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갈등 상담] 본당이 시끄러운 이유는? (1)


작금에 본당마다 시끄러운 일들이 적지 아니 일어나고 있고, 성당이 전처럼 조용하지 않고 도떼기시장처럼 되어간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커져가고 있습니다. 어떤 성당은 본당신부와 신자의 갈등 때문에, 또 어떤 곳은 신자와 신자간의 갈등 때문에, 또 어떤 곳은 수녀님과 신자들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시끄럽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요즈음 사람들이 자기주장이 강해져서 말들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나름의 설명을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문제를 표피적이고 단편적으로 단정하는 것이지 공동체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는 못합니다. 기껏해야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약발 없는 처방으로 일시적인 안정감만 줄 뿐, 그 뿌리는 여전히 남아서 언제라도 다시 불씨가 될 여지를 남깁니다. 따라서 본당이 안정을 찾으려면 불안정한 이유를 명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당이 시끄러운 첫 번째 이유는 신자들 중에 마음의 상처가 깊은 분들이 많을 때, 특히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던 분들이 성당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대인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은 아이는 성장하면서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성인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의 지도자가 된 후에는 다른 신자들을 돌보고 본당 신부나 수도자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충실한 협조자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합니다. 어떤 본당에는 여러 본당 신부들을 도운 사목위원들이 있습니다. 어떤 신부가 오더라도 성심껏 도움을 드렸기에 어떤 신부에게라도 환영을 받고, 본인이 그만두고 싶어 해도 그만두지 못하는 은총 아닌 은총을 누리는 분들, 이런 분들은 대개 부모와의 관계가 좋았던 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 오는 본당 신부들과 사사건건 갈등을 일으키고 신자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고 내 편, 네 편을 갈라놓는 분들, 본당이 하루도 조용하지 않게 하는 분들은 왜 그런 것일까요? 자신들은 정의롭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본인들의 미성숙함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는 능력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서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점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아가 아닌 문제어른이 되고만 것입니다. 물론 이런 관점은 비단 신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본당 신부들 역시 신자들을 내 편, 네 편으로 갈라놓는다면 같은 관점에서 벗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만 찾으려고 할 때입니다. 신앙생활은 철저하게 자신을 위한 삶입니다. 자기 문제를 보고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삶, 그래서 가톨릭 신앙인들은 ‘수도복을 입지 않은 수도자’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자기 문제를 보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때에는 본당이 자기 문제를 다듬는 수도원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리는 재판정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미사 중에 우리는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구절은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가지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결코 신앙의 성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요. 내적인 성숙은 자기 문제를 보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내 탓이오’ 운동을 하신 것 역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너무 심하게 다른 사람들을 몰아 붙여 나라가 갈라질 듯한 위기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또한 문제 발생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는 내적 탐색과 내적 성찰을 하지 않는 한 안정감을 갖기 어렵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기도하지 않을 때입니다. 시끄럽다고 소문난 본당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 기도하기보다 모여서 서로 헐뜯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헐뜯음은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 하게 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대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기도 중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고, 교회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성당은, 하느님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기에 당연히 주도권 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연스레 그런 성당은 갈등이 심하고 시끄러워지겠지요. 본당이 조용한 분위기를 간직하려면 모두가 성령의 빛 안에서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수도자적인 삶을 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해답임을 말씀드립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1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가좌동 성당 주임)]


[공동체 갈등 상담] 본당이 시끄러운 이유는? (2)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복음적이지 못한 이기적인 행동인가 하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본성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자신에 대한 애정이 더 깊은 것에 대하여 죄의식을 갖거나 자신을 비하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웃 사랑을 강조하신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자기애(自己愛)가 지나칠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도 성장하지 못하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친 경우를 일컬어 ‘자기애적 성격장애’라고 합니다. 이 말의 시작은 그리스의 나르시스 신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반해서 만지려고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본당에 이런 자기애적 성격장애를 가진 이들이 많을 때, 신자 간에 분열이 잦고 조용할 날 없이 시끄럽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자기애적 성격장애에 대하여 말씀드릴까 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지나치게 자부심을 가지거나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데 있습니다. 본당에 가면 터주대감 노릇을 하는 신자들을 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정말 말없이 봉사하고 일하면서 인정받고 사랑받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사사건건이 부딪치고 싸우다가 등을 돌리고 사는 분들도 적지 아니 있습니다. 이분들은 본당신부가 새로 오면 제일 먼저 찾아가서 자기가 본당을 위해 그동안 얼마나 공을 세웠는지 그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기도 합니다. 혹은 자기가 거느리고 다니는 사람을 앞세워서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양 소문을 내도록 합니다. 왜 이렇듯 유아적이고도 미성숙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평소에 성공 권력에 대한 공상에 젖어 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 열등생일수록 성당 안에서 자기 권력을 행사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봉사직인 직분을 자기 권력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새로 오는 본당신부를 자기 권속으로 만들려고 하여서 자기와 좋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식의 반협박 언행을 하는 경우도 발생하곤 합니다.


