한 문헌)을 인용한, 다음 내용만 소개해도 금세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 기업들은 발전된 나라들 혹은 소위 제1세계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여기서 합니다. 그 기업들이 철수한 다음에 남겨놓는 것은 실직, 버려진 마을들, 매장 자원의 고갈, 산림 벌채, 농업과 지역 목축업의 황폐화, 오렴된 강…따위와 같은 막대한 인간적 환경적 빚들뿐입니다.” “다국적 기업들은 그런 식으로” 자본을 늘립니다(51항).


‘차별화된 책임’을 회칙은 미국 주교들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흔히 보다 더 힘 있는 이해집단에 의해 지배되는 토의에서,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무너지기 쉬운 사람의 요구”에 더 많이 주목하는 것(52항)이라고 설명한다.


우리의 ‘문제’를 보자. 첫째, 지도자들의 모습을 본다. 사회적 약자와 물리적 접촉을 하고 있는가? 둘째, 도시와 비도시 사이의 심각한 불평등을 본다. 도시 시민이 배출한 생활 쓰레기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시 시민과 산업 분야에서 소비하는 전력은 어디에서 생산되며, 어느 지역을 거쳐서 오는가? 셋째, 성장은 ‘막대한 인간적 환경적 빚’을 사회적 약자와 미래 세대에 떠맡기는 것은 아닌가? 마지막으로 ‘힘 있는 이해집단’의 몫만 불리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초주검이 되어 내버려진 이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린 사제와 레위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 하신다. 물론 우리의 삶과 사회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으면, 사마리아인처럼 가서 그렇게 해야 한다(루카 10,29-37 참조). [평화신문, 2015년 8월 2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7. 서론과 1장 ⑦-1


울부짖음을 초래하면서도 귀를 막는 이들은 누굴까?


회칙은 장마다 고유한 주제와 접근법을 갖고 있다고 밝힌다(16항). 이제 1장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1장은 ‘오늘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자는 초대라 할 수 있으며, 그 접근법은 ‘생생한 최신의 과학적 분석’(17항)이라 할 수 있다.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이 있다. 첫째는 ‘자연’(하늘, 땅, 물, 생물 다양성)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회와 전 지구’의 상황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소개한다는 점이다. 전문가들 사이의 정직하고 참된 토론을 호소하는 셈이다(61항).


둘째는 단순히 과학적 정보를 널리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목표’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자각’과 ‘인격화’ 그리고 ‘행동’이 그것이다(19항 참조). 회칙은 이를 ‘윤리적·정신적 여정’이라 한다(15항). 모두가 참여하는 대화에 대한 호소이면서, 동시에 ‘말 잔치’에 대한 경계라 할 수 있다.


최신의 과학적 분석에 기초한 ‘오늘의 상황’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급속한 변화와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한 병의 증후군들과 불안(18항 참조). ② 과학기술이 초래하는 사태의 악화와 악순환(20항). ③ 내다 버리는 문화(22항)와 무관심의 세계화(25항). ④ 이미 행성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들을 넘은 인간의 모험적 착취(27항).


왜 이런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을까? 회칙은 이를 “진보와 인간 능력에 대한 비이성적 자신감”(19항)에서 찾는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잘못 인도된 근대정신, 즉 ‘인간중심주의’와 ‘상대주의’에서 그 사상적 배경을 찾는다. 이를 우리는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의 충족을 행복과 발전이라고 보는 태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며, 학자들은 ‘공리주의적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 정도로 정리할지도 모르겠다.


회칙은 현재 상황을 함께 보자고 초대하지만, 격렬한 반발이 있을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한자리에 모여서 ‘정직한’ 대화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반발할까? 회칙은 1장 곳곳에서 시사하고 있는데, 참된 ‘윤리성과 영성이 부재한’ 이란 수식어를 붙여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대로 열거한다.


‘기업의 이해관계’(20, 34항), ‘일부 더 많은 자원과 사회적 권력이나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26항), ‘폐기하고 내다 버리는 습관이 전례 없는 수준에 도달한 곳’(27항), ‘물 자원을 사유화하여 시장의 규칙에 지배를 받는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려는 이들’(30항), 물을 통제하려는 ‘대형 다국적 기업들’(31항), ‘생명(생활)의 원천들을 비이성적으로 다 먹어치우는 경제 그룹들’(32항), ‘빠르고 쉬운 이익을 좇는 이들’(36항), ‘세계적으로 거대한 경제적 이해관계들’(38항),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도달하기에는 너무 높은 수준에서 [모든 문제를, 배제된 이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추론’하는 지도자들(49항), ‘소수의 사람들만 소비할 권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믿는 이들’(50항), ‘발전된 나라들 혹은 소위 제1세계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을 일을’ 저개발국가에서 하는 ‘다국적 기업들’(51항), ‘정보를 조작하면서까지 정치를 지배하는 과학기술과 금융’(54항), ‘경제와 과학기술 사이의 동맹’(54항), ‘경제 권력들’(56항), ‘강력한 금융이익집단들’(57항), 지난 2세기의 ‘진보의 신화를 집요하게 붙잡고 있는 이들’(60항)이다.


이를 정리하면, “방해자(저항과 관심 결여)의 태도는, 믿는 이들에게도 그런 태도는 있는데, 문제의 부정에서부터 무관심, 태연한 회피 혹은 기술적 해결책에 대한 맹목적 자신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라 할 수 있다(14항).


그러는 사이, 인류는 ‘사회적 부채’(30항), ‘막대한 인간적·환경적 빚들’과 ‘생태적 부채’(51항)를 눈덩이처럼 불려 떠넘긴다. 미래의 행성에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자연’과 ‘사회’와 ‘사람’에게도 말이다. 물론 현재의 대지와 사회적 약자도 울부짖는다(49항), ‘불쌍한 우리’(2항)는 누구일까? [평화신문, 2015년 8월 9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8. 서론과 1장 ⑦-2


누가 울부짖으며, 왜 귀를 막아서는 안 되는가?


많은 사람이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것”(56항)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인간 활동의 목표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있기 때문”(61항)이다. 그러나 “맑은 정신으로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면”(34항) 세상이 황폐화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누이가 우리에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여기서 ‘누이’는 대지를 지칭한다. 회칙은 그 ‘대지’가 ‘불쌍한 우리 가운데서’ “가장 심하게 학대를 받고 내버려졌다”(2항)고 한다. 우리가 편리한 대로 사용하고 폐기하여 아무 데나 내다버린 일회용품을 연상케 한다. 그러면 ‘불쌍한 우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회칙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최악의 충격을 겪을 개발도상국들과 그곳에 사는 사회적 약자들과 식물과 동물들’(25항) ‘아프리카 대륙’(28항, 51항) ‘강과 호수와 바다’와 ‘안전한 물을 구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29항) ‘수십억의 인구’(31항) ‘멸종할 수천 종의 동식물’(33항) ‘포유동물과 새들과 곤충들’(34항) ‘주권을 침해받는 (남미의) 개별 국가들’(38항) ‘이 행성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48항)이 바로 불쌍한 우리라 할 수 있다. 불쌍한 우리가 울부짖으며, 충분히 죽었으며, 계속 죽어간다.


어떤 이들은 ‘생성소멸’이 이치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태연히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것이 ‘자연’의 길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의해 유발된 울부짖음이요 죽음이요 멸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래 그 존재 자체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고, 우리에게 줄 메시지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인위적으로 막은 것이기 때문이다(33항 참조).


회칙은 ‘재앙을 개괄’함으로써 그것을 보고 우리 마음이 크게 움직이기를 기대한다(15항). ‘인간의 활동’으로 ‘출구’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희망,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만이 아니라(61항 참조), ‘하느님과 하느님 계획에 대한 신뢰’ 때문이기도 하다(13항).


무엇 때문에 주저하는가?


왜 귀를 막고 눈을 감아서는 안 되는가?


소극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 오늘의 상황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있으면서도 회피하거나 숨길 수 없는 문제들’(18항)이며, “끔찍한 불의에 대한 침묵의 목격자”(36항)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여태까지의 “과학기술-경제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새로운 권력 구조들이 우리의 정치뿐만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압도할 수도”(53항) 있으며,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권리가”(33항) 없다. 물론 우리는 ‘생태적 부채’(50항)를 갚아야 하고, ‘차별화된 책임’(52항)을 이행해야 한다. 보다 직설적으로는, 여태까지 지속시킨 ‘인간들의 자기 파괴적 악행을 고안하는 방식’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59항).


적극적으로 성찰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새롭고 보편적인 연대’(14항)와 ‘단 하나의 인간 가족’이라는 확신(52항)이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관대함과 연대와 돌봄의 몸짓들”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58항)이다. 신앙인으로서는, ‘하느님의 기대’(61항)에 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회칙은 묻는다. “이 시점에 모두를 권력에 집착하도록 꾀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즉 모든 이가 그렇게 하는 것이 급박했고 또 필요했을 때, 행동을 취하는 데 있어 무능했던 것으로 기억될 뿐인데도, 모두를 그 권력에만 집착하도록 꾀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57항) [평화신문, 2015년 8월 16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9. 제2장 - 1


1장에서 교황은 신뢰할 만한 과학적 사실들을 근거로, ‘지금 우리의 공동 가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소개한다. 이는 교황이 “지루하고 추상적”(17항)인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실재가 관념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교회 사람들에게 ‘실재주의자’가 되자고 권한다. 1장은 ‘실재’를 놓고 모든 사람이, 특히 과학자 및 전문가들이 정직하고 진실하고 공개적인 토론을 해달라는 교황의 요청이라 할 수 있다(201항 참조).


교황은 인류가 직면한 사태(도전)의 급박함과 엄중함과 복잡함을(15항) “고통스럽게 자각”하여 “자신의 인격적 고통으로 변환”(19항) 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아무리 “최악의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다시 선한 것을 선택하고…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새로운 경로”(205항)를 밟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전하며 ‘공동 가정을 돌보는 일’에 관한 실효적인 대화와 토론을 긴급히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화와 토론의 자리에서 이 회칙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문화와 경험과 재능을 갖고 참여하고 협력”해서 구축해야 할 “새롭고 보편적 연대”에 기여하기를 교황은 바란다(14항).


‘창조의 복음’이라는 제목을 붙인 2장은 간단히 ‘유다-그리스도교 전통’(15, 76, 78항)에서 이해하는 ‘창조’ 혹은 ‘세상’이라 할 수 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이해하는 창조와 세상’으로 서술해도 될 것을 교황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이유 하나는 모든 종교의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스스로 믿는 이들이라 고백합니다. 이 (신앙)고백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재촉해야 합니다. 자연 보호를 위하여, 사회적 약자를 방어하기 위하여, 존경과 형제애의 관계망을 구축하기 위해서 말입니다”(201항).


또 다른 이유는 회칙 전편에 걸쳐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지난 2세기에 걸쳐 세상을 이끌어 온 과학기술 패러다임의 행적’에 대한 반성(특히 3장 참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지난 200년 동안 우리의 공동 가정에 상처 입히고 학대한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문제는 우리에게 이런 재앙에 맞설 수 있는 문화가…지도력이…법적 틀이 없다는 것입니다”(53항).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도 다음 진술에서 일단의 답을 찾을 수 있겠다. “정치는 경제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경제도 효율성만 따르는 과학기술 패러다임의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189항). 3장에서 밝히고 있지만, 오늘날 재앙의 뿌리는 지난 2세기의 근대정신과 닿아 있으며, 그 근대성은 절대 주체로서의 인간관과 단순한 객체로서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여, 과학 기술적 패러다임을 절대화했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창조주 혹은 종교들을 밀어내버리거나 하위문화쯤으로 간주하고 있다(62항).


그러나 교황은 과학과 종교가 실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다른 접근법을 갖고 있을 뿐, 서로 생산적이며 심층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믿으며, 대화를 제안한다(62항). 회칙 제2장은 “인류와 세상에 유익한” 즉 “해방의 경로를 모색하는” 이 대화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자세와 확신을 제시한다(64항).


회칙 제2장의 소제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I 신앙이 비추는 빛(63~64항), II 성경의 지혜(65~75항), III 우주의 신비(76~83항), IV 창조의 조화 안에 있는 각 피조물의 메시지(84~88항), V 우주적(보편적) 친교(89~92항), VI 재화의 공동(보편) 목적(93~95항), VII 예수님의 눈길(96~100항). 이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자. [평화신문, 2015년 8월 23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0. 제2장 - 2 성경의 지혜


회칙 2장의 ‘성경의 지혜’(65~75항)와 관련, 우리가 진지하게 성찰할 내용 몇 가지만 소개한다.


1. (구약 성경은) 인간 실존과 그 역사적 실재를 ‘관계’로 이해한다. “인간의 생명(생활)은 하느님과 관계, 이웃과 관계, 대지(세상)와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 세 관계는 근본적인 것으로서 서로 밀접하게 엮여 있다. 이 세 가지 결정적 관계는 인간 안팎에서 파괴되며, 이 관계의 결렬이 죄다”(66항). 회칙은 성경에서 밝히는 이 관계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 동시에 어떻게 그 관계들이 파괴되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웃과 관계가 파괴될 때, 어떻게 그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와 땅과의 관계는 물론 인류 전체에 악영향을 주는 것으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한다.


“이웃과 적합한 관계를 가꾸고 유지해야 할 의무를 경시하는 것, 즉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에 대한 돌봄과 보호를 경시하는 것은 나와 나 자신, 나와 다른 이들, 나와 하느님, 그리고 나와 대지와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성경은 이 모든 관계가 무시될 때, 즉 정의가 더 이상 땅에 남아 있지 않게 될 때, 우리의 생명(생활)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노아의 이야기에서 봅니다”(70항).


2. “단호하게 배격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성경을 잘못 이해해서] 우리 인간만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우리 인간에게만] 땅을 지배하라고 했으므로, 이는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인간의 절대 우월(지배)을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67항). 이를 회칙은 ‘왜곡된 인간중심주의’(69항)라고 비판한다. 이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는 “창조주와 인류와 전체로서의 창조(피조물) 사이의 조화”를 붕괴시켰는데, “우리가 주제넘게 하느님의 자리를 취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피조물로서의 한계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66항)에 다름 아니다.


3.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인류에게 새로운 시작(쇄신)의 기회를 주신다(71항). 하느님께서 재촉하시는 이 쇄신의 삶에는 “창조주의 손으로 자연에 새겨 놓은 리듬을 되찾고 존중하는 것”(71항),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찬미(72항), 하느님께 대한 관상으로 얻어야 할 새로운 힘(73항)과 희망(74항)이 포함되어 있다.


4. “성경에서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분과 창조하신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의 창조 행위와 구원 행위는 거룩한 행동 방식으로서 밀접하게 그리고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습니다”(73항).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바로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시며 해방자이심을 기억하고 고백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 교회가 “지상의 권력들을 숭배하는 것을 종식시키는 방식”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자리를 강탈하는 것을 종식시키는 방식”이다(75항).


5.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 당국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창조 질서의 보전과 참다운 해방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정치ㆍ경제ㆍ문화 같은 사회의 제 분야와 그리스도교는 실효적인 대화를 나눌 용의가 있는가? 우리 사회의 다른 종교 혹은 종파와 대화를 나눌 의지가 있는가? 혹시 회피 내재주의의 쓴 독을 지금 마시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그리스도인이 ‘왜곡된 (이기적)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하느님(원천)께 돌아갈 때(전환과 회개), 그럼으로써 파괴된 관계(자신, 이웃, 세상)를 회복하여, ‘쇄신의 삶’을 살 때 인류와 세상에 유익하다. 물론 용기가 필요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신뢰와 희망이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하는가?


“무에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개입하실 수도 있으며, 모든 형태의 악을 극복하실수도 있습니다. 불의는 무적이 아닙니다”(74항). [평화신문, 2015년 8월 30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1. 제2장 - 3 우주의 신비


III. 우주의 신비(76-83항)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성찰할 수 있다.


1. 창조(삼라만상)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계획과 관계가 있는 실재이기에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다. 사물을 이용 대상으로만 삼을 것인지,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자비하심을 발견할 이웃으로 볼 것인지, 인간의 태도에 있어,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은 훌륭한 길을 제시한다(76-77항).


2. 그러면서도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은 자연을 ‘탈 신화화’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부각시켰다. 인간은 “세상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상이 갖는 잠재력을 개발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능력을 계발할 의무”를 갖는다. 이 책임과 의무는 ‘무제한의 물질적 진보’라는 근대의 신화와 양립할 수 없다(78항).


3. 인간은 자유롭게 지성을 적용하여 역사에서 자유와 성장과 구원과 사랑을 열매 맺을 수도, 타락과 상호 파괴를 향해 치달을 수도 있다. 이는 ‘개방되고 상호 소통하는 체계들로 되어 있는 우주관’을 전제한다(79항).


이는 동시에 오늘날 인류가 가고 있는 길이 생명을 향한 길인지 죽음을 향한 길인지 진지하게 물을 것을 요청한다.


4. 발전이 필요한 세상을 창조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악들이나 위험들이나 고통”을 마치 “해산의 진통”으로 삼아, 당신 스스로를 제한하시면서 동시에 인간의 협력을 이끌어내시는 분이시다(80항).


