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


박성대(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 이번 달부터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대구대교구 2대리구장 박성대(요한) 주교대리 신부님의 글을 연재해드립니다. 현재 본당 소공동체를 하고 계시는 분들과 소공동체 모임을 갖고자 하시는 분들께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註)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루카 13,34-35)


1. 소공동체가 안 된다?


몇 년 전, 대구대교구에서 소공동체 대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마침 서울대교구 정월기 신부님께서 소공동체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 “‘소공동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뒷좌석에 계신 어느 신부님께서 “안 된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참가자들 모두가 일시에 큰 소리로 웃은 기억이 있다. 사실 맞는 대답이다. 소공동체는 잘 안 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에 소공동체가 도입된 지 20년이 되었고 대구대교구에서는 제1차 교구 시노드의 결론으로 소공동체를 도입하고, 본당의 모든 조직도 소공동체 정신에 따라 개편하기까지 하면서 10년을 거쳐 왔지만 소공동체 사목을 하는 본당은 거의 없다.

어느날 교구장이신 조환길 대주교님께서도 물으셨다. “왜 대구대교구에서 소공동체 확산이 안 됩니까?” 이 질문은 대주교님 혼자만의 질문이 아니다. 교구 대부분의 신부님들이나 신자들의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지금 대구대교구에서는 소공동체 사목이 안 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되지도 않는 소공동체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소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며 포기를 권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렇다면 소공동체는 과연 미래 교회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이쯤에서 소공동체 사목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가? 과연 소공동체 사목은 실현 불가능한 것인가? 왜 그럴까?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공동체가 안 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교회가 소공동체를 받아들이기에 매우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공동체가 안 되고 어려운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소공동체가 잘 안 되는 현실을 보면서 먼저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을 소개하고 싶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루카 13,34-35)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지만 그들은 그 복음을 마다하였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 구세주이시며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이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알아볼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편협한 율법주의에 젖어 있고 전통과 관습에 묶여있고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라고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경직되어 있고, 귀와 눈이 멀어져 있었다. 그로 인해 결국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분을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죄를 짓게 된 것이다. 구약시대에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이나 특전에 연연해 한 나머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에 눈을 뜨지 못한 것이다. 과거의 전통만을 고집한 나머지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당신이 한탄하시고 우신 예루살렘 성전에 제일 먼저 들어 가셔서 평소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분노를 터뜨리시고 예수님답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난폭한 모습을 보이시며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지금의 교회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으려고 하지 않고 자꾸만 헌 부대에 담으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마르 2,22)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


1) 교회가 정체성(正體性)을 잃었다.


소공동체가 잘 안 되는 그 첫 번째 이유로 교회가 정체성(正體性)을 잃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정체성을 잃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졌다는 말이다. 이 말은 ‘말씀중심’의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심하게 말하면 말씀을 잃어버렸다.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지면 예수님과 멀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교회가 정체성을 잃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즉 교회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모르게 된다. 또한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맡기신 중요한 사명인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게 된다. 그러면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탄의 대상이 되고 걱정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요즈음 이런 말이 들리는지도 모른다. “요즈음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너무나 부끄러운 말이고 충격적인 말이다.


2) 교회가 성사성(聖事性)을 잃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가 성사성(聖事性)을 잃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정체성을 잃게 되면 자동적으로 성사성을 잃게 된다. 교회는 하느님의 성사이다. 하느님의 가장 큰 특징이며 신비는 다름 아닌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공동체’를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외톨박이가 아니라 가족 공동체이다. 그러나 공동체이신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이 ‘나 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교회는 그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자기 집에 다른 사람들이 오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 그래서 방문을 모두 닫아 걸고 살고 있다. 동시에 마음의 문까지 닫아버렸다. 아무도 그 집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심지어는 예수님마저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3) 교회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소공동체의 영성을 거부하거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심각한 위암과 같은 위장병에 걸린 사람이 밥을 먹는데 그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심각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 몸의 병은 생각하지도 않고 음식에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루 빨리 병든 몸을 고쳐야 한다. 필요하면 수술도 해야 한다.


이런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한 프로그램이 바로 소공동체이다. 그런데 많은 사목자들과 신자들이 기존의 신심행위에 발목이 잡혀 탈출을 못하고 있거나 과거의 생각이 바뀌지 않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목자들과 신자들이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생활을 하던 이집트에 머물고 있거나, 광야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절대로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역주행은 자살행위와 같다. 아직도 많은 사목자들과 신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상태에 머물러 과거의 안일과 관습에 묶여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하루 빨리 이집트를 탈출해야 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의 모습에서 과감한 탈출을 해야 한다.


[월간빛, 2012년 10월호]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


박성대(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1)


2. “교회가 침몰하고 있다!”


“교회가 침몰하고 있다!” 이 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가 왜 공의회를 소집했는가를 묻는 많은 주교들의 물음에 대답한 말이다. 이 말은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 “교회가 망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지금도 떠나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의 위기, 신앙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이유는 바로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기 위함이다. “왜 소공동체인가?”를 묻는 질문은 “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는가?”를 묻는 질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소공동체를 하는 이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배우고 살자는 말이며 그것은 곧 ‘복음을 살자’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새롭게 등장한 ‘복음화’ 내지 ‘새로운 복음화’를 이루기 위함이다.


소공동체 교육을 청하는 어느 주임신부님께 “왜 이렇게 어려운 소공동체를 하려고 합니까? 틀림없이 기존 신심단체들, 특히 레지오 마리애의 반발과 저항때문에 어려울 텐데”라고 하였더니 “본당을 살리기 위함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기 위함이었듯이 소공동체도 바로 생기를 잃어가고 역동성이 떨어져 미래와 비전이 보이지 않고 죽어가는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며 미래 교회의 대안이다. 소공동체의 목적은 소공동체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복음화하고 교회를 복음화하여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고 무슨 이유로 교회에 생기가 없고 교회가 역동성을 잃어가고 교회에 미래와 비전이 보이지 않아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를 외면하고 교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는가?


작고하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하신 말씀을 소개하고자 한다. “쇄신은 실로 공의회의 제1차적, 또 그 가장 간절한 소망이었다. 공의회의 모든 토의와 분위기, 여기서 나온 모든 교령은 ‘쇄신’이라는 ‘라이트 모티브’에 의해 낙인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 공의회는 왜 이렇듯이 교회 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했는가? 또한 교회는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에 이같이 쇄신을 강조하게 되었는가?”(사목 339호, 2007년 4월호 249쪽)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상


김수환 추기경께서 지적하신 쇄신되어야 할 과거 교회, 즉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 즉 트리엔트 시대의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를 아래와 같이 지적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위해서나 세계를 위해서나 분명히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공의회를 기점으로 하나의 새 세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또한 이를 종점으로 교회사상 한 특징적인 세대가 그 막을 내렸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트리엔트 시대의 종식이다. 환언하면 16세기의 종교 개혁 이래 오늘날에 이르는 40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에 걸쳐 교회 생활과 양상을 결정적으로 지배한 트리엔트 공의회 시대가 종결된 것이다.”(사목 339호 249쪽) 그렇다면 종결되고 쇄신되어야 할 트리엔트 시대의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였던가?


① 성직자 중심의 교회


16세기의 교회는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혼란과 교회 분열이라는 크나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런 나머지 교회는 엄률과 엄단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과 같은 폐단을 낳게 되었다.


트리엔트 시대의 교회는 위계제도(Structura hierarchica)를 주장하고, 동시에 교회가 완전한 사회(?)라는 자기도취와 착각 속에 교회의 가견적 사회성을 강조함으로써 가톨릭 교회관이 오랫동안 ‘위계제도 중심의 교회’, ‘제도 중심의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회의 가견적 사회성을 지나치게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신비(Mysterium)를 가려 버리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동시에 교회를 군주정체와 다름없는 봉건적 신분 사회로 전락시켜 버리는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으며 아직도 그 꿈과 도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슬픈 현실을 보고 있다. 그 결과로 성직자들은 군주사회의 군주(?)가 되어 버렸고 평신도 사이에 격심한 신분적 차별이 생기면서 평신도가 교회에 속하기는 하되, 그들의 위치는 미성년의 그것과 같이 종속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아직도 교회 복음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되고 만 것이다. 그 결과로 평신도들은 아직도 자기들의 위치와 책임을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주된 원인은 가톨릭 교회관이 트리엔트 시대를 거쳐 이같이 오랫동안 ‘위계 제도 중심의 교회’, ‘제도 중심의 교회’로 변질된 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복음과 멀어진 교회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필연적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교회가 되면서 교회가 생기를 잃고 역동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군주와 기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 속에 갇혀 유연성을 잃고 경직된 모습이 된 것이다.


② 성경을 빼앗아 간 교회


한 마디로 지금 교회에는 “말씀이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말씀’과 멀어졌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신자들에게서 성경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교회가 성경을 신자들의 손에서 빼앗아 간 것은 너무나 큰 실수이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교회가 정체성을 잃고 역동성과 생기를 잃은 가장 큰 원인은 신자들과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진, 복음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이다. 교회를 살리고 교회를 쇄신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복음화’는 우리 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사는 것이고 교회가 복음 중심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화’란 잃어버린 성경을 다시 찾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이다.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미사 전에 그날의 복음과 말씀을 묵상하기보다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미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아직도 그들은 트리엔트 시대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확실한 하나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③ 경직된 전례


김수환 추기경은 또 다시 지적하였다. “가톨릭에서는 라틴어가 가톨릭의 ‘심벌’이라고 간주될 만큼 그 위치가 절대적으로 강화된 것을 비롯해서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전례가 제도화, 율법화, 형식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전례의 획일적인 일원화를 가져왔으며 또 전례의 생활화를 저해하였고 이로 인하여 신자들은 전례에 의식적이요 적극적인 참여가 불가능했다. 전례상의 기도도, 복음 선포도 그들에게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나 다름없었고 그리하여 전례는 성직자들의 전유물화(專有物化)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적 차별과 유리는 어디서보다 전례에 있어 현저했다 아니할 수 없다. 또한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의 원천’(전례헌장, 10항)인 전례가 생활화되지 못하는 곳에서 신앙의 생활화나 열렬한 사도직 활동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상황 아래서는 참된 의미의 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건설과 성장은 기대하기가 힘들 것이다.”(사목 339호 254쪽)


[월간빛, 2012년 11월호]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3)


박성대(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2. “교회가 침몰하고 있다!”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상

① 성직자 중심의 교회

② 성경을 빼앗아간 교회

③ 경직된 전례


④ 반세계적인 자세의 교회


또다시 작고하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사목 339호’에 기고하신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 추기경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간절한 소망인 ‘쇄신’과 ‘회개’의 이유로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1563년)가 말하는 소위 ‘트리엔트식 교회’의 부정적인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한마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트리엔트식 교회’의 영향으로 형성된 잘못된 교회의 모습과 그 결과로 생긴 많은 부작용을 종식시키기 위해 열렸다고 말하고 있다. 김 추기경께서는 그 ‘트리엔트식 교회’의 잘못된 교회의 모습은 과연 어떤 교회였는가를 앞에서도 말했지만 또 다른 한가지인 ‘반세계적인 교회’를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교회와 세계, 즉 서구 사회와의 관계는 처음에는 상호 간의 소원(疎遠)으로, 그 후에는 점차 적대 관계로까지 발전해 갔다. 그리하여 교회는 세계의 정신적·문화적 발전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으며, 세계는 인간의 자기 각성, 자기 창조력의 재발견과 더불어 교회 없이(sine Ecclesia) 혹은 교회를 거슬러(contra Ecclesiam) 독주해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 라는 선언, 혹은 칼 마르크스의 유물주의적 공산주의 선언 등에서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뿐 아니라, 종교와 신(神)마저 거부하는 인간 본위의 세계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의 반교회적 내지 반종교적 태도에 대한 교회의 답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단지 세계의 발전을 회의적으로 대하는 것만이 아니었고, ‘Anathema sit’, 즉 단죄로써 응하는 극단적인 것이었다. 아무튼 트리엔트 시대의 교회는 세계와의 대화를 상실한 교회였다. 세계도 교회를 외면했지만, 교회 역시 세계를 외면하였고, 더 나아가 이를 심판하는 데만 시종일관하였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종교 개혁을 계기로 무수한 양 떼가 교회를 배반하고 떠난데 이어, 교회는 철학자, 사상가, 정치가, 과학자 등 지성인 일반을 잃게 되었다.”(「사목」, 339호 255면-256면)


●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는 교회!


세상이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확인한 이 공의회는 세상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교회의 몫으로 받아들이노라고 장엄하게 선포하였다.(사목헌장, 1항 참조) 법적이고 제도적인 사고를 복음의 정신으로 바꾸어 나가는 이 힘겨운 쇄신의 여정에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수많은 세상 사람들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경의를 표했다.”(최원오, 「사목」, 339호 11면)


필자가 소공동체를 하면서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눈과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감동하였다. 어떻게 교회가 이런 자각을 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제2의 성령 강림이 아닐 수 없고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우리 교회가 트리엔트식 교회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끝난 지 40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교회에는 그 잔재가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이 명제에 쉽게 동의를 못하고 과연 이 말이 맞는 말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소공동체 사목을 힘들어 하고 소공동체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이해가 부족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함이다. 교회가 세상을 복음화한다는 말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말이다. 서울대교구장이셨던 정진석 추기경께서 2010년도 사목교서에서 그해 사목방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복음화로 세상을 바꾸자는 말이다. 세상을 복음화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복음화해야 하고 교회가 먼저 변화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목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봉사해야 하고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교회는 과연 그런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바로 아직도 우리는 트리엔트식 교회관과 사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세상과 등진 교회, 세상을 적대시하는 교회, 세상 위에 군림하는 교회, 세상과 대화를 상실한 교회, 세상 속의 교회가 아닌 별세계에 특별한 모습으로, 별천지에서 별개로 존재하는 교회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자만과 독선, 자아도취와 권위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하게 우려할 일이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난, 세상을 외면한, 세상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교회는 ‘친교의 교회’라는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걱정하거나 실망하게 되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 2006년도 우리나라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 동안 개신교만 14만 명이 감소했다. “개신교는 왜 홀로 쇠퇴하고 있는가?”라고 외치면서 그 원인으로 “우리 개신교가 지역 사랑방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개신교는 우리들만의 교회였다.”라고 개신교 스스로 진단하였다. 맞는 말이다. 이 말은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이 말은 교회가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지 못했다는 말이고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교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고 세상을 섬기기보다는 ‘신자확보’에 혈안이 되었고 ‘교세확장’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사(聖事)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교회가 성사가 아니라 목적이 되면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실망 때문에 교회를 떠나게 되고 특히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결과로 지금 유럽 교회는 비어가고 있고 화석화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생전에 어느 언론과 인터뷰를 하던 중에 눈물을 흘리며 우신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황우석 교수의 논문조작 사건’ 때문이었다. 추기경님께서 왜 세상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을까? 우리 천주교 일도 아니고 종교적인 일도 아닌데, 그분이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걱정하고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중생(衆生)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는 말이 있다. 세상이 아프면 예수님도 아파하신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징표,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의 관심사나 세상 사람들의 바람과 갈증을 알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친교의 교회’가 될 수 있다. ‘친교의 교회’ 내지 복음 중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교회의 진정한 복음화와 새로운 복음화를 이룰 수 있다. 소공동체가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실질적이며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다. 교회는 지금 복음화, 내지 새로운 복음화를 외치고 있지만 구체적인 실천은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복음화와 새로운 복음화의 유일한 대안인 소공동체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공부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월간빛, 2012년 12월호]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4)


박성대(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3. “벼랑 끝에 선 교회!”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2)


소공동체가 힘들고 잘 안 되는 이유는 위기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소공동체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지금 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므로 소공동체가 구현시키고자 하는 주제들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힘든 심각한 위기, 다른 말로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심각한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문(2012년 9월 30일자)에서 ‘신앙의 해’ 선포와 관련한 보도에서 “벼랑 끝에 선 교회”라는 타이틀과 함께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말을 인용 보도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상대주의, 세속주의 등 우리 시대에 만연한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현장, 또 신앙 위기의 배경들 속에서 이 모든 위기를 넘어서는 원동력을 「신앙의 정체성 확립」에서 찾았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계속해서 가톨릭 신문은 한국 주교회의 한국사목연구소 부소장 박선용 신부의 말을 인용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유럽교회를 비롯해 세속화 등의 영향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사회 안의 교회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요청이 ‘신앙의 전수’임을 확인했다.”고 말하면서 또한 “‘신앙의 해’는 세계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위기를 신앙 쇄신을 통해 되찾고 극복해 가고자 하는 노력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였다.


● 깨어있는 분들의 염려


한국 교회 안에서도 교회의 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린다. 마산교구 원로이신 정하권 몬시뇰께서는 “과거 4백 년 동안 자라나는 새 시대에 대한 몰이해로 교회는 차례차례로 자녀들을 잃어갔다. 현대의 정신 분석학이 무엇인지,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의 실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저들의 말투가 교회의 정통적인 말투와 다르다고 단죄만 하려고 드는데 왜 현대의 지성이 도망가지 않겠는가?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신경마비 증세와 혈맥경화증세를 수술하기 위해서 개최된 것이다. 이 수술이 성공하면 세상은 교회가 거대한 시체가 아니요, 역사의 유물도 아니며, 박물관의 화석이 아니라, 현재의 동반자요, 미래의 조타수임을 깨달을 것이다.”(사목 339호 312면)


또한 수원교구 원로 사제이신 심상태 몬시뇰께서는 다음과 같은 한탄의 말씀을 하셨다. “젊은 네티즌들 일부가 ‘그리스도’의 한자 표기인 ‘기독교’로 불리는 개신교를 ‘개독교’로, 우리 교회를 가리키는 ‘가톨릭’을 ‘개톨릭’으로 부르면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혐오감과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그리스도 진리의 진정성을 체험하게 하는 복음적 삶이 수반되지 않은 채 이론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선포 활동에만 역점을 두는 재래 서구 교회적 선포 양식이 오늘날 첨단 정보화 시대에서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지표로 보입니다.”(사목 339호 232면) 그리고 유럽교회를 일컬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한 교회”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이는 결코 과장되거나 지나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평신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목적 권고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심각한 위기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활력에 찬 수많은 전통과 대중 신심 형태가 여전히 보존되고 있는 다른 지방이나 나라들에서도 그 도덕적, 정신적 유산은 세속화와 분파의 확산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유 때문에 뒤집어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34항)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원장 김정우(요한) 신부는 자신의 저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20여 년 전, 유럽생활을 하면서 유럽교회에 대한 세 가지 표현들을 들었다. 첫째는 ‘유럽교회는 늙었고 한국교회는 젊다.’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라는 것이고, 셋째는 ‘유럽교회는 늙은 것이 아니라 지쳤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2,0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나 유럽교회가 이런 말들을 듣게 되었다면, 문제는 이제 200년밖에 지나지 않은 한국교회가 이런 말들을 듣게 될지 모른다는 징후가 여기저기 감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한국교회 안에서는 신 영성(유사영성)의 피해가 늘어가는 것과 함께 냉담자 증가, 예비신자 감소, 주일미사 참례자의 감소, 청소년들의 신앙생활 기피와 주일학교의 퇴조 등과 같은 난제들을 한국교회가 겪고 있기 때문이다.”(포스트모던 시대의 그리스도교 윤리, 김정우, 12면) 계속해서 김정우 신부의 또 다른 저서 《새 복음화를 위한 윤리적 과제》(김정우, 2012. 대구가톨릭대학교 출판부)에서 “기존의 종교와 신앙에 대한 비판과 무관심, 그로 인한 신앙적인 성향의 퇴조라는 서구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위기가 한국 교회에도 나타나고 있다.”(동 저서 24면)고 말하고 있다.


