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1) 그들은 왜 투표장에 가지 않았나


정치도 대중매체도 공동선 지향해야


사람들은 저마다의 잣대와 이익에 기초해 사회 현안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사회교리'라는 분명한 지침이 있다. 교회는 이 지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사회교리 주간(4~10일)을 제정했다.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박동호(신정동본당 주임) 신부가 일상 속의 사회교리를 풀어내는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를 연재한다.


얼마 전 치러진 10.26 재보궐선거 투표율을 갖고 의견이 분분했다. 어느 쪽에서는 투표율이 높으면 유리하고, 다른 쪽에서는 낮을수록 유리하다는 것이다. 서울과 전국 11개 지방자치단체장 재보궐선거를 포함한 평균 투표율은 45.9%였다. 선거 불참자 비율이 54.1%인 셈이다.


이런 결과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투표율과 관련해 다음의 세 가지를 살펴보자. 하나, 투표에 의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경우. 둘, 외적 환경으로 투표에 참여하기 어려운 경우. 셋, 정치에 관한 무관심 혹은 혐오.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이유


오늘 이야기할 대목은 세 번째 경우다. 투표 불참자 54.1% 가운데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 심지어 혐오로 투표하지 않은 이들이 많다면 왜 그런 현상이 생겼을까? 물론 그 탓을 유권자에게 돌릴 수 있겠지만 밖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즉 정치적 부패와 정당의 역할ㆍ임무 부재가 국민의 무관심과 불신, 더 나아가 혐오까지 불러온 것은 아닐까? 교회의 여러 가르침에 입각해 이 문제를 살펴보자.


▶ 간추린 사회교리 411항, 정치적 대표성의 도덕적 요소


민주주의제도의 심각한 결함 가운데 하나는 도덕원칙과 사회정의 규범을 한꺼번에 짓밟는 정치적 부패다. 정치적 부패는 공공기관들에 대한 불신을 증대시키고,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 불만을 조장한다.


더 나아가 부패는 대의기관(국회나 각종 대의원회)들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왜곡한다. 대의기관은 의뢰인의 청탁과 국가 공무원 사이에 정치적 거래가 이뤄지는 무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 선택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의 편협한 목표에 부합하는 정치적 선택이 이뤄진다.


▶ 간추린 사회교리 413항(정치 참여의 도구)


정당들은 국민의 폭넓은 참여를 촉진하고, 공공의 책임이 모든 이에게 미칠 수 있게 할 임무가 있다. 정당들은 시민의 열망을 간파하고 그 열망이 공동선을 지향하도록 하며, 국민이 정치적 선택을 내리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실질적 가능성을 제공하도록 요구받는다.


진실 왜곡하는 대중매체 경계해야


10.26 재보궐선거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이른바 대중매체 역할이다. 전통적 대중매체인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에 의한 정보전달과 새로운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 SNS(사회관계망시스템)를 통한 정보확산 현상을 살펴보자.


선거 때만 되면 등장하는 용어가 '네거티브 전략', '흑색선전', '검증', '색깔론' 따위의 말들이다. 물론 처음에는 정책 대결을 펼쳐서 국민 판단에 맡기겠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후보의 정책이나 비전은 찾아보기 어렵다. 후보에 대해서는 대중매체들을 통해 알려진다. 사람들 이목을 끄는 정보들은 대부분 검증의 심판대에 올려진 후보자의 이른바 흠집이나 의혹들이다. 여기서 그 경로가 어떻든 대중매체와 정보에 대해 성찰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다.


▶ 가톨릭교회 교리서 2496항


사회적 전달 수단(특히 대중매체)은 그 이용자들에게 일종의 수동성을 길러주거나, 그들이 시청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력이 부족한 소비자가 되게 할 수도 있다. 이용자들은 불성실한 영향력에 더 쉽게 저항하기 위해서, 식견을 갖추고 정확한 의식을 다져가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 간추린 사회교리 414항(정보와 민주주의)


정보는 민주적 참여를 위한 주요한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가운데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수 사람이나 집단이 조종하는 뉴스 미디어 현상이다. 여기에 정치활동과 자본 정보기관의 유착이 더해지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미친다.


▶ 가톨릭교회 교리서 2494항(제8계명,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대중매체를 통한 정보전달은 공동선을 위한 것이다. 사회는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 권리의 올바른 행사는 커뮤니케이션이 그 내용에서 언제나 진실해야 하고, 정의와 사랑을 지키며 완전해야 한다는 것이 요구된다.


▶ 가톨릭교회 교리서 2499항


진실을 왜곡하고, 대중매체를 통해 여론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며 자신들의 절대적 지배력을 공고히 하겠다고 꿈꾸는 전체주의 국가들의 고질적인 악습을 도덕은 고발해야 한다.


[평화신문, 2011년 12월 18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 사람 나고 돈 났다


비정규직 양산, 인간 존엄성 훼손 위험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로 11월 21일 IMF(국제통화기금-단기국제금융기구)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그해 12월 5일 1차로 55.6억 달러를 차입한 이후 99년 5월 20일까지 모두 10차에 걸쳐 195억 달러를 차입했다.


IMF관리체제는 '고금리'와 '재정긴축'을 특징으로 한다. IMF가 우리나라에 요구한 개혁정책 또한 고금리와 긴축, 부실한 금융기관 및 기업 퇴출, 시장의 완전 개방 등으로 요약된다.


우리나라에서는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리해고가 자유로워지자 비정규직이 많이 늘어났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8월 기준으로 임금노동자 중 비정규직 노동자는 599만 5000명으로 34.2%이다. 실제 비율은 더 높다는 견해도 있다. 지난 3월에 노동사회연구소가 발표한 자료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831만 명으로 전체 임금노동자(1706만 명)의 48.7%에 이른다.


비정규직이면 어떠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삶의 질이 현저하게 악화되며 노동(사람)이 자본(돈)의 노예가 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심각하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통계청 자료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임금, 노동조건, 고용환경, 복지에서 정규직 노동자와 차별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모든 현상의 자본주의를 절대 가치로 세우려는 혹은 받아들이게 하려는 힘이 도사리고 있다. 과연 옳은 일일까? 답은 아니다. 경제활동은 인간의 전인적 삶의 한 부분이며, 자본주의는 이 경제활동을 위해 사람이 만든 여러 모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 비정규직노동자는 임금과 복지 등 모든 분야에서 차별 받고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사진은 비정규직 철폐 관련 집회 장면.


비정규직과 무제한 자유 자본주의


비정규직 양산은 무제한 자유를 꾀하는 자본주의 결과다. 교회는 자본주의에 대해 이중적 판단을 내린다. 경제활동에서 개인의 책임과 자유로운 창의력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그 긍정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자본주의 경제활동의 자유는 결코 무제한이 아니며 언제나 인간 자유에 기여해야 한다는 조건에 붙는다.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정당한 정치구조(국제공동체, 국가, 지방정부) 안에서 규칙(법률)과 도덕으로 제한해야 한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는 인간과 사회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도구는 유용할 수도 위험할 수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과 노동(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교회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노동이 자본보다 우위에 있다고 분명히 밝힌다.


생산수단의 총합인 자본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지만, 노동은 생산 과정에서 한순간도 없어서는 안 될 주요 동인(動因)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노동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노동을 자본에 예속시키려는 것으로, 인간을 목적이 아닌 도구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간추린 사회교리」 277항, 335항 참조)


비정규직과 기업이윤의 독점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비정규직 양산은 인간을 자본확충 도구로 삼아 기업 이윤을 독점하려는 태도의 결과다. 기업의 이윤은 자본과 노동의 협력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당연히 어느 한 편이 그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물론 기업 이윤은 기업 운영 목표가 된다. 그리고 기업이 이윤을 냈다는 것은 생산수단과 방법을 적합하게 사용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업이 이윤을 남기면서도 그 이윤을 공정하게 분배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를 들어 연말에 대기업이 사상 최대 이익을 냈다고 발표하면서 그 이윤을 내기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은 노동자를 해고한다든지, 생산설비를 이전함으로써 노동자 삶을 벼랑으로 내몬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혹은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거나 고용하더라도 비정규직으로 고용함으로써 전체 사회 발전을 외면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런 일은 기업이 사회정의 의무를 회피하고 노동자 권리를 침해하면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회문화체제에서 일어난다.(「간추린 사회교리」 340항) 교회는 기업의 이윤추구가 정당하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지향하는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더 큰 목표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수단(기업의 경제활동)과 목적(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 증진)이 전도되면 시장경제는 비인간적이며 소외를 낳는 제도로 타락해 걷잡을 수 없는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간추린 사회교리」 348항)


비정규직과 국가의 임무


비인간적 삶으로 내몰 위험이 높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사정 협력이 필요하다. 자율에 따른 노동계약이 확보되기 위해서는 당사자 사이의 관계가 공평해야 한다. 노사 사이의 심각한 힘의 불균형이 존재할 때 이를 조정하고 균형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국가 역할이다.


하지만 노사 자율성을 내세워 국가 가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를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경제문제에서 국가의 근본 의무는 경제문제를 조절하기 위한 적절한 법적 틀(규제)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는 어느 한 쪽(사용자ㆍ경영자ㆍ자본가)이 다른 한쪽(노동자)을 실질적 종속 상태로 내몰지 못하게 하고, 쌍방 간의 일정한 평등을 갖춤으로써 경제자유의 기본조건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무엇보다도 자유시장 환경에서 경제활동은 제도와 법, 정치공백 상태에서는 수행될 수 없다. 경제활동은 언제나 올바른 사회와 정치질서의 통제(규제)를 받아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51항 참조)


[평화신문, 2012년 1월 1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 강론, 건전한 논란(?)을 기대하며 (상)


하느님과 백성의 거룩한 소통의 장


일선 사목 현장에 있는 사제들에게 사목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어렵습니까?"하고 물으면 사제 대부분이 "강론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답할 것이다. 물론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강론에 대해 교우들이 보이는 반응도 천차만별이다. 사제의 강론에 실망하는 교우도 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이유부터 "강론 시간에 강론은 하지 않고 정치적인 발언을 해서 싫다"는 대답까지 다양하다.


강론을 듣기 싫어서 다른 본당을 찾는다거나 성당에 가지 않는다는 교우, 강론하는 도중에 격렬하게 항의하거나 강론 시간에 주보를 정독하는 교우도 있다. 심지어 묵주기도를 바치는 교우도 있다.


그렇다면 강론이 왜 서로에게 힘들며 같은 강론에 대한 교우들 반응도 천차만별일까? 이는 '강론'이 갖는 성격 때문이다.


강론은 말씀 선포의 연장


가톨릭교회 교리서에는 사제 강론이 '말씀 선포의 연장'(1154항)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은 '전례주년의 흐름을 통하여 거룩한 기록에 따라 신앙의 신비들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규범들을 해설'(52항)하는 것으로 성격을 밝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을 살펴보면 강론과 관련된 소임을 가장 먼저 다룸으로써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동시에 현대 세계의 상황에서 강론으로 겪는 어려움의 배경을 찾기도 한다. 교령은 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제들은 주님께 받은 복음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생략).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전수하고 교리를 설명하거나, 당대의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언제나 자신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회개와 성덕으로 부르는 것이 사제들의 소임이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상황에서 사제들의 설교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적절하게 움직이려면 하느님 말씀을 일반적이거나 추상적으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해야 한다.


강론은 말씀의 선포인가, 주장을 펼치는 장인가?


이런 교회 가르침을 바탕으로 '강론'과 관련한 논란(?)을 몇 가지로 정리해 성찰하자.


사제의 강론은 '말씀 선포의 연장'이다. 미사는 사적 신심 행위가 아니다.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공적이고 거룩한 제사이다.


이 공적 제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해 뜨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일을 계속할 뿐이다. 사제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교회 이름으로 이 제사를 거행하며 하느님 백성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제물로 봉헌함으로써 세상과 이웃, 하느님과의 일치에 참여한다.


이 미사 가운데 '말씀 전례'가 있는데 이 때 하느님의 백성은 '거룩한 기록' 곧 성경(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냥 독서가 아니라 선포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온 회중이 한 자리에서 듣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제도 교우도 그런대로 이견이 없다.


그러나 강론을 '말씀 선포의 연장'이라고 볼 것인지, 아니면 '사제의 발언' 정도로 볼 것인지에 따라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말씀 선포의 연장'이라고 믿는다면 사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막중한 소임을 수행하는 만큼 마땅히 열성을 다해 준비하고 기도해야 한다.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그 소임 앞에서 두려워했던 그 두려움으로.


동시에 교우들도 강론이 마음에 들던 들지 않던 그 강론에 마음과 귀를 열고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물론 거짓 예언자도 있었고 예언자의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은 지도자와 백성도 있었다.


강론, 신앙의 신비 해설


강론을 사제도 교우도 '말씀 선포의 연장'이 아니라 '사제 개인의 발언' 정도로 여긴다면 사제는 아예 강론을 하지도 말아야겠고 교우도 강론을 들을 이유가 없다.


미사의 말씀 전례가 사제 개인의 혹은 교우 개인의 사사로운 주장의 각축장이 아니라 하느님과 백성 공동체의 거룩한 소통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론의 소재 및 주제 선정 문제가 발생한다. 평소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인간관을 펼치거나 혹은 그에 맞춰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신비들과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을 해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제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변함없으시고, 무한하시고, 절대적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건 부유한 사람이건 똑같이 비를 내리고 햇볕을 비추듯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라는 줄거리의 강론을 했다고 하자.


이를 받아들이는 회중 사이에는 그다지 논란이 일지 않을 것이다. 있다면 아마 "너무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다" 혹은 처지에 따라서 "위로가 되었다" 정도쯤일 것이다.


이렇게 신앙의 신비를 해설하는 데에서는 논란이 적은데 그것은 신앙의 신비를 완전하게 해설하고 온전하게 이해해서라기보다 '신앙의 신비' 그 자체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누군들 신앙의 신비를 완전하게 인간의 언어와 체험으로 해설하겠는가? 누군들 인간의 이성으로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평화신문, 2012년 1월 8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사회교리] (4) 강론, 건전한 논란(?)을 기대하며 (중)


현실문제, 그리스도적 시각으로 해석


- 사제가 강론대에서 전하는 그리스도인 생활규범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복음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해설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삽화=임선형


지난 호에서 사제는 강론시간에 신앙의 신비와 그리스도인 생활규범을 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앙의 신비를 해설하는 경우에는 논란이 적다. 신앙의 신비를 완전하게 해설하고 온전하게 이해해서라기보다 신앙의 신비 자체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누군들 신앙의 신비를 이성과 언어와 체험으로 온전하게 해설하고 또 이해할 수 있겠는가.


강론, 그리스도인 생활규범 해설


논란은 강론 내용이 그리스도인 생활규범에 대한 해설일 때 벌어진다. 생활규범에 대한 이해가 사람마다, 시대에 따라, 그리고 환경에 따라 저마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신앙과 생활규범을 지나치게 좁은 의미로 이해하면 그리스도인 생활규범은 단순한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는 정도에 머문다. 그것을 넓은 의미로 접근하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환경ㆍ제도ㆍ세계질서와 평화 같은 구체적이면서 현실적 영역까지 확대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을 지나치게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미사 참례와 기도 및 고해성사 등 본당 테두리 안에서의 신심활동 및 봉사활동 정도다. 몇 가지 규칙과 규범을 성실히 수행하면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이른바 냉담 중이라고 한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신앙과 생활규범을 정치ㆍ경제ㆍ사회 등의 영역으로 확장해 해석, 해설하는 것을 신자들은 낯설고 불편해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십계명 가운데 5계명은 '살인하지 마라'인데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회교리는 이 대목에서 '평화'와 '전쟁'에 대해 설명한다. 전쟁 문제에서는 군 복무에 관한 것도 다루는데, 그 가운데 이른바 '대체복무제'에 대해서도 말한다. 교회는 양심에 따라 무력사용을 거부하는 행위를 적극적 평화 수호 및 평화 증진 행위로 인정한다. 또 국가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대체복무 등으로 공동체에 봉사할 기회를 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친다.


평화에 대한 설명에는 민감하면서도 분열(?)까지 일으킬만한 대목이 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 부재' 혹은 '적대 세력과의 균형 유지'로 전락될 수 없다고 말한다. 또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결실이라 밝힌다.


더 나아가 군비경쟁이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악의 길이라고 단호하게 비판한다. 사제가 강론대에서 이에 근거해 해군기지건설과 공군 차세대 전투기 도입 등의 군비증강 정책이 교회 가르침에 반(反)한다고 비판하면 이는 말씀 선포의 연장인가, 아니면 사제 개인의 발언인가.


필자 경험으로는 많은 교우들이 그러한 내용의 교리가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또 그런 이야기를 미사시간에 해도 되느냐고, 혹은 한쪽 편만 드는 발언으로 공동체를 분열시킨다며 불편해한다.


강론,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당대의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제들 소임이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4항 참조)


위의 조항에서 말하는 당대 문제란 당연히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다. 문제 원인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고, 사회 구성원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문제 해결의 필요성이 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연히 교회와 하느님 백성이 처한 사회 문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사람들을 힘겹게 하는 가장 큰 문제는 경제문제일 것이다. 99%의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한가운데 살기에 이 문제를 초월할 수가 없다. 따라서 경제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사제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말씀을 놓고 강론을 하면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설명하였다고 하자.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은 자본이 축적되면 될수록 노동의 소외 혹은 노동의 피폐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자본주의 혹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이들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내용이다.


교회도 경제원리로서의 자본주의가 갖는 한계를 밝히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자본이 노동을 예속시켜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는 공의회 「사목헌장」과 「가톨릭교회 교리서」, 「간추린 사회교리」에 담긴 일관된 가르침이다.


사제가 이런 강론을 했다고 하자.


"국가의 법률적 구조로 통제하지 않는 이런 무한 자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게다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공동선을 위해 오늘의 경제 환경을 개선하고, 정당성을 갖는 국가와 같은 정치공동체는 경제활동에 적절한 통제와 규제를 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당대의 문제를 복음의 빛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세상 문제에 대한 쓸데없는 참견으로 봐야 하는가.


안타깝게도 교회가 경제활동에 있어서 국가 역할(「사목헌장」 65항)을 가르치고 있음을 아는 교우들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제가 경제문제에 대해 전문가도 아니면서 나선다고 말한다. 경제문제는 경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


[평화신문, 2012년 1월 15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5) 강론, 건전한 논란(?)을 기대하며<하>

구체적 생활에 적용해 복음의 진리 설명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일반적으로나 추상적으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하여야 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4항」 참조).


▲ 인간은 누구나 구체적 생활환경 속에 살고 있고 사제의 강론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구체적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신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삽화=임선형


#강론, 구체적 생활환경에서 복음의 진리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 생활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진리는 관념에 불과하다. 이는 물과 그릇에 비유할 수 있다. 물이 없다면 그릇은 빈 그릇일 뿐이다. 또 그릇이 없으면 어디에 물을 담겠는가.

진리! 그중에도 영원한 진리는 마땅히 현실세계에서 사람과 공동체와 만물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겪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진리는 불완전한 것이다. 불완전한 것을 영원한 진리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보편성과 타당성을 갖춰야 한다. 구체적 생활환경에서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공간적 보편성이 결여된 것이다.

예를 들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가톨릭교회교리서」는 평화를 '정의의 작품이며 사랑의 열매'(「사목헌장」 78항 참조)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와 사랑, 정의는 일반적이지만 추상적인 용어다.

철학과 법에서는 정의를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때 있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있어야 할 것은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무형의 것으로는 자유와 권리 같은 것이 속하며 유형의 것으로는 재산과 소득 같은 것을 꼽을 수 있다.

사제가 "정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하는 내용의 강론을 했다고 하자. 그것은 지나치게 일반적이며 추상적이다.

그럼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론을 살펴보자.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노동의 권리, 이런 것들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실현된 상태가 곧 정의로운 것이며 자유와 권리가 없으면 그 사회는 불의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입니까? 불의한 사회입니까? 만일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면 평화는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공공의 안녕을 명분으로 혹은 평화를 명분으로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요? 그것은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진리를 구체적 생활환경에 적용해 설명한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이며 추상적으로 설명한 것인가?


#군비경쟁과 세계화는 구체적 생활환경에 속하는가?

우리 일상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을 예로 들어보자. 제주도 강정에 국민의 군대 해군은 새로운 기지 건설을 위한 기초 공사에 들어갔다. 육군은 대형공격헬기(AH-X)를 해군은 해상 작전헬기를, 공군은 8조 3000억 원을 들여 5세대 전투기 60대를 도입할 계획을 세웠다. 물론 여러 관점에서 이런 사업을 바라볼 것이며 전문가들 견해도 다양할 것이다.

우리 교회도 평화에 관한 가르침에서 군비경쟁을 다룬다. 평화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용어라면 군비경쟁은 구체적이며 직간접으로 보통 사람들의 생활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할 수 있다.

군비경쟁에 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힌다. "군비경쟁으로 전쟁의 원인들이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증대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거듭 선언하여야 한다. 군비경쟁은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우리의 분쟁들을 더욱 인간다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노력을 거부한다면 이 악의 길에서 우리는 어디로 끌려갈지 모른다"(81항 참조).

사제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나타나 평화를 비는 대목을 말하며 「사목헌장」의 가르침을 인용했다고 하자. 사제의 강론은 평화에 대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해설인가? 우리 공동체의 구체적 생활환경에 적용한 설명인가?

교우들은 강론이 구체적 생활환경에 맞춰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데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런데 이 구체적 생활환경에 대한 이해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자신과 가족 혹은 가까운 생활영역만을 생각한다. 어떤 이는 지구 저편의 처지도 자신의 생활환경의 범주에 포함한다.

앞의 생각도 부정할 수 없지만 나중의 생각도 무시할 수 없다. 세계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오늘날 자신과 가까운 생활영역에서 체험하는 것들의 배경을 따져 들어가면 그 영역은 확장될 수밖에 없다.

가정에서 불화가 있었다고 치자. 이는 개인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시야를 넓히면 경제적 곤란과 실직, 경제구조의 변화, 세계경제 흐름 따위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정의 불화를 극복하려면 당사자의 성격과 태도 변화뿐만 아니라 그 가정이 놓인 사회와 국가, 세계 환경의 변화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사제의 강론은 구체적 생활환경에 적용해 하느님 말씀을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강론에 대한 건전한(?) 논란은 그만큼 하느님 말씀에 대한 성찰과 세상에 대한 사랑에 관심이 많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제에게도 교우에게도 강론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깊은 성찰이기를 소망한다.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 재화 사용의 보편적 목적 (1) 내 돈 내 맘대로 쓰는데 뭐가 잘못됐나?


재화의 노예가 되시겠습니까


자신의 전 재산을 ○○학교 장학기금으로 혹은 ○○복지재단에 기부했다는 독지가들 소식을 언론을 통해 종종 접할 수 있다.


우리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에 온기를 전하는 소식이 아닐까 한다. 게다가 기부자가 평생 근검절약하며 모은 돈을 쾌척하거나 고인 이름으로 그 유족이 기부했다면 감동과 부끄러움은 배가 된다.


여기서 '부끄럽다'는 감정은 재물의 소유에만 관심을 두고 그 사용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마음에서 기인한다. 또 이러한 소식에 감동을 받는 이유는 비록 사람이 본성적으로 이기적 존재일지라도 마음 한편에는 이타적 의지가 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 처지에서 기부 액수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수백억 원에 이르기도 한다. 때로는 진정성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재단을 설립해 출연함으로써 편법 증여라는 의혹을 사는 경우도 있고, 세금 감면을 위한 꼼수라는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다.


사적 소유권, 시민자유의 한 조건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우리에게 낯선,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다지 낯설 것도 없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에 관해 살펴보자.


우선 너무 익숙한 사유재산권에 대해 알아보자. 사유재산권은 과연 절대적이며 무제한일까? 교회는 이를 인간 자유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사유재산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서, 지성을 사용하여 재화를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며, 사유재산과 재화에 대한 다른 형태의 사적 소유권은 개인과 가정의 자립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을 각 개인에게 제공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 자유의 신장으로 여겨야 한다(…) 이는 책임을 이행하도록 자극을 줌으로 시민자유의 한 조건을 이룬다."(「간추린 사회교리」 176항)


이는 교회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경제학 분야에서도 다루는 관점이다. 교회는 또한 사유재산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이득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다양한 형태의 재산 소유권을 행사하는 주체에게는 더 나은 생활 조건, 안정된 미래, 무수한 선택의 기회와 같은 일련의 객관적 이득이 주어진다."(「간추린 사회교리」 181항)


이처럼 사유재산권은 자유의 영역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소유권을 행사하는 주체에게 객관적 이득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재화의 사적소유 권리를 절대시하려는 경향에 기운다. 재화가 더 나은 생활, 안정된 미래, 선택의 기회와 같은 그런 객관적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런 재화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사유재산권이 시민자유의 한 조건이라고 절대시하면 가혹한 예속화를 가져온다. 어디까지나 재화는 삶의 조건일 뿐 목적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재화의 유혹과 우상


더 나은 생활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한 가정당 1.23명으로 세계 222개국 중 217위다. 이처럼 초저출산 현상과 결혼을 늦추거나 하지 않으려는 현상의 원인을 재화의 소유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결혼과 자녀로 인해 오는 재화 부족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닐까.


재화 편중으로 생기는 양극화 현상은 교육ㆍ경제ㆍ정치ㆍ문화ㆍ종교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나타난다. 경제적 격차로 생기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미래에 수많은 이들이 불안해한다. 많은 젊은이가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느끼며 절망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갈망에도 이른바 빈곤의 늪은 깊어져 간다. 그리고 빈부격차라는 불균형은 더하면 더했지 개선되지 않는다. 평화를 위협하는 심각한 불균형 원인은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수렁에 깊숙이 빠져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개인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같은 용어로 포장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관해 의구심을 갖고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고 시민자유와 권리라 여기는 이 사유재산권이 과연 '절대적이며 무제한인가' 살펴봐야 한다. 사유재산권을 절대시함으로써 치명적 부작용은 없는가, 치명적 부작용이 있다면 사람을 살리는 조치가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


재화로 인한 치명적 부작용을 교회는 조금 섬뜩하지만 '재화에 대한 민족ㆍ사회ㆍ사람의 가혹한 예속화'라고 표현한다. 사람이 재화의 노예가 됨으로써 자아를 상실하고 책임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재화는 유혹을 일으키는 기만적 약속만 가져다줄 수도 있다. 재산의 역할을 지나치게 절대시하는 민족이나 사회는 결국 가장 가혹한 예속화를 겪기 마련이다(…) 분별없이 자기가 가진 재화를 우상시하는 사람은 그 재화에 예속되고 그 노예가 되어 버린다."(「간추린 사회교리」 181항)


[평화신문, 2012년 2월 5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 재화 사용의 보편적 목적 (2) 사유재산권은 절대적이며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 인정한 적 없다


내 것, 나만의 것 아니다


사유 재산권에 앞서는 공동사용권


과연 재화의 소유권은 절대적인가? 어느 지역이 재개발 예정지구나 신도시 개발지역으로 묶여 개발이 제한됐다고 상상해보자. 이러한 상황에서 분쟁과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유로 그 지역에 토지와 주택을 소유한 사람의 권리(사유 재산권)와 이해관계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유 재산권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주거환경 개선 혹은 공익을 위해, 혹은 공동선을 위해 개인 소유권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공동 사용권에 의한 사유 재산권의 예속'이라고 한다. 교회는 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사유 재산권을 절대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 (…) 사유 재산권은 재화가 만민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공동 사용권에 예속된다."(「간추린 사회교리」 177항)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은 재화는 만민을 위한 것이라는 점과 공동 사용권이다. 이를 '재화(사용)의 보편적 목적'이라고 한다.


비록 나의 노동과 지성을 통해 특정 재화를 소유하게 됐지만 그 재화는 반드시 사회적 기능을 가진다. 엄밀히 말해 분업과 협업을 통하지 않고는 내 것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러니 그 재화를 어찌 나만의 것이라 주장할 수 있겠는가? 사회의 수많은 요소가 그 재화를 있게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간추린 사회교리」를 살펴보면 "인간은 합법적으로 소유한 외적 사물을 자기 사유물만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 하며 그러한 의식에서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 개인들은 자기가 가진 자원을 (…) 자신과 가족만이 아니라 공동선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재화 소유자의 의무가 생긴다"(178항)고 밝히고 있다. 또 만민의 공동사용권, 곧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사용은 "모든 윤리적, 사회적 질서의 제1원칙이고 그리스도교 사회교리의 특수한 원칙"(172항)이라고 말한다.


선용의 수단으로서의 소유


더 나아가 재화의 공동사용 권리는 무엇보다도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는 자연권이며 타고난 권리다. 이는 재화에 대한 인간적, 법적, 모든 경제 사회적 체계와 수단에 우선한다. 사유 재산권과 자유로운 상거래 권리를 포함한 모든 권리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 만민의 공동 사용권'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런 권리들의 본 목적을 되찾아 주는 일이야말로 중대하고도 긴급한 사회적 의무라 하겠다.(「간추린 사회교리」 172항 참조)


그러나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만민의 공동사용권 원칙이 만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거나 편리한 대로 이용하거나 소유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 권리가 공평하고 질서 있게 행사되기 위해 국가적, 국제적 합의를 통해 권리를 규제하는 개입과 법질서가 필요하다.


종종 우리는 주변에서 평등과 자유를 내세워 규제를 철폐하거나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듣는다. 반대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듣게 된다. 나라와 나라 사이 관세와 무역장벽 철폐와 자유무역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재화사용의 보편적 목적의 원칙에 바탕을 두고 적절한 규제 필요성을 제시한다. 이는 사유 재산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규제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사유재산은 (…) 본질적으로는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칙을 존중하는 도구에 불과하므로, 결국 목적이 아니라 수단인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77항)


교회가 사유 재산권을 반대하는 게 아니다. 교회는 사유 재산권이 진정한 사회적, 민주적 경제정책의 핵심 요소이고, 올바른 사회질서의 보증이란 점을 인정한다.


다만 사회교리는 모든 이가 재화에 대한 소유권을 공평하게 누리기를 강조한다. 사회교리는 복음에 나타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권을 고려해 남보다 잘사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남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너그러이 일정한 자기 권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되풀이해 말한다. 소유는 선용의 수단에 불과하다.


[평화신문, 2012년 2월 12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8) 재화 사용의 보편적 목적 (3)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원리


개인 빈곤 · 불행은 복합적 원인


지난 글에서 재화의 사적 소유권과 공동 사용권에 대해 이야기했다. 간략히 정리하면 △ 자연권이며 절대적 권리인 공동 사용권 △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사용에 종속되는 사적 소유권 △ 타인의 이익과 공동선에 기여하는 사회적 기능으로서의 재화 소유 등이다.


즉, 공동선에 기여하는 재화 사용은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84항). 한마디로, 가톨릭교회는 개인 소득을 얼마나 올리고, 그것으로 무엇을 이뤘느냐보다는 재화를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관심을 기울인다.


도와줘야 하나, 아니면 외면해야 하나?


오늘은 재화 사용의 보편 목적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사랑)의 원리라는 교회 가르침을 살펴보자.


과거 농경사회에도 빈곤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빈곤에 대처하는 양식이 오늘날처럼 논란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흔히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가 그 구성원의 불행(빈곤)을 함께 짊어졌기 때문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모든 생활양식을 바꿔놓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개인이나 한 가정의 빈곤과 불행에 대한 대응 양식일 것이다. 빈곤에 대한 책임이 개인과 가정으로 돌아간 것이다. 도시사회와 산업화 사회는 다른 이들의 아픔을 돌아볼 여유를 앗아갔다.


물론 행복을 남과 나누지 않는다는 상대적 매력이 있기는 하다. 이를 흔히 자본주의의 개인주의화라 한다. 경제적으로는 주기적 불황이나 불평등 심화ㆍ빈곤 심화라 하고, 좀 더 그럴듯하게 '시장의 실패'라고 부르기도 한다.


독자들도 거리나 지하철에서 도움을 청하는 이를 만났을 때 이런 갈등을 한 적 있을 것이다. "도와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몇 푼 주자니 그를 계속해서 그렇게 만드는 데 한몫을 하는 것 같고, 도와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것 같고…."


혹자는 일할 수 있는(몸이 성하게 보이는) 사람을 도와줘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편하게 살려는 나쁜 버릇만 키우고,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공평하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인데, 도움을 청하는 이의 어려움을 보고 그렇게까지 따질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불행에 처한 사람은 일단 도와야 한다는 말이다. 또 다른 사람은 위기 상황에 놓인 사람은 일단 도운 뒤 자립할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을 사회가 마련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회복지와 관련한 다양한 견해들 사이의 논쟁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복지는 모든 시민의 권리로서 당연히 보편복지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과 최소한 도움을 주는 선별(잔여)복지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한다. 선별복지는 당장 위기 극복 차원에서, 보편복지는 중장기적 계획 차원에서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왜 가난한가


보편복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현대 산업사회 혹은 탈산업사회에서 개인의 도덕적 결함, 즉 나태와 태만ㆍ게으름 같은 이유로 특정 개인이 불행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경쟁과 자본주의 시장경제 같은 사회경제 환경 때문에 누구나 불행에 빠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회가 그 불행의 일부 혹은 전부를 보상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논리를 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지는 권리이며 사회 및 국가는 국민 복지에 책임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보편복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국민연금제도와 건강보험제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뿐만 아니라 보육ㆍ교육ㆍ주택 같은 영역에까지 사회 책임을 확장하려고 한다. '사회보장제도'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강하게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여기에는 개인 혹은 가정의 생활은 그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열심히 일해서 노후를 준비할 생각은 않고 아예 놀면서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살려는 사람이 있다고 불편해한다.


의료보험료는 조금 내면서 그다지 아프지도 않은데 병원을 자기 집 안방 드나들 듯이 한다고 비판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쉬운 일만 찾고, 그 사이 놀면서 고용보험료를 축내는 사람들이 허다하다고 주장한다. 또 교육ㆍ보육ㆍ주택마련 같은 분야에 대해서도 개인 책임을 사회에 떠넘기려 한다고 비판한다.


지난해 서울시의 무상급식과 관련된 주민투표도 따지고 보면 이 같이 복지에 관한 상충된 논쟁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런 논란의 배경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시각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개인 혹은 한 가정의 빈곤과 고통, 불행은 당사자 탓인가? 아니면 사회의 불완전함 혹은 구조적 결함 같은 '시장의 실패' 탓인가?"


물론, 어느 하나를 정답으로 내세울 수는 없다. 더 큰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불행에 처한 이들에 대한 교회 가르침을 소개하겠다.


[평화신문, 2012년 2월 19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9) 재화 사용의 보편적 목적 (4)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원리


선행, 그들의 것 돌려주는 것


성경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바라볼까? 게으름과 나태, 도덕적 해이, 무책임 때문에 가난해졌다고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구약성경의 신명기ㆍ레위기ㆍ시편, 그리고 예언서들은 가난과 빈곤에 처한 이들을 불의한 통치구조와 탐욕, 착취의 희생자로 보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공동체가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돌보는 것을 의무로 명하고 있다. 신약도 마찬가지다. 이웃을 위한 사랑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구약성경에서의 가난과 불의


교회 관행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 자주 논란과 비판 소재가 되는 게 '십일조'다. 이는 십일조 자체보다 그 사용에서 비롯된다. 구약을 보면 "너희 소출에서 십 분의 일을 모두 떼어 놓고, 그것을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그들이 너희 성안에서 배불리 먹게 될 때(…) 당신께서 저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습니다"(신명 26,12-14)라며 그 사용처를 밝힌다.


이처럼 십일조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데 주로 쓰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힘없고 약하고 불쌍한 존재로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비참한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 고통과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해내셨다. 구약의 시편과 예언서는 가난한 이들과 탐욕스러운 이들, 불공정한 재판을 일삼는 지도자를 대조시킴으로써 가난과 빈곤, 고통이 불의에 의한 희생임을 드러낸다.


신약성경의 사회적 약자와 불의


신약에서 예수님은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을 당신과 동일시하면서 당대 지도자를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며 신랄하게 비판하신다.


가장 유명한 가르침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일 것이다. "누가 이웃인가?" 하는 물음에, 예수님은 "무력한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신다. 무력한 사람을 돌보지 않고 지나친 이들은 나름 형편이 괜찮은 이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누구인가를 가르치면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이들을 비판하시는 것이다.


행복선언에서도 예수님은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 편을 드신다. 반면 부유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듣기에 불편할 정도로 꾸짖으신다.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의 라자로와 그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하고 자신의 풍요로움만 즐기는 부자의 비유를 들며 가난의 탓이 부자의 무관심에 있음을 드러내신다. 아울러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 제자들이 따라야 할 길임을 밝히신다.


자비 이전에 정의의 의무이다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의 가르침은 어떤가? "애덕의 실천은 자선 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빈곤 문제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 대처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184항)고 말한다. 빈곤 원인이 개인의 도덕적 결함일 수도 있겠으나 사회 정치의 구조적 불의와 불완전함에도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10억 인구가 굶주림으로 시달리고, 어린이가 5초에 한 명씩 굶주림과 기초적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죽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에 몰려있다. 가난한 나라의 빈곤이 과연 그들만의 탓일까.


국외여행을 며칠 다녀온 분들이 "그쪽 사람들이 얼마나 게으른지 구걸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겨. 그러니 가난할 수밖에…"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이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책임해서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오랜 식민지배의 억압과 착취 때문에, 혹은 발전 자체가 불가능한 현재의 불의한 경제 교역조건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살펴봐야 한다. 빈곤을 그들 나라의 부패와 게으름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교회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오랜 식민지배의 억압과 착취로 이룬 선진국의 책임을 엄중하게 묻고 있다.


교회는 가르침을 통해 사랑과 정의의 관계로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가난한 이들에게 선행을 베풀 때,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라 그들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맡겨진 정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정의에 따라 이미 주었어야 할 것을 마치 사랑의 선물인양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밝힌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의무를 올바로 수행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은 분명 "재물에 지나친 애착을 갖거나 재물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가 전하는 것은 재화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가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재화를 나누는 정신은 정의와 사랑의 의무이다.


[평화신문, 2012년 2월 26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10) 자유무역은 절대선일까? (1)


소수의 만족 위해 대다수는 불만족


"전체 인류나 사회집단 등을 빈곤으로 내몰면서 인간을 희생시켜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간추린 사회교리」 332항)


자유무역


대부분 언론에서 그 내용이나 영향력에 대해 충분하게 다루지 않은 커다란 사회적 이슈 가운데 하나가 한미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이 아닌가 한다.


협정문이 무려 1500쪽에 이르는데다 국회 비준을 받아야 하지만 비준 주체인 국회의원조차 그 내용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협정문을 양국이 같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영어로 만든 것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얼마 전에는 법원이 그 번역의 오류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런데 주류 언론은 FTA의 심각한 문제 제기가 있었음에도 이를 다루지 않은 채 협정이 구세주라도 되는 듯 홍보에만 열을 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몇몇 판사가 법 차원에서 검토할 부분이 있다고 SNS를 통해 알린 것을 두고도 그 내용보다 처신을 여론의 도마 위에 올린다.


한마디로 국민 대다수가 잘 모르고 국민의 합의(Consensus) 없이 몇몇 사람이 국가간 약속을 해버린 꼴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언론에 공개하지 않은 채 비준을 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 와서 얼마 남지 않은 국회의원 총선에서 뜨거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이 자리에서는 그 내용과 절차의 시시비비는 차치하고, 자유무역(Free Trade)과 국제교역(International Trade)에 대한 교회 가르침을 살펴보겠다.


모든 이들이 만족하는 거래는 없을까?


불과 40여 년 전이다. 어린 시절 동네 꼬마들은 마루 밑에 있던 먼지 쌓인 못 신는 고무신 한 켤레를 주고 강냉이를 바꿔 먹었다. 전형적 물물교환(Trade)이었다. 동네 꼬마들은 강냉이를 먹고 싶었고, 아저씨는 고물 고무신이 필요했다. 어린 시절에 얼마나 만족했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대체로 만족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지하철 역사 한 구석에서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가 더덕 껍질을 벗기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더덕 냄새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지만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다. 지하철 역사와 전동차 곳곳에 '불법으로 판매하는 것은 사지도 팔지도 말라'는 그럴듯한 계몽 투의 글귀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법으로 사고파는 것을 규제하는 셈이다.


공익근무하는 젊은이들이 할머니 앞에 서서 야단을 치거나 빨리 거둬가라고 재촉할 때는 '얼마나 통행에 영향을 준다고, 너무 야박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한다. '질서'라는 노란 완장을 찬 젊은 할아버지들이 비슷한 연배의 잡상인 할머니를 내쫓는 광경을 볼 때면 슬픔과 분노마저 느껴진다.