제가 몇 해 전 새 본당에 부임을 하였는데, 처음가자마자 이런 분을 만났습니다. 주일날 미사가 끝나서 신자분들과 인사를 하는데, 딱 가로막고서서 자신이 저보다 경험과 경력이 많으니 자기 조언을 들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예전에도 그랬다는데, 제가 상대를 안 하고 피하니 결국 다른 성당에 가서 제 욕을 하고 다니더랍니다. 이런 분은 신자 공동체 안에서도 기피대상 1호입니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감탄을 요구하다보니 주위 사람 또한 피곤해져서 가까이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애적 성격장애인 사람이 성당에서 요직을 차지하면 본당신부들은 아주 힘이 듭니다. 사사건건 본당신부와 맞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기가 심어놓은 심복들을 다 빼어버려서 본당신부의 힘을 빼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분들이 많이 있는 본당의 신부나 순한 신자들은 너무나도 자주 상처를 입습니다. 그들이 뱉듯이 하는 말에 상처를 받고 마음의 병을 앓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성격장애를 가진 이들은 주위 사람들의 마음에 쉽게 상처를 입히는 것일까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즉 자기애적 성격장애가 있으면 주위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기의 행복감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심술궂은 어린아이처럼 마음에 들면 헤헤거리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치 쓰레기나 폐품처럼 대하여서 마음에 심한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였다가 느닷없이 평가절하를 하는 등 극과 극을 오가는 병적인 행위를 번복하기도 합니다. 특히 분노 조절이 잘 되지 않아서 주위 사람들을 긴장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지나친 분노를 표출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심각한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마치 폭군처럼 피비린내 나는 적대적 행위를 서슴치 않고 행합니다. 이렇게 폭군적 기질을 발휘하는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을 보고 주위 사람들은 ‘성격이 강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두려워합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늘 우울감이 존재하고 자존감이 낮습니다. 즉 마음에 당당함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항상 주위에서 자기를 보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에 대해 안테나를 세우고 삽니다. 바로 칭찬결핍증 환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기만하면 자신의 공을 늘어놓아서 칭찬을 들으려 구걸을 하는 것이고, 행여 다른 사람이 자기를 비판하면 속이 뒤집어져서 이성을 잃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처럼, 그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위에 가까이 있으면 언제 똥물을 뒤집어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2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가좌동 성당 주임)]


[공동체 갈등 상담] 현대판 바리사이들


예수님과 늘 각을 세우고 대립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한 무리가 바리사이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16,4)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16,6) 이렇게 복음서에서 바리사이가 비판의 대상이 되니, 우리 교회 안에서는 바리사이를 마치 마귀들의 집단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를 무조건 나쁘게 매도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정체성을 가졌던 것이고, 그들의 병적인 콤플렉스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교회가 가진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는 말 그대로 ‘분리된’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학교에서 우열반을 가르듯이 바리사이들은 스스로를 영성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종교적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당시 평신도 영성지도자로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일까요? 그들이 지나치게 율법주의에만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강박적으로 율법에 집착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였고, 법은 보았지만 사람은 보지 못하였기에 사람을 위하여 강생하신 주님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사람을 치유가 필요한 이로 보셨지만, 바리사이들은 사람을 율법을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만 판단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는 바리사이들의 비판에 대하여,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9-13) 하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인간관과는 전혀 다른 인간관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구약율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그 입장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바리사이들처럼 지나치게 율법적으로 사는 이들을 ‘바리사이 콤플렉스’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지금 바리사이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바이러스는 여전히 남아 현대의 신자들까지 감염시키고 있습니다. 자기성찰은 하지 않으면서 눈에 불을 켜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캐는 사람, 말은 하지 않아도 마음 안에 늘 차가운 분노를 가지고 사는 사람, 새 신자들을 마치 자기 수하처럼 거느리고 자신이 영적지도자인양 행세하는 사람, 종교단체가 주관하는 단기간의 연수를 다녀와서 마치 자신이 신학적으로 또 영성적으로 대단한 인물인양 떠드는 사람, 미사 중이든 어떤 때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사람, 성당의 자질구레한 일들에도 좀생이처럼 사사건건 나서는 사람, 본당신부가 자기만 특별히 대우해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리사이 콤플렉스에 감염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이런 사람들이 생기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크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를 편히 하지 못하고 경직된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발달 시기 중에 항문기를 건강하게 보내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릴 때 똥을 비롯한 지저분한 것들을 만지작거리고 노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 결벽증이 심한 부모님으로부터 지나치게 통제받고 야단을 맞으면서 지낸 경우 그 시절의 기억이 병적인 콤플렉스가 되어 어른으로 자라서도 사사건건 사람들에게 잣대를 들이대는 신경증적 환자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인생은 자기 파괴적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무너뜨리면서 자신의 마음도 무너뜨리는 모순된 삶을 삽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문제를 고치려고 하지 않을까요? 이들은 자신이 가진 병적인 문제를 다른 사람들이 알까봐 두려워서 종교적이고 외적인 치장에 엄청나게 공을 들입니다. 남들보다 기도를 배는 더 하던가 특히 단체로 하는 기도모임에서 유별나게 기도의 양을 늘려서 하는 정성을 보이고, 자신의 외적인 치장도 마치 전문 종교인인양 꾸밉니다. 때로 어떤 이들은 고위성직자의 외양을 흉내 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터줏대감처럼 행세하기에 아무도 감히 직언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런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다른 신자들이 자기를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열을 느낍니다. 병적 심리 상태의 하나인 가학성 성격장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외적인 열심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의 암적 존재라고 불리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3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가좌동 성당 주임)]