또한 개신교 신자이면서 국무총리를 지낸 한완상 씨는 자신의 저서 《예수 없는 예수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적으로나 우리 형편으로 보나 기독교와 교회의 모습은 딱할 정도로 낡은 모습입니다. 그 낡음이 위기의 징후입니다. 위기의 겉모습, 곧 형상의 위기 징후만을 보아도 기독교와 교회는 이제 한계에 다다른 듯합니다. 양적 팽창 속에서 지속되어온 반지성적 교회풍토와 신자들의 기복적 신앙, 경직되고 불투명한 교회운영과 권위주의적 교회 지배 구조 등이 위기의 징후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한마디로 교회의 양적 성장 둔화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수백 년간 서구 교회가 줄곧 유령화되면서 기껏해야 문화재로 남게 되는 과정을 상기시켜 줍니다.”(예수 없는 예수교회, 한완상, 89면)


얼마 전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신앙의 해’를 선포하는 교서에서 “오늘날 유럽교회가 과도한 사고방식과 개인주의로 인해 신앙의 중요성, 그리고 그 의미를 상실한 ‘식어버린 신앙’이라면 한국교회는 ‘허약한 신앙’”이라고 비유했다.(가톨릭신문, 2012.10.14일자)


현대 교회의 심각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 ‘복음화’내지 ‘새로운 복음화’이다. 소공동체는 지금 교회가 처해진 총체적인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는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프로그램이다. 교회는 ‘새로운 복음화’를 수없이 외치면서 새롭게 구체적으로 변화된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여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 구조와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을 고집하고 있다. 소공동체가 미래 교회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다른 처방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소공동체 사목을 본격적으로 해보지도 않고 소공동체가 안된다고 한다. 소공동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 “소공동체를 안다.”고 하니 답답하기까지 하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2)는 말씀이 위기에 있으면서도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오늘의 교회를 두고 하시는 말씀같이 두렵고 크게 들린다.


[월간빛, 2013년 1월호]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5)


박성대(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4. “심상치 않은 이상 징후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마태 16,3)


「새로운 지평을 찾는 교회」(2003.9.15. 가톨릭출판사, 배경민)에서 유럽과 북미교회의 실상을 표현하기를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그리스도교 국가였던 서구 북미의 교회들이, 재복구하기 힘들 정도로 피폐한 처지의 모습으로 쇠퇴하고 있다.”(동 저서 38면)고 절망적인 말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유럽교회는 성장이 멈추거나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고 마치 ‘신 없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이고, 남미교회는 잘못된, 혹은 지나친 성모 신심 때문에 기복신앙에 빠져 있고, 하루에 7천여 명이 개신교로 개종을 하고 있다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교회는 괜찮단 말인가? 오늘날의 특징은 세계화 시대이다. 서구에서 일어난 일들이 금방 아시아 지역에도, 특히 한국에도 급속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몇 십 년 안으로 한국 교회도 심각한 위기현상에 직면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위에 소개한 제목은 「성공적인 교회들에는 비밀이 있다.」(차동엽, 2005년, 에우안겔리온)는 책에서 제일 먼저 언급하는 말이다. 한국 교회에도 ‘심상치 않은 이상 징후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다. 차 신부는 저서에서 가장 심각한 이상 징후들로 네 가지를 말하였다. 첫째가 냉담신자의 증가이고, 둘째가 신자 증가율의 감소이고, 셋째가 젊은 신자의 감소이고, 넷째가 신자 고령화의 가속화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자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남아있는 신자들은 고령자들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한국천주교회도 지금은 유럽과 남미에 비해서 건강한 교회처럼 보이지만 만일 현재의 한국교회의 실상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 한국 교회의 미래도 결코 밝다고 말할 수 없으며 결코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 교회도 비전이 보이지 않는 실망스러운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1) 냉담신자의 증가


차 신부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가톨릭신문 보도(2007.7.23)를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최근 냉담자율이 30%를 넘으며 심각한 「신앙의 위기」에 봉착한 한국교회로서는 신자 재교육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성공적인 교회들에는 비밀이 있다. 9면) 2011년도 주일미사 참례율이 27.2%(매일신문 2011.6.27)이던 것이 그 다음 해에는 23.2%(평화신문 2012.5.6)로 떨어졌다. 주일미사에 나오지 않는 신자 수가 평균 72-80%에 이른다. 주일미사에 참여하지 않는 신자(72.8%)는 냉담자로 봐야 할 것이다.


2) 신자 증가율의 감소


차 신부는 저서에서 “1980년대 연평균 7.7%라는 놀라운 신자 증가율을 보였던 한국교회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계속 감소세를 보이더니 2003년 현재 1.9%를 기록하고 있다.”(동 저서 12면)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평화신문(2011.6.12)에 의하면 “신자증가율 1.7%… 교세 성장 빨간불”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3) 젊은 신자의 감소


차 신부가 소개한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2003년 말 기준 한국 가톨릭교회 교세통계를 보면 그간 교회 내에서 피부로만 느껴왔던 젊은 층 신자들의 교회이탈 현상을 실감하게 된다. 흔히 「교회의 미래」로 불리는 유년, 소년, 청년 인구의 감소가 두드러졌다는 것이다.(중략) 안타깝게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40대 미만의 탈교회(脫敎會) 현상이 현저하게 가속화되고 있다. 유아세례율의 저조, 첫영성체율의 급격한 하락, 초중고 주일학교 운영난, 신혼부부의 이혼율에 기인한 조당자 급증 등은 한마디로 40대 미만의 교세가 이미 위험한 정도를 넘어서고 있음을 말해주고도 남는다. 주목할 것은 젊은 신자의 감소세가 타종교에 비해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5년도 한국 갤럽조사(한미준)에 의하면, 종교 내 청년인구(18-30세) 비율에서 개신교는 44.1%, 불교는 35.1%를 기록하고 있으나 가톨릭교회는 16%대에 그치고 있다.”(동 저서 13-14면)


4) 신자 고령화의 가속


역시 차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 고령화의 심각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가톨릭교회의 신자 고령화 현상은 개신교나 불교보다 심각할 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대로 향후 몇 십 년 후의 종교인 분포를 예시해 주는 불길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5) 대구대교구의 어두운 미래


지난 2011년 사제 연수회에서 발표된 대구대교구 교세 통계표(2008년도)에 근거한 우리 신학 연구소의 분석에 의하면 대구대교구의 고령화 본당은 153개 본당 중 136개(88%) 본당이다. 반면에 고령화 이전 본당은 겨우 17개(11%) 본당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번에 개최한 제2차 교구 시노드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1995년과 2005년 인구센서스를 비교하면 70세 이상 신자의 비율이 6.4%에서 10.1%로 늘어났으며, 60세 이상은 12.1%에서 19.3%로 늘어났다. 신자들이 고령화되는 비율은 우리 사회의 고령화 비율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교회의 신앙 활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30-50대 여성신자의 이탈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대구대교구 제2차 시노드 3차 건의안 설명집 38면)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부족하지만 우리 가톨릭교회가 당면한 위기 현상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하여야 한다. 침몰되고 있는 교회, 죽어가는 교회를 살려야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교회, 정체성을 잃어가는 교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에서 ‘복음화’ 내지 ‘새로운 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교회로 만들어야 한다. 잘못된 교회, 잘못된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생긴 ‘교회의 위기’ 혹은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공의회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하여 ‘복음화’ 내지 ‘새로운 복음화’를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소공동체는 바로 교회가 지금 절실히 필요로 하는 ‘복음화’ 내지 ‘새로운 복음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며 교회의 미래를 위해 가장 잘 처방된 대안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걱정되는 것은 한국의 다른 대부분의 교구와 비교해서 우리 대구대교구에서는 소공동체 사목을 하는 본당이 줄어들고 소공동체 사목에 대한 관심이 자꾸만 멀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월간빛, 2013년 2월호]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6)


박성대(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Ⅱ. 복음 중심의 교회


1.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1) ‘말씀’을 유배(流配) 보낸 교회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 -17)


지금까지 교회의 많은 위기들을 말했다. 그러나 아직도 염려되는 것은 많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이 위기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 독일 주교님들이 한국 교회 소공동체를 견학하러 왔었다. 한국의 여러 교구에서 하고 있는 소공동체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독일 주교님들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분들이 왜 눈물을 흘렸을까? 지금 유럽 교회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신자들은 평일 저녁에 자기들이 사는 동네나 가정에 모이지도 않을 뿐더러, 모여서 성경을 읽는 모습조차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유럽 교회를 일컬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해버린 교회라고 한다. 만일 우리 한국 교회도 사목과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고 이대로 간다면 지금의 유럽 교회처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한 참담한 교회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유럽 교회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이미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잃어버렸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한국 교회도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유럽 교회를 닮아가고 있고, 다른 차이점을 볼 수 없는 것 같다.


말기암(癌)은 실상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하다. 살 희망이 없고 수술도 소용이 없다. 소공동체를 하는 것은 소멸 직전에 있는 교회를 소생시키자고 하는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역동성을 잃어버린 교회에 생기와 신바람을 불어넣고 의무적으로 다니는 교회를 ‘다니고 싶은 교회’로 만드는 것이며,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활기와 기쁨을 찾기 위함이다. 병들어가는 교회를 살려서 더욱 건강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교회가 생기와 역동성을 잃고 성사성과 정체성을 잃은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또한 우리 교회의 미래가 불투명하거나 어둡다면 그 원인과 이유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교회가 겪고 있는 가장 큰 위기는 다름 아닌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말씀’과 너무나 오랫동안 멀리 하고 있었던 나머지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절망적인 일이 또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복음 나누기를 해보면 신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다. 정말로 답답하고 한심한 모습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절망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복음 나누기가 부담스럽고 어려운 나머지 소공동체가 재미없게 느껴진다. 과거에는 묵주신공 같은 방식으로 기도문을 그냥 외우기만 하고 듣기만 하면 되었지, 내 스스로 복음을 읽고 들은 것을 스스로 묵상하고 스스로 복음 나누기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제들의 강론이나 훈화를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면 되는 ‘먹여주는 교회’에 길들여진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자연적으로 피동적이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신심행위’로 일관하던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이 ‘복음 위주’로 많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에는 신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묵주신공 일변도이던 것이 요즈음은 ‘복음 나누기’를 많이 한다. 그리고 ‘거룩한 독서’, ‘성경 공부반’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아마도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소공동체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어느 수녀원에 특강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수녀원의 큰 성당에 들어가보니 수녀님들의 개인 자리에서 있어야 할 성경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수녀님들의 앞자리가 다 그랬었다. 깜짝 놀랐다. 그 수녀원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십여 년 전 군종 신부 시절에 강의나 강론 준비 중에 성경 구절을 찾아야 하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옆에 계시는 목사님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목사님은 일 초 만에 금방 그 성경 구절을 찾아 주신다. 나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이런 망신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것은 나 자신 혼자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제의 입에서 무슨 감동적인 강론이 나올 수 있겠는가? 성직자나 수도자가 이렇다면 평신도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의 성경지식은 개신교 신자들과 비교해서 무식에 가깝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잃어버린 ‘말씀’을 찾고 멀어진 ‘복음’을 다시 회복하자는 것이다. 소공동체 사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과 함께, ‘말씀 중심의 사목’을 하는 것이다. ‘말씀 중심의 사목’을 하려면 강론 때에도 성경으로 강론하고 신자들도 성경을 항상 전례 때에 지참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쉽게 잘 안 된다. 성경이 무거워서 가지고 다니기가 매우 힘들고 불편하단다. 한 달 후에 쓰레기통에 버리는 편리한 매일미사 책이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자들은 항상 성경을 지참하고 다니는 것에 비하여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천주교 신자들은 볼 수가 없다. 한마디로 교회가 복음과 멀어져 있다. 신자들은 말씀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교회가 신자들에게서 말씀을 빼앗아 유배(流配)보낸 큰 실수를 했다. 그것도 1300년대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무려 700여 년 동안이나! 교회가 성경을 빼앗고 묵주나 성인전이나 준주성범 같은 신심서적을 신자들에게 주었다는 심한 말도 한다. 그리고 지금 한국교회는 레지오 마리애 중심의 사목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 한국교회 성장의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레지오 마리애도 좋다. 그러나 레지오 마리애 중심의 사목에 대한 심각하고도 진지한 반성과 용기있는 성찰이 필요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복음화’를 부르짖는 지금이야말로 과연 레지오 마리애가 우리 미래 교회의 대안이 될 수 있고 ‘복음화’, 그리고 ‘새로운 열의’, ‘새로운 표현’, ‘새로운 방법’을 부르짖는 ‘새로운 복음화’에 걸맞는 새로운 주역이 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살펴볼 때라고 생각한다. 아래에 소개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6-9)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13)


[월간빛, 2013년 3월호]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7)


박성대(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Ⅱ. 복음 중심의 교회


1.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2)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으로?


참으로 충격적이고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다. 필자의 지나친 염려와 편견에서 나온 것인지 몰라도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솔직한 마음으로 이런 염려를 지울 수가 없다. 우리 신부님들의 사목에서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으로’, 그리고 ‘복음보다 덜 중요한 것을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사목하는 경향이 있고 또 신자들도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만일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없고 성모님만 있게 된다. 우리는 지금 성모님을 믿는 ‘마리아 교’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이런 오해와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하여 한때 교회에서는 본당의 가장 중심 자리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모셔진 성모상을 옆으로 옮기라고 한 적도 있었다.


필자는 네 차례에 걸쳐 남미(南美), 특히 멕시코를 방문하고 성지순례를 한 적이 있다. 남미의 많은 신자들이 미사 때에 성모상을 안고 미사에 참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자신들의 자동차에 묵주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닌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성당에서는 십자가는 보이지 않고 성모상만 모셔진 경우도 있었다. 참으로 충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기복신앙에 젖어 있는 남미 교회의 실망스럽고 걱정스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남미 교회의 특징을 말한다면 ‘성모님 신심’을 신앙생활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성모님 신심’이 지나쳐 복음보다 ‘성모님 신심’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잘못되고 지나친 성모님 신심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을 정도이다. 기복신앙의 주범은 ‘잘못된 성모님 신심’이다.


지금 남미에서는 하루에 7천여 명이 개신교로 개종을 하고 있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얼마 전에 파나마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사목하시는 한국 신부님과 현지인들의 미사에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미사에 참례한 신자의 반 정도가 영성체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대부분이 혼인 조당자들이라고 했다. 정식 혼배성사를 받지 않고 동거하는 신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파나마대교구에서 5년 만에 한 명의 새 사제가 탄생되었다는 충격적인 말도 들었다. 지금 남미에서는 거의 50%의 사제가 방인 사제가 아닌 외국 선교사들이 사목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 명의 사제가 몇 개의 본당을 사목하고 있다고 한다. 사제성소와 수도성소의 감소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남미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건너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성모신심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남미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으로는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으로 가르치고, 복음보다 훨씬 덜 중요한 것을 복음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거나 사목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복음 말씀을 살고 지키기 보다는 지나친 신심에 빠진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교회가 복음과 멀어진 교회, 정체성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7-9)


필자가 모 본당에서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하여 ‘말씀’을 강조하는 사목을 하던 중에 어느 레지오 간부가 다음과 같은 글을 본당 홈페이지에 올린 적이 있었다. “말씀을 강조하다보니까 성모님 신심이 소홀히 될까 염려됩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 보다는 레지오마리애 중심의 신앙생활, 말씀보다 묵주신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한 사람의 입에서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다. ‘말씀’은 믿음의 대상이지만 ‘성모님’은 믿음의 대상이 절대로 될 수 없다.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필자는 본당에 있을 때에 주일미사 입당 행렬 시에 성경을 높이 들고 입당해서 성경을 제대 앞 성경 안치대에 안치하게 했다. 요즈음은 이렇게 하는 성당이 점점 늘어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극히 드문 현상이긴 하지만 아직도 어떤 성당에는 제대 앞 중앙에 성모님 상을 모셔놓은 성당을 가끔 볼 수 있다. 사목적인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많은 본당에서 미사 전에 신자들이 공동으로 묵주기도를 바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또는 미사 전에 개인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치는 신자들도 많은 것 같다. 극소수의 신자들이지만 아직도 미사 중에 묵주기도를 하기도 한다. 필자는 본당신부 시절에 미사 전에는 묵주기도를 바치기 보다는 그날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미사 준비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주문하여 신자들도 기쁘게 잘 따라 주었다.


말씀으로 사신 성모님!


성모님은 우리 신앙인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성모님께서 ‘말씀’ 중심으로 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모님께서 천사로부터 인사말을 들으셨을 때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에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고백하시면서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시면서 말씀에 순종하신 분이셨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모님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이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하면서 성모님을 극찬하였다.