이런 노점과 달리 지하철 이용객이 많은 환승역에는 거의 대부분 편의점이나 깔끔한 실내장식을 한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물론 좌판하고는 수준이 다르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맹비와 관리비, 임대료를 내야 하고 때가 되면 공정하든 불공정하든 재계약도 해야 한다. 어쩌면 부채 원금과 이자 때문에 가게 주인도 힘겨워할 지도 모른다.


못 신는 고무신을 건네고 퍼주는 강냉이를 받아왔을 때는 주는 쪽과 받는 쪽 서로 만족했다. 강냉이 아저씨도 덤이라고 주면서 그다지 불편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편의점이나 지하철 역사 내 점포에서는 '만족'이 안 생긴다. 편의점 직원도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니 물건을 건네주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고, 물건을 사는 나도 돈만 건네주고 물건을 받으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그러면 이런 거래(교역)에서 도대체 누가 만족하는 것일까.


누구를 위한 교역인가?


탐욕에는 끝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런 실존적 이유의 불만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소수의 만족을 위해, 대다수는 불만족스러운 단순한 소비자로 전락하는 심각한 불균형의 세상으로 변한 것은 아닌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20대 80의 사회, 10대 90의 사회, 더 나아가 1%대 99%의 사회라는 신조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도 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부실채권은 자유자본주의 경제의 치명적 결함이라 할 수 있다. 주기적 불황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 외국계 펀드회사가 어떤 은행을 사들였다가 다시 팔아 무려 5조 원의 이익을 냈다는 뉴스를 기억할 것이다. 2012년 정부 예산이 325조 원임을 감안하면 그 펀드회사 차익으로 이 땅의 얼마나 많은 보통 시민이 위기에 내몰렸을까.


우리 교회의 가르침을 소개한다.


금융 거래량이 실물 거래량을 훨씬 능가한 지금, 금융 부문은 경제의 실질적 토대를 무시하고 자신만을 발전의 준거로 삼을 위험이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인 금융 경제는 뿌리를 잃은 채 근본 목적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그 목표들과 상충하게 된다. 다시 말해, 금융 경제는 실제 경제에 도움을 주고 궁극적으로는 민족과 인류 공동체 발전에 이바지해야 할 본래의 근본적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


[평화신문, 2012년 3월 4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11) 자유무역은 절대선일까? (2)


진정한 공정 자유무역은 불가능


"금융 거래량이 실물 거래량을 훨씬 능가한 지금, 금융 부문은 경제의 실질적 토대를 무시하고 자신만을 발전의 준거로 삼을 위험이 있다.(…) 금융경제는 실제경제에 도움을 주고 궁극적으로는 민족과 인류 공동체 발전에 이바지해야 할 본래의 근본적 역할을 포기하게 되었다."(「간추린 사회교리」 368-369항)


실물경제 위에 군림하는 금융시장


자본주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산업자본주의, 독점자본주의, 그리고 수정자본주의를 거론하는데, 최근에는 '주주자본주의'라는 용어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는 기업의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주주(투자자)의 최대 배당 이익에 경영목표를 두는 것을 말한다.


이런 투자자들의 활동무대인 금융시장의 경미한 재채기는 보통 사람들이 생활하는 실물시장에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덮치는 건 아닌가 살펴봐야 한다. 금융경제가 실제경제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붕괴시킬 위험이 있는 건 아닐까?


몇 해 전 미국에서 모기지론 사태가 있었다. 그 용어조차 낯설지만 우리말로 번역하면 주택담보대출쯤 될 것이다. 태평양 건너 어느 한 나라에서 생긴 이 사태를 놓고 금융위기라고 했다. 우리 지도자들은 "우리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며 그 대책을 이미 마련해 놓았다"며 국민의 걱정을 덜어주려 했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됐다. 얼마 되지 않아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정부는 40여 개 생필품 목록을 정해서 특별히 관리하겠다고 발표했다. 물가는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를 대로 오른 물가가 이제는 새삼스럽지 않다.


금융위기에 이어 오는 물가상승으로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누굴까? 당연히 소득이 낮은 서민층이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 자신과 가족이 누리는 생활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주택담보 대부업체의 재채기로 이 땅의 수많은 서민층의 삶이 황폐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얼마 전 우리 언론은 한국 무역규모가 드디어 1조 달러를 넘었다고 야단스럽게 보도했다. 그런데 정작 서민들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공정한 자유무역은 없을까?


자유무역(Free Trade), 그것도 국제무역(International Trade) 자체를 교회 가르침에 비춰 살펴보자.


"국제금융 체제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극심한 불균형에 비춰 볼 때, 전체적 양상은 더욱 혼란스러워 보인다. 금융시장의 규제 철폐와 쇄신 과정은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만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배제된 나라들, 특히 약소국이나 발전이 지연된 나라들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금융 불안이 실제경제 체제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 결과들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윤리적으로 심각한 걱정거리가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369항)


우리는 자유무역이 금융거래의 자유, 곧 금융시장의 규제 철폐를 주요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닌지, 약소국이나 발전이 지연된 나라가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지 살펴봐야 한다. 나라와 나라 사이 담을 허물었다면 각 나라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게는 혹시 그 혜택이란 것이 그림의 떡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혜택보다는 실제경제 체제에서 부정적 결과들에 노출되어 고통을 받는 이들이 늘어나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교회는 지난 2003년 '국제무역에 관한 윤리적 지침'을 통해 이런 자유무역의 한계를 밝힌다.


지침에서 "자유무역은 양 당사자가 경제적으로 공평하고 그로 인하여 진보가 촉진되고 노력이 보상받는 경우에 한하여 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국제무역 시스템에 참여한 국가들은 전혀 동등하지 않다. 서로 동등하지 않은 국가에게 그들의 다양한 경제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접근법만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자유무역의 불공정성을 지적한다.


재화나 용역의 자유로운 교환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은 발전과 평화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 공정한 자유무역은 없다. 자유무역은 사회정의가 요구하는 바를 따르고, 국민 모두와 개개인의 발전에 기여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무역이라고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과연 진정한 자유무역으로 불릴 수 있을까? 혹은 부당한 접근법이 될까? 혹은 윤리적으로 심각한 걱정거리를 안겨줄까? 3월 15일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고 시간이 흐르면 그 답을 알게 될 것이다.


[평화신문, 2012년 3월 11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12)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조종하는 뉴스 미디어 현상 (1)


정보 민주주의 이뤄지고 있는가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가운데 특별히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소수 사람이나 집단이 조종하고 있는 뉴스 미디어 현상이다. 이런 현상에 통치행위와 재정, 정보 기관들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이는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미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여론형성과 정보 민주주의


최근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었던 기존 대중매체와 새로운 형태의 소통양식에 대해 살펴보자.


지난 재보궐 선거가 끝난 뒤 화제가 됐던 내용 가운데 하나가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라는 소통양식이다. 기존의 신문이나 텔레비전 혹은 인터넷 매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통장치가 투표라는 정치 행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왔다.


판사들이 사회 현안에 대해 개인 의견을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공개적으로 밝혀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참의 논란을 거친 후 어느 판사는 법복을 벗어야 했는데 이를 두고도 말이 많았다.


몇몇 신문사는 종합편성채널의 텔레비전 방송국을 개국했는데, 시민에게는 생소한 '방송통신법'의 개정을 놓고도 뜨거운 논란이 일었다.


기존 언론의 공정성에 대한 시시비비는 새삼스러운 화제라고도 할 수 없는 가운데 방송을 공정하게 제작, 보도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많은 언론인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누리방 디도스 공격 사건도 있었다.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투표행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선거관리위원회의 누리방 대문을 누군가 강제로 닫은 사건이다. 시민이 정보, 특히 변경된 투표소 위치를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침 출근길 투표하려는 사람들의 참정권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것이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와 영향력이 있는 소셜 네트워크 영역도 심의할 수 있는 뉴미디어 정보 심의팀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안에 설치했다. 한쪽에서는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언론환경에서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란 혹은 새로운 언론 현상의 배경에는 '여론형성'과 '정보 민주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기존 대중매체든 새로운 형태의 소통양식이든 마찬가지다.


정보의 진실성은 누가 판단하나?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에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와 신문 잡지 정도의 대중매체밖에 없었다. 이때 시도때도 없이 듣고 보던 용어가 '유언비어'였다. 흑백 종이신문과 잡지에서 대문짝만 하게 크게 박힌 '유언비어',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뉴스 시간에 첫 꼭지에 심심하면 나오는 표현도 바로 유언비어였다.


국어사전에서 유언비어 뜻을 살펴보면 "아무 근거 없이 널리 퍼진 풍설, 뜬소문"이라 나온다. 정부는 언론을 통해 유언비어가 사회를 어지럽히고 혼란스럽게 하기에 그 불순세력을 발본색원(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서 없애 버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쪽에서는 유언비어는 곧 근거 없는 풍설이고, 사회를 어지럽히고 혼란스럽게 한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근거 있는 사실이라고 믿었다.


시대가 변해 텔레비전과 신문이 진실을 제대로 알리려 노력했다며 정론을 자처하는 이들도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오히려 그 당시 언론이 권력의 시녀에 불과했다고 혹평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강압적 외부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요즘 유언비어란 용어는 '괴담'이라는 용어로 이름을 바꿔 다시 등장했다. 기존의 일부 특정 방송과 신문은 이 괴담이 인터넷이나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유포됨으로써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그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지금까지 진짜 유언비어와 괴담을 퍼뜨린 이들은 바로 기존의 특정 방송과 신문이라며 소리 높여 비판한다.


방송통폐합이니 해직언론인이니 언론 길들이기니 언론장악이니 하는 용어들이 있었다. 지금도 진행 중이며 과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이들도 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부 언론은 오래전부터 언론이기를 포기하고 권력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국가권력과 언론권력이 손을 잡고 상호 이익을 챙겼다는 비판도 있다.


국가권력은 비판 대신 우호적 홍보의 이익을, 언론은 권력으로부터 특혜를 받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그 많은 정보는 전부 진실일까?


[평화신문, 2012년 3월 18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13)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조종하는 뉴스 미디어 현상 (2)


이해관계 덫에 걸린 언론보도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가운데 특별히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고 있는 뉴스 미디어 현상이다. 이런 현상에 통치행위와 재정과 정보기관들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이는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미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우리가 만나는 그 많은 정보들은 과연 진실일까? 우리는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고 있을까?


정보와 민주주의


가끔 언론보도와 관련하여 정보공개 여부를 놓고 시민의 알 권리가 논란의 주제로 떠오른다. 흔히 시민의 알권리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알릴 것과 알리지 말 것을 누가 정할까.


언론매체를 포함하여 이해관계에 놓여있는 이들이 그것을 정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그들이 알리고 싶은 것을 전하면서 시민의 알권리라고 포장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을 은폐하며 국민이 알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닌가 또는 시민의 알 권리 기준을 자기들 이해관계에 두는 것은 아닌가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언론이 알리고 싶은 것을 전하면서 사실을 전하기보다는 이해관계에 따라 적절하게 버무리거나 국민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비판력이 부족한 정보 소비자로 길들일 수도 있다. 이는 우리 대중매체 역사를 살펴보면 충분히 의구심을 가질 만하다. 우리에게 언론분야 전문가나 시민 대다수가 변함없이 인정하는 정론의 대중매체가 있는지도 자신하기 어렵다. 언론 장악과 언론 독립이 여전히 회자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교회는 '정보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가르치는데 그 내용이 우리 현실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려 마음이 아프다.


"정보는 민주적 참여를 위한 주요한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정치 공동체의 상황과 사실들, 제시된 문제 해결책을 모르고서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진실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


우리 언론이 소개하는 경제상황과 사실들, 그리고 제시된 문제 해결책을 예로 들어보자.


가장 뜨거운 논란이 된 것은 FTA다. 그런데 방송들과 '○○일보'가 전하는 것과 '○○신문'이 전하는 것은 그 내용의 진실 여부를 떠나 너무나 다르다. 지나치게 단순한 표현이지만 정답과 오답이 양립하는 형국이다.


한쪽에서는 FTA를 우리 경제의 구세주처럼 미화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다수 시민에게 재앙이라고 걱정한다. 대중매체가 하나의 사물을 놓고 이렇게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이데올로기, 이익 추구, 정치적 통제, 집단 간의 알력, 기타 사회악 때문"(「간추린 사회교리」416항)이 아닐까.


우리 사회는 이데올로기로 한 몫을 챙기는 사람들이 꽤 많다. 언론의 산업화 역시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무슨 때가 되면 대중매체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다. 그 중에도 가장 유치한 이데올로기 논란이 이른바 '색깔논쟁'이다.


물론 대중매체도 이데올로기의 덫에서 자유롭지 않다. 몇 십 년이 지나도 이 유치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는 스스로의 책임이 크다. 대중매체의 정치적 통제 혹은 통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몸부림은 우리 언론의 살아있는 역사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 이 시각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진실에 근거한 정보는 없는가?


새로운 형태의 매체가 등장했고 대중매체 관련 정책과 법이 제정되고 개정되었는데도 대다수 시민은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물론 "복잡한 사회생활 영역에서 정보와 의사소통을 위한 여려 형태의 도구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면서 실질적인 다원주의를 보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시민이 대중매체 정책에 관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필요가 충족되었는지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합법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꽤 많다. 대중매체를 '돈벌이가 되는 사업'으로 보고 특정 집단을 위한 정책과 법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이런 비판에 대해 어떤 매체는 침묵하고 어떤 매체는 비판한다. 역시 정답과 오답이 양립하는 셈이다.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받을 사회의 권리는 그렇게 무시당한다.


이는 "도덕적 가치들과 원리들은 대중매체에도 적용된다. 윤리 차원은 커뮤니케이션 내용과 커뮤니케이션 과정(전달방법)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 구조나 제도 문제와도 관련된다. 여기에는 흔히 첨단기술과 제품의 분배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정책 문제(누가 정보를 많이 가지게 될 것이며 누가 적게 가지게 될 것인가)가 포함된다"(「간추린 사회교리」416항)는 교회의 가르침에 반한다.


[평화신문, 2012년 3월 25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14) 사회복지와 교회의 가르침 (1)

풍성한 복지의 잔치(상) - '위기에 내몰리는 시민의 삶'


알맹이 없는 복지 논쟁 언제까지


가물에 콩 나듯 이 땅의 시민이 사회의 주인행세(?)를 할 수 있는 19대 국회의원 총선이 며칠 남지 않았다. 후보자들은 저마다 시민을 편하게 해주겠다며 지지를 호소한다. 그들의 호소만 들으면 복지가 흘러넘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까지 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실패 현상 가운데 하나가 사회 구성원 간의 불평등 심화라 할 수 있다. 시민 사이의 심각한 불평등은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국가는 이를 완화 혹은 극복하기 위해 사회보험제도 같은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 '4대 보험'이 한 예다.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보장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생산 활동에 참여하기가 어렵고, 당연히 생활의 곤란함을 겪는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국민건강보험제도를 마련해 그 위험에 대비한다.


노동하다 다치면 마찬가지로 생산 활동을 못하게 되고 살림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로 위기 극복을 돕고 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실직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고용보험제도로 이들을 돕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어 더이상 생산 활동을 할 수 없으면 소득이 없게 되고 경제적 위기를 맞이한다. 이를 위한 것이 바로 국민연금보장제도다.


이 제도들의 공통점은 시민의 '생산 활동'을 전제하고 생산 활동의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 복지정책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산 활동이 필요하고 그 활동에 장애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보험'을 마련하는 것이다. 보험료를 부담할 형편조차 되지 못하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활용해 기초생활을 지원한다.


이런 제도들을 사회보장제도라고 부른다. 이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사회가 일정 부분 보완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시민 개인이나 가족은 물론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사회 전체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셈이다.


끊이지 않는 복지 논란, 건전한 토론이 필요하다


선거를 앞두고 모든 후보자가 복지를 내세우고 있지만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선거가 끝나면 복지에 관한 논란이 다시 불거질 것이기 때문이다. "왜 사회에 대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그렇게 주장하면서 개인에 대한 책임을 사회에 떠넘기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주장과 그에 따른 논란이 반복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온전하게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특권층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기에 사회는 어떤 형식으로든 그 구성원이 삶을 유지 발전할 수 있도록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재연될 것이다. 우리 사회를 양분하는 보편복지와 선별복지에 관한 논란이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은 자명한 일이다.


보편복지와 선별복지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보편복지는 복지를 사회적 권리로 보며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주장한다. 4대 보험제도나 노인을 위한 사회보장이나 어린이를 위한 공공 교육이 보편복지에 속한다. 보편복지는 모든 사람이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전제하기에 공공제도로서의 서비스 제공을 선호하며 차별하지 않음으로써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장점이 있다. 다만 경비가 많이 소요될 수 있고 복지 서비스 남용 문제에 대한 우려가 문제로 지적된다.


선별복지란 지원이 필요한 가족이나 개인이 서비스를 받으려면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 통상적으로 자산조사를 활용한다. 선별복지는 제한된 사회정책을 선호하며 보편복지 정책을 낭비적이라고 간주한다. 개인 혹은 가족의 책임을 강조하지만 지원을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 통합을 저해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들 각각의 복지는 장단점이 뚜렷하다. 예를 들어 "비용이 얼마나 드는가?"하는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선별복지가 적절하다. 다른 면으로 복지를 사회적 권리, 혹은 사회통합의 관점에서 본다면 보편복지가 적절할 것이다.


복지 서비스를 받는 사람의 처지에서 본다면 낙인(수치심)을 받지 않는 보편복지가 적절하겠지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측(정부)에서 본다면 경비의 효율성이란 점에서 선별복지가 적절할 수 있다. 결국, 보편복지 주장과 선별복지 주장 사이에는 건전한 토론과 사회적 합의 과정을 요구된다.


그런데 우리는 선별복지를 주장하면 보수주의 딱지를, 보편복지를 주장하면 진보주의 딱지를 붙인다. 더 나아가 이를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몰고 감으로써 시민 복지를 정략적으로 활용한다는 의구심마저 든다. 복지에 관한 주장은 곳곳에 흘러넘치는데 정작 복지 실현은커녕 시민의 삶은 점점 더 위기에 내몰리는 게 현실이다.


[평화신문, 2012년 4월 1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15) 특별기고 - 총선과 신앙


책임 있는 참여, 신앙인의 사명


"교회는 결코 현세적 야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추구한다. 곧 성령의 인도로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심판하시기보다는 구원하시고, 섬김을 받으시기보다는 섬기러 오셨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3항).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회 복음화 사명


국회의원 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마음을 잡기가 쉽지 않다. 절망은 사회가 언제나 발전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퇴보하기도 했다는 역사의 교훈에서 나온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가혹한 억압과 권력의 횡포 앞에서, 또 인권의 실종 앞에서 절망한다.


온갖 장치로 포장해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초(超)국적 기업의 자본 권력은 우리가 숨을 쉬는 것조차 고마워하도록 강요한다. 정치는 국민이 아니라 이제 이 거대기업에 충실하게 봉사한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희망은 더디지만 발전을 향하는 역사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인류에게는 희망의 체험이 있다. 정치적 억압에서 자유를, 경제적 빈곤에서 해방을 이룬 체험이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믿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선거가 희망의 불씨를 살릴 수 있을까?


일부에서는 신앙행위와 정치행위를 그럴듯하게 구별함으로써, 교회를 세상 넘어 초월의 세계로 내몰려고 한다. (지역)교회도 때로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는 대신에 초월의 세계로 포장된 현세적 야심에 취하기도 한다.


교회는 「가톨릭 사회교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고 말하며, 이를 '사회 복음화'를 위한 사명이라고 한다. 교회 가르침에는 가정ㆍ문화ㆍ경제ㆍ정치ㆍ생태ㆍ평화와 국제질서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할 사회교리의 항구한 원리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나침반 「가톨릭 사회교리」


「가톨릭 사회교리」의 기본원리는 유권자인 그리스도인에게 성찰과 분석, 판단과 행동을 위한 지침이다. 정당과 후보자를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길잡이인 셈이다.


「가톨릭 사회교리」의 기본원리로 인간 존엄성의 원리(인권), 공동선의 원리(사회정의), 보조성의 원리(시민의 자율성), 연대성의 원리(공동선에의 헌신), 재화 사용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소유권 제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원리를 꼽을 수 있다. 특히 보조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참여'다. 이는 민주주의의 모든 질서를 이루는 주축 가운데 하나다. 교회는 이를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어떤 정부가 어느 정도 민주적 정부인지는 무엇보다도 시민과 관련하여 시민을 위하여 시민의 이름으로 시민이 행사하는 권한과 역할이 어느 정도 시민에게 부여되었는지에 따라 판명된다. 그러므로 모든 민주주의는 참여 민주주의여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간추린 사회교리」 191항)


이 자리에서 앞서 이야기한 내용을 예로 들어보자. 가톨릭교회는 "국민이 대중매체 정책에 관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참여는 공개적이어야 한다. 대중매체가 돈벌이가 되는 사업일 때 특정 이익집단을 위해 잘못 이용되지 않고 진정 민의를 대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416항)고 가르친다.


동시에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가운데,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고 있는 뉴스 미디어 현상이다. 이런 현상에 정치활동과 금융과 정보기관들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이는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영향을 미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고 밝힌다. 이에 따르면 방송통신 관련법의 제ㆍ개정 관련 논란을 대하고, 수많은 언론인의 파업을 보며, 교회가(그리스도인이) 이를 신앙(교리)과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 여긴다면 이는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닌가.


다른 예를 들어보자. 정부가 시장 효율성을 내세워 공공부문의 선진화를 위한 민영화를 추진하려 한다는 소식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가톨릭교회는 자유시장 제도의 긍정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간추린 사회교리」 347항), 공동재화(공공부문)는 국가와 사회가 보호해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백주년」 40항). 그럼에도 이런 경제문제는 그리스도인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역시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닌가.


책임 있는 선택이 세상을 바꾼다


시민의 책임 있는 참여 여부는 민주주의의 생사를 가른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책임이 더욱 막중하다. 현세적 야심보다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 곧 진리를 증언하고, 구원하고, 섬기는 그 일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택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움을 실현하는 신앙행위다. 총선도 마찬가지다. 대의 민주주의 정치제도에서 우리가 선택한 정치인들은 세상에 진리를 증언할 수도, 거짓을 퍼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민을 구원과 해방의 길로 이끌 수도, 억압과 질곡으로 내몰 수도, 시민을 섬길 수도 노예로 내몰 수도 있다.


[평화신문, 2012년 4월 8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16) 사회복지와 교회의 가르침 (2)


어지러운 복지의 말잔치, 위기에 내몰리는 시민의 삶


지난 번에 보편복지 주장과 선별복지 주장은 각기 나름대로 장단점을 갖고 있으며, 그 때문에 건전한 토론과 사회적 합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선별복지와 보편복지


복지정책은 다음 네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누구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가, 그 서비스를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그 정책실현을 위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이다.


우리 언론은 주로 네 번째 요소, 즉 재원마련 대책도 없이 즉흥적 선심성 복지공약을 남발한다고 비판한다. 시민들 대부분이 이에 공감한다. 그러나 시민 사이에 혹은 여론을 형성하는 언론 사이에 소모적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


첫째, 선별복지를 보수의 시각으로, 보편복지를 진보의 시각으로 단순하게 대립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복지를 인권의 사회권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것처럼 사회복지 역사는 보편복지로 발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선별복지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예를 들어, 4대 보험ㆍ초중학생 무상교육ㆍ65살 이상 노인의 지하철 무료이용 같은 경우는 보편복지 성격을 갖는 정책이다. 만일 보편복지가 진보주의의 주장이라고 가정하자.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보수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 실행하고 있는 보편복지 정책부터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맞다. 마찬가지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관점에 따라 선별복지정책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주의자는 거의 만나보기 어렵다.


둘째, 선별복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보편복지를 비판하면서 많이 내세우는 것 가운데 '도덕적 해이'를 들 수 있다. 의료비 부담이 적다고 불필요하게 병원을 찾음으로써, 국민건강보험공단 재정을 악화시킨다고 비난한다. 혹은 일은 하지 않거나, 힘든 일은 피하는 사람들까지 사회가 책임져야 하느냐고 비판한다. 이는 극복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것만이 도덕적 해이라 할 수는 없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무


내용은 회자하면서도 용어는 낯선 '역선택'이란 것이 있다. 국민의료보험을 강제하지 않는 임의가입으로 하고 민간보험회사에서 의료보험상품을 판매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민간보험회사는 사회 통계상 평균 질병률에 기초해서 보험료를 부과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평균 질병률보다 낮은 질병률을 가진 젊은층과 건강한 층의 상당수는 보험료가 높다고 생각해 탈퇴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지균형 차원에서 보험료를 인상하거나 보험적용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평균 질병률보다 낮은 질병률을 가진 가입자가 탈퇴하는 악순환이 지속될 것이다. 결국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 저소득 계층만 남게 된다.


결과적으로 보험료의 급격한 인상과 의료서비스 축소가 불가피하고 공익 차원의 의료보험제도는 유지될 수 없다. 이러한 것을 역선택이라 하는데, 강제가입으로써 이 문제를 방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도덕적 해이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전 국민 의무가입과 당연 지정제를 축으로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시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필요한 낭비가 가져오는 피해보다, 역선택이 가져오는 피해가 훨씬 치명적일 수 있어서다. 쉽게 말하면 불필요한 서비스 과잉으로 축나는 재정보다 강제가입하지 않을 경우 건강보험료를 내지 않으려는 이들이 차지하는 손실 부분이 훨씬 클 수 있다는 뜻이다.


고위공직자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메뉴 가운데 하나가 국민건강보험료 미납인 이유도 바로 이 역선택의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고액 소득자는 평소 건강관리를 잘하고 생활환경이 비교적 쾌적하기에 질병에 걸릴 확률이 낮은 편이다. 그런데 의료서비스를 받지 않으면서 꼬박꼬박 고액 보험료를, 그것도 되돌려 받지도 못할 보험료를 납부하는 것이 마뜩잖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들이 낸 보험료를 갖고 보험료를 내지 않거나 조금 낸 저소득층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역시 아깝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공동체 의식이나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있지 않으면 역선택의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매우 높다.


역선택의 결과에 대해 설명해 줄 성경 구절이 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보편복지와 선별복지 주장 사이의 건전한 토론을 위해서는 바로 낭비적 요소와 함께 역선택의 문제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평화신문, 2012년 4월 22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17) 사회복지와 교회의 가르침 (3)


어지러운 복지의 말자치, 위기에 내몰리는 시민의 삶


지난 호에서 복지비용 지출의 낭비적 요소만 부각되는 경향이 있고, 그에 버금가는 중요한 문제인 역선택 문제는 낯설다는 이야기를 했다. 특히 의료 민영화와 관련해서 독자들이 역선택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했으면 좋겠다. 보편적 의료서비스의 낭비적 요소보다 역선택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 곧 국민건강보험제도 붕괴가 시민 건강과 보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


단순 복지 비교가 갖는 오류


오늘은 복지 논란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문제인 '시기상조론'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나라가 보편복지 정책을 펼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목소리가 사회 일각에서 들린다. 국민소득 4만 불이 넘는 북유럽이나 독일 같은 선진국이 펼치는 보편복지정책을 국민소득 2만불 수준의 우리가 할 수 있겠느냐는 의견이다.


일리 있는 주장처럼 들리지만, 비교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다. 복지 선진국이 국민소득 2만 불 수준일 당시와 비교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의견이다. 단순히 현재 상태를 비교하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복지 선진국은 1970년대 국민소득 2만 불을 넘겼다. 그 당시 복지 선진국은 정부 재정 중 복지분야 지출이 평균 20% 중반에서 높게는 30%를 넘었다. 당시 우리나라 복지분야 지출은 국가재정의 10%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비교를 하려면 우리의 현재 경제수준과 복지선진국의 국민소득 2만 불 시절 경제수준을 비교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근거로 보면 우리나라 정부 재정 가운데 복지가 차지하는 지출 비율이 턱없이 낮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일상에서도 이러한 단순 비교로 인한 오류 때문에 혼란을 겪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가끔 어르신들이 요즘 젊은이들은 3D 직종의 일을 피하려 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우리 때는 그런 것 가리지 않았다"는 말이 뒤따른다. 이러한 말들은 얼핏 일리 있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정작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이런 지적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해 볼 문제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세상이 변한 것이 답일 수 있다. 어르신들이 경제활동을 했을 젊은 시절의 세상 환경이 지금 젊은이가 사는 세상 환경과 다르다는 뜻이다.


우선 대학진학률에서부터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과거 고등교육을 받은 분들 비율은 한자리에 그쳤지만, 지금 젊은이들은 80%가 넘게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다. 지금 젊은이들이 대하는 정보의 양과 질 역시 과거 젊은이들이 접하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난다. 욕구와 기대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는 뜻이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왜 아무 일이나 하지 않느냐, 우리 때는 무슨 일이나 열심히 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가와 국민이 함께 만드는 복지사회


우리나라 경제수준을 고려하면, 사회 혹은 국가가 모든 이들을 위한 복지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말을 흔히 한다. 이러한 논리로 경제수준이 더 높아져 보편복지정책이 확대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의견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사회 논리를 떠나 사회교리와 성경 가르침에 비춰 볼 때 보편복지와 선별복지 가운데 어느 것이 교회 입장에 가까울까. 사회교리의 기본 원리인 인간의 존엄함의 원리, 공동선 원리, 재화 사용의 보편적 목적 원리, 연대성 원리를 기초로 할 때 교회는 보편복지를 지향한다.


물론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 원리만을 놓고 보면 선별복지를 지향하는 것처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보편복지를 전제로 한 말이다. 또한 국가의 주요 임무가 공동선 증진에 있으므로 복지정책으로는 보편복지를 지향해야 함이 자명하다.


그러나 국가의 보편복지정책이 다 담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이러한 부분은 교회를 비롯한 민간영역이 짊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가는 그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 정책과 자금을 마련하기 적절하지만, 관료주의와 비인간화에 치우치는 위험을 초래한다. 반대로 중간단체나 민간영역은 복지 전달자로서 인간적일 수 있지만, 재원마련이나 제도적 장치를 통한 안정성 마련에 한계를 지닌다.


그러기에 국가가 정책이나 제도 혹은 재원을 마련하고, 복지 서비스를 민간영역이 맡는 것을 교회는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백주년」 49항 참조).


[평화신문, 2012년 4월 29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18) 국가의 실패를 경계하며 (1)


무능 · 부패 위험 도사리는 '큰 정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초등학교'라는 용어를 국민학교라고 불렀던 때가 있었다. 컴퓨터에서 국민학교라고 자판을 두드리니 자동으로 초등학교로 변환될 정도로 국민학교는 이제 낯선 용어가 됐다. 아마 지금 아이들에게 "옛날에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했다"고 말하면 그런 말이 있었냐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집단 발전을 위한 개인의 획일화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쓰던 시절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을 거역할 수 없는 절대가치로 여기던 때였다. '국민교육헌장'이란 것도 있어서 모든 학생이 달달 외워야 했다. 시험에는 그 헌장의 글자 수가 몇 개인지를 맞추는 문제 외에도 지문 가운데 괄호를 만들고 빈칸을 쓰는 문제도 곧잘 출제됐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첫 구절은 아직도 필자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 중학생이 됐을 때 쯤,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것이 생겼다. 전체 조회시간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혹은 운동장에서 뛰어놀다 5시가 돼 국기 하강식이 거행될 때면 배경음악과 함께 국기에 대한 맹세가 확성기를 통해 흘러 나왔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모든 학생은 꼼짝 않고 서 있어야 했다.


그 시절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집단의 번영을 위해 개인의 개성은 드러날 수 없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교복이었을 것이다. 머리도 자유롭게 기를 수 없었고 치마 길이조차 개인 자유 영역에 속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학생에게도 교복이란 것이 있었다. 배지가 있어서 소속감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절이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획일성'이다. 그 획일성 앞에 개성을 드러내는 건 극도로 제한됐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런 획일성이 강요됐다. 정치 분야에서 이념을 달리하는 정당 활동은 엄격하게 제한됐다.


경제 분야에서도 기업은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정부 주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필요한 도구였다. 문화 분야에서는 의례 검열이란 것이 있었고, '가정의례 준칙'이 있어서 결혼과 장례에 관해서도 공권력이 개입했다. 이런 획일적 사회에서 개성, 다양성, 자유 같은 가치는 살아 숨쉬기 어려웠다.


전체와 개인의 가치


이 시기 우리 사회는 이른바 민주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발전 대신에 개인으로서의 주체성과 시민으로서의 자유가 소중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됐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우리 의식과 생활에서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영광과 개인으로서의 주체성과 자유의 가치가 꼴을 달리하면서 어지럽게 뒤섞이게 됐다.


국가와 민족이 있어야 개인으로서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들도 있고, 국가는 수단이며 민족은 개념에 불과하며 나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이런 극단적 주장은 좌ㆍ우와 진보ㆍ보수의 이념으로 포장돼 수시로 충돌한다. 본성상 불가분 관계인 인간의 개체성과 사회성을 물리적으로 양분해 대립시켜 편가름 함으로써 이익을 보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의구심을 떨 칠 수 없다.


무능과 부패로 인한 국가의 실패


경제학에 '정부의 실패'라는 용어가 있다. 정부가 경제 분야에 개입함으로써 경제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를 말한다.


정부의 실패 원인으로는 무능과 부패를 꼽을 수 있다. 정부도 당연히 사람이 꾸려가고, 정치인이든 관료든 유한한 사람에 불과하다.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도 당연히 무능할 수 있다. 경제생활에서 다수의 시민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이들이 무능하다면 그 결과 역시 부정적이다.


게다가 이들도 사람인지라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부패할 수 있다. 정부 부패는 당연히 시민 피해로 나타난다. 아마도 최악의 경우는 무능함과 부패의 결합일 것이다. 경제현안을 진단하고 실행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사리사욕의 부패가 더해지면 그 폐해는 가늠할 수 없다.


한 나라에 두 개의 정부가 있다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함으로써 경제상황을 바로잡을 기회를 갖겠지만, 정부는 하나뿐이므로 표현 그대로 독점적 지위를 가진다. 독점적 지위가 안정성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무사안일과 불합리한 관료주의를 불러올 수도 있다. 경제 분야에서 정부의 무능과 부패, 무사안일과 관료주의는 시민 절대다수의 경제생활을 곤경으로 내몬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정부의 실패를 확장해 국가의 실패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비경제분야 곧 공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 법질서 붕괴, 국방 실패, 교육과 문화의 왜곡 따위 현상으로 국민이 겪는 고통이 정도를 넘을 때, 우리는 국가의 실패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평화신문, 2012년 5월 6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19) 국가의 실패를 경계하며 (2)


갈 길 잃어버린 ‘목자 없는 양’


지난호에서 경제학에 나오는 ‘정부의 실패’를 언급하면서 이를 확장해 ‘국가의 실패’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정부의 행위가 경제분야는 물론이고 비경제분야에서 실패할 때 국민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긴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 법질서(정의) 붕괴, 국방 실패, 교육과 문화 왜곡 따위 불의한 현상으로 국민이 겪는 고통이 정도를 넘을 때 역시 우리는 국가의 실패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드러난 국가의 실패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이 같은 국가의 실패를 가르치는 대목을 찾아보자. 시대는 다르지만 우리 현실을 유비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사무엘 상권 8장 10-18절을 그대로 옮긴다.


사무엘은 자기한테 임금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을 모두 전하였다. 사무엘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오.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으로 삼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고 수확하게 할 것이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오. 또한 그는 여러분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 제조사와 요리사와 제빵 기술자로 삼을 것이오. 그는 여러분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주고,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 여러분의 남종과 여종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 그리고 여러분의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오. 여러분의 양 떼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갈 것이며, 여러분마저 그의 종이 될 것이오. 그제야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 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


그러나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마다하며 말하였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은 하느님만이 임금이었던 부족국가 이스라엘이 이제 왕이 다스리는 왕정국가로 넘어가는 시대상이 반영돼 있다. 성경학자들은 이 대목 중 이스라엘이 왕정국가체제시대에 접어들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신앙으로 재해석한다. 앞에서 다룬 내용을 빌면, 국가의 실패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신약성경의 복음은 힘없는 식민지 백성과 당대 최고 권력을 가진 통치자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취한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동족 유다인들은 국가의 실패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로마 식민통치는 유다인의 모든 사회생활 영역에서 폐해를 끼쳤다.


정치적 예속과 경제적 피폐, 문화 · 교육의 왜곡, 인간 존엄성 상실은 유다인 개인뿐만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 전체를 어둠으로 내몰았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시대가 그랬으며,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의 처지와 같아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대 지도자들의 무능과 부패, 기득권 유지를 위한 율법주의, 즉 관료주의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내몰았다. 백성의 처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국가의 실패라고 부를 수 있다.


국가의 성공을 위한 국민의 관심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이땅에 오셨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셨다. 국가의 실패라는 현실에서 예수님은 변함없이 아버지 하느님 뜻을 따르셨다. 예수님은 쓰러진 백성을 일으켜 세우시려 했다. 로마 권력과 그 권력을 등에 업고 법과 제도를 운용하는 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없애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행적은 정치적이라 할 수 있다.


역사는 언제나 국가의 실패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 35년과 6 · 25전쟁이 그렇다. 얼마나 많은 국민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국가의 실패로 인한 상처와 폐해는 아직도 온전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할머니들 시위는 어느새 1000차를 훌쩍 넘겼다. 6 · 25전쟁으로 남과 북에서 서로 그리워하며 고향에 갈 날만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이 겪는 고통 역시 국가의 실패가 낳은 비극이다.


아마도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에 의해 국가의 성패가 갈릴 것이다. 국가라는 틀 안에서 국민으로 사는 우리가 국가의 실패를 경계하고 좋은 정부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평화신문, 2012년 5월 13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0) 시장의 실패를 바라보며 (1)


국가와 시장, 상호보완 필요할 때


전체 국민에게 유익한 영향은 다 어디 갔어∼


지난호에서 정부 혹은 국가(the state)의 실패를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부가 경제분야에 개입함으로써 오히려 경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를 '정부의 실패'라고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분야뿐만 아니라 인권과 사회정의, 법질서, 교육, 문화, 국방 따위 비경제적 분야에 걸쳐 시민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를 '국가의 실패'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하며 현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봐야 한다. 오늘은 정부의 실패에 대응하는 '시장의 실패'에 대해 살펴보자.


서민의 삶을 고달프게 하는 시장의 실패


시장의 실패란 정부가 경제분야에 개입하지 않거나 개입하더라도 최소한으로 개입했을 때, 혹은 부적절하게 개입했을 때 나타나는 폐단을 말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그레고리 맨큐의 「경제학」에서는 시장의 실패(market failure)를 "시장이 자유롭게 기능을 하는 상황에서도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설명한다.


19세기 자유주의 경제와 자유방임의 시장경제는 △빈부격차와 빈곤의 확대 △주기적 불황과 대량실업 △규모의 경제에 따른 독과점화 △공공시설과 공공서비스 같은 공공재의 부족 △환경파괴와 오염 같은 외부불경제 효과를 유발했다. 자신의 나쁜 행위로 타인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것이 외부불경제 효과로, 이 때문에 시민의 삶은 고달파진다. 이를 '시장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실패와 심화되는 사회 불평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시장의 실패를 극복하거나 완화하고자 정부 개입을 요구하는 이른바 수정자본주의가 등장한다. 이는 정부가 자본주의의 토대를 유지하며 시장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분야에 개입하는 것을 말한다. 수정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경제 운용은 시장의 실패를 완화하거나 극복하는 동시에 경제성장을 가져온 것처럼 보였다. 인류 역사에서 그만한 경제적 번영을 누린 적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이 번영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정부의 실패가 나타난 것이다. 정부가 경제 분야에 개입했지만 무능, 부패, 무사안일, 혹은 관료주의로 경제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경제생활을 하는 절대다수 시민을 곤경으로 내몰았다고 비판받는 대목이다.


그리고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 대처 수상이 집권하는 1980년대부터 우리 귀에 익숙한 '작은 정부'의 구호가 만병통치약처럼 등장했다. 정부의 시장 개입을 비판하고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여 지난 30여 년 동안 전 세계에 위세를 떨쳤다.


그런데 이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은 2008년 미국의 주택담보 대부업 사태로 확산되며 전 세계 금융위기와 경제위기를 불러왔다. 금융규제완화의 폐해와 불평등의 심화는 우리 시대의 난치병이 되었다.


시장과 국가 서로 보완하고 조화를 이루는 세상


앞에서 제시한 폐단들의 정도와 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언론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용어들만 떠올려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빈곤의 확산으로 20:80으로 불리던 빈부격차의 골은 10:90으로, 급기야 1:99의 세상으로 묘사된다.


주기적 불황과 대량실업은 세계적 경제위기, 혹은 금융위기, 대불황이란 용어로 대치됐다. 대량실업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란 말로 이름을 바꿨다.