여기서 두 가지 정도를 성찰하게 된다. 하나는 세상의 악들과 위험들과 고통 앞에서 보이는 교회의 패배주의가 그 하나이며, 모든 인간을 타자화시키는 자기 중심주의가 다른 하나다.


5. 살아 있는 다른 존재들을 인간이 임의로 지배할 수 있는 객체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본다면 “승자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게 되며,…조화와 정의와 형제애와 평화라는 이상”은 설 자리가 없게 된다(82항). 인간의 참된 성소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주께 돌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지 “무책임하게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 신앙인이 성찰할 것 하나는, 신앙의 지나친 개인주의화 및 내재화라 할 수 있다. 사회와 역사와 미래보다는 현재의 자신의 마음(정신) 상태로 신앙을 제한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둘째는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승자 독식’ 현상이다. 이를 우리는 ‘무제한의 치열한 경쟁’이라는 중립적 용어로 그 악을 은폐한다. 셋째 모든 피조물을 무책임하게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현상인데, 우리는 이를 언제나 ‘성장’이라고 포장하여 강요한다.


“모든 피조물은 초월적 충만함(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서 하나의 공동 목적지, 즉 하느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83항). 이 여정에서 우리 인간은 여정의 ‘표지’이며 생명의 ‘샘물’이 되라고 거룩한 부름을 받았다. 이는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 곧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 중인 인류의 표지가 되어야 할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론을 상기시킨다.


IV. 창조의 조화 안에 있는 각 피조물의 메시지(84-88항)에서 성찰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심지어 미래에 존재할 그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일구신 ‘공동의 가정’(home)의 ‘한 가족’(family)인 셈이다. 다수성과 다양성을 전제하는 이 가족의 각 구성원은 그 나름의 자리와 개성과 가치를 지닌다(86항 참조). 이는 흔히 ‘다수성’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으로 구별하려는 우리의 태도와 ‘다양성’과 ‘차이’를 곧잘 차별로 환원시키려는 우리의 태도를 경계한다.


2. 게다가 이 다양성과 다수성은 모든 피조물이 상호 의존하고 보완하며 서로에게 기여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이 관계 속에서 각 사물이 지닌 의미와 중요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동시에 “무진장한 하느님의 부유함”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86항).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주기를 바라신 가르침(메시지)”(85항)을 갖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이 메시지와 현현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생태적 덕들(the ecological virtues)을 계발하는 것”(88항)이다. 그 덕으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창조 안에 그 나름 고유하고 적절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이는 소극적으로는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 현존의 자리로 인정함으로써 ‘우주적(보편적) 친교’의 길로 나서게 한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6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2. 제2장 - 4 보편적 친교와 재화의 공동 목적 예수님 눈길로


V .우주적(보편적) 친교(89-92항)


회칙은 다음과 같이 ‘친교’의 차원을 확장한다.


1. 모든 피조물이 우주적 가족(universal family) 이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이다(89항 참조). 하느님께서 주인이시라는 이 확신은 다른 피조물을 책임 있게 대해야 마땅하며, 더더욱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엄청난 불평등에 대해 특별히 분노해야”하는 근거가 된다(90항).


회칙은 묻는다. “실천적으로, 우리는 분노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여기는 이들을 계속해서 묵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치 그들이 더 위대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듯이 말이다(90항).


2. 그러면서, 회칙은 현재 환경 운동 일부에서 보이고 있는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인신매매에 무관심하거나,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혹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되는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일을 하면서, 위험에 내몰린 [동식물] 종들의 거래와 맞서 싸우는 것은 분명히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91항). ‘환경에 대한 관심’과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사회 문제를 풀겠다는 확고한 투신’은 결합되어야 한다. 회칙이 강조하는 이 보편적 친교는 환경, 인간, 사회에 대한 관심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3. 마침내 회칙은 “평화와 정의와 창조 보존은 확실히 상호결합되어 있는 세 주제”라고 천명한다. 사람 사이뿐만 아니라 형제인 태양과 자매인 달과 형제인 강과 어머니인 대지(92항)와 곧 모든 가족을 결합시키는 ‘보편적(우주적) 친교’의 힘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VI. 재화의 공동(보편) 목적(93-95항)


1. 우리에게 매우 낯설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에게조차 생소한 교회의 오랜 가르침이 바로 ‘재화의 보편적 목적’ 원리다. 우리에게는 철두철미 재화의 사적 소유와 임의의 처분 권리가 거의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사적 재화의 권리(사유 재산권)를 절대적이며 불가침하다고 인정한 적이 없다.” “사적 재화가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교회 가르침은 적어도 한국 교회 안에서는 설 자리가 거의 없다. 오히려 “부당한 습관들”이야말로 능력으로 칭송받는 형편이다(93항). “인간의 권리들을 존중하지 않고 증진시키지 않으면서” 경제적 성장만을, 그것도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발전’이라고 내세우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자연스럽지만, 회칙은 이를 “가치 있는 것이 못 된다”고 비판한다(93항).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은 “창조주께 대한 충실성”(93항)을 의심해봐야 한다.


2. 회칙에서 어쩌면 도발적으로, 혹은 불쾌하게 들릴 수 있는 몇몇 대목 가운데 하나가 이 자리에서 발견된다. 회칙은 뉴질랜드 주교들의 가르침을 인용한다. “가난한 나라들과 미래 세대들한테서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강탈하는 그 비율로 세계 인구의 20%가 자원들을 소비하는” 이때 “너는 살인하지 마라”는 하느님의 계명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95항). 이 대목은 “우리는 생산된 식량 가운데 거의 1/3가량이 내버려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량이 버려질 때마다 그것은 마치 가난한 사람들의 식탁에서 식량을 훔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50항)의 다른 표현이다. 굳이 설명과 성찰이 필요 없다. 어찌 “고통스러운 자각”(19항)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VII. 예수님의 눈길로(96항-100항)


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아버지로 강조하셨으며(96항),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주목하셨으며(97항), 창조(삼라만상)와 완전한 조화 속에서 사셨으며(98항) 인간의 노동을 거룩하게 하셨다(99항).


예수님의 삶에서 “건전치 못한 이원론”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역사의 과정에서 일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건전치 못한 이원론을 펼쳤으며 복음을 왜곡했다”(98항). 우리의 경우를 보자. 우리는 “세상의 육신과 세상의 일과 세상의 것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내세우면서 정작 실제로는 집착하고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어떻게 사람과 자연과 사회와 세상을 착취하고 학대하며 함부로 다뤄 상처를 입힐 수 있겠는가? 혹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제1장) 태연하거나 회피할 수 있겠는가? 고통스러운 자각이 없고 그 자각을 인격적으로 변환시키지 않고, 더 나아가 무엇이든 하지 않는다면, 불신앙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창조 범위 안에 있고”, “자연과 창조주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64항). [평화신문, 2015년 9월 13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3. 제3장 - 생태적 재앙의 근원들


① 이정표 없는 십자로에 선 인류


가야 할 목적지와 경로를 분명히 알면 그 걸음이 편안하다. 새삼 무수히 많은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비록 거친 도시 환경이라 하더라도 수많은 간판 속에서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다. 지나치는 사람의 얼굴도 찬찬히 바라볼 수 있다. 도로 위의 위험스러운 장애물을 볼 수도 있다. 비도시의 한적한 길이라도 길가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도 새삼 눈길을 줄 수 있으며,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렇게 몸만 편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가야 할 목적지와 경로를 모른다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몸은 불편하고, 마음은 불안하다. 그러다가 십자로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 불편과 불안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정표마저 없다면….


회칙은 이 시대를 그렇게 이정표 없는 ‘십자로’에 비유하고 있다(102항). 그 ‘십자로’ 앞에 서 있는 인류의 당혹감(불안)의 심각함을, 제3장의 제목처럼, ‘생태적 재앙’으로 기술하며 경각심을 높이고 있다. 여기서 거듭 확인해야겠다. 회칙에서 말하는 ‘생태’(ecology)는 ‘자연환경’만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 필자의 짧은 경험에서 볼 때,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자연’과 ‘생태’를 같은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야말로 회칙이 오늘날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진단한 ‘환원(축소)주의’라 할 수 있다. 그 같은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지구촌 체계가 안고 있는 진짜 문제들과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못 보게) 가리는 것”(111항)이라 할 수 있다. 회칙 1장에서 밝힌 것처럼, 생태는 하나의 ‘공동 가정’이다. 그 가정에는 대기, 물, 땅과 다양한 생물, 사람, 사회, 그리고 지구촌 자체가 서로 결합하여 상호 의존 및 상호 작용하며 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실재(reality)다.


그러니 오늘날 공동 가정이 직면한 ‘생태적 재앙’이란 자연환경의 훼손 정도로 축소해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위험에 빠진 것이 아니라, 모든 가족이 공멸의 위기에, 곧 가정 자체가 파멸될 위기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칙은 묻는다. 어쩌다가 이 ‘공동의 가정’이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회칙은 그 직접적 원인을 “지난 2세기” 동안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하나인 인간이 감행한 “기술적 무모함”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무모함을 감행하게 된 ‘근본적인 무엇’을 제3장에서 제시하고 있다.


오해해서는 안 될 중요한 내용이 있다. 회칙 1장과 마찬가지로 3장은 생태적 재앙(증후군, symptoms)과 그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기술적 무모함’(102항)과 ‘무차별적이며 일차원적인 기술주의의 패러다임’ 추종(106항)을, 그리고 근본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왜곡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를 고발하고 폭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회칙이 밝히고 있듯이, 교종은 소극적으로는 “변화의 (급)속도”를 줄이자고,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실재들’(realities)을 보자”(114항, 116항)고 제안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회칙은 “윤리적 함의에 관심을 기울이는”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폭넓은 토론”을 촉구하고 있다. 그 토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다음의 인용은 분명히 보여준다. “생태의 문화가 오염, 환경적 부패와 천연자원들의 고갈이라는 당장의 문제들에 대처하는 일련의 부분적 응급 대응들쯤으로 환원(축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태의 문화에는 사물을 보는 차별화된 방식, 차별화된 사고방식, 차별화된 정책들, 차별화된 교육 프로그램, 차별화된 생활방식과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111항). 교종은 “과감한 문화적 혁명의 길”로 나서자고 호소한다(114항). [평화신문, 2015년 9월 27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4. 제3장 - 생태적 재앙의 근원들


② 과학과 과학기술 : 창의성과 권력 기쁨과 흥분, 위험과 공포와 극단의 모험 사이에서


대중매체가 특정 기업들의 새로운 상품이 출시될 것이라는 예고 기사를 내보내고, 출시일이 되면 전날부터 매장 앞에서 밤을 새워 기다린 이들을 화면으로 내보내고, 그다음에는 전 세계에 걸쳐 그 신상품이 얼마나 팔렸는지를 생생하게 강조하며 보도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그 상품에 담긴 새로운 기능들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다. 이 자리에서는 언론사인가 특정 기업의 홍보실인가를 따지는 일은 제쳐놓자. 하여튼 그렇게 ‘신상품’ 곧 ‘변화’는 세상을 휩쓸 기세로 우리에게 다가오며, 일부 사람들은 열광한다. 사실 기뻐하고 흥분할 만한 변화가 얼마나 많은가? 그 변화의 영역과 규모와 속도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앞에 소개한 사례는 ‘정보통신’ 분야의 ‘휴대용 단말기’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의 경우, ‘국민건강보험제도’ 덕분에 쉽게 병원을 찾는다. 대도시의 대형 병원에는 ‘여기 아픈 사람은 죄다 모였네!’할 정도다. 그곳에서도 붐비는 정도로 절대 뒤처지지 않을 곳이 아마 ‘진단방사선과’가 아닐까 한다. 핵 기술을 ‘의료’ 분야에 적용한 결과다. 전국 어디에서나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발달한 대중교통수단 덕분일 터이다. 특히 고속전철과 지하철이 제공하는 편리함과 속도에 대해서 어르신들의 놀라움은 혀를 내두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핵 기술을 ‘전력 생산’ 곧 ‘산업’ 분야에 적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인류는 핵 기술을 ‘평화롭게’ 이용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교종은 이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오늘날 우리는 무수히 많은 변화 물결이 일어난 지난 2세기의 수혜자입니다.… 우리가 이런 발전을 기뻐하고 그 발전이 우리 앞에 계속해서 펼쳐놓고 있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에 흥분하는 것은 정당합니다”(102항). 물론 과학과 기술이 “제대로 된 지도를 받을 때”(103항)와 “건전한 윤리와 문화와 영성”(105항)이 있을 때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렇게 기뻐하고 흥분할 수만 있을까? 정보통신 분야와 핵 산업 분야를 예로 들었으니, 그 ‘치명적 부작용(?)’을 살펴보자. 공교롭게도 다른 대형 사건으로 묻혔지만 한동안 온 사회를 흔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우리나라 막강 권력기구라 할 수 있는 곳에서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그것이다. 이때 개입 수단으로 채택한 것이 ‘정보통신기술’이었다. 심지어 이 ‘정보통신기술’ 덕분에 사람들은 ‘권력’으로부터 더 이상 숨을 곳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다룬 책까지 나왔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감시사회’라고 부른다. 교회는 ‘뉴스 미디어’를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거나, 여기에 통치활동과 금융, 정보기관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가르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전 지구를 공포에 몰아넣었고, 사람들은 잊고 지내지만, 아직도 진행 중이며 그 악영향을 예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건이 있다. 바로 이웃 나라 일본 어느 기업의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건이다. 그때 언론에 ‘안전 신화’라는 말은 빠짐없이 등장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건이, 더 거슬러 올라가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라는 도시 상공 500m에서 폭발시켜 한꺼번에 무려 20여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핵폭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인류를 ‘공포’로 내몰았다는 점이다.


정보통신기술이든 핵 기술이든 인간의 창의성으로 만들어낸 과학과 과학기술의 “경이로운 산물”(102)이다. 그런데 “이 분야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그 지식과 재능을 이용할 경제적 자원을 가진 사람들”의 “막강한 권력”이 “극소수”의 손에만 쥐어졌다면, 게다가 그 “막강한 권력을 현명하게 사용할 것이라는 보장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면, 그래도 마냥 기뻐하고 흥분할 수 있을까? 교종은 인류가 과학과 과학기술을 갖고 이처럼 “극단의 모험”을 하고 있다고 진단한다(104항). [평화신문, 2015년 10월 11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5. 제3장 - 생태적 재앙의 근원들


③ 기술주의 패러다임의 세계화 - 자연, 사람과 사회, 경제와 정치를 무차별적으로 지배하는 기술주의


“세계화된 과학기술의 정신에 굴복하지 맙시다. 모든 것의 의미와 목적에 의문을 품읍시다”(113항).


지난 호에서 다룬 회칙의 내용은, 인류가 그 고유의 창의력과 그것으로 발전시킨 과학과 과학기술 덕분에 마침내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과, 역설적이게도 인류는 ‘기쁨과 흥분’ 그리고 ‘위험과 공포’ 사이에서 극단의 모험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회칙은 인류가, 정확히는 소수의 막강한 권력자들이 인류를 상대로, 그렇게 무모한 모험을 하는 근본 원인을 ‘무차별적이며 일차원적인 패러다임’에서 찾는다(106항). 이 패러다임에서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외적 ‘객체’로부터 철저하게 분리시켜 극단으로 찬양하는데, 여기서 인간과 물질적 객체 사이는 원래의 우호적 관계에서 일탈하여 ‘대립적 관계’로 진입하게 된다. 인간은 과학과 과학기술로 외부의 객체를 지배하고 소유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추출하려고” “이 행성을 끝없이 쥐어짜서 말리려” 대든다. 마침내 우리는 세계라는 실재에 대한 지배와 소유와 무한 추출을 ‘발전’, ‘진보’, 혹은 ‘무제한의 성장’이라고 믿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회칙은 단도직입적으로 ‘거짓말’과 ‘거짓 개념’ 때문이라고 밝힌다. 회칙은 이 거짓에 기초한 패러다임을 무차별적이며 일차원적인 ‘기술주의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교종의 회칙은 색깔이 분명하다. 이 기술주의 패러다임에 따른 ‘무제한의 성장’이라는 발상이 “경제학자들과 금융업자들과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너무 매력적인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발상과 권력(힘)의 결합을 다음과 같은 ‘거짓말’과 ‘거짓 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분명하게 비판한다. “지상의 재화를 무한정 공급할 수 있다.” “무한한 양의 에너지와 자원을 얻을 수 있다.” “그것들을 재빠르게 재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자연 질서의 착취에 따른 부정적 결과들을 쉽사리 경감시킬 수 있다.”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런 식으로 말했을까? 경제학자들과 금융업자들과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이고, 그리고 인류가 무심히 기대하고 있는 그 ‘무제한의 성장’이나 ‘인류의 번영’이 거짓말과 거짓 개념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까지 말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지금부터라도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의 악화를 극복하면 되지 않을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칙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환경의 악화’는 하나의 표지일 뿐이라고 단언한다(107항 참조).