성모님의 행복이 어디에 있었는가? ‘말씀’에 대한 믿음에 있었다. 놀라운 일이 하나 있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다른 복음 사가들과는 달리 성모님에 대한 말씀이 다음의 말씀 외에는 없다. 예수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성모님께 대한 말씀이 없다고 해서 마르코 복음이 복음이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마르코 복음도 분명히 복음이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성모신심보다는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고 말씀하셨다. 위의 말씀들이 성모신심을 부정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토록 공경하고 좋아하는 성모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기막힌 말씀이다.


결론적으로 성모신심 없는 가톨릭 교회, 묵주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상상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목적인 배려와 비중이 복음에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말씀과 복음보다 더 중요한 신심은 없다. 사목과 영성의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월간빛, 2013년 4월호]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8)


박성대(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II. 복음 중심의 교회


1.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2. ‘말씀’의 중요성


1) ‘말씀’은 하느님이시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이 말씀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말씀’은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아버지’와 다르시면서도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결국 ‘말씀’도 ‘아버지’처럼 하느님이시다. 곧 하느님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시다.”(주석성경,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 355면) 위의 성경말씀을 보면 ‘말씀=하느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 주석의 내용처럼 결코 무리가 없는 말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포함한 우주 만물을 창조하는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창조 수단이 다름 아닌 ‘말씀’이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는 말씀을 창세기에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세상 창조 과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표현되는 말씀이 열 번이나 나온다. 창조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는 ‘말씀’은 하느님의 의지와 하느님의 힘으로 해석되지만 곧 ‘말씀’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라는 말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역시 이 말씀도 요한복음 1,1의 말씀처럼 ‘말씀=예수님’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라는 말이다. 우리는 전례 때에 복음환호송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 받으소서.”라고 자주 노래한다. 역시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라는 말이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도 제12차 세계주교대의원회 정기총회에서 “아버지의 말씀이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다.(주님의 말씀 15면)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말씀’이 없으면 하느님도 안 계신다는 말이다. 또한 ‘말씀’이 없으면 예수님도 안 계신다는 것이다. 하느님 없는 믿음이 어찌 믿음이라 할 수 있겠으며 예수님 없는 믿음이 어찌 믿음일 수 있겠는가? 교회는 지금 결정적인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공동체를 통하여 교회를 복음화하고 쇄신하고자 하는 것은 멀어진 복음을 가까이 하고 잃어버린 복음을 다시 찾자는 것이다. 그래서 소공동체를 통하여 복음나누기를 함으로써 복음을 되찾고 복음과 가까이 하며 복음 중심의 신앙생활로 우리들의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신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의례히 묵주신공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였지만 그보다는 복음나누기를 통하여 복음을 가까이 할 뿐만 아니라 복음도 나누고 자신도 나누고 삶도 나누는 ‘나누는 삶’의 매력과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2)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이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필요한 것 한 가지’가 무엇일까? 그것을 마리아가 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그 ‘필요한 것 한 가지’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신앙을 키우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더욱이 요즈음 교회는 ‘복음화’를 부르짖고 있다.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의 쇄신을 위하여 찾아낸 방법이 바로 ‘복음화’이다. 이 말 속에는 복음과 멀어진 교회를 복음과 함께 사는 교회로 만들자는 말이다. 어쩌면 말씀이 없거나 말씀과 멀어진 교회를 ‘말씀 중심의 교회’, ‘복음 중심의 교회’로 변화시키자는 말이다.


저 유명한 모리스 준델 신부가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구원을 찾아 모스크바 쪽으로 방향을 바꾼 사실을 생각하면 그것은 유럽의 황폐이고, 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빛나게 보여 주지 못한 그리스도교 세계의 황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일은 수백만의 프랑스 사람들이 전적으로 비그리스도인이 된 사실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교회도, 그리스도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나날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모리스 준델, 성 바오로 87면) 다시 말해서 유럽의 사회가 ‘신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말이다. ‘황폐해진 유럽 교회’, ‘신 없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복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며 ‘말씀’이 없는 교회, 혹은 ‘말씀’과 멀어진 신앙생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교회는 복음으로 복음화하기보다는 로마화 혹은 유럽화 내지 유럽 중심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과 멀어짐으로써 교회의 정체성을 잃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이다.


3) 말씀은 구원과 직결되어 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만일 내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거나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다면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티모 2,12)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마태 7,23)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3)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28)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는 기쁨과 행복!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17)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셨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필리 3,8)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원리를 깨닫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목욕탕에서 나와 벌거벗은 몸으로 연구실로 달려가면서 “알았다! 알았다!” 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만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면 결코 그분을 떠날 수가 없다.


오늘날 냉담자가 많은 이유도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무너지고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가 ‘말씀’ 중심의 사목과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해야 할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소공동체이며 소공동체를 통하여 복음나누기를 생활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화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월간빛, 2013년 5월호]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9)


박성대(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Ⅱ. 복음 중심의 교회


1.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2. ‘말씀’의 중요성


4)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몇 십 년 전만 해도 주일에 성당에 안 나가면 손가락질을 받았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오히려 성당에 나가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유럽의 분위기에요.”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벨기에 주교님의 말씀이다.(가톨릭신문 2013.4.14) 그리고 10년 동안 새 사제가 고작 3명밖에 없었단다. 지금 유럽 교회는 비어가고 있다. 주일미사 참례자 수가 3%밖에 안 된다고 했다. 한심한 모습이다. 지금 유럽 교회는 황폐되었고 죽어가고 있다. 아니 죽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유럽의 교회를 닮아갈 것이라는 뻔한 걱정을 지울 수가 없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이미 사제성소와 수도자성소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주일미사 참석률도 30%에 머물고 있는 데다가 대구대교구의 경우 본당 고령화 현상이 90%대에 이르고 있다.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회가 정체성을 잃으면서 역동성(力動性)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역동성을 잃은 가장 큰 원인이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4-27)는 말씀처럼 ‘말씀’없이 살면 신앙생활의 의미와 목적도 모르고 신앙생활의 기쁨을 모르게 된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힘을 잃게 되고 어려움이 닥치면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결국은 신앙을 포기하게 되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


지금 교회는 ‘새로운 복음화’를 부르짖고 있다. ‘새로운 복음화’의 골자는 ‘새로운 열정’, ‘새로운 표현’, ‘새로운 방법’이다. 지금 우리 가톨릭교회에 이 새로운 복음화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왜냐하면 우리 가톨릭교회에는 엄숙함과 근엄함, 그리고 성스러움은 있지만 열정과 기쁨이 없다. 전례는 형식과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아직도 중세시대의 복장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제들의 강론은 지루하고 감동이 없다. 그리고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모습들이 기쁨보다는 근엄하고 권위적인 표정이다. 따라서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의 모습에서도 기쁨과 생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성가를 제대로 부르지 않는다. 억지로, 마지못해 부르는 것 같다. 성가를 열심히 부르는 주례 사제를 보기가 드물다. 성당에 처음 온 사람들이 미사에 한 번 참례한 후 다시는 성당을 찾을 것 같지가 않다. 미사의 전례 분위기가 패잔병들이나 환자들의 모임 같고 심하게 말하면 때로는 마치 장례미사 같이 너무나 무겁고 경직된 분위기를 느낄 때가 많다. 신자들이 냉담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이다. 그러니 의무적이고 습관적으로 나오는 노인들이 대부분이고 젊은이들은 찾아보기가 힘들어져가고 있다.


원인이 무엇일까? 우리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사목에 문제가 있다는 말도 된다. 또 다른 말로는 사제들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신앙생활의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왜 기쁨이 없을까? 그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제들과 신자들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다. 참으로 놀랍고도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공동체 교육을 하면서 신자들에게 ‘하느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인가를 물어 본 적이 많았다. ‘하느님’ 하면 제일 먼저 떠올라야 할 단어가 ‘사랑’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이 하느님 본성의 핵심이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에 창조주, 심판자, 영원하신 분, 절대자, 전지전능하신 분 등의 단어를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좋으신 하느님이기보다는 무서운 하느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사랑이신 하느님보다는 창조주나 심판자와 같은 교리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표시이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 ‘말씀’ 중심의 사제생활 내지 사목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과 멀어진 교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나누기를 통하여 ‘복음 중심의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소공동체는 ‘복음중심의 교회’를 만들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말씀 없는 신앙생활, 말씀과 멀어진 신앙생활, 심지어는 복음과 반대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교회가 그것을 방치하거나 외면하기도 하고 심지어 옛것을 고집하면서 조장하기까지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복음을 모르면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르게 되고 우리에 대한 하느님과 예수님의 넘치는 사랑을 체험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마르 12,28), “가장 큰 계명”(마태 22,36),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루카 10,25)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마르 12,33)이다. 이 말씀은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이고 가장 큰 계명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고 구원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셨다는데 우리는 그 사랑을 얼마나 느끼고 체험하고 있는가? 부끄러울 정도로 도무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심각한 반성거리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럴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처음으로 행하신 첫 기적(요한 2,1-12)을 다른 곳이 아닌 혼인잔치에서 행하셨다. 혼인잔치는 사랑의 잔치이다. 하느님과 우리들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로 바뀌었다.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번째 기적을 통하여 하느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바꿔 놓으신 것이다. 돌 항아리는 가혹하고 엄격한 율법주의의 경직성을 상징하고 있지만 포도주는 복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복음인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슴에서 솟아 흐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들에게 ‘사랑’을, ‘사랑이신 하느님’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소공동체로 하느님의 놀랍고도 넘치는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월간빛, 2013년 6월호]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0)


박성대(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Ⅱ. 복음 중심의 교회


1.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2. ‘말씀’의 중요성


5)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필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고 충격과 함께 감동하면서 내 눈을 의심하기까지 하였다. “성서의 하느님은 한마디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며 언제나 인간을 향해 당신 자신을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1요한 4,9 참조, 함께 걷는 하느님과 인간, 이영헌 지음, 40면) 참으로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다.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위해서 존재해야지 어떻게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자녀들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위하여 가진 것을 다 내어주고 빈털털이가 되고 나이가 들어 늙어 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부모들의 인생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위한 인생이었다. 그분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존재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셨음이 틀림없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려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의 크기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알아야 한다. 성서가 말하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요한 12,49-50) 성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은 하나도 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말씀만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요한 6,39) 그리고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요한 16,13-15)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자신이 아닌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시고 활동하시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들으신 것만, 받으신 것만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오직 사랑뿐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삼위일체적인 사랑이며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퍼부어 주신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20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이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의 열기가 식지 않고 더 뜨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랑의 열기를 체험해야 한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루카 1,46-47,공동번역)라고 노래하신 성모님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그 사랑에 매료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셨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이 넘치는 사랑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삼위일체 대축일 복음 말씀 중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요한 16,12)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이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분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 가슴 벅찬 하느님의 사랑을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슬픈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 넓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에페 3,18-19) 우리가 이토록 깊고 큰 하느님의 사랑은 모르면서 다른 것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에 매료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다름 아닌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그 사랑은 ‘말씀’ 속에 있다. 우리가 그 엄청난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먹기 위해서는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경의 결론은 하느님이며 예수님이고 사랑이다. 한마디로 성경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사랑의 편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연애편지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의 자애와 자비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자애와 자비는 용서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그분께서는 모두 용서해 주신다. 정말 이해가 안가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는 성경 말씀(루카 7,36-50)을 소개하면서 하느님의 놀랍고 너무나 크신 자애와 자비, 그리고 용서를 묵상하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싶다.


오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 빚진 사람에게 채권자가 모두 탕감해 주었는데 두 채무자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카 7,43)라고 시몬이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이 비난하는 여자에 대하여 용서를 베푸시면서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가르쳐 주셨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이런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하기 힘든 하느님의 사랑이 ‘말씀’ 속에 녹아 있다. 그리고 시편 저자는 이렇게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노래하였다.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 끝까지 따지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그분의 자애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에 굳세다. 해 뜨는 데가 해 지는 데서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우리에게서 멀리하신다.” (시편 103,8-12)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콜로 2,13-14)라고 말씀하셨다.


소공동체는 ‘말씀’을 통하여 이토록 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신앙생활로 변화시키고 또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고 아무리 많은 다른 신심행위와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고치고 신앙과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이 바로 소공동체이다.


[월간빛, 2013년 7월호]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1)


박성대(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Ⅱ. 복음 중심의 교회


1.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2. ‘말씀’의 중요성


6) 말씀은 힘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소공동체가 안 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복음과 멀어져 있고 신자들이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복음과 멀어지면 교회의 정체성을 잃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사성을 잃게 되고 교회의 역동성도 잃게 된다. 교회가 정체성을 잃게 되면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으로 가르치고 복음보다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하게 가르치는 큰 잘못을 하게 된다. 그러면 생각이 있고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게 된다.


말씀이 없으면 힘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말씀이 곧 힘이기 때문이다. 유럽은 물론이고 한국 교회도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그 위기는 냉담자의 급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수가 본당의 전체 신자수 가운데 약 30%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70%는 주일미사에도 참례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냉담자들이다. 그들이 냉담하는 이유는 평소에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 복음 중심의 신앙생활과 반대되는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냉담자들은 고통과 십자가의 의미와 가치를 모를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어려움이 생기면 십자가를 지고 갈 힘이 없었던 것이다.


● 말씀은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자 이루어졌고 그분께서 명령하시자 생겨났기 때문이네.”(시편 33,9) 또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이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는 말씀이 나온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 이 말씀들은 하느님께서 빛을 창조하실 때에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똑같은 방법을 쓰셨다. 즉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창세 1,3)이라는 구절이 창세기에 10번이나 나온다. 그리고 그 창조하신 만물을 당신의 말씀으로 지탱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낸다는 것으로 없는 것을 있게 만든다는 말이다. 창조적인 힘이 가장 크고 무서운 힘이다. 그 창조적인 힘은 하느님의 힘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그런 창조적인 힘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창조적인 하느님의 힘을 말씀을 통하여 얻어 누릴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면 내 안에 창조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이 창조적인 힘으로 많은 기적을 이루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모세를 말하고 싶다. 모세는 이집트의 파라오 왕궁에 살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겁이 나서 도망을 갔다. 도망자 신세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모세는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량한 처지가 되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라오에게서 구해내라는 엄청난 명령을 내린다.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탈출 3,11-12) 그러나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하느님의 힘을 받아 수많은 기적을 일으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파라오에게서 해방시켰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서도 하느님의 힘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다. 천사가 말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그리고 또 천사가 말하였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성경이 말하는 많은 기적 사화들이 성경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오늘을 사는 나에게 그 기적의 말씀이 육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읽는 독자에게 일어나야 한다. 모세가 일으킨 출애급의 기적이 내 안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성모 마리아에게 일어난 성령으로 인한 예수님의 잉태가 내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나도 예수님처럼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 말씀은 부활의 힘을 가지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당신에 관한 말씀을 풀이해주셨다. 그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부활을 체험하였다. 제자들은 고백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실 때에도 당신의 말씀으로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리실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 말씀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 말씀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진하게 만날 수 있다.


● 절망은 없다!


말씀의 힘을 믿는 사람은 창조의 힘을 체험할 수 있다. 또 말씀의 힘을 믿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힘이 주어진다. 이 말씀의 힘은 하느님의 힘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하였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2코린 4,7-9) 말씀 없이 사는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면 쓰러진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 24-27)


복음으로 복음화를 이루어야 한다. 다른 것으로 복음화할 수 없다. 새로운 복음화는 새로운 열정, 새로운 방법, 새로운 표현이다. 새로운 열정을 찾아야 한다. 그 새로운 열정도 말씀과 복음으로만 가능하다. 우리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힘이 없어 보인다. 생기도 없다. 사제들의 사목생활에도 힘이 없어 보인다. 특히 사제들의 강론에 힘이 없어 감동을 느끼기가 어렵다는 말도 많이 들린다. 교회는 역동성을 회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소공동체의 목적은 곧 ‘말씀’과 ‘복음’으로 교회를 살리기 위함이다. ‘말씀’과 ‘복음’으로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생기와 역동성을 찾기 위함이다. 말씀은 힘이다!


[월간빛, 2013년 8월호]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2)


Ⅱ. 복음 중심의 교회


1.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2. ‘말씀’의 중요성


7)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요한 11,27)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사람들이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억지로라도 모셔다가 임금으로 모시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끝까지 그분을 끈질기게 따라 다녔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썩어 없어질 것들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분’이시다.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분’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바로 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 마을의 회당에서 당신을 두고 예언한 성경 말씀, 즉 이사야 예언서 61,1-2의 말씀을 읽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당신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바로 그분, 즉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분’임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당신이 읽으신 두루마리를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 주시고 말씀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분’은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시다.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시며 예언자이신 그분은 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그분이어야 한다. 아무나 “내가 메시아다.” “내가 그리스도이다.”하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분’이 될 수는 없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께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묻게 하였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그러자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4-5) 이 말씀 역시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분이시다.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이사 26,19) 그리고 또 이런 말씀도 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5-6)


이 말씀들은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바로 그분’이신데 그분이 오시면 예언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그런 분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분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인생에 가장 큰 숙제는 죽음이다. 이 죽음까지도 해결하실 수 있는 그런 분이어야 한다.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는 그런 분이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기적을 일으키시면서 그의 동생 마르타를 통하여 당신을 알려 주셨다. 마르타가 고백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이런 선언을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분이야말로 진정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분 이시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시다.


●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요한 17,12)


특별히 요한복음 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사화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위에 소개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요한 17,12)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수난사화에 7번이나 나온다. 당신이 하신 말씀과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과 행동이 우연히 일어나거나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모두가 성경 말씀에 예언된 행동과 사건과 말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루카 24,27)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루카 24,44-46)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즉 파스카의 신비가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 16,13) 그리고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가 대답한 그리스도는 세례자 요한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마태 11,3)라고 물은 바로 그 ‘오실 분’이심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 질문, 즉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의 질문은 바로 나에게 하신 질문이다. 나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분’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진정한 고백을 하고 또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 예수님은 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분’을 알아야 한다. 소공동체를 통하여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중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월간빛, 2013년 9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3)


III. 평신도 중심의 교회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1. 어불성설(語不成說)의 교회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성직자 위주의 교회’를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바꾸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성직자 중심, 혹은 성직자 위주의 교회였다. 그로 인하여 평신도는 교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방관자, 구경꾼으로 전락하였고 평신도들의 자발성이 결여된 탓으로 언제나 소극적인 평신도의 모습을 버릴 수가 없었다.