[공동체 갈등 상담] 종교 사기꾼


어느 성당을 가든지 유난히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지방 교구 초짜 본당 신부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분은 보좌 생활을 하다가 처음 본당 신부로 발령을 받아서 갔는데, 첫날 저녁 느닷없이 웬 신자 세 사람이 예고도 없이 사제관에 들어오더랍니다. 그리고는 다리를 벌리고 앉더니 자기들은 전임 사목위원인데 새로 오신 신부님이 마음에 들어서 찾아왔다며 앞으로 본당의 모든 사목을 자기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더랍니다. 현재 일하고 있는 사목위원도 아니고 또 오라고 청한 적도 없는데 불쑥 찾아와서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것이 불쾌하였지만 모두 연세가 드신 분들이라서 “아, 나중에 같이 이야기를 하지요.” 하고 보냈답니다. 나중에 다른 이들이 해준 말에 따르면 그들은 전임 신부님 속을 엔간히 썩인 사람들로, 본당 신부를 제쳐놓고 자기들끼리 사목을 하려고 한 무뢰한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기들 패거리를 다 데리고 사목회를 나가 버리더니, 새 신부가 오니까 다시 전처럼 하려고 든다는 것이지요.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새 본당 신부가 더 이상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자, 임기가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뒷전에서 욕을 해대고 심지어는 예비 신자들이 세례를 받으면 다시 자기들이 데려가서 재교육을 시키며 자기 사람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이도 있고 교육도 받은 사람들인데 안하무인으로 성당 터줏대감 노릇을 하려 해서 애를 먹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병적인 콤플렉스, 그 중에서도 성전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성전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의 증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비난해도 자신은 살아있는 성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뻔뻔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고,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 모두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성찰이나 회개 같은 신앙적 행위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또 자신들은 모든 도덕률을 초월해서 사는 사람들이기에 규범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면 마치 동네 양아치들처럼 자기 세력을 동원하여 정신적인 압력을 가합니다. 물론 새로 온 본당 신부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본당 신부가 자기들 말을 들으면 졸개처럼 부리려고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세력을 동원하여 심리적·물질적 상처를 주는 파렴치한 행위를 합니다. 이들에게는 자기가 가진 종교가 일종의 방어막 역할을 해주는 셈입니다. 마치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처럼, 종교를 자기치부를 가리는 방어막처럼 사용하면서 그 뒷전에서 벌이는 모든 일들은 마치 신성한 행위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입니다.


이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호감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병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짐짓 겸손한 척하면서 자신이 모든 고상함의 바람직한 모델인양 연기를 합니다. 또 아첨이나 공공연한 존경 행위들을 거부하는 척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거부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인데 면전에서 무시를 당하면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여서 주위 사람들을 당혹케 합니다. 이들이 건강한 성격이 아니라 연극성 성격장애, 히스테리성 성격장애이기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들은 누가 보는 곳에서만 선행을 하고 늘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심리적인 걸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본당에서 한 일들에 대해서는 미주알고주알 자랑을 하고 그런 것들이 본당사에 기록되기를 은근히 바라기도 합니다. 또 성전 안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밖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전혀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종교 사기꾼이지요. 본당에 이런 종교 사기꾼들이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으면 본당 신부들은 물론 마음 약한 신자들은 휘둘림을 당하고 상처입고 그러면서도 심리적인 노예 생활을 하는 고약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병적인 우월감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가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열등감을 가지고 살며, 그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서 우월감을 추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우월감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동기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자기열등감을 인정하지 않고 보상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병적인 우월감이 생겨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림으로써 자기를 높이는 변태적 우월감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면 종교를 자기방어막으로 생각하고 병적인 자기우월감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터주대감 노릇을 하면서 사람들을 자신의 심리적 노예로 만들려 하고,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병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곤 합니다. 또 이들의 내면에는 심한 열등감이 숨어있어서 자기열등감을 건드리는 사람은 상대가 성직자이건 수도자이건 신자이건 상관없이 적개심을 드러내고 심리적 살인행위를 저지르지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교회의 암적 존재라 하고, 오염의 근원인 종교 사기꾼들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이 여린 많은 이들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양의 탈을 쓴 늑대’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4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가좌동 성당 주임)]


[공동체 갈등 상담] 투사와 그 해결기법 침묵의 영성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들은 대개 인간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가끔 듣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같은 성당에 아주 싫은 자매가 있는데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괴롭습니다. 제가 믿음이 약해서일까요, 아니면 속이 좁아서일까요?”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성당을 비롯한 종교 공동체 안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다시 물음을 던집니다. “자매님이 싫어하는 그 자매를 자매님 혼자서만 싫어하나요? 아니면 다른 분들도 다 싫어하나요?” 이 물음에 대하여 “저만 혼자 싫어해요.” 한다면 그것은 본인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싫어한다면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겠지요.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 문제인 경우가 아니라 나 혼자만 상대방을 싫어해서 심리적 갈등이 생긴 경우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공동체든 대개 갈등의 원인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방어기제’라는 것을 가지고 삽니다. 자기 속을 다 보이고 싶지 않아서 방어막처럼 사용하는 심리기제를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어기제는 ‘투사’입니다. 투사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때 마치 그것이 상대방의 것인 양 책임 소재를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소위 ‘내 탓이오’가 아니라 ‘네 탓이오’를 하는 것이지요. 투사의 대상은 개인의 생각이나 가치관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남의 생각처럼 여기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책임보다 남의 책임으로 돌렸을 때 심리적으로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안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을 남에게 돌림으로써 자기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끼면서 편안해지기 때문에 투사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험담할 때에 무의식적으로 도덕적 우월감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투사가 주는 부산물입니다. 그래서 험담과 같은 투사 행위는 자신의 억압된 욕구를 충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공격성도 해소해주기에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치기가 어렵지요.