대기업과 재벌, 초국적 기업의 영업이익 잔치와 중소기업의 몰락 또한 낯설지 않다. 공항과 도로, 철도, 의료, 교육 전 분야의 공공재를 민영화하려 한다. 민영화의 폐단을 숨기기 위해 선진화란 용어까지 만들었다. 환경 보호를 노래하면서 4대강과 갯벌 개발, 해군기지와 핵발전소 건설 같은 환경파괴 사업이 돈벌이 사업으로 강제 추진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공공부채와 가계부채가 각각 1000조에 육박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수많은 사람이 품위 있는 생활은커녕 생존 그 자체를 감사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시장의 실패에다 정부의 실패가 겹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시장과 국가는 서로 보완하며 조화롭게 활동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자유 시장은, 국가가 경제 발전의 윤곽을 정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체계를 갖출 때에만 전체 국민에게 유익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시장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을 다 동원해서도, 국민들의 인간적 성장에 필수적인 재화와 용역이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보장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 그러한 경우, 국가와 시장의 상호 보완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간추린 사회교리」 353항)


한 개그맨의 유행어 "전체 국민에게 유익한 영향은 다 어디 갔어∼"가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평화신문, 2012년 5월 20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1) 시장의 실패를 바라보며 (2)


공정한 분배, 선택 아닌 도덕적 요구


세계화, 기회와 위험의 공존


우리는 통신과 교통수단 발달로 공간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 사람과 실시간으로 얼굴을 보며 대화도 한다. 저 먼 나라에서 열리는 축구경기를 방에 누워서, 혹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시청할 수도 있다. 지구촌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에 직면해 있다. 오늘날 세계는 금융규제 완화로 인한 폐해로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심화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적절한 처방을 내놓지 못한 채 장기간 대불황을 겪고 있다. 세계 많은 시민의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의 「간추린 사회교리」에서는 세계화를 '기회와 위험'으로 진단하고 있다.


시장 실패로 심화하는 사회 양극화


더 걱정스러운 것은 그동안 각국 정부가 위기 때마다 내놨던 대책에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플레이션으로 경기를 되살리는 통화팽창정책과 국채발행 같이 정부가 미래에 생산될 자원을 미리 앞당겨 쓰는 공공부채정책, 개인이 융자를 받아 생활하도록 돕는 민간부채정책과 같은 처방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돈을 찍어내도 물가상승에 맞는 실질임금인상이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통화정책을 무한정 완화할 수도 없게 됐다.


정부로서는 공공부채 원금과 이자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상황이 됐다. 경제적 부담 가운데 상당히 많은 몫을 국민 세금으로 해결해야 한다. 2011년 기준 우리나라 2인 이상 가구당 소득이 4600만 원인데, 부채는 이미 5100만 원을 넘었다. 지금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힘겨움의 무게는 미래 세대가 겪을 그것에 비하면 차라리 가벼울지 모른다.


정부의 실패를 포함해 국가의 실패를 이야기한 것처럼, 시장의 실패를 포함해 자본주의 실패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칼 폴라니라는 사상가는 저서 「The Great Transformation」(국내에서는 「거대한 전환-우리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이란 제목으로 번역됐음)에서 시장경제를 '악마의 맷돌'(satanic mill)에 비유했다. 시장의 실패를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독자들은 인내심을 갖고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경제서적과 달리 교회의 「간추린 사회교리」에서는 시장의 실패, 혹은 자본주의 실패란 표현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성찰하는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간추린 사회교리」 2부 7장 '경제생활'에서 시장의 실패를 살펴볼 만한 대목을 소개한다.


"전체 인류나 사회집단 등을 빈곤으로 내몰면서 인간을 희생시켜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재화와 용역의 사용 가능성으로 드러나는 부의 성장, 그리고 이들의 공평한 분배에 대한 도덕적 요구는 인간과 사회 전체에 연대라는 근본 덕목을 실천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정의와 사랑의 정신으로 빈곤과 저개발, 낙후를 낳고 영속시키는 '죄의 구조'가 발견되는 모든 곳에서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갖가지 구체적인 이기적 행위들이 이러한 구조를 쌓아 올리고 강화시킨다."(「간추린 사회교리」 332항)


인간과 사회 연대를 위한 공평한 분배


교회는 인류나 사회집단 등을 빈곤으로 내몰며 빈곤과 저개발, 낙후를 낳고 영속시키는 행위, 즉 인간을 희생시키면서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을 죄의 구조라고 보았다. 자유자본주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시장경제를 악마의 맷돌로 묘사한 폴라니를 떠올리기 충분하다.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 진영 사이에 벌어지는 성장과 분배의 대립적 논란에 대해서도 교회는 길을 제시한다. 부의 성장은 재화와 용역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며, 공평한 분배는 선택이 아니라 도덕적 요구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적 행위들이 죄의 구조를 쌓아 올린다. 교회는 이 죄의 구조를 물리치려는 근본 덕목으로 연대를 촉구한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것은 인간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길이다.


"교회 교도권은 양적인 것만 추구하는 발전 뒤에 숨어 있는 위험을 경고한다. 일정한 사회집단을 위하여 온갖 물질 재화를 지나칠 정도로 확보해 주는 것은 사람들을 자칫하면 '소유'의 노예, 즉각적인 충족의 노예로 만든다.(…) 이것이 이른바 '소비' 문화 또는 '소비주의'라고 하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334항)


즉각적인 충족의 노예로 만드는 이런 경제모델을 교회는 '소비주의'라고 점잖게 비판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를 '천한 자본주의'라고 비판한다. 이 천한 자본주의를 교회는 "강력한 법적 틀(정치와 사회의 통제) 안에 두지 않는 무한자유의 경제 체제"라고 한다.


결국, 시장의 실패와 자본주의 실패는 사람과 사회를 소유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평화신문, 2012년 5월 27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2) 시장의 실패를 바라보며 (3)


늘어만 가는 나랏빚에 깊어가는 서민의 한숨


가계부채와 국가채무


지난 호에서는 우리나라 가계부채를 소개하면서 2인 이상 가구의 한 해 평균 소득이 4600만 원이지만 가계부채는 가구당 5100만 원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가계부채만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다. 바로 국가채무가 있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2007년 299조 원이었던 국가채무가 2012년에는 이보다 약 50%나 증가한 448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더 무서운 것은 채무의 양보다 성격이다.


국민의 또 다른 빚, 적자성 채무


자산을 매각해서 상환할 수 있는 채무를 금융성 채무라고 한다. 돈을 빌려 쓰긴 했지만 가진 어떤 것을 팔아서 갚을 수 있는 채무를 말한다. 빚을 진 것은 부담이 되지만 필요할 때 당장 요긴하게 쓸 수 있으니 고마울 수 있다.


그러나 금융성 채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채무에 대응할 만한 자산이 없어서 시민에게 세금을 걷어야만 갚을 수 있는 이른바 적자성 채무란 것이 있다. 그런데 이 적자성 채무 비중이 2012년 전체 나랏빚의 49.5%인 222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국가채무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채무자가 갚지 못할 때 누군가 대신 갚아야 하는 보증채무란 것도 넓은 의미의 나랏빚이라 할 수 있다. 또 국가재정으로 해야 할 사업을 공기업에 넘긴 예도 있다. 중앙정부와 공기업, 지방정부와 지방공기업이 짊어진 부채도 고려해야 한다.


이 모든 부채를 다 합하면 1000조 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물론 그 가운데 상당 부분(적자성 채무)을 시민이 부담해야 할 것이다. 나랏빚을 갚지 못할 때 지금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도 이어진다. 결코 가볍지 않은 벗기 힘든 짐이 될 것이다.


국가의 감세정책, 불필요한 재정 투입


물론 국가채무의 증가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경기 부양책을 펼치려면 정부가 엄청난 재정을 투입해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부의 세수 확보 없이, 혹은 세수 감소를 꾀하면서 지출을 위해 빚을 낸 경우가 없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23조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한 4대강 사업이 떠오른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차치하고서라도 정부의 적자가 누적되는 상황에서 그 막대한 사업비를 들여 꼭 해야 했는지, 불가피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정부는 종합부동산세와 법인세, 소득세 등에 대한 대규모 감세정책을 펴면서 막대한 세수 감소를 초래했다. 실제로 정부의 조세 부담률은 2007년 21%에서 19.3%로 낮아졌다. '세금폭탄'이란 자극적 표현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면서 세수 감소를 정당화했다. 기업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법인세를 인하했지만, 활성화된 시장에서 분배가 제대로 이뤄졌는지도 의문이다.


상식적으로 똑같은 지출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수입을 줄이지 않았다면 적자는 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수입을 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출을 늘렸으니 빚이 불어날 수밖에 없다. 조세부담률을 높이려면 시민의 조세저항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정부 지출을 줄이려면 이른바 작은 정부를 지향해야 할 텐데, 이는 공공정책의 축소를 불러온다. 이 역시 시민에게는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서민 경제


어쩌면 인위적 통화팽창 정책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플레이션 확대를 가져올 것이다. 인위적 통화팽창은 실질 경제가 생산하지 않은 자원을 짜내면서 일시적으로 소비수준과 소득의 재분배를 유지할 수 있게 하지만, 대규모 실업을 유발할 수 있다. 실질임금이 오르지 않는 상태에서 치솟는 물가에 살아남으려면 시민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또 졸라매야 한다. 정치 분야에서 통화팽창 정책을 반길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가계부채 혹은 민간부채의 위기를 겪고 있다. 여기에 공공부문의 부채 위기와 통화팽창 정책의 한계, 그리고 "윤리적으로 심각한 걱정거리가 된 국제 금융 체제의 극심한 불균형"(「간추린 사회교리」 369항)에 거의 맨몸으로 노출돼 있다.


몇 해 전 미국의 금융위기가 우리나라 실물경제에 끼친 악영향을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금융 거래량이 실물 거래량을 훨씬 능가한 지금, 금융시장의 재채기는 실물시장에 태풍이 되어 돌아온다.(「간추린 사회교리」 368항 참조)


"점점 더 확대되어 가는 경제 환경 안에서(…) 국가의 정부들은 국제 경제와 금융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빠른 변화 과정을 통제할 능력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342항)


[평화신문, 2012년 6월 3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3) 시장의 실패를 바라보며 (4)


양극화로 번지는 빚 권하는 사회


빚지고는 살기 힘들어


"빚지고는 못살아!"는 말이 있다. 좋은 뜻으로 이 말을 할 때는 남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거나, 사회제도나 환경이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줄 때 꼭 보답하겠다는 다짐이 포함돼 있다. 우리 일상생활과 사회구조에서 그렇게 고마워하면서 지낼 수 있는 일이 많다면 그 삶은 하루하루가 살 만한 날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마움보다는 원망 때문에 힘겨울 때도 있게 마련이다. 누군가 나에게 억울하게 불이익을 안겼을 경우, 혹은 내가 처한 사회구조가 터무니없이 부조리할 때가 그렇다. 마음은 증오나 원망으로 어지러워지게 마련이다. 그 정도를 넘으면 "빚지고는 못살아!"가 복수와 보복의 다짐이 된다.


이 시대의 매정한 종


성경에서는 빚이 죄와 관련된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과 빚을 탕감한다는 말이 나란히 쓰인다.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에서 이를 볼 수 있다. 만 달란트를 임금에게 빚진 사람과 그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 이야기다.


1데나리온은 성인 남성이 남의 밭에서 하루 일하고 받는 품삯 정도다. 6000데나리온이 1달란트이다. 이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원화로 환산을 해보았다. 일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하루 밭일을 하면 대략 6~8만 원쯤 받는다고 한다. 도시의 편의점에서 시간제로 일하는 어린 학생들이 시급 5000원을 받으니까, 하루 8시간 일하면 4만 원쯤 받을 것이다.


밭에서 일하건 편의점에서 일하건 하루에 5만 원쯤 받는다고 치면, 백 데나리온은 500만 원쯤 되는 셈이다. 1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이니까 3억 원쯤 될 것이고, 만 달란트는 무려 3조 원쯤 되는 것이다.


성경의 매정한 종은 무려 3조 원을 탕감받아 놓고, 자기한테 500만 원 빚진 친구를 멱살잡이하고 그것도 모자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똑같지는 않지만, 공교롭게도 이를 떠올릴만한 일이 있었다.


우리는 15년 전 쯤 온 나라를 뿌리채 뒤흔들어 놓은 이른바 IMF 사태를 맞았다. 구조조정이니 기업매각이니 하는 말이 낯설지 않았다. 그 당시 매각한 기업이 ○○은행이었고, 이 은행을 사들인 자본이 있었다.


은행을 사들인 자본은 공적자금으로 회사를 정상화시킨 다음 그 은행을 매각하면서 무려 수조 원의 시세차익을 얻었다. 그러는 사이 대학생들은 치솟는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학업에 전념하는 대신 일자리를 찾아 헤매야 했고, 마침내는 대출을 받는 처지로 내몰렸다. 등록금이 대략 500만 원쯤 될 것이다. 누구는 1만 달란트를 탕감받아 자기 것으로 삼았고, 누구는 500만 원을 마련하지 못해 곤경에 처했다. 매정한 종의 비유가 우리에게 현실이 된 셈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1만 달란트를 탕감받아 손에 쥔 것을 능력이라며 부러워하고, 500만 원에 허덕이는 것을 무능력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다.


부의 재분배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우리나라의 가계부채가 평균소득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2011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가구는 1769만 가구이고, 가계부채는 912조 9000억 원이다. 이 가운데 주택담보대출은 392조 원이라 한다. 이를 계산해보면 한 가구당 5100여만 원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2인 이상 가구의 한 해 평균 소득은 4600여만 원이라고 하며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대비 가계부채는 73.8%를 차지한다.


참고로 국내총생산은 외국인이든 우리나라 사람이든 국적을 불문하고 우리나라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생산활동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우리나라의 영역 내에서 가계와 기업, 정부 등 모든 경제주체가 일정 기간 생산활동에 참여해 창출한 부가가치 또는 최종 생산물을 시장가격으로 평가한 합계를 말한다. 여기에는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지불되는 소득과 국내 거주자가 외국에 용역을 제공함으로써 수취한 소득도 포함된다.


하여튼 가계부채가 그렇게 많다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다. 가계에서는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멱살잡이 당하지 않고, 감옥에 가지 않으려면 허리띠를 졸라매고 빚을 갚아야 한다.


우리는 "삶이 고달프다. 경기가 워낙 좋지 않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위로한다. 그렇지만 과연 경기침체 때문만일까? 경기침체보다는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살펴봐야 한다. 적절한 법률적 구조로 통제하지 않는 무제한의 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필연적 귀결은 아닐까 돌아봐야 한다.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이들의 대문 밖에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많은 이들이 지친 몸으로 누워있다"(루카 16,19-21 참조).


[평화신문, 2012년 6월 10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4) 세상 속의 교회 (1)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까?


사회 현실 진단해 복음 선포해야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는 교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사회를 인간다운 발전으로 이끄는 데 있다"며 "이를 위해 교회는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하고, 또한 사회와도 일치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예로부터 교회는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기 위해 교회의 '남은 것'뿐만 아니라 '요긴한 것'을 가지고도 나누었다"며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곳이 없어서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데 교회가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敬神禮)를 위해 값비싼 장식을 마련한다든가, 화려한 성전(聖殿)을 짓는다든가 하는 일은 교회의 신앙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소유의 노예가 된 세상 사람들에게 존재의 복음을 가르쳐 줘야 할 교회가 더 소유하기 위해 애를 쓴다면 이는 교회의 길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이는 교회 발전이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수의 '소유(所有)'가 다수의 '존재(存在)', 즉 인간됨을 손상시키는 사회 현실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사회적 관심」 31항 참조)


예언직, 복음으로 어둠을 밝히는 등불


교회와 신앙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예언직과 사목직과 사제직이라는 '삼중직무'를 받아 수행해야 한다.


이중 예언직은 교회와 세상의 현실을 진단하고, 복음의 빛을 비춰 해석하며, 그 올바른 길, 즉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전통에서 예언자는 주로 두 가지 역할을 수행했다. 하나는 하느님 뜻을 전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돼주는 것이었다. 구약시대 사회적 약자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모든 분야에서 소외된 이들이었다.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회의 약자였다.


거꾸로 힘 있는 사람은 모든 분야에 걸쳐 우월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반영됐다. 그만큼 이들에게는 하느님 백성을 돌봐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하느님 백성을 사지로 내몰기도 했다. 이런 경우 예언자는 힘없는 이들의 편이 되어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불의한 지도자들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구약의 일부 예언자들, 신약의 요한 세례자,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은 바로 이들 불의한 지도자들 손에 처형되는 운명을 맞는다. 예언자들은 특히 지도자들의 불의함으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의 신음에 귀를 막은 채 거행하는 겉치레뿐인 경신례를 비판했다.


예언직 수행이 하느님 말씀을 이용해 힘 있는 사람들 비위를 맞추거나, 힘없는 사람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일은 결코 아니었다. 무병장수의 길을, 대학입학 해법을, 사업번창 비책을, 부동산 개발이익 전망을 돈 몇 푼 받고 알려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용어가 주는 오해라 치부하기에는 성경과 교회의 전통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다양한 역할의 조화와 일치


사목은 섬김을 의미한다. 인간이 되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섬김으로써 하느님 뜻을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 내용을 살피기 전에 용어가 갖는 문제를 짚어보자.


고대 농경사회에서 목자와 가축 관계를 반영한 이 용어가 오늘날 현대인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보다는 다스림과 순종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용어이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목자는 양을 보살피지만 다스리는 지위에 있고, 양은 목자의 다스림에 순종함으로써 자랄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은 사람이고 양은 양일뿐이다. 아무리 목자가 양을 사랑과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섬긴다 하더라도 말이다. 목자와 양은 근본적으로 같을 수 없다.


근대 이전 사람들은 하늘이 누구는 지도자로, 누구는 평민으로, 누구는 노예로 세웠으며, 각각 나름대로 역할을 맡겼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세운 이 질서는 절대적이었으며 신성시되기까지 했다. 사람이 함부로 거스르거나 훼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신분에 따른 구별과 차별은 당연했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제도화했다. 적어도 정치적 의미의 평등이 실현된 현대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질서이다.


예언이라는 용어가 주는 오해만큼이나 사목이라는 용어 역시 오해의 위험이 크다. 성직자를 목자로, 하느님 백성을 양으로 보게 되면 그 둘 사이는 주종(主從) 관계가 형성돼 지배와 피지배 질서를 정당시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혹은 신분에 따른 구별을 넘어 차별을 제도화할 위험마저 있다. 역할의 다양함과 다양한 역할의 조화와 일치를 지향하는 뜻을 담은 용어 개발이 필요한 이유다.


[평화신문, 2012년 6월 17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5) 세상 속의 교회 (2)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까?


참된 인간화 · 사회화를 봉헌물로


교황 회칙에서 본 교회의 역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사회를 인간다운 발전으로 이끄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교회는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하고, 또한 사회와도 일치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투신이다. 예로부터 교회는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기 위하여 교회의 '남은 것' 뿐만 아니라 '요긴한 것'을 가지고도 나누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것이 없어서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데 교회가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敬神禮)를 위해서 값비싼 장식을 마련한다든가, 화려한 성전(聖殿)을 짓는다든가 하는 일은 교회의 신앙이 아니다. 소유의 노예가 된 세상 사람들에게 존재의 복음을 가르쳐 주어야 할 교회가 더 소유하기 위하여 애를 쓴다면 이는 교회의 길을 벗어나는 일이다. 교회의 발전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수의 소유가 다수의 존재, 즉 인간됨을 손상시키는 사회 현실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 31항)


백성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지도자


지난 호에 이어서, 사목의 내용과 성격을 살펴보자.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하느님을 섬기듯 백성을 섬기는 이들이었다. 모세가 그랬으며, 다윗과 솔로몬이 그랬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지도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대에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할 사람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셨으며, 제자들을 벗으로 삼으셨다. 그분에게서는 신분이나 인종에 의한 차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하느님께 대한 순종을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섬김으로 드러내셨다. 그분은 사람을 지도하는 일만 하신 것이 아니라 차별 없이 모두와 동행하셨다.


특히 약하고 힘없는 이웃을 당신과 동일시하셨으며, 그들을 섬기는 것이 곧 당신을 따르는 길임을 분명히 밝히셨다. 사목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사제직은 이 세상을 거룩한 제물로 만들어 하느님께 봉헌하는 직무를 의미한다. 그것은 세상 사물 질서 안에 하느님 정의와 사랑을 심어 그 열매를 맺음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하느님 이름을 거룩히 빛내며, 하느님 나라를 세우며, 하느님 뜻을 이룸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께 거룩한 제물로 봉헌하는 것이다.


경신례는 중요하다. 그러나 겉치레뿐인 예배는 위험하다. 마음을 다해 정성껏 바치는 제사는 중요하다. 그러나 마음뿐인 제사는 위험하다.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이나 겉치레뿐인 경신례는 부정과 불의의 죄를 면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위험은 얼마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침략전쟁이든 정당방위전쟁이든 종교적 예식을 치르고 나서 얼마나 많은 살육의 전쟁이 있었던가!


필자는 예비신자 교리시간에 "만일 우리가 월화수목금토요일에는 온갖 불의와 부정을 저질러놓고, 주일에 두 눈 감고 두 손 모아 경건하게 미사에 참례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가 봉헌하는 이 미사성제를 어여삐 받아들이실까요?"하고 묻는다. 아직 "그렇습니다"하고 답하는 예비신자를 만난 적이 없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신앙 따로 생활 따로'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얼마 전 총선이 있었다. 꽤 많은 그리스도인 후보자가 출마했다. 그 후보자들은 저마다 교회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느님 뜻과 교회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신앙 감각으로 정치 분야에서 활동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 현실에서는 난망하다.


반대로 그리스도인 유권자가 하느님 뜻을 실현할 정치인에게 투표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 역시 무리다. 신앙과 정치를 철저하게 분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는 철저하게 빈말에 불과하다. 실제 그렇다면 이는 알맹이 없는 신앙, 껍데기뿐인 신앙일 뿐이다.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 행하는 경신례가 겉치레에 불과하지 않으려면, 땅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땀 흘려 헌신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경제생활과 정치생활, 문화생활, 국제관계 따위에서 참된 인간화와 참된 사회화를 이루려는 노력으로 거둔 결실을 경신례 제대 위에 봉헌물로 바쳐야 한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제물로 기꺼이 받아주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세상을 거룩하게 하여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제직은 그런 것이다.


교회는 세상 한가운데서 예언직과 사목직과 사제직을 수행할 임무가 있으며, 이 임무의 수행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기도 하다.


[평화신문, 2012년 6월 24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6) 세상 속의 교회 (3)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까?


남은 것 아닌 요긴한 것 나누고 있나


교회 발전은 '소유' 아니라 '존재'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사회를 인간다운 발전으로 이끄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교회는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하고, 또한 사회와도 일치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투신이다. 예로부터 교회는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기 위하여 교회의 '남은 것'뿐만 아니라 '요긴한 것'을 가지고도 나누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것이 없어서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있는데 교회가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敬神禮)를 위해서 값비싼 장식을 마련한다든가, 화려한 성전(聖殿)을 짓는다든가 하는 일은 신앙이 아니다. 소유의 노예가 된 세상 사람들에게 존재의 복음을 가르쳐 주어야 할 교회가 더 소유하기 위하여 애를 쓴다면 이는 교회의 길을 벗어나는 일이다. 교회의 발전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수의 소유가 다수의 존재, 즉 인간됨을 손상시키는 사회 현실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 31항).


하느님 나라의 표지, 교회


필자가 회칙 「사회적 관심」 31항을 계속해서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사목현장에서 만나는 교우뿐만 아니라 많은 동료 사제와 수도자가 갖는 교회의 할 일에 대한 인식과 태도 때문이다.


교회가 해야 할 일과 교회의 신앙, 교회의 길을 '그리스도와 일치'로만 이해하며 이를 경신례로 드러낸다고 믿는 분이 너무 많다. 그럴 경우 교회가 할 일은 당연히 경신례의 테두리에 갇히게 된다.


사회와 일치를 필수가 아닌 선택쯤으로 이해하는 태도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사회를 인간다운 발전으로 이끄는 교회 투신을 개인 성향쯤으로 치부하거나 때로는 불필요한 간섭 정도로 폄하한다. 교회의 그리스도와 사회와의 일치를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병렬 대립시키거나 순서를 매기려 한다. 이 역시 교회의 할 일을 이른바 하느님 사업에 제한한다. 하느님 도구에 불과한(?) 교회가 그 주인이신 하느님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려 하는 셈이다.


지난 호에 교회의 세 가지 직무, 곧 예언직ㆍ사목직ㆍ사제직을 살펴봤다. 오늘부터는 1990년대부터 교우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나눔과 사귐과 섬김을 따져봐야겠다. 교회는 세상에서 나눔과 섬김과 사귐의 원리로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 나라 표지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기준의 나눔


교회 나눔을 성찰할 때 나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무엇을 나눌 것인가 하는 문제도 놓쳐서는 안 된다. 세상의 나눔은 철저하게 주고받기식이다. 그것을 나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고받기식 나눔은 최소한의 질서일 뿐이다. 이를 공정 혹은 정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질서조차 무력화된 무한 자유주의의 시장만능 세상에서, 정의와 공정이 언어유희 소재쯤으로 전락한 우리 사회에서 나눔은 주고받기를 넘어 강자의 수탈 수준으로 치닫는다.


거저 주는 법이 없고, 이익이 생기지 않는 나눔은 어리석음이며 감상주의적 낭만으로 치부한다.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한다. 더구나 대가 없이 퍼주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어리석음만이 아니라 낭비라는 부도덕으로 간주한다.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받을 것도 없다. 내놓을 것이 없으면 차라리 부자들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함이나 인권을 내세워 자기 몫을 주장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 된다. 생존을 위한 비굴함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세상의 이러한 나눔 구조, 아니 거래 구조에서는 사람을 줄 것이 없는 사람과 줄 것이 있는 사람, 받을 것이 없는 사람과 받을 것이 있는 사람으로 구별해 차별한다. 주고받을 것이 많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갖게 되고, 없는 사람은 그만큼 궁핍해진다.


물론 주고받을 것이 재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생활 등 전인적 차원의 참여기회도 포함한다. 이러한 빈익빈 부익부와 불평등 심화는 단순히 경제적 부조리 현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이익을 취할 모든 분야에서 이익을 취할 능력이 있는 이들 사이의 나눔, 즉 거래와 경쟁만 있을 뿐이다. 회칙은 이를 "소수의 소유가 다수의 존재, 즉 인간됨을 손상시키는 사회 현실"이라고 진단한다.


사회적 기준과 다른 교회의 나눔


교회의 나눔은 다른 것일까. "예로부터 교회는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기 위하여 교회의 '남은 것' 뿐만 아니라 '요긴한 것'을 가지고도 나누었다"는 회칙 내용은 오늘의 교회에도 해당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은 누구인가. 우리 교회가 남은 것 뿐아니라 요긴한 것까지도 나누고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혹시 가장 가난한 이들의 신음을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값비싼 장식의 화려한 성전에서 경신례를 거행하는 것만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싶어 함으로써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평화신문, 2012년 7월 1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7) 세상 속의 교회 (4)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까?


세상의 섬김과 다른 교회의 섬김


구원의 표지이자 도구인 교회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예언직과 사목직, 그리고 사제직을 수행해야 한다고 몇 차례에 걸쳐 말했다. 이 직무는 교회가 작위적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창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이 직무는 선택이 아니다. 교회는 나눔과 섬김과 사귐의 공동체로서 세상 안에서 세상의 '대조사회'가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은 교회를 세상 안에서 '구원의 표지이자 도구'라고 정의한다.


뒤바뀐 사회의 섬김


지난 호에서 교회의 나눔을 살펴보았다. 나눔은 결코 이해관계에 따른 거래가 아니다. 남은 것만이 아니라 요긴한 것까지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 31항 참조). 오늘은 교회의 섬김에 대해 우리 모습을 성찰하자.


교회의 섬김은 '누구를 섬기는가'하는 관점에서 세상의 섬김과 구별된다. 교회의 섬김은 세상의 섬김과 방향이 다르다. 세상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힘 없는 쪽에서 힘 있는 쪽으로 섬긴다. 그 대표적 표현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다. 직위에 따른 도덕적 의무쯤으로 번역되는 이 표현이 나온 시대에는 귀족이 평민과 노예를 보살필 의무가 있었다. 물론 평민과 노예는 귀족에게 절대 충성해야 했다.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가며 귀족을 섬겨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툭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거론되는 배경에는 전근대적인 계급적 상호관계가 무너진 것에 대한 개탄이 섞여 있을 것이다. 넘나들 수 없는 계급을 당연하게 여기는 쪽에서는 보통 사람을 하위계급에 묶어 두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럼 지체 높은 사람, 가진 것 많은 사람, 높은 지위에 오른 성공한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삶이 고달플 것이다. 신분상승 기회마저 박탈당할지 모른다. 가난을 대물림할 수 있다. 심지어 정치와 경제, 사회적 기본권, 인간의 존엄함을 드러내는 기본 인권마저 빼앗길지 모른다. 국가는 시민을 통제하고, 자본은 노동을 지배하고, 법은 사회적 약자를 겁박하는 일이 벌어진다. 봉사 혹은 섬김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언어의 유희인 경우가 많다.


정치공동체는 더이상 시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시민이 정치공동체에 순종해야 하는 꼴이다. 노동자가 땀 흘린 1시간의 가치가 5000원도 안 되지만 그마저 자본에 구걸하고 선처를 기다려야 할 처지다. 사회적 약자는 법적 권리마저 보호받지 못한다. 그래서 저마다 한을 품는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노랫말을 곱씹으면서 성공하겠다고 뱃속에서부터 다짐한다.


하느님 백성을 향한 교회의 섬김


교회 공동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를 걱정하는 대화를 나누다가도 "오죽하면 평신도를 '병신도'라고 하겠어"하는 자조 섞인 말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평신도라는 용어를 바꿀 생각을 하는 이도 없다. 평신도가 귀족과 대조되는 신분을 드러내는 전근대적 용어임에도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찾아보기 힘들다.


성직자와 수도자 사이의 위계질서 역시 다르지 않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현장에서 성직자와 수도자 사이에는 높낮이가 분명하다. 하느님 백성 곧 교회의 보편사목직을 분명히 밝혔음에도, 성직자는 수도자의 '사목'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목 협력자'라는 말을 붙여 인심을 쓴다.


성직자라고 해도 다 같은 성직자도 아니다.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가 존재한다. 둘 사이의 벽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다. 물론 교계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교계제도를 신분의 구별쯤으로, 그리고 신분에 따른 지배와 복종의 관계쯤으로 이해하는 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이 정의한 것을 수용할 여지는 없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사목하고 또 언제나 증가시키도록 당신 교회 안에 온몸의 선익을 도모하는 여러 가지 봉사 직무를 마련하셨다"(「교회헌장」 18항).


그런데 우리는 이 봉사 직무가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것이며, 그 목적은 온몸의 선익을 도모하는 데 있음을 외면한다. 섬김은 찾기 어렵고 다스림만 도드라진다.


교회의 섬김은 그리스도의 몸, 하느님 백성을 향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봉사 직무의 전형을 교회 창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누구를 섬겼는지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준다. 현학적, 철학적, 신학적으로 해석할 필요도 없다.


하느님 아들만큼 지체 높고 힘 있고 모든 것을 가지신 이가 또 있을까. 그런 분이 당대의 주변인을 섬기셨다.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이들을 벗으로 삼으셨고 당신과 동일시하셨다.


교회의 섬김은 그런 것이다. 그분처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으로 내몰린 이들, 곧 사회적 약자를 섬기지 않는 것은 '교회의 길'에서 일탈한 것이다.


[평화신문, 2012년 7월 8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8) 세상 속의 교회 (5)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까?


사회적 약자와 사귐 이루고 있나


세상 안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교회의 교회다움을 살펴보았다. 이는 세상을 초월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 안의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모습을 말한다. 교회의 초월성과 역사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아마도 '대조사회'가 아닌가 한다.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조사회로서의 교회는 예언직과 사제직, 사목직을 수행하며 나눔과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를 이룬다. 교회는 세상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완성하려는 인류와 동행한다. 오늘은 그 마지막으로 교회의 사귐에 대해 성찰하자.


계급적 사귐이 사회의 분열으로


세상의 사귐은 유유상종, 끼리끼리의 형태를 띤다. 사는 동네가 달라도 교류하기 힘들다. 사람을 만나면 어느 동네에 사는지를 물어본다. 사는 지역을 확인하는 순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아무리 죽마고우라도 인생 여정이 다르면 함께 자리하는 것이 어색할뿐더러 사귐을 이어가기가 힘들다. 먹는 것도 다르고, 입는 옷도 다르며, 즐기는 문화도 다르다.


어른들은 그렇다 쳐도 아이들 다니는 학교, 어린이집도 다르다. 심지어 놀이터와 장난감까지도 다르다. 단순히 다른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다양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것이 아니라 질적 수준의 격차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격차는 점점 더 심화한다.


사귐은 철저하게 계급으로 바탕으로 이뤄진다. 계급의 벽은 너무 높아서 넘어설 수 없다. 서로 사귀지 못하게 하려고 경계의 담을 치기도 하고, 섞이지 않도록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한 인간을 특정계급에 귀속시키고, 그 안에서만 어울릴 것을 강요한다. 물론 상위계급으로 도약할 기회는 언제나 있지만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나 하위계급으로 추락할 위험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 만큼 쉽다.


이른바 3계급사회(상류, 중류, 하류)는 급속히 허물어진다. 중산층의 몰락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1:99의 사회'가 아닐까 한다.


계급과 계급 사이의 괴리도 점점 커진다. 이런 사회에서 하위계급에 속한 이들은 절망하며 미음에 증오를 키워가기 쉽다. 상위계급에 속한 이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경멸하기 쉽다. 나눔을 실천해도 우월적 지위에서 베푸는 '동정'정도에 머문다. 이해관계나 수준에 따라 사귐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교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끄는 수레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사귐은 소외된 이웃과의 사귐이다. 뜻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하다못해 피부색이 다르고, 수준이 다르고, 그래서 중심에서 설 자리가 없어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과 사귀는 것이 교회다운 사귐이다. 이를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혹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고 한다.


세상의 사귐이 유유상종의 사귐이라면, 교회의 사귐은 세상이 배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사귐이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과 대조되는 교회의 교회다움을 실현할 수 있다. 절망과 미움과 증오를 물리치기 위해서, 경멸과 우월감과 동정을 넘어 한마음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는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고 사귀어야 한다.


이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교회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을 덜어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교회헌장」 8항).


오늘 우리 교회가 누구와 사귀며, 누구를 섬기며, 누구와 나누고 있는지 돌아보자. 교회의 세상 안으로의 투신은 한마디로 약자를 섬기고, 가난한 이와 나누고, 소외당한 이와 사귐으로써 세상을 인간다운 발전으로 끌어가는 '끌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땀을 흘리고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남은 것' 뿐만 아니라 '요긴한 것'마저 내어놓아야 한다.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내어놓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고통과 희생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다"(「교회헌장」 8항).


값비싼 장식이 달린 옷을 입고는 수레를 끌 수 없다. 값비싼 장식이 훼손될까봐 수레에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 또 화려한 수레를 만들면 아무 짐이나 실을 수 없다. 실을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혹여 싣더라도 품위 있고 괜찮은 값나가는 물건만 실을 뿐, 그 안에 형편없는 물건이나 지저분한 쓰레기 같은 물건을 싣지 않는다.


이는 인간다운 발전을 위해 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를 실을 수 있는 끌차가 아니라, 위세를 부리고, 자랑하고, 만족을 가져다주는 고급 승용차에 앉은 귀족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신앙이 아니며, 교회의 길을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소수의 '소유'가 다수의 '존재', 즉 인간됨을 손상하는 사회 현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31항 참조)을 보고 있다. 바로 그 현실에 오늘의 우리 교회가 있다.


[평화신문, 2012년 7월 15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9) 평화는 무력으로 얻을 수 없다


군비 경쟁으로는 평화 보장 어려워


무력은 평화의 도구인가


"많은 사람들이 무력 증강이 가상의 적에게 전쟁을 단념하도록 하는 역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것을 국가 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유효한 것으로 여긴다(…). 군비경쟁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킬 위험이 높다. 냉전 기간의 전형적인 핵 억지 정책은 대화와 다자간 협상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인 군비 축소조치로 대체되어야 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315항 ; 「간추린 사회교리」 508항 참조).


과열되는 군비경쟁


지난 6월 14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ㆍ미 외교 국방장관 회담이 열렸다. 한ㆍ미 양국은 한ㆍ미ㆍ일 사이 군사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군사협력'이 북한을 포함한 중국까지 견제하는 군사력 블록 형성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남북관계 개선과 동북아 평화 건설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군비증강을 촉발할 것이란 우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군사력이란 결국 가상의 적대세력을 향한 힘이기 때문이다. 군사협력을 우려하는 배경은 다음과 같다.


우선, 양국은 공동성명에서 "북한의 점증하는 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포괄적인 연합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 관계자는 이를 "현재 추진되는 한국형 미사일방어 체제에 미국이 정보 탐지 식별 타격을 위한 시스템을 지원해 한ㆍ미공조를 강화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한국이 미국의 미사일방어 체제에 적극 참여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미사일방어 전략은 새로운 군비경쟁을 촉발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 러시아나 유럽도 이에 맞서 공동 미사일방어망을 구축하기로 한 상태다.


다음으로, 공동성명은 일본과의 안보 협력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한ㆍ미일 3자 협력의 범위를 재난구호에서 해양안보, 항해의 자유,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으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최근 "국가의 안전보장에 이바지한다"(「원자력규제위원회 설치법」 부칙 12조)는 명목아래 사실상 핵무장의 길을 열었다.


지역 평화를 위협하는 군비경쟁


일본은 우주항공연구개발 기구의 활동을 '평화 목적'으로 한정했다. 그러나 그 규정을 삭제한 개정안을 통과시켜 우주 활동의 군사적 이용, 즉 대륙 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 지난해 말에는 공산권 국가, 유엔이 금지한 국가, 국제분쟁 당사국 혹은 분쟁 우려가 있는 국가에 무기수출을 금한다는 무기수출 3원칙을 완화했다. 제3국과의 무기 공동개발 및 생산의 길을 열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일본은 헌법해석의 수정으로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가 제3국으로부터 무력 공격을 받았을 때 일본이 공격을 받지 않더라도 제3국을 공격할 수 있는 '집단적 자위권' 허용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인류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다. 그 결과로 집단적 자위권행사 금지라는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 일본의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우리 언론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군사 대국화', 혹은 점잖게 '우경화'라고 말한다.


군사력 증강은 일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난 6월에는 미국 항공모함이 동원된 한ㆍ미ㆍ일 해상훈련이 한반도 인근해역에서 실시됐다. 서해에서는 한ㆍ미연합 해상 기동훈련이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지난 4월 청도에서 해상 연합군사 훈련을 진행한 바 있다. 냉전 종식 이후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을 지향해온 동아시아의 시대정신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한ㆍ미ㆍ일과 북ㆍ중ㆍ러 양 세력이 군사력으로 대립하는 형국이다.


시대를 넘어 되풀이되는 군비경쟁


우리 가운데에는 북한의 위협과 중국의 부상(浮上)을 우려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이에 맞서기 위해 "한ㆍ미 혹은 한ㆍ미일 동맹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구체적으로 "무력 증강이 가상의 적에게 전쟁을 단념하도록 하는 역설적인 방법"이며 "국가 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유효한 것"(「사회교리」 508항)이라 여기는 분들도 있다.


교회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나 '적대세력의 균형유지'가 아니다(「사목헌장」 78항). 게다가 교회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가르친다.


"군비경쟁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킬 위험이 높다. 냉전 기간의 전형적인 핵 억지 정책은 대화와 다자간 협상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인 군비 축소조치로 대체되어야 한다"(「사회교리」 506항).


과거 동서의 냉전 기간의 전형적인 핵 억지 정책이 한반도에서 한ㆍ미ㆍ일과 북ㆍ중ㆍ러의 군사력 대립으로 재연되고 있다.


[평화신문, 2012년 7월 22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0) 갈라진 세상과 교회의 투신 (1)


불평등으로 갈라진 세상, 일치 위한 교회 투신 필요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사회를 인간다운 발전으로 이끄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교회는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하고, 또한 사회와도 일치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투신이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 31항).


그동안 교회의 나눔과 섬김과 사귐에 대해 몇 차례 살펴보았다. 교회 직무로서의 예언직과 사목직, 사제직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 연장 선상에서 '교회의 투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양극화 이면, 절대 풍요와 절대 빈곤


개막 50년을 맞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현대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를 급격한 변화와 심각한 불균형으로 보았다. 또한 현대 세계의 인간이 처한 상황을 희망과 고뇌로 진단했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서술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인류가 이토록 풍요로운 재화와 능력과 경제력을 누려 본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 인구의 상당수는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사목헌장」 4항)일 것이다. 한쪽이 부를 쌓을 때 다른 쪽은 굶주리는 형국이다.