지금 교회는 복음화, 그리고 새로운 복음화를 외치고 있고 이 새로운 복음화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신앙의 해를 선포하기까지 하였다. 이 새로운 복음화는 새로운 열정, 새로운 표현, 새로운 방법을 말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새로운 열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교회는 열정(熱情, passion)이 없다. 평신도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성직자들의 처분만 기다리는 자세로는 절대로 새로운 열정을 가질 수가 없다.


한국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오용석 사무총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거의 반세기가 지났지만 평신도들은 세례와 견진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사제직, 예언직, 왕직 3중직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존재라는 의식 없이 여전히 성직자 중심의 ‘옛’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성직자들이 시키는 대로 수동적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본당 사제들이 평신도들이 바뀌기보다 예전처럼 해주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신자들을 대해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신앙의 해’와 ‘새로운 복음화’에서 강조되는 평신도 사도직을 위해서 반드시 쇄신되어야 할 부분이다.”(사목정보 2012, 10월호 22면)라고 말했다.


평신도들이 방관자 내지 구경꾼으로 남아 있는 이상 교회의 새로운 열정은절대로 기대할 수가 없다. 미래교회의 성패는 성직자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역할에 달려 있다. 또 미래교회의 성패는 평신도들의 양성과 활성화에 달려 있다. 평신도들의 자발성 없이 교회는 절대로 새로운 열정을 기대할 수가 없다. 옥한흠 목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교회의 주체요, 얼굴인 평신도를 예수의 제자로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확신한다. 여기에 우리 교회의 사활이 걸려 있다.”(평신도를 깨운다, 옥한흠, 33면)고 말했다. 얼마 전 수원교구에서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이근덕 신부는 “성직자 중심으로 운영되는 현재의 교회 제도와 방식은 성직자들에게 도리어 독(毒)이 되고 있다.”(가톨릭신문, 2013.6.16)고 말하였고, 유희석 신부는 “우선 본당 공동체 내 사목자들의 사목형태를 일신하기 위해 본당 공동체의 주인은 바로 신자들임을 잊지 않고, 평신도들도 주인의식을 갖추도록 해 쌍방적인 협력 사목을 해나가야 한다.”(가톨릭신문, 2013.6.16)고 말하였다. 또한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최홍준 회장은 “‘한국교회에서 평신도는 여전히 주변적 또는 보조적 인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주소’라고 지적하며 ‘평신도의 능력이 교회에서 적극 활용될 수 있도록 본당을 비롯한 교회 각 분야에서 평신도 전문가와 지도자를 양성하고 활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가톨릭신문, 2012.11.18)


유명한 교회론 신학자인 한스 킹 신부는 “교회가 참으로 하느님 백성이라면, 어불성설인 것은 ‘교회’를 ‘평신도’와 구별하여 마치 평신도는 완전한 의미에서 ‘laos’가 아닌 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직자 위주의 그릇된 교회관이다.”(교회란 무엇인가, 분도, 85면)라고 말했다.


평신도라고 지칭하는 ‘laicos’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알면 평신도들이 왜 교회에서 성직자들의 시녀 역할이나 기쁨조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교회가 얼마나 잘못하였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laos’라는 의미가 ‘laicos’로 쓰이면서 평신도의 개념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신약성경에서 ‘laos’라는 말이 ‘하느님 백성’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하여 자주 사용되었는데 반하여, 평신도를 지칭하고 있는 왜곡된 개념인 ‘laicos’, 즉 ‘평신도(문외한, 국외자)’라는 말은 성경에 전혀 없는 말이다. ‘laicos’라는 말은 이교도들에게는 ‘무식한 대중’이라는 뜻이며 유다인들에게는 ‘사제나 레위가 아닌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laicus’의 뜻은 너무나 비하된 의미를 갖고 있다. 즉 그것은 ‘물건’, 혹은 ‘사물’처럼 취급되는 ‘자격 없는 대중’, ‘낮은 백성’이라는 그리스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laicus’라는 말이 ‘보통 신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성직자는 왕과 황제들처럼 성품을 받은 사람으로서 특권이 부여되고 백성을 가르치고 다스리는 지위를 가지며 교육과 예술, 그리고 지식을 독점하는 위치에 선 사람으로 대우하였다. 1142년에 반포된 교령(Gratiani)에 첫째 계급으로는 신부와 수도자가, 둘째 계급으로는 평신도가 언급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트리엔트 교리서에는 “주교와 사제들이 하느님의 위격을 친히 지상에서 대리하기 때문에, 그들의 직책은 필시, 보다 높은 다른 직책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직책임에 틀림없다. 그 때문에 그들은 천사들이라고 불릴 뿐만 아니라 신(神)들이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이 불사적인 하느님의 불가사의한 힘을 우리한테 대리하기 때문이다.”(제3천년기의 한국교회와 신학, 심상태, 59면)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태양과 달의 비유가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되기도 하였다.”(같은 책 59면)고 소개하고 있다.


1908년에 반포된 비오 10세의 교서(Haerent Animo)의 한 문장 속에는 “사제와 평신도의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처럼이나’ 크다.”고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같은 책 62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역사적인 영향으로 아직도 우리는 그 역사적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갇혀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한스 큉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교회를 말하면서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 백성이다. 교회를 성직화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하느님 백성이라면 명약관화하거니와 교회는 결코 어떤 특정한 계급 또는 신분이나 교회 내의 어떤 특정한 당국 또는 관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교회는 온 하느님 백성이요, 온 에클레시아이며, 온 신앙 공동체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교회 안에서 동등하다.”(같은 책 85면)고 말했다.


옥한흠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 잃어버린 성경적 평신도상을 다시 회복하는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일을 위해 교회 지도자가 된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가 잠들어 있으면 그 교회는 세상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집단으로 전략하고 말 것이다. 다가오는 예측 불허의 세기를 교회가 책임지기 위해서는 평신도를 깨우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평신도를 깨운다, 49면)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다. “평신도가 호응적이고 능동적이며 건설적인 교회의 일원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는 바른 이유는 신학적 원리에 입각한 실용주의나 편의주의 때문이 아니라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역자가 평신도의 도움을 필요로 해서도 아니며, 평신도가 유용한 존재가 되기를 원해서도 아니며, 지금 세상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그의 뜻으로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같은 책 35면) 평신도 중심의 교회를 만드는 것은 시대적인 요구에 앞선 복음적 요구이다.


[월간빛, 2013년 10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4)


Ⅲ. 평신도 중심의 교회


1. 어불성설(語不成說)의 교회


2. ‘새로운 복음화’의 주역은 평신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내놓은 새로운 용어가 ‘Aggiornamento(현대 세계에로의 적응)’이다. 이 주제를 구현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대의 징표’를 읽는 것이다. 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현대 세계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갈망하는지를 알 수 있다. 교회는 오늘날 ‘시대의 징표’ 를 읽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11년도에 언론에서 세계 곳곳에서 대중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대중들이 분노하고 있다. 대중들의 분노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중동 민주화를 이룩한 대중들의 분노는 쓰나미처럼 밀려가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가(Wall街)까지 점령했다. 오랜 세월 침묵하던 대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유는 가속화되고 있는 사회 양극화 때문이다. 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대중들의 삶이 갈수록 피폐해진 것이 대중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중략> 월가의 분노는 최상위 1%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반면 나머지 99%는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매일신문, 2011.11.12) 이런 사회적 현상을 세상의 일로만 여기고 외면하지 않고 ‘시대적인 중요한 징표’로 읽어야 할 것 같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양극화 현상이 심각하게 뿌리박혀 있다. 이러한 교회의 양극화 현상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아직도 우리 교회는 어불성설의 교회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1%가 99%의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1%가 아닌 그보다 훨씬 더 적은 0.09%(성직자 : 4,621명, 평신도 : 5,309,964명. 2011년 한국천주교교세통계)의 성직자들이 99.91%인 평신도들을 병신도나 찬밥대우를 하면서 교회를 독점하고 있다.


그리고 주객전도(主客顚倒)의 현상과 함께 과연 이런 어불성설의 현상을 보면서 99.91%가 박탈감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으며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탈감과 소외감으로 생긴 반란과 분노가 ‘냉담’이라는 심각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많은 지성인과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러니 이런 교회에서 어떻게 교회의 정체성과 복음적인 교회의 모습을 느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새로운 복음화가 말하는 열정과 생동감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시대적인 징표’와 함께 복음적인 요구를 잘 읽고 과감한 변화와 구조 개편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고 하신 예수님의 분노가 담긴 말씀이 더욱 크게 들린다.


정하권 몬시뇰은 “교구나 본당이 교구장이나 본당 신부의 봉건 영토란 말인가? 그 구역 안에 있는 신자와 재산이 그 구역을 담당하고 있는 주교나 신부의 소유물이란 말인가? 모두 그리스도의 양이요 하나인 교회의 신자요 재산이 아닌가.”(사목 339호, 279-280면)라고 말했다. 교구장이나 본당신부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구민이나 본당신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성직자는 신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차원을 넘어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들이지 결코 다스리거나 군림하는 특권층의 권력자들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결코 교구민이나 본당신자들은 교구장이나 본당 주임신부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학생들이 학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학생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또한 교구가 본당을 위해서 존재하지 본당이 교구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본당 없이 교구가 있을 수 없고 본당의 복음화 없이 교구의 복음화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학교가 교육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부가 학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고 말씀하셨다.


또한 이영헌 신부는 “성서의 하느님은 한마디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며 언제나 인간을 향해 당신 자신을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다. <1요한 4,9 참조> 하느님의 이와 같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극치를 이루고 있다.”(함께 걷는 하느님과 인간, 이영헌, 40면)고 말하고 있다.


교구장이나 주임신부가 교구나 본당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해서도 안 되며 평신도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독선과 독재, 그리고 횡포를 부려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내가 누구를 위한 성사(聖事)인가를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생각하는 탓으로 많은 본당에서 주임신부와 신자들간의 충돌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평신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교서에서 말씀하셨다. “새로운 복음화라는 도전적이고 경이로운 이 위대한 과업이 교회에 맡겨져 있으며, 이는 현대 세계에서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인간과 사회의 모든 가치와 요구를 존중하며 인간과 사회에 봉사하는 가운데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로서, 스스로를 이 위대한 과업의 능동적이고도 책임있는 주체로 인식하여야 합니다.”(64항)


특히 성령의 또 다른 은총으로 선출된 새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2013년도 브라질 세계청년대회에서 “평신도를 성숙하지 못하게 하는 성직자 중심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며 평신도를 복음 선포의 동반자로 여기며 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기를 당부했다.”(가톨릭신문. 2012.8.4)는 가톨릭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또한 모리스 준델 신부는 “부탁이니 제발 성직자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선택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뽑히게 된 특전을 받은 사람이란 없습니다. 바리사이주의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정말 어느 누구도 감독해야 할 미성년자처럼 대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라고 말했다.(나날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모리스 준델, 107면)


지금까지 성직자들이 교회의 모든 사목이나 행정을 독점한 나머지 평신도들을 아직도 미성년자, 어린애로 남아 있게 만들어 버렸다. 아직도 총회장을 비롯한 본당 사목평의회 간부들이 실질적인 구실과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기가 참으로 힘이 드는 현실이다.


정하권 몬시뇰께서도 말했다. “급변하는 세상에 효과적으로 봉사하려면 좀 더 다원적이고 다양한 봉사 체계가 필요하며, 평신도들의 막강한 능력과 경험이 이 봉사 체계 안에 유권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수렴되어야 하겠다.”(사목 339호, 정하권, 284면)


소공동체가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도 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교회, 성직자 위주의 교회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명심해야 한다. 사목은 사제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평신도들도 훌륭한 공동 사목자들이며 사목 동반자들이다. 평신도들이 항상 복음화의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는 한 복음화는 불가능하다. 평신도들이 새로운 복음화의 주역이다!


[월간빛, 2013년 11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5)


Ⅲ. 평신도 중심의 교회


1. 어불성설(語不成說)의 교회

2. ‘새로운 복음화’의 주역은 평신도!


3. 가정 복음화가 복음화의 핵심이다.


소공동체가 잘 안 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의 눈에 평신도들은 아직도 어린애, 아니 요람에 누워있는 아기에 머물러 있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할 줄도 모르고 할 생각도 못한다. 시키는 것만 하는 아주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모습에 갇혀 있다. 아무리 교회의 주인이 평신도라고 해도 그 말을 수긍하지도 않고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또 교회생활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직자나 평신도나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바꾸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만일 이런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공동체는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공동체는 교회의 비전이다. 교회의 비전은 평신도들에게 있다. 미래 교회의 성패는 평신도들의 양성과 교육에 달려 있다. 다른 말로 ‘평신도가 교회의 미래이다.’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평신도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은 복음화의 핵심이 바로 가정 복음화이기 때문이다. 복음화를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정 복음화 때문이다. 가정의 주인은 성직자들이 아니라 평신도들이기 때문이다.


복음화가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곳은 다름 아닌 가정이다. 만일 가정이 바로 서지 못하고 가정이 복음화되지 않는다면 교회의 복음화, 세상의 복음화는 불가능하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가장 심각한 현상은 ‘가정 파괴’에 있다.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더 심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2008년도 통계에 의하면 40%가 이혼을 했고 하루에 640명의 ‘돌싱(돌아온 싱글)’이 탄생하고 있다. 혼외 출산도 심각하다. 구라파에서는 ‘싱글 맘’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2009년 5월 15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아이슬란드 66%, 스웨덴 55%, 노르웨이 54%, 미국 40%, 영국 44%, 아일랜드 33%, 이태리 22%가 싱글 맘이다. 구라파의 경우 열 명의 아이가 태어나면 평균 다섯 명은 혼외 가정, 즉 아버지 없는 싱글 맘의 가정에서 태어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싱글 맘’이 100만, ‘싱글 대디’가 24만 가구를 넘어 섰다. 가정 공동체가 무너지면 교회도 세상도 다 무너진다. 가정 복음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신앙의 해’를 선포하시면서 무엇보다 ‘그리스도 신앙의 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를 말씀하셨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주제도 그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의 전수’가 안 된다는 말이다. 심각한 일이다. 교회의 미래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왜 신앙의 전수가 안 되는가? 가장 큰 원인은 가정에 있다. 자녀들이 부모들의 신앙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녀들이 신앙의 유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모들은 혼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녀들의 신앙에는 관심이 없거나 소홀히 하는 가정들이 많다. 본당에서 간부로 봉사하는, 심지어 총회장이나 회장급 간부들까지도 자녀들의 신앙생활은 냉담 중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주일학교에 학생들이 보이지 않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신앙의 전수가 안 되고 있다는 말이다. 가정이 파괴되고 가정이 교회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가정이 복음화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가정의 복음화가 가장 시급한 과제이며 가정 복음화가 새로운 복음화의 결정적인 핵심이고 지름길이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개막 연설에서 “불행하게도 많은 이유로 인해서, 가장 오래 전에 복음화된 제도인 혼인이 깊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신앙의 위기와 혼인의 위기는 직접 연계되기에 혼인을 ‘새로운 복음화’의 대상으로서뿐만 아니라 혼인 자체가 복음화의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가톨릭신문, 2012.10.14)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정을 복음을 전하는 사명과 그 자체의 특별한 특성을 가진 교회로 ‘가정 교회(Domestic Church)’라고 부르고 바오로 6세 교황은 가정을 사회와 교회에 가장 기본이 되는 세포로 ‘작은 교회(Little Church)’라고 불렀다. 오늘날 복음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가장 큰 이유가 기존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있다. 즉 신앙과 생활이 유리된 잘못된 신앙생활이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과 생활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그들이 성당에 갈 때만 신자이고 집에 오면 다른 사람, 즉 비신자가 되고 만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성당에만 계시지 집이나 가정에는 계시지 않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모리스 준델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발을 씻으실 때 무릎을 꿇으시며 하느님의 지성소(至聖所)가 바로 인간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성체성사, 모리스 준델, 대구대교구 사목국, 19면) 그리고 또 말했다. “성체성사 안에는 매우 큰 요구가 있습니다. 내가 온 교회와 우주에 현존이 되는 한에서만, 실제적 현존은 우리에게 참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실제로 사셔야 합니다. 우리는 감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감실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께서 감실에 계시는 것은 아무 쓸 데가 없습니다.”(같은 책 32면)


우리가 지성소가 되고 우리가 감실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교회가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성령의 궁전이라고 했다. 바오로 사도는 말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그리고 또 말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바오로 사도는 또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2) 이 말씀들은 우리가 바로 교회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교회가 될 때 우리가 사는 가정 또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일컬어 성전이라 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19-21) 예수님의 몸이 교회인 것처럼 우리의 몸도 교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 가정을 복음화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교회이고 우리 가정이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소공동체가 부르짖는 “우리가 교회다!”라는 구호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평신도는 복음화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복음화의 주역이다. 왜냐하면 가정의 주역들이 평신도들이기 때문이다. 소공동체로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평신도들이 교회의 비전이고 미래이기 때문이다.


[월간빛, 2013년 12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6)


Ⅳ 친교의 교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1. 이웃이 없다.