어떤 사람들이 투사와 같은 미성숙한 행위를 할까요? 자기 문제를 마주하기 힘들어하고 자기 자신안의 어두움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 즉 비현실적이고 회피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대개 투사라는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잘 사용합니다. 간혹 지나치게 영적인 것, 신비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자기 안을 말끔하게 정리하려는 분들이 있는데 대개 이런 분들이 투사가 심해서 자기 안의 어두움이 마치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양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안의 악한 성향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혹은 어떤 악한 존재가 따로 존재하는 양 행동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신문 사회면에 난 범죄기사를 보면서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것, 또 심하게 일어나는 자기 안의 화를 분노마귀가 들어와서 그렇다는 둥 둘러대면서 외부 대상이 문제인 듯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보다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 편하기에 외부로 투사를 심하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런 유아적이고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자주 사용하다 보면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까지도 성장이 아닌 퇴행의 길로 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투사는 다른 사람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소통을 어렵게 하여 공동체 안에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병적인 투사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교회가 미사 때마다 기도하는 “내 탓이오”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내 탓이오’란 모든 문제의 책임을 지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불편한 감정이 발생하였을 때 그 감정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전가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찾으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내 안에서 문제를 찾으려면 침묵의 영성을 수련하여야 합니다. 침묵은 영성 생활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신학교나 수도원에서는 침묵에 대하여 수없이 강조합니다. 신학교의 경우 낮에는 소침묵, 밤에는 대침묵을 지키게 합니다(그래서 신부들이 강론을 잘 못한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그런데 이런 외적인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자기 안의 문제를 들여다보기 위함입니다. 만약 침묵이 그저 말하지 않는 피상적 행위로만 끝난다면 오히려 말을 하고 사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기 안의 문제만을 보려는 노력을 하게 되면 외적으로는 조용하나 내적으로는 전쟁터의 장수와 같은 심리적 상태가 됩니다. 스님들이 말하는 묵언수행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 상태를 가진 분들은 자기 안의 문제를 보느라 너무 바빠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거나 다른 사람들의 결점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구성원들이 침묵 안에서 자기 문제를 보고 다듬느라 바삐 산다면 자연히 그 공동체는 조용하지만 활력이 넘치는 수도원과 같은 곳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신앙인들이 이렇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수도원 같은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수도자처럼 살려고 하면 무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루 종일 침묵을 지킬 일은 아니고, 미사나 피정 같이 환경적 조건이 주어진 상태에서는 침묵을 지키고 평소에는 즐거운 담소를 나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5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가좌동 성당)]


[공동체 갈등 상담] 공간의 영성


제가 지방에서 강의를 할 때 “사람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어떤 분이 “눈물의 씨앗입니다!”라고 답해서 좌중이 폭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오랜 철학적 물음입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답을 내어놓았고 아직도 그 답이 나오고 있는 현재진행형 물음입니다. 영성심리에서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존재’라고 합니다. 씨줄날줄의 교차점처럼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지점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몇 시에 어디서 만날까’라는 말들을 하는 것이고,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얼마나 자각하고 사는지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짓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공간보다 시간에 더 많이 신경을 씁니다. ‘시간은 화살과 같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을 아껴 써라.’ 등등의 말이 있지요. 장례미사 강론에서 자주 언급하는 주제 역시 시간입니다. 성경에서도 시간의 중요함을 여러 곳에서 전하고 있고, 수도원에서는 아예 시간 전례라는 기도를 만들어서 시간의 중요성을 마음에 각인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공간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들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간 인식은 일상생활이나 영성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공간에 대하여 가장 절실한 느낌을 가질 때는 언제일까요? 만원 버스나 사람이 꽉 들어찬 지하철을 탔을 때, 셋방살이 단칸방에서 여러 식구가 자야할 때, 만석인 비행기 이코노미 좌석에서 꼼짝도 못하고 몇 시간을 가야할 때, 우리는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낍니다. 이렇듯 공간이 중요하기에, 사람들은 돈을 벌기만 하면 더 넓은 집을 사고 더 큰 차를 삽니다.


그렇지만 공간의 영성은 이런 본능적 욕구와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좁은 공간 안에 두어야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살펴봅시다. 일각에서는 중세 가톨릭이 유럽 중세 암흑기를 초래한 장본인이라고 폄하합니다. 그러나 중세 유럽의 학문은 가톨릭 수도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수도원에서 배출되었고, 그들이 만든 대학들이 중세 유럽 지성인들을 산출하는 사회적 자궁 역할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수도원에서 이렇게 걸출한 인물들이 나왔을까요? 수도자들은 자신을 좁은 공간 안에 가두어놓고 스스로를 단련하고 훈련하는 시간을 평생토록 가졌기 때문입니다.


중세가 아닌 현대에 와서도 성공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수도승처럼 살았다.”입니다. 불가의 성철스님이 10년 수행을 하실 때 철조망을 치신 것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당신 자신이 스스로를 좁은 공간 안에 가두고 수도에 정진하기 위한 방책으로 그리하기도 하신 것입니다. 가수 박진영 씨가 가수지망생들에게 “나는 지금도 고3수험생처럼 산다.”라고 한 말 역시, 성공을 얻으려면 수도승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프랑스에는 몽생미셸이라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넓은 갯벌에 생뚱맞게 솟아오른 바위산 위에 세워진 수도원.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이곳은 처음에는 수도원이었다가 한때 감옥으로 쓰였고, 지금은 다시 수도원으로 사용하는 건물입니다. 이 수도원 안에서 돌 창문 틈새를 내다보면 넓은 갯벌이 보이는데, ‘창을 내다보는 사람의 마음은 전혀 달랐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인생의 아이러니가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창을 통해 탈출하고 싶은 답답함을 느꼈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창을 통해 내적 자유와 감사를 느꼈겠지요. 이런 상반된 장면이 연출된 곳이 바로 몽생미셸 수도원입니다.