회칙은 기술주의 패러다임이 사람과 사회까지 종속시켰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을 단순한 도구로 채택하고 다른 문화적 패러다임을 촉진시키겠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과학기술의 동기가 인류의 이익이나 참된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것’ 즉 권력에 있다고 고발한다. 과르디니를 인용한 내용이 오늘 인류의 처지를 대변한다. “인간은 자연도 박탈당하고 인간 본성도 박탈당한 요소(부품)들로 된 (기계의) 손잡이를 움켜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과 사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남아 있을까?(108항 참조)


기술주의 패러다임은 경제 생활과 정치 생활마저 지배하려 한다. (경제의 실질적 토대를 무시하는) 금융이 실물경제를 압도하게 된 것도, 세계적 금융 재앙 앞에 속수무책인 것도, ‘낭비적이며 소비주의적인 초발전(superdevelopment)과 탈인간화의 강탈(dehumanizing deprivation)이 지속되는 상황’이 공존하는 것도 기술주의 패러다임이 경제 생활과 정치 생활을 지배했기 때문이다(109항 참조). 회칙이나 교종이나 사방에서 반대 받는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어느 월간지는 교종을 두고 ‘악마의 배설물에 맞서는 교황’이라는 제목의 글을 1면 톱으로 다루기까지 했다.


교종은 “과감한 문화적 혁명의 길로 나서는 일이 시급히 필요”하며, “모든 것의 의미와 목적에 관해 의문을 품자”고 호소한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아직까지)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책임과 가치와 양심의 발달과 동반하지 않고”(105항) 있으며, “과학적이며 과학기술적인 진보가 인류와 역사의 진보와 동일화될 수 없기”(113항)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18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7. 제3장 - 생태적 재앙의 근원들


④ 근대의 인간중심주의가 초래한 재앙과 그 결과 - 생태 재앙의 뿌리 : 왜곡된 인간 본성(인성), 왜곡된 인간관계(사회적 차원)와 하느님과의 관계(초월적 차원)


교종은 ‘일단 멈춰서’ ‘지금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을 맑은 정신으로 바라보자고 초대한다. 하늘과 땅과 뭇 생명의 절규를 듣자고 한다. 사람들 삶의 질이 추락하고 사회가 고장 나며, 전 지구 차원의 불평등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상처를 고통스럽게 보자고 한다(제1장 참조).


이 절규와 상처(증후군, symptoms)를 불러온 병은 지난 2세기 동안 사람과 사회와 정치와 경제가 맹목으로 뒤쫓은 ‘무차별적이며 일차원적인 기술주의 패러다임’이다. ‘인간’과 ‘윤리’, ‘양심’과 ‘도덕’을 퇴출시킨 과학 및 과학 기술과 경제의 동맹이 ‘만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패러다임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스러운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동안 인류가 이룩한 업적에 비하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다. 기껏해야 간단히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는 ‘부작용’쯤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회칙은 병뿐만 아니라 증후군마저도 ‘치명’이라고 고발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와 자연과 저개발 지역의 뭇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과학)기술주의 패러다임’과 함께 회칙이 생태 재앙을 불러온 또 다른 인간적 뿌리로 제시한 것이 ‘근대의 과도한 인간중심주의’다. 이는 세상 안에서 인간의 ‘참된 자리’를 잃어버리게 했다. 대신 자신만을 중심에 놓아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공간을 자의적으로 대상화함으로써 ‘세상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존엄함’을 훼손했다. 게다가 이는 개인 차원은 물론 사회 차원의 유대를 약화해버렸다. 마침내 인간은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실재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절대적 지배행위”를 하게 만들었다(117항).


회칙은 이 ‘과도한 인간중심주의’의 배경에 교회의 책임도 있음을 밝힌다.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부적절하게 제시한 것이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불러왔다고 고백한다(116항 참조).


교종은 지난해 이 땅을 방문하여 주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교회의 사목이 공리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 태도를 갖게 될 유혹을 경계한다. 교종은 또 사목 활동가들의 ‘극도의 개인주의’를 ‘악’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지난 호에서 교종과 회칙이 교회 안팎으로부터 ‘반대 받는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언급했는데,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왜곡된 인간중심주의의 겉모습이라 할 수 있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공리주의와 실용주의를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은 ‘절대적 지배’의 자리에서 ‘초발전’의 삶을 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49항 참조).


‘과도한 인간중심주의’가 불러온 현상은 두 극단이 공존하는 ‘일종의 지속적 정신 분열’이다. 한 극단에는 “보다 더 작은 존재들, 즉 사회적 약자, 인간의 한 태아, 장애를 갖고 있는 한 사람, 자연 자체에 본래부터 있는 가치들을 전혀 보지 않는 기술주의의 태도”가 자리하고 있다. 다른 극단에는, 앞의 태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간들한테 있는 특별한 가치를 전혀 보지 않는 태도”(118항)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 본성(인성, humanity) 자체의 쇄신’이 대두된다. 회칙은 ‘쇄신된 인성’이 결여된 인간중심주의를 ‘잘못 지도된(길을 잘못 들어선) 인간중심주의’라고 부른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불균형을 더할 것이며, 사람들의 고유한 역량(지성, 의지, 자유, 책임)을 존중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118항 참조).


회칙은 ‘상호 인격적 관계의 쇄신’, 곧 ‘사회적 차원’의 쇄신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만일 오늘날 생태 재앙이 근대성의 위기, 즉 윤리적, 문화적, 정신적 위기를 드러낸 하나의 작은 표지에 불과한 것이라면, 근본적인 모든 인간관계를 치유하지 않으면서, 자연과 환경과 맺은 우리의 관계를 치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을 향한 개방성이라는 ‘초월적 차원’에서의 쇄신은 말할 것도 없다(119항). 회칙은 이 ‘인성 자체’와 관계의 사회적 차원과 초월적 차원의 쇄신을 위한 길을 제4, 5, 6장에서 제안하고 있다.


인간의 ‘참된 자리’는 ‘무엇이든 누구든’ 폭압적으로 지배하려는 세상과 독립된 ‘자기중심(self-centeredness)’에 있지 않다. 회칙은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참된 자리’를 되찾자고, 더 나아가 “새로운 종합”(121항)을 개발하자고 초대한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25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6. 제3장 - 생태적 재앙의 근원들


⑤ 실천적 상대주의와 고용보호


교종은 오늘날의 생태 재앙이 저절로 발생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지난 2세기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여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늘과 땅, 사람과 사회, 그리고 지구촌 차원에서 목격되는 부정적 모습을 ‘발전과 성장’에 따른 부작용쯤으로 가볍게 볼 수는 없다. 치명의 재앙 수준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교종은 그 재앙의 원인을 그동안 인류가 지녀온 마음의 태도, ‘과학 및 과학기술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 정신’ 혹은 ‘근대성’에서 찾는다. 이는 역사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 즉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관을 대변한다. 오늘날 생태의 재앙은 ‘무차별적이고 일차원적인’ 과학기술주의 패러다임을 쫓은 결과이며, ‘과도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맹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회칙은 극복해야 할 “최근 몇 세기의 잘못된 주장들”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교종은 교회가 ‘실천적 상대주의’ ‘고용의 보호’ ‘생물학의 새로운 과학기술들’에 대해 계속해서 성찰해야 한다는 뜻을 밝힌다(121항).


실천적 상대주의: 마음의 태도는 생활 양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회칙은 ‘잘못 인도된 인간중심주의’라는 마음의 태도가 ‘잘못 인도된 생활 양식’, 곧 ‘실천적 상대주의 문화’를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이는 “당장의 편의를 절대적으로 우선하고 다른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만들어버리는”(122항) 생활 양식이며, “우리 자신의 열망과 즉각적 욕구 충족 말고는 객관적인 진리들이나 건전한 원리들을” 부정하는 생활 양식으로서, 하나의 “무질서”다(123항).


이 실천적 상대주의 문화는 ‘환경의 타락’(재앙) 뿐만 아니라, ‘사회의 부패’를 불러온다. 교종은 ‘사회의 부패’ 현상으로 ‘강제노동’ ‘노예노동’ ‘아동 성 착취’와 ‘노인 유기’ ‘인신매매’ ‘조직 범죄’, ‘마약 거래’, ‘피의 다이아몬드 거래(무기밀매)’, ‘멸종위기 동물의 모피 거래’, ‘사람 장기매매’, ‘아이들의 제거’ 따위의 행위를 구체적 사례로 들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시장의 볼 수 없는 힘’에 대한 맹신을, 문화적 측면에서는 ‘사용하고 버리는 문화’를 실천적 상대주의의 논리와 같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사회와 문화 자체가 부패하면, 이를 바로잡으려는 정치적 노력이나 법 집행은 ‘독단적 강요’나 ‘장애물’로 보일 뿐이다(123항).


고용 보호: 교회가 성찰해야 할 시급한 과제의 다른 하나로서 회칙은 ‘고용 보호’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계량(규모)의 경제들”(129항)과 “기업의 한정된 이해 관계와 모호한 경제적 추론”(127항)을 앞세워 “단기적으로 보다 많은 재정(금융) 소득을 얻기 위해,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을 그만 두는 그런 기업” 활동과 “노동자의 해고와 기계화로 생산 비용을 절감하려는 경제적 진보”(128항)를 묵인하고 있다. 그 대가는 “많은 사람의 경제적 자유”는 가로막히고, “고용의 가능성들은 계속해서 악화되는” “현실적 조건”(129항)이다.


교회는 변함없이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선성’을 가르쳤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치닫고 있는 셈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사람의 모든 활동이 갖는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물음”(125항)을 오로지 ‘경제적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환원(축소)주의’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는다.


인간 노동(활동)은 “창조된 세상을 신중한 방식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세상을 돌보는 가장 좋은 방식”(124항)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다른 무엇과 맺어야 하고 맺을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개념”에서 이해해야 한다(125항). 인간 노동은 “영적으로 의미 있는”(126항) 활동이며, “인격적 성장을 위한 무대”(127항)가 되며, “지상 생활에서의 성장과 인간적 발전과 인격적 완성을 향한, 곧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려는 경로”(128항)가 되어야 한다. 바로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한 안정된 고용 보장”을 오늘날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127항)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산의 다양성과 사업의 창의성을 옹호하는 그런 경제를 촉진시켜야 한다.” 그래서 회칙은 “소규모 생산자들과 차별화된 생산물을 떠받쳐줄 분명하고 확고한 수단을 취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자원과 재력을 가진 이들을 억제해야 할” 정치 권위의 “권리와 의무”를 강조한다(129항).


“현실적 조건들은 많은 사람의 경제적 자유를 가로막고 있으며, 고용의 가능성들은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는데도, (당국이)경제적 자유를 주장한다는 것은 정치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그런 속임수(a doublespeak)를 쓰는 것입니다”(129항). 우리 현실을 보는 듯하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8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8. 제4장 - 통합의 생태


① 생태의(자연) 환경요소, 경제요소, 사회요소


모든 것은 연결되어 상호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재앙은 두 개의 별도의 재앙, 환경의 재앙과 사회의 재앙이 아니라 하나의 재앙이다.


맑은 정신으로 우리의 공동 가정(하늘, 땅, 물, 생명, 사람, 사회,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은 보면 가히 ‘재앙’(위기)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회칙 제1장). 교회는 인류가 제기하는 고뇌에 찬 물음에 응답할 사명을 가진다. 하느님께 대한 교회의 신앙 때문이며(제2장), 게다가 “인류를 자멸하지 않도록 보호해야”(79항) 하기 때문이다.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회칙은 ‘십자로’에 도달한 인류가 가야할 길을 찾는 대화와 토론에 협력을 아끼지 않으려 한다. 교종은 재앙의 근본원인으로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는 무차별적이고 일차원적인 과학기술주의와 과도한 인간 중심주의를 꼽으며, 실천적 상대주의와 고용의 문제, 새로운 생물학적 과학기술의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그 윤리적 함의에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뜻을 밝힌다(제3장).


이제 회칙은 재앙에 직면한 인류가 가던 무모함의 길을 잠시 멈춰 통합의 생태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제4장). ‘생태’라는 용어 그 자체로 이미 ‘통합’이란 의미를 담고 있음에도, ‘통합’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재앙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접근 방식이 단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경계하기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다. 하나의 (통합) 생태는 (자연) 환경,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의 요소들을 갖고 있는데, 이 요소들은 불가분의 상호 작용을 하며, 인간 차원과 사회 차원을 분명하게 존중한다. 회칙이 강조하는 것을 요약하면서 우리 모습을 성찰한다.


생태의(자연) 환경 요소 : 자연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작용뿐만 아니라, 사회의 체계들(경제, 행동양식, 실재를 파악하는 방식들)과 자연계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고려해야 한다. 자연은 사회와 분리될 수 없으며 단순히 사회의 무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자연을 구성하고 있으며,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자연 생태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연) 생태계라는 실재를 기반으로 해서 살고 행동한다(139-40항 참조).


생태의 경제 요소 : (자연) 환경 보호는 발전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발전 과정을 통합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생태는 경제의 요소를 지니게 된다. 또 그 때문에 경제학은 경제 성장만을 위해 절차를 단순화하고 생산비용을 줄이고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상이한 여러 지식들을 함께 고려하는 인본주의를 따라야 한다. 즉 사람과 사회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경제가 되어야 한다(141항 참조).


우리도 어떤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환경영향평가라는 것을 시행해야 한다. 회칙은 이를 ‘환경충격평가’라고 부른다. 회칙은 이 충격 평가를 위해 연구자들의 합당한 역할, 다양한 연구의 상호 작용 촉진과 폭넓은 학문적 자유 보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의 이 환경충격평가는 대부분 ‘경제적 관점’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표적 사례로, 4대강 사업, 동계올림픽 경기장 건설, 핵발전소 건설, 케이블카 사업 따위를 들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경제 발전에 ‘유용’하다고 하더라도, 자연 환경이 갖는 본래의 가치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윤리 요소’를 고려한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실정이다.


생태의 사회 요소 : (자연) 환경과 사람의 삶의 질에 중요한 결과를 낳는 것은 사회 제도이므로, 생태는 필연적으로 사회(제도)의 요소를 갖게 된다. 가정에서부터 국제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제도는 인간관계들을 규정하므로, 중요한 것은 모든 사회 ‘제도의 건전성’과 ‘유효성’이다. 낮은 수준의 건전성과 유효성(제도의 불안정함)은 불법의 일반화를 불러오는데, 회칙은 특히 이를 우려할 만한 현상으로 제시한다. 낮은 수준의 제도적 유효성은 소수에게는 혜택을, 절대다수에게는 고통을 안겨주고, 불법과 탈법의 일반화는 사람과 사회와 자연을 지속적으로 황폐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42항 참조).


대표적 사례로 최근의 ‘노동 개혁’을 들 수 있다. 노동 개악이라는 비판을 받는 배경에는 제도의 건전성과 유효성에 대한 경험상의 회의가 자리하고 있다. 소수 기업의 경제적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절대다수 노동자의 삶의 질을 황폐화시킬 것이라 우려하는 것은 지난 수십 년 우리의 노동 정책(제도)이 (대)기업 편향적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노동 개혁이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명분을 내세워 또다시 ‘노동’과 ‘사회’의 희생(양보)을 제도화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바로 그 제도의 불건전성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15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9. 제4장 - 통합의 생태


② 생태의 문화 요소


“문화적 정체성은 오랜 시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며, 사회적 구조들은 생활과 공동체의 의미에 대한 지역 공동체의 깨달음을 구체화한 것들입니다. 하나의 문화가 사라진다는 것은 식물이나 동물의 한 종이 사라지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145항).


우리는 ‘문화’라는 말을 흔히 ‘예술 분야’ 정도에 제한하여 사용하려 한다. 대중매체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대중매체가 ‘문화’를 소개할 때 그 내용의 대부분은 음악이나 미술, 책이나 전시회 등에 관한 것이다. 이때도, 우리의 의식과 태도에 영향을 주는 프레임이 빈번하게 작동한다. 예를 들어 주류 문화와 비주류 문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로 구별하여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차별을 구조화한다.


그에 따른 폐단은 심각하다. 서열화를 가져오고 우월과 열등을 내재화시킨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 사회의 ‘예능인’에 대한 태도라 할 수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대중을 향한, 혹은 대중에게서 분출된 예술을 가볍게 여기려 한다. 최근의 역사 교과서와 관련한 논란에도 그 같은 일부 집단의 우월적 태도가 반영돼 있다. 노동자와 시민의 삶을 이끌어 왔던 그 역동성에 대한 성찰은 찾아볼 수 없고, 이른바 ‘위대한(?) 인물’들이나 ‘거창한(?) 사건’에 대한 평가를 두고 시끄러울 뿐이다. 일제 강점, 한국전쟁,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땅의 평범한 시민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역사 교육’은 불가능한 것인가?


생태가 갖는 문화 요소: 교종은 ‘문화’를 그렇게 좁은 의미로 이해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문화는 한 공동체 안에 얽히고설킨 ‘관계’를 드러내는 양식이다. 나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사회(공동체)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 그 관계를 어느 특정 공동체가 특정 시기에 구체화시킨 것, 그것을 문화라고 이해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이 문화의 아버지(어머니)이며 동시에 문화의 아들(딸)이다. 그래서 회칙은 ‘자연’이 일종의 세습 재산이듯이, 문화 역시 ‘세습 재산’이라고 밝히면서, 그 세습 재산이 지금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우려한다. “문화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 이상의 무엇입니다. 문화 역시 무엇보다도 살아있으며, 역동적이며, 참여적인 현재의 실재입니다. 문화는 우리가 인간과 (자연, 사회) 환경 사이의 관계를 재고할 때 배제해서는 안 될 실재입니다”(143항).