가. 개인주의 시대


다음은 2013년 1월 18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내용이다. “지난 16일 오후 2시쯤 부산 서구 남부민동 4층짜리 다세대 주택. 이 주택의 건물주 이모(39)씨는 수도관이 동파되는 바람에 보수 공사를 해야 했다. 이씨는 동파된 수도관의 위치를 찾기 위해 2층에 세든 김모(55)씨의 집 보일러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머리가 몸에서 떨어진 백골 상태의 시신이 보일러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출동한 경찰은 보이러실 천장 철골에 매듭진 전기줄에 김씨의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경찰은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는 점 등으로 미뤄 김씨가 보일러실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집안에선 2006년 11월 달력이 펼쳐져 있었고, 2007년 1월부터 배달된 전기, 수도 등 각종 고지서와 독촉장 등이 쌓여 있었다. 경찰은 김씨가 2006년 말 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자살자의 죽음을 이웃도 가족도 모두 7년간이나 몰랐다는 충격적이고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2013년 11월 8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또 다른 기사이다. “택배회사 로고가 찍힌 차량이 일본 도야마현 다카오카 시에 있는 560년 된 고찰 앞에 멈췄다. 택배 기사가 네모난 상자를 승려에게 건넸다. 승려가 허리를 굽혔다. ‘잘 받았습니다.’ 발신자는 장의업체. 상자 속 내용물은 불과 일주일 전까지 일본 열도 반대쪽 해안 지바현에서 가족없이 혼자 살다 지병으로 숨진 64세 할머니의 유골이었다. 친척들은 다들 ‘인연 끊긴 지 오래라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르기 곤란하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장의업체가 지자체 허가를 받아 할머니를 화장한 뒤 유골을 수습해 이곳 다이호지 절에 택배로 보낸 것이다. … 이 절에는 이런 식으로 일본 전역에서 홀로 죽은 사람들의 유골이 하루가 멀다하고 택배로 온다.… 2009년 한 장의업체가 이 절에 신자들의 합사 묘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무연고 사망자의 유골을 받아달라.’고 부탁해 왔다. 다이호지 절 관계자 히즈메 나오쓰구 씨는 “처음엔 정말 난감했다. 그분에게 ‘만약 우리가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폐기된다.’고 해서 유골함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일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무연고자 유골’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다이호지 절에 쉬고 있는 영혼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죽어도 시신을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선 ‘무연사(無緣死)’지만, 정말로 가족도 친척도 없는 혈혈단신은 아니다. 부인도 있고 자식도 있고 몇 년 전까지 멀쩡하게 직장도 다녔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인연이 끊겨 홀로 숨진 경우가 많다. 젊었을 때 가족을 팽개치고 회사에만 올인하다가 나이 먹어서 가족에게 외면당한 샐러리맨도 있다. ‘고령화·핵가족화·개인주의화’를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라는 게 일본 언론과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일본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도 이런 일이 곧 일어날 것이다. 작년 한 해 ‘무연고자’로 처리된 사람이 810명으로 불과 3년 전보다 95명 늘었다. 독거노인도 더 많고 고독사도 더 잦은 서울에서는 일단 화장해서 10년간 납골했다 500~700명씩 한 봉분에 묻는다고 한다. 개인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달아 이 사회가 깊이 병들어, 아니 죽어가고 있다. 유골이 택배로 배달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필자가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일이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찾아 오셨다. 그 분의 하소연이다. “신부님, 배고픈 것은 참아도 외로운 것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일년 내내 내 방문 한번 열어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신부, 수녀는 뭣 하는 사람들이며 구역장, 반장은 뭣 하는 사람들입니까?” 이 말은 들은 필자는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에게 본당 사목자로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께 용서를 빌었다. 필자가 소공동체를 하게 된 직접적이고 강한 동기가 되었다. 현재의 반과 구역은 본당의 행정 조직에 불과하다. 지금 본당의 반 모임과 구역 모임이 단순한 본당의 행정조직의 차원을 넘어 교회가 되어야 하고 거기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특별히 이웃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한국사회에 또 하나의 심각한 현상은 ‘자살’이다. 한국은 OECD 30개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의하면 하루 34명이 자살을 하고 있으며 한 해의 자살자 수가 울릉도 도민(1만 235명)보다 많다. 그리고 20~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왜 자살을 할까? 이유는 뻔하다. 고독하기 때문이다. 이웃이 없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고 심지어 같이 밥을 먹을 사람도 없다. 요즈음 일본에서는 화장실에서 혼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최근 화장실에서 혼자 밥을 먹는 ‘변소 밥’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왕따를 당해 친구가 없는 아이가 화장실 밥을 먹는 경우가 많을 것 같지만, 대학생이나 사회인이 변소 밥을 먹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친구가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이다. 어느 학자는 학교와 직장에서 함께 식사를 할 친구가 없는데 대해 극도의 공포감을 가지는 것을 ‘점심 친구 증후군’이라 불렀다. 타인과 사이좋게 지낼 수 없는 자신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일본인 특유의 질병이다. 화장실은 이 공포를 벗어날 수 있는 쉼터이다.”(매일신문 2011.7.9) 일본만 그런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나라의 회사에서도 ‘화장실에서 밥을 먹지 맙시다.’라는 글이 회사의 여기 저기에 나붙을 날이 곧 다가오리라 예감된다. 아니 이미 있는지도 모른다.


소공동체가 안 된다고들 아우성이다. 안 될 수밖에 없다. 모두가 개인주의 시대를 살고 있고 모두가 이웃 없이 살고 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 말씀은 아랑곳없이 이웃 없이 ‘나홀로’ 신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많은 신자들이 ‘이웃이 되어주는 삶’(루카 10,36)을 살지 않고 ‘이웃이 되어주기’(루카 10,36)를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요즈음 많은 신자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본당에 교적을 옮기지 않고 옛날에 다니던 성당으로 먼 길을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옆집에 살고 있는 같은 천주교 신자들에게까지 이웃이 되어주지 않고 있다. 지역공동체에 관심없이 자기 편리한 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공동체성을 상실한 삶, 혹은 공동체성을 상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거기에는 하느님도, 예수님도 계시지 않는데 말이다. 하느님의 신비, 즉 삼위일체의 신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나홀로’ 신앙을 통해서는 하느님도, 예수님도 결코 만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세상도 붕괴하고 교회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공동체만이 이 세상을 살리고 우리 교회도 살릴 수 있다.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공동체를 통하여 죽어가는 신앙생활을 살려야 하고 침몰하는 교회를 살려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려야 한다. 소공동체만이 살 길이다. 소공동체만이 대안이다.


[월간빛, 2014년 1월호, 박성대 요한 신부(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7)


Ⅳ 친교의 교회


2.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정호승 시인이 일간 신문(2008.10.25. 동아)에 올린 ‘새벽편지’의 제목이다. “가을은 찾아 왔지만 지난여름 태풍을 잊을 수 없다. 새벽에 느닷없이 창을 뒤흔들던 태풍은 순식간에 수많은 나무를 쓰러뜨렸다. 아침에 일어나 아파트 마당에 나가보니 10여 그루의 소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져 있었다. 대부분 30m가 넘는 소나무로 어떤 녀석은 허리가 두 동강난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나는 쓰러진 소나무를 바라보며 올 게 오고 만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국 서남부 지역엔 밑동의 지름이 10cm인 데다 키가 90m 이상 똑바로 자라면서도 뿌리가 2, 3m밖에 되지 않는 레드우드라는 삼나무가 있다. 이 거목은 체구에 비해 뿌리가 연약하지만 낙뢰에 불타는 일은 있어도 태풍에 쓰러지는 일은 거의 없다. 뿌리가 땅 밑으로 깊게 뻗진 못하지만 옆으로 25m 이상 뻗어 한 뿌리에 여러 그루의 나무가 자라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각자 한 그루의 나무지만 땅밑에서는 한 뿌리에 연결돼 공동체를 이루며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아파트 소나무가 레드우드처럼 뿌리가 서로 연결됐다면, 나무와 나무사이를 대나무 막대로 한데 연결해 묶어놓기라도 했다면 지하주차장 위에 사는 삶이었다 하더라도 태풍에 쓰러지진 않았을 것이다.


강진 다산초당 가는 산길엔 소나무 뿌리가 마치 혈맥처럼 길 위로 울퉁불퉁 뻗어 나온 ‘뿌리의 길’이 있다. 그들은 뿌리가 서로 뒤엉킨 채 한 몸을 이루고 있어 산길을 오르는 수많은 사람이 밟아도 아파하거나 태풍에 쓰러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같다. 이처럼 한 그루의 나무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뿌리를 깊게 뻗어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나무의 뿌리와 한 몸이 되어 공동체를 이루는 것 또한 중요하다.


우리도 지상에서는 각자 한 그루의 나무로 서 있지만 그 뿌리는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 그러나 우리가 이루는 공동체는 레드우드나 다산초당 가는 산길의 소나무처럼 서로 이해하고 공존하는 공동체라기보다 이해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서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공동체다. 지상에서는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도 땅속에서는 나와 다른 뿌리라고 해서 거부하고 받아 들이지 않는다. 나와 삶의 방식이 다르고 이념의 뿌리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한 몸이 되길 꺼린다면 끝내는 우리 아파트 소나무들처럼 쓰러지고 말 것이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있음으로써 나는 비로소 존재한다. 일찍이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 있다면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는 결국 당신이 없으면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인도 출신 예수회 신부 앤서니 드 멜로가 쓴 우화 중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남자가 연인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연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남자가 ‘나야, 나!’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는 ‘돌아가라, 이 집은 너와 나를 들여놓는 집이 아니다.’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곳을 떠나 광야로 가서 몇 달 동안 연인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와 문을 두드렸다. 연인이 다시 ‘누구냐?’고 물었다. 남자가 이번에는 ‘너야, 너!’라고 말했다. 그러자 금방 문이 열렸다.


우리는 이렇게 ‘나’이면서도 동시에 ‘너’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당신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라는 존재 속에 포함된 ‘너’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갈등과 분열의 폭을 증폭시킨다. 우리 아파트도 하늘로 쭉 뻗은 몸매를 자랑하는 소나무만 있다면 조경의 미는 형성되지 않는다. 울타리로 심는 쥐똥나무나 회양목 같이 키 작고 볼품없는 나무와 어우러져야 조경의 미가 완성된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어우러짐으로써 아름다움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서로 다르다는 점이 갈등의 원인이 되지만 삶의 원동력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어쩌면 지난 여름 태풍이 소나무를 쓰러뜨렸는지 모른다. 이제 우리 아파트 소나무는 다시 일어섰다. 비록 뿌리는 땅속 깊이 뻗어나갈 수 없지만 버팀목을 세우고 팽팽한 쇠줄로 몸을 한데 묶었다. 지난 여름 태풍보다 더 강한 태풍이 불어오더라도 이제 서로 한 몸을 이루며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태풍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다고 서로 속삭이면서….”


김영식(천호식품 대표) 씨의 또 다른 아름다운 글을 소개하고 싶다. <이웃끼리 저녁 한번 합시다> “며칠 전 내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방(榜)을 하나 붙였다. 우리 동(棟) 주민끼리 저녁이나 한 끼 하자는 내용이다. … 사실 같은 건물에 산다는 것은 굉장한 인연이다. 불교에서는 5천 겁(劫)의 인연이 있어야 이웃에 산다고 한다. 부부의 인연이 8천 겁이라고 하니, 이웃과의 인연 또한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인연에도 서로 데면데면하다. 심지어 이웃끼리의 갈등은 사회적 문제까지 확대됐다. 국민의 88%가 층간 소음 등 이웃 간 갈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문제의 시작은 이웃과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웃끼리 얼굴이라도 익히자는 뜻으로 엘리베이터에 게시물을 붙였던 것이다. 과연 몇 분이나 참석할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이웃 몇 분과 식사에 소주나 한 잔 곁들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엘리베이터 게시물에는 모임을 응원하는 어린 친구들의 ‘파이팅!’ 메모부터 ‘꼭 참석하겠다.’는 메모까지 모임에 대한 반응이 꽤 좋았다.


드디어 일요일 저녁 6시, 식사 자리에는 총 78가구 중 65명이 참석했다. 서로에게 무관심한 듯 보였던 사람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웃과 친해지기 위해 그렇게 적극적일 수가 없다. 치과의사 부부는 모두에게 줄 선물로 치약을 준비했는가 하면, 위·아래층 사람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서로 건배를 하면서, 층간 소음을 적게 하려고 위·아래층 상황에 맞춰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저녁 9시쯤 자리가 파할 때까지 한 사람도 먼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리 아파트에는 변화가 느껴졌다. 얼굴을 익히고 나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가벼운 인사나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민 스스로 만든 단 한 번의 모임에 이 정도의 변화가 생기다니….


그러고 보면 한국 사람은 참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무관심한 척해도 얼굴 보고 인사 몇 번 나누면 바로 정(情)이 들고 만다. 이렇게 서로의 사정을 아니 위층에서 아이들이 쿵쿵거린다고 흉기를 들고 올라갈 수 없을 것이며, 아래층에 공부하는 학생이 있는데 감히 쿵쾅거릴 수 있겠는가? 서로가 정을 나눌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가만 있을 게 아니다. 우리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삭막하다는 도시의 아파트촌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 ‘작은 행복’을 만들어 가는 좋은 이웃들이 점점 늘어나길 기대해본다.”(2013.12.6. 조선)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동체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음적인 삶인가를 체험하고 증거하기 위함이다. 공동체를 사는 것만이 세상과 교회를 살리는 일이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2008년도 성탄 메시지에서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이 세상은 붕괴될 것이다.” 소공동체가 답이다!


[월간빛, 2014년 2월호, 박성대 요한 신부(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8)


Ⅳ 친교의 교회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3.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다.


지난 호에서 공동체가 아니면 사람도 사회도 결코 존재할 수 없고 살 수도 없다는 것을 소개하였다. 사람이 살고 이 세상이 진정으로 살려면 ‘함께’, ‘더불어’, 그리고 ‘같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만이 살 길이다.


최근 한 언론의 보도를 보면 “지난 20일 대구 달서구 한 임대 아파트에서 송모(56세)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이혼 후 혼자 살던 그는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영양부족 및 알코올성 간질환으로 쓸쓸하게 세상과 작별했다. 앞서 17일에는 김모(56세) 씨가 자신의 집에서 숨져 있는 것을 사회복지공무원이 발견했다. 그 역시 혼자 살면서 병을 앓고 있었으나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웃도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사회복지공무원이 달려갔을 땐 숨진 지 5일이 지난 뒤였다. 그날 같은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온 또 다른 사람도 세상을 떠났다. 56세 김모 씨로 밝혀진 그 역시 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혼자 쓸쓸히 지내다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맞는 고독사가 최근에는 중년층으로 퍼지고 있다. 이혼과 실업으로 말미암은 가족해체가 늘면서 홀몸 중년층이 두터워지고 있다.”(매일신문, 2014.1.24)


노인 고독사에 이어 중년층의 고독사가 늘어나고 있는 참으로 걱정스러운 현상이 우리 주변의 현실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공동체를 살지 않으면 이 세상은 붕괴되고 망해버리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성의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필요성과 당위성을 우리는 신앙의 차원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도 찾게 된다. 신앙인으로서 공동체를 살아야 하는 아주 중대한 이유를 하느님의 모습과 성경이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신비가 이 삼위일체의 신비 속에 다 들어 있다. 이것이 하느님의 모습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본질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좋으신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하느님의 본질과 모습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하느님은 사랑”(1요한 4,16)이시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그리고 곧 이어서 성령을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17) 하느님께는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지만 세 분의 하느님이 아니고 한 분의 하느님이시다. 성부와 성자, 성령이 모두 완전한 하느님이시지만 결코 하느님은 세 분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한 분의 하느님이시다. 그것을 일컬어 삼위일체의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수학적이고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 신비는 바로 사랑의 신비이고 하느님이 공동체이심을 말해주고 있다. 사랑을 살지 않고 공동체를 살지 않으면 이 신비를 절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나홀로’ 신앙생활을 하거나 공동체를 살지 않고 ‘외톨박이’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공동체를 살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신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아주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공동체를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차동엽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어떤 삶이 ‘인간의 완성’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크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홀로’의 길을 택합니다. 불가(佛家) 또는 도가(道家)에서 이 길을 택합니다. … 어떤 이들은 ‘더불어 함께’의 길을 택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이 길을 택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녔다고 얘기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본성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본성은 ‘삼위일체’로 드러납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풍요로운 나눔과 친교가 하느님의 본 모습입니다. 이들 세 위격(位格)이 각각 서로에게 ‘너’(=삼위)이면서 동시에 ‘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연대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이 나눔, 친교, 사랑의 연대를 본성으로 하는 하느님의 모상을 인간이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너’를 필요로 하는 존재요, 너와 ‘더불어 함께’의 길입니다.”(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 차동엽, 117-119면)


이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존재 방식이며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의 행복의 원리가 이 삼위일체의 신비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공동체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다른 말로 하면 ‘사귐의 신비’이며 ‘나눔의 신비’이며 ‘일치의 신비’ 이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신비는 ‘친교의 신비’ 이며 ‘사랑의 신비’이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고 공동체를 살아야 하는 정말로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체험하기 위함이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함이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부활 사화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 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28-31) 우리가 만일 ‘함께’, ‘더불어’, ‘같이’의 삶을 살지 않으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분을 만날 수도 없다. 또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지 않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만 체험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공동체를 살지 않으면 거기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 공동체를 살지 않으면 거기에 하느님도 계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하느님을 만날 수도 없다.


소공동체가 추구하는 교회의 새로운 존재 방식은 ‘친교의 교회’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이 ‘친교의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교회의 ‘새로운 존재 방식’이며 이것은 교회가 혹은 신학자들이 고안해낸 방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 원리나 방식에 근거를 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삼위일체의 신비에 근거를 둔 것이고 그 신비를 교회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통해서 드러내고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새로운 존재 방식’인 ‘친교의 교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 역시 복음적인 강력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성서학적인 관점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지 결코 시대적 요구나 사회적 요구 때문만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월간빛, 2014년 3월호, 박성대 요한 신부(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9)


Ⅳ 친교의 교회


4. 삼위일체적 친교


1) “교회가 송곳입니까?”