사람들은 이를 '양극화'라고 부르지만, 이 용어는 사회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무디게 한다. 양극은 중간 부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이 말은 듣는 사람 대부분이 자신은 양극의 중간지대에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현실은 중간지대의 급속한 붕괴, 곧 중산층의 빠른 붕괴 현상을 보인다. 중간지대가 상위로 올라가면 그것을 발전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중산층 붕괴는 하위층으로 추락하는 빈곤화를 뜻한다. 이 양극화는 사실 '소수의 풍요로움과 절대다수의 빈곤'을 뜻한다.


교회는 "현대 세계는 경제와 금융의 복잡한 세계화 현상을 특징으로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61항)고 진단했다. 교회는 세계화가 가져올 '기회'를 다음과 같이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세계 경제 분야의 새로운 기회들을 확인하는 것과 더불어 상업과 금융관계의 새로운 차원들과 관련된 위험을 보게 된다. 실제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선진국들 사이에서도 불평등이 심화되는 경향을 드러내는 수많은 징후들이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362항).


오늘날 세계경제를 위기에 몰아넣은 금융 위기에 대해서도 교회는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이른바 '세계 자본시장' 조성은 자본의 유동성 증가로 생산성 부문의 자원 접근성을 높였기 때문에 유익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 위기의 위험을 증대시키기도 하였다. 금융 거래량이 실물 거래량을 훨씬 능가한 지금, 금융 부문은 경제의 실질적 토대를 무시하고 자신만을 발전의 준거로 삼을 위험이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368항).


불평등과 불균형 숙명 아니다


'소수의 풍요로움과 절대다수의 빈곤'은 소수 금융자본 소유자의 무한 풍요로움과 아울러 절대다수인 실물시장 참여 시민의 절대 빈곤화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몇 해 전 세계 금융시장의 상징인 미국 월가의 시위자들이 내세운 구호'1 : 99 사회'는 이를 반영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밝힌 심각한 불평등 혹은 심각한 불균형 역시 마찬가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년이 지났음에도 이 심각한 불균형 정도가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 이 지구는 하나의 지구촌이 아니라, 두 세계로 갈라져 그 거리는 급속히 벌어지고 있다. 상상초월의 풍요로운 재화와 능력과 경제력을 만끽하는 세계와 역시 상상초월의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의 세계가 그것이다.


풍요로운 재화와 능력, 경제력을 누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장밋빛 희망을 노래한다. 그러나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신음 내는 것조차 버겁다. 세상은 풍요로운 재화와 경제력을 소유하는 것이 유능함이며, 가난과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무능함이라고 끊임없이 세뇌한다. 무능을 탓해야지 유능함을 탓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세상의 불평등과 불균형은 마치 필연이며 숙명의 그 무엇이 돼버렸다.


교회는 풍요로운 재화와 능력의 사회와 일치하기 위해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사회로의 투신을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평화신문, 2012년 8월 5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1) 갈라진 세상과 교회의 투신 (2)


정치, 누구를 위한 도구인가...시민 섬기는 봉사 정신 필요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사회를 인간다운 발전으로 이끄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교회는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하고, 또한 사회와도 일치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투신이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 31항).


지난 호에서 경제 분야의 심각한 불균형, 소수의 풍요와 절대다수의 빈곤에 대해 살펴봤다. 또 심각한 사회 양극화와 관련해 '교회의 투신'을 성찰했다. 교회는 '풍요로운 재화와 능력과 경제력'의 사회와 일치하고자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사회와의 투신을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일회용 소비자로 내몰린 시민


그런데 이 불균형 현상을 경제 분야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정치 분야에서도 양극화가 위세를 떨치고 있다. 요즘 각 정당은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를 내세우기 위해 분주하다. 그런데 정당에 속하지 않은 어떤 인물의 지지율이 기존 정당의 유력 후보 지지율을 무색하게 한다. 그리고 어느 진보(?)정당은 내부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같은 몸에 다른 옷을 걸쳤을 뿐인 이상한 진보와 이상한 보수가 서로 자리다툼을 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진보정치세력은 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채 좌초할 위기에 처했다. 우리에게 진보정치세력이 형성된 것인지, 우리에게 보수정치세력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이 땅의 시민 대부분은 정치 주체라기보다는 소비자, 그것도 일회용 소비자로 내몰린 게 현실이다.


진보든 보수든 정치의 토대와 목적은 '시민을 위함'이어야 한다. 그러나 진보정치세력과 보수정치세력에서도 시민을 위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다. 저마다 권력, 그것도 지배권력을 탐하는 세력 사이에서 '그들만의 정치'만 요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진보든 보수든 정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구의 분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 시민은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혹은 구경꾼으로 내몰린다.


정치 분야에서도 그렇게 양극화는 심화된다. 정치를 업으로 삼는 "소수가 막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만, 다수는 자발적으로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가운데 흔히 비인간적 생활조건과 노동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사목헌장」 63항).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불균형과 불평등이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힌 더욱 근본적인 저 불균형에 직결된다"고 보았다. 어떤 점에서는 맞고, 어떤 점에서는 틀렸다.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명제 역시 맞지만, 인간이라고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현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한계를 뼈에 사무치게 체험하며 좌절조차 사치인 세계의 사람들과 무한한 자기 욕망을 주체 못하는 세계의 사람들과 어떻게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사목헌장」 10항 참조).


갈라진 세상, 교회는 답해야 한다


게다가 정치공동체인 한 국가 안에서 시민을 위해 경제를 통제해야 할 정치와 사회는 점점 시장의 유익한 도구쯤으로, 곧 경제의 충실한 봉사자로 전락하고 있다.


"매일같이 현 경제위기를 수놓고 있는 사건들을 보면 '시장'이 국가를 지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칭 '민주주의 주권 국가'라고 하나 국가는 시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그어놓고, 시민이 요구할 수 있는 것에 양보를 종용하는 모습이다. 국민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확인한다. 바로 정치 지도자들이 자국민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국가나 민주주의의 준엄한 원리에서 비켜 있는 유럽연합(EU)이나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국제기구들을 위해 봉사한다"(르몽드 타블로이드 2012년 1월호 1면).


인류의 심각한 의문은 어떻게 한 인류가 두 하위 부류로 그렇게 철저하게 나뉘고 있는가이다. 피조물들에 대한 지배를 날로 강화할 수 있는 소수의 권력 독점 정치세력은 무능(?)한 부류의 대다수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조물로 만들어가고 있다(「사목헌장」 9장, 10장 참조).


이 심각한 의문에 교회는 답해야 한다. 인류 구원의 도구인 교회가 갈라진 세상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인류 구원의 공동체성과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지 않으시는 분"(「교회헌장」 8항)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헌장」 1항)다.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눠 주도록 부름 받고 있음(「교회헌장」 8항)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평화신문, 2012년 8월 12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2) 폭력에 익숙한 사회, 폭력을 용인하는 국가


평화와 폭력은 공존할 수 없어


산책하다 보면 종종 경찰 순찰차를 만난다. 순찰차마다 5대 폭력을 근절하겠다는 문구가 붙어 있다. 조직ㆍ학교ㆍ성ㆍ주취(酒醉)ㆍ갈취폭력이 경찰이 뿌리를 뽑겠다는 5대 폭력이다.


산책길에서 학교와 인도 사이에 걸린 현수막도 볼 수 있다. 신고만 하면 학교폭력을 해결해주겠다는 내용이다. 어떤 경우에는 교문 위에 버젓이 '학원폭력 집중 추방기간'이란 현수막도 걸려 있다. 이런 현수막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사회 곳곳 폭력의 그림자


비록 어린 학생들이 과중한 학업으로 힘들어하지만, 산책하는 동안 스치듯 그들과 만나는 시간은 언제나 기쁘다. 그렇게 예쁜 청소년들과 '폭력'이 어찌 어울릴 수 있단 말인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폭력이 청소년들 공간에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닌지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근래 경찰이 주취폭력을 추가해 시민들이 알기 쉽게 5대 폭력으로 정리해 주었지만, 어떤 폭력이든 폭력은 국가 공권력의 적이었다. 치안을 담당하는 대다수 경찰은 사회에서 폭력을 추방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언론이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다룰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배경과 원인 가운데 하나가 '학교 당국의 안이한 대응' 혹은 '묵인'이었다. 학교에서 조직적 따돌림과 폭력이 반복돼도 교사가 몰랐거나, 묵인했거나 적절하게 예방하지 못했다는 질책이 반복된다.


심지어 폭력을 매매하는 회사가 생겨 성업 중이다. 국가만이 경찰력과 군사력이라는 합법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고전적 국가주의 국가론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민간영역의 폭력은 그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는 불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폭력이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 등장한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최근에 새롭게 생긴 현상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민간의 폭력을 묵인했다. 재개발과 뉴타운사업으로 전국의 도시 곳곳에서 갈등이 있었다. 한쪽에서는 재산권을 내세워 개발하겠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주거권을 내세워 반대하며 대치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철거를 강행했다. 대부분의 현장에는 용역회사에서 파견된 혹은 시행사가 계약을 맺고 임시로 고용한 직원들(?)이 있었다.


철거현장에서는 철거 반대 주민과의 충돌이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이며, 많은 경우 물리적 충돌이 발생한다. 그 현장에 혹은 그 주변에 20대 초반의 경찰기동대원들이 있으며, 사복에 무전기를 든 경찰도 있다. 폭력행위가 일어나도 경찰은 누군가의 명령으로 묵인하고 지켜 볼 뿐이다. 헬멧 속 청년 경찰의 눈빛은 폭력을 고통스럽게 각인한다.


심판이 경기 중 반칙을 못 본체 하면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갈등 현장인 노사분규 현장도 철거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출동한 경찰의 목적이 폭력적 충돌을 막는 것이 아니다. 노사분규를 그저 지켜보는 경찰은 어느 한 쪽을 편든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한다. 이 때 내세우는 명분은 언제나 노사자율, 주민자율 해결 원칙 같은 것이다. 이는 단체경기 중 반칙을 했는데 심판이 못 본체 하는 것과 같다.


가난하고 힘이 없는 세입자 혹은 재개발을 반대하는 주민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자금을 갹출해 폭력을 상품으로 파는 용역회사와 계약을 맺는다고 가정해보자. 그 용역회사 직원들이 재개발 현장에 등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일 노동조합이 회사 측 용역회사 직원 동원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다며 또 다른 용역회사와 계약을 맺으면 어떻게 될까? 헬멧을 쓰고 곤봉과 방패를 손에 든 건장한 청년들이 고용주를 위해 무력으로 충돌할 것이다. 각각 자신을 고용한 쪽과의 계약이행을 내세워서….


폭력이든 폭력의 묵인이든 그 어떤 경우도 불법이다. 시민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국가에 경찰력이라는 공권력을 위임했다. 그런데 우리는 폭력을 용인하는 국가를 체험하고 있다.


폭력은 교회 가르침에 명백하게 어긋난다.


"인간관계와 사회관계에서는 폭력이 출현하였다. 평화와 폭력은 공존할 수 없으며, 폭력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실 수 없다"(「간추린 사회교리」 488항).


불법을 따지기 이전에 교회는 폭력을 악이며 거짓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폭력은 악이며,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고, 인간에게 걸맞지 않는 것이다. 폭력은 우리가 믿는 진리, 우리 인간에 관한 진리와 상충되기 때문에 거짓이다. 폭력은 그것이 수호한다고 주장하는 것들, 곧 인간의 존엄과 생명, 자유를 파괴한다"(「간추린 사회교리」 496항).


[평화신문, 2012년 8월 19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3) 성체훼손, 더 강력해진 억압기제에 직면한 교회


무참히 내팽개쳐진 그리스도의 몸


신앙의 핵심이며 본질인 성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이용훈 주교는 10일 제주 강정마을의 성체 훼손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독자들에게 그 전문을 소개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지난 8월 8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현장에서 천주교 신부들이 미사를 집전하던 중에 경찰이 강제 진압을 시도하다가 성체가 훼손된 사건에 대하여 충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며 폭거임을 밝힙니다.


성체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내어주신 그분의 몸으로, 우리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며 본질입니다. 성체가 훼손된 것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님께서 짓밟히신 것이므로, 가톨릭교회는 이를 절대로 묵과할 수 없습니다.


정부가 국가 안보를 명목으로 강행하고 있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처음부터 주민의 뜻을 왜곡하였고, 의사 결정과 공사를 강압적 방식으로 무리하게 진행하였으며, 제주지역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심화시켰습니다.


해군기지 건설이 강행되는 동안, 경찰 등 공권력은 이에 반대하는 이들의 집회에 강압적, 폭력적으로 대응하였고, 가톨릭교회의 신성한 종교집회인 미사에 난입하여 사제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직접적 대응을 자제해 왔으나, 유감스럽게도 정부는 그 뜻을 무시하며 경찰의 폭력 행사를 묵인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톨릭 신앙의 핵심인 성체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번 사건에 대하여 책임자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합니다. 아울러 국가 안보라는 미명하에 강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즉각 중단하여, 제주도를 정의와 생명의 가치가 살아있는 평화의 섬으로 만들어 줄 것을 촉구합니다.


힘겨운 도전에 직면한 교회


과거 군사독재 시절 수많은 무명의 학생과 노동자, 지식인과 언론인, 문화예술인과 종교인은 이웃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사목헌장」 1항)를 함께 나누었다. 민주화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 결실로서 오늘의 우리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주권재민의 원리와 시민 기본권을 인정하는 민주주의 제도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곧게 낼 길, 메워야 할 골짜기, 낮추어야 할 산과 언덕, 평탄하게 해야 할 거친 길"(루카 3,5 참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새 하늘 새 땅'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어쩌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운 도전에 직면했는지 모른다.


"세계화를 구호로 내세우며 등장한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은 모든 사물에 자본의 논리를 강요하며 인간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과거 정치 이데올로기와 법률체계, 매스미디어 등을 통해 저항세력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던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자본의 힘까지 결합되어 모든 비판과 반대의견을 잠재우는 새로운 방식의 억압의 기제를 보편화하고"(존 베리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 중에서) 있기 때문이다.


4대강 사업, 용산 참사, 해고노동자 죽음, 강정 해군기지 건설, 경비전문회사의 파업노동자에 대한 폭력과 직장폐쇄….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그 공통점은 정치 이데올로기, 법률체계, 매스 미디어와 자본의 힘으로 무장한 새로운 방식의 억압기제가 작동했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처형되신 것처럼, 오늘날 새로운 방식의 십자가(억압기제) 무게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도 그 억압기제의 작동 앞에 무참히 내팽개쳐진 것이다.


"구원의 봉사자인 교회는 추상적 차원이나 단지 영적 차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과 역사의 구체적 상황 안에 있다"(「사목헌장」 40항).


[평화신문, 2012년 8월 26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4) 성체훼손과 모독, 폭력(억압)의 일상과 종교


짓밟힌 성체, 속수무책인 교회


지난 호에서 새로운 억압의 기제가 우리 일상을 옥죄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 홍수에 시민은 속절없이 휩쓸린다. 주권재민의 형식 속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억압의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우리 일상이 너무나 분주하다.


법률체계 역시 범인(凡人)이 접근할 수 없도록 복잡하고 어지럽다. 전문가에게 내맡길 수밖에 없다. 법률은 모든 시민과 사회를 위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법률가들 몫이 됐고, 대다수 시민은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현실이라고 믿는 이들도 참 많다.


벽에 갇힌 인간 공동선 증진 노력


대중매체는 더 이상 정보를 소통하여 시민의 판단과 참여를 돕는 유용한 수단이 아니다. 시민은 그들 뜻대로 생산된 정보를 그저 소비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정보매체는 시민을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막강한 권력이다. 시민의식을 지배하겠다고 정보를 노골적으로 왜곡, 조작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본의 횡포는 아예 성역화되기까지 했다.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하겠다는 이들은 아예 "여러분에게 많은 돈을 안겨주겠습니다"며 드러내놓고 목소리를 높이고, 법률체계는 일방적으로 자본의 편에 서서 깃발을 든다. 대중매체 역시 수익 정도에 따라 영향력을 가늠하지 않는가.


이렇게 정치 이데올로기, 법률체계, 대중매체, 그리고 자본이 결합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 증진을 위한 노력은 매우 어려운 과업이 되었다. 시민의 삶을 철저하게 황폐화하는 이 억압기제는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명령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삶을 포기하라", "생존을 위해서는 생활을 포기하라"고 한다.


드디어 가톨릭교회의 심장인 '성체'가 짓밟혔다. 불교 법당이 군홧발에 짓밟힌 적도 있었다. 억압기제의 비위를 맞추면 폭력의 손길에서 벗어날 줄 알았지만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억압기제는 종교라고 관용을 베풀어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성체를 훼손하고 모독해도 그들은 교회가 침묵할 것을 감각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법당이 짓밟혀도, 성체가 모독 훼손되어도….


그들 눈에는 종교도 그들이 지배하는 수많은 하위 권력집단 가운데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하위 권력을 적절하게 보장해준다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자신했을 것이다. 마치 일제가 이 땅의 수많은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했을 때, 많은 우리 지도자들이 침묵했거나 친일 부역했던 것과 같다.


종교마저 폭력 억압기제에 순응하는가


성체가 짓밟히고 시간이 한참 흘렀다. 그들의 오만한 판단은 옳았다. 교회는 어떤 저항의 몸짓조차 취하지 않았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강한 유감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그쳤을 뿐이다. 그들이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거리에서 미사를 봉헌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나 '공무집행 방해' 같은 죄목으로 법정에 세워 실형을 선고했어도 우리 교회는 조용했다. 오히려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고 야단치기까지 했다.


사람도 그렇게 하찮게 내팽개친 이들이 성체라고 달리 대할 리가 없다. 그들 판단에는 사람을 처벌해도 가만히 있는 교회였는데, 성체를 짓밟는다고 교회가 달리 행동할 것이라 여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교회가 세속의 지배와 억압기제와 상호 승인한 셈이다.


억압과 지배를 탐내는 이들은 자본과 권력 독점에서 행복을 누리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은 고작 마음의 평화, 곧 종교에서 행복을 구하는 법인가. 만일 그렇다면 정치 이데올로기, 대중매체, 법률체계가 자본에 예속되어 오늘날 새로운 억압기제로 작동한다는 분석에서 또 하나, 종교를 덧붙여야 하겠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이 신음하는데, 그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도록 격려하고, 부추기고, 고무시켜야 할 종교마저 그 억압기제에 순응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사랑과 정의를 하느님 뜻으로 가르치는 그리스도교가 융성하고, 살생을 금하고 자비를 가르치는 불교가 문화인 세상에서, 투쟁과 불의와 폭력이 태연하게 생존과 지배 원리로 작동하는 우리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필연일지 모른다.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면서도 침묵을 강요당했는데, 성체가 모독 훼손된 것이 무에 그리 대수겠는가. 종교는 폭력 앞에 속수무책인 것이 아니라, 폭력의 억압기제에 기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평화신문, 2012년 9월 2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5) 거리미사와 성체성사


예수님 희생 기억하는 미사, 사회적 약자에게 눈 돌려야


지금 이 땅 곳곳에서 길거리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작은 고을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서울시청이 보이는 대한문 앞에서, 한강 상류 두물머리 강가에서, 청춘의 상징이었던 통기타를 제조하는 콜트콜텍공장 한 모퉁이에서, 그렇게 거룩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거룩함에는 희생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거룩함'이 참 익숙하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에게도 거룩함을 수식하고, 성경ㆍ성당ㆍ성가처럼 책과 장소와 음악에도 거룩함을 수식하고, 성품ㆍ성직자ㆍ성인처럼 사람과 직분에도 거룩함을 수식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과 피에도 '성체'와 '성혈'처럼 거룩함을 수식한다. 그러나 익숙한 거룩함은 더는 거룩함이 아니다.


거룩함이란 무엇일까? 무엇을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 발에 밟힌 그곳, 자동차 소음과 수많은 행인의 분주함으로 어지러운 그곳, 무심히 흐르는 강 주변에 잡초가 제멋대로 자란 곳, 기계소리로 어수선한 곳, 그곳을 우리는 거룩한 곳, 곧 성당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곳에서 부르는 노래를 성가라 할 수 있을까? 그곳에서 읽는 하느님 말씀을 성경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곳에 모인 이 사람 저 사람을 모두 성도(聖徒)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곳에서 이뤄지는 행위를 성찬례라 할 수 있을까? 그곳에서 나누는 빵과 포도주를 성체와 성혈이라 할 수 있을까?


희생이란 말의 라틴어 어원은 '거룩함을 행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성(聖)과 속(俗)은 같은 내용의 두 이름인 셈이다. 거룩함은 희생을 구성하고, 행동은 거룩함과 짝을 이룬다. 우리는 그 전형을 성찬례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의 몸과 피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서 거룩하기도 하겠지만, 그분 희생 때문에 거룩하다. 이웃을, 그것도 보잘것없는 이를, 배고프고 목마르며, 헐벗고 떠돌아다니며,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스스로 내어놓는 그 희생 때문에 거룩하다. 세상이 내버린 이들, 세상이 무능하다고 낙인 찍은 이들, 거추장스럽다며 사라져줬으면 바라는 이들, 그 보잘것없는 이들 가운데 하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맡기고 피 한 방울 남김없이 흘렸기에 거룩하다.


희생이 없는 거룩함은 단순한 상징이며 표지에 불과하다. 상징과 표지는 실재가 아니다. 전통적 교리로 따지자면 성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그 희생(거룩한 행위)을 기억하며 그 희생에 동참하고 동행하지 않는 성찬례는 성찬례(성사)가 아니다. 우리들의 상징적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희생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우리가 기억할 예수님은 누구일까? 우리를 위해 당신 몸을 내어주신 예수님, 우리와 모든 이를 위해 피 흘린 예수님, 그 예수님이 우리가 기억할 예수님 아닌가. 그리고 그 예수님은 "배고프고 목마르며, 헐벗고 떠돌아다니며, 병들어 누워있고 감옥에 갇힌 이", 그러니까 사회적 약자와 당신을 동일시하셨다.


예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이 세상 사회적 약자를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당부하신 최후의 유언은 떠올려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당신 몸을 내어주고, 피를 흘리신 그것을 우리보고 계속해달라고 당부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겉모습으로만 성과 속을 구별하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일까, 전국 방방곡곡 성당에서 성음악과 함께 성스러운 미사가 매일 봉헌된다. 또한 방방곡곡에서 예수님의 벗들은 배고프고 목말라하며, 헐벗고 떠돌며, 아파하고 감옥에 갇힌다.


그러나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예수님의 벗을 기억하며 봉헌하는 미사를 신기한 듯 바라보거나 차가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왜 미사를 길거리에서 하느냐"고 마뜩잖아 한다.


그러나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을 덜어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교회헌장」 8항).


[평화신문, 2012년 9월 16일]


[박동호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6) 폭력의 낙수효과와 비폭력 평화주의자 예수님


사회 곳곳 파고든 폭력의 낙수


'낙수효과'라는 경제용어가 있다. 예를 들면 국가경제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정부는 불경기를 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드는 국책사업을 벌이고, 사업을 통해 서민들에게 골고루 돈이 흘러들어가 소비가 살아나면 덩달아 공급을 위한 생산이 늘어나게 돼 경제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게 낙수효과다.


얼마 전 어느 경제인단체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실제로 낙수효과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자, 다른 시민단체는 통계를 교묘하게 활용한 것에 불과할 뿐 낙수효과는 실현되지 않았다고 반박한 일도 있었다.


낙수효과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돈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것도 넓게 골고루 퍼져나간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낙수효과가 실현될 것 같지 않다.


왜냐면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경제인들이 위에서 아래로 돈을 흘려보낼 만큼 배려와 분배정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할 정도로 성숙하다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당한 몫을 가진 다음 나머지를 아래로 내려 보내기보다는 오히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머니를 더 만들어서 최대한 축적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까.


오늘 이야기는 엉뚱하지만 슬픈 낙수효과, 곧 폭력의 낙수효과 실현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폭력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것이 폭력인지 모르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매일 공기를 들이마시고 살면서도 공기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35년 동안 일제의 강압적 지배를 받았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폭력의 일상이 35년 간 계속됐다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폭력에 익숙해져야 했을 것이다.


물론 이 기회에 한 몫을 제대로 챙긴 '똑똑한' 이들도 몇몇 있었다. 우리는 이들 행위를 '친일부역'이라고 말한다. 폭력행위에 가담한 공범이라 할만하다. 그것으로 그쳤다면 아마 폭력의 일상을 극복했을지도 모르지만 해방 후 불행하게도 우리는 한국전쟁이라는 집단(국가) 간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사람을 죽이는 일, 다치게 하는 일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는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침략을 했든 침략을 받았든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것도 수백만 명이 말이다. 사회 전 분야에 깊게 남아있는 전쟁의 상흔은 사실 폭력의 흔적이다.


국가는 외침을 막고 국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력과 아울러 사회 내부 무질서와 범죄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경찰력을 독점적으로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나 쓰라린 아픈 기억이 있다.


군사력을 외침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향해 사용한 적이 두 번이나 있다. 또 치안을 명분으로 일본 제국주의 권력의 몽둥이가 돼 조선 백성을 다스린 35년 역사가 있다. 군사력과 경찰력이 시민을 보호하기보다 시민을 억압하는 데 이용된 셈이다. 물론 모든 군인과 경찰공무원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심적 군인과 경찰들은 대부분 빛을 보지 못했다.


필자가 병역의무 이행을 위해 입대했을 때 자대에 배치되어 내무반에 들어가 본 벽보는 다름 아닌 '육군명령 제0호, 구타금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참 많이 맞았다. 이른바 '얼이 빠졌다'는 이유였다.


회식이 끝나면 맞고, 훈련이 끝나면 맞고, 하다못해 토요일 오후 축구경기를 마친 후에도 맞았다. 사람이 얼이 빠지고 혼이 빠지면 그게 사람인가. 아마 구타는 집나간 얼을 불러들이는 '전어' 같은 역할을 했나보다. 사목을 하며 병역을 마친 젊은이들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해주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듣는다. 이제 군대에서 구타와 폭력은 거의 사라진듯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에 폭력이 마치 일상인 것처럼 되살아났다. 처음에는 학교폭력이 기승을 부리는 것처럼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흥행몰이를 했다. 학교폭력이 조금 시들해지니 주취(酒醉)폭력이 유행을 탔고, 곧이어 질세라 성폭력이 뒤를 이었다.


폭력을 행사한 이력을 학생생활기록부에 적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길거리에서 아무나 불러세워 조사하겠다고 한다. 술 마시고 행패 부린 이들을 잡아 가뒀더니 범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며 자랑한다. 성폭력범을 거세하면 재범률이 0%가 될 것이라고 한다. 폭력을 서비스 상품(용역)으로 제공하는 회사까지 생겼다.


그런데 어딘가 석연치 않다. 폭력을 휘두른 어린 학생,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린 어른, 인면수심의 흉악한 성범죄자들, 폭력을 파는 회사 말단 직원 대부분이 사회적 소외계층이다. 그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고 고성을 지르며 제거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더 큰 폭력은 철저하게 잊고 외면하고 침묵한다. 국가(일본군국주의, 남북의 군대와 경찰력)가 행한 폭력이 드디어 가장 낮은 곳에까지 골고루 스며든 것일까. 폭력의 낙수효과가 실현된 것일까.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폭력 평화주의자'였다.


[평화신문, 2012년 10월 7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7) 교회의 길을 다시 묻는다


해방과 평화의 길, 교회의 몫


복음을 읽으며 예수님 삶을 성찰할 때마다 불편함을 피할 수 없다. 한 여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뱃속에 두고 무슨 배짱으로 그리 말씀하셨을까?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유년시절을 전한다.


"주님께서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2-53).


헤로데나 빌라도의 귀에 들어갔으면 즉시 '십자가형'에 처할 불순한 발언 아닌가. 목자들도, 시메온도, 한나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하나같이 힘없는 이들이었음에도 세상의 불의와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그 태도가 나를 부끄럽게 한다.


예수님의 꿈과 희망


어머니 마리아처럼 예수님도 희년 곧 해방을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며 젊음을 시작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


그런데 마르코 복음은 이 예수님의 꿈과 희망이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버렸음을 생생하게 전한다. 짧은 마르코 복음을 대충 살펴보자. 처음부터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간주했다. 이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밥을 먹는다고 트집을 잡고, 안식일에 무슨 일을 하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으며, 헤로데 당원들과 없애버릴 모의를 꾸미며, 마귀 우두머리라고 소문을 내고,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따지고, 시험하려고 표징을 요구했다.


예루살렘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올무를 씌워,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여 없앨 방법을 찾았으며, 마침내 유다의 도움(?)을 받아 그 뜻을 이루게 된다. 마르코 복음 전편에 걸쳐 일관되게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집요하게 예수님을 없애려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들이 단번에 뜻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바로 '군중'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땠을까? 수석사제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들을 두려워했을까? 안타깝게도 마르코 복음서는 그렇게 전하지 않는다. 제자들은 몸은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과 엇나갔다. 제자들은 믿음도 없었으며,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했으며,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탄'이라고 꾸지람을 듣기까지 했다. 배신하지 않겠다고 힘주어 장담했던 제자들은 막상 예수님께서 붙잡히자 모두 달아났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자신이 한패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했으며,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제 발로 수석사제들을 찾아갔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조차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아 그분께 꾸지람을 듣는다.


인간은 교회의 길이다


힘깨나 쓰는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대들고, 곁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중의 폭력인 셈이다. 예수님은 무방비로 폭력 앞에 노출됐다. 다만 무명의 불쌍한 군중만이 예수님을 지켜주었던 형국이다. 그럴 만도 했다. 그분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가지셨다. 그 이유가 바로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었다.


세상 누가 그 군중을 온몸과 마음으로 끌어안았던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원로들과 헤로데 같은 지도자들은 더 이상 군중의 참된 지도자가 아니었다. 로마에 부역하며 일신의 영달을 탐했던 이들, 곧 하느님의 포도밭을 가로채려는 이들에 불과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감탄하며 따른 이유가 있었다. 자신들과 한편이 되어 같이 고통을 겪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서 불의와 폭력을 고발하는 목소리를 들었으며, 해방과 평화의 길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방과 평화를 갈망하던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지켜줄 힘이 없었다. 현실의 폭력은 그렇게 해방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짓밟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헌장」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른다.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을 덜어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8항).


2000년이 지난 오늘에도, 공의회를 연지 50년이 지난 오늘에도, 거악은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 온 인류를 신음케 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무절제한 방종이든, 금융자본의 무한 탐욕과 횡포든, 정치권력의 현세적 야욕이든, 현실의 불의와 폭력 앞에서 인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힘없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은 고통을 받으며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교회의 길을 다시 성찰한다. "인간은 교회의 길이다"(「백주년」 제6장).


[평화신문, 2012년 10월 14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8) 교회의 사회교리 - 선포의 임무, 고발의 임무


굶주린 이들 위한 목소리 어디에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2-53).


성경의 '마리아의 노래' 한 구절임을 모르는 교우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을 거룩한 성전에서 성경 말씀으로 듣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만일 이 구절의 출처를 지운 채 각 성당 정문에 펼침막으로 만들어 길거리 오가는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걸어놓았다고 상상해 보자. 아마 시끄럽지 않은 성당이 없을 것이다. 길거리 오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교우들 사이에서도 소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외면 받는 마리아의 노래


오늘날 통치자는 누구며 비천한 이들은 누굴까? 오늘날 굶주린 이들은 누구이며, 부유한 자들은 또 누굴까? 성경에 익숙한 누군가는 이 구절에서 애써 이른바 '영적인 미'를 찾으려 할 것이다. 통치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세속의 힘에만 의지하는 이들이며, 비천한 이들은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이들이며, 굶주린 이들은 하느님 말씀을 갈망하는 이들이며, 부유한 자들은 세속의 것에 탐닉하는 이들이라고…. 그러나 이 구절이 성경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영적인 미를 찾으려 할 것인가.


아마 왜 거룩한 성당에서 '끌어내리느니', '내치느니'하는 미움과 증오의 언어를 담은 문구를 내거느냐고 꾸짖으려 할 것이다. 아마 통치자와 비천한 이들 사이를,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 사이를 분열시키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냐고 야단칠 것이다. 교회는 사랑과 자비, 용서와 관용, 일치와 화합을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가르치려 들 것이다. 길거리에서 이 구절을 본 사람이나 매일 성당을 드나드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 구절이 성경 말씀, 그것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한 말이라고 한다면 그 반응은 어떨까?


우리는 불편함에 불편해한다. 그래서 외면하거나 아예 마음과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한다. 그렇게 불편해하고, 그래서 외면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이 참 많다. 마리아의 노래도 그 가운데 하나다. 마리아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보통의 젊은 여인에 불과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보통 이하의 비천한 여인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만삭의 몸인데도 여인숙 방 한 칸 구하지 못했을까?


비록 천주의 모친이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하찮은 한 여인이 통치자를 왕좌에서 끌어내린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당대 아우구스티노 황제나 총독 빌라도나 로마에 부역하고 있던 영주 헤로데와 수석사제와 원로들 귀에 마리아의 발언이 흘러들어갔다면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면 미래도 없다


마리아의 노래의 이 구절은 영적 의미를 갖는 고차원의 수사(修辭)가 아니었다. 실제 당대 군중이 갖고 있던 간절한 염원이었다. 로마제국 식민통치, 그에 부역해 한 몫 챙긴 꼭두각시 왕과 그 충복들은 군중의 고혈(膏血)로 자주색 옷과 고운 아포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살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군중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워(…)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비천하고 굶주린 군중은 실제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초주검이 되어 길거리에 내버려졌다"(루카 11,30 참조).


마리아의 노래는 현실에 도전한다. 군중을 고통에 내몰고 왕좌를 차지한 이들과 그 고통을 외면한 부유한 자들을 고발하고 꾸짖는 것이다. 그것도 실속 없는 원한이나 미움이나 질투의 감정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 '구원자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이다.


오늘날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이웃이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는가? 오늘날 하느님이 사랑하는 동물과 식물, 강과 바다, 산과 하늘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신음하는가.


그런데도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애써 외면하고 눈을 감고 귀를 막으려 한다. 외면하니 편하고, 눈을 감으니 꿈을 꿀 수 있고, 귀를 막으니 천상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좋은가? 한참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황폐한 세상이 펼쳐져 있고, 눈을 뜨니 내 자식의 종기 핥는 모습이 보이고, 귀를 여니 내 부모의 신음이 들리지만, 주변에 아무도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줄'(루카 16,24) 사람이 없다. 제발 그런 일이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교회의 사회교리에는 선포의 임무와 더불어 고발의 임무도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81항).


[평화신문, 2012년 10월 28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9)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세상 속 하느님의 일, 외면할 것인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와 함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43-50).


복음 가운데 가장 짧지만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르코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참 딱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차치하고, 그분과 한솥밥을 먹던 제자들 태도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외면한 열두 제자


예수님께서 가까이 불러 사도로 세우신 제자들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자. 우선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다(4,39)", "그토록 깨닫지 못하였다"(6,52),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으며,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했다"(7,1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8,17-18).


베드로는 비록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그럴듯하게 고백했지만 정작 예수님으로부터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8,27-34)하며 꾸지람을 들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셨을 때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했다. 세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을 때는 놀라워하고 또 두려워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마실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또 당신이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제자들은 "할 수 있습니다"(10,38)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수석사제들에게 팔아넘기려고 그들을 찾아갔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다른 제자들 역시 모두 그렇게 말했다.


결국,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것뿐이 아니다. 베드로는 누군가 예수님과 한패라고 지목하자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라며 예수님을 부정했다. 물론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그 울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두 제자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다시 외면받는 그리스도


이렇게 마르코복음이 전하는 제자들 태도는 한결같았다. 예수님 행보를 기찻길에 비유하면 예루살렘을 향한 상행선이다. 제자들은 상행선에 몸을 실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하행선을 향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살아있을 때도 돌아가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그랬다.


어찌 보면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그리고 원로들이 그토록 바라던 것, 곧 예수님을 제거하려한 집요한 시도를 다른 누구도 아닌 벗이자 제자들이 완성해준 셈이다. 예수님이 무엇을 했기에 그들이 제거하려 했고, 제자들은 왜 스승을 지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버림으로써 그들을 도와주었을까? 스승은 세상에 참 생명과 평화를 회복하려고 했다. 반면 권력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막으려 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스승과 동행하는 대신 편하고 넓은 길, 곧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을 선택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이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함과 권력을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군중을 발아래 두려는 세력의 집요함은 여전하다. 정도(正道)를 벗어나 탐욕의 사도(邪道)를 취하더라도 괜찮다고 한다. 오히려 그것이 성공이며 경쟁력이라 미화하기까지 한다.


마침내 강은 만신창이가 되고, 산은 허물어지고, 하늘은 구멍이 나고, 땅은 오염됐다. 이제 사람의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한다. 구럼비가 깨지고, 핵발전소가 세워지고, 4대강 물길은 콘크리트 덩어리에 막혔으며, 노동자들은 길거리로 내몰렸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이를 막거나 힘없는 자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십자가가 두려웠고, 불편했으리라.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8항).


[평화신문, 2012년 11월 4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0) 사제와 레위인은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부자의 삶만이 축복이라 여기는 사회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말했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루카 12,16-18).


심화하는 사회 불균형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른바 경제개발, 성장, 경쟁 따위가 마치 불변의 상식처럼 된 사회에 살고 있다. 나눔과 분배, 배려, 공존 따위의 삶의 태도는 공허한 말 잔칫상에 오를 뿐이다. 사실 그렇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치른 후부터니까 불과 60년 남짓 되었다.


이른바 '고도 압축성장'으로 설명하는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현실뿐만 아니라 의식과 가치마저 고도 압축시켜버렸다. 보존과 개발, 나눔과 성장, 배려와 경쟁을 대립시켜 취사선택하도록 강요받았다. 그 대가는 오늘 우리가 겪는 심각한 불균형이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 이 심각한 불균형을 대물림해야 할지 모른다. 심각한 불균형은 아무리 똑바로 가려 해도 왜곡(歪曲)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지름이 다른 두 바퀴의 이륜마차를 올라타고 질주하는 형국이다.


이 심각한 불균형 현상 가운데 가장 도드라진 것이 '부의 불균형' 아닐까?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의 모든 것을 경제성장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죽을 듯이 몰아세웠고, 따르지 않으면 핍박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제거했다. 그것은 일종의 강요였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시작으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을 거쳐, 세계 경제대국 10위에 도달했다. 자랑스러워할 법하다.


그러는 사이 정의와 민주, 연대, 배려, 공존과 같은 가치와 의식은 서서히 죽어갔다. 인간다운 생활을 꿈꾸는 것은 불순한 사상으로 매도됐으며, 인간다운 사회건설을 희망하는 것은 사치로 비난받기 십상이었다. 그 현상을 알았으면서도 참았을지 모른다. 나태함으로 무사유(無思惟)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침내 자살률 세계 1위, 저출산율 세계 1위, 그리고 상상초월의 빈부격차와 가난과 부의 대물림 앞에서 수많은 시민이 절망하고 있다.


복음을 기초로 한 경제 민주화


축적되면 나눌 줄 알았다. 쌓이면 흘러넘쳐 골고루 퍼질 줄 알았다. 하지만 분배도 낙수효과도 없었다. 그것은 속임수였으며 착각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는 그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아니, 그 착각에서 깨어나기가 두려워 바퀴 크기가 다른 이륜마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지도 모른다. 두려움에서뿐만 아니라,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뛰어내리지 못하고 있다면 섬뜩하다.


그러는 사이, 우리를 앞으로 내모는 이들은 '곳간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재물을 모아' 둘 궁리를 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들도 이렇게 시민을 왜곡의 노선으로 내몰다가는 '더 큰 곳간들'을 지을 수 없다는 위기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경제 민주화가 화두가 된 참 배경이 사람을 위한 경제 민주가 아니라, 더 크게 확장할 정교한 탐욕의 곳간을 마련하는 또 다른 거짓 이데올로기는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곳간은 사람을 도구로 전락시킨 시장, 무절제한 신자유주의 경제와 자본의 세계화 따위일 것이다.


얼마나 더 성장이니 경제 민주화, 복지라는 달콤한 언어로 포장한 심각한 불균형 속에서 고통을 겪어야 할지 가늠하는 것조차 두렵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 그 고통스러운 호소를 낙오자의 불만쯤으로 치부하거나, 고통의 원인을 개인의 도덕적 해이로 점잖게 꾸짖는 지식사회의 태연함이다. 또 빈곤을 숙명이나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이고, 더 나아가 현실을 초월하도록 교묘하게 인도하는 종교의 무책임이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의 시대를 향해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이 땅의 지식사회와 종교는 부자에게 라자로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호화로움의 일부는 나누는 것이 정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자의 삶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며 라자로를 외면한다. 강도들을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린"(루카 10,29-31 참조) 사제와 레위인처럼 말이다.