자연과 마찬가지로 이 문화라는 실재도 위협을 받고 있다. 그 증세는 문화의 ‘평준화’, 문화의 ‘획일화와 다양성의 약화’, ‘문화적 정체성 파괴’다. 삶의 생생함도, 역동성도, 참여성도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면 문화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일까? 회칙이 꼽는 인간적 원인은 ‘세계화된 경제 장치들이 조장하는 소비주의의 관점’과 ‘획일화된 규제와 기술적 개입들’이다(144항).


사실 우리는 문화의 황폐함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 문화를 예로 살펴보자. 정치는 인간의 존엄함을 증진시킴으로써 공동선 실현을 위해 ‘올바른 질서’를 세우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활동을 오로지 ‘경제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려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존엄함이나 공동선이나 올바른 질서라는 숭고한 가치는 실종되고 오로지 ‘돈’과 맺은 관계에서만 바라보라고 내몰고 있지 않은가?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은 존중하고, 돈이 드는 사람은 배제하려 한다. 선과 악의 식별 노력은 실종되고 특정 집단의 경제적 이익만 득세한다. ‘윤리 도덕적 질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경제적 이해득실’만 유일한 기준이 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수 십 년 전 이웃 나라 시민을 ‘경제적 동물’이라며 손가락질 한때가 있었다. 그 손가락질은 지금 어디를 누구를 겨냥하고 있을까! 시민 가운데 누구도 그런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고 있을까? 저절로 그렇게 되었을까? 혹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의 과정일까? 아니다. 누군가 혹은 특정 세력이나 집단이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봐야 한다. 회칙이 지적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의 세계화된 경제의 여러 작동 장치들은 사람을 소비주의의 관점에서만 보도록 부추깁니다(혹은, 세계화된 경제의 여러 작동 장치들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소비’의 관점에서 보도록 부추깁니다)”(144항).


자신과 이웃과 사회와 자연과 그리고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돈’의 관점으로만 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관계 양식으로서의 우리 문화를 두고, 건강한 문화라고 해야 할까? 병든 문화라고 해야 할까? 만일 병든 문화라면, 우리는 그 병을 치유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치유하지 않는다면, 더 중한 병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이다. 우리는 문화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회자되는 ‘금 숟가락과 흙 숟가락’에 관한 이야기를 그저 재기발랄한 말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는 쓰고 버리는 소비재가 아니라 세습 재산이다. 당연히 물려줘야 할 실재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29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0. 제4장 - 통합의 생태


③공동선의 원리 - 우리 모두에게 보낸 연대의 소환장,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소환장


교회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은 그다지 많지 않다. 신앙 생활 자체를 사생활의 정신적인 활동 가운데 하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다 보니 성당 안과 밖의 생활 및 태도가 서로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긴다. 이런 이분법적 자세는 실제 사목 현장에서 만나는 대부분 교우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표현을 빌리자면, ‘삶에 덧붙여진 액세서리’ 정도의 무게를 지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우 탓이라 할 수 없다. 교회 책임이 무겁고, 무엇보다도 성직자와 수도자의 책임이 크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렇게 ‘전승’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 지 50년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그런 형편에서 교우에게 ‘사회교리’ 혹은 ‘공동선의 원리’는 용어조차도 생소할 수밖에 없다. “사회 집단들과 그 구성원 개인들이 자기완성을 보다 더 충만하고 쉽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들의 총화”가 공동선의 원리다(156항).


사람이든 집단이든 그 나름의 올바른 목표가 있게 마련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조건’이 좋아야 한다. 한 젊은이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직업을 구할 수 없으면(경제 조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으면(정치 조건), 사회와 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면(문화 조건), 그가 꿈을 이룰 수 있겠는가? 가정도, 학교도, 기업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공동선이란, 집단이든 그 구성원이든 이런 사회생활 조건들이 제대로 마련된 상태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사회가 부단히 추구해야 할 목표라 할 수 있기에, 교회는 이 공동선 실현이 국가의 제1의 임무라고 가르친다.


우리 교회는 이 공동선의 원리를 사회 윤리의 중심 원리이면서 다른 원리들을 통일하는 원리라고 강조한다. 사실 ‘인간 존엄성의 원리’와 함께 ‘공동선의 원리’는 사회교리의 기본이 된다.


그런데 회칙은 이 공동선의 원리가 그리스도인과 인류에게 ‘연대의 소환장’,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소환장’이 되기도 한다고 피력한다. 사회생활의 조건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을 경우 누가 가장 고통스러울까? ‘인간 존엄함’과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불의한 사회상황’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존재는 누구일까?


예를 들어보자. 우리 경제는 대외의존도가 높다고 말한다. 환율 변동에 기업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대기업은 충격에 견딜 수 있지만, 중소기업의 경우 휘청거리거나 쓰러지기 일쑤다. 가난한 가정에서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병환을 앓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제적 부담으로 가정이 붕괴되고 다른 가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들의 문제이며, 그 문제에 대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이다. 이런 태도에는 ‘내 것은 내 것이니까 나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라는 사유재산권과 그 처분권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주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교회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교회는 ‘지상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공동사용권’을 믿는다. 지상의 모든 재화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며,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은 지상의 재화를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가르침이다. 더 나아가 회칙은 교회의 사람들에게 ‘사회적 약자’에 대해 고마워해야 한다고까지 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의 길이며, 공동선 실현을 위한 윤리적 명령이기 때문이다(158항). [평화신문, 2015년 12월 6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1. 제4장 - 통합의 생태


④ 세대 사이의 정의와 세대 안의 정의


‘어제 오늘 내일.’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필자의 고교 시절 학생 동아리 이름이 YTT(Yesterday, Today, Tomorrow)였는데, 너무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친구들 사이의 우정과 의리를 끝까지 지키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내용을 확장해서, 회칙은 이를 ‘세대 사이의 연대’라고 부르며 이 연대를 ‘정의의 기초 문제’로 다룬다(159항 참조).


이 가르침은 교종의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는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겁게는 역사라는 실재라 할 수도 있겠다(79항 참조). 인류 역사의 무대에는 희망과 고뇌를 안겨주는 사건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다(시간과 과정). 특정 권력이 그 역사의 과정을 묶어둘 수도 없을뿐더러 조작하려는 것은 억지며 역리다(공간과 권력).


우리는 오늘 어떤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가?(160항 참조). 혹시 내일은 내 삶과는 무관하니까 오늘 모든 것을 다 써버리고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가계부채와 함께 공공부채라는 것이 있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공기업이든 정치 공동체가 빚을 내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빚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일시적 위험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내일을 준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오늘 진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 오늘 갚을 능력이 없을 경우, 자연스럽게 내일로 그 상환을 연기할 것이다.


그런데 연기했는데도 그 빚과 이자를 갚을 뾰족한 대책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또 빚을 내서 생활하면 된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채권자가 무작정 연기해주지 않을 것이고 다른 데서 빚을 얻어 올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를 부도라고도 하고 파산이라고도 하며 신용불량이라고도 한다. 만일 오늘의 우리가 빚을 내어 생활하고, 그 빚을 내일의 세대에게 갚으라고 한다면? 그것도 처분하여 갚을 담보물도 없다면, 내일의 세대는 오늘의 세대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돈 이야기를 했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자연이든 사회든, 내일의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실재다. 좋은 것을 물려줄 수도 있고, 해로운 것을 물려줄 수도 있다. 교종은 공동선의 원리가 내일의 세대에까지 연장된다고 밝히면서 그 사례를 든다. “세계적 경제 재앙들은 우리가 공동 운명을 무시했을 때 반드시 유해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159항).


우리의 경우는 너무나 생생하다. 1997년 당시 정부는 국가부도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IMF(국제통화기금)의 강력한 경제개혁 요구들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IMF 구제금융을 수용했다. 그 후 누군가는 ‘국가’ 경쟁력이 높아져 ‘선진국’ 대열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시민 삶의 질 저하와 사회의 붕괴’(회칙 제1장 Ⅳ 참조)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회칙은 말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세상은 우리 다음에 올 사람들에게도 귀속되어 있다”(159항).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을 “순전히 실용적인 방식으로만” 바라보아, “효율성과 생산성과 개별적 혜택”에 맞추어 이용하려 든다.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4대강 사업, 핵발전소와 송전탑 건설, 케이블카 건설 따위가 다 그렇다. 그 같은 오늘의 우리 사업에서 “이 세상은 우리가 거저 받아서 다른 이들과 공유해야 할 선물”이라는 태도는, “환경은 각 세대에 하느님께서 빌려주신 것이며, 그 빚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할 것”이라는 자각은 찾아볼 수 없다.


회칙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지구 최후의 날에 대한 예언들을 이제는 더 이상 경멸하거나 빈정거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다가올 내일의 세대에게 엄청난 폐허와 황무지와 오염을 남겨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비와 낭비와 환경 변화 속도는 이미 행성의 한계 역량에까지 손을 뻗었습니다. 이미 그 자체로도 지속시킬 수 없는 우리의 현재 생활양식은 파국들을 재촉할 뿐입니다”(161항).


‘지구 최후의 날에 대한 예언들’과 ‘파국들’이란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교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원인을 ‘근대 이후 세상 사람들의 광포한 개인주의의 모험’ 때문이라고 말이다. ‘즉각적 욕구 충족’에만 몰두하고, ‘미래(내일) 세대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오늘)우리의 무능력’과 ‘발전에서 배제된 이들을 고려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이라고 말이다(162항 참조).


그래서 회칙은 “미래의 사회적 약자뿐만 아니라, 오늘의 사회적 약자도 기억하자”고 호소하면서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급박한 도덕적 요구라고 가르친다. “이 지상에서 그들의(오늘의 사회적 약자의) 인생은 짧으며, 그들은 계속해서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더 공정한, 세대와 세대 사이의 연대 의식과 함께 같은 세대 내의 쇄신된 연대 의식이라는 도덕적 요구의 급박성이 대두됩니다”(162항).


회칙은 ‘생태’를 단순히 ‘자연 환경’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환경, 경제, 사회, 문화, 일상생활의 요소를 모두 담고 있는 인간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을 갖고 있으며, 인간 존엄함과 공동선의 원리와 재화의 공동목적과 공동사용권의 원리, 그리고 세대와 세대 사이의 정의와 연대와 세대 안의 정의와 연대의 원리가 모두 작동하는 그런 ‘통합의 생태’를 말하고 있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13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2.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①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책임한 시대로 기억될 것인가!


“시민 사회가 기울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환경에 관한 정상회의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정상들에게 정치적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166항)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이 땅을 찾으셨을 때,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 것을 두고 ‘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문제를 삼으려는 분들이 있었다. 참 점잖은 ‘이의 제기’라 할 수 있다. 물론 교종께서도 점잖게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대꾸하셨다.


2년 전 교종의 권고 「복음의 기쁨」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리고 이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발표되었을 때 일부 사람들이 보인 격렬한 반발에 비하면 교종의 ‘노란 리본’은 사실 ‘사건’도 아니다. ‘공산주의자’, ‘막시스트’ ‘레닌주의의 아류’, 혹은 ‘경제의 문외한이 어설프게 쓴 책’ 따위의 비난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신성시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온 비난이다. 마침내 회칙이 발표된 바로 그 날 미국 공화당은 아예 대변인을 내세워 발 빠르게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회칙과 교종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표현의 수위는 다르지만, 교회 안에서도 일부 인사들은 나름 ‘점잖게’ 교종의 태도와 권고와 회칙을 언급하며, 그 의미를 축소 혹은 왜곡하려 했다.


여기서 정말 궁금함이 생긴다. 왜 교종의 발언과 권고와 회칙을 비난할까? 독자께서 그의 권고와 회칙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읽어보면 그 답을 금세 찾아낼 수 있다. 교종의 행보로 보아 ‘폭압의 권력’을 탐하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부의 축적’에 눈이 먼 것 같지도 않다. 그 행보가 ‘사회적 약자’ 편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면 교종이 어느 자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지 분명해진다. 그런데다가 교종은 지금의 경제와 금융 체제의 부작용과 미흡함을 문제 삼으며, 제발 제대로 된 ‘처방’을 내려주십사고 품위 있게 간청하지 않는다. 대신 교종은 신성하고 절대적인 그 체제(system) 자체에, 그리고 그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근본적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도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말이다. 지금의 경제 체제,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 자율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를 실현시켜주기 위해 충실히 봉사함으로써 사람과 사회와 자연을 황폐화시키는 경제와 정치의 부도덕함과 무모함과 무능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는다. 만일 외계인이 있다면, 자멸과 상호파괴의 길로치닫는 인류의 오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라고까지 한다.


회칙은 그 부도덕함과 무모함과 무능함(회칙의 3장)이 불러온 재앙들(1장)은 통합의 생태(4장)와 철저하게 반한다고 밝힌다. 물론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도 분명히 반한다(2장).


이제 교종은 회칙 제5장에서 병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그리고 그 진단과 처방을 찾기 위한 ‘대화’와 ‘행동’ 노선을 제시하려 한다. 제5장은 의미심장한 진단을 내놓으면서 시작한다. “많은 어려움이 지난 세기 중반에 시작되었습니다”(164항). ‘지난 세기 중반’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를 말한다. 인류는 급속한 변화와 심각한 불균형에 내몰린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1965년 12월 8일)은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시작한다. 회칙에서 진단하는 내용으로 말한다면,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그에 부합하는 윤리와 도덕의 부재라는 불균형일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미국을 한 축으로 하는 서방세계와 소련을 주축으로 하는 동방세계 사이의 냉전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다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지구 남반부 지역을 식민 지배함으로써 급속히 발전한 선진 국가들과 막 독립한 남반부의 수많은 나라들 사이의 심각한 경제적 불균형을 더할 수 있다.


맑은 정신으로 보면, 그 심각한 불균형의 문제를 못 볼 수가 없다. 교종은 그 부정적 결과들을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특정 생활양식과 생산소비 모델”이 낳았다고 밝힌다. 게다가 “그 해결책들이 단순하게 몇 나라만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아리라, 반드시 지구촌 차원의 전망에서 제시되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힌다(164항 참조).


우리 모두에게 부정적 결과를 안기고 있는 특정 ‘생활양식과 생산소비 모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지구촌 차원의 전망’을 훼방 놓고 ‘자기 나라만의 이해관계’를 지키려는 나라는 어느 나라들일까?


교종은 그동안 환경에 관한 현안에 대해 괄목할 만한 대중적 토론과 시민으로부터의 헌신적이며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고 긍정한다. 그렇지만 “정치와 기업(경제)의 영역에서는 그 도전의 급박성을 놓고 볼 때, 그 대응방식에 있어서나 시의성에 있어서도 훨씬 뒤쳐졌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말한다. 정치와 경제가 이제라도 올바른 몫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산업화 이후의 시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책임한 시대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165항 참조). [평화신문, 2015년 12월 20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3.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② 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


“보다 더 힘이 세고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이 정직하고 용기를 내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숨기려 하고 있는 그 문제가 야기할 비극들을 몸소 겪어야 할 사람들은 (곧 사회적 약자와 미래 세대는) 이런 양심의 실패와 책무의 실패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169항).


‘지난 세기 중반’부터 우리는 ‘하늘과 땅과 물과 뭇 생명’에서 중병의 증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연 환경의 악화가 무수한 사람의 삶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렸고, 사회를 고장 나게 했고, 불평등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았으며, 그 범위가 지구촌 차원으로 확산되었음을 고통스럽게 목격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 환경과 인간 환경과 사회 환경에서 중병의 증세가 심각하게 악화된 덕분에(?) ‘이성과 지성과 책임감’을 지닌 사람들이 점점 더 강하게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이 행성은 우리 모두의 고향이며, 인류는 하나의 공동 가정에 살고 있는 한 백성”이라는 확신이다. 또 “지구촌 차원의 환경 및 사회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몇 나라만의 이해 관계”가 아니라 “지구촌 차원의 전망”에서 “하나의 공동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도 자각하게 되었다(164항 참조).


이 고통스러운 자각(19항 참조)은 ‘시민 사회’의 ‘대중적 토론과 헌신적이며 활발한 응답’을 이끌어냈지만, 세계 공동체의 ‘정치 및 경제 영역’에서는 그 대응 방식과 시의성에 있어서 시민 사회의 열망을 거의 담아내지 못하고 있음이 현실이다(165항 참조). 예를 들어, ‘1992년 리오 데 자네이로 지구 정상회의’는 ‘생태계를 돌보기 위한 국제적 협력’과 ‘오염 유발자의 비용 부담 책무’와 ‘환경 충격 평가의 의무’ 등을 명문화했다. ‘지구 온난화’ 추세를 되돌리려는 노력으로 ‘온실 가스의 대기 집중을 제한한다는 목표’를 설정했고 ‘생물 다양성에 관한 행동 계획을 갖춘 의제’를 채택했으며, ‘삼림에 관한 원칙’도 밝혔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렀다. 일부 분야에서 ‘긍정적인 결실’을 맺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그 성적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협정 이행 감시 장치’와 ‘정기적 조사’와 ‘협정 불복종에 대한 제재 수단’ 같은 ‘효율적이고 유연하며 실질적인 협정 이행 수단’을 아직까지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67-169항 참조).