우리네 인생이 꼭 이 수도원과 비슷합니다. 때로는 감옥 같고 때로는 수도원 같은 것이 사람의 인생입니다. 그런 우리 인생에서 영성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자유롭게 살고픈 욕구를 절제하고 스스로를 좁은 공간에 가두고 집중하는 역설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가 본당 사목을 25년간 하면서 본당마다 조용한 분들이 있는가 하면 늘 시끄러운 소문의 진원이 되는 분들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대개 조용한 분들은 자신을 기도방에 가두고 스스로를 다듬는 분들이고, 시끄러운 분들은 마음이 감옥이라고 답답해하면서 정신 사납게 사는 분들이더군요. 그러니 성공을 못하고 늘 그런 인생을 삽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6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가좌동 성당)]


[공동체 갈등 상담] 갈등해소를 위한 주님의 죽음과 부활 묵상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간혹 지나치게 열심한 신자들은 주님과 같은 고통을 느끼겠다고 채찍으로 자기 몸을 때리기도 하고 십자가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영화배우 멜 깁슨이 제작한 ‘그리스도의 수난(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주님 수난의 처절함에 대해 진저리칠 정도로 마음 아파하고 그런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 수난시기의 묵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우리가 놓치는 것들도 적지 아니합니다. 초점을 주님의 고통에만 두어 그분의 죽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요. 주님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강렬한 메시지를 줍니다. 행복한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나의 죽음에 대하여 많은 이가 아쉬워하고 그리워한다면 가장 행복한 죽음이겠지요. 그렇게 본다면 주님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으신 분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보통 애도기간이 6개월 정도라고 합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갑니다. 그런데 주님의 죽음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애도합니다. 6개월이 아니라 무려 2,000년이 지났는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세월이 지나면서 더 그 이름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가는 분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이것을 묵상하면 주님의 죽음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이라면 이러한 관점에서 자신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당마다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옳네, 네가 그르네 하면서 속상해하기도 합니다. 마치 그런 일들이 아주 중요한 듯이...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죽고 난 후에 나를 기억해주고 안타까워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는가이겠지요. 본당에서 아무리 큰소리를 내고 사람들을 휘어잡았어도, 죽고 난 후에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다면 그 죽음은 가장 불행한 죽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안팎으로 시끄러울 때일수록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자리 잡기를 다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만, 더 중요한 점은 내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의 부활을 반겨줄 것인가입니다. 주님께서 은총을 주셔서 부활한다 하더라도 갈 곳이 없으면 소위 부활노숙자가 되고 말겠지요.


어떤 집에 아주 성격이 고약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술만 먹으면 주정을 부리고 살림을 때려 부수어서 아내가 참다못해 남편을 데려가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여전하여서 주님께 따졌더니 남편의 기도가 더 세서 안 된다고 말씀하셨답니다. 화가 난 아내가 기도의 양을 두 배로 늘렸습니다. 그리고 그 보람 때문인지 남편이 죽었습니다. 아내는 행여 남편이 살아날세라 관을 대못으로 촘촘히 박고 매장을 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사흘 만에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내를 다시 괴롭혔습니다. 이번에는 아내가 기도를 열 배를 더 해서 남편을 보내고는 관을 아예 거꾸로 땅바닥에 심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남편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기가 막힌 아내가 주님께 어찌된 일이냐고 따지자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도 네 남편을 한 방에 보내고 싶은데 그 녀석이 성모님과 계약을 맺었느니라. 자기가 성모성당을 지어드릴 터이니 세 번 살아나게 해달라고 말이다. 이제 한 번 더 남았느니라.” 그러자 아내가 울부짖었습니다. “안 됩니다, 주님. 이제 제가 맞아 죽을 차례입니다.” 그러자 고민하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알았다. 성모님께서 저기서 무슨 소리를 하나 엿듣고 계시니 내가 메모를 하나 주마.” 하고는 메모를 주시는데 거기에는 ‘092’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 내용을 아무리 보아도 알 수가 없어서 머리 아픈 김에 이제 말문이 트인 손주에게 ‘옛다, 너나 봐라.’ 하고 주었는데 손주 녀석이 혀 짧은 소리로 ‘공구리 공구리’ 하더랍니다. ‘아, 콘크리트를 치라는 말이구나!’ 하고는 세 번째로 남편이 죽자 콘크리트를 쳐서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하심을 죽자고 믿고,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아무리 깊은 믿음을 가져도,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은총으로 부활한다고 치더라도 내가 살아나는 것을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면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처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가족만이라도, 적어도 내가 다니는 성당 식구들만이라도 나의 죽음을 그리워하고 다시 살아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면 성공한 인생이고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처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고 주님의 부활처럼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는 부활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위해 기도해줄 사람들을 가능한 한 많이 모아야 합니다. 기도를 해주건 밥을 사건 이런 저런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서 그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본당에서 적지 않은 분들이 자신이 마치 본당의 주인인양 행세하면서 신자들뿐만 아니라 신부나 수도자에게까지 심리적 행패를 부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개 성격적인 결함이 심한 분들인데, 이런 분들은 내가 죽고 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어줄까, 내가 부활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겨줄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콘크리트 친 무덤 안에서 생매장 부활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7-8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가좌동 성당)]