"신앙인들이(…) 종교, 윤리, 사회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버린다면, 신앙인들은 이 무신론 발생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19항).


[평화신문, 2012년 11월 11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1) 의료민영화의 문을 열려하는가?


누구를 위한 의료민영화인가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5,55-56).


질병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1980년대 중반 신학생 시절, 필자의 소속 본당 강론대에서 예수님이 발현하셨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오후에 외출해 성당을 방문했을 때 목격한 그 광경은 지금도 생생하다. 성당 현관 철문이 아예 없어졌으며, 마당에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성당 앞 대로는 교통경찰이 차량과 통행인을 통제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다. 미사 중에 강론대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누군가 알리면서 생긴 일이었다.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몰려왔음을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만큼 사람은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어 한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 덕분에 질병의 고통에서 어느정도 해방되고, 수명도 많이 연장됐다. 불치 혹은 난치 질환에 대한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적어도 겉으로는 축복의 세상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병원을 찾아가면 어지간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렇지만 과학과 의학의 힘만으로 질병치료가 끝나는 것이 아니어서 더 안타까울 수 있다. 과학과 의학 발달에 막대한 재원이 투입된 까닭이다. 의사 한 명을 양성하는 데는 다른 직종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보다 몇 배 재원이 요구된다. 그렇게 많은 재화가 투입된 과학과 의학기술을 거저 이용할 수는 없다. 아주 단순하게 구별하면, 사회와 국가가 대가를 치르든, 환자와 그 가족이 대가를 치르든, 아니면 분담해서 치르든 해야 한다. 의료행위 대가를 온전히 국가가 치르는 경우를 사회주의체제 의료정책이라 부를 수 있다. 환자와 그 가족이 그 부담을 전부 짊어지는 경우는 자유주의 의료정책이라 부를 만하다.


부에 따른 선택적 진료 합당한가


값비싼 의료비를 사회 구성원이 합의해 평소 조금씩 모았다가 질병에 걸렸을 때 지원하는 제도를 이른바 '보험'이라 한다. 이 보험은 보험가입자와 보험회사 사이의 계약에 의해 성립되는데, 이를 '사보험'이라 한다. 현재 우리나라처럼 전 국민이 국가제도로 운영하는 '국민건강보험'에 강제로 가입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공보험'이라 부른다.


공보험 운영에는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일부 언론이 대대적으로 비판하는 도덕적 해이가 바로 그것이다. 적은 보험료를 내고 치료를 받다 보니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질병에도 병원을 안방 드나들 듯해서 건강보험재정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에서도 도덕적 해이는 발생한다. 보험료 과다청구가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류언론은 고액납부자의 회피는 이 도덕적 해이를 다룰 때보다 크게 다루지 않는 경향이 있다.


국민건강보험제도 운영에서 발생하는 몇몇 부정적 현상을 근거로 이른바 의료 민영화를 줄기차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부정적 현상을 극복하는 길은 사회 구성원이 원하는 의료서비스를 원하는 수준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가가 전국민을 상대로 강제로 보험제도를 운영(당연지정제)하기보다는 민간 영역에서 운영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주장이 더해진다. 이른바 민영화다.


얼핏 보면 합리적 주장으로 들리지만, 잔인함이 드러난다. 속된 표현으로 치료비를 부담할 수 없으면 죽어야 한다는 식이다. 그 잔인함을 희석하기 위해 그들은 당연지정제의 예외를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혹은 특별법이 적용되는 이른바 경제자유 특별구역에 외국인을 위한 병원을 따로 세울 터이니, 이 병원에서는 외국인과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한 사람만이라도 치료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마침내 지난 10월 29일 정부와 보건복지부는 대통령선거에 국민 관심이 쏠린 틈을 타서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의료기관의 개설허가절차 등에 관한 규칙'을 고시해 영리병원을 허용했다. 병원 설립 조건은 외국자본 50% 이상, 의료진 10% 이상 외국의사면허 소지 등이다. 영리병원에서는 내국인 환자도 100% 진료 가능하다.


머지않아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돈벌이(산업)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들은 병원 대신에 '장터'를 배회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게 될지 모르겠다.


미국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가 만든 '식코'를 보라. 미국 민간의료보험 조직의 부조리적 폐해의 이면을 폭로한 영화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장사하는 먼나라의 의료보험 현실이 언젠가 우리 모습이 될 수 있다.


[평화신문, 2012년 11월 18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2)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왜곡된 정보의 희생제물 아닌지


우리는 우연히 이 시대 이 땅에서 살고 있다. 그 누구도 부모에게 "저는 모년 모월 모시에 모지역에 태어나게 해주십시오"하고 청하여 태어나지 않았다. 순전히 우연이다. 물론 하느님의 구원계획 여정에 참여한 것은 하느님 뜻이지만 말이다.


긴밀하게 연관된 지구촌


부질없지만 괜한 상상을 해본다. "내가 수 천 년 전 씨족 부족국가 시절에 태어났다면, 내가 절대 왕권국가 시절에 태어났다면, 하다못해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내 삶은 어땠을까"하고 말이다. 가당치도 않지만, 그 시절 내 삶은 지극히 단순했으며, 사회도 그러했을 것이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정보라야 단순한 삶에 필요한 단순한 내용에 그쳤을 것이다. 그리 단순하니 조작할 필요도, 포장할 필요도, 왜곡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정보 유용 여부는 차치하고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데 힘들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랴! 안타깝게도(?) 우리는 21세기 이 땅에 살고 있다. 그것도 정보의 쓰나미가 일상인 시대를 말이다. 온 세상 온갖 사건들이 내 일상에 끼어들고 있다. 예를 들어, 태평양 건너 어떤 나라의 대통령 선거까지 내 삶에 간섭한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에 대한 외교정책이 달라지고, 그것으로 국내 정치와 경제 상황이 영향을 받고, 그것 때문에 우리 교우들 삶의 조건이 변하고, 그것 때문에 내가 봉사하는 공동체에, 또 그것 때문에 내 삶에 변화가 올 것이라는 식이다. 속으로야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냉정함을 되찾는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예를 들어 그 나라의 대외정책, 특히 국방정책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이 땅의 시민들 삶을 내 뜻과 무관하게 조종한다. 관심을 갖고 대중매체를 뒤져가며 살펴본다.


흔히 언론에서 G2라고 이름 붙인 나라가 있다. 중국과 미국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Super Powers)이란 용어에 익숙했다. 슬그머니 G2로 바꿔 부르지만 전 분야에 걸친 이들의 경쟁은 3차 세계대전 위기까지 치달았던 과거 미ㆍ소 두 진영의 냉전을 떠올린다. 끝장 경쟁을 벌일지도 모른다. 막무가내로 건설을 밀어붙이고 있는 제주 해군기지는 우리를 지켜줄 성벽이 될까? 아니면 G2 사이에 벌어지는 무력충돌의 최전선, 그것도 한 번 상대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그냥 시험해보는 탐색전의 무대가 될까? G2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무력으로 이루겠다는 발상을 실현하기라도 하면, 이 땅은 그들의 무력 확인의 터가 되고, 이 땅에 사는 시민은 희생제물이 되지 않을까.


객관적 정보전달이 올바른 사회 만들어


유명 대중매체를 통해 이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구하기가 어렵다. 불가피하게 전문분야를 다루는 매체를 찾아볼 수밖에 없는데, 보통의 시민으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보의 유용성과 진실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예가 또 있다. 요즘 18대 대통령 선거 관련 정보가 그것이다. 매체마다 후보들 혹은 그 주변인들이 쏟아내는 정책과 발언을 보도한다. 한마디로 어지럽다. 그때 그때 다르고, 이 자리 저 자리에서 한 말이 다르고, 후보와 그 관계자 사이의 발언도 다르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을 일부러 혼란스럽게 만듦으로써 정치를 혐오하게 만들고 이른바 '묻지마 투표'로 유인하려는 속셈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게다가 매체들의 보도 태도를 보면 속이 보인다. 노골적으로 그것도 지나치게 치우치기 때문이다. 정보전달 매체의 객관성과 공정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혹시 "언론매체와 권력집단이 결탁해 시민을 일회용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시민은 투표 한 번 하고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 삶의 현장에서 생존을 위해 버둥거리는 우중(愚衆)에 불과하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혹은 권력과 결탁한 지식사회와 대중매체는 시민을 자기들이 제공하는 (조작된) 정보의 맹목적 소비자 혹은 추종자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시민은 사회의 주인인가, 아니면 그때 그때 이용하고 버려도 될 우중인가?


"정당들은 폭넓은 참여를 촉진하고 공공의 책임이 모든 사람에게 미칠 수 있게 할 임무가 있다. 정당들은 시민 사회의 열망을 간파하고, 그 열망들이 공동선을 지향하도록 하며, 국민이 정치적 선택을 내리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실질적 가능성을 제공해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413항).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가운데,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고 있는 뉴스 미디어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에, 정치활동과 자본, 정보기관들이 유착까지 더해지면 이는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미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평화신문, 2012년 11월 25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3) 신앙인의 투표 (상)


인권수호 우선인 후보를 찾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민은 혼란스럽다. 시민은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에 대해 객관적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투표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 대중매체는 객관적 정보를 시민에게 충분히 제공하고 있는가 살펴봐야 한다. 혹시 우리가 대하는 대중매체는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시민의 판단과 참여는 심각하게 왜곡될 것이다 .그것은 곧 민주주의의 훼손을 의미한다.


인간 존엄성, 무엇보다 우선되는 가치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이하 정평위)는 대통령선거 출마자들에게 '정책제안 및 질의서'를 보냈다. 정평위가 제안하고 질의한 분야는 다음과 같다.


△ 인간의 존엄성(사형제도 폐지, 국가보안법과 모자보건법의 일부 조항 개정 또는 폐지, 인간 배아 생산과 활용, 언론의 공공성과 독립성 보장) △ 공동선 및 사회정의(4대강 사업과 탈핵발전 및 에너지, 신자유주의 경체철학과 자유무역협정, 공공부문 민영화, 경제민주화, 사회보장정책과 사회복지, 자본으로부터의 노동자 보호, 노동조건과 노동권 보장 따위) △ 평화(남북관계, 제주해군기지 따위)


인간의 존엄함과 사회정의인 공동선 추구, 그리고 평화 문제는 사회교리의 주요 주제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자 시민으로서 언론을 통해 홍수처럼 쏟아지는 많은 정보를 관찰, 식별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우선 인간 존엄성이라는 기준을 살펴보자. 인간이 귀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귀함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여 발전시킨 것이 바로 인간의 기본적 권리들 곧 '인권'이다. 인권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시켜야 할 목표다. 국가는 인권을 수호하고 발전시킴으로써 공동선을 실현하는 제1의 임무를 가진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했다. 시민으로서 대통령의 행위를 평가할 수도 없었으며, 그랬다가는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최고 권위의 헌법조차 시민 동의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사람이 주인(민주)으로서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쳤는지 모른다. 국가는 이 권리를 시민에게 돌려주지 않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국가는 정부 이름으로 행위하고, 정부 역시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후보 및 그 집단이 갖고 있는 인권 수호 및 발전 의지를 살펴보는 것은 당연하다. 인권을 억압하거나 훼손하면서까지 시민을 배부르게 해주겠다는 후보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 존엄함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그처럼 귀한 인간의 존엄함, 그리고 기본적 권리인 인권이 아무렇지도 않게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명분을 보면 인권 실현의 유보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비이성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이다. 시민사회든 국가든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이점에서 사람은 시민사회와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국가와 집단은 인간 삶의 조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사회와 국가의 구성 요소쯤으로 보거나, 국가 행위에 시민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도구쯤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것이다. 비이성적이다. 또 하느님 구원의 대상이며, 하느님의 대화 상대인 사람을 소모품처럼 취급한다. 반그리스도교적이다.


구체적으로 경제발전, 성장, 경쟁을 앞세우면서, 혹은 경제위기를 내세우면서 인간의 존엄함과 인권을 내팽개치기까지 한다. 경제도 인간 활동의 한 분야일 뿐 전부가 될 수 없다. 더욱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존엄함, 자유, 평등, 연대를 호소하고 내세우면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무시하기 일쑤다.


국가안보를 내세우기도 한다. 인간의 존엄함을 지킴으로써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국가안보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치 인간의 존엄함과 인권은 안보를 위해 유보해야 할 무엇쯤으로 여기거나, 또 그렇게 믿도록 오랫동안 강요당했다. 인간의 존엄함과 인권실현은 공동체 안보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공동선, 곧 안보의 절대 필수조건이다.


인간의 존엄함, 그리고 그 구체적 실현인 인권보호는 다른 어떤 가치보다 앞선다. 그래서 절대적이라고까지 한다. 인간의 존엄함과 권리들은 바로 사람 그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앙인에게 그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인권은 흔히 시민ㆍ정치 영역의 권리들, 경제ㆍ사회ㆍ문화 영역의 권리들, 그리고 연대ㆍ집단 영역의 권리들로 구별한다. 수고스럽지만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찾아보자. 그 인권목록을 놓고 후보와 정당, 공약을 살펴보고 판단하면 적어도 개인으로서 '묻지마 투표'를 하는 부끄러움만큼은 피할 수 있다.


[평화신문, 2012년 12월 2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4) 신앙인의 투표 (중)


말뿐인 경제민주화 공약 아닌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헌법」 119조 2항).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지난 호에 인간의 존엄함과 인권을 이야기했다. 곧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후보와 그 정당 혹은 정책공약을 평가할 때, 인간의 존엄함과 인권은 훌륭한 판단 기준이 된다. 그래야 '묻지마 투표'라는 부끄러움만은 면할 수 있다. 오늘은 두 번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공동선과 사회정의를 살펴보자.


공동선 실현과 사회정의


국가의 제1의 임무는 공동선과 사회정의 실현이다. 공동선 원리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 일치 평등에서 나오는 것이다. 공동선이란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자기완성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간추린 사회교리」 164항)를 말한다. 정의는 흔히 계약ㆍ법적ㆍ분배정의로 구분한다.


계약정의는 개인과 개인이 정당하게 맺은 계약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법적정의는 개인이 집단 혹은 국가에 대해 이행해야 할 의무를 말한다. 이와 반대로 분배정의는 집단 혹은 국가가 개인에게 재화나 기회를 나눠줘야 할 의무를 말한다. 그런데 계약ㆍ법적ㆍ분배정의 실현의 주체가 이를 실천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어느 중소기업 예를 들어보자. 사용자와 경영자가 밤낮으로 기업활동을 했다. 노동자도 힘껏 일했다. 기업은 이윤을 내어 재투자하고 노동자에게 생계임금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같은 대불황 시기에 흑자는커녕 적자를 면치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임금을 지불하지 못한 사용자와 경영자는 부도덕하고 불의한 것인가.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는 염치가 없으며 탐욕스러운 것인가. 누구도 이를 부도덕하고 염치없으며, 불의하고 탐욕스럽다고 말할 수 없다. 이때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정의, 곧 '사회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다.


국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적 제도를 마련하고 재화를 제공해야 한다. 사용자가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노동자가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국가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시장은 약육강식의 야만에 불과하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강자에게는 그 시장이 자유의 공간이겠지만, 약자에게는 사냥감이 되어 쫓기는 사냥터에 불과하다. 소수의 대기업 혹은 재벌은 날로 몸집을 불려 가지만, 중소기업 혹은 자영업은 영양실조와 아사(餓死) 위기에 내몰린 우리의 경제 현실이 이를 보여준다.


소수의 독점을 규제할 후보를 찾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제민주화'가 사회를 뜨겁게 달구다가 식어버렸다. 처음 소개한 헌법 119조 2항은 공동선과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국가(정치)가 시장을 규제해야 한다는 이른바 경제민주화조항이다.


헌법이 밝히고 있음에도 화두로 떠오른 이유는 헌법적 가치가 우리 사회에서 실종되었다는 방증이다. 국가 스스로 헌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경제민주화는커녕 경제독재가 돼버렸다. 그것도 소수 대기업 중심의 경제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형국이다. 그 지배가 국민경제의 불균형, 소득 불균형, 시장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초래했다. 교회는 이를 '시장의 우상'이라고 부른다.


"국가는 독점 상황이 발전을 지연시키거나 장애를 가져올 때 개입할 권리도 있다. 국가는 발전을 조화시키고 이끌어 나갈 역할 외에 특별한 상황에서는 보충 기능도 수행할 수 있다"(351항).


이는 처음에 소개한 우리나라 헌법과 닮았다. 우리 현실은 소수 대기업과 다수의 중소기업 사이, 산업과 산업 사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 그 밖에 많은 분야에서 불균형이 심화했다. 한쪽의 실질적 종속 상태와 독점으로 치닫고 있다. 시장의 자유를 내세웠지만, 입법부ㆍ행정부ㆍ사법부가 힘 있는 경제 주체 한쪽에 충실히 봉사한 결과는 아닐까.


경제문제에서 국가의 근본적 의무는 경제문제를 조절하려는 적절한 법적 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실질적 종속 상태로 만들 만큼 강력해지지 않도록 쌍방 간의 일정한 평등을 요구하는 경제 자유의 기본 조건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마침내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은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이룩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그 진정성과 실천의지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재래시장에 가서는 서민을 위한 경제정책을 펼치겠다고 하면서, 나라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경제지도자 모임에 가서는 잘 봐달라고 하는 태도를 보인다.


선거관리위원회의 누리방(www.nec.go.kr)을 방문하여 경제관련 정책공약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무엇보다도 적절한 법적 틀을 마련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평화신문, 2012년 12월 9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5) 신앙인의 투표 (하)


공동선 · 사회정의가 선택 기준돼야


누가 보수주의자이고 누가 진보주의자일까. 이들은 툭하면 서로 증오한다. 이들의 대립을 기득권 지키기와 빼앗기라고 부르면 어떨까. 상식과 몰상식으로 구별하면 어떨까.


이들의 싸움은 어린 학생들 밥 먹는 문제, 교육 문제를 놓고도 벌어진다. 4대강 사업,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놓고도 싸움은 이어진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 더 나아가 동북아의 평화에 대한 이해에서도 대립한다. 무엇을 지키고자 하고, 무엇을 향해 나가려는 것일까.


거짓 좌우 이념의 허상을 넘어서


'내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는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고, 그 자유를 훼손하는 인간의 탐욕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통제하겠다는 좌우의 두 건강한 날개는 찾아보기 어렵다. 주권재민의 정치의식은 왜곡된 대의민주주의의 권력 욕망으로 질식당할 지경이며, 평등을 꾀하는 경제정의는 탐욕의 시장자유주의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


참된 인간화ㆍ사회화를 지향하는 '참된 발전'(평화)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와 진보도, 좌익과 우익도 없다. 그냥 권력욕과 탐욕의 정도 차이가 보수와 진보, 좌와 우가 있을 뿐이다.


한국전쟁의 상흔은 평등과 자유의 유전인자마저 멸하려는 국가주의 모습으로 남았다. 국가안보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세계 많은 나라 가운데 우리만 전쟁을 치렀을까. 냉정히 물어보자. 국가주의는 필연이었는지를. 또, 정치 및 경제 독재가 역사의 필연이었는지.


전범국인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을 비롯해 영국과 프랑스 등 많은 유럽의 국가가 전화를 겪었다. 그 국가들이 전쟁 후 반드시 국가주의, 정치ㆍ경제의 독재의 길을 걸었는가? 역사는 우리가 걸은 길이 필연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가 독재의 길을 걷는 동안 그들은 민주의 길을 걸었다. 우리가 국가주의를 신성시하는 동안 그들은 국가를 인간을 위한 도구로 다듬었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국가주의에 대한 향수와 정치ㆍ경제 독재에 대한 그리움의 현상을 목도한다. 불의든, 거짓이든,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행동하고, 번영을 가져다주겠다면, 모든 것을 용납했던 과거 독일과 이탈리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업고 권좌에 올랐다. 그들이 전 세계를 전장으로 몰아넣고 무수한 이들을 살상하는 세계 대전을 일으켰을 때에도, 독일과 이탈리아 시민은 열렬히 지지했다.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다.


망각하는 역사는 되풀이되는 법일까. 수십 년의 독재도, 두 차례의 쿠데타도, 일상이 돼버린 시장의 실패도 우리는 철저히 망각하려 한다. 아니 잊으라는 국가주의자와 시장주의자들의 요구에 충실히 따른다. 과거를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그들의 다그침에 충실히 따르려 한다.


책임 있는 참여의 길로


아픔을 망각하고 장밋빛 현실에 취한 오늘 우리의 삶은 미래 세대의 짐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미래 세대의 삶을 무작정 그리고 무책임하게 앞당겨서 소비하는지 모른다. 슬그머니 공공부채와 민간영역 부채 2천조를 떠넘기려 한다. 무분별한 노동자 해고의 문제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그리고 우리만의 문제일까. 가까운 미래의 예고편일지 모른다.


철탑에 올라 생존을 향한 사투를 벌이는 노동의 문제가 우리 시대만의 문제일까. 아니다. 가까운 미래, 아니 지금의 청년들을 짓누르기 시작한 고역의 서막이 일지 모른다. 국가주의와 정치 및 경제의 독재는 사람을 국가의 구성요소쯤으로, 정치권력욕의 대상쯤으로, 경제 수단 가운데 하나쯤으로 전락시킨다. 수단은 그 속성상 필요에 따라 동원되고, 폐기될 뿐이다.


우리가 무절제한 탐욕이 채워지지 않아 불행하다면 사필귀정이겠으나, 다음 세대의 삶마저 앞당겨 황폐화할 권리가 있을까.


"우리나라는 1948년에 제정된 헌법을 통하여 민주공화국으로 출범한 이래, 군사 독재와 권위주의 정부 시대를 거쳐 마침내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최근까지도 권력주변의 비리를 비롯한 정치인들과 검찰의 비리가 끊이지 않는 등 권력의 부패와 윤리적 타락으로 인한 정치 불신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기업의 횡포로 인한 정리해고 남발,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 양극화 심화 등 사회적 약자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청소년과 노인 자살 급증, 심각한 저출산과 청년실업 문제 등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드리는 호소,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인간의 존엄함과 그 존엄함을 실현한 기본적인 권리들(인권)을 절대가치로 여기고, 사회정의와 공동선 실현에 앞장서며, 정의와 사랑의 열매인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은 성숙한 정치의식으로 무장한 시민의 책임이다.


[평화신문, 2012년 12월 16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6) 평화를 원한다면 연대하라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는 '인간 중심 정치'의 토대


선거가 끝났다. 어떤 이는 환호했을 것이고, 어떤 이는 탄식을 쏟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침착하게 그 결과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환호했든, 탄식했든, 침착했든 모두 괜찮다. 다만 여전히 현실의 짐이 너무 무거워 신음조차 내지 못하는 이웃의 강요된 침묵에 마음이 아프다.


정치가 선거기간에만 신음조차 내기 힘든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럼 여태까지 그 목소리를 틀어막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루의 요란한 선거와 힘없는 이들에 대한 정치권의 오랜 침묵 사이 간극을 메우기가 어렵다. 어쩌면 하루의 선거는 사회의 약자도 섬김을 받을 수 있다는 환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장엄한 주권재민선언을 잠깐 느낌으로써 오랜 무거운 침묵을 잊는 그런 환각 말이다.


정치생활 토대와 목적은 인간이다


사람은 본성으로 사회적이며 정치적이다(「간추린 사회교리」 384항). 그런데 만일 사회(공동체)와 정치가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있다면 어떨까. 누군가는 현대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를 분업화라고 했다. 주로 경제영역에서 인용되는 특징이지만, 이를 사회에 적용해보자. 어쩌면 공동체의 철저한 해체, 사회의 해체현상 앞에서 우리는 고립된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공동체ㆍ상생ㆍ공생ㆍ동반ㆍ배려ㆍ관심ㆍ이해와 같은 낱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부끄러운 고립화를 인정하기 싫거나 혹은 감추기 위한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정치는 어떤가. 정치의 궁극은 '자기지배', 즉 자기 운명을 자기 스스로 지배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 교회는 이를 "정치생활의 토대와 목적은 인간이다"(384항)고 밝힌다. 당연히 정치공동체(국가)는 근본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함으로써 인간 존엄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 현대에서 공동선 실현은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보장함으로써 드러난다(388항)고 가르친다.


그런데 만일 자기 운명을 자기 스스로 지배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면, 그 존엄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면, 정치는 과연 정치일까? 단 하루 단 한 번의 투표행위로 나의 운명을 스스로 다스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역설적으로 정치의 실종이 아닐까.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는


교회는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한다. 이 체제는 확실히 시민에게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중요한 권한을 부여한다. 또 피지배자들에게는 지배자들을 선택하거나 통제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평화적으로 대치할 가능성을 보장해준다. 따라서 "교회는 사적 이익이나 이념적 목적을 위하여 국가 체제를 점령하고 폐쇄된 지배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도와주면 안 된다"(406항)

고 강조한다.


그런데 혹시 단 하루의 투표를 통해 지배자들을 선택하기는 했는데, 그 지배자를 통제할 수가 없다면 어떡할까. 혹은 그 지배자가 사적 이익이나 이념적 목적으로 권력을 독점하여 소수 지배집단을 형성함으로써 절대다수 시민을 고통으로 내몬다면 어떡할까.


정치의 실종은 그 토대이자 목적인 인간의 실종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 실종은 인권 실종을, 인권 실종은 인간 존엄함의 실종으로, 인간 존엄함의 실종은 하느님 실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이 목적이며 토대여야 할 정치생활이 사람을 사적 이익이나 이념적 목적에 동원되는 수단으로 전락시키며 하느님마저 도구화시킨다. 수단과 도구로 전락한 인간은 불필요하면 언제든지 폐기된다.


선거가 끝났지만, 정치 주변으로 밀려난 수많은 이들의 처지는 여전하다. 오히려 떠들썩한 선거 승패로 더 멀리 밀려났는지 모른다.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이들이 곳곳에서 '생명과 평화'를 외치고 있지만,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니, 그 목소리마저 빼앗겼는지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목소리를 빼앗긴 가장 약한 이들 가운데에서 교회의 창립자 그리스도를 섬기자(「교회헌장」, 8항). 그리고 연대(連帶, solidarity)하자. 연대성은 가깝든 멀든 수많은 사람의 불행을 보고서 막연한 동정심이나 피상적 근심을 느끼는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도덕적 덕목이다.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도 항구적인 결의인 까닭이다.


"연대성은 타인을 착취하는 대신에 이웃의 선익에 투신하고 복음의 뜻 그대로 남을 위하여 '자기를 잃을' 각오로 임하는 것"이기에 공동선을 지향하는 사회적 덕목이다(193항). 연대의 결실은 평화다(102항).


[평화신문, 2012년 12월 23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7) 어리석어서 거룩한 그리스도의 미사(크리스마스)


사회적 약자에게 다가온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


코흘리개 시절, 이색 저색 크레파스로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는 뜻도 모르는 문구를 집어넣어 성탄 카드를 만들곤 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지금 뜬금없이 '왜 그렇게 무성의하게 카드를 만들었을까' 자문한다.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딱히 카드를 건넬 이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 애써 핑계를 찾는다. 수십 년이 지나 해마다 성대하게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교회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다.


그리스도 미사의 진정한 의미


필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철없던 그때나 지금이나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한 이유는 '거룩하게 태어난 그 아기가 도대체 무슨 죄를 범했기에 십자가에 처형되었을까',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으니, 그 아기는 하늘과 땅을 하나로 잇는 길을 연 셈인데, 사람들은 왜 십자가를 만들어 하늘로 높이 세워놓고 그곳에 그를 매달았을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또한, 하늘과 땅을 잇는 길을 폐쇄하려는 것이었을까, 왜 폐쇄하려 했을까, 하느님 통치를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까, 자신들의 무한 통치를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혹시 이 사람처럼 하늘과 땅을 이으려는 불경한 짓(?)을 하면 이 꼴을 당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누군가 으름장을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상념들 때문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 성탄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말이다. 그리스도(Christ, 기독, 基督)는 하느님의 사명(구원과 해방)을 받아 기름을 얹어 성별(聖別)하여 파견된 이(메시아)를 말한다. 미사라는 말은 '파견'이라는 의미를 갖는 라틴말이지만, 교회는 희생과 나눔과 친교의 제사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하느님 사명을 요약하면 구원과 해방이다. 이는 비(非) 구원과 억압의 상태를 전제한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비 구원과 억압의 상태에 놓인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해 파견된(성탄) 예수의 희생(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것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원과 해방이 마음의 문제이며 개인의 문제이며 사후의 문제이기만 한 것인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많은 사람의 기대와는 달리 신구약성경과 교회 가르침은 구원과 해방이 현실의 구체적 문제이며, 공동체의 문제이며, 역사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예수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돌본 이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는지, 거꾸로 끈질기게 예수를 죽이려 애쓰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는지를 보라. 오늘날 표현으로 요약하면 예수는 사회적 약자에게 구원과 해방의 길을 열어주었고, 그 예수를 죽음의 길로 내몬 이들은 현세의 힘 있는 지도자들이었다.


따뜻함을 전하는 그리스도인


우리는 예수의 성탄을 노래하고, 카드와 선물을 주고받으며, 거리를 빛으로 장식하지만, 그 모든 것은 반드시 이 땅의 평범한 사람에게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이어야 한다. 예수가 목숨을 바쳐 돌보고 섬긴 사람들, 예수가 당신의 이웃으로 또 벗으로 삼은 이들을 외면하면 안 된다. 그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부르는 성탄 노래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대한 조롱에 불과하다. 거리에 내몰린 이들을 그늘로 몰아넣었다면, 아무리 화려한 성탄 장식도 의미가 없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겉옷을 놓고 벌인 제비뽑기에 불과하다. 수많은 이들을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틀에 가둬놓았다면, 성탄 카드와 아무리 비싼 선물이라도 고통에 신음하며 목말라 하는 예수에게 건넨 신포도주에 불과하다.


존경하는 어느 신부가 지난해 12월 20일 "아직 성탄도 아닌데 성금요일 아침을 맞은 텅 빈 마음"이라는 문자 글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그리고 다음날 21일 한진중공업지회 최강서 조직차장의 죽음에 이어, 또 그 다음날 22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이운남씨가 목숨을 끊었다. 우리 사회가 '잘 살아보세'를 노래할 때, 예수처럼 수많은 힘없는 이들이 사선을 넘나들고 있다.


성탄을 보내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와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땀을 흘려야겠다. 내 삶이 크리스마스 카드가 되어야겠다. 겨울 추위를 이기려면 따뜻함이 필요하고, 마땅히 땔감을 태워야 한다. 이웃과 세상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남을 태워서라도 나를 따뜻하게 하면 된다는 세태에서, 나를 태워 남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참 거룩함이다.


[평화신문, 2013년 1월 1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8) 정부의 실패(분열과 갈등)의 치유


사회정의 회복은 통합의 지름길


한 해를 시작했다. 단절 없는 시간의 흐름을 물리적으로 해와 달, 날로 나눈 것은 사람뿐이다. 시간의 흐름에 사람의 행위가 얹히며 역사가 이뤄진다. 사람의 행위는 흔적 없이 지나가 버리는 게 아니다. 그 흔적이 아름다워 두고두고 따라야 할 이정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픈 상처가 돼 피해야 할 교훈이 되기도 한다.


사람은 단순한 개체(個體)로 머물지 않는다. 소통하며 결합함으로써 무리를 이룬다. 사회는 사람을 사람답게 형성한다. 이 사회는 단순한 사람의 집합이 아니라, 생물처럼 구성원의 삶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영향을 미친다. 이 사회도 흔적을 남긴다. 다음 사회에 이정표가 될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피해야 할 교훈으로서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앞의 경우를 성공한 사회, 나중 것을 실패한 사회라고 할 수 있겠다.


드러난 사회의 분열과 갈등


지난해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선인은 '분열과 갈등'을 끊겠다고 밝혔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분열과 갈등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무엇이 분열과 갈등을 일으킨 것일까. '시장의 실패'도 그 중 하나다. 시장의 실패는 시장이 자유롭게 기능하도록 맡겨뒀는데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못하는 경우다. 그 이유로 흔히 외부 효과와 시장 지배력을 들 수 있다. 이때 적절한 정부 정책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부의 실패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정부가 잘못된 정책으로 정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다. 정부는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정부라는 기구는 당연히 사람이, 곧 정치인과 관료들이 운용한다. 그 정치인과 관료는 이기적일 수 있고, 능력이 한참 모자랄 수 있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도 있다. 이때 정부는 그 막강한 권력으로 정치인과 관료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며 무능함과 도덕적 타락을 포장할 수 있는 아주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 결과는 다수의 주권자 시민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이를 정부의 실패로 부를 수 있다.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정치 책임자들은 정치적 대표성의 도덕적 차원, 곧 국민의 운명과 온전히 함께하며 사회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을 망각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권위란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공동선을 활동의 참된 목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행사하는 권위를 의미한다"(「간추린 사회교리」 410항).


공동선 추구가 해법이다


지난 몇 해 동안 우리의 정책 책임자들이 국민의 운명과 온전히 함께하려 했는지, 국민의 운명보다는 소수 집단과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목숨을 끊고, 철탑에 올라가고, 천막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시민으로부터 위임받는 권위를 남용한 것은 아닌지, 그것을 비판하는 수많은 언론인을 길거리로 내몰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교회는 민주주의 제도의 가장 심각한 결함 가운데 하나로 정치적 부패를 꼽는데, 이는 도덕원칙과 사회정의 규범을 한꺼번에 짓밟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국가의 올바른 통치를 위협하며,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또한 공공기관들에 대한 불신을 일으키고,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야기한다"(411항). 마치 우리의 지난 몇 년 모습을 요약한 것 같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공공 행정기관이 국민에게 봉사하게 돼 있음에도, 그 정신에 어긋나는 지나친 관료주의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412항 참조).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갈등으로 몰아넣은 일들을 살펴보자. 검역주권 포기 논란, 4대강 사업 논란, 쌍용자동차 대량해고와 연이은 노동자 및 그 가족의 자살, 용산 참사, 핵발전 확대 정책, 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 문제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혹시 정부의 실패, 곧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린 정치적 부패와 정치 책임자들의 도덕적 해이(사리사욕과 불의)와 무능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길은 '사회정의'를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사회정의란 소수의 특정 그룹이 아니라 사회 모든 구성원이 사회ㆍ정치ㆍ경제ㆍ문화 등 전 영역에서 적절한 자원에 자유롭게 접근해 자기완성을 추구하고, 그럼으로써 공동선을 구축하는 사회 통치원리를 말한다(201항 참조).


[평화신문, 2013년 1월 13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9) 사람이 정말 귀한지 궁금해요


하느님 모습 닮아 존엄한 인간


지난 호에서 정부의 실패가 가져온 폐해가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는 곧 다수 시민의 삶을 고통으로 내몰 수 있다는 것을 살펴봤다. 그 근본적 치유를 위해서는 사회정의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회정의란 소수의 특정 그룹이 아니라, 사회 모든 구성원이 사회ㆍ정치ㆍ경제ㆍ문화의 전 영역에서 적절한 자원에 자유롭게 접근해 자기완성을 추구하고, 그럼으로써 공동선을 구축하는 사회통치 원리를 말한다(「간추린 사회교리」 201항 참조).


인권의 원천은 주님이시다


사회정의와 공동선 실현, 그리고 사람의 자기완성은 상호 조건이며 목표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신앙인에게 이는 신앙의 실현이기도 하다. 창세기 표현을 빌리면 사회정의와 공동선은 "보시니 좋았다"는 자연 환경과 인간 환경이며, 자기완성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자"는 하느님 뜻의 실현이다. 안타깝게도 하느님 뜻을 자기 것으로 삼아 하느님처럼 되려는 '유혹'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창세기는 아담과 인간의 범죄(3장), 카인의 형제 살인(4장), 사람들의 악(6장), 그리고 바벨탑 구축(11장)으로 이어지는 죄악의 확장을 서술한다. 사람들은 그 대가를 치른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그때마다 당신 손길을 펼치신다. 아담과 여자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시고, 카인에게 표를 찍어주시고, 노아에게 방주 한 척을 만들게 하셨으며,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창세기는 사회정의와 공동선, 그리고 자기완성이 어떻게 훼손되는지 보여주고, 하느님께서는 그 회복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자기완성은 하느님 모습대로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 때문에 교회는 사람의 존엄함을 절대적 가치로 고백한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자기완성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 강생과 부활에서 존엄함의 절대성을 찾는다. 게다가 성령께서 사람의 삶을 이끌어주시기에 무엇보다도 사람은 귀한 존재이다. 한마디로 교회는 사람 존엄의 근거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서 찾았다. 사람의 존엄함을 훼손하거나 가벼이 여기는 모든 행태는 곧 하느님께 대한 도전인 셈이다.


사람의 존엄함은 인권이란 옷을 입고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교회는 아주 명료하고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인권의 궁극적인 원천은 인간의 단순한 의지나, 국가라는 실재나, 공권력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체에서 그리고 그의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인권은 보편적이고 침해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다"(153항).


이웃의 인권에 관심을 쏟자


그런데 먹고살기 바빠서였을까, 잘 살게 해주겠다는 국가 지도자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어서였을까. 우리는 인권 훼손과 침해에 참 관대했다. 검역주권 논란(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논란)에서 시민의 집단 항의는 진압되고 무더기로 사법처리됐다.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강정의 절규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금지된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라 할 수 있는 정치 및 시민 권리가 훼손되고 실종됐다. 기륭전자, 재능학습지, 이랜드, KTX,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경제적 권리는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아직도 곳곳에서 이 경제적 권리는 무시되기 일쑤다.


도대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만큼 살게 됐는데 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까. 왜 그토록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힘겨워하는지, 도대체 어느 정도 잘 살아야 만족할지 생각해볼 문제다.


어느 인권활동가의 글을 인용한다. "지난 5년동안 숱한 장례식을 지켜봐야 했다. 23분의 OO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 OO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을 얻은 노동자들과 활동보조인 없이 화마에 쓰러져간 장애인뿐만이 아니다. 살인단속에 쫓겨 다치고 병든 이주노동자들, 일제고사와 경쟁 강화에 자살한 청소년들,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고 애도하지 못한 죽음, 살아 있을 때 그 손을 붙잡지 못한 죽음들이 너무 많았다."


어쩌면 우리는 함께 살 용기마저 빼앗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자 없는 양처럼,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누군가의 재촉에 쫓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가, 내 삶의 완성이 정말 귀한가. 사회정의와 공동선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한가. 인권에 관심이라도 투자하자.


[평화신문, 2013년 1월 20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50) 교회의 창립자 예수님께서 낚으시려는 사람들


소외된 이들을 제자로 삼아


교회는 성탄시기를 보낸 뒤 연중시기를 보내고 있다. 지난 연중 제1주일 평일미사에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 말씀을 들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며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리고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 갖가지 질병을 앓는 사람, 한센병과 중풍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고쳐주시며 많은 마귀를 쫓아내신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밥을 같이 드신다. 짧은 복음이지만 당신이 제자를 부르며 하신 "사람을 낚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복음에서는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다"고 요약했다.


예수님과 율법학자의 하느님


그런데 사람을 낚는 예수님의 행보를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율법학자 몇 사람은 예수님을 두고 "이 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며 시시비비를 따지자고 한다. 그리고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하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갈라놓으려고 한다. 율법학자쯤 되면 하느님에 대해서도 남들보다는 권위를 갖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하느님과 하느님의 법에 관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평가했을 것이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든, 나병에 걸렸든, 중풍에 쓰러졌든, 세리든, 죄인이든,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가까이해서는 안 될 부류의 인간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똑같은 부류의 사람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복음"(마르 1,14)을 전하며, 그들을 해방시키며, 그들과 식탁을 같이 하신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율법학자들은 그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한다.


여기서 진지하게 묻게 된다. 율법학자의 하느님과 예수님의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일까? 만일 같은 하느님이라면,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를 서로 비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두고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극단적 비난을 서슴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학자들을 위선자, 회칠한 무덤 같은 이들이라고 비난한다. 서로 비난하고 있는 셈이다. 이 율법학자 그룹은 예수님을 바로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십자가에 매달았다. 스스로는 할 수가 없어 총독 빌라도의 손을 빌려서라도 그 예수님을 죽였다. 이쯤 되면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예수님을 죽일 정도로 증오했거나,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있거나. 죽일 정도로 증오했다면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어쨌거나 죽일 정도로 증오했다면, 그들에게 자비의 하느님은 없는 셈이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충성으로 그랬다면, 이는 신념이라기보다는 광기의 폭력에 불과하다.


이 시대 주님의 제자는 누구인가


율법학자의 하느님과 예수님의 하느님은 같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적어도 복음이 전하는 내용을 살펴볼 때 그들이 믿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믿는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 아니다. 여기서 오늘의 우리 교회와 신앙인의 모습을 무겁게 성찰하게 된다. 과연 우리가 믿는 하느님, 우리가 따르는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 우리가 높이 부르는 하느님의 이름과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은 하느님과 같은 분일까.