‘효율적이고 유연하며 실질적인 협정 이행 수단’을 마련하지 못한 원인, 곧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교종은 ‘공동의 책임’과 함께 다음과 같이 ‘차등의 책임’을 분명히 밝힌다. “보다 더 힘이 세고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이 정직하고 용기를 내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구촌 차원의 공동선보다 자국의 이해관계”를 앞세울 정도로 ‘보다 더 힘이 세고 [지구를]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은 어느 나라를 말하는 것일까?(169항) 특정 국가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조사하면 다 나온다.’


회칙의 언어를 빌면, 이들 나라의 태도는 정직하지 못하고 비겁하며 무책임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교종은 이를 “양심의 실패와 책무의 실패”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그 실패의 대가를 지불하는 데 있어서, 말을 만든다면, 일종의 ‘역차등의 고통’이 발생한다. “우리가 숨기려 하고 있는 문제들”이 야기할 비극은 누가 더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있는가? “오늘날 국제 공동체에서 벌인 토의에서 우리가 경솔하게 미뤄놓았고, 그에 따라서 우리가 초래한 나쁜 결과들”의 고통을 누가 짊어질 것인가? 오늘날 사회적 약자이며, 내일의 세대다. 그래서 회칙은 단호하게 경고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책임한 시대”로 기억될 수 있으며, ‘부정직과 비겁함과 무책임과 실패’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169항 참조). 일부 진영에서 교종을 격렬하게 비난한 배경을 짐작할 만하다.


우리가 일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차별적 언어가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 말이다. 흔히 경제적으로(물질적으로) 앞선 나라와 뒤쳐진 나라를 지칭한다. 그러면서 일부는 그 ‘선진국’을 동경하고 그 ‘후진국’을 무시한다. 그 나라 국적의 시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우리가 동경하고 닮으려 하는 그 ‘선진국’ 가운데 일부 나라는, 회칙의 문맥을 따르면, ‘정신적 도덕적 후진국’이라 부를 만하다.


회칙은 경고에 그치지 않고 경계와 고발로 이어진다. 그대로 옮겨놓는다. “‘탄소 배출권 거래 전략’은 새로운 형태의 투기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 투기는 세계 차원에서 오염 가스 배출을 감소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전략은 일종의 ‘환경에 대한 책임이라는 가면’을 쓴 것일 뿐이며, 빠르고 쉬운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 전략은 단순히 일부 나라들과 영역들의 과소비 유지를 허용하는 술책이 될 수 있습니다”(171항). 그런 전략들은 겉으로는 환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더 나쁜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될 수 있다. ‘산업화된 나라’의 과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나라들과 사회적 약자를 ‘궁지’로 내몰 수 있기 때문이다(170항 참조).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 투기와 가면과 술책은 언제나 ‘더 나쁜 불의’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25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4.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③ 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 - 연대에 뿌리를 둔 윤리적 결정으로 ‘세계 공권력’의 확립이 시급히 필요하다


“21세기는…민족국가들의 약세 현상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경제 및 금융 영역들이 초국가적 성격을 갖고 정치 영역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조직된 국제기구들을 설치하는 것이 핵심이 됩니다”(175항).


오늘날 전 지구 차원에서 목격되고 있는 생태 재앙의 악화 일로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통합의 생태로 전환시킬 수는 없을까! 교종은 우리에게 그에 대한 문화와 지도력이 없기에 ‘법적 틀’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호소한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런 재앙에 맞설 수 있는 문화가 아직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경로를 밟을 수 있는… 지도력이 없습니다. 분명한 경계를 세우며 생태계 보호를 보장할 수 있는 법적 틀을 구축하는 일이 불가결하게 되었습니다”(53항).


지난 호에서 다룬 것처럼, 교종은 통합 생태로 전환하는 그 길을 밟기 위해 ‘공동의 책임’과 함께 ‘차등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각 나라의 주권에 대한 존중’은 건전한 문화와 정의로운 지도력과 권위 있는 ‘법적 장치’의 마련 과정에서 바탕이 된다. 이는 모든 가톨릭 사회원리의 바탕에 ‘인간의 존엄함과 인권’에 대한 존중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교종은 그 막중한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서 “모든 나라에 책무를 부과하고 용납할 수 없는 행위들을 방지하기 위한 있는 규범들”이 필요하며 이를 집행할 “구속력 있는 국제 협정들”의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구속력’을 강조한 배경에는 그동안 ‘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가 그다지 결실을 보지 못했다는 성찰, 시민사회의 자각과 열망에 대해 정치 및 경제 분야의 미흡한 대응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있다(165, 166항 참조).


회칙은 ‘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로서 다음과 같이 몇몇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1972년 스톡홀롬 선언,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 지구 정상회의(167항), 생물 다양성 보호와 사막화와 관련한 현안들(169항), 지속 가능한 발전에 관한 유엔 컨퍼런스(169항), 기후 변화와 관련된 회의들(170, 171항), 대양의 통할 체계와 관련된 대회들(174항) 등이 그것이다.


교종은 물론 ‘위험 폐기물’과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과 ‘오존층 보호’와 관련해서 국제 공동체의 대화가 긍정적인 결실을 맺었다고 평가한다(168항). 그럼에도 전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미흡하다고 평가한다. “정상회의를 통해 마련한 협정은 거의 이행되지 않았습니다”(167항). “의미 있는 진전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169항).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교종은 이에 대해, ‘정상들의 정치적 의지의 결여’(166항), ‘(협정 이행을) 감시하기에 적합한 기구와 정기적 조사와 불복종에 대한 제재의 결여’(167, 173항), ‘보다 더 힘이 세고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의 정직하지 못함과 비겁함과 무책임’, ‘지구촌 차원의 공동선보다 자국의 이해관계를 앞세운 나라들이 취한 행동들’ ‘양심의 실패와 책무의 실패’(169항), ‘새로운 형태의 투기와 술책’(171항), 가난한 나라의 ‘추문 수준의 소비와 부패’(172항), ‘산발적인 대화’(174항) 등을 꼽고 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대목은 ‘민족 국가들의 약세 현상’과 ‘경제 금융 영역의 초국가화’에 대한 지적이다. 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회칙이 밝힌 것처럼, 경제 금융 영역이 정치 영역을 ‘지배’(압도)하기 때문이다(175항). 이 같은 교종의 해석은 이미 앞에서도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과학기술-경제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새로운 권력 구조들이 우리의 정치뿐만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압도할 수도 있습니다”(53항). “환경에 관한 지구 정상회담의 실패는 우리의 정치가 과학기술과 금융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경제와 과학기술 사이의 동맹은 그 동맹의 직접적 이해관계와 관련 없는 것은 무엇이나 퇴출시켜 버립니다”(54항).


이런 상황에서 교종은 교회의 가르침을 계승해 외교 활동을 강화하면서, “백성들 사이의 연대에 뿌리를 둔 윤리적 결정”(172항)으로 ‘세계 공권력’을 확립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역설한다(175항 참조).


우리 사회를 성찰하며 묻게 된다. ‘우리는 자연과 경제와 사회와 문화 요소의 통합 생태를 위한 건전한 문화와 정당한 지도력과 권위 있는 법적 틀을 갖추려는 노력을 기울이는가?’ ‘우리의 권력 구조는 자유와 정의와 연대를 향한 시민 사회의 열망을 외면하고, 대신에 경제와 금융 동맹의 지배에 앞장서서 봉사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1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5.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④ 국가 및 지역 차원의 새로운 정책들을 위한 대화 - 정치, 할수 있는 일이 정말 많은데


“일부 지역에서는 재생 가능 에너지 자원을 이용하기 위하여 협동조합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이 사례는 기존의 세계 질서가 그 책임을 떠맡는 데 무력한 반면에, 지역의 개인들과 시민 사회들은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79항).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공동 가정인 ‘통합의 생태’를 보호하고, 그때까지라도 우리가 초래한 거센 ‘자멸의 소용돌이’(163항)라 할 만한 생태의 재앙 문제(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위기 및 지구촌 차원의 불평등 심화)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그 일은 ‘급박하고 절실하며 광대한’ 도전이다(15항 참조). 그 때문에 반드시 국제 공동체 차원의 접근이 요구된다.


이에 교종은 국제 관계의 윤리(51항 참조) 회복, 국제 질서에서의 공동 및 차등의 책임(170항)과 우주적 연대에 뿌리를 둔 각국의 윤리적 결정(172항), 구속력 있는 국제 협정들(173항)과 보다 더 효율적으로 조직된 강력한 국제 기구들과 세계 공권력의 확립(175항)을 모색하는 ‘대화’를 긴급하게 호소한다(제5장 I ‘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


그렇다고 해서 국제 공동체의 실효적인 대응책이 마련될 때까지 모두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는 국제 공동체의 효과적인 대응이 실망스러울뿐더러,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각 나라와 지역 차원에서 짊어져야 할 ‘공동 및 차등의 책임’이 엄연히 존재하며, “할 수 있는 일이 정말로 많기 때문이다”(180항).


회칙은 국가의 책임과 임무로 자국 내의 ‘계획 수립과 조정과 감독과 집행’을 꼽는다. 인간이 자기 능력들을 오용할 가능성이 실제로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가가 그 임무를 수행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권위’다. 국가의 권위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특정한 소수의 폐쇄적 지배 집단의 위력에서 생기는 것도 다수의 합의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 권위는 ‘도덕적’이어야 한다. 회칙은 국가 권위의 도덕성을 참된 ‘법치’에서, 그리고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건전하고 성숙하며 위엄이 있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공동선’에서 찾는다(177항 참조). 가톨릭 사회교리는 정치 행위가 ‘인간 존엄’과 ‘인권’을 보호함으로써 공동체의 ‘공동선’을 증진할 수 있기 때문에 ‘차원 높은 애덕의 행위’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흔히 ‘근시안적인 권력의 정치’와 ‘선거의 이해 관계’에 몰두하는 정치는 즉각적인 결과물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대중을 화나게 하는, 소비 수준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거나 외국인 투자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그런 조처를 꺼린다.” 그곳에서는 “어려운 시기에, 고상한 원리들을 유지하고 장기간의 공동선을 생각하는 참된 치국을” 기대하기 어렵다(178항). 정치 공동체(국가)의 참된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근시안적인 권력의 정치만이 아니다. ‘정치적 부패’도 빼놓을 수 없다. 정치적 부패는 “민주주의 제도의 가장 심각한 결함 가운데 하나”로서 “도덕 원칙과 사회 정의 규범을 한꺼번에 짓밟는다”(「간추린 사회교리」411항).


교종은 다음과 같이 시민 사회가 정치 권력을 압박하고 단속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때때로 부패로 인하여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정부들(정치인들)이 결정적인 정치 행동을 취하도록 하려면 대중이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사회는 반드시, 비정부 기구들과 중간 그룹들을 통해서, 보다 더 엄격한 규제들과 절차들과 단속(통제)들을 발전시키도록 정부들에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시민이 정치권력을 - 국가, 지역, 그리고 자치도시의 정치 권력을 - 단속(통제)하지 않으면, [정치 권력과 기업이] 환경에 가할 손상을 통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웃한 공동체들 사이에서 동일한 환경 정책을 지지하는 합의들이 이루어진다면, 지역 차원의 입법이 보다 더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179항).


교종의 이런 발언에 불편함을 느끼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가톨릭 신자 가운데 그런 분이 계시다면 우리 신앙의 확신에서 발전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교종의 가르침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충실할 뿐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는 ‘정치 공동체(국가)는 시민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이를 ‘정치 공동체에 대한 시민 사회의 우선성’이라고 한다. 가톨릭 교회의 이 가르침은 유별한 것도 아니다.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나라의 헌법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근시안적인 권력의 정치와 선거의 이해 관계에 몰두하는 정치, 정치적 부패와 민주주의 제도의 가장 심각한 결함, 그리고 정치 권력에 대한 시민 및 시민 사회의 통제와 참된 치국을 다시 생각한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10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6.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⑤ 국가 및 지역 차원의 새로운 정책들을 위한 대화 - 건전한 정치는 역사에 '사심 없는 책임 완수의 증명서'를 남겨놓는다


“모든 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시급했고 또 필요했을 때, 행동을 취하는 데 있어 무능했던 것으로 기억될 뿐인데도, 모두를 그 권력에만 집착하도록 꾀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57항).


근시안적인 권력의 정치, 선거의 이해 관계에 몰두하는 정치(178항)와 정치적 부패(179항)는 건전하고 성숙하며 위엄이 있는 사회가 부과할 수 있는 법과 규칙을 내놓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되면 개인이나 사회 단체의 악행을 억제하지도 못하고, 선행과 창의력과 주도성을 촉진시키지도 못한다(177항). 그런 정치는 환경 관련 의제들을 지연시키기 일쑤고(178항), 공동선의 증진은 요원해진다(179항). 기후 변화와 환경 보호와 관련된 정책의 ‘연속성’은 실종되고, “시급히 조처를 해야 할 때에도 통치 기간에 가시적 결과를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개입하지 않으려는” 비겁함마저 보인다(181항).


회칙이 제시하는 접근 및 행동 노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 권력에 대한 대중이나 시민 단체의 통제와 압박이다. 회칙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정부들(중앙정부, 지방정부)이 중요한 정치적 행동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사회는 반드시 비정부 기구들과 중간 단체들을 통해 보다 더 엄격한 규제와 정차와 단속을 발전시키도록 정부들에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 권력이] 환경을 훼손하는 행위를 통제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179항).


회칙이 제시하는 다른 하나의 접근 및 행동 노선은 ‘건전한 정치’의 회복이다. 건전한 정치란 “예방과 안전, 규제 규범들, 시의적절한 법 집행, 부패 척결,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들, 잠재적 혹은 불확실한 위험이 있을 경우의 적절한 개입”과 관련한 규칙을 내놓음으로써, 개인과 시민 단체들의 “악행을 억제하고 선행과 창의력과 주도성을 촉진하는” 정치다(177항). 건전한 정치란 “어려운 시기에서도 고상한 원리들을 유지하고 장기간의 공동선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국가를 바로 세우는” 정치다(178항). 건전한 정치란 “오늘날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는 단기 소득과 단기 결과의 사고방식과 충돌하더라도, [정치인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기의 존엄을 용감하게 입증하고 ‘사심 없는 책임완수 증명서’를 남겨놓을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조정할 역량, 선행을 촉진시킬 역량, 부당한 압력과 관료주의적 타성을 극복할 역량”이 있는 정치이다(181항).


회칙은 국가와 지역의 차원에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시민과 시민 단체들이 정치권력을 압박할 때 그 올바른 지향을 밝힌다. 국가 차원에서 건전한 정치는 “에너지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원료 사용을 줄이는 상업 생산 형태를 장려하는 일, 에너지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더 많이 오염시키는 상품을 시장에서 퇴출하는 일, 운송 체계를 향상하는 일, 에너지 소비와 오염 수준을 감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건축과 개축을 권장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지역 차원에서 건전한 정치는 “소비를 조절하는 일, 폐기물 처리 및 재활용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일, 특정 종들을 보호하는 일, 다양화된 농업 및 작물 순환 계획을 수립하는 일”을 할 수 있다.


회칙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교종의 자세를 여기서도 볼 수 있는데, 바로 ‘가난하고 취약한 존재의 우선성’이 그것이다. 교종은 ‘보다 더 열악한 지역의 농업’과 ‘소규모 생산자들’과 ‘생태계’를 잊지 않는다. “보다 더 열악한 지역의 농업은 비도시 기반 시설들, 지역이나 국가 차원의 시장 조직화, 관계 체계들, 지속 가능한 농업 기술 개발에 투자함으로써 향상될 수 있습니다. 소규모 생산자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지역의 생태계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협동과 공동체의 조직화가 장려될 수도 있습니다”(180항). 회칙은 구체적인 한 사례로 에너지 ‘협동조합’을 소개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재생 가능 에너지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서 협동조합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이 협동조합들은 지역 내에서의 에너지 자급자족과 심지어는 남은 에너지의 판매까지 보장합니다”(179항).


우리 사회는 어떤가? 정부가 바뀔 때 정책의 연속성은 유지되는가? 대중과 시민 단체들의 정부에 대한 압박은 활발한가? 우리의 정치는 시민과 사회 단체의 ‘악행을 억제하고 선행과 창의력과 주도성을 촉진하는가? 고상한 원리는 유지되고 공동선은 증진되고 있는가? 제도를 개혁하고 조정할 역량과 부당한 압력과 관료주의적 타성을 극복할 역량은 있는가? 에너지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소규모 생산자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가? 생태계 보호를 위해 새로운 형태의 협동과 공동체를 조직화하는 일을 하는가? 혹시 ‘단기 소득과 단기 결과’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고상하고 관대한 사회의 바탕이 될 훌륭한 목표와 가치’는 질식시키고 ‘오로지 경제 성장’만을 꾀하려는 것은 아닌가? ‘참되고 뜻깊은 인본주의’는 배제하고 고삐 풀린 무자비한 ‘자본주의’만 발전시키려는 것은 아닌가?(181항 참조). [평화신문, 2016년 1월 17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7.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⑥ 대화와 의사 결정의 투명성


“우리는 환경을 구하겠다는 [과학 기술적] 개입들에 관해서 궁리하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환경충격평가] 토론에 참여하여 [의견 일치로] 개발한 그런 정책들을 마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183항).