몇 년 전 필자가 교구에 대한 몇 가지 불만을 선배 신부님께 표현하였다가 그 선배 신부님으로부터 “박 신부, 송곳을 발로 차면 박 신부 발만 찔린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즉시 반발하면서 큰 소리로 반문하였다. “교회가 송곳입니까?” 모리스 준델 신부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최근에 저는 역사적인 작품인 교회사를, 특히 초기 시대의 것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공의회에서는 교의를 반대한 사람들을 너무나 잔혹하게 다룬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가령 네스토리우스가 에페소 공의회에서 어떻게 쫓겨나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육화의 진리들에 관련된 견해 때문에 문제가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그의 교설을 거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법의 희생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 교회법은 그를 괴롭혔고, 과연 인간의 정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온 무게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같은 세기의 또 다른 공의회에서 주교들은 자기들 생각에 그리스도를 갈라 놓는다고 생각되는 동료 주교를 갈가리 찢어 죽이도록 요구했습니다. 바로 이런 면이 이 교회 권위자들에게서 받는 인상입니다. 그들은 교의를 마치 압착(壓搾) 롤러처럼 여겼습니다. 그들은 결코 하느님을, 사랑의 친밀한 관계로 우리를 부르시는 사랑이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이성을 짓이겨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압착기가 아닙니다. 신앙이란 우리 마음에 당신의 비밀을 털어 놓으시는 하느님의 마음의 사랑입니다.”(나날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모리스 준델, 성바오로, 98-99면)


2)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는 ‘친교의 교회’


교회의 개념이 잘못된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역사적인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면서 복음에 입각한 교회의 성사성과 정체성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친교의 교회’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여러 교서들을 통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의 중심이 친교 교회론임을 분명하게 천명하신다. ‘친교의 교회론’은 공의회 문헌들의 중심 개념이고 기본 개념이다. … 교회 당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20주년이 되던 해인 198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2차 특별 총회를 통하여 지난 공의회에서 피력된 ‘친교의 교회론’이 모든 공의회 문서의 핵심적인 통찰이라고 선언하며 공의회 이후의 교회의 모든 쇄신 노력을 촉진하는 힘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1998년 로마에서 개최된 아시아주교대의원회의 의안집도 제6장 제목을 ‘친교인 교회’로 정하면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2차 특별 총회와 같은 ‘친교 교회관’의 입장을 반복하여 천명하고 있다. ‘시노드의 마지막 진술은 이 교회론의 중심 사항을 요약하고 있다. 곧 ‘친교인 교회’는 삼위일체의 친교에 근거를 둔다. 교회는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친교를 잇는 힘이며 표지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친교이며, 모든 민족의 친교의 장소이며 상징이다.’”(소공동체 연구, 주교회의, 84-86면)


3)교회는 계급사회가 아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본질과 본성과 실체를 드러내야 할 성사로서 계급적 구조와 상하 관계가 아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적 세 위격체로 존재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이 세 위격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삼위일체적 친교’를 드러내야 한다. 그 ‘삼위일체적 친교’를 심상태 몬시뇰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관계 안에 있는 순전한 생명이시요,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가없이 충만한 사건이시며, ‘줌(성부)’과 ‘받음(성자)’과 ‘하나로 함(성령)’이라는 ‘친교’이시다.”(소공동체 연구, 주교회의, 86면) 그리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적 신비는 결코 높고 낮음이 있는 계급 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세 위격들 사이에는 높고 낮음이 없고 앞서고 뒤따름이 없이 영원으로부터 진리와 사랑 안에서 영원히 서로 삼투하는 동등하고 동격의 친교 관계만이 존재한다.”(같은 책, 86-87면)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중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소공동체가 안 되는 큰 원인도 여기에 있다. 아직도 교회는 오랫동안 길들여진 교계(敎階)제도에 묶여 있거나 젖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교회는 피라미드식 계급(階級) 구조 안에 갇혀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성직자들이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신부들이 평신도들을 종이나 심부름꾼, 운전기사나 기쁨조로 취급하면서 독선과 횡포를 휘두르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또 다른 성직자 중심의 교회, 성직자 위주의 교회인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닐 수 없다.


우리 한국 교회는 레지오 마리애식 신앙생활에 젖어 있다. 한국 천주교회가 온통 레지오 마리애에 매달려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모든 본당이 레지오 마리애를 중심으로 본당 운영을 하고 있다. ‘Legio Mariae’는 글자 그대로 ‘마리아의 군대’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활동한 결과, 많은 신자들이 명령과 지시에 의하여 움직이며 복종과 보고를 하는 군대식 신앙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이로 인하여 신자들은 피동적이며 소극적인, 나아가 방관자 내지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교회에는 역동성과 창조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진부한 도식 안에 가두는 교회가 되어 화석화되거나 박제된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줄 뿐이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을 위한 구원의 진정한 성사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버린 죽은 교회가 되고 만다.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는 “과거의 교회관이 공동체보다는 교회법적 ·성사적 교회의 성격을 지녔다.”고 간주하면서 공동체적 차원을 간과하였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중세 이래 교회가 자신을 성서-교부적 친교 공동체로서보다는 교계적이요 법적으로 파악되는 사회적 실재로 이해하였고, 신학적으로도 제도 중심적 교회관이 주도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원래적 교회관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크게 변색되어 있었고 점점 뒷전에 퇴조해 있었다. 중세에는 특별히 교회와 국가가 혼돈되고 동일시되기에 이르렀고 여기에서부터 교회는 자신을 더욱 교계적이요 법적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한 사고 안에서 그 시대에는 조직체적이요 법적인 교회 이해가 자연히 넓게 자리를 잡게 된다.’”(같은 책 87면)


‘친교’는 교회의 본질이다. 이 ‘친교’는 성서적 개념인 코이노니아(koinonia)의 의미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 공동체성과 하느님과 일치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친교 공동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임병헌 신부는 ‘신적(神的) 친교’와 ‘형제적 친교’로 구분하여 나누고 있다.(같은 책, 90면 참조) 그러나 이 신적 친교는 상하, 수직적 계급구조의 개념이 아닌 ‘사랑의 관계’, ‘수평적 관계’, ‘사귐과 나눔’, ‘함께’, ‘더불어’, ‘같이’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신적 친교 내지 삼위일체적 기막힌 친교가 아닐 수 없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불교에 이런 말이 있다.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소공동체를 통하여 ‘삼위일체적 친교’를 드러내는 ‘친교의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월간빛, 2014년 4월호, 박성대 요한 신부(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0)


Ⅳ 친교의 교회


5. 세상과의 친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1)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 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 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 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정호승)


김수환 추기경의 손은 한 번도 성당에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성당에서 세상으로, 세상 안으로 뛰쳐 나왔다.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바로 예수님이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 모든 일간지 신문에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추기경께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성당에서 일어난 충격과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한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 사건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슬프고 수치스러운 일 때문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이나 김수환 추기경의 눈물이 주는 의미가 크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복음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는 ‘복음화’ 혹은 ‘새로운 복음화’를 부르짖고 있다. 이 ‘복음화’는 과거의 ‘선교’ 개념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교’란 신대륙을 발견하고, 1622년 포교성성의 설립과 함께 가톨릭 신앙의 전파를 의미하는 일반적 용어가 되었다. 선교에 대한 정의는 복음선포 활동의 여러 가지 단계나 양상 중에서 특히 교회로부터 파견된 선교사들이, 아직 복음을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민족이나 지역에 복음을 가르치고 그들을 개종시켜 교회를 부식(扶植)하는 활동”(선교의 어제와 오늘의 복음화, 정일, 27-28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선교’의 특징을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지리상의 발견 후 전통적 선교활동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을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된 구원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다고 간주하면서, 저들에게 선교사를 파견하여 구원의 진리를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이를 수용한 사람들을 교회로 입교시키는 것이다. 선교는 그 표현과 수행방법에 있어 독백적인 선포로 이루어지고, 그 성공도는 외부적으로 확인 가능한 예비신자나 영세자의 숫자에 입각하여 측정되며, 그 목표도 교회의 부식으로 양적인 팽창을 통한 교회 영역의 확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업은 점령군의 역할로 간주되기도 하고, 선교사는 종교 제국주의적 식민정치의 협조자라고 토착민들에게 인식되고, 근대 식민시대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앞잡이로 간주되었다. 이는 유럽 중심적 사고방식과 문화적 우월의식, 그리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선교’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유산으로 물려 받았다. 그리하여 어떤 현대인들에게 ‘선교’라는 말은 지적인 혼동과 감정적인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다툼을 연상하는 불확실한 개념이 되었고 부정적인 의미의 선전(Propaganda)으로 이해되며 심한 적대감을 보이기도 했다.”(같은 책 28-29면) 이러한 한정적이며 배타적인 의미의 ‘선교’로 교세확장은 될 수 있어도 세상을 구원해야 할 구원의 성사(聖事)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의 의미를 더욱 확대하여 ‘복음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교회의 ‘자기 복음화’와 함께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복음화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고 구현하셨던 진리로서의 복음을 비신자들에게 선포하고 교리를 가르쳐 세례와 성사를 베푸는 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생활화하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회개와 쇄신을 통한 교회의 자기 복음화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교회를 통하여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으로 인간을 내적으로 쇄신시켜 ‘복음적 생활’로 인도하는 활동이며, 이 ‘복음적 생활’을 통해서 이룩되는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인류의 쇄신’이다.”(같은 책 35면) 이 복음화의 의미를 살펴보면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즉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만일 교회가 ‘세상을 위한 교회’임을 알지 못하면 교회의 복음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복음화는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왜 교회가 ‘친교의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게 된다. 한마디로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명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부정하려고까지 한다.


가톨릭신문은 “공의회가 폐막한 지도 40년이 지났지만 ‘세상을 향한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의 모습은 여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2013.3.31)고 보도했다. 신정훈 신부도 말하였다. “교회는 결코 자족할 수 없으며 교회 밖의 일에 대하여 배타적일 수 없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갈라진 형제들, 타종교인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 또한 교회의 시야에 포함되는 것이다. ‘하느님 백성’이라는 교회의 자기 이해는 ‘남과 상관없이 나만 잘 믿으면 된다.’는 편협한 개인주의적인 구원 이해를 뛰어넘는 공동체적 구원관을 제시한다.”(가톨릭 신문. 2012.2.12)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특히 성직자들이 ‘세상을 위한 교회’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소공동체의 필요성과 가치를 몰라 소공동체가 잘 안 되고 있다.


[월간빛, 2014년 5월호, 박성대 요한 신부(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1)


Ⅳ 친교의 교회


5. 세상과의 친교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2) 변화와 개혁 때문에 길을 잃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교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시면서 가르쳐주신 신비가 바로 ‘육화(肉化)의 신비’이다. 우리가 이 ‘육화의 신비’를 모르면 예수님을 알 수가 없다. 예수님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과 사랑의 신비도 알 수 없다. 이 신비는 우리 신앙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신비이다. 이 육화의 신비를 담고 있는 말씀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이다. 이 말씀 속에 육화의 신비가 담겨져 있고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있다.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방식이 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다. 그런데 이 육화의 신비가 바로 다름 아닌 ‘변화’를 말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변화는 엄청난 변화이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는 변화이며 하늘이 땅으로 변하는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이다. 그래서 새 하늘, 새 땅이 되는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육화의 신비, 즉 변화의 신비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이 육화의 신비를 살아 이 세상에 그 육화의 신비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실천해야 할 막중한 사명, 곧 이 세상을 바꾸는 사명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적 요청이며 시대적 요청이다. 이러한 막중한 사명을 교회가 잊으면 절대로 안 된다. 이 사명을 잊지 않기 위하여 실현시켜야 할, 절대로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과제가 바로 육화를 사는 일이며 그것은 바로 변화를 사는 일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가장 중요한 주제는‘Aggiornamento(현대 세계에로의 적응)’이다. 이 주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자기 복음화’라는 기막힌 말을 내놓았다. 성령의 위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열렸던 20번의 공의회는 언제나 예외 없이 이단에 대한 단죄와 파문으로 일관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만은 일체의 단죄와 파문을 하지 않고 ‘자기 복음화’라는 기막힌 선물을 내놓았다. 놀라운 교회의 새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 ‘자기 복음화’는 바로 교회의 쇄신을 말하는 것이고 교회의 자기 반성과 회개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바로 ‘육화의 신비’에서 비롯된 것이고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 복음화’는 ‘자기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코닥의 관료주의에서 벗어나라.”이 말은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한 말이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만든 131년 역사의 코닥은 필름 카메라 시장에 안주한 탓에 결국 회사가 파산했다.”고 말했다.(2014.1.8. 동아) “개혁·개방 하지 않으면 중국 앞에는 오직 죽은 길밖에 없다.”(2013.11.18. 조선) 이 말은 중국 국가 주석인 시진핑이 한 말이다. 현대의 시대적 특징은 변화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망하거나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말이다. 교회도 예외일 수는 절대로 없다. 교회도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거나 망하거나 죽는 길밖에 없다. 교회도 세상 속의 교회일 뿐 세상을 떠난, 세상 위에 군림하는 별개의 세계에 사는 예외적인 존재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교회도 이 시대적인 특징인 변화를 외면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만일 교회가 이 변화를 외면하거나 게을리 하면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복음적 요구나 시대적인 요청을 거절하는 것과 같으며 설자리를 잃어 버리게 될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처음으로 일으키신 기적이 카나의 혼인잔치(요한 2,1-12)이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기적을 일으키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기적을 통하여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주셨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바꾸러 왔다.”는 메시지이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 사명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부르짖는 복음화는 다름 아닌 세상을 바꾸는 작업이다. “교회로서는 복음화의 기쁜 소식을 인류의 모든 계층에까지 전해주어,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라고 한 것과 같이 그 힘으로 인류를 내부로부터 변혁시켜 새롭게 하는 것이다. 교회로서 복음화 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다 넓은 지역에서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방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것이다.”(‘새로운 복음화’ 개념 연구 및 사목적 모색, 서울대교구 사목국, 21면) 한마디로 교회가 해야 할 복음화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복음화 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을 모두 천주교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세상 복음화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며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 살고 싶은 세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2009년도 사목지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로 정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신앙인들은 각자 생활의 증거와 말씀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며, 그리고 교회는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와 쇄신의 길을 걸어갈 것을 촉구하였다.(2009.12.6. 평화신문 참조)


다행히 새로 선출되신 교황께서 이 교회의 자기 복음화 내지 자기 변화를 강력히 촉구하셨다. 특히 최근에 발표하신 「복음의 기쁨」에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가톨릭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시면서 교회의 자기 회개와 쇄신을 강조하셨다. “저는 선택적, 즉 교회의 관습, 관행, 시간과 계획, 언어와 구조 등 모든 것을 교회의 자기 보존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복음화에 적절하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 선교적 열정을 꿈꿉니다.”(2013.12.8. 가톨릭신문)라고 말씀하셨고, 또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 쓰느라 폐쇄적인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더 좋아한다. 교회는 쇄신과 변화 때문에 ‘길을 잃을까봐’ 걱정하지 말고, ‘잘못된 안도감을 주는 구조 안에, 가혹하게 남을 판단하게 만드는 규율들 안에, 그리고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습관들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같은 신문)고 말씀하셨다. 또한 교황께서는 “복음 본연의 참신함을 되찾자고 초대하시며 ‘새로운 길’과 ‘창조적인 방법’을 모색하여 예수님을 우리의 ‘진부한 도식’ 안에 가두지 말자고 하셨다.”(같은 신문) 그러시면서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같은 신문)고 하시면서 변화의 절박함과 시급성을 말씀하셨다.


특별히 이 변화를 위한 요한복음사가의 편집 의도는 각별하게 보인다. 시간적으로 맞지 않지만 성전 정화 사건(요한 2,13-22)을 카나의 혼인 잔치 바로 다음에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른 공관복음에서 볼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이 말씀은 교회의 자기 변화, 즉 자기 복음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도 리모델링 정도가 아니라 그 범위를 훨씬 벗어나는 엄청난 변화, 즉 새로운 창조, 새로운 개혁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창조와 개혁도 다른 방식이 아니라 복음적인 방법, 예수님 식의 변화와 쇄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사제들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사제들의 생각이 도무지 바뀔 것 같지가 않다. 사제들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소공동체가 어렵다. 사제들의 변화 없이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심각한 교회의 위기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월간빛, 2014년 6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2)


Ⅳ 친교의 교회


5. 세상과의 친교


3) 교회의 ‘자기 복음화(自己 福音化)’


세상의 변화를 말하는 교회를 보고 세상이 뭐라고 할까? “자기들은 바뀌지 않으면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가장 필수적이며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바로 교회의 ‘자기 복음화’이다. 이 말은 교회의 자기 변화이다. 필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위대함을 교회의 ‘자기 복음화’에서 보았고 또 감동하였다. 교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복음화’의 차원에서 과거의 교회의 죄와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한 적이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를 향해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죄를 참회하고 용서를 청했다. 십자가를 끌어안고 ‘죄의 고백과 용서의 청원’이라는 특별예식을 거행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수없이 학살하면서도 ‘선교’를 빌미로 묵인됐던 그리스도인들의 엄청난 죄악들, 그 이전에 저지른 십자군전쟁과 종교전쟁, 이단재판과 마녀 사냥, 갈릴레오 사건과 금서목록 같은 수치스러운 죄과들을 고백하고 겸허하게 고개를 숙인 자리였다.”(가톨릭신문, 2014.4.27)하였다. 역사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복음화’이다. 뜬금없이 생긴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의 복음 선교>를 통하여 “복음화는 참으로 교회의 고유한 은총이고 사명이며, 교회의 가장 깊은 본성입니다. 교회는 복음화를 위해서 존재합니다.”(14항)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교회는 복음 선포자이지만 먼저 교회 자신을 복음화하여야 합니다. … 교회가 복음 선포를 위한 새로움과 활력과 힘을 지니려면 언제나 교회가 먼저 복음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상기시켜 주었고, 1974년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재확인하였듯이, 교회가 믿음을 주며 세상을 복음화하려면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으로 자신을 복음화하여야 합니다.”(15항) 한마디로 교회의 ‘자기 복음화’를 말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2의 성령강림이라고 말할 만큼 위대한 성령의 역사임을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열린 20차례에 걸친 공의회는 언제나 이단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단죄나 파문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어떤 것에 대하여도 단죄나 파문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단죄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쇄신되고 회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 얼마나 기막힌 성령의 역사하심인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고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자기 복음화’는 교회의 회개와 쇄신을 말한다. 회개와 쇄신을 위해서는 교회가 바뀌어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의 복음화이고 세상의 복음화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과연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 소공동체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소공동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교회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변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말로는 바뀌어야 한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가 너에 대한 정의의 심판보다, 나에 대한 자성과 심판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 서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개혁할 것이 없는지 깊이 생각하고 생활을 바꿔 나가야 할 때라는 것이다. 즉 각자가 자기반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기 삶을 반성하고 뉘우치고 고쳐 나가기보다 타인을 비판하고 비난하는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김 추기경은 일찍이 각자의 각성 없이는 한국 천주교회와 한국 사회는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타인에게 반성을 요구하기는 쉽지만, 스스로 반성하기는 어렵다.”(매일신문, 2014.5.26)


최근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건이후 매스컴 여기저기에서 나온 새로운 용어가 하나 있다. ‘관피아(官+마피아)’이다. 필자는 이 말을 보면서 우리 교회가 생각났다. 혹시 우리 교회에도 ‘관피아’같은 ‘교피아(교회+마피아)’와 같은 것은 없는지? 조폭과 신부들과 닮은 점이 있다는 농담이 있다. 아직도 우리 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 권위주의식 교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직자가 교회의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그런 나머지 사제들의 독선과 오만에 의하여 본당이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 신자들의 무조건적인 순명과 복종만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나머지 생각 있는 많은 신자들은 ‘교피아’에 물들어 있는 교회를 더 이상 봐줄 수 없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리고 남아있는 신자들은 노인들이 대부분이거나 피동적이며 소극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열정과 역동성과 창조성과 자발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다른 말로 교회의 미래가 어둡다는 말이다. 만일의 경우에 우리 교회 안에 이런 ‘관피아’와 ‘교피아’같은 것들이 남아있다면 하루 빨리 일소하고 척결해야 할 것이다.