교회 사람들을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걸친 양극화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이야기한다. 어디서부터 해법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걱정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이웃, 사회적 약자들은 추운 거리에서 천막생활을 한다. 그리고 철탑 위에서 절규한다. 종교와 교회는 혹시 그들의 몸짓이 교양 없고 경건치 못하다고 거리를 두려는 것은 아닌지…. 그들을 정화시키기 전에는 한 식탁에 앉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성경에서는 소외받는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당신 제자들을 부르셨다.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본다"(「교회헌장」, 8항).


[평화신문, 2013년 1월 27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51) 공동선, 진정한 애국심의 지표


공동선,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


국가를 흔히 영속적(永續的)이라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국가는 영속적이라기보다는 그 지속 시간이 길다고 하는 것이 맞다. 예를 들어보자. 지금 아프리카 대륙의 그 많은 국가가 언제부터 국가라는 이름을 갖게 됐는가. 불과 몇 십 년 전이다. 오랜 식민지배가 끝나고, 타국에 의해 영토가 나뉘고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우리나라 경우도 한반도에 세 왕국이 각 나라로 존재했다. 그러다가 통일됐고 다시 분단되지 않았는가. 어쨌든 국가는 정부에 비하면 그 지속 기간이 긴 편이라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국가와 정부 그리고 관료


국가는 국민국가 시대에 들어 정부라는 기관으로 구체적으로 실현됐다. 그리고 이 정부는 영속적이지도 않다. 그 지속 기간도 길지 않으며, 오히려 주기적으로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현대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같은 대한민국에서 제1 · 2 · 3공화국,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따위로 제각각 다르게 정부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다. 이 정부라는 것도 그냥 골격만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 구조에 사람들이 들어가 있다. 흔히 정치인과 관료들이 그들이다.


문제는 그 정치인과 관료가 사람이라는 데에 있다. 그들이 공동체가 만든 제도와 법과 규정에 따라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그 제도와 법과 규정 역시 사람들이 만들었으므로 현실세계에서 완전할 수 없다. 그 제도와 법과 규정을 운영하는 사람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에, 정부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국가와 정부, 그리고 그 정부에서 활동하는 정치인과 관료를 동일시하는 경향을 가진다. 불완전한 정치인과 관료들 행동을 정부 행동으로, 정부 행동을 곧 국가 행위로 절대시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이상한 태도가 슬그머니 나타날 수 있다. 정부에 대한 충성을, 그리고 그 정부를 운영하는 사람들(정치인과 관료들)에 대한 복종을 애국 혹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 여긴다. 정부에 대해 비판하고, 그 정부를 운영하는 사람들에 대해 복종하지 않는 것을 불충 혹은 애국이 아니라고 매도한다.


공동선 추구가 우선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 인류가 처음으로 ‘인류’ 자신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란 사건은 아마도 1 · 2차 세계대전과 그 와중에 발생한 대학살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많은 이들을, 그것도 그렇게 터무니없는 이유로 학살할 수 있단 말인가. 인류 자신의 능력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분명 일국의 통치자였으며 정부의 이름으로, 더 나아가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행동했다.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 시민 가운데 상당히 많은 이들이 히틀러와 무솔리니,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정부, 그 정부가 내세운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국가의 행위를 열렬히 환호했다.


이 전쟁과 대학살을, 애국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내세워 정당화할 수 있을까? 잘못된 신념을 가진 소수 권력자들이 평범한 시민의 소박한 애국심과 민족애를 반인륜적 범죄에 교묘하게 이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 사례는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최선을 성취하려는 국가의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도, 그리고 국가와 시민이 최악의 상태로 내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정치인과 관료들, 그리고 정부 행위에 대한 비판과 감시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이를 반정부 혹은 국가에 대한 불충이라 하여 그 비판과 감시의 역할을 포기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공동선을 훼손하고 특정 계층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비판과 감시를 악용해서도 안 되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정당한 비판과 감시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는 그 기준을 공동선에서 찾는다. “정치 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완전한 자기 정당화와 의미를 얻고, 공동선에서 본래의 고유한 자기 권리를 이끌어낸다. 참으로 공동선은 개인과 가정과 단체가 더 충만하게 더욱 쉽게 자기 완성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 생활 조건의 총체를 포괄한다. (…) 정치권력의 행사는 바로 그 공동체 안에서든 국가를 대표하는 기관에서든 언제나 도덕 질서의 한계 안에서 정당하게 제정됐거나 제정될 법질서에 따라 (…) 공동선을 위해 이뤄져야 한다”(「사목헌장」, 74항).


[평화신문, 2013년 2월 3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52) 설을 맞으며, 제발 함께 살자


설은 사회성 회복 다짐하는 날


'나'라는 사람은 유일무이한 존재다. 온 우주 곳곳을 샅샅이 뒤져도 또 다른 '나'는 지금 여기 있는 '나'말고는 없다. 세상 그 무엇과도 교환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지금 여기 있는 나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렇게 유일하기에 귀한 존재다.


이 유일함과 귀함을 이유로 인간의 존엄함을 말할 수 있다. 내가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처럼, 지금 내 옆에 있는 그도 유일무이하기에 나의 귀함, 나의 존엄함만큼이나 그의 귀함과 존엄함도 무겁다.


나의 삶과 그의 삶의 무게는 터럭만큼도 차이 없이 똑같이 귀하다. 유일무이함으로 자유를 말할 수 있으며, 똑같은 존엄함 때문에 평등이란 말을 할 수 있다. 피부색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성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그 존엄함에서 평등하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의 유일무이함과 귀함에서 나온다. 여기서 이 유일무이함을 인간의 '개체성'이라고 한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홀로 한순간도 살 수 없다. 태어나는 것도 '나'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있어야 나라는 사람이 비로소 있게 된다. 내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가 있었기에 나라는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사람이 있어야 나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나'는 과거의 누군가, 곧 부모, 형제, 친지, 조상이 있어 있게 된 것이고, 미래의 누군가를 있게 한다.


사람은 유일무이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과거와 미래의 수많은 사람과 함께 사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 자리의 나는 또 다른 자리의 어떤 수많은 사람들, 세상의 수많은 동식물, 하다못해 미생물과 무생물하고 함께 살고 있다.


이렇게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긴 하지만, 동시에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미래의 수많은 사람과 자연과 함께, 공간적으로는 세상 곳곳의 수많은 사람과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존재다. 이를 사람들은 인간의 '사회성' 혹은 '공동체성'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이 개체성과 사회성은 우리가 벗어버리거나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필연적 조건이다.


모두가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자


우리의 설은 바로 이 사회성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가족과 정을 나누는 것도, 돌아가신 부모, 형제, 친지, 조상을 기억하는 것도, 바로 사람의 이 사회성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요즘 이 사회성과 공동체성이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 나만 알고 남은 배려하지 않는 태도, 나만 살고 남은 죽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태도 때문이다. 조금 범위를 넓혀서, 우리 동네, 우리 지역, 우리 나라만 알고, 다른 동네, 다른 지역, 다른 나라는 생각하지 않는 태도, 우리만 살고, 남은 죽어도 괜찮다는 태도, 이런 분위기가 우리 사회를, 이 세상을 휩쓸고 있다.


이를 자유라는 말로, 경쟁이란 말로, 세계화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는 한다. 자기만 살고, 남은 죽거나 살거나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나만 살려고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기만 살려고 할 것이고, 이는 살기 위한 투쟁을 불러오고, 그렇게 되면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하기에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우리 동네, 우리 지역, 우리 나라만 살려하는 것처럼 남의 동네, 남의 지역, 남의 나라도 잘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쪽은 살고 한쪽은 죽어야만 한다.


이를 두고 어느 사상가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했고, '인간은 인간에게 서로 늑대다'라고 묘사했다. 그런 세상을 야만의 상태라고도 했다.


설은 사회성과 공동체성을 다시 기억하고 회복하려는 다짐을 새롭게 하는 날이다. 함께 살 길을 찾으려고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며,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것이다.


현대의 시민국가 시대에 함께 살 길을 찾는 이 일을 가족단위, 지역단위 차원 에서만 찾을 수가 없다. 국가 차원에서도 세계 공동체 차원에서도 '지구인이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국가 각 분야 지도자들의 사리사욕이 과거보다 훨씬 위험하고 훨씬 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 그들이 사리사욕에 빠지지 못하도록 한 사람 한 사람 깨어있는 시민의식이 예전보다 더 절실하다. 설이다. 한 해를 시작하며 공동체성, 사회성을 회복하도록 우리 모두 마음을 새롭게 하자.


[평화신문, 2013년 2월 10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53) 도덕성을 갖춘 지도자가 인재다


정치권위는 도덕률로 세워져


지난 호에서 설을 맞아 '지구인이 함께 사는 길'을 찾기 위해서라도 국가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사리사욕에 빠지지 못하도록 한 사람 한 사람 깨어있는 시민의식이 예전보다 더 절실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우리는 분야마다 존경받는 지도자를 만나기가 너무 어렵다. 지도자의 도덕성을 찾아보는 일은 아예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평범한 시민의 입에서 "그렇게 엄격하게 도덕성을 따지다가 나라를 위해 일할 인재를 구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말이 나올까. 더욱 슬픈 것은 "그런 인재가 있겠어? 괜찮은 사람치고 부동산투기, 논문 표절, 병역기피, 세금누락, 위장전입, 그런 거 안 하는 사람 있겠어" 하는 맞장구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공직 후보자 인사청문회와 관련해 대중매체가 전하는 소식들은 시민에게 엉뚱한 기대를 갖게 한다. 이번에는 어떤 불법, 탈법이 능력의 목록에 추가될까 하는 기대 말이다.


진리 추구는 지식인의 몫이다


그런데 요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접한다. 나라를 위한 인재를 찾는데, 도덕성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공개하지 말자는 식으로 말하지만), 슬금슬금 시민 의식을 흐리려 한다. 교회는 정치적 권위가 "국민의 단순한 동의만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도덕률에 따라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96항)고 가르친다.


관련된 이들의 도덕성을 뒷순위로 놓으려 하거나 지나치게 따지지 말자고 하는 것을 두고, 백번 양보해 정당하지 않은 권력욕에 휘둘려 그랬다 치자. 그러나 언론이나 지식인, 혹은 종교인들 입에서 그런 식의 말을 들을 때에는 사정이 다르다. 공동체를 암흑의 야만으로 내몰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매체의 윤리성을 이야기할 때, "정보의 객관성의 권리 행사"를 말한다. 흔히 말하는 시민의 알 권리가 그것이다. 그런데 대중매체가 나서서 정치권력의 토대인 도덕성을 살피지 말자는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이는 대중매체 자체의 윤리성을 의심케 한다. 더 나아가 시민의 건전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지식인의 책임은 무엇일까? 오늘날 자본은 지식을 상품으로 만들어버렸지만, 그렇다고 지식인이 스스로 그 책임을 포기해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거짓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고, 오류 속에서 진리를 밝혀 문명을 일구는 몫은 비록 고달프지만, 상당 부분 지식인의 책임이다. 축적한 지식을 동원해서 정치권위의 도덕성을 부수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일은 결코 지식인의 임무가 아니다. 이는 수많은 사람을 거짓으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종교야말로 저마다 형태와 길이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진리를 추구한다. 아무리 현실 조건이 열악하더라도 궁극적 진리에 토대를 둔 도덕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를 포기한다면 더는 종교가 아니다.


도덕률은 지도자의 덕목이다


사순 제1주일의 복음(루카 4,1-13)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내용을 다룬다. 그 유혹 내용이 어쩌면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탁월한 능력을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 나라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차지하는 능력, 어떤 위기에서도 쓰러지거나 다치지 않는 능력 말이다. 불법이든, 탈법이든, 불의든, 부도덕함이든 괜찮다. 그런 능력만 있다면 인재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사실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나 위장전입과 부동산투기로 축재하는 능력은 비슷하다. 모든 권세와 영광을 차지하는 능력이나 권력자를 쫓아 경배하며 변신할 수 있는 능력 역시 비슷하다.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 능력은, 어쩌다 운이 없어 추락하더라도 반드시 다시 일어서 인재로 인정받는 능력과 닮았다. 도덕성이 모자란 지도자가 불법, 탈법, 불의, 부도덕함으로 욕망을 실현하는 것을 능력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 자리에서 여러 차례 소개했지만, 우리 현실을 두고 말하는 것 같아 교회의 교리를 다시 소개한다. "민주주의 제도의 가장 심각한 결함 가운데 하나는 도덕원칙과 사회정의 규범을 한꺼번에 짓밟는 정치적 부패이다. 정치적 부패는 국가의 올바른 통치를 위협하며,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또한 공공기관들에 대한 불신을 증대시키고, 차츰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야기한다"(「간추린 사회교리」 411항).


[평화신문, 2013년 2월 24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54) 공공재 민영화하면 국민이 행복해질까


누구를 위한 공공재 민영화인가?


필자가 사는 동네 골목에는 미용실과 슈퍼, 편의점과 작은 교회가 참 많다. 가게든 교회든 닫힌 채로 혹은 오랫동안 빈 채로 남아있거나, 내부 수리를 하고 주인이 바뀌는 경우가 빈번하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힘들게 견디다 마침내 "장사가 너무 안 돼 가게를 접었다"는 소문을 듣곤 한다. 그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게 지낼까 하는 생각에 안타깝다.


심각한 불균형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시늉만 내고, 경기가 좋지 않다며 '양극화'(소수의 부의 집중과 다수의 빈곤화)뿐만 아니라 '빈곤의 대물림'을 당연히 여기도록 세뇌하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화가 난다.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품위 있는 생활이 사치가 되고, 말 그대로 '생존' 그 자체마저 위협받는다. 그리고 사회 일부 지도자들은 생존을 위협받는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불의ㆍ불법ㆍ탈법을 '인재'로서의 필수과목쯤으로 여긴다.


공공부문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것


아무리 경제 분야의 자유가 성장과 효율을 가져다준다고 하더라도, 그 성장과 효율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은 인간이기 때문이다"(「간추린 사회교리」 331항).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의무로 여기는 교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한순간도 놓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분명히 고백한다.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칙은 가난한 이들, 소외당하는 이들, 어느 모로든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 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다시 한 번 강력히 확인하여야 한다"(182항).


그런데 지난 몇 년 동안, 그리고 최근에도 무서운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것도 아주 작은 소리로 말이다. 바로 의료ㆍ철도ㆍ전력ㆍ물 따위의 공공부문을 민영화 혹은 선진화하겠다고, 혹은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는 소식이다. 이런 분야를 공공부문이라 부르는 이유는 대중이 소비하는 까닭이다. 어느 특정인은 소비하고, 어떤 사람은 소비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재화가 아니란 뜻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고, 명절이 되면 도로나 철도를 이용해 친척을 찾아야 하며, 어두우면 전깃불을 밝혀야 한다. 살려면 물을 마셔야 한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런 분야를 시장에서 거래하는 상품으로 만든다면,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구매능력 유무가 절대적 가치가 된다. 장사가 너무 안돼 가게를 접은 이들과 그 가족들은 치료비가 비싸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하나. 통행료나 철도요금이 너무 비싸면 친척을 찾지 말아야 하나! 가스나 전기요금이 비싸면 추워도 떨며 지내야 하나. 만일 그렇다면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 조건에서" 살아야 하는 셈이다.


이윤보다 사람이 먼저다


물론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고 선진화하기 위해 경쟁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얻는 경제적 효율성에 대해 찬반의 시각이 있다. 전문가들의 충분한 토론이 필요하고, 실제 공공부문을 민영화했던 다른 나라의 사례를 꼼꼼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공공재는 대중이 소비하는 재화이기 때문에 전문가뿐만 아니라 대중의 의사를 묻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만 공급돼야 한다.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충분한 논의와 검토는 고사하고 대중의 민주적 여론 형성 과정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상식으로 따져보더라도 의료ㆍ철도ㆍ전력ㆍ물 따위의 공공부문을 민영화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상품을 공급하는 쪽에서는 이윤을 남기려 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의료ㆍ철도ㆍ전력ㆍ물 따위를 이용하지 않을 사람이 있는가. 아무리 가난해도 빚을 내서라도 구매해야 한다. 대중이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공공재의 비배제성과 비경쟁성이라고 한다.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 소비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 수돗물 대신 마실 것이 없고, 병원 말고 다른 곳에서 치료할 방법이 없다.


그런 공공재를 상품으로 만들어서 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게 한다면, 이윤을 내겠다는 공급자가 탐욕스럽지 않으리라는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여태까지 자본이 사람을 위해 양심적이며, 이성적이며, 윤리적이었던 적이 믿어도 될 만큼 많았는지 기억을 더듬어 봐야 한다.


[평화신문, 2013년 3월 10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55) 공공재를 시장에서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을까?


공공성 해치는 민영화의 그늘


지난 호에는 효율성과 경제성을 목적으로 공공재를 민영화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는 글을 실었다. 공공재는 사회 구성원 누구도 그 재화 사용에서 배제할 수 없으며, 다른 재화로 대체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 그러기에 어느 정도 비효율과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공공 영역에서 관리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교리에 비춰보면, 공공재에 관한 몇 가지 조항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자유시장과 공공재, 둘째는 재화(사용)의 보편적 목적 및 권리, 셋째는 재화(사용)의 보편적 목적 및 권리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 넷째는 국가(정치공동체)와 국제금융시장과 공공재의 민영화, 마지막으로 공동선 실현이라는 국가의 의무에 대한 가르침이다. 오늘은 '자유시장과 공공재'에 대해 살펴보자.


인간 성장의 필수적 재화 공공재


공공재의 비배제성이란 가난해서 그 재화를 구매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재화사용에서 배제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서 병원을 못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운영상 여러 문제가 지적되는 국민건강보험에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며, 보험료를 부담할 능력이 없는 시민일지라도 국민기초생활제도로 보호하는 이유다.


공공재의 비경쟁성이란 앞의 경우처럼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할 때, 의료 서비스 말고 다른 서비스로 대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픈 사람은 의료서비스 말고 다른 서비스를 선택해 건강을 회복할 수 없다. 의료 서비스는 시장에서 사고파는 콩나물과 시금치 같은 상품이 아니다. 콩나물은 입맛에 따라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아프면 누구나 예외 없이 병원에 가야 한다(비배제성). 시금치 대신 꽁치구이 반찬을 먹으면 되지만 아프면 병원 말고는 갈 곳이 없다(비경쟁성).


바로 이 비배제성과 비경쟁성이란 특성으로 공공재를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내맡길 수만은 없다. 시장에서는 구매능력이란 것이 반드시 개입하기 때문이다. 구매능력이 있는 이들만이 원하는 상품을 구입하고, 대체 상품들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물론 교회는 자유시장의 긍정적인 면을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진정한 경쟁 시장은 정의가 추구하는 중요한 목표들에 이를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이다. 그 목표란 개별 기업들의 과도한 이윤을 조절하고,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며, 자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보존하며, 기업가 정신과 혁신에는 상응하는 보상이 돌아가며, 건전한 경쟁 분위기에서 상품을 비교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정보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347항).


공공재는 우리 모두의 것


사회교리는 실질적인 시장의 우상숭배 위험에 직면해 시장의 한계를 강조한다. "시장만이 모든 종류의 상품을 공급할 임무를 맡을 수 있다는 생각은(…) 공감을 얻을 수 없다.(…) 그러한 한계는 본질적으로 단순한 상품들이 아니며 또 될 수도 없는 재화들, 곧 시장의 전형적인 특징인 '등가교환'법칙과 계약 논리에 따라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닌 재화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중요한 요구를 시장이 충족시키지 못하는 데에서 쉽게 드러난다"(349항).


인용에서 말하는 '등가교환법칙과 계약 논리에 따라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닌 재화'이면서 '인간의 중요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재화가 바로 공공재라 할 수 있다. 공공재는 국민들의 인간적 성장에 필수적인 재화와 용역으로서 시장에서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보장할 수 없는 분야이며, 시장의 구조에 좌우돼서는 안 되는 특정 범주의 재화와 집합재, 공공 사용을 위한 재화들이라는 뜻이다(345-346 참조).


교회는 경제 분야에 대한 국가의 활동에 있어서, 보조성의 원리와 연대성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여야 하며, 연대성에 원리에 따라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경제 주체 당사자들의 자율성에 일정 제한을 두어야 한다"(351항).


더 나아가 국민들이 인간적 성장에 필수적인 재화와 용역이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보장할 수 없는 분야의 경우, 국가와 시장의 상호 보완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공공재를 민영화 혹은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놓아 경쟁체제를 통해 효율과 경제성을 높여 국민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줄 것이라는 주장은 인간이 갖는 탐욕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낭만이다. 인간적인 성장에 필수적인 재화와 용역인 만큼 그 수익이 얼마나 막대할 것인가.


[평화신문, 2013년 3월 17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57) 재화의 보편적 목적 · 권리와 사회 약자에 대한 우선 선택 의무


약자 위한 우선 선택, 자비 아닌 정의


공공재를 재화(사용)의 보편적 목적 및 권리라는 교회 가르침에 비춰 살펴봤다. 물ㆍ전기ㆍ통신ㆍ의료ㆍ교육ㆍ치안ㆍ국방 등 공공재를 효율성을 위해 민영화하면, 시민에게 더 큰 혜택이 갈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소수 투자자의 이윤 극대화만 가져올 위험이 크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공동체 형성에 기초적인 법적 정의조차 무력화시키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경제 민주화'가 최대의 화두가 되기까지 했을까.


인간적 성장의 필수조건, 재화


오늘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의 의무' 관점에서 공공재를 살펴보자. 교회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가 가난한 이들, 소외받는 이들, 어느 모든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 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182항)고 가르친다.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 조건이란 무엇일까? 교회가 인간의 존엄성과 함께 강조하는 공동선에 어긋나는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공동선은 집단이든 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쉽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인 까닭이다.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란 정치ㆍ경제ㆍ문화ㆍ국제ㆍ종교적 조건 따위로 구별할 수 있다. 독재 치하에서, 빈곤 상태에서, 마음과 정신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는 조건, 정치 및 경제의 식민 상태, 종교의 자유가 없는 상태, 그 삶을 인간다운 생활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를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 조건' 혹은 공동선의 부재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경제적 조건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전방위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교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고 기본적인 생활 여건을 조성하는 물질 재화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이 먹고 성장하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사귀며 또한 인간 소명의 가장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이러한 재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171항).


이렇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재화가 공정하게 모두에게 분배된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개인적 원인에서건, 사회 구조적 이유에서건, 혹은 왜곡된 국제질서 때문이건 빈곤한 이들이 존재한다. 전 세계에서 생산하는 곡물로 120억 명이 먹고 살 수 있다는데, 지구 인구 70억 중 절반 가까이 굶주리는 게 현실이다.


재화의 올바른 사용, 선택이 아닌 의무


교회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 "창조된 재화는 예정된 대로 언제나 전(全) 인간과 온 인류의 발전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언한다"(177항)고 가르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그리스도교 사랑의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특별한 형태의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도록 영향을 주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재화의 소유와 사용에 관한 논리적 결정에도 적용된다고 가르친다.


당연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사랑과 거기서 영감을 받아서 내리는 결정은 수많은 굶주리는 사람과 집 없는 사람,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182항 참조). 그 같은 결정은 단순한 자선 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빈곤을 양산하는 사회적ㆍ정치적 문제에 대처하는 것도 포함한다. 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184항)이라 분명히 밝힌다.


공공재를 민영화해 경제성과 효율성을 제고하고, 국민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준다는 말이 설득력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수익이 목적인 시장이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 조건'에 놓여 있는 시민, 곧 사회적 약자에게 '자비의 행위'를 베풀 수 있을까. 아무리 따뜻한 자본주의를 논하더라도 시장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정의의 의무로 받아들일까. '윤리적으로 심각한 걱정거리'(369항)가 된 국제 금융체제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도록 실물 시장을 유인할까.


공공재의 민영화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교회의 정의의 의무를 행하는데 장애가 될지 모른다. 공공재의 민영화는 교회가 펼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자선 행위에만 국한되며,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 조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평화신문, 2013년 4월 7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59) 공동선 실현이라는 국가의 의무와 공공재


모두의 온전한 성장 위한 공공재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계화는 공공재 민영화 문제와 관련해 본다면 그다지 좋은 조건이 아니다. 세계화의 물결 앞에 국가 간 장벽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오늘날, 각국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떤 정부도 국제사회의 제약과 의무, 특히 자국민을 희생시켜야 하는 금융시장의 강요를 무시하기 어렵다. 지난 호에서는 그 예로 1997년의 외환위기, 2007년의 금융위기, 그리고 론스타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소송(ISD, Investor-State Dispute)을 들었다.


정치공동체의 목적은 인간이다


대중이 소비해야 할 재화(공공재)는 효율성과 경제성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효과와 목적을 먼저 따져야 한다. 효율은 투입량에 대한 산출의 비율이다. 간단히 말해서 100을 투입해 80이 나왔다면 효율은 80%가 된다. 손해인 셈이다.


기업에서는 부가가치를 높이려 한다. 말하자면 100을 투입해서 120%, 130%의 성과를 얻으려 한다. 그만큼 이익이며, 이는 경제성과 직결된다. 100을 투입했더니 120이 나온다면 할만한 일이 된다. 그러나 80이 나온다면 당장 "그런 일을 왜 하느냐"고 한다.


그러나 효과는 효율과 엄연히 다르다. 효과는 기대한 수준을 채운 정도를 말한다. 아픈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때 어떤 약이 효과적인가를 따진다. 아무리 비싸도 약이 듣지 않으면 효과가 없으며, 아무리 싸도 약이 들으면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효과는 치유라는 목적에 직결된다.


국가(정치공동체)는 무엇인가? 국가 역시 효율성과 경제성을 찾아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존재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정치공동체의 토대와 목적을 인간이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국가가 할 일이 "근본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함으로써 인간 존엄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현대에서 공동선의 실현은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보장함으로써 드러난다"(「간추린 사회교리」 388항). 교회는 이를 "국가는 공동선 달성을 위하여 협력해야 할 구성원 각자의 온전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384항)고 요약한다. 국가가 추구하는 효율성과 경제성은 "구성원 각자의 온전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만 내세울 수 있다.


국민의 온전한 성장, 국가가 도와야 한다


특정 계층이나 집단도 "구성원 각자의 온전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 나름의 효율과 경제를 우선할 수 있다. 기업이 대표적이다. 기업 혹은 시장은 투자자, 경영인, 노동자, 소비자 모두 효율성과 경제성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이다. 그러나 국가는 절대로 기업 같은 이익집단이 아니다. 국가의 토대인 인간은 경제 생활만 하는 부분(部分) 존재가 아니라, 정치활동, 문화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활을 하는 전인(全人)인 까닭이다. 경제 생활이 아무리 중요해도 인간의 삶의 한 부분일 뿐 전부가 될 수 없다.


실제 사람한테는 효율성과 경제성만으로 따지지 못할 무수한 영역의 삶이 있다. 연인 사이 같은 인간관계를 효율과 경제로만 따질 것인가? 학문과 지식, 사회 생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경제 분야 같은 특정 집단ㆍ분야를 온전하게 성장시키기 위해 국가가 그 권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가 할 일이 아니다.


"정치 공동체는(…) 특정한 개인이나 사회 단체의 권리 보호에만 관심을 두는 행위를 피해야 한다"(389항). 오히려 국가 공동체는 그 효율과 경제라는 잣대가 사회를 휩쓸어 구성원 각자의 삶이 황폐화되지 못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죽하면 우리 헌법은 국가가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장방지"하기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헌법」 119조 2항)고 명시하겠는가!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은 "구성원 각자의 온전한 성장"은커녕, 구성원을 시장과 경제의 노예로 전락시킬 위험이 크다. 실제 그런 현상은 이미 우리의 삶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사)교육시장이니 의료산업이니, 삶의 모든 분야를 효율과 경제성이라는 시장원리로 바라보는 데 우리는 얼마나 익숙한가.


국가와 관련해서 우리가 한 순간도 놓쳐서는 안 되는 본질이 있다. 국가의 목표는 "구성원 각자의 온전한 성장"이다. 사회적 약자조차도 엄연히 국가의 토대이자 목적인 구성원, 곧 인간이다. 공공재는 구매 능력이 약한 사회적 약자를 포함해 모든 구성원 각자의 온전한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화다.


[평화신문, 2013년 4월 28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0) 폭력에 무심하고 익숙한 사회, 그리고 그리스도인


사랑의 계명에 적어도 차별은 없어야


교회는 하느님을 섬기며, 예수님을 주님(그리스도, 메시아)이라 고백하며,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라고 가르친다. 그 가르침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밝히셨다. 물론 그 아버지의 뜻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차별 없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측량할 도리가 없다.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는 하느님께서 그 무게를 헤아리실 테니 말이다. 그래도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구약의 이스라엘은 계약으로, 성전으로, 그리고 율법으로 그가 하느님을 사랑하는지를 셈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매개로 '하느님 사랑'의 길을 보여주셨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되고 헐벗은 사람, 병들거나 감옥에 갇힌 사람(마태 25,31-46 참조)들이다. 한마디로 작은이들을 업신여기지 않고(마태 18,10), 차별하지 않으며(야고 2,8-9 참조), 더 나아가 그들 가운데에서 교회의 창립자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4월 25일,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못하고 그저 육우당(六友堂)이라 부르던 한 젊은이의 죽음을 추모하는 10주기 추모 기도회가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렸다. 자신의 호를 육우당이라 지은 이유가 너무 마음 아프다. 육우당은 술,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그리고 묵주라는 여섯 친구를 뜻한다. 누구도 그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나 보다. 그에게는 묵주도 친구였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7조에서 동성애를 삭제하도록 권고하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교의 어떤 연합회에서 강력하게 반발하며 인권위의 결정을 철회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동성애자 인권운동 활동가인 그는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종교계의 태도에 항의하는 유서와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루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겨우 19세였다.


서로 사랑하여라


매일 저녁 6시 30분에 서울의 대한문 앞에서는 거리 미사가 봉헌된다. 정치권이 유권자의 표를 의식할 때에는 쌍용자동차매각 과정을 국정조사를 할 것처럼 해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외면한다. 그 막강한 힘 앞에서 평범한 노동자와 시민은 무력하다. 쌍용차 희생자를 기리는 분양소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임시로 만든 꽃밭을 보면, "너무나 힘이 없어 스스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생명이 그들에게는 강제로 꽂힌 꽃의 생명만큼도 못한 것인가"하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가장 작은 고을 가운데 하나인 제주의 강정에서도 매일 거리미사가 봉헌된다. 미사 때면 경찰은 누군가의 업무추진을 위해 법을 집행한다며 사람들을 둘러막고, 공사장 정문에 앉아 있는 이들을 들어 옮긴다. 힘없는 이들은 굶주리고 목말라하며, 헐벗고 떠돌아다니며, 병들어 눕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다. 힘있는 이들에 의해 힘없는 이들은 그렇게 도처에서 스러져간다.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의 공통점은 힘 없고 약한 처지에 놓인 개인이나 집단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예수님 시절에도 대부분의 유다 민중은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이중의 폭력 앞에 대책 없이 신음했다. 로마 제국은 무력으로 억눌렀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로마제국에 부역하고 집단의 안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을 사지로 내몰았다. 이렇게 폭력은 언제나 비겁하게 힘없는 사람과 집단을 향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오늘 주일미사에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말씀을 소개하며 강론을 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그걸 그리스도인 가운데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을 모르는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가 있을까.


예수님처럼 사랑하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라면, 적어도 차별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불이익을 가하지는 말아야 한다.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힘없다고 하찮게 여기고, 나와 다르다고 불이익을 태연하게 가하는 이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누구인가 돌아봐야 한다.


[평화신문, 2013년 5월 19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1) 사회는 진실 · 자유 · 정의 ·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1)


공동선 위협하는 왜곡된 정보 전달


우리말 '사람'은 바로 '삶'과 '앎'의 결합해 이뤄진 것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삶의 어느 한순간이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들기 전까지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오관을 총동원하고, 정신을 집중하고, 심혈을 다 기울이며 내 삶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알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아마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앎'에의 의지를 포기한 채 '그냥 그렇게' 지내기 쉽다. 그러나 이 익숙함은 독이 될 수도 있다.


죄에 대한 익숙함


미사는 참회의 예절로 시작한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이 고백이 무미하고 공허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내 탓이라고 가슴을 쳐도 가슴이 아프지 않다. 형제들에게 고백한다고 하지만 무엇을 고백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가해(加害)의 죄값을 치르고, 어떻게 상처를 치유할 것인지….


5월은 계절의 여왕이며 성모성월인 데다가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이 줄지어 있지만 한편 고통스러운 달이기도 하다. 5ㆍ16이 있고, 5ㆍ17이 있으며, 5ㆍ18이 있기 때문이다. 5ㆍ16은 필자가 갓난아기 때이니 개인적 기억은 없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사회적 기억으로 물려받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한 사건이다. 5ㆍ17과 5ㆍ18은 한창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니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사건들이다.


당시 우리 언론은 사실관계조차 전하지 않았다. 이 역사의 사건을 알게 된 것은 외국 언론을 통해서였다. 그것도 숨어서 말이다. 귀에 익숙한 용어, 쿠데타의 사전적 의미를 알게 된 것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쿠데타는 국가에 폭력을 가한다는 프랑스어다. 외침(外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라고 국민의 이름으로 맡긴 그 무력(국방력)을 '국가에 대한 폭력'에 동원했으므로 5ㆍ16과 12ㆍ12를 쿠데타라 하는 이들이 있으나 끝까지 '구국의 혁명'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5ㆍ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국가가 기념하는데도, 아직도 폭도들이 일으킨 사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0ㆍ26 이후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5ㆍ17을 군부가 정권탈취의 야욕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법은 심판했지만, 여전히 그 주역을 칭송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일제강점 35년을 정당화하며 '을사늑약' 대신 고집스럽게 '을사조약'이라고 부르고, 심지어는 그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됐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들은 이러한 과거를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해야 할 죄'가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여긴다.


교회 가르침은 신앙인 삶의 기준이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앎의 혼돈이 생긴 것일까? 다음의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우리 신앙인에게 기준을 제시한다. 그대로 옮긴다.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의 앎이 대중매체를 통해 형성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리는 아닐 터이다.


"대중매체를 통한 정보 전달은 공동선을 위한 것이다. 사회는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 권리의 행사는, 커뮤니케이션이 그 내용에서 언제나 진실하여야 하고 정의와 사랑을 지키고 완전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곧 뉴스의 취재와 보도에서 인간의 정당한 권리와 존엄성 그리고 도덕률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2494항). "여론 조작을 목적으로 대중매체를 통해서 거짓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라도 정당화할 수 없다. 이러한 개입으로써, 개인과 집단의 자유를 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2498항).


교회는 정보의 왜곡, 곧 앎의 혼란이 민주주의 제도를 위협한다고 밝힌다.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하게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가운데, 특별히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는 뉴스 미디어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에, 정치(통치) 활동과 금융 및 정보기관들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이는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미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그런데 혹시 이 위험한 결과에 우리의 책임은 없을까? "사회적 전달 수단(특히 대중 매체)이 그 이용자들에게 수동성을 길러 주거나, 그들이 시청하는 것에 대해 비판력이 부족한 소비자가 되게 할 수도 있기(「가톨릭교회 교리서」 2496항)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2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2) 사회는 진실 · 자유 · 정의 ·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2)


정보의 객관성 위한 소비자 권리 중요


지난 호에서 필자는 정보의 왜곡이 민주주의 제도를 위협한다고 밝힌 교회 가르침을 소개했다.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하게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가운데,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조종하는 뉴스 미디어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에, 정치활동과 금융 및 정보기관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이는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미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이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는 데에 교회는 시민의 수동성 혹은 비판력 부족도 한몫을 할 수 있음을 밝힌다. 사회적 전달 수단(특히 대중 매체)이 그 이용자에게 일종의 수동성을 길러 주거나, 그들이 시청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력이 부족한 소비자가 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96항).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3) "교황님, 그런 말씀을 하셔도 됩니까?" "제 의무입니다."


윤리 없는 금융, 인간을 돈의 도구로


교황 프란치스코가 5월 16일 몇몇 신임 대사들에게 한 연설을 번역한 것이다.


인간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여러 분야에서 성취한 업적을 볼 때, 인류 가족은 지금 중대한 역사의 전환기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건, 교육, 통신 같은 분야에서 참된 인류 복지 증진에 긍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 대다수 사람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것도 바라봐야 합니다.


두려움과 절망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옥죄고 있습니다. 잘사는 나라에서조차 그렇습니다. 삶의 기쁨은 사라지고, 타락과 폭력은 도를 더해가고, 빈곤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굴욕적인 방법으로라도 살아남으려고 사투를 벌입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돈과 맺는 왜곡된 관계에 비롯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가장 먼저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에서 금융위기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그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냈습니다. 구약의 황금 송아지 숭배(탈출 32,15-34 참조)가 오늘날 인간적 목표도 갖지 않는 정체불명의 경제 독재 속에서 새롭고 냉혹한 이미지를 갖고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금융과 경제는 인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의 금융과 경제는 사람을(…) 소비만 하는 존재쯤으로 격하시킵니다. 더 나쁜 것은 인간 자체를 소비재쯤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보물인 연대성은 반생산적인 것으로, 금융과 경제 논리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소수의 수입이 급증하고 다수의 수입은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이런 불균형은 시장과 금융 투기를 절대적 자율에 내맡겨야 한다는 주장에서 비롯합니다. 공동선을 추구해야 할 국가의 통제권을 부정하는 그런 이데올로기에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눈에 띄지 않는 이 독재는(…) 부채와 신용은 국가와 국가의 실물 경제를 분리시키고, 시민을 시민의 실질 구매력과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부패와 이기적 탈세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권력과 소유의 의지는 무한 확장되었습니다.


신앙의 실천 촉구는 교황의 의무입니다


이런 태도 뒤에 숨은 것은 윤리의 거부, 일종의 하느님 부정입니다. 연대성 같은 윤리는 귀찮은 존재로, 윤리는 반생산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인간을 조종하고 종속시키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윤리가 그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봅니다.


윤리는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시장 논리의 통제 밖에 있습니다. 금융인, 경제학자, 정치인은 하느님을 경영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위험한 존재로 여기는데, 하느님은 인간을 완전한 자기완성으로, 어떤 형태의 예속으로부터의 독립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윤리는 보다 인간적인 균형 잡힌 사회질서를 창조하게 합니다. 금융 전문가, 정치 지도자들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말을 명심할 것을 촉구합니다.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강탈하는 것이며 그들에게서 생명을 빼앗는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우리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모든 이에게 유익한 경제개혁을 이끌어 내고, 윤리적 노선을 따르는 금융개혁이 필요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태도 변화가 요구될 것입니다. 나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자기 나라의 특정 상황을 고려하면서 확신과 장기 전망을 갖고 이 도전에 응하라고 촉구합니다. 돈이 사람을 섬겨야 하지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교황은 부자건 가난하건 똑같이 모두를 사랑합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자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재촉해야 할 의무, 가난한 사람을 존중해야 할 의무, 가난한 사람을 북돋워야 할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모든 사람의 전인적 발전을 위해 일합니다. 교회는 공동선이 단순한 여분의 무엇이나 정치 프로그램에 덧붙여진 부수적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교회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시민의 공동선을 위해 진정으로 봉사하라고 격려합니다. 교회는 금융 지도자들이 윤리와 연대성을 고려할 것을 촉구합니다.(…) 윤리와 하느님을 향한다면, 경제와 사회 영역 사이에 벌어진 절대적 이분법을 극복하고, 건강한 공생 상태로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ㆍ경제적 사고체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목자들과 가톨릭 공동체의 교우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기쁘고 용감하게 형제적 사랑과 신앙을 실천하기를 촉구합니다. 교우들은 성경에서 영감을 받아 주도적인 태도로 자기 나라의 참된 발전에 두려움 없이 기여해야 합니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16일]


객관성이 부족한 정보 전달의 위험성


금속을 높은 온도로 높여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바꾸는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 건식 정련)을 한미 양국이 공동연구 중이다. 핵연료를 사용 후 처리하는 기술로 전기분해를 통해 폐 핵연료를 플루토늄, 아메리슘 등이 섞인 금속과 우라늄 등으로 분리할 수 있다. 상용화된 습식 재처리(질산에 녹이는 방식)와 달리 핵무기 원료인 순수 플루토늄만 추출할 수 없다. 또 폐 핵연료에서 발생하는 열과 방사성 독성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소개된 바 있다(○○일보, 5월 24일).


하지만, 미국에서 고속증식로를 연구했던 한 교수는 “기술이 과장돼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성과 안전성 문제로 미국에서도 포기한 사업이라는 것이다. 파이로프로세싱이 성공해도 재활용한 핵연료를 사용할 안전한 고속증식로가 개발되지 않았다. 1946년 최초의 실험 고속로가 만들어진 이래 일본이 ‘몬주’, 프랑스가 ‘페닉스’라는 이름의 고속증식로를 세웠지만 잦은 사고로 상용화되지 못하고 있다(△△일보, 5월 4일).