우리에게는 ‘환경영향평가’라는 제도가 있다. ‘영향’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업을 시행하기 전에 ‘환경영향평가’ 과정을 의무화한 배경에는 그 영향이 ‘나쁜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의도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도 회칙처럼 ‘환경에 가할 충격에 대한 평가’(환경충격평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회칙은 국제 공동체 차원에서 그리고 국가 및 지역 차원에서 어떤 사업이 환경에 가할 충격을 평가할 때, ‘대화와 의사 결정의 투명성’을 원칙으로 제시한다. 자유로운 의견 교환과 투명한 정치적 과정이 없다면, 환경에 가할 충격을 은폐하는 형태의 부패가 횡행하고, [평가 주체와 대상 사이의] 호의를 교환함으로써 정보의 왜곡과 형식적 토론으로 허울뿐인 협정서만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183항 참조).


우선, 환경충격평가에 있어 회칙이 제시하는 접근 및 행동 노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환경충격평가는 특정 정책과 계획과 사업을 구상하는 처음부터 그 집행과 사후 전 과정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평가 방식은 학제 사이에 협력하는 방식, 투명한 방식, 어떠한 경제적 혹은 정치적 압력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방식이어야 한다. 셋째, 그 평가는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지역 경제와 공공의 안전과 노동조건에 관한 연구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추가 투자의 필요성 여부도 조사해야 한다. 다섯째, 상이한 이해관계자 사이의 의견 일치와 지역민이 그 토론에서 특히 중요하다. 여섯째, 의사 결정 과정과 후속 활동과 감시 활동까지 포함하는 전 과정에 이해 당사자들이 참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위험 요소들과 가능성에 관한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적이며 정치적인 토의에는 반드시 정직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183항 참조).


둘째, [평가의] 의사 결정은 어떤 사업이 불러올 ‘위기와 혜택’을 대조한 것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환경의 위기는 현재와 미래의 공동선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기 소득과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소비주의 문화에서는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고 허가서에 승인 도장을 찍거나 정보를 은폐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184항).


셋째, 제안된 모험 사업에 관한 평가 토의에서는 반드시 그 사업이 ‘참된 통합적 발전’에 기여할 것인지를 식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그 사업으로 성취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어디서? 언제? 어떻게? 누구를 위해서? 위기는 무엇인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이며 그 대가를 누가 그리고 어떻게 치를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식별을 위한 이런 물음이 모두 같은 수준의 비중을 갖지는 않는다. 우선순위가 있다는 뜻이다. 회칙은 하나의 예로서 ‘물과 관련된 사업’에 있어서 물이 희소하고 불가결한 자원이라는 점과 모든 사람의 물에 대한 권리는 다른 요소들보다 우선하는 식별 요소가 된다고 강조한다(185항).


넷째, 충격평가 토의에서 예방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 이는 상처받기 가장 쉬운 이들을 보호하고 또 자신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반박할 수 있는 증거를 모을 수 있는 능력이 별로 없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만일 환경에 심각하고 또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입힐 것이라는 ‘객관적인 정보’가 있다면, 비록 명백한 증거가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사업은 반드시 중단되거나 변경되어야 합니다.” “제안된 활동이 환경이나 그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심각한 해를 유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입증할 의무”는 사업 주체에게 있기 때문이다(187항).


다섯째, 충격평가에서 대화와 의사 결정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익만이 계산의 유일한 기준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중요한 새 정보가 드러날 때, 반드시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87항). 무엇보다도 “특정 이해관계 집단이나 특정 이념이 공동선을 손상하지 않도록 정직하고 공개적인 그런 토론을 도모하기” 위함이다(188항).


우리의 경우를 성찰한다. 환경에 가하는 충격평가가 경제적 수익 계산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것은 아닌가? 특정 이해 관계 집단이나 특정 이념을 앞세워, 혹은 국책사업이나 법을 앞세워 ‘공개적이며 정직한 토론’ 대신에 형식적 토론만 하는 것은 아닌가? 사업이 초래할 위기는 축소하고 그 혜택은 과장하지는 않는가? 지역민의 의사를 존중하는가? 예를 들어 새만금 간척 사업, 핵발전소 건설 사업, 4대강 사업, 케이블카 설치 사업, 혹은 신도시 건설 사업 따위를 생각할 수 있다. 사업을 구상하고 계획하고 시행하고 그 후속의 활동, 즉 사업의 전 과정에 이해 관계자와 지역민이 참여하여 ‘정직과 진리’에 기반을 두고 공개적인 환경충격평가 토론을 통해 그 의사 결정을 하였는가? [평화신문, 2016년 1월 24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8.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⑦ 경제 성장과 발전,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경제는 효율성만을 내세우는 무차별적이며 획일적인 패러다임의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수익 극대화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미래 세대에 떠넘길 상처를, 즉 환경에 입힌 손상을 반성하기 위해 스스로 발걸음을 멈출 것이라 희망하는 것이 과연 현실주의적입니까?(190항)


한국 천주교회에는 그다지 소개되지 않았지만, 사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교회 안팎에서 신랄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전문가들은 세계적인 경제 전문 잡지나 방송을 통해서 그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내 회칙이 발표되던 날 미국 공화당은 공식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교종을 비판했다. 그들이 교종을 신경질적으로 비판한 이유는 바로 오늘날 세계 질서를 선도하고 있는 ‘체계(system)’와 발전 모델과 도그마 자체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를 쥐락펴락한 절대 지배권을 행사한 신자유주의(시장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금융)자본주의 경제체계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그들에게 교종의 도전은 “특정 이해관계(집단)들이나 특정 이념들이 공동선을 손상시킨다”(188항)는 고발로 들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완성을 위한 대화에서의 정치와 경제’(189 ~198항)라는 소제목에서 이미 엿볼 수 있듯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와 경제는 인간의 완성을 위해 정직하게 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는 경제에 복종”했으며, “경제도 효율성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과학기술 패러다임의 명령에 복종”했다(189항). 그에 따라 발생한 극단적 사례가 바로 ‘2007~2008년의 금융 공황’(189항 참조)과 같은 사태와 정치 자체에 대한 악평과 불신이다(197항 참조). 건전하지 못한 경제와 정치의 대가를 “환경과 가장 약한 사람들”(198항)이 극단의 고통으로 치러야 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경제체계에 대해 회칙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미래라고는 없고 새로운 재앙을 잇달아 불러일으킬 뿐이며, 그 재앙의 회복은 더디고 치러야 할 희생은 막대하고 그 회복마저도 겉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한 금융체계의 절대 권력”, “우리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구시대의 쇠퇴한 기준들”, “환경에 불필요한 충격을 가하며, 역내 경제들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생산 [방식]”과 “더 많은 거품을 내려는 금융 거품”(189항). “시장이 마치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식의 개념”, “오로지 수익 극대화만 꾀하는 곳”(190항). “존경할 만하지도 창의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더욱더 천박한 일”(192항).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연출된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성장”(193항). “경제의 불량 기능과 그릇된 적용”과 “지나간 자리에 더 나은 세상과 더 높은 수준의 통합적 삶의 질이라는 흔적을 남길 수 없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 발전”과 “사회와 환경에 대한 기업들의 책임”마저 “일련의 마케팅과 이미지 제고의 수단들로 환원시키는 방식”(194항). “수익 극대화의 원리”가 초래한 “경제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윤리적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는 경제 활동(195항).


사실 “전체 체계의 철두철미한 개혁과 재검토”를 위한 “새로운 길들을” 닦을 절호의 기회가 있었지만(189항), 우리는 (경제와 정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금융의 거품은 더 많이 나도록 했고, 실물 경제에 대한 열정은 식게 하고 있다. 금융시장이 점점 더 강렬하게 실물시장을 압도하는 형국이다. 기업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중소기업은 무너지며 고용의 기회는 바늘구멍보다 작아졌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기저기서 ‘지속 가능한 성장’에 관한 구호는 무성하다. 그러나 회칙은 이를 두고 “생태의 가치들과 언어들을 금융과 과학 기술주의의 범주들 안에” 흡수시킴으로써 사람들의 “주의를 흐트러뜨리고 핑곗거리를 내놓는 한 방식”일 뿐이라고 비판한다(194항).


한마디로 회칙은 지금의 경제 체계와 발전 모델 자체(실재)와 그것을 떠받치고 이끌어가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며 재검토와 철저한 전환을 촉구한다. 우리는 “환경은 시장의 힘들로는 적절하게 보호하거나 증진시킬 수 없는 재화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190항). 그리고 “합리적인 한계를 둠으로써,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우리가 걸어온 발걸음들을 거슬러 올라가 조사함으로써 성장 억제와…후퇴 성장까지도”(193항), “생산과 소비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것”(191항)까지도 검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진보(발전)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다시 정의해야 하며, 지구촌 차원의 현재의 발전 모델을 바꿔야” 한다(194항). 경제는 더 큰 그림을 보아야 하며 창의력과 진보에 관한 이상들을 끌어내는 ‘개방성’을, 상이한 가능성에 대한 개방성을 갖춰야 한다(191항).


우리의 경제를 성찰한다. 경제는 사람과 사회의 삶의 질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자연 환경과 사람과 사회를 경제의 수단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가 눈만 뜨면 외치는 ‘성장’과 ‘발전’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분명히 경제는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건강한가? 그만큼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 [평화신문, 2016년 1월 31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9.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⑧ 정치가 없는 경제론은 정당화될 수 없다


“어떤 지역에서는 국가가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아서, 일부 기업 그룹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시혜자의 가면을 쓰고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자신들이 특정 규율로부터 면제된다고 여깁니다”(197항).


교종은 경제 분야에서 ‘수익 극대화의 원리’가 “생산을 증대시키는 동안 앞으로 치를지도 모를 비용에 대해, 곧 미래 자원 및 환경의 건강 관련 비용에 대해 거의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비윤리적인 경제 개념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하며 기업 활동의 윤리성 회복을 강조한다. 지금 세대의 우리가 자원을 다 써 버린 대가로 지불해야 할 사회·경제적 비용을 다른 민족이나 미래 세대가 알아내고 지불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시장이든 국가든 자원을 할당하고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다(195항).


이어서 회칙은 인간 완성을 위해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며(189항), 건강한 정치의 역할을 호소한다. 그렇다면 허약한 정치는 무엇일까? 첫째, 경제에 종속되거나 아예 경제와 무관한 정치다. 그리되면 국가 그 자체보다도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일부 경제 영역들은 더 큰 책임감을 짊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재앙과 환경 문제 해결에 있어 경제적 접근 외의 다른 접근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며,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일에도 관심을 두지 못할 것이다(196항). 둘째,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치다. 그리되면 건전한 공공 정책들을 법제화하는 일이 보류되거나 일부 기업 그룹들의 사악한 논리를 무너뜨릴 수 없게 된다(197항). 셋째, 빈곤과 환경의 타락이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을 경제에 떠넘기고 대신 자기들의 권력을 움켜쥐거나 확장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정치다(198항).


건강한 정치란 우선, 사회의 각 수준에 현존하는 역량들을 개발할 자유를 부여하며, 공동선에 대한 보다 더 큰 책임감을 요구하는 보조성의 원리를 따르는 정치다. 건강한 정치는 현존하는 재앙과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경제적 접근 외에도 다양한 접근 방식을 함께 모색할 것이며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196항). 둘째,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전략을 세우기 위해, 멀리 내다보며 새롭고 통합적이며 학제 간 제휴하는 자세로 지금까지의 ‘과정 전체’를 재고할 용기를 가진 정치다(197항). 셋째, 공동선을 향해 경제와 대화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는 형식들을 찾는 정치다(108항).


정치와 경제는 그 목적도 토대도 인간이며 사회다. 정치와 경제는 궁극적으로 참된 인간화와 참된 사회화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이며 수단이다. 이를 위해 각각 윤리적인 경제와 건강한 정치가 요구되며 그 상호작용의 형식들도 찾아내야 한다. 그 실패는 금융 소득에만 관심을 두는 경제와 권력 쟁취와 확장에만 관심을 두는 정치를 키울 것이며, 그 대가는 무수한 사회적 약자의 양산이며 고통이다(198항). 이를 교회의 사회교리는 ‘죄의 구조들’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뜻과 상반되고 이웃의 선익에 위배되는 행동과 태도들, 또 그러한 행동들에서 비롯되는 구조들은 오늘날 두 가지 범주로 나타난다. 한편에서는 이득을 향한 강렬한 욕망이며, 다른 편에서는 자기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19항).


교종은 정치와 경제가 자기들 각각의 실수를 깨달아 알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 잘못이란 일부 정치 영역에서 보이는 경제에 종속되어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치이며, 일부 경제 영역에서 보이는 비윤리적이며 무책임하며 사악한 논리에 사로잡힌 경제를 말한다. 교종은 동시에 건강한 정치와 윤리적인 경제가 공동선을 향해 상호작용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198항).


우리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 말이 있다. 규제 완화, 규제 철폐, 규제 개혁 따위의 말이 그것이다. 그 내용은 ‘시장에 너무 많은 규제가 있어서 기업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그래서 경쟁력이 떨어지고 발전하지 못하므로, 과감하게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때로는 아예 노골적으로 우리나라 기업의 경제적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우리의 정치 수준이 한참 뒤떨어져 그 역량을 뒷받침하기는커녕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마침내 정치의 목적이 마치 경제에 봉사하는 데 있다고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사람과 사회와 자연 곧 생태를 보호하고 개선하는 그 일은 오로지 지금의 경제(시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그 시장과 경제를 섬기는 것이 정치의 몫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이는 시장 혹은 경제의 절대 자율이 만능의 신이라는 믿음과 마찬가지다. 가히 경제의 독재라 부를만하다. 정치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할 때 현실 세계에서 이를 견제할 힘은 어디에 있을까? [평화신문, 2016년 2월 7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0.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⑨ 과학(학문)과 대화하는 종교들


“오늘날의 생태적 재앙이 갖는 엄중함은 우리 모두에게 공동선을 향해 길을 나서라고, 언제나 ‘실재들은 관념들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인내와 자제와 관대함을 요구하는 대화의 행로로 나서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201항).


정치와 경제가 사람과 사회와 자연 곧 생태를 보호하고 개선하는 그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오히려 오늘날 생태 재앙을 일으킨 과학기술 만능과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에 종속될 때, 이를 바로 잡을 힘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교종은 ‘생태적 전환’(216항 이하)을 위한 “과감한 문화적 혁명의 길”에서 우리가 “속도를 줄이고 다른 방식으로 실재를 볼 것”(114항)을 촉구한다. “오늘날 생태 재앙이 근대성의 윤리ㆍ문화ㆍ정신적 재앙을 드러낸 하나의 작은 표지에 불과한 것”(119항)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생활양식과 생산ㆍ소비 모델과 기축 권력의 철저한 변화뿐만 아니라(4항) 대중과 시민사회의 건전한 압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204항 참조).


회칙은 ‘나침반을 잃어버린’ 인류(200항)를 걱정한다. 우리에게 ‘인문학의 고사’라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심지어 대학에서 철학과를 폐지한다는 소식부터 대학이 취업을 위한 직업훈련소가 되었다는 자조적인 탄식도 들린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사회가 ‘학문’조차도 철저하게 ‘돈벌이’가 될 수 있는 분야와 그렇지 못한 분야로, 정직하게는 ‘경제’ 혹은 ‘기업’에 활용 가치가 있는 분야와 그렇지 못한 분야로 나누어 버렸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사회에서는 “미학적 감수성이나 시나 혹은 사물들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파악할 이성의 능력조차도 설 자리가 거의 없게 된다. 윤리적 원리들조차…순수하게 추상적인 형태”로만 자존하여 공허해진다(199항). 우리에게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려 주는 나침반이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회칙은 ‘종교’ 혹은 인문학의 가치와 임무를 재확인한다. 특히 ‘종교’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 사상을 자극하고 마음과 정신을 확장하는 영구적인 힘”을 갖는다. 게다가 종교의 언어들은 “모든 맥락을 고려하는 윤리적 원리들”을 담을 수 있다(199항). 종교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조화롭게 살 수 있게 하고, 희생할 수 있게 하며, 다른 것들을 잘 다루게 할 수 있는 위대한 동기들”을 잊지 않게 한다(200항).


그렇다고 해서 교종은 종교가 제 임무와 역할을 언제나 올바르게 실천한 것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각 종교가 그 원천에 충실할 것을 권고한다. “만일 [종교의] 원리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자연을 학대한 것을 정당화하고, 창조에 폭압을 행사하고, 전쟁과 불의와 폭력을 자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면, 우리 믿는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적] 지혜의 보고들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각 종교들이 갖는 원천들에로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원천 곧 지혜의 보고에 충실하지 않은 믿는 이들의 삶은 곧 “자기들의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방식의 삶, “자기들의 행동으로 그 신앙을 부정한” 삶, “하느님의 은총에 개방되어” 있지 않은 삶,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삶이기도 하다(200항).