현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과거의 특정한 가톨릭 양식에 완고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복음화하는 대신에 남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며 사람들의 요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이는 선으로 포장된 끔찍한 타락이다. 하느님, 껍데기뿐인 영성이나 사목으로 치장한 세속적인 교회이다.”(평화신문, 2014.12.8) “출세주의와 교회 내에서의 권력 추구욕은 교회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죄악이다.”(가톨릭신문, 2013.6.2)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사제나 수도자, 주교, 추기경, 교황이라 하더라도 이 세속성의 길을 걷기 원한다면 살인자의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물질 중심의 세속성은 영혼도, 사람도, 교회도 죽일 것입니다.”도 말씀하셨고 또 사제는 양 냄새나는 목자가 되어야 할 것을 주문하시면서 “사제들이 부를 쫓거나 헛된 것을 찾으면 목자가 아니라 늑대가 된다.”(평화신문, 2014.5.11)고 경고하셨다.


지금 우리 교회의 자기 복음화를 위해서는 리모델링이나 내부수리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우리나라는 지금 국가 개혁이 아니라 국가 개조를 말하고 있다. 우리도 개혁이 아니라 개조의 차원에서 교회를 바꿔야 된다고 생각한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개혁(改革)은 ‘뜯어서 고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개조(改造)는 ‘고치어 새로 만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개혁보다 개조가 훨씬 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개혁보다 개조가 더 어렵다. 우리 교회도 개혁보다는 개조차원에서 ‘자기 복음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소공동체는 지금까지 하던 신심행위나 기도형태를 하나 더 만든 신개발품이 절대로 아니다. 소공동체는 신앙생활의 패러다임(Paradigm)을 바꾸자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월간빛, 2014년 7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3)


Ⅳ 친교의 교회


5. 세상과의 친교


4) 세상을 섬기는 교회 - “최고의 서비스로 잘 섬기겠습니다!”


필자가 군종신부로 있을 때 일이다. 매일 가는 대중목욕탕에서 한 미국인을 만났다. 그의 부인이 한국 여성이라 그런지 그는 한국어에도 능통했다. 그리고 한국의 대중탕을 매일 즐길 정도로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한국 문화에 적응이 잘 된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한국에서 죽을 때까지 살 작정이냐?”, 그러자 그는 “지금은 직업상 살고 있지만 한국에서 오래 살 생각은 없다.”고 대답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대단히 분명하고 간단했다. “한국에는 Goverment Service가 없다.” 맞는 말이다. 정부와 공무원의 서비스가 없는 나라이다. Goverment Service만 없을까? 일반 상점에도 가보면 정말 서비스가 없고 불친절하다. 이와 같이 우리 가톨릭교회에도 서비스가 없다. 신자들은 소중한 고객이다. 아니 고객 그 이상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서비스로 잘 섬겨야 한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든지 말든지 식이다. 이런 불친절과 이런 무례가 또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필자가 본당에서 사목할 때 본당가족들(보좌신부, 수녀님들, 회장단, 사무실 직원)과 사진을 찍어서 본당의 모든 신자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크게 걸어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이렇게 썼다. “최고의 서비스로 잘 섬기겠습니다.” 본당 신자들은 물론이고 그 사진을 보는 사람마다 기뻐하였다. 본당 사목자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닮은 섬기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28)


침체와 감소의 길을 걷고 있는 개신교에서 ‘개신교의 나아갈 길’이라는 주제로 열린 대담에서 “‘개신교회 전체가 더욱 낮은 자세로 세상을 섬겨야 한다.’, ‘성경은 목회자를 군림하는 자로 정의하지 않는다. 목회도 ‘말씀’을 갖고 교인들을 섬기는 것이다. 모든 문제가 거기서 시작된다. 목사는 성도들을 섬기고, 교회는 이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라는 성경 원리를 되새겨야 한다.’, ‘이웃에게 다 퍼줘 교회 곳간이 텅 빈다는 소리가 더 많이 들려야 한다.’, ‘이제 교회가 사회를 섬겨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사회를 섬기는 길 외에는 살 길이 없다.’”는 대담회의 결론을 보도하였다.(동아일보, 2012. 2. 24)


평화신문에 서울대교구의 모 본당 ○신부의 얘기가 보도된 적이 있다. 〈…그는 반미사를 봉헌할 때면 강론을 짧게 하고, 신자 한 명 한 명의 발을 닦아준다. 그는 “눈물, 콧물 정신없이 쏟는 신자들 얼굴을 그냥 바라볼 수 없어서 가난에 병든 발만 바라보며 정성껏 닦아 드린다.”고 말했다. 또 “얼마나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신자들 발 모양은 상상을 초월한다.”며 “그들의 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따뜻한 사랑에 얼마나 목말라하고 있는지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영명축일 축하행사도 하지 않는다. 영적, 물적 예물도 받지 않는다. 대신 영명축일이면 하루 종일 고해소에 들어가 냉담을 풀고 돌아온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평소 신자들에게 “그토록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데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정 선물을 하고 싶으시면 냉담 교우를 데려와 주세요.”라고 말했다.〉(평화신문, 2012.11.25)


위의 기사가 보도된 후 전국에서 그 ○신부님이 어느 본당의 누구냐는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그리고 부산에 계시는 한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늙은이 부탁인데 제발 한 번 들어달라. 신부님을 뵈어도 아는 체 하지 않고 미사만 참례하겠다.”고 약속하는 할머니의 간곡한 청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미사참례를 위해 부산에서 반나절 넘게 걸리는 ○○성당까지 올라오겠다고 했다. 며칠 동안 ○신부에 대해 묻는 전화를 받으면서 ‘신자들이 사제의 사랑에 목말라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 사제와 상담을 하고 싶어도 약속조차 잡기 힘들고 전화 통화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사무실에 전화해 신부님을 찾으면 열에 아홉은 “신부님이 바쁘시다. 자리에 안 계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1년 내내 본당 신부와 말 한 마디 나눠보지 못하는 신자도 적지 않다.〉(평화신문, 2012.11.25)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금년도 성유축성미사에서 전 세계 사제들에게 “그저 울타리 안의 양에 만족하고 그 털이나 매만지는 미용사가 아니라 양 냄새 나는 목자”가 될 것을 당부하셨다.(평화신문, 2014.5.11)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자기복음화’, 교회의 쇄신과 회개, 교회의 자기 변화가 전제되지만 그것은 교회가 세상과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이 세상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공동체 모임의 복음 나누기 7단계 중 5단계에서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묻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같은 질문을 하였다. “교회가 현대 세계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은 교회의 사명을 묻는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 29-37)에서 제시하신 질문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 29) 우리는 찾아야 한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 36)


신앙인의 삶 가운데 ‘이웃이 되어주는 삶’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이웃’ 중에 가장 중요한 ‘이웃’이 바로 ‘세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이 바로 우리 교회가 섬겨야 할 나의 가장 소중하고도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세상과 이웃이 되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친교의 교회’이며 그 정체성을 세상과의 친교 속에서 드러내야 한다. “소공동체는 주님과 소공동체원들과 세상과의 친교 속에 놓여 있다. 소공동체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소공동체는 소공동체원들이 세상 한가운데서 겪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를 간직하고 있다.”(공동체들의 친교, 심흥보, 성바오로, 56면)


고(故)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 톤즈에서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세웠다. 혹자는 이러한 이태석 신부님의 행위에 이해를 못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복음화의 모습이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이지 결코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월간빛, 2014년 8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4)


Ⅳ 친교의 교회


5. 세상과의 친교


5) ‘지역 사랑방’이 되어야 한다.


2005년 통계청에서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천주교는 10년 동안(1985년~1995년까지) 228만 명이 증가한 반면 개신교는 14만 4천 명이 감소하였다. 개신교는 원인 분석과 함께 대책마련에 들어갔다. 가장 큰 원인으로 “개신교는 지역 교회가 되지 않고 있다. 지역과 관계없이 교인들이 모이니 대형 버스가 신자들을 실어 나른다. 앞으로는 교회가 지역 사랑방이 되어 탄탄하게 뿌리를 박는 쪽으로 변해야 한다.”(시사저널 2006.10.19)고 진단하였다.


교회는 성사(聖事)이다. 성사는 목적이 아니고 도구이다. 교회가 교회를 위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성사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개신교의 잘못이 여기에 있었다. 아직도 개신교는 교세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것은 복음화에 역행하는 행위이다. 복음화에 역행하면 복음과 멀어지게 되고 그 정체성도 상실하게 되면서 교회의 기능과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교회를 지탄하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


불교에서 하는 참으로 의미있는 말이다. 예수님 육화의 신비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인간과 똑같은 사람이 되셨고 뿐만 아니라 인간이 겪는 고통을 똑같이 겪으셨다. 정호승 시인이 지은 좋은 시가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이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 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 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밤에 몰래 바티칸을 빠져나가 노숙자들을 만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교황께서 그들을 천주교 신자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교회를 복음화하고 그들 또한 복음화시키기 위함이다. 앞에 소개한 시의 그 어느 구절에서도 특정 종교의 교세확장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복음화이다. ‘복음화’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며,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내적 삶의 변화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더욱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 또한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반대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 사상, 생활방식 등을 복음의 힘으로 바로 잡는 것” 이다. 또한 ‘새로운 복음화’는 “복음을 일방적으로 전하기보다는 다른 종교나 문화와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 진리를 찾아내고 구원을 위한 인류의 공동선을 증진하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나아가 세상과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평화 연대, 정의와 자유와 같은 보편적 가치들에 기초하는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창출함으로써 인간생활 전반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다.”(평화신문 2014.7.27) 교회는 이 ‘복음화’, 혹은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서 존재한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에서 성당을 짓기보다 학교를 먼저 세웠다. 교회가 ‘지역 사랑방’이 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3) 바오로 사도도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1코린 1,17)


소공동체가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선교’ 개념에 붙들려 있거나 갇혀있다. 과거의 ‘선교’의 정의는 “교회로부터 파견된 선교사들이, 아직 복음을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민족이나 지역에 복음을 가르치고 그들을 개종시켜 교회를 부식(扶植)하는 활동”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성사성, 즉 ‘위함’의 의미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소공동체 사목을 통하여 우리 교회의 미래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종교를 위한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를 위한 교회의 우물 안의 개구리식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소공동체 본당은 성당 주차장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주차 편의를 제공하고 또 어떤 본당은 공부방을 만들어 지역의 학생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또 어떤 본당은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거나 봉사하기도 한다. 이 모두가 교회가 ‘지역 사랑방’이 되기 위함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소집되면서 “교회가 현대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었다. ‘복음나누기 7단계’의 여섯 번째 단계인 활동 단계에서도 이것을 묻고 있다. “우리가 지역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바라고 있는가?”를 묻고 토의하면서 구체적인 활동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안 되면 레지오마리애 활동 보고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소공동체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아직도 의식 개혁이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자된 소명, 교회의 소명, 소공동체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실천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소홀히 되면 소공동체는 힘을 잃게 되고 소공동체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소공동체에서 본당의 일에 대해서는 활발하게 토의하면서 관심을 갖지만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들만의 잔치에 빠져있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하루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획기적인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친교의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월간빛, 2014년 9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5)


소공동체를 활성화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소공동체 사목을 하는 사제나 소공동체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우리만 소공동체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회의와 갈등과 소외감을 가지게 되면서 주저함과 망설임이 생긴다. 물론 아직도 대부분의 많은 본당이 레지오 마리애 중심으로 본당이 운영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이런 갈등과 회의를 가지면서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갈등과 고독감 때문에 고민하는 사제들이나 신자들을 위하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소공동체 소위원회 총무 노주현 비비안나 님이 제공한 『독일 가톨릭 교회와 소공동체』를 소개하고자 한다.


천년의 세월 ‘고도로 조직화된’ 독일 가톨릭 교회의 위기


독일에서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독일 사회, 정치, 문화, 경제, 교육의 토대가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독일 ‘교회’는 세계 교회 전통과 신학을 선도하면서 세상 속에서 부와 권력, 명성을 누려왔다. 그런데 2011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고향인 독일을 방문했을 때 “고도로 조직화된” 이 교회 구조 뒤에 과연 “그에 부합하는 영적 힘,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힘”이 있는지 물으면서 지나친 부와 권력으로부터 정화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소공동체가 사회 안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새롭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이 글에서는 오늘날 독일 교회가 직면한 위기와 도전은 무엇이고 독일 교회는 이 ‘시대의 징표’를 분별하며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어떤 변화와 쇄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독일 교회가 겪고 있는 광야의 이 순례 여정은 한국 교회를 비롯해 많은 지역 교회가 이미 걷고 있거나 앞으로 맞부딪칠 길이기에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2011년 9월에 발행된 독일 교회 통계에 따르면 전체 독일 인구 8,174만 명 중 약 62%가 그리스도인이고 가톨릭 인구는 30.2%에 달하는 2,400만 명으로 27개 교구에 11,524개 본당이 있다. 다른 유럽 교회와 마찬가지로 독일 교회도 성소자와 사제 수의 감소와 부족, 신자 수의 급격한 감소와 고령화 현상을 심각하게 겪고 있다. 이에 많은 교구에서 이미 여러 본당이 문을 닫고 4-8개 본당을 한 본당으로 통합하여 운영하고 있어 향후 2-5년 안에 현재 400개 본당이 있는 경우 50여 개 본당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한다. 본당 활동에 참여하는 신자 대부분도 60대 이상이며 젊은이들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또한 ‘성당에 나오고 있는’ 독일 교회 신자들의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알아본 한 조사 결과는, 독일 교회가 처한 위기의 실상을 보여준다. 이 조사에 따르면 ‘교회로부터 멀어져 있고 교회에 대해 불확실하거나 믿음이 깊지 않다’는 응답이 50%를 차지했고 ‘교회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에 비판적이다’라는 응답이 37%, ‘교회를 믿고 교회에 헌신적이다’라는 응답은 17%에 불과했다.


천년의 세월, 신앙의 유산을 계승하고 전파해온 독일 교회의 이 슬픈 그림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신앙의 뿌리를 뒤흔들며 하느님이 계시던 자리를 휩쓸어 가는 듯한 거센 폭풍의 실체를 현대 서구 사회를 지배하는 세속주의, 물신주의, 상대주의와 개인주의라고 규정하며 외부의 영향, ‘세상 탓, 남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지난 3월 전 세계 언론이 앞 다투어 보도한 독일 교회의 한 사건은 교회가 과연 세속화된 세상을 아름답게 채울 수 있는 ‘복음의 향기’를 지니고 있는지 묻게 한다. 작년 10월부터 수백억 원 대의 호화로운 주교관 신축과 사치스러운 생활, 진실 은폐를 위한 거짓 증언, 중세시대 영주처럼 군림하며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으로 비판을 받아온 독일 림부르크 교구장 프란츠-피터 테바르츠-판 엘스트(Franz-Peter Tebartz-van Elst) 주교가 교종 프란치스코가 그의 사임을 수락하는 형태를 띠었지만 결국 주교직에서 파면된 것이다. 이 사건은 몇 해 전부터 독일에서도 공개적으로 문제가 되어온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문제와 이에 대한 독일 교회의 참회와 사죄가 결여된 미온적 대응에 이어 독일 신자들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큰 충격과 실망, 냉소와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제도’ 교회에 대한 불신과 신앙의 상실을 가속화시켰다.


이 사건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이나 인간적인 영예를 얻으려는 생활 방식에 빠진”(「복음의 기쁨」, 80항), “자기 안위만을 신경쓰며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49항)의 모습을 드러내는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교회는, 교종 프란치스코가 “신앙심의 외양 뒤에, 심지어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영적인 세속성이 교회 안에 스며들면 단순히 도덕적인 다른 세속성보다 더 엄청난 재앙이 될 것”(93항)이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기면서 “용기를 갖고 복음의 빛이 필요한 모든 ‘변방’으로 가라는 부르심”(20항)에 따라 교회 쇄신의 여정을 떠나야 할 때를 맞고 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 독일 교회의 새로운 출발과 풀뿌리공동체를 향한 길


독일 교회는 국제 전교기구 미시오(Missio-Aachen과 Missio-Munich)를 비롯해 해외 원조기관인 미제레오르(Misereor), 아르베니아트(Arveniat), 카리타스(Caritas) 등을 통해 제3세계 국가와 지역 교회에 대한 구호 활동과 개발 사업, 정의, 평화, 생명 활동, 교육과 사목 프로젝트 지원 등 다양한 영역에서 막대한 재정적 후원을 오랫동안 전개해왔다. 이러한 지속적인 후원 활동은 독일 교회가 오늘날 제3세계 지역 교회들과 긴밀한 연대와 협력을 이루고 세계 교회 차원의 사목적 교류를 선도할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독일 미시오 교육 ·양성부서의 책임자 시몬느 라펠 박사는 독일 교회가 이러한 상호 교류를 통해 더 이상 ‘전해주고 가르치는 교회’가 아니라 ‘받아들이고 배우는 교회’로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지역 교회들과 긴밀한 연대와 협력을 이루고 세계 교회 차원의 사목적 교류를 선도할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작년에 독일 미시오는 아르베니아트, 튀빙겐 대학 신학부와 공동 주최로 지난 50년 동안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과 가르침을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세계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2013년 1월 17일-20일, 독일 튀빙겐) 그들이 선택한 주제는 “오늘날 세상은? 소공동체(기초그리스도인공동체) 안에서 교회의 여정”이었다. 독일 교회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소공동체 책임자들을 한 자리에 초대하여 소공동체에 대한 각 대륙과 지역 교회의 경험과 성찰을 나누는 장을 마련하고 그들이 2000년부터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해온 소공동체 활성화 과정을 되돌아보며 ‘교회가 되는 새로운 길(a new way of being Church)’을 모색해보고자 하였다.