보통 시민이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 두 일간신문이 실은 글을 그대로 옮겨보았다. 같은 주제인데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앞의 기사를 보면 너무나 좋은 기술처럼 보이는데, 뒤의 기사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수동적 정보 접근, 사회 분열로 이어져


이 예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이며, 다른 하나는 시민의 수동성 혹은 비판력 부족이 갖는 위험성이다. 과연 어떤 기사가 객관적이고, 진실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까. 왜 한 신문은 파이로프로세싱을 좋은 것이라 말하고, 왜 다른 신문은 경제성과 안전성에 문제가 많다고 말할까. 혹시 그 정보 제공이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는 뉴스 미디어 현상”은 아닌지, 혹은 정치 활동과 금융 및 정보기관들의 유착까지 더해진 것은 아닐지 짚어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덧붙일 것이 있다. 대중매체가 전하는 정보가 보통 시민의 지식과 경험을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정보일 경우를 보자. 이를 ‘정보의 비대칭성’이라 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의학 정보처럼, 정보를 제공하는 쪽과 받는 쪽 사이에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파이로프로세싱도 마찬가지다. 매체가 제시하는 정보에 비판을 가할 수준의 전문 지식이 없기에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는 뜻이다. 이는 두 번째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혹시 그 매체가 일부 독자에게 수동성을 길러주어 비판력이 부족한 소비자가 되게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일 두 매체를 접한 두 사람이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한 사람이 “내가 신문에서 읽었는데, 그 기술이 정말 좋은 것이니까 꼭 개발해야 해” 하고 주장할 것이고, 다른 사람은 “나도 신문에서 읽었는데, 그 기술이 엄청난 비용이 들고 게다가 얼마나 위험한데. 그러니까 개발할 수도 없고, 개발해서는 안 돼” 하고 주장할 것이다.


더욱이 거기에 멈추지 않고 이 같은 대화가 사회 영역으로 확장되면 이는 분명 집단과 집단 사이의 분열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대중매체가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그리고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의 중요함을 다시 일깨운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9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4) 악마가 정말 있다면…


하느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악마가 정말 있다면, 그가 우리 사람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느님으로부터 도망가려 해도, 그분께서 가만 놔두지 않으실 것을, 그러면 그럴수록 그분은 더욱 맹렬하게 우리 사람에게 다가오신다는 사실을 악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면 다른 무엇이 있을까? 우리 사람이 하느님께만 매달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악마가 가장 원하는 것이 아닐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마르 12,28)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것일 수 있다. 만일 하느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악마가 바라는 것이라면 기가 찰 노릇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향한 사랑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을 사랑할 마음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의 조금이라도 나눌 겨를이 있을까.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정신을 팔 틈이라도 있을까.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려는데, 다른 사람에게 쏟을 힘이 있을 수 있을까. 그토록 하느님을 사랑하였으니 하느님께서 상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얼마나 큰데 그 기대를 무너뜨릴 일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악마는 우리에게 그렇게 철저하게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하고, 그래서 우리 각자가 하느님만을 향해 달려가도록 유혹한다. 하느님을 향해 달려가는 데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재촉하면서 세상과 이웃에게 절대로 한 눈 팔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8)는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물리쳐야 할 유혹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내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하느님은 나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묻는다 하더라도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대답하면 될 것이다(창세 4,9). 모른다는데 하느님께서 어찌하시겠는가!


이웃을 외면하라는 악마의 유혹


나 자신 지금 '살아남기'(生存)에도 겨를이 없다고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 쓰러뜨려야 하는 게 이 세상이라고 믿는다. 그 생존의 공포에서 살아남고 게다가 앞서기 위해 사투를 벌이며 하느님께 매달리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쓰러뜨려야 할 그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살아남기 위해 쓰러뜨린 그는 안됐지만, 내가 지켜야 할 아우가 아니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백번 양보해서 이웃을 사랑하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간의 관계라는 단순한 차원에서 인심을 쓴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여긴다. 내 근처에 있는 궁핍하고 곤궁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하느님께 큰 상을 받을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마태 5,19) 선행이다. "이웃이 가난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하고자 애쓰는 것"(「간추린 사회교리」, 208항)은 세상일에 쓸데없이 끼어드는 일이며, 하느님을 향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고 만다.


그런데 교회는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사회의 중개를 활용해 이웃의 삶을 개선하고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이라 가르치며,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밝힌다(208항).


그렇다. 악마가 있다면, 악마가 바라는 것은 그렇게 우리를 하느님께만 결합시키고, 이웃과는 생존의 공포를 이용해 떼어놓음으로써, 사회적 차원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것, 사회적 약자들끼리라도 연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그 악마의 손길에 덥석 손을 내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자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재촉해야 할 의무, 가난한 사람을 존중해야 할 의무, 가난한 사람을 북돋워야 할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지난 호에서 소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임대사들에게 한 말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짊어진 그리스도인의 의무 그것을 교회는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 즉 '연대', '사회적 정치적 애덕'이라고 밝힌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23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5) 성을 내지도, '바보','멍청이'라 하지도 말자


북과 적대 관계, 이제는 그만!


살인해서는 안 된다. 너무나 당연하다. 어떤 경우라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런 일이 너무나 자주 벌어진다. 꼽으라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에서부터 실수에 의한 사고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자연재해 앞에서 생명이 스러지기도 하지만, 분노나 충동으로 다른 사람의 귀한 생명을 해치기도 한다. 풍요로움에 주체를 못하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속수무책으로 굶어 죽는 어린이들이 무수하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한 마음


집단과 집단 사이에 첨단 살상무기를 동원한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라졌을까! 언젠가 어느 주교님이 '평화'를 주제로 한 강론 중 20~21세기에 인류가 벌인 전쟁들과 그로 인한 사상자를 열거하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다. 좀 더 자세하게 자료를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절망할 것 같아서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서도 안 되고, 바보라고 해서도 안 되고, 멍청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고 당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렇지만 살면서 성 안 내고 남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입에 올리지는 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까지 성을 내지 않고, 속으로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그런 일은 무수히 많다. 어쩌면 가까운 사이, 서로 좋은 사이였기에 성을 내고 바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성을 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해놓고 미안해서 사과하고 화해하는 것이 평범한 우리 모습이다. 사람 모두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나쳤네" 할 수 있고, "아니, 내가 과했네"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집단의 의식 차원으로 넘어가면 관계가 그렇게 간단히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예를 들어보자. 그리스도교가 자리를 잡고 이방 세계로 확장된 다음, 서구사회에서 유다인은 하느님을 죽인 죄(deicide)에 시달려야 했다. 이는 직접 간접으로 아주 오랫동안 반유다주의를 형성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 유다인을 향해 바보, 멍청이라 불렀으며, 성을 냈다. 마침내 2차 세계대전의 수백 만 명 유다인 학살로 이어졌다. 서구사회에서 이 같은 터무니없는 짓을 멈춘 것은 불과 몇 십 년이 되지 않는다. 이 사건은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유다인 전체에 가한 '하느님을 죽인 죄'가 부당하다고 밝힌 것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였다(비그리스도교 선언, 4항 참조).


그리스도인이라도 성내지 말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시대를 흔히 '동서 냉전시대'라고 불렀다. 경쟁이라 했지만 그 경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리고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서로에게 성을 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했다. 그것은 점잖은 편이다. 서로를 궤멸시켜야 할 악마로 만들었으니까. 역사의 교훈을 잊은 것일까? 아니면 특정 집단 혹은 세력의 의도적 작업일까?


상대 집단을 그렇게 싸잡아 비난하고 적으로 만들면 이중 삼중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첫째, 집단 구성원을 결속시킬 수 있다. 이때 자기 집단 내의 동질감과 상대 집단에 대한 이질감은 곧잘 선과 악으로 둔갑한다. 자기 집단은 선하고 상대 집단은 악하다고 믿으려 한다. 둘째, 자연스럽게 악한 상대 집단을 무너뜨리기 위해 역량을 결집할 수 있는데, 증오심이 큰 몫을 한다. 상대 집단을 무너뜨리는 것은 부당한 증오심의 발로가 아니라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세우는 것이라며 정당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셋째 효과는 아마도 집단 내 특정 세력의 야욕을 감추는 데 있다. 집단 안을 향한 성찰의 노력보다는 관심을 밖으로, 곧 상대 집단에 대한 경계나 비난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냉전시대나 동서 사이의 관계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남의 일만이 아닐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은 서로 '괴뢰'라고 손가락질했다. 서로 소련의 괴뢰라고, 미국의 괴뢰라고 했다. 서로 꼭두각시라고, 바보, 멍청이라고 불렀고, 성을 냈고, 죽이기까지 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이라도 북을 향해 성을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지 말자(마태 5,20-26 참조). 정전(停戰) 60년이 됐는데, 그쯤 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평화신문, 2013년 6월 30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6)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해야 할 국가(공권력)의 의무


공생 없이 사람다운 세상 원하는가


지난 5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몇몇 신임 대사들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황은 부자건 가난하건 똑같이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교황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자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재촉해야 할 의무, 가난한 사람을 존중해야 할 의무, 가난한 사람을 북돋워야 할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약육강식 논리가 사회 불평등 심화한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단순하게 경제적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오늘날 삶의 모든 분야는 밀접하게 결합ㆍ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약자일 수밖에 없으며, 문화적으로는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교황이 말한 가난한 사람은 '사회적 약자'라고 이해해야 한다.


부자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강자'쯤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 본성으로 갖고 있는 '사회성'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사회 안에서 약한 처지에 놓여 있으며, 그 원인에는 자신의 탓(무능, 게으름, 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요인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원인이 개인에 있든 사회에 있든 그 많은 '사회적 약자'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는 이른바 '사회적 이동'이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데 그나마 남아 있는 희망과 믿음이 소멸하고 있다. 아무리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했다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면 사회에서 사회적 강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믿음 말이다.


우리의 태도를 솔직하게 성찰해야겠다. 약자를 향한 우리 시선에는 사회성이 담겨 있는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보면서 혹시 게으름이나 무능의 당연한 결과라고 보는 것은 아닌가? 혹은 그런 부모에게 태어난 그 자체를 '불운'으로 치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소수자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상을 갖고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소수의 사람을 보면서 혹시 걸러내야 할 불순한 '이물질'쯤으로 보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거꾸로 이른바 힘센 사람, 강자를 대할 때는 어떤가? 경쟁력을 갖추고 능력이 출중하므로 당연하며, 혹은 부모를 잘 만난 행운 때문이라 여기며 부러워하지는 않는가? 혹은 그 힘에 편승하기 위해, 혹은 힘 센 이들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충실히 부역하지는 않는가? 그것이 내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보자.


우리의 그 같은 이중의 태도, 약자에 대한 냉소와 강자에 대한 선망이 혹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자양분이 되지는 않을까? 더 나아가 힘센 사람들이 사실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것인 사회 자원을 독점했거나, 정치ㆍ사회 영역에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해서 제도와 법과 질서를 만들고, 그것을 거의 독점적으로 이용해 강자의 자리에 오르거나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럼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 또 심화되는 것이 아닌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


백번 양보해서 사회적 불균형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더라도 상식의 사회는 그 불평등을 개선하려 하지, 심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적 불균형을 개선하려는 일은 당연히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며 의무이겠지만, 사회적 불균형의 세계화 시대에 그 책임과 의무는 무엇보다도 사회와 공권력에 있다. 그 일을 하라고 모든 시민은 권력을 몰아준 것 아닌가!


그런데 만일 정치와 사회가, 그리고 공권력이 불균형을 개선하려 총력을 기울이기보다,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충실히 봉사한다면 사회가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성장을 위해 자본에는 세금을 낮추고, 노동에는 세금을 높이거나, 보통 사람에게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를 '페이퍼 컴퍼니'니 '조세회피처'하면서 유전무죄하고, 부채에 허덕이는 서민에게는 무전유죄를 외친다면 말이다. 공정거래를 내세우지만 사실은 약육강식의 승자독식을 정당화한다면, 공권력(公權力)은 진짜 공권력일까? 특정 계층을 위한 사(私)권력일지도 모른다.


교황의 말을 조금 바꾸면, "국가 공권력은 부자건 가난하건 똑같이 모두에게 봉사해야 한다. 그러나 공권력은, 그 권력의 원천인 국민의 이름으로, 부자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재촉해야 할 의무, 가난한 사람을 존중해야 할 의무, 가난한 사람을 북돋워야 할 의무를 가진" 것 아닐까?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른다. 아무리 그래도 동물은 먹을 만큼만 사냥한다. 포식의 서열에서 위계가 올라갈수록 그 개체 수가 적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개체 수가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공생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아무리 사회적 약자라도 함께 사는 사회가 사람이 사는 사회다.


[평화신문, 2013년 7월 14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7) 가난에 영적 가난이 따로 있는 것일까


현실 외면한 영적 가난은 위험


우리는 연중시기를 보내며 요즘 주일미사 때, 루카복음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복음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가 않다. 복음 말씀이 지나치게 부와 가난을 이분법적으로 대립ㆍ대조시키며 평가에 대한 선택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루카복음은 다른 복음에는 없는 예수님의 출생 배경과 유년시기를 다룬다.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압권은 '마리아'다. 그 마리아가 부른 노래는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아기를 가진 여인이 부른 노래치고는 너무나 무겁다. 통치자와 부유한 사람이 들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이다. 통신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었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또 어떤가? 바로 성경(이사 61,1-2)을 인용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 말씀에서 아무리 (좁은 의미의) 영적ㆍ종교적 메시지를 찾으려 해도 비껴갈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는 당대의 보통 유다인들이 그렇게 철학적이며 영적이며 종교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 가난하고 배고프며 식민 지배를 받으며 고통을 겪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식민지 동족을 아끼고 사랑해 헌신하려는 이들에게도 당신 뜻을 분명히 전한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마리아의 노래도, 예수님의 말씀도 루카복음은 구원과 해방이 아무리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해도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그것을 배제한, 혹은 그 고통과 억압을 간단히 초월한 구원이 아님을 보여준다.


복음이 전하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루카복음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그 이유로 복음이 지나치게 이분법적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했다"(루카 6,24-26).


예수님께서 어찌 그렇게 사람을 편 갈라서 한편은 행복하다 하고, 다른 한편은 불행하다고 하실까? 앞에서 인용한 마리아, 자애로우신 어머니 마리아가 어찌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 '통치자','부유한 자'를 그렇게 철저하게 배제할까?


우리는 그 불편함을 모면하기 위해 타협을 시도한다. 바로 영적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 말이다.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쯤으로, 통치자는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쯤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쯤으로, 굶주리는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리는 사람쯤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은 자기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쯤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쯤으로 말이다. 그러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결코 예수님과 마리아가 꾸짖으려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갈망하는 사람이라고 위로 삼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 그러니까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정말로 배고프고, 정말로 잡혀가고, 정말로 앞을 못 보고, 정말로 묶여 갇혀 있고, 정말로 비천한 사람이 늘어간다.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아져 버렸다. 통치자들은 그 교만이 끝이 없고, 부유한 사람들은 그 부를 주체하지 못하는데, 영적 해방 덕분에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우리가 부와 가난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그동안 실제 부와 가난 사이의 불균형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


[평화신문, 2013년 7월 21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8) 야만은 먼 옛날의 남의 이야기일까?


힘 없는 제자들 선택하신 이유


지난 호에서 '가난'과 관련해 루카복음을 성찰하며, 우리가 부와 가난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동안 우리 사회의 실제 부와 가난 사이의 불균형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실제 부와 가난 사이의 불균형이 생활 전체 영역으로 확산되고, 그것도 모자라 대물림되려 한다. 경제적 가난과 부는 곧 정치ㆍ사회ㆍ문화적 영역의 불균형을 심화한다. 불균형이라는 표현은 점잖은 편이다. 불균형이 아니라 독차지와 빈털터리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소수 관료 및 정치인과 다수의 보통 시민, 소수 사회ㆍ문화 영역의 권력자들과 다수의 그 구성원 사이의 균형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이 우리 세대의 무감각과 탐욕의 자업자득에 그친다면 그래도 괜찮다. "내 탓이오!"하면 되니까….


가난과 부유함의 대물림을 끊을 수 없는가


그런데 이 극소수의 독점과 절대 다수의 빈곤이 대물림되는 징조가 보인다. 어느 국회의원이 서울특별시 자치구 가운데 땅값이 높은 3곳과 땅값이 싼 하위 3곳 출신 청소년의 소위 SKY 대학 진학 현황과 미래의 희망을 분석해 지역과 대학 진학, 그리고 지역과 미래의 희망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혔다.


평균 땅값 상위 3개 자치구 출신 중고등학생들은 소위 명문대에 높은 진학률을 보이며, 고소득 전문직을 희망했다. 반면 하위 땅값 3개 자치구 출신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률은 낮고, 안정적 직업을 희망했다. 말하자면 심각한 불균형이 미래에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기성세대는 어찌해야 할까? 그냥 "자식들이 부모 잘 만나 대박 났다", 혹은 "자식들이 부모 잘 못 만나 쪽박을 찼다"라고 헛웃음을 지어야 할까.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기회의 평등권'이 실종되고 있다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실종을 슬퍼해야 한다는 뜻이다. 신분과 혈통으로 계급이 구별됐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보다 못한 사회로 역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신분과 혈통으로 사람을 차별했을 그때(살아보지 못했으니 그 차별의 정도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고매한 신분의 소수는 무지렁이 다수를 보살피고 살리고 돌볼 책임감이라도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오늘의 우리 모습을 보라. 모든 것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이들은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물려주려 한다. 권력이 있고, 금력이 있으니, 사회의 제도와 법을 마음껏 활용해서…. 여기에는 세상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능력과 기술까지 포함된 듯 보인다. 대신 경제ㆍ사회ㆍ정치ㆍ문화적으로 힘없는 이들은 아무것도 물려주지 못한다. 정당하게 분노하고 저항할 힘조차 대물림되지 못한다.


나누고 베풀 때 건강해지는 사회


오늘의 우리 모습에서 교회의 신원과 사명을 다시 생각한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는데, 그 면면이 좀 그렇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어부 형제였는데, 물고기 153마리에 배가 가득 찰 정도로 작은 배로 생계를 꾸렸던 초라한 이들이었다. 세리 마태오는 멸시받으며 살았던 이였을 것이다. 아마 다른 제자들도 고만고만했을 것이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동고동락했던 이들은 배가 고파서 남의 밀밭 서리를 했던 그런 이들이었다. 예수님과 움직이면서도 끼니와 묵을 곳을 걱정하던 이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ㆍ정치ㆍ경제ㆍ문화ㆍ종교적으로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했을 그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을 마련해주지도 않으시면서 오히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돌보라고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막연히 짐작만 한다.


한 사회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돌볼 이들은 누굴까를 묻고 싶다. 당연히 건강하고 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 바리사이, 사제, 원로, 대사제 등 그런 사람들 아닐까? 그래야 사람 사는 세상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 몫을 내팽개쳤다면 어떨까? 예수님께서는 이 야만(?)의 세상에서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고 세우고 펼치시기 위해 그들을 겁도 없이 꾸짖으셨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 그들에게서 사람됨을 찾을 수 없었나 보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더 나아가 힘없는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고, 때리고, 초주검으로 만들어놓는 불의를 환히 드러내기 위해 힘없는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닐까.


[평화신문, 2013년 7월 28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9)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상)


사제들 선언 외면한 교회 미디어


이 면을 통해 독자와 만난 지 한 달(휴간 및 휴재 관계로)을 훌쩍 넘겼다. 그 사이에 이러저러한 일이 많았지만, 교회와 관련한 일로는 각 교구의 사제들이 '선언'을 빼놓을 수 없다. 필자가 알고 있기에도 부산(121명), 마산(77명), 전주(151명), 광주(246명), 대구(103명), 안동(66명), 대전(141명), 원주(57명), 인천(160명), 수원(306명) 등 1000명이 넘는 사제들이 교구별로 서명이라는 형식을 빌려 '의견'을 밝혔다.


공동선 추구를 위한 대중매체의 정보전달


교회도 여러 언론매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우선 각 교구의 주보를 꼽을 수 있겠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이 있고 또 신문도 있다. 각 매체는 저마다 그 성격이 다르고, 나름대로 취재와 편집의 방향과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게으름 탓으로 꼼꼼히 안 찾아봐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교회의 여러 매체는 각 교구 사제들의 '선언'을 외면했다.


교회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정치 공동체의 상황과 사실들, 제시된 문제 해결책을 모르고서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이러한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가운데,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수 사람이나 집단들만이 조종하고 있는 뉴스 미디어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에다 통치활동과 금융기관과 정보기관들 사이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이는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십계명 가운데 8계명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를 설명하면서 "대중매체를 통한 정보전달은 공동선을 위한 것이다. 사회는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특히 대중매체는 그 이용자들에게 그 수동성을 길러주거나(…) 비판력이 부족한 소비자가 되게 할 수도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94항).


교회는 더 나아가 이렇게 선언한다. "교회와 정치 공동체 모두 자격은 다르지만 동일한 인간들이 개인적 사회적 소명에 봉사한다. 교회와 정치 공동체는 사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개인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실재 안에 내재된 권리들을 온전히 행사하고,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올바로 수행하도록 돕고자, 인간에 대한 봉사를 지향하는 유기적 조직들이다"(「간추린 사회교리」 425항).


신앙과 생활은 별개의 세계가 아니다


교회의 대중매체가 사제들의 일련의 행위에 대해 외면(?)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소개한 교회의 가르침에 비춰 몇 가지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교회 공동체 내의 "상황과 사실들, 제시된 문제 해결책"을 몰라도 될 정도로 뉴스 보도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즉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할 필요가 없는, 흔히 말하듯 '시민의 알 권리'의 대상이 되는 정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굳이 교우들의 '참여'가 필요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둘째로, 사제들의 행위가 "공동선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이를 전하는 것은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셋째로, 사제들의 행위를 전하는 것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실재 안에 내재된 권리들을 온전히 행사하고,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올바로 수행하도록 돕고자 인간에 대해 봉사"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첫 번째 경우, '신앙'과 '생활'을 아무런 관련도 없는 별개의 두 세계, 정치공동체는 지상의 세계를 관장하고, 교회 공동체는 천상의 세계를 관장한다는 식의 주장에 근거하는 것일 수 있다.


둘째 경우, 그 때문에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참된 정보는 오직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에 관한 것밖에 없다고 여기는 태도에 근거하는 것은 아닌지.


셋째 경우, 인위적으로 정한 규칙이나 제도가 '시민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실재 안에 내재된 권리'보다 앞선다는 태도에 근거하는 것은 아닌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 이전의 시대, 곧 전근대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평화신문, 2013년 8월 25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0)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하)


절대권력화에 미디어 너마저...


교회는 민주주의를 높게 평가한다. 민주주의가 "시민들에게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중요한 권한을 부여하며, 피지배자들에게는 지배자들을 선택하고 통제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평화적으로 대치할 가능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는 법치 국가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올바른 인간관의 기초 위에 성립한다고 교회는 가르친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백주년」 46항 참조).


법치란 "개인들의 독단적 의사가 아니라 법이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올바른 인간관이란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도 민주주의 제도도 인간의 존엄함과 인권, 그리고 인간의 삶의 조건인 '공동선' 실현을 위한 도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들


"진정한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의 존엄, 인권존중, 정치생활의 목적이며 통치 기준인 공동선에 대한 투신과 같은(…) 가치들을 확신 있게 수용한 열매이다." 국가권력(공권력)의 존재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류 역사는 '개인들의 독단적 의사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법치로 극복했고, 국가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권력분립'(입법, 사법, 행정의 공권력)으로 균형과 견제를 발전시켜 왔다(「간추린 사회교리」 407ㆍ408항 참조). 우리는 이를 '민주공화'(民主共和)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교회는 현실에서 어떤 정치체제도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로 '죄의 구조들'의 존재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과 이웃의 선익에 반하는 태도와 행동들, 그리고 그것들로 구축된 죄의 구조들, 그 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든 이익을 집어삼키려는 욕망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쟁취하려는 권력에의 욕망이 강렬하게 꿈틀거리고 있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 37항 참조).


게다가 역사는 "사적 이익이나 이념적 목적을 위하여 국가의 권력을 점령하고 폐쇄된 지배집단을 형성하는"(「백주년」 46항) 일이 얼마나 빈번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정치 공동체가 이른바 경제독재와 정치독재의 무대로 이용된 경우다.


사실 우리의 현대사는 이 죄의 구조들을 극복하고 진정한 민주공화를 실현하려는 힘겨운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을 확인하고, 인권을 발전시키며,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희생됐는지 오늘의 우리는 그분들의 희생에 빚을 졌다. 이는 우리가 미래 세대에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왜곡, 시민 인권과 존엄 위협


그러나 우리는 쉽게 망각한다. "사적 이익이나 이념적 목적을 위해 국가권력을 독점한 폐쇄적 지배집단"이 민주공화를 얼마나 심각하게, 얼마나 끈질기게 왜곡했으며, 깊은 상흔을 남겼는지를 말이다. 일제강점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폐쇄적 지배집단은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민주공화를 부정한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폐쇄적 지배집단의 강압에 의해 침묵하거나, 때로는 무감각과 무관심으로, 때로는 적극적으로 죄의 구조들의 확장을 돕는다.


정보도 한몫을 한다. 교회는 '정보'가 민주적 참여를 위한 주요한 도구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그러면서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시민의)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가운데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고 있는 뉴스 미디어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에, 정치 활동, 금융기관, 정보기관들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이는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미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고 경계한다.


이른바 국가정보원과 관련된 일련의 '새로운 사태'는 폐쇄적 지배집단이 죄의 구조들을 이용해서 민주공화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고, 이에 우리의 무감각과 정보의 비윤리성(「간추린 사회교리」 416항)이 가세한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게다가 시민을 위한 봉사의 목적에서 일탈한 행정부를 바로잡아야 할 입법부의 무능함과 사법부의 수수방관은 법치를 적극적으로 포기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삼권'이 협력하고 대중매체가 협력함으로써 폐쇄적 지배집단이 절대 권력화된다면, 그 대가는 모든 인간, 곧 시민의 존엄과 인권과 공동선의 실종일 수밖에 없다.


[평화신문, 2013년 9월 1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1) 세수와 공공지출, 그 불만의 진짜 원인은?


공공지출의 불공정성에 대한 불신


"세수(稅收)와 공공 지출은 시민ㆍ정치 공동체에 매우 큰 경제적 중요성을 지닌다. 공공 재정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발전과 연대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공정하고 효율적이며 효과적인 공공 재정은 경제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국가는 공공 재정으로 고용 성장을 촉진하고, 기업 활동과 비영리 활동을 지원하며, 무엇보다도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보장보호제도를 보장함으로써 국가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355항).


감세, 신중한 검토가 필요해


얼마 전 정부가 발표한 '2013년 세법개정안'이 하루 만에 개정되는 일이 있었다. 단번에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대한민국 모든 시민의 삶에 작든 크든 영향을 줄 일이 그렇게 쉽게 하루 만에 개정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 보통 사람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수천만의 시민과 가정의 살림살이 형편이 다르고, 세금에 대한 태도가 다르고, 부담 능력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고 한 해 동안 나라 살림을 염두에 뒀을 테니 말이다. 하루 만에 바꿀 정도로 가볍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필자의 경우 규모가 크지 않은 본당 살림살이를 살필 일이 많다. 예를 들어 몇백 명 참여하는 행사를 치를 때에도 남은 기간 지출할 일들이 무엇이고 얼마나 필요한지 검토하느라 이리저리 따져보고 궁리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고, 괜찮다 싶으면 지출을 결정한다.


두 번째로 떠오른 것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것저것 찾아보니, 정부가 발표한 '2013년 세법개정안'을 놓고 "서민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서민과 중산층의 가벼운 지갑을 다시 얇게 하는 것은 정부가 추진하는 서민을 위한 경제정책 방향과 어긋나는 것"이라는 대목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보도에 따르면, 수정안으로 세 부담이 증가하는 납세자는 연봉 5500만 원 이상 근로소득자 205만 명(소득 상위 13%) 가량으로 애초 3450만 원 이상 434만 명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다. 개정안은 연간 4000~7000만 원 구간 소득자의 추가 세 부담을 16만 원으로 잡았다.


그러나 수정안에 따르면 연소득 5500~6000만 원의 추가 세 부담은 연간 2만 원, 6000~7000만 원은 연간 3만 원이며, 연소득 5500만 원 미만 노동자들은 추가 세 부담이 발생하지 않거나 줄어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증세액은 애초보다 약 4400억 원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며 이를 충당할 뾰족한 수가 없다고 한다.


세금, 공동선 증진 위한 목적도 있어


만일 정부가 계획한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공공 재원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사회교리 내용만을 놓고 짐작해보면, '고용 성장을 촉진'하는 일, '기업 활동과 비영리 활동을 지원'하는 일,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보장보호제도를 보장'하는 일을 줄여야 할 것이다. 국가가 공공 재원으로 할 수 있는 이 일들 가운데 어떤 일을 줄일까?


교회는 '공공지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공공지출은 연대 의무에 속하는 납세, 합리적이고 공정한 조세 부과, 공공 자원의 정확하고 정직한 관리와 분배 등 몇몇 근본 원칙들을 준수할 때 공동선을 지향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55항).


연봉 3450만 원 이상 소득 노동자든, 5500만 원 이상 소득 노동자든, 6000만 원 이상 소득 노동자든 몇만 원의 추가 세 부담에 실망하고 불만스러웠을까? 그런 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권리는 혜택이므로 늘이고 싶고, 의무는 부담이므로 줄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 본성으로 사회성이라는 것이 있어, 부담을 줄이고 싶어도 기꺼이 부담을 짊어질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믿고 싶다.


혹시 시민들의 불만이 몇만 원의 추가 세 부담에 있기보다는 정부의 '2013년 세법개정안'을 보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조세 부과"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리고 "공공자원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관리하고 분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공공지출이(…)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평화신문, 2013년 9월 8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2) 사람과 가정과 사회를 위한 경제를 생각하며


돈 나고 사람 나는 세상, 무섭다


우리 사회는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다. 세상이 자연스럽게 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뜻을 갖고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대가족'이란 말 대신 '지구촌' 혹은 '세계화'란 말이 더 익숙하다. '핵가족'이란 말 대신 '단독세대'란 말이 더 익숙하다. '혼인 기피' 혹은 '저출산' 현상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 변화의 핵심에는 '사람과 돈' 관계의 변화가 있다. "사람 나고 돈 났다"고 했지만, 이제 그 말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음을 체험하고 있다.


눈부신 고도 성장의 그림자


무상보육(無償保育) 논란이 어지럽다. 올해부터 0~5세 영유아의 무상보육(보육료와 양육수당 지급) 대상이 소득 하위 70%에서 모든 계층으로 확대됐고, 필요한 재원 중 중앙정부 보조를 서울은 20%, 다른 지역은 50%로 정했지만 그에 대한 재원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입법부가 서울은 국고 보조를 40%로, 다른 지역은 60%로 늘리는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을 만들었지만 행정부(기획재정부)의 반대로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


재원이 모자란다는 것은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세수(稅收)가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한정된 가용 재원의 사업 우선순위와 배분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으며, 이 둘의 결합일 수 있다.


혹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지 모른다. "요새 아이들은 애를 낳지 않으려 한다", "아이를 낳아 놓으면 다 알아서 큰다", "우리 어렸을 때는 유아원, 유치원, 어린이집 그런 것 없어도 다 잘 컸다" 하고 말이다. 그러나 마음뿐일 게다. 고생 마다않고 다 키운 당신 자식들이 손자들을 낳고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알아서 큰다", "부모가 키워야 한다", "사회가 부담해야 한다" 하는 보육에 대한 태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일제 강점과 해방과 한국전쟁이 초래한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우리는 앞뒤 가리지 않고 고도 압축성장의 속도전에 뛰어들었다. 도시화와 저임금의 노동을 감수했고, 이른바 서민생활물가를 통제함으로써 성과를 낸 듯하다. 저임금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강제했고 물가는 자유를 얻었지만, 시민의 생활은 더욱 불안해졌다. 거기다 정보ㆍ통신ㆍ교육의 확대는 원초적이든 사회적이든 욕구와 필요를 팽창시켰다. 보육의 욕구와 필요도 그 가운데 하나다.


성장과 분배를 이질적 두 범주로 구별하며 성장을 우선하고 분배를 소홀히 한다면 결과는 자명하다. 시민의 욕구와 필요를 모두 충족시킬 경제는 있을 수 없다. 사람을 위한 경제가 아니라, 경제를 위한 사람에 몰두하는 한 더더욱 그렇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은, 혹은 생각했더라도 일부 특정 집단만을 위한 경제성장의 대가는 다수 시민과 가정과 사회의 소외다. 사람은 생산 수단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으며, 대신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는 데 너무나 익숙하다. 경제적 이윤을 가져다주지 않는 사람은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고 말았다.


돈에 끌려가는 인간의 삶


자연스럽게 가정은 해체됐다. 가정을 꾸리고 유지하는 원동력을 남녀 사이의 무상 자기증여보다는 주로 경제적 능력에서 찾는다. 노동력을 상실하고 질병에 시달리는 어르신을 돌보는 일은 가정에 짐이 됐고, 혼인 기피와 초저출산이 자연스런 현상이 됐으며, 축복이 돼야 할 자녀의 양육은 부담이 되고 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사는 공동체를 사회라고 한다면, 그리고 이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가 경제활동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그 경제가 사회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목적이 돼 버렸다. 사회가 경제를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사회를 압도하고 있다. 이를 '경제독재'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무상보육의 논란은 '돈 나고 사람 났음'을 드러내는 한 현상일 뿐이다. 무상보육을 축소, 포기하지 않는 한 해법은 증세로 재원을 확보하거나, 보육사업을 다른 사업보다 중요하게 여겨 재원을 우선 배분하거나, 그도 어려우면 빚을 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기업의 법인세는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며 낮추고, 수조 원을 들여 전투기를 사들이고 해군기지 건설은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국채나 지방채 발행으로 빚을 내 다음 세대에게 떠넘긴다. 가장 힘없는 영유아의 삶을 '팔자'로 내모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얼마 전에는 아이들 밥 먹는 것 갖고 어른들이 꼴사나운 모습 보이더니, 이제는 그보다 더 어린 영유아 돌보는 것 갖고 그런다. 이제 곧 할아버지 할머니들 돌보는 것 갖고 그럴 것이다. 결국 돈 벌어 바치지 못하고 돈만 드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짐이라 여긴다. 참 무섭다.


[평화신문, 2013년 9월 15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3) 우리의 대중매체, 공동선을 위한 것일까


사회의 '공기' 대중매체 맑고 깨끗하게


필자는 지하철을 하루에 몇 차례 타고 다닌다. 때로는 타자마자 빈자리가 있는지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환승하는 것이 힘들다고 느낄 때도 있다. 출퇴근길 지하철 입구와 환승역의 사람들을 '인파'라고 표현한 것이 정말 절묘하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 급하다고 빨리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갈 수도 없는 그 상황이 때로는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급할수록 천천히, 그렇다고 멈추지도 말고….


대중매체가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


지하철에서 가장 두드러진 우리의 초상이 하나 있다. 저녁 늦은 시간이 아니면, 대개 지하철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무엇인가 보고 듣고 있는 그 모습 말이다. 게임을 하든, 소통을 하든, 검색을 하든… 모두 휴대전화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다 가끔 종이신문, 그것이 주요 일간지든 무가지든 읽는 이들을 만난다. 그리고 낮 시간 한가한 식당에 들러 늦은 점심을 할 때면 어김없이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데 때로는 뉴스와 보도이고, 때로는 오락물이거나, 때로는 스포츠 경기다.


저녁 시간 가정에서 가족들은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드라마가 이야기 소재인 걸로 짐작하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다. 한마디로 뉴미디어든 소셜네트워크든 종이신문이든 라디오든 텔레비전이든 도시 대부분의 사람은 '대중매체'와 한순간도 떨어져 있지 못하는 것 같다.


공기가 맑을 수도 있고 오염돼 있을 수도 있다. 맑은 공기가 맑은지를 느끼려면 오염된 공기가 얼마나 독한지를 알고 있어야 하고, 오염된 공기가 얼마나 오염된 것인지는 맑은 공기가 얼마나 신선한지를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대중매체는 공기와 같다. 그러나 그것은 공기와는 달리 우리가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다. 공기가 자연환경이라면 대중매체는 인간 환경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다. 그래서 교회도 "대중매체를 통한 정보 전달은 공동선을 위한 것"(「가톨릭교회교리서」 2494항)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공동선은 '인간 환경의 총체'다.


공기가 맑아야 사람이 건강하듯 대중매체가 깨끗해야 사회가 건강하다. 그 때문에 교회도 "사회는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을 다르게 표현하면 "대중매체는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쯤 될 것이다.


대중매체, 공동선 증진 위해 힘써야


우리의 대중매체는 얼마나 진실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까? 대중매체는 혹시 자기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진실이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 아닐까? 자유 대신에 종속을 강요하는 것 아닐까? 정의 대신에 불의를 일상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연대 의식 대신 패거리 집단의 줄서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하나 예를 들고 싶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진실 대신에 거짓을, 자유 대신에 종속을, 정의 대신에 불의를, 연대 대신에 분열을 일상화하고 강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몇몇 대중매체는 무소불위의 지배력을 확장할 것이다. 교회의 우려가 우리에게는 현실로 다가온다. "대중매체는 그 이용자들에게 일종의 수동성을 길러 주거나, 그들이 시청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력이 부족한 소비자가 되게 할 수도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496항).


우리는 공기 오염에 민감해서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만들어내자며 대중교통, 특히 버스에 '원전 하나 줄이기' 스티커를 붙여 시민들에게 호소하지만 사회의 건강을 위해 대중매체를 깨끗이 하자는 구호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깨끗하지 못한 데다가 "통치 활동과 금융ㆍ정보기관들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이는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미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는 것을 알면서도 보통 사람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일 게다.


현대사회에서 대중매체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털어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제발 공동선을 위해 기여하고 있길 소망한다. 앞의 민주주의의 위기가 쓸데없는, 괜한 우려였으면 좋겠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평화신문, 2013년 9월 29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4) 대중매체, 이기일까 흉기일까


칼, 살인자와 요리사 누구의 손에?


대중매체가 전하는 정보는 '진실'일까? 아니면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가공된 것일까? 만일 임의로 가공된 것이라면 그것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릇된 정보 가공의 위험성


언론인 출신으로서 고위 공직자가 되었다가 해외에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해 해임된 분이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등장한 용어가 한동안 회자된 적이 있다.


시민에게는 매우 낯선 용어 사용이었다. 바로 '마사지'라는 말이었다. 보통 시민은 경직된 신체 어떤 부분을 부드럽게 해주는 행위 정도로 이해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를 '정보'를 가공하는 것쯤으로 사용했다. 아무리 좋게 해석하더라도 보통 시민이 이해하기 너무 어려워서 쉽게 풀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엘리트주의적 발상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만도 없다. 정보를 그렇게 손질한다는 것은 손질하는 사람의 의도가 반영된다는 뜻이고, 그 의도가 불순하다면, 조작과 왜곡, 더 나아가서는 날조까지 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중매체는 혹시 그렇게 불순한 의도를 갖는 세력과 손잡은 것은 아닐까?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주고받으면서…. 핵사고와 관련한 기사와 핵 산업 관련 기업의 광고가 결합하면 정보는 어떻게 '마사지' 될까? 경제민주화를 정책으로 실현하려는 의지와 대기업의 광고가 결합하면 그 관련 기사는 어떻게 가공될까? 방송통신 관련 정책과 방송사의 이해관계가 결합하면 어떤 식으로 전달될까? 일상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우리가 대중매체를 통해 만나는 그 많은 정보들은 누군가 이렇게 가공하고 마사지한 것은 아닐까? 이해관계, 특히 정치권력과 금권의 이해관계가 얽혀서 서로에게 유리하도록 정보가 가공되고 조작되고 왜곡되고 날조된다면, 대중매체를 통해 정보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시민들의 판단과 그 판단에 근거한 선택과 참여는 심각한 '자유의 침해', 곧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온다.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받을 권리'는 철저하게 훼손된다.


어떤 분들은 이야기한다. 과거와 달리 다양한 대중매체를 대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정보 수용자의 자유는 충분하게 보장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교회는 현대인을 '비판력이 부족한 소비자'로 길들일 수 있음을 걱정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2496항 참조).