‘원천으로 돌아가기’는 ‘현대 세계에의 적응과 쇄신’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한 정신 가운데 하나다. 마땅히 교회는 초대 교회 신앙 공동체의 삶(성경)을 존재와 생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교종은 한국 교회의 현실 진단과 미래의 방향 찾기에서 언제나 그 기준은 사도 시대의 이상적 교회 모습을 드러낸 우리의 초대 교회의 삶이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5장을 마무리하면서 회칙은 종교 사이의 대화, 학문 사이의 대화, 생태 운동 사이의 대화를 호소한다. ‘대화’는 ‘교회의 끊임없는 정화와 쇄신’ ‘현대 세계의 복음화 사명’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교종은 “자연 보호, 사회적 약자의 방어, 존경과 형제애의 관계망 구축”을 위한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촉구한다. 다양한 학문 사이의 대화도 소극적으로는 지식의 고립화와 절대화를 막기 위해서, 적극적으로는 환경 문제를 효과적으로 대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빈번하게 이념적 충돌이 벌어지는 생태 운동들 사이에서도 개방적이며 존경심을 갖는 대화가 필요하다(201항).


우리의 경우를 성찰한다. 종교는 우리 사회의 ‘나침반’으로서의 임무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자기만족과 자기 몰두의 내재주의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교회는 ‘원천(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끊임없이 쇄신하며 복음화와 대화의 길로 나서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학문은 사물들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파악할 이성의 능력을 발휘하는가? 아니면 거꾸로 고립화와 지식의 절대화를 꾀하는 가운데 스스로 ‘경제’에 종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화신문, 2016년 2월 21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1.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① 새로운 생활양식과 교육


“어떤 물건을 즉시 버리기보다는 재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뜻을 갖고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고유한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동일 수 있습니다”(211항).


지난 2세기에 걸쳐 인류는 지배자이며 주인인 양 우리의 공동 가정을 마음껏 착취하여 황폐화시켰다. 그 무모함은 인류를 마침내 십자로에까지 데려왔다(102항). 그 십자로에는 경로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없고, 인류에게는 방향을 알려 주는 나침반이 없다. 우리는 이정표를 마련하고 나침반을 찾기 위해서 일단 멈춰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인류가 걸어온 길뿐만 아니라, 태도 자체를 재조사해야 한다. 회칙은 이를 “기초적 자각”의 회복이며 “문화적이고 영적이며 교육적인 거대한 도전”이라고 한다(202항).


환경의 타락은 우리에게 생활양식을 재조사하라는 과제를 안겨 준다(206항). 교종은 그 한 사례로 “과학 기술-경제 패러다임을 쫓는 소비주의”를 꼽는다. 소비주의가 낳는 것은 “경제·금융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극소수”의 거짓 자유와 대다수의 자유 박탈과 정체성 상실이다(203항). 이는 “집단적 이기심”을 불러오고 “탐욕”을 키움으로써 더 많은 구매와 소유와 소비를 갈망하게 만든다. 이 집착적 소비주의 생활양식에서는 “공동선에 대한 참된 의식”을 찾아볼 수 없고 “사회 규범조차도 개인적 욕구들과 충돌하지 않는 한도까지만” 수용함으로써 “사회적 불안”과 “폭력과 상호 파멸”을 야기한다(204항). 회칙은 이런 소비주의를 ‘자기 중심과 자기 몰두의 개인주의’ 생활양식이라고 한다(208항).


우리는 자기 중심과 자기 몰두의 개인주의 생활양식을 극복하고 다른 생활양식을 개발할 수 있다. 우리는 변할 수 있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존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하고 정신적 사회적 제약을 초월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참된 진선미를 향한 개방성과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할 능력이 있다. 우리는 선한 것을 다시 선택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다(205항). 이 생활양식의 변화는 정치·경제·사회적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건전한 압력이 될 수 있다. 그 예로 교종은 ‘특정 상품 불매 운동’이 기업의 생산 방식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소개하면서 생산방식뿐만 아니라 소비 생활의 도덕성 회복을 강조한다(206항). 이렇게 우리는 공동체적이며 이타적인 ‘생태 생활양식’에 부합하는 “다른 생활양식을 개발하고 사회에 의미 있는 변화들을 일으킬 수 있다”(208항).


‘다른 생활양식’을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새로운 습관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관념에 머물고 말 것이다. 여기서 교육 차원의 도전을 맞이하게 된다(209항 참조). 교종은 ‘생태 시민 의식’(211항)을 고취하려는 환경 관련 교육이 그 목표를 넓혀 왔음을 주목한다. “과학적 정보 제공과 의식 고취와 환경 재앙 방지”에 중점을 두었던 교육이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에 기초한 근대정신의 신화에 대한 비판”으로 교육 영역을 확장했으며, “다양한 수준의 생태적 평형 상태 회복”까지도 모색하게 되었다고 환영한다. 그러면서도 교종은 생태 윤리에 참된 의미를 부여하는 그 ‘초월자’를 향한 도약을 촉진하는 교육이 되어야 하며, 그 생태 윤리를 개발할 수 있는 교육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210항).


법과 규제만으로는 “나쁜 행실의 경로”를 바꾸는 데에 충분치 않다. ‘생태 시민 의식’을 갖고 좋은 습관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사심 없이 생태의 삶에 투신할 수 있으려면”, 훌륭한 덕을 계발함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인격적 성숙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종합하여 교종은 ‘환경에 대한 책임 교육’이라고 부른다. 이 교육은 “더 많이 지출하고 소비할 수도 있지만, 규칙적으로 난방을 덜 하고 대신 따뜻한 옷을 입는” 습관처럼, “주변 세상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의미 있게 영향을 주는 행동 방식들”을 장려할 수 있다. 이런 좋은 습관(덕행)은 고상하고, ‘창의력’을 드러내며, ‘고유한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동’이다(211항). 그런 행동들은 세상에 ‘미덕’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충만한 삶’을 살게 하며, 지상의 삶이 값지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212항).


우리 자신을 성찰한다. 우리는 교육 영역을 포함하여 사회 각 영역에서, 공동체적이며 이타적인 ‘생태 생활양식’에 부합하는 생활양식 대신에, 자기중심과 자기 몰두의 개인주의 생활양식을 조장하는 것은 아닌가? 심지어 우리의 왜곡된 신앙생활이 개인주의와 공리주의 생활양식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오랫동안 이 땅의 종교가 지나치게 이기적이며 기복적인 성향, 곧 개인주의 신앙에로 퇴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음에도 개선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교회에는 ‘생태 윤리’를 개발할 역량을 갖춘 교육자들은 있는가? 교회는 주변 세상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의미 있게 영향을 주는 행동 방식들의 모범을 보이기보다는, 더 많은 지출과 소비를 과시하는 양적 팽창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교회는 ‘생태의 윤리’ 교사인가? [평화신문, 2016년 2월 28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2.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② 그리스도교 영성 - 생태의 전환


“생태 재앙은 철저한 ‘내적 전환에의 소환장’이기도 합니다. …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생태의 전환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난 결과들은 자기 주변 세상과 맺는 관계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이루신 업적의 보호자들이 되는 것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교인 생활에서 선택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이 아닙니다”(217항).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생태의 재앙’(제1장)은 근현대의 ‘소비주의 패러다임’이 낳은 치명과 자멸과 공멸의 중병(重病)이다. 이를 치유하기 위한 처방은 “문화·영(정신)·교육적인”(202항) 거대한 전환이다. 회칙은 이를 ‘생태의 전환’이라고 부르며, 그 전환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교의 ‘생태의 영성’을 그리스도인에게 제안한다(216항 이하). 그리스도교의 건전한 영성은 ‘생태의 전환’을 가져오며, 그 전환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결과들은 자기 주변과 맺는 관계(문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17항 참조).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온 인류 가족에 대한 연대와 존경과 사랑을 가장 웅변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 헌장」 3항)


회칙은 ‘생태의 전환’으로 두 차원을 제시한다. 하나는 사람들의 ‘인격적 차원의 전환’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의 ‘공동체 차원의 전환’이다. “삼라만상과의 화해를 성취하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우리의 ‘인격적 차원의 전환’은 “우리의 잘못, 죄, 실수와 실패에 대한 인정”과 함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참회와 변화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218항 참조). 그럼에도 “오늘날 세상이 직면한 그 엄청나게 복잡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주도성” 곧 ‘인격적 차원의 전환’뿐만 아니라, “공동체 관계망들”로 대처해야만 하므로 ‘공동체 차원의 전환’이 반드시 요구된다(219항 참조). 교회의 사회교리에서는 전자를 ‘개별적 행동을 재촉하는 애덕’으로, 후자를 ‘정치 사회적 차원의 애덕’으로 설명한다.


‘생태의 전환’을 도모하려면, 인격적이든 공동체적이든, ‘관대한 돌봄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회칙은 그 정신을 키우기 위한 네 가지 태도를 제시한다. 첫째, 감사와 무상의 호의라는 태도다. 이는 세상이 하느님의 무상의 호의에 따른 선물이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둘째, 사랑하는 자각이라는 태도다. 이는 우리가 다른 창조물과 우주적 친교로 결합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태도를 말한다. 셋째, 하느님께서 주신 각각의 역량을 개발하는 태도다. 이는 문제 해결에 있어서 보다 더 위대한 창의력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태도를 말한다. 넷째,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태도다. 이는 인간의 우월성을 지배가 아니라 책임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말한다(220항 참조).


교종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신 안에는 분명히 ‘생태 전환의 차원’을 갖고 있다고 밝힌다. “각각의 창조물은 하느님의 무엇인가를 반영하며 우리에게 전할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자각’에 대한 확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물질적 세계에 가져다주신” ‘안정’에 대한 확신, “우리 인간에게는 무시할 권리가 없는 하느님의 질서와 활력이 이 세상에 새겨져 있다”는 ‘인정’에 대한 확신이 바로 그 ‘전환의 차원’이다(221항 참조). 그리고 교종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전환의 차원을 인정하고 충분히 살아 달라”고 요청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창조물과 맺은 우리의 관계, 우리 주변 세상과 맺은 우리의 관계 안에서 분명히 드러나” 인류의 “숭고한 형제 관계”를 키우는 데 협력하기를 희망한다.


회칙을 가르침을 빌어서, 우리의 교회 생활을 성찰한다. “우리에게 주신 그 영적 보화들 안에서 (건전한 영성에서) 정신의 생활은(the life of the spirit) 육체나 자연이나 세상의 실재들과 무관하게 분리되지 않으며,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 안에서, 그것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들과 친교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216항). [평화신문, 2016년 3월 6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3.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③ 그리스도교 영성, 기쁨과 평화


“실재 안에서(in reality) 매 순간을 보다 더 기쁘게 잘 사는 사람들은… 적은 것을 소유하더라도 많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 [소유보다는] 다른 즐거움을 계발하고, 형제적 만남의 만족, 봉사의 만족, 자기들의 은사 개발의 만족, 음악과 미술의 만족, 자연과 접촉의 만족, 기도의 만족을 찾을 때 그렇습니다”(223항).


그리스도교 영성은 삶의 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곧 마음의 태도에 있어서, 대안의 관점을 제안하며, 예언자적이며 관상적인 생활양식을 권장한다(222, 226항).


회칙은 “지난 세기가 절제와 겸손을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은 시대”였다고 단언한다. 근현대의 소비주의 패러다임은 ‘지배의 역학’을 강화하고 ‘쾌락의 축적’만을 강요하고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소비재’(222항) 앞에서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찾아 다른 곳에 가서 기웃거리는 그런 생활”에 빠져들게 되었다(223항). 사람들은 자신을 자율적인 존재로 여기며 하느님을 배제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모든 것을 무한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려 했지만, 결국 ‘집착과 걱정’(223항)에 사로잡히고 ‘환경의 불균형들을 포함한 다수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을 뿐이다(224항).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두르는 가운데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거칠게” 다루며, “피상적 소비자, 공격적 소비자, 그리고 충동적 소비자로 만드는 그런 불건전한 고뇌”에 빠져, 기쁨과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었다(226항).


그렇다면 회칙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이 제안하는 ‘대안의 관점’, ‘예언자적이며 관상적인 생활양식’, 그리고 ‘마음의 태도’는 무엇일까?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다 더 적은 것이 보다 더 낫다’(less is more)는 확신을 갖고, 각각의 사물과(each thing) 매 순간을(each moment) 소중히 여기는 삶이다. 회칙은 이를 “중용과 작은 것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성장”이라고, 곧 ‘소박함에로 복귀하는’(222항) 삶이며 [집착과 걱정과 고뇌로부터] ‘해방하는 절제’(223항)의 삶이라고 한다. 이는 3장에서 다룬 ‘획일적이며 일차원적 패러다임’을 쫓는 고삐 풀린 소비주의의 극복을 위한 대안의 태도라 할 만하다.


둘째, 그리스도교 영성은 생태계들의 통합성뿐만 아니라, “과감하게 인간 생활(생명)의 통합성에 대해서, 즉 모든 위대한 가치들을 촉진하고 통일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대화를 제안한다(224항). 이는 3장에서 다룬 ‘과도한 인간중심주의’와 ‘실천적 상대주의’의 극복을 위한 대안의 태도, 좀 더 구체적으로는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다룬 ‘배제’를 토대로 하는 ‘경제체계’ 혹은 ‘돈을 우상화하는 새로운 경제독재’의 극복을 위한 대안의 태도라 할 만하다.


셋째, 그리스도교 영성은 ‘경탄할 역량과 함께 균형 잡힌 생활양식에 반영되는 내적인 평화의 회복을 제안한다. 진정한 내적 평화는 생태와 공동선을 돌보는 [외적] 평화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25항). 이처럼 그리스도교 영성이 제안하는 “통합의 생태에는 창조와(삼라만상과) 고요한 조화를 회복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는 태도, 우리의 생활양식과 이상들을 성찰하는 태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며 우리를 둘러싸고 계시는 창조주를 관상하는 태도”가 포함된다.


교종은 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완벽한 모범을 다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 “우리는 [지금] ‘마음의 태도’에 대해서, ‘고요한 정중함’으로 생명(생활)에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서, 후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지 않고 ‘어떤 사람 앞에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는 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매 순간’을 우리에게 철저하게 살라고 주신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의 꽃과 하늘의 새를 관상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셨을 때, 혹은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마르 10,21)는 말씀처럼 부자 청년을 바라보시며 그의 불안함을 알아보셨을 때, 바로 이 [마음의]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 앞에 그리고 모든 것 앞에(to everyone and to everything) 완전하게 현존하셨습니다”(226항).


우리의 영성과 교회의 태도를 성찰한다. 우리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내세워, 그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책임과 무관심을 정당화하지는 않는가?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라는 ‘조건절’(條件節)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말이다(1 코린 9, 22 참조). [평화신문, 2016년 3월 13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4.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④ 그리스도교 영성, 사회 · 정치적 사랑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부도덕했고, 윤리와 미덕과 신앙과 정직을 충분히 조롱했습니다. 경박한 피상성이 우리에게 결코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왔습니다”(229항).


‘사랑’만큼 흔한 말도 없을 것이다. 마치 물과 공기가 모든 생명체의 유지와 성장에 필수적이면서도 가장 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그 공기와 물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자연 생태계가 재앙을 맞고 있듯이, 사랑 역시 왜곡되거나 그 가치가 축소되어 사회 생태계가 위협을 받고 있다. “사랑을 친밀한 육체적 관계로 국한하거나 단순히 타인을 위한 [개별적] 행동의 주관적 측면에 한정시킨” 탓이라 할 수도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204항). 혹은 교종의 회칙이 극복해야 할 오늘날의 문화로 꼽은, ‘건전한 윤리와 도덕’을 동반하지 않은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와 ‘공리주의’가 낳은 결과라 할 수도 있다.


생태 전환을 도모하려는 대화에서, 회칙은 ‘사회·정치적 사랑’이라는 교회의 영성으로 기여하고자 한다. 교회는 진리와 자유와 정의와 함께 사랑을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로 제시하는데, 특히 사랑이 “사회 윤리 전체의 가장 높고 보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간추린 사회교리」 204항 참조). 사랑을 “개별적 행동을 재촉”하는 것쯤으로 여기는 우리의 태도와는 너무 다르다.


첫째, 교회의 영성에서 사랑이 사회적인 차원을 갖는 근거는 ‘우주적 형제 관계’에 대한 확신과 ‘우주적 형제애’에의 소명(부르심) 때문이다. 우리 공동의 가정은 공동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무상의 호의로 창조하셔서, 인류에게 가꾸고 돌보라는 책임을 맡긴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 가정에서 인류는 서로 형제이며 누이다. 게다가 뭇 생명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바람과 태양과 구름”조차도 이 가정에서 한 가족을 이룬다(228항 참조). 이 가정에서는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나’의 이기적 욕망에 따른 ‘소유와 지배와 오남용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고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 가족이다.


우주적 형제애는 “보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는 모든 행동”으로, 곧 “사회에 대한 사랑과 공동선에의 헌신으로” 드러난다. 때문에 이는 “개인들 사이의 관계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과 경제적 관계들과 정치적 관계들이라는 거시적 관계들에도” 영향을 주며, “더욱 큰 규모의 전략들을, 곧 환경의 타락을 중단시킬 전략들을 그리고 사회 전 영역에 스며들게 할 ‘배려(돌봄)의 문화’를 촉진할 전략들을 마련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230항).