[공동체 갈등 상담] 꼴통들이 문제야


꼴통이란, 다른 사람의 말은 들은 척도 안하는 안하무인에다 고집불통인 사람들을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흔히 정치계를 비판하며 쓰기도 하지만, 사실 꼴통들이 가장 많은 곳은 종교계입니다. 우리 천주교회의 경우 꼴통들이 일으킨 사건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욕을 듣는 일들이 있습니다. 조금 이상한 꿈을 꾼 것도 마귀의 자식이라서 그렇다며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한 마녀재판, 십자가를 들고 전쟁을 치르면서 약탈을 자행하였던 십자군 전쟁, 무지와 무식의 극치를 보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재판 등등 우리 교회 안의 꼴통들이 저지른 일들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우리 교회는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들은 멀쩡할까요? 천만의 말씀, 우리 교회 이상으로 만만치 않은 일들이 터지고 있음을 신문지상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교회를 팔아먹는 목사들이나 수억 원대 노름판을 벌인 중들이 꼴통이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들이 물의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나 꼴통은 아니고 찌질이라고 합니다. 꼴통과 찌질이는 수준이 다릅니다. 찌질이는 단순히 돈 욕심에 팔린 자들, 머리가 빈 사람들이지만 꼴통은 자기신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기신념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신념이 필요합니다. 신념이 없으면 줏대가 없고, 신념이 없으면 앞날에 대한 희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이 지나칠 경우에는 병적인 신념으로 변질이 되어서 외곬수니 꼴통이니 하는 말들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성심리에서는 꼴통의 특징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변화에 직면했을 때 거부한다.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개의치 않고 특정한 관점을 유지한다. 그래서 실제를 무시하고 환상에 빠져든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오해를 일으킨다.’ 한마디로, 경직된 신념체계를 가지고 사는 것이 꼴통들의 특징입니다.


어떤 본당에 아주 심한 꼴통 신부가 있었습니다. 이 신부는 성격이 괴팍한데다 옛날 교리에 너무 집착하여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지 한참 되었는데도 여전히 옛날 방식의 신앙생활을 고수하면서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려는 신부나 신자들을 믿음이 약한 것들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고집쟁이였습니다.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볼 때 기도문을 조금만 틀려도 법석을 떨고, 미사 때 성가대나 해설자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야단, 영성체 때 왼손 오른손 구분 못한다고 야단을 해대니 마음에 상처를 입은 신자들이 발길을 끊어서 신자수가 자꾸 줄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처럼 훌륭한 신부를 몰라본다고 버럭버럭 거품을 물고 화를 내다가 죽어서 천당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천당문 앞에 있던 베드로 사도가 그 신부를 보더니 득달갈이 달려와서는 “오느라 고생했는데 미안하지만 천당에는 못 들어온다.”라고 말했습니다. 신부가 왜냐고 물으니 “네가 천당에 온다고 하니까 천당 주민들이 너한테 잔소리 들으면서 시달리고 사느니 차라리 연옥에 가서 사는 게 낫겠다고 집단 이주 신청을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하느님께서 너만 천당에 못 들어오게 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다시 신부가 “그럼 저는 어디서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묻자 베드로 사도가 어떤 조그마한 숙소로 데려갔는데, 문패를 보니 골방이라고 적혀 있고 방 안에는 수염을 기르고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골방은 뭐고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골방은 너 같은 꼴통들이 사는 방이란 뜻이고, 저 사람은 유대교 랍비인데 너만큼 성질이 꼴사나워서 자기 민족과 종교가 가장 우월하다고 자랑질을 해대니 천당 주민들한테 미움을 받아 쫓겨난 놈이다.”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골방에서는 신부와 랍비가 서로 자랑 끝에 싸움질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가진 사고방식은 물처럼 융통성이 있고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는 비단 일반적 사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치게 꽉 막힌 사람은 자기는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 속을 뒤집어놓기 일쑤여서 결국 왕따를 자초합니다. 또 경직된 신념을 가진 꼴통들은 그 말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강한 폭풍우가 지나고 나면 잡초들은 살아남는데, 천년만년 끄떡없을 것 같던 거목들은 부러져 내동댕이쳐지듯 그런 신세가 됩니다. 본당마다 소위 토박이 혹은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 중에 성실하고 마음이 열린 분들은 새로 오는 신자들에게 안내인 혹은 쉼터 같은 역할을 해서 성당을 편하고 기분 좋은 곳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간혹 꼴통 같은 신자들은 자기들이 토박이랍시고 소위 유세를 떠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닫힌 마음을 가진 분들이 나대는 본당은 신자들 간에 분열이 적지 않고 본당 신부들도 임기가 끝날 때까지 속이 썩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 때문에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몰아낸다.’는 경제 이론인 그레샴의 법칙이 종교계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꼴통짓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9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가좌동 성당)]