독일 교회는 왜, 어떻게 풀뿌리공동체인 소공동체를 시작하고 추진하게 되었을까? 독일 교회가 처한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교회 당국자들은 본당 통폐합과 같은 교회 구조 개편을 시도했지만 사목적 책임과 영성적 쇄신이 수반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독일 교회는 여전히 중앙집권적, 성직자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다. 이러한 형식적이고 단편적인 접근 방식으로는 독일 교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자각과 우려가 커져갔다. 이런 와중에 독일 미시오는 여러 해 동안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온 아시아 교회의 ‘교회가 되는 새로운 길’, 소공동체를 통한 친교 공동체의 비전과 방법을 2000년부터 독일 교회에 소개하고 많은 교구의 소공동체 활성화 노력을 지원해왔다.


독일 교회 소공동체 전국팀의 책임자인 디에터 트웨스(Dieter Tewes) 박사는 지금까지 지난 15년 동안 여러 교구에서 “아시아 지역 교회의 소공동체에 대한 사목 비전과 경험을 배우면서 소공동체를 더욱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독일의 현실에 적합한 모델과 방법을 찾기 위해 애써왔다.”고 평가했다. 독일 미시오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소공동체 전문가들을 독일에 초대하여 소공동체와 복음 나누기, 비지배적인 지도력 등에 대한 다양한 워크숍과 강연회,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개최해왔다. 또한 독일 교구의 소공동체 책임자들이 인도, 필리핀, 스리랑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한국 등의 나라를 방문하여 소공동체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아직까지, 독일 주교단이 해외 소공동체 탐방을 한 것은 2009년 한국 방문이 유일하다. 그 당시 독일 주교들은 제주교구 소공동체 등을 방문하고 신자들을 만나면서 깊은 감동과 영감을 받았다. 독일 주교단 대표 밤베르크 대교구장 르드빅 쉬크 대주교는 “개인적 신앙과 사회적 실천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소공동체는 위기의 독일 교회를 소생시키는 씨앗이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고 귀국하여 독일 전체 주교들과 그들이 체험하고 발견한 내용을 나누는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독일 미시오가 주축이 되어 독일 교회 소공동체 전국팀과 지역팀을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룸꼬 연구소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독일어로 번역하거나 개정하여 사용하고 있고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소공동체 프로그램과 자료, 정보의 공유 등을 촉진하고 있다.


현재 독일 교회 전체 27개 교구 중에서 함부르크, 힐데샤임, 오스나브뤼크 등 14개 교구에서 소공동체를 통합사목의 방법으로 본당에서 실현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노력해왔고, 최근에 프라이부르크, 뮌스터, 림부르크 교구에서도 복음나누기를 시작하면서 소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에 동참하고 있다. 독일 북부지역 교구들이 남부지역 교구들보다 먼저 소공동체를 도입하고 발전시켜왔는데 북부가 남부에 비해 가톨릭 신자 수가 훨씬 적고 세속화 경향이 더 강한 현실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독일 교회 소공동체 전국팀 관계자들은 독일 교회 소공동체가 적지 않은 결실도 맺었지만 아직도 많은 어려움과 도전이 있기에 여전히 출발 단계에 있다고 평가한다. 독일 미시오의 시몬드 라펠 박사는 “기본적으로 독일의 문화와 사고 체계가 연구와 검증을 통해 획득한 확실한 이론과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시행해가는 데 상대적으로 오랜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소공동체의 구현도 독일에서의 구체적인 성공 사례를 만들어 가면서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독일 교회에서 소공동체를 시작하면서 복음나누기 7단계가 많이 강조되었지만 6단계의 ‘실천 활동’이 결여된 점, ‘소공동체’의 통합적 사목 비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소공동체를 마치 또 하나의 성경공부 그룹처럼 여기는 태도, 가정에서 복음나누기 7단계를 기초로 모임을 하면서 성경에 대한 ‘공부나 연구’가 아닌 ‘자신의 삶과 신앙을 나누는 것’에 익숙하지 않거나 주저하고 꺼리는 성향, 소공동체가 아시아나 아프리카와 같이 개발이 덜 된 나라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닌가라는 일종의 오만과 무지, 편견 등을 독일 교회에서 소공동체 활성화를 가로막는 장애와 도전으로 꼽았다.


동아프리카 국가들에서 25년 동안 선교사로 일하면서 소공동체를 체험하고 독일 아우구스부르크 교구로 돌아와 교구와 본당 차원에서 소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애써 온 맥스 스테터 신부는 “독일 주교들과 유럽 주교들이 아시아주교회의(FABC), 동아프리카주교회의(AMECEA) 주교들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 백성의 친교 공동체, 참여하는 교회의 비전을 가지고 소공동체(기초교회공동체)에 대한 공동의 사목비전과 지지를 밝히는 것이 독일 교회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또한 스테터 신부는 자신의 본당 경험을 토대로 “소공동체는 소위 본당의 핵심 멤버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일 미사에만 왔다 갔다 하는 신앙생활에서 회의를 느끼며 어떤 영적인 갈망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로부터 이루어져 왔다.”고 말하면서 소공동체에 대한 열정과 희망을 표명했다.


독일 교회에서 싹트기 시작한 소공동체가 오늘날 독일 교회가 걷고 있는 거친 광야의 순례 여정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을 자신의 삶으로 가리켜 주고 늘 깨어 있으면서 희망을 간직한 믿음의 사람들”(86항)이 되어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독일 교회뿐만 아니라 선교하는 제자 공동체인 우리 모두가 “새로운 생명과 진정한 복음 정신이 없다면, ‘교회 본연의 소명에 대한 충실성’이 없다면, 그 어떤 새로운 구조도 이내 쓸모없는 것”(26항)이 된다는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풀뿌리처럼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복음의 기쁨’을 되찾고 더욱 키워갈 수 있기를 성령께 간청한다.


[월간빛, 2014년 10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교구장 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6)


이번 달 “특별기고 - 왜 소공동체인가?”에서는 필자가 교구 내 어느 본당에서 실시하였던 소공동체 특강에 참여한 어느 신자분이 소공동체 특강을 듣고 보내온 편지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 사람의 이야기에 앞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아래의 글을 읽으며 각자의 신앙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찬미예수님! 신부님, 저는 신부님의 소공동체 특강을 들은 ○○성당 유○○입니다. 먼저 이 글을 통해 신부님을 저희 성당으로 불러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바쁜 시간 저희 성당을 찾아주셔서 뜨거운 강의를 해주신 신부님과 형제자매님들께도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에게는 이틀간의 강의가 축복이었습니다. 어쩌면 신부님께서는 그리도 저의 마음과 똑같으신 말씀을 하시던지 강의 내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게 하셨습니다. 또한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도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부님, 저는 나이가 46세입니다. 제 신앙고백을 하자면 저는 대학교 때 세례를 받고 견진성사까지 받았지만 올 가을까지 10여 년을 냉담자로 지내왔습니다. 불과 몇 달 전 직장에 교우가 있어서 덕분에 다시 성당을 찾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냉담을 한 이유는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대학시절에 세례를 받고 하느님에 대한 갈증과 열정으로 하느님을 알아 나가려고 혼자 여기저기 성경모임에도 나가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제가 다니는 성당에서는 그 당시에도 성경말씀보다는 레지오 모임이 더 활성화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세례 받고 얼마 되지 않았던 저에게는 성경말씀 속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제대로 알고 느끼기도 전에 반복적인 묵주기도를 하다 보니 그 기도가 제대로 된 기도가 될 수가 없고 입에서 그냥 맴돌고 머릿속에는 잡념이 떠오르는 그런 기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묵주기도가 마치 무슨 숙제를 해야 하는 부담 같은 것도 느끼게 되고 하니 과연 이러한 기도를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실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점점 신앙의 열정과 충만함이 사라지고 회의가 들면서 저 스스로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갓 첫발을 내딛는 신앙의 초보자에게 걸음마부터 가르치지 않고 뛰어 다니라고 하는 격인 것 같은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 묵주기도보다 성경말씀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신 신부님의 말씀에 저 또한 300%이상 동감합니다. 성경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은 신앙인은 곧 회의와 의심이 들게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교회에서 레지오 활동보다는 성경을 들고 다니며 성경말씀 안에서 하느님을 알고 그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모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아마도 그 당시의 제가 대학생인 데다 젊은이로서 성경말씀에 목말라하고 갈증을 느끼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 목마름을 교회에서 채워주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저의 갈망은 점점 더 강론 안에서도 부족함을 느끼게 했고 교우들과의 만남에서도 뭔가 공허하고 충족되지 않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가톨릭의 많은 청년들이 저와 똑같은 갈등을 겪거나 또한 그러한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아 냉담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성경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신자에게 어떻게 말씀을 묵상할 능력이 나오겠습니까? 제 주위에도 냉담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들이 “가톨릭교회에서는 성경말씀에 신자들이 흠뻑 젖을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개신교회로 가버리는 사람도 생겨나더라고요. 저희 친정어머니는 60세가 넘어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옆에서 보면 그야말로 기복신앙 그 자체이십니다. 성경은 잘 이해도 못하신 채 그저 묵주기도만 성당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십니다. 그야말로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보고 있으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성경을 가까이, 쉽게 이해시키고 강론 중에도 말씀에 대한 비중을 높여주는 게 신자들의 영적성장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라에서도 출산율이 낮으면 나라의 미래가 어둡다고 하여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출산 장려 운동을 펼치고 있듯이 젊은이는 나라의 미래요 희망이고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청소년이나 청년이 많은 교회가 미래가 있고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미사를 가 봐도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는 실정입니다. 제가 다니는 직장에서 보아도 개신교회의 젊은이들은 늘 모여 하느님 말씀을 나누고 친교를 하며 책상 어느 곳이라도 성경을 두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성경말씀을 읽곤 하는데 가톨릭 젊은이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잘 볼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성경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의 성경은 손때가 묻어 검은가 하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성경은 아마도 책상 안에서 먼지를 고스란히 먹으며 장식품으로 자리하고 있는 집이 꽤 많을 것입니다. 그러한 성경을 장식장에서 끄집어내는 작업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니 어떻게 신앙이 자라날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자유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지적에도 공감을 하게 됩니다. 우선 저 스스로도 그러하니까요. 저는 사실 획일화된 기도문이 나의 기도가 아닐 때가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 더 하고 싶은 얘기가 많고 더 드릴 이야기가 많을 때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기도문에 너무나 오래 길들여진 저희 신자들에게 자유기도가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게다가 성경말씀에도 무장되어 있지 않으니 어떻게 자유기도가 잘 되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누구의 책임이라 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세례를 받고 하느님 나라에 초대되었을 때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 싶은 마음과 열정이 얼마나 큰지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잘 알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왜 떠날까요? 저는 많은 요인들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그러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에 충실할 때만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하느님의 양들이 정말 하느님의 나라의 문을 두드리다가 잃어버린 양이 된 걸 우리 교회는 모두 심각하게 반성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쩌면 말씀 안에서 신앙을 굳건하게 세워주지 않아서 양들을 잃어버리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저 또한 십 수 년 길을 잃은 양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신부님들께서 신자들에게 성경을 들고 다니게 하고 성경말씀에 강론의 초점을 맞춰서 신자들에게 성경말씀과 소공동체에 관한 특강을 하고 교육을 시키고 소공동체 활동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신부님이야말로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 사목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부님, 이 소공동체 운동이 정착되어 저희 가톨릭 신앙인들이 제대로 된 신앙인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시고 뿌리를 잘 내리도록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당 안에서뿐만 아니라 필요한 곳 어디서라도 특강을 해 주시고 사랑을 나누어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오늘은 직장에 나와 성경을 펼치다보니 사도행전 2장 42절부터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 말씀이 와 닿으면서 새삼 소공동체 특강 때의 신부님 모습이 떠올라 이렇게 감사의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올 한 해 선물로 저에게는 신부님의 소공동체 강의가 가장 큰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저도 소공동체 모임 활동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소공동체 신앙이 전 교회에 뿌리 내릴 때까지 신부님께서도 은퇴하지 마시고 잘 이끌어 주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월간빛, 2014년 11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교구장 대리 신부)]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7)


“우리 성당, 좋은 성당”


소공동체 사목을 하는 이유는 결코 소공동체,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다. 본당 공동체를 복음화 하는 것이 소공동체의 목적이다. 본당 공동체를 복음화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함이다.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하여 교회를 먼저 복음화해야 하고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자기 복음화’이다. ‘자기 복음화’를 이루기 위하여 본당 공동체를 복음화해야 하는 것이 가장 필연적인 선결 과제이다. 본당 공동체를 복음화 하는 것을 필자는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란 어떤 성당인가? ‘좋은 성당 이란 ‘다니고 싶은 성당’이라고 필자는 지금까지 말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느 한 해는 소공동체 사목을 하면서 본당 사목 지침을 “우리 성당, 좋은 성당”이라고 정한 때가 있었다.


사제 생활 동안 필자를 가장 슬프게 만든 것은 “저는 신부님 때문에 이 성당을 떠납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필자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저는 신부님께서 저희 본당 주임사제라는 것이 참으로 행복합니다.”는 고백을 들을 때였다. 실제로 본당은 주임사제의 역할에 따라 주일미사 참례자 수나 주일헌금이 달라진다. 물론 주일미사 참례자 수나 주일헌금 정도가 그 본당을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성당이 복음화 되고 신자들이 열정과 생기를 느끼고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성당은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 되면서 주일미사 참례자 수와 주일헌금이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성당은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성당이 되어야 하는가? 소공동체를 하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본당을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으로 만들기 위해서 소공동체를 한다. 그 말을 어려운 말로 ‘복음화’ 내지 ‘새로운 복음화’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복음화 된 성당을 일컫는데, 복음화 된 성당이란 어떤 성당을 말하는가? 필자는 앞에서 오늘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어불성설(語不成說)의 교회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교회를 어불성설의 교회가 되게 했단 말인가? 복음화는 교회의 여러 가지 어불성설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어불성설의 첫 번째가 바로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으로’, 그리고 ‘복음보다 훨씬 덜 중요한 것을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사목하거나 가르치고 또한 신자들도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런 나머지 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다. 생각이 있고 의식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면서 심각한 사실이다. 그리고 냉담자가 교적상 신자들의 3분의 2 수준에 이르면서 교회는 자꾸만 고령화되어 가고 있다. 대구대교구 본당의 90% 가량이 고령화 본당이다. 이유는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혹은 말씀이 없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7-13)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교회는 끊임없이 식별하여, 일부 관습들이 복음의 핵심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관습은 비록 오랜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이제는 예전과 똑같이 이해되지 않으며, 그 메시지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습니다. 일부 관습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이러한 것들을 재고하여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43항)


어불성설의 둘째 이유는 아직도 우리 교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성직자들이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그래서 본당은 본당신부가 꽉 잡아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머물러 있는 사제들이 많아 보인다. 만일 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되지 않으면 본당은 엉망이 되거나 황폐된다고 걱정하고 있는 사제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 실시한 교황 방한 후속 심포지엄에서도 “사제가 중심이 되어 모든 일을 다 하는 구조로는 교황님의 권고를 이행할 수 없다. 신자들도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교회가 방향을 제시하고, 그 방향으로 갈 때 생기는 문제들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가톨릭신문, 2014.11.2)며 성직자 중심의 교회 체질을 개선하여 ‘평신도의 의사결정권 확대’가 필요함을 말했다. 하루 빨리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벗어나 평신도 중심의 교회가 됨으로써 평신도들로 하여금 주인의식을 갖고 자신들이 결코 주임신부의 심부름꾼이나 보조자로 소극적이며 피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미숙아 수준의 평신도가 아니라 사목의 동반자이며 복음화의 주역임을 깨닫고 평신도로서의 자발성을 찾아줘야 할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복음화의 가장 큰 숙제이다.


지금까지 연재해 오면서 소공동체가 안 되는 교회, 즉 어불성설의 교회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지적하면서 우리 교회가 소공동체를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심각한 병에 걸려있는 ‘위기의 교회’를 말하였다. 여전히 부족함과 아쉬움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열심히 읽어 주었고 많은 격려를 보내주었다. 그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외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지평을 찾는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다. 《새로운 지평을 찾는 교회》를 펴낸 배경민 신부는 저서에서 말했다. “시대적 요구 상황에 대처하도록 힘쓰면서, 교회는 지금까지의 선교관과 교회론을 보강하고, 성령의 참신하고 새로운 말씀과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고 따르며, 전통적으로 실행하여 오던 교회의 존재 역할의 지평을 새롭게 추구하고 확장시켜 가야 할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교회는 지금까지의 존재 범주를 훨씬 넘어, 시대의 표징을 간파하면서, 새로운 지평과 경계를 찾아 가야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움에의 도전 정신을 보다 심도 있게 체득해야 함을 당면 과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새로운 지평을 찾는 교회, 7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예수님의 첫 기적도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이었다. 이는 ‘내가 세상을 바꾸러 왔다.’는 예수님의 강력한 메시지이다. 그리고 성전으로 가셔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요한 2,19)고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셨다. 소공동체는 미래의 새로운 교회됨의 유일한 답이 틀림없다. 레지오 마리애도 좋지만 미래 교회의 답이 되기에는 부족함과 한계가 있음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미래 교회의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새 패러다임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장래성이 없는 상품을 고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소공동체로 교회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우리 성당을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으로 만들어야 한다!


* “특별기고 - 왜 소공동체인가?”는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연재해주신 제2대리구장 박성대 교구장대리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월간빛, 2014년 12월호, 박성대 요한(대구대교구 제2대리구장, 교구장대리 신부)]