둘째,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사랑이 정치적인 차원을 갖는 근거는 ‘공동체 차원의 행동’, 곧 ‘연대’에의 소명 때문이다. 사회는 “공동선을 증진하고, [자연과 사회] 환경을 수호하는 일을 수행하는” 수많은 시민사회 ‘단체의(공동체의) 활동’을 통해서도 풍요로워진다. 이 공동체 차원의 활동은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며, 공유의 정체성과 기억되고 전승될 수 있는 이야기와 함께 연대의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한다. 이 연대를 의식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의 공동 가정에서 함께 살고 있음을 자각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차원의 행동들이 공동선에 ‘헌신하는 사랑’을 곧 연대의 의식을 드러낼 때, ‘강렬한 영적 경험들’이 될 수 있다(231항 참조).


우리의 교회 생활을 성찰한다.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궁핍하고 곤궁한 이웃을 도와주라”고 한다. 그렇지만 “사회의 중개를 활용해 이웃의 삶을 개선하고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며” “이웃이 가난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하고자 애쓰는” 행위는 그 사랑의 계명에서 의도적으로 배제시킨다. 그런 일은 세상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에게는 대안의 관점과 예언자적이며 관상적인 삶을 드러낸 공동체의 활동이 있었다. 이 땅의 초대 교회의 생활이 그것이다.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낸 삶이기도 하며, 언제나 기억하고 전승할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며 거울과도 같다. 그 거울 앞에 섰을 때, 오늘의 우리 교회와 교회 생활은 어떤 모습일까? ‘사회·정치적 사랑’은 그 용어조차 우리 교회와 교우에게는 매우 낯설다.


“사람들은 내가 가난한 이에게 먹을 것을 주니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들이 먹을 것을 갖지 못 했느냐고? 물으니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릅니다”(헬더 카마라 대주교). [평화신문, 2016년 3월 20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5.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⑤ 그리스도교 영성, 성사의 표지들과 쉼의 기념


“성찬례(성체성사)는 그 자체로 우주적 사랑의 활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주적입니다(cosmic)! 성찬례가 어떤 비도시 교회의 초라한 제대 위에서 거행될 때조차도, 언제나 세상의 제대 위에서(세상이라는 제대 위에서) 거행되기 때문입니다”(236항).


교종은 인류가 직면한 생태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가 기여할 수 있는 영성으로서 회칙은 ‘관상’과 ‘성사’와 ‘주일’의 영성을 제안한다.


우리는 ‘관상’과 ‘성사’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 용어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관상’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느끼는 정도로, ‘성사’는 ‘성당’과 ‘주일’이라는 특정 공간과 시간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교회의 규정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아닐까? 교회는 사랑에 ‘개별 행동을 재촉하는 차원’과 ‘사회·정치적 차원’이 있다고 믿는다. 관상과 성사도 그와 유사하다.


교종은 “[우리의] 이상은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행동을 발견하기 위해 외부에서 내부에로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all things)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강조한다. 그 길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 교회는 ‘관상’의 삶을 제시한다. 참된 관상은 “우리 마음 안에서 하느님 은총이 활동하신다는 것을 보다 더 많이 느끼는 것을, 그리고 우리 자신 밖의 창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을 보다 더 잘 배우는 것을 심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뭇잎 하나에는, 산자락 하나에는, 이슬방울 하나에는, 한 사람의 사회적 약자의 얼굴에는 발견되어야 할 신비로운 의미가 있다”(233항).


그렇게 ‘우리 자신 밖의 창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연을 채택하셔서 초자연적 생명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에게 물질적 우주의 모든 창조물은 사람이 되신 말씀(the incarnate Word) 안에서 그 참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사들은(the Sacraments) 그 초자연적 생명의 전달을 위해 하느님께서 특별히 허가하신 길이다. 그러므로 “물과 기름과 불과 빛깔들”은 ‘성사적 표지’로서 그 상징적 힘과 함께 우리의 흠숭지례(성사)에서 통합된다. “축복하는 [사람의] 손은 하느님 사랑의 도구 가운데 하나이며, [이 세상에] 가까이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반영한 것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영성에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나 ‘자연과 물질의 배척’나 ‘육체의 부정’이 자리할 곳이 없다(235항).


창조된 그 모든 것이 최상의 상태로 들어 높여지는 때는 바로 성찬례(성체성사)에서다. 바로 하느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셨고 자신을 당신의 창조물을 위한 음식으로 내주셨기 때문이다. 첫째, [이제] 그분께서는 위에서 부터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그분을 모신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오신다. 둘째, 이제 우주 천지만물은 성찬례에 현존하시는 육화하신 아드님과 결합되어 하느님께 감사를 올린다. 셋째, 실제로 성찬례는 그 자체로 우주적 사랑의 활동이다. 넷째, 성찬례는 모든 창조를(삼라만상을) 껴안고 관통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결합시킨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환경에 관한 우리의 관심에 빛을 비추고 동기를 부여하는 원천이 되며, 모든 창조(삼라만상)의 청지기가 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다(236항).


그러면 우리는 주일을 어떻게 이해할까? 주일은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다. 그렇다고 형식적으로 미사에 참례해야 하는 날만도 아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주일의 의미는 훨씬 심오하다. 첫째, 주일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우리 자신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치유하는 날”이다. 둘째, 주일은 “주님 부활의 날로서 새 창조의 ‘첫 날’이며 창조된 모든 실재가 도달할 최종 변모에 대한 보증”의 날이다. 셋째, 주일은 ‘관상적인 휴식’의 날로서 ‘노동의 의미’를 완성하는 날이다. 넷째, 성찬례에 중심을 둔 이 관상적 휴식의 주일은 “다른 모든 것에 상처를 입혀 가면서까지 인간적 소득을 찾게 만드는 그 고삐 풀린 탐욕과 고립감을 막아준다. 다섯째, 노동을 금지하는 주일은 다른 존재들의 권리에 대해 새로운 감수성을 갖게 해준다. 이렇게 주일은 한 주 전체에 빛을 비추고, 우리에게 자연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더 큰 관심을 찾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237항)


우리 사회와 교회 생활을 성찰한다. 우리는 모든 창조물이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고 내 욕심대로 거칠게 다룬다. 그 모든 창조물 안에 이미 존재하는 ‘신비로운 의미’ 혹은 ‘하느님의 흔적(사랑과 정성)’을 찾아내려는 경외의 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교회 생활에서조차 관상의 기도와 성사생활의 의미는 축소되거나 형식적 규범의 준수쯤으로 환원되기 일쑤다. 주일의 삶은 ‘주일 미사 참례 의무’ 정도로 대치되거나, 그 의무 이행조차 힘들어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무자비한 ‘노동’의 짐을 강요하고 강요받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6년 3월 27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6.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⑥ 그리스도교 영성, ‘성삼위의 본체적 관계’와 ‘지구촌 차원의 연대’, ‘성가족’과 ‘공동의 가정’, ‘새 창조의 완성’과 ‘우리의 투신과 투쟁’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관대하게 헌신(투신)하라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물론] 우리의 여정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빛과 힘을 주십니다”(245항).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로 시작하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바로 이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본체적 관계’에 대한 신앙고백에 집중되어 있다.


회칙은 하느님께서 성삼위의 그 본체적 관계들이 지닌 마침 없는 그 ‘활력’을 이 우주의 천지만물 사이의 무궁무진한 관계들 속에 새겨 넣으셨다고 고백한다(240항 참조). 이는 하느님을 (혹은 종교를) 순수한 관념의 영역, 세상 및 역사와 무관한 영역, 기껏해야 하위문화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려는(62항 참조) 태도에 대해서 교회의 신앙을 근거로 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삼위일체의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에는 여전히 ‘모호함’이 남아 있다. 교종 자신도 보이지 않는 분께 대한 이 신뢰가 마치 “찾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물속 깊은 곳에 잠수하는 것”과 같으며, 자신도 “그런 경험을 자주한다”고 고백한다(「복음의 기쁨」 280항). 그리고 회칙은 그 모호함이 우리 “인간의 눈길이 한쪽으로” 치우치고, “어두워”지고 “취약”해진 탓으로 본다(239항 참조).


보좌 사제로 사목할 때, 어린이에게 했던 강론 가운데 아직 잊지 않는 내용이 있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하늘이 잔뜩 흐렸다. 낮에도 그랬고 늦은 오후에도 그랬다. 그래서 온종일 날씨가 흐리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실재’가 그랬을까? 아니었다. 밖과 안 그 사이에 있는 유리로 된 창을 열고 ‘하늘’을 보았더니 너무나 맑았다. ‘하늘’이라는 ‘실재’(reality)가 흐린 것이 아니라, ‘유리로 된 창’이라는 관찰의 도구 곧 ‘관념’(idea)이 흐렸던 것이다.


그 모호함을 걷어내는 길로서 교종은 ‘관상’과 함께 ‘외출’을 권한다. “하느님과의 친교, 다른 사람과 친교, 모든 창조물과의 친교”를 위해 “자신만의 울타리”에서 나와 “우주 전체에 걸쳐 엮여 있는 무수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탈출’(exodus)을 말이다. 그 탈출은 맹목적 방황이 아니라, ‘성장’과 ‘성숙’과 ‘성화’의 거룩한 동행의 여정이다. 그 동행의 여정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구촌 차원의 연대”라는 영성이 필요하다(240항).


이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는 “모든 삼라만상의 여왕이며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지혜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다. 예수님을 돌보셨고, 그분의 죽음을 함께 하셨고, 들어 높여져 그분과 함께 계신 마리아께서는 이제 모든 사물의 의미를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241항 참조).


마지막으로 회칙은 ‘나자렛의 성가족’을 돌보신, “자신의 노동과 관대함으로 마리아와 예수님을 돌보고 보호하신”, 특히 “부당한 자의 폭력으로부터 그들을 구해 내신” 성 요셉을 소개한다. 교종은 자신의 첫 공식 외부 행사로서 람페두사를 방문하여 참회의 미사를 봉헌했을 때, 무수한 난민의 죽음을 우연한 불행의 ‘사고’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헤로데’의 불의한 폭력과 우리의 ‘무관심’이 초래한 ‘사건’으로 보았음을 연상시킨다. 회칙은 요셉처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진정으로 강한 사람”(242항)이 되자고 호소한다(242항 참조).


우리는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다. “관대한 헌신(generous commitment, 투신)을 불러일으키시고, 당신께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요청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여정을(way)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빛과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생명의 주님께서 언제나 이 세상 한가운데에 현존”하시며,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의 대지에 확실하게 결합시키셨기 때문이며, 그분의 사랑이 끊임없이 우리를 재촉해서 앞으로 나아갈 새 길들을 찾게 해주시기” 때문이다(245항).


그러니 그동안 우리의 무모함으로 공동 가정인 이 행성에 가한 자멸적 상처가 심각하여 가히 ‘재앙’의 수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우리 희망의 기쁨을 빼앗기지 말자. 우리의 공동 가정을 돌보려는 우리의 투신과 투쟁은 “천상의 잔치”에 입고 갈 예복임을 기쁘게 받아들이자(244항 참조).


오, 주님!

당신의 힘과 빛으로 저희를 붙잡아 주소서.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가 모든 생명을 보호하게 하시고.

저희가 더 나은 세상을 준비하게 하소서.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가 정의의 나라, 평화의 나라, 사랑의 나라, 아름다움의 나라,

다가오고 있는 당신의 나라를 준비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교종의 ‘삼라만상과 하나 되어 바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에서) [평화신문, 2016년 4월 3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7·끝. 사회회칙 「찬미받으소서」


피조물들의 절규에 응답하고 행동하라


길을 나서며…


우연히 어느 방송인의 이야기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호소, ‘쉼’의 영성을 들었다. 그는 ‘휴식’이라는 한자어 ‘休息’을 풀어주었다. ‘休’는 나무 옆의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며, ‘息’은 ‘나’와 ‘마음’의 관계 곧 ‘나’의 ‘마음’을 살피는 것, 혹은 ‘나’를 ‘마음’으로 헤아려 살피는 것을 형상화한 문자라는 설명이었다. 개인으로서든 공동체들로서든 우리에게는 그 ‘휴식’이 시급히 그리고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으로 들었으며, 그 짧은 이야기가 마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요약하는 듯했다.


회칙은 ‘자기 파멸’과 ‘상호 파멸’의 무모함을 멈추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잠시 멈춰서 ‘우리의 공동 가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을 맑은 정신으로 바라보자고 권한다. 그러면 하늘과 땅과 물과 벗에게서 들려오는 절규를 생생하게 들을 것이라고 한다. 곳곳에 ‘균열이 난 상처’를 또렷하게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회칙은 기후 변화와 대기 오염의 두려움, 자원(물)의 빈곤과 뭇 생명의 절박함, 오물 덩어리로 변하는 이 행성의 비참함에 공감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와 똑같이 하느님을 닮은 이웃이 얼마나 처절하게 살고 있으며, 공동체가 얼마나 황폐하게 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지구가 얼마나 심각한 불균형으로 휘청거리고 있는지를 깨닫고 행동(동행)하는 여정에 나서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회칙 제1장 참조). 이를 회칙은 ‘생태의 전환’의 길로 나서는 것이라 밝힌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회칙은 그 근본적 원인을 ‘인간’에게서 특히 ‘근대’의 인간관과 세계관에서 찾는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제자리 곧 이 세상에서의 ‘올바른 자리’에서 벗어난 근대의 ‘주체’ 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거기에 인간의 ‘창의력’이 더하여 ‘과학’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지만, 그 오ㆍ남용과 함께 ‘경제’ 및 ‘금융’이 결탁하여 ‘진보의 신화’라는 ‘거짓’과 ‘무차별적이고 획일적인 패러다임’이 강고하게 구축되었다고 진단한다. ‘과도한’ 혹은 ‘폭압적 인간중심주의’와 ‘실천적 상대주의’(제3장 참조)는 왜곡된 개인주의와 공리주의와 실용주의의 가면을 쓰고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새로운 사태’를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다.


교종은, 회칙에서 분명하게 밝히듯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답을 주려 하지 않는다. 다만 ‘생태 재앙’이 제기하는 도전의 시급성과 광대함과 심각함을 자각한다면, 그에 걸맞은 응전과 지향이 필요하며(제4장), 그 길로서 모든 이의 정직하고 진실한 ‘대화의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대화의 길에 교회도 나서야 한다고 호소한다(제5장). 참된 평화의 길을 구축하는 데 따라야 할 원칙들을 교종은 이미 자신의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밝혔다. 물론 이 원칙들은 특정 이념이 아니라 복음적 근거를 갖는다. 첫째,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 이는 생태 전환의 과정 모색에 인내를 갖고 대화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일치는 갈등을 압도한다. 이는 갈등 요소(차이)를 생태 전환의 과정에 연결시키는 것을 요구한다. 셋째, 실재들은 관념들보다 위대하다. 이는 생태 전환의 과정에 개인으로서든 공동체로서든 구체적인 행동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전체가 부분보다 위대하다. 이는 생태 전환을 위한 투신에 있어 다양성과 함께 그 조화의 중요함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다.


회칙은 인류의 생태 전환에 기여하는 것을 ‘사명’으로 밝히면서, 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인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가장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공의회의 선언을 충실히 따른다. 이를 위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는 건전한 영성과 교육이 요구되는데, 그 영성과 교육의 토대를 제2장 창조의 복음에서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강조한다. 그 만남은 ‘관상’의 태도를 불러올 것이다(제6장).


여기서 소개하고 싶은 ‘그림’ 하나가 있다. 지난해 12월 8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년을 기념하며 교종은 1년을 ‘자비의 특별희년’으로 보내자고 우리를 초대하였다. 이때 모습을 드러낸 ‘그림’에는 예수님의 어깨에 얹혀 있는 우리의 얼굴과 예수님의 얼굴은 겹쳐 있는데, 그 두 얼굴에는 눈이 세 개밖에 없다. 한 눈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의 ‘공동의 눈’이다. ‘관상’이란 이 ‘공동의 눈’으로 ‘나’만이 아니라 천지 만물을 헤아리는 태도다.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관상’은 ‘생태 전환’에 대한 투신을 불러온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투신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사목 목표를 ‘쇄신과 정화’, ‘복음화’ 그리고 ‘대화’라고 선언했다. 교종은 복음과 보편 교회의 공의회 가르침에 따라 그 ‘사목’에 헌신한다. 말씀의 봉사자로서 교종이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 교회의 쇄신을 가르쳤다면,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가장 시급한 ‘복음화’의 과제로서 ‘생태의 전환’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쇄신과 복음화 사명 수행을 위해 거침없이 대화의 길로 나서고 있다. “당면한 ‘실재’를 자세히 그리고 완전히 분석하는 것이 교종의 임무는 아니지만, 저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 시대 정신을 식별하고 확인하며, 선한 정신의 움직임을 선택하고 악한 정신의 움직임을 거부하기를 … 권고합니다”(「복음의 기쁨」 51항).


* 이번 호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을 마칩니다. 해설해 주신 박동호 신부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10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