[공동체 갈등 상담] 화 내는 사람들이 문제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성격이 안 좋다’, ‘성질이 더럽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성질을 부리는 사람들이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미국 심리학자인 레드포드와 버지니아 윌리암스는 <화가 부르는 것>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적대적 신드롬에 놓인 사람들은 강도 높은 예민한 자기방어라는 인식하에 다른 사람들에게 공격적으로 행동하려는 충동을 자주 느끼고, 언어적 · 실제적 태도에 있어 저돌적인 행동을 하고, 그러한 행동이 적대감을 강화시키고 충동에 대한 자제력을 잃게 하는 악순환으로 연결되며, 결국 대처능력을 상실하고 다른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켜 스스로 소외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불이 모든 것을 태우듯이 지속적인 분노는 자기 인생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사에 열을 내고 자주 화를 내는 사람들은 자기 분노를 잘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분노 조절을 하는 첫 번째 방법은 세상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대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잘못되면 짜증부터 냅니다. 심지어 하느님께 삿대질을 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지금 기도를 바치니 세상사가 다 내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빌기 때문입니다. 청개구리 심보로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자기 뜻대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께 화를 내거나 심지어 냉담을 하기도 합니다. 가끔 행복지수가 낮은 나라와 높은 나라를 비교하는 기사가 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더 높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알고 마음을 내려놓은 가난한 사람들은 그만큼 스트레스를 덜 받는데 반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지가 강한 반면 자의식도 강해서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안달복달 짜증을 내기 때문에 행복지수가 낮은 것입니다. 따라서 일이 안 풀리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일수록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분께 의탁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적개심을 줄이는 길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유치하고 이기적인 자기 마음을 달래는 것입니다. 어른이건 아이이건 누구나 다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선물 앞에 장사없다’는 말처럼 아무리 원수 같은 자일지라도 나한테 잘해준다면 쌓였던 앙금이 순식간에 풀리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죽도록 미울 때에는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준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야야 합니다. 혹은 앞으로 받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미리 생각해보아도 한결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어떤 본당 신부가 신자들이 속을 썩여도 늘 싱글벙글 하고 다녀서 비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화가 날 때마다 영명축일에 받은 선물을 생각하고 그래도 화가 나거든 내년에 받을 선물까지 미리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고 하더랍니다. 한번 따라 해보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 방법은 미국 뇌 과학자인 질 볼티 테일러 박사의 방법입니다. 테일러 박사의 실험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 안에 분노가 일어나서 몸 안에서 맴돌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분 30초, 즉 90초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나는 화가 나면 하루 종일 가는데 무슨 소리냐’고 따질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한번 화가 나면 몇 분이 아니라 몇 시간 동안 때로는 며칠 동안 화가 안 풀어져서 힘들어하곤 합니다. 그러나 90초 이상 지속되는 화는 본래 화가 났던 주제가 아니라 연이어 떠오른 다른 생각들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즉 무엇인가 화가 나는 것을 생각하다보면 연이어 다른 것들이 줄줄이 떠올라서 90 곱하기 90 하는 식으로 화내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가 났을 때에는 딱 90초만 시간을 보내면 웬만한 화는 사라진다고 합니다.


네 번째 방법은 화가 났을 때 음악이나 그림 혹은 사진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울 때 엄마가 아이 눈 앞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무엇인가를 보여주면 아이들은 울음을 그칩니다. 마찬가지로 어른들 역시 마음은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화가 난 자기 마음 앞에 보기 좋고 듣기 좋은 무엇인가를 갖다 놓아주면 순식간에 마음이 돌아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영감님은 화가 나면 금고를 열어본다고 합니다. 금고 안에 들어있는 돈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아주 편해진다는 것이지요. 혹 돈을 좋아하는 분들은 한번 따라 해볼 만하겠네요.


다섯 번째 방법은 평소에 즐겁게 노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대개 적개심이 많은 분들은 잘 놀지를 못합니다. 적개심이 의심을 만들고 사람을 멀리하게 하기 때문인데 그럴수록 놀이판에 자주 끼어야 합니다. 물론 심한 돈 놀이판은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낄낄거리고 놀 수 있는 그런 놀이판에 함께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길들이기 마련인지라 재미있는 놀이를 계속해서 하다보면 적개심의 길이 아니라 재미의 길이 만들어져서 화통한 마음을 만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 방법은 다른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못된 마음을 억누르고 모든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특히 내 마음을 힘들게 한 사람들을 위해, 마음이 가지 않더라도 주님께 그들을 봉헌하고 잘 이끌어 주십사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이타적인 기도 생활이 우리에게 평안한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채근담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거센 바람 성난 비에는 새들도 조심하고, 갠 날씨와 따뜻한 바람에는 초목도 기뻐한다. 가히 알지로다. 천지에는 하루도 온화한 기운이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의 마음에는 하루도 기쁜 정신이 없어서는 안 된다.’ 내가 화를 내면 새들도 개들도 사람들도 다 떠나서 외로운 처지가 되고, 내 마음이 화창하면 새도 개도 사람들도 다 나에게로 오기 마련입니다. 노년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눈도 제대로 못 감고 한을 품은 채 이 세상을 하직하느냐 아니면 문턱이 닳도록 친구들이 드나들어서 외로울 시간 없이 사느냐 하는 선택은 우리가 마음 안의 적개심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10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가좌동 성당)]


[공동체 갈등 상담] 불편하게 살아야


본당이 시끄러운 이유 중 하나는 지나치게 편안함을 추구하는 신자들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편안함은 인간의 욕구 중에서 기본적이고도 간절한 욕구이지요. 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는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총각이 장가가는 이유는 편하게 밥상 받기 위해서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두는 이유도 부엌살림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하지요. 본당 주임신부가 보좌신부를 두고 싶어 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듯합니다. 이처럼 편안하게 살고픈 욕구가 강하다보니 편하게 사느냐 불편하게 사느냐가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오면 친정어머니가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손이라고 합니다. 딸 손가락이 살쪄서 반지가 안 들어갈 정도면 부잣집 맏며느리라고 좋아하지만, 손바닥이 갈라지고 피부가 거칠면 시집 잘못 가서 고생한다고 불행하다고 모녀가 붙들고 한바탕 웁니다. 이처럼 하루 종일 일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은 불편하게 살기에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벌을 받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나온 것을 두고 저주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마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제주도 해녀들의 꿈의 섬인 이어도 같은 곳을 바라고, 천국은 아무 일도 안하고 호의호식하는 곳이라고 상상합니다. 또 현대 산업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경제 강국들을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나라의 산업이 편안함을 추구하고, 사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도구들을 갖추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산업이 각광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늘 편안한 것이 좋은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모든 영성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왜냐하면 편안한 삶에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몸이 편안하려고 꼼짝도 안하고 기계가 다 해주면, 당연히 살이 찌게 되고 온갖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심리적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은 심리적인 비만을 불러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는 데만 집착을 하면 융합이라는 방어기제가 생겨서, 안보면 죽고 못 살 것처럼 굴지만 서로의 영역이 지켜지지 않는, 즉 내 생각이 네 생각이고 네 생각이 내 생각이라는 유치한 관계가 형성되고 배타적인 공동체가 만들어지며 심리적 퇴행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쓸데없는 소문이나 만들어내는 삼류집단이 될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약간은 불편하게 살아야 합니다. 몸은 불편하게 써야 건강해집니다. 수도원에서 장수하는 분들은 대부분 하루 종일 무엇인가 꼬물거리면서 몸을 사용하신답니다. 당뇨로 고생하던 선배 신부님이 핸드폰을 쓰지 않고 굳이 유선전화를 사용하는 이유가, 불편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건강에 이롭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 건강 역시 그렇습니다. 가끔은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도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가져야 심리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는 밥 먹는 자리이건 혹은 기도하는 자리이건 자기 마음에 드는 곳에 앉지 못하고 매번 지정해주는 자리에 앉아서 불편함을 견디는 훈련을 합니다.