진실과 정의, 연대의식에 근거한 정보 전달


얼마 전 부산에 가는 기차 안 뒷좌석에 앉은 젊은이가 하는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한참 동안 듣느라 괴로웠던 적이 있다. 젊은이 이야기의 요지는 '어떤 유명한 배우가 어이없게도 종북단체에 기부를 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단어는 '어이없게도'와 '종북단체'였다. 아마 수십 번은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 젊은이가 판단한 '종북단체'는 어떤 성격의 단체를 말하는 것일까. 그 젊은이가 '어이없게도'라고 판단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그 젊은이의 이야기 가운데 어느 단체가 종북단체인지, 그리고 왜 종북단체인지, 왜 어이가 없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마치 동의를 얻어내려는 듯 옆 좌석의 사람에게 그렇게 반복해서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 젊은이가 그 같은 내용을 그 유명 배우에게 직접 들었을 수도 있고, 그 배우가 기부한 단체를 직접 찾아가 확인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아마도 어떤 대중매체를 통해 접한 정보를 진실이라고 믿고, 그렇게 믿었기에 자신감을 갖고 이야기했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중매체는 그 젊은이에게 이기(利器)일까, 흉기(凶器)일까?


필자는 여러 자리에서 '칼'을 예로 든다. 같은 칼이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데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그 칼을 엉뚱한 곳에 사용하면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되기도 한다. 대중매체가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사회에 제공'하고 있다면 분명 정보 수용자와 사회를 발전시키는 '이기'이다. 그러나 흉기가 되어 사람의 정신을, 그리고 사회를 해칠 수도 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말이다.


[평화신문, 2013년 10월 6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5) 대화와 소통, 협력과 존중의 부재


공동선 향한 연대와 민주주의 위해


지난 호에는 대중매체가 진리와 자유, 정의와 연대에 기초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사회는 그런 정보에 접근할 권리가 있음을 다뤘다. 교회의 이 가르침은 대중매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리고 일선 사목현장에서도 적용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이야기도 못 하나


본당의 마을(구역) 모임이 있었다. 평범한 본당 사제라면, 그리고 구역과 반모임에 참여하는 교우라면 그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마을 미사를 봉헌한다. 성당이 아니라 집에서 이웃으로 알고 지내던 교우들을 만났으니 분위기는 사뭇 정겹다.


필자에게는 특히 무릎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계신 모습이 제일 따뜻하다. 음향시설도 없고 성가대도 따로 없지만 선포하는 하느님 말씀이나 부르는 성가는 성당에서 봉헌하는 미사 때와는 다른 경건함을 불러일으킨다.


미사를 봉헌한 다음 마을 교우들의 친교 시간이 이뤄진다. 이 친교의 시간에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는 모습이 있었으니, 바로 남녀유별에 관한 것이다. 형제들은 형제들끼리, 자매들은 자매들끼리 마치 선으로 그은 것처럼 따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절대로 섞이는 법이 없다. 지금은 그런가 보다 하지만, 이는 전에 사목하던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형제자매 사이에 성별의 유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차이가 있는데 식탁 분위기의 차이가 그것이다. 대체로 자매들 사이에는 이야기가 그치지 않지만, 필자가 앉아 있는 형제들 사이에는 그렇지 않다. 누군가 분위기를 살려가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교우가 없다면, 어색한 분위기인 경우가 많았다. 형제들 식탁에서의 어색함의 근본 원인은 대부분 필자에게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필자는 강론이나 교리 시간이나 훈화, 혹은 회합에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세상'에 관한 복음적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사제들은 하느님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는 것이 첫째 직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이기도 하다(「사제생활교령」 4항 참조).


그러나 교우들 가운데 "신부님은 왜 항상 세상 이야기만 하세요"하고 분명하게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보면 분명 필자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다. 이는 마을 모임에서 형제들끼리 앉은 식탁에서의 어색함의 배경이기도 하다. 본당 사제의 '세상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자칫 모처럼의 정겨운 모임을 망칠까 봐 그 이야기를 주제로 꺼내지 못하는 것 같다.


대화와 소통, 협력과 존중으로 만드는 공동선


흔히 사람들이 처신의 정설(定說)인 것처럼 내세우는 것이 있다. 친구들과의 대화 혹은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정치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반드시 싸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필자는 그 같은 정설이 자리 잡은 데에는 사상 및 정치의 근대화(민주주의)에 저항하려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고 추측한다. 시민으로 하여금 정치를 논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시민으로 하여금 종교적 진리를 논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말이다.


주권이 왕(王)에서 민(民)에게로, 그래서 왕국(王國)에서 민국(民國)으로의 이행 과정을 가로막으려는 의도, 교권이 '교계제도'에서 '하느님 백성'에로의 이행 과정을 가로막으려는 의도 말이다. 혹은 '폐쇄적 지배집단'이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려는 의도 말이다.


이 글은 '사제의 세상 이야기' 자체의 시시비비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팎에서 체험하는 대화와 소통, 협력과 존중의 부재의 심각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 또 집단과 집단 사이에 대화와 소통, 협력과 존중이 없다면 그 관계를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사회를 공동 운명체라고 할 수 있으며, 대화와 소통 없이 어떻게 공동선을 향해 연대할 수 있으며, 협력과 존중 없이 어떻게 참된 사회화를 향해 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때로는 더딜 수도 있고, 때로는 비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공동선과 참된 사회화는 공장에서 생산하는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과 함께 온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껏 한올 한올 엮어야 할 옷감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참된 민주주의의 길이며, 불순한 의도(?)에 맞서는 길이다.


[평화신문, 2013년 10월 13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6) 핵무기와 핵발전은 교회의 길이 아니다 (1)


생명, 죽음의 길, 어떤 선택을?


사회의 비민주성과 국가의 폭력은 밀양 송전탑 건설 현장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이 땅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국가의 중앙집중형 전력공급체계에 기댄 탐욕과 불의가 있다. 공의회는 인류가 겪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사목헌장」 1항)임을 고백했다. 앞으로 수차례에 걸쳐 핵발전 및 핵기술의 문제를 다루려 한다.


핵무기, 핵발전소 그리고 우리의 선택은


누구도 하느님께서 보시기 좋게 창조한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 그 하느님 정원의 모든 생명에 폭력을 가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과학기술을 악용한 핵무기의 폭발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잿더미로 만들고 수십만의 무고한 시민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살아남은 이들과 그 2, 3세에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핵 억제력'(핵무기 보유로 적의 공격을 억제할 수 있다는 힘의 논리)을 내세워 경쟁적으로 수천 기의 핵무기(nuclear weapon, 核武器)를 개발하고 보유하여 세상을 '공포의 균형'으로 갈라놓은 강대국들은 마침내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 핵발전소(核發電所)에서,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에서 핵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다. 패전의 폐허를 딛고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일본의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은 다시 인류를 충격과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불과 60여 년 만에 벌인 이 대형 핵사고들은 인간이 자연과 모든 생명에 가한 폭력이었으며, 미래세대에 고통을 떠넘긴 몹쓸 짓이었다.


다행히 강대국들과 선진국들은 핵무기 감축과 핵발전소 가동 중지 및 폐쇄를 결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이를 핵발전 확대와 수출과 핵주권론(핵무기 개발과 보유) 확보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 이는 핵무기와 핵발전이 세상에 참된 평화와 발전의 유산으로 남을지, 회복할 수 없는 고통과 재앙으로 남을지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나 우리 앞에는 두 길이,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신명 30,19 참조) 놓여 있다. 핵발전과 핵무기는 추상적 관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 환경', 그것도 인류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환경 가운데 하나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핵무기와 핵발전에 관해 냉정하게 성찰하고 현명하게 판단하며 윤리적으로 선택 실천해야 한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 41항 참조).


신앙인의 이 같은 노력이 인류가 안고 있는 "고뇌에 찬 문제들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구원의 힘을 풍부히 제공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이 들어 있는 이 민족과 사회에 연대와 존경과 사랑을 가장 웅변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사목헌장」 3항).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핵발전과 관련해서 사제들, 특히 수도권 및 도시 지역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의 관심이 더욱 필요하다. 대부분의 전력은 '힘없는 지방마을'에서 생산되어 수도권과 대형 공장밀집지역으로 송전되어 소비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고 했겠는가. "현대 세계의 상황에서 사제들의 설교는(…) 하느님의 말씀을 일반적으로나 추상적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 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하여야 한다"(「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4항).


마찬가지 이유로 교우들 역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평신도들은 복음화와 인간 성화에 힘쓰며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그 질서를 완성하도록 노력함으로써 실제로 사도직을 수행"(「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2항)하기 위해서, "인간 구원에 관련되는 문제들은 물론, 자신과 세상의 문제들을 교회 공동체에 들고 와서 함께 논의하고 연구하고 해결하여야"(10항) 하기 때문이다.


참고=핵발전(核發電, nuclear power generation)은 핵을 인위적으로 분열시킬 때 발생하는 고온으로 물을 끓여 그 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핵무기의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해서 '핵' 대신 '원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원자력발전'이라고 하지만, '핵'과 '원자'는 같지 않다.


[평화신문, 2013년 10월 27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7) 핵무기와 핵발전은 교회의 길이 아니다 (2)


약자의 고통 위에 세워지는 송전탑


"우리를 다 밟고 가그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경남 밀양시 단장면 바드리마을 주민들의 절규다. 성남시는 같은 날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을 가로지르는 송전탑 철거를 완료한 것을 기념하는 '구미동 송전전로 지중화 사업 준공 기념 콘서트'를 연다고 밝혔다. '송전탑'이란 것을 두고 한쪽에서는 절규하고, 한쪽에서는 환호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핵발전이 구조적으로 갖고 있는 비윤리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단적인 예다. 핵발전은 교회의 길, 인간의 길이 될 수 없다.


핵발전소, 안전하면 왜 변두리에만 건설할까


산업용 전력수요를 합리적으로 조정할 계획은 세우지 않으면서, 재생에너지 산업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시민들에게 에너지 절약을 그렇게 요란하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핵발전소만 있으면 그렇게 불편하게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은밀하게 시민의 마음을 조작하는 것 아닌가?


수도권에는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생활한다. 얼마나 많은 전력을 소비하고 있겠는가? 정부와 핵산업 관련 정부 관료와 산업계와 한전, 그리고 일부 지식인과 언론이 주장하는 대로 핵발전소가 그렇게 안전하고, 그렇게 친환경적이고, 그렇게 경제적이라면 수도권에 핵발전소를 건설해야 하는 것 아닌가?


더 나아가 서울에 핵발전소를 건설하면 어떨까? 천만 인구가 살고 있는 데다가 고층건물이 무수히 들어서 있으니 전력소비가 엄청날 것이다. 게다가 수도 서울에는 한강이 가로지르고 있으니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정전 대란을 떠들썩하게 내세우며 시민의 불편함을 걱정한다면 더욱 그렇다. 1000만, 아니 2000만 시민의 불안함을 일거에 없앨 수 있으니 말이다. 전력소비지에 전력생산시설을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윤리적인가!


그런데 우리나라건 일본이건 중국이건 핵발전소는 왜 하나같이 거주인구가 적고, 외진 바닷가에 건설할까? 일본의 경우 핵발전소 부지 선정 기준은 가장 낙후되고 인구가 적게 사는 변두리, 저항이 가장 없는 곳이라고 한다. 후쿠시마도 그런 곳이었다. 핵사고가 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으로 누리는 안락함


그 본질적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안전하지 않고 오히려 절대 위험시설이며, 친환경적이지 않고 오히려 자연환경에 심각한, 그것도 영구적 회복불능의 폐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경제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가장 비싼 경비가 드는 것이 핵발전 방식이기 때문이다. 대용량의 핵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소비지까지 보내려니 송전선이 필요하고, 그 때문에 송전탑을 세워야 한다.


대량 생산된 핵발전 전력은 전국에 있는 1600여 개의 송전탑을 잇는 고압 송전선을 통해 대도시 소비지와 산업단지로 보내야 한다. 핵발전소 건설과 송전탑 건설에 수십조 원이 필요한데, 관련 산업계에서는 그 얼마나 괜찮은 돈벌이 사업인가.


핵발전 방식은 소비지 거주 주민의 편리함과 산업시설 지역과 관련 산업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생산지와 송전탑 지역 주민의 불편함과 고통을 강요하는 비윤리적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핵발전을 묵인하고 편리함을 내세워 의존하는 한 힘없는 지역의 희생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나의 기쁨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강요하는 것이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겠는가?


힘없는 지역의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송전탑 건설을 온몸으로 막으며 절규하는 그 시각, 도시의 시민들은 송전탑을 철거하고 송전선을 땅속에 묻었다고 유명 가수를 불러 축하공연을 계획하는 것, 핵발전 방식을 계속하는 한 이 구조적 비윤리성은 벗어날 수 없다.


더구나 비윤리성은 동시대에 끝나지 않는다. 핵발전을 하고, 그래서 우리가 풍요로움과 편리함을 만끽하면 할수록 미래 세대의 환경권과 생존권을 위협하는 수준은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 인류는 핵발전 과정에서 나오는 치명적인 핵폐기물(엄밀히 말하면 폐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폐기물이라는 용어도 기만적이다)을 안전하게 끌어안고 살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선진국에서 핵발전을 포기하고 더 이상 핵발전소를 건설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핵발전은 사회적 약자, 저발전 지역,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의 희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불의한 구조, 곧 '죄의 구조'를 갖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다.


[평화신문, 2013년 11월 3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8) 핵무기와 핵발전은 교회의 길이 아니다 (3)


핵 관련 다양한 의견 소통, 수렴 필요


사람은 누구나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를 고민하고 그 답을 찾으려 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재물의 소유와 소비(물질적 풍요로움)에서 삶의 답을 찾았다. 경제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정치도 문화도, 가정도 교육도 하다못해 종교까지도 '경제 살리기'라는 구호에 따라 움직였다. 경제를 사람과 사회의 주인으로 섬긴 셈이다. 그런데 경제발전을 그렇게 노래하는데 삶과 사회는 날로 황폐해지고 있다.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의 실종으로 겪는 불행이다.


그릇된 진실이 민주주의 위협


교회는 '진리, 자유, 정의, 사랑'이 인간의 진정한 발전을 도모하는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라고 믿는다. 사회교리는 "이 가치들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자기완성을 이루고 더욱 인간다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확실하고 긴요한 방법이다. 이 가치들은 경제, 정치, 문화, 기술의 본질적 개혁과 필요한 제도 개혁을 이루도록 부름 받은 공권력의 필수적인 준거가 된다.… 교회는… 사람들이 내린 여러 가지 결정들 안에 이러한 가치들이 어떻게 수용되고 배척되는지 보여주고자 현세 질서에 개입한다"고 밝히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197항).


교회는 특별히 대중매체 분야와 경제 분야에 관련된 문제에서 진리를 해치려는 시도나 진리의 요구를 상대화하려는 위험을 경고한다(198항). 사실 우리는 경제성장과 안보를 내세운 정치권력이 언론과 경제를 지배도구로 악용한 아픈 역사를 체험했다. 형식적으로 정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언론의 독립과 경제민주화를 기대했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고 개탄하는 전문가가 많다. 물론 이 같은 비판에 대해 경제성장에 발목을 잡고, 안보를 해친다고 비난하는 일에 언론이 앞장서기까지 하고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대중매체가 정치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시민들이 정보의 객관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회가 우려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는 뉴스미디어 현상"과 이런 현상과 정치 활동과 금융기관ㆍ정보기관들의 유착이 미치는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다(414항 참조).


진리에 따른 사회문제 해결


핵산업과 핵무기와 관련해서 다양한 의견과 합리적 의심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지만 정부 주도의 핵산업 정책에 대한 일방적인 홍보만 있을 뿐이다. 대중매체는 핵산업 분야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전하기만 할 뿐, 핵기술이 갖는 위험성과 핵사고의 실체를 외면하거나 축소한다.


사실 핵발전 산업과 관련해서 정보의 차단 및 사고의 축소 보도는 거의 공통적 현상이다. 일본 후쿠시마 핵사고 때 2, 3호기의 핵반응로 노심 융해는 사고 후 100시간 안에 일어났는데, 일본 정부는 두 달이 지난 뒤에야 그 사실을 공개했다. 전형적인 정보차단(disinformation)이라 할 수 있다.


핵분열이 갖는 위험 정보 역시 공식 입장에 따라 차단됨으로써 철저히 축소되고 왜곡된다. 정보의 독점과 왜곡, 축소와 의도적 외면은 국제 원자력 관련 공식 기구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핵발전의 안전과 국제기준을 제시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핵산업에 의존적이고 핵산업 분야의 발전을 지원하는 기구로서 독립적일 수도, 중립적일 수도 없는 기구의 기준은 신뢰성을 갖기가 어렵다.


정보의 객관성과 신뢰성은 국제 혹은 국가 원자력 기구에서, 혹은 전문가의 전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배경의 전문가(집단, 기구)가 어떤 목적으로 정보를 생산하는지, 그 정보의 생산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는지가 정보의 신뢰성과 객관성 곧 윤리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역할은 핵발전소 폐쇄 주장을 비롯한 다양한 의견들이 표출되고, 소통되고, 수렴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사회집단들이 진리에 따라 사회문제(핵무기와 핵발전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수록 그들은 악습에서 더욱 멀어지고 객관적 도덕 요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198항).


[평화신문, 2013년 11월 10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9) 핵무기와 핵발전은 교회의 길이 아니다 (4)


'국책사업' 에 짓밟힌 소시민의 자유


핵발전은 시민, 특히 힘없고 약한 이들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교회의 길이 될 수 없다. 이 자리에서 교회가 믿는 '사회생활의 근본적 가치' 가운데 하나인 자유를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상식적으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한다. 우선 사회교리는 자유를 "모든 인간이 지닌 최상의 존엄성의 표징"(「간추린 사회교리」 199항 참조)이라고 밝힌다.


인간 존엄함의 무게는 다를 수 없다


모든 인간이 지녔다는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우리는 쉽게 체험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라.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인 줄 알아" 하는 말들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대개 두 경우를 설명한다. 하나는 우월감이고 다른 하나는 체념이다. 사람 존엄함의 무게가 다르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존엄함의 무게를 다는 척도가 보편적이 아니라 작위적이라는 데에 있다. 재물 소유의 정도, 사회적 지위, 하다못해 우리의 경우는 그가 사는 동네에 따라, 사람의 존엄함의 무게가 다르다.


핵발전은 철저하게 생산지의 주민과 생산지와 소비지 사이를 잇는 지역의 주민 존엄성과 자유를 배제하는 구조를 가진다. 절대 위험시설인 핵발전소 지역 주민에게 존엄성의 유보, 더 나아가 자유의 유보를 강제하는 구조라는 뜻이다. 그것도 소비지 주민만의 존엄성과 자유를 위해서 말이다. 이는 소비지 주민의 자유를 "순전히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한다거나 개인의 자율성을 멋대로 무절제하게 행사"하는 것쯤으로, "관계의 단절과 전적인 자기만족의 성취"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사례가 지난 호(77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밀양 지역의 주민에게는 아파트 높이의 거대한 송전탑을 받아들이라고 강제하고, 성남시 분당구의 지역 주민에게는 민원을 받아들여 지중화 작업을 마치고 잔치를 벌여주는 식이다.


둘째로 자유는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된 것이라도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은 무엇이든 거부할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200항). 우리는 '거부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일종의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국가의 행위, 아니 정부의 행위, 아니 관료들의 공적 업무 행위에 대해 거부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법은 이성과 양심에 따라 집행돼야


우리는 '충'과 '효'를 절대적인 덕목으로 삼거나, 혹은 절대적인 덕목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길들여졌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길들였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책임과 의무, 곧 국가의 책임과 의무, 정부의 책임과 의무, 관료의 책임과 의무, 특히 시민과 시민사회에 대한 그 공적인 책임과 의무를 따지는 일에는 소극적이 됐다.


소극적이라기보다는 때로는 불경한 것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국책사업'이란 이름을 내걸고 밀어붙이는 것이 추진력으로 둔갑하기 일쑤다. 그렇게 포장된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따지는 일은 반정부가 되고 반국가가 돼 버리기도 한다. 말하자면 국가, 정부, 관료의 행위로 포장된 그 많은 공사(公事)들의 부도덕함과 비윤리성을 거부하는 것조차 부정한다.


핵발전의 경우가 그렇다. 핵발전소와 송전탑 건설, 경주의 방사선 핵폐기물처리장 건설 같은 핵발전 관련 사업의 경우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강행되지만, 확고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공동선과 공공질서가 정한 한계 안에서 모든 경우에 책임 있는 태도로 이뤄져야 하는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전원(電源)개발촉진법(이하 전촉법)'이라는 것이 있다. 전촉법은 전원 개발설비 부지로 결정되면 강제수용까지 할 수 있게 규정해 놓았다. 게다가 사업의 실시계획만 승인되면 도로법ㆍ하천법ㆍ자연공원법 등 19개 법률에 규정된 인ㆍ허가 사항 등에 대해서도 인ㆍ허가가 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사업을 강행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이런 법을 '확고한 법적 테두리'라고 할 수 있을까? 이성과 양심에 반하는 법은 확고한 법이 아니라, 오히려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 가하는 폭력일 뿐이다. 법대로 한다지만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할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되는 자유"에 가하는 폭력에 불과하다.


[평화신문, 2013년 11월 17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80) 핵무기와 핵발전은 교회의 길이 아니다 (5)


핵산업, 미래세대에게 불의


한 때 '정의'(正義)와 관련한 책이 거의 필독서가 되다시피한 때가 있었다. 교회는 정의를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라고 정의(定意)한다.


그리고 교회는 "정의의 고전적 형태인 교환 정의, 분배 정의, 그리고 법적 정의에 대한 존중을 끊임없이 요구"한다.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사회 정의'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오늘날 전 세계적 차원의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요청되는 사회 정의는 사회 정치 경제적 측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의의 구조적 차원과 그 해결책과 관련된다"(「간추린 사회교리」 201항).


국민의 권리 충돌, 국가가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핵발전은 겉으로는 정의를 실현하는 구조로 보인다. 핵에너지의 소비자들은 '계약'에 따라 소비하는 에너지에 대해 사용료를 낸다. 이는 교환 정의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핵관련 지역 주민, 핵발전소 지역 주민, 송전탑 지역 주민,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지역 주민에게도 보상과 정부 교부금 지원 등으로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한국수력원자력과 한전은 법률에 따라 핵발전소를 짓고 송전탑을 건설하니 법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이는 핵심을 간과한 것이다. 한쪽의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위해 다른 한쪽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교환 정의는 형식에 불과하다. 게다가 핵발전은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로서의 정의를 부정한다. 핵발전은 구조적으로 핵발전으로 생산되는 전력의 소비자를 위해 이웃인 전력 생산지 및 송전탑 지역 주민의 권리를 제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산지 주민과 소비지 주민의 권리가 충돌할 때, 그 권리를 보호할 의무는 국가에 있다. 국가가 생산지 주민에게 보상하고, 정부 교부금을 지원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보상이 지역 주민의 의사와 반한다면 어떡할까. 그리고 권리의 충돌을 극복할 대안 마련이 가능한 데도 한쪽의 권리를 보호하느라 다른 쪽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권리보호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상과 정부 교부금 지원을 강제하는 것은 경제적 약자의 약점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이웃의 것은 이웃에게 돌려줘야


국책사업이란 이름으로 관련법에 따라서, 특히 전원(電源)개발촉진법에 따라 공사를 강행하는 것은 지난 호(79회)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이 법은 전원개발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전력수급의 안정을 도모하고,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공사 강행은 '확고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기도 어렵다. 핵발전이 법적 정의를 실현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핵발전은 치명적이며 처분 불가능한 핵폐기물을 남김으로써 현 세대의 이익을 위해 미래 세대에 희생과 부담을 강요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정의를 실현하려면 이익과 피해, 권리와 의무를 공정하게 분배해야 하는데, 미래 세대는 고스란히 피해와 의무만 짊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핵산업은 현재의 생산지 주민은 물론 미래 세대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으며, 줄 수도 없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정의를 단순한 '인간의 협약'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경계한다. 옳은 것은 단순히 법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효용성과 소유의 기준에 따라 배타적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202항).


우리의 경우 핵발전과 관련해 도덕적 윤리적 합의를 찾아보기 어렵고, 대부분 경제성과 효용성에 관한 논란만 무성하다. 소유와 효용성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정의에 대한 성찰은 비경제적 비효율적 낭비쯤으로, 거추장스러운 것쯤으로 치부한다.


그동안 사회 전 분야에서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고, 오히려 이웃의 것을 내 것으로 취하는 것을 능력이라고 여기고,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발전이라고 믿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웃 나라에서 핵참사가 났는데도, 우리의 핵발전의 불의한 구조에 둔감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평화신문, 2013년 11월 24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81) 핵무기와 핵발전은 교회의 길이 아니다 (6)


사회 · 정치적 애덕 수용 않는 핵


사랑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사회적 정치적 애덕'에 대해서는 어떨까? 필자가 여러 다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교회는 사랑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애덕을 강조합니다" 하고 말하면 대부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다.


근본적 모순 바로잡는 사랑 필요


예전보다 더욱 복잡해진 세상 속에 평화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하려면, 개별 행동을 재촉하는 사랑의 역할만을 강조할 수 없다. 현대 세계의 문제들에 새롭게 접근하는 방식을 가르쳐 줄 수 있고, 사회 구조들과 사회 조직, 법적 체계들을 내부로부터 쇄신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보여주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랑은 사회적 정치적 애덕이라는 특징적인 형태를 띤다(「간추린 사회교리」 207항 참조).


이 사회적 정치적 애덕은 상황에 따라 사회의 중개(仲介)를 활용해 이웃의 삶을 개선하고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웃이 가난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하고자 애쓰는 사랑의 행위로써 반드시 필요하다(208항).


하지만 핵발전은 이 사회적 정치적 애덕을 거부한다. 핵발전은 그 자체로 에너지 생산과 공급이라는 관점에서 이웃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을 제거하는 '사회적 중개'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핵발전 단계만, 그것도 일면만 부각한 것에 불과하다.


핵발전은 핵발전 전단계(核發電 前段階)와 핵발전 단계, 핵발전 후단계, 곧 핵발전의 전 과정을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우리의 경우 핵발전 단계만 부각해 그 안정성, 환경성, 경제성을 강조한다. 게다가 미국의 스리마일, 구소련의 체르노빌, 일본의 후쿠시마 등 몇 차례의 핵사고에서 그 위험성과 반환경성, 비경제성이 드러났음에도 말이다.


핵발전의 모든 과정을 고려하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물론 경제성과 안전성에 관련해서 핵관련 당국이나 산업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 모든 단계를 고려하면 핵발전은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거의 영구적으로 남기며, 가장 비싸며, 가장 위험한 발전 기술일 뿐이다.


이웃과 미래세대의 고통을 담보로 한 핵발전


더욱이 핵발전은 '이웃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을 양산한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자국에서 핵산업을 사양산업으로 분류하고, 대신 한시적 수출산업으로만 여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핵산업이 미래 세대가 짊어져야만 하지만 벗어버릴 수 없는 너무나 무겁고 위험한 짐을 떠넘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아무리 현 세대의 사회적 정치적 애덕의 행위라고 하더라도 미래 세대에 벗어날 수 없는 짐과 고통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 아무리 의도가 옳다고 하더라도 불의한 결과까지 용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성상 정부나 거대 자본이 담당할 수밖에 없는 대용량의 중앙 집중형 에너지 생산방식인 핵발전이 그 자체로 이웃의 삶을 개선하는 데 선용된다는 것도 의심스럽다. 오히려 절대 다수의 시민을 철저하게 수동적 소비자로 머물게 함으로써 다른 차원의 약자로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핵발전 방식이 '에너지 민주주의'에 반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여름과 한겨울이 되면 시민들에게 정전을 이야기하며 불안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에너지 절약을 강조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시민으로 하여금 에너지소비를 촉진하고, 과소비에 익숙해지자 다시 전력공급의 한계를 이유로 불안감과 불편함을 강요하는 형국이다. 핵발전과 핵기술이 시민에게 주인 행세를 하는 셈이다.


정부와 소수 전문가, 핵관련 산업계와 학계, 그리고 국가주의에 의지하는 일부 정치인들이 은밀히 일방적으로 유지 확대하려는 핵산업(핵발전과 핵무기)은 그 자체로 '진리'와 '자유', '정의'와 '사랑'(사회적 정치적 애덕)이라는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를 제대로 수용할 수 없는 구조다.


[평화신문, 2013년 12월 1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82) 사회교리 - 그리스도인의 삶 (1)


가톨릭 신앙의 골다공증


종교와 정치, 그 관계에 대해 할 말이 참 많을 것이다. 최근에는 종교가 정치에 개입할 수 있다느니 없다느니, 해야 한다느니 하지 말아야 한다느니, 할 수도 있다느니…. 끝이 없을 것이며, 그 이유도 무수할 것이다. 다만 우리 사회의 경우 합리적이며 생산적인 대화와 토론이 없으며, 일방적인 윽박지르기만 난무한다. 두세 마디 지나고 나면 화내기 일쑤다. 거의 '폭력' 수준이다.


믿음과 신앙은 분리될 수밖에 없는가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는 참담하다. 논쟁(?)에서 '신앙' 특히 '그리스도 신앙', 더 더욱 '가톨릭신앙'을 찾아볼 수 없어서다. 종교(religion)는 영어식으로 하면 '일반명사'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Christianity)는 엄연히 고유명사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대문자로 쓴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그 어떤 고유함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고, 유다교도 마찬가지고, 힌두교도 마찬가지다.


종교와 정치, 종교와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반론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 신앙인은 (고유한) 그리스도교와 정치, 그리스도교와 세상을 성찰하고 토론하고 논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그리스도교 가운데 가톨릭이 있고, 그 가톨릭 가운데 로마 전례를 따르는 로마 가톨릭이 있다.


그렇다면 가톨릭 신자라면 가톨릭교회 혹은 가톨릭 신앙과 정치, 가톨릭교회 혹은 가톨릭 신앙과 세상을 성찰하고 토론하고 논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현실은, 적어도 필자가 만난 거의 대부분의 가톨릭 교우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대중매체를 접했는지, 어느 정치적 성향을 가졌는지, 어느 경제적 이념을 따르는지, 그 기준과 잣대로만 바라보고 판단하고 주장할 뿐이었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두고 심각한 골다공증이라 말하고 싶다. 그것도 뼈에서 칼슘 성분이 모조리 빠져나간 완전한 골다공증, 그래서 겉으로는 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부러질 위험이 있는 상태 말이다. 성경과 가톨릭 신앙과 교리와 제도와 가르침 같은 것이 철저하게 빠져나가고 겉으로 드러나는 조직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것만 같다.


교우들 가운데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을 바탕으로, 그리고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바탕으로 교회의 현실 참여의 찬반 입장을 말씀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세상 앞에 하나가 된 교회


필자의 생각이 막연하고 근거 없는 억지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의 말씀처럼 정치참여 문제 때문에 천주교회가 분열했다면 앞으로 경제 문제 때문에, 문화 문제 때문에, 국가 문제 등 무수히 많은 문제들 때문에 그렇게 분열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분열로 그칠까? 상호 단죄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단죄하면 가톨릭 좌익교회, 가톨릭 우익교회, 가톨릭 보수교회, 가톨릭 진보교회, 그렇게 돼야 하나?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 가톨릭교회가 그렇게 심각한 골다공증의 증세를 보이고 있다면 그 원인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필자 개인으로는 몇 가지 원인을 꼽고 싶다. 우선 성경의 철저한 사유(私有)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은 이스라엘 공동체, 첫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가 구체적인 역사에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을 신앙으로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성경을 공동체 대신 '나', 구체적인 역사 대신에 '마음'의 영역으로 환원시켰다.


둘째, '신앙'과 '삶'의 철저한 이질적 구별을 꼽을 수 있다. 이는 개인으로서 마음으로 믿고 성당에 가서 성사생활 하면 하느님께 은총을 받아 구원을 받는다는 정도로 신앙을 제한하고, 가정과 문화, 경제와 정치, 사회와 환경, 곧 구체적인 삶을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었다. 셋째, 그리스도교의 성경과 그에 바탕을 둔 고유의 신앙체계와 교리와 교회제도에 대한 무관심이다. 신앙의 해를 기념했지만 고유의 신앙과 그에 따른 삶을 찾아보기 어렵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서 경제영역에서, 정치영역에서, 교육영역에서, 곧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톨릭 신앙인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리고 교회의 책임, 특히 성직자의 책임이 크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그리스도인의 삶'(제3편)이,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가톨릭교회에는 사회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가톨릭 신자는 얼마나 될까? 있다는 것을 아는 분들 가운데 그 내용을 아시는 분은 또 얼마나 될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평화신문, 2013년 12월 8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83) 사회교리 - 그리스도인의 삶 (2)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가톨릭교회 교리서」(1992년)는 모두 네 부분으로 구성됐다. '신앙고백', '그리스도 신비의 거행'(성사),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그것이다. 신앙고백도 성사도 기도도 우리 교우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용어다. 그 내용의 복잡성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삶이란 말도 사실은 그다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우리 말 '사람'은 '살다'의 이름씨인 '삶'과 '알다'의 이름씨인 '앎'이 결합된 말이라고 배웠다. 교리서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러니까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을 아는 것'쯤으로 풀 수 있다.


그리스도처럼 사는 길이 무엇인가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간 존엄성, 인류 공동체, 하느님의 구원-법과 은총, 십계명으로 나눠서 풀이하고 있다. 교리서는 인간 존엄성에서 그 근거와 인권(인간의 기본적 권리들과 모든 권리의 원천이며 목적이 되는 생명권)과 국가의 의무를 가르친다.


인류 공동체에서는 공동선, 보조성, 연대성, 재화(혹은 재화사용)의 보편 목적,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 등을 가르친다. 십계명 부문에서도 흔히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단순한 종교적 계명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서는 군 복무를 공동체에의 봉사로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대체복무제와 국가의 의무를 가르치고 있다. '거짓증언 하지 말라'는 계명에서는 대중매체와 관련한 교리가 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에서는 국가의 가정에 대한 의무에 대한 내용들도 포함돼 있다.


이를 요약하면 그리스도인이 현실에서(가정ㆍ문화ㆍ경제ㆍ정치ㆍ생태ㆍ평화ㆍ국제질서ㆍ법과 제도) 무엇을 실천하며 살아야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인지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교리서가 이렇게 현실의 문제를 교리로 제시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하느님 백성인 그리스도인이 바로 세상 안에서 살고 있으며, 그 안에서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체험하고 있으며, 교회는 마땅히 하느님 백성과 인류가 나아갈 길을 제시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양심으로 인간다운 세상 만들어야


얼마 전 폐막한 '신앙의 해'는 앞에서 소개한 「가톨릭교회 교리서」 출간 20년뿐만 아니라, 이 새 교리서의 배경이 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년) 개막 50년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이 공의회에서 가장 돋보이는 문헌은 「교회헌장」과 「사목헌장」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사목헌장」의 구성과 내용을 거의 고스란히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과 공의회의 여러 문헌들,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제3편, 교황 및 주교들의 가르침,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백성의 신앙과 역사적 공동체적 체험 가운데 이른바 '현실' 혹은 '세상'과 관련한 것들을 정리한 「간추린 사회교리」를 교회는 2004년에 내놓게 된다.


가톨릭 신앙인뿐만 아니라 교우가 아닌 분들은 가톨릭교회가 '세상' 혹은 '현실'의 문제에 대해 그토록 깊은 관심이 있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꽤나 생소할 것이다. 사람들은 물론 가톨릭 신앙인조차 이를 개입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교회는 다음과 같이 인간에 대한 봉사라고 밝힌다.


교회는 인류가 직면한 "고뇌에 찬 문제들에 대하여 인류 가족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그 문제들을 복음에서 이끌어 낸 빛으로 비추어 주고(…) 구원의 힘을 인류에게 풍부히 제공함으로써, 하느님 백성(교회)이 들어 있는 온 인류 가족에 대한 연대와 존경과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사목헌장」 3항).


좀 더 구체적으로 교회는 인간다운 사회 건설을 이끌어야 할 원리들(인간 존엄함과 인권, 공동선, 재화의 보편적 목적, 보조성, 참여, 연대)과 더불어 근본적인 가치들도 제시한다. 이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들로 교회는 "진리와 자유, 정의와 사랑"을 꼽는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물질주의와 개인주의에 휩쓸려 거짓과 억압, 불의와 미움이 판을 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이성과 지성과 양심은 끊임없이 묻는다.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진리와 자유, 정의와 사랑을 실현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그래서 교회는 이 가치들을 "경제, 정치, 문화, 기술의 본질적 개혁과 필요한 제도 개혁을 이루도록 부름 받은 공권력의 필수적인 준거"로 제시하며, 더 나아가 "사람들이 내린 여러 가지 결정들 안에 이러한 가치들이 어떻게 수용되고 배척되는지 보여주고자 현세 질서에 개입한다"고 밝히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197항 참조).


[평화신문, 2013년 12월 15일]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84 · 끝) 사회교리 - 그리스도인의 삶 (3)


사랑은 '사회 · 정치적 애덕' 특징 지녀


지난 호에서 인간다운 사회 건설을 위해 '진리와 자유, 정의와 사랑'이라는 근본 가치들이 실현돼야 하며, 사람들이 내린 결정들 안에 이 가치들이 어떻게 수용되고 배척되는지 보여주고자 교회는 현세 질서에 개입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간추린 사회교리」 197항).


예를 들어 사람들이 내린 경제 분야의 결정이 수많은 사람을 빈곤으로 내몬다면, 이는 자유라는 근본 가치가 배척되고 있다고 교회는 밝혀야 한다. 정치 분야의 결정이 시민이 갖는 기본적 권리들(인권)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이는 정의라는 근본 가치를 배척하는 것이라고 교회는 말해야 한다. 대중매체 분야에서 윤리적 정보를 생산하고 전달하지 않아서, 수많은 시민의 판단과 참여의 왜곡을 가져온다면, 이는 진리라는 근본 가치를 배척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인 '진리와 자유, 정의와 사랑'이 현세 질서에 수용되도록 교회가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교회가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은 그 소명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이웃 사랑에만 머물지 말아야


오늘은 마지막으로 '사랑'에 대해 살펴봐야겠다. 사실 사랑처럼 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생활에서 사랑은 마치 공기와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랑을 '친밀한 육체적 관계'로 국한하거나 단순히 '타인을 위한 행동의 주관적 측면'에 한정하려 한다.


육체적 관계로서의 사랑은 굳이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해석하지 않아도, 공부하지 않아도 저절로 느끼는 것이니 말이다. 말 그대로 자연일 것이다. 타인을 위한 행동의 주관적 측면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에게는 타인을 향한 마음이 있다. 좋은 사람에게는 사랑이, 싫은 사람에게는 미움이 있다. 물론 타인을 향한 마음이 없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흔히 '이기적'이라는 표현을 쓸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이기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사랑의 주관적 측면만 살펴보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정치적 사회적 애덕'이라는 특징을 가진다고 가르친다. 현대세계의 인간관계 때문이다. 사실 농경 목축사회에서 이웃을 향한 주관적 사랑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사람들은 함께 살 수밖에 없었다. 경제생활도 철저하게 계절의 변화와 땅과 물과 같은 자연에 의존했다.


자연재해 때문에 흉년이 들었다고 하자. 식량을 비축한 사람이 자기네 가족만 살겠다고 이웃의 배고픔을 외면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런 경우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지만,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타인을 위한 행동으로서 주관적 측면의 사랑은 당연했을 것이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떠돌아다니고, 병들고 감옥에 갇혀 있는 이웃을 보고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 초래하는 원인까지 신경 써야


현대의 도시사회에서 개인이 그 같은 타인을 위한 주관적 측면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가능하더라도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가끔 강론 때 교우들에게 묻는다. "도심 한복판에서 노숙하시는 분들을 모셔서 재워드리고 식사를 제공하고 머물게 할 분 계십니까" 하고. 반응은 침묵이거나 가벼운 웃음이다.


침묵인 이유는 복음 말씀 때문일 것이고, 가벼운 웃음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는군요"하는 뜻일 게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인간관계가 제한된 지역공동체 안에 머물렀던 과거 농경 목축사회와는 달리, 현대 사회는 그 관계망이 바로 사회 정치 공동체 전체 속으로 확산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는 이를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궁핍하고 곤궁한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개인 간의 관계라는 단순한 차원과는 다른 무엇을 의미할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208항)고 설명한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이 '사회적 정치적 애덕'이라는 특징을 가진다고 가르친다.


사회적 정치적 애덕은 "상황에 따라 사회의 중개를 활용해 이웃의 삶을 개선하고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208항)을 말한다. 사회의 중개는 정책, 제도, 법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의 정책이 이웃의 삶을 개선할 수도, 떨어뜨릴 수도 있으며,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이 될 수도, 그 요인을 제거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가톨릭교회가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삼는 사랑은 '사회적 정치적 애덕'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불쌍한 사람을 직접 도와주는 것도 사랑의 실천이지만, 사회의 제도를 개선하고 법을 만들어 가난의 사회적 원인을 제거하고 삶을 개선하려는 행동도 '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평화신문, 2013년 12월 22일]


※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는 이번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사회교리를 알기 쉽게 독자들에게 전해주신 박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