산에 오르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뿌리가 깊고 굵은 나무들은 물도 없고 흙도 없는 바위틈바구니에서 자란 것들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뿌리를 길고 굵게 뻗었기 때문입니다. 사람 역시 나무와 유사합니다. 불편한 환경과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은 그 마음의 뿌리가 깊고 굵습니다. 그러나 순탄하고 편안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뿌리가 가늘고 얇아서 작은 일에도 쉽사리 흔들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냅니다. 결국 본당이 시끄러운 것은 ‘불편함의 영성’이 얕은 분들이 많아서입니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떠들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본당 신부나 수도자 또는 다른 신자들이 자기 영역을 조금이라도 바꾸려고 하면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분들은 신경쇠약일 가능성도 높으니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11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공동체 갈등 상담] 시끄러운 본당 시끄러운 마음


사도 바오로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왜 이렇게 간곡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에페소 신자들이 그만큼 말도 많고 서로 헐뜯으면서 살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비단 에페소 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동안 본당 사목을 하면서 느낀 점은 아주 시끄러운 본당이 있는가 하면 덜 시끄러운 본당이 있을지언정 조용한 본당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첫째, 우울한 신자들이 많을 때 그렇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고 사람은 누구나 장점만큼이나 결점과 단점을 가지고 삽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은 일종의 착시 현상 즉 상대방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장점이 너무나 커보여서 단점이나 결점은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마음이 병들었거나 우울한 사람들은 그런 착각이나 환상에 빠지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단점을 크게 보고 적나라하게 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늘 속이 편치 않고, 그 상태에서 주저리주저리 말하다보니 좋지 않은 소문의 진원지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본당이 조용해지려면 우울한 신자들이 심리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둘째, 내면의 수다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리학자인 삭티 거웨인은 “우리는 거의 한순간도 쉬지 않고 마음속으로 내면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스스로에게 분주히 말을 걸면서 감정은 물론 일상적 사건들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내면의 수다가 즐거운 것이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않아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 안에서 부정적인 수다를 떨어대는 존재를 일컬어 ‘내면의 투덜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내면의 투덜이’는 몇 가지 특징을 보이는데, 우선 우리가 과거에 연연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성당이 오래되고 유동인구가 별로 없는 지역의 성당에 가보면 처음에는 서로 정이 깊다는 착각이 듭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매여서 눈치 보며 산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사람들끼리 모여서 칭찬은커녕 은근히 헐뜯기 일쑤에, 그것도 지금의 문제가 아니라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하거나 혹은 집안 족보까지 들먹입니다. 그래서 잡다한 소문이 성당 안에서 끊임없이 퍼집니다. 이런 현상이 바로 내면의 투덜이가 만든 부작용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아주 고집이 센데다 우리가 약해진 순간에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의욕 대신에 분노와 슬픔에 사로잡히게 하거나 기분을 망가뜨리거나 늘 불평을 늘어놓게 합니다. 이런 이유로 공동체가 늘 갈등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면의 투덜이’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예전에는 무조건 때려잡으려고 하였습니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눈을,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손을 없애버리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생긴 심리적 부작용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예민해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독기를 품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심리학자인 호르스트 코넨은 우선 내면의 투덜이가 우리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식을 벗어난 자학적 행위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도록 합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듯이 ‘투덜이’, ‘우울이’, ‘삐짐이’ 등으로 그 성격에 따라 다르게 붙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굴을 들이밀면서 다른 사람 잘못을 들추어내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때에는 ‘그렇게 해서 얻을게 뭐냐’ 등의 말로 설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말을 듣지 않으면 으름장을 놓아야 합니다. ‘조용히 해라! 나 건드리지 마라!’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그만!!”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나가!!”하고 야단을 쳐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거칠게 다루거나 억지로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 자아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부모 속을 썩이는 아이처럼 평생 데리고 살아야할 내 안의 문제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아이가 너무나 싫고 미울 때에는 왜 그 문제아가 나에게 붙어있는지 그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 안에 내면의 투덜이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선 겸손하기 어려울 것이고, 영신수련을 할 기회가 없어질 것이고, 부모님 속 썩인 죄에 대한 보속의 기회가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불편한 대로 데리고 살아야겠지요.


지난 1년간 본당이 시끄러운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결론은 하나입니다. ‘내 탓이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생전에 ‘내 탓이오’ 운동을 장려하고 확산시키려 무척 노력하셨습니다. 교회건 사회건 사람들이 지나치게 남의 탓을 하는 것이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와해시킬 위험성이 있음을 아시고 예방책이자 치유책으로 ‘내 탓이오’ 운동을 벌이셨지요. 이 운동은 갈등이 심하고 시끄러운 본당을 화목하고 조용한 본당으로 만들기 위한,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우리가 해야 할 영신수련 방법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입니다.


[길잡이, 2012년